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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선생글 동문선 (2) 87권~129권 까지 정리 모음

천하한량 2007. 1. 31. 17:52

  
 
 
 서(序)
 
 
송 서 도사 사환 서(送徐道士使還序)
 

홍무(洪武) 건원(建元) 3년 4월에 호를 옥암(玉巖)이라 하는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가 향폐(香幣)와 축책(祝冊)을 받들고 금릉(金陵)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왕경(王京)에 당도하자, 들에 나가 맞아들이고 사관을 주어 위로하여 모두 일정한 격식에 의하되 오직 삼가며, 예조에 명하여 제사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또 동지밀직(同知密直) 이성림(李成林)으로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색(李穡)도 또한 참예하게 되었다.
5월 정유일을 이용하여 여러 관원이 위패를 모시고 산수(山水)의 신을 성남(城南)에서 합제(合祭)한바, 그 이튿날에 옥암이 매우 기뻐하였으며, 복명(復命)하기에 급박하여 예성강(禮成江) 항구에서 바람 때[候風]을 기다렸다. 며칠이 못 되어서 왕은 이르기를, “도사가 왔을 적에 몸이 조금 불편하여 더불어 예를 차리지 못하였으니 마음에 섭섭하다.” 하고, 불러들여 위문하며 한참동안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옥암이 제사의 일 때문에 내 얼굴을 잘 알았고, 또 내가 유관(儒冠)을 쓴 것을 보고서 시를 청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며, 행장을 끌러서 가지고 있는 대창(大倉) 제자(諸子)의 시를 내보이므로 받아서 끝까지 다 읽었다.
옥암은 참으로 시를 좋아하는 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쉽게 이것을 남에게서 구득했겠는가. 이에 여러 친지의 시를 받아주고 그 머리에 대략을 서(序)하는 바이다.
도가(道家)의 부류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자(老子)는 주(周) 나라 주하사(柱下史)로서 불우하여 5천 자의 글을 저술하였고, 두 번째 전하여 개공(蓋公)에 이르러서는 조참(曹參)이 문제(文帝)에게 천거하여 한 나라가 형벌을 쓰지 않게 만들었으니, 비록 우리 유자가 천하에 쓰이게 되더라도 그 성과는 반드시 다 이와 같이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그 이른바 수록(授?)ㆍ배장(拜章)ㆍ부주(符呪)ㆍ환단(還丹)같은 술(術)은 비록 각기 설명이 있으나, 지루하고 허망하여 다 노자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 된 자는 마땅히 그 스승의 도를 힘써야 할 것이다.
지금 천자가 밝음이 일월과 합하여, 인심에는 진위(眞僞)가 있고 학술에는 사정(邪正)이 있다는 점을 남김없이 통찰하며, 현교(玄敎)에 있어서도 깊이 청정(淸淨)의 도와 합하여 마음으로 해내(海內)가 영일(寧壹)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그 굉장한 규모와 원대한 정책은 한(漢) 나라보다 만 배나 넘었으며, 옥암은 조천궁을 벗어나 만 리의 외국에 제사를 대행하게 되었으니, 그 사람의 어진 것을 따라서 족히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정신이 완전하고 지킴이 굳건하며 말은 간략하고 의(義)는 밝음을 볼 때, 스스로 안보한 것이 중함을 알 수 있다. 재계하고 목욕하여 그 덕을 신성하게 하며 당연히 제사할 바를 제사하여 사람을 다스리는 근본을 확립한 것에 이르러서는, 정결하고 정미(精微)한 온축(?畜)을 다한 이가 아니면 능히 참예할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옥암의 이번 행차가 있게 된 것이니, 어진이를 세우되 일정한 방향이 없는 것을 또한 큰 조정의 사람 쓰는 법에서 보겠다. 장차 개공(蓋公)같은 이가 나오게 된다면 이 백성이 그 혜택을 받을 것은 틀림없다. 옥암의 성은 서씨(徐氏)요, 이름은 사호(師昊)요 양주(楊州) 사람이다. 갖추어 기재하는 것은 망제(望祭)의 실지 행사가 이때로부터 시작된 것을 나타내자는 때문이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증 김 판사 시 후서(贈金判事詩後序)
 

상(喪)에 대한 제도가 폐지된 지가 오래이다. 지난날 내가 중원에 있을 때에, 사대부가 상복을 입고 수질(首?)을 띤 채 술ㆍ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서 처음에는 매우 해괴하게 여겼는데, 아침저녁으로 곡하는 것이 3년을 마치도록 게으르지 아니하여 비록 악독한 무리라도 그 소리를 듣고 가슴속에 흐느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음을 보고서야, 드디어 중국의 강상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려는 주(周) 나라가 은태사(殷太師) 기자를 봉한 후로부터 대개 문명으로 변하여 상기(喪期)도 일찍이 3년으로 정하였으나 백 일만에 길사(吉事)에 나아가며, 풋마늘을 먹지 않는 것은 좋게 알면서 쌀밥을 먹는 것은 여전하며, 장지를 가리는 것과 죽은 이를 보내는 절차는 대략 중국과 동일하나 우제ㆍ졸곡은 없으며, 소ㆍ대상ㆍ담제는 그 예가 엄연히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곡하지는 아니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가 아직도 복중에 있는 줄을 모르게 된다. 이로써 본다면 지금 천하의 상제(喪制)를 거론할 때 득실이 대개 상반된다. 본국의 복제도(服制圖)를 살펴보니, “3년상에 있어서는 백 일 동안 휴가를 주고 그 나머지는 각각 차례대로 내려간다.” 하였다. 과연 백 일로써 3년을 당한다면 소ㆍ대상ㆍ담제도 백 일 안에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 돌이 소상이요, 두 돐이 대상이요, 그후 3개월 되는 달 중순이 담제로 되어 다 휴가가 있으니, 그렇다면 27개월로 된 것이 분명하며, 또 휴가란 것은 관직에 있는 자를 두고 말한 것이다. 휴가가 끝나면 당연히 공사를 봐야 하는데, 길(吉)과 흉(凶)은 그릇을 같이 사용하지 못하므로 복을 벗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남은 사람이야 무엇 때문에 스스로 복을 벗겠는가? 복을 비록 벗었더라도 술도 마시지 아니하고,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내방 거처도 하지 아니하며, 3년을 심상(心喪)하는 것이 옳거늘, 이에 이르기를, “나는 휴가가 이미 끝났다. 나는 복을 이미 벗었다.” 하며, 못하는 짓이 없다면 대개 또한 생각을 잘못한 탓일 따름이다.
그 폐단을 미루어보면 관직에 있는 자의 휴가에 있다. 기복(起復)의 명령이 미치어 무직자가 그 본을 뜨고, 서민도 또한 그 본을 떠서 구차하고 간편한 것을 인습하여 드디어 그 잘못을 모르게 된 것이다. 이러므로 능히 3년을 마치기는 오직 시묘(侍墓)하는 자만이 그렇게 한다. 무릇 묘라는 것은 체백이 들어 있는 곳이요, 혼기는 본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므로, 삼우(三虞)를 제사하여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가묘(家廟)가 이미 폐하게 되면 정신이 주류(周流)하여 어디를 가도 자손에게 의탁하지 않음이 없으니, 자손이 있는 곳이 신이 의지한 곳이다. 그렇다면 아침저녁으로 곡하고 또 제사하는 것을 집에서 아니하고 들녘에서 한들 또한 무엇이 해로우랴. 비록 성인(聖人)의 법제로 따진다면 조금 유감 되는 점이 있으나 지금 예법이 탕진해 없어지는 때에 능히 자식 된 지정(至情)을 극진히 하여 3년만에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 그 은혜를 갚는 것은 그 길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그의 사는 마을을 정표하고 남들이 효자라 칭하게 되는 것이니, 비록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역시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낙안(樂安) 김씨는 삼한의 대성이다. 형제가 어머니를 섬기어 효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신축년 겨울에 도적이 서울을 침범하게 되자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는데 형씨 제학(提學)은 불행히 도중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어머니가 무척 슬퍼하여 미구에 또 죽었다. 아우 판사(判事) 공이 그 상(喪)을 태산의 별장에 초빈하고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짚방석을 떠나지 아니한 지가 수개월이었다. 이미 장사하고 그 곁에 살며 복제를 마치니, 대개 내가 이른바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바꾸지 않는다는 그것이다.
담암(淡庵) 백 선생(白先生)이 효에 극진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사대부가 시를 지어서 아름답게 여겼다. 나같은 자는 바로 이른바 휴가가 끝났으므로 공사를 보는데 이 권을 읽으니, 능히 슬픔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상제에 대한 득실과 그 폐단의 소유와 시묘를 하는 것이 정에서 나온 뜻을 얻었다는 것을 써서 후서(後序)를 하는 것이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동안거사 이공 문집 서(動安居士李公文集序)
 

맹자(孟子)가 옛 사람을 벗삼는 예를 논하기를,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세대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문장을 논하여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다.” 하였다. 문장은 사람 말의 정수이다. 그러나 말이란 반드시 모두 그 마음과 같으며 실제의 행실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ㆍ양자운(揚子雲)과 당 나라 유종원(柳宗元)과 송 나라 왕안석(王安石)같은 무리들이 그 말이 글월에 널려 있는 것은 이의를 달 것이 조금도 없지만, 서서히 그 행동의 실적을 상고해 보면 능히 우리의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비유하자면, 예불(禮佛)하는 도한(屠漢)이나 예를 배운 창부(倡婦)가 밖에서 보면 그럴 듯하지만 근본을 따진다면 도한이요 창부인 것과 같다. 그것을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이렇기 때문에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고 더욱이 그 세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다.
이색(李穡)은 배우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옛 사람을 논하며 어찌 감히 천하의 선비를 논하리오. 그러나 한갓 문장만으로써 사람을 허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히 숨겨두지 못한다. 전 밀직사사 겸 감찰대부 이공이 그 선친 동안거사(動安居士) 문집을 판각하려 하는데 그 질서(姪?) 병부 시랑 안군으로 인하여 내 글을 빌려서 서문을 하고자 하였다. 나는 일찍이 거사의 높은 풍도(風度)를 사모하여 그 시절에 나서 채찍을 쥐고 뒤를 따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는데, 편 머리에 이름을 실린다면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는데 어찌 사양하랴.
삼가 살피건대 거사는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갖은 고생으로 스스로 이루었다. 경오년 환도(還都)하던 때에 거사가 아직도 천한 몸이었는데, 언사(言事)로써 충경왕(忠敬王)의 지우(知遇)를 얻게 되어 순안공(順安公)을 따라서 원조(元朝)에 들어가서, 매양 황제의 은사가 있으면 표를 올려 진사(陳謝)하여 그 문장이 문득 사람을 경동하게 되자 이름이 드디어 크게 떨쳤다. 충렬왕을 섬기어 정언(正言) 사간이 되매 더욱 언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쓰이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떠나서 두타산(頭?山) 속에 자취를 감추고 몸을 마치려는 듯이 하였다. 충선왕이 직위하자 제일 먼저 거사를 불러들여 대우가 극히 융숭하였으나 거사는 끝내 즐거워하지 않고 돌아가기를 청하여 더욱 간곡하므로 이에 밀직부사 사림학사(詞林學士)로써 치사하게 하였다.
가훈이 법도가 있어 여러 아들들이 모두 유명하며 그 막내 아들이 역시 곧은 절개와 위대한 인격으로 당시의 중신(重臣) 대부가 되었다. 아, 재주가 아니고서 영탈(穎脫)이 이와 같겠는가. 어질지 않고서 벼슬자리를 벗어던지겠는가. 도가 몸에 축적되지 않고서 이들이 능히 세 조정의 청문(聽聞)을 움직였겠는가. 교화가 가정에 시행되지 않고서 능히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였겠는가. 여러 가지 행사의 실적에 나타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비록 전집을 보지 아니하여도 그 마음에 뿌리박힌 것이 문사에 나타났음을 따라서 알 수 있다. 아,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언(言)이 있다는 말을 나는 여기서 더욱 믿는다. 지정(至正) 19년 동지(冬至) 후 3일.

동문선 제86권   
 
 
 서(序)
 
 
묵헌선생문집 서(?軒先生文集序)
 

아, 문장의 흥하고 쇠하는 것은 천지의 기수(氣數)와 관계되는 것인가. 원 세조(元世祖)가 해내를 통일하여 문학하는 선비가 대궐 아래로 폭주하게 되자 묵헌(?軒) 선생은 충선왕을 따라 들어가 세조를 뵈오니, 세조는 관(冠)을 쓰지 아니한 채 한가히 앉았다가 갑자기 이르기를, “너는 비록 왕자(王子)지만 내 집 외손이요, 저는 비록 배신(陪臣)이지만 유자(儒者)다. 어째서 나로 하여금 관을 쓰지 않고 유자를 보게 하느냐.” 하고, 드디어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았다. 인하여, “교지(交趾)를 치자면 장차 어떤 계책을 써야 하느냐.” 물으니, 선생은 꿇고 아뢰기를, “군사를 수고롭게 하여 멀리 치는 것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선생의 학문이 이와 같으므로 이를 발하여 문장을 지으면 인정과 물태(物態)가 극진하게 담기고 물이 쏟아지듯이 기세가 거침없으니 학자가 지금까지 종주로 삼고 있다.
선생의 증손(曾孫)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자복(子復)이 그 아우 자의(子宜)와 함께 와서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받아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순수하기가 마치 광석과 박석(璞石) 속에서 금과 옥이 금방 나온 듯하고, 준일(俊逸)하기가 마치 고기가 냇물에 있고 새가 구름 사이에 있는 것같다. 그 제정(帝庭)에 진언(陳言)하여 표장(表章)을 기술하고 국사(國史)를 교정하여 강령과 조목을 구분한 데 이르러는 진실로 일세를 독보하였다. 나는 만생(晩生)이나 오히려 선생의 자손을 상종하여 문장 도덕의 여서(餘緖)를 듣게 됨으로써 스스로 다행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검열(檢閱) 형제가 우리 도에 뜻을 두어 능히 선조의 아름다움을 앎에 있어서랴. 알고서 전하지 아니하면 또 어질지 못한 것이니, 그 서를 급히 구하여 판각하려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동방의 문학이 융성하여 중국에서 칭찬받음을 보게 된 것은 대개 최 문창(崔文昌)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 녹명(鹿鳴)으로 말미암아 제정에서 대책(對策)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독권(讀卷)하는 자가 그 사이에 있어 면주(面奏)할 길이 없는데, 유독 선생은 침전에 입대하여 천하의 대사를 판단하였으니 진실로 공사(貢士)의 미칠 바가 아님은 물론이요, 비록 옛 명신(名臣)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 나는 일찍이 그 사실을 노래하여 뒷 사람에게 알리려 하면서도 아직 못했는데 검열 형제가 다행히 글을 청하므로, 비졸(鄙拙)함을 헤아리지 않고 즐거이 서를 만들었다. 그 문장의 흥하고 쇠함으로써 머리에 쓰는 것은 선생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요, 또한 자탄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죽계(竹溪)는 근재(謹齋) 선생의 아들이요, 지금 밀직 첨서(密直簽書)로 이색(李穡)과 동년(同年)의 진사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선친 삼 형제가 과거로 말미암아 현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또 내 자식 삼 형제가 모두 요행히 말석의 과거에 편입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준 것이다. 내 족조(族祖) 문성공(文成公)의 손자 정당공(政堂公)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 어찌 하늘이 우리 안씨만을 후히 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가. 문성공은 충렬왕을 섬기어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였고, 근고에 없는 훌륭한 문장을 지니셨는데도 오히려 3대를 지나서 그 손자가 과거에 올랐으니 그 갚음을 받은 것이 더디었다 하겠다. 하지만 내 선친이 비록 덕을 쌓고 의(義)를 행했다고 하지만 내가 계승한 것이 없는데, 내 자식이 과거에 오른 것이 이와 같이 빠르니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착한 자를 복되게 하고 음란한 자에 화를 내리어 그 실상이 없고서 그 이름을 얻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내 조고의 덕행이 위로 천심(天心)을 감동시켜 자손에 혜택을 내린 것이니, 어찌 성시(聲詩)로 전파하여 후학의 권장이 되게 할 만하지 않은가.” 하였다. 그러나 오래 두고 내 글을 청하지 아니하였었다.
하루는 그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기 때문에 국가가 우리 모친에게 녹을 주고 또 택주(宅主)로 봉하여 영광을 입혔으니, 이러고도 시로 노래하지 아니하면 이는 태만한 일이며 또 자식의 도리는 오직 부모를 현양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선생의 문자를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광종(光宗)이 과거를 창설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파한 적이 없었으니, 부자나 형제가 내리 과거에 오른 자가 어찌 적겠는가. 나는 병이 들어서 넓게 상고를 못했으니, 그대는 옛 늙은이에게 물어보고 사가(史家)에게 구득해서 기록해 오라. 나는 장차 그대를 위하여 서를 하겠다.” 하였다.
그후 며칠이 못 되어서 안씨가 또 와서 말하기를, “나는 감히 멀리 옛일까지는 상고하지 못 하고, 우선 충렬왕으로부터 상당(上黨 청주〈淸州〉) 한 중찬공(韓中贊公) 이하 열여섯 집을 구였다. 비록 많은들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선생은 가르쳐주소서.” 하므로, 나는 이르기를, “재상 김근(金覲)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부일(富佾)ㆍ부식(富軾)ㆍ부의(富儀)가 바로 그 사람들이요, 평장(平章) 민공(閔公) 규(珪)의 아들 오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강균(康鈞)ㆍ적균(迪鈞)ㆍ광균(光鈞)ㆍ인균(仁鈞)ㆍ양균(良鈞)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평장(平章) 임유(任儒)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경숙(景肅)ㆍ경겸(景謙)ㆍ경순(景純)이 바로 그 사람들이요, 증복야(贈僕射) 이격(李?)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진(? 없어졌음)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검교정승(檢校政丞) 김태현(金台鉉)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는데, 광철(光轍)ㆍ광재(光載)ㆍ광뢰(光輅)가 바로 그 사람들이요 그 나머지는 다 상고할 수 없다. 그대가 알아낸 것은 청주 한씨에 사기(謝奇)ㆍ사겸(謝謙)ㆍ보(譜) 삼 형제와, 함양(咸陽) 박씨(朴氏)에 장(莊)ㆍ가(理)ㆍ계원(季元) 3형제와 진양 박씨에 인간(仁幹)ㆍ인지(仁祉)ㆍ인우(仁祐) 삼 형제와, 죽주(竹州) 박씨에 문화(文華)ㆍ효수(孝修)ㆍ송생(松生) 삼 형제와 화평(化平) 노씨(盧氏)에 승관(承?)ㆍ승조(承肇)ㆍ승신(承愼) 삼 형제로 지금 세상에서 모두 아는 바이다. 김해 김씨에 동양(東陽)ㆍ광윤(光潤)ㆍ광원(廣元) 삼 형제와, 밀양 박씨에 밀양(密陽)ㆍ대양(大陽)ㆍ삼양(三陽)ㆍ계양(季陽) 사 형제와 곡성(曲城) 염씨(廉氏)에 국보(國寶)ㆍ흥방(興邦)ㆍ정수(廷秀) 삼 형제와, 창녕 성씨(成氏)에 석린(石璘)ㆍ석용(石瑢)ㆍ석인(石?) 삼 형제와 흥안 배씨에 중보(中甫)ㆍ중성(中誠)ㆍ중유(中有)ㆍ중륜(中倫) 사 형제와, 전주 유씨(柳氏)에 극강(克綱)ㆍ극서(克恕)ㆍ극제(克齊) 삼 형제와, 단산(丹山) 우씨(禹氏)에 홍수(洪壽)ㆍ홍강(洪康)ㆍ홍득(洪得) 삼 형제와 또 동복 형제ㆍ월성 이씨ㆍ양천 허씨ㆍ회골(回?) 설씨(?氏)가 있다.” 하였다.
아, 이는 족히 국가가 아름다운 풍속을 배양하였다는 것을 엿볼수 있으며, 삼한(三韓) 인물의 번성한 것이 비록 다 과거에 있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과거가 번성함으로 말미암아 한 나라 정치의 기상이 더욱 뚜렷이 나타나서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이 우하(虞夏) 시대에 있었다고 하나 역사가 전하지 아니하여 상고할 수 없고, 주 나라가 은 태사(殷太師) 기자를 봉하게 되어서는 중국과 상통이 있었다는 것을 대개 알 수 있다. 또 비록 봉했지만 또 신하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도가 있는 우범(禹範)을 받은 것을 중히 여긴 때문이다. 태사의 사당이 평양부에 있어 국가에서 제사하기를 더욱 삼가고 있으니 태사가 우리 동인을 감화시킨 것이 매우 깊었다. 어찌 쌍기(雙冀)ㆍ왕융(王融)의 천박한 무리가 우리 문풍(文風)의 시작이 된 것에 비하랴. 비록 그러하나 쌍씨ㆍ왕씨가 후생을 유액(誘掖)한 바가 또한 지극하다 하겠다. 그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일시에 경동하여 어리석은 남녀들로 하여금 모두 과거란 아름다운 것으로 흠모하게 하여 그 자제들에게 기필코 얻도록 힘쓰게 한 것은 반드시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럼으로써 훈도되고 젖어 들어 집집마다 글을 읽어서 과거를 취득하되 삼 형제 오 형제가 함께 오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쌍씨ㆍ왕씨의 공이 크다 하겠다. 지금 장차 안씨를 가영(歌詠)하면서 쌍씨ㆍ왕씨에 미치는 것은 대개 음식할 때에 반드시 처음 만든 자를 제사하는 법에서다. 아, 사람이 뜻을 얻으면 그 본을 잊는다는 것은 또한 무슨 심리일까.
근재(謹齋) 선생의 이름은 축(軸)이요, 자는 당지(當之)요, 정당(政堂)공의 이름은 보(輔)요, 자는 원지(員之)요, 밀직(密直)공의 이름은 집(輯)이요, 자는(없어졌음), 첨서(簽書)공의 아들은 장자는 중온(仲溫)이니 군부 판서(軍簿判書)요, 다음은 경량(景良)이니 좌헌납(左獻納)이요, 다음은 경공(景恭)이니 전리 좌항이요, 막내는 경검(景儉)이니 과거 보는 공부를 익히고 있다고 한다. 창룡(蒼龍) 무오 4월 일.

 

 

동문선 제87권   
 
 
 서(序)
 
 
증 휴상인 서(贈休上人序)
 

이색(李穡)

내 나이 16ㆍ7세에 뭇 선비들과 노닐며 연구(聯句)를 짓고 술을 마시곤 하였다. 지금 천태판사(天台判事) 나진자(懶眞子)가 우리들을 사랑하여 불러 함께 시를 읊조리며 해가 부족하면 밤까지 계속하고 술이 얼근하면 고담(高談)과 희학(戱謔)을 하였다. 오(吳) 선생이란 분이 왕왕 와서 모임에 참여하였는데, 얼굴이 청수하고 말도 잘하였다. 휴상인(休上人)은 그 아들이다.
선생이 휴상인에게 명하여 나진자(懶眞子)에게 배우게 하였는데, 휴상인은 《논어(論語)》ㆍ《맹자(孟子)》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곧 떠나서 삼각산으로 들어갔다. 다음해 갑신 정월에 나진자가 또 우리 무리 2ㆍ3명과 더불어 삼각산에서 놀았는데, 휴상인이 동도주(東道主) 가 되었었다. 휴상인은 나이가 나보다 두어 살이 위며 사이가 매우 좋았었는데, 그뒤부터 서로 만날 기회가 매우 적었고, 아주 보지 못한 적이 오래였다. 그때 함께 노닐던 사람 중에 정랑(正郞) 홍의원(洪義元), 진사(進士) 오동(吳同), 내시(內侍) 김정신(金鼎臣)은 다 고인이 되었고, 단지 지금 광양군(光陽君) 이공(李公)이 나와 함께 조정에 있을 뿐이며, 중랑(中郞) 김군필(金君弼), 정랑(正郞) 한득광(韓得光)은 다 시골에 있다.
그런데 어찌 휴상인이 내 집에 찾아오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휴상인이 올 적에, 나진자가 시자(侍者)를 보내면서 편지를 갖추어 휴상인의 일을 매우 자상히 말하였는데, 내가 잊었을까 걱정하여 그런 것같다. 그 편지를 읽고 그 얼굴을 대하니 어렴풋이 전일에 본 기억이 난다. 휴상인이 사중은(四重恩)을 갚아야겠다는 생각 아래 몸과 마음을 수련한 것은 스스로 그 도가 있으려니와, 또 부처의 형상과 부처의 언어가 다 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더욱 긴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자인 도우(道于)ㆍ달원(達元)이란 자로 하여금 종이와 먹을 구걸하여,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을 주해가 있는 것으로 각각 한 질씩 인출(印出)하도록 하였다. 또 설법해서 얻은 시주로 서방미타(西方彌陀) 여덟 보살을 그려 장명등(長明燈)에 두고, 그 나머지를 미루어주어 경을 인출하는 비용에 보태었다. 또 말하기를, “법보(法寶)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내 나이 60에 가까우니 봉지(奉持)하는 것이 혹시 태만하면, 다른 변이 없으리라고 보증할 수 없으므로 장차 대산(臺山)에 두고 뒷사람으로 하여금 지켜 나가게 하려는 것이니, 원하건대 선생은 그 사실을 기록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불교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배우지 않았으므로, 인과(因果)와 진수(進修)의 두 이야기는 모두 모르는 바이니, 어찌 감히 언급하리오만 휴상인의 말이, “위로 사중은(四重恩)을 갚겠다.” 하니, 우리 유도(儒道)와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풍속이 무너져서 부자(父子)가 서로 등지고 형제가 서로 싸우며, 역적이 계속해 일어나고 완악한 백성이 자주 난리를 꾸미는데, 천륜을 무시하는 부도(浮屠)가 도리어 이와 같이 중한 은혜를 갚을 줄 아니, 어찌 기뻐서 뛰고 싶지 않겠는가. 또 하물며 휴상인과 같은 옛 친구임에랴. 또 더구나 나진자의 청으로 먼저 하는 데는 어찌하랴. 이에 즐거이 이 글을 만드는 것이다.


[주D-001]동도주(東道主) : 동도(東道)는 동도주(東道主)의 준말인데 흔히 그 지방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됨.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 사신(使臣) 촉지무(燭之武)가 진백(秦伯)을 보고 한 말임. 《좌전(左傳)》

 


동문선 제87권   
 
 
 서(序)
 
 
증 송자교 서(贈宋子郊序)
 

최소재(崔疏齋)가 와서 말하기를, “표(彪)가 염동정(廉東亭)과 함께 성산(星山) 송 영공(宋令公) 문하의 출신이었는데, 지금 그 손자 자교(子郊)가 또 동정(東亭)에게 뽑히게 되어 장차 성산에 돌아가서 그 조부를 뵈오려 하므로, 우리들이 그 떠남을 전송하게 되자 동정도 또한 감히 자중하지 못하고 나와서 모임에 참여하였다. 당연히 글을 써서 증별(贈別)해야겠는데, 시나 문에 우리가 능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 요량해도 족히 우리 은문(恩門)을 감동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선생은 비록 후진이나 함께 용두회(龍頭會)에 있으니, 자교(子郊)를 보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 비할 바 아니므로 행여 한 마디 말로 빛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나는 늙고 또 병들어 건망증이 이미 심하다. 그러나 우리 좌주(座主) 익재(益齋) 시중(侍中)의 손자 이 정당(李政堂)이 자기 조부의 문생 안(安) 정당 문하의 출신이고, 근재(謹齋) 안 문정공(安文貞公)의 손자 정랑(正郞) 경공(景恭)이 자기 조부의 문생 홍 찬성(洪?成) 문하의 출신이며, 내 아들 종학(種學)이 선친 가정공(稼亭公)의 문생인 한청성(韓淸城)의 문생이 되었는데, 지금 자교가 동정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은문(恩門) 문생이 당(唐)에서 한창 성했고, 송(宋)의 말세에는 액을 당하였다. 그러나 문장의 혈맥이 천지와 더불어 함께 흐르니 어찌 세교(世敎)의 높고 낮음과 시대의 경히 여기고 중히 여김이 그 사이를 틈나게 할 것인가.
중원이 사고가 많은 이래로 우리 동방은 선비를 존중하고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태평한 세상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그들도 주문(主文)의 영화와 급제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감탄하지 않는 자 없으며 도저히 미칠 수 없다고 여겼으니, 아, 국가 풍화의 융성함과 인심의 정대함이 과거에 비교하여 줄어들지 아니하였다. 나는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외람되게 봉군(封君)의 열에 있고 겸하여 사한(史翰)을 영솔하였으니, 인재를 격려하고 왕화를 넓히어 오늘 쓰고 뒷날에 물려주게 함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다.
소재(疏齋)의 청은 진실로 감히 어기지 못하거니와, 동정(東亭)의 아름다움도 또한 마땅히 기록해야 할 것이며, 송씨 자손도 또한 마땅히 기록해야 하므로 비졸(鄙拙)함도 잊고 글을 써서 떠나는 길을 전송하며, 또 이르기를, “동정의 영친(榮親) 잔치에 그대의 조부가 오지 않으면 섭섭할 것이니, 서늘한 가을에 수레를 편안히 하여 그대가 모시고 오면, 나도 또한 다시 회의 말석에 참여하게 될 것이니, 유독 동정의 영광만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십운시 서(十韻詩序)
 

백자(百字)로 과거를 보는 것은 어디서 기인되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국가가 문치를 일으키고 교양하는 방법도 따라서 여러 가지였다. 간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끌어들이고 화려한 은총으로 격려시키는 것은 몽매한 자를 깨우쳐서 유익됨을 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 선왕이 인재를 기르는 거룩한 마음이 어찌 그리 원대하였던가. 근세에 백자과(百字科)로 진출한 자가 많은데, 열헌(悅軒) 조(趙) 선생이 그 중에서 더욱 우뚝한 이였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신사년 과거에 내 나이 14세로 역시 이 과거를 거쳐서 송정(松亭)의 문생이 되었다. 평생에 비록 칭도할 만한 것은 없지만 육운(六韻)ㆍ팔각(八脚)에 비하면 역시 하늘과 땅처럼 간격이 나지 않고, 그 국가의 과거를 마련하여 선비를 뽑는 뜻에 있어서도 역시 과히 틀리는 정도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구씨(舅氏) 김유양(金有暘)이 이 과거로 유사에게 시험을 보기로 하여 구본(舊本)을 구하므로 곧 흥국사(興國寺) 법천방장(法泉方丈)에서 일찍이 그 집서(集書)를 얻어본 것을 기억하여, 명하여 책을 가져다 옮겨 쓰도록 하고, 그 머리에 이 글을 써서 뒷사람으로 하여금 상고함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양광도 안렴사 안시어시 서(送楊廣道按廉使安侍御詩序)
 

순흥 안씨가 대대로 죽계(竹溪)에서 살고 있었다. 죽계는 그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왔으므로, 산도 크고 물도 멀어 안씨의 흥왕(興旺)이 아마 한이 없을 모양이다. 근재(謹齋) 선생이 대정(大定) 갑자년에 천자의 조정에서 응시(應試)하여 드디어 이름을 크게 떨치고, 돌아와서 본국에 벼슬하여 지위가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도덕이 한때 걸출하였다. 그 벼슬에 있으면서 일에 임하면 닥치는 곳마다 공을 이루었고, 충의의 대절(大節)에 이르러서는 무너진 풍속을 격려하고 쇠퇴한 세상을 진작하며,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완악한 자를 청렴하게 한 것이 많아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선생의 막내아들 사청(嗣淸)도 역시 문학으로 진출하였는데, 나와 동년이다. 조정에 서면 상서로운 기린과 위엄 있는 봉황과 같고, 외국에 사신 가면 장성(長城)과 적국(敵國)과도 같아서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하지만 온자한 품은 오히려 나았다.
나의 선친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이 근재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었고, 또 그 아우 정당공(政堂公)과 함께 동년이었는데, 내가 또 사청(嗣淸)과 더불어 함께 신사년에 진사가 되었으니, 안씨와 이씨는 세교(世交)를 맺게 되었다. 그렇다면 증언(贈言)할 바에야 정(情)으로 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사청(嗣淸)이 시어사(侍御史)로서 외직에 나가 양광(楊廣)을 안찰하게 되니, 동년의 진사들이 서로 작별을 나누며 술이 오가자 나는 곧 말하기를, “이미 세교(世交)를 맺게 되었고 공이 또 말을 청하는데 어찌 침묵할 수만 있으랴. 그러나 사청이 학업이 있고, 절조가 있어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맡은 바의 직무를 충실히 함으로써 성명(聲名)이 몹시 높아지고 있으니 경계한다면 망령이요, 칭찬한다면 아첨이다. 그러나 안회(顔回)와 자로(子路)는 어떠한 인물인가. 그분들은 친히 성인을 모시어 아침저녁으로 성인의 훈계를 들었으니, 조존(操存)ㆍ성찰(省察)의 공부에 있어서는 진실로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순순히 증언(贈言)하였으니, 더구나 우리들이랴. 사청이 내외직을 계속 역임하여 비록 현달하였지만, 그 묵은 세덕(世德)과 부지런한 행동으로 공명과 사업이 물밀듯이 날로 나아가서 끝이 보이지 않으며, 더구나 그 장점을 유세하여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 않은 것은 그의 특징이다. 그러나 도덕이 몸에 배고 정사가 효과를 거두는 것이 또 오늘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진보할 여지가 아직도 많이 있을 것이니, 사청은 더욱 힘쓸지어다. 그렇다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그 뜻을 견지하여 처음대로 변함이 없으면 되는 것이다.” 뭇 사람들이 “그렇다.” 하므로 드디어 써서 서문을 하는 것이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은계 임상인 서(送隱溪林上人序)
 

7월 21일에 나는 더위에 지쳐서 옷을 풀고 망건을 벗고 손님을 사절하였으므로 문정(門庭)이 적적하였는데, 수풀 임자 이름을 가진 임상인(林上人)이 찾아왔다. 그는 곧 시내 계(溪) 자로 별호를 한 은계(隱溪)였다. 그래서 상쾌하고도 맑으므로 뛸 듯이 기뻐했다. 수풀이라면 푸른 솔인가, 푸른 대인가. 시내라면 내리쏟는 샘물인가, 바위 밑에 깊게 고인 못물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해온 것이 오래였는데, 하루아침에 내 집 문안에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나는 피곤해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면대할 수 없으니, 이는, “지척간에 응당 만리를 논해야 하리[咫尺應須論萬里].”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리오. 자못 하늘이 나에게 맑은 일을 주기를 아끼는 모양인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가장 균평하여 일찍이 푼(分)ㆍ촌(寸)이나, 수(銖)ㆍ양(兩)의 사이에도 사정을 두지 않은 동시에 청(淸)ㆍ탁(濁)이나, 후(厚)ㆍ박(薄)이 서로 빼앗아가지 못하고 한(閑)ㆍ망(忙)이나, 정(靜)ㆍ조(躁)가 서로 용납되지 못하니,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그것도 또한 감히 조금도 푼ㆍ촌이나 수ㆍ양의 사이를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거처하는 곳은 도회지요, 노니는 곳은 공(公)ㆍ경(卿)의 저택이요, 더불어 읊고 노래하는 자는 모두 큰 창옷 입고 넓은 띠를 띤 무리들이니, 상인(上人)같은 임천(林泉)의 선비와 더불어 서로 면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역시 천리(天理)이니, 의당 순히 받을 따름이다. 무엇을 한하랴.
바야흐로 순히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술하려 하는데, 더위가 더욱 심하여 곧 걷어 치우고 쓰지 않으니 뒷날을 약속하고 다시 오면 마땅히 상인을 위하여 나의 설명을 끝마치겠다.


[주D-001]지척간에 …… 하리[咫尺應須論萬里] : 두보의 시 〈희제왕재화산수가(?題王宰?山水歌)〉에 보인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율정 선생 일고 서(栗亭先生逸藁序)
 

문장은 밖에 있는 것이지만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마음이 발하는 것은 시대성과 관계가 있으므로 시를 외는 자가 능히 풍아(風雅)의 정(正)과 변(變)에 느낌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말세의 장구(章句)가 날로 비속한 곳으로 달려가니 정음(正音)이 다시 흥기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다행히 외로운 봉황새가 참새떼 속에서 우는 수도 있지만, 또 그 울음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가버리고, 가는 것이 더욱 멀어질수록 남은 소리는 들을 수 없으니, 아, 슬픈 일이다.
율정(栗亭) 선생은 웅위(雄偉)한 자품으로 《춘추(春秋)》를 통하고 《문선(文選)》을 전공하여 문장이 그 속에서 나왔다. 그래서 선생의 좌주(座主) 익재(益齋) 선생이 매양, “공의 글에는 고아한 기운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 기록된 것이 이에서 그친 것은 웬일일까. 공이 금강(錦江)에 노퇴하여 일찍이 화재를 만나 가옥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문서도 따라서 다 없어지고, 오직 손자 소종(紹宗)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두었던 것이 남았을 따름이다.
선생의 사위는 기거랑(起居郞) 허식(許湜)인데, 글월을 잘하고, 그 아들 조(操)는 군부 총랑(軍簿摠郞) 지제교(知製敎)로 지금 전라 안렴사(全羅按廉使)가 되었다. 이 문집을 발간할 양으로 나에게 서문을 하라 하니, 내가 젊었을 때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고, 기거공(起居公)이 또 나를 격몽(擊蒙)하였으며 소종이 나의 문생이 되었으니, 모든 의로 보아 사양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곧 이와 같이 쓴다. 선생의 출처에 관한 대절은 국사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시 중언하지 않는 바이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증 원상인 서(贈元上人序)
 

상인은 내가 양주(楊州) 배[舟] 위에서 만나보았는데, 생김새가 수결(修潔)하여 도인의 기풍이 있으므로 마음속으로 기뻐서 오래 전부터 사귄 것같았다. 뱃길이 좁고 막혀서 혹 밀면 움직이고, 혹 당겨서 앞으로 나가게 하려면 노고가 심할 것같은데도, 난색을 보이는 일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억지로 하는 짓이라 여겼더니, 며칠이 지나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그 사람이 대개 지취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여일(餘日)에 아직 힘이 여유가 있어 서늘한 기운을 따라 강으로 가니 또 배를 끌고 물속으로 달려서 옷이 젖어 몸에 붙으니, 좌우가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으나 상인은 태연하였다. 유독 지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 형해(形骸)를 잊어버린 자이다.
무릇 도에 들어간 자는 마치 멍에를 벗은 말이 횡으로 달려 방향이 없는 것과 같으므로 곧장 물욕의 제압을 받지 않은 연후라야 앉아도 내가 앉고 행해도 내가 행하며, 당당히 자신을 높여서 비로소 단독으로 운행할 수 있는 것이니, 상인은 아마도 이에 가까운 모양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방으로 유람하게 되는데, 선생은 내게 한 마디 증언(贈言)이 없을것인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상인이 구하는 바는 내가 배운 것이 아니요, 나의 배운 것은 상인이 구하는 바가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 그러나 옛 사람은 반면(半面)의 사귐도 있었는데, 하물며 □ 배를 함께 탄 두터운 정의로서 말이 없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사양하지 아니하고 대략 써서 증정하는 바다.
상인의 이름은 경원(景元)인데 《화엄경(華嚴經)》을 전수하기 위하여 지금 남종(南宗)의 무리 운수승(雲水僧)에게 가는 길이니, 나는 그가 족히 초혜전(草鞋錢)을 보상할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선상인 서(送詵上人序)
 

내가 듣건대, “부도(浮屠)씨가 같은 뽕나무 아래에서 세 번 자지 않는다.” 하니, 유람다니는 것은 진실로 그들의 일이다. 그러나 때는 평온하며 어지러운 것이 있고, 길은 통하고 막힌 것이 있으니 함부로 깜깜한 속으로 내닫고 위험한 데를 저촉할 수 없으므로, 종신토록 뜻을 이루지 못하는 자가 어찌 적다 하랴. 다행히 동궤(同軌)ㆍ동문(同文)의 시대를 만나서 월(越) 나라로 가고 연(燕) 나라 가기를 마치 당(堂)에서 뜰에 가듯이 하며, 배타고 물을 건너고 신을 끌고 산을 올라 풍찬노숙(風餐露宿)하기를 방안에 있는 것같이 여기게 된다면 즐거운 일이 아니랴. 심상(尋常)의 작은 사이라도 개구리는 능히 건너뛰지 못하는데, 9만 리라도 대붕새는 구름 타고 날아가니, 그 기상을 가히 알 수 있다. 하물며 스승을 찾아 도를 물어서 밥을 대해도 밥을 잊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잊어버리며 기필코 저 언덕에 도달하려 하는 자에 있어서랴.
선상인(詵上人)은 내가 두 번째 여강(驪江)에서 만났는데, 대개 벼슬하는 집안이다. 글을 읽어 문장을 본업으로 하다가 나이 21세에 고향의 승려를 따라 금강산을 구경가는데, 도중에서 뇌옹(瀨翁)이 대산(臺山)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산구경도 소원이기는 하지만 출가(出家)하는 것이 더욱 더 어렵고 뇌옹을 만나는 것이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나는 장차 뇌옹을 따라 출가한 다음에 산을 구경하겠다.” 하고, 드디어 대산에 들어가 뇌옹을 보고 간청하니, 뇌옹이 그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부모가 그 소문을 듣고 처음에는 슬퍼하다가 나중에는 마음이 풀리어, 종적을 찾아서 금강산에 당도하여 만나보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승과(僧科)를 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상인은 말하기를, “승과를 볼진대 차라리 사과(士科)를 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출가한 것은 도를 배우자는 것인데 도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하늘이니 내 뜻이 변경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그 아버지는 턱을 끄덕이며 흐느껴 울며 돌아갔다.
상인은 이로부터 학문이 더욱 깊어지고 명성이 더욱 떨치어, 동배들이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고, 또 장차 온 천하를 구경하려 드니 그 뜻이 장하다. 그가 내 말을 듣기를 매우 간절히 청하였으나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도가 같지 아니하면 서로 의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째가 되면 서로 두터워지는 것이 인정이니, 작별을 고하는 마당에 어찌 말이 없을 수 있으랴.
곧 말하기를, “그 나아가는 것이 날래면 그 물러가는 것도 빠른 법이니, 상인은 경계할지어다. 백리를 가는 자는 90리가 절반이니, 상인은 힘쓸지어다. 처음에 부지런하다가 나중에 게으른 것은 유가(儒家)나 불가(佛家)가 다같이 근심하는 바이니, 나도 상인과 더불어 경계하고 힘써야 하겠다. 만약 그 도에 있어서 상인이 돌아가서 구하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자상인 서(送玆上人序)
 

환암(幻庵)의 제자 가운데 자제(子弟)의 수재들이 있으니, 바로 허(許)씨와 기(奇)씨다. 모두 소년으로 집안의 화를 만나 벗어던지고 세상을 떠났으니, 대개 얻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기씨의 이름은 상자(尙玆)인데 사방에 뜻이 있어, 장차 노래를 사인(詞人)이나 시승(詩僧)들 사이에서 얻을 양으로 나 색(穡)에게 서문을 청하므로, 색(穡)은 환암과의 관계로 사양하지 않았다.
무릇 사방이란 말은 동서남북을 두고 이른 것이다. 우리 삼한은 천하의 동쪽에 있는데, 삼한의 동쪽은 일본(日本)이라, 긴 고래[鯨]와 큰 물결 속에 적선(賊船)의 화가 서로 잇대고, 북쪽은 여진(女眞)과 접해 있어 나는 모래와 쌓인 눈속에 우탈(區脫)의 경계가 계속 이어진다. 서남쪽의 중원(中原) 지방은 바깥문도 닫지 아니하고 길가에 물건이 있어도 주워가지 아니한다. 그런데도 사명(使命)이 아직 통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짚신과 대지팡이로 감히 그 어느 지경을 밟으려는가. 상인이 이른바 사방이란 말은 천하의 사방이 아니라 대개 삼한의 사방인 것임을 알겠다.
비록 그렇지만 세계도 무궁하거니와 내 마음도 또한 무궁하다. 부처가 보리(菩提)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제천(諸天)에 두루 노니는 것이, 마치 달이 하늘에 있어도 일천 강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데, 내 마음은 부처에서 나왔으나 내 몸은 이곳에 매였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디든지 못 가는 곳이 없으니, 어찌 달에 양보하랴. 상인도 정녕 이와 같을 것이므로 나는 이에 노래로 잇는다. “사람에게 육신이 있음은 말이 구유에 매인 것과 같은데, 마음이란 두루 두루 팔방을 달리도다. 무릇 길이라 이를진대 통하고 막힌 것이 있나니, 분간 없이 쫓아가면 흔히 실덕(失德)이 되느니라. 젊어서 도(道)를 향하는 건 함축(?蓄) 밖에 또 있으리. 네 마음을 편안히 하여 나의 권면을 잊지 말지어다.”


[주D-001]우탈(區脫) : 흉노족이 그들의 경계에 만들어 놓은 척후용의 초소.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절전상인 서(送絶傳上人序)
 

도가 천지의 사이에 있어 유명(幽明)을 꿰뚫고 크고 작은 것을 포함하여 어느 물(物)에나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때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체(體)와 용(用)이 너무도 찬란하지만 사람이 행하는 것은 전하고 전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유독 우리 유자(儒者)의 일만이 아니라 달마(達磨)학자도 거의 이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 의발(衣鉢)의 표신은 6대에 이르러서 그치게 되었으나 그 법은 불계에 두루 행한다. 내가 들으니 여러 선(禪)학자도 이와 같다고 한다.
소(紹)상인이란 자는 호는 절전(絶傳)인데, 장차 방외(方外)에 노닐 양으로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그의 무리가 아니나 기어코 내게 와서 청하는 그 뜻을 헛되게 할 수 없으므로 대략 말을 한다. “우리 동방의 운석(韻釋)이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이어받은 자가 대대로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전등록(傳燈錄)》을 읽고 《조파도(祖派圖)》를 뒤져보면 족히 볼 수 있다. 지금 상인이 이을 소[紹] 자로 이름한 것을 보면, 부처의 혜명(慧命)을 이어보겠다는 것인데, 절전(絶傳)이라 한 것은 그 본의가 아니요, 그 의미를 거꾸로 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일 뿐이다. 천하가 크고 선지식(善知識)을 가진 자도 역시 매우 많을 것이니, 법을 얻고 돌아온다면 헛걸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상인은 아무쪼록 힘쓸 지어다.”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월창 서(送月?序)
 

목은자(牧隱子)가 여강(驪江) 신륵사(神勒寺)에서 피서하고 있는데, 키가 크고 낯이 검은 어떤 중이 있어 내가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말을 건넸으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심으로 이상히 여겨 곁에 있는 중에게 물으니,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한다. 나는 의심이 비로소 풀리어 요즘 세상에서 얻어보기 어려운 중이라 여기고 자못 경의를 표했더니 그후부터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소순(蔬筍)의 냄새가 없으므로 어디로부터 왔느냐고 물어보니 대개 일찍이 음률을 잘했고, 그림에 능하였고, 술에는 고래가 냇물을 들이키듯 하고, 바둑에 있어서도 풀밭을 태우는 불길과 같고, 또 창을 쓰는 것은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미칠 수 없는 자였다.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야 대개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선뜻 이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벽을 대면하고 오뚝 앉아서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아니하니, 천도가 두 번째로 조금 변했는지라, 그 기운의 호방함과 그 마음의 굳건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족히 큰 일을 추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 일로 경외(京外)로 가서 시주를 권할 모양이니, 역시 상(上)을 축수하고 생(生)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니, 그 뜻이 또한 크다고 하겠다.
무릇 키가 크고 기운이 호방하며 마음이 굳건하고 뜻이 큰 것은 모두 사람마다 얻기가 어려운 것이며, 겸비한 자는 아주 적다. 다만 월창(月?)이 잘 양성할는지의 여부가 염려될 뿐이다. 월창이여, 아무쪼록 신중하기 바란다. 추국(鄒國)이 말하기를, “술(術)이란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월창이 진실로 능히 아름다운 바탕으로 도의 바른 것을 지킨다면 그 신통(神通)과 묘용(妙用)도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주D-001]소순(蔬筍)의 냄새 : 승려의 시문이나 언사에 나타나는 말투나 특징을 비꼬아 이르는 말.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경상도 안렴 이지평 시 서(送慶尙道按廉李持平詩序)
 

신(神)과 사람의 사이는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신을 섬기는 것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제왕이 한 가지 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구분이 엄격한 한정이 있어 문란해서는 안 된다. 대개 천자라야 천지를 제사하고 제후라야 산천을 제사지내고, 대부(大夫)라야 오사(五祀)를 제사지내는 것이니, 예를 기록한 자가 벌써 말해 둔 것이었다.
국가가 동한(東韓)을 전제(專制)하면서부터 경내 산천으로 무릇 사전(祀典)에 있는 것은, 해마다 두 차례씩 조신(朝臣)을 뽑아서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으니, 그 사신의 이름을 제고(祭告)라 하였다. 또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풍속의 아름답고 악한 것을 관찰하고 공세(貢稅)를 상고하고 제도를 통일시키도록 하였으며 널리 찾아다니며 물어서 상과 벌을 시행하여 상(上)의 물음에 대비하게 하니, 그 사신의 이름을 안렴(按廉)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사명을 겸하고 군ㆍ읍을 안행(按行)하게 되니, 실로 옛날 사방을 순성(巡省)하는 유법인 동시에 임금을 대신하여 행사하기 때문에 그 존귀하고 영화로움이 다른 사신으로는 감히 견줄 수 없다.
이미 존귀하고 영화롭다 이를진대, 그 책임의 중한 것은 또 어떠하랴. 인신(人臣)이 조정에 서게 되면 반열의 높고 낮은 것은 미처 따질 바 아니요, 다만 그 권세가 족히 그 뜻을 행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인재를 평가하여 출척을 시행하는 이부(吏部)와 논사(論思)하여 임금에게 충언을 바치는 관직(館職)과 같은 것은 맑은 자리요, 요긴한 자리요, 화려한 자리요, 임금과 친근한 자리라 할 수는 있지만, 어찌 풍기(風紀)를 맡은 관이 대쪽[簡]을 쥐고 낯빛을 바로하고, 대궐의 뜰에 서서 반드시 말하면 시행되고, 간하면 듣게 하는 자와 같으랴. 한 몸으로 이 두 가지 소임을 겸하는 것은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동년(同年) 완산(完山) 이군이 감찰(監察) 지평(持平)으로부터 명을 받고 나가서 경상도를 안렴하게 되었으니, 이는 이른바 한 몸으로 두 가지 소임을 겸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의 사대부가 시를 지어 그 떠남을 아름답게 하였다. 정언(正言) 곽(郭)군이 와서 나에게 서문을 청하여, “지평의 뜻입니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이군은 독실한 자격으로 정밀하고 민첩한 수완을 써서 내외직을 출입하는 동안에 성적이 매우 좋았으니, 마땅히 대단(臺端)에 있어 다시 도끼를 쥐고 제사를 대행하며 사방을 순하여 혁혁하게 사람의 보고 듣는 것을 경동하게 할 만하며, 그는 능히 신명에게 고하여 반드시 흠향하게 하고, 반드시 이르러 오게 하여 풍우가 제 때를 잃지 않고 모든 복이 다 내리며 백성은 안정하게 살고, 관리는 그 직에 적합하고 훈훈하여 태화(太和)가 되리니, 돌아와서 전리(田里)의 태평가(太平歌)를 올리어 상(上)의 덕을 빛나게 할 것을 기약할 수 있으므로, 드디어 써서 서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급암시집 서(及菴詩集序)
 

육의(六義)가 이미 폐하였고 성률(聲律)ㆍ대우(對偶)가 또 만들어졌으니, 시의 변(變)이 극도에 이르렀다. 고시(古詩)가 변하여 제(齊)ㆍ양(梁)에 와서 섬약해지고, 율시(律詩)가 변하여 만당(晩唐)에 와서 폐쇄되었는데, 유독 두공부(杜工部)가 여러 체를 겸비하여 수시로 내보이자 높은 풍운이 탈속하여 고금을 뒤덮었다. 그 사이에 뛰어나게 절묘하여 유속(流俗)에 빠지지 아니한 이로는 도연명(陶淵明)ㆍ맹호연(孟浩然) 같은 이가 있었으니, 시대마다 어찌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편집(編集)의 전한 것이 드무니 애석한 일이다.
지금 도(陶)ㆍ맹(孟) 두 시집은 겨우 몇 편만 보존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의 탄식이 있게 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그 인물을 천년 아래서도 알게 되며, 노(老)ㆍ두(杜)로 하여금 천지간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를 보면 편집을 전하게 한 그 공이 작다 할 수 있으랴. 또 더구나 당(唐)의 한유(韓愈)와 송(宋)의 증공(曾鞏)ㆍ소식(蘇軾)은, 천하에서 문장에 능하기로 유명한 이들이나 시도(詩道)에는 만족하지 못한 감이 있어 유식자가 한스럽게 여기니, 시의 시 된 것이 또 어찌 공교롭고 졸하며 많고 적은 것으로써 따질 수 있으랴.
내가 이 말을 왼 적이 오래였는데, 급암(及菴) 선생의 시를 읽고 더욱 믿어진다. 선생의 시는 담담한 것같으면서 천박하지 아니하고, 화려한 것같으면서 사치스럽지 아니하여 뜻을 놀린 것이 진실로 심원하니 읽을수록 더욱 맛이 있다. 그 역시 뛰어나게 절묘한 유인가? 그 전해질 것은 기필할 수 있다. 선생의 외손 제민(齊閔)ㆍ제안(齊顔)이 다 문장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지난해 창졸한 걸음에도 유실하지 아니하고 또 와서 서문을 청하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책머리에 쓰기를 이와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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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농상집요 후서(農桑輯要後序)
 

고려의 풍속이 졸박하고 인후하지만 치생(治生)하는 데에 능하지 못하여 농사를 짓는 집안은 한결같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물이 불거나 가뭄이 들어도 곧 재해가 되니,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절약하여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소채(蔬菜)ㆍ건어(乾魚)ㆍ육포(肉脯) 따위에 지나지 아니할 따름이며, 미곡을 중히 여기고 서직(黍稷)을 경솔히 알며 삼모시는 많고, 면사는 적으므로 사람들이 속도 비고 겉도 충실하지 못하여, 바라보면 마치 병들었다 금방 일어난 사람같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 된다. 초상ㆍ제사에 대해서는 소반(素飯)에 고기를 쓰지 아니하며, 연회에는 소와 말을 잡고 야생(野生)의 동물로써 만족을 취한다.
무릇 사람이 이미 이목구비(耳目口鼻)의 형체가 갖추어진 이상, 성색(聲色)과 취미(臭味)의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가볍고 따뜻한 것은 몸에 편리하고 기름지고, 달콤한 것은 입에 적합하며 여유 있기를 원하고, 결핍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오방(五方)의 사람도 그 성품이 똑 같은데, 어찌 유독 고려만이 이와 같이 다르랴. 성하되 사치한 데 이르지 아니하고, 검소하되 누추한 데 이르지 아니하며, 인의(仁義)를 토대로 하여 도수(度數)를 만든 것은 성인이 정해 놓은 제도이며 사람의 일이 아름다워지는 이유이다.
집에서 기르는 다섯 마리 닭과 한 마리 돼지는 사람에게 사육(飼育)만 받으며 아무데도 쓸데없는 것이지만 차마 죽이려 하지 아니하고, 소와 말은 인력을 대신하여 큰 공이 있지만 선뜻 죽이며, 사냥과 놀이의 노고는 혹 사지가 부스러지고 목숨까지 빼앗기게 되는 수도 있지만 용감히 하며, 우리 속에 기른 가축(家畜)을 잡는 데는 용감하지 못하다. 그 경중을 알지 못하고, 의를 해롭히며 법제를 무너뜨려, 그 본심을 상실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또 어찌 백성의 죄만이랴. 나는 그윽이 슬퍼하는 바이다. 대개 백성의 재산을 제한하고, 왕도(王道)를 일으키는 것이 나의 뜻인데도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는 데야 어찌하랴.
봉선대부(奉善大夫) 섬주 지사(陝州知事) 강시(姜蓍)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농상집요(農桑輯要)》는 행촌(杏村) 이시중(李侍中)이 그의 외생(外甥) 판사(判事) 우확(禹確)에게 전수하고, 나 강시 또 우확에게서 얻었는데, 무릇 의식(衣食)과 재정을 충족하게 하는 이유와, 곡식을 심고 짐승을 기르는 갖가지 준비를 하는 것에 대하여, 각각 부문별로 모아서 자세히 나누어 분석하고 촛불로 비치듯이 하였으니, 실로 치생(治生)하는 훌륭한 법이다. 내가 장차 여러 고을에 주고 새겨서 널리 전하게 하려 하는데, 그 글자가 크고 권질이 무거워서 먼 곳에 보내기가 어려울 것을 근심하여, 이미 가는 해서로 써서 등출(謄出)하여 두었고, 안렴(按廉) 김공 주(湊)가 또 베 몇 필로 그 비용을 도와주었다.” 하며, 권말에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 글을 대개 구경하고 맛을 들였다. 나는 우리 습속을 민망히 여기고 깊이 염려하지 아니한 바 없는데, 조정이 선 지가 하루가 아니면서도 한번도 감행할 것을 건의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그러나 비록 강군의 뜻이 나와 같다는 것을 이에서 알 수 있다. 백성의 재산을 제한하고 왕도를 일으키는 것은 그 일이 또 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 강군도 또한 일찍이 강론이 있었는지 모르겠거니와, 만약 기필코 행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단을 물리치는 것부터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습속이 변할 길이 없을 것이니, 이 책에 실린 것도 또한 허문(虛文)이 되고 말 것이다. 강군은 더욱 힘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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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중순당집 서(中順堂集序)
 

시도(詩道)가 관계되는 바는 대단히 중하다. 왕화(王化)와 인심이 이에서 나타나게 된다. 세교(世敎)가 쇠하자 시가 변해서 소(騷)가 되었으며, 한 나라 이래에 오ㆍ칠언(五七言)이 시작됨으로써 시의 변이 극도에 달했다. 비록 고시와 율시가 아울러 나열되고, 공하고 졸한 것이 계통이 다르나 또한 각기 그 성정을 도야하여 그 취지에 적응하였으니, 그 사기(詞氣)를 따져보면 세도가 오르내린 것이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
금남(錦南)의 오수(迂?) 나 판서(羅判書)가 현릉(玄陵)의 지우(知遇)를 얻어, 연구(聯句)의 시를 짓고 3품(品)의 관에 오르니, 나라 안의 사대부가 흠모하고 찬송하여 무릇 90편의 시를 지었는데, 군옥부(群玉府)와 같이 찬란하여 눈을 부시게 한다. 오수는 자청하여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물(物)을 만나 회포가 흥기하면 문득 시로 형용한 것이 52편에 달하였고, 일본의 조계선자(曹溪禪者)로부터 증정받은 것이 또 10편이었다. 사가(史家)가 그 원본을 얻어서 등사해 두었고, 대신(臺臣)이 또 보기를 청하고, 부중(府中)의 진신(搢伸)이 다 얻어 보기를 원하여 다투어 구하기를 적이 지금 30년인데도 오히려 그치지 아니한다.
오수(迂?)는 말하기를, “나의 오(迂)는 세상에서 오활하다는 것인데 관이 육조의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과연 오활한 것인가. 시를 몹시 즐기기에 그 시고[酸] 찬[寒] 맛으로 고량(膏粱)만 먹는 자들에게 기롱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역시 오활할 따름이라 어찌 일에 방해야 되겠는가. 이름이 여러 선비들의 시 가운데 실렸으니, 그 유전될 것을 기필할 수 있어서 퍽이나 다행하다. 그러나 흩어져서 하나도 없으므로 나는 장차 연결하여 총록(叢錄)을 만들 작정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또 유전하기 어려운 것이 염려이기로 목판에 새기어 사람들로 하여금 다 얻어 보게 하여, 금남(錦南)에 오수가 있는 줄을 알게 할 생각이라.” 하고, 이에 나를 찾아와서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천자가 제후의 나라에서 시를 채집하는 것은 다 옛 제도였다. 다른 날에 이 시집을 모두 상관(上官)에게 보내면 오수의 이름이 더욱 전할 것이고, 일본의 시가 오수로 인하여 중국에 전파하게 될 것이니, 유독 오수의 다행만이 아니라 또한 일본의 다행이기도 하다. 하물며 우리 선왕이 선비를 존중한 거룩한 덕이 안팎에 넘실거리는 마당에 있어, 오수의 이 시집이 또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감히 갖추어 써서 편머리에 보태지 아니하랴. 중순당(中順堂)은 오수의 거처하는 집이다. 시는 정리하여 몇 권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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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증 일구 상인 서(贈一?上人序)
 

조계승(曹溪僧)에 종해(宗海)란 이가 있다. 그 이름 지은 이유를 물어보니 대개 불가의 설에 근본하였는데 우연히 하서(夏書)의, “바다에 조종(朝宗)한다.”는 문구와 합치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와서 내게 호를 청할 적에도 이 하서의 문구로써 고하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을 들어 말하는데 대개 거울이 물건을 비출 적에, 똑같은 유(類)로써 응해 주며 사정(私情)을 두지 않는 것에서 비유를 취한 것이라 한다.
바다의 물건된 것이 천지간에 있어 같이 견줄 데가 없다. 그러므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가 땅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물이 싣고[載] 있는 것이다.” 하였다. 무릇 땅이란 것은 하늘과 짝하여 큰 것이 된다. “그럼에도 물이 싣고 있다.” 한다면 물은 하늘과 비하여 또한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은지 알 수 없으니, 그 체된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지금 비가 하늘에서 내려 그 물방울이 서로 부딪치면 거품이 생기게 되니 거품은 물로 치면 가장 작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가장 작은 것으로 가장 큰 것과 짝할 수 있다면 형세가 그러한 것인가? 아니다. 이는 팽조(彭祖 8백 살을 산 고대의 신선)와 상자(?子 어려서 죽은 사람), 붕새와 메추리의 사이처럼 큰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바로 그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바다나 거품이라 하는 것은 이름이 달라졌을 뿐이다. 거품은 그 바다로 돌아가고 바다가 그 거품을 받는 데는 역시 자취가 있느냐 하면 없다. 거품이 사그라들어서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게 되면 유독 이치만 한가지일 뿐 아니라 그 물건의 자체도 역시 다르지 않다. 이로써 불자(佛者)의 설명이, “적(跡)과 상(相)을 없애버리면 공(空)으로 돌아가고, 항렬(行列)을 분포하면 바다로 돌아간다.” 하니, 바다가 비록 크지만 체를 떠나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에, “적멸(寂滅)이라, 또는 생사(生死)라.” 한다. 바다가 적멸에 거품되는 것은 이른바 부처요, 생사에 거품되는 것은 곧 이른바 중생이다.
지금 상인(上人)은 장차 어느 지경의 거품이 되려는가 또한 모르겠다. 생사나 적멸이 과연 둘인가 하나인가. 상인은 그 스승에게 얻은 것으로써 이미 마음속에 흡족하게 여긴다면 혹시 맹랑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마땅히 당세의 큰 선비에게 널리 물으면 반드시 상인에게 알려주는 자 있을 것이다.
상인의 속성(俗姓)은 조(曺)씨니 나주(羅州) 회진현(會津縣) 사람이다. 선(選)에 들어 그 과거에 올라 죽원(竹院)에서 학자를 가르치는데 나이는 31세요, 대선사 총(聰) 남산(南山)의 제자이다. 사람을 논하면 반드시 그가 배운 바를 말하는 것이므로 아울러 언급해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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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이색
 
 
증 환옹 상인 서(贈幻翁上人序)
 

탄여(坦如)라는 중이 내 집에 찾아와서 청하기를, “나는 조계종(曹溪宗)이요, 지금 정사년은 대선(大選)의 해요, 속성(俗姓)은 영일(迎日) 정(鄭)가요, 연복사(演福寺) 주지 대선사 죽암(竹菴) 진공(軫公)은 나의 스승이다. 내 나이 27세인데도 별호가 없어서 동년배들이 무어라 부르기 어려우므로 우리 스승의 말씀이, ‘환옹(幻翁)이라 하라.’ 하였다. 그 출처를 물으니, 《원각경(園覺經)》 보현장(普賢章)에 있는 말이었다. 그 설명을 청하였더니 선사가 이내 말씀하기를, ‘여(如)야, 네 이름 탄여(坦如)는 무슨 뜻인가. 평탄하여 중심에 일정한 주장이 없고 밖으로도 기대는 데가 없으며 종용하게 스스로 얻는 것을 이름이니, 이는 반드시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결론이다. 비록 그렇지만 너는 또 세계를 보아라. 환(幻)이 아니냐.’ ‘예 환입니다.’ ‘몸과 마음도 환이 아니냐.’ ‘예 환입니다.’ ‘삼세(三世) 교주(敎主)와 제방(諸方) 조사(祖師)도 환이 아니냐.’ ‘예 환입니다.’ ‘내가 말하고 네가 듣는 것도 환이 아니냐.’ ‘예 환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들으니, 한산(韓山) 목은자(牧隱者)가 방금 환어(幻語)로써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네가 가서 청하면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것이라.’ 하므로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라고 한다.
나는 이르기를, “사(師)의 스승은 양반집 후예로서 고량(膏粱)과 기환(綺紈)으로 그 육신을 기르고, 시서와 예악으로 그 성정을 닦았는데, 초연히 홀로 벗어나 돌아보지 아니하니 진실로 여(如)와 환(幻)의 취미를 얻었다 하겠다. 비록 그러하나 나는 배우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하고 이에 상인에게서 그 설을 궁구하였다. 상인은 말하기를, “지금의 세계는 기(器)의 세간(世間)이요, 중생은 곧 정(情)의 세간이요, 부처는 곧 정지각(正知覺)의 세간이다. 이 세 가지가 서로 융화하여 막힘이 없는 고로 여여(如如)의 지혜가 항상 홀로 비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라 하는 것은 모두 환을 쓰고 사는 것이 된다. 여(如)가 아니면 환을 구할 수가 없고 환이 아니면 여(如)를 구할 수 없으니, 어찌 사리(事理)가 혹시라도 서로 빼앗기는 일이 있으랴.” 하므로, 나는 이르기를, “상인은 진실로 원기(園機)의 선비라 하겠다. 내가 그 말을 관찰하니 하나는 여(如)가 바로 환이란 말이요, 또 하나는 장차 여(如)가 환이라는 말이다. 처음에 환(幻)으로 보면 물이 있고 내가 있으니 이는 대(對)가 있는 것이요, 마침내는 여(如)가 장차 환인데 물(物)도 없고 나[我]도 없으니 이는 대가 없는 것이다. 물과 나를 모두 잊어버리고 마음과 자취가 둘이 없다. 이것이 그 지극한 것이다. 다른 날에 환옹이 편안히 앉아 바로 생각하여 만약 그 설에 대한 소득이 있으면 오늘의 말이 옳고 그른 것을 나에게 알려 달라. 나는 마땅히 허심탄회하게 듣겠다.”고 하였다.
여(如)는 또 묻기를, “우리 스승께서 선생이 방금 환어(幻語)로 사람에게 말한다 하였으니, 말의 환이 되는 것을 들려줄 수 있느냐.”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성음(聲音)이 나올 적에는 목구멍ㆍ혀ㆍ입술ㆍ가[齒]가 서로 어울려서 소리가 이뤄지는 것이며 그 글을 옮길 적에도 붓ㆍ먹ㆍ종이ㆍ벼루ㆍ물이 서로 어울려서 형체가 이뤄지는 것이다. 하물며 전주(轉注)ㆍ가차(假借)ㆍ형성(形聲)ㆍ사의(事意)의 사이에 그 변하는 것이 사람을 번갈라서 헤어도 자세히 할 틈이 없음에랴. 그러나 나아가서 분석해 보면 소리가 과연 어디에 있다 하랴. 글월이 과연 어디서 왔다 하랴. 이것이 환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였다.
여(如)는 머리를 조아리며 하는 말이. “우리 스승이 참으로 선생을 알았다 하겠다. 우리 스승이 이른바, ‘환이 아니냐.’에 대해서는 선생이 반드시 알 것이니, 여(如)는 배우기를 원하는 바라.”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여흥 신륵사 선각진당시 병서(麗興神勒寺禪覺眞堂詩幷序)
 

지선(志先)이란 중은 나와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국신리(國?里)의 노구(老?)를 끌고 왔다. 그가 하는 말이, “우리 스승 각선(覺先)의 탑에 선생이 이미 명(銘)을 지어주셨으니, 지선(志先) 등이 진실로 이 망극한 은혜를 받았거니와, 이에 또 장차 선생의 일언(一言)을 청해서 우리 스승의 진당(眞堂)에 기(記)하려 하니, 선생은 행여 거절하지 말라. 우리 스승이 오탁(五濁)의 악한 세상에 상(相)을 나타내고 기(機)에 응하였으니, 비하자면 부처가 나온 셈이다. 그러므로 회암(檜巖)은 옛날의 기림(祇林)과 같고 신륵(神勒)은 옛날의 쌍림(雙林)과 같다. 지선 등이 부여잡고 부르짖으며 민절(悶絶)할 지경이나, 마침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화적(化跡)을 돌아보니 달이 허공에 떨어져 남은 빛이 이미 다한 듯하나 다행히 사리(舍利)가 있으므로 그 때문에 받드는 것이 지극하고 도모(道貌)가 있으므로 그 때문에 전하는 것이 넓다. 지금 신륵사의 석종(石鐘)은 실로 정골사리(頂骨舍利)를 안치한 것이다. 지선 등은 이르기를, 후일에 사리에 예배하는 자가 우리 스승의 도모를 알 길이 없으니, 그 바람[風]을 흠모하면서 그 얼굴과 의포가 어떠한 줄을 모르면, 의귀(依歸)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반드시 만족하지 못한 바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도모를 우러러보고 물러나서 사리를 보며 반기고 사모하면, 어찌 교접(交接)하는 순간에 감오(感悟)되는 바가 없으랴. 이래서 진당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선생은 우리들을 아는 이는 아니지만 붓을 쥐고 기술하는 것은 선생의 일이니, 선생은 끝까지 은혜를 입혀주기 바란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지선의 말이 옳다. 지금 무릇 상설(像設)이 허다하나 길거리 아이들이나 항간의 여자들이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반드시 따라서 일러주기를, ‘이 부처는 그 이름이 아무 것이며 이는 부처의 제자인데, 그 이름이 아무 것이며, 이는 부처의 제자인데 그 이름이 아무 것이다.’ 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숭배하는 예를 드리고, 마음으로 그 상에 묵념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선각(禪覺)의 진영도 또한 하나의 단청한 고물(故物)이라 뉘 따라서 알리오. 지선 등의 구구한 마음은 장래에 밝힐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그 청이 부지런할 만하다. 그러므로 사양하지 아니하고 시로써 맺는다. 후일의 독자는 행여 기롱하지 말라. 토목의 공정에 있어서는 항상 있는 일이므로 쓰지 않는다.”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보제존자 어록 후서(普濟尊者語錄後序)
 

공민왕의 스승 보제존자(普濟尊者)는 불법을 서천(西天)의 지공(指空)과 절서(浙西)의 평산에게 이어받아 크게 종풍(宗風)을 천양하였다. 그러므로 그 편언(片言) 반구(半句)라도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므로 어록(語錄)을 기술하게 된 것이다. 스승의 도가 행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뒷사람에게 달려있는데 뒷사람이 스승의 도를 알자면 어록이 아니고서는 알 길이 없으니 마땅히 그 제자들이 이에 부지런할 만하다. 나는 재주가 없는 몸으로써 어지(御旨)를 받들어 명(銘)을 지었고 또 어록을 인(引)하게 되었으니, 나의 행이랄까 불행이랄까 뒤에 오는 자는 더욱 감계(鑑戒)할지어다. 제자의 이름은 각간(覺?)ㆍ각연(覺然)ㆍ각변(覺卞)인데, 그들이 구본(舊本)을 교정해서 인쇄에 붙일 양으로 나에게 서문을 구하므로 대략 쓰기를 이와 같이 한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선수집 서(選粹集序)
 

시대순으로 글월을 모으는 것은 공자의 법이다. 그러므로 상고(上古)의 서는 명목을 우서(虞書)ㆍ하서(夏書)ㆍ상서(尙書)ㆍ주서(周書)라 하였다. 또한 체(體)로 시를 모으는 것도 역시 공자의 법이다. 그러므로 제후 나라의 시는 명목을 풍(風)이라 하고, 천자의 서는 아(雅)ㆍ송(頌)이라 하였다. 공자가 요순(堯舜)을 조술(祖述)하고 문왕ㆍ무왕은 헌장(憲章)하여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산정하고 정치를 내고 성정(性情)을 바르게 하여, 풍속을 한결같이 하고 만세 태평의 근본을 세웠으니, 이른바, “사람이 생긴 이래로 공자보다 더 훌륭한 이는 없다.”는 말이 어찌 미덥지 아니하랴. 중간에 진(秦)의 화재에 타버리고 겨우 공자 사당 벽에서 나왔으나, 시ㆍ서의 도가 없어져 흩어지고 어지러워졌다가 당(唐)에 이르러, 한유(韓愈)가 홀로 공자를 존숭할 줄을 알았으므로 문장이 드디어 변하였지만, 원도(原道) 한 편으로써 족히 그 득실을 볼 수 있다. 송(宋)의 세대에 이르러 한유를 숭배하여 고문(古文)을 배운 자는 구양수(歐陽脩) 등 몇 사람일 따름이요, 공ㆍ맹의 학을 강명하여 노자ㆍ석가를 배척하고, 만세를 깨우친 것에 있어서는 오로지 주(周)ㆍ정(程)의 공이었다. 송 나라 사직(社稷)이 없어지자 그 설이 북방으로 흘러 들어가서, 노재(魯齋) 허(許) 선생이 그 학을 써서 원 세조(元世祖)를 도와 중통(中統) 지원(至元)의 정치가 모두 이에서 나왔으니, 아, 거룩하다.
내 친구 김경숙(金敬叔)이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문중자(文仲子)가 경(經)을 속찬하여 《논어(論語)》를 체 받았으니, 거의 참람하고 분에 넘치는 짓이나 논하는 자가 또한 일찍이 용서를 하였다. 이로써 나는 천박하고 고루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옛날에 들은 바를 편집하여 □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릇 몇 명의 시문(詩文)이 풍화(風化)와 성정(性情)에 관한 것이 있는 몇 편을 정리하여 몇 권을 만들었다.” 하였고, 아무 벼슬을 지낸 아무개가 또 와서 말하기를, “김경숙이 세상에 나서 그 뜻을 실행하지 못하고 늙어 버렸으니, 나로서도 역시 슬프게 여기는 바다. 그가 다행히 전장(典章)을 널리 구하여 모아서 한 기록을 만들었는데, 선생께서 이름을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 지어주었고, 또 고금의 시문 몇 권을 모았는데, 선생께서 이름을 《선수집(選粹集)》으로 하라 하였으니, 선(選)은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에서 취하였고, 수(粹)는 요현(姚鉉)의 당문수(唐文粹)에서 취한 것이니 그 의미는 그 정수를 뽑았다는 것이다. 선(選)하면 정수하게 되고 정수하면 곧 선한 것이니, 그 작자를 탄미(嘆美)한 까닭이요, 그 배우는 자를 흠동(歆動)케 하자는 것이다. 원컨대 선생은 인해서 글 한 편을 주어 편 머리에 싣게 하여 달라.” 하였다.
나는 사양하다 못해서 자신의 일을 들어서 말하기를, “이색(李穡)이 젊었을 적에 중국에 놀며 진신(搢紳)선생의 말을 들었는데, 문은 한(漢)을 법받고 시는 당(唐)을 법받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 까닭을 몰랐었다. 한림(翰林)에 들어가게 되자 천하가 너무 어지럽고 어머니도 늙으셨기에, 직을 사면하고 돌아와서 그릇되게 공민왕의 지우를 얻어 관에 봉직하여 허물이 없기를 힘쓰고 있기 때문에, 능히 문학에 전심하지 못하고 한두 가지의 소득조차 다 소멸되어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경숙의 수립(樹立)한 것이 이와 같이 우뚝함을 보니, 어찌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아니하랴. 비록 그러나 이 책이 전하면 나의 서문이 전해질 것을 알 수 있고, 서문이 전해지면 이름이 전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사양하겠으며 다른 날에 중국의 문장을 상고하여 한 책을 만들어내는 자가, 공자의 노서(魯誓)ㆍ노송(魯頌)ㆍ상송(商頌)의 예를 본받아서, 혹시 한두 편을 취택하여 편의 말미에라도 두게 되면 그야말로 큰 행이니, 내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동문선 제87권   
 
 
 서(序)
 
 
주관육익 서(周官六翼序)
 

천지의 사이에 나라를 세우고 하늘을 대신하여 행사하는 이를 천자(天子)라 이르고, 천자를 대신하여 분배받은 땅을 맡아서 다스리는 자를 제후(諸侯)라 하나니, 지위는 상하가 있고 세력은 대소가 있어 결코 문란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주역(周易)》의 이괘(履卦)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지가 서로 합심하면 태평함을 이루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색한 것이니, 그 상하의 정을 통하고 대소의 분을 정하여 하늘의 명령을 보답하고, 사람의 기강을 수립할 것을 구하자면 옛글에서 상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자가 서(書)를 산정하여 당(唐)ㆍ우(虞)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지금 그 두 전(典)을 읽어보면 오히려 그 시절에도 관을 명하는 데는 도유(都兪)ㆍ해양(諧讓)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사람을 쓰는 것도 자상하고 스스로 처(處)하는 것도 정확하였다. 그렇기에 마땅히 봉황새가 날아들고 짐승도 춤을 추는 상서를 이룩할 만하다. 삼대(三代) 시대에는 서로 손익(損益)이 있어 비록 각각 법칙을 달리하였으나 시대의 사명일 따름이요, 도(道)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주관(周官)》ㆍ주례(周禮)》ㆍ《직방(職方)》의 서에서 역력히 상고할 수 있다. 진관(秦官)이 오직 옛것을 버리고 자기만을 존대하니 주(周) 나라 제도가 이에서 탕진되었던 것이며, 한 나라가 흥기하여 진지(秦志)를 인습하게 되니, 옛법에는 비록 만족하지 못한 한탄이 있었으나 또한 장차 어찌 하겠느냐.
비록 그렇지만 공자는 일찍이 말씀하기를, “예라 예라 하지만, 옥백(玉帛)을 두고 이름이랴. 악이라 악이라 하지만, 종고(鐘鼓)를 두고 이름이랴.” 하였다. 그렇다면 제도가 옛것이고 아닌 것은 급한 바 아니다.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물(物)을 다스림에 있어 시대에 따라 제도를 창설하고, 강상(綱常)을 부식하며 풍화를 널리 선포하며 이와 같이 할 따름이다. 우리 동방이 당요(唐堯)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세상이 편안하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했다. 그래서 세 나라로 갈라졌다가 고려 태조에 이르러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서 비로소 통일하여, 지금 천백여 년을 내려왔으며 관제의 연혁도 또한 여러번이었으나, 직림(職林)을 기술한 책을 집필한 사람이 있지 않았다. 이로써 관에 있는 자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대임할 자가 오면 바로 떠나며, 혹시 그 관수(官守)를 묻는 일이 있으면, “나는 모른다.” 하고, 그 녹봉을 물으면, “나는 약간의 녹봉을 받았는데 지금 벌써 몇 해가 되었다.” 할 뿐이다. 아, 소용없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한다면 나는 믿지 못하겠다.
근년에 고난(苦難)을 많이 겪은 이래로 양식 가마와 무기만은 따로 국(局)을 설치하고, 능한 자를 뽑아서 주장하게 하였지만 전리(典理)의 백관을 출척(黜陟)하는 것과, 군부(軍簿)의 제위(諸衛)를 단속하는 것, 판도(版圖)의 재정을 출납하는 것과, 전법(典法)의 형옥(刑獄)을 처결하는 것, 예의(禮儀)의 조회(朝會)ㆍ제사(祭祀)와 전공(典工)의 공장(工匠) 조작(造作)과 고공(考工)의 도력(都曆), 도관(都官)의 사인(私人)은 하나의 고사(故事)로만 보아 넘길 따름이요, 각사(各司)ㆍ각부(各府)에 대하여 능히 그 관을 두게 된 연유를 탐지하여 힘써 시행하려는 자는 거의 적다.
김군 경숙(敬叔)이 그런 것을 깊이 개탄하여 육방(六房)으로 강(綱)을 삼고, 각각 소관된 일을 분류하여 목(目)을 만들어 관에 거하는 자로 하여금 다 그대로 준수하여, 그 당연히 할 바에 극진할 것을 생각하게 하고, 힘이 부족하면 힘써서 달성하게 하고, 다만 가버리면 그만이라는 전일의 격식과 같지 않게 하였으니, 경숙의 마음 쓴 것이 부지런하다 하겠다. 이미 편이 이루어져서 목판에 새기기로 했는데, 진양(鎭陽) 임희민(林希閔)이 군(君)의 말을 전하고 나에게 책 이름을 청하여 또 서문을 청하기에, 나는 대단히 기뻐서 그 명목을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 하고, 대략 그 관을 두게 된 의의를 기술하여 고하노니, 직에 있는 군자는 거의 위로 국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아래로 김경숙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D-001]도유(都兪)ㆍ해양(諧讓) : 벼슬을 제수할 때 주고받는 말로써 찬성하고 사양한다는 뜻.

