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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죽 같은 절개로 일생을 마감하신 목은 이색 선생

천하한량 2007. 2. 4. 02:43

휘 색(穡)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께서는
1328년 5월 신미일,
아버님이신 가정공(稼亭公)께서 문과급제하시고
8년이 지난 31세의 나이가 되실때,
외가인 경북 영덕군 영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김종직의 <영해 회고시>에,
"선생이 한 번 나시매 사람의 상서가 되시니
이로부터 단양의 초목이 말랐도다" 란
                구절이 있습니다]

  자(字)는 영숙(穎叔), 호(號)는 목은(牧隱) 입니다.
 
  두살때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오십니다.

 

  목은께선 어려서부터 총명과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
  8세에 숭정산 독서당에 입문, 학문을 시작한 후
  여러 이름난 산사에 다니며 학문을 탐구하셨습니다. 

 

  1382년 고려 충혜왕 복위 2년,
  겨우 14세의 나이에 진사 성균시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16세의 나이에 별장(정7품)의 벼슬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 이곡-이색 부자가문이
  고려 최상층 명문가로 부상하였음을 증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아버님이신 휘 곡 가정 문효공께서 어렵게 발신하여
  재상의 지위까지 올라간것에 비하면
  아드님이신 휘 색 목은 문정공께선
  부친보다 월등했던 본인의 타고난 능력과 또 아버님의 음덕으로
  어렸을때부터 이미 그 탁월한 실력을 만천하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수월하게 벼슬길에 나가시게 되는 경로를
  밟게 되신 것입니다.

 

  목은께서 19세의 나이에 장가를 들려하자
  당시 최고 명문 집안에서 서로 사위를 삼고자하여
  혼례 당일까지도 서로 다투었을 지경이었다합니다.

  결국 공께선 당대 제일 명문 집안 중의 하나인
  안동권씨에게 장가드는데,
  그 장인은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
  그 처조부는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
  그 증조부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
  그 외조부는 선도전서( 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이었습니다.

 

  26세때인 공민왕 2년(1353)에
  고려 문과에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고
  다음해 3월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급제,
  황제가 친림하는 전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천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라고 할 수있는데,
  전시에서 차석을 하신건
  원나라 사람이 아니면 장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후 원과 고려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온갖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치다가
  결국 공민왕 20년 (1371) 7월 16일,
  공의 나이 44세 되실때 정당문학의 재상반열에 오르고
  우왕 8년 (1382) 11월, 55세에 판삼사사(종1품)가 되며
  우왕 11년(1385) 58세에 검교 문하시중이 되십니다.

 

  우왕 11년 (1388) 목은께서 환갑되는 해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와서
  6월 8일 우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하고자 할 때
  우왕의 세자인 창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음에
  공께선 조민수등과 함께 6월 9일 창왕을 옹립하셨습니다.

 

  이해 8월 7일, 공의 나이 61세에
  최고의 벼슬인 문하시중에 오르시고,
  이성계는 그 다음 자리인 수문하시중이 됩니다.

  그러나, 새 왕국을 세우려는 딴 뜻을 품었던 이성계 일파는
  결국 우왕이 신돈의 혈육이라는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억지 누명을 씌워
  창왕 2년(1390) 11월 15일엔  창왕까지 다시 폐위시키며
  공양왕을 세웁니다.

 

  목은의 장남이신 휘 종덕(種德) 문양공(1350-1388)께선
  추성 익위공신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벼슬을 지냈는데,
  아버님 목은공께서 창왕을 세우신 것이 죄가 되어,
  조정에서 극형으로 국문하여 장형으로 즉매를 맞아 숨지게 하니,
  이 때 문양공의 나이 39세이셨습니다.
  슬하에 4남을 두셨습니다.

 

  목은께서 이성계 일파의 뜻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며 절의를 꺾지 않으시자
  12월 1일에 목은과 그 차자인 휘 종학(種學) 인재공
  (1361-1392)을  역모로 몰아 귀양보낸 다음,
  공양왕 3년(1392) 4월 4일 이성계 일파는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때려 죽이고
  다음 7월 17일 이성계가 결국 왕위에 올라
  새왕조을 개국하니 이것이 바로 조선입니다.

 

  이성계 즉위 후에 이성계의 근위세력인 정도전일파는
  무자비한 반대세력 제거에 몰입했는데
  8월 23일에 목은의 둘째자제인
  봉익대부 서연시독관 진현관제학 상호군 휘 종학 인재공을
  장사현으로 유배되는 도중
  거창 무촌현에 이르렀을 때에
  정도전이 보낸 순홍종이 목 졸라 죽였습니다.
  (혹은 매질을 해서 죽였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인재공의 나이 32세였습니다.
  인재공은 슬하에 6남을 남겼습니다.

 

  목은의 3남 휘 종선(種善) 양경공(1368-1438)도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후에 그의 일파로 몰려
  한 때 멀리 귀양살이를 갔다가 나중에야 풀려 났습니다.
  양경공은 슬하에 5남을 남겼습니다.

 

  이미 고려조때에 왕방, 조반등의 음모로
  둘째 아들인 휘 종학 인재공 및 이숭인과 청주옥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셨던 목은께선 이렇게 해서  두 아드님을
  당신보다 먼저 앞세워 보내게 되신 것입니다.


  쿠데타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그  일파의 무자비한 숙청이 한창이었던
  고려 왕조 말년과 새왕조 조선 초년기를 거쳐
  소중한 두 아들을 잃으시고
  관직 박탈, 연속되는 유배와
  투옥의 생활을 하시던 목은께선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되셨는데
  한 번은 낙향해 계신 공을 찾아와
  이성계는 이런 도움을 청했다고 합니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게".
  친구의 이 말에 목은께선,
  "나라 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잖소.
  망국의 대부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해골을 가져다 고산에 묻을 뿐이요" 라고.

