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3남으로
자는 경부(慶夫), 호는 ?
어머님은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로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의 손녀,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의 증손녀,
선도전서( 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의 외손녀 입니다.
양촌(陽村) 안동(安東) 권근(權近)의 사위가 됩니다.
아버님 목은께서 41세이신
1368년 공민왕 17년에 태어났습니다.
1382년 우왕 8년, 공의 나이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언관에 재직했습니다.
1388년 창왕 원년, 공의 나이 21세 때,
맏형님 휘 종덕 문양공이 39세의 나이로 돌아가십니다.
1392년 태조 1년, 공의 나이 25세 때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피살되자
포은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아버님 목은과 둘째 형님 휘 종학 인재공과 함께
멀리 귀양살이를 갔습니다.
4월에 귀양을 갔던 것이고
7월에 공양왕이 폐위되며 조선이 들어선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의해
아버님 목은의 직첩이 회수되고 서인으로 강등되며
인재공 또한 직첩을 잃고 곤장 1백대의 형벌을 받은 후
먼 곳으로 귀양을 또 갑니다.
한 달 후인 8월에 둘째형님 인재공이
겨우 32세의 나이로 순흥종에 의해 목이 졸려
비명에 서거하십니다.
10월, 교서에 의해 아버님 목은의 유배가 해제되어
한주(=한산)으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이듬해인 1393년(태조2) 공의 나이 26세때에
아버님 목은께서 사면되시고 편리한데로 살게끔
나라에서 교서를 내립니다.
이듬해인 1394년(태조3)에 어머님 정신택주 안동권씨가
64세로 돌아가십니다.
1395년(태조4) 공의 나이 28세때 12월22일,
태조가 아버님 목은을 한산백에 봉합니다.
이듬해인 1396년(태조5) 5월 7일 공의 나이 29세때에
아버님 목은께서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시던 중
이방원-정도전의 사주에 의하여 독살되시며
69세로 그 파란만장한 대인생을 마감하십니다.
11월에 한산 가지고개에 아버님의 시신을
후손들과 함께 장사지냅니다.
공은 조선 개국 후 후손의 안위를 지키라는 아버님의 유언과
새 왕조에 입교한 빙장되는 권양촌의 권유로
순창 백천의 군수와 여흥부사를 지냈고
이 해에 병조참의가 되었습니다.
태조가 아버님 목은의 옛친구와 동료로서
목은에 대한 예를 잊지않고 끝까지 지켜주며 신의를 다한 것도
양경공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만 했던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 부합했던 것입니다.
1409년 태종9년, 공의 나이 42세에 좌우사간대부가 되었는데
이 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시행되었습니다.
1411년 공의 나이 44세되던 해에,
명나라의 진연이 지은 아버님 목은의 묘지명에
태조를 비방한 구절이 문제가 되자,
그것을 양경공이 진연에게 지시한 것이라 하여
동래진으로 귀양가 유배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뒤 풀려나 호조참의로 지내다가
인수부윤으로 승진되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417년 공의 나이 50세에 충청도 관찰사가 됩니다.
이 때 구암사와의 노비속공 문제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 됩니다.
석방된 후 이듬해인 1418년,
세종1년에 한성부윤이 되며
다시 인수부윤을 거쳐
1421년 공의 나이 54세에 좌근동지총제가 됩니다.
1423년 공의 나이 56세에 진전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이듬해에 다시 진하사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 왔습니다.
이 때 진하사 도총제 권화달의 문제로 인하여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됩니다.
이듬해에 석방됩니다.
1426년 공의 나이 59세에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했는데
새 감사와의 교체 도중 호부 인수인계 일로 파직됩니다.
이듬 해에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공의 나이 61세에 진하사로 다시 북경에 다녀오고
이듬 해에 선위사로 황주에 다녀왔습니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가 되어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책택하는 일을 관장했습니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로 승진,
1438년 공의 나이 71세에 중추원사가 되었습니다.
이 해에 돌아가십니다.
공은 일찌기 고려-조선왕조 교체기때에
위에 두 형들을 비명에 잃고
목은에게 유일하게 남았던 아들로서
아버님 목은께서 서거하신 후에는
시신을 거두어 후손들과 장사를 지내고
아버님의 방대한 저서인 목은집을 펴내는 등
집안의 어른과 장남구실을 하였습니다.
할아버님 가정과 아버님 목은을 닮아
역시 문장에 뛰어났습니다.
아버님 목은의 상을 당하였을 땐 3년상의 여묘살이를 하며
효성이 지극했던바
효자로 일컬어졌습니다.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습니다.
슬하에 5남을 남겼는데
사육신 휘 개 백옥헌공은 공의 손자,
토정공 휘 지함은 공의 5대손,
아계공 휘 산해와 장정공 휘 기는 공의 6대손,
휘 병상과 문정공 휘 병태는 11대손,
효정공 휘 사관은 공의 14대손,
문간공 휘 경재는 공의 15대손,
수당 휘 남규 선생은 공의 18대손 입니다.
시호는 양경(良景)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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