동문선 제87권   
 
 
 서(序)
 
 
증 김경숙 비서 시 서(贈金敬叔?書詩序)
 

근세에 조군(趙郡) 소대참(蘇大?) 백수보(伯修父)가 국조(國朝)의 명신사략(名臣事略)을 편찬하고 또 문류(文類)를 편찬하니, 규재 선생(圭齋先生)의 말이, “백수는 배움에 여가가 있고 필찰(筆札)이 또 풍부하므로 능히 이것을 성취했다.” 하였는데, 색(穡)은 말하기를, “소공(蘇公)이 태평의 전성기에 태어나서 사방의 문학하는 선비와 교우하고, 역대의 전칙(典則)에 익숙하며 또 정민한 재주가 있으니, 유독 필찰이 풍부할 뿐 아니다. 이에 반해 궁벽한 곳에 처하고, 한직에 거하여 이미 금전이 없어서 구입하기도 어렵고, 또 책을 파는 저자가 없어서 관람할 길도 어려운데 모아 놓은 것이 하도 많아서, 수백 권에 달한 것은 유독 우리 김경숙(金敬叔)이 있을 따름이다. 김경숙은 임인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뜻이 문학에 돈독하고, 해서를 잘 쓰므로 뽑혀서 일찍이 표장(表章)을 썼는데 공민왕이 보고서 아주 칭찬하였다. 나는 대개 그를 흠모한 적이 오래였으나 수년래에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이와 같은 기특한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 두 가지 책의 이름을 청함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서 전고(典故)의 머리에는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 쓰고, 문장의 머리에는 《선수집(選粹集)》이라 쓰고, 또 각각 그 이름을 정하게 된 의의를 서술하였었다. 진양(鎭陽) 임희민(林希閔)이 진신(搢紳)들에게 시를 얻어서, 김경숙에게 주려고 또 나에게 서(序)를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동방의 교화의 근원이 대개 기자(箕子)가 봉해진 데서 발단되었는데, 교조(敎條)가 간편하여 번문(繁文)과 말절(末節)의 번잡함이 없으므로, 후세에 인습되어 지금까지 순박하고 간략한 풍속이 남아 있다. 삼국을 차지하고라도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래로, 광종(光宗)이 과거의 제도를 만들어서 선비를 취택하여 문학의 융성함이 중국에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 성서(成書)에 대해서는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김경숙이 발분해서 만들게 된 것이었던가. 그의 좋아하는 바가 이와 같을진대 그 속에 지닌 바는 짐작할 만하다. 고금을 통해서 책을 저술한 자가 많으나, 우리 삼한의 근세에는 유독 쾌헌(快軒) 문정공(文正公)이 제일이요, 그 문인 계림(鷄林) 최졸옹(崔拙翁)이 또 그 다음이다. 편집이 풍부한 것은 쾌헌을 칭하고 간택이 정한 것은 최졸옹을 칭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성행하지 못하는 것은 공장(工匠)이 옹졸하고 권질이 무겁기 때문이니, 은대집(銀臺集)ㆍ상국집(相國集)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 문장에 그칠 따름이니, 전하고 전하지 못하는 것이 급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주관육익(周官六翼)》은 직위에 있는 자의 좌우명(座右銘)이니, 만약 전하지 못한다면 지치(至治)의 혜택이 내리지 않을 것이니, 그 세도에 관계된 것이 어찌 중하지 아니하랴. 김경숙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한다. 만약, ‘내가 목판에 새겨서 명산(名山)에 간직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노니 전해짐의 넓고 넓지 않은 것은 나의 알 바 아니다.’ 한다면, 내가 김경숙에 대한 소망이나 여러 사대부가 시를 지어 찬미하게 된 것이 모두 허문(虛文)이 되고 마는 것이니, 김경숙은 아무쪼록 힘쓸지어다.” 하였다.

동문선 제87권   
 
 
 서(序)
 
 
원암연집 창화 시 서(元巖?集唱和詩序)
 

옛날의 군자는 그 임금을 보좌할 때에 그 의를 다하므로 그 임금이 예로 대해주는 것도 극진하여 풍부하였다. 예모가 풍부하고 의가 극진하며 뜻이 같고 기미가 합하여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은 구름이 용(龍)을 따르고, 유유한 것은 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늙음에 미쳐서도 휴퇴(休退)와 등용이 계속 반복되어 실컷 노닐고 한없이 편안하며, 황발(黃髮)을 드리우고 흰 머리를 얹은 나이에도 직위를 떠났다 해서 하루도 국가를 잊은 적이 없고, 의논이 있으면 결단하며, 어려움이 있으면 붙다르니, 군신의 사이가 어찌 그리도 서로 양해가 깊었던가. 나는 원암(元巖)에 모인 여러 늙은이의 연집시(?集詩)를 보고서 대개 세 번이나 감탄하였다.
주상의 남방 거둥에 있어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공(廉公),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공(李公),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공(黃公),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공(洪公), 수춘군(壽春君) 이공(李公), 계성군(啓城君) 왕공(王公)이 실로 따라가게 되니, 주상께서도 심히 가상히 여기어 그 대우하는 것도 또한 예를 다하였다. 8월 병술일에 행차가 원암에 머무르고 정해일에 속리사(俗離寺)에 거둥하였는데, 이튿날에 큰비가 와서 원암으로 되돌아와 하루를 머물렀다. 여러 늙은이가 이미 편안한 몸으로 자처하고, 또 도성(都城)에 돌아가는 길이 가까워짐을 즐거워하여, 이에 술을 들고 서로 권하며 노래로 흥을 돋구는데, 대장군 김하적(金何赤)이 젓대를 불고, 장군 김사혁(金斯革)이 쟁(箏)을 타고, 창안(蒼顔) 백발이 웃음과 말로 수작하여 바라보기에 신선과 같았다.
아, 신음(呻吟)하고 상처를 입은 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 승평의 문채가 이러할 줄을 어느 뉘라 일렀으랴. 여러분이 이미 늙었으나 상(上)이 부소(扶蘇)의 양지쪽 법궁(法宮)의 안에 계시지 못함을 쓰라리게 여기어, 몸소 무기를 거느리고 번갈아서 야차(野次)에 숙직하며, 풍우(風雨)와 한서(寒暑)에도 그만두지 아니하니, 여러 관료들이 이를 본받아서 각기 제 직무를 닦아 감히 결하는 일이 없었다. 그 조석으로 주선하는 사이에 인심을 감동하게 하고 국가에 이익되게 한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렇다면 묘당(廟堂)에 앉아서 호령을 내는 자와 비해서 어느 것을 취택하겠는가. 저 시상(柴桑)의 도연명(陶淵明)이나 죽림(竹林)의 칠현(七賢)은 명교(名敎)의 죄인이건만, 일 좋아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림 그리고 노래하였는데, 하물며 원암의 성한 집회는 국가의 원기(元氣)가 됨에 있어서랴.
다만 모르겠다. 지금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누구이며, 노래를 잘하는 자가 누구인가. 만약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자제의 예를 갖추어 쟁 타고 젓대 부는 열에 끼이고 싶어도 이미 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가영(歌?)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나같은 불초가 제창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오. 시험삼아 보건대, 속리산이 장엄하고 숭고하여 하늘에 닿았으니 우리 후생은 마땅히 우러러볼 바가 아니랴. 여러 늙은이의 풍류와 문채가 비록 더불어 높이를 경쟁해도 가할 것인데, 어찌 노래나 그림이 있어야만 되겠는가.

동문선 제87권   
 
 
 서(序)
 
 
송 설부보사 환조 시 서(送?符寶使還朝詩序)
 

명 나라가 천명을 받아 무공(武功)이 이루어짐을 고하여 중원이 평정되므로, 이에 사이(四夷)를 권고(眷顧)하고 안무(按撫)하여 두어둠이 마땅하다. 드디어 사신을 명하여 수레를 태워 사방으로 내보내어, 위엄과 덕화를 선포하고 각기 그 나라 백성을 안정케 하였다. 그래서 부보(符寶) 설공(?公)이 조서(詔書)와 예폐(禮幣)를 받들고 만 리의 바다를 건너, 이 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신성한 천자의 회유(懷柔)하는 뜻을 선양하니, 온 나라가 분주하여 받들기를 오직 삼가히 할 따름이었다. 지난번 관적(關賊)이 요동(遼東)을 침범하니 공은 실로 이 땅에 피난 왔었다. 그래서 사대부로 함께 노닌 자가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옛날 떠날 적엔 그리움이 깊었고, 지금 오게 되자 기쁨이 지극하였으며, 또 그 돌아감이 빨라서 만류할 수 없음을 근심하여 이에 서로 시를 지어 증정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조선 나라를 세운 것은 실로 당요(唐堯) 무진년이었다. 비록 대대로 중국과 상통하였으나 중국이 일찍이 신하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이 때문에 주 무왕이 은 태사(殷太師)를 봉하여 신하를 삼지 아니하였다. 그후 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솥발처럼 대치하여 서로 웅장하여 진(秦)ㆍ한(漢) 이래에 혹은 상통도 하고 혹은 절교도 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굉장한 자격과 원대한 계략으로 당의 말기에 일어나서, 드디어 삼국을 합병하고 그 땅에서 왕이 되어 5대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왔으니, 대개 5백 년이 되어간다. 습속이 이미 다르고 언어가 통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중국의 알아주지 않는 바이지만, 그러나 시ㆍ서ㆍ예ㆍ악의 풍이 아직도 사라지지 아니하여 중국을 존대할 줄 알며, 만약 성인(聖人)이 나오게 된다면 의지하여 돌아가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하물며 지금 천자가 먼 곳 사람을 비루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가혜(嘉惠)하는 것이 이와 같으며, 부보공(符寶公)이 또한 능히 마음가짐이 충족하여 예칙할 수 없어, 험한 거센 파도를 보기를 평탄한 길처럼 여기고 덕음(德音)을 선초하여, 상하가 서로 믿어서 털끝만큼도 의심이 없으니, 대대로 번방이 되어 우리 제명(帝明)을 머리에 얹고, 천만세를 나갈 것이 대개 지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공은 부디 기억하시라.


동문선 제88권   
 
 
 서(序) 이숭인
 
 
송 우천봉 상인 유방 서(送雨千峯上人遊方序)
 

우천봉(雨千峯)은 불가에서는 고제(高弟)였고, 유가에 노닐 적엔 상빈(上賓)이었다. 대개 환암(幻庵)과 귀곡(龜谷)은 조계(曹溪)의 사표요, 한산자(韓山子 이목은(李牧隱))는 우리들의 영수인데, 실로 모두 상인을 애중히 여겨 예우하였으니, 상인은 무엇을 공부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사람됨이 나이는 젊은데 학식은 대단하고, 외형은 여위었는데 신색(神色)은 기름지며, 말기운은 씩씩하여 맑은 바람과 같으니, 나 역시 상종하기를 원하는 바이다. 서로 이별한 적이 오래였는데 이제 찾아와서 손을 마주잡고 차분히 환담을 나누고 말하기를, “내가 여러 곳을 두루 유람하려 하는데, 선생은 글 한 편을 지어주기 바란다.” 하였다.
나는 전날 사명을 받들고 중원에 간 적이 두 번이었다. 요습(遼?)을 지나고 내양(萊洋)을 횡단하고 제(齊)ㆍ노(盧)의 옛 터를 거치고 대하(大河)와 강회(江淮)의 내리 쏟는 물결을 건너, 곧장 천자의 도성으로 나아가서 궁궐과 성곽의 웅장하고 아름다움과 강산과 토지의 끝없이 이어짐과, 예악과 전장(典章)의 밝게 구비됨과, 진신(搢紳)과 공경(公卿)의 엄중함을 보고 마음과 눈이 활짝 열리어, 바다 모퉁이에서 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으니, 장유(壯遊)라 할 수 있었다. 물러나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오히려 왕사(王事)가 한정이 있어, 더 많이 구경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는데, 상인은 이미 부도(浮屠)가 되었으매 고운 야학(孤雲野鶴) 같은 뿐만이 아니니, 빨리 떠나도록 하라. 삼대(三代) 시대로부터 한(漢)ㆍ당(唐) 이후로도 천하가 통일된 때는 적으니, 진실로 통일이 아니면 땅덩어리가 중단되어 비록 스승을 찾고 도를 물을 뜻이 있더라도 어떻게 갈 수 있으랴. 그 때문에 종소문(宗小文 종각(宗慤))이 와유(臥遊)의 한탄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즈음 성명(聖明)이 즉위하여 해와 달이 비치고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은 모두 판도(版圖) 안에 들었으니 폭원(幅員)의 넓음이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다. 빨리 떠나도록 하라. 비록 그러하나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한 번 손으로 퉁기는 찰나에, 천지가 생기지 않은 처음으로부터 천만 세의 무궁에 이르기까지, 환하게 눈앞에 있을 것인데 하물며 장해(章亥) 의 지나간 곳과 주목왕(周穆王)의 수레바퀴가 미친 곳과, 추연(鄒衍)의 이른바 구주(九洲)ㆍ구영(九瀛)은 모두 형기(形氣)의 안에 있을 것이 아니냐. 상인의 이번 걸음에는 반드시 식견을 갖춘 자를 만날 것이니, 나를 위하여 물어 주기 바란다.


[주D-001]장해(章亥) : 옛날 걸음을 잘 걷는 자의 이름임.

 

동문선 제89권   
 
 
 서(序) 정도전
 
 
증전교김부령시서(贈典校金副令詩序)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출처와 거취(去就)가 어찌 일정하랴. 마땅히 크게 쓰이게 되면 큰 대로 행하고 작게 쓰이게 되면 작은 대로 행하며, 쓰이지 못하게 되면 행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할 따름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에게 소유하여 내외ㆍ경중의 구분을 정확히 아는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친구 김의경(金義卿)군이 글을 읽어 선비가 되자 때를 기다려서 움직일 모양이었는데, 계사년을 당하여 문충공(文忠公) 이윤(伊尹) 이익재(李益齋)와 문정공(文正公) 홍양파(洪陽坡)가 노성한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종장(宗匠)의 자리를 전담하여 선비를 선택하는 권한을 잡으니, 기특한 꾀를 기르고 원대한 식견을 갖추어 깊이 파묻혀 나오지 않던 선비들이 모두 노래하며 힘껏 분발하여 말하기를, “이야말로 때가 왔다.” 라고 하며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을 맞대어 시험장에 나아가서 경중을 경쟁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의경은 한산(韓山) 목은(牧隱) 선생과 함께 담소하며 일어나서 기탄 없이 앞으로 나아가니, 동배(同輩)들이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주시하면서 감히 당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여러 선비를 밀어내고 맨 앞 줄에 서서 높이 병과(丙科)에 발탁되었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신기할까.
문학에 능하다는 명망으로 교서(校書)의 직에 들어가 교정하는 책임을 전담하였고, 얼마 후에는 충직하고 강경함으로써 알려져 좌정언 지제교(左正言知製敎)에 제수되어 정사의 잘잘못을 낱낱이 아뢰게 되었고, 사람을 등용하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합당하게 받아들이고 물리치니, 거의 크게 쓰이게 되었다고 보겠다. 그러나 김의경의 재주와 학문이 마땅히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른바 그 큰 것에 있어서는 아직 시험조차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어버이가 늙음으로써 은퇴하고 남쪽으로 돌아가서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며 떠나지 아니하니, 진실로 쓰이는 데도 뜻이 없고 행하는 데도 뜻이 없었다.
현 상국(相國) 하공(河公)이 전라절도사(全羅節度使)로 부임하여 말하기를, “한 지방을 맡은 책임이 중하고 군민(軍民)의 사무도 복잡하니, 다스리는 법과 정벌(征伐)의 꾀는 마땅히 어질고 식견이 있는 이에게 자문해서 행해야 하겠다.” 하고, 김의경을 청하여 유악(?幄)에 두고 상빈(上賓)으로 대접하니, 김의경은 국사(國士)의 지우(知遇)에 감동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책략은 실수가 없어 삼군(三軍)의 호령이 분명하고, 한 지방의 부세와 송사가 공정하여, 군사는 승첩(勝捷)의 공이 있고, 백성은 편안한 살림을 하게 되었다. 김의경은 말하기를, “지금 이와 같은 성과가 있는 것은 주인이 어질기 때문이다.” 하니, 상국은 말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막빈(幕賓)이 도와서 된 것이다.” 하고, 이에 장계를 아뢰어 봉선대부 전교부령 보문각직제학(奉善大夫 典校副令 寶文閣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그 공을 정표(旌表)한 것이다. 김의경은 조정에서 쓰던 것을 막부(幕府)에 써서 그 도가 시행되자, 그 주인은 과연 공을 이룩하게 되었으니, 어디고 맞지 않은 데가 없음이 이와 같다. 옛날 당(唐) 나라 사람 노매(盧邁), 정여경(鄭餘慶), 조종유(趙宗儒), 고소련(顧小連) 등은 모두 하남(河南)의 막빈(幕賓)으로 조정에 들어와 재상이 되니, 그 시대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어 지금까지 아름다운 명성이 자자하다. 내가 듣건대, “재상은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긴다.” 하니, 훗날에 상국이 조정에 돌아와서 숨은 인재를 열거(列擧)하고 어질고 뛰어난 자를 추천하게 되면 김의경의 이름이 제일 앞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당나라 하남(河南)의 막빈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랴. 내가 비록 버려진 몸이나 다행히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장차 김의경을 위하여 눈을 씻고서 그 크게 쓰이고 크게 행하는 것을 보고야 말 것이다.

동문선 제89권   
 
 
 서(序) 정도전
 
 
경산이자안도은문집서(京山李子安陶隱文集序)
 

일월(日月)ㆍ성신(星辰)은 천문(天文)이요, 산천ㆍ초목은 지문(地文)이요, 시서(詩書)ㆍ예악(禮樂)은 인문(人文)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氣)로써 되고 땅은 형(形)으로써 되고 사람은 도(道)로써 된다. 그러므로, “문(文)이라는 것은 도를 싣는 그릇이다.” 하였으니, 인문이 그 도를 얻으면 시서ㆍ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서 삼광(三光 일(日)ㆍ월(月)ㆍ성(星))이 순조롭게 행하고 만물이 골고루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문(文)의 성함이 이에서 더할 수 없다. 선비가 천지의 사이에 나서 그 빼어난 기운을 받아 문장으로 발로되어 혹은 천자의 궐정(闕庭)에 드날리고 혹은 제후의 나라에 벼슬하였으니, 이를테면 윤길보(尹吉甫)는 주(周) 나라에서 목여(穆如)의 아(雅)를 짓고, 사극(史克)이 노(魯) 나라에서 역시 무사(無邪)의 송(頌)을 지었으며, 춘추시대 열국(列國)에 이르러서는 대부들이 조빙(朝聘)하고 왕래하여 능히 알맞은 시를 지어 물(物)을 느끼게 하고 뜻을 비유하였으니, 진(晋) 나라 숙향(叔向)이나 정(鄭) 나라 자산(子産) 같은 자도 역시 높이 평가할 만하며, 한(漢) 나라의 전성기에 있어서는 동중서(董仲舒)와 가의(賈誼) 같은 이들이 나서 대책(對策)한 글월을 올려 천(天)ㆍ인(人)의 온축(蘊蓄)을 밝히고, 치안(治安)의 요령(要領)을 논함과 동시에 매승(枚乘)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제후의 나라에 노닐면서 모두 뛰어난 문장으로 성정을 읊어서 문(文)의 덕을 아름답게 하였다.
우리 나라는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대대로 중국 풍속을 사모하여 문학하는 선비가 끊임없이 배출되어 고구려에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있었고 신라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있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과 학사(學士) 이규보(李奎報)가 우뚝한 존재였고, 근세에는 계림(鷄林) 익재(益齋) 이공(李公) 같은 대유(大儒)가 나서 비로소 고문(古文)의 학을 제창하였고, 한산(韓山) 가정(稼亭) 이공(李公)과 경산(京山) 초은(?隱) 이공이 따라서 화작(和作)하였으며, 지금 목은(牧隱) 이 선생이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고, 북으로 중원에 유학하여 연원(淵源)이 올바른 사우(師友)를 얻어 도덕과 성명(性命)의 학설을 궁구하고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는 제생(諸生)을 맞이하여 가르쳤다. 그래서 보고 흥기한 자는 오천(烏川) 정공(鄭公) 달가(達可)ㆍ경산(京山) 이공(李公) 자안(子安)ㆍ반양(潘陽) 박공(朴公) 상충(尙衷)ㆍ밀양(密陽) 박공(朴公) 자허(子虛)ㆍ영가(永嘉) 김공(金公) 경지(敬之)ㆍ권공(權公) 가원(可遠)ㆍ무송(茂松) 윤공(尹公) 소종(紹宗)이 있었고, 비록 나같이 불초한 자도 역시 이상 여러분들의 열에 끼이게 되었는데, 그중 자안씨(子安氏)가 정심하고 명확하여 여러분을 압도하였다. 그는 선생의 강설을 들으면 조용히 해득하고 마음으로 통하여 두 번 묻지 아니하였고, 그 홀로 깨달은 것에 있어서는 사람의 의사 밖을 뛰어 났으며, 모든 서적을 넓게 읽어서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그리고 저술한 시문(詩文) 여러 책은 《시경》의 흥비(興比)와 《서경》의 전모(典謨)에 근원을 둠과 동시에 그 화순(和順)의 쌓임과 영화(榮華)의 발양이 또 모두 예악(禮樂) 가운데서 나왔으니, 도를 깊이 체득한 자가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명 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황제가 천하를 차지하자 덕을 닦고 무력(武力)을 금하여 모든 문명을 같이 하고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인문(人文)을 새롭게 하여 천지를 경영하고 있는데, 이때를 당하여 우리 왕국(王國)의 사대(事大) 문자는 대개 자안씨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천자는 보고 아름답게 여기며 이르기를, “표(表)의 사연이 진실하고 간절하다.” 하였다. 요즘 세시(歲時)의 인사를 닦기 위하여 요동과 심양을 지나고 제로(齊魯)를 거치고 세차게 흐르는 황하를 건너서 천자의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 관감(觀感)에 곁다른 소득이 어떻다 하랴. 아, 계찰(季札)이 노(魯)에 가서 주(周) 나라 악(樂)을 구경하고 능히 그 성덕(盛德)을 알았는데 자안씨의 이 여행은 마침 제작(制作)의 전성기를 당했으니, 장차 그 보고 느낀 바를 나타내어 공덕을 기술해서 명(明) 나라의 아송(雅頌)이 됨과 동시에 윤길보(尹吉甫)의 뒤를 따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자안씨는 돌아와서 그것을 나에게 보여준다면, 나는 마땅히 제목을 관광집(觀光集)이라 하겠다.

동문선 제89권   
 
 
 서(序) 정도전
 
 
약재유고서(若齋遺藁序)
 

내가 하루는 망우(亡友) 약재(若齋)의 유고(遺稿) 몇 책을 얻어서 눈물을 지으며 다 읽고 이내 붓에 먹을 적시어 그 책 머리에 쓰기를, “이는 동국 시인 김경지(金敬之)의 소작이라.” 하였다. 그 글씨가 끝나기도 전에 어떤 객이 힐책하기를, “김선생의 학술과 행실이 어찌 시인에 그칠 따름이랴. 선생은 세가(世家)의 집에 나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의 길에 나아간 뒤로는 포은(圃隱) 정공(鄭公)ㆍ도은(陶隱) 이공 및 고(故) 정언(正言) 이순경(李順卿)과 더불어 우의가 더욱 돈독하여 조석으로 강론하며 연구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 동방 의리(義理)의 학문은 이 두세 분으로 말미암아 제창된 것이다. 국가가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옛 제도를 신장하고 생원(生員)의 액수(額數)를 증광(增廣)하자, 재상 한산(韓山 목은) 이공이 사석(師席)의 맹주(盟主)가 되어 유명한 선비를 발원하여 학관(學官)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다른 관직으로 직강(直講)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생들이 경서를 들고 자리 앞에 열지어 수업하였고 비록 휴가를 얻어 집에 있을 때에도 따라와서 질문하는 자가 서로 줄지어 유익된 바가 많았으니, 선생의 학술의 올바름이 어떻다 할 것이겠는가. 갑신ㆍ을묘의 해를 당해서 국가에 사고가 많았는데 당시 재상이 세력을 쓰고 있으므로 선생은 글월을 올려 잘 잘못을 심히 말하였는데, 보고가 되지 않은 채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예(例)에 의하여 외가의 고을 여흥(驪興)군으로 이사하여 여강어부(驪江漁父)라 스스로 호(號)를 짓고 그 거실(居室)을 육우당(六友堂)이라 하고, 강ㆍ산ㆍ춘ㆍ하ㆍ추ㆍ동의 경치를 즐기며 7년의 세월을 보냈다. 나라에서 의로운 풍모를 높이 보아 불러들여 간관(諫官)의 책임과 관직의 지킴이 둘 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또 선생이 외교에 대한 재주가 있으므로 요동도사(遼東都司)에 예를 드리게 하였는데, 때마침 조정의 명령이 내려 사사로이 교제하는 것을 허하지 아니하고 선생을 운남(雲南)에 유치하게 되었는데 발길이 사천(四川)의 노주(瀘州)에 당도하여 병을 얻어 여관에서 작고하였다. 선생이 처음 길을 떠나 병들어 죽기까지에 만리의 길을 걸으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느나 조금도 염려하고 애달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죽음에 임박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에서 아녀자의 손에서 죽는다면 누가 알아주랴. 지금 만리 밖에서 왕사(王事)로 죽어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성명을 알게 하였으니, 죽을 곳을 얻었다 이를 수 있다.’ 하고, 가사(家事)에는 한 마디 말도 언급하지 아니하였으니, 선생의 행위의 높음이 또 어떻다 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그대 말이 진실로 옳다. 경지(敬之)의 학술과 행실은 사첩(史牒)에 갖추어 있고 사람의 입에 전파하리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릴 것이 있으랴. 시도(詩道)를 말하기 어려운 것이 오래였다. 아송(雅頌)이 폐기됨으로부터 시인의 원망하고 비방하는 작품이 흥기하였고 소명(昭明)의 《문선(文選)》이 행세하자 그 폐단이 나약에 치우쳤고, 당(唐) 나라에 이르러 성률(聲律)이 시작되어 시의 체가 드디어 크게 변하였으니,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를 제일 탁월하다 이르는 바이다. 송(宋) 나라가 흥기하자 진유(眞儒)가 쏟아져 나오니, 경학과 도덕이 삼대 시대를 따라갈 만하였지만, 시에 있어서는 당률(唐律)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근체(近體)라 해서 경솔히 여길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서 시를 말하는 자는 간혹 그 소리는 얻었으나 그 맛이 없고 그 뜻은 있으나 그 문장이 부족하니, 과연 능히 성정에서 발표되어 물(物)로써 흥(興)하고 같은 유(類)로써 비(比)하여 시인의 본뜻에 위배되지 않은 자가 거의 드물다. 중국에 있어서도 그렇거든 하물며 변방에 있어서랴. 경지(敬之)의 외조(外祖) 급암(及庵) 민공(閔公)이 사학(詞學)을 잘하되 더욱 당률(唐律)에 능하여 익재(益齋), 우곡(愚谷)같은 분들과 서로 부르고 화답하곤 하였는데, 경지가 조석으로 곁에 모시고 돌보는 데서 느끼고 열리어 자득한 것이 더욱 많았다. 내가 일찍이 경지의 시를 보니, 그 생각하는 것은 아득하여 집착한 바 없고, 그 얻은 것은 충실하여 자득한 것 같으며 그 붓을 휘두른 것은 나풀거려 구름이 지나고 새가 나는 것 같으며, 그 시됨이 청신하고 유려하여 그 인품과 같으니, 경지는 시도에 있어 완성됐다 하겠다.” 하였다. 객이, “그렇다.” 하므로 마침내 써서 서문을 하였다.

동문선 제91권   
 
 
 서(序) 권근
 
 
도은 이선생 숭인 문집 서(陶隱李先生崇仁文集序)
 

문장은 세도(世道)를 따라 오르고 내리니, 이것은 대개 기운의 성(盛)하고 쇠(衰)한 데 관계되는 것이어서 서로 더불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왕왕 특이하게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따라 휩쓸려 넘어가지 않고 예전 사람의 문장을 압도하고 독보적인 사람이 있다. 옛적에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과 진(晉) 나라의 도연명(陶淵明) 같은 이는 비록 그 나라의 운수가 쇠퇴해 가는 때에 났어도 그 문장은 더욱더 떨치고 일어서서 활짝 피어난 광채가 있었고, 또 그 절의(節義)의 늠름함은 곧장 가을 하늘과 높은 것을 다투어서 넉넉히 만세토록 신하된 사람의 공경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킬 만하고 인륜과 세교(世敎)에 대한 공이 몹시 크니, 단지 문장만을 숭배할 것이 아니다.
성산(星山) 도은(陶隱) 이선생은 고려 말년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문이 정하고 풍부하였으니, 염락(廉洛)의 성리(性理)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여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과 백가(百家)의 글을 철저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조예가 아주 깊고 식견이 몹시 높아 뚜렷이 정대(正大)한 위치에 섰으며, 부처의 학설과 노장(老莊)의 학문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그 옳고 그른 것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문장을 다룸에는 고고하고 아담하며 탁월하고 치밀하였으며, 고율(古律)과 병려(倂儷)까지도 모두 절묘한 지경에 이르러 정연한 법도가 있었다.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이 매양 경탄하기를, “이분의 문장은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어느 세대고 쉽사리 볼 수 없으며, 우리 동방에서는 글하는 선비가 있은 뒤로 그와 비교할 사람이 거의 없다.” 하였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두 차례나 중국에 갔었는데, 중국 선비들이 글을 보고 만나 이야기한 사람이면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래서 예장(豫章) 사람 주탁(周倬)과 오흥(吳興) 사람 장부(張溥)와 가흥(嘉興) 사람 고손지(高巽志) 같은 이가 서(序)와 발(跋)을 지어 그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단지 한 나라에서만 중하게 여기고, 한때에만 울리고 말 뿐이겠는가. 참으로 예전 사람의 문장을 압도하고 독보적인 사람이라 할 만하다.
고려가 생긴 지 5백 년에 백성을 잘 기르고 잘 가르쳤으므로 많은 인재와 아름다운 문헌(文獻)이 거의 중화(中華)와 비교할 만하기는 하지만, 세상에 이름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목은의 풍부한 것과 도은의 아담한 것이 있을 뿐이다. 운수가 쇠해 가는 말엽에 와서 그 문장이 더욱 떨치고 나타났으니, 이것은 반드시 수백 년 동안 잘 길러온 은택이 결국 여기서 뭉쳐 끝을 맺은 것인가 보다.
우리 조선에 와서 왕업(王業)이 한창 잘 되어 나가는데 선생이 시골로 내려가 있으니,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천명(天命)을 받은 뒤에 그 재주를 사랑하여 장차 불러 쓰려 하는데, 선생이 졸(卒)하였으니, 기막히고 아까운 노릇이다. 선생이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지금 우리 주상전하가 그때 잠저에 있으며 그 과거에 뽑혔다. 임금이 된 뒤에 매양 경연에 나오기만 하면 감반(甘盤) 의 예전 의(誼)를 생각하여 다시 벼슬을 높여 주었다. 그 두 아들이 좋은 벼슬에 있으므로 또 명령으로 그 유고(遺稿)를 발간하여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그 선생님을 높이 대우하고 문헌을 존중히 여기며 절의를 포장하는 것이 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몇 가지 훌륭한 일이 한꺼번에 생겼으니, 우리 전하가 이런 일에 생각을 둔 것이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신(臣) 근(近)이 명령을 받고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대강 이 말을 써서 서(序)로 한다.


[주D-001]감반(甘盤) : 은 고종(殷高宗)의 스승이었는데, 고종이 천위(踐位)한 후 정승을 삼았다. 그리하여 후에는 즉위하기 전의 임금의 스승을 감반이라 한다


동문선 제91권   
 
 
 서(序) 권근
 
 
여강연집 시 서(驪江宴集詩序)
 

주상이 즉위한 지 3년 되는 신미년 겨울 11월에,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목은 선생이 임금의 부르는 명령을 받고 서울로 오다가 여강의 별장에 들르니, 도관찰사(都觀察使) 안공(安公)이 술을 내서 위로하였다. 해가 지자 하늘이 맑고 달이 밝아서 배를 중류에 띄우고 흥껏 놀다 파하였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강에 얼음이 얼어 배가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를 지내고 도평의사(都評議使)가 첩지(牒紙)를 맡아 가지고 왔는데, 좌대언(左代言) 신(臣) 첨(詹)이 전지(傳旨)하기를, “한산군(韓山君) 색(穡)이 충주(忠州) 여주(驪州) 사이에 있으니, 도관찰사는 음식과 역마를 신칙하여 예절을 갖추어 조심성 있게 보내라.” 하였다. 안공이 공손히 명령을 받들고 또 가서 잔치를 차렸는데, 이날은 구름이 끼고 눈이 조금씩 오며 강에 얼음이 풀렸다. 선생이 안공과 같이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내려오는데, 그때에 자리에 모시고 있던 첨서(簽書) 종학(種學)은 선생의 아들이요, 여흥 군수(驪興郡守) 권총(權總)은 그 생질이요, 나와 도사(都事) 이우(李愚)는 문인이다. 술을 부어 올리며 흥이 한창 무르녹았는데 구름 속의 달은 은은하게 비치고 물빛은 하늘에 닿은 듯이 까마득하며, 고요한 물결은 바람 한 점 없고 눈송이는 드문드문 떨어지니, 이 또한 배 가운데 한 좋은 경치였다.
그 이튿날 도재(陶齋) 이 학사(李學士)가 수문관(修文館)의 명령을 받들고 역마를 달려 와서 또 어제와 같이 뱃놀이를 하였는데, 도재는 지금 문장으로 크게 이름이 있는데 신해년 과거에서 선생이 시관으로 있을 때 장원으로 뽑은 사람이요, 안공은 쌍청(雙淸) 상국(相國)의 맏아들인데, 쌍청은 곧 선생과 동방(同榜)급제였기로 세교(世交)가 아주 두터운 사이다. 안공은 일찍이 문장과 행동이 깨끗하고 근신하여 좋은 벼슬을 내리 지냈고, 지금은 또 중요한 임무를 띄고 한 지방을 맡아 다스려서 백성을 잘 살게 하며 임금의 덕화를 펴려고 애쓰는 중인데, 더군다나 선생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찌 성의껏 그 자리를 만들어서 성상이 우대하여 불러 오는 뜻에 맞도록 할 생각이 없겠는가. 이에 그 성심에 감격되어 얼음이 스스로 풀려서 오늘의 뱃놀이를 이루었으니, 아름답지 않은가.
여강 산수의 좋은 경치는 예전부터 칭송되던 곳이다. 사람의 일은 마음대로 되기 어렵고 좋은 친구는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들이 이리저리 헤어져 있다가 이런 회합이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기회요, 안공은 관찰사의 높은 자리에 앉아 온갖 사무에 분망한 이상 역시 이런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또 동짓달 얼음이 꽝꽝 얼어붙는 시절에 배를 띄우고 즐겁게 놀기를 오늘같이 한 것이 몇 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한자리에 모인 분들이 한산(韓山)처럼 덕망이 높고, 안공처럼 세력이 있고, 도재처럼 문장이 좋고, 현달하고 호걸스럽기가 제공(諸公) 같은 이가 서로 더불어 배를 탄 것이 또 몇 번인지 알지 못하는 데 있어서이겠는가. 이는 이 강이 생긴 뒤로부터 지금까지 정말 처음으로 한 번 있는 일이다. 내가 아무 재주도 없이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장구(長句) 사운시(四韻詩) 한 편을 지어 도관찰사 깃대 아래 받들어 올리니, 매우 부끄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다.

동문선 제92권   
 
 
 서(序)
 
 
고려국사 서문[高麗國史序]
 

정총(鄭摠)

옛날 열국(列國)에는 제각기 사관(史官)을 두고 그때 일을 맡아 기록하는데 잘하고 잘못한 것을 자세히 드러내어 권장하고 징계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진(晉) 나라의 승(乘)과 초(楚) 나라의 도올(??)과 노(魯) 나라의 춘추(春秋)가 바로 이것이다. 고려씨(高麗氏)가 그 시조 때부터 역대로 모두 실록(實錄)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글이 전쟁을 거친 뒤에 나와 없어지고 잘못된 곳이 많았다. 공민왕 때에 와서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이제현(李齊賢)이 사략(史略)을 짓는데 숙왕(肅王)에서 끝냈고,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과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금경록(金鏡錄)》을 짓는데 정왕(靖王)에서 끝냈으니, 모두 너무 소략하였고 그 외에는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없다. 우리 국왕 전하가 즉위하신 처음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신(臣) 정도전(鄭道傳)과 신(臣) 정총(鄭摠) 등에게 명령하여 고려국사를 찬술하라고 하였다. 신 등이 이 명령을 받고 몹시 걱정이 되어서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본래 자질이 용렬하고 못났으며 재주도 삼장(三長) 삼장(三長)이 없는데다가 기록되어 있는 것도 완전하지 않으니, 아무리 연구하여 잘 절충하려하나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치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 다를 것이 없으니, 다 없어지지 않고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의리(義理)로 따져서 이끌어 펴고 비슷한 일을 확충시키면 그 시비득실을 대부분 다 알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재주도 없고 학문도 변변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곧 착수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왕(元王) 이상은 참람한 기록이 많으니 지금 그전에 종(宗)이라 했던 것은 왕(王)으로 하고, 절일(節日)이라 했던 것은 생일(生日)로 하고, 조(詔)는 교(敎)로 하고, 짐(朕)은 여(予)로 한 것은 명분을 바르게 한 것이요, 조회와 제사는 보통 일이기 때문에 조회에 연고가 있으면 기록하고 임금이 친히 제사지내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예(禮)에서 삼가는 것이요, 재상의 제배(除拜)를 기록한 것은 그 책임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 뽑은 것을 기록한 것은 어진 사람을 찾는 것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대간(臺諫)이 복합(伏閤)한 것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이 빠졌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충신을 나타낸 것이요, 상국(上國)의 사신이 왕래한 것은 아무리 자주 있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천왕(天王)을 높인 것이요, 천재지변과 수해와 한해(旱害)는 아무리 피해가 작아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하늘의 꾸짖음을 근신한 것이요, 사냥하고 잔치한 것은 아무리 자주 있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멋대로 노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국왕 전하는 성스럽고 슬기로운 자질과 높고 밝은 학식으로 옛 전적을 강구하고 연마하여 행동이 예전 명철한 제왕을 본받으시는데 이 책이 유실되고 소략한 속에서 뽑아낸 것이니, 임금과 신하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정치 교화의 득실과 예악의 연혁과 풍속의 좋고 나쁜 것을 구비하여 기록하지는 못하였으나, 《시경(詩經)》에 ‘은나라의 거울이 멀지 않다. 하후(夏后) 시대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요한 정무를 보시는 여가에 보시면 선악취사의 단서와 정사를 하며 백성 다스리는 도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을까 합니다.


동문선 제92권   
 
 
 서(序) 이첨
 
 
목은 선생 문집 서문[牧隱先生文集序]
 

문사(文辭)는 덕(德)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화순(化順) 한 기운이 쌓여 영화로움이 드러나는 것은 가릴 수가 없다. 대체로 문사는 정치와 교화로 더불어 서로 유통되는 것이어서 치란의 시대에 따라 인하여 그 소리가 슬프고 즐거움의 다름이 있으니, 모두 그 성정(性情)에 있는 것을 시로 읊어서 그 속에 쌓인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체제가 세도(世道)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그 음절이 풍토를 따라 변천하는 것이다. 진실로 삼광 오악(三光五嶽)의 신령한 기운을 타고나서 음양이 합했다 떨어졌다 하는 이치를 통찰하고 사물의 무궁한 변화를 환하게 아는 자가 있으면, 그 문장의 웅장하고 전아하며 오묘하고 정화(精華)한 것이 천지의 원기(元氣)를 짝하고 우주의 조화와 같을 수 있으니, 세대의 강쇄(降殺)하는 것과 풍속의 변천되는 것이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한산(韓山) 목은 선생이 이 세상에 나오면서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듣고 기억력이 뛰어나 중국에 들어가서 벽옹(?雍 국학)에 편입되어 3년 만에 졸업하였으니, 그 학문이 넓고 깊고 높고 커서 완전히 자득하였다. 중국의 높은 과거에 뽑혀서 좋은 벼슬에 있다가 영광스럽게 고향으로 돌아와서 곧 본국에서 벼슬하여 40여 년 간 여러 벼슬을 지냈고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사문(斯文)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국가의 모든 사명(辭命)과 제(制) ㆍ 교(敎) ㆍ 명(銘) ㆍ 송(頌)의 글은 반드시 공이 맡았고, 또 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생각하며 후진을 교육해서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었고, 대의(大義)를 설명하고 은미한 말을 분석하며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하게 알아듣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성리(性理)의 학문이 이때부터 밝게 되었다. 공이 다섯 차례나 지공거(知貢擧)로 있어서 당대 명사(名士)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고, 또 여러 해 동안 병으로 벼슬에서 쉬고 있을 때에 여러 손님들을 만나 보는데 아무리 이단자라 하여도 찾아오면 쫓지 않았고, 사대부의 산소 앞에 세우는 비문과 잔치하고 전송하는 글에서부터 중이나 기타 이단에 대한 글까지도 지어 달라면 곧 승낙하고, 붓을 대면 물이 흘러가듯 하니 처음에 생각하지 않고도 지극히 오묘한 지경에 이르고 겸하여 사실을 조리있게 총괄하여 뚜렷이 대가(大家)가 되었으니, 시(詩)와 문(文) 70권이 있다. 그 문장의 왕성하고 풍부한 것은 이른바 참으로 천지의 원기를 짝하고 우주의 조화와 같다는 것이다. 하루는 그 막내아들 사헌 집의(執義) 종선(種善)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선군(先君)의 유고를 목판에 새기는 것이 거의 끝나게 되었으니, 자네가 서문을 지어 달라.”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공의 문하에 다니던 객이다. 공이 알아주셨지만 원래 나의 학술이 너무 소략하여 보답할 길이 없는데, 더군다나 감히 함부로 그분 문집에 서문을 지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공이 중국 예부(禮部)에서 과거 볼 때에 대사도(大司徒) 구양문공(歐陽文公)이 크게 칭찬하고 장원으로 뽑았으니, 그것은 반드시 뜻이 같고 기운이 합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 글을 평론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뜻이 웅장하고 문사(文辭)의 섬세한 것이 마치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천둥과 번개가 번쩍번쩍하며 비와 우박이 한꺼번에 쏟아지다가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그치면 파란 하늘이 깨끗이 씻어 놓은 것 같아서 그 기이하고 위대하여 평범하지 않다’ 하였으니, 만약 이 사람으로 하여금 공의 문집을 보게 하였으면, 응당 똑같은 평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리(義理)는 위로 장자(張子) ㆍ 정자(程子)의 계통을 이었고, 문사는 아래로 소동파 ㆍ 황정견을 내려다 본다고 한 것은 호정(浩亭) 서문에서 모두 말하였고, 넓고 넓어 강하(江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 같다 한 것은 양촌(陽村) 서문에 모두 나왔으니, 내가 무엇을 덧붙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주D-001]삼장(三長) : 역사가가 되는데 필요한 세 가지 장점. 재지, 학문, 식견을 말함.


동문선 제96권   
 
 
 설(說) 이규보
 
 
한씨 사자 명자 설(韓氏四子名字說)
 

한첨서(韓簽書) 공이 그 네 아들의 이름을 짓고 또 자(字)를 지었다. 옛사람은 아들을 서로 바꾸어서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친구인 한산(韓山)의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그 의의를 설명하라 하였다. 색(穡)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상환(尙桓)에 대하여 서경에 이르기를, “씩씩함〔桓桓〕을 숭상한다.” 하였으니, 용기를 내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용기가 앞서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지(知)ㆍ인(仁)ㆍ용(勇)을 세 가지의 통용할 수 있는 덕이라하여 용기를 그 끝에 두었으나, 지혜와 인을 극치에 도달하게 하며,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유지하며 모든 물건을 육성시키게 하는 힘은 용기이다. 지혜는 용기가 아니고서는 선택하지 못할 것이고, 인도 용기가 아니면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굳세도다, 씩씩함이여.” 라는 말로 이를 찬미하였다. 상환(尙桓)에게 백환(伯桓)이라고 자를 지은 것에 대하여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질(尙質)에 대하여는 그 근본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논어》에 이르기를, “문채가 바탕을 이기면 너무 화려하고, 바탕이 문채를 이기면 너무 속되다.” 하였다. 바탕은 꾸밈새의 근본이다. 그런데 꾸밈새가 너무 지나친 지가 오래되었다. 온화한 미와 충신한 독실함이 없어지고 드러나지 않아, 비록 좋은 바탕이 있을지라도 다같이 타락하여 유행하는 세속에서 헤어나는 사람이 없으니, 꾸밈새의 폐해가 극단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오직 꾸밈새만을 숭상하여 혹은 그 근본은 잃어버리고 그 지엽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비록 한쪽으로 치운친 듯 하더라도 바탕을 중히 여기는 것이 낫다. 상질의 자를 중질(仲質)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경(尙敬)에 대하여는 그 마음속에 주장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3백 가지의 예의(禮儀)와 3천 가지의 예모(禮貌)에 대하여 공경이라는 말을 첫머리에 두었으니, 곧 요전(堯典)에서 ‘공경한다’는 말을 먼저 쓴 것과 같은 뜻이다.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공경함에서 출발하여 뜻을 진실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에 이르며, 정치하는 사람은 공경함에서 출발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부부간에 서로 공경한 사실을 역사에서 또 이를 기록하였으니, 농사를 짓는 들판에서도 공경이 없어서는 안될 터인데, 하물며 조정과 향당에서이겠으며 하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이겠는가. 하늘을 섬기며 천제께 제사를 지내 사방의 신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상경의 자를 중경(仲敬)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덕(尙德)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힘써 잃지 않기를 강조하였다. 《서경》에 이르기를, “능히 덕(德)을 밝힌다.” 하였다.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나서 모든 이치를 갖추고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타고난 선(善)이다. 기질이 이를 구속하기도 하며 물욕이 이를 가리우기도 하니, 여기에서 그것을 잃게 된다. 이것을 하늘에서 타고나서 이것을 자기에게서 잃어버리니, 그러므로 이를 허위(虛位)라 한다. 그러나 그 본연의 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순간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굳게 지키며 이것을 확충시키는 것은 곧 나에게 있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낳을 때부터 갖추어있는 것이 덕이고, 잃었다가도 다시 찾는 것이 덕이다. 상덕(尙德)의 자를 계덕(季德)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용(勇)으로 그 본뜻을 전일하게하며, 질(質)로 근본을 삼으며, 경(敬)으로 주장을 삼으며, 덕(德)으로 그 하늘에서 타고난 것을 지키면, 한씨(韓氏)의 형제는 곧 그 선조에 대하여 욕됨이 없을 것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


[주D-001]한첨서(韓簽書) : 첨서는 벼슬 이름. 곧 한 수(韓脩)임.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이며 벼슬이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으로 상당군(相當君)에 봉하였고 특히 글씨에 뛰어 났음.
[주D-002]공경한 사실 : 춘추시대 희공(僖公) 33년에 진(晋)의 각결(?缺)이 들에서 밭을 매는데 그 아내가 점심을 가져왔다. 각결은 그 아내를 대하기를 손님처럼 공경하였으므로 지나다가 이것을 본 구계(臼季)라는 사람이 그를 진문공(晋文公)에 추천하여 대부(大夫)를 삼았다.《좌전》
[주D-003]허위(虛位) :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도와 덕은 빈 자리이다〔道與德爲虛位〕.”라 한 것을 가리킴.


동문선 제96권   
 
 
 설(說) 이규보
 
 
자인설(子因說)
 

동래(東萊) 정자인(鄭子因)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선생이 한산(韓山)에 있을 때에 일찍 문하에 나아가서 《논어》와 《맹자》를 배우고 자(字)에 대한 설(說)을 청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자네의 이름을 가종(可宗)이라고 지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은 친근히 해야 할 사람을 잃지 않는 것뿐이다.’ 하고, 곧 자(字)를 가인(可因)이라고 지어주셨는데 이제 26년이 되었습니다. 그 뜻을 받들어 지내오면서 감히 어긋나지 않게 하였으나 그 의의에 대해서는 당시에 청하지 못하여서 지금까지 유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선생은 그 해설을 완전히 들려 주십시요.”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지금일이라도 늦지 않다. 억(抑)이라는 시에서 경계한 말이 이미 매우 분명하지 아니한가. 하물며 자인(子因)은 나이가 아직 50이 못되었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으니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나 내가 늙었으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은 넓으며 큰데도 오히려 서로 의지하며 붙어있는데, 더구나 인간 윤리의 아름다움은 기강과 풍화가 관계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임금과 신하는 서로 보좌하며 친구끼리는 서로 충고함을 인하여 유지되는 것이니, 임금이 훌륭한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도 서로 인연이 없으면 그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요(堯)ㆍ순(舜)이 마음이 서로 맞은 것과 후대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난 것에서 모두 그 사실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서로 의사가 맞지 않을 경우에는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다가 그만두고 가기도하며 담을 넘어서 피하여 가기도 한다. 그가 이렇게 피하여 도망하는 것은 반드시 그의 마음속에 확고히 변하지 않는 의지가 있는 것이며, 반드시 그 정세가 붙어있어서는 안될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슬프다. 성인이 일어나서 만물이 모두 그를 쳐다보며 구름이 용(龍)을 따르듯 바람이 범을 따르듯이 되어 기운과 기회가 서로 합하는 것이 아교(阿膠)와 윷이 서로 배합되는 것 같아서 어그러짐이 없어, 말하면 듣고 계획을 세우면 그대로 들어주어서 공적을 이루며 정치가 잘 되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서로 인연을 맺은 효과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자인(子因)은 어려서 글을 읽고 과거를 통하여 벼슬길에 들어서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그가 인연 맺은 사람이 없다 할 수 없다. 그러나 농촌에 은퇴하여 은사(隱士)처럼 있으니, 그가 인연을 맺은 사람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이제라도 벼슬자리를 주어 불러들이면 곧 가고 교체되면 곧 그만두니, 유연(悠然)히 그런데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 같아, 자인(子因)의 학문은 지키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날에 출처(出處)의 구분을 능히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 자인(子因)은 앞으로 그 태도를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이에 자인설(子因說)을 지어 그를 권면한다.


[주D-001]가인(可因) : 이것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에, “인연을 맺는데 있어서 그 친근히 해야 할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높일 만하다〔因不失 其親 亦可宗也〕.” 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2]억(抑) : 춘추 시대에 위무공(衛武公)이 59세에 자기를 반성하며 왕(王)에게 간하는 뜻을 나타내어 지은 시(詩). 곧 나이가 많아도 학문에 대한 마음을 더욱 굳게 가지는 예로 인용한 것.

 

동문선 제96권   
 
 
 설(說)
 
 
한씨 사자 명자 설(韓氏四子名字說)
 

한첨서(韓簽書) 공이 그 네 아들의 이름을 짓고 또 자(字)를 지었다. 옛사람은 아들을 서로 바꾸어서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친구인 한산(韓山)의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그 의의를 설명하라 하였다. 색(穡)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상환(尙桓)에 대하여 서경에 이르기를, “씩씩함〔桓桓〕을 숭상한다.” 하였으니, 용기를 내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용기가 앞서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지(知)ㆍ인(仁)ㆍ용(勇)을 세 가지의 통용할 수 있는 덕이라하여 용기를 그 끝에 두었으나, 지혜와 인을 극치에 도달하게 하며,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유지하며 모든 물건을 육성시키게 하는 힘은 용기이다. 지혜는 용기가 아니고서는 선택하지 못할 것이고, 인도 용기가 아니면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굳세도다, 씩씩함이여.” 라는 말로 이를 찬미하였다. 상환(尙桓)에게 백환(伯桓)이라고 자를 지은 것에 대하여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질(尙質)에 대하여는 그 근본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논어》에 이르기를, “문채가 바탕을 이기면 너무 화려하고, 바탕이 문채를 이기면 너무 속되다.” 하였다. 바탕은 꾸밈새의 근본이다. 그런데 꾸밈새가 너무 지나친 지가 오래되었다. 온화한 미와 충신한 독실함이 없어지고 드러나지 않아, 비록 좋은 바탕이 있을지라도 다같이 타락하여 유행하는 세속에서 헤어나는 사람이 없으니, 꾸밈새의 폐해가 극단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오직 꾸밈새만을 숭상하여 혹은 그 근본은 잃어버리고 그 지엽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비록 한쪽으로 치운친 듯 하더라도 바탕을 중히 여기는 것이 낫다. 상질의 자를 중질(仲質)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경(尙敬)에 대하여는 그 마음속에 주장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3백 가지의 예의(禮儀)와 3천 가지의 예모(禮貌)에 대하여 공경이라는 말을 첫머리에 두었으니, 곧 요전(堯典)에서 ‘공경한다’는 말을 먼저 쓴 것과 같은 뜻이다.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공경함에서 출발하여 뜻을 진실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에 이르며, 정치하는 사람은 공경함에서 출발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부부간에 서로 공경한 사실을 역사에서 또 이를 기록하였으니, 농사를 짓는 들판에서도 공경이 없어서는 안될 터인데, 하물며 조정과 향당에서이겠으며 하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이겠는가. 하늘을 섬기며 천제께 제사를 지내 사방의 신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상경의 자를 중경(仲敬)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덕(尙德)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힘써 잃지 않기를 강조하였다. 《서경》에 이르기를, “능히 덕(德)을 밝힌다.” 하였다.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나서 모든 이치를 갖추고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타고난 선(善)이다. 기질이 이를 구속하기도 하며 물욕이 이를 가리우기도 하니, 여기에서 그것을 잃게 된다. 이것을 하늘에서 타고나서 이것을 자기에게서 잃어버리니, 그러므로 이를 허위(虛位)라 한다. 그러나 그 본연의 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순간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굳게 지키며 이것을 확충시키는 것은 곧 나에게 있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낳을 때부터 갖추어있는 것이 덕이고, 잃었다가도 다시 찾는 것이 덕이다. 상덕(尙德)의 자를 계덕(季德)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용(勇)으로 그 본뜻을 전일하게하며, 질(質)로 근본을 삼으며, 경(敬)으로 주장을 삼으며, 덕(德)으로 그 하늘에서 타고난 것을 지키면, 한씨(韓氏)의 형제는 곧 그 선조에 대하여 욕됨이 없을 것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


[주D-001]한첨서(韓簽書) : 첨서는 벼슬 이름. 곧 한 수(韓脩)임.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이며 벼슬이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으로 상당군(相當君)에 봉하였고 특히 글씨에 뛰어 났음.
[주D-002]공경한 사실 : 춘추시대 희공(僖公) 33년에 진(晋)의 각결(?缺)이 들에서 밭을 매는데 그 아내가 점심을 가져왔다. 각결은 그 아내를 대하기를 손님처럼 공경하였으므로 지나다가 이것을 본 구계(臼季)라는 사람이 그를 진문공(晋文公)에 추천하여 대부(大夫)를 삼았다.《좌전》
[주D-003]허위(虛位) :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도와 덕은 빈 자리이다〔道與德爲虛位〕.”라 한 것을 가리킴.


동문선 제97권   
 
 
 설(說)
 
 
맹주설(孟周說)
 

이색(李穡)

계림(鷄林) 이씨(李氏)로서 관직이 오재(五宰)에 이르고, 월성군(月城君)을 봉한 이가 있는데, 그 장증손(長曾孫)이 정보(廷?)이다. 대신(臺臣)이 되어 중한 명망이 있었는데, 나에게 자(字)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마침 《운회(韻會)》를 찾아 보니 보(?) 자 밑에 해석하기를 보(輔)라 하였다. 이에, ‘주나라 왕실의 보좌’라는 말을 취하여 자를 맹주(孟周)라고 하였다. 국가에서 인재를 쓰는 것이 마치 수레에 보(輔)를 두는 것과 같으므로 옛글에 말하기를, “너의 보(輔)를 버리지 말라. 너의 복(輻)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고 시대의 난국을 구제하는 것은 수레가 무거운 짐을 싣는 것 같으므로 말하기를, “마침내 지극히 험한 곳을 넘었으니 일찍이 뜻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인재를 써서 시대의 난국을 구제한 것이 주나라의 정치를 따를 수 없는 이유이다. 대개 주(周)라는 것은 주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이름이요, 주남(周南)이라는 것은 주공(周公)의 교화를 남방에 입게 한 것이니 풍(風)의 바른 것이다. 풍화(風化)가 아름다우면 인심이 돌아오므로 말하기를, “행하여 주나라로 돌아오니 만민의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사군자(士君子)가 어려서는 배우고, 장성해서는 배운 것을 행하여 집에서부터 시작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마치어, 임금을 착하게 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며, 풍속을 바꾸어서 반드시 그 사람들을 요(堯)ㆍ순(舜)과 같이 만들고, 그 시대를 당우(唐虞)와 같이 만들어야 한다. 하(夏)ㆍ는(殷)으로부터 주나라에 이르러 바르게 되었으니, 대개 주나라 이후에는 천하에 착한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뜻이 있는 선비가 발돋움하고 바라볼 것은 주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공ㆍ소공(召公)ㆍ필공(畢公)이 왕실을 보좌한 것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실려 있어서 찬연하게 눈에 비치니, 맹주도 역시 거기에 마음을 두는가. 주나라에 마음을 둔 연후에야 오늘날 조정의 보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하도(河圖) 낙서(洛書)를 보는 자는 우(禹)임금을 생각하고, 청묘(淸廟)에 들어가면 주 문왕(周文王)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맹주가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한다면, 그 주나라의 마음을 맹주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주나라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관저(關雎)와 인지(麟趾) 에 마음을 둘 뿐이다. 관저와 인지는 문왕의 지위에 있는 자들이 바랄 것이지, 맹주가 마땅히 사모할 바는 아니다. 비록 그렇지만 시경에 말한 대로 제제(濟濟)하게 선비가 많아 문왕이 이를 힘입어 편안하였으니, 문왕이 아름다운 교화를 일으켜서 집안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미쳤으니, 어찌 많은 선비의 도움이 없이 되겠는가. 선비가 비록 미천하나 반드시 천하의 일을 자임(自任)하는 것은, 장차 천자를 도와서 그 뜻을 행하고 그 배운 것을 베풀려는 것이다. 맹주는 의심하지 말라. 중니(仲尼)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쓰는 자가 있다면 내가 동쪽 주나라를 만들 것이다.” 하였으니, 주나라의 도(道)를 동방에 일으키는 것이 오늘에 있지 않겠는가. 맹주는 의심하지 말라.


