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書)
우본국재상 서(寓本國宰相書)
이곡(李穀)
곡은 돈수재배하고 여러 상공 합하에게 글을 부칩니다. 나는 병이 나서 좌우에 나아가 마음에 생각하는 일을 면전에서 진술할 수 없사오나, 만약 끝내 말하지 않으면 다만 나의 마음이 늘 만족하지 않아 불평스러울 뿐 아니라, 답답한 것을 다 말하지 않으면 또한 제공들이 반드시 나를 아는 게 없다 하여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겠기에,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고 한 마디의 말을 토설하는 것이니 오직 제공께서 듣기를 바랍니다. 우리 삼한국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도 또한 이미 오래입니다. 풍속은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형정(刑政)이 문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없는 것이 도탄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행히 지금의 국왕과 승상은 명을 받고 나라에 가니 백성이 바라는 것이 큰 가뭄에 단비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왕과 승상이 춘추가 많음으로 해서 겸손하고 조용하며 화합하여 일국의 정치를 제공에게 듣는다면, 그 사직의 안위와 인민의 이해(利害)와 사군자(士君子)의 진퇴가 모두 제공에게서 나올 것입니다. 대저 군자를 나오게 하면 사직이 편안하고 군자를 물러가게 하면 인민이 병폐를 받게 되는 것은 고금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쓰는 것이 또 정치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을 쓰기는 쉽고 사람을 알기는 어려운 것이니 그릇됨과 올바름을 묻지 않으며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오직 재물만 있으면 이를 대접하고 오직 세력만 있으면 이를 의지하며 나에게 붙는 자는 비록 간사하고 아첨해도 그를 나아가게 하고 자기와 다른 자는 비록 마음이 곧고 바르며 조심성이 많아도 그를 물러가게 한다면, 그 사람을 쓰는 것이 이미 쉽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쓰는 것이 쉬운 까닭에 정치가 날로 어지럽고 정치가 어지럽기 때문에 국가가 따라서 위태로워지고 망하는 이것은, 멀리 옛적에서 구함을 기다릴 것 없이 실로 목전에서 똑똑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은 그것이 그러함을 알아서 한 번 사람을 진퇴시킬 무렵에는, 반드시 그 소행과 지내온 내력을 살펴 오직 재물에 더럽히고 세력에 빼앗길까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선인과 악인이 서로 빼앗고 옥석이 서로 섞이니, 그 사람을 아는 것이 이미 어렵지 않겠습니까. 지금 본국의 풍속은 재물이 있으면 유능하다 하고, 세력이 있으면 슬기가 있다 하여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옷과 유자(儒者)의 관을 광대잡극의 놀이라 하고 곧은 말과 정당한 이론을 마을의 미치고 망녕된 말이라 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함이 마땅합니다. 곡이 친척을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 임금의 옆에 오래 머무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일 뿐이었습니다. 작금 들은 바에 의하면 제공이 정사를 도와 좋게 고치는 소이도 전일과 그리 서로 멀지 않다는데, 표면적인 구실로는 비록 노인을 숭상한다지만 젊은이가 실제로 그 자루를 주관하며 표면적인 구실로는 비록 청렴한 사람을 숭상한다지만, 탐내는 자가 실제로 그 권력을 잡으며 이미 악한 소인배를 물리쳤는데도 큰 사람이 그 잘못을 고치지 않으며 이미 옛 신하를 갈았는데도 새로운 자가 도리어 그 옛사람에 붙으니 사람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고 사람을 쓰는 것은 매우 쉽다면, 국왕과 승상이 위임한 뜻이 아닐 듯한데 조정이 그것을 듣는다면 불가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제공에게 글을 부쳐도 부질없이 그 노여움만 살 뿐 도움되는 바 없으니 필요 없다.”
하기에 곡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사직이 진실로 편안하고 인민에게 진실로 이롭다면 장차 본말을 갖추어 조정에 말하고 천자에게 진달하게 해야지, 어찌 제공이 노한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겠는가.”
했습니다. 이에 감히 미치광이의 말을 고하오니 바라건대 제공은 굽어살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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