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종덕(種德) 문양공(文襄公)
문양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장자로
자는 ?구( 九), 호는 삼당(三堂) 혹은 현암(玄巖)입니다.
어머님은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 로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의 손녀,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의 증손녀,
선도전서( 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의 외손녀 입니다.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를 지낸
진주(晉州) 유혜손(柳惠孫)의 사위가 됩니다.
1350년, 아버님 목은께서 23세이실때 태어나셨는데
문양공은 가정의 장손으로
할아버님 가정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였습니다.
나면서부터 총명함이 남에게 뛰어났고
성장하시자 인품이 훤칠하고 지 깨끗하며 직하고 커서
남에게 굽히지 않는 기운이 있었습니다.
화려한 옷으로 몸을 꾸미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합니다.
할아버님 가정과 아버님 목은의 가학을 이어받아서
깨다는 것이 남에게 뛰어났고
또 스스로 얻은것도 또한 많았습니다.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친 후에
1373년, 공의 나이 24세때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때에
우왕때에 추성 익위공신 동지밀직사사(종2품)의
벼슬에 올랐습니다.
1387년 우왕 13년, 공의 나이 38세때에 지밀직으로서
문하평리 이구와 함께
정조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습니다.
1388년, 공의 나이 39세일때 벌어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후에는
정권이 그의 일파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는데
아버님 목은께서 창왕을 세우신 것이 죄가 되어
문양공께서는 극형으로 국문되었습니다.
장형으로 즉매를 맞아 39세의 나이에 돌아가십니다.
공이 세상을 뜬 날은
바로 아버님 목은의 환갑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1390년 12월 1일에
아버님 목은공과 동생인 인재공이 역모로 몰려
함께 관직에서 쫓겨나고 귀양을 갑니다.
이성계 일파가 목은 부자들을 제1의 걸림돌로 지명하고
일찌기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목은공께선 학문만으로도
일찌기 고려와 원나라를 모두 울리며 당대 최고이셨고
벼슬도 최고인 문하시중에 계시며
정권의 핵심인물이셨습니다.
고려말의 나라 민심이 목은께 향해있었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습니다.
목은의 세 아들들도 학문과 인격이 부친을 닮아
모두 훌륭하였기로 일찌기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장성했던 문양공과 인재공은
재상반열의 높은 관직에 있었을 뿐 아니라
세 아들 모두 당대의 명문 권력가 집안의 사위들이었습니다.
막강한 관직에 올라 있던 목은의 문인들,
조선 건국 후엔
조선초기 유학의 묵직한 한 파를 비중있게 형성했던
당시 실력가들도 적지않았습니다.
목은 부자들과 그 근위 세력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이성계 일파에겐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문양공은 죽음을 당하고
바로 밑의 아우 인재공은 1392년에 살해됩니다.
목은의 3남 중 막내였던 양경공도 한 때 유배살이를 합니다.
한동안은 장손 계열인 문양공의 후손들과 인재공의 후손들이
고향인 한산의 선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개성이나 서울 부근에서 묘소를 마련했어야 됐습니다.
문양공에 대한 기록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많지않은 것은 이성계 일파가 고려말에 감행한
숙청작업이 얼마나 무자비했음을 추측하게 만듭니다.
장자인 문양공과 둘째인 인재공을 잃으신 목은께서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 양경공께
후손의 안위를 지키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은
쉽게 이해가 갈만한 일입니다.
문양공은 일찌기 부모님께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얼음속 생선이 부엌에 들어오고
겨울 죽국이 밭에서 났는데
이는 하늘이 공의 효성에 감동해서 그랬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합니다.
아버님 목은께서 말씀한
"얼음속 생선과 겨울 죽국은 하늘이 알아준것"이란
시 구절에서 공의 갸륵한 효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님 목은이 병들어 계셨을 땐 벼슬도 마다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병시중을 들었습니다.
또한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였습니다.
방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총명함이 남에 월등하여
착한 일을 즐겨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는데
이 또한 특별히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문양공은 슬하에 4남을 두셨으며
할아버님 가정공과 아버님 목은공이 주향이신
영모리 영모암(충청남도)의
문헌서원에 추배되셨으며
공의 효성을 추도한 효행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휘 맹균 문혜공은 문양공의 2남,
휘 현영 충정공(=판서공)은 8대손,
휘 기조 충간공은 9대손,
휘 규령 정혜공은 10대손,
휘 상정 대산공은 13대손,
월남 휘 상재는 15대손이 됩니다.
시호는 문양(文襄)입니다.
'▒ 목은자료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은 이색선생이 찿아와 술상 놓고 기쁘게 웃는 꿈을.....-정추(鄭樞)- (0) | 2007.02.04 |
---|---|
목은 이색 선생의 3남 양경(良景) 이종선(李種善)선생의 생애 (0) | 2007.02.04 |
송죽 같은 절개로 일생을 마감하신 목은 이색 선생 (0) | 2007.02.04 |
목은 이색 선생 연구 30년 독일 자보롭스키 교수 (0) | 2007.02.04 |
목은 이색선생의 손자 한재(漢齋) 이맹균선생의 시 (0) | 2007.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