[주D-001]운회(韻會) : 한문 글자를 성음을 구별하여 운을 따라 모아놓은 책.
[주D-002]풍(風)의 바른 것 : 풍(風)은 《시경》에 있는 국풍(國風)을 말한 것이나, 원래는 민요(民謠)라는 말이다. 주(周)나라 초년에 정치가 청명할 때에는 바른 풍화가 있었으므로, 그 민요가 바른 민요라고 해서 정풍(正風)이 되고, 정치가 문란하여 진 뒤에 지어진 민요는 변칙적인 민요라 하여 변풍(變風)이라 하였는데, 여기 주남(周南) 편은 주나라 초년의 작이므로 풍의 바른 것이라는 것이다.
[주D-003]관저(關雎)와 인지(麟趾) : 모두가 《시경》〈주남편(周南篇)〉에 있는 시들이다. 관저는 부부의 금실이 화목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켰다는 시이고, 인지는 부부가 화목하여 그 자손이 감화되었다는 시이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지현설(之顯說) 
 

문생(門生)인 좌부대언(左副代言) 강은(姜隱)의 자(字)는 지현(之顯)인데, 나에게 자설(字說)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은(隱)이라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 이치는 은미하나 사물에 나타나는 것은 그 자취가 찬연하니, 은(隱)과 현(顯)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체(體)와 용(用)은 한 근원인 것이 분명하다. 현(顯)에 대한 설명을 다해 보겠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만물이 제각기 다르게 흩어져 있어,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펼쳐져 나열되어 있고 산악이 솟아 있고 물줄기가 흘러가니, 이는 ‘드러난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까닭을 아는 자가 적다. 또 임금을 높이고 신하는 낮추어 백 가지 제도가 닦아 갖추어 지고, 시서(詩書)ㆍ예악(禮樂)이 성하게 일어나며,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빛나게 꾸며져 있으니, 이 또한 ‘드러난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유래(由來)된 것을 아는 자 또한 적다. 사람의 마음에서 찾아 보면 거울처럼 비어 있고 저울처럼 공평하여, 사물이 앞에 오면 조금도 사(私)가 없으며, 구름이 떠가듯 물이 흐르듯 하여 사물이 지나가면 조금도 막히는 것이 없다. 체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용은 감촉하면 마침내 통하여 광명하고, 찬란하며 순수하고 독실하다. 은(隱)이라고 하자니 용(用)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두 나타나 있고, 현(顯)이라고 하자니 체(體)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광대하고도 은미하다.” 하였으니, 귀신(鬼神)의 덕과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顯)의 도(道)는 내 마음에서 보아서 천덕(天德)에 통달할 뿐이다. 사군자(士君子)는 그 처한 지위대로 행하여 가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으며, 가슴 속이 쇄락(?落)한 것이 광풍(光風)ㆍ제월(霽月)과 같아서, 음사(陰邪)가 그 정상(情狀)을 숨기지 못하고 귀(鬼)와 역(域)이 그 형상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지현(之顯)은 소년으로 과거에 뽑혀 대(臺)와 성(省)을 고루 거쳤으니, 그 행적을 상고해 보면 군자답다. 강하고 굳센 기운은 간사(姦邪)에 부닥치면 곧 꺾이게 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바탕은 효도와 우애를 도탑게 하여, 서로 감화되게 하여, 평생에 행한 것이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현(顯)의 도가 행하여진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나더러 숨긴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너희에게 숨김이 없다.” 하였으니, 공자는 밝기가 일월과 같았다. 지현이여, 우러러 사모하고 가슴에 간직할지어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맹양설(孟陽說)
 

정유년(丁酉年) 과거에 급제한 이좌랑(李佐郞)이 그 친구 정자인(鄭子因)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자(字)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서(李舒)씨는 나의 친구인데 어찌 편지가 없는가. 이것은 예를 잃어버린 것이니, 나는 자(字)에 대하여 말하기 어렵다.” 하였다. 내가 이서씨를 아낀 지가 오래다. 처음에 진사 시험을 볼 때에 갑자기 자기가 지은 과문(科文)을 가지고 내 집에 와서 시정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그 용모를 보니 매우 훌륭하고 그 기운이 청수(淸粹)하므로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의 글을 읽어 보니 정확하고 성실하면서도 속되지 않아 조금만 고치니 크게 어그러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또 배나 기뻐하였다. 왕래한 지 오래지 않아서 과연 고시관(考試官)의 취한 바가 되어, 몇 해 안 되어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풍채가 여러 사람들 중에서 뛰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정언은 반드시 크게 쓰일 것이다.” 하였다. 시골에서 부모를 모시고 있어 나오지 않은 지가 □해나 되었는데, 비록 부르는 명이 있어도 응하지 않으니 세상을 피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제 그 이모부 진씨(陣氏)가 서울로 오는 편에 편지를 써서 내게 고하기를, “지난 번 자인(子因)이 갈 때에 선생한테 청하여 내 자를 지어 오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와 같은 무리가 감히 직접 선생께 여쭐 처지가 못 되고, 자인이 선생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그를 통하여 선생의 말씀을 얻어 나의 영광으로 삼으려 하여 미처 나의 실례된 것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께서 나를 더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 불가한 까닭을 밝게 말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선생께서 저를 가르칠만 하다고 여기신 것이니, 얼마나 큰 다행한 일입니까. 원하건대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편다는 것은 양기(陽氣)의 일이다. 봄 기운이 발양하면 모든 만물이 드디어 화창하여, 화기가 흘러 넘쳐 간격 없이 두루 젖어드니, 세상에 비유하면 당우(唐虞)의 때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를 당하여는 임금과 신하가 모두 성인이고 예(禮)와 악(樂)이 크게 행하여, 사흉(四凶)의 무리는 마치 작은 구름이 푸른 하늘에 있는 것과 같다가, 그것이 사라진 뒤에는 밝은 해가 중천에 있어서 광채가 찬란한 것과 같으니 그 교화가 입혀지고 덕이 운행됨이 이때에 융성하게 된다. 지금 배우는 자들이 조금만 지식이 있는 이는 반드시 말하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이서씨로서 요ㆍ순의 세상에 뜻을 두지 않으리라고 나는 믿지 못하겠다. 이에 자를 맹양(孟陽)이라 지으니, 맹양은 그 이름과 자의 뜻대로 실천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말하기를, “나의 이름을 ‘편다’라고 한 것은 거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다면, 노씨(老氏)에 가까운 것이니, 이것은 음이요 양이 아니다. 양은 군자이니 바라건대 서로 더불어 힘쓰자.
동문선 제97권   
 
 
 설(說)
 
 
호연 설 증 정보주 별 (浩然說贈鄭甫州別)
 

호연(浩然)한 기운은 곧 천지의 시초이니, 천지가 그것으로 제 위치에 놓인다.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니 만물이 그것으로 발육된다. 오직 이 기운을 함축하여 체(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운이 발하여 용(用)이 되는 것이다. 이 기운은 가장자리도 없고 틈도 없으며, 후박(厚薄)ㆍ청탁(淸濁)ㆍ이적(夷狄)ㆍ중화(中華)의 구별이 없으니, 호연이라 이름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요(堯)의 인과 순(舜)의 지혜와 공자의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은 모두 스스로 강(彊)하여 쉬지 않고, 순일(純一)함이 그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발현된 것이다. 오직 강하기 때문에 능히 천하의 사물에 흔들리지 않으며, 천하의 사물이 저지(沮止)할 수 없기 때문에 쉬지 않으며, 오직 순일하기 때문에 능히 천하의 사물에 섞이지 않으며, 천하의 사물이 간단(間斷)하게 할 수 없으므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덕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높아지고 공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서, 당세에 나타나고 후세에 무궁토록 전하는 것이니, 이른바 호연이라는 것이 그 속에 가득찬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옛날의 성인은 마음으로 이것을 보존하고 몸으로 살펴, 행하는 일에 드러나서 말로 운운(云云)할 필요가 없었다. 맹가(孟軻)씨는 이 도(道)가 날마다 쇠퇴해지는 것을 근심하여 그 실마리를 끄집어내어 천하의 선비를 분발시켜, 그 둔한 것을 채찍질하여 날카로운 데로 나아가게 하였으니, 이에 양기(養氣) 즉, 기운을 기른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맹가씨가 어찌 과장하여 말한 것이겠는가마는, 여기에 종사하는 자가 적으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보주 자사(甫州刺史) 정군(鄭君)이 나에게 말하기를, “전에 내가 이름을 우(瑀)라고 지었을 때에, 그대가 내 자를 온숙(溫叔)이라 지어 주었는데, 내가 지금 우(寓)로 고쳤으니, 원컨대 그대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자를 지어 달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크다, 이름이여. 천지 사방을 우(寓)라고 하는데, 천지 사방 가운데 서서 좌편으로도 보고 우편으로도 돌아보니 그것이 크지 않은가. 지극히 작은 몸으로 호연(浩然)한 기운을 길러 천지의 사이에 가득차게 하는 그것이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천지와 만물은 일체이므로 사람의 한 몸에 천지와 만물이 갖추어졌으니, 그 몸을 닦는 데는 먼저 그 뜻을 가져야 하고 뜻을 가진 다음에야 기운을 기를 수 있다. 점차로 쉬지 않고 그치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이른바 조그마한 몸이 위와 아래로 천지와 더불어 함께하게 되어, 초목ㆍ금수와 같이 잠깐 동안이라도 함께 썩지 않고 빛을 천백 년 후까지 끼칠 것이다. 초목ㆍ금수와 더불어 잠깐 동안이라도 썩지 않아서 빛을 천백 년 후까지 끼치는 것은 곧 호연한 기운이 천지 사이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맹가씨는 크고 강하고 곧은 것으로 말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강(彊)하고 순일한 것으로 호연(浩然)을 풀이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 뜻을 주석(注釋)하고 그 말은 주석하지 않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 이러하다.” 하였다. 정군의 성품은 닦이고 깨끗하며 강개(慷慨)하여, 당세의 사업에 뜻은 있으나 그 기운을 기르는 데에는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호연(浩然)으로 자를 짓는 것이니, 바라건대, 그 이름대로 실천함이 있을지어다. 보주로 부임함에 있어 글을 지어 주기를 요청하기에, 드디어 써서 가는 데에 전송하는 시(詩)의 머리에 둔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호연 설 증 정보주 별 (浩然說贈鄭甫州別)
 

호연(浩然)한 기운은 곧 천지의 시초이니, 천지가 그것으로 제 위치에 놓인다.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니 만물이 그것으로 발육된다. 오직 이 기운을 함축하여 체(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운이 발하여 용(用)이 되는 것이다. 이 기운은 가장자리도 없고 틈도 없으며, 후박(厚薄)ㆍ청탁(淸濁)ㆍ이적(夷狄)ㆍ중화(中華)의 구별이 없으니, 호연이라 이름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요(堯)의 인과 순(舜)의 지혜와 공자의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은 모두 스스로 강(彊)하여 쉬지 않고, 순일(純一)함이 그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발현된 것이다. 오직 강하기 때문에 능히 천하의 사물에 흔들리지 않으며, 천하의 사물이 저지(沮止)할 수 없기 때문에 쉬지 않으며, 오직 순일하기 때문에 능히 천하의 사물에 섞이지 않으며, 천하의 사물이 간단(間斷)하게 할 수 없으므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덕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높아지고 공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서, 당세에 나타나고 후세에 무궁토록 전하는 것이니, 이른바 호연이라는 것이 그 속에 가득찬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옛날의 성인은 마음으로 이것을 보존하고 몸으로 살펴, 행하는 일에 드러나서 말로 운운(云云)할 필요가 없었다. 맹가(孟軻)씨는 이 도(道)가 날마다 쇠퇴해지는 것을 근심하여 그 실마리를 끄집어내어 천하의 선비를 분발시켜, 그 둔한 것을 채찍질하여 날카로운 데로 나아가게 하였으니, 이에 양기(養氣) 즉, 기운을 기른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맹가씨가 어찌 과장하여 말한 것이겠는가마는, 여기에 종사하는 자가 적으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보주 자사(甫州刺史) 정군(鄭君)이 나에게 말하기를, “전에 내가 이름을 우(瑀)라고 지었을 때에, 그대가 내 자를 온숙(溫叔)이라 지어 주었는데, 내가 지금 우(寓)로 고쳤으니, 원컨대 그대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자를 지어 달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크다, 이름이여. 천지 사방을 우(寓)라고 하는데, 천지 사방 가운데 서서 좌편으로도 보고 우편으로도 돌아보니 그것이 크지 않은가. 지극히 작은 몸으로 호연(浩然)한 기운을 길러 천지의 사이에 가득차게 하는 그것이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천지와 만물은 일체이므로 사람의 한 몸에 천지와 만물이 갖추어졌으니, 그 몸을 닦는 데는 먼저 그 뜻을 가져야 하고 뜻을 가진 다음에야 기운을 기를 수 있다. 점차로 쉬지 않고 그치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이른바 조그마한 몸이 위와 아래로 천지와 더불어 함께하게 되어, 초목ㆍ금수와 같이 잠깐 동안이라도 함께 썩지 않고 빛을 천백 년 후까지 끼칠 것이다. 초목ㆍ금수와 더불어 잠깐 동안이라도 썩지 않아서 빛을 천백 년 후까지 끼치는 것은 곧 호연한 기운이 천지 사이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맹가씨는 크고 강하고 곧은 것으로 말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강(彊)하고 순일한 것으로 호연(浩然)을 풀이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 뜻을 주석(注釋)하고 그 말은 주석하지 않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 이러하다.” 하였다. 정군의 성품은 닦이고 깨끗하며 강개(慷慨)하여, 당세의 사업에 뜻은 있으나 그 기운을 기르는 데에는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호연(浩然)으로 자를 짓는 것이니, 바라건대, 그 이름대로 실천함이 있을지어다. 보주로 부임함에 있어 글을 지어 주기를 요청하기에, 드디어 써서 가는 데에 전송하는 시(詩)의 머리에 둔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맹의설(孟儀說)
 

지정(至正) 무신년에 내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는데, 생도가 매우 많아서 나누어 오경(五經)을 연구하게 하였다. 《서경(書經)》을 연구하는 자가 8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 유경(劉敬)씨의 행동이 여러 사람에게 뛰어나서 과업(課業)을 받은 뒤에는 단정히 앉아서 읽기를 쉬지 않았다. 칙천지명 유시유기(?天之命惟時惟幾)라는 여덟 자에 대하여 차분하게 여러 번 되풀이하였는데, 그 소리가 길게 나서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였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손가락질하고 웃으나 유경씨는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그 마음의 한결같음을 알 수 있다. 오래 된 뒤에 성균관 안이 모두 탄복하였다. 신해년에 내가 외람되게 공거(貢擧)를 맡았는데 유경씨가 시의(詩義)로 합격하였으니, 《시경》과 《서경》을 통하였다 할 수 있다. 학관(學官)에 보직하였다가 공로로 참직(參職)을 제수하여 가게 되자, 성균관의 여러 교관들이 조정에 청하여, 유경씨가 순유박사(諄誘博士)를 겸한 지 지금 5년이 되었다. 그러나 여태껏 고위직에 승진하지 못하였는데도 편안히 여겨 밖으로 사모하는 것이 없으니, 그 마음에 기른 것이 도달한 바가 없고서야 어찌 그러하겠는가. 이제 자(字)에 대한 설명을 나에게 청하기를, “제가 다행히 친구들의 괄시를 받지 않아서 저의 자(字)를 맹의(孟儀)라고 하였으니, 그에 대해 가르침을 받기 원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요전(堯典)에 흠(欽)을 첫머리로 하였고 문왕편(文王篇)에 경(敬)을 일컬었으니, 자네가 언제나 사모하는 것이 아닌가. ‘빛이 사방에 입힌다’는 것도 흠(欽)에서부터 나오고, ‘해가 뜨는 먼 지역까지 덕(德)이 크게 입혀진다’는 것도 경(敬)에서부터 나온다. 요임금이 사악(四岳)에게 물을 때나 관(官)과 사당에 있을 때에, 편안하면서도 부지런히 힘써, 움직이지 않아도 백성이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도 백성이 믿는 것은 그의 빛나고 성한 위의(威儀)이다. 천 년 뒤에도 우러르기를 하루와 같이 하니, 아, 성하다.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말하기를, ‘요(堯)ㆍ순(舜)과 문왕(文王)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아는 성인이니 감히 바랄 수가 없다. 감히 바랄 수가 없다.’ 하니, 의당 세상의 도(道)가 날마다 저하되고 사람의 마음이 날마다 박하여져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다. 성인이건 현인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불초한 사람이건 모두 동포이니, 부모가 여러 자식에게 준 것이 어찌 후하고 박함이 있겠는가. 사람이 태어나자 오직 욕심만 따르기 때문에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에 하늘이 어질게 사랑하여 뛰어난 자를 명하여 스승이 되고 임금이 되게 하여, 그 본래의 착함을 회복하게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만방을 화합하게 하였다’는 것과, ‘만민을 모두 화합하게 하였다’는 것이 빈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행해야 할 떳떳한 도리와 사물의 법칙은 그 안팎이 같으며 정조(精粗)에 있어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하늘이 자유롭게 운행하는 것은 한 가지 일도 인(仁)이 아닌 것이 없어서, 말과 행실이 나타나고 사체(四體)에 베풀어져서 환하게 흘러넘치니, 예의 삼백(禮義三百)과 위의 삼천(威儀三千)의 넉넉하고 큰 것이 어찌 반드시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해지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집집마다 표창할 수 있다.’ 한 것이다. 비록 그러나 먼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시작한다. 뜰 안을 청소하는 것은 백성의 법칙이요,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힘써야 할 것이니, ‘의관을 바르게 하고 높은 곳을 바라보라.’〔正其衣冠 尊其膽視〕고 하지 않았는가. ‘얼굴빛과 말 기운이 신실한 데 가까우면 비루한 것이 멀어진다.’ 함은 증자의 말이다. 증자가 공자의 도를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맹의(孟儀)가 그것을 체험하면 비로소 하늘의 명을 삼갈 수 있을 것이요, 비로소 넉넉하고도 큰 예의(禮義)와 위의(威儀)의 경지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순중설(純仲說) 
 

갑인과(甲寅科) 장원(狀元) 김정언(金正言)이 말하기를, “내 이름이 자수(子粹)이기 때문에 내 자(字)를 순중(純仲)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은 그 뜻을 설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장차 가슴에 간직하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비유하면 제패(?稗)와 같다. 학문이 박잡하고 말이 망발되니 어떻게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순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나타나지 않을까 문왕(文王)의 덕이 순수함이여,’ 하였으니, 이는 문왕이 하늘과 더불어 공(功)이 같은 묘함을 찬양한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감히 바랄 바는 아니나, 그러나 문왕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자는 평범한 백성이니, 저도 어찌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말을 써서 자를 순중(純仲)이라 하였는데, 대개 강(剛)하고 굳세고 순수하고 정(精)한 것은 건(乾)의 덕이니, 건의 덕은 문왕과 같지 않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선비는 현인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되기를 바라고, 성인은 하늘 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이 자부하는 것이 또한 얕지 않으니 말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하늘의 명령이 심원(深遠)하여 쉬지 않으니,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운행하여 쉬지 않고 커서 빠뜨림이 없는 것이 어찌 주재(主宰)하는 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일월과 성신이 상(象)을 보이는 것과 풍우(風雨)와 상로(霜露)가 가르침이 되는 것이 어찌 일찍이 잠깐이라도 어긴 적이 있는가. 비록 꾸짖는 것이 위에서 보이고 재앙이 아래에서 일어나더라도 또 잠깐일 뿐이요, 그 생성(生成)하고 함육(涵育)하는 조화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 같으니, 그 다함이 없는 것과 순일(純一)한 것을 알 수 있다. 건괘의 대상(大象)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이를 보고서 스스로 힘써 쉬지 않는다.” 하였으니, 성인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깊다 하겠다. 군자가 스스로 힘쓰면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으면 폐하지 않으니, 흔들리지 않고 폐하지 않는 것은 그 지극한 데 이르려는 것이다.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하늘보다 먼저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天時)를 받드니, 하늘 같이 되기를 바라는 묘한 것이 이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문왕을 바랄 뿐이 아닌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은 내 스승이다. 주공이 어찌 나를 속였으랴.” 하였다. 주공이 문왕을 스승으로 하여 《주역》의 괘효(卦爻)를 도왔으니, 이것은 성인이 성인을 스승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을 말하는 자가 모두 주공에게로 돌린다. 붉은 신[赤?]이 진중한 것을 볼 때면 그 마음이 어찌 순일하지 않겠는가. 문왕의 관저와 인지의 교화가 파부(破斧)ㆍ결장(缺?)의 때에도 행하여 풍(風)의 변한 것이 다시 바른 데로 돌아왔으니, 순일하여 쉬지 않은 소치가 아닌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역경에 처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주공이 성인으로도 이런 때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디로 좇아서 그 통달한 효도를 알았겠는가. 슬프다, 순일한 법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순중이 장원에 뽑혀 언관(言官)이 되었으니 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있다가 당시에 버려졌으나, 그러나 그 마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아름답게 여겨 자설(字說)을 지어서 권면하니, 부디 지키는 바가 있게 하라. 지킴이 있으면 순일해질 것이다.


[주D-001]제패(?稗) : 제(?)는 쭉정이란 말이고 패는 원래 자귀로 깎아낸 나뭇 가지의 껍질이라는 말이니, 자기 자신을 그런 쓸모 없는 물건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2]파부(破斧)ㆍ결장(缺?) : 부는 도끼이고 장(?)은 자루 꽂는 구멍이 네모진 도끼이니, 모두 무기로 쓰던 것이다. 그 무기가 깨어지고 이지러지도록 전쟁에서 고생하였건만, 임금의 교화가 잘 실천되어 딴 마음을 먹지 않았다는 말이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순중설(純仲說) 
 

갑인과(甲寅科) 장원(狀元) 김정언(金正言)이 말하기를, “내 이름이 자수(子粹)이기 때문에 내 자(字)를 순중(純仲)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은 그 뜻을 설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장차 가슴에 간직하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비유하면 제패(?稗)와 같다. 학문이 박잡하고 말이 망발되니 어떻게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순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나타나지 않을까 문왕(文王)의 덕이 순수함이여,’ 하였으니, 이는 문왕이 하늘과 더불어 공(功)이 같은 묘함을 찬양한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감히 바랄 바는 아니나, 그러나 문왕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자는 평범한 백성이니, 저도 어찌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말을 써서 자를 순중(純仲)이라 하였는데, 대개 강(剛)하고 굳세고 순수하고 정(精)한 것은 건(乾)의 덕이니, 건의 덕은 문왕과 같지 않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선비는 현인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되기를 바라고, 성인은 하늘 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이 자부하는 것이 또한 얕지 않으니 말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하늘의 명령이 심원(深遠)하여 쉬지 않으니,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운행하여 쉬지 않고 커서 빠뜨림이 없는 것이 어찌 주재(主宰)하는 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일월과 성신이 상(象)을 보이는 것과 풍우(風雨)와 상로(霜露)가 가르침이 되는 것이 어찌 일찍이 잠깐이라도 어긴 적이 있는가. 비록 꾸짖는 것이 위에서 보이고 재앙이 아래에서 일어나더라도 또 잠깐일 뿐이요, 그 생성(生成)하고 함육(涵育)하는 조화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 같으니, 그 다함이 없는 것과 순일(純一)한 것을 알 수 있다. 건괘의 대상(大象)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이를 보고서 스스로 힘써 쉬지 않는다.” 하였으니, 성인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깊다 하겠다. 군자가 스스로 힘쓰면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으면 폐하지 않으니, 흔들리지 않고 폐하지 않는 것은 그 지극한 데 이르려는 것이다.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하늘보다 먼저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天時)를 받드니, 하늘 같이 되기를 바라는 묘한 것이 이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문왕을 바랄 뿐이 아닌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은 내 스승이다. 주공이 어찌 나를 속였으랴.” 하였다. 주공이 문왕을 스승으로 하여 《주역》의 괘효(卦爻)를 도왔으니, 이것은 성인이 성인을 스승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을 말하는 자가 모두 주공에게로 돌린다. 붉은 신[赤?]이 진중한 것을 볼 때면 그 마음이 어찌 순일하지 않겠는가. 문왕의 관저와 인지의 교화가 파부(破斧)ㆍ결장(缺?)의 때에도 행하여 풍(風)의 변한 것이 다시 바른 데로 돌아왔으니, 순일하여 쉬지 않은 소치가 아닌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역경에 처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주공이 성인으로도 이런 때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디로 좇아서 그 통달한 효도를 알았겠는가. 슬프다, 순일한 법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순중이 장원에 뽑혀 언관(言官)이 되었으니 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있다가 당시에 버려졌으나, 그러나 그 마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아름답게 여겨 자설(字說)을 지어서 권면하니, 부디 지키는 바가 있게 하라. 지킴이 있으면 순일해질 것이다.


[주D-001]제패(?稗) : 제(?)는 쭉정이란 말이고 패는 원래 자귀로 깎아낸 나뭇 가지의 껍질이라는 말이니, 자기 자신을 그런 쓸모 없는 물건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2]파부(破斧)ㆍ결장(缺?) : 부는 도끼이고 장(?)은 자루 꽂는 구멍이 네모진 도끼이니, 모두 무기로 쓰던 것이다. 그 무기가 깨어지고 이지러지도록 전쟁에서 고생하였건만, 임금의 교화가 잘 실천되어 딴 마음을 먹지 않았다는 말이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중영설(仲英說) 
 

나옹(懶翁)의 제자에 각웅(覺雄)이란 이가 있는데, 호는 중영(仲英)이다. 일찍이 서기(書記)가 되었는데, 옹이 매우 사랑하였다. 옹이 입적(入寂)한 뒤에 중영의 무리가 6ㆍ7년 동안 부도(浮圖) 옆에 있으며 배회하고 떠나가지 못하였다. 하루는 상당(上黨) 한맹운(韓孟雲)이 쓴 중영(仲英) 두 글자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는데, 우리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니 우리 죄이다. 우리 스승은 지공(指空)을 스승으로 하고 또 평산(平山)을 스승으로 하여 달려 다닌 것이 수천리요 또 수천리여서, 발이 부르튼 것도 근심하지 않고, 마침내 마음이 편안한 뒤에 한가하게 돌아왔으니, 삼산(三山)ㆍ이수(二水)의 기록에 바쳤고, 이로움을 베푼 것이 동쪽 땅에 두루하였다. 우리 스승은 두 번 이 세상에 온 사람이지만 달려다니기를 오히려 이렇게 하였거늘, 하물며 우리들이겠는가. 산에 놀고 내를 건너고 스승을 찾고 도(道)를 묻는 것이 시기를 잃을 수가 없으니 선생은 가르침이 있기를 바란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상인의 학문은 나의 아는 바가 아니요, 내가 배운 것은 또 상인이 외도(外道)로 여기는 것이니 내가 장차 어떻게 책임을 맡겠는가.” 하였다. 내가 보건대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가 각각 한 태극(太極)이다. 동물 중에 양(陽)을 얻은 것이 웅(雄)이 되고, 식물 중에서 양을 얻은 것이 영(英)이 된다. 대개 수컷이 된 연후에야 암컷이 받을 수 있고, 꽃봉우리가 된 연후에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대화(大和)를 보합(保合)하여 정고(貞固)한 데로 돌아가서 낳고 낳는 이치가 다함이 없으니, 이것은 나의 학설이다. 대사가 스승으로 삼는 대웅(大雄)이라는 이는 이른바 세존(世尊)인데 삼계(三界)의 스승이 되고, 대사가 구하는 심화(心花)라는 것은 이른바 과덕(果德)이니, 십방찰(十方刹)에 비치어 부처의 마음 마음이 곳에 따라 발현한 것이다. 대사가 그대로 달려다녀야 하겠는가. 대사가 돌아가서 이름과 호를 얼마 안되는 동안이나마 돌이켜 생각하여 얻음이 있으면, 우담발화(優曇鉢花) 가 세상에 출현할 것이나, 버릴 만한 가지와 덩굴이 뭐 있겠는가. 중영은 마땅히 가섭(伽葉)이 빙그레 웃은 것이 실상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알 것이니, 꽃 없이 공연히 가지만 꺾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가할 것이다.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주D-001]우담발화(優曇鉢花) : 불경에서는 3천 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아주 장엄ㆍ화려한 꽃이어서, 이 꽃이 피면 부처가 탄생한다고 하였다.
[주D-002]가섭(伽葉) : 석가여래의 제자로, 석가여래가 꽃을 따서 비비면서 빙그레 웃는 것을 보고, 자기도 따라서 웃고 후에 선(禪)의 교리(敎理)를 밝혔다고 한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천봉설(千峯說)
 

조계(曹溪) 우상인(雨上人)은 귀곡(龜谷)의 제자인데 그 호(號)를 나에게 물었다. 내가 말하기를, “귀곡이 사람의 이름을 잘 짓는데 어찌 상인에게는 아끼는가. 일운(一雲)으로 하면 어떠한가.” 하였다. 상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스승 섬기기를 자식이 아비 섬기듯 하는데 이것은 우리 스승의 이름으로 바꾸기를 청한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귀곡과 함께 교유한 지가 또한 오래되었는데, 이름을 잊었으니 내 죄이다. 천봉(千峯)으로 바꾸어보자.” 하였다. 상인이 말하기를, “좋으니 원컨대 그 말을 끝마쳐 달라.” 하였다. 상인이 이미 좋다 하였으니 내가 어떻게 사양하겠는가. 산은 땅에 붙어 있는데, 땅의 형세가 서북쪽이 높기 때문에 천하의 산이 서북에서 일어나서 동남쪽으로 달리어 중국에 두루 퍼졌으니, 우공(禹貢) 삼조(三條)에서 볼 수 있다. 오악(五嶽) 이 비록 존엄하고 높으나 각 방면에 있는 것이 또한 많다. 멈추어서 우뚝 선 것을 그 크고 작음에 따라 ‘봉우리’라고 이름하니, 봉우리가 천하에 벌려있는 것이 또 많을 것이다. 그 ‘천(千)’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간 숫자를 든 것 뿐이다. 하나라고 부족한 것이 아니요, 만이라고 남는 것이 아니니 상인이 처하는 곳이 좋도다. 밝은 달이 그 위에 있으면 정(定)에서 나와 차(茶)를 달이니 상인이 맑도다. 어찌 이것을 취하지 않겠는가. 쌓인 눈이 그 아래에 가득하면 정(定)에 들어가 벽(壁)으로 향하니 상인이 높은데, 이것을 취하지 않고서 비[雨]를 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는 ‘나’를 이름이다. 내가 천봉(千峯)에 있으면 혜택이 사해에 미치어 싹이 나고 껍질이 터지니 초목이 생장하는 것이요, 아름다운 벼를 많이 심어서 나라를 상서롭게 하고, 그 백성을 넉넉하게 하니 그 이익이 넓다. 상인이 취한 것이 아마도 여기에 있나보다. 아마도 여기에 있나보다. 그러나 비가 항상 내릴 수 없으니 제때에 내리는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 대사의 사는 데가 그림 속 같은지라, 내가 푸른 신을 신고 가서 놀아 긴 소나무 아래와 흰 돌 위에 앉아서, 여러 봉우리에 대하여 상인과 더불어 그 뜻을 말하여 높은 봉우리의 소재(所在)를 묘하게 하고, 손을 잡고 올라 임하는 것이 이것이 내 소원이다. 암자의 이름은 보자(普滋)인데, 실로 환옹(幻翁)이 지은 것이라 한다. 상인의 마음이 여기에서 더욱 명백하여 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언급한다.


[주D-001]오악(五嶽) : 중국에서는 태산(泰山)을 동악(東嶽)이라 하고, 형산(衡山)을 남악(南嶽)이라 하고, 화산(華山)을 서악(西嶽)이라 하고, 항산(恒山)을 북악(北嶽)이라 하고, 숭산(嵩山)을 중악(中嶽)이라 하며, 국가적으로 존숭하였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설우설(雪牛說) 
 

유상인(乳上人)이란 이는 보제(普濟)의 제자이다. 대장경(大藏經)을 인쇄할 때에도 같이 하고 대장경을 읽을 때에도 함께 하였다. 모양이 청수하고 행동이 완비하여 여러 사람 중에 뛰어 났으니, 보제(普濟)가 설우(雪牛)로 이름을 지은 까닭이 있다. 내가 그 뜻을 부연하겠다. 설(雪)은 설산(雪山)이요, 우(牛)는 설산(雪山)의 소이다. 젖의 효용은 불경에 자세히 말하였으니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젖이라는 것은 사람과 짐승이 제가 낳은 것을 사랑하여 기르는 것이다. 형체가 이미 생기니 젖이 아니면 기를 수가 없으며, 성명(性命)의 바른 것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니 젖의 공이 크다. 보제가 홀로 이것을 취하였으니 대개 그 가르침은 청정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교화로 용(用)을 삼는다. 설산은 서역(西域)의 높고 시원한 곳으로서, 향초가 무성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먹이는 소는 반드시 살찌고 기름지고 그 똥이 깨끗하여 오히려 도량(道場)을 설비하는 데에 쓰이는 바가 되니, 몸이 순수하여 섞이지 않고 기운이 완전하여 패하지 않고, 도량을 엄하게 정제하고 재계하는 기구를 정하게 닦아서, 넓은 사랑을 느끼고 묵은 때를 씻어서 정(定)의 문에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선교(禪敎)에서 소를 취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고 또 열 가지가 있는데, 그 말이 각각 같지 않으니 의논할 수 없다. 설산의 소는 몸을 기울여서 서쪽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상인을 위하여 말한다. 상인(上人)의 법유(法乳)가 어느 날에나 함식(含識)에 두루할 것인가. 더욱 힘쓸지어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경춘설(景春說) 
 

내가 관동(關東)을 유람하는데 간성(杆城) 지군(知郡) 박군(朴君) 인을(仁乙)이 자(字)를 구하고 또 말을 청하였다. 내가 늙은지라, 학문이 희미하고 문사(文辭)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말을 하여도 글을 이루지 못하고, 뜻을 말하여도 온축(蘊蓄)한 데에 이르지 못하니, 어떻게 그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함께 사원(寺院)에 있었으니 구면(舊面)이 아니라 할 수 없고, 지금 나를 만나 그 정(情)이 매우 성하니 욕(辱)되게 함이 없을 수 없다. 이에 경춘(景春)이라 박군의 자를 짓고 말하기를, “인(仁)은 하늘에 있어서는 생(生)이다.” 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심(心)이라 하며, 을(乙)은 방위에서는 동쪽에 있고 물건에서는 나무에 있다. 그러므로 인(仁)은 네 가지 덕(德)을 포괄(包括)하고 을(乙)은 사방의 첫머리가 되니, 곧 상제(上帝)가 거기에서 나서 한 해에 운행하는 것이다. 그 운행하는 것이 동쪽에 있으면 봄이라 하고 남쪽이면 여름이요, 서쪽이면 가을이요 북쪽이면 겨울이다. 겨울이면 다시 봄이 되어 낳고 낳아서 궁하지 않아 만고가 하루 같으니, 봄이 사시의 첫머리가 되는 것이 거짓이 아니요, 인(仁)이 네 덕을 포괄한 것이 빈 말이 아니다. 을(乙)의 뜻을 또 어떻게 말하랴.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존양(存養)하는 것이니, 집에 있으면 사랑하고 효도하고 정치를 하면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것이 인(仁)을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또 그 얼굴이 순수하여지고 등이 수북하여지고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살찌는 것은 인의 발현이요, 봄의 화창한 것이다. 백성이 좇아서 화하는 것이 봄 바람에 서 있는 것 같아서, 화한 기운이 사방으로 통달하여 무궁한 데까지 흐르는데, 하물며 한 고을의 땅이겠는가. 현달하여 위에 있어서 당(唐)의 양춘(陽春)을 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니, 그대는 잠심(潛心)할지어다.

동문선 제97권   
 
 
 설(說)
 
 
이씨 삼자 명자 설(李氏三子名字說)
 

광릉(廣陵) 이호연(李浩然)이 유사(有司)에 천거되었는데, 《서경(書經)》의 뜻을 잘 알기로 이름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서론(緖論)을 듣기를 원하나 이루지 못하였더니, 하루는 와서 내게 말하기를, “내가 세 자식이 있으니 첫째는 지직(之直)인데 자(字)는 백평(伯平)이요, 다음 둘째는 지강(之剛)인데 자는 중잠(仲潛)이요, 다음 셋째는 지유(之柔)인데 자는 숙명(叔明)이니, 이는 성인의 총명을 사모해서이다. 대개 세 가지 덕이라는 것은, 성인이 세상을 무마하고 사물에 응하는 것이 때에 따라 마땅함을 마련하여 백성의 풍속을 황극(皇極)에 끌어 넣는 것이다. 사람이 날 때 하늘에서 품부받아 중(中)과 화(和)의 체용(體用)이 갖추어졌으니, 강충(降衷)이니 유성(綏性)이니 하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품(氣稟)이 처음에 변하고, 더러운 습속이 나중에 몰려들어, 중(中)이 못되고 화(和)가 못되는 지경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이어 극(極)을 세워서 임금으로써 다스리고 스승으로써 가르치니, 이에 삼덕(三德)의 명목이 서서 세도(世道)가 평강(平康)하게 되었고 사람마다 착하게 되었다. 성인이 대체 무엇을 하랴. 또한 바르게 하고 곧게 하여 상도(常道)에 순하게 할 뿐이니, 옷을 늘어뜨리고 앉아서 하는 것이 없어도 다스림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 큰 자식의 이름을 지직(之直)이라 하고 자를 백평(伯平)이라 하였으니, 요(堯)ㆍ순(舜)의 백성이 되고자 함인데, 이것은 성인이 곧은 것을 화평하고 편안한 세상에 쓴 것이다. 세도(世道)가 차차 떨어져서 백성이 침체하고 후퇴하여 중(中)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돕고 붙들어주어 그 퇴폐해진 기운을 진작(振作)시켜 중화(中和)로 돌아오게 하고야 마니, 이것은 성인이 강(剛)한 것을 침잠(?潛)한 세상에 쓴 것이다. 그러므로 내 둘째 자식의 이름은 지강(之剛)이라 하고 자는 중잠(中潛)이라 한 것이다. 세도가 올라가 백성이 고명(高明)해져서 중(中)에 지나치는 지라, 이에 적시고 갈고 하여 그 강하고 뻣뻣한 기운을 소모시켜 중화(中和)에 돌아오게 하고야 마니, 이것은 부드러운 것을 고명한 세상에 쓴 것이다. 그러므로 내 끝의 자식의 이름을 지유(之柔)라 하고 자를 숙명(叔明)이라 하였다. 아. 성인이 중(中)을 백성에게 쓴 것이 이와 같으니, 백성이 진실로 중(中)에 돌아온다면, 부모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벽됨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내 자식을 이름 짓는 데에 반드시 이것으로 한 것은, 장차 세변(世變)을 살피고 성화(聖化)를 사모하여 견묘(?畝) 가운데에서 스스로 즐기려는 것 뿐이니, 호정(戶庭)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는 것이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청컨대 선생은 설(說)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진실로 그대가 《서경》을 잘 아는도다. 나는 늙어서 황극(皇極)의 행하는 것과 삼덕(三德)의 총명을 볼 수가 없으나 그대의 아들 세 사람은 모두 훌륭한 바탕이 있으니, 훗날 성취되는 것은 진실로 측량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폐함이 없는 것이 나의 바램이니, 힘쓸지어다.” 하였다.

 

 

 

전(傳)
 
 
송씨전(宋氏傳)
 

이곡(李穡)

송씨(宋氏)는 중이 되어 이름을 성총(性聰)이라 한다. 그러나 절에서 거처하지 아니하고, 호천사(昊天寺)의 동산교(東傘橋) 남쪽에 있는 근수루(近水樓) 두 칸에 살면서 날마다 그 안에서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돈이 생기면 곧 술을 사고 안주를 사들이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또한 산수와 인물을 잘 그리면서도 그다지 속되지 않았다. 성격이 소탈하여 일이 혹 마음에 맞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얼굴 빛을 붉혔으며,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사이 없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가 시를 짓는데 음운의 규칙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곧 시가 돼서 나왔다. 어떤 것은 사람을 놀랠 만큼 잘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좌중에 있는 사람을 크게 웃길 정도의 것도 있다. 그러나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적이 없고, 곧 말하기를, “어쩌다가 좋은 글귀가 생긴 것이지 내가 잘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든가, “어쩌다가 졸작이 된 것이지, 내가 나쁘게 지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 된 것 뿐이다.” 하였다. 집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도 모두 이런 식이어서 평생에 재물은 생각하지도 않고, 물건 값을 입으로 얘기하는 일이 없으며, 손에 수판을 잡을 줄 몰랐다. 아마 옛 사람중에서도 그와 같은 이는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맹자(孟子)》의 글을 읽기를 좋아 했는데, “불효 중에서도 후손 없는 것이 가장 크다.” 는 구절에 이르러 느낀 바가 있었는지 마침내 그 종교를 버리고 그의 머리에 갓을 얹였다. 한 번 과거장에 가본 적이 있었으나 그의 글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특이한 풍이 있어서 초탈한 곳이 있지마는 다른 작품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고시관들이 채택하지 아니하였고, 송씨도 스스로 알기 때문에 고시관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나는 수년 동안 북경에서 지내다가 돌아와 보니 송씨는 벌써 죽고 없었다. 아, 슬프도다.
내가 14살 때에 아직 시를 배우지 못했었는데, 종종 송씨에게 다녔으므로 송씨가 나에게 시를 짓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지은 것을 보고는 “됐다” 하였다. 이 해에 송정(松亭) 김(金)선생이 성균관에서 학생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송씨가 나에게 응시하기를 권하였다. 이때에 아버지는 북경에 계셨고, 어머니께서는 또 나를 어리게 생각하여 내가 시험을 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네가 반드시 미친게로구나. 너의 공부가 반드시 시험을 칠 정도가 못 될 것인데, 아마도 네가 미쳤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어떤 사람이 너를 속이는 것일 것이다.” 하시며, 종이를 주지 아니하시니, 송씨는 자기가 종이를 사서 주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나는 어쩔수 없이 시험을 보았더니 우연히 합격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나의 의심이 풀렸다.” 하셨다. 내가 곧 생각하기를, “이것은 요행으로 된 것이요, 사실상 내가 재주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공부를 힘써서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고, 이때부터 공부할 목표를 세우고 다행히 중도에 그만두지 아니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책을 읽은 힘이며 송씨의 힘이었다.
송씨는 무오년에 출생하여 나보다 11살이 더 많았다. 만일 그가 오래 살아서 직접 나의 출세한 것을 보았다면, 반드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며, 만일 죽은 사람이 아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자기가 사람의 장래를 밝게 알아 보았다는 데 대하여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그의 사적을 전하여 뒤의 사람이 이것을 보고 본받기를 바란다.
한산자(韓山子)여, 한산자여, 곧 송씨가 만들어 놓은 것이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공자는 안회(顔回)를 만들어 놓았다.”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송씨가 그대에게 공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공자의 이야기와는 너무나 성질이 다르지 않은가.” 하였다. 나는 이르기를 “뜻만을 따다 쓴 것 뿐이다. 시인의 말을 심하게 따져서 무엇하느냐.” 하였다. 모(某)씨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영광군(靈光郡) 출신으로 전의 별장이었던 조경수(曹敬脩)에게 출가하였고, 누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씨(李氏)에게 출가하여 낭장인 의(義)와 모직(某職)에 있는 천경(天景)을 낳았고, 하나는 모씨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소경으로 거문고를 잘 탔다. 이름은 윤명(允明)인데, 통문시위호군(通門侍衛護軍)에 뽑히었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오동전(吳同傳)
 

태학생인 오동(吳同)은 키가 크고 약간 구부정하였다. 글씨를 잘 쓰며 문장도 잘 하였다. 경진년에 진사에 합격된 사람이다. 하루는 길에서 좌주(座主)인 김정당(金政堂)을 만났는데, 정당이 직접 꾸짖기를, “너는 어째서 글은 읽지 않고 이렇게 쫓아다니기만 하느냐.” 하니, 오동은 손으로 품속에 있는 책을 두들겨 보이며 갔다. 이때에 나이가 15, 6살이었다. 차츰 자라서 성균관의 생원이 되었는데, 예법대로 자신을 단속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는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선배와 늙은 학자들의 칭찬이 점점 넓었는데 불행히 명이 짧아서 죽었으니, 슬프다. 오동이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절에서 글을 읽을 적인데, 어떤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재를 올리며 분향하는 탁자 위에다 소문(疏文)을 올려 놓았다. 그런데 마침 중들 가운데는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모든 중이 땀을 흘리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오동이 이르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너희들을 대신하여 읽어주겠다.” 하고, 곧 중의 옷을 입고 머리는 상투를 틀어서 정수리에 올려 세우고 그 위에다 갓을 얹였다. 모든 중들이 서 있는 속에 끼어 들어가서 거짓으로 시주(施主)에게 이르기를, “내가 두통이 나서 나올 수가 없는 형편이나, 시주의 밥을 배부르게 먹고서 재 올리는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면 죄가 클 것이요, 머리 모양이 여러 사람들과 다른 것은 죄가 적을 듯하여 나왔으니, 시주님네는 괴이쩍게 보시지 마십시요.” 하였다. 범패를 마치고 나서 시주는 향로를 받들고 꿇어 앉아서 감히 꿈쩍거리지 못하고 있을 때, 오동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서 그갓을 벗을 것처럼하니, 시주가 급히 말리기를, “스님, 갓을 벗지 마십시요.” 하였다. 오동은 못이기는 척하고 그대로 있었다. 회가 끝나고, 시주가 가고 나서 모든 중들이 크게 웃어대어 산골짜기가 떠나갈 듯하였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며 산중의 얘기꺼리가 되었다. 지금 천태종의 판사(判事)인 나암 원공(懶菴元公)이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했는데, 오동도 그 가운데에 참여 했었다. 얼마 후에 병으로 죽으니, 선비들로서 계(契)를 모았던 사람들이 돈을 내어 부조하였다.
이영(李?)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오동의 고종형제였다. 역시 글씨를 잘 썼는데, 안상헌(安常軒) 선생이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또 그를 가르쳤다. 과거에 뽑히어 정언이 되었다가 예부원외랑으로 옮겼었는데, 그 뒤에 들어앉고 나오지 않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흥국사(興國寺)의 남쪽에 우뚝한 봉우리가 있고, 그 동쪽 벼랑이 곧 오(吳)와 이(李)가 살던 집이다. 일찍이 비 오는날 밤에 같은 자리에 누워서 지새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흐릿하여 전 세상의 일인 듯하다. 진실로 그에 대하여 기록을 남길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대략 이러한 정도로 적고 군(君)에 대하여 상세히 아는 사람을 기다리는 바이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싹만 나왔다가 패지 않는 것도 있으며, 패기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하였으니, 아, 슬프다. 아. 슬프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박씨전 朴氏傳
 

쾌헌(快軒) 김문정(金文正)공이 문장과 도덕으로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때에 대신이 되어, 나라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함에는 시귀(蓍龜)와 같았고, 나라의 교화를 협조하여 주석(柱石)이 되었다. 그런데도 집안의 규모가 더욱 엄하였다. 여러 아들이 과거에 올랐는데, 첫째는 일찍 죽고, 둘째는 둔헌(鈍軒), 셋째는 송당(松堂)이었는데, 모두 대신의 지위에 올라서 그 집안을 계승하였고, 사위는 안씨(安氏)와 박씨(朴氏) 였는데, 안씨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박씨는 밀직대언(密直代言)인데 모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였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는 곧 안씨의 손자 세 사람이 과거에 올랐고, 박씨도 아들 세 사람이 과거에 올랐다. 이름을 소양(少陽), 자를 중강(仲剛)이라는 사람은 박씨의 아들인데, 차례로는 셋째다. 비록 성균관의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의 응시에는 합격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딱하게 여기므로 그의 사적을 기록한다.
중강은 성품이 고결하여 장구의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글을 읽거나 과거 준비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보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므로 과거 보는 장소에는 반드시 들어가지만 종이와 붓과 등불만을 가지고, 책 한 권도 끼고 가지 않으며 웃고 지껄이면서 글을 지어가지고는 잘 됐는지 안 됐는지 조차도 보지 않고 던져버리고 나오기 때문에 마침내는 되지 않았다. 일찍 스스로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좁다란 구석에 갑갑하게 쳐박혀 있는 것은 우물안의 개구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서쪽으로 떠나서 중국 서울에 갔다. 산천ㆍ인물ㆍ궁궐ㆍ성ㆍ도시를 두루 구경하고 나서 그 넓고 활달한 안목과 크고 호탕한 기운이 이미 옛날과 달라져서 희망했던 것에 들어 맞았다. 서하(西夏)의 간극장치서(幹克莊治書)공이 그를 한 번 보고 사랑하여 자기 집에 머물러 있게 하고, 후하게 대우하며 여가 있는 대로 공부를 시켰으나, 중강은 역시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래 있는 동안 북방 말에 능하여 나가서 길가는 사람과 얘기하면 길가는 사람은 중강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자못 스스로 흐뭇하게 생각하여 벼슬을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그의 인척으로 산남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지사(知事)가 된 사람이 있어서 그 관청의 주차(奏差)로 채용하였다. 일찍이 전승(戰勝) 보고서를 가지고 한 번 서울에 왔었는데, 그 해에 내가 회시에 합격되어 여관에서 서로 만나 며칠 동안 즐겁게 지내다가 갔다. 이때부터는 다시 보지 못하였다.
아, 중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구나. 우리 나라의 사절이 해마다 건강(健康)으로 문안을 들어가는 데도 한 사람도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어쩌면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서울에 친구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민간에 돌아다니면서 고향 사람과 만나기를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인가. 아니면 벌써 고인이 되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어쩌면 8,9년이나 되는 동안에 사람의 왕래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렇게도 소문이 없을 수가 있는가.
나는 중강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의 안면을 서울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송정(松亭) 선생은 실로 나의 좌주(座主)이니, 좌주의 생질을 소홀하게 사귈 수 있는가. 그러므로 같이 밥을 먹으면 중강이 감히 배부르게 먹지 아니할 수 없었고, 옷을 같이하면 중강이 감히 입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남들은 중강을 괴이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를 근후한 태도로 대우하였고, 남들은 중강을 방탕하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그를 예법대로 단속하였다. 그러므로 중강도 감히 평범한 교제로 나를 사귀지 아니하였다. 쾌헌공(快軒公)의 자손들은 정말 한 세상을 잘 지내는데, 중강은 중국에 들어가서 마침내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뒷 사람이 장차 중강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강은 아주 없어지고 전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이를 매우 슬프게 여겨, 간단히 그의 대략을 적어서 아는 사람이 있기를 기다린다.
중강이 만일 중국에서 공을 세워서 역사에 기록하기를, “고려의 박씨인데 아버지는 아무개, 어머니는 아무씨.”라고 한다면, 곧 나의 이 전기는 전하지 못하여도 좋을 것이지만, 만일 혹 그렇지 못하다면 마땅히 박씨의 자손으로서 족보를 만드는 사람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초계정현숙전(草溪鄭顯叔傳)
 

초계(草溪)에 숨은 군자인 정상사(鄭上舍)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아버지인 가정공(稼亭公)과 같은 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아들 중에 습인(習仁)이라는 이가 있는데, 자는 현숙(顯叔)이다. 나는 그의 안면을 안 지가 오래였지만 은근히 즐겁게 지낸 적이 없었고, 정 상사의 아들인 줄도 몰랐으며, 현숙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숙은 의지와 기개가 있고 재주가 있으며 술이 취하면 거리낌 없이 말을 하므로, 같은 대열에 선 사람이 그를 꺼렸다. 을미년 봄에 익산(益山)의 이시중(李侍中)과 죽계(竹溪) 안정당(安政堂)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었는데, 현숙이 대책을 지어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서 가르침을 맡았는데, 그 공로에 의하여 참관(參官)에 들어갔다. 무턱대고 남을 따르지도 않고 구차스럽게 남과 어울리지 않았다. 관료들은 모두 그와 곧 친하게 지나기를 원하였으나 현숙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선발이 되어 나가서 영주(榮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사무를 보려 하는데 아전이 옛적부터 내려오는 관례에 의햐여 소재도(消災圖) 앞에 나아가서 향을 피워 올리기를 청하였다. 현숙은 말하기를, “신하된 사람으로 떳떳하지 않은 일을 행하지 아니, 재앙이 무엇 때문에 생기겠는가. 만일 느닷없이 생기는 재앙은 군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뿐이다. 병이 생기기 전에는 건강에 주의할 뿐이요, 병이 생기면 약을 쓸 뿐이다. 죽게 되면 내장이 먼저 탈이 났기 때문에 고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인데, 소재도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하며, 아전에게 철거하여 버리기를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을 뜯어 가지고 요를 만들어서 깔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얘기를 전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한 것이다. 주(州)에 탑(塔)이 있었다. 현숙이 그 탑의 이름을 물었더니 아전이 무신탑(無信塔)이라고 하였다. 현숙이 말하기를, “정말이냐.” 하니, 아전은 “감히 근거 없는 말씀을 드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현숙이 양반들로서 늙어서 집에 들어 앉아 있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두가 “그렇다.” 는 것이다. 현숙은 말하기를, “괴이한 일이로다. 나무라도 이름이 나쁘면 그 그늘에서 쉬지 아니하고, 샘도 이름을 도둑샘이라고 하는데서는 그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모양이 높다랗게 생겨서 한 고을 사람이 모두 쳐다보는 것을 무신(無信)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는가. 식량을 없애면 사람이 스스로 살지 못할 것이요, 무기를 없애면 사람이 스스로 방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식량을 버리며 무기를 버리기를 헌 신짝처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미더움[信]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공자께서 벌써 말씀하셨다.” 하고, 또 주(州)의 아전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이를 헐어버리고 그 벽돌을 가지고 객사를 수리하게 하였다.
때마침 권력을 잡은 대신이 불교를 턱없이 좋아했으므로, 현숙을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신료들이 그 뜻을 딱하게 여기어 현숙을 위하여 임금에게 말씀을 드리는 사람이 많아서 화를 면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현숙의 이름은 더욱 중하게 되었다. 권력을 잡았던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나서 현숙은 다시 기용되어 양주(梁州)를 다스리게 되었고, 또 밀성(密城)을 다스리었다. 가는 곳마다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도와서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났다. 사귀(邪鬼)를 받드는 사당을 금지하고, 그 무당들을 때려 쫓아버리는 것은 현숙의 상투적인 사업이었으므로, 이런 데 대한 사실은 생략한다. 그가 중앙에 들어와서 도관랑(都官郞)이 되었을 적에도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또 소재도를 없애버리려 하였으나 지위가 낮아서 해내지 못했다. 현숙은 어머니가 죽어서 3년간 여묘를 살았고 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그가 지극히 슬퍼함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충신은 효자에서 난다는 말이 미더운 것이다.
지금 임금께서 정사를 계승하시게 되자 어진 인재를 구하는 것을 서두르셨다. 재상은 평소부터 현숙의 명망을 중히 여겼으므로 아뢰어서 전교령(典校令)에 임명하였으니, 곧 비서감이다. 3품관의 의복을 내렸으니 영광스러운 대우였다. 마침내 일본에 들어갈 사명을 받았는데, 현숙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현숙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고, 그의 아들이 금년에 진사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는데,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으니, 사람들은 그를 슬프게 여겨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숙은 태연스럽게 하고 얼굴에 정의감을 나타내며 말하기를, “살다가는 반드시 죽는 것인데 어째서 지방을 가려야 할 것이며, 신하로서 임금이 계신 바에 어찌 이를 사피할 수 있느냐. 또 나의 목표가 공을 세우는 데에 있으니, 비록 남의 나라라도 꺼릴 것이 없다. 하물며 동쪽은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일컫는 곳이 아닌가. 더구나 지금 두 나라 사이의 친선이 처음으로 시작되어 즐겁게 서로 접촉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사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을 모두 잡아서 소퉁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 공자께서 떼를 타고 멀리 가시려 하던 생각이라든지, 신선이 가서 약을 채취하던 종적이라든지, 운황(雲皇)과 치기(雉紀)의 고사 같은 것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상세히 적어올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노래와 시를 지어서 교외에 차려 놓은 막사에 나가서 전송하려 하였다. 나는 옛날부터의 친구이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비로소 이호연(李浩然)이 말한 것을 근거로 하여 이를 정리 서술하였다.
이호연은 씩씩한 선비이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또 말하기를, “현숙이 여묘를 지킬 때에 그의 아버지가 불교를 좋아하였으므로 매일 불경을 읽다가 마침내 외게 되었고, 오래가도록 잊지 않았다.” 한다. 효자는 그의 부모에 대하여 차마 죽었다고 여기지 않기를 이렇게 하였다. 하루는 나갔다가 친구를 찾아갔는데, 그 집에서 마침 중을 데려다가 재(齋)를 올렸다. 중이 불경 두어 권을 외는데 현숙이 옆에서 줄줄 내려 외었다. 중은 그가 반드시 불교의 신도라 생각하고 성명을 물었더니, 현숙은 곧 대답하기를, “바로 탑을 헐어 버린 정 아무개다.”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크게 웃었고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탄복하였다 한다.
일본의 사절이 현숙이 어떤 사람인가를 관반(館伴)에게 물었다. 관반이 사실대로 일렀더니 일본의 사절은 불교 신자였는데, 그의 강렬(剛烈)함을 두려워하여 곧 말하기를, “부처님을 배척하는 사람은 우리 나라의 법률에 인정되지 못하니 이를 바꾸어 달라.” 부탁하여 마침내 가지 못하였다.

동문선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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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전(崔氏傳)
 

신사년 십운과(十韻科)에 합격한 최림(崔霖)은 아버지의 이름이 성고(成固)인데 낭장이요, 어머니는 장씨(蔣氏)인데 모관 아무개의 딸이다. 최림은 술을 좋아하며 시를 읊고 절간에 다니며 놀기를 좋아 하는데, 술을 받아 주지 않는 자라면 거기를 떠나버린다. 한계(寒溪)라는 중과 매우 뜻이 맞아서 친숙히 서로 쫓아다니므로 예법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상당히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워낙 재주가 높기 때문에 차츰 그를 대우하며 공경하였다. 계사년 가을 향시에서 내가 최씨와 함께 합격하게 되었는데, 중서당(中書堂)에서 회시를 보게 됐을 때에 최씨는 안질이 생겨서 글씨를 쓰기가 곤란하였다. 곧 탄식하기를, “내가 기왕에 합격된 것은 요행으로 된 것이다. 지금 나보다 재주가 높은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두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가 과거에 오른다는 것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었는데, 눈까지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나는 과거를 포기하겠다.” 하고, 마침내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미 본국에 돌아와서 병부원외랑으로 옮겨갔다가 병신년에 다음 해의 신정(新正)을 하례하는 표를 받들고, 서울에 왔다가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다가 요하(遼河)에 이르러 도둑을 만나서 사신ㆍ부사(副使) 및 삼절(三節)의 사람과 아전까지 모두 피해되었다. 아, 슬프다.
기주(?州)의 진중길(秦中吉)은 나의 아버지와 젊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분이다. 널리 배웠고 문장에 능하여 그에게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높은 과거에 합격하고 훌륭한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진공(秦公)은 늙어서도 오히려 과거장에 나다니려 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정해년 공거(貢擧)의 고시관이 되었을 때, 진공은 말하기를, “내가 가정(稼亭)과 어릴 적부터 같이 공부하였으니, 비록 요행으로 합격이 된다 할지라도 남들은 반드시 가정이 나를 보아준 것이라 할 터이니, 나로 말미암아 이런 이름을 얻는다면 이것은 내가 가정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지, 될 수 있는 일인가.” 하며, 마침내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이 5 품을 지냈으니 관료의 대열에 서게 됨이 확실하건만 물러가서 여러 학생들과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씨는 그의 사위였다. 그의 문장은 또한 진씨로써 미칠 바가 아니었으나 벼슬에 달하지 못하고 불행히 죽었으니, 아, 최씨의 화인가. 진씨의 화인가. 진씨는 오래 살았고 최씨는 일찍 죽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는 최씨나 진씨가 모두 후세에 전하게 될 것이니, 이것으로나마 지하에서 행여 스스로 위로함이 있을 것이다.
최씨는 뜻이 크고 결단성 있게 말을 하였으니, 만일 그가 죽지 아니하여 그의 문장이 더욱 발전되었다면 마땅히 졸옹(拙翁)에게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벼슬에 있은 지 오래 되지 못하여 뜻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문장을 지은 것이 적어서 재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의 정기는 요하(遼河)의 하늘에 흩어졌으며, 그의 넋은 요하의 들판을 가리었으니, 마땅히 학(鶴)이 되어 화표(華表)를 말하며 돌아오리니, 1천 년이 지난 뒤에 최씨의 전기를 읽고 또 그의 음성을 들으리로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나는 이것으로 그의 대강을 기록하여 최씨전(崔氏傳)을 지었다.

동문선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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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전(白氏傳)
 

백씨(白氏)는 이름은 인(璘)인데, 서림(西林) 출신이며, 나의 어릴적 친구다. 나의 아버지 가정공(稼亭公)이 정해년의 공거에 고시관이 되었을 때 백씨가 을과(乙科)에 뽑혔으니 이것은 동문(同門)이었으며, 서림과 우리 한산(韓山)은 땅이 한데 맞닿았기 때문에 집이 매우 가까워서 총각 시절에 서로 사귀어 놀았고, 숭정사(崇政寺)에서 글을 같이 읽었으니 이것은 동학(同學)이었으며, 지금 천태종의 나잔(懶殘) 스님이 선비들과 상종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또 동파(東坡)의 시를 읽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비들의 무리가 나아가서 그의 말을 들었으므로 날마다 자리가 가득히 차 있었다. 그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이 계를 모아서 신의를 나타냈는데, 백씨가 사실 이를 총괄하였으니, 이것은 동지(同志)가 된 것이다. 그런즉 백씨를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사람을 알면서 그의 전기를 써서 뒤에 전하게 하지 않는 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함정(咸正)이다. 내시부에 벼슬하면서 여럿이 있으면서 반드시 예법을 지켰다. 여러 원장(院長) 중에 조금이라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있든가, 혹은 잡상스런 말로 농을 걸어오면 반드시 화를 내며 물러서서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함정(咸正 바르다는 뜻)이라고 지어주셨는데, 조금이라도 치우친 짓을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여러 원장들은 오래도록 그를 탄복하였다. 벼슬이 통례문 사인에 까지 이르렀다. 어머니인 김씨(金氏)는 상주(尙州) 출신인데, 고사(庫使)를 지낸 이로 이름은 인통(仁通)이라고 하는 분의 딸이다. 백씨의 아우가 하나인데, 이름은 소(?)다. 도평의사사의 지인(知印)을 경유하여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지냈고, 지금은 무슨 벼슬에 있는데 능력이 있다는 평이 있다. 백씨는 모 벼슬을 지낸 기씨(奇氏), 이름이 주(?)인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 벼슬에 있는 아무에게 출가하였고, 다시 모 벼슬인 정(鄭) 아무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백씨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강한 것이 아마 근대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백씨와 현주(見州)에 있는 절간에 같이 있었는데, 하루는 서로 공부한 글을 누가 먼저 외는가 보기로 약속했는데, 백씨는 점심 때도 되지 않아서 다 외었고, 나는 어두워진 뒤에야 마침내 외게 되었다. 벌써 1년이 넘도록 같이 서림(西林)에 있는 절간에 있었는데, 불을 끄고 밤에 누워서 입으로 장기를 두었다. 이튿날 이것을 그대로 놓는데 백씨는 한 길도 틀리지 않았고 나는 두 군데나 겹쳐 놓았다. 이와 같은 일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제 다 쓰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도 백씨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씨는 밥을 먹는데 한끼에 두 사람의 분량을 한꺼번에 먹어도 그다지 배가 부르지 아니하였다. 또한 힘이 세어서 스스로 힘세고 날쌔다고 자부하는 자라도 감히 당하지 못하였다. 그는 문장을 짓는데 힘이 기다란 무지개처럼 뻗어 올라가서, 그 기운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고, 그의 글씨도 매우 속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나의 조모의 묘지명을 썼으니, 나의 아버지가 그 글씨를 평가한 바 있었을 것이다.
을미년 가을에 내가 한림원에 봉직하고 있다가 이듬해에 돌아가려 할 때에 함께 하룻밤을 이야기하였는데, 백씨는 객지에서 곤란이 심하였으나 뜻은 조금도 줄지 아니하였다. 대체로 출세하려는 의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이 북경에서 죽어 장사지내고 말았다. 아, 슬프도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정씨가전(鄭氏家傳) 
 

정씨(鄭氏)는 서원(西原)의 큰 성(姓)이다. 족보에 실린 것으로는 별장(別將)인 이름을 극경(克卿)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극경은 증중랑장(贈中郞將)인 효문(孝聞)을 낳고, 중랑장이 조의대부 신호위 대장군(朝議大夫神虎衛大將軍)인 의(?)를 낳았는데, 처음의 이름은 준유(俊儒)였다. 대장군이 금오위(金吾衛)의 산원(散員)인 적성(赤城) 백이신(白利臣)의 딸에게 장가들어 감찰어사 증상서우복야(監察御使贈尙書右僕射)인 현(?)을 낳았고, 복야가 유릉직(綏陵直)인 평주(平州) 한휘(韓暉)의 딸에게 장가들어 도첨의찬성사로 시호가 장경공(章敬公)인 해(?)를 낳았고, 장경공이 부영(扶寧) 김공(金公) 구(坵)의 딸에게 장가들어 청하군(淸河君)인 책(책)과 판전교시사인 이(怡)를 낳았고, 다음에 중찬치사(中贊致仕)로 시호가 광정(匡定)인 홍공(洪公) 규(奎)의 딸에 재취하여 딸 둘을 낳았는데, 대언(代言)인 경사만(慶斯萬)과 종부령(宗簿令)인 최광(崔廣)에게 출가하였다. 청하군이 판삼사사(判三司事)인 상락군(上洛君) 김공(金公) 순(珣)의 딸이며, 도첨의 중찬인 양천(陽川) 허문경공(許文敬公) 공(珙)의 외손녀에게 장가들어 설헌(雪軒)선생 오(?)와 설곡(雪谷) 선생 포(?)를 낳았다. 전교(典校)가 모 벼슬인 아무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판사(判事)인 곽침(郭琛)에게 출가하였다. 경씨(慶氏)는 지금 시중공(侍中公)인 복흥(復興)을 낳았고, 최씨(崔氏)는 판개성(判開城)인 맹손(孟孫)을 낳았다. 설헌(雪軒)은 모 벼슬인 아무의 딸에게 장가들어 곽침을 낳았는데, 벼슬이 정윤(正尹)이요, 다음인 선진(旋軫)은 지금 양가대사 조계종 연복사주지(兩街大師曹溪宗演福寺住持)가 되었고, 다음은 운(?)인데 정유년에 급제하여 지금 판전교가 되었다. 딸을 만호(萬戶)인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 삼사우윤(三司右尹)인 권주(權鑄), 규정(糾正)을 지낸 유정현(柳廷顯)에게 각기 출가시켰다. 설곡(雪谷)은 첨의참리(僉議參里)인 춘헌(春軒) 최문도(崔文度)선생의 딸에게 장가들어 간(?)을 낳았다. 벼슬이 안릉령(安陵令)이었는데 일찍 죽고, 다음은 연(衍)인데 추(樞)로 고치고 자(字)를 공권(公權)이라 했는데, 지금은 자로 행세한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 앉았다. 딸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인 원송수(元松壽), 정당문학인 정사도(鄭思道), 호군(護軍)인 이인부(李仁富)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원씨(元氏)의 딸은 첫째는 삼사좌윤(三司左尹)인 허금(許錦)에게, 규정(糾正)인 김약채(金若采)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정씨(鄭氏)의 아들은 홍(洪)인데, 정사년에 급제하여 예의정랑(禮義正郞)으로 있다. 이씨(李氏)는 아들이 셋인데, 박실(樸實)은 낭장이요, 강실(剛實)은 정사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신호위참군(神虎衛參軍)이며, 견실(堅實)은 승사(承仕)다. 첨서(簽書 공권(公權)을 가리킴)는 지도첨의(知都簽議) 한대순(韓大淳) 공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총(摠)이라 하는 아들을 낳았는데, 병진년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좌정언(左正言)이 되었고, 다음은 증(拯)과 탁(擢)이다. 딸은 내부령(內府令)인 이빈(李贇)에게 출가하였다. 정씨의 선대에서 경사를 쌓고 복을 내려 보내었으니, 대장군이 나라 일을 위하여 희생한 사적은 공신(功臣)을 봉한 문서에 기록되었고, 제사를 드리는 예전(禮典)에 실려 있으며, 장경공(章敬公)의 위대한 공업은 뚜렷히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그의 자손이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장군은 대성(臺省)의 관리로 서경분사(西京分司)에 있었는데, 마침 성주(成州)의 출신인 최광수(崔光秀)가 요(遼)의 잔당인 금시(金始)가 반란을 일으킨 기회를 이용하여 서경병마사(西京兵馬使) 최유공(崔愈恭)을 죽이고, 그 성(城)을 점령하여 관료들을 배치하고 정예 군대를 모집하여 “고구려를 다시 살린다.”고 성명하고, 격문을 전하여 서로 선동하였으니, 그것은 우리 고종(高宗) 4년 정축년이었다. 대장군이 지위는 비록 낮았으나 크게 노하여 신부(神斧)를 들고 필현보(畢玄甫), 신죽(申竹)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최광수를 공격하여 과연 도끼를 한 번 들어서 그를 찍어 죽이고, 그의 무리 80여 명을 베고 나머지는 따지지 않고 내버려두니, 변덕부리던 사건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여 특별히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고, 그대로 내시원(內侍院)에 참직(參直)하게 하고, 의관(衣冠)과 안마(鞍馬)를 내려주고 참가한 군관들에게 차등이 있게 상을 베풀었다. 장군(將軍)ㆍ시랑(侍郞)을 거쳐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강화(江華)에 도읍을 옮기던 다음 해에 필현보가 서경(西京)의 일로 반란을 일으켰다. 대신이 그를 불러들여 안무(按舞) 시킬 것을 의논하는데, 필연보가 일찍이 의(?)의 부하로 있었으므로 곧 의를 보내고 달려가서 임금의 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이미 대동강에 왔을 때 따르는 사람이 갑자기 들어가지 말라 하였으나, 의는 용기를 내면서 말하기를, “명령을 받고 나온 이상 감히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는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본분이다.” 하였다. 이미 필현보를 보니 필현보는 대장군을 얻은 데 대하여 기뻐하며, 대장군을 주장을 삼으려 하며 일변 달래며 일변 협박하였으나, 대장군은 마침내 굴하지 아니하다가 피해되었다. 나라에서는 선대의 공신을 표창하는데 대장군을 꼭 참여시켰다.
어사(御史 견(?)을 가리킴)는 선대의 덕을 받지 않았고, 아들인 장경공은 어릴 때부터 힘을 내어 문장을 잘 하였다. 원종(元宗) 신미년에 나이가 18살이었는데, 사마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과거에 급제하고, 또 이듬해에 비서성에 들어갔다가 바로 통문원녹사(通文阮錄事)와 대관승(大官丞)으로 바꾸었고, 여러 번 옮겨서 문한서(文翰暑)와 사관(史館)에 봉직하였다. 신사년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올랐는데, 공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이 해에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행차할 적에 따라갔는데 일본을 정벌하기 위함이었다. 계미년에 좌보간에 옮겼고, 겨울에 군기소윤(軍器少尹)으로 옮겼다. 을유년에 군부정랑(軍簿正郞)에 옮겼고, 병술년에는 보문서대제(寶文署待制)가 되었고, 정해년에 소윤비서(少尹秘書)가 되었다. 가을 7월에 임금을 따라서 북으로 올라와서 조현대부 군기윤(朝顯大夫軍器尹)에 승진되고, 겨울에는 군부사(軍簿司)의 총랑(摠郞)으로 전목부사(典牧副使)를 겸임하고, 무자년에는 전직(前職)을 그대로 가지고 춘관시독(春官侍讀)을 겸하였고, 얼마 후에 사관 수찬관(史館修撰官)에 보충되었고, 겨울에 전리총랑 문한시독학사(典理摠郞文翰侍讀學士)에 옮겼고, 경인년에는 밀직사 우부승지 우사의 대부 세자우유선(密直司右副承旨右司議大夫世子右諭善)에 발탁되었고, 임진년에 우승지에 승진되어, 남성(南省)의 시험에 고시관이 되어 정당(正堂)인 이언충(李彦沖) 등 62명을 뽑았다. 갑오년에 지신사(知申事)에 승진되었고, 원정(元貞) 을미년 가을 7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가 되었고, 곧 국학 대사성에 옮겼다. 병신년 봄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옮겼고 겨울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세자원빈(世子元賓)을 겸하였다. 무술년 가을에 지사병조판서(知司兵曹判書)에 승진되었다. 8월에 표(表)를 받들고 성절(聖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갔더니 성종(成宗)이 그를 보고, 정말 사신답다는 칭찬이 있었다. 경자년에 밀직사(密直司)로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그해 겨울에 판삼사사가 되었고, 신축년에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事司)가 되었고, 갑진년 봄에 참리 첨의사(?理僉議司)가 되었고, 을사년에 찬성사 연영전 대사학 동수사(延英殿大司學同修史)에 승진되었고, 4월에 공거(貢擧)를 맡아서 장자빈(張子贇) 등 33명을 뽑았는데 이때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얻었다고들 하였다. 정승(政丞) 한종유(韓宗愈), 정승 김영돈(金永旽)은 모두 공의 문인이었다. 이해 6월 5일에 옛 질환이 일어나서 저녁이 되어 깨끗이 세상을 마쳤다. 유언에 의하여 장례를 간소하게 지냈다. 나이는 52살이었다.
장경공(章敬公)은 풍채가 잘났고 수염이 그림과 같았다. 평소에 있을 때에는 성품이 너그러웠으나, 일을 만나면 분명하고 날카로워 흔들 수가 없었으니, 대체로 마음이 강한 분이었다.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은 은총을 믿고 충렬왕을 그르치어 장차 충선왕을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세우려고 천자에게 표를 올리어 요청하려 하였다. 장경공은 그의 하는 짓에 대하여 분개하였으나 이를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길에서 송(宋)을 만났다. 성재(省宰)와 원재(阮宰)가 서로 만날 때에 예절을 차리도록 되어 있는데, 송방영은 교만하여 그대로 말 위에서 인사만 하려 하였다. 장경공은 거짓으로 못 본척하고 천천히 말에서 내리어 예절을 마치고 그의 길을 따르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의 직책인데 어째서 폐지하느냐.” 하고, 자기의 수행원을 시켜서 그 멱살을 잡고 그 뺨을 갈기게 했더니 송방영은 부끄러워하면서 가 버렸다. 이것이 강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경공은 벼슬에 들어가면서부터 늘 인사전형에 참여하였는데, 장경공이 올리든가 내치든가 하는 것이 모두 여러 사람의 의사에 일치되었다. 일찍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이 된 적도 있었다.
청하군(淸河君)은 성품이 활달하고 얽매임이 없으며 집안 사람의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았다. 부인인 김씨(金氏)의 할아버지 충렬공(忠烈公)이 늘 그를 칭찬하기를, “책(?)은 정말 남자답다.” 하였다. 젊어서 집안의 공로로 여러 번 벼슬하여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阮錄事)에 부임되었다가,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 흥위위 참군사별장(興威衛參軍事別將)을 지냈다. 대덕(大德) 8년에 흥위위 보승호군(興威衛保勝護軍)으로 조현대부(朝顯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이듬해 가을에는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 옮겼고, 겨울에 동경부 유수(東京副留守)로 나갔으며 12월에 예빈윤(禮賓尹)을 첨가하였다. 대덕 정미년에 충주 목사로 나갔는데, 정사가 엄정하고 밝았으므로 아전이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고, 연우(延祐) 기미년에 친어군 대호군(親禦軍大護軍)으로 들어와, 중현대부(中顯大夫)에 올랐고, 지치(至治)의 연대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입어 5년 동안이나 북경에 머물러 있었는데, 심왕(瀋王)의 세력이 날로 커졌기 때문에 신하로서 절의를 지킨 사람은 백에 둘이나 셋 정도였고, 돌아서서 임금을 욕하며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청하군은 이때에 궁궐도감사(宮闕都監使)로 있었는데, 왕의 경비가 다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곧 도감(都監)의 묵은 예산 중에서 명목이 없는 것을 꺼내어, 가벼운 짐으로 만들어서 이를 북경의 저택에 보내었다. 충숙(忠肅)은 매우 이를 고맙게 여기어 정사를 회복한 뒤에 곧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임명하고, 바로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올리어 판선공(判繕工)을 시켰다. 마침 병이 생겨서 청하군(淸河君)에 봉하고 조용히 들어앉아서 정양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청백함을 나타내며 그의 공로에 보답한 것이었다. 나이 55살에 죽었다.
설헌(雪軒)의 자는 사겸(思謙)이다. 연우(延祐) 정사년 과거에 급제되어 벼슬이 첨의평리(僉議評理) 개중대광(階重大匡)에 이르렀고, 추충진의 보리공신(推忠陳義輔理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시호를 문극(文克)이라 하였다. 공은 일찍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제거정동유학(提擧征東儒學)이 되었는데, 대체로 충숙왕이 현릉(玄陵)에게 전할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니, 이러므로 현릉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설곡(雪谷)은 자(字)가 중부(仲孚)다. 태정(泰定)은 병인년에 나이 18세였는데, 잇달아 진사과와 급제과(及第科)에 합격하였다. 계림(鷄林) 최졸옹(崔拙翁)에게 다니며 놀기를 좋아하여 그의 문장 쓰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의 시나 문장은 속스러운 기가 없었다. 비순위참군(備巡衛參軍)과 전의직장(典儀直長)을 지냈으며, 지원(至元) 정축년에 예문관에 들어와 수찬이 되어, 표를 받들고 북경에 갔었다. 마침 충숙왕이 우리 나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심양도(瀋陽道)의 길에서 올라가 뵈었다. 충숙은 첫번에 보고 그를 사랑하여 머물러 두고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무인년에 갑자기 계급을 특진하여 좌사보(左思補) 지제교, 성균관 사예, 예문관 응교지제교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게 하였다. 기묘년 정월에 충숙왕이 죽고 신사년에 충혜왕(忠惠王)이 서고 나서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옮겼고, 이해 여름에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좌사의대부 예문관 직제학지제교(左司議大夫藝文館直提學知製敎)에 임명되고, 가을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관계가 올랐다. 사의대부(司議大夫)는 옛날의 간의대부였으므로 글월을 올려, 규탄한 바가 많았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자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얼마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와 집에 들어있는데, 어떤 사람이 왕에게 참소하기를, “정씨의 형제가 중국으로 달아나 태제(太弟)를 끼고 옹호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이리하여 명을 내리어 형제를 모두 쫓아내게 하여 문극(文克)은 영해(寧海)로 가고, 설곡(雪谷)은 울주(蔚州)로 가게 되었다. 설곡은 비록 귀양살이로 있으면서도 태연스럽게 시를 읊으며 지냈다. 지금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시의 구절을 보면 백성을 사랑으로 따뜻이 하며 아전을 엄하게 다룬 것이 나타나서, 지금까지도 칭송을 한다. 갑신년에 북경에 갔었는데, 승상인 별가석화(別哥昔化)공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장차 천자에게 추천하려 했는데, 불행히 병에 걸려서 을유년 가을 7월 14일에 객지 여관에서 죽었다. 첨서(簽書 공권(公權))가 이때 나이가 13세였는데 널을 받들고 돌아왔다. 나의 아버지 가정공(稼亭公)이 그를 곡했는데, 그 시에, “걱정이 많고, 마음을 슬프게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대체로 이때에 같이 객지에 있으면서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글씨가 일대의 명필이었다. 우리 집 병풍에 쓴 8폭을 신축년 겨울에 버리고 갔으니 아깝다. 부인이 일찍이 홀로 되어 아들을 엄하게 가르쳤고, 나이가 70이 다 됐는데도 더욱 건강하다. 첨서는 어려서는 병이 잦았는데 자라면서 차츰 의학에 통하여 능히 몸에 나쁜 것을 제거하며 원기를 도와서 나이가 50이 다 되는데 정신과 광채가 피어났다. 아마 만물을 창조한 이가 설곡이 불행하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어 첨서에게는 후하게 하려는 것인 듯하다. 첨서는 나와 같은 해에 급제하였고, 또 일찍 간관으로 있었으므로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 차례대로 서술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이에게 보낸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송씨전(宋氏傳)
 

