기(記)
금내청사 중흥 기(禁內廳事重興記)
이곡(李穀)
국초(國初)에 관직을 설치할 때 6국(局)을 대궐에 두어 문한(文翰)을 맡게 하고, 한림(翰林)ㆍ사관(史館)ㆍ비서(秘書)ㆍ보문(寶文)ㆍ동문(同文)ㆍ유원(留院)이라 하였는데, 사관과 한림이 으뜸이 되었다. 서울이 옮겨감으로부터 왕궁(王宮)과 관청이 파괴되어 남은 것이 없어졌는데 경오년에 옛 서울로 돌아온 뒤에 경영하여 건축할 겨를이 없었다. 문한을 맡은 관원이 하루라도 그 처소가 없어서는 안된다 하여 마침내 예전 정사를 의논하던 당(堂)을 하사하였는데, 지은 지가 60년이 넘기 때문에 퇴락하고 무너지게 되었어도 수축하는 자가 없었다. 원통(元統) 계유년 6월 어느날 궁궐 안의 여러 사람들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술을 마실 때에 춘추관 수찬(修撰) 안원지(安員之)만이 술을 마시지 않다가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있은 지 이미 7년이다. 이제 떠날 것이지만 매해 여름에 비만 오면 물이 새서 앉거나 누울 곳이 없으니 위험하기가 무너져가는 담장 밑에 있는 것 같은데도 여러분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간혹 수축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비웃으며 말하기를, ‘서생은 술이나 마시고 시나 지을 줄 알 뿐이지 무엇 때문에 있을 곳을 마련한단 말인가.’ 하니, 아, 세상의 인사(人士)란 스스로 자기 몸 봉양하기를 죽은 뒤에라야 그만두거늘, 어찌 관청 보기를 사는 집처럼 여기지 않는가.” 하자. 여럿이 모두 말하기를, “그렇다. 수찬의 말을 따르리라.” 하고, 곧 공해전(公?錢) 얼마씩을 내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인가(人家)에서 차용하여 즉시 재목과 기와를 사고 인부를 관청에 청구하였고, 혹 얻지 못하면 사사로 장인들을 고용하고 집 하인들을 각각 부역시켜 각기 먹이고 각기 독려하여 8월 을축일에 시작하여 50일 만에 인부 5백 명을 들여서 청사 네 채를 지었다. 옛 규모보다 깊이와 넓이가 석 자나 더하였고 사고(史庫)와 남쪽 대문을 각각 두 채씩 지은 것이 모두 정도에 알맞아 전보다 화려했지만 사치하지는 않아서 뒤에도 계승할 수 있게 하였으니, 처음에 비웃던 자들이 마침내는 부끄러워서 엎드렸다. 공사가 끝난 뒤에 황제가 계신 서울로 편지를 보내며 나의 글로 그 일을 기술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기문이야 누군들 짓지 못하겠는가마는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그대에게 구하는 것은 그대는 사관에 있던 사람이고, 또 황조(皇朝)의 한원(翰苑)에 있으니, 거처도 옮겨지고 수양도 옮겨져서 반드시 보고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본관의 증축을 알리지 않을 수 없노라.” 하였으므로, 내가 편지를 받고 탄식하기를, “예전에는 백성을 부역시켜도 한 해에 3일에 불과하였다. 본국의 법에는 혹 3년을 지나면서도 왕궁과 관청이 파괴된 것도 수축하지 못하였으니, 백성들의 힘을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이곳은 국가의 역사를 맡는 곳이고, 문한이 있는 곳인데도 관청에서 수축하지 않아 변변치 못한 속관이 자기의 소유를 다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요직에 있는 관리는 능히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써서 보내려 하였으나 인편을 얻지 못하여 오래 되었다. 이제 다행히 조칙을 받들고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이 당(堂)에 오르는 기회를 얻으니 건물이 장대하고 화려하여 볼 만한지라 문장은 본래 재차 청하기를 기다릴 것이 없어 기쁜 마음으로 썼다. 대궐의 예전 6국을 무신년 관제(官制)에 한림원과 사관을 개정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 되었고, 비서는 전교시(典校寺)가 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원통(元統) 2년 9월 16일에 기문을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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