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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선생의 손자 한재(漢齋) 이맹균선생의 시

천하한량 2007. 2. 4. 01:41

이맹균(李孟畇)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지밀직사(知密直事) 종덕(鍾德)의 아들이다. 고려의 신우(辛耦) 때에 나이 15세로 등제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있었다. 특히 시를 잘하였다. 이조에 들어와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가 죄에 연좌되어 유배되어 죽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일찍이 〈송도(松都)〉라는 시를 지어 슬퍼하였는데 그 중 둘째 연에,


영웅은 이미 갔으나 산하는 남아 있으며 / 英雄已逝山河在


인물은 남천(南遷)하고 옛 도읍은 비었네 / 人物南遷市朝空


상원에 꾀꼬리와 꽃은 보슬비에 젖었는데 / 上苑鶯花微雨後


여러 능의 풀과 나무는 석양 속에 기울더라 / 諸陵草樹夕陽中

하였으니, 감회와 한이 많은 글이다. 《용재총화》

 


○ 아들이 없는 것을 한하여 시를 짓기를,

탄무자(嘆無子)
 


옛날부터 인류는 인에서 일어나 / 自從人類起於寅


부자가 서로 전해 이 몸에까지 왔거니 / 父子相傳到此身


내 죄가 무엇이건대 하늘이 돌보지 않아 / 我罪伊何天不弔


남의 아비 되지 못한 채 머리가 세었는가 / 未爲人父鬢絲新

 

 

하였다. 그뒤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와서 가화(家禍)를 일으키자,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귀양살이하다가 죽었다. 《용재총화》
 


○ 학문이 정심하고 필적도 뛰어나서 한산(韓山) 가목(稼牧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父子))의 풍이 있었다. 관직은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만년에 죄 없이 불운하였고 또 후사가 없어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등백도(鄧伯道)가 자식이 없자 하늘도 무심하다 하더니, 문혜(文惠)도 역시 그러하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송경 회고(松京懷古)
 


                                   

5백 년 내려오다가 왕기가 끝났으니 / 五百年來王氣終


닭을 잡고 오리를 친 공은 어디 갔는고 / 操鷄摶鴨竟何功


영웅들 한 번 가니 호화도 다했구나 / 英雄一去豪華盡


인물이 남[한양]으로 옮겨 저자도 텅 비었네 / 人物南遷市井空


가랑비 내린 뒤의 상원(궁궐에 속하는 비원)의 연하여 / 上苑煙霞微雨後


석양 비낀 적에 모든 능의 초목들 / 諸陵草樹夕陽中


가을 바람에 지나는 손 한이 얼마뇨 / 秋風客恨知多少


지난 일 유유하여라, 물만 동으로 흐르누나 / 往事悠悠水自東

 

 

[주D-001]닭을 잡고 오리 친 : 태봉(泰封) 말년에 당상(唐商) 왕창근(王昌瑾)이 궁예(弓裔)에게 바친 옛 거울에 새겨 있었다는 도참문(圖讖文) 중의 일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먼저 계림을 정복하고 뒤에 압록강을 취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철원(鐵原) 취전주(聚錢州)에 당도하여[次鐵原聚錢州]
 


학과 돈과 양주를 세상에 겸하기 어렵거니 / 世上難兼鶴錢州


이 다락의 좋은 경치 사람의 시름을 풀어주네 / 此亭形勝解人愁


청산이 그림처럼 평야를 둘렀고 / 靑山似畫圍平野


녹수가 바람을 풍겨 가을 기운 움직이네 / 綠樹含風動素秋


용을 탔던 여조는 지금 어디 있는고 / 麗祖乘龍何渺渺


사슴을 잃은 궁왕도 길이 가고 말았네 / 弓王失鹿亦悠悠


난간에 의지하니 활짝 트이는 가슴 속 / 憑闌賸得胸中豁


구태어 저 구름밖에 신선놀이 해 무엇하리 / 雲表何須汗漫遊

 

 

[주D-001]학(鶴)과 돈과 양주(楊州) : 옛날 사람들이 모여 각기 소원을 말하는데, 혹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 하고, 혹은 돈을 흠뻑 가지고 싶다 하고 혹은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고 싶다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하되, “나는 허리에 10만 관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올라가고 싶네.” 하였다. 이곳 지명에 따라 인용한 것이다.
[주D-002]사슴[鹿]을 잃은 : 임금이 나라를 잃은 것을 비유하였다. 진(秦) 나라의 간신(奸臣) 조고(趙高)가 임금 앞에 사슴을 끌고 와서 말[馬]이라고 한 일이 있었으므로, 진나라가 망한 것을 사슴을 잃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휘 맹균(孟畇) 문혜공(文惠公)은 목은의 손자로

  휘 종덕 문양공의 2남입니다.

 


  자는 사원(士原), 호는 한재(漢齋) 입니다.