이곡(李穡)

송씨(宋氏)는 중이 되어 이름을 성총(性聰)이라 한다. 그러나 절에서 거처하지 아니하고, 호천사(昊天寺)의 동산교(東傘橋) 남쪽에 있는 근수루(近水樓) 두 칸에 살면서 날마다 그 안에서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돈이 생기면 곧 술을 사고 안주를 사들이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또한 산수와 인물을 잘 그리면서도 그다지 속되지 않았다. 성격이 소탈하여 일이 혹 마음에 맞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얼굴 빛을 붉혔으며,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사이 없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가 시를 짓는데 음운의 규칙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곧 시가 돼서 나왔다. 어떤 것은 사람을 놀랠 만큼 잘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좌중에 있는 사람을 크게 웃길 정도의 것도 있다. 그러나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적이 없고, 곧 말하기를, “어쩌다가 좋은 글귀가 생긴 것이지 내가 잘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든가, “어쩌다가 졸작이 된 것이지, 내가 나쁘게 지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 된 것 뿐이다.” 하였다. 집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도 모두 이런 식이어서 평생에 재물은 생각하지도 않고, 물건 값을 입으로 얘기하는 일이 없으며, 손에 수판을 잡을 줄 몰랐다. 아마 옛 사람중에서도 그와 같은 이는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맹자(孟子)》의 글을 읽기를 좋아 했는데, “불효 중에서도 후손 없는 것이 가장 크다.” 는 구절에 이르러 느낀 바가 있었는지 마침내 그 종교를 버리고 그의 머리에 갓을 얹였다. 한 번 과거장에 가본 적이 있었으나 그의 글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특이한 풍이 있어서 초탈한 곳이 있지마는 다른 작품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고시관들이 채택하지 아니하였고, 송씨도 스스로 알기 때문에 고시관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나는 수년 동안 북경에서 지내다가 돌아와 보니 송씨는 벌써 죽고 없었다. 아, 슬프도다.
내가 14살 때에 아직 시를 배우지 못했었는데, 종종 송씨에게 다녔으므로 송씨가 나에게 시를 짓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지은 것을 보고는 “됐다” 하였다. 이 해에 송정(松亭) 김(金)선생이 성균관에서 학생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송씨가 나에게 응시하기를 권하였다. 이때에 아버지는 북경에 계셨고, 어머니께서는 또 나를 어리게 생각하여 내가 시험을 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네가 반드시 미친게로구나. 너의 공부가 반드시 시험을 칠 정도가 못 될 것인데, 아마도 네가 미쳤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어떤 사람이 너를 속이는 것일 것이다.” 하시며, 종이를 주지 아니하시니, 송씨는 자기가 종이를 사서 주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나는 어쩔수 없이 시험을 보았더니 우연히 합격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나의 의심이 풀렸다.” 하셨다. 내가 곧 생각하기를, “이것은 요행으로 된 것이요, 사실상 내가 재주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공부를 힘써서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고, 이때부터 공부할 목표를 세우고 다행히 중도에 그만두지 아니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책을 읽은 힘이며 송씨의 힘이었다.
송씨는 무오년에 출생하여 나보다 11살이 더 많았다. 만일 그가 오래 살아서 직접 나의 출세한 것을 보았다면, 반드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며, 만일 죽은 사람이 아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자기가 사람의 장래를 밝게 알아 보았다는 데 대하여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그의 사적을 전하여 뒤의 사람이 이것을 보고 본받기를 바란다.
한산자(韓山子)여, 한산자여, 곧 송씨가 만들어 놓은 것이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공자는 안회(顔回)를 만들어 놓았다.”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송씨가 그대에게 공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공자의 이야기와는 너무나 성질이 다르지 않은가.” 하였다. 나는 이르기를 “뜻만을 따다 쓴 것 뿐이다. 시인의 말을 심하게 따져서 무엇하느냐.” 하였다. 모(某)씨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영광군(靈光郡) 출신으로 전의 별장이었던 조경수(曹敬脩)에게 출가하였고, 누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씨(李氏)에게 출가하여 낭장인 의(義)와 모직(某職)에 있는 천경(天景)을 낳았고, 하나는 모씨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소경으로 거문고를 잘 탔다. 이름은 윤명(允明)인데, 통문시위호군(通門侍衛護軍)에 뽑히었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이곡
 
 
백씨전(白氏傳)
 

백씨(白氏)는 이름은 인(璘)인데, 서림(西林) 출신이며, 나의 어릴적 친구다. 나의 아버지 가정공(稼亭公)이 정해년의 공거에 고시관이 되었을 때 백씨가 을과(乙科)에 뽑혔으니 이것은 동문(同門)이었으며, 서림과 우리 한산(韓山)은 땅이 한데 맞닿았기 때문에 집이 매우 가까워서 총각 시절에 서로 사귀어 놀았고, 숭정사(崇政寺)에서 글을 같이 읽었으니 이것은 동학(同學)이었으며, 지금 천태종의 나잔(懶殘) 스님이 선비들과 상종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또 동파(東坡)의 시를 읽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비들의 무리가 나아가서 그의 말을 들었으므로 날마다 자리가 가득히 차 있었다. 그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이 계를 모아서 신의를 나타냈는데, 백씨가 사실 이를 총괄하였으니, 이것은 동지(同志)가 된 것이다. 그런즉 백씨를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사람을 알면서 그의 전기를 써서 뒤에 전하게 하지 않는 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함정(咸正)이다. 내시부에 벼슬하면서 여럿이 있으면서 반드시 예법을 지켰다. 여러 원장(院長) 중에 조금이라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있든가, 혹은 잡상스런 말로 농을 걸어오면 반드시 화를 내며 물러서서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함정(咸正 바르다는 뜻)이라고 지어주셨는데, 조금이라도 치우친 짓을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여러 원장들은 오래도록 그를 탄복하였다. 벼슬이 통례문 사인에 까지 이르렀다. 어머니인 김씨(金氏)는 상주(尙州) 출신인데, 고사(庫使)를 지낸 이로 이름은 인통(仁通)이라고 하는 분의 딸이다. 백씨의 아우가 하나인데, 이름은 소(?)다. 도평의사사의 지인(知印)을 경유하여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지냈고, 지금은 무슨 벼슬에 있는데 능력이 있다는 평이 있다. 백씨는 모 벼슬을 지낸 기씨(奇氏), 이름이 주(?)인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 벼슬에 있는 아무에게 출가하였고, 다시 모 벼슬인 정(鄭) 아무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백씨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강한 것이 아마 근대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백씨와 현주(見州)에 있는 절간에 같이 있었는데, 하루는 서로 공부한 글을 누가 먼저 외는가 보기로 약속했는데, 백씨는 점심 때도 되지 않아서 다 외었고, 나는 어두워진 뒤에야 마침내 외게 되었다. 벌써 1년이 넘도록 같이 서림(西林)에 있는 절간에 있었는데, 불을 끄고 밤에 누워서 입으로 장기를 두었다. 이튿날 이것을 그대로 놓는데 백씨는 한 길도 틀리지 않았고 나는 두 군데나 겹쳐 놓았다. 이와 같은 일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제 다 쓰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도 백씨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씨는 밥을 먹는데 한끼에 두 사람의 분량을 한꺼번에 먹어도 그다지 배가 부르지 아니하였다. 또한 힘이 세어서 스스로 힘세고 날쌔다고 자부하는 자라도 감히 당하지 못하였다. 그는 문장을 짓는데 힘이 기다란 무지개처럼 뻗어 올라가서, 그 기운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고, 그의 글씨도 매우 속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나의 조모의 묘지명을 썼으니, 나의 아버지가 그 글씨를 평가한 바 있었을 것이다.
을미년 가을에 내가 한림원에 봉직하고 있다가 이듬해에 돌아가려 할 때에 함께 하룻밤을 이야기하였는데, 백씨는 객지에서 곤란이 심하였으나 뜻은 조금도 줄지 아니하였다. 대체로 출세하려는 의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이 북경에서 죽어 장사지내고 말았다. 아, 슬프도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제 명극권 후(題名極卷後)
 

이숭인(李崇仁)

불교도의 명극(明極)이란 자가 그 별호로 방내 방외(方內方外)의 선비에게 글을 구하였는데, 그 환암(幻菴)의 게(偈)와 한산자(韓山子 한산 이씨 이목은)의 시와 명(銘)이 이미 명극의 취지를 통창하게 밝힌 것이 극진하였다. 비록 그러나 나는 일찍이 명명(明命)이라 말한 것과 명덕(明德)이라 말한 것이 있음은 들었으나, 명극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대개 불(佛)씨의 말이나 그 자의(字義)가 우연히 내가 들은 바와 같은 것이다. 나의 말로 말미암아 추구한다면, 사람의 본성과 만물의 법칙이 환히 밝게 나타나서 그 공효가 빛나게 사해에 미치고, 천지에 이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대사가 이른바 명극이란 그 어떤 것인가. 또한 한 조각의 영괴(靈怪)함이 사람과 하늘에 광명하게 비침이 있는 것을 나의 혼매함이 족히 알지 못하는 것인가. 대사는 돌아가 환암옹(幻菴翁)에게 물어서 얻음이 있으면 나의 혼매함을 열어 주기 바란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서 상찰보 정설암 대자 권후(書上札補正雪菴大字卷後)
 

이색(李穡)

원(元)나라가 일어난 지 백여 년에, 문치가 크게 화하여 사방의 학사들이 다 그의 재능을 정숙하게 다하니, 찬란하게도 일대의 성세를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논평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문(文)은 한(漢) 같고, 그 시(詩)는 당(唐)과 같으며, 그 자(字)는 진(晉)과 같다.” 하였는데, 대자(大字)에 이르러서는 유독 설암(雪菴)을 높이 받들어 으뜸으로 일컬었다. 설암이 누구를 법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안씨(顔氏 안진경) 이래로 이에 미치는 자가 드무니, 이름을 어찌 헛되이 얻었으리요.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옵께서 하늘이 낳으신 자품으로 사수(師授)하지 않으시고도 깊이 대자의 법을 얻으셨으니, 마치 대화산(大華山)이 중천에 솟은 것을 거령(巨靈 신장)이 쪼개 열었고, 버티고 선 구정(九鼎)이 사수(泗水)에 빠졌는데, 만부(萬夫)도 취할 수 없는 것 같으면, 그 침중(沈重)하고도 엄준 경직(勁直)함이 이와 같았으니, 설암으로 하여금 다시 쓴다 하더라도, 능히 독보(獨步)하겠는가. 그러나 겸양하고 빈 것같이 하여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으니 거룩하고 아름답도다. 지신사(知申事) 신(臣) 흥방(興邦)이 설암이 쓴 위응물(韋應物 당나라 시인)의 시 두 수를 얻었는데, 머리의 석 자가 결(缺)하였고, 또 점과 획이 결한 것이 몇 자가 있었다. 어느날 임금이 서연(書筵)에 납시었을 때에 이를 바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설암의 글씨를 열람한 바가 많았지만, 이것은 가장 득의의 작품이다. 그 운필의 법도 있음을 너는 알겠느냐.” 하고, 이미 해서로 결한 바 화극삼(畵戟森)의 석 자를 쓰시고, 아울러 그 점획의 결한 곳을 보완하신 뒤에 내 보내시어 흥방에게 하사하시고, 또 하유하여 말씀하시기를, “설암의 대자(大字)는 세상에서 법받는 터이므로, 내 굳이 해서로 써서 양보함을 보이는 것이니, 너는 마땅히 집에 간직할지니라.” 하였다. 흥방이 물러나와 이색에게 말하기를, “내가 문필의 조그마한 기능으로 임금에게 권장과 우대를 입었고, 이제 또 친히 어찰(御札)을 내리시어 영광을 입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리요. 그대는 태사(太史 국사(國史)의 편수를 맡은 관직)이므로 감히 고하노라.” 하였다. 신(臣) 이색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소위 글씨를 잘 쓴다는 자를 신은 압니다. 그러나 옷깃을 먹에 더럽히며 세월을 두고 연마하여도, 능히 설암의 경지에 이른 자는 역시 드뭅니다. 만약 제왕에 이르러서는 밖으로는 만기(萬幾 정무)의 노고가 있고, 안으로는 백체(百體)가 안일하신데, 어찌하여 능히 이에 도달하셨단 말입니까. 삼가 이 권자(卷子)를 보오니, 여섯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임금의 덕이 겸손하시니, 겸손하면 도(道)가 빛나는 것이 그 하나요, 임금의 마음이 비어 있으면 잘 모이는 것 그 둘이요, 양보하심을 보였으니, 백성이 다투지 않을 것이 그 셋이요, 문학을 숭상하시면 백성이 감화할 줄 안 것이니, 그 넷이요, 지신사는 왕명을 출납하니, 이른바 임금의 인후와 구설(口舌)같은 것이니 대하기를 후하게 함이 당연하지 않으리요. 이것이 그 다섯이요, 글자와 획을 반드시 바르게 하고, 반드시 곧게 하며, 크고 작은 것을 한결같이 하시니, 또 전일함을 보인 것입니다. 전일함은 성(誠)이니, 지성한 연후에 만물이 있는 법이니, 크도다 정성이여, 하늘과 사람이 어찌 이 밖에 있으리요. 이것이 여섯입니다. 이 여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으니 어찌 갖추어 기록하지 않으오리까. 신 이색은 손을 머리에 대고 머리를 땅에 대어 절하고 삼가 쓰나이다.” 하였다.


[주D-001]거령(巨靈) : 옛날 신화에 나오는 신장(神將)의 이름이다. 그는 큰 도끼를 가지고 대화산(大華山)과 용문(龍門)을 찍어서 열어 놓았다고 한다.
[주D-002]구정(九鼎)이 …… 빠졌는데 : 구 정은 중국 전설에 하우(夏禹)가 중국 본토 구 주(九州)의 홍수를 뿜어 빠지게 한 뒤에 주에서 철(鐵)을 모아들여 각기 그 주(州)마다 지리 물산 등을 기록한 솥을 만들었는데, 그 중량이 천균(5만 근)이라 한다. 그 솥이 하(夏), 은(殷)을 거쳐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전하는 상징으로 되었었다. 그런데 주나라가 멸망할 때에 진시황이 군민(軍民) 5만 명을 동원하여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으로 끌어가는 도중에 사수(泗水)에서 솥 하나가 물에 떨어졌다. 그것을 건지려고 물속에 들어가 보니, 신룡(神龍)이 막아서 건질 수 없었고 이내 여덟개 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서 이수보 시 권후(書李壽父詩卷後)
 

이색(李穡)

이군 수보가 나에게 행촌(杏村)이 쓴 수보(壽父)의 두 대자(大字)와 익재(益齋) 노인의 시와 설(?)공의 명(銘)을 보였는데, 그 인(仁)과 수(壽)의 훈석을 더할 수 없이 다하였으나,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또 고하기를, “사람과 초목ㆍ금수는 다 만물의 하나이나, 사람은 천지와 함께 더불어 짝하여 셋에 참여한다. 그러나 고금을 통하여 찾아보아도 초목ㆍ금수와 더불어 같이 썩지 않은 자가 거의 희소하나, 이(伊 이윤)ㆍ부(傅 부열)ㆍ주(周 주공)ㆍ소(召 소공)의 부귀와 이(夷 백이)ㆍ제(齊 숙제)ㆍ공(孔 공자)ㆍ안(顔 안자)의 빈천이 있지 않으냐. 오직 능히 천지와 짝을 지어도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당시에 나타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를 저와 같이 오래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는 능히 부귀와 빈천으로도 그 마음을 손상하지 않고, 그 이ㆍ부ㆍ주ㆍ소와, 이ㆍ제ㆍ공ㆍ안이 초목ㆍ금수와 더불어 같이 썩지 않은 까닭을 힘써 구한다면, 비로소 가히 그 이름과 자를 실천할 것이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서 도은시 고후(書陶隱詩藁後)
 

이색(李穡)

정사년 중동(仲冬 음력 11월) 그믐 전 3일에,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나서, 향불 피우고 꿇어앉아 도은의 시 두어 편을 읽으니, 구슬이 소반 위를 굴러가는 것 같고, 얼음덩이가 산골을 흘러 나오는 것 같으며, 그 구슬과 얼음을 옥병에 넣어둔 것 같아서 훌륭한 시문들과 더불어 마땅히 아울러 전할 것이요, 고인만이 홀로 그 아름다움을 점유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에 시를 읽고도 그 맛을 모르다가 유독 부자(夫子 공자)가 취한 바, “마음의 감사함을 없게 하기 위함이다.” 한 말에 방불하게 상상하여 논년에 이르러도 능히 잊지 못하였다. 도은의 시어의 뜻이 이미 쇄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고, 그의 뜻이 오직 이에 있는지라, 족히 사람의 성정(性情)의 바름에 감동을 주어, 무사(無邪)한 곳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이 까닭에 나는 몹시 좋아하여 그 책 뒤에 써서 돌려 보내노라.

동문선 제102권   
 
 
 발(跋)
 
 
서 금남 우수전 후(書錦南迂?傳後)
 

이색(李穡)

우수(迂?)가 소년 시절부터 시부(詩賦)를 잘하여 장옥(場屋 고시장) 사이에 출입하매, 같이 나간 사람들이 모두 능수로 추중하였으나 매양 합격하지 못하였다. 뒤에 책문(策問)으로 장옥에서 대결하여, 그 능난함이 전과 같으면서도 더 교묘하였는데도 주관하는 자가 역시 번번이 버리고 취하지 않으니, 그 합격함을 얻은 자라고 해서 어찌 다 우수보다 능했으랴. 참으로 그 운명임을 알겠도다. 이미 굴하고는 물러나 학문을 강론하고, 그 사는 집을 이름하여 중순(中順)이라 하니, 배우는 선비들이 날로 증가하고 그의 지도를 받아 작문하던 사람들이 왕왕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좋은 벼슬자리를 취하였다. 여기에서 우수도 또한 스스로 그 운명임을 알고 곧 우(迂)라고 스스로 이름하였고, 사람들도 역시 우라고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삼 년의 오활한 것이 도리어 하루아침에 영광스럽고 우대하는 까닭이 될줄이야 뉘 알았으리요. 지금 〈우수전〉을 보니, 임금이 고시에 응하는 자가 글을 잘 못지어 먹물을 마시는 벌을 받고, 답안을 백지로 제출하였던 일에 대해 하문하였는데, 우수가 인하여 말을 아뢰어 임금이 수긍하였다. 또 널리 다른 말을 인용하여 그 온축하였던 바를 다 기울여 말하고, 이에 이르러 시를 지어 붓대를 잡자 즉시 이루어 놓으니, 마치 신의 도움이 있는 것과도 같았다. 즉시 3품(三品)의 옷을 하사하였다. 전일에 같이 장옥에 출입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화려한 요직에 나간 자들을 돌아보니, 모두 그 아래 질(秩)에 있게 되었는데, 더구나 우수와 같이 임금 앞에 입대하여 시를 짓게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 우수의 능함과 같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그의 바른 말은 위문정(魏文貞)과 같고, 농담 잘 하기는 동방삭(東方朔 한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회해와 별설을 잘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3천갑자를 살았다 한다.)과 같았으며, 학식이 널리 통달하기는 장무선(張茂先) 과 같아서 그의 재능이 문장의 말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니, 누가 우수를 오활하다 이르리요. 우수는 진실로 오활하지 않은 사람이다. 담암(淡菴) 백(白) 선생이 사행(事行)의 시말에 대한 전기를 지어 상세히 전하였다. 나는 다만 우수가 오활한 것으로 지우(知遇)를 입어 마침내는 오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취하여 전기 뒤에 기록하여 돌려 보낸다.


[주D-001]답안을 백지로 제출하였던 일 : 고려의 송천봉(宋天逢)이 시관이 되어 선비를 뽑았는데, 왕이 가장 나이어린 다섯 사람을 불러 모란시를 짓게 하였다. 그러자 대부분 제대로 짓지 못하였고 한 사람은 백지를 제출하였으므로 왕이 노하여 그 방을 거두어 들였다. 《고려사》송천봉(宋天逢)전
[주D-002]위문정(魏文貞) : 당나라의 태종(太宗) 때에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한 위징(魏徵)이란 그의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다.
[주D-003]장무선(張茂先) : 서진(西晉) 때의 정치가인 장화(張華). 그의 자가 무선인데, 그에게는 《박물지(博物誌)》라는 저술이 있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제 호연자설 후(題浩然字說後)
 

이색(李穡)

허무(虛無)와 한만(汗漫)은 오직 도(道)의 허탄해짐을 가져오고, 편협한 마음과 천착한 지혜는 오직 도의 비색을 가져온다. 한 마음의 은미함은 성현이 이를 희구(希求)하였다는데, 그 바른 것을 구하려면 오직 그 그른 것을 버려야 한다. 넓게 사방에 통달하면서도 다하지 않고 천지에 충만하여 호발에도 침투한다. 하물며 인륜의 상도를 좇는 것을 누가 막으랴. 태연히 처하면 능히 그 천성을 온전히 할 것이다. 광주(廣州)의 이(李)씨는 강개한 군자이다. 자를 호연이라 하였기에 감히 그 취지를 기술한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제 척약재학음 후(題?若齋學吟後)
 

이색(李穡)

급암(及菴) 민(閔)선생의 시의 조어(造語)가 화평 담담하고, 용의(用意)가 정하고 깊었는데, 당시 익재(益齋) 선생과 우곡(愚谷) 선생이 죽헌(竹軒) 정승과 더불어 한 마을에 살고 있어 철동 삼암(鐵洞三菴)이라 불렀으나, 급암은 죽헌의 사위이다. 죽헌이 서거하고 급암이 또 그 집에 와서 사니, 삼암의 칭호가 끊이지 않아서 한 세상이 모두 종주로 높였다. 나는 뒤늦게 났으나, 다행히 평시에 모두 그 분들의 도덕의 광휘에 교접함을 얻어 한 평생 태산 북두같이 귀의하여 사모할 것으로 삼았으니, 다행한 중에 다행한 일이다. 익재 선생이 매양 탄미하여 말하기를, “급암의 시법(詩法)은 스스로 천연의 의치(意致)를 얻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졸옹(拙翁) 언명보(彦明父)는 성질이 호방 활달하고, 사람들에게 허여함에 적었으나, 유독 급암만을 몹시 사랑하여 외출하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취침하면 침상을 마주하였으며, 집사람에게 있고 없는 것과 생산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으며, 또 같이 술을 즐기고, 또한 같이 즐겼다.” 하였다. 내가 급암의 문하에 왕래할 때는 급암의 나이가 이미 쇠하였으나, 부드럽고 한아한 군자여서 항상 후진(後進)을 끌어 들이기를 뒤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하루는 높은 행차로 누추한 내 집에 굽혀와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해가 진 뒤에 갔다. 나는 지금까지 감히 이를 잊지 못한다. 외손 김경지(金敬之)씨가 급암 선생의 집에서 생장하였고, 향학(向學)하게 되어서도 또 급암에게 배워 익재ㆍ우곡에게도 친히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다북쑥이 삼[痲]속에 나면 붙들어 매지 않아도 곧게 클 것은 사세의 필연한 바이고 더구나 타고난 자질이 정수하고 아름다워 제배(?輩)들이 따를 수 없다. 이제 그 〈학음(學吟)〉을 보니, 더욱 그의 시법이 급암과 혹사함을 알겠다. 아, 시를 어찌 쉽게 말하며, 문장이라 이르랴, 학문이라 이르랴. 아, 시를 어찌 쉽게 말하리요.

동문선 제102권   
 
 
 발(跋)
 
 
제 척약재학음 후(題?若齋學吟後)
 

이색(李穡)

급암(及菴) 민(閔)선생의 시의 조어(造語)가 화평 담담하고, 용의(用意)가 정하고 깊었는데, 당시 익재(益齋) 선생과 우곡(愚谷) 선생이 죽헌(竹軒) 정승과 더불어 한 마을에 살고 있어 철동 삼암(鐵洞三菴)이라 불렀으나, 급암은 죽헌의 사위이다. 죽헌이 서거하고 급암이 또 그 집에 와서 사니, 삼암의 칭호가 끊이지 않아서 한 세상이 모두 종주로 높였다. 나는 뒤늦게 났으나, 다행히 평시에 모두 그 분들의 도덕의 광휘에 교접함을 얻어 한 평생 태산 북두같이 귀의하여 사모할 것으로 삼았으니, 다행한 중에 다행한 일이다. 익재 선생이 매양 탄미하여 말하기를, “급암의 시법(詩法)은 스스로 천연의 의치(意致)를 얻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졸옹(拙翁) 언명보(彦明父)는 성질이 호방 활달하고, 사람들에게 허여함에 적었으나, 유독 급암만을 몹시 사랑하여 외출하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취침하면 침상을 마주하였으며, 집사람에게 있고 없는 것과 생산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으며, 또 같이 술을 즐기고, 또한 같이 즐겼다.” 하였다. 내가 급암의 문하에 왕래할 때는 급암의 나이가 이미 쇠하였으나, 부드럽고 한아한 군자여서 항상 후진(後進)을 끌어 들이기를 뒤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하루는 높은 행차로 누추한 내 집에 굽혀와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해가 진 뒤에 갔다. 나는 지금까지 감히 이를 잊지 못한다. 외손 김경지(金敬之)씨가 급암 선생의 집에서 생장하였고, 향학(向學)하게 되어서도 또 급암에게 배워 익재ㆍ우곡에게도 친히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다북쑥이 삼[痲]속에 나면 붙들어 매지 않아도 곧게 클 것은 사세의 필연한 바이고 더구나 타고난 자질이 정수하고 아름다워 제배(?輩)들이 따를 수 없다. 이제 그 〈학음(學吟)〉을 보니, 더욱 그의 시법이 급암과 혹사함을 알겠다. 아, 시를 어찌 쉽게 말하며, 문장이라 이르랴, 학문이라 이르랴. 아, 시를 어찌 쉽게 말하리요.

동문선 제102권   
 
 
 발(跋)
 
 
발 나흥유 하 시권 跋羅興儒賀詩卷
 

이색(李穡)

우수(迂?)가 노년에 지우(知遇)를 만나고는 항상 스스로 태공망(太公望)에 비유하였으니, 그 자부하는 바가 얕지 않아, 하객(賀客)들과 연회하는데 미쳐서는 왕모중(王毛仲) 으로 자처하였으니, 또 어찌 그다지도 비유하더란 말인가. 이는 우수의 가슴속이 평탄 명백하고, 경중(輕重)하는 바 없어, 말을 토하매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가 기이한 지우를 얻은 것이 요행이 아니요,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주D-001]왕모중(王毛仲) :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미천한 출신으로 말(馬)을 잘 길러서 황제의 은총을 받아 부귀가 혁혁하였던 사람.
 
 
동문선 제102권   
 
 
 발(跋)
 
 
발 황벽어록(跋黃蘗語錄)
 

이색(李穡)

〈황벽전심요결(黃蘗傳心要訣)〉과 〈완릉록(宛陵錄)〉은 공히 38매이니, 당(唐)나라 배휴(裴休)가 편찬한 것이다. 일본(日本)의 승려 윤중암(允中菴)이 널리 전포하려 생각하고, 손수 이를 새긴 끝에, 나의 말을 구하여 발문을 삼으려 하는데, 나는 이 학문에 대개 연구할 겨를이 없었으니 감히 말할 수 없고, 다만 윤중암에 대하여 아는 것만을 쓰려한다. 윤중암이 나이 25세였던 기해년에, 이 어록을 휴대하고 중국에 가서 배우려고 항해하다가, 풍랑에 동요되어 드디어 왕경(王京)으로 오니,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중간에 병화를 만나 휴대했던 책을 잃었던 것이니, 이제 판각한 것은 보법제선사(報法齊禪師)의 구장본(舊藏本)인 것이다. 불가의 이야기는, “삼대[麻]도 같고 똥덩이도 같고 번개치듯 천둥치듯 한다.”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 눈을 크게 뜨게 하는데, 오직 이 어록만은 명백하여 깨닫기가 쉽다. 윤중암이 이와 같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마음을 가히 알 것이다. 그의 스승 견룡산(見龍山)이 도장로(道長老)와 같이 중봉(中峰)을 스승으로 섬겨 도를 얻고, 강남(江南) 도솔사(兜率寺)의 주지로 있다가 바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도중에 연경에 머무르니, 여러 산의 장로들이 이를 존경하여 모두 그에게 미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내가 연경에 있을 때에, 이를 익숙히 들은 바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용산도 또한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으니, 윤중암의 연원(淵源)을 가히 볼 수 있고, “먼곳에 있는 사람을 관찰하려면 그 주인한 바로서 한다.” 하였으니, 윤중암이 어느 사람의 집에 객사를 정하였는데, 원정당(元政堂)과 염밀직(廉密直)이었으며 산은 반드시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게 이르는 곳을 택하였고, 그 묵희(墨? 서화)에 있어서도 맑고도 기이한 자취가 있었으며, 더욱이 백의선(白衣仙)의 전신법(傳神法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그 신정(神情)을 전달하는 법)을 좋아하였는데, 그 사람됨에 있어서 가장 그 결함을 말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때문에 즐겨 이 글을 쓴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발 중옥 환학 시권(跋仲玉還學詩卷)
 

이색(李穡)

중옥은 묵헌(墨軒) 선생의 손자요, 이상(二相)공의 둘째 아들이다. 나이 20여 세에 중국에 들어가서 성균학생(成均學生)에 승보(升補)되어 강습하기를 □ 오래하였는데, 동렬에게 찬양 받았으며, 어버이에게 귀성할 것을 고하고 곧 돌아오려 할 적에, 한때의 큰 선비들이 모두 시로 송별하니, 사림들이 영광으로 알았다. 신축년 난리에 분탕된 나머지 규정(糾正) 정희(鄭熙)가 이를 얻어서 민씨에게 돌려보내니, 남아 있는 자가 겨우 9명이요, 또 떨어져 나가서 분별할 수 없고, 읽어도 구절이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들은 바로 질정하여 위와 같이 보충해 써 넣었다. 급암(及菴)의 시는 오직 한 귀만을 얻었으나 굳이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혹시 와서 고하는 자가 있지 않을까 한 것이다. 사대부에게 준 시장(詩章)은 본래 전집(全集)에 있는 것이나 전하는 것이 적고, 본권(本卷)이 세간에 산질되어 떨어져 나가 있어 자손도 얻어 보는 자가 드물거든, 하물며 그 장항아리의 덮개로 되어 흩어진 것이다. 자복(子復)이 그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신명에 통한 것이니, 정씨의 얻은 것이리오. 병중에 회포에 느낌이 있고, 나도 또한 중국에서 학업을 닦은 사람이로되, 선배의 한 마디의 정중한 증언(贈言)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 책을 보고 더욱 중옥을 사모함이 있으니, 중옥은 가히 아들을 두었다고 이를 만하다. 이 책으로 하여금 드디어 인몰되도록 하였다면, 선대 유학자들의 필적을 어찌 오늘과 장래에 빛을 내게 하리요. 중옥은 가히 아들을 두었다고 이를 만하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발 우곡제 선생 송 홍진사 시권(跋愚谷諸先生送洪進士詩卷)
 

이색(李穡)

선산(善山) 부계(缶溪)에 홍(洪)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를 잘 받들어 효행으로 알려졌다. 그가 송경(松京)에서 학업을 닦고, 벼슬을 하다가 돌아감에 우곡 정(鄭)선생이 시로서 송별할 적에,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 부자 형제가 국가고시의 주시관(主試官)을 계승 역임한 성대한 사실을 기술하였으니, 대개 그 어머니는 최씨의 10대 손이라는 것이다. 한때 유림의 종주였던 익재(益齋)선생, 급암(及菴) 민(閔)선생, 초은(樵隱) 이(李)선생, 칠원(漆原) 윤상의(尹商議), 단양(丹陽) 우제학(禹提學), 익양(益陽) 윤도사(尹都事), 매계(梅溪) 정정선(鄭旌善), 울진(蔚珍) 심중서(沈中書), 양천(陽川) 허이재(許彛齋)가 모두 그 운(韻) 자를 써서 시를 지었고, 회산(檜山) 황평장(黃平章)이 유학과 도교(道敎) 사이를 왕래하면서, 시를 창화(唱和)하기를 좋아하더니, 또한 홍씨의 일을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주니, 이제 26년이 되었다. 홍씨의 이름은 민구(敏求)요, 자는 호고(好古)이니, 익재선생이 명명한 바이다. 금년의 지공거(知貢擧)인 염동정(廉東亭)과 같이 계사년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때문에 그 회시(會試)를 시행함에 있어,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고가 주사(主司 주시관)을 만났구나. 염동정도 또한 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 문하에서 나오게 하려 할 것이요, 또 같은 해의 진사 출신을 굽혀서 문생(門生)으로 삼으려고 할 것은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이다. 호고의 마음에도 또한 주사가 혹시 불쌍히 여겨서 거두어 줄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을 것도, 역시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심으로써 말하는 것은 공도(公道)요, 하늘을 두고 말하는 것은 명(命 운명)이다. 26년 간의 옛 친분으로도 하루아침에 취사(取舍)하는 속에 참여함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니, 천명이 아니라고 일러야 옳겠는가. 공도가 아니라고 일러야 옳겠는가. 선비가 세상에 나서 젊어서 글을 읽고, 늙어서도 걷어 치우지 않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 대개 천성의 본원을 알고 득실의 근본에 통달하여 들어가서 자득하지 않음이 없으려는 것이다. 호고의 언어와 기색으로써 보건대 참으로 그 마음속이 유연한 자이요, 참으로 명을 아는 자이다. 내가 요행히 과거에 오른 이래로 두 번이나 시관을 맡았으나, 나와 같은 해에 진사한 사람들이 굴욕을 당하고 간 자도 또한 많았던 것이다. 그 고시의 문권(文券 답안지)을 당하여는 마음을 단정히 하고 눈을 문권에 주시하면서 한결같이 공도로 결단하는 것이니, 어느 겨를에 터럭만치라도 동년고구(同年故舊)에게 생각이 미치겠는가. 동년고구도 생각할 겨를이 없거든 어느 겨를에 한미한 집인지 훈벌의 대가(大家)인지를 생각하겠는가. 호고의 유연히 자득해 함은 의당한 일이요, 동정(同正)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니, 유연히 자득해 함은 의당한 일이다. 하물며 나이 44세이니, 다른 날에 성취하는 바를 그 어찌 헤아리랴, 호고의 말에 이르기를, “세상에서 이르기를, 양저(梁?)의 장원이 82세에 비로소 과거에 올랐으되, 또한 능히 공거를 관장한 바 있으니, 내 어찌 감히 스스로 선을 긋고 나가지 아니하랴.” 하였다. 그 말이 장하여 내가 더욱 가상하게 안다. 염동정이 비록 내게 청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장차 이를 신장(伸張)하여 말하려 했거든, 하물며 또 서간을 보내어 호고를 위하여 나의 말을 요구함이랴, 내 그러기에 이를 써서 뒷날 주사자가 거자(擧子 시험 보는 선비)를 선발하는 법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발 급암 시집(跋及菴詩集)
 

이색(李穡)

지난번에 내가 이미 김씨 형제를 위하여 그 외대부(外大父 외조부) 급암선생의 시에 서문을 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경지(敬之)와 더불어 같이 성균관에 있게 되어 매양 보면, 경지가 학도들에게 수응한 여가에는 언제나 조용한 곳에 들어앉아 하루 한 장씩을 쓰고, 한더위에도 폐하지 않음으로 내가 더욱 공경히 대하였다. 대개 경지가 외가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의 외조를 알고 사모함이 더욱 깊었던 것이요, 성질이 문필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이다. 쓰기를 겨우 마치자, 선생의 문인 이단공(李端公) 이(?)가 마침 경상도를 안찰하게 되어 판각(板刻)하는 공역을 이로 말미암아 능히 이루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하늘이 경지의 돈독한 효성을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아우님도 중국에 들어가 널리 교유하면서 하남왕(河南王) 군문(軍門)에 서한을 올려 크게 칭찬함을 입어, 중의대부 중서병부랑중 겸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에 임명되었더니, 이미 고국에 돌아와서 불행히 죽었다. 경지는 이름을 구용(九容)으로 고치고, 지금 민부의랑(民部議郞)으로 옮겼으나, 강관(講官)직만은 예와 같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제 계월헌 인공음(題溪月軒印空吟)
 

이색(李穡)

초무학(超無學)은 보제(普濟)의 고제(高弟)이다. 계월헌은 그가 살고 있는 곳이요, 인공음은 그의 저술한 바이다. 보제가 스스로 강월헌(江月軒)이라 호하였으니, 강의 모인 바는 간(磵)과 계(溪)이다. 달의 비침이 어찌 분리되고 회합하는 바 있으리요. 소위 인공음도 또한 어찌 형적을 찾을 길이 있으리요만 색이 일찍이 사모함이 있었으니, 초무학이 북경에 외유하여 보제를 알현하니, 보제가 몹시 칭찬 탄미하여 말하기를, “말만 나오면 문구를 토하되, 화살과 칼이 서로 버티는 것같이 하여 한 입으로 빈주(寶主)의 문귀를 토해내니, 장차 몸으로 불조(佛祖)의 관문을 뚫고 들어갈 것이다.” 하고, 법어(法語)와 의물(衣物)로서 성의와 신뢰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보제가 이미 입적하자 초무학이 바야흐로 그 도로써 수많은 행각승 사이에 스승이 되어 명(名)과 상(相)에서 벗어나 사물에 응접함에 형적을 남기지 않았으니, 시냇물과 달처럼 비록 형적이 있는 것 같으나, 잡으려하면 얻을 수 없으니 공허한 가운데 나타나 있음[印空]이 분명하다. 대저 공(空)이란 것은 빈 것이 아니요, 만물이 좇아나오는 바이니, 만물이 나오는 것은 곧 공의 작용인 것이다. 조사(祖師)의 인신[印]을 찬 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그 인신을 찍으리요. 뒤에 이 시집을 읽는 자, 그 성률의 잘잘못에 구애하지 말라. 이 도(道)는 말로 가히 다할 것이 못 되며 이름으로 가히 표명할 것이 못 되나니, 그 또한 공허한 데에 나타나 있는[印空] 것일 따름이다. 공을 어찌 형태와 색채로 변명하리요.

동문선 제102권   
 
 
 발(跋)
 
 
서 나옹 삼가(書懶翁三歌)
 

이색(李穡)
구슬은 방향을 따라 빛을 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이나 그 깨끗함은 불성(佛性)을 나타내고, 해골은 기운이 흩어지고 살이 썩어 사람들이 버리는 바이나 생존하였을 적에는 불도를 행하였고, 수없이 기운 승려의 의복은 비단을 버리고 해어진 누더기를 기운 것이니 피부를 가리고 추위와 더위를 막을 뿐이나, 이것은 그가 위의(威儀)를 장엄히 하여 도중(徒衆)사이에 편안히 처할 턱이 없어서 그러함이 아니요, 불도에 들어가 불성을 봄이다. 세 노래가 수미(首尾)가 서로 응하고 맥락이 서로 통하여, 후인에게 보이는 뜻이 깊고도 간절하다 할 것이다. 나옹(懶翁)의 문자는 손가는 대로 맡겨 일찍이 초고를 지은 적이 없이 그대로 실리(實理)를 토한 것으로서, 찬연히 써내어 운어(韻語)가 쟁쟁하나, 한편으로 그가 세속 문자를 깊이 이해하지 않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세 노래가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한 것은 필시 그가 정밀한 생각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하여 지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영가(永嘉)의 구법(句法)을 본떴을까. 일후에 이 글이 서역에 유전하면, 마땅히 감상할 자 있을 것이다. 제자 모(某) 등이 내게 그 발어를 써달라 청하기에, 내가 그 제목을 풀이하고, 또 그 체를 상고하여 이로써 그 청에 응한다. 그런데 그 정치한 속이야 내가 고기[魚]가 아니거니, 어찌 고기를 알랴.

동문선 제102권   
 
 
 발(跋)
 
 
발 호법론(跋護法論)
 

이색(李穡)

송(宋)나라 승상 장천각(張天覺)의 《호법론》 한 편이 거의 만여 자에 달한다. 석씨의 도제 승준(僧俊)이 환암 보제대선사(幻菴普濟大禪師)의 명으로 충주(忠州) 청룡사(靑龍寺)에서 이를 중간하였는데, 이미 공역을 마치고는 원본을 가지고 나에게 그 말미에 발하기를 요구해 왔다. 내가 그 말을 보니 거의 다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다. 그러나 한(韓 한유)ㆍ구(歐 구양수)씨를 배척하기를 좋아하였으니, 한ㆍ구씨는 내가 본받는 바인지라, 내 실로 해괴하게 안다. 하지만 오탁악세(五濁惡世 불교에서는 인류가 생존하는 세계를 오탁악세라 부른다.)에서는 착한 일을 하여도 반드시 복되지 않으며, 악한 짓을 하여도 반드시 화 되지 않는다 하니, 불씨가 아니면 어디에 귀의하겠는가. 아, 《호법론》이 세상에 성행함은 의당한 일이로다.

 
 동문선 제102권   
 
 
 발(跋)
 
 
근사재일고 발(近思齋逸藁跋)
 

이색(李穡)

원조(元朝) 북정(北庭)의 진사로서 고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자에 마조상 백용(馬祖常伯庸)과 여궐 정심(余闕 廷心)은 더욱 그 뛰어난 자였다. 을유년 을과(乙科)인 설백료손(?伯遼遜) 공원(公遠)이 남방에서 배워 나이 20이 넘지 않아서 과거 공부를 다 통달하고, 사이 사이로 고문을 닦으니, 이름을 크게 떨쳤다. 이미 급제하고 한림(翰林)의 직임을 받들어 단본당정자(端本堂正字)에 선발되어 한참 만에 숭문감(崇文監)에 승진되어 바야흐로 크게 신임 기용하는 방향으로 나가더니, 정권을 잡은 자가 그의 아버지 회남(淮南) 좌승공(左丞公)과 더불어 숙원이있었던 관계로 지방으로 나와 단주(單州)를 다스리니, 유능하다는 성명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임시 우거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적들이 이미 상도(上都)를 격파하고, 요서(遼西)를 향하고 있었다. 공원이 자제들을 이끌고 단 한 필의 말로 요수(遼水)를 건너 고려로 들어왔는데, 이미 떠난 지 수일 만에 적이 대령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임금이 단본당(端本堂)에서 좇아 놀았던 까닭으로 해서 영접과 위로가 서로 있었고, 접견함에 이르러서는 예로써 대우함이 극진하여 전(田)을 부원(富原)에 하사하고, 개부(開府)의 군(君)으로 봉하였더니, 수년 동안 살다가 병으로 죽었다. 아우 되는 공문(公文)공이 평소에 그 문고(文藁)가 흐터져 유실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그 시의 기록할 만한 것을 자필로 써서 두 질을 만들었더니, 신축년에 병란을 피하다가 또 잃었던 것을 현 진주 판관 김군 자빈(子贇)이 그 한 질을 잿더미 속에서 얻어 설씨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설씨는 회골(回?)의 대족(大族)으로 중국에 들어와 명문이 되었던 것이니, 급제한 자가 아홉이나 되었다. 시서와 예의가 여러 대에 걸쳐 배고 젖었던 바 공원이 그 정화(精華)를 쌓아서 밖으로 발표하여 떨치고 빛내니, 그의 문장이 광명 찬란하여 곧장 백용(伯庸)ㆍ정심(廷心)과 더불어 서로 상하를 다투니, 가히 후세에 전할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죽기도 전에 이미 잃었고, 잃고 또 잃어서 몇 개 없는데 이르렀으니, 그 역시 슬픈 일이로다. 이제 이 문고를 보니, 모두 소년 시절의 작품이로되, 창연(蒼然)하게 노성한 기운이 있으니, 장년의 저술한 바를 대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들 도관총랑(都官摠郞) 천우(天佑)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문고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김후(金侯)의 힘이다. 나의 형님 천민(天民)이 다행히도 그의 상관이 되어 장차 판에 새기어 이를 진주 향교에 장치하려 한다.” 하고, 그 연유를 서문해 주기를 청하는지라, 내 간략히 공의 나가고 물러앉은 경력의 대개와 이 편질이 다행히 있게된 것을 편말에 서술하여 다른 날에 문장을 분류하여 속편(續篇)하는 자의 고증하는 바로 삼고저 한다. 청룡(靑龍) 임자년 중추(仲秋).


[주D-001]설백료손(?伯遼遜) 공원(公遠) : 고려 공민왕 때 위구르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백료손이며, 공원은 그의 자(字)이다. 《고려사》설손전.

 

동문선 제103권   
 
 
 발(跋)
 
 
근사제일고 발(近思齊逸藁跋)
 

설장수(?長壽)

선인(先人 사망한 아버지의 호칭)의 초고(草藁)가 연도(燕都 북경)에 있을 때에는 원래 모두 7책으로 되어 있었으니, 몸소 분류하여 13권으로 하였던 것이다. 지정(至正) 무술년에, 마침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상고(喪故)를 당하여, 대령(大寧)으로 나와 우거하고 있더니, 이 해 섣달에, 홍구(紅寇)의 난리를 만나 세간과 서적이 씻은 듯이 없어졌던 것이다. 드디어 홀몸으로 동으로 달려, 기해년 봄에 송경(松京)에 도달하였고, 인하여 기억에 잊지 않은 것을 기록하여 두 질(帙)을 만들고 이를 《근사재일고》라 하니, 무릇 시와 문을 합하여 모두 7백여 수가 되었으며 압강(鴨江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주년(週年) 사이에, 또한 3백여 수가 되어, 따로 한 질을 만들고는 《지동록(之東錄)》이라 일렀다. 선인이 세상을 버리시게 되자, 돌아간 숙부 첨추공(簽樞公) 공명(公明)과 지금의 상보공(尙寶公) 공문(公文)과, 및 장수 등이 의론하기를, “서문을 한산(韓山) 이상국(李相國 이색)에게 청구하여 이내 판재에 새겨 영원히 전하게 할 계책을 도모하자.” 하였으나, 논의의 결정을 보지 못한 채 여러 숙부가 서방으로 돌아가자, 고자(孤子 아버지를 잃고서 자칭하는 말)의 힘이 미약하여 일은 드디어 중지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광산(光山) 김자윤 중빈(金子贇仲彬)이 일찍이 한 번 배타고 논 바 있고, 또 그 대략의 경위를 알고 있었는데, 신축년 가을에 내가 우거하는 집에 들려서 말하기를, “내가 《근사일고(近思逸藁)》가 있음을 들었으나, 아직 한 번 보지 못하였으니, 혹 빌려 볼 수 있느냐.” 하기에, 나는 사절하지 못하고, 우연히 강좌(江左)에 있을 때에 지은 것 한 질을 내주어, 이로서 그 소청을 말막음 하였던 것이다. 홍구가 서울을 침범함에 미쳐서 창졸간에 달아난 까닭에 나의 소장본은 다시 존류(存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난이 평정되자 김군이 홀로 이 편질을 완전히 보전하여 돌려주므로, 내가 놀랍고 기뻐서 두 번 절하였다. 그러나 역시 전일의 소원 만은 능히 수응하지 못하였다. 홍무(洪武) 임자년에, 내가 진양(晉陽)의 수령으로 나가니, 때마침 김군이 이 고을의 통판(通判 판관과 같음)으로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개연히 나를 돌아 보고 말하기를, “《일고》의 이미 유실된 부분은 진실로 다시 어찌 할 도리가 없으나,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장구하게 전할 수 있다. 그대가 만약 감히 사역(私役)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지 않는다면 나는 장차 나의 사재를 들여서라도 하겠다.” 한다. 이리하여 각공을 모집하고, 판재(板材)를 구입하여 10일이 못 되어 그 일을 마쳤던 것이다. 아, 자식이 되어 능히 유적을 보전 수호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천지 사이에 용납하지 못할 죄이다. 김군이 한 번 안 까닭으로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기울여서 이미 보전하여 잃지 않게 하고, 또 일을 도와서 후세에 전하게 하니, 비록 옛사람의 충후(忠厚)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더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할 것은 설씨의 자손들이 그 덕을 만 분의 하나라도 능히 갚을 수 있을지의 여부이다.

동문선 제105권   
 
 
 변(辨)
 
 
사에 대한 변[辭辨]
 

이색(李穡)

부(賦)란 것은 근세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삼위(三緯)에 근원하였는데 삼위(三緯)가 변하여 소(騷)가 되고, 소가 변한 연후에 부(賦)를 짓게 되었다. 사(辭)란 것은 공씨(孔氏) 계사(繫辭)에 나왔는데, 《주역(周易)》을 찬양한 것이다. 지금 그 사(辭)의 글을 읽어보면, 운(韻)을 단 것이 매우 많은데, 아마 그 역시 《서경(書經)》의 갱재(?載)란 것에 근본하였는 듯하다.
초 나라 굴원(屈原)이 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변아(變雅)의 유행인 것이다. 송옥(宋玉)ㆍ경차(景差)ㆍ가의(賈誼)가 잇달아 일어나 부를 지었는데, 원류(源流)가 여기서 갖추어졌다. 한(漢) 나라가 일어나자 무제(武帝)가 추풍사(秋風辭)를 지었는데, 대개 소(騷)에 근본하여서 말이 더욱 질박 고상하고, 진(晉) 나라 처사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으되, 말이 번다하나 부(賦)보다는 오히려 간략하고, 반고(班固)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어나자, 남김 없이 포괄하였기 때문에 1편(篇)을 10년만에 이루었다는 말까지 있으니, 아, 만족하기도 하나 그 또한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유독 글뿐만 아니라 흔히 겉으로 꾸민 것이 날로 더해 가면서 속에 쌓인 것은 날로 깎아서 줄고, 지엽(枝葉)이 무성하면서 근본이 쇠약해지는 것은 매우 괴이한 일이다. 근본을 무성하게 한다면 지엽은 성기더라도 또한 무엇이 해롭겠으며, 또한 무엇이 해롭겠는가.

 

 

동문선 제109권   
 
 
 제문(祭文)
 
 
초은선생에게 제사지내는 글[祭樵隱先生文]
 

이색(李穡)

경신(庚申)년 가을 9월 26일에 한산인(韓山人) 이색은 초은(樵隱) 선생에게 제사드리나이다. 공이 옛날 천자의 뜰에서 책문(策文)을 올릴 때에는 깊은 뜻을 우리 부친 가정(稼亭 이색의 아버지 호)에게 물어서 결단하였고, 돌아와서는 우리 모친에게 문에 와서 절을 하였다. 그때 내 나이 15세에 공의 얼굴을 알았는데, 공은 익재(益齋)를 이어 나라에 단청(丹靑)이 되었다. 내가 선생을 글자리에 모신 것이 10년이 넘었다. 내가 전에 병이 들었을 때에 공이 황천(黃泉)으로 돌아갔는데, 내가 지금 일어나서 공의 형용을 산에서 보니 눈물이 떨어진다. 선배는 갔구나. 나는 외롭다. 사문(斯文)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명명(冥冥)한 데에 돌아가고 말았구나. 글을 앞에 베푸노라. 늠름한 영령(英靈)이여, 아, 슬프다. 상향.

 동문선 제109권   
 
 
 제문(祭文)
 
 
경재상 형제가 부친인 시중 정렬공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대신 지음[爲慶宰相兄弟祭父侍中貞烈公文]
 

아, 슬프다. 하늘이여! 여기에 이르렀는가. 죽음을 다해 나라를 섬겨 어려운 때를 구제함에 있어서 더욱 분발하고 더욱 연마하여, 조금도 쇠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임금의 수족이 되고 나라의 귀감(龜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덕은 소공석(召公奭)과 같았으니 마땅히 스승이 되셔야 할 것인데, 하늘이 주지 아니하여 향리(鄕里)에 돌아오셨습니다. 향리에 돌아오셨으니 마땅히 오래 사셔야 할 것인데,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아니하였으니, 슬프다. 어찌할꼬. 외롭게 외롭게 남은 저희 자식들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우리 자손들을 돌아보고 흠향하시옵소서. 아, 슬프다. 상향.


 
 동문선 제116권   
 
 
 행장(行狀)
 
 
목은 선생 이 문정공 행장(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권근(權近)

공의 휘는 색(穡)이요, 자(字)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이신데,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 사람이다. 공의 증조부는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추봉받았던 분으로 이름은 창세(昌世)이며, 할아버지는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秘書監丞)을 선증(宣贈) 받았고, 본국에서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에 추봉받은 분으로 이름은 자성(自成)이며, 선친은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본국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本國匡正大夫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을 선수(宣授) 받고, 시호(諡號)는 문효공(文孝共)이요, 이름은 곡(穀)이다. 원조(元朝) 원통 계유전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호는 가정(稼亭)이다. 문집 20권이 세상에 전해져 있다. 비(?)는 요양현군(遼陽縣君)을 선봉(宣封) 받은 본국 함창군부인 김씨(咸昌郡夫人金氏)로서 천력(天曆) 무진 5월 신미에 공을 낳았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지혜는 보통 사람과 다르고 글 읽을 줄을 알면서부터 글을 보면 곧 암송하는지라 지정(至正) 신사년에 공의 나의 겨우 14세로,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이미 우뚝하게 명성이 높았다. 비로소 20세가 되어 곧 혼사를 하려 하니 일시에 높은 가문과 명망 있는 족속들로 사위를 택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그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여 잔칫날 저녁까지도 다투고 있었다. 곧 안동 권씨에게 장가드니, 명위장군 제군만호부만호 본국 중대광 화원군(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本國重大匡花原君)을 선수 받은 중달(仲達)이란 분의 딸이고, 원조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본국 삼중대광 도첨의 우정승(元朝朝列大夫太子左贊善本國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인 한공(漢功)의 손녀이다. 무자년에 가정(稼亭) 선생이 원조(元朝)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있을 때 공이 조관(朝官)의 아들로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에 보충되어 재학 3년에 중국의 연원(淵源 근본 내력) 있는 학문을 수업하여 익혔다. 갈고 닦으며 물들고 젖도록 익히고, 더욱 크게 나아가서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글을 더욱이 공부했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 선생이 본국에 돌아와 돌아가니 분상(奔喪)하여 거상을 끝마쳤다. 계사년 여름 5월에 공민왕(恭愍王)이 과장(科場)을 열어 선비를 시험할 때 공이 으뜸이 되어 숙옹부승(肅雍府丞)을 제수 받고, 가을에 정동행성(征東行省) 해원(解元)에 합격하였으며 이내 진봉사(進奉使)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북경에 도착하여서 갑오년 2월에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丞旨) 구양현(歐陽玄)과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같이 회시(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이 또 합격하게 되었다. 3월에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을 하였는데 제이갑(第二甲)이 제2명에 뽑히었다. 독권관 참지정사(讀卷官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彛)와 한림승지 구양현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였다. 칙령으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 차례를 기다리는데, 공민왕이 곧 통직랑 전리정랑 예문응교 동지제교 겸춘추관 편수관(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同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더하여 주었다. 을미년 봄에 왕부 필도치 장서 비목(王府必?赤掌書批目)이 되니 유림으로 명예로운 선발이었다. 봉선대부 시내사사인지 지제교 겸춘추관 편의관(奉善大夫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여름에 또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표(表)를 받들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갔다. 8월에 한림원에 예사(禮仕)되었다. 겨울에 경력(經歷 지방 행정관)에 임시로 임명되었으나 병신년 정월에 어머니가 늙으신 까닭으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대개 또한 천하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을에 본국 관제(官制)가 행하여져서 중산대부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고 겸춘추관 편수관 겸병부낭중(中散大夫吏部侍郞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으로 고치게 되어, 문무의 선임을 관장하였다. 처음에 공이 그때 정사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일을 말씀하여 올렸던 바, 모두 시행되었다.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파하고 이부와 병부의 선거를 복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명(命)이 있었다. 정유년에 국자좨주 지각문 계중대부(國子祭酒知閣門階中大夫)에 시보(試補)하였다. 지인상서(知印尙書)가 되었으니, 이는 필도치(必?赤)의 장(長)이므로 거기 선발된 것은 더욱 영광스러웠다. 7월에 우간의대부로 승진되고 계급은 대중대부를 더하니, 이 뒤로부터는 무릇 벼슬을 제수하는 데는 모든 관직(館職 춘추관)을 띠게 되었다. 무술년에는 간한 말로 일이 생겨 권귀(權貴)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에 한때의 간관이 모두 좌천되었는데, 공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어 행장을 꾸려 가지고 새벽되기를 기다리던 중 그날밤에 명이 내려, 공만이 승진되어 통의대부 추밀원 우부승선지공부사(通議大夫樞密院右副丞宣知工部事)를 받았다. 왕이 재상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색은 재덕이 출중하여 보통 사람과 비할 바 아니니 등용하고 버리는 것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따르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 가까이 후설(喉舌 목과 혀같이 가깝고 요긴한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의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장악한지 무려 7년 동안 좋은 계획을 진술하여, 임금에게 주입시키니 나라에 유익됨이 넓고 많았다. 신축년 11월에는 홍적(紅賊)이 서울을 함락시켜, 임금이 피난하게 되자, 신료(臣僚)들은 창졸간에 많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공은 왕을 따라 곁을 떠나지 않고 일심으로 호위하며 참모하고 협찬(協贊 협력하고)하여, 크게 많은 어려움을 건졌다. 모두 극복의 공을 이루니, 일등공훈에 책봉되고, 철권(鐵券 공신에게 나누어 주던 훈공을 기록한 문서)과 전지(田地) 1백 결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 봉훈대부 정동행중서성 유학 제거(奉訓大夫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선수(宣授) 받고, 겨울에 본국 단성보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本國端誠輔理功臣奉翊大夫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을 받으니, 이때부터 나라의 정사를 참여하며 듣기를 20여 년이나 하였다. 비록 벼슬을 내놓고 한가하게 있더라도 큰 정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물었다. 을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의 시관)가 되어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뽑아서 정미년 겨울에는 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하니, 본국 판개성 겸성균대사성(本國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서이다. 처음 신축년에 병란을 겪은 뒤로 학교의 교육이 폐기되었으므로 임금께서 다시 일으키려고, 성균관을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다시 지었다. 강의를 받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한때 경술(經術)의 선비를 가려 뽑았으니,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ㆍ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ㆍ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ㆍ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ㆍ경산(京山) 이숭인(李崇仁) 등과 같은 이가 모두 다른 관직으로서 학관을 겸하였고, 공은 그 장이 되었다. 대사성을 겸함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해 무신년 봄에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며, 여러 사람이 경서를 나누어 글을 가르치고 날마다 강의가 끝나면 서로 의심나는 것을 의논하여 각각 그 아는 것을 다하였다. 공은 즐거워하는 태도로 분석하고 절충하여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맞도록 힘썼는데, 저녁이 다 하도록 피곤함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되어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나 학자들이 그 기송(記誦) 사장(詞章)의 습관을 버리고 신심(身心) 성명(性命)의 이치를 궁구하여, 유교를 높일 줄 알고 이단(異端)에 의혹되지 않으며 그 의리를 바르게 하고 공리(功利)는 꾀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유교의 기풍과 학술이 환하게 일신되었으니 모두 선생이 가르친 공이었다. 여름 4월 왕이 구제(九齋)에 행차하여 친히 여러 생도에게 경서의 뜻을 시험하고, 공에게 독권관(讀券官 답안을 읽는 관리)을 명하여, 이첨(李詹) 등 7명을 취하여 급제를 주었다. 기유년 여름에 동지동거(同知貢擧)로 유백유(柳伯濡) 등 33명을 뽑았는데, 처음으로 중국 과거제도의 역서통고(易書通考)의 법을 썼다. 처음에는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의 동쪽에 세웠는데, 사치를 다하고 극진히 화려하게 하여 몇 해가 되어도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땅을 마암(馬巖)의 서쪽에 골라서 지었는데, 더욱 굉장함을 다하여 노력과 비용이 몇만 냥에 이르렀다. 시중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ㆍ첨서밀직(簽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의 역사는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제물을 낭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술사가 말하기를, ‘여기에 집을 짓게 되면 나라에 불리하다’ 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외람되게 백관의 수장이 되었으니 사직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간함이 옳겠소.” 하고 바로 글을 올려 불가함을 논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유탁을 옥에 가두었다. 이 일로 죄를 주려고 공에게 명하여 대중에 유시하는 글을 짓게 하였는데, 공이 죄명을 물어보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수상으로 있으면서, 불의의 일을 많이 하여, 하늘이 큰 가뭄을 부른 것이 죄의 하나요, 연복사(演福寺) 전토를 빼앗은 것이 둘째요, 노국공주가 죽었을 적에 3일 동안 제사를 거른 것이 셋째요, 그 장사를 강등(降等)시켜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 한 것이 넷째이니, 불충과 불의가 무엇이 이보다 크랴.”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근일에 유탁 등이 글을 올려 영전의 역사를 그만 두기를 청함에 비록 네 가지 일로 그를 죄 주신다 하옵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상소 때문인 것으로 알 것이오며, 또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죽일만한 죄가 아니오니, 다시 한번 생각하옵기를 원하옵니다.” 하였다. 왕은 더 노하여 쓰라고 더욱 급하게 독촉하니, 공이 엎드려 말씀하기를,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 그 죄를 성립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상소의 사건은 영도첨의(領導僉議)께서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였다. 이때에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극히 총애를 받은 신하로 세력을 부렸는데 마침 임금 곁에 있었다. 신돈이 마지못하여 바로 말하기를, “노신도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노하실까 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옥새로 봉인하게 하니 춘부는 고개를 푹 늘어뜨리고 엎드려 감히 드리지 못했다. 신돈이 말하기를, “마땅히 말한 자로 하여금 이것을 봉인하게 하십시오.” 하여, 이내 공에게 명하니, 공은 임금이 노할까 두려웠으나, 바로 봉서하기를, “신 색(穡)은 삼가 봉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탓으로 내 말을 좇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덕 있는 사람을 구하여 섬길지어다. 태조께서 어찌 처음부터 왕손이겠는가. 내가 임금의 자리를 피하겠노라.” 하고, 정비(定妃)의 궁으로 옮겨가 거처하면서 음식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다음날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려고 임금에게 공을 옥에 가두어 문책하기로 하고,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에 처하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의 포의(布衣)로부터 외람되게 임금의 알아주심을 힘입사와 갑자기 재상의 자리에 이르렀사온데, 상감의 덕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 있다 하오면 죽음에 이르더라도 애써 말씀드리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옵니다. 이제 유시중(柳侍中)이 구속되어 있사온데 신이 감히 무죄를 극진히 말하옴은 상감께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살펴 깨닫게 함으로써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고자 함이옵나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신이 우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서가 아니오라, 다만 이 한번의 실수로 말미암아 상감의 이름이 뒷세상에 아름답지 못할까 두려워서이옵니다.” 하였다. 옥관(獄官)이 갖추어 상감에게 말씀올리니, 임금은 드디어 감동하고 깨달아 유탁들을 석방하고, 공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조회에 들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知貢擧)로서 김잠(金潛) 등 33명을 뽑았다. 가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 받고 문충보절 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이때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다. 공민왕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여론이 어떠한고.”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 나라에서 사람을 얻었다 하옵니다.” 하니, 왕은 웃으며 이르기를, “문관과 무관에서 모두 제 일류만 써서 재상을 삼았으니, 감히 의논하겠는가.” 하였으니, 대개 같은 날 두 어진 이를 채용한 것을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이었다. 왕은 매양 공과 성산(星山) 사람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며, 반드시 좌우로 하여금 깨끗이 쓸고 향을 피우게 하였으니 행승(倖僧) 신조(神照)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만나는데, 하필 공경을 드림이 이와 같사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알리요. 이 두 사람의 도덕이 평범한 선비가 아니요, 또 색(穡)의 학문은 피부를 넘어 골수에 들어간 자이다. 비록 중국이라 하더라도 겨룰 자가 없는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소홀하게 하겠느냐.” 하였다. 대체로 왕이 일찍이 황제의 뜰에 입시하였을 때 조정 안의 사대무들이 공을 칭찬하는 것이 그전부터임을 들었던 까닭으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9월에는 어머니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사를 당하였다. 다음해 임자년 6월에는 왕께서 기복(起復) 하게 하여,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복직시켰는데, 병으로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대광으로 계급을 주었다. 갑인년 가을에 공민왕이 흥서하였다. 공이 어머니인 요양현군의 서거(逝去)로부터 슬프고 상한 것이 병이 되어 구토 설사로 병들었는데, 임금의 서거를 듣고 병이 더욱 위독하게 되어 문을 닫고 7ㆍ8년 동안 누워 있다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화상의 부도(浮屠)의 명을 지었다. 그 무리들이 그로 하여금 많이 문하에 왕래하게 되었고, 무릇 시문도 구하였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곧 응대하니 부도(浮屠 불교)에 매우 아첨한다는 비방을 들었다. 공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그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복되게 한다 하니 나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노라.” 하였다. 정사년에 추충보절 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더하였고,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를 관장하였다. 임술년에 삼중대광 판삼사사(三重大匡判三司事)를 받았고,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였으며, 갑자년에 한산 부원군(韓山府院君)을 더하여 봉하였다. 을축년에 벽상 삼한 삼중대광 검교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을 받았다. 병인년에 지공거로 맹사성(孟思誠) 등 33명 뽑았다. 무진년에 조정(朝廷 명 나라)에서 철령위(鐵領衛)를 두고자 하니, 시중 최영(崔瑩)이 정권을 잡고 정치를 하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요(遼)를 치려 하였다. 우리 태상왕이 거의(擧義 옳은 일을 주장함)하여 군사를 끌고 돌아와 집요하게 최영을 물리치고 공을 기용하여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공이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틈이 있어 왕과 집정(執政 정권 잡은 사람)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변명할 수가 없을 것인데, 상감께서 어리시어 능히 행하지 못하시니, 이것은 이 늙은 놈의 책임입니다.” 하고, 곧 연경에 가기를 자청하므로 임금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이 심하다고 말리니, 공이 말하기를, “신이 포의로서 지위가 최상의 품질에 이르러, 항상 죽음으로 보답하려 하였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사옵니다. 설사 길에서 죽어 시체로 왕명을 받들더라도 진실로 나라의 명을 천자에게 알리게 되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산 것에 진배 없사옵니다.” 하고, 북경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가 가상하게 여기어 상주는 것이 보통보다 더함이 있었고, 융숭하게 대우하여 보내었다. 기사년에 우리 나라에 돌아와서 가을에 물러가기를 청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등극하니 공을 꺼리는 자가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기게 되었다.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밀려났다. 5월에는 이초(彛初) 를 상국(上國)에 보냈다는 것으로 무함되어 공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청주에 가두고 고문하기를 매우 준엄하게 하니 일이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생사는 하늘이다. 마땅히 의리와 운명에 순할 뿐이다.” 하고, 태연하게 자처하였다. 며칠 뒤 여명(黎明)에 시작한 비가 아직 한낮이 되지 못하여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아오르게 되어 성문을 무너뜨리고 넘어오니 집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문사관(問事官 조사하던 관원)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가 나무를 붙들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역마로 급하게 나라에 보고하니 풀어주고 책임을 묻지 아니하였다. 이 고을이 수재가 이와 같이 심한 일이 오로지 없었으므로 모두 공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왕은 본래부터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아는지라 누차 소환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사람의 탄핵을 받아 갑자기 쫓김을 당했다. 공이 왕래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고, 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서 병을 청탁하여 가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다. 신미년 겨울에 또 함창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돌아오니, 문인 권근(權近)이 또한 충주로 귀양가다가 길에서 공을 보고 남에게 들은 것을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이다. 사람의 신하된 도리가 임금께서 명하는 것에 따를 뿐이므로, 부르면 가고 가라 하시면 와서 죽어도 또한 피하지 못할 것인데, 가고 오는 것을 어찌 생각할 것인가.” 하였다. 이미 오니, 다시 한산 부원군에 봉하였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직되시고, 6월에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니, 공을 꺼리는 자가 극형을 가하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내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하지 아니하는데, 감히 거짓을 복종하겠는가. 비록 죽더라도 바른 귀신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상감에게 들리니, 상감이 그 점을 살펴서 특별히 용서하여 장흥으로 옮겨 가게 하니, 오로지 공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겨울에 용서받아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공양왕 초년으로부터 기필코 꺼려하는 사람들이 누차 계교로써 공을 기필코 죽을 땅에 두려고 하였으나 왕이 문득 구하여 온전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이르러 공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그 계책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가서 놀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대로 머물러 거처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어 불러 맞이하고 다시 한산에 봉하니, 나가 뵙고 물러나올 때는 중문까지 보내고 대접하기를 옛친구의 예로써 하였다. 병자년에 공의 나이 69세가 되었다. 여름 5월에 여강(驪江)으로 가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배에 오르려 하는데, 병이 들어 아들 종선(種善)을 경성에 부르고 7일 날에는 병이 위중하자, 중이 불도를 말씀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손을 들어 휘두르며 말하기를, “생사의 이치를 나는 의심하지 않노라.” 하고, 말을 마치자 세상을 끝마쳤다. 부고가 보고되니, 임금이 대단히 슬퍼하고 조회를 사흘 동안 보지 않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제사지내고 부의금을 보내는 데 더함이 있었다.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내렸다. 10월에는 자손들이 영구를 모시고 한주(韓州)로 돌아가서 11월 갑인년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밝고 깊으며 학문이 정미롭고 넓어, 처사가 자세하고 밝으며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사정을 잘 이해하여 주었다. 의론할 때에 가부를 정함에 있어서 명백하고 간절하되 반드시 충후함을 주로 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할 때에 겸손하고 공순하고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며, 단아하시어 화기가 유연화되, 늠름한 기상을 범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재상이 되자 힘써 이루어진 법을 좇아 복종하고 새로 고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대체를 가지도록 힘썼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생각이 늙도록 변하지 않아 매양 말과 얼굴빛에 나타나고 시문(詩文)에 나타났다. 후진들을 권면하여 진취시키되 반드시 윤리를 위주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게을리하지 않고 모든 책을 박람(博覽)하였지만 더욱 이학(理學)에 깊었다. 대개 문장을 짓기 위하여 붓을 잡으면 바로 써내려가는데 마치 바람이 가고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으면서도, 말뜻이 정도(精到)하고 격률(格律)이 높고 넓어 도도하기가 강하(江河)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문집이 있는데, 시 35권과 문 20권이 있다. 원 나라 말년 지정(至正) 계사년부터 황조(皇朝) 홍무 기사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간에 나라의 문한을 장악한 사람이 많이 변경된 까닭으로, 험난한 즈음에 능히 사명(詞命)을 지어, 여러 번 감탄함을 받았고, 공이 폄직당하게 되니 공을 꺼리는 자가 글을 맡아 보게 되었는데, 비로소 표사(表辭) 문제로 황제에게 책망을 당하게 되었으니, 공의 문장과 지식이 세상에 도움이 있음이 이와 같았다. 아깝게도 공민왕이 한갓 공경만 다 할 줄 알고 그 말을 모두 쓰지 못하여 늦게 백료의 장이 되었으나, 얼마 아니되어 파면되고 마침내는 헐뜯고 미워함을 당하게 되어서 경제(經濟) 의 학문을 끝내 크게 실시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그런 것이다. 집을 다스리는 데 비용의 유무를 묻지 아니하여 비록 자주 끼니꺼리가 없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빠르게 말하는 일도 없어, 집사람이나 하인들이 혹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천천히 타일러 일찍부터 노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연회 좌석에 참석하였을 때에도 여유롭고 느긋하게 행동하여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마음이 소탈하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여, 기쁨과 노함이 외모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모가 나지 않아, 완전히 한 덩어리의 화한 기운으로 뭉쳐 있다. 오래도록 은총을 받고 이로운 자리에 교만하고 뽐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늘그막에 어려움을 만나서도, 기개가 떨어지고 줄어듦을 보지 못하였다. 옥에 갇혀도 욕되게 여기지 않고, 높은 벼슬을 하여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의 타고난 천성과 지키고 실천해 나아감이 또한 확고하여 뽑을 수 없다고 이를 만하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종덕(種德)인데, 추성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推誠翊衛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이고, 둘째 아들은 종학(種學)인데, 봉익대부 첨서밀직사사(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이고, 병진의 진사로 무진년에 성균관 과거를 맡아 보았고,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맡아 보던 주시관)가 되었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셋째는 종선(種善)인데, 중정대부 전교령 지제교(中正大夫典校令知製敎)가 되었으며, 임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장남인 밀직 종덕은 아들이 넷이 있는데, 맏아들 맹유(孟?)는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中顯大夫監門?大護軍)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맹균(孟畇)인데, 승봉랑 고공좌랑(承奉郞考功佐郞)이 되어 을축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셋째 아들은 맹준(孟畯)인데, 임신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넷째 아들 맹진(孟畛)은 인덕궁(仁德宮) 사연(司涓)이 되었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통정대부 승추부 우부대언(通政大夫承樞府右副代言)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중훈대부 종부령(中訓大夫宗簿令)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인 첨서(簽書) 종학은 아들이 여섯인데, 맏아들 숙야(叔野)는 조봉대부 사재소감(朝奉大夫司宰少監)이 되고, 둘째 아들 숙규(叔畦)는 성균관 생원이 되고, 셋째 아들 숙당(叔當)은 호용순위사 부사직(虎勇巡衛司副司直)이 되고, 넷째 아들 숙묘(叔畝)는 조산대부 사수소감(朝散大夫司水少監)이 되고, 다섯째 아들 숙복(叔福)은 성균관의 생원에 합격되었고, 여섯째 아들 숙치(叔?)는 아직도 어리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아직 어리다. 셋째 아들인 전교(典校) 종선의 아들은 하나인데, 계주(季疇)라 불렀다. 증손(曾孫)에 남자 일곱 사람과 여자 아홉 사람이 있다.


