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금강산 보현암 법회 기(金剛山普賢菴法會記)
지원(至元) 4년 무인년 가을 8월 초하루에, 한 사문(沙門 중)이 문앞에 와서 고하기를, “석씨로 보현암 주지인 지견(智堅)인데, 원나라 조정 규장공(奎章公)이 태정(泰定) 연간에 일이 있어서 왕경(王京)에 와서 드디어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하면서 여러 절을 찾아다닐 때에 지견이 때마침 본 절을 중수할 때였는데, 공이 그 풍경의 절묘함을 좋아하여 지견을 불러 앞세우고 말하기를, ‘이 산은 천하에 이름나고 산중의 명승지로도 여기가 으뜸이니, 대사는 우선 공사를 독촉하라. 내가 그 단월(檀越 시주하는 사람)이 되리라.’ 하더니, 공이 이미 조정으로 돌아가고 지견도 나오지 않은 지가 10여 년이러니, 지원 병자년에 본 절 비구 달정(達正)이 서울에 갔을 때 공이 보고 기뻐하여 저폐(楮幣)를 내어서 이포색(伊蒲塞)의 찬수에 공양하게 하니 민(緡)으로 계산하면, 5천 남짓이었다. 이어 말하기를, ‘대사는 우선 가지고 가라. 내가 마땅히 계속해서 시주하리라. 지견은 이미 나더러 잊었다고 말할 것이나, 보현암은 이제까지 나의 마음 속과 눈에 있었다. 대사가 온 것이 늦은 것 뿐이다.’ 하였다. 그 해 정월에 달정 대사가 돌아와서 이듬해 여름부터 선열회(禪悅會)를 개최하기로 하였고, 금년에는 더욱 치류(緇流) 3백여 명을 청하여 옷과 바리를 시주하고 큰 불사를 일으켰으니 4월 초 8일에 시작하여 7월 15일에 끝냈다. 위로는 임금 한 사람을 장수하게 하고 아래로 여러 생민을 복되게 하는 바에 이미 그 정성을 다하고 그 극진함을 지극히 하였으나, 공의 마음에는 아직도 미진한 것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공의 뜻을 기술하여 뒤에 오는 이에게 알리게 하라.” 함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미더움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큰 것으로 신하가 되어서 믿음이 없으면 능히 충성을 하지 못하고, 자식이 되어서 믿음 없으면 능히 효도를 하지 못하나니, 믿음이 없고서 능히 사람 노릇하는 자는 있지 않다. 공이 도덕과 절의로 천자의 팔다리가 되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간절하게 그 빛을 바라고 그 혜택을 바라는 자가 얼마이겠는가. 또 한편 공이 황제의 은택을 선포하여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다 그 욕망하는 것을 얻도록 하려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인데, 반드시 수십 년 전의 말을 실행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독실하게 하니, 그 믿음이 어떻겠느냐. 이것으로 공이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 하고 부모 섬기기를 효도로 하고 불도에 귀의하기를 정성으로 함을 알 수 있다. 능히 부와 귀를 누리는 것은 오직 믿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감히 두 번 절하고 공경히 쓰지 않겠느냐. 공의 이름은 사라반(沙刺班)으로, 지금 규장각 대학사 한림학사 승지(奎章閣大學士翰林學士承旨)가 되었고, 부인은 기(奇)씨니, 선경옹주(善敬翁主)의 소생이다. 동한(東韓)의 이름난 집안 본국 정순대부 좌상시(正順大夫左常侍) 기철(奇轍)이 그 친척으로 실로 이 모임을 주간하였다 한다.
[주D-001]이포색(伊蒲塞) : 우바새[優婆色]라고도 쓰는데, 청신사(淸信士)라고 번역되어 있다.
[주D-002]치류(緇流) : 중은 회색 옷을 입는 까닭에 회색의 무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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