 


  1371년 (공민왕20), 할아버님 목은께서 44세,

  아버님 문양공께서 22세때에  2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님은 문화평리(門下評理) 혜손의 딸,

  제학(提學) 인비의 손녀, 찬성(贊成) 욱의 증손녀,

  현복군 찬성(贊成) 안동(安東) 권렴(權廉)의 외손녀인 

  정경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입니다. 

 


  1383년(우왕9) 공의 나이 겨우 13세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는 기염을 토하고,

  1385년(우왕11) 공의 나이 15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직학, 사신소감, 내서거인, 지단양군사의

  벼슬을 나란히 거치게 되는데,

  1388년 공의 나이 18세에 아버님 문양공께서

  비명에 돌아가시는 비극적인 일을 당합니다.

 


  2년뒤인 1392년, 공이 22세일때에 

  숙부 휘 종학 인재공(둘째집)이

  무창현에서 정도전의 사주로 인해

  목이 졸려 또한 비명에 돌아갑니다.

 


  이듬해 1393년(태조2) 5월 22일(혹은 28일),

  어머님 정경부인 진주유씨가 45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십니다.

 


  또 이듬해 1394년 8월 1일,

  말년에 고생만 하시던 할머님 안동권씨가

  64세의 나이에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1396년 공께서 26세되실 때 5월 7일,

  할아버님 목은께서

  이방원-정도전에 의해 독살되십니다.

 


  문혜공의 형님은 휘 맹유(?-?) 사윤공(司尹公)으로

  고려때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 監門?大護軍)

  벼슬을 지냈고,

  바로밑의 동생분은 휘 맹준(?-?) 정언공(正言公)으로

  139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고려때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 監門?大護軍)

  벼슬을 지냈습니다.

  조선에 들어와서 1426년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수찬(通訓大夫 修撰),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등의 관직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에 이르렀는데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했을 때에

  평안도 용천에 피신한 까닭으로 그 후손들이

  그대로 용천에 터전을 잡았습니다.

  막내동생은 휘 맹진 숭정대부 판중추원사(崇政大夫 判中樞院事)

  입니다.

 


  1406년(태종6), 공의 나이 36세때에  사헌부집의로 재직중

  사송을 계류한 죄로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고

  그 후에 지영천군사, 지우문감사, , 좌사간, 경승부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421년(세종3), 공의 나이 51세때에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예조판서를 지냈습니다.

 


  1425년(세종5), 55세때에 진위사로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에 이조-병조판서를 역임하였습니다.

 


  1427년(세종9), 공의 나이 57세때에 좌빈객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고, 그 뒤 의정부참찬 겸

  대사헌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습니다.

 


  1429년(세종11)에 사은부사로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1430년에 돌아와 의정부참찬,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1437년(세종19), 공의 나이 67세때에 예문관대제학 겸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판이조사를 겸하는 것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에 우찬성 겸 판이조사, 좌찬성을 지냈습니다.

 


  1438년 숙부 휘 종선 양경공(셋째집)이 71세의 나이로

  돌아가십니다.

 


  1440년(세종22), 공의 나이 지긋한 70세때에

  평소에 질투가 심했던 공의 부인 정경부인 전의이씨

  (貞敬夫人 全義李氏)가

  그만 젊은 첩을 흠씬 두들겨패게 한 뒤

  움속에 처 넣고 굶겨 죽였는데,

  시체를 묻어주지않고 서대문밖 홍제원 길섶 웅덩이에

  그냥 갔다 버렸습니다.

  원래 정경부인 전의이씨는 글과 시작에도 능하여

  시편도 여럿 남겼고 학식을  갖추었는데,

  이 사건으로 정경부인의 작첩을 잃게되어

  족보에는 그냥 목사(牧使) 구직의 딸인

  전의이씨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처음에 부인 전의이씨의 작첩을 거두는 벌로

  비교적 가볍게 죄를 다스렸던 조정에서도,

  끊이지않고 올라오는 상소와 탄핵때문에

  세종은 영의정 황희와 독대끝에 

  공을 파면시키고 황해도 우봉현으로 귀향보냅니다.


  70세의 고령으로 귀양을 간 공은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개성부에서

  그 나이에 돌아가십니다.

 


  문혜공은 조선조에서 한산이씨가 배출한

  대제학 3명 중 한 분으로,

  어릴때부터 총명이 탁월해 수재로 불렸고  

  할아버님의 유풍이 물씬 풍겨 당대의 대문장가였습니다.


  글씨와 시문에 뛰어났던 분이셨습니다.

 


  성품은 온화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러나, 평생 무자식이었고 

  사납고 질투심이 강한 부인때문에

  말년에 초라하게 최후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공의 막내 동생되는 휘 맹진 판중추공의 3남

  부정공(副正公) 휘 보기(保基) 께서 공의 대를 잇는데,

  부정공은 아들 네 명을 보았으니

  휘 준(濬), 휘 함(涵), 휘 관(灌), 휘 지() 입니다.

 


  시호는 문혜(文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