[주D-001]해원(解元) : 해(解)라는 말은 지방에서 실시하는 초급 시험이요, 원(元)은 장원이란 말이다.
[주D-002]기복(起復) : 예전에는 거상을 입고 있는 3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아니하므로 벼슬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그 사람이 필요하면, 특명으로 그 사람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명한다. 그것을 기복이라 한다.
[주D-003]이초(彛初) : 이(彛)는 윤이(尹彛)요, 초는 이초(李初)이다. 이 두 사람이 명 나라 서울 북경에 가서 이성계(李成桂)가 왕씨는 아닌 사람인데, 자기의 친척이라 하여 요(瑤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고, 군을 동원하여 중국을 공격하려 한다고 고발하여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되었었다.
[주D-004]경제(經濟) :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준말인데,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건진다는 뜻이다.


동문선 제117권   
 
 
 행장(行狀)
 
 
고려국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 영록대부 형부상서 정선생 행장(高麗國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榮祿大夫刑部尙書鄭先生行狀)
 

정도전(鄭道傳)

선생의 성은 정(鄭)이요, 휘는 운경(云敬)이요, 자(字)는 □이며, 일찍 모친을 여의고 이모의 집에서 길러졌다. 겨우 여나믄 살에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여 영주향교(榮州鄕校)에 들어갔다가 복주목(福州牧 지금의 안동)의 향교에 올라갔다. 처음 들어가니 여러 학생들이 대수롭게 알지 않았으나, 공부한 과정을 매길 때마다 우등을 하여, 그 고을 원들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외삼촌 한림 안장원(翰林安壯元 이름은 분(奮) 이며 어머니의 오빠)을 따라 개성으로 와서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십이도(十二徒)들 사이에 놀아, 여러 학생 가운데서 유명해져서 한림 유공(翰林劉公 이름은 동미〈東美〉)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근재 안공(謹齋安公)의 칭찬을 받게 되고, 가정 이공(稼亭李公)과 나이를 가리지 않는 친한 벗이 되었다. 동방 산수가 좋단 말을 듣고 가정선생이 선생과 가보기를 약속하자, 선생이 기껍게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도보로 따라갔다.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에 갔다가, 거기서 머물러 수년이나 글 공부를 하였고, 또 옛날 간의대부 윤공(尹公 이름 안지〈安之〉)과 삼각산에서 글 공부를 하였는데, 한번 본 것은 다 기억하였고 대의에 통달하고야 그만두었다. 병인년 □월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지순 원년(至順元年 고려 충숙왕 17년) 10월에 송천봉(宋天逢)의 방(榜)에 동진사(同進士)에 올랐고, 2년 정월에 상주목(尙州牧)의 사록(司錄)이 되었다. 용궁감무(龍宮監務)의 장물죄를 무고(誣告)한 자가 있어 안렴사가 선생에게 그 사건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선생이 용궁에 가서 감무를 보고 묻지도 않고 돌아와 하는 말이, “관리들이 뇌물을 탐내는 것은 비록 나쁜 일이나, 그 재주가 족히 법을 농락할 줄 알고 위엄이 족히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못하는 것인데, 지금 감무는 늙어서 직책을 못하는데, 사람들이 무엇을 겁내어 뇌물을 주겠습니까. 무고입니다.”하였다. 안렴사가 과연 무고인 것을 알고 탄복하기를, “근래 관리들이 모두 까다롭게 다루는 것만 능사로 아는데, 이 사록은 진실로 점잖은 사람이다.”하였다. 이 고을 사람에 환자(宦者)가 있어 천자(당시 원나라 황제)에게 귀염을 받았는데, 사신으로 와서 상주에 들려 선생에게 비례(非禮)로 욕을 주려 하니, 선생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나자 아전들과 선비들이 길가에서 부르짖고 통곡하니, 환자가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밤에 용궁까지 뒤따라와 이마에 피가 흐르도록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돌아가 주기를 청하였다. 3년 4월에 전교(典校)에 들어가 교감이 되고 4년 3월에 주주가 되고, 윤 8월에 낭(郞)이 되었는데, 모두 도평의 녹사(都評議錄事)를 겸하였다. 이때 원사(院使) 장해(張海)가 어향사(御香使)로 명을 받들고 오는데, 나라에서 선생을 접반녹사(接伴錄事)로 임명하였다. 어향사가 사랑하는 강릉 기생과 함께 있으며 선생이 들어가 공사를 이야기하는 데도 기생이 한 자리에 뻔뻔스럽게 앉아 있자 선생이 꾸짖어 내려가게 하니 어향사가 성을 냈다가 다시 위로했으니, 선생은 더럽다고 접반을 사면하고 돌아와버렸다. 5년 9월에 삼사 도사(三司都事)로 옮겼다가 6년 10월에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로 제수되었고, 지정 원년(至正元年 고려 충혜왕 2년) 6월에 전의 주부(典儀主簿)가 되었다. 계급은 다 승봉랑(承奉郞)이었다. 2년 8월에 통직랑(通直郞)으로 올라,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이 되고, 3년 □월에 밀성군 지사(密城郡知事)로 나갔다. 이때 재상 조영휘(趙永暉)가 밀성 사람에게 빚받을 것이 있어 어향사 안우(安祐)에 부탁하여 본군(本郡)에 공문을 보내어 받아들이라 하였으니, 선생이 그것을 제쳐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이 고을 마중나온 아전이 어향사를 보고 김해부에 달려 들어가니 미처 마중 나오지 않았다고 부사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 달려와서 수석 아전과 함께 들어와서, “김해 부사가 죄없이 욕을 당하였으니 지금 명령을 좇지 않으면 무슨 욕이 있을지 모릅니다.” 했으나 선생이 듣지 않아, 온 고을이 걱정을 하였다. 어향사가 들어와서 인사를 마치고 전에 공문을 보낸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밀성 사람 중에 부채진 사람이 있다면 조재상 자신이 받을 것이지, 상공(相公)께서 물을 일이 아닙니다.”하니, 어향사가 성을 내어 좌우 사람으로 하여금 둘러 포위하니, 선생이 정색하고, “이제 들밖까지 마중나와 의식을 갖추고 천자의 명령을 영접하는데, 무엇으로 나를 죄줍니까. 상공이 덕음(德音)을 선포하여 먼 곳 백성들에게 은혜스럽게 하지 않고 감히 이런 일을 합니까.”하니, 어향사가 할 말이 없어 그쳤다. 관직이 갈려서 갈 때에 선생이 공무로 밖에 나가 있다가 고을에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떠났더니, 밀성 사람들이 월봉(月俸)은 당연히 바칠 것이라 하여 그 행자(行資)로 주었으나 부인이 받지 않았다. 4년 9월에 복주목 판관(福州牧判官)으로 옮겼다. 호장(戶長) 권원(權援)은 전에 향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이다. 부임하던 날 저녁에 술과 안주를 갖고 뵙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불러들여 함께 앉아 술을 마시면서 하는 말이, “이 자리에서 자네와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은 옛정을 잊지 않음이니, 내일이라도 법을 범하면(삼봉집 참고) 판관으로서 너를 용서할 수 없다.”하였다. 그 고을 승정(僧正 중〈僧〉의 벼슬)이 옹천(瓮川) 역 길에서 도둑에게 해를 받아 겨우 목숨만 붙은 것을, 역리(驛吏)가 그 연유를 물으니, 승정이 말하기를, “내가 베〈布〉 몇 필을 지고 아무개의 집으로 갈 때, 밭 가운데서 거름주는 일꾼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아무 곳에서는 밭에서 김매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얼마쯤 가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나는 밭에서 김매고 있던 자이다. 불러서 이야기하려 하였는데 왜 대답하지 않느냐’하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저를 치고 베를 빼앗아 갔습니다.” 하였다. 역리들이 부축하고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죽었다. 아전들이 김매던 자들을 잡아서 목사에게 알렸고, 김매던 자들이 자복해서 이 옥사가 이루어졌다. 선생이 다른 곳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승정을 죽인 자는 이 사람이 아닐 것이다.”하니, 목사가, “벌써 자복하였다.”하였다. 선생은, “어리석은 백성이 매질하니 고초를 견디지 못하여 겁을 먹고 아무렇게나 대답한 것일 것이요.”하니, 목사가, “그렇다면 공이 이 일을 명백히 처리하오. 나는 모르겠소.”하였다. 선생이 거름주던 주인을 불러, “내 들은 즉 네가 일꾼들에게 술대접하던 날 승정이 지나간 뒤에 승정의 베를 말하던 자가 있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하렸다.”하니, 밭 주인의 대답이, “한 사람이 좌중에서 ‘승정의 베로 술값을 갚겠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그 사람과 그 아내를 잡아다가 그 사람은 밖에 두고 먼저 그 아내를 문초하기를, “내 들으니 아무 달 아무 날에 네 남편이 베 몇 필을 너에게 주었다 하니 어디서 얻은 것이라 하더냐.”하니, 그 아내의 대답이, “아무 달 아무 날에 남편이 베를 가져와 하는 말이, ‘베를 빌려 줬던 자에게서 돌려 받았다’고 하더이다.” 하였다. 다시 그 사내에게, “베를 빌려 줬던 사람은 누구냐.”물으니, 그가 말이 막혀 죄를 자복하였다. 목사와 아전들이 놀라 물으니 선생의 대답이, “대개 도둑이란 그 종적을 감추고 누가 알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인데, 김매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인 것이라.”하였다. 5년 □월에 들어가 삼사 판관(三司判官)이 되고, 6년 10월에는 봉선대부 서운부정(奉善大夫書雲副正)이 되고, 이 해 겨울에 하정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들어갔다. 이 때는 황후 기씨(奇氏)가 사랑을 독차지하여, 중관(中官 내시)들이 우리 나라 사람이 많았다. 술과 안주를 가져와 대접하면서 자못 거만스러웠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 대접하는 것은 옛 임금을 위한 것일 것이다.” 하니, 중관들이 놀라며 “우리들을 가르쳐 주었소. 그대는 큰 수재(秀才)요.” 하였다. 7년 3월에 성균 사예가 되고, 12월에 봉상 전교 부령 직보문각 지제교(奉常典校副令直寶文閣知製敎)에 오르고, 8년 2월에 양광도(楊廣道) 안렴사로 나갔다가 9년 10월에는 교주도(交州道) 안렴사가 되었다. 공이 가는 곳마다 대소 고을들이 엄숙하여졌다. 양광도에 있을 때 가정(稼亭)이 그 선조 분묘를 참배하기 위하여 한주(韓州 서천)에 돌아와 있었다. 선생이 찾아가 뵙고 웃고 이야기함이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선생이 술에 취하여 비스듬히 누워서 가정에게 하는 말이, “우리들은 이만하면 현달한 것이요.”하니, 가정의 말이, “내가 네 번이나 재상자리를 지냈으되 아직도 내 위에 있는 자리가 있는데, 자네는 겨우 안렴사 4품직에서 어찌 귀히 되었다 하는가.”하니, 선생의 말이, “어찌 동해 지방에 유람하던 때를 생각하지 않는가.”하니, 가정이 크게 웃었다. 10년 4월에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고, 11년 정월에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어 옥(獄)을 다스림이 원통하고 지체됨이 없었다. 12년 9월에 또 외직으로 전주 목사가 되어 봉순대부 판전교시사의 차함(借啣)으로 있었다. 늦은 봄부터 이른 여름까지 가뭄이 심하다가 선생이 부임하던 날 큰 비가 내려 관리와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이 전에 중이 장가를 들어 살림을 하고 있다가 하루는 밖에 나가서 상처를 입고 산길에서 죽었다. 그 아내가 목사에게 정소(呈訴)했으나 증거를 잡지 못해 오래도록 결말을 짖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부임하던 날 또 와서 정소하였다. 즉시 그 아내에게 “남몰래 친한 사람이 있느냐.” 하고 국문하니, 대답하기를, “친한 사람은 없으나 이웃에 홀아비가 하나 있어 일찍이 저에게 희롱하기를, ‘노승이 죽으면 일이 마음대로 되겠다’고 한 일이 있습니다.”하였다. 곧 그 홀아비와 어미를 잡아들여 사나이는 밖에 두고 어미만 불러들여 문초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 아들이 집에 있었느냐 외출했었느냐.” 하니, 대답이, “이날 아들이 외출했다가 돌아와 하는 말이, ‘아, 괴롭다. 친구와 술을 마셨더니 취했다’ 하더이다.” 하였다. 다시 그 아들을 불러들여, “그날 누구와 술을 마셨느냐.”하고 추궁하니 말이 막혔는데 과연 중을 죽인 자이었다. 어향사(御香使) 노모(盧某)가 횡포가 심하여 가는 곳마다 수령들을 능욕하였다. 고을에 들어와서는 성밖까지 영접 나오지 않았다고 죄책을 잡았다. 선생이 예(禮)를 인증하여 굴하지 않고 즉일로 버리고 떠나니, 부로(父老)들이 부르짖어 울고 어향사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니 나가지 않았다.
병신년 7월에 중산대부 병부시랑으로 불려가서, 무반(武班)의 인사를 맡아 전형을 공평하게 하였다. 9월에는 서해도 찰방(察訪)으로 군수품을 맡아 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는 전쟁이 일어나는 처음이었고 군량이 급했는데, 선생이 2,30만 석 운반하는 일을 한 달에 끝내니, 국가에서 전국에 독촉할 적에 서해도를 인증하여 말하였다. 지정(至正) 17년 2월에 중대부 비서감보문각 직학사(中大夫秘書監寶文閣直學士)에 오르고, 4월에 존무강릉 겸삭방도 채방사(存撫江陵兼朔方道采方使)가 되었다. 삭방도의 고을들이 오랫동안 여진(女眞)에 함몰되어 경계가 분명치 못하였는데, 전쟁이 문득 일어나니 백성이 흩어졌다. 이에 선생이 경내를 어루만지고 백성의 산업을 안정시켜 백성이 편하게 되었다. 18년 2월에 본직으로 지형부사(知刑部事)가 되었다. 송사(訟事)가 도평의사로부터 내려온 것이 있으니 선생이 재상에게 말하기를, “백관의 차례를 정하여 능한 자를 쓰고 능하기 못한 자를 물리치는 것은 재상이 할 일이며, 법을 행하는데 각각 맡은 관원이 있는데, 일마다 재상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은 그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라.”하였다. 송사하는 자가 폭주하여 선생이 판결하는데 처음에는 유의하지 않는 것같이 하다가, 두 사람이 함께 와서 송사할 때엔 판결이 정당하여 이기고 짐이 다 공평하다고 일컬으니 공민왕이 가상하게 여겼다. 19년 3월에 영록대부 형부 상서에 뛰어 오르고, 겨울에는 공민왕이 남방을 순행할 때 선생이 충주까지 따라와 뵈오니 왕이 기꺼이 인견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23년 7월에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을 제수하였으니, 그 편의를 좇은 것이다. 25년 겨울에 병으로 사직하고 영주(榮州)에 돌아와 26년 정월 23일 을사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 선영 밑에 장례를 지냈으니 영주읍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이 해 겨울 12월 18일에 부인 우씨(禹氏)도 세상을 떠나니 부장(附葬)하였는데 영주 사족(士族) 산원(散員) 연(淵)의 딸이다. 선생이 평소 가사에 관심이 없었고 세속의 이해 관계에 담담했으나 손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했는데 부인은 있고 없고를 관계치 않고 적당히 주찬(酒饌)을 갖추어 선생의 어진 이를 친하고 착한 이를 벗하는 뜻에 순종하였다. 아들이 셋이니, 도전(道傳)은 임인년 진사시험에 합격해서 지금 선덕랑 통례문 지후(宣德郞通禮門祗候)가 되었고, 도존(道存)과 도복(道復)은 다 글을 읽었다. 딸은 하나이니 사인(士人) 황유정(黃有定)에게 출가했는데, 성균 사예 근(瑾)의 아들이다. 손자는 둘을 두었는데, 진(津)ㆍ담(澹)이며 다 어리다. 아들 도전은 삼가 행장을 쓴다.


[주D-001]십이도(十二徒) : 즉 12공도(公徒), 개성에 있었던 12사학(私學)의 전부다. 당시 최충(崔?)의 9재(齋)를 모방하여 11명의 유신(儒臣)들이 사학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11명의 도(徒)에 최충의 도(徒)를 합하여 12도라 함.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鄭倍傑)의 홍문(弘文)공도, 노단(盧旦)의 광헌(匡憲)공도,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文忠)공도, 김의진(金義珍)의 양신(良愼)공도, 황영(黃瑩)의 정경(貞敬)공도, 유감(柳監)의 충평(忠平)공도, 문정(文正)의 정헌(正憲)공도,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주D-002]가정 이공(稼亭李公) : 한산(韓山)사람 이곡(李穀)의 호, 목은(牧隱) 색(穡)의 부친, 자(字)는 중보(仲父)이며, 고려 시대의 학자. 문집 20권이 있다.
[주D-003]양광도(楊廣道)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광주군 부근 일대의 옛 도명.
[주D-004]교주도(交州道) : 지금의 파주군, 장단군 부근 일대의 옛 도명.

동문선 제119권   
 
 
 비명(碑銘)
 
 
광통보제선사비명 병서 (廣通普濟禪寺碑銘) 병서(幷序) 
 

이색(李穡)

금상(今上) 4년, 정사 겨울 10월 초하룻날 문하판사 칠원부원군(門下判事漆原府院君) 신(臣) 윤환(尹桓), 시중 청원부원군(侍中淸原府院君) 신 경부흥(慶復興), 수 시중 광평부원군(守侍中廣平府院君) 신 이인임(李仁任), 판삼사 철원부원군(判三事鐵原府院君) 신 최영(崔瑩), 찬성사 판판도사사(贊成事判版圖司事) 신 목인길(睦仁吉), 삼사좌사(三司左使) 신 이희필(李希泌), 찬성사 판례의사사(贊成事判禮儀司事) 신 양백연(梁伯淵), 상의(商議) 신 양백익(梁伯益), 찬성사 판전공사사(贊成事判典工司事) 신 이성계(李成桂), 상의 신 홍중선(洪仲宣), 평리(評理) 신 변안열(邊安烈)ㆍ신 임견미(林堅味), 상의 신 왕복명(王福命)ㆍ신 이자송(李子松), 평리 신 조민수(曹敏脩), 지부사(知府事) 신 왕안덕(王安德), 정당 문학 신 권중화(權仲和), 삼사 우사(三司右使) 신 최공철(崔公哲), 지부사 상의(知府事商議) 신 박보로(朴普老), 정당 문학 상의 신 이보림(李寶林), 밀직사 판사(密直司判事) 신 한방언(韓邦彦), 사신(使臣) 조인벽(趙仁璧), 상의 신 우인열(禹仁烈), 지사(知司) 신 조사민(趙思敏), 신 이림(李琳), 상의 신 홍인계(洪仁桂), 동지(同知) 신 심덕부(沈德符), 첨서(簽書) 신 강군보(姜君寶), 동지 상의 신 강영(康永), 동지 신 도길부(都吉敷), 상의 신 김용휘(金用輝)ㆍ신 김광부(金光富), 동지 신 안종원(安宗源), 첨서 상의 신 곽추(郭樞), 동지응양군 상호군(同知鷹揚軍上護軍) 신 박임종(朴林宗), 부사(副使) 신 이영(李榮), 상의 신 우현보(禹玄寶), 부사 신 배극렴(裴克廉), 상의 신 지용기(池湧奇)ㆍ신 설사덕(薛師德), 부사 신 유실(柳實), 상의 신 이인립(李仁立), 제학(提學) 신 윤방안(尹邦晏), 부사 신 유만수(柳曼殊), 상의 신 왕빈(王?), 부사 신 목충(睦忠), 제학 상의 신 윤진(尹珍), 부사 상의 신 박수경(朴脩敬), 부사 신 송광미(宋光美) 등이 소장(疏狀)에 서명(署名)하여 아뢰기를,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 장년기이며, 착하고 공경함이 날로 향상하여, 종묘를 받들고 국가를 다스림에 부모님이 낳아 길러 준 은혜와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함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밤낮으로 간직하고 계셔서, 엄숙하고 공손하고 공경하며 두려워하시니, 비록 지극히 착한 덕(德)일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은 직책을 봉행함에 어두움을 무릅쓰고 오직 선왕(先王)이 부탁하신 중책을 견디어 전하에게 보답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선왕의 춘추 12세였는데, 중국의 서울에 입조(入朝)하니 황제의 총우(寵遇)가 비길 데 없었습니다. 기축년에 종친인 위왕(衛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북정(北庭) 수천 리의 땅에 친영하였삽고, 기묘년에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 나라에 내려오실 때에 제서(制書)로 승의공주(承懿公主)를 봉하셨습니다. 을사년 2월 16일에 공주가 훙(薨)하니, 군신(群臣)들이 호(號)를 인덕공명 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라 올리고, 4월 임진일에 정릉(正陵)에 장사지냈습니다. 부고가 가니 황제가 제령(制令)으로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라는 호를 추증사셨사온데, 슬프게 생각하신 까닭으로 가등(加等)한 것입니다. 갑인년 9월 23일에 선왕이 훙하시자 군신(群臣)들이 경효대왕(敬孝大王)이라는 호를 올리었습니다. 10월 경신일에 현릉(玄陵)의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에 장사지냈사온데, 이것은 대체로 두 분의 명복을 추복(追福)하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적을 기재할 비석은 선왕께서 중국에서 구해 오신 것입니다. 돌이 도착하였으나 공역(工役)이 한창 많을 때였기 때문에 아직 새기지 못하였더니, 이제 공사 감독관인 척산군(陟山君) 신 박원경(朴元鏡)과, 밀양군(密陽君) 신 박성량(朴成亮) 등이 공사를 마쳤다고 말하고 비석에 글을 새기기를 청합니다. 신 등은 그윽히 말하기를, ‘신 색(穡)이 비문을 짓고 신 수(脩)가 쓰며, 신 중화(仲和)가 전자(篆字)를 쓰게 하면 마땅하겠다’고 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네 색(穡)은 일찍이 문묵(文墨)으로써 우리 선고(先考)를 섬기었으니, 선고의 큰 덕을 드러내 밝혀서 끝없이 드리워 보이는 것은 너의 직책이다. 삼가 봉행하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신 색은 간절하게 스스로 헤아려 보니 밝으신 명에 걸맞게 따르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감히 하교를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여 보니, 이 절은 옛날에는 시흥종(始興宗)에 예속되었는데, 여러 번 그 현판을 고쳐서 광암사(光巖寺)니, 운암사(雲巖寺)니 하였다는 것이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의 기록에 기재되어 있다. 산봉우리의 이름을 무선(舞仙)이라 하고, 물 이름을 주지(酒池)라고 한 것은 모두 가리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선왕(先王)께서 불전(佛典)에 능통하였으며 선종(禪宗)을 숭상하였다. 드디어 말하기를, “불법은 본래 둘이 없다. 하물며 사원(寺院)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조계종(曹溪宗)의 천화사(天和寺)를 시흥종(始興宗)에 예속시키고 말하기를, “감히 다시 광암사를 돌아보지 말라.” 하였고, 광암사는 조계종에 예속시키고 말하기를, “감히 다시 천화사(天和寺)를 바라지 말라.” 하였으니, 싸움의 실마리가 여기에서 끊어진 것이다. 십대사찰(十大寺刹)에 들어가니 차례로는 첫째가 된다. 곧 동(洞)을 광암동(光巖洞)이라 명명하고, 현판을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고 제목하였으니, 광통보제란 말은 대체로 이(利)와 은택이 물(物)에 미쳐서 통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구제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자 함이다. 처음에 공주가 훙하였을 때, 산릉의 터를 보기 위하여 사천대신(司天臺臣)이 그의 속료(屬僚) 경강(景岡)ㆍ서원(胥原)을 거느리고 안 간 곳이 없었는데, 광암동에 들어가서 좋은 곳을 복정(卜定)하였다. 장차 장사를 지내려고 할 때에, 임금이 사천(司天)인 신하 우필흥(于必興)에게 면대(面對)하여 타이르기를, “조금 동쪽으로 옮기고 그 한중간을 사용하지 말아라. 다른 날 나를 그 서쪽에 장사지내어 조금이라도 한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선왕께서는, 해로하지 못하고 태어남은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것을 더욱 느껴서, 그 관청에 명하여 자신의 능실(陵室)을 지으라고 명하여 날짜를 정해 공사를 일으키니, 여러 신하들은 감히 한마디의 말도 내지 못하였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좋은 날을 가려서 현릉(顯陵)의 친묘(親廟)의 능실을 청소하여, 절하고 예(禮)를 마치면 정릉(正陵)에 거둥하여 서성거리며 둘러보곤 하다가 해가 다해서야 떠나가는 것이었다. 조신(朝臣)이 벼슬에 제배(除拜)되어, 삼가 각문(閣門 여기에서는 능실의 합문(閤門))에 나아가 사은하고, 출사(出使)하는 관원의 조사(朝辭)나 조참(朝參) 때에는 다 능(陵) 아래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절사(節祠) 때에는 백관들이 성찬(盛饌)을 차려서 조전(助奠)하여 오래 갈수록 더욱 더 삼갔으니 아, 예가 변함이요 정(情)이 드러난 것이다. 정으로 인하여 예를 일으킴이 지극하다. 신축년에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거둥하였다가 계묘년에 경도(京都)로 돌아와서, 성남(城南)의 흥왕사(興王寺)를 행궁으로 삼았더니, 적이 한밤중을 틈타서 내정(內庭)에 몰래 들어왔다. 임금이 그것을 알고 문예부(文睿府)의 밀실에 옮겨 갔는데, 노국대장공주가 그 문 곁에 앉게 되었더니, 적이 그 앞에 칼날을 드러내게 되어 매우 급급하고 위태하였으나, 감히 그 독수(毒手)를 함부로 하지는 못하므로 장수와 정승이 들어가 구제할 수 있었다. 지금 이른바 흥왕공신(興王功臣)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보우(保佑)한 공은 비록 제갑(提甲)에 비하더라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노국대장공주는 그윽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고요한 덕성을 타고 나서, 옛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짝과 비기기에 넉넉하다. 15년 동안에 일찍이, 터럭만한 사사로운 청알(請謁)도 없었으며, 또 그의 공이 빛나기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그 영화를 누려서 그 보답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미월(彌月 임신 후 만 10개월)의 생산(生産)에서 마침내 그 몸이 죽어, 온 나라 신민들은 슬픔이 뼈에 사무치니, 비록 백천 년이 지난들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절을 지은 까닭이도다. 더군다나 지금 선왕의 하늘에 계신 신령을 여러 신하들이 그 말소리를 듣고 그 밝은 빛을 친근할 수 없으니, 그의 몸과 혼백을 감춘 곳에 힘을 다할 것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또 양부(兩府)의 대신들이 반드시 광암사에 비석을 새기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절의 신구(新舊)의 토지와 노비와 보원(寶原), 고해(庫?), 전고(典庫)와 공응 공판도감(供應供瓣都監)의 토지와 노비와, 전물(錢物) 같은 것은 철권(鐵券)에 기록하고 황금의 인장(印章)을 찍어, 임금과 신하가 같이 맹세하고, 사책(史冊)에 기록하여 명산(名山)에 장치(藏置)하였다. 그 맹세한 말에 이르기를, “종묘와 사직의 여러 신(神)과 천(天)과 용(龍)으로부터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이것을 위에서 보고 계신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고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면 돌에 새긴 뒤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것의 보존은 무사할 것이다. 아, 그의 생각함이 원대하구나.
그 공정(工程)을 상고하여 보니, 임자년의 봄에 경영하여 정사년의 겨울에 준공하였다. 미륵전ㆍ관음전ㆍ해장의 집과, 천성(天星)의 위치, 안팎 선사(禪思)의 집에 일을 보는 이는 질서가 있고, 살고 있는 중들은 승사(僧舍)가 있다. 식당과 객실과 창고와 부엌과 욕실과 종고(鐘鼓)의 누각 등, 모두 집으로 된 것이 1백여 동이나 된다. 그 구조가 교착ㆍ치밀하고, 지붕과 처마는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고, 꿩이 높이 날아오른 것 같다. 부벽(浮碧)은 비늘처럼 즐비하고, 단청은 노을처럼 현란하다. 범패(梵唄)의 기구와 연등의 공구(供具) 등, 온갖 필요한 것은 하나도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질서가 정연하고 빛남이 찬연하다. 크게 삼회(三會)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하니, 불사(佛寺)에서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이 거의 스스로 위로되고, 또한 유감이 없게 되었다.
신 색(穡)은 공손히 생각하니, 선왕이신 경효대왕(敬孝大王)께서는 총명하고 신성(神聖)하여 믿음을 주장하고 공순으로 행하셨다. 천지를 공경하여 교사(郊社)에 정성을 다하고, 조종(祖宗)을 공경하여 종묘의 가을 제사와 겨울 제사에 몸소 강신(降神)의 예를 행하셨다. 적전(籍田)을 몸소 경작하여 백성들보다 먼저 농사하시고, 여러 산릉을 수리하여 추원(追遠)의 도리를 다하셨으며,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을 모두 새롭게 하고 모두 완비하게 하였다. 중국을 높여 제후의 법도를 삼갔으니, 천하의 달통한 예절이요, 착하신 부왕을 섬겨 아들의 직분을 다하였으니 천하의 지극한 효도이며, 어진 원자(元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았으니 천하의 큰 계책이셨다. 외적의 침입을 막아 업신여김을 방어하였으니, 천하가 그의 지혜를 추중(推重)하고, 옥사를 의논하여 형법을 느슨하게 하니, 천하가 그의 용서함을 존중하였으며, 곤궁한 사람을 돌보고 우환 있는 사람을 구휼하여 주시니, 천하가 그의 은혜에 감격하고, 산 것을 놓아 주고 죽이기를 금하시니, 천하가 그의 인정(仁政)에 돌아갔다. 아악(雅樂)을 바로잡고 복장을 변별하며, 조정의 의절을 강구하고, 예속을 일으켜 높이시어 한 시대를 창성함이 고대를 능가함이 매우 많다. 다만 그 만난 때가 어려움이 많고 수(壽)를 받음이 길지 아니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보양(保養)의 은택을 입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아, 슬프다. 이 절에 사는 모든 자로 그 도(道)로써 자임하는 이는 반드시 말하기를, “내가 능히 국가를 복되게 할 수 있다. 내가 능히 귀신과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니, 거의 그 말을 실천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신 색(穡)은 삼가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린다.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밝고 밝고 빛나고 빛남은 / 明明赫赫
경효대왕의 덕이요 / 敬孝之德
엄숙하고 엄숙하며 온화하고 온화함은 / 肅肅雍雍
노국공주의 모습일세 / 魯國之容
금슬의 낙으로 벗 삼더니 / 友之琴瑟
장사에는 그 묘혈을 같이 했네 / 藏同其?
황지 신령하고 창성하여 / 黃紙靈昌
상서롭지 않은 것을 꾸짖네 / 訶禁不祥
절집을 이미 지으니 / ?林旣作
금빛과 푸른 빛이 빛나도나 / ?耀金碧
용과 코끼리가 차고 밟으니 / 龍象蹴踏
조석으로 종고 소리로다 / 鍾鼓朝夕
제사에는 풍성함이 있고 / 有祀其?
바람은 서늘하다 / 有冷其風
신이 뜰에 오르고 내리니 / 陟降庭只
향기가 발산하여 감통하도다 / 焄蒿感通
왕국에 복을 주시니 / 錫祚王國
자손이 천억이네 / 子孫千億
신민들은 살 곳을 정하여 / 臣民奠居
편안하고 즐거워하는 얼굴빛을 보겠도다 / 而康而色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 而至於斯
부처의 위력에 유래한 것이다 / 繇佛之威
아득하고 먼 삼계 속에서 / 茫茫三界
부처님 아니면 어디에 귀의할 것인가 / 匪佛曷歸
강물은 끊어질지언정 / 江流可斷
산의 돌은 타서 없어질지언정 / 山石可爛
오직 이 불교의 도량만은 / 惟此覺場
나라와 더불어 끝이 없으리라 / 與國無疆
너희들 후세의 사람에게 고하노니 / 告?來者
이 새긴 글을 볼지어다 / 視此刻章


[주D-001]부모님의 죽음을 …… 마음 : 《예기(禮記)》 〈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는 그것을 밟고 슬픈 마음을 두고, 봄에 비와 이슬이 내리면 그것을 밝고 놀라움 있어 장차 부모님을 뵈올 듯이 한다고 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계절이 바뀜에 따라 그리워함을 말한다.
[주D-002]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 : 고려 신종(神宗) 원년에 설치한 관청으로, 국내의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補益)하여 기업(基業)을 연장하는 일을 맡아 봄.
[주D-003]천(天) …… 팔부신장(八部神將) :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神將)으로, 천(天)ㆍ용(龍)ㆍ야차(夜叉)ㆍ건달배(乾達婆)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喉羅伽)를 말한다.


동문선 제119권   
 
 
 비명(碑銘)
 
 
서천 제납박타존자 부도명 병서 (西天提納薄?尊者浮圖銘) (幷序) 
 

이색(李穡)

가섭백팔전(迦葉百八傳)에 의하면 제납박타존자(提納薄?尊者) 선현(禪賢)의 호는 지공(指空)이다. 태정(泰定) 연간에 난수(難水)가에서 천자를 뵙고, 불법을 논하여 천자의 뜻에 맞았다. 관계 관사[有司]에 명하여 해마다 옷과 양식을 주니, 사(師)가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고, 떠나가서 동쪽으로 고구려에 노닐어,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례하였더니, 황제(중국)가 연경(燕京)으로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천력(天曆)의 처음에 조서를 내려, 사랑하는 여러 중들과 더불어 내정(內庭)에서 불법을 강설하게 하고, 천자가 친히 임석하여 설법을 들었다. 여러 스님들이 은총을 믿고 오만한 기세를 부리며, 그가 자기네의 은총을 앗아갈 것을 미워하여, 막아서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여러 중들 중에서 어떤 자는 베임을 당하고 어떤 자는 쫓겨났으며, 사의 명성은 중외에 떨치어 드러났다. 지정황후(至正皇后)와 황태자가 연화각(蓮花刻)에 맞아들여 불법을 물으니, 사가 아뢰기를, “불법은 스스로 배우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다스리는 데에만 전심하심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만물과 만복의 만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없어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바치는 주옥(珠玉)을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천력 연간 이후로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은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이미 말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가끔 스스로, “나는 천하의 주인이다.” 하고, 또 후비(后妃)를 가리켜 말하기를, “모두 나의 시녀(侍女)들이다.” 하였다. 듣는 자가 괴이하게 여기었으나 감히 그 까닭을 묻지 못하더니, 오랜 뒤에 임금에게 알려지자 임금이 이르기를, “저는 법중왕(法中王)이니 마땅히 그 자부함이 이러할 것이다. 우리 집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하였다. 중원병(中原兵)이 장차 일어나려 할 때, 사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병마(兵馬)가 많은 것을 아는가. 어디에 몇 만 명이 주둔하고, 어디에서 몇 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 하였다. 사가 살고 있는 절에는 다 고려의 중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말하기를, “네가 무슨 까닭으로 배반하느냐.” 하고, 고취(鼓吹)를 울리려고 하다가 중지하였다. 수일 뒤에 요양성(遼陽省)에서 달려와 고려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였다고 아뢰었다. 경사(京師 서울)라는 곳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사가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빨리 떠나가라.” 하더니, 얼마 뒤에 천자가 북쪽으로 순수하고 중원병(中原兵)이 입성하여, 부(府)를 세우고 북평(北平)이라고 하였으니 사의 말한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증조의 휘(諱)는 사자협(師子脇)이고 나의 조(祖)의 휘는 곡반(斛飯)이며 모두 가비라국(伽毗羅國)의 왕이다. 나의 아버지의 휘는 만(滿)이며 마갈제국(摩竭提國)의 왕이다. 나의 어머니는 향지국공주(香志國公主)이며, 나의 두 형은 실리가라파(悉利伽羅婆)와 실리마니(悉利摩尼)이다. 나의 부모가 동방(東方)의 대위덕신(大威德神)에게 기도하여 나를 낳았다. 나는 어릴 때에 성질이 맑고 깨끗한 것을 즐기고 술과 마늘을 먹지 아니하였다. 다섯 살 때에 스승에게 가서 나라의 글과 외국의 학문을 배웠으며, 대강 그 대의(大義)만을 깨닫고는 버리었다.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의약(醫藥)의 효력이 없었다.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적자(嫡子)가 중이 되면 임금이 병이 완쾌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물었다. 내가 즉시 응낙하니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여, 나의 아명(兒名)을 불러 말하기를, “누달라치파(婁???婆)야 네가 능히 할 수 있느냐.” 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막내아들이라 하여 처음에는 매우 난처하게 여겼으나, 마침내 아쉬움을 참고 중으로 내주기를 원하게 되어서 아버지의 병이 금방 나았다. 8세에 삼의(三衣 비구가 입는 세 가지 옷, 즉 승가리(僧伽梨)ㆍ중의(重衣)ㆍ대의(大衣))를 잦추고, 나란타사(那蘭?寺)의 강사(講師) 율현(律賢)의 문하에 보내어 머리를 깎고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을 배우다가 얻음이 있는 것 같아서 제불(諸佛)과 중생의 허(虛)와 공(空) 두 경계를 물으니 강사가 말하기를,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이 참 반야(盤若)인 것이다. 남인도(南印度)의 능가국(?伽國) 길상산(吉祥山) 보명(菩明)에게 가면 심오한 뜻을 궁극히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 나의 나이는 19세였다. 분발하여 홀로 찾아가서 우리 스승을 정음암(頂音菴)에서 배알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중축(中竺)으로부터 여기에 닿기까지의 보수(步數)를 셀 수 있는가.” 하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러나와 암석(岩石)의 동굴에 앉아서 6개월을 지냈다. 내가 깨닫고 일어나려고 하니 두 다리가 서로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서 그곳 임금이 의원을 불러 약으로 치료하니 곧 나았다. 나는 스승에게 고하기를, “두 다리가 한 걸음입니다[兩脚是步].” 하였다. 나의 스승이 의발을 내게 붙였다. 〈마정기(摩頂記)〉에 말하기를, “산을 한 걸음에 내려오니 이는 사자아(獅子兒)로구나. 나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출신한 자가 2백 43명이나 되지만, 중생에게 다 인연이 적다. 네가 나의 교화를 넓혀라. 가서 힘쓰라.” 하고, 소나적사야(蘇那的沙野)라고 호를 지어 주었다. 중국말로는 공(空)을 가리킨다. 나는 게(偈)를 지어 스승의 은혜를 사례하였다.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아가면 허공이 텅 비어 환하게 틔여 있고, 물러나면 1만 가지 법이 함께 잠겨버린다.” 하고 한마디 크게 소리쳤다. 처음에 내가 나의 스승을 찾아갈 때에, 나라허국(??許國)을 지나는데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게를 설명하여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단치국(旦?國)은 남녀가 섞여 살며 벌거벗고 있으므로 내가 큰 도를 주었다. 향지국(香至國)에서는 임금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의 생질이다.” 하였다. □ 머루르기를 즐기지 아니하였다. 화엄사(華嚴師)가 널리 20가지의 보리심(菩提心)을 강설하고 있으므로, 내가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가릉가국(迦陵伽國)의 바닷가 귀봉산(龜峰山)에 범지(梵志) 가 살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천길 만 길 되는 가파른 벼랑에 몸을 던져 죽는다면, 마땅히 인간계와 천상계의 왕(王)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수행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인데, 육신에 무슨 관여가 있는가.” 하고 육도(六度 보살 수행의 여섯 가지 덕목)ㆍ 십지(十地) 등의 법을 닦게 하였다. 하안거(夏安居)의 결제일(結制日 음력 4월 16일)에 마리지산(摩利支山)에서 드디어 능가국(?伽國)에 도착하였다.
이미 나의 스승을 하직하고 산에서 내려오니 무봉탑주(無縫塔主)인 노승이 반 길을 마중 나와 맞아 주었다. 내가 얻은 바가 있음을 알고 나에게 법을 강연하라고 하였다. 나는 탑을 칭송하고, 우지국(于地國)으로 갔다. 그곳은 군주(君主)가 외도(外道 불교 이외 모든 교)를 믿어서 나에게 살생ㆍ도둑질ㆍ사음(邪淫)의 계(戒)가 있다고 하여 기녀를 불러서 같이 목욕하게 하였다. 내가 태연하기가 죽은 사람과 같으니, 임금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기필코 이인(異人)이다.” 하였다. 그 외도는 나무와 돌로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사람의 머리ㆍ가슴ㆍ넓적다리에 산 하나를 고요히 세운 뒤에, 술과 음식으로써 산에 제사지내고 남녀가 그 앞에서 교합하는데, 이름을 음양공양(陰陽供養)이라고 하였다. 내가 인간계와 천상계, 미(迷)와 오(悟)의 이치를 들어 사교를 타파하고, 국왕을 도와서 불도를 믿게 하였다. 내가 게(偈)로써 사뢰니 임금이 게로써 답하였다. 내가 다시 게로써 아뢰니, 임금이 진기한 구슬 두어 개로써 시주하였다. 모임 가운데 여승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을 젖혀 놓고 묻기를, “저 스승과 이 제자 중간은 누구입니까.” 하였다. 내가 한 게를 지어 보이니 여승이 크게 깨닫고, “바늘눈 속에 상왕(象王)이 지나감[針眼中象王過之]”이라는 게송(偈頌)을 지은 것이 있다. 사자국(獅子國)에는 여래발(如來鉢)과 부처님의 발자국이 있는데, 바리때는 그 한 바리때의 밥을 가지고 1만 명의 중을 능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부처님의 발자국은 때때로 빛을 말한다고 한다. 내가 다 우러러 구경하고 절하였다. 마리야라국(??耶?國)에서는 범지(梵志)를 신앙하였으므로 나는 들리지 아니하였다. 차라박국(??縛國)에서는 정도(正道)와 사교(邪敎)를 함께 믿고 있었다. 내가 좌석에 기대앉아서 말을 하니 여승 중에 말없이 뜻이 서로 통하는 자가 있었다. 가라나국(迦羅那國)도 또한 외도를 신앙하였다. 그곳 왕이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내가 《대장엄공덕보왕경(大莊嚴功德寶王經)》 마혜사라왕인지품(摩醯莎羅王因地品)을 보여 주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법 밖에 또 바른 법이 있구나.” 하였다. 외도의 신도들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즉시성을 나와 버렸다. 해는 이미 깜깜하게 어두워졌으며 범이 오고 있었다. 시자(侍者)가 까마귀의 소리를 알아듣고 나무에 올라가 범을 피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네가 이미 새소리를 알아들으니 내가 설법하는 것을 능히 알 수 있느냐.” 하니, 시자가 말이 없었다, 삼삼봉(三三棒)을 크게 행하였더니 드디어 깨달았다. 신두국(神頭國)은 사막이 아득하고 멀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나무가 있는데 그 열매가 복숭아 같았다. 굶주림이 심하여 두개를 따서 다 먹기도 전에 공신구도공거광전노인(空神句到空居廣殿老人)이 자리를 바로하여 말하기를, “도적은 어찌 절하지 않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불교도이다. 어찌 너에게 절할 수 있겠느냐.” 하니, 노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불교도라고 말하면서 어찌 과일을 훔쳤느냐.”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굶주림과 목마름이 핍박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은 도둑이다. 이제 너를 놓아 주겠으니 불계(佛戒)를 잘 수호하라.” 하였다. 눈을 감게 하고 잠깐 사이에 이미 저쪽 언덕에 이르렀다. 누워 있는 나무 위에서 물을 끊이는데 그 나무는 바로 큰 뱀이었다. 적리라아국(的??兒國)의 여인이 교합(交合)하기를 요구하였다. 굶주렸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고자 하여 장차 응할 것 같이 하면서 그의 말[馬] 중 어느 것이 좋은 것인가 물으니 실지대로 일러 주거늘, 내가 곧 그 말을 타고 달리니 나는 듯하여 문득 다른 나라의 지경에 이르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를 묶어 가더니 그의 양(羊)을 먹이라고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왔는데, 동굴에 들어가서 선정에 들어갔더니 7일째인 밤에 흰 빛 광채가 동굴에서 뻗쳐 나왔다. 그 사람이 눈을 헤치고 들어와서 나의 가부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옷과 보물을 시주하였지만 받지 아니하였다. 남녀가 함께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나에게 바른길을 알려 주었다. 가기를 오래하여도 사람을 볼 수 없더니 뜻밖에 길에서 만나게 되어 마음으로 매우 기뻐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붙잡아서 왕이 계신 곳에 데리고 가서 면전에 꿇어앉히고 말하기를, “하늘이 가문 것은 반드시 이 요괴 때문입니다. 청하건대 죽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직 놓아 주어라. 3일 동안 비가 오지 않거든 그때에 죽인들 무엇이 늦겠느냐.” 하거늘, 내가 향을 피우고 한번 비니 큰 비가 사흘 동안이나 내리었다. 차릉타국(嵯楞?國)에 미친 중이 있었다.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우두(牛頭) 세 개를 땅에 벌여 놓고 부들방석을 그 위에 깔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한번 보고 불태워 버리니 그가 부르짖기를, “산하(山河)와 대지가 한 조각이 되었구나.” 하였다. 아누지(阿?池)에는 중 도암(道巖)이 그 곁에 살면서 풀로 작은 암자를 짓고 있다가 사람이 오면, 불태우면서 “불을 끄라. 불을 끄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하자 역시 불을 끄라고 부르짖었다. 정병(淨甁 깨끗한 손을 씻는 물을 담는 병)을 발로 차서 엎지르니 도암(道巖)이 말하기를, “아깝다. 오는 것이 왜 그리 늦었는가.” 하였다. 말라사국(末羅娑國)은 부처님을 섬기기를 매우 삼갔으나 사교(邪敎)와 정도(正道)가 섞여 있었다. 내가 설법하여 사론(邪論)을 타파하니 외도(外道)가 바른 길로 돌아왔다. 성동(城東)에서는 보화상(寶和尙)이 그가 살고 있는 곳의 사방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채소의 씨앗 한 그릇을 놓아두고 사람이 오면, 자신은 밭을 다스릴 뿐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내가 채소의 씨앗을 가지고 좇아다니며 뿌리니, 중이 부르짖기를, “나물이 났다. 나물이 났다.” 하였다. 그 성 안에 비단을 짜는 이가 있었는데, 사람이 와도 말을 하지 않고 비단만 짰다. 내가 칼로 끊어버리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의 짜던 일이 끝났다.” 하였다. 아누달국(阿?達國)에서는 중 성일(省一)이 기와 굽는 아궁이 속에서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그을음을 낯에 바르고 나와서 춤을 추고는 다시 돌아가곤 하였다. 내가 계(偈)로써 그 잘못을 꾸짖었다. 조사국(早娑國)에서는 중 납달(納達)이 두어 해 동안을 길가에서 살면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잘 오셨소.” 하고, 가는 이를 보고는 “잘 가십시오.” 하였다. 내가 문득 세 번 몽둥이로 치니 그가 한 번 주먹으로 반격하였다. 적리후(的?侯)의 나라에는 바라문교(婆羅門敎)가 성행하므로 나는 손을 대지 않고 지나갔다. 정거리국(???國)에서는 진종(眞宗)과 사교(邪敎)가 같이 퍼져 있었다. 도적을 만나서 옷을 빼앗기고 알몸이 되었다. 미가라국(?伽羅國)에서는 왕이 나를 안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청하였다. 보봉(寶峰)이라고 하는 자가 있어서 불경을 강설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더불어 현상(玄相)을 선양하여 강설하였다. 동쪽으로 수일 동안을 가니 높은 산이 있는데 철산(鐵山 쇠로된 산)이라고 하였다. 흙도 돌도 풀도 나무도 없으며, 해가 비추면 아침볕은 그 형세가 불과 같았다. 다른 이름은 화염산(火焰山)이며, 7,8일 동안을 가야 산정(山頂)에 도달할 수 있다. 무릇 17,8개의 국가가 있으며, 가로 하늘 북쪽과 연접하여 있는데, □ 그것이 몇 천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 동쪽에서 하수(河水)가 나온다. 양쪽 언덕이 높이 솟아 있어 □ 다리로 건너는데, 얼음과 눈이 녹지 아니하므로 설산(雪山)이라고 부른다. 외로운 몸으로 굶주림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들 과일을 씹으면서 서번(西蕃)의 국경에 도달하였다. 내가 중국에 교화를 펼 때, 북인도(北印度)의 마가반특달(摩訶班特達)을 서번(西蕃)에서 만나 함께 연경에 도착하였다.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서쪽으로 안서왕(安西王)이 부중(府中)에 노닐었다. 왕 전가제(傳可題)와 만나니 제(提)가 나에게 머물기를 청하여 불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나의 뜻이 두루 돌아다니는 데 있었으므로,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불도는 자비한 생각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대가 이것을 배우려는 마음이 더욱 더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제가 말하기를, “중생들이 태초부터 악업(惡業)을 이루 셈할 수 없이 쌓았으므로, 내가 진언(眞言) 한 귀로 저들을 제도하여 초월한 삶을 얻어 하늘의 즐거움을 받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네 말이 망녕되다. 사람을 죽인 자는 남이 또한 너를 죽이는 것이다. 생과 사가 서로 대응하는 그것이 고(苦)의 근본인 것이다.” 하니 제(提)가 말하기를, “그것은 외도(外道)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자비라는 것은 진정 불자의 도리인 것이다. 이것에 위반한다면 그야말로 외도인 것이다.” 하였다. 왕이 바치는 선물이 있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서번(西蕃) 마제야성(摩提耶城)은 그곳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었으나 주사(呪師)가 나를 미워하여 차[茶] 물에 독을 넣어 마시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사신(使臣)이 왕도(王都)에서 와서 나에게 청하여 함께 돌아갔다. 반특달(班特達)의 스승으로 하여 서로 협력하여서 교화를 밝히고자 하였는데, 뜻이 서로 맞지 않아서 또 떠나갔다. 가단(伽單)의 주사(呪師)가 나를 죽이려고 하므로 나는 곧 하성(蝦城)으로 갔다. 성주(城主)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니, 외도(外道)가 나를 질투하여 나의 치아 한 개를 부러뜨렸다. 장차 떠나가려고 하는데, 그가 길에서 기다려 반드시 죽이려고 하므로 그의 성주가 나를 호송하여 주었다. 촉(蜀)에 이르러서 보현(普賢)의 거대한 불상에 예배하고, 3년을 좌선하였다. 대독하(大毒河)에서는 도적을 만나서 또 발가벗고 달아났다. 나라사(羅羅斯) 땅의 경계에서 한 중이 승복 한 벌을 주었으며, 어떤 여인이 작은 옷 한 가지를 주었다. 그리고 단가(檀家)의 공양(供養)에 응하였는데, 같이 공양을 받는 중이 내놓은 산 거위를 붙잡아서 삶아 먹으려고 하므로 내가 그의 아내를 때렸다. 아내가 우니 중이 성을 내어 나는 쫓겨났다. 내가 들으니 그곳의 관원이 나의 상(像)을 만들어 놓고 수재나 한재나 전염병이 있을 때에 기도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다고 한다. 금사하(金沙河) 관소(關所)의 아전이 내가 부인옷을 입고 머리털이 또 긴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기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아니하므로 인도의 글자로 써 보였으나, 또 알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억류되었는데, 늦게 돌 틈에 구부리고 누웠더니 깨닫지 못한 잠깐 사이에 피안(彼岸)에 도착하였다. 진도(津渡)의 사람이 나를 기이하게 여겨 예배하였다. 운남성(雲南城)의 서쪽에 절이 있었다.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선정에 들어갔더니 거기 사는 중이 성안에 들어오기를 청하여 조변사(祖變寺)에 이르러 오동나무 아래에 앉았다. 이날 밤에 비가 왔으나 밝은 다음에 보니 옷이 젖지 아니하였다. 성(省)에 가서 날이 개기를 빌었더니 당장에 감응하였다. 여름에 용천사(龍泉寺)에 앉아서 범자반야경(梵字般若經)을 서사(書寫)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물이 부족하였으므로, 내가 용(龍)에게 명하여 샘물을 끌어다가 여러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대리국(大理國)에서 나는 여러 가지 음식을 물리치고 다만 호도(胡桃) 아홉 개만 먹고 날을 넘기었다. 금치오(金齒烏)는 철오몽(撤烏蒙)의 한 부락이다. 나를 예배하여 스승으로 삼고 상(像)을 빚어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내가 들으니 무뢰배가 나의 소상(塑像)의 선봉(禪棒)을 땅에 던졌다가 들 수가 없었다. 뉘우쳐 사과하고 잡으니 쉽기가 전과 같았다고 한다. 안녕주(安寧州)의 중이 묻기를, “옛날 삼장법사(三藏法師) 진체(眞諦)가 당 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벽지(僻地)에서도 어음(語音)을 알았다는데.” 하였다. 그때 나는 이미 운남의 말을 알고 있었으므로 응답하기를,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고, 성인과 범인은 길이 다른 것이다.” 하였다. 계경(戒經)을 설법하기를 청하여 정수리에 불이 타고 팔이 불타는 것처럼 급하고 열렬하게 하였다. 관민(官民)이 다 그러하였다. 중경로(中慶路)의 여러 절에서 설법을 청한 것이 무려 다섯 번이나 되었다. 태자가 나에게 예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라(羅羅)의 사람들은 원래 부처도 중도 알지 못하였는데, 내가 도착한 뒤에는 모두 발심하였으며 나는 새도 또한 염불하는 소리를 하였다. 귀주(貴州)에서는 원수부(元帥府)의 관원들이 모두 수계(受戒)하였다. 묘만(猫蠻)ㆍ요동(??)ㆍ청홍(靑紅)ㆍ화죽(花竹)ㆍ타아(打牙)ㆍ갈로(??) 등 여러 동네의 오랑캐들이 모두 진기한 채소를 가지고 와서 수계하기를 청하였다. 진원부(鎭遠府)에 마왕신묘(馬王神廟)가 있는데, 배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고기를 제수(祭需)로 하여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가 파손된다고 하였다. 내가 한번 큰소리로 꾸짖고 배를 출범시켰다. 상덕로(常德路)로 가서 금강(金剛)ㆍ백록(白?) 두 조사(祖師)와 관음의 자소상(自塑像)에 예배하였다. 동정호에서는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자못 많았다. 능히 바람과 비를 멈추게 하였는데, 내가 갔을 때 마침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이 끓어올랐으므로 내가 삼귀오계(三歸五戒)를 설법하여 중국말과 인도말로 번갈아 선설(宣設)하였다. 그리하여 풍랑을 멈추게 한 것이다. 전에는 제사지내는 자가 밤에 실로 짠 신을 제물로 바치고 날이 밝으신 신을 다 부수는 것이었는데, 내가 간 뒤에는 그 바치는 제물을 다 물리치고 소제(素祭)로 지내게 하였다. 호광성참정(湖廣省?政)이 나를 쫓아 보내려고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빈도(貧道)는 인도(印度) 사람이다. 멀리 와서 황제를 뵈옵고 바른 법을 선양하도록 도우려 하는데, 너는 황제의 수(壽)를 축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하였다.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를 지나다가 전신탑(前身塔)이 우뚝 솟은 것을 보았다. 뼈가 아직도 썩지 않았었다. 회서관(淮西寬)이 반야(盤若)의 의미를 물었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삼심(三心)은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양주태자(楊州太子)가 배로 나를 보내어 수도에 이르게 하였다. 대순승상(大順丞相)의 아내 위씨(韋氏)는 고려 사람이었다. 숭인사(崇仁寺)에 나를 청하여 시계(施戒)하였다. 조금 뒤에 난경(?京)에 이르렀으니 태정(泰定) 연간에 지우(知遇)를 받았다는 것이 이때였다.” 하였다.
아, 사(師)의 유력(遊歷)이 이러하니 진실로 남들과는 다르다. 사는 천력(天曆) 연간부터 승의(僧衣)를 벗고 귀인의 옷을 입었다. 대부대감(大府大監)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아내 김씨도 역시 고려 사람이었다. 사를 좇아 중이 되어 증청리(澄淸里)에 집을 사서 절을 마련하고 사를 맞아다가 살게 하였다. 사가 그 절의 편액(扁額)을 법원(法源)이라고 제목하였으니, 대체로 천하의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므로 그 뜻을 취하여 스스로 비유한 것이다. 사는 변발(?髮)과 흰 수염으로 용태는 검고 빛이 나며, 의복과 음식은 더할 수 없이 사치하였다. 평소에 의젓하고 엄숙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였다. 지정(至正) 22년 겨울에 내시가 오니 사가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너의 임금에게 내가 생일을 지난 뒤에 갈 것이지, 생일 전에 갈 것인지를 아뢰어 보라.” 하였다. 장패향(章佩鄕)이 속히 첩목아(帖木兒)의 회지(回旨)를 부쳐 와서 사에게 한겨울만 조금 더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사가 또 말하기를, “천수사(天壽寺)는 나의 영당(影堂)이다.” 하였다. 이해 12월 20일에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귀화방장이란 사가 집을 세우고 사가 명명한 곳이다. 황제의 명령이 있어서 성(省)ㆍ원(院)ㆍ대(臺)의 모든 관사(官司)에서 의식을 갖추고 호위하여 천수사의 감실(龕室)에 안치하였다. 다음 해에 어사대부 도견첩목아(圖堅帖木兒)ㆍ평장백(平章伯) 첩목아가 향을 싸 가지고 와서 사의 시체를 배알하고 향과 □를 바른 베[布]와 매화나무와 계수나무와 빙단(氷團)을 사용하여 육신(肉身)을 빚어 상(像)을 만들고, 무신년 가을에 병임성(兵臨城)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4분하여 달현(達玄)ㆍ청혜(淸慧)ㆍ법명(法明)과 내정(內正) 장록길(張祿吉)이 각각 가지고 갔다. 그의 무리 달현이 바다를 건너오는데, 사도 달독(司徒達督)은 청혜(淸慧)에게서 얻어가지고 함께 우리 나라로 돌아왔다. □임자년 9월 16일에 왕명으로 회암사(檜巖寺)에 부도를 세우고 장차 탑 안에 넣으려고 유골을 물에 씻다가 사리 몇 개를 찾아내었다. 사가 인도(印度)에서 문수사리(文殊師利)의 《무생계경(無生戒經)》 2권을 가지고 왔다. 참정(參政) 위대박(偉大朴)이 그 첫머리에 서문을 쓰고, 손수 《원각경(圓覺經)》이라고 썼으며, 구양승지(歐陽承旨)가 그 말미에 발문을 썼다. 사의 계송(偈頌)은 매우 많아 따로 기록되어 있어서 다 세상에 퍼져 있다. 운남(雲南)의 오무견능언(悟無見能言)이 7세에 사를 의탁하고 출가하였을 때에 이미 말하기를, “스승의 나이는 육십갑자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하였는데, 오(悟)가 75세 때에 사가 입적하였다. 길문강(吉文江) 중 인걸(仁杰)이 말하였다. 문인(門人) 전 임관사(林觀寺) 주지 달온(達蘊)은 사의 도행을 기록할 것을 꾀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더 부지런하게 하며, 사도 달독은 험하고 어려운 수천 리를 사의 뼈를 받들어 산 사람을 섬기 듯하여 죽음을 보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였고, 나옹(懶翁)의 제자 모(某)가 말하기를, “우리 스승도 또한 일찍이 사를 스승으로 하였으니, 사는 곧 우리의 조(祖)입니다.” 하고, 사의 제자인 정업원 주지(淨業院住持) 묘장비구니(妙藏比丘尼)와 더불어 연석(燕石)을 사서 장차 회암서의 언덕에 세우기로 하였으니, 천륜으로써 비유해 본다면 효자ㆍ순손(順孫)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 일을 듣고 천자가 명하여 신 색이 명을 짓고, 신 수(脩)가 써서 신 중화(仲和)가 전자(篆字)로 편액(扁額)을 쓰라고 하였다. 신 색은 말하기를, “사의 육신은 이미 화장하여 넷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나머지의 유골은 어느 곳에 탑을 세우게 하며, 명을 구하여 그것이 전하여지기를 꾀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 붓을 잡는 자는 누구일지 알지 못하겠노라. 또 알지 못하겠다. 지공선사가 여기에 계시는지, 저기에 계시는지, 또한 선세(蟬? 해탈)하여 다시 돌아보거나 소중히 여김이 없는 것을 그의 문도된 자들이 그의 은혜를 갚으려고 억지로 하는 것인가. 신은 여기에서 느낌이 없을 수 없다. 삼가고 두려워하여 명을 받들고 이어서 명을 쓴다.”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스님의 발자취는 / 維師之迹
서역에서 시작되었다 / 發?西域
만왕의 아들이요 / 滿王之子
보명의 적통이다 / 普明之嫡
난경에서 지우를 만나니 / ?京遇知
좋은 때로다 / 允也其時
연화를 방문함이 / 延華之訪
왜 그리 늦었던가 / 云何其遲
나의 자취 돌아보니 / 回視我轍
가지 않은 나라 없으니 / 靡國不歷
지붕 위에서 병의 물을 쏟은 듯하고 / 屋建之?
물에 던진 돌처럼 거침이 없네 / 水投之石
천력(문종)이 승려를 사랑하였으나 / 天曆幸僧
나만은 부처인양 사랑 더욱 더하였다 / 拂我以增
지금 옷 입으니 / 服今之服
도예는 더욱 높다 / 道譽愈騰
미친 말 농지거리 / 狂言戱謔
남이 알 바 아니지만 / 匪人攸測
사전에 병화 말해 / 談兵未?
분명히 밝혀내니 / 如析白黑
먼저 봄이 밝은 것은 / 先見之明
도에 정한 때문이다 / 乃道之精
어떤 이는 의심하고 어떤 이는 비방하나 / 或疑或謗
스님의 마음이야 편하기만 하였다 / 師心則平
사리 이미 빛이 나니 / 舍利旣赫
송구하지 않음이 없다 / 罔不?息
누가 사람의 성품이 / 孰謂人性
극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가 / 不協于極
여기 회암사에 / 胥斯檜巖
돌 세우고 명을 새긴 것을 보아 / 樹石以?
조금도 와전됨이 없게 하여 / 無敢或訛
길이 보게 하노라 / 于永厥監

하였다.


[주D-001]범지(梵志) : 바라문의 생활 가운데 제 1기에 해당한 동안의 사람 범사(梵士).
[주D-002]십지(十地) : 보살 수행의 계위(階位)인 52위 중 제 41위로부터 제50위까지의 10위.