 

  공의 이런 소나무처럼 푸르르고
  대나무처럼 굳게  변함없는 절개는
  공과 상의하여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던
  야은 길재에게 써준 시,
  "비흥일개재막막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네)"
  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태조 4년(1395) 11월 24일에는
  태조가 목은을 왕궁으로 직접 초빙하여
  친구의 예로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 중문까지 나가 읍하며 배웅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이성계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쓰러트리고 새 왕조를 세워 태조가 되었지만
  그는 계속 자신의 친구였으며
  윗자리에 있던  목은을
  끝까지 어렵게 대하며
  공의 학문과 품성을 아끼는 마음에
  새 왕조에 입조할 것을
  계속 회유하며 간청했던 것입니다.

 

  목은을 오래전부터 시기해오며 살해하려고 노리던
  간신배와 조무라기들이 적지 않았는데,
  태조의 옹호로 무사한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드님 둘을 위시하여 
  포은 정몽주 및 많은 친우와 제자들이 고려와 함께 죽어갔지만
  이성계 일파가 목은을 처음에 함부로 제거할 수 없었던
  까닭중에 하나는,
  고려에서뿐 아니라 중국에서까지 널리 알려지며 추앙받던
  공의 명성과 정치적 위치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이방원과 정도전 일파는 계속 기회를 노리던 중에
  다음해인 태조 5년(1396) 목은께서 69세이시던
  병자 5월 7일,
  공께서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수했습니다.
  이에 이방원과 정도전이 사자를 시켜
  여강의 연자탄 제비여울에서 휴식하시던 공께
  술과 안주를 내려 보내어 어주라 속이고
  목은에게 극독이 들은 술병을 보냈습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신륵사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목은공께서는 명이 하늘에 있는데
  죽고 사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랴?고
  태조가 보냈다는 그 독술을 마신 후
  곧 배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께선 마지막까지 충성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고매한 품격을 지키시며 의연하게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신것입니다.

  이때 술병을 막았었던 대나무 잎이 강가로 떠밀려가서
  대숲을 이루어 그 대쪽같은 절개를 상징하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여주에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3일동안 조회를 중단합니다.

 

  셋째아들 양경공이 공의 시신을 거두었고
  자손들과 함께 한산의 가지 고개에 11월에 장사하였습니다.


  다음은 목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6백주년이 되던 1996년 학술발표대회에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목은의 우뚝한 삶을
  종합평가한 것을 실은 것입니다;


  "목은은 학자와 정치가, 교육자로서 큰 자취를 남겼으며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왕조교체기에 끝까지 고려에 대해
   불사이군하는 충절을 지킨 충신이었다.
   고려를 통틀어 산문으로는 익재 이제현,
   시인으로는 목은을 꼽는다.
   그가 남긴 시 6천31수는 질적으로도 고려 최고이다"
   (이문원 중앙대 교수)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 비판함으로써
   고려를 불교사회에서
   성리학사회로 전환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본격적인 성리학시대를 여는데 이바지한
   당대의 유종이었다.
   불교의 우수성을 함께 인정해
   조선시대 일부 선비로부터 배척받았지만
   목은의 사상은 전것을 이어받아 새로움을 연 것으로
   목은은 당대의 선구자였다"
   (윤사순 고려대 교수)

 

  "무신정권이래 유행한 문장해석중심의 사장학에서 벗어나
   실천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리학 관점에서 사서오경을 일관적으로 해석해
   한국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따라서 목은이야말로
   고려말 성리학의 사회적 전파와
   이론적 발전에서 결정적 역활을 수행한
   성리학파의 종장으로서
   그의 유학사상은 한국성리학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다"
   (금장태 서울대 교수)

 

  "공민왕 16년 성균관이 신축된 뒤
   대사성을 맡아 성리학을 크게 일으켰고
   과거에서 시험관을 6차례 맡아
   권근, 이숭인, 맹사성 등
   고려말, 조선초의 명신, 학자 1백 32명을 배출하는 등
   교육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신천식 명지대교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여말 삼은의 한 분이신 목은,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공께선
  당시 고려와 원나라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이셨으며
  그야말로 한국역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실로 너무나 위대한 업적을
  여러 방면에 두루 걸치며 남기셨던
  거인이셨던것입니다.


  "집이 가난하여 아침밥을 간혹 거르기도 했는데
   하물며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명월과 청풍으로 내 집을 윤택케 한다"
   라고하신 목은,

  "소년시절에 산사에서 글을 읽을 때
   죽그릇 속에 비친 얼굴을 대한 적이 있는데
   작위가 봉군에 이르러서도 백발을
   죽그릇에서 볼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하신 목은,

  "병든 몸으로 국정을 맡아
   해마다 쌀을 빌려 살아가는 궁색한 형편" 임을
  전혀 숨기지 않으셨던 그 이셨기에
  오늘날 후손들은 당당하게
  목은의 몇 대손이라며 또한 말을 할 수있는 것입니다.

  한산이씨가 관향을 한산으로 부르게 된 것은
  문효공께서 한산군, 문정공께서는 한산부원군에
  피봉된것에 연유합니다.?

  목은 문정공께선 3명의 자제분과 15명의 손자를 보셨고
  한산의 문헌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장단의 임강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서산서원 등 전국 각지에서 배향되고 있으십니다.

  저서로는 <<목은문고>> 와 <<목은시고>>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