동문선 제119권   
 
 
 비명(碑銘)
 
 
보제존자 시선각 탑명 병서 (普濟尊者諡禪覺塔銘) (幷序) 
 

이색(李穡)

공민왕 현릉(玄陵) 재위 20년, 경술년 가을 9월 10일에 사(師)를 불러 서울에 들어오게 하였다. 16일에 사가 우거하고 있는 광명사(廣明寺)에서 크게 양종(兩宗) 오교(五敎)의 각 사찰의 승려들을 모아 그들의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여 공부선(功夫選)이라 이름하고,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관람하였다. 사가 소향(燒香)을 마치고 법좌에 올라서 말하기를, “고금의 습속을 버리고 범인과 성인의 종적과 유래도 다 쓸어버리고, 납자(衲子 승려)의 명근(命根)도 베어 버리며, 중생의 의심의 그물도 깨끗이 벗어 버리면, 놓아주고 다그치는 것은 손아귀에 있고, 변화하고 융통하는 것은 기틀에 있는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와 역대의 조사(祖師)들이 그 법은 하나인 것이다. 모여 있는 여러 스님들은 청하건대 실지대로 대답하라.” 하였다. 이에 차례로 들어와 대답하게 하니, 몸을 굽히고 땀을 흘리며 다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이치에는 통하였으나 사물에 구애하고, 어떤 이는 열광함이 지나쳐서 말에 실수하는 이도 있었다. 한 구절의 문답만으로 문득 퇴각시키니 임금이 즐겨하지 않는 듯하였다. 환암수선사(幻菴脩禪師)가 뒤에 오니 사가 차례로 세 구절을 물었다. 삼문(三門)의 모임이 끝나니 회암사(檜巖寺)로 돌아갔다. 신해년 8월 26일에 공부상서 장자온(張子溫)을 보내 조서를 내리고 인장(印章)과 법복(法服)과 발우(鉢盂)를 내렸으며, 모두 갖추고 봉(封)하여 왕사(王師)ㆍ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ㆍ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ㆍ근수 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삼고, 송광사(松廣寺)가 우리 나라의 첫째 가는 도량이라고 하여 거기에 살도록 명하였다. 임자년 가을에 우연히 지공(指空)의 삼산우수지기(三山雨水之記)를 생각하고, 회암사(檜巖寺)에 옮기려고 하는데, 때마침 부름을 받고 이 절의 법회에 오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살기를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사가 말하기를, “선사(先師) 지공(指空)이 일찍이 중수하기를 계획하였는데, 병화에 불타 버렸으니 감히 그 뜻을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전우(殿宇)를 증축하고 넓히도록 하였다. 공사를 이미 마치었으므로 병진년 4월에 크게 낙성회를 열었다. 대론(臺論)이, “회암사는 경읍(京邑)과 매우 가까워서 선비와 여인들의 왕래가 밤낮으로 잇달게 되어 혹은 생업을 폐지하기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영원사(瑩源寺)에 이주(移住)하라는 왕명으로 길 떠나게 되어 핍박하였다. 사가 병이 나 있었는데, 수레에 태워 삼문(三門)을 나가서 못가에 이르러니 스스로 수레 메는 자를 지도하여 열반문(涅槃門)으로 나가게 하므로 군중들이 모두 의심하여 목이 쉬도록 울부짖으니 사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노력, 노력, 나 때문에 중단하는 일이 없게 하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그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서 호송관(護送官) 탁첨(卓詹)에게 말하기를, “내 병이 위중하니 빌건대 배로 가게 합시다.” 하였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7일만에 바야흐로 여흥에 이르렀다. 또 탁(卓)에게 말하기를, “조금 머물렀다가 병이 조금 덜한 때를 기다려서 갑시다.” 하니 탁이 마지못하여 복종하였다. 신륵사(神勒寺)에 우거하는데, 5월 15일에 탁(卓)이 또 가기를 독촉함이 급박하니, 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마땅히 갈 것이다.” 하고, 이날 진시(辰時)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 사람이 바라보니 5색의 채색 구름이 산정을 덮었다고 한다. 이미 화장하여 유골을 씻는데, 구름도 없이 비가 온 것이 사방 수백 보가 되었다. 사리 1백 55개를 얻었다. 기도하고 나누어 5백 58개를 만들었다. 사부제자(四部弟子)들이 재 속에서 찾아내어 각자가 몰래 가진 것은 그 수를 이루 다 알 수 없었다. 신령한 광채가 3일 동안을 비쳐 빛이 나더니 그치었다. 중 달여(達如)가 꿈에 용이 화장대(化葬臺) 아래에 서리고 있는데, 그 형상이 말과 같은 것을 보았다. 유골을 실은 배가 회암사로 돌아 올 때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물이 불어 있었다. 모두들 흑룡(黑龍)이 배의 항행(航行)을 도운 것이라고 말하였다. 8월 15일에 절의 북쪽 벼랑 위에 부도(浮圖)를 세웠다. 정수리 뼈에서 나온 사리는 신륵사에 안치함은 그의 마지막을 표시한 것이요, 석종(石鐘)으로 덮은 것은 감히 와전됨이 없도록 경계함이다. 일이 조종에 알려지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고 하고, 신 색(穡)에게 글짓기를, 신 중화(仲和)에게는 붉은 전자(篆字)의 액을 쓰기를 명령하였다.
신은 삼가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혜근(惠勤) 호는 나옹(懶翁)이니,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향년 57세이고, 법랍(法臘)은 38세이다. 영해부(寧海府) 사람이니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고의 휘는 서(瑞)니 구선관령(具膳官令)이다. 모는 정씨(鄭氏)니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정씨가 꿈에서 금빛 나는 새가 날아와서 그의 머리를 쪼며 갑자기 알을 떨어뜨리니, 오색의 광채가 찬란한 것이 품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인하여 임신하고 연우(延祐) 경신년 정월 15일에 공을 낳았다. 겨우 갓쓸 나이가 되었을 때 이웃의 벗이 죽었다. 여러 부로들에게 묻기를,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 모두 모른다고 말하였다. 마음으로 매우 슬퍼하고 달아나 공덕산(功德山)에 들어가서 요연사(了然師)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요연사가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로 출가하였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합니다.” 하고, 또 길을 열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요연사가 말하기를, “여기에 온 너라는 것은 무슨 물건이냐.” 하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도 있는 자가 능히 온 것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모를 뿐입니다.” 고 말하니, 요연사가 말하기를 , “나도 또한 너와 같이 아직 알지 못한다. 가서 스스로 구하면 여사(餘師)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에 이르러 회암사에 와서 밤낮을 홀로 좌선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중국에 가서 스승을 찾겠다는 뜻을 결정하고 무자년 3월에 연경에 이르러 지공에게 참례(參禮)하니, 묻고 대답하는 것이 서로 계합하였다. 지정 10년 경인년 정월에 지공이 여러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하어(下語)하니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사가 여러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두어 마디 말하고 세 번 절하고는 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1백 8대의 조사(祖師)이다. 이해 봄에 남쪽으로 강소성ㆍ절강성을 유람하고 가을 8월에 평산(平山)에게 참례하니, 평산이 묻기를,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 하였다. 사(師)가 말하기를, “서천의 지공이 날마다 일천의 칼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니, 평산이 말하기를, “지공의 일천 칼은 잠깐 두고 너의 한 칼을 갖고 오라.” 하였다. 사가 좌구(坐具 앉을 때 까는 방석)로써 평산을 끌어 당기니 평산이 선상(禪床)에 거꾸러져 있으면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고 부르짖었다. 사가 말하기를, “나는 칼입니다. 능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능히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고, 곧 붙들어 일으키니 평산이 설암(雪巖)의 전한 바인 급암(及庵)의 옷과 불자(拂子)로써 신의(信義)를 표시하였다. 신묘년 봄에 보타락가산(寶?洛迦山)에 닿아 관음상을 참배하였다. 임진년에는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千巖)에게 참례하였다. 때마침 강호의 천여 명을 모아 놓고 입실할 자를 뽑고 있었다. 천암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고 사가 대답하니 암이 말하기를, “부모가 낳기 전에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하였다. 사가 말하기를, “오늘 아침은 4월 초이틀입니다.” 하니, 천암(千巖)이 허락하였다. 이해에 북쪽으로 돌아와 거듭 지공에게 참례하니 지공이 법의(法衣)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주었다. 이에 연대(燕代)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유람하니 소연하여 한가한 한 사람의 도인이었다. 이름이 궁궐 안에 들려서, 을미년 가을에는 성지(聖旨)를 받들고 수도(首都)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렀다. 병신년 10월 보름날 강당을 여는 법회를 개설하였다. 황제가 원사(院使)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어 금란가사(金?袈裟)와 폐백을 하사하고, 황태자는 금관가사와 상아의 불자를 보내 주었다. 사가 가사를 받고 여러 사람들에게 묻기를, “고요하게 텅 비고 적막하여 본래 한 가지 물건도 없는 것인데, 이 찬란한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니 여러 사람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천천히 말하기를, “구중궁(九重宮)의 금구(金口) 속에서 나왔다.” 하였다. 곧 향(香)을 피워서 성수(聖壽)를 축하하고 좌석에 올라 가서 주장(柱杖)을 가로 어루만지며 두어 마디 말을 하고 곧 좌석에서 내려왔다. 무술년 봄에 지공(指空)을 하직하고 수기(授記)를 얻어 동쪽으로 돌아오는데, 가기도 하고 또 멈추기도 하면서 근기에 따라 법을 강설하였다. 경자년에는 대산(臺山)에 들어가 있었다. 신축년 겨울에는 임금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서울로 맞아 들이고 심요(心要)를 강설하기를 청하였다.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내리었으며, 공주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바치고, 태후는 친히 보시를 베풀며,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나 곧 사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법(法)에서 나도 또한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부득이 즉시 신광사로 갔다. 11월에 홍건적이 경기를 유린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옮겼다. 중의 무리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적을 피해 옮겨 가기를 청하니 사가 말하기를, “오직 명을 보전할 뿐이다. 적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두어 날 만에 청하는 것이 더욱 급하였다. 이날 밤에 꿈을 꾸니 낯에 검은 점이 있는 한 신인(神人)이 의관을 갖추고 절하며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흩어지면 적이 반드시 절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원컨대 스님은 뜻을 굳게 가지십시오.”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좌(土地神座)에 가서 그의 얼굴을 보니 꿈에 보던 얼굴이었다. 과연 적이 오지 아니하였다. 계묘년에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더니 내시 김중손(金仲孫)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을사년 3월에 대궐에 나아가서 물러가기를 빌어, 비로소 일찍부터 원하던 바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용문(龍門)ㆍ원적(元寂) 등 여러 절을 유람하고 병오년에는 금강산에 들어갔다. 정미년 가을에는 청평사(淸平詞)에 머물렀다. 그해 겨울에 예보암(猊寶岩)이 지공(指空)의 가사와 손수 쓴 편지를 갖고 와서 사에게 주고 말하기를, “지공 선사의 치명(治命 죽기 전 맑은 정신으로 한 유언)이다.” 하였다. 기유년에 거듭 대산(臺山)에 들어갔다. 경술년 봄에 사도(司徒) 달예(達睿)가 지공의 영골을 받들고 와서 회암사에 보안하였다. 사가 스승의 유골을 예배하고 인하여 임금의 부름에 달려가 광명사(廣明寺)에서 여름을 지내고 첫 가을에 회암사에 돌아왔다. 9월은 곧 공부선(功夫選)이 있는 달이다. 사가 거처하는 방을 강월헌(江月軒)이라고 하였는데, 평생에 일찍이 세속의 문자를 익히지 아니하였으나 시짓기를 청하는 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붓을 잡고 쓰는 것이 마치 생각을 거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이치와 뜻이 심원하였다. 만년에는 묵화(墨畵)를 좋아하여 그가 그린 산수(山水)는 정도(正道)와 권도(權道)에 핍근하였다. 아, 도가 이미 통하였으니 다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 색은 삼가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진실로 선각 스님은 / 展也禪覺
기린의 뿔처럼 드물게 있는 존귀한 인물이다 / 惟麟之角
왕자의 스승이며 / 王者之師
인천의 안목이었다 / 人天眼目
모든 중들이 그를 종장으로 섬겨 / 滿衲宗之
물이 구렁으로 달리듯 모여 들었으나 / 如水赴壑
충분히 아는 이는 드물었다 / 而鮮克知
사의 세운 비가 우뚝히 높은 것을 / 所立之卓
새의 꿈이 신령하게 빛이 났네 / ?夢赫靈
그가 처음 나실 때 / 在厥初生
용신이 상주를 호송하여 / 龍神護喪
마지막이 진실로 아름다웠네 / 終然允藏
더구나 사리가 있어 / ?曰舍利
영이함을 나타내었다 / 表其靈異
광활한 강물 속에 / 江之闊矣
희고 흰 밝은 달은 / 皎皎明月
공안가 색인가 / 空耶色耶
위도 아래도 시원하게 트였네 / 上下洞徹
아득히 멀리 있는 높으신 풍격은 / 邈在高風
영구히 사라지지 않겠네 / 終古不滅

하였다.


[주D-001]인천(人天)의 안목(眼目) : 지극히 큰 지혜를 지닌 사람.
 
 
 동문선 제119권   
 
 
 비명(碑銘)
 
 
고려국 증 순성 경절 동덕 보조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이공신도 비명 병서 (高麗國贈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事完山府院君朔方道萬戶兼兵馬使榮祿大夫判將作監事李公神道碑銘) 幷序 
 

이색(李穡)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휘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 입전(司徒三重大匡立全)을 낳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으며,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경영(景榮)을 낳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다. 대장군이 내시집주(內侍執奏) 인(隣)을 낳으니, 집주는 시중(侍中) 문공(文公) 휘 극겸(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다. 장군 양무는 상장군(上將軍) 이공(李公) 휘 강제(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으니 안사는 성품이 호방하여 뜻이 천하에 있었다. 일찍이 의주(宜州)의 수령이 되어서 어진 정사를 하였다. 인척 관계로 강릉부(江陵府)의 삼척현(三陟縣)에 이거(移居)하였으니, 대개 그곳의 풍속을 즐겨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으로써 지현(知縣)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지현이 해치려고 꾀하는 것을 어떤 사람이 공에게 알리니, 공이 가족을 이끌고 몽고씨(豪古氏)에게 달아났다. 몽고씨가 그를 남경(南京)에 살게 하고 5천 호소(戶所)의 다루가치를 삼았다. 다루하치가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李公) 휘 공숙(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 행리(千戶行里)를 낳았으니 그의 관직을 승습(承襲)하였다. 원 나라의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게 되어 천하의 병선(兵船)들이 우리 나라에 모였다. 우리 충렬왕(忠烈王)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군함(軍艦)을 짓게 하고, 명장을 선택하여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남경천호(南京千戶)도 또한 원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와서 모였다. 충렬왕을 만나 보는 일이 두 번 세 번 거듭될수록 더욱 공경하고 더욱 삼가며, 매양 사죄하여 말하기를, “전하의 신하인 저의 선인(先人)이 북쪽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이의 입 같은 위험을 빗어나려고 하였을 뿐이며, 감히 군부(君父)를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본래 사족(仕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이제 경의 하는 일을 보니 마음에 있는 바를 넉넉히 알 수 있다.” 하였다. 천호(千戶)가 등주호장(登州戶長) 최공(崔公) 휘 기열(基烈)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증 찬성사 춘(椿)을 낳았다. 춘이 어버이의 뜻을 이어 우리 나라에 오니, 충숙왕이 상품을 하사함이 더욱 풍성하였다. 그의 충성함을 권장하는 까닭이다. 찬성사가 증 문하시중(門下侍中) 박공 휘 광(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공에게 고(考)이며 비(?)이다. 공(公)의 휘는 자춘이며 자(字)도 자춘이다. 이[齒] 갈 만한 나이에 범상한 아이들과는 다른 바 있더니 차츰 자라면서 말 타는 일 활 쏘는 일을 잘하여, 아버지의 벼슬을 계승하니 사졸들이 즐겨 따랐다. 지정(至正) 을미년에 선왕께 조현(朝見)하니 선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조부와 아버지가 몸은 비록 외국에 있었으나 마음은 우리 고려의 왕실에 있었으므로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실로 총애하고 칭찬하였다. 이제 네가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욕되게 함이 없으니, 내가 장차 네게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하였다. 쌍성(雙城)은 변방이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관리의 다스림이 소략하고 땅이 비옥하며 인구가 번식하니, 우리의 동쪽과 남쪽의 항산(恒産)이 없는 백성들이 많이 살러 갔다. 국가가 원 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리니, 황제의 명령을 받고 차관(差官)이 왔으며 요양성(遼陽省)에서도 또한 차관이 왔다. 선왕은 성낭중(省郞中) 이수산(李壽山)을 달려 보내 모이게 하여 새 호적(戶籍)의 백성과 옛 호적의 백성을 가려 구분하여 삼성조감호계(三省照堪戶計 세 성(省)이 호적의 수를 대조하여 감정(勘定)함)라고 하였더니, 그 뒤에 위무(慰撫)하고 안정시키는 일이 마땅한 바를 잃어 차츰차츰 유리해 옮겨 가고 있었으므로, 곧 공에게 명하여 여기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으니, 여러 대(代)의 충성을 가상(嘉賞)한 때문이다. 백성들이 이때로부터 각자의 생업에 안정함을 얻어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병시년 봄에 공이 내조(來朝)하니 선왕이 맞아들여 말하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위무하고 안정하게 하는데 노고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그때에 기씨(奇氏)가 반란을 도모한다고 밀고하는 자가 있었는데 쌍성의 관리가 이에 관련되었다고 하였다. 선왕이 공에게 말하기를, “경은 장차 진(鎭)으로 돌아가라. 우리 백성에게 만일 변란이 있거든 마땅히 나의 명령과 같이 하라.” 하였다. 5월에 기씨를 평정하였다. 재신 유인우(柳仁雨)에게 명령하여 가서 잔당을 토벌하고 또 평민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타이르게 하였다. 유인우가 이미 그 접경에 이르러서는 머뭇거리며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니, 위계가 중현대부(中顯大夫)였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로써 공에게 내응(內應)하라는 전지를 내렸다. 공이 명령을 듣고 즉각 함매(含枚)하고 행군하여 유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소생도경(小生都景)을 쫓으니, 송생도경이 처자를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이에 임금이 명령하기를, “쫓아야 할 자는 갔다. 죽이거나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니,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음식물을 갖고 와서 우리 군사를 환영하였다. 주현(州縣)의 이름도 모두 그 옛 이름을 회복하니, 고주(高州)ㆍ요덕(耀德)ㆍ장평(長平)ㆍ원흥(元興)ㆍ정주(定州)ㆍ함주(咸州)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9월에 공의 위계를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올리고 사복경(司僕卿)에 이임(移任)하였다. 개경(開京)에 제택(第宅)을 하사하여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에 승진되고 통의(通儀) 정순(正順)의 두 대부에 가자되었다. 이해에 색(穡)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조정 안에 있다가 공의 얼굴을 보니 낯은 주홍빛 같고 수염은 아름다웠다. 감히 지위의 순서를 넘어서 서로 더불어 대화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풍채는 지금도 오히려 나의 마음과 눈에 남아 있어서 잊을 수가 없다.

경자년 봄 3월에 영록대부 판장작감사(榮祿大夫判將作監事)로서 나가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었다. 4월 갑술일에 병으로 돌아갔으니 나이 46세였다. 아깝다. 부음을 듣고 공민왕은 매우 슬퍼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하고 예에 따라 치부(致賻)하였다. 사대부들은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이제는 동북 방면에는 사람이 없구나.” 하였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무릇 세 번 장가들었다.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원계(元桂)로서 지금 추충 절의 보리공신 중대광 완산군(推忠節義輔理功臣重大匡完山君)이 되었다.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다. 증 문하시중 영흥부원군 휘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성계(成桂)라고 한다. 지금 충성 양절 익찬 선위정 원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 완산부원군(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兼判典農寺事上護軍完山府院君)이 되었다. 김씨(金氏)는 정안택주(貞安宅主)를 봉하였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화(和)라고 하며 지금 성근보조공신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상호군(誠勤輔祚功臣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이 되었다. 딸은 순성 익위 협찬 보리공신 삼중대광 용원부원군(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 공에게 시집갔다. 지금은 진화택주(眞和宅主)로 봉하니 최씨가 낳았다. 손자와 손녀 몇이 있다. 완산군(完山君)이 재취(再娶)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양우(良祐)라 하며 전 사복정(前司僕正)이요, 다음은 천우(天祐)라 하며 전 호군이다. 딸은 전 중랑장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부인 김씨(金氏)는 찬성사 휘 용(鏞)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조(朝)라 하며 진사이다. 다음은 서(曙)라 하며 전 랑장이다. 딸은 생원 노신(盧愼)에게 시집갔다. 다음 두 아이는 모두 어리다. 판삼사공(判三司公)은 재취한 부인 한씨(韓氏)를 원신택주(元信宅主)로 봉하였다. 밀직부사로 치사한 휘 경(卿)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방우(芳雨)라 하며 전 예의판서(前禮儀判書)다. 다음은 방과(芳果)라 하며 추충 여절 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 상호군(推忠礪節翊衛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兼軍簿判書鷹敭軍上護軍)이다. 다음은 방의(芳毅)라 하며 중정대부 신호위 대호군(中正大夫神虎衛大護軍)이다. 다음은 방간(芳幹)이라 하며 전 군기소윤이다. 다음은 방원(芳遠)이니 통직랑 예의정랑지제교(通直郞禮儀正郞知製敎)이다 딸 둘이 있으나 어리다. 경실(京室) 강씨(康氏)는 보녕택주(保寧宅主)를 봉하였다. 판삼사사 휘 윤성(允成)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방번(芳蕃)이라 하며 승봉랑 고공좌랑(承奉郞考工佐郞)이다. 다음은 방석(芳碩)이라 하며 군기록사(軍器錄事)이다. 딸은 중현대부(中顯大夫) 흥위위 대호군(興威衛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동지(同知)공의 재취한 부인 안씨(安氏)는 영동정(令同正) 종기(宗奇)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지숭(之崇)이며 전 연경궁부사(前延慶宮副使)이다. 부인 노씨(盧氏)는 경원군(慶原君) 휘 은(?)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숙(淑)이며 진사이다. 다음은 징(澄)이며 별장이다. 다음은 담(湛)ㆍ청(淸)ㆍ철(澈)이라 하며 모두 어리다. 딸 하나가 있으나 어리다. 외손은 남녀 몇이 있다. 용원부원군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경(卿)이라 하며 진사이다. 다음은 후(侯)라 하며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이다. 사(師)ㆍ부(傅)ㆍ보(保)ㆍ백(伯)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집에 있고, 차녀는 내부부령(內府副令) 임맹양(林孟陽)에게 시집갔다. 증손(曾孫)이 남녀 약간인이 있다. 판서(判書)가 찬성사 지공(池公) 휘 윤(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복근(福根)이라고 한다. 딸 셋은 모두 어리다. 대호군이 지간성(知杆城) 최인두(催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석근(石根)이라고 한다. 딸 하나는 어리다. 소윤(小尹)이 판도판서(版圖判書) 민공(閔公) 휘 선(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맹중(孟衆)이라고 한다. 딸 둘은 다 어리다. 정랑(正郞)이 판전교(判典校) 민공(閔公) 휘 제(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색(穡)이 계묘년에 밀직제학으로 승핍(承乏 인재가 부족하여 재능 없는 자가 벼슬을 함)하였더니, 이듬해에 판삼사공이 와서 추밀원 부사가 되었으며, 신해년에는 판삼사공이 지문하(知門下)에 임용되었을 때에 나는 사공(司空)으로서 정당(政堂)에 개임(改任)되었다. 공민왕이 근신들에게 묻기를, “문신 색(穡)과 무신 성계(成桂)가 같은 날 입성(入省)하였는데 조정이 여론들은 어떻다고 하느냐.” 하였으니, 대체로 스스로 자랑하는 말이다. 그 후 수십 년 동안에 동렬(同列)에 있다는 자가 적고 나와 공(公)은 그 사귐이 물처럼 담담하여 한결같을 뿐이었다. 오래도록 서로 공경하는 풍모를 사람들은 간혹 우리들을 사모하였으니, 감히 공의 아버지 보기를 나의 아버지 보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의 신도(新道)에 명(銘)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내가 이씨의 계보를 상고하여 보니 / 我考李氏譜
신라의 대아간은 / 新羅大阿干
인물이 뛰어나고 슬기로워 이미 임금의 제정을 도왔네 / 膚敏旣?將
후한 봉록으로 벼슬하는 고관이 대대로 많았네 / ?仕多高官
오마로 삭방에 노닐으니 / 五馬游朔方
위임과 은혜가 아울러 드러났다 / 威惠??彰
그곳의 풍속을 즐겨 머물러 살았으니 / 留居樂土風
삼척은 고향과 같도다 / 三陟如故鄕
수령이 원망하는 말이 있으므로 / 守臣有怨言
몸을 빼쳐 원 나라에 들어갔네 / 脫身歸大元
천부장의 임명을 받았으니 / 授命長千夫
대대로 덕망이 있어 백성들이 은혜를 품었으며 / 世德民懷恩
온화하고 공손하게 옛 임금을 섬기니 / 溫恭事舊君
조빙은 어이 그리 부지런하였던고 / 朝聘何勤勤
근본을 보답하고 또 처음에 돌아가서 / 報本又返始
세속을 깨우치고 따라 공훈도 이루었네 / 警俗仍樹勳
더구나 우리의 시중공은 / ?我侍中公
공민왕이 그 충성을 크게 칭찬하였네 / 玄陵大賞忠
하늘은 어찌하여 그를 빼앗음이 급하였는가 / 天胡奪之?
백성들의 궁과 통은 누가 맡아 다스릴까 / 孰司人窮通
판삼사인 아들이 있어서 / 有嗣判三司
공훈과 명망이 한 세상에 으뜸이며 / 功名冠一時
자손들이 모두 귀현하였으니 / 子孫盡貴顯
천도가 무지함은 아니로구나 / 天道非無知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는 반드시 무성하며 / 本固枝必茂
근원이 멀면 흐름은 길다 / 源遠流斯長
명시는 나의 졸렬한 것이 부끄러우나 / 銘詩愧我拙
천년으로 밝은 빛을 끼치리라 / 千載垂耿光

하였다.


[주D-001]함매(含枚) : 행군할 때 떠들지 못하도록 가는 막대기를 입에 물리는 것.

동문선 제119권   
 
 
 비명(碑銘)
 
 
고려국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 충경공 염공신도비 병서 (高麗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府院君贈諡忠敬公廉公神道碑) (幷序) 
 

이색(李穡)

지금 임금 9년 임술년 3월에 태평재상(太平宰相)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나이 79세로 병드니, 공경대부들이 날마다 문 앞에 와서 경과를 물었으며, 자손들이 마루에 가득하게 모여 탕약을 받들었고, 위와 아래에 기도하여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임금은 중관(中官)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을 내리며 술을 내렸다. 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효험이 없었다. 아, 그것은 명인 것이다. 공은 평소에 건강하여서 오래 앓는 일이 없었으며 늙을수록 신기(神氣)와 풍채는 더욱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향년함이 더욱 높을 것이라고 기필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렀으니 명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공이 병이 들자 자제들에게 장사를 박(薄)하게 할 것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죽은 뒤 3일 만에 매장하여 국가의 유사(有司)를 번거롭게 함이 없게 하여라.” 하였다. 부음이 알려지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다. 재상이 말하기를, “곡성(曲城)이 3일장으로 하라고 유명하였으니 감히 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담당 관사(官司)로서 본다면 국가에서 장가를 거행하는 것은 국법이다. 이것을 어긴다면 그 허물은 장차 누가 맡을 것인가. 또 공에게 국장을 베풀지 않는다면 국장의 예법을 어떤 사람에게 쓴단 말인가.” 하고, 특히 도당(都堂)에 모여서 담당 관사를 독려하여 한 가지도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아, 공의 사양한 것이나 재상의 거행한 것이 모두 예에 유래하여 나온 것이니 예라는 것은 국가가 아름답게 된 까닭이다. 신(臣)의 직책은 기록하고 편찬하는 데 있다. 하물며 신도(神道)에 비명을 새기라는 밝은 유시(諭示)가 있음이겠는가.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다.
삼가 상고하여 보니, 곡성 부원군은 성은 염씨(廉氏)요, 이름은 제신(悌臣)이며 자는 개숙(愷叔)이고 아명은 불노(佛奴)이니 서원(瑞原)의 대족(大族)이다. 먼 조상인 휘 현(顯)은 문묘(文廟)를 도와 성균관에 선비를 시취(試取)하였으며 재상이 되었다. 휘 신약(信若)은 명종(明宗)을 도와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의 벼슬을 하였으며, 직위가 대사(大師)에 이르렀다. 증조의 휘는 순언(純彦)이니 졸할 때의 벼슬은 소부승(小府丞)이었다. 은청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銀靑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를 추증하였다. 조의 휘는 승익(承益)이니 흥법 좌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 시충정(興法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諡忠靖)이다. 충렬왕을 도와 허 시중(許侍中) 조 시중(趙侍中)과 더불어 서로 차례로 정권을 잡으니, 한 세대의 이름난 공경들이 감히 나란히 할 자가 없었다. 고(考)의 휘는 세충(世忠)이니 졸할 때의 벼슬은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이었다. 비(?)는 가순택 주조씨(嘉順宅主趙氏)이니 주충보절 동덕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첨의 평양부원군 시 정숙(推忠保節同德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判都僉議平壤府院君諡貞肅) 한인규(韓仁規)의 딸이다. 대덕(大德) 갑진년 10월 무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내외시중(內外侍中)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이미 범상한 사람과 같지 않았으며 11세 때에 고모부인 원나라의 중서평장사 말길(末吉)이 불러다가 좌우에 두고 유생(儒生)을 초빙하여 수업함이 10년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덕망과 기량은 세상에 뛰어났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에 진저(晋邸)에 들어가 황제의 대통을 잊게 되었을 때 말길공이 공을 데리고 화림(和林)에 가서 수레를 영접하니, 황제가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공에게 금중(禁中)에서 숙위(宿衛)하라고 명령하고 사랑해 돌봐줌이 상례와 같지 않았다. 말길은 대신(大臣)이었으며 황제가 또한 친신(親信)하였다. 그러나 병 때문에 조현(朝見)하지 못하였으나 황제가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명하여 그의 집에 가서 자문하게 하였다. 그가 아뢰는 것이 있으면 공이 모조리 전달하였다. 대부 첩실(大夫帖失)을 이미 베고 그의 여동생을 공에게 내려 주니, 공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아는 것은 없사오나 역적의 무리에게 가깝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니, 황제가 더욱더 소중히 여기었다. 임술년에 황제에게 주청하기를, “신이 어머니를 오래 못 보았습니다. 원컨대 휴가를 내려 주십시오.” 하였다.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금강산에 향(香)을 내리게 하고, 금자원패(金字圓牌)를 주었다. 그의 행차를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의 가는 길을 빠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는 사자(使者)들의 오고감이 빈번하였는데 다 원 나라 조정의 권위를 빙자하여 우리나라의 재상을 능욕하고 수령을 보기를 개나 말같이 하였다. 그런데 공은 재상에게는 공경하고 수령에게도 예모를 하였으며, 또 한 가지 일도 임금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아니하였다. 이미 돌아감에 상의사(尙衣使)를 제수하였다. 지순(至順) 신미년에 또 향을 내려 주었는데 더욱더 근신하니 부로들이 말하기를, “나이는 비록 젊으나 노성한 사람에 부끄럽지 않다. 이야말로 참 내외시중(內外侍中)의 손자로구나.” 하였다. 지순(至順) 계유년에 공은 자시하(慈侍下)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조정에 청하여 나와서 정동성낭중(征東省郞中)이 되었다. 그때 동료들이 자못 황제의 위복(威福)을 농간하므로 공이 극력 다투어서 억제한 바가 많았으며, 토지와 노비에 관계된 소송은 모조리 담당 관사에게 돌렸으므로 충숙왕(忠肅王)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염낭중(廉郞中)은 청렴하고 간결하다.” 하였다. 좌우의 관원들이 공문서의 결재를 청하면 임금은, “우리 낭중이 서명하였느냐.” 묻고, 염낭중의 서명의 있으면 결재하고 서명이 없으면 중지하였다. 그를 우리 낭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친근하게 말한 것이다. 공이 머문 지 9년이 되어서 왕이 훙(薨)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오래 머무를 수 없다.” 하였다. 그때 마침 중국 조정에서 익정사승(翊正司丞)으로 부르니 위계는 봉훈대부(奉訓大夫)였다. 지정(至正) 계미년에 강절성(江淅省)에 봉명 사신으로 나가서 중정원(中政院)의 돈과 재화를 회계 감사하게 되니, 관리들이 뇌물을 보내고 아첨하는 자가 많았다. 공이 일절 물리치니 승상(丞相) 별가 불화공(別哥不花公)이 특별한 예로써 대우하였다. 그가 들어가 정승이 되었을 때, 공을 황제에게 천거하여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강절(江淅)에 있을 때에 염불노(廉佛奴)의 청백함이 남보다 뛰어남을 알았습니다.” 하고, 그 사실을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어 장차 공을 등용하려 하였는데, 그때 마침 대부인이 병이 들었으므로 돌아가 근친하기를 힘껏 청하였으므로 등용되지 못하였다. 병술년 6월 17일에 충목왕[明陵]이 말하기를, “염모(廉某)는 원 나라의 황제를 섬기어 조신(朝臣)이 되었고, 나의 대부(大父) 충숙왕을 도와 막관(幕官)이 되어 함께 국정을 꾀하였으니, 나의 오늘에 비록 본국에서는 일찍이 벼슬하지 않았으나 상례(常例)로써 논할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광정대부 삼사우사상호군(匡靖大夫三司右使上護軍)을 제배하였다. 이듬해 가을에는 중대광(重大匡)을 가자하고 수성 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의 호를 내리었으며 곧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에 옮기었다. 겨울 12월에는 찬성사에 올리었다. 정동성(征東省)의 재속(宰屬)이 대신(臺臣)의 장단점을 문책하고자 하니, 대부 이수(李遂) 공을 지목한 것이다. 공이 말하기를, “대강(臺綱)은 마땅히 흔들 바가 아니다. 더구나 이대부는 한 시대의 인걸이다. 그를 욕되게 해서야 옳겠는가.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의 배운 것을 저버리는 일이 된다.” 하고, 중국 조정에 들어가 고하여 일이 멈추게 되었다. 무자년에는 판관도사사(判版圖司事)에 승진하였다. 다음 해에 국상이 있어서 정승 왕후(王煦)가 천자에게 조현(朝見)하러 가면서 서정(庶政)을 공에게 위임하니, 공의 재결함이 공평하고 마땅하여 안팎이 편안하였다. 기축년에 충정왕[?陵]이 즉위하여 공을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重大匡都僉議贊成事判版圖)로 제배하였다. 경인년에는 나라의 표전(表箋)을 받들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다. 신묘년에는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을 등용하고자 하니, 조일신(趙日新)이라는 자는 공의 외가 사람인데,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저해하였다. 일신이 패한 뒤의 다음해에 임금이 말하기를, “염모(廉某)의 어진 것은 내가 아는 바이나 일신이 미워하기를 극심하게 하므로, 내가 그들이 서로 용납할 수 없음을 두려워한 까닭에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늦출 수 있겠느냐.” 하고, 찬성사로 복직시켰다. 갑오년 정월 11일에는 공에게 단성수의 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영경령전사(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判軍簿司事上護軍領景靈殿事)를 제배하였다. 2월 16일에는 우정승 판전리 영효사관(右政丞判典理領孝思觀)에 승진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게 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예의(銳意)하여 여러 가지 정사를 새롭게 하려고 하는데, 그 여름에 정승 채하중(蔡河中)이 탈탈대사(脫脫大師)의 세력으로써 왕에게 청병(請兵)하고 복직(復職)하기를 꾀하였다. 공이 그것을 알고 퇴직하기를 비니, 임금도 또한 그의 핍박한 바 되어 채하중(蔡河中)을 쓰고, 공은 곡성(曲城)에 봉하였다. 탈탈대사가 부른 것은 다 재상과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공도 또한 일행 중에 끼어 있었다. 평양에 이르러서 그 용맹한 무리들이 모의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친족을 떠나고 조상의 분묘를 버린 채 사지에 나아가면 어느 날에나 돌아오겠는가.” 하고, 드디어 공에게 고하고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 임금이 하늘과 같다. 하늘을 도피할 수 있겠는가. 또 충신 의사라면 어찌 두 가지 마음을 가지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유 정승(柳政丞) 탁(濯)과 더불어 샛길로 빨리 갔다. 이미 제도(帝都)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사람을 달려 보내어 공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염모(廉某)는 고려의 대신이며 또 대족(大族)이다. 예로 대접하여 보내라.” 하고, 휘정원(徽政院)에서 연회를 베풀어 총애하였다. 병신년에 기씨(奇氏)를 베고 공에게 명하여 북쪽 지방에 군사를 주둔하게 하였더니, 대장 인당(印?)이 제 마음대로 함부로 그의 부장(副將) 강중경(姜仲卿)을 죽였다. 국가에서 그가 달아날까 두려워하여 즉시 토죄하지 아니하고 공에게 명령하여 계략을 써서 베이니, 군사들이 변란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중국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어 경계에 와서 변란이 일어난 까닭을 물으므로, 공이 기씨(奇氏)가 나라를 뒤엎으려고 한 것을 갖추어 자세히 진술하여 먼저 처리하고 뒤에 알린 뜻을 명확하게 증언하였더니, 과연 천자의 성냄을 돌이키게 하여 간곡히 일방(一方)에 사전(赦典)을 내리게 되었으니 모두 공이 응대를 잘한 힘이었다. 그해 겨울에 도원수(都元帥)로서 북쪽의 변경을 진압하게 하였다. 임금이 절월(節鉞)을 주고 또 말하기를, “공이 간 뒤에는 나는 북쪽을 돌아보지 않겠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또한 쌀이나 소금에 관계되는 일을 가지고 상청(上聽)에 간구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염공(廉公)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하였다. 그가 군정(軍政)을 다스릴 때에는 마초(馬草)와 군량을 먼저 하고, 성곽과 보루를 그 다음으로 하고, 병기와 기계를 또 그 다음으로 하였다. 공이 비록 처음부터 마음 속에 정하고 있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최 부사(崔副使)에게 문의하였다. 최 부사는 지금의 영삼사공(領三司公)이다. 공이 사람을 아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해 겨울에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開府儀同三司上柱國守門下侍中上將軍判兵部事領景靈殿事)에 제배되었다. 다음해에는 판이부사 영효사관사(判吏部事領孝思觀事)에 승진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공이 이미 임기가 찼다고 하여 직위를 사퇴하였다. 선비들의 여론이 모두 말하기를, “염공은 전선(詮選)을 맡은 것이 다섯 번이나 되건만 일찍이 사사로운 은혜나 혐원(嫌怨)으로써 등용하였거나 내보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종족(宗族)이 비록 많으나 영화스럽고 추요(樞要)한 관직에 있는 자가 없다. 대체로 담담하여 욕심이 적은 것이다.” 하였다.
공이 봉후(封侯)되어 본제(本第)에 간 뒤, 월여 만에 홍건적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임인년에는 벽상 삼한 삼중대광곡성후(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侯)로 개임(改任)되었다. 임금의 수레에 호종하여 상주(尙州)로 옮겨 가고 또 청주(淸州)로 옮겨 갔을 때, 공은 시중(侍中) 윤환(尹桓) 공과 이암(李巖) 공과 더불어 수종하였다. 다음해 3월에 또 공을 시중(侍中)으로 기용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을사년에 임금이 신돈(辛旽)의 말을 들어 관원을 내쫓고 올려 쓰게 하였다. 신돈이 공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임금에게 참소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기유년에 특진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삼고, 인하여 곡성백(曲城伯)을 봉하니 돈(旽)이 또 임금에게 참소하였다. 임금이 공의 아들과 사위에게 명하여 신돈을 끊을 수 없는 뜻을 타일렀다. 그러나 공은 더욱 자기의 지키는 바를 굳게 하니 임금이 여기에서 더욱 공을 신임하였다. 올라성(兀羅城)의 전역(戰役)에서 여러 장수들은 공의 절제(節制)를 받아 감히 사람을 많이 죽이지 못하였다. 신돈이 패하니 임금이 더욱더 공을 무겁게 여겼다. 공에게 보국(輔國)이라는 두 글자를 더하고 전과 같이 봉읍(封邑)하였다. 임금이 친히 얼굴을 그려 하사하였으며, 공의 딸을 궁중에 들이어 신비(愼妃)라고 하였다. 부인 권씨(權氏)를 봉하여 진한국 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라고 하였으니,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부인에게 봉록을 준 것이니 그전의 일이었고, 그 뒤 중자(仲子) 문하 평리(門下評理) 공이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 고려 때의 과거 시험관)가 되니 당시의 세상에서 부러워하였다. 계축년에 공을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기용하였다. 위계와 겸직은 전과 같다. 판개성 겸감춘추관사 곡성부원군(判開城兼監春秋館事曲城府院君)으로 가자하였다. 대개 총애함이 지극한 것이었다.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은 청탁하는 바가 많았으나 공이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흥경이 원망하는 말을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염 시중은 중국에서 배웠으며 성품이 또 높고 깨끗하여 조정의 다른 신하들에게 비교할 수 없다. 또 대신의 마음 쓰는 것은 네가 알 바 아니다.” 하였다. 흥경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여서는 공을 영문하사(領門下事)로 삼았으며 또 영서연(領書筵)으로 삼았다. 5세에 걸쳐 원로였기 때문이다. 을묘년 정월 초닷샛날 임금이 상을 마치고 정전(正殿)에 납시니, 재신(宰臣)들이 송수(頌壽)하였는데 공이 첫머리에서, “임금되기 어려우며, 신하 노릇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진 이를 친근하게 하고 망령된 자를 멀리하시옵소서.” 하는 등의 말을 아뢰어, 말뜻이 명료하고 간결하니 임금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였다. 공을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 공신 영삼사사(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領三司事)에 제배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전과 같게 하였다. 병진년 10월에 원 나라 조정의 예부상서 적흠(翟欽)이 와서 선명(宣命 조칙)을 내리고, 자덕대부 장작원사(資德大夫將作院使)를 명하였다. 공이 절하고 받은 뒤에 사신에게 말하기를, “신은 늙었습니다. 이제 성은을 입고 보답을 도모할 길이 없사와 구구한 심정은 천지같이 큰 것이 있사옵니다.” 하였다. 정사년에 도총도감(都摠都監)을 설치하고 오부(五部) 병마를 훈련시켰는데 공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기미년에는 판문하사(判門下事)가 되고, 경신년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이임(移任)되었으며, 그해 겨울에는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공은 이미 늙었으나 나라에 크게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재상이 반드시 공과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환(尹桓) 공을 청하여 회의하였다. 공은 단연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반드시 할 말을 다하였다. 공은 거처하는 집을 다스리는데 사치하지도 아니하고 누추하지도 않게 하였으며, 비록 여러 번 이사하였으나 반드시 별원(別院)을 두고 꽃과 나무를 심어 산림과 같게 하였다. 매헌(梅軒)이라고 현액을 걸었다. 향을 피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어서 담담하였다. 손이 오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안주와 반찬을 극히 깨끗하게 하여 흐뭇이 취한 뒤에 그쳤다. 풍류가 소쇄(蕭?)하여서 바라보면 신선 같았다. 금년 정월에 기로(耆老)들과 함께 공민왕을 배알하고 느낀 바가 있어서 물러나와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 공민왕의 지나친 등용을 입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있은 지 29년이나 되고 나이도 또 79세나 되었다. 내게 병이 자주 나니 반드시 나는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곧 장사를 박(薄)하게 지내라는 명이 있었다. 3월 2일에 병이 들고 18일 정묘에 정침에서 졸하여, 20일 기사에 임강현(臨江縣)의 대곡(大谷)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그것은 공이 잡아 놓은 터이다. 아, 공은 유감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임금이 일찍이 중관 판후덕사(中官判厚德事) 김실(金實)을 보내 공의 문병을 하게 하였을 때, 공은 의관을 갖추고 어약(御藥)과 궁온(宮?)을 받은 뒤에 김실에게 말하기를, “공은 이 늙은 신하를 위하여 임금께 잘 말씀 아뢰어 주시오. 임금께서 노신(老臣)에게 생각을 마치시는 까닭은 한갓 신이 일찍이 선왕(先王)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입니다. 신은 지금 위태롭습니다. 원하건대 임금께서는 날마다 삼가심을 하루같이 하여 오직 끝을 영원하게 하기를 도모하심이 신의 소입니다.” 하였다. 이날에 근비(謹妃)와 의비(毅妃)의 하인이 와서 궁온을 내리었다. 아, 공은 유감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은 무릇 두 번 장가들었다. 완산군부인(完山君夫人) 배씨(裴氏)는 중대 광완산군(重大匡完山君) 정(挺)의 딸이다. 일찍 사망하였으며 아들이 없다.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권씨(權氏)는 원조(元朝)의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추성동덕 협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예천부원군 영예문관사(朝列大夫太子左贊善推誠同德協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醴泉府院君領藝文館事)시(諡) 문탄(文坦) 휘 한공(漢功)의 딸이다. 성질이 근검하고 자제를 교육함이 엄하였다. 평상시에는 몸에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선공(先公)이 병들어 수 년이 되었으나. 공을 치료 하고 약 쓰는 일을 더욱 부지런하게 하였다. 3남 5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이름을 국보(國寶)라 하였으며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대제학(推忠輔理功臣重大匡瑞城君藝文館大提學)이다. 다음은 이름을 흥방(興邦)이라 하였으며 충근 익대 섭리찬화공신 전광정 대부문하평리 겸 성균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상호군(忠勤翊戴燮理贊化功臣前匡靖大夫門下評理兼成均大司成藝文館大提學上護軍)이다. 다음은 이름을 정수(廷秀)라 하였으며, 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 겸 판전의시사 우문관제학 지제교 충 춘추관수찬관 지전리내시 다방사(正順大夫密直司知申事兼判典儀寺事右文館提學知制敎充春秋館修撰官 知典理內侍茶房事)이다. 맏딸은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 홍징(洪徵)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 제학(奉翊大夫判內府寺事進賢冠提學) 임헌(任獻)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사 상호군(推誠佐理功臣奉翊大夫密直使上護軍) 정희계(鄭熙啓)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바로 신비(愼妃)이다. 다음은 중정대부 삼사우윤(中正大夫三司右尹) 이송(李悚)에게 시집갔다. 그 밖에 아들 혜주(惠珠)는 통제원(通濟院) 주지(住持)인데 김씨(金氏)가 낳았다. 광원(廣元)은 봉순대부 판사복시사(奉順大夫判司僕寺事)인데 이씨(李氏)가 낳았다. 딸은 중랑장(中郞將) 홍문필(洪文弼)에게 시집갔으며 김씨(金氏)가 낳았다. 손자와 손녀 몇이 있다. 서성군(瑞城君) 국보(國寶)가 현복군(玄福君) 권공(權公) 휘 염(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치중(致中)이라 하였다. 친어군호군(親禦軍護軍)이다. 차자는 치용(致庸)인데 전의부령(典儀副令)이다. 딸은 사헌지평 안조동(安祖同)에게 시집갔다. 문하평리(門下評理) 흥방(興邦)은 종부부령(宗簿副令) 조문경(趙文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맏은 위위소윤(衛尉少尹) 임치(林?)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지신사(知申事) 정수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조득주(趙得珠)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외손에 남녀 몇이 있다. 밀직부사 홍징의 아들은 이름을 상빈(尙賓)이라 하였는데 성균학유(成均學諭)이다. 다음은 상부(尙溥)인데 산원(散員)이다. 다음은 상연(尙淵)인데 권무(權務)이다. 모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딸은 모두 어리다.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임헌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공위(公緯)라 하였으며 낭장이다. 다음은 공진(公縝)인데 별장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며 딸들도 모두 어리다. 밀직사(密直使) 정희계(鄭熙啓)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으며 중랑장(中郞將)이다. 딸은 어리다. 우윤(右尹) 이송(李悚)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길(佶)이라 하였으며 권무(權務)이다. 다음은 일(佾)인데 어리다. 판사복시사 광원(廣元)이 아들을 낳았으나 어리다. 중랑장 홍문필(洪文弼)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증손으로도 남녀 몇이 있다. 호군(護軍)이 전법판서(典法判書) 박사신(朴思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怡)라 하였으며 권무이다. 부령이 밀직제학 윤방안(尹邦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순(恂)이라 하였으며 권무이다. 지평이 아들을 낳았는데 금강(金剛)이라 하였으며 권무이다. 딸은 어리다. 아, 공이 오복(五福)을 갖추어서 자손이 길한 것을 만남이 이와 같다.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한 것은 거기에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대대로 신하인 구가(舊家)의 여경(餘慶)인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남에게 은택을 입힌 밝은 징험인가. 신은 여기에서 실로 감동되어 일어나게 하는 바가 있다. 공과 같은 사람이 묘당(廟堂) 위에 계속 이어진다면 태평의 기대가 어찌 오늘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아, 공은 이제 가고 없구나. 아, 공은 없구나. 신 색(穡)은 삼가 손을 마주잡고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공의 나이 젊었을 때 / 公在妙齡
황제의 조정에서 높이 뛰어났고 / 敭翹帝庭
돌아와 정동성의 막료 중에 장이 되니 / 歸長省幕
다스림은 평온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 理靜民寧
다섯 임금의 조정을 차례로 섬기면서 / 歷事五朝
국가의 위령을 드높였다 / 敭國威靈
진정하면 무거움이 산악과 같고 / 鎭之山嶽
움직이면 뇌성처럼 위엄이 떨쳤네 / 動以雷霆
어려운 그때를 / 時之艱矣
공이 마침 만났는데 / 公乃適丁
삼군은 목숨을 바치고 / 三軍效命
온갖 법은 바로 섰다 / 百度惟貞
생민들은 양육하고 / 生民是育
종사는 호위하여 / 宗社是屛
바르게 하고 곧게 하며 / 以匡以直
기르고 편하게 하니 / 以毒以亭
여러 사람들의 병은 낫게 하고 / 衆病以?
취한 자는 깨게 했네 / 群醉以醒
태평하게 된 것은 / 大平之目
신명이 들어준 것이네 / 神明所聽
착하신 공민왕이 / 於穆玄陵
그의 모습 친히 그리니 / 親圖其形
풍부한 공훈이며, 성대한 덕행이 / ?功盛德
단청에 밝게 빛이 난다 / 煥乎丹靑
공은 진실로 원로이며 / 展也元老
온 나라의 모범이로다 / 一國儀刑
어찌하여 백세 향수 못하셨는가 / 胡不期?
하늘과 땅이 아득하고 어둡구나 / 天地杳冥
높은 산과 낮은 늪은 끊은 듯 구획지고 / 有截原?
냇물은 서늘하네 / 川流??
산은 멈춰 서고 정기는 쌓여 있어 / 山止氣畜
분묘의 터전은 아름답구나 / 有美泉?
비석이 우뚝 솟아 / 有突?碑
위로 별에 이르네 / 上磨于星
천추에 와전 없이 / 千載勿訛
우리 동토에 비쳐 주리라 / 照我東坰

하였다.

 

동문선 제120권   
 
 
 비명(碑銘)
 
 
유명 시 강헌 조선국태조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 건원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建元陵神道碑銘 幷序)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주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특이한 징조를 나타내어 그 임금이 될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하(夏) 나라에서는 현규(玄圭) 를 준 일이 있었고, 주(周) 나라에는 협복지몽(協卜之夢)이 있었다. 한(漢) 나라를 거쳐서 그 이후로 어느 왕조에서나 각각 다 이러한 징조가 있었으니, 다 하늘이 준 것이고 사람의 모책에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공훈과 덕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 또한 현저하였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 금으로 만든 자)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며 말하기를, “공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고 한 일이 있다. 하 나라의 현규(玄圭)와 주 나라의 꿈과 더불어 같은 부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인(異人)이 문에 와서 편지를 올리며 말하기를, “지리산의 바윗사이에서 얻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글에는 ‘나무 아들이 삼한(三韓)을 고쳐 바로잡는다.[木子更正三韓]’라고 써 있었다. 사람을 시켜 나가 맞으려하니, 이미 가벼렸다. 그리고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의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을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이 수천 년 동안 떠돌았는데 이제야 특별히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이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신이 삼가 선원계보(璿源系譜)를 상고하여 보니, 이씨는 전주(全州)의 망족(望族)이다. 사공(司空)은 휘가 한(翰)인데 신라에 벼슬하였고,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6대 손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에 이르러 태조 임금의 고조(高祖)인 목왕(穆王)은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四代)에 걸쳐 습작하여 모두 다 능히 잘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쇠퇴하게 되니,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기었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침략하여 왕경(王京)을 함락시키니, 공민왕이 남쪽으로 옮겨 가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서 수복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승첩의 보고를 올리었다. 다음해 임인년에는 오랑캐 납합출(納合出)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고, 또 그 다음해인 계묘년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으니, 공민왕이 믿고 의지함이 더욱 두터워졌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되어 장(將)ㆍ상(相)에 이르게 되어 안팎을 드나들었다. 《경서》와 《사기(史記)》를 보고 힘써 노력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구제할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지성(至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훙(薨)하고 다른 성(姓)이 왕위를 절취하니, 권력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나라의 정치를 탁란하게 하고, 바다의 도적이 나라 안에 깊이 들어와 군(郡)ㆍ현(縣)에 불지르고 약탈하곤 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기니, 동남쪽이 편안하게 되었다.
무진년에 시중 최영(崔瑩)이 권간들을 베고 무찌를 때,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에게 의뢰하여 삶을 보전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鉞)을 주어서,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를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바른 도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리었다. 군사들이 이미 언덕에 올라갔을 때, 큰 물이 섬을 삼켜 버리니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최영을 잡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이름난 유학자(儒學者) 이색(李穡)을 좌시중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들은 국정을 탁란하게 하고, 미치고 패려한 자들이 서로 모함하여서 위망(危亡)의 형세가 급급하니,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이(轉移)하는 힘이 아니었다면, 온 나라가 위태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말하기를, “이제 공이 의로운 일을 거사하여 중국을 높였으니, 집정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날을 정하여 명 나라 서울에 가게 하였다.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를 골라서 색(穡)과 함께 가서 조현(朝見)하게 하니, 고황제(高皇帝)가 칭찬하고 돌려보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다른 성(姓)의 사람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문책하여 왔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군과 재상들과 함께 왕씨(王氏)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폐지하고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하니, 민중의 마음이 서로 즐거워하였다. 공이 높아지니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참소와 간악한 모함이 번갈아 모함하게 되어, 정창이 자못 이에 의혹되었다. 태조는 벼슬이 성대하므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사퇴함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행(西行)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의 음모가 더욱 급격하게 되었다. 전하(태종을 가리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고를 억제하니, 여러 가지 모함이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태조를 추대하니, 신료와 부로들도 모의함이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태조가 정변(政變)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 번 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마루의 섬돌을 내려 오지 않은 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계도하여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 신 조반(趙?)을 보내어 알리니, 중국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를 높였으며, 백성들에게는 병화가 없고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상제의 명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이어서 또 칙명이 있어 이르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이라고 고치려 하는가.” 하였다. 즉시 예문관 학사 신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서 주청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에 근본하여 이름 지음이 좋겠다. 하늘에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길이 후세 자손에 이르도록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이 명성과 의로움과 열렬함이 위에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청명(請命)하면 문득 윤허를 얻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우리 나라를 황제에게 무함한 자가 있어서, 황제가 임금의 친 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태조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 경서에 능통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여러 아들들 중에서 제일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도착하여서 진술하는 의견이 황제의 뜻에 맞으니, 예로써 우대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 한양에 수도를 정하였다. 궁궐을 짓고 종묘를 세웠으며, 일찍이 사대(四代)를 추존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라 하고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 배위 최씨를 정비(貞妃)라고 하였으며, 황조를 도왕(度王), 배위 박씨를 경비(敬妃)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배위 최씨를 의비(懿妃)라고 하였다. 예악을 닦고 제사를 삼가며, 관복의 제도를 정하여 위의(威儀)의 등차를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서 재주 있는 자를 육성하며, 봉록을 후하게 하여 선비들을 권장하였다. 소송을 밝게 분별하여 바르게 판결하며 수령들을 뽑는 데 신중하게 하였다. 좋지 못한 정치는 모두 고치니, 여러 가지 공적은 밝게 빛났다. 바다의 왜구들이 와서 복종하고, 온 나라 안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고 큰 성덕(盛德)은 정말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이니, 총명하고 신무(神武)하고 영웅스럽고 위대한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 때문에 황제의 조정에 견책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얼자(?子)를 끼고 제 뜻을 제멋대로 펴보려고 하였다. 전하가 그 기미를 밝게 살피어 남김없이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을 세자로 세울 것을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정종〈定宗〉)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후사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므로 전하를 세자로 책립하였다. 경진년 7월 기사일에, 태조에게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일에는 상왕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명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황제의 인이 찍힌 조서를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하고, 이어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룡포와 면류관 아홉 벌을 하사하니, 품수가 친왕(親王)과 비등하였다. 우리 전하가 양궁(兩宮)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함을 지극하게 갖추었다.
영락(永樂) 무자년 5월 24일 임신년에 태조가 승하하시니, 춘추가 74세이며 재위 7년이고,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아니한 것이 11년이었다.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니,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애모함이 망극하였으며, 거상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이 해 9월 9일 갑인일에, 도성의 동쪽 양주(楊州)의 치소소재지(治所所在地)의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였다. 능(陵)을 건원릉(健元陵)이라고 하였다. 부고를 듣고 명 나라의 황제는 매우 슬퍼하여 정무를 보지 아니하였다. 즉시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파견하여 태뢰(太牢 나라의 제사에 소를 통째로 바치는 제물)를 써서 사제(賜祭)하니,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밝고 통달하며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공경히 천도에 순종하고, 근신한 마음으로 사대(事大)하였으며 한 나라의 백성들을 보휼하니, 우리 황고(皇考)께서 깊이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내렸다. 왕의 공덕이 드러남은 비록 고대 조선의 어진 임금일지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조칙을 내려 부의(賻儀)를 내림을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더할 수 없이 갖추어져서 유감됨이 없었다. 대체로 우리 태조가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잇는 효도가 전후에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마음을 잘 누리었으므로, 국말 국초(國末國初)의 즈음에 크게 하늘과 사람이 위와 아래에서 돕는 일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은 것이니, 아, 위대하도다. 운운.
신은 역대의 천명(天命)을 받아 창업한 임금을 보니, 덕과 사업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사기(史記)에 빛이 나서 광채를 흘려 보냄이 끝이 없다. 이제 우리 조선이 탄생하여 일어나니, 성대한 덕과 큰 부명이 옛보다도 광채가 난다. 이는 마땅히 이미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를 얻을 것이며, 넓은 터전을 높게 하여 큰 복조를 흘려 보내니, 하늘과 땅과 더불어 장구하리라. 신 근(近)이 외람되게 비명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펴서 기술하여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신의 글재주가 비졸하여서 크고 아름다움을 드러내 선양하여서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하기에 부족하므로, 다만 삼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공훈과 덕택만을 찬술하고, 감히 손으로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명을 드린다. 그 글은 이러하다.

하늘이 이 백성 낳으시고 / 天生斯民
사목(임금)을 세워 / 立以司牧
길러서 키우며 다스리게 하실 제 / ?長?冶
덕 있는 이는 사랑하시고 돌보시네 / ?眷有德
하늘이 또박 또박 말하지는 않건마는 / 非天諄諄
명령은 혁혁하게 나타나 있나니 / 有命赫赫
우 임금은 현규를 주고 / 禹錫玄圭
주 나라 꿈은 협복일세 / 周夢?卜
우리 조선은 / 惟我朝鮮
왕업 터전 닦으실 제 / 肇基王迹
신인이 꿈속에서 / 夢有神人
금척을 주셨다 / 授以金尺
부록이 먼저 정하니 / 符?前定
하늘 뜻 분명하네 / 天心昭?
고려의 운수 이미 종말이라 / 麗運旣終
임금은 혼암하고 정승은 포학하여 / 君昏相酷
농사철에 출병하여 / 農月興師
큰 나라에 싸움 걸었도다 / 大邦構隙
우리 태조 의를 지켜 가던 깃발 되돌리니 / 我?義旋
죄인들 복죄하였네 / 罪人斯得
충성이 위로 들려 / 忠誠上聞
황제가 기뻐하였네 / 帝心載?
천운은 돌아오고 / 歷數有歸
민정은 절박하여 / 輿情斯迫
위대한 왕업 이미 이룩하였으나 / 大業旣成
저자의 상인들도 동요하지 않았도다 / 市肆不易
명 나라 고황제가 찬탄하여 이르기를 / 高皇曰咨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 惟爾有國
백성들은 병화가 없고 / 民無兵禍
하늘이 주는 기쁨 즐기네 하시고 / 樂天之樂
이어서 조선이란 / 繼賜國號
옛 국호를 다시 내렸도다 / 朝鮮是復
지리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 相地定都
한강의 북쪽이라 / 于漢之北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 虎踞龍蟠
왕기가 쌓였도다 / 王氣攸積
궁궐은 높고 높으며 / 宮室崇崇
종묘는 우뚝하네 / 宗廟翼翼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며 / 仁深好生
정치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 冶蔚思輯
백 가지 제도가 갖추어 닦아지고 / 百度具修
만 가지 왕화는 흡족하게 되었네 / 萬化斯洽
근정하시기에 지치셔서 / ?倦于勤
맏아들에 전하시니 / 傳付聖嫡
맏아들은 이어 공적이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 ?讓于功
부자와 형제간에 계승하였네 / 惟世惟及
밝고 밝은 우리 임금 / 明明我后
조그마한 조짐도 반드시 살피시어 / 有幾必燭
두 번 화란을 평정하니 / 禍亂再平
그 경사 지극히 돈독하네 / 其慶克篤
개국하고 정사한 것 / 開國定社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 咸我之績
대명은 사양하기 어렵고 / 大命難辭
신성한 큰 그릇 제대로 의탁되었도다 / 神器有托
두 임금 정성껏 봉양하니 / 祇奉兩宮
공손하고 더욱 정성스러웠도다 / 虔恭愈恪
효도와 우애가 신에게 통하여 / 孝弟通神
상제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웠네 / 帝眷尤渥
태상왕의 상을 만나 근심에 잠긴 마음 / 遭喪??
슬퍼하고 사모하여 몸부림쳐 울부짖었네 / 哀慕踊?
황제가 부고 듣고 매우 슬퍼하시며 / 帝聞震悼
사자를 보내 조곡하고 / 遣使弔哭
태뢰를 써서 제사하며 / 太牢有祀
부의를 후하게 하라 칙명내리고 / 厚賻有?
시호를 주어 칭찬하니 / 美諡褒嘉
조상하는 예법이 완전하게 갖추었네 / 恤典備飾
하늘의 도우심이 / 自天佑之
시종일관 변함없어 / 終始不?
큰 복조 길이 이어지고 / 景祚??
자손은 천억으로 번창하며 / 子孫千億
종사가 유구하여 / 宗祀悠長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 與天罔極

 

[주D-001]현규(玄圭) : 현(玄)은 하늘 빛이요 규(圭)는 큰 홀(笏)이다. 예전 우임금에게 요임금이 이 현규를 하사하였는데, 그것이 하늘 아래의 모든 것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주D-002]협복지몽(協卜之夢) : 문왕(文王)이 사냥 나갈 때에 꿈꾼 것을 점쳐서 강태공(姜太公)을 얻어 그의 힘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이 꿈을 말함.
동문선 제120권   
 
 
 비명(碑銘)
 
 
유명조선국 승인 순성 신의왕후 제릉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承仁順聖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幷序)
 

옛날부터 제왕이 천명을 받고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후비(后妃)의 현명함에 힘입어서 덕(德)을 같이하고 경사를 길러서 그 서업(緖業)을 길게 하였다. 하(夏) 나라의 우(禹) 임금은 도산(塗山)의 여자가 있어서 계(啓)가 능히 계승하게 되었고, 주(周) 나라에는 태사(太? 주문왕(周文王)의 비(妃) 무왕(武王)의 어머니)가 있어서 무왕(武王)이 큰 업을 받들 수 있었으니, 하우씨(夏禹氏)와 주 문왕(周文王)의 하늘과 짝할 만한 종사(宗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우리의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타고난 자질이 맑고 의젓하며 부덕(婦德)은 유순하고 정숙하였다. 일찍이 태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시집가서 태조를 도와 왕업을 이루게 하고, 착하고 어진 아들을 낳아 왕통(王統)을 무궁하게 드리우게 하였으니, 신성한 공과 떳떳한 법이 옛날의 착한 후비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큰 훈업이 금방 이루어지려 할 때에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태상왕이 나라를 창업하였으나 왕비로 높일 수 없었으며 두 착한 아드님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영화스러운 봉양을 할 수 없었다. 산릉(山陵)이 빛남을 가리워서 서리와 이슬이 슬픔을 더하게 한다. 아, 슬프다. 처음의 시호는 절비(節妃)이며 능호는 제릉(齊陵)이다. 신의왕후라는 시호를 더하고 인소전(仁昭殿)을 두어 진용(眞容)을 봉안하였으니, 추후(追後)하여 높이는 예전(禮典)은 이미 갖추어 거행되었다.
우리의 주상전하께서 어머니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질 것을 아프게 생각하고 효도를 펼 길이 없어서, 이에 주무관(主務官)에게 명령하여 큰 비석을 새기게 하고, 신 근(近)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지어 길이 뒷세상에 보이게 하도록 하였다. 신 근은 명령을 받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후(后)의 성은 한씨(韓氏)니, 안변(安邊)의 세가(世家)이다. 아버지의 휘는 경(卿)이니 충성공 근 적덕육경 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忠誠恭謹積德毓慶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조고(祖考)의 휘는 규인(珪仁)이니, 적선육경 동덕찬화 익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사사 겸판이조사 안천부원군(積善毓慶同德贊化翊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使司兼判吏曹事安川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증조(曾祖)의 휘는 유(裕)이니 증 순성적덕좌 명보리공신 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겸 판호조사 안원군(贈 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兼判戶曹事安原君)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추봉하였는데, 병의육덕보조 공신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판형조사(秉義毓德輔祚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判戶曹事) 원려(元麗)의 딸이다. 후(后)께서는 나면서부터 맑고 상냥하며 총명하고 지혜 있음이 비범하였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자 배필을 선택하여 우리 태상왕에게 시집왔다. 태상왕이 그때에 장군이 되고, 정승이 되어 수십 년 동안을 드나들면서 싸우느라고 편안한 해가 없었는데, 후는 능히 힘을 다하여 가사를 경영하여 남편의 성공을 권면(勸勉)하였다. 또 성품이 질투하지 아니하여 첩과 시녀들을 예로써 대우하였다. 많은 아들들을 두었는데, 올바른 도리로써 교육하였다.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는 슬기롭고 어질고 영명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가 20세도 못 되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에 벼슬하였다.
거짓 임금 신우(辛禑) 무진년에 시중 최영(崔瑩)이 중국을 치려고 꾀하여, 지금의 우리 태상왕이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현저하였으므로, 그에게 절월(節鉞)을 주어 가서 요동을 치게 하였다. 태상왕이 의(義)를 지켜 군사를 되돌려서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이름난 선비 이색(李穡)으로 대신하게 하니, 나라의 안팎이 무사하여 우리 나라가 길이 그 공적을 힘입게 되었다. 이색이 태상왕에게 아뢰기를, “이번, 중국에 싸움을 도발하려 한 뒤를 당하여, 집정한 이가 친히 가서 황제의 조정에 조현(朝見)하지 아니하면 공의 충성이 천하에 밝혀질 수 없습니다.”하고, 날을 정하여 가려하니 태상왕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나와 공이 일시에 사자(使者)로 가면 나라일은 누구에게 맡기겠소. 내가 아들 한 사람을 골라서 공에게 수행하게 하면 내가 가는 것이나 같지 않겠소.” 하고, 곧 지금의 우리의 전하를 보내어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였더니, 특별히 고황제(高皇帝)의 우대하는 예를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또 칙서를 내려 타성(他姓)으로 왕씨(王氏)의 후사를 삼는 것을 문책하였다. 태상왕이 여러 장군과 재상들과 의논하여 왕씨의 후예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권세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서 남의 것을 강탈하고 훔치고 속여 빼앗곤 하였다. 태상왕이 그때에 좌상(左相)이 되매, 전지(田地)의 사유를 폐지하여 문란하여진 법을 바로 세우니, 폐단이 없어지고 이로움이 일어나서 온갖 법도가 함께 새로워졌다. 공이 높으면 상주지 아니하고, 덕이 크면 용납하기 어려운 것일까. 참소와 간사한 말이 번갈아 얽어서 모함하니, 점점 번지고 젖어듦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정창(定昌)이 자못 나약하고 혼암하여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망설이기만 하였다. 후(后)가 드디어 근심하고 노심(勞心)하여 병이 났다. 신미년 가을 9월 12일에 훙(薨)하니, 향년 55세였다. 예를 갖추어 성남(城南)의 해풍군(海豊郡) 속촌(粟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우리 전하가 분묘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보내고자 하더니, 다음해 임신년의 봄에 태상왕이 서쪽에 나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다. 전하가 와서 시탕(侍湯)하니, 뭇 간사한 무리들이 이 틈을 타서 모함함이 더욱 급하여졌다. 우리 전하가 기틀에 대응하고 계책을 결단하여,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흉악한 무리들이 와해되었다. 정창이 더욱 꺼리므로 가을 7월 16일에 전하는 2, 3명의 대신들과 앞장서서 대의를 외치니, 신료와 부로들이 모의하지 않았건만 뜻이 일치하여 입을 모아 추대하였다. 태상왕이 여러 사람들의 심정에 못이겨 이에 왕위에 나아가니 저자에서는 상인들이 가게를 바꾸는 일도 없이 나라 안은 하루 아침에 맑고 밝게 되었다. 즉시 사자를 보내어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 아뢰고 잇달아 회보(回報)의 칙명을 받았다. 이미 왕작(王爵)을 허가하고 또 국호를 조선이라고 미칭(美稱)으로 고쳐 주었다. 3년이 지난 뒤, 갑술년 여름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임금의 친아들을 입조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태상왕이 우리 전하가 경서에 통하고 예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하여 중국에서 온 사신을 따라 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미 도착하매, 황제가 더불어 말하여 보고 가상하게 여기어 넉넉한 상을 주고 돌려보내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상왕이 병이 드니,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를 것을 생각하여, 여러 적계(嫡系)의 왕자를 제거한 뒤에 어린 얼자를 세우려고 음모하여 여러 무리들과 붕당을 만들어서 화란의 발생이 박두하게 되었다. 전하가 그 낌새를 밝게 살피어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 앞질러 베어서 제거하여 화란의 불을 꺼버리고, 태상왕에게 청하여 적출(嫡出)의 아들이며 연장(年長)인 상왕(上王)을 맞아들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떳떳한 차례가 이미 바로잡히니, 종묘와 사직이 안정하게 되었다. 9월 정축일에 태상왕이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상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 등이 동기(同氣)가 서로 죽이도록 음모를 꾸미고, 회안군(懷安君)의 부자를 추켜 세워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게 하니, 역적의 기세가 매우 치성하였다. 우리 전하가 장수와 사졸들을 거느리고 격려하여 곧 바로 평정하였다. 박포(朴苞)만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불문에 붙였으며 회안(懷安)은 안치에 처하여 지친(至親)의 의(誼)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상왕이 후사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하게 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고, 세자로 책봉하여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었다. 가을 7월 기사일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상왕에게 계운신무(啓運神武)의 호(號)를 올리었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도 또한 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전하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사자(使者)를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에게 청명(請命)하니, 다음해인 신사년에 건문제(建文帝) 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과 문연각 대조(文淵閣待詔) 단목례(端木禮)를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갖고 와서 우리 전하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겨울에 홍려시 행인(鴻?寺行人) 번문규(藩文奎)를 보내 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벼슬의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하였다.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여 널리 만방에 알리니, 전하가 즉시 좌정승 신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들어가 등극을 축하하였다. 황제가 우리 전하의 충성으로 사대(事大)하는 것을 칭찬하고,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금년 4월에 와서 전과 같이 봉작하여 왕으로 하였다. 9월에 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곤면(袞冕) 구장(九章 아홉벌)과 금단사라(錦段紗羅)와 서적(書籍)과, 왕비에게 갓과 도포와 금단사라와, 태상왕에게 금단사라를 내렸다. 이처럼 세상에 드문 은전이 전후로 계속하여 이르렀다. 대체로 우리 전하의 성대한 공덕은 실로 하늘이 계시한 바로서, 오로지 우리 나라에 붙이어서 큰 계획과 아름다운 천명을 연장하게 하였으니, 상제의 융숭한 권고를 받아 하늘이 주는 녹의 영구함을 누려야 마땅할 것이다.
기초를 창조한 자취는 비록 조종(祖宗)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자손을 잘 낳은 경사(慶事)는 실로 신의왕후(神懿王后)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 성대하도다. 후(后)게서는 여섯 아들을 낳으셨으니,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우리의 주상전하가 다섯째이다. 맏은 방우(芳雨)이니 진안군(鎭安君)을 봉하였다가 먼저 졸하였고, 셋째는 방의(芳毅)이니 익안대군(益安大君)을 봉하였고, 넷째는 방간(芳幹)이니 회안대군(懷安大君)을 봉하였다. 여섯째는 방연(芳衍)이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딸은 두 분이 있었으니, 맏은 경신궁주(慶愼宮主)로서 찬성사(贊成事)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선궁주(慶善宮主)로서 청원군(淸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상왕의 배필은 김씨(金氏)로서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니, 증좌시중(贈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우리 전하의 배필은 정비(靜妃)니 여흥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驪興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 민제(閔霽)의 딸이다. 맏아들은 원자(元子) 제(?)이고, 차남(次男)과 삼남(三男)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정순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경정궁주(慶貞宮主)이니 평녕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복근(福根)이라고 부르며 봉녕군(奉寧君)을 봉하였다. 딸은 소윤(少尹) 이숙묘(李叔畝)에게 시집갔다. 익안군은 증 찬성사 최인규(崔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석근(石根)이라고 부르며 원윤(元尹) 벼슬에 있다. 딸은 첨총제(僉摠制) 김한(金閑)에게 시집갔다. 회안(懷安)은 증 찬성사 민선(閔璿)이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맹종(孟宗)이며 의령군(義寧君)을 봉하였다. 딸은 종부령(宗簿令) 조신언(趙愼言)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신 근(近)이 일찍이 살펴보니, 삼대(三代) 성왕의 후비(后妃)의 덕(德)은 도산(塗山)과 태사(太?)보다 더 큰 이가 없다. 시(詩), 서(書)에 실려 있어서 천고에 밝게 빛난다.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덕(德)이 진실로 그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비견할 만하다. 다만 신 근은 학식이 얕고 문장이 졸렬하여 비록 성덕을 더할 수 없이 형용하더라도, 하늘과 땅을 그림 그리는 것과 같아서 어찌 능히 그것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시경》에 나오는 주(周) 나라의 시편(詩篇)인 대아(大雅)의 〈대명(大明)〉과 〈사제(思齊)〉의 뜻을 상고하여 삼가 명(銘)의 사(詞)를 기술하고 손 들어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올리는 바이다. 그 사는 이러하다.

상제가 밝고 현저하여 / 上帝赫赫
덕 있는 이를 계도하여 돕나니 / 啓佑有德
사사로움을 위해서가 아니고 / 匪伊私之
백성을 위함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 爲民之極
그 계시는 어떠하던가 / 其啓維何
유순하고 아름다운 부덕을 낳아 / ?生柔嘉
와서 덕 높은 임금의 배필이 되었네 / 來配于德
실가지락 마땅하여 / 允宜室家
임신하고 생육하니 / 載震載育
그 정령이 밝고 밝아 / 厥靈是赫
성스럽고 밝은 이를 낳았으니 / 篤生聖哲
하늘과 사람이 기대하던 바라네 / 天人攸屬
성스러운 아버지를 붙들어 도우시고 / 扶翊聖父
위대하게 백성들의 군주가 되었네 / 誕作民主
몸소 황제의 조정에 가 조견하시어 / 躬朝帝庭
우리 국토를 보전하였네 / 保我邦土
서얼의 화란이 싹틀 때에 / 孼芽之萌
낌새를 밝게 살펴 / 炳幾維明
시원하게 씻어버리니 / 廓爾?掃
종묘와 사직이 편안하게 되었네 / 宗社載寧
공을 세우고도 능히 사양하여 / 功成克讓
적장을 높이시니 / 以尊嫡長
떳떳한 인륜이 이미 바로잡히어 / 彛倫旣正
나라의 기초 세력 더욱 장성하였네 / 基勢益壯
형제의 담안 싸움 만났으나 / ?遭墻?
차마 그에게 죄주지 못하여 / 不忍致?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시고 / ?獲保全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였네 / 友愛彌篤
덕은 높고 / 維德之隆
공은 크니 / 維功之崇
마땅히 상제의 돌봄이 서리어서 / 宜?帝眷
명 주심이 많고 무겁네 / 錫命稠重
밝고 밝은 황제의 고명 / 明明帝誥
빛나고 빛나는 황금의 인장을 / 煌煌金寶
우리의 임금님이 받으시니 / 我龍受之
만대에 이르도록 길이 보존하리라 / 萬世永保
왕업의 발자취는 / ?維王迹
조종이 쌓아 왔으나 / 祖宗攸積
우리의 신성하신 임금을 낳으심은 / 誕我聖神
후의 덕에 연유하였네 / ?繇后德
신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 臣拜稽首
올리는 말씀이 구차한 것 아니니 / 獻辭不苟
만세에 밝게 드리워 / 萬世昭垂
천지와 함께 영원하리라 / 天地永久

 

[주D-001]도산(塗山)의 여자 : 도산은 우임금이 장가를 든 곳으로, 곧 우임금의 비(妃)를 가리킨다. 비가 어진 아들 계(啓)를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주D-002]건문제(建文帝) : 명 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장손으로, 후계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가 그의 숙부인 영락제(永樂帝)에게 쫓겨서 행방불명되었다.
[주D-003]〈대명(大明)〉장 : 무왕(武王)과 그 조상이 나라를 세운 사적을 노래한 것.
[주D-004]〈사제(思齊)〉장 : 문왕과 후비(后妃)들의 덕을 찬미한 노래.

 

 

동문선 제121권   
 
 
 비명(碑銘) 변계량
 
 
묘엄존자 탑명(妙嚴尊者塔銘)
 

우리 태조(太祖) 원년 겨울 10월에, 사(師)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송경(松京)에 왔다. 태조가 이달 11일 탄신날로써 법복(法服)과 기구(器具)를 갖추어, 사(師)를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변지부무애종 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 묘엄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扶無?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에 봉하였다. 그 자리에는 양종(兩宗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ㆍ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오교(五敎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계율종(戒律宗)ㆍ열반종(涅槃宗)ㆍ법성종(法性宗)ㆍ화엄종(華嚴宗)ㆍ법상종(法相宗))의 여러 절의 승려들이 다 있었다. 사가 왕사(王師)의 좌석에 올라 소향(燒香)하고 축복을 마친 뒤에 불자(拂子 먼지털이)를 일으켜 세워 대중(大衆)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세(三世)의 모든 불설(佛說)이 이르지 못하였으며, 역대의 조사(祖師)들이 전도하지 못하였다. 너 대중들이 도리어 알 수 있을까. 만약 심사(心思)와 구설(口舌)로써 계산하고 비교하여 이야기하는 자는 우리 선종(禪宗)에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유교에서는 인(仁)이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말하지만, 그 용(用)은 한가지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를 갓난애기를 보호함과 같이 한다면, 곧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지극히 어진 마음과 크게 자비한 마음으로 나라에 임한다면 자연히 성수(聖壽)는 끝이 없고 자손들은 길이 장성하여,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지금 개국한 처음을 당하여 형법(刑法)에 빠진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시어 모두 용서하셔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인수(仁壽)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국가의 무궁한 복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좋게 여겨 즉시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 그때에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이 시(詩)를 지어 사(師)에게 보내 왔는데,

착하신 임금은 용이 하늘에 날고 / 聖主龍飛天
왕사께서는 부처가 세상에 나오심일세 / 王師佛出世

라고 하였다.
임금이 회암사(檜?寺)의 나옹(懶翁) 스님이 있던 대도량(大道場)에 사(師)를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정축년 가을에 북쪽 벼랑에 수탑(壽塔)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사의 스승 지공(指空)의 부도(浮圖)가 있는 곳이었다. 무인년 가을에 사가 늙었다고 하여 사임하고 돌아가 용문(龍門)에 살고 있었다. 임오년 5월에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께서 또 회암사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또 사임하고 금강산에 들어가더니, 을유년 9월 11일에 입적하였다. 3년 만인 정해년 겨울 12월에 임금이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에게 명하여 사(師)의 유골을 회암(檜?)의 탑에 두게 하였다. 또 4년 뒤의 가을 7월에 시호(諡號)를 무엇무엇이라 했다. 상왕(上王)이 태조의 뜻을 임금에게 말하니, 임금이 신 계량에게 명하여 그 탑을 이름짓고 또 명(銘)을 쓰라고 하였다.
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자 문득 소제(掃除)를 하였으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서는 남이 감히 앞서지 못하였다. 나이 18세가 되어서 벗어 버리듯 티끌세상 밖에 나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법을 물으니, 법의 교시(敎示)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은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圖菴)에 살게 하였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사(師)가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병술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의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참선에만 전심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으며, 임진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妙香山金剛窟)에 머무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보하였다. 간혹 잠을 자게 되면 마치 종이나 경쇠를 쳐서 깨우는 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때에 석연(釋然)히 깨닫는 바 있어서 스승을 찾아 질의하고 싶은 마음이 급급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몸을 빼쳐 연경(燕京)으로 달려가 서천지공(西天指空)에게 참례하여 절하고 일어나 말하기를, “3천 8백 리에 친히 화상(和尙)의 면목을 뵈었습니다.” 하니, 지공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사람을 모두 죽이겠구나.” 하였으니, 이는 허락한다는 뜻이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다음해인 갑오년 정월에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서 나옹(懶翁)에게 참례하니 나옹이 한 번 보고 깊고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령(霧嶺)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서 두 번째로 나옹을 서산영암사(西山靈?寺)에서 뵙고 두어 해를 머물렀다. 그가 선정(禪定)하고 있을 때에는 밥 먹을 때를 당하여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니, 옹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었느냐.” 하니, 사(師)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옹(翁)이 하루는 사와 더불어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 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조주가 말하기를,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느냐.’ 하니, 수좌가 대답이 없었다. 이제 누가 너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적당히 대답하겠느냐.” 하였다. 사가 곧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니, 옹이 문득 그치고 갔다. 그날 밤에 사가 옹의 방에 가니, 옹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에게 속이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하였다. 뒤에 사에게 말하기를,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너와 나는 일가(一家)를 이루었구나.” 하였다. 또, “도(道)가 사람에게 있으면 코끼리에게 상아가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감추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날 네가 어찌 남의 앞에 나서는 인물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사가 그 얻은 바를 이루었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건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참방(參訪)할 뜻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방에 유람하려 하였으나, 그때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서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우리 나라에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옹이 손수 한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여 말하기를, “그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손[客]과 주인의 글귀를 머금기도 하며, 몸이 불조(佛祖)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갑자기 떠난다고 하기에 내가 게(偈)를 지어 송별한다.” 하였다. 그 게송(偈頌)에 말하기를,

이미 주머니 속에 따로 세계가 있음을 믿어서 / 已信囊中別有天
동쪽 서쪽에서 삼현 쓰는 것을 일임하여 둔다 / 東西一任用三玄
누가 너에게 참방한 뜻을 묻는 이가 있거든 / 有人問?參訪意
앞문을 타도하고 다시 말하지 말라 / 打倒面門更莫言

하였다. 사(師)가 이미 돌아오니 나옹(懶翁) 또한 지공(指空)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갖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해년 여름에, 사가 가서 나옹을 뵈오니 불자(拂子)를 그에게 주었다. 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사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옹의 무리 중에 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사가 알고 떠나가니, 옹이 사에게 말하기를,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사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교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그 글귀에 말하기를,

옷깃을 나누매 특별히 상량할 것이 있으니 / 分衿別有商量處
누가 속의 뜻이 다시 현묘함을 알리요 / 誰識其中意更玄
너희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 任?諸人皆不可
내 말은 겁공을 꿰뚫고 통하리라 / 我言透過劫空前

하였다.
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전조(前朝)의 말기에 명리로써 사를 불러 봉하여 왕사를 삼고자 하였으나, 사가 번번이 가지 않더니 마침내 조선 태조 원년인 임신년에, 태조의 지우(知遇)가 있었으니, 사(師)의 거취(去就)가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사(師)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사가 사양하니 태조가 사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하겠는가.” 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사가 항상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 9월에 사가 선사(先師) 지공(指空)ㆍ나옹(懶翁)의 두 탑(塔)의 명칭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왕지(王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개설하였다. 스스로 나옹선사(懶翁先師)의 진영(眞影) 찬(讚)을 지어 말하기를,

지공의 1천 칼과 평산 절의 처림대사의 꾸짖음에 / 指空千劍平山喝
공부로 선택되어 어전에 설법했네 / 選擇功夫對御前
최후의 신령한 빛 사리를 남기시어 / 最後神光遺舍利
삼한의 조실에서 천만년을 전하리라 / 三韓祖室萬年傳

하였다.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 전독(轉讀)의 불사(佛事)를 연복사(演福寺)에 개설하고 사(師)에게 주석(主席)을 명하였으나, 사가 무인년에 사퇴한 뒤로부터는 여러 사람을 대하는 데 게을러져서 비록 임금의 명령일지라도 사양하고 다시 회암사(檜巖寺)로 갔다가, 곧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서 진불암(眞佛菴)에 머물렀다. 을유년 봄에 약간 병이 났으므로 모시는 자가 의약을 드리고자 하니, 사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80세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여름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그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사(師)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어느 때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사(師)의 병이 위독하였다. 중이 묻기를, “ 사대(四大) 가 제각기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하니, 사(師)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물으니, 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까.” 하니, 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이라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일 뿐이니, 어느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사가 두 팔을 서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나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세상을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이 때 화엄종의 중 찬기(贊奇)가 송경의 법왕사(法王寺)에 있었는데, 꿈에 사가 공중(空中)의 불정(佛頂 석가모니 부처의 정수리[頂])의 연화(蓮華) 위에 있는데, 부처와 연화의 크기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꿈을 깨어서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기어 절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꿈 이야기를 하니, 듣는 자들이 그것은 심상한 꿈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부고가 왔는데, 사가 입적한 시간이 바로 그 꿈을 꾼 때였다. 사가 지은 인공음(印空?)은 문정공(文靖公)이 그 첫머리에 서문(序文)을 썼으며, 인간(印刊)하여 이룩한 대장경(大藏經)을 용문사(龍文寺)에 봉안하였는데, 문정공이 그 말미에 발문을 썼다.
사는 성질이 문채나게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며, 스스로 봉양(奉養)하는 것을 매우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베풀어 희사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8만 가지의 행 중에서 젖먹이의 행이 제일이 된다.” 하면서, 모든 행위를 그 젖먹이처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그가 사람을 접대하는데 공손하며, 남을 사랑함이 정성스러움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힘써서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대체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신 계량은 삼가 손을 들어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탑을 자지 홍융(慈智洪融)이라고 명명(命名)하고, 또 이어 명(銘)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사의 도가 우뚝히 높으심이여 / 師道之卓
보통 생각할 바가 아니다 / 匪夷所思
선각의 적통이요 / 禪覺之嫡
태조의 스승이었다 / 祖聖之師
사께서 평상시엔 / 師在平居
아이와 같다가 / ?兒之如
구안한 이를 만나면 / 具眼之遇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듯 버티었다 / 箭鋒相?
옷 한 벌 바리때 한 개로 / 一鉢一衣
겸손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었다 / 謙謙自卑
나라에서 존숭함이 상대가 없었으나 / 尊崇無對
누구가 있는 듯이 삼가하시고 / 若或有之
세상에 나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는데 / 或去或就
그 행동이 구차하지 않았다 / 先不見苟
하늘이 주신 수명은 / 天錫佛壽
79세였으니 / 七旬有九
어디에서 오셨던가 / 來也何從
돋는 해 품에 품고 / 日射懷中
어디로 가셨는가 / 去也何向
연화 위의 하늘이로다 / 蓮華之上
경건한 그의 무리 / 虔虔其徒
행적을 표창할 것을 기획하니 / 圖表厥跡
천지 사이 견고한 것은 / 兩閒之堅
돌보다 오랜 것이 없도다 / 無久惟石
비석에 명을 새겨 / 刻此銘章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垂示罔極

하였다.


[주D-001]사대(四大) : 불가에서 말하는 인체를 구성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4대 원소.
 
 동문선 제121권   
 
 
 비명(碑銘)
 
 
유명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착한 아들과 뛰어난 손자를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록을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매, 우리 태종(太宗)으로써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 되게 하셨다. 아, 장하다. 어찌 사람의 작위(作爲)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하는 일이로구나. 그것은 상(商) 나라의 왕실(王室)에 어진 임금과 착한 임금이 이어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의 왕가(王家)에서 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은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여 보오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벼슬한 휘 한(翰)이 신라에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6대 손인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 만에 태종 임금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서는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가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잘 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잔하게 되니,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다. 공을 쌓고 어진 덕행을 누적(累積)하였음이 그 유래가 장구하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 낳으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특하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슬기로움이 무리에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 20도 못 되어서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정치는 산란하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는 위태로웠다.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의 자격으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의 서울에 조회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 9월에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가 훙(薨)하니, 태종이 제릉(齊陵)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가 서쪽의 행차에서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돌보며 모시었다. 공양왕의 신하가 그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뒤집어 엎을 것을 꾀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 들과 더불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외치고 태조를 추대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로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갑술년 여름에, 명(明) 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조회하게 하라고 명령하니, 태조가 우리의 태종이 경서에 능통하고 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명 나라에 이르러서는 진술하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만족하였으므로, 예를 갖춘 우대를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몸이 편찮았는데 권신(權臣)이 붕당(朋黨)을 모아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가 곧 일어날 것 같으므로 태종이 낌새를 밝게 살펴 제거해 버렸다. 그때에 종친들과 장군과 재상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의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하였다. 박포만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의 벌에 처하였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공정(恭靖)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일이 다 우리의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比等)하였다.
임오년에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니, 황제가 충성을 칭찬하였다.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서 전대로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袞冕) 9장(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ㆍ서적을 주었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내리어서 각각 차등이 있게 하였다. 그때부터 뒤에는 황제의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하여 쉬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가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의 조하(朝賀)에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국왕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번번히 ‘지성이라.’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태종이 애모함을 그지없이 하였다. 양암(諒闇 임금이 거상(居喪)할 때에 있는 방)에 거처하면서 초상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매우 슬퍼하고 정사 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예부 낭중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서서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추증하였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은 자가 상언(上言)한 것이 있었다고 하여 담당 관사(官司)에게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본래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는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 달콤한 이슬)가 함흥부 월광구미리(咸興府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다음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의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어 진하(進賀)하였으나 임금이 받지 아니하였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제(?)가 패덕(敗德)하다고 해서 세자의 직위를 해제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함이 없어서 국민들이 촉망(囑望)한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중국 조정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하였다.
이해 8월에 임금이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령을 주청(奏請)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부왕(父王)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號)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으로 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과 찬성(贊成) 신 이종무(李從茂) 등을 명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상왕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다. 칙서(勅書)의 사연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며,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는데, 칙서는 대략 이러하다. “부왕이 돈후하고 노성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였으며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었다.” 하였다.
9월에 공정(恭靖)이 죽자, 전하가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역월의 복제[易月之制]를 마쳤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를 알리었더니, 다음해 4월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아니하였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하여 몸을 훼상(毁傷)함이 예(禮)에 지나친다고 하여 거상 기간을 날을 달로 계산하는 역월의 복제를 좇기를 명하였으나 전하가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장사 뒤에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服制)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임오일에 태후(太后)를 광주(廣州) 수읍(首邑)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陵)을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신축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太宗)에게 품의(?議)하고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지 않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으며,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함은 종묘와 사직을 바로잡았다. 사대하는 일은 천자가 그의 지성을 칭찬하였으며,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의 도(道) 있음에 심복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제하였다. 덕과 예(禮)를 우선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을 물리치고, 음사(淫事)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였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하였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없애버리니, 모든 사적(事績)은 다 빛이 났다.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산물은 풍성하였다. 제왕의 도가 아, 성대하도다. 그가 상제(上帝)의 사랑을 얻음이 융숭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감로(甘露)를 내리는 상제의 상서를 얻었던 것이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다음달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훙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 들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년을 거상(居喪)할 것을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아니하였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왕위에 있은 것이 19년이었다. 한가롭게 살며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크고 작은 신료들과 아래로 하인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목이 쉬도록 호곡(號哭)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오랠수록 더욱더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6일 경자(庚子)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하였다. 유언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부고(訃告)가 가니, 황제가 슬퍼하여 정사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특별히 예부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 와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돈후하고 지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하여 공경히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서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부음이 멀리 들려오니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낍니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하였다. 또 전하께서 부의(賻儀)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리었다. 대체로 우리 태종(太宗)의 공덕이 성대함과 전하의 효성이 지극함이 앞뒤에서 서로 받들어서 천심을 잘 누렸기 때문에 마지막과 시초의 즈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하게 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姓)은 민씨(閔氏)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障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 만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을 낳고,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 복(?)을 낳았으며,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황비(皇?)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딸이다. 선을 쌓음으로써 흘러나오는 경사가 맑고 덕 있는 이를 낳게 되었으니, 총명하고 지혜스러움이 남에게 뛰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매 배필을 가려서 우리 태종에게 시집왔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건지려는 뜻이 있어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나, 태후는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가정의 공궤(供饋)에는 삼가하여 그의 공부를 힘쓰게 하였으며,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법을 따르게 하였다. 첩(妾)과 시녀들을 예(禮)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하여졌다. 무인년에 태종이 사직을 정할 즈음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큰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하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여 정비(靜妃)로 봉하였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명 나라의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황제의 하사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나 되었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의 호(號)를 올리었고, 경자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차분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경건한 덕을 타고났으며 태종을 잘 도와서 내치(內治)에 전심하였다. 20년 동안 궁궐 안에서의 용의(容儀)는 엄숙하고도 화목하였으며, 또 착한 아들을 낳아서 종사(宗社)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흥하자 빈(嬪)과 시녀와 첩들이 마음껏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婦)가 모(母)의 거동을 본받음이 지극하였도다. 4남 4녀를 낳았으니,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제(?)이며, 다음은 이름을 보(補)이니 효녕대군(孝寧大君)으로 봉하였다. 그 다음은 종(種)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였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하였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혜옹주(貞惠翁主)로서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이름을 인(?)이라고 하며 공녕군(恭寧君)으로 봉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큰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숙정옹주(淑貞翁主)이니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비(緋)인데 경녕군(敬寧君)으로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인 온(溫)의 딸이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첫째는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효녕(孝寧)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前判中軍都摠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성녕(誠寧)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에게 시집갔다. 물론 같은 이씨가 아니다. 정경공주(貞慶公主)가 딸 넷을 낳았으니, 첫째는 돈녕 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中淹)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이름을 담(聃)이라고 하며 한성 소윤(漢城小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경녕(敬寧)이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공녕(恭寧)이 병조 참의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신은 적이 살펴보니, 우리 태종(太宗)의 큰 덕과 높은 공이 본래 이미 모든 임금들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나, 배필의 어지심과 내조의 공도 또 촉도 신지(蜀塗莘摯)와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고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 있다. 모든 신하들이 모두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겨 길이 뒷 세상에 밝혀 보이고자 하여, 전하가 신(臣) 계량에게 명하였다. 신 계량은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손으로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 / 天眷海東
우리 태종을 내려주셨네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쓰는 태종이여 / ??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스러운 아버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조근하여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하였네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 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적계 형을 높여 세자되게 하였네 / 嫡長是尊
형제간의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墻
우애가 오히려 두터웁네 / 友愛猶惇
효제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도 드물었네 / 從古罕聞
그 덕은 후하고 / 維德之厚
그 공은 성대하니 / 惟功之懋
하늘이 매우 밝게 살펴 / 天鑑孔昭
거듭하여 보우하시네 / 式申保佑
휘황한 금보가 / 煌煌金寶
전후에 빛나고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이 잇달아 도착하매 / 帝誥?臻
내 드디어 왕위를 받았네 / 我乃龍受
할아버지 훈계를 지켜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아름답게 문채나네 / 煥乎郁郁
상중에 여막살며 / 遭喪居盧
애모함이 망극하여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사대하니 / 抵事朝廷
황제가 지성이라 칭찬하였네 / 帝稱至誠
경건하게 승사하니 / 肅肅承祀
신명이 감응하고 / 感于神明
교린에 도 있으니 / 交隣有道
왜국이 복종하며 / 倭邦來庭
왕씨 후예 돌보아 / 存?王裔
편안히 살게 하였네 / ?遂其生
안팎이 태평하기 / 中外又安
20년이 되어가니 / 垂二十齡
윤택한 감로가 / ??甘露
해마다 함부에 내리었네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湜) 폐하시고 덕 있는 이에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길이 천수를 누리며 / 期享永年
이 땅에 군림하시기를 기약하였는데 / 父臨下土
그 어찌 빈천을 재촉하여 / 何促賓天
병이 낫지 않는가 / 一疾莫愈
슬프다, 착하신 아들 / 哀哀聖子
슬퍼함이 가이없어 / 痛悼無比
3일 동안 철선하고 / 徹膳三日
상심을 못이기며 / 不勝?毁
거상 중의 모든 절차를 / 凡百喪事
예대로 지키었네 / 維禮之履
황제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자 보내 사제하고 / 遣使以祀
높이는 시호 주며 / 贈謚褒崇
후한 부의 내리시니 / 賜賻優隆
조문의 예를 완비함에 / 恤典之備
신하들 기뻐하네 / 喜溢臣工
신의 태후 생각 같아 / 思齊太后
진실로 화순하네 / 允也肅?
가만히 도와 사직을 안정시켜 / 密贊定社
큰 총명에 배필하고 / 克配亶聰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제주 되게 했네 / ?主宗祐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 乾健?明
공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하고 바르심은 / 坤厚柔貞
원경의 법칙이네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슬 같은 벗이요 / 琴瑟以友
죽어서도 같이 장사하였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아, 기린 같도다 / 于嗟其麟
종묘 제사 / ??宗祀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글을 올리오니 / 臣拜獻詞
옥 같은 굳은 돌에 이 사연 새기어서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 없이 / 萬代不磨
우리 나라 빛나게 하리라 / 昭我東垠

하였다.

 동문선 제124권   
 
 
 묘지(墓誌) 이제현
 
 
대원 제봉 요양현군 고려 삼한국대부인 이씨 묘지명(大元制封遼陽縣君高麗三韓國大夫人李氏墓誌銘) 병서(幷序) 
 

대부인(大夫人)의 성은 이(李)씨이니 흥례부(興禮府)가 본향이다. 증조부의 휘는 순광(淳匡)이니 사재주부(司宰注簿)이며, 조부의 휘는 우(祐)이며 부친의 휘는 춘년(椿年)이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15세가 지나 한산 이씨 정읍 감무(韓山李氏井邑監務) 휘 자성(自成)에게 시집가니 두 집이 원래부터 다른 성씨이요,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3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배(培)요,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은 곡(穀)이다. 딸은 장씨(張氏)에게 출가했는데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정읍부군(井邑府君)이 죽은 다음 40년간 과부로 절개를 지켰다.
자질이 영리 민첩하고 자상하면서도 엄하여, 두 아들의 과거 공부를 힘써서 모두 출세하도록 하였다. 배(培)는 벼슬이 사복서 승(司僕署丞)이요, 곡은 국가시험 수재과(秀才科)에 오르고 또 황조 제과(皇朝制科)에 올랐으며, 지금 봉의대부(奉議大夫)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낭중(郞中)이 되었고, 또 국상(國相)이 되었으며 한산군(韓山君)에 봉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정읍부군을 비서감 승(?書監丞)으로 증직하고, 대부인은 현군(縣君)에 봉작하였으며, 나라에서는 명하여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니 당세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나이 83세로 지정(至正) 10년(충정왕 2년) 10월 임인일에 세상을 마쳤는데, 그해 12월 병신일에 한산(韓山) 둔덕에 장사지내었다.
명문에 이르기를,

몸가짐 절개 있고 / 持身有節
자식 교육 법도 있으니 / 訓子有則
선비로도 어려운 일 / 士也其難
어머니로서 능히 했네 / 惟母時克
몸이 높은 영화 누렸으니 / 身享尊榮
□이름을 이루었기 때문이네 / 由口名遂
유허(幽墟)에 글을 새겨 / 刻文幽墟
길이 후세에 보이노라 / 于求厥?

하였다.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유원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고려국 단성좌리공신 삼중대광 흥안부원군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시 문충공 초은선생 이공 묘지명 병서 (有元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高麗國端誠佐理功臣三重大匡興安府院君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諡文忠公樵隱先生李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원 나라가 일어난 지 백여 년이 되었으나 진사로서 벼슬이 재상에 이른 자는 아주 드물었고, 고려의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한 이는 한 사람이고, 벼슬을 거듭하여 대부에 이른 이는 오직 초은 선생(樵隱先生)과 우리 부자(父子)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벼슬이 다 동성 낭중(東省郞中)에 그쳤고, 왕의 수레가 북쪽으로 파천한 지 7년이 되었는데,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한 것이 또 6년이 되었다. 내가 처음 병에 걸렸을 때에, 증세가 매우 급하였는데, 선생이 내 집 문을 지나다가 찾으시고 슬피 울고 오래 있다가 가셨다. 그리고 두어 달 만에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니, 나는 지금까지도 이를 슬퍼한다.
선생의 장손(長孫) 밀직대원 존성(存性)이 와서 말하기를, “선생은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문필을 가지고 의논하기를 가장 오래한 분이었으니, 우리 할아버지를 아는 분은 이 세상에서 공 만한 분이 없을 것입니다. 공은 마땅히 우리 할아버지의 묘에 명(銘)하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죽고 사는 것은 타고난 명이 있는 것이나, 나의 죽음이 선생보다 앞섰거나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나도 잇달아 죽었다면 역시 그만이었겠는데, 지금은 나의 병도 조금 낳았는데, 선생의 묘에 명이 안 되어 있다면 내가 어찌 사양하랴.” 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李)씨이요, 이름은 인복(仁復)이며, 자는 극례(克禮)인데, 경산부(京山府)가 본향이다. 증조의 이름은 장경(長庚)인데, 공검하고 위엄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다들 엄하다고 두려워하였으며, 비록 벼슬아치로 다닌 자들도 혹 어떤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 이공이 이를 듣는다면 그 뜻이 옳지 못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고, 또 그들이 참으로 허물이 있을 때에는 공이 반드시 글을 보내어 꾸짖어 주었다. 늙은 뒤에 집에 있을 때에도 고을 관원들이 그가 지나가는 벽제성이 들리면, 반드시 상(床)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가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할 때를 기다려서 일어나 앉았다는 것이다.
아들 4명이 있었는데, 백년(百年)은 모관(某官)을 지나고 천년(千年)은 모관(某官)을 지났으며, 요양성(遼陽城) 참지정사(參知政事) 승경(承慶)을 낳아서 손자의 영귀(榮貴)로 모관에 증직되었고, 셋째 아들 만년(萬年)은 모관을 지나고, 끝에 아들은 조년(兆年)인데, 이 분이 곧 선생이 조부로 벼슬은 정당문학이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선생이 평소에 한가로이 있으면서 말할 때마다 그의 증조부 호장공(戶長公)이 대단한 분이라고 칭송하였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부는 악한 것이면 원수같이 미워하셨고, 남의 급한 일에는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달려가 구하셨으니, 나는 일생을 두고 이를 사모하고 배우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문열공은 아직 어른이 되기 전에 풍신(風神)과 정채(精彩)가 준수하고 영발하여 초계(草溪) 정윤의(鄭允宜)가 그 고을에 부사로 왔다가 한 번 보고 범인과 다름을 알고서 그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임명되니, 이름이 나날이 무거워 갔으며, 충혜왕(忠惠王)을 섬겨 엄한 것으로 임금에게 두려움을 받아 매양 공이 들어갈 때 마다 임금이 신발 소리만 듣고서도, “이조년이 오나보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용모를 정제하고 기다렸다 한다.
기묘년 사변[己卯之變 심왕 고(瀋王暠)의 사건을 말함]에 문열공은 임금을 따라 원 나라 서울로 가서 이익재(李益齋)에게 청하여 대신 글을 써 가지고 장차 승상부에 올리려 하였더니, 마침 승상 백안(伯顔)이 실각하였으므로 그 글도 올리지 못하였으나, 이 사실을 듣는 이는 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 이르기를, “담(膽)이 몸보다도 더 크다 함은 이공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그 후 본국에 돌아와서 공신록(功臣錄)에 오르게 되자 마땅히 추밀(樞密)의 관직이 돌아갔어야 할 것인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모는 나이는 늙었으나 뜻이 아름답다.” 하고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동쪽 언덕에서 참새 잡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공이 곧장 앞으로 들어가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벌써 명이(明夷) 의 시절의 일을 잊으셨나이까. 소인이 무리와 친압하여 극히 하찮은 놀이나 즐기시는 것이 종묘를 받드는 도리가 아니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절실하였다. 임금이 속으로는 크게 성이 났으나 그 뜻을 밖으로 감히 내지 못하고 부드러운 말로 치사하고 보냈다. 공이 집에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임금의 나이 바야흐로 강장한데다가 하고자 하는 바를 기탄없이 하고 있고, 나도 이미 늙어 또한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지금 물러가지 아니하면 반드시 화가 돌아올 것이요. 또 자주 간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견책이 돌아가는 곳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미 그 아름다운 일을 받들어 드릴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의 잘못만을 더하게 될 것이니, 이는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바가 못 된다. 떠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음날 필마단동(匹馬單童)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몸이 마치도록 벼슬길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선생의 아버지의 이름은 포(褒)인데, 순박하고 돈후한 군자로 성재(省宰)의 지위에 이르고 매사에 순서를 좇고 예법을 따랐다. 아들 5명을 두었는데, 맏아들이 곧 선생이고, 다음이 지금 시중(侍中) 벼슬에 있는 인임(仁任)이며, 그 다음은 아무인데 병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그 다음은 아무 아무인데 다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다. 선생의 우애의 정은 천성에서 우러나왔고, 여러 아우들도 선생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였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건장하였으며 점점 자라면서 글을 읽으려고 할 줄 알았으며, 행동거지가 노성한 사람과 같은지라, 문열공이 매양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우리의 문호를 크게 빛낼 자는 너의 백중(伯仲) 형제일 것이다.” 하였으니, 형은 선생이고 아우는 시중공(侍中公)을 말한 것이다. 태정(泰定) 병인년에 선생의 나이 19세에 판서 신천(辛?)이 감시(監試)를 보이고, 길창군(吉昌君) 권준공(權準公)과 밀직 박원공(朴遠公)이 지공거로 있었는데, 선생이 일거에 연달아 급제하여 다음해 3월에 복주 사록(福州司錄)에 선발되었고, 기사년에 교감 전교를 거쳐 다음해에는 또 전의 직장에 전직되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문장을 하는 데는 정밀히 연구하고 널리 공부하지 아니하면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붓을 잡을 때는 지극히 고심하여 가다듬었다. 그 득의(得意)한 데 이르러서 사람들에게 보이면 그 말과 뜻이 엄중하고도 심오하여 일세에 우뚝하였으며, 사물을 서술하거나 음영하는 데는 왕왕 풍자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원(至元) 무인년에 이르러 사관(史官)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직장(李直長)의 문학이 높고 세속에 붙 쫓지 아니하니, 어찌 사관에 추천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예문 수찬에 제수되었고, 기묘년에 춘추 공봉에 승진되었으며, 경진년에 첨의주서에 옮겼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승봉랑 감찰 규정에 승진되어 5월에는 좌정언 지제교에 임명되었으며, 조금 뒤에는 통직랑 전의시승 지제교에 올랐다. 그 해 가을에 정동향시(征東鄕試)에 가서 제 2위로 합격하였고, 겨울에는 기거 사인(起居舍人)으로 전직하였다. 임오년에 원 나라 서울에서 실시하는 회시(會試)에 응시, 이에 선발 급제하여 장사랑 대령로 금주판관(將仕郞大寧路錦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원 나라 서울에 있을 때에 본국에서는 우헌납(右獻納)에로 옮겼으며, 계미년에 다시 기거랑 기거주(起居郞起居注)로 옮겼다.
갑신년에 명릉(明陵 충목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유신(儒臣)들을 예로써 부르고, 또 이르기를, “이모(李某)가 원 나라 과거에 급제한 것이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이를 발탁하지 아니하면 나의 문학을 숭상하는 본의이랴.” 하고 전리 총랑ㆍ사복정ㆍ좌사의 대부 등 세 번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모두 관직과 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게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인복을 대접한 것이 아직도 다하지 못하였다.” 하고 그의 본 관직에다가 밀직사 우부대언을 더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서 군부(判書軍簿)가 되었으며, 또 다음해에는 전리(典理)로 옮겼다. 이해 10월에 이르러 임금이 또 이르기를, “이모(李某)를 지금부터는 크게 써야 하겠다.” 하고, 밀직제학에 승진 임명하고, 또 선생에게 서연(書筵)에 나와 강의할 것을 명하였는데, 선생의 용모가 엄숙하고 말이 간략하면서 입이 무거우므로, 충목왕이 매양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숙연하여진다.” 하였다.
이 해에 나의 선군(先君) 가정공(稼亭公)이 건의하여서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등 세 임금의 실록을 편수하기로 하여, 시중 이익재(李益齋)와 찬성 안근재(安謹齋)가 해 수(數)를 나누어서 집필하게 되었는데, 공도 또한 이에 참여하였다. 다음해 봄에 밀직부사에 오르고, 그 해 가을에 다시 지사(知司)에 올랐으며 겨울에 또 좌사(左使)에 올랐다. 기축년에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에 제수됨으로써 본국의 벼슬은 파면되었다.
신묘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오르고, 임진년 가을에 이르러 조일신(趙日新)이 여러 불평분자의 무리들을 모아서 한밤중에 기황후(奇皇后)의 형인 기원(奇轅)을 죽이고, 또 왕궁으로 들어와서 숙위하고 있는 근신들을 죽이고서 스스로 정승이 되어 내외 호령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불안과 공포에 싸여 모두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가만히 선생을 불러서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감히 이러한 난동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고유한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 나라 조정이 당당히 있고 그 법령이 밝게 서 있사온데, 만약 이를 유예한다면 신은 그 허물이 아마도 전하께 까지 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자, 임금은 드디어 조일신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일이 진정되고 나서 선생에게 명하여 이에 대한 글을 지어 원 나라에 보고하게 하였던 것이니, 임금이 본래 공을 중하게 여겨서 장차 크게 쓰려 하던 차에 이러한 대답을 듣고서는 더욱 소중히 대하였다.
계사년에 다시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 판사 재사(判司宰事)가 되고, 가을에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에 승진되었으며, 다음해에는 감찰대부를 겸임하였다. 을미년 봄에 선생이 정부의 관직에서 사퇴하니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였고, 가을에 다시 정당문학으로 돌아갔으며, 겨울에는 정동성 원외랑(征東省員外郞)에 제수되어 또 감찰 대부를 겸하였으며, 병신년에 관제(官制)가 새로 시행됨에 따라 금자대부(金紫大夫)의 직첩을 받고, 여전히 정당문학 보문각 태학사 동수국사 판한림원사(政堂文學寶文閣太學士同修國史判翰林院事)의 직책을 띠고, 또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겸임하였다.
그때 원 나라에서 특사(特赦)를 반포하기 위하여 온 사사(赦使)가 돌아가게 되자, 우리나라에서 마땅히 표문을 올려 은혜에 사례하여야 될 터인데, 사절로 보낼 사람의 인선을 어려워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재상들 중에서 대체를 알고 절의를 지킬 이를 구한다면 이 모와 같은 사람이 없다.” 하고, 드디어 사절의 일을 명하니, 선생은 조금도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며, 갔다 돌아오자 또한 사명을 능히 완수하였던 것이다. 정유년에 감수국사(監修國史)와 지공거가 되어, 지금의 정당문학 염흥방(廉興邦) 등 33명을 선발하니, 당시의 공론이 많은 선비를 얻었다고 일컬었고, 기해년에 상서좌복야로 고쳐 임명되어 어사대부를 겸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게도 아무 재능 없는 사람으로 대관(臺官)의 일을 섭행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일찍이 기강을 진작한 바 없었으니, 스스로 생각하건대 세세한 일은 위에 번거롭게 주달할 것이 못 되고, 큰일은 또 정부가 있으니 중간에서 흔들고 간섭할 것이 못 되므로, 나는 한 가지의 일도 말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대관직에 들어가면서부터 백관의 강기가 숙연하였으니, 선생의 겸손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경자년에 참지 중서정사에 임명되었고, 신축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해 겨울에 홍건적이 국경을 침입하여 국가가 남쪽으로 옮겨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기로 하였다. 선생이 지금의 시중공(侍中公)과 같이 충주 행궁(忠州行宮)으로 임금을 맞아 뵈니, 임금은 몹시 기뻐하고 따라서 같이 가기를 명하였다. 다음해 2월에 우리 군사가 크게 집결하여 서울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큰 병란을 치른 뒤인지라 모든 일에 마땅히 적응한 조치가 있어야 하겠으므로, 임금이 선생으로써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았다. 그리고 바로 첨의평리가 되었으며, 겨울에는 중대광 삼사좌사(重大匡三司左使)에 올랐다. 계묘년 봄에도 도첨의찬성사에 임명되고, 여름에는 우문관 대제학감 춘추관사에 오르고, 또 단성좌리(端誠佐理)의 공신호를 받았다. 갑진년에 흥안군(興安君)에 봉하고, 판예문관 춘추관사가 되었으며, 그 해 겨울에 삼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판판도사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올랐다.
패라첩목아(?剌帖木兒)가 군병을 인솔하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승상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대신하여 앉으니, 원 나라에 들어가서 그 사실을 황제에게 주달하여야 할 터인데 그의 인선이 곤란하였다. 공민왕이 또 이르기를, “이아무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 선생이 들어가서 승상을 면대하여 보는데, 언사가 간단명료하고 용모가 단정 엄중하자 승상이 여러 번 주목하였고, 선생이 물러나가자 시종하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앞에 나와서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임금이 천자에게 막속(幕屬)으로 천거하고, 또 선생을 좌우사(左右司)의 장(長)으로 삼으니 드디어 봉의대부(奉議大夫)에 진급하였다.
을사년에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하고, 바로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윤 10월에 내가 선생과 같이 공원(貢院)에 있었는데, 선생에게 봉군(封君)하는 명이 또 내렸으며, 지금의 전교시승으로 있는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선발하였으며, 기유년에는 선생이 지공거가 되고 내가 부지공거가 되어, 지금 좌헌납(左獻納)으로 있는 유백유(柳伯濡) 등 33명을 뽑았다. 경술년에 검교 시중이 되고 신해년에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가 되었는데, 관계와 작위가 옛 과 다름이 없었다.
갑인년 선생의 나이 67세였다. 3월에 등에 종기가 생기니, 선생은 스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옷을 갖추어 입고 북향하여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사퇴ㆍ하직하는 형상을 짓고, 시중공(侍中公)에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죽으면 관에서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평일에 실오라기나 털끝만한 도움도 국가에 드린 바 없었으니, 이대로 죽는 것만도 부끄러움이 있다. 공은 나를 위하여 잘 말하여 그런 은전을 내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원복(元服)을 몸에 더 입고서 조용히 돌아갔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애도하여 소찬을 행하고, 조회를 정지하고는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를 드리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서거한 지 3일 만에 도성 남쪽 속촌(粟村)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선생의 평일의 유명이었다. 다음해에 충정왕묘(忠定王廟)에 배향하였다.
증조부에게 벼슬을 증직(贈職)하였고, 조부 관함을 갖추어 씀 는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으며, 공민왕 21년에 공로를 평론하여 성산후(星山侯)에 추증하고, 충혜왕묘(忠惠王廟)에 배식(配食)하였고, 고(考) 관함을 갖추어 씀 의 시호는 경원(敬元)이요, 증조모 모(某)씨는 모 군부인(某君夫人)에 봉하였고, 조모 정(鄭)씨도 모군 부인에 봉하였으며, 모친 설(薛)씨는 성균관 대사성 문우(文遇)의 딸로 모 군부인에 봉하였다.
선생은 모두 세 번 장가들어 아들 2명을 낳았다. 첫째 부인은 판사 강거정(姜居正)의 딸로서 아들 향(向)을 낳았는데 벼슬은 낭장이며, 강씨가 죽고 계실 이(李)씨를 맞으니, 모관 아무의 딸로 아들 용(容)을 낳았는데 벼슬이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夫夫典法摠郞)이었는데, 두 아들이 다 선생보다 먼저 죽었다. 또 하(河)씨에게 장가드니 모관 아무의 딸로서 아들이 없었다. 손자 한 사람은 낭장이 낳았는데 벼슬은 대언(代言)이요, 증손녀 두 사람이 있었다. 대언이 먼저 모관(某官) 윤모(尹某)의 딸에게 장가들었더니, 딸만 낳고 죽었으므로 지금 다시 판개성부사 성림공(成林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내가 이미 선생의 뒤를 따랐으므로 일찍이 보니, 선생은 남의 착한 일을 들으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기뻐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을 보면 반드시 얼굴에 노기를 띄었으나, 입 밖에 내어 그 잘못을 말하는 법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은 입이 둔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 성품이 편벽되고 조급하여 혹시 말하다가 실수할까 두려워서 인(認)으로 몸가짐을 삼았는데, 지금 늙었으나 아직도 마음이 움직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이것은 나의 수양이 아직도 다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아, 선생의 학문의 정밀함과 몸가짐의 돈독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타고난 기질을 변화시켰으니, 그 행사에 앞서 삼가고 살핌을 다른 사람이 미처 따르지 못한 것은 의당한 일이로다. 이로 명(銘)하려 한다. 명하기를,

성산의 영화로서 / 星山之英
천자 뜰에 과거하니 / 入貢天庭
동해에 빛이 흘러 / 流光東海
문성이 찬란하다 / 有爛文星
행실을 극히 삼가고 / 有行斯愼
말을 어려워하니 / 有言斯認
오직 옛날의 인재요 / 惟古之才
금세의 준걸이었다 / 惟今之儁
오직 어려운 때를 만나거나 / 惟時之艱
어려운 사명이 있을 때면 / 惟使之難
공의 몸이 비록 파리하여도 / 公躬雖?
공은 반드시 관문을 나갔다네 / 公必出關
황친을 죽이고 황명을 거역함은 / 誅親拒命
모두 왕정을 범한 것이라 / 悉干王政
만인의 눈이 두려워하였으나 / 萬目瞿瞿
공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네 / 公不少病
공이 서쪽에서 돌아올 때 / 公歸自西
횐 말 타고 오시니 / 有馬之斯
집집마다 서로 경축하였네 / 室家相慶
우리 공이 돌아오셨다고 / 我公歸兮
우리 나라가 / 惟是我國
뼈만 남았더니 공이 와서 살을 붙였네 / 如骨而肉
우리 공이 안 오셨다면 / 匪我公歸
우리 추위 뉘라서 데워 줄까 / 子寒誰?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은 / 人言我公
문장의 정종이라 일컬었다 / 文章之宗
오직 나라뿐이요 한 몸과 집을 잊었으며 / 國而忘家
전대에 또한 능하였다 / 專對是工
열렬한 그 행실 / 烈烈行實
태묘에 배향하셨네 / 升配大室
뒤를 열어 상서 내리니 / 迪后降祥
자손이 길하고 창성하리라 / 子孫其吉
속촌의 양지와 / 粟村之陽
선산의 산마루에 / 星山之岡
영혼은 가지 않는 곳이 없으리니 / 魂無不之
조손이 서로 바라보리 / 祖孫相望
아, 흥안부원군이여 / 嗚呼興安
길이길이 잊지 못하리로다 / 求世不忘

하였다.


[주D-001]명이(明夷) : 원래는 《주역》의 괘(赴) 이름이다. 착한 사람이 뜻을 얻지 못하고 참소를 만나 고난 한 형편에 있음을 말하는 것.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완산(完山) 최씨(崔氏)의 보계(譜系)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 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그가 숭(崇)을 낳았는데 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고, 공부(工部)가 전(佺)을 낳았는데,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벼슬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 치사(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충렬ㆍ충선ㆍ충숙 등 세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그 중에서도 충선왕이 더욱 그를 나라의 그릇으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에게서 오는 것이 많았는데, 득평이 대직(臺職)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으며,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고,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풍의(風儀)를 두려워하였고, 전토를 측량하여 세액을 조정할 때에는 재상(宰相) 채홍철(蔡洪哲)을 도와서 전라도 각 주현(州縣)의 전토를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가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승지 세자원빈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직되었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시(內侍)로 들어갔고,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별장으로 전직되었다. 천력(天歷) 경오년에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공과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공이 같이 고시(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에 단양 부주부(丹陽府注簿)로 임명되었고, 또 4년 후에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어 승봉랑(丞奉郞)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충숙왕이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할 때에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을 가벼이 쓸 수는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제수하니 공은 사양하다 못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직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高)씨의 난이 일어나자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려 하여, 도감을 설립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자, 공은 매우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니, 상부(相府)에서 자못 독족 하고 또 협박도 하므로 공이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서 그 판사(判事)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하던가. 임금의 악한 일이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 좌우에 있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그 악을 맞아 들여서 하도록 한 것인데, 먼저는 맞아들여 하도록 해놓고, 뒤에 다시 그 일을 들추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니,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처음 정사에서 공에게 전법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지흥주(知興州)가 되어 나갔는데, 모든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적(田籍)이 오래되고 해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이것을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과 서로 대질ㆍ교정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평소에 공을 꺼렸으므로 벼슬을 갈아버렸는데, 정해년에 정승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를 정리하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이른즉 두 정승은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난 곳이니, 최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즈음에, 두 정승이 또 말하기를, “최모가 지난번 지평직에 있을 때에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풍헌(風憲)직에 머물어 재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공의 외씨(外氏)인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아의 대부로 있었으므로, 법제상 서로 피하게 되어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임되었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 부령(典客副令)ㆍ자섬 사사(資贍司使)가 되어, 안팎의 비용과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겸하여 다스려서, 그것에서 남는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니, 전에 있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나갔더니,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는 것을 받들고 온 사자(使者)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니, 대관의 강기가 다시 떨쳤으나 1년 만에 파직하고 말았다.
신묘년에 현능(玄陵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臺臣)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고, 다음 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 갔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갑오년에 다시 불러서 전법 총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는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약조를 지키더니,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마음 아파하였고, 그가 시설한 바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불렀는데, 그때 군사 선발을 토지에 의해 한 것은 그 법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공에게 명하여 도감사(都監使)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법을 보면 한 사람이 전토를 받으면, 그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게 되며 그 받은 자가 죄가 있어야만 그 전토를 회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게 되어 번잡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에 마땅히 받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주고 그치도록 하니, 송사도 조금 간단하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尙書右丞)에 임명되고, 정유년에는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判大府寺事)에 승진되니,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으나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근실하여, 한 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공민왕이 이르기를, “판대부(判大府)로서 그 직책을 다한 이는 최모 뿐이다.” 하였다. 기해년에 공주목(公州牧)으로 나가니, 그의 행정과 백성들의 사모함이 앞서 복주목(福州牧)에 있을 때와 같았다. 신축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 해 겨울에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 가고, 다음해 봄에 임금이 상주로 거둥하니, 모든 수요와 공급과 설비의 판출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에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로서 본경(本京 개성)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니, 공민왕이 인견하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고, 그 해 겨울에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다음해에 전리 판서로 옮기고, 또 다음해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으며, 기유년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됨으로써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제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이 궐원이 되자 공민왕이 이르기를, “안동의 원은 내가 이미 그 적임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혹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함이었다.
갑인년 봄에 나이 많음으로써 사퇴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의 승하하니 공은 곡반(哭班)에 나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계급을 대광계(大匡階)로 올렸다. 다음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江陵)에 있는 밀직 최안소(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으니, 이는 대개 이 세상에서의 최후 결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겼는데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이인(異人)이 날더러 말하기를, ‘오년(午年)에 이르면 죽는다.’고 하더라 금년이 무오년(戊午年)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그가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감방(坎方)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평일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사물에 달관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辛)씨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 치사(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 천(?)의 딸이요,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朴)씨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윤류(允?)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이요, 박씨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이며,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繕工寺丞)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에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판서의 자녀가 5명인데,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서 지금 전라도 안렴사이고, 다음은 원(原)이니 중랑장이며, 그 다음은 각(慤)이니 별장이요, 딸은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며,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은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며,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며,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 惟公之直
또 공은 맑았다 / 惟公之淸
오직 공은 덕이 있었으며 / 惟公之德
또 공은 이름이 높았다 / 惟公之名
그 이름과 그 덕은 / 惟名惟德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 惟世之則
어찌 크게 쓰여져 / 胡不大用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 正我王國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 旣相我王
묘당에서 주선하였고 / 周旋廟堂
76세의 고령으로 / 年七十六
아직도 강강하였건만 / 尙爾康强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 公退則決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 允矣明哲
아, 최공이여 / 嗚呼崔公
온 세상이 그 풍모를 흠모하리로다 / 世歆其風

하였다.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한문경공 묘지명 병서 (韓文敬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내 나이 16ㆍ7세에 시승(詩僧)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여, 한 번은 묘련사(妙蓮寺)에 이르러서 선비와 중들이 섞여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연구(聯句)의 시를 지었는데, 그때에 문경공(文敬公)이 아직 12ㆍ3세의 동자로서 매양 척척 대구(對句)가 되는 연구시를 불러서 좌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으며, 비록 문묵(文墨)에 늙은 자라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감히 같은 서열에 낄 생각을 못하므로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보통 사람과는 달리 알고 있었다.
정해년에 나의 선군(先君)이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이 과연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였으니, 그때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낙제한 자들도 그의 재주에 굴복하여 이르기를, “한생(韓生)은 요행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벌에 의한 음직(蔭職)으로 두 번이나 진전직(眞殿直)과 별장이 되었기 때문에 벼슬을 구하지 않고, 고서(古書)의 토론을 좋아하였고 또 익재선생(益齋先生)에게 가서 《좌전(左傳)》과 《사기(史記)》ㆍ《한서(漢書)》 등을 읽었으며, 글씨 쓰기를 익혀서 진서(眞書)와 초서(草書)가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었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고 공을 덕녕부 주부(德寧府注簿)에 보직하고, 정방(政房)에 불러다 두고서 비도적(秘?赤)으로 삼았다. 신묘년에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도로 가서 공이 따라가 있었는데, 공민왕이 불러서 돌아왔으나 즉시 쓰지 않았다. 계사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전의 주부(典儀注簿)에 제수되고 또 비도적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전리좌랑 지제교가 되고, 또 다음해에 두 번 계급을 올려서 통직랑 성균직강 봉선대부 성균사예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예문응교를 겸임하게 하였다. 병신년에 관제(官制)를 고쳐서 중산대부 비서소감 지제고가 되고, 다음해에 병부시랑 한림대제로 옮겼으며, 가을에는 직학사(直學士)에 승진하였고, 또 그 다음해에 중정대부 국자좨주 지제고에 올랐다.
신축년에 왕이 사적(沙賊)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니 따라가서 전의령과 전교령에 두 번 전직되었는데, 다 중정의 품계였으며, 다음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서 봉순대부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에 승진되었다. 겨울에 밀직사좌부대언 보문각직제학 지공부사에 임명하니, 이는 대개 공을 등용하여 인사의 전선(銓選)을 맡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우부대언에 오르고, 또 좌대언에 올랐다.
을사년 봄에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행동이 아주 은밀한 것이 있었다. 공이 이를 알고 비밀리에 왕에 고하기를,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어지러운 일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옵소서. 신이 아니면 누가 감히 말하오리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바야흐로 신돈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 해 여름에는 판서 예의(判書禮儀)에 임명하고 가을에는 군부(軍簿)직에 제수해 보내니, 이것은 대개 공을 소외한 것이다.
10월에 부친의 상사를 당하고 3년의 상제를 마쳤으나, 왕은 전일 직언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오히려 쓰려고 하지 않았다. 신해년 가을에 신돈의 죄상이 드러나자, 왕이 이르기를, “한 모(韓某)는 선견지명이 있으니 급히 불러오라.” 하고, 곧 영록대부 이부상서 수문전학사(榮祿大夫理部尙書修文殿學士)를 제수하고 수일이 지나서 왕이 이르기를, “전선(銓選)은 중요한 일이다. 총명 민첩하고 정밀한 자가 아니면 그 권한을 줄 수 없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오직 한모(韓某)가 그에 적격한 사람이다.” 하고, 이에 공을 정의대부(正議大夫)로서 우승선(右承宣)에 임명하고, 겨울에는 좌승선에 승진시켜 전선(銓選)을 맡게 하였다.
을묘년 여름에 밀직제학 동지서연에 임명되고 가을에는 첨서로 승진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가서 부사(副使)로 고쳐 제수되고 조금 뒤에 동지로 올랐으며, 5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지금 판서에 재직 중인 정총(鄭摠) 등 33명을 뽑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좋은 선비를 선발해 얻었다고 일컬었다. 그 해 가을에 지사(知司)에 오르고, 무오년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하였고 대광(大匡)의 품계에 오르니 관직은 진현(進賢)으로 고쳐주고, 수충찬화공신(輸忠化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기미년 겨울에 광암비(光巖碑)를 쓴 공로로 다시 첨서가 되고 다음해 봄에는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 중대광(重大匡)의 계급에 올랐으며, 임술년에는 왕을 호종하여 남경(南京)에 갔다오니, 다음해 가을에 그 공으로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임명하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이 하였다.
갑자년 2월 28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라 사람들이 다 탄식하고 애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이 겨우 52세에 사망하니 천도의 어그러짐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날을 택하여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기슭에 있는 선산 아래에 장사하니 예로써 한 것이다.
한(韓)씨는 상당(上黨)의 대가(大家)이니, 난(?)은 삼한공신(三韓功臣)이고, 사기(謝奇)는 첨의부 우간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교이니, 공의 증조가 되며, 악(渥)은 벼슬이 선력 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당부원군이며, 시호는 사숙(思肅)으로 충숙왕을 도와서 관위가 총재에 이르고 공로가 국가에 있었으니, 이는 공의 조부이다. 사숙공이 5명의 아들을 두어 모두 명철한 재상이 되었는데, 그 이름을 공의(公義)라 하는 분이 밀직 의 관직을 거쳐 중대광 청성군(重大匡淸城君)에 봉하였고, 시호를 평간공(平簡公)이라 하여 밀직사좌대언 겸 감찰집의 경사만(慶斯萬)의 딸과 혼인하였으니, 공의 고비(考?)인 것이다.
공이 검교문하시중 길창부원군(檢校門下侍中吉昌府院君) 권적(權適)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6녀를 낳았다. 장남 상환(尙桓)은 전 삼사우윤(前三司右尹)이요, 다음 상질(尙質)은 서북면 도관찰출척사 겸 평양윤이요, 다음 상경(尙敬)은 공조총랑 지제교 겸 상서소윤이요, 그 다음 상덕(尙德)은 종부시승이다. 손자로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우윤(右尹)은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의 딸과 결혼하여 2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출척사(黜陟使)는 문하 시중 이성림(李成林)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낳았는데 전 종부시승 강책(姜策)에게 시집갔고, 다시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송신의(宋臣義)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총랑(摠郞)은 전 판도판서 오준량(吳俊良)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시승(寺丞)은 전대언(前代言) 이귀생(李貴生)의 딸과 결혼하였다. 6녀 중에 맏딸은 삼사우윤(三司右尹) 안경검(安景儉)에 시집가서 5녀 1남을 낳았고, 다음 딸은 성균직강 이작(李作)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다 어리고, 다음 딸은 대호군 권방위(權邦緯)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전호군 임중선(任中善)에게 시집가서 4남을 낳았으며, 그 다음은 의덕부승(懿德府丞) 박등(朴登)에 시집갔고, 다음은 중랑장 전보(田甫)에 시집갔다.
큰 아들 우윤 상환은 총명 민첩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병으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였고, 둘째 아들 출척 상질은 경신년 과거에 제3위로 급제하였으며, 총랑 상경은 임술년 과거에 제3위이며, 막내아들 시승 상덕은 을축년 과거에 제9위로 급제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어머니에게는 종신토록 나라 창고의 곡식을 주도록 되어 있어 지금 권씨 부인이 그 영광스러운 효양(孝養)을 받고 있으니, 공도 지하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공이 선화(仙化)하여 가신 지도 벌써 9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성음과 용모가 언제나 나의 마음속과 눈앞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겠는가. 출척공(黜陟公)이 그 여러 형제와 더불어 묘소에 명을 묻으려는 뜻이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여, 나를 찾아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아, 슬프다. 내가 문경공(文敬公)의 청으로 일찍이 그의 아버지 평간공(平簡公)의 묘소에 명한 바 있었는데 이제 또 문경공의 묘소에 명하게 되다니, 그 역시 슬픈 일이로다. 명에 이르기를,

옥병 속에 얼음을 담아둠과 같은 것은 / 玉壺置?
오직 공의 맑은 지조요 / 惟公之淸
티끌 갑 속에서 거울을 연 것과 같은 것이 / 塵匣開鏡
오직 공의 밝은 마음 이외다 / 惟公之明
부귀 속에서 자라났건만 / 長于紈綺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일이 없었으며 / 無華靡事
시문과 서예에 노닐고 / 游於詩書
털끝만큼의 재리를 추구한 바 없었습니다 / 絶絲毫利
효도하고 우애하며 충성하고 신의 있었고 / 孝友忠信
또 청렴하고 고요하며 너그럽고 화평하셨으니 / 廉靜寬和
장수를 누리셔야 마땅하거늘 / 宜至眉壽
하늘이 빼앗아 가는데 어찌 하오리까 / 天奪奈何
오직 자녀를 많이 두시어 / 惟其多子
재주 있고 아름다우니 / 有才有美
공의 명성이 전함은 / 公名之傳
생시와 같을 것입니다 / 如在于世
내가 공의 부자의 분묘에 명을 지으니 / 我銘父子
이 마음 어찌 상하지 않으오리까 / 心胡不傷
바라옵건대 많은 복을 내리시어 / 庶其垂裕
자손들을 창성하게 하시옵소서 / 子孫其昌

하였다.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중대광 청성군 한시평간공 묘지명 병서 (重大匡淸城君韓謚平簡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금상(今上)이 즉위한 지 14년에 평간공(平簡公)이 비로소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에 장차 이듬해 정조(正朝)를 하례하기 위하여 원 나라 서울로 사절(使節)을 보내려고 재신(宰臣)들이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지금 원 나라 승상이 궁전 뜰을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조근(朝覲)에 회동하는 것이 다른 날에 비할 바 아닙니다. 신 등은 실로 이에 보낼 사절의 적격자를 선정하기 곤란하오니,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 하니, 그날로 전지가 내리기를, “한모(韓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하고는, 공을 불러들여 친히 보고 유시하기를, “정유년에 성절(聖節)을 하례하러 갔을 때 갈 때도 무난히 잘 갔고 오는 데도 잘못되었다는 말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대를 가상히 여겨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또 가되 공경히 할지어다.” 하니, 공이 두 번 절하여 사례하면서 말하기를, “신과 같이 불초한 자가 추부(樞府)의 자리만 갖추고 있사옵고, 다른 아무런 재능이 없사와 성은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터인즉 어찌 감히 사명으로 가는 것을 피하오리까.” 하고 갔다가 돌아왔는데, 과연 왕의 뜻에 부합한 바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봉군(封君)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오래지 않아서 다시 기용되기를 아직도 바라고 있었더니, 아 슬프다.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공은 성은 한(韓)씨이니, 대대로 청주(淸州)가 본향이었다. 먼 조상에 난(蘭)이란 분이 있었으니, 개국 초에 공이 있어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내렸다. 그 뒤에 가장 장한 이름이 있는 강(康)이니, 원종(元宗) 때에 성균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을 도와서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로 국가의 고시를 관장하였으며, 중찬(中贊)으로 치사하였는데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문혜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를 낳았고 간의공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악(渥)을 낳으니, 시호는 사숙(思肅)이며, 충숙왕(忠肅王)이 원 나라에 참소당하여 욕보고 있는 것을 일찍이 기발한 계책으로 무사히 탈출하게 하였고, 또 충혜왕(忠惠王)을 도와서 두 번이나 총재가 되어 대묘(大廟)에 배향되었다. 사숙공이 동지밀직 전리판서 원경(元卿)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사람을 낳았고 맏아들 대순(大淳)은 죽었는데 벼슬이 지도첨의사사였고, 중례(仲禮)와 방신(方信)은 다 정당문학이었으니, 공은 차서에 있어 그 둘째였다. 형은 아우를 우애하고 동생들은 형에게 공손하여 한때 사람들이 모두 이를 흠모하였고, 또 불법(佛法)을 배운 자는 각성(覺星)이라 이르니, 역시 조계종(曹溪宗)의 시(詩)하는 승려이다. 공의 이름은 공의(公義)요, 자는 의지(宜之)이니 향년이 59세였다.
처음에 선조의 음덕으로 녹남 부사(錄南部事)가 되었더니, 일찍이 충혜왕의 알아줌을 받아 계급을 초월하여 호군에 제수되고, 여러 번 승지 하여 대호군 삼사 우윤이 되었다. 그때에 안정하고 망동하지 않으므로 세상을 좌우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전주목(全州牧)으로 나아가 백성에게 은혜로운 베푼 바 있고 충목왕(忠穆王) 때에 소부(小府)ㆍ위위(衛尉)ㆍ선공(繕工)의 세 판사를 역임하였으며, 충정왕(忠定王) 때에 대언(代言)에 발탁되었는데, 왕이 손위(遜位)하던 날에 백마산(白馬山) 아래로 달려가서 음식물을 바치고 사사로 사람에게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모름지기 시종(始終)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금상(今上)이 공을 충성이 있다 하여 그 재능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 오래였다.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시행하면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고 오래지 않아서 호부 상서로 옮기고, 2년이 지나서 형부로 옮겼다. 토지에 대한 송사가 법대로 처결되지 않는다고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는데 공이 들어가서 일에 따라 재량 처결하니, 사람들의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그가 정부에 있을 때에 관리가 성안(成案)을 가지고 와서 결재를 청하면 그 중에 옳지 못한 것을 보았을 경우 반복하여 그 뜻을 보인 뒤에야 서명하였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부인 경(慶)씨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의 딸이요, 찬성사 정해(鄭?)의 외손인데 주부가 되어서는 남편에게 화순하였고, 어머니가 되어서는 자녀에게 본보기기 되었다. 아들이 3명인데, 수(脩)는 옛 것을 좋아하고 문학에 능하여 급제를 거쳐 관직을 역임하고 현재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있으며, 다음 이(理)도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있으며 현직 개성 판관(開城判官)이요, 그 다음 제(齊)는 별장으로서 과거를 보려고 학업을 닦고 있고, 딸 3명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종부령 김사겸(金士謙)과 삼사 우윤(三司右尹) 이창로(李彰路)와 군부판서 염흥방(廉興邦)은 그의 사위들이다. 손자에 남자가 4명인데 우복(祐復)은 별장이요, 다음이 선복(善復)이고 그 다음은 다 어리며, 손녀가 5명이다. 외손인 남자 김우(金禑)는 권무(權務)이며, 손녀 2명이 있다.
장차 11월 갑신일에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산기슭에 장사하려 하는데, 수(脩)와 흥방(興邦)이 와서 묘명을 나에게 구하니 공의 아들과 사위는 다 나의 벗이다. 벗의 아버지의 묘에 명하는 것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공은 자상 근검하였고, 일체의 행동을 예법에 따라 하였으며, 마음속에 온축한 포부를 펴지 못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구(才具)로서 하루도 국정을 전담하지 못한 것은 역시 하늘의 뜻인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몸에는 버릴 만한 행실을 가려낼 수 없고, 아들을 가르쳐서 모두 출세시켰으며 죽은 뒤에는 아름다운 시호를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후세에 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또한 가히 유감(遺憾)이 없을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문혜공의 손자요 / 文惠之孫
사숙공의 아들로서 / 思肅之子
어질고 후한 형제들이 / 振振弟兄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었도다 / 克世其美
공이 총릉을 섬겨 / 公事聰陵
시종 한결같음이 있으매 / 旣有終始
금상은 그의 충성을 묻지도 않고 / 不問其忠
그 재능을 시험하셨다 / 其能可使
두 번 원 나라 조정에 조근하였는데 / 再覲天庭
돌아와서는 반드시 마음에 들게 하였다고 칭찬하시었다 / 還必稱旨
이에 여러 사람들은 때가 왔다고 하였으나 / 衆曰時哉
공은 물러가고 말았다 / 公則退矣
이때의 높은 공은 누구도 / 維時巍巍
이보다 더할 리 없었거늘 / 莫或尙此
필경 이에 그치고 말았으니 / 而止於斯
누가 저 하늘의 이치를 징험할 것인가 / 孰徵其理
내 여기에 시를 지어 / 我庸詩之
이것을 오는 세상에 물으리라 / 以訊來世

하였다.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 묘지명 병서 (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幷書 
 

이색(李穡)

지정(至正) 27년 정미 7월에 추성 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鷄林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 익재선생(益齋先生) 이공(李公)의 병으로 본댁에서 돌아가니 나이 8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이라 시호를 정하였고, 10월에는 유사에 명하여 의장(儀仗)과 위사(衛士)를 갖추어서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에 있는 선영 아래에 장사하였으며, 병진년 10월에는 공민왕(恭愍王)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이요, 자는 중사(仲思)이니 아버지의 성은 이(李)씨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奕居世)의 창업을 보좌한 대신에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 뒤에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김현(金現)을 낳았고, 병부령이 삼한공신 태수(三韓功臣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는데, 신라왕 김부(金溥)가 이미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에 들어와서 조회하고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금서(金書)의 아내로 삼게 하여 윤홍(潤弘)를 낳았다. 윤홍이 승훈(承訓)을 낳았고, 승훈이 주복(周復)을 낳았고, 주복이 이(?)를 낳았고, 이가 치련(侈連)을 낳았고, 치련이 총섬(寵暹)을 낳았고, 총섬이 춘정(春貞)을 낳았고, 춘정이 현복(玄福)을 낳았고, 현복이 선용(宣用)을 낳았고, 선용은 승고(升高)를 낳았다. 승고가 문림랑 상의직장동정(文林郞尙衣直長同正) 득견(得堅)을 낳았고, 상의직장이 증좌복야(贈左僕射) 핵(?)을 낳았고, 복야는 검교정승 문정(檢校政丞文定) 진(?)을 낳아 대릉직(戴陵直) 박인육(朴仁育)의 딸과 결혼하니, 즉 진한국 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다.
지원(至元) 정해 12월 경진일에 공을 낳으니, 공은 어릴 때부터 의젓한 기상이 어른 같았고 글을 지을 줄 알게 되면서부터 이미 작자(作者)의 기풍이 있었다. 대덕(大德) 신축년 공의 나이 15세였다. 시선(侍?) 정상(鄭常)이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였는데, 응시하러 온 사람들이 자기의 재능을 자부하고서 서로 기염을 토하며 견주다가 공이 지은 글을 듣고서는 일시에 기운을 잃고 위축되어 감히 앞을 다투는 자가 없더니, 공이 과연 장원하였다. 이 해에 국재(菊齋) 권부(權溥)공과 열헌(悅軒) 조간(趙簡)공이 시관이 되어 과거를 보였는데, 공이 또 병과(丙科)에 급제하자 권공(權公)이 그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과거란 것은 조그마한 기능이다. 나의 덕을 크게 축적할 수는 없는 것이니 옛 경전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다시 이를 절충 함으써 지당한 결론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니, 문정공(文定公)이 이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혹 우리의 문호를 더욱 키워주시려는 것인가.” 하였다.
계묘년에 권무 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가 되었고, 무신년에는 예문춘추관에 뽑혀 들어가니, 관중에 있던 선비들은 모두 공에게 자리를 사양하고 감히 글을 논하지 못했으며, 그 후 오랜 뒤에 제안부 직강으로 옮겨갔다. 기유년에 사헌 규정에 발탁되었고, 경술년에 선부 산랑으로 옮겼다가 신해년에 재차 전교시승 삼사판관으로 천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황경(皇慶) 임자년에 서해도 안렴사가 되어 부월을 잡은 옛사람의 풍모가 있었고, 다시 성균 악정(成均樂正)에 승진, 그 해 겨울에는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가 되었으며, 계축년에는 내부(內府)에 부령(副令)이 되었다. 풍저창은 말질하는 것을 감시하고 내부에서는 저울눈의 근량과 잣 수를 따지는 것인데, 공은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조금도 난색을 짓는 일이 없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무슨 일이고 할 수 있는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인종(仁宗)을 도와서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맞아 세웠기 때문에, 원 나라 두 조정에서의 은총과 예우는 비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전할 것을 청하고 자기는 태위(太尉)가 되어 원 나라 서울의 저택에 머물고 있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서적을 쌓아놓고 연구하며 스스로 즐기고, 인하여 이르기를, “원 나라 서울에서 문학하는 선비는 모두 천하에서 선발한 명사들인데 우리 관부 중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나의 수치이다.” 하고, 공을 원 나라 서울을 불러들이니, 바로 연우(延祐) 갑인년 정월이었다. 그때에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요목암(姚牧菴)ㆍ염자경(閻子靜)ㆍ원복초(元復初)ㆍ조자앙(趙子昴)등이 다 왕의 문하에 와서 놀았는데, 공이 그 사이에 서로 추축(追逐)하여 학식이 더욱 진취되었고, 여러 석학들도 공을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을묘년에 선부 의랑으로 전직되고 가을에는 성균 좨주에 임명되어 이내 의랑직을 겸임하였으며, 병진년에 서촉(西蜀) 지방으로 사명을 받들고 가니, 이르는 곳마다 읊은 시와 글이 세상 사람들 입에 전파되어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 해에 판전교시사가 되고, 정사년에 선부전서에 임명되었으며, 기미년에 왕이 강남지방에 향을 보내려 내려갔을 때 누대의 풍물을 구경하며 흥취가 나며 시를 읊어 회포를 풀었는데, 매양 조용히 말하기를, “이런 곳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경신년에 지밀직사에 임명되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여 당시에 좋은 선비를 많이 얻었다는 칭송이 있었으니, 이때 공의 나이 34세였다. 문정공(文定公)과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과 장인 장모와 세 좌주(座主)가 모두 건강히 있었으므로, 공이 잔치를 벌이고서 술잔을 들어 헌수하니 온 세상에서 다 이를 찬미하고 부러워하였다. 이 해에 상주하여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에 임명되었고 지치(至治) 임술년 겨울에 원 나라 서울로 갔다. 그러나 아직 도착하기 전에 충선왕(忠宣王)의 참소를 맞나 서번(西蕃)으로 귀양길을 떠나갔던 것이다. 다음해에 공이 서번으로 가서 왕을 뵈었는데, 도중에서 읊은 시문에는 그 충성과 의분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에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事)에 승진되고 을축년에는 다시 공신의 호를 추성양절(推誠亮節)이라 고쳐 내렸으며, 다시 첨의평리 정당문학에 두 번 전직되고 병인년에는 삼사사(三司使)로 옮겼다. 천력(天曆) 경오년에 충혜왕(忠惠王)이 국권을 잡고 공을 다시 정당문학으로 삼았으나 얼마 안 가서 파면되었고, 뒤에 지원(至元) 병자년에 이르러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하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에 임명되었다.
기묘년 2월에 충숙왕이 돌아가고 그 해 가을에 정승 조적(曹?)이 백관을 위협하여 영안궁(永安宮)에 군병을 주둔하게 하고 선언하기를, “임금 곁에 있는 간악한 소인들을 축출해 버리겠다.” 하였으나, 은밀히 심왕(瀋王) 고(暠)를 위하여 한 것이므로 충혜왕이 정예의 기병을 인솔하고 공격해 죽였다. 그러나 그 일당이 도성에 있는 자가 심히 많았으며 또 반드시 왕을 죄에 밀어 넣으려고 하므로 인심이 불안과 공포 속에 싸여 있고 몹시 위태하여 앞날에 있을 환란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있었다. 공이 분연히 일어나 자기 일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의 아드님을 알 뿐이다.” 하고, 따라서 원 나라 서울로 가서 말을 대신하여 글을 올려 그 일의 해명함을 얻으니, 그의 공로가 가장 컸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니 뭇 소인들이 더욱 선동 비방하므로 공이 곧 물러나 자취를 감추고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 사이에 《역옹패설(?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 겨울에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공을 부원군(府院君)에 승진시키고,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에 임명하고 서연(書筵)에서 공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병술년에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을 편수하였고, 문자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신묘년 겨울에 공민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아직 본국에 이르기 전에, 공을 우정승으로 삼아 정동성사(征東省事)를 임시로 맡게 하였다. 이때 수개 월 동안이나 나라가 공허한 상태에 있었는데, 공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인민들이 이에 힘입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임진년에 추성양절 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를 내리니,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공의 벼슬자리가 그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이를 알고서 세 번이나 사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그 해 10월에 조일신이 여러 불평분자들을 취합하여 밤중에 왕궁에 들어가서 자기가 꺼리던 자를 모조리 죽이고, 군병을 놓아 마구 살해하였으나 공은 그때 벼슬을 사퇴한 후였으므로 그 화를 면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일신이 잡혀 죽고 다시 공을 기용하여 우정승에 임명하였는데, 계사년 정월에 또 사퇴하였다.
5월 다시 부원군으로 지공거가 되어 고시를 주재하였고, 갑오년 12월에는 다시 우정승을 삼았으나 다음해에 또 사퇴하니 공의 나이 70세였다. 김해후(金海侯)에 봉하고 12월에 문하시중을 삼았다. 정유 5월에 본직(本職)으로 치사하기를 빌어서 왕이 이를 윤허하였다. 국가 제도에 군으로 봉하고서 치사하면 반사(頒賜)하는 녹봉이 다른 관원과 차이가 있는 법인데, 공은 이미 늙고서도 많은 녹을 받는 것이 분의에 편하지 못하다 하여 본직으로서 치사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의 공론이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을 공경히 대우하는 바가 아니라 하여 임인년에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였다.
공이 15세에 과거에 올라 이름이 일세를 덮었고, 조정에 벼슬한 뒤로는 오로지 문서(文書)만을 받들어서 예문관과 춘추관에서는 지제교를 역임하여, 속관(屬官)을 거쳐 벼슬이 양부(兩府)에 봉군(封君)하기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그 관직에서 떠난 일이 없었는데, 다만 충정왕(忠定王)이 왕위에 있던 3년간만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공이 일찍이 원 나라에 표문(表文)을 올려 공민왕(恭愍王)을 세우자고 청하였던 까닭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두텁고 무거운데다가 학문으로 보익하여 고명정대 하였기 때문에 그가 발의하는 언론이나 시행하는 사업들이 정대하고 찬연하여 모두가 볼만하였다. 처음에 공이 《사기(史記)》를 읽을 때에 필삭(筆削)한 대의를 반드시 《춘추》에서 법 받았는데, 당(唐)나라 〈칙천기(則天紀)〉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어찌 주(周) 나라의 남은 것을 가져다가 우리 당 나라의 일월(日月)에 붙이랴.” 하더니, 뒤에 주자(朱子)의 《자치 통감강목》을 얻어 보고 스스로 그 지식이 정확함을 징험하였다.
남이 조그마한 착한 일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들어서 칭찬해 주고 혹시라도 이런 좋은 일을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선배의 남긴 일은 비록 미세한 일이라도 미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평생에 조급한 말과 장황한 낯빛으로 추잡한 말에 언급한 일이 없었고, 손과 대하여 술을 나누면서 고금의 일을 논란 검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최졸옹(崔拙翁)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3일만 보지 않아도 눈을 닦고서 보게 된다 하더니, 나는 익재(益齋)에게서 옳은 말임을 보았다.” 하였다. 공은 옛 법을 준수하려고 힘썼고 급히 장(更張)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어찌 옛날 사람만 같지 못할 가만은 다만 나의 재주가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였다.
공의 손자가 기(奇)씨와 혼인 관계로 연관되므로 공이 그의 너무 성만(盛滿)한 것을 꺼려하였고, 그가 평장사에 임명됨에 미처서 공민왕이 두 대제(待制)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이를 하례하게 하고, 또 공에게 명하여 사실을 서술하라 하니 공이 이를 사양하고 스스로 익재라고 호하였다. 신돈(辛旽)이 실각한 뒤에 공민왕이 이르기를, “익재의 선견지명은 미칠 수 없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신돈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이제 와서 과연 징험하였다.” 하였다.
공이 젊을 때부터 나이가 같은 제배(?輩)들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라 하였고, 재상이 된 뒤에는 사람의 귀천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익재라고 호칭하였으니, 세상에 중망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공의 저술한 바와 문집 몇 권이 세상에 간행되어 있다.
공은 모두 세 번 결혼하였는데,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權)씨는 2남 3녀를 낳았으니, 장남 서종(瑞種)은 봉상대부 종부부령이요, 다음 달존(達尊)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 직제학 지제교이며, 장녀는 정순대부 판사 복시사 임덕수(任德壽)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정대부 전농정 이계손(李係孫)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 김희조(金希祖)에게 시집가서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하였다.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朴)씨는 선수 서경등처 만호부부만호 중현대부 사복정(宣授西京等處萬戶府副萬戶中顯大夫司僕正) 거실(居室)의 딸로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 창로(彰路)는 봉익대부 개성윤이요, 장녀는 정순대부 판전농시사 박동생(朴東生)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봉순대부 판전교지사 송무(宋懋)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혜비(惠妃)인데 지금 여승이 되었다.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徐)씨는 통직랑 지서주사 중린(仲麟)의 딸로 2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중정대부 삼사우윤 김남우(金南雨)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봉선대부 전의부정 이유방(李有芳)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실)이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중랑장 임부양(林富陽)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아직 어리다.
장남 종부(宗簿)는 밀직사겸 감찰대부 홍유(洪侑)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보림(寶林)은 광정대부 정당문학 상의회의 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이요, 장녀는 통헌대부 판위위시사 조무(趙茂)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현대부 순흥부사 이원적(李元)에게 시집갔다. 또 검교 중랑장 김송주(金松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내유(乃猷)인데 조계중 광도사(廣度寺)의 주지이다.
총랑(摠郞)은 상당군(上黨君) 백이정(自?正)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덕림(德林)은 조봉랑 여흥군사(朝奉郞驪興郡事)요, 다음 수림(壽林)은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이며, 원 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한림학사 자선대부가 되니, 이 때문에 공에게 태상경(大常卿)이 중직 되고 훈(勳)ㆍ계(階)ㆍ작(爵)을 갖추어 내렸다. 그 다음 학림(學林)은 중현대부 소부윤(中顯大夫小府尹)이요, 딸은 봉익대부 개성윤 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 기인걸(奇仁傑)에게 시집갔다.
개성 윤(開城尹)은 중대광 청성군(重大匡淸城君) 시호 평간(平簡) 휘 공의(公義)의 딸인 한(韓)씨와 결혼하여 1녀를 낳았는데 춘추관 검열 원서(元序)에게 시집갔고, 계실은 정순대부 판전객시사 김묘(金昴)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반(蟠)은 산정도감 판관이요, 다음 곤(袞)은 경선점 녹사(慶仙店錄事)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외손으로는 사복(司僕)이 2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 순의(純義)는 봉선대부 군기소윤이요, 다음 순례(純禮)는 중랑장이며, 장녀는 통직랑 기거랑 지제교 신혼(申渾)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정대부 친어군 대호군 박영충(朴永忠)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봉선대부 소부윤 황간(黃侃)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랑장 김추(金錘)에게로 시집갔다. 전농정(典農正)이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즐(?)은 낭장이요, 다음 양(亮)은 중랑장이며, 딸은 통헌대부 판선공시사 안익(安翊)에게 시집갔다.
판전농(判典農)이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경(經)은 봉선대부 군기소윤이요, 다음은 위(緯)는 장이요, 다음 수문(殊文)도 별장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전교(典校)가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좌윤(左尹)이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이름이 상좌(上佐)이고, 다음은 광대(廣大)이며, 딸은 다 어리다.
증손에 남녀 약간명이 있으니, 조위위(趙衛尉)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종선(從善)은 중랑장이요, 다음 천선(遷善)은 권무(權務)이며, 딸은 다 어리다. 이순흥(李順興)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유희(有喜)는 숭은전직(崇恩殿直)이고 딸은 다 어리다. 여흥(驪興)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신(伸)은 승봉랑 공조서령이요, 다음은 밀(密)이며, 장녀는 정순대부 판위위시사 이승원(李承源)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통례문지후 곽유례(郭遊禮)에게 시집갔다. 밀직(密直)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숭의(崇義)요, 그 다음 숭도(崇道)는 전객녹사이며, 딸은 다 어리다. 소부(小府)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직 어리고, 장녀는 사헌지평 김만구(金萬具)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어리다. 기개성(奇開城)이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신(愼)이요, 순의(純義)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순례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자(滋)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신혼(申渾)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호(浩)이니 대전지유 중랑장이요, 장녀는 낭장 황윤기(黃允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대호군이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용수(龍壽)는 별장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며, 황소부(黃小府)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약로(藥奴)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며, 즐(?)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효로(孝奴)이고 딸은 어리다. 양(亮)이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백공(伯恭)이요, 다음은 백겸(伯謙)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 명(銘)하기를,

하늘과 땅이 정기를 쌓으매 / 天地儲精
공이 이에 태어났고 / 公?挺生
규벽성이 광채를 발하자 / 奎璧耀芒
공이 이에 드러났네 / 公?發揚
이름은 온 천하에 넘쳐 흘렀으나 / 名溢域中
몸은 바다 동쪽에 있도다 / 身居海東
도덕의 원수요 / 道德之首
문장의 정종으로 / 文章之宗
태산북두 같기는 / 北斗泰山
창려땅의 한퇴지요 / 昌黎之韓
광풍제월 같기는 / 光風霽月
용릉의 주렴계라 / ?陵茂叔
네 번 국정을 잡았고 / 四秉國鈞
나이는 80을 넘었다 / 年踰八旬
기린과 봉황의 상서요 / 麟鳳其瑞
시초와 거북의 신명이었으니 / 蓍龜其神
공훈은 사직을 남겨놓았고 / 功在社稷
은택은 생민에 미쳤도다 / 澤流生民
종묘에 올려 배향하니 / ?宮升配
슬프고 영광스러움이 짝이 없도다 / 哀榮無對
부디 너희 자손들아 / 惟爾子孫
그 충과 효를 따르라 / 忠孝是遵
알지 못한다 이르지 말라 / 勿謂無知
공이 구천에 계시니라 / 公在九原

하였다.


[주D-001]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 :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무슨 일로 원 나라 정부에 미움을 사서 토번(지금의 서장 근처)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므로, 잠시 섭정격인 단사관을 원나라에서 두었던 것이다.
[주D-002]필삭(筆削) : 필주(筆誅)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죄 있는 자를 실제로 죽일 권한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죄상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세상에 발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D-003]주(周) 나라의……붙이랴 : 당 나라 고종황제의 황후인 무측천(武則天)이란 여자가 고종을 독살하고 자기가 정권을 잡아, 당 나라의 나라 이름까지 고쳐서 주(周)라고 한 것이 22년간이었다. 그것을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정식 황제로 대우하였으나 여기에서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한 말이다. 그 후에 주자가 《통감강목》을 편찬할 때에는 그 무측천을 당 나라의 역적으로 지적하였다.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이 본향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위려(就礪)이니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위열(威烈)이요, 증조(曾祖)의 이름은 전(佺)이니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익대(翊戴)요, 조부의 휘는 변(?)이니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서 시호는 문신(文愼)이요, 아버지의 휘는 윤(倫)이니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崔)씨이니,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 충(沖)의 13세손이요, 부지밀직사사 서(瑞)의 딸이다.
13세에 민(閔)씨의 집으로 시집와서 며느리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천성이 엄하여 자제를 교도하는 데도 반드시 예로써 하여 친척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도한다.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 김묘(金昴)에게 출가시키니, 김묘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18세손이다. 김씨의 자녀로 아들은 제민(齊閔)ㆍ제안(齊顔)ㆍ구덕(九德)이 있고, 딸은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과, 전 개성 윤 이창로(李彰路)와, 전 종부령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 허호(許顥)와, 전 전객부령 허의(許誼)와, 낭장 겸 박사 이존사(李存斯)와 문하 주서 김섬(金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이 이름을 구용(九容)이라 고치고 그 아들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행장에 의하여 명(銘)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 급암공(及菴公)은 천성이 순진하고 솔직하여 장벽을 세우지 않고 날로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으며, 집안의 살림살이는 묻지 않고 오직 부인에게만 맡겼는데, 부인께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서도 오직 날짜를 부족하게 여겼다. 또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남편을 섬기는 예는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공경하는 마음 한 가지만 지킬 것이며, 의복과 음식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되, 오직 그때에 맞도록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공이 성정에 맡겨 술 마시고 마음껏 자적하는 것은 그 부인이 안에서 집안일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하였던 것이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비록 부인보다 연치가 많았으나 또한 부인을 꺼려하여 감히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첨서밀직(簽書密直) 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머니와 같이 섬겼다. 기해년에 급암공이 돌아가고 겨우 3년 상을 마치자 신축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손자 제안(齊顔)이 옳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느냐.’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함이 그 아버지의 풍도에 있었다 한다. 갑인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급암(及菴)의 장사 때에 시로써 만사(挽詞)를 도운 바 있었으니 부인의 묘명(墓銘)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여강의 서쪽 / 驪江之西
발산 양지에 / 鉢山之陽
급암의 부인 / 及菴之室
김씨를 장사하였다 / 金氏攸藏
위열공의 가풍이 / 威烈之風
정렬공에 이르러 더욱 떨쳤으니 / 振于貞烈
규문이 엄숙하여 / 閨門肅然
문채도 있고 절조도 있었다 / 有文有節
오직 너희 자손들은 / 惟爾子孫
그이 마음을 잘 간직하고 / 惟心之存
또 부도를 실추하지 말아서 / 無墜婦則
구천의 여령을 위로하도록 하라 / 以慰九原

하였다.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중대광 현복군 권공 묘지명 병서 (重大匡玄福君權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권(權)씨는 김행(金幸)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신라의 대성(大姓)이다. 복주(福州 안동)의 태수(太守)로 있었는데, 고려의 태조(太祖)가 이미 왕위에 오른 뒤에 신라를 공경하여 복주에 이르자, 행(幸)이 천명에 돌아간 바를 알고서 온 고을을 들어 항복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행은 가히 권도(權道)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 인하여 권(權)이란 성(姓)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후세에 내려오면서 이름난 사람이 많았으니 문청공(文淸公) 훤(?)이 무거운 명망이 있었고, 첨의찬성사 국재선생(僉議贊成事菊齋先生) 보(溥)는 벼슬이 총재(?宰)였으며, 문장과 도덕이 한때의 으뜸이었고, 송재선생(松齋先生) 준(準)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하고 막료를 두게 되었는데, 겸허하고 공손하여 절의를 지키고 집에 있기를 잘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향모하였는데, 이 3대가 잇달아 지공거(知貢擧)로 있었던 바 그 문생들 중에서 현달한 관원이 많이 나왔었다. 이로 인하여 부귀를 부러워하고 예법을 사모하는 자는 모두 권씨에게 돌아갔고, 의릉(懿陵)이 공의 딸을 수비(壽妃)로 삼았고 영릉(永陵)이 공의 누님의 딸 홍(洪)씨를 맞아 화비(和妃)로 삼았으니, 역시 권씨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공이 비록 문벌의 배경으로 인하여 영달함에 이르렀으나, 마음속으로는 매우 즐거워하지 않고 오직 절의를 중히 여기고 있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로 말미암아 그를 훌륭하게 알았다.
공의 이름은 염(廉)이요, 자는 사렴(士廉)이니, 송재가 밀직사 오인영(吳仁永)의 딸과 결혼하여 대덕(大德) 임인년 10월 기사일에 공을 낳았다. 10세에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에 보직되어 연우(延祐) 갑인년에 별장(別將)으로 옮기고, 그 이듬해 보마배 행수(寶馬陪行首)에 선발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낭장으로 승진되었고, 정사년에는 원 나라 서울 북경에 갔다. 무오년에 삼사부사(三司副使)에 임명되어 봉상대부(奉常大夫)에 올랐고 그 해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지치(至治) 계해년에 또 북경으로 가서 원 나라 황제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 받들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에 중정대부사복정(中正大夫司僕正)을 더하였고, 이듬해 원 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를 제수하니 이는 대개 세습으로 받던 관직이었다.
또 이듬해에 응양군대호군으로 고쳐 주고, 또 다음해에 선군별감이 되어 전토를 법도 있게 나누어주니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천력(天曆) 무진년에 북경으로 갔다가 지순(至順) 경오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정순대부 좌상시(正順大夫左常侍)에 임명되고, 뒤에 지원(至元) 을해년에 현복군(玄福君)에 봉하니 공이 도량이 맑아 공무 다스리기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축년에 숭교리(崇敎里)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운금루(雲錦樓)라 편액 해 붙이니 시중 익재(益齋)가 그 기문을 지었다. 꽃이 필 때마다 성찬을 베풀고서 귀빈을 맞이하여 존공(尊公)에게 헌수(獻壽)하고 자손들이 모두 모여서 즐기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다 흠모하였다. 무인년 3월에 의릉(毅陵)이 말하기를, “현복군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할 만한 사람이다.” 하고, 공에게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匡靖大夫僉議贊成事)를 더하였다. 그때 연남(燕南)의 양재(梁載)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공이 그의 사람됨을 하찮게 여겨 예(禮)로써 같이 사귀지 않으니, 양재가 깊은 원한을 품고 극력 왕의 명을 저지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현복군에 봉하고 1년이 지나서 공이 병으로 자택에서 돌아가니, 때는 경진년 4월 7일이었다.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는 공의 숙부이다. 슬프게 울면서, “권씨의 자제에 만호(萬戶)보다 더 어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일찍이 그가 우리 종족을 보호하여 주기를 바랬 더니, 하늘이 어찌하여 우리 집의 어진 자제를 이렇게 급하게 빼앗아 갔단 말인가.” 하였다. 정헌공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여 아부하지 않았으며, 또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공이 착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공은 부귀한 가문에서 자라났으되 아름다운 장식을 물리쳤고, 남의 경사나 조문 등에도 반드시 몸소 갔으며, 남의 장사를 치를 때에는 자기 친척이나 붕우를 불문하고 검은 갓과 흰 옷으로 조상하였고, 슬퍼하는 빛이 안면에 나타났으므로, 보는 사람이 그 정성에 심복하여 모두 따를 수 없다고 말하였다. 평생 남과의 교제를 잘하여 그들이 환란을 만나면 힘을 다하여 구원하여 주고 일이 해결된 뒤에라야 비로소 손을 떼었으며, 비록 잔치를 벌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음악과 여색을 즐기지 않았고, 또 활 쏘고 말 달리기에 능하여 사냥하는 데 정도가 아닌 궤우(詭遇)의 법을 쓰지 않아도 얻는 것이 매우 많아서 무부(武夫)들도 모두 그의 능란함을 칭찬하였다. 그가 가장 즐겨하지 않는 것은 작록(爵祿)이었고, 어버이의 마음을 얻고 마음을 얻으려는 것이 그이 가장 큰 욕망이었다.
공이 섬기고 벗하던 자로는 익재(益齋) 이 시중(李侍中)ㆍ회안(准安) 장순공(莊順公)ㆍ양파(陽坡) 홍시중(洪侍中)ㆍ안상헌(安常軒)ㆍ안근재(安謹齋)ㆍ홍당성(洪唐城)ㆍ김언양(金彦陽)ㆍ민급암(閔及菴)ㆍ최졸옹(崔拙翁)ㆍ평리 이권(評理李權)ㆍ복야배천경(僕射裴天慶) 등인데 이는 모두 당대의 호걸로서, 문장이며 정치며 말달리기며 활쏘기에 있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대종(大宗)으로 삼고 있는데, 공이 그 속에서 교유하는 사이에 익히고 보아서 자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또 작고한 시중 김일봉(金逸逢)을 초빙하여 몽고어(蒙古語)를 익혀서 통하는 것이 많았다. 그 타고난 재능의 아름다움이 이같이 많았는데, 하늘이 연수를 주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더란 말인가.
공이 죽을 때에 그 조부모와 부모가 무탈하였으니, 그 조부모와 부모의 마음은 어떠하였겠으며, 공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려 할 때에 그 조부모와 부모에게 생각이 미쳤을 것이니, 그의 심정은 또 어떠하였겠는가, 아, 슬픈 일이로다. 부인 조(趙)씨는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시호 충숙공(忠肅公) 조련(趙璉)의 딸로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나 아들을 가르쳐 인도하는 데 법도가 있어 종족들이 이를 칭도하였다. 공이 돌아간 지도 이제 벌써 30여 년이다. 여러 아들이 모두 달관(達官)이 되어 능히 그 가문의 명성을 이었으니 구천지하에 있는 영혼인들 어찌 느껴 아는 바 없으리요.
공이 돌아 갈 때에 나의 나이 겨우 13세였으니, 당시 13세의 동자가 공의 유당(幽堂)의 명(銘)에 붓을 잡으리라고 누가 일렀겠는가. 아, 모두가 가히 감개로운 일이라 하겠다. 공의 여러 아들이 모두 나와 더불어 친한이 있는지라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므로 그 집의 세계(世系)와 벼슬의 경력을 서술하고 자손을 기록한다.
장남 용(鏞)은 선수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宣授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重大匡玄城君)이요, 차남 현(鉉)은 선수왕부단사관 봉익대부 판도판서 상호군(宣授王府斷事官奉翊大夫版圖判書上護軍)이요, 삼남 호(鎬)는 봉익대부 전법판서 상호군(奉翊大夫典法判書上護軍)이요, 사남 균(鈞)은 선수봉의 대부 융상제점소제점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宣授奉議大夫隆祥提點所提點奉翊大夫典工判書上護軍)이요, 막내아들 주(鑄)는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이다. 장녀는 수비(壽妃)요, 차녀는 원조 한림학사 승지 영록대부(元朝翰林學士承旨榮祿大夫) 보달실리(普達實理)에게 출가했고, 삼녀는 봉익대부 판전의사사(奉翊大夫判典儀寺事) 오중화(吳仲和)에게 출가했고, 사녀는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고(中正大夫典儀令寶文閣直提學知製敎) 염국보(廉國寶)에게 출가했고, 막내딸 선수정동행중서성 도진무사도진무 충근찬화공신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宣授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都鎭撫忠勤贊化功臣匡靖大夫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 원송수(元松壽)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로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현성군(玄城君)이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준(濬)은 행수 별장(行首別將)이요, 차남 연(演)은 산원(散員)이며, 맏딸은 별장(別將) 민양(閔亮)공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중랑장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으며, 다음은 집에 있다. 단사관(斷事官)이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 수안(壽安)은 성균 학생(成均學生)이요, 장녀는 도제고 판관(都祭庫判官) 김균(金?)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보마배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 박자안(朴子安)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별장(別將) 김을부(金乙富)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판서(判書)가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징(澄)은 행수 낭장(行首郞將)이요, 차남 환(澣)은 성균 진사(成均進士)요, 삼남 담(湛)은 전보도감 녹사(典寶都監錄事)이며, 맏딸은 좌우위록사(左古衛錄事) 홍희충(洪希忠)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별장(別將) 한휴(韓烋)에게 시집갔다. 제점(提點)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홍(弘)은 성균 학생(成均學生)이요, 딸은 모두 어리다. 좌윤(左尹)이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훈(壎)이요, 차남은 식(埴)인데, 모두 어리고 딸도 또한 어리다.
외손 약간 명이 있으니, 승지(承旨)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습득려(拾得驢)이며 딸은 어리다. 오(吳)씨가 1남 4녀로 장남 제보(齊甫)는 흥복도감 녹사(興福都監錄事)요, 딸은 모두 어리다. 염(廉)씨가 2남 1녀를 두어 장남 치중(致中)은 목릉직(穆陵直)이요, 차남 치화(致和)는 창릉직(昌陵直)이며 딸은 어리다. 원(元)씨가 2남을 두었으니, 장남 서(序)는 박두점 녹사(?頭店錄事)요, 차남은 상(庠)이니 사경원 판관(寫經院判官)이다. 공을 장사한 묘소는 개성현대평원(開城縣大平院) 서쪽 산에 있다. 명(銘)하기를,

이미 어버이에 효도하고 / 旣孝于親
또 사람에게 믿음을 받았으며 / 而信於人
벼슬 또한 군에 봉해졌으니 / 位又封君
그 몸이 현달하도다 / 顯矣其身
천자께서 탄식하시고 / 天子曰?
호부를 내리시니 / 錫之虎符
가문을 잘 이어 / 善繼家門
그 빛이 해동에까지 넘쳤도다 / 光溢海隅
아들 많이 두고 장수하는 사람이 / 多男而壽
세상에 많기도 하건만 / 世則多有
한스럽게도 공에겐 부족하였으니 / 獨慊於公
그 누가 방해하였던고 / 誰其??
오직 일시의 은총은 / 惟時之寵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중하지 않을 것이나 / 匪賢不重
저 무덤이 황무할 지라도 / 公名不磨
공의 이름은 민멸되지 않으리라 / 有荒丘?

하였다.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율정 선생 윤문정공 묘지명 병서 (栗亭先生尹文貞公墓誌銘 幷序 )
 

이색(李穡)

율정 선생을 장사한 지 석 달이 지나서 선생의 손자 소종(紹宗)이 그가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선생의 분묘에 명(銘)하여 주기를 청해 왔다. 아, 공이 돌아가셨구나. 내가 북경에서 선자(先子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사를 듣고 달려 오니, 선생이 여러 분보다 먼저 오셔서 곡을 하였고, 곡을 마치고 다시 나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긴 한숨을 지으며 탄식하고 돌아가셨는데, 이제 20년의 긴 세월이 흘렀어도 이를 감히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상사에 길이 멀어 가서 한 번 곡하지 못하고 있으니, 묘명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公)의 이름은 택(澤)이요, 자(字)는 중덕(仲德)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양비(良庇)인데, 무송현(茂松縣) 호장(戶長)이요, 조부의 이름은 해(諧)인데,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 치사(正獻大夫國學大司成文翰司學致仕)이다. 상주(尙州)의 사록(司錄)으로 있을 때에 고을 백성 중에 누이에게 난행을 한 자가 있었는데 이때 심한 한발이 계속되었다. 정헌공[正獻]이 고을의 장관과 다투어 끝내 극형으로 처치하니, 하늘이 과연 비를 내린 적이 있었다. 형조와 사헌부의 관직을 역임할 때에는 강직하고 씩씩함을 견지하였다. 경상ㆍ전라ㆍ양광(楊廣)ㆍ회양(淮陽) 등의 여러 도는 모두 안찰사로 있었고, 중승(中丞)으로 있을 때 죽도 계속 먹지 못하여, 콩을 삶아 주림을 채울 뿐이어서 세상에서 청백리라고 이름지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은 수평(守平)으로 봉익대부 밀직부사의 증직(贈職)을 받았는데, 정헌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어머니 김씨는 진례군부인(進禮郡夫人)의 봉호를 받았으며, 지원(至元) 기축년에 공을 낳았다. 공이 출생한 지 3년, 세 살 때부터 학업을 시작하였는데, 수업하기만 하면 외었으며, 정헌공은 공이 사람을 경동(警動)시키는 문구를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앉아서 울며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는 바로 너구나. 수평이 죽지 않았도다.”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깊이 자립의 뜻을 세우고서, 일찍이 장원한 적이 있는 고모부(姑母夫)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글을 배워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더욱 《좌씨춘추(左氏春秋)》에 연구가 깊었다. 항상 문정공(文正公) 범중엄의, ‘천하 사람의 근심을 내가 먼저 걱정하며, 천하 사람이 즐긴 이후에야 나도 즐거워하리.’라는 말을 외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평범하게 살아가랴.” 하였다. 연우(延祐) 정사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경신년에 수재과(秀才科) 〈보검부(寶劍賦)〉로 제1위로 급제하니, 사람들이 그 글을 많이 서로 전해가며 애송하였다. 경산부 사록(京山府司錄)에 선발ㆍ임용되어 농경(農耕)을 독려하고 학교를 보수하며, 백성들에게 상례와 제례를 권장하고 예절과 풍속을 진흥시켰다. 서적록사(書籍錄事)로 들어와 다시 교감ㆍ검열 등 관직을 역임하니, 벼슬은 겨우 9품에 불과하였으나 재상으로 자처하니 혹은 너무 거만하고 경망하다고 하였으나, 공은 떳떳한 태도로 자처하면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지순(至順) 임신년에 의릉(懿陵)이 북경 저택에 있자, 공이 필마로 들어가서 알현하니 이금이 한 번 보고 곧 국가의 큰 그릇임을 알고 후히 대접하고, 이어 뒷일을 부탁하는 말이 있었으니, 임금의 뜻이 지금의 전하에게 뜻을 두었던 것이다. 공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이미 늙었으니 어찌 해내겠습니까.” 하였다. 다음해에 임금이 서경에 행차를 머무르니, 검열권참군(檢閱權參軍)으로서 모든 설비와 차비를 법도 있게 하여,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편안히 지나가니, 임금이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질도다. 회(回 안회(顔回)라는 공자의 제자)의 사람됨이여.” 하니, 이는 공의 용모가 중국인과 유사한 때문이었다. 원 나라의 조사(詔使)가 왔기에 공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읽으라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조서를 읽는 데는 본래 내외제(內外製)가 있는데, 참군이 읽는 것은 종전의 관례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군으로 양제(兩製 내외제)를 삼는 것도 내게 달린 것이 아니냐.” 하고, 드디어 명하여 권응교(權應敎)를 삼고 자문나포(紫文羅袍)를 하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부윤(府尹)으로 발탁하려다가 자급(資級)이 낮다 하여 판관(判官)으로 승진시켰다. 어떤 사람이 공을 불손한 자로 무고(誣告)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생(尹生)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필연코 너의 무고일 것이다.” 하였다. 무인년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되어 인물의 전형과 선임을 맡으니, 임금이 공의 아들에게 호군(護軍) 벼슬을 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맑은 벼슬자리가 지극히 중하며, 또 어질고 공로 있는 신하도 오히려 벼슬이 침체되어 있는데, 감히 신의 자식에게 사사로이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더욱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기묘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승직하고, 성균관에서 선비들을 시험하고 안원룡(安元龍) 등 99명을 선발하니, 알려진 명사(名士)가 많았다. 3월 계미에 임금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임금이 다시 북경에서 하던 말을 공에게 거듭 말하니, 공이 무릎꿇고 대답하기를, “성상의 염려를 번거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이 왕위에 오르고 정치의 혁신을 도모하니, 공은 즉시 전원으로 물러가 한가로운 나날을 조용히 보내면서 보양하였다.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다시 나주 목사에 피선되니, 공이 부임하는 곳에는 언제나 정사에 관용을 위주로 하면서도 강폭한 자를 제어하고 나약한 자를 붙들어 세웠는데, 총릉(聰陵 충정왕(忠定王))이 왕위에 서게 되자 다시 광양 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처음에 명릉이 돌아가니, 백성들의 여망이 모두 지금의 임금으로 돌아갔다. 공이 발의하여 원 나라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본국에는 형제와 숙질(叔姪)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젊은 임금이 그 보위(寶位)를 감당하여 보전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하였는데, 그 표현이 매우 절실하여 총릉이 이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에, 이런 좌천의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신묘년에 임금이 처음 정사에 임하자, 밀직사(密直司)로 들어와 제학(提學)이 되니, 확고히 당세의 일을 바로잡는 책무로 자임하고, 소를 올려 건의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드디어 개성윤(開城尹)으로 치사(致仕)하니, 당시 공의 나이가 64세였다. 근신(近臣)이 향악(鄕樂)을 원 나라에 바칠 것을 건의하니, 공이 이 사실을 듣고서 상소하기를, “세황(世皇 원 나라 세조(世祖))이 일찍이 이미 물리친 것을 이제 다시 바치면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국가 재정의 절약을 말하니, 임금이 마음속 깊이 이를 받아들였다. 남경(南京)에 궁실을 지으니, 공이 말하기를, “중 묘청(妙淸)이 인묘(仁廟 인종)를 미혹하게 하여 나라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감계(鑑戒)가 절실할 뿐만 아닙니다. 더구나 오늘날 사방 변경에 다른 도둑의 침범에 대비하여 병사를 양성하여도 오히려 부족한데, 공사를 일으켜 민중을 노역에 동원한다면 아마도 근본을 손상하게 하지 않을까 우려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서경》의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재신(宰臣)들에게 하사하게 하고, 공에게 명하여 이를 강의하게 하니, 이로 인하여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공로를 진달하여 말하기를,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왕을 본받아 주공의 훈계를 들으시고, 장중하고 겸손하며 스스로 억제하고 삼가며 두려워하시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니, 임금이 정색하고 들었다. 공은 또 진서산(眞西山 송 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편저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본조의 중령(中令) 최승로(崔承老)가 성묘(成廟 성종)에게 글을 올려 모두 진강(進講)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불교의 학설에 깊이 맛들여 초연히 멀리 갈 뜻이 있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위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생민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저 윤리를 폐절한 한낱 필부의 일을 본받으려고 하시옵니까. 신의 말씀을 들으신다면 공자의 도(道)가 아니면 불가하니,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에 더 살피시옵소서.” 하였으며, 또 백악(白岳)의 공사에 대하여도 공이 그 폐해를 극력히 말하고 이어 아뢰기를, “모든 일의 잘잘못을 성상의 의중에 비록 훤히 아십니다만 대신에게 위임하시고 즉시 처분을 내리지 않으시기에,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이미 그 폐해가 이루어져 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술을 내려 주었다. 공은 단번에 석 잔을 마시고도 정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니, 홍언박(洪彦博)이 이를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윤공의 강직함이 이 경지인 줄은 몰랐다. 내가 할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공이 비록 치사(致仕)하였으나 선왕의 임종 때의 명을 받음으로써, 일찍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어, 혹 지나치게 곧다는 지경에 이르러도 임금 또한 너그럽게 용납하였던 것이다. 갑진년에 공의 나이 76세로 질병이 생기자, 소를 올리고 금주(錦州)로 돌아가서 스스로 산수를 즐긴 지 7년이 지났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잠시도 잊는 때가 없었다. 경술 8월 병자일에 아들과 손자들을 앞에 불러 놓고 훈계하기를, “우리 할아버지 정헌공께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시어 청백하고 충직하신 것으로 당대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께서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항상 선대의 뜻을 잇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어쩌다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은총과 영록(榮祿)이 바라던 정도에 훨씬 넘었고, 나이 또한 팔순(八旬)을 넘었으니, 이는 모두가 선대의 숨은 덕의 소치요, 정헌공의 청백이 남기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굳게 지키고 떨어뜨리지 말 것이며, 내가 장차 죽거든 장사에 구기(拘忌)하지 말고, 부도법(浮屠法 불가의 법)을 쓰되 너무 사치하지 말라.” 하고, 9월 정유일에 세상을 마쳤는데, 이날 저녁에 하늘로부터 큰 바람과 비가 일더니, 입관(入棺)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쳤다. 기해일에 대부인(大夫人 어머니)의 분묘 옆에 안장하였다. 부고를 아뢰니 임금은 몹시 애도하고 태상(太常)에게 명하여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내리니, 공의 사후에 있은 영광의 은전 또한 흠이 없다고 할 만하다. 공이 이미 일찍 부친을 잃어 미처 아버지의 얼굴도 알지 못한 것을 더욱 한하여, 시제(時祭) 때에 분묘에 올라가면 반드시 목을 놓아 곡하며 몹시 애통해 하였고, 또 서적에서 부자간의 은정을 기술한 것을 보면 언제나 눈물을 떨어뜨리며 기가 막혀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곤 하였다. 또 항상 주머니 한 개를 차고 있다가 맛난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집에 가서 대부인에게 드렸고, 남들이 비웃었지만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다. 윤장원이 죽으니 손녀 둘이 의탁할 곳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우리 고모부의 손자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 어찌 사람이 될 수 있으랴.” 하고, 선비를 택하여 시집보냈다. 나가서 놀 때에 길에서 금(金) 백 냥을 떨어뜨린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지키며 주인을 기다리니, 잃어버렸던 주인이 울면서 깊이 사례하고 갔다. 그러나 조금도 남에게 덕을 보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공은 평생을 베 이불과 헤어진 자리를 깔고 덮었고, 혹은 끼니를 건널 적도 있었으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도 봄 가을의 좋은 때가 이르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손님을 맞아 즐겼으니, 그 본연의 성정(性情)에 맡겨 유유자적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은 무릇 네 번 장가갔는데, 문(文)씨는 진사 부(富)의 딸로 아들 귀생(貴生)을 낳았는데 벼슬이 산원(散員)이요, 그 다음 이(李)씨는 시위호군(侍衛護軍) 장연(長衍)의 딸로 아들 봉생(鳳生)을 낳았는데 벼슬이 별장(別將)이며, 맏딸은 진사 김요(金耀)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작고한 기거랑 지제고 허식(許湜)에게 시집갔다. 그 다음 부인 기(奇)씨는 밀직부사의 증직을 받은 연(璉)의 딸로 아들 동명(東明)을 낳았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부산랑(理部散郞)이요, 딸은 낭장 박귀령(朴龜齡)에게 출가했으며, 그 다음에 또 기씨에게 장가들었는데 검교 대호군 정보(鼎輔)의 딸로 작고한 진사 이존중(李存中)의 실내(室內 부인)가 된 딸을 낳았다. 손자에 남자가 9명인데, 효종(孝宗)은 산원(散員)이니 계사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적이 있고, 창종(昌宗)은 산원이요, 사종(嗣宗)은 흥순궁 녹사(興順宮錄事)이며, 선창(宣暢)은 불도를 배웠고, 소종(紹宗)은 을사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산랑이요, 회종(會宗)과 목감직(牧監直)의 흥종(興宗)과 무종(茂宗)ㆍ수종(秀宗)이다. 손녀가 4명이며 외손이 2명이니, 성균생원 허조(許操)와 박술(朴戌)이요, 외손녀가 3명이며 증손자 4명은 아직 모두 어리다. 아, 큰 기개로 위대하고 뛰어난 인재는 세상에 용이하게 나는 것이 아니며, 나와도 때를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도 쓰이지 못하거나, 쓰인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 천명이다. 율정 선생에 대한 의릉(毅陵)의 지우(知遇)는 천 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일인데, 의릉의 승하가 너무나 빨랐다. 금상께서도 깊이 선생을 아시기에, 손수 진서(眞書)로 율정(栗亭)의 두 글자를 쓰시어 내리시니, 그 예우가 또한 극진하였으나 공이 정부에 있은 지 겨우 수개월 만에 치사(致仕)하였고, 집에서 19년의 긴 세월을 한가로이 보냈다. 상소문을 올려 논한 것이 비록 곧고 간절하나, 필경 무슨 보탬을 주었던가. 아, 슬프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당당한 문정이여 / 堂堂文貞
씩씩하게 활보하였네 / 高視闊步
비록 미관말직이지만 / 雖厠末寮
우뚝한 재상의 기상 / 巍然宰輔
의릉히 한 번 보고 / 毅陵一見
진담을 내보였고 / 出示肺腑
조용히 뒷일을 부탁하니 / 溫言托孤
과연 그 포부와 부합했네 / 果?所負
이미 참군 자리에 시험하고 / 旣試參軍
다시 부윤에 임명하려고 / 欲尹其府
우선 판관에 승진시키니 / 姑陞判官
기특한 지우가 아니더냐 / 可謂奇遇
임금의 말씀을 출납하고 / 出納王言
인물의 전형에 참여하게 하니 / 參與銓注
장차 큰 정사를 총괄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 蓋將納麓
홀연 승하에 비오는 듯한 눈물 / 鼎湖淚雨
해를 붙든 그 충성 / 扶日至忠
먼저는 절름거리나 뒤에는 형통하나니 / 先屯後亨
사람들은 공의 등용을 기대하였고 / 人望公庸
공은 도리어 불평을 품었네 / 公懷不平
그 불평이 무엇이던가 / 不平伊何
나의 간곡한 이 말이 / 我言丁寧
매우 쓴 약이라네 / 如藥瞑眩
그 말을 어찌하여 듣지 않았더란 말인가 / 云胡不聽
금주의 산기슭 / 惟錦之山
울창한 저 숲 속에 / 有鬱其蒼
기운 올라 하늘을 쏘니 / 有氣屬天
이곳이 바로 공의 무덤이네 / 實公幽堂
혹 믿지 못하겠거든 / 厥或不信
새긴 명비를 보라 / ?此刻章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철성부원군 이문정공 묘지명 병서 (鐵城府院君李文貞公墓誌銘 幷序 )
 

지정(至正) 갑진년 5월 초 5일에, 추성수의 동덕찬화 익조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철성부원군(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鐵城府院君) 이공(李公)이 향년 68세로 병으로 인하여 자택에서 세상을 마치니,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내리고, 소관 관아에서는 장례식에 따른 설비의 제공을 법전에서 정한 대로 하였으며, 6월 초 9일에 대덕산(大德山)에 있는 부인 홍(洪)씨의 영역(塋域) 속에 합폄(合?)하였다. 다음해에 임금이 공을 생각하고 친히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공의 모습을 비슷하게 그리고 술을 내려 제사지내게 하니, 막내아들 강(岡)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사례하고, 물러와서는 나에게 명(銘)을 청하기를, “분묘의 묘비명을 일찍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명(銘)할 수 있다.” 하였다. 나는 강과 친밀한 벗이기 때문에 공을 아버지같이 섬겼으니 아, 어찌 차마 명(銘)하겠는가. 공의 처음 이름은 해(?)요, 자(字)는 익지(翼之)였는데, 뒤에 흉악한 자와의 동명(同名)을 피하여 이름을 암(?)이라 고치고, 자를 고운(古雲)이라 고쳤으며, 진주의 속현 고성(固城)은 공의 본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진(瑨)인데 급제하고는 벼슬하지 않았고, 조부의 이름은 존비(尊庇)인데 유가의 도로써 충렬왕을 섬겨 30여 년간을 인물의 전선(銓選)을 맡았었으며, 성균관에서 선비를 고시 선발하였고 또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는데, 마지막 벼슬은 판밀직사사 감찰대부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우(瑀)인데, 재능을 인정받아 회양(淮陽)과 김해의 부사와, 전주와 진주의 목사를 역임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인애(仁愛)의 덕을 남겼고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였다. 어머니 박씨는 함양군부인(咸陽郡夫人)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지량(之亮)이며, 판삼사사(判三司事)인데, 지원(至元) 연간에 공로가 있어 천자가 금부(金符)를 하사하고 만부장(萬夫長)의 작호를 주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와 달랐고, 소학에 입학하였을 때 벌써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어졌다. 나이 17세 때에 계축년 과거에 급제하니, 당시 지공거였던 권 정승(權政丞)과 최 찬성(崔贊成)이 크게 칭찬하고, 또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는 재상의 그릇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이 크게 진보하고 명성이 날로 전파되니, 의릉(毅陵 충숙왕)이 공의 능력을 사랑하여 명하여 부인(符印)을 맡기고, 비성(?省)의 관직을 제수하니 교감(校勘)을 거쳐 재차 벼슬을 옮겨 낭관ㆍ주부(注簿)와 단양부좌도관(丹陽府佐都官)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 초기에 전의령(典儀令)으로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발탁되어 감찰집의(監察執儀)를 겸하였으며, 신미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고, 지원(至元) 경진년에는 다시 지신사(知申事)로 복직되었다가 곧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경질되고 봉익계(奉翊階)에 승급되었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성균관은 스승의 도(道)가 존재하는 곳이며, 임무 또한 중하다. 그러나 나의 정치를 돕는 양부(兩府)에서 실상 그 직무를 담당하고 있으니, 그 추밀동지(樞密同知)를 주라.” 하였다. 명이 내리자 조정 위의 선비들이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정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바로 정당문학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옮기고, 신사년의 공거(貢擧)를 주관하였는데, 이때에 권세를 잡은 자가 우리의 유가(儒家)를 비방하고 비웃으니, 공이 완전 고립무원의 입장이 되어 그 뜻을 마침내 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잡아 구제한 일도 많았다. 명릉(明陵)이 왕위에 서고 신임과 은총이 더욱 높아 찬성사(贊成事)에 승진시켰고, 총릉(聰陵)이 즉위하고 이르기를, “선왕의 옛 신하 중에 덕과 공로가 있는 자로 오직 이모(李某)가 나의 정사를 보좌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좌정승(左政丞)에 임명하더니, 얼마 안 되어 파면되고 말았다. 금상이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공을 등용하려다가 행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봉작을 습작하고 개부(開府)를 설치하게 하여 공경히 대우를 다하였다. 3년 계사에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나이가 장차 60이 되고 지위도 극에 달하였으니, 이때에 치사(致仕)하여 물러가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랴.” 하고,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려는 마음이 매우 급하여 나이와 덕이 높은 옛 신하들을 예로써 부르고, 공도 도로 유시하여 머물러 있게 하고, 때때로 불러 입대(入對)하더니, 드디어 공을 쓸 것을 결심하고 8년 무술에 다시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다. 기해년 겨울에 모적(毛賊) 이 북방 변경을 침범하므로, 공을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삼아서 가서 모든 군사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군사가 다 집합하기 전에 적이 벌써 가까이 접근하였다. 서경(西京 평양)을 지키던 신하가 주장하기를, “서경을 지키려는 계책은 불가하다.” 하고, 또 창고의 양곡을 불사르려고 하는 것을 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계책이 될 수 없다. 적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銳鋒)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중간에서 막지 못하면 그 형세가 반드시 우리 국도(國都)를 진동시킬 것이니, 적을 막으려면 이 성을 미끼로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 우리 백성에게 늙은이와 노약자를 데리고 동쪽으로 피하게 하고, 창고와 가옥을 단단히 잠그고 파괴하지 않으면, 적이 이를 보고 반드시 우리가 겁내고 있다고 하여 또한 잠시 주둔할 것이니, 우리가 겁낸다고 알면 마음이 교만해질 것이요, 잠시 주둔한다면 예봉이 쇠약해질 것이다. 그 동안에 우리는 군사의 집합을 기다렸다가 하루아침에 공격하여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니, 오늘 불살라서 없애려고 하는 것을 다른 날에 우리가 다시 쓰게 될지 어찌 보장할 수 있는가.” 하니, 달이 넘지 않아서 공의 예견처럼 과연 적이 패배하였고, 창고와 가옥도 처음처럼 완전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안동(安東)까지 임금의 행차를 호종한 공이 제일 컸기 때문에, 다음해에 적을 평정하고 상을 내리니, 공이 면전에서 아뢰기를, “지금 불행히 어려운 때를 당하여 장상(將相)은 반드시 인재를 써야 할 것이온데, 신이 조금도 장점이 없는 자로서 오랫동안 좌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니, 청하건대, 자리를 피하여 어진 이를 쓰도록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더욱 공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공신의 호를 더하여 내리고 봉조청(奉朝淸)에 봉군(封君)하였다. 공이 관직에 있을 때에는 부지런하여 근신하여 법도를 지켜 한 터럭만큼의 용서도 없었으며, 집에서는 비용의 유무를 묻지 않고 도서(圖書)로써 스스로 즐기니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선원사(禪源寺)의 식영암(息影菴) 노승과 방외(方外)의 벗이 되어 절간에 당(堂)을 짓고 해운(海雲)이라 편액해 달고는, 조각배로 왕래하면서도 가기만 하면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으니, 대개 공의 아담한 도량이 이와 같았으며 행촌(杏村)은 스스로 붙인 별호였다. 일찍이 몸소 《서경》의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임금에게 바치고, 그 아들 강(岡)에게 말하기를, “너는 마음 속에 명심하라. 나는 이미 늙어 책임질 직임도 말할 책임도 없으나, 너는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공이 비서(?書)로부터 재상직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인물을 전선(銓選)에 하는 데 참여하였지만 벼슬을 주고 빼앗는 데 있어 조금도 사사로운 정실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마치도록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전후의 문생(門生) 중에 고관에 오른 자와 명성있는 자가 많았고, 여러 아들도 모두 업적을 세웠으니 아,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을 이에 증험하겠도다.
부인은 시중(侍中) 충정공(忠正公) 자번(子藩)의 증손이요,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딸로 공보다 27년을 앞서 죽었는데, 며느리로서 집의 복록을 이었고 아내로서 군자의 덕에 짝하였으며, 어머니로서 자녀를 많이 두었다. 아들 네 명을 두었으니 인(寅)은 중정대부 종부령(中正大夫宗簿令)이요, 다음 종(宗)은 정순대부 판전객시사(正順大夫判典客寺事)이며, 다음 음(蔭)은 모적(毛賊)의 평정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는데, 신축년 겨울에 안주(安州)에서 전몰하였고, 그 다음이 강(岡)으로 지금 바야흐로 밀직사지신사 예문관제학 지제교 지전리사사(密直司知申事藝文館提學知製敎知典理司事)로 있다. 딸이 둘이니, 하나는 판사(判事) 김광병(金光丙)에게 출가했고, 또 하나는 회양 부사(淮陽府使) 조신(趙愼)에게로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 목(牧)은 낭장이다. 손자 모(某)는 모 관직에 있고, 또 모와 모가 있으며, 손녀 몇 명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높도다 문정공이여 / 巍巍文貞
철성에 개부하였도다 / 開府鐵城
처음 좌정승에 오르자 / 初宅左揆
아! 넘침을 경계하여 / 曰噫戒盈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서 / 奉身而退
푸른 물 밝은 산에서 / 水綠山明
구름이 말리고 펴듯이 / 如雲卷舒
아무 매임이 없이 무심하다가 / 杳乎無情
다시 묘당에 들어왔으나 / 還居廟堂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네 / 不動色聲
긴 뱀과 큰 돼지 같은 무리 / 長蛇封豕
서경에서 죽을 때 / 就戮西京
하늘이 공의 마음을 열어 / 天啓公衷
조용히 계책을 세워 / 從容策成
적에게 교만하게 하여 전복시키니 / ?驕以覆
9묘의 혼령이 놀라지 않았도다 / 九廟不驚
사람들이 비로소 탄복하니 / 人始歎服
시서로 용병하도다 / 詩書用兵
큰 공로 이미 세상을 덮었으니 / 大已蓋世
그 작은 것을 논평해 무엇하리 / 其細奚評
임금이 이르기를 원로여 / 王曰元老
몸은 비록 죽었으나 공로는 오히려 살았구나 / 雖死猶生
내가 헤아려 보건대 / 我儀圖之
높은 관원에게 모범이 되리 / 以風列卿
이미 초상화를 이루고 / 旣成旣肖
이어 관원을 보내어 재계하여 제사하니 / 明?繼?
경대부와 사대부에게 권면하고 / 列卿用勸
자손에겐 영광이로다 / 子孫與榮
예로부터 / 自古在昔
임금과 신하가 뜻을 모아 / 君臣聚精
그 망할 것을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은 / 不亡其亡
다름이 아니라 정성이로세 / 匪他曰誠
저 태사에게 고하노니 / 詔爾太史
이 명에 증험하리라 / 尙徵斯銘


[주D-001]아버지의 봉작을 습작하고 개부(開府)를 설치 : 부는 관청이라는 말인데, 여기는 아버지의 원 나라 벼슬 만부장(萬部長)을 습작하고, 그 만부장의 사무소를 차렸다는 말이 된다.
[주D-002]모적(毛賊)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서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대장인 모거경(毛居敬)이란 자가 이해 12월 말에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온 것을 말한다.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이색
 
 
송당 선생 김공 묘지명 병서 (松堂先生金公墓誌銘 幷序 )
 

지정(至正) 신사년에 내 나이 14세에 성균시에 응시했다. 고시장에 나아가 뜰 가운데 선생을 바라보니 포(袍)와 홀(笏)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는데, 엄숙한 모습이 마치 태산교악(泰山喬嶽)과도 같아서 여러 선비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떠들지 못하였다. 문생이 되어서는 왕래하면서 가르침을 들으니 따뜻한 말씨와 부드러운 낯빛으로 국법을 설명해 밝히고, 인재를 부지런히 권면하고 또 거듭 말하면서 나라의 풍속이 날로 쇠퇴하여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집에서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서적이 있어 담담하다. 동산 산마루에 솔을 재배하고 서재 남쪽 못 가운데 연꽃을 심었으며, 해마다 뜰에 모란이 활짝 피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문생들을 불러놓고 대부인(大夫人)께 헌수(獻壽)하니, 그 형제와 자손들이 항상 화기애애하여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신명까지 통하였다. 대부인이 91세의 장수를 누렸으니,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 아닌가. 병신년 3월에 대부인이 병환으로 돌아가니, 황고(皇考) 문정공(文正公)의 묘소 아래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서 살면서 복제(服制)를 마쳤다. 선생은 본래 병으로 걷기가 어려웠으나 아침저녁으로 전(奠) 올릴 때에 반드시 몸소 쓸고 닦기를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풍속에 부모의 분묘를 지킬 때에, 흔히 종을 대신시키고 사사로이 노복의 부역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차마 어버이에게 섭섭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몸소 이를 행하였으니, 이는 근래 재상 중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선생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광식(光軾)이고,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니, 광주(光州) 사람인 사공(司空)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사공이 고려의 태조를 도와서 공로가 있었고, 그 후예에 이름은 광서(匡瑞)요,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인 사람이 있었다. 중랑장이 휘(諱) 위(偉)를 낳았는데 벼슬은 삼사사(三司使)였으며, 삼사사가 휘 경량(鏡亮)을 낳았는데 대장군이며, 대장군이 감찰어사 휘 수원(須元)을 낳았는데, 처음에 삼별초(三別抄)가 순수히 귀순하지 않고 반심(叛心)을 품고 바다 섬 속으로 들어갔었는데, 어사공이 영광(靈光)의 원으로 있다가 이들에게 죽었다. 어사공이 국자좨주(國子祭酒) 휘 고영중(高瑩中)의 손자 모관(某官)을 지낸 휘 몽경(夢卿)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고씨는 나이 1백 2세가 되도록 살았다. 예전에 고씨의 꿈에 밝은 별이 품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쾌헌 선생(快軒先生)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4대의 왕조의 원로로 일국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고문적인 존재로 정승에 이르고 치사(致仕)하였다. 일찍이 국초 이래의 문장을 모아 《해동문감(海東文鑑)》이라 이름하여 간행한 적이 있고, 성균시를 관장하고 다시 지공거가 되어 공이 선발한 선비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죽계(竹溪)의 안근재(安謹齋)와 최졸옹(崔拙翁)은 그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분이었다. 먼저 행수낭장(行首郞將) 김의(金義)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광식(光軾)이요, 벼슬은 선부의랑(選部議郞)에 이르렀고, 계실(繼室)은 태조의 아들 효은(孝隱)의 후손인 시랑(侍郞) 정단(丁旦)의 딸로서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광철(光轍)은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고, 다음이 선생이요, 다음은 광로(光輅) 급제하였다. 맏딸은 정당문학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밀양군(密陽君)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공의 삼형제가 이미 과거에 올라 대부인이 나라에서 주는 녹으로 그 몸을 마쳤다. 박씨의 아들 4명과 안씨의 손자 3명이 또 모두 과거에 오르니,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공은 지원(至元) 갑자년 정월 갑자일에 출생하자, 이미 신장이 2척(尺)이 넘어 부모가 기특하게 여겨 몹시 사랑하였다. 관례 후 황경(皇慶) 계축년에 과거에 급제하니, 좌주(座主) 일재선생(一齋先生) 권정승(權政丞)이 예법을 아는 것을 사랑하여 후히 대하고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직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에 충혜왕을 따라 원 나라 서울로 갔는데, 그 공로로 사복시 승(司僕寺丞)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도관 정랑(都官正郞)으로 옮겼다. 그 뒤 지원(至元) 기묘년에 충혜왕이 조적(曹?)에 의해 거의 폐위될 뻔했다가 다행히 이겼으나, 그의 일당이 원 나라 권력층에 많이 붙어서 기필코 자신들의 음모를 성취시키려고 하였다. 왕이 북경으로 갈 때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이 위태로우실 것이니 나만 어찌 차마 여기서 혼자 면하겠느냐.” 하고 수종해 갔다가 천자의 성명(聖明)하심에 힘입어 다시 작위를 회복하고 돌아오니, 때는 경진년 가을 7월이었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참전선사(參銓選事)가 되고, 성균좨주(成均祭酒)ㆍ삼사좌윤(三司左尹)ㆍ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등 관직을 여러 번 전전하였으나, 모두 관직(館職)과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다음해 가을에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지금의 지밀직사사 성사달(成士達) 등 99명을 선발하니, 당시에 선비를 많이 얻었다고 일컬었다. 충혜왕이 평소에 공의 엄중함을 꺼렸고, 좌우의 사람들도 대부분 꺼렸는데, 다만 구실로 삼을 것이 없었다가 드디어 말하기를, “김공은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고 벼슬길에 나오는 것은 그의 본래의 뜻이 아니다.” 하니, 임금이 차차 이 말을 믿게 되어 드디어 공의 직임을 갈아버리니, 여러 소인들이 더욱 기세를 폈다. 계미년 겨울에 악양의 화[岳陽之禍 충선왕이 귀양간 것]가 일어나고, 갑신년에 충목왕(忠穆王)이 왕위에 서면서 공을 기용하여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고 다시 지신사(知申事)로 옮기니, 권력을 잡은 대신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제수하였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이를 후회하고 밀직부사 제조전선사(密直副使提調銓選事)에 임명하였다가 곧 지사(知司)로 승진되었다. 기축년에 충정왕(忠定王)이 왕위에 오르자 서연(書筵)을 열어 공을 스승으로 삼으니, 공이 굳게 사양하였고, 첨의(僉議)로 들어가서 평리(評理)가 되고, 광정대부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어, 이어 제조전선사(提調銓選事)를 겸하고 있다가 바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고쳐 주니,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문인에 대한 선발은 이조에서 관장하고 무신에 대한 선발은 병조(兵曹)에서 관장하는데, 정방(政房)에서 총괄하는 것은 권신(權臣)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니 아름다운 법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신의 말씀을 들어 주시어 옛 제도대로 하시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고 하며 공에게 명하여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임하게 하였다. 신묘년 10월에 현릉(玄陵)이 왕위에 오르자, 공은 두문불출하고 대부인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절을 다하였다. 대부인이 돌아가시자 여묘(盧墓)를 마칠 때에 이르러서는 시중(侍中) 홍양파(洪陽坡)선생이 당대 이름 있는 경과 재상들과 같이 찾아가서 그 노고를 위로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나이 63세로 처음 여기 와서 살 때에는 항상 하루아침으로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 종족의 수치나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더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나의 고비(考? 돌아가신 부모)의 덕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위문갔던 사람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탄복하였다. 여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집 북쪽 모퉁이에 판위(版位)를 마련해 놓고, 행사할 때마다 곡읍(哭泣)을 그치지 않았다. 숙병으로 인하여 문밖을 나가지 않으니, 현릉(玄陵)이 그 명성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공에게 유시하기를, “공과 더불어 말하고자 생각해 온 지 오래되었소. 과인으로 하여금 한 번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자식과 조카에게 부축하게 하여 조정에 들어가니, 임금이 이르기를, “연령과 안색은 그다지 쇠하지 않았는데도 병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한참 동안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그리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이 사는 마을에 영창방(靈昌坊) 효자리(孝子里)라고 정문(旌門)을 세워 표시하고, 또 그 마을의 몇 호(戶)의 부세를 면제해 주어 공을 받들게 하였다. 신축년 겨울 11월에 홍건적을 피하여 고창현(高昌縣)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러 살던 중 계묘년 3월에 경미한 병증을 느꼈으나 행동과 언어가 조금도 변함이 없더니, 14일에 날이 저문 후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올해 나이가 70이니 죽은들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소. 남자가 부인 앞에 숨을 거두지 않는 것이 옛 예이니, 여러 여종과 더불어 물러가 있으시오.” 하고, 또 경계하기를, “음성을 높이거나 급한 말로서 나를 동요시키지 말라.” 하더니, 조금 있다가 숨이 끊어지니 평소 수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아들과 사위들이 영구를 받들고 서울로 돌아와서 모월 모일에 덕수(德水)에 있는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
공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시호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의 딸을 아내로 맞아 자녀 둘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흥조(興祖)로 성격이 쾌활하며 큰 뜻이 있었고, 벼슬이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軍器監)에 이르렀으며, 수원(水原)ㆍ해주(海州)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매우 현저하였으나, 취성(鷲城 신돈)의 손에 죽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 딸은 봉선대부 내부부령(奉善大夫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출가하였으니,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다. 손자는 남녀 몇이 있으니, 군기는 감찰대부 신중전(申仲全)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낭장 송의번(宋義番)에게 출가하였다. 내부(內府)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총(?)은 학문을 좋아하고 뜻이 고상하였으며, 전(前) 봉선대부 좌우위 보승호군(奉善大夫左右衛保勝護軍)이었고, 다음 포(苞)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전의녹사(典儀錄事)를 역임하였다. 외증손 몇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호군(護軍)이 공의 행장으로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묘비명을 청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마땅히 명을 지어야 하네.” 하니, 이에 받아 가지고 서술하는 바이다. 아, 선생의 덕행과 정사가 이처럼 현저하니, 자손이 많아야 마땅하거늘 군기감의 후손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정하지 않은 것이요, 또 이것이 하늘의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과 다른 바이다. 아, 슬프도다. 하지만 다행한 일은 박씨가 있다는 것이다. 선비가 공을 세워 그 외조부를 드러내는 자가 역사서에 끊이지 않았으니, 박씨는 힘쓰고 또 힘쓰라.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동쪽 언덕 / 惟東有岡
푸른 저 솔숲은 / 有松蒼蒼
군자의 저택이요 / 君子之宅
못물 가득히 차고 / 池水之盈
연꽃 향기 맑음은 / 蓮香之淸
군자의 덕이로다 / 君子之德
나아가 임금을 섬길 적엔 / 出以事君
정사가 있고 문채가 있어 / 有政有文
우리의 왕국을 바로잡았고 / 正我王國
들어와 어버이를 모실 적엔 / 入以事親
늙을수록 더욱 참되어 / 愈老愈眞
백성의 풍속을 변화시켰네 / 化我民俗
선생의 높은 풍모 / 先生之風
널리 해동을 덮어 / 被于海東
길이길이 법받을 것이로다 / 永世攸則
내 이 명을 지음은 / 我作斯銘
선생을 사적으로 좋아함이 아니요 / 匪私先生
사필의 곧음이로다 / 史筆之直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해평군 시충간 윤공 묘지명 병서 (海平君諡忠簡尹公墓誌銘 幷序 )
 

선산(善山)의 속현 해평(海平)의 명망 있는 대족(大族)은 윤(尹)씨이다. 휘(諱)가 군정(君正)인 분은 고왕(高王)과 원왕(元王)을 내리 섬겨,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에 이르렀고, 휘 만비(萬庇)는 충렬왕을 섬겨 기사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최종 벼슬이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상호군이었다. 휘 석(碩)은 정승공(政丞公)으로 전에 원 나라의 사자가 왔는데, 정승공이 당시 별장으로 있으면서 잔인(盞人 술잔을 전하는 사람)으로 임금 앞에 모시고 섰더니, 사자는 두 왕자(王子)가 원 나라 조정에 입시하라는 천자의 교지를 전하였다. 정승이 이를 듣고 홀로 ‘나는 마땅히 아우를 따르리라.’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고하였더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의 계책은 잘못인 것 같다. 왕자를 쫓는다는 것은 뒷날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형이 있는데 아우가 나라를 소유하는 법이 있느냐.” 하였다. 공은 다시 고하기를, “저도 그런 줄은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우를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나 그 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계책을 결정한 까닭입니다.” 하니, 아버지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형은 원자(元子)로 일찍이 사망하였고 아우는 바로 충숙왕(忠肅王)인 것이다. 공이 왕자를 따라 원 나라 서울에 가니, 요좌(僚佐)로서 공보다 높은 자가 없었고, 그 뒤에 벼슬이 도첨의 우정승 판전리사사(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에 이르러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고, 자급은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충근절의 동덕찬화 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의 호를 하사받아 또한 공보다 나은 자가 없었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일로 어찌 천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천자가 공의 이름을 듣고서 특별히 진국상장군 고려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都元帥)를 제수하여 특별히 총애하였다. 해평부원군이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 이백년(李百年)의 딸과 결혼하여, 지대(至大) 경술년 4월 계해일에 공을 낳았다. 연우(延祐) 경신년에 공의 나이 11세로 태운사 진전직(泰雲寺眞殿直)에 보직되고, 15세에 사설직장(司設直長)에 보직되었으며, 16세에 낭장에 제수되고, 19세에 호군에 임명되니, 영릉(永陵 충혜왕)을 따라 원 나라에 있던 다음해였다. 이때 진저(晉邸)가 죽고 문종(文宗)이 강남으로부터 먼저 궁에 들어와서, 지위를 정하고서 명종(明宗)을 북방으로부터 맞아들이는데, 문종이 교외로 나아가서 위로할 때에 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가 독약 넣은 술을 바쳐 명종이 한밤중에 붕(崩)하니, 육군(六軍)이 소란하였다. 공이 재상 조익청(曹益淸) 이군해(李君?) 등 관원 등과 더불어 충혜왕을 도우니, 임금이 이에 의지하여 두려워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신의 철권(鐵卷)을 하사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에 대호군에 오르니 공의 나이 21세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승진되고, 명릉(明陵 충목왕)이 즉위하던 5월에 상호군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다. 다음해 4월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기니, 왕 정승(王政丞)이 조정의 권한을 잡고 옛법을 써서 문관의 선임은 전리(典理)로 돌려보내고, 무관의 선임은 군부로 돌려보내니, 공이 정승을 보좌함에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다음해 평양윤(平壤尹)으로 나갔는데, 공이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을 시험한 것으로, 겨우 1년 만에 치적을 이루어 다시 지밀직(知密直)으로 부르니, 이때 공의 나이 38세였다. 현릉(玄陵) 5년에 두 번 지밀직사사가 되었고, 그해 겨울에 표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갔는데, 이는 원 나라에서 의복을 하사한 사은(謝恩)의 사절이었다. 18년에 세 번 지밀직사사를 역임하였고, 홍무(洪武) 경술년에 밀직사에 승진되고, 다음해 지문하성사 상의회의 도감사(知門下省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으며, 또 다음해에 평리(評理)로 승진하고, 겨울에는 중대광 해평군(重大匡海平君)에 봉하였다. 염곡성(廉曲城) 윤칠원(尹漆原) 등 여러 기로(耆老)들과 결사(結社)하여, 조용히 논 지 10여 년, 임술 9월에 병을 얻어 10월 9일에 단정하게 앉아서 서거하니, 공의 나이 73세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남과 간격이 없었으며, 몽고어(蒙古語)에 대략 통하였고, 공의 행동도 북방사람과 흡사하였다. 정사에 있어서는 대체를 따르려고 힘쓰고, 너무 각박하지 않은 장자(長者)였다. 공이 무릇 두 번 장가갔으니,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조(趙)씨는 대광첨의찬성사 상의보문각대제학시 문극공(大匡僉議贊成事商議寶文閣大提學諡文克公) 연수(延壽)의 딸이요, 이(李)씨는 대광 월성군(大匡月城郡) 휘 천(?)의 딸이다. 조씨가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 보(寶)는 벼슬이 응양대호군에 이르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이 진(珍)인데, 중대광 해평군(重大匡海平君)이다. 손자 손녀 몇 명이 있으니, 응양대호군의 아들 가관(可觀)은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으로 경상도 부원수로 나가 있고, 딸 하나는 위위주부(尉衛主簿) 이지(李持)에게로 출가하였다. 해평군의 아들 창(彰)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며, 다음 신(莘)은 지금 덕창부 사인(德昌府舍人)이며, 다음 수(須)는 지금 춘추 검열(春秋檢閱)이고, 큰 딸은 판사(判事) 김구용(金九容)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낭장 홍윤복(洪潤福)에게로 갔으며, 그 다음은 사설서령(司設暑令) 성보(成溥)에게로 시집갔다. 이씨 부인은 자녀가 없었다. 증손과 증손녀 몇 명이 있으니 누구 누구이다.
공이 표문을 받들고 사은사로 갈 때에 나는 서장관으로 따라갔으며, 공의 큰 아들은 나와 동갑이다. 그러므로 공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것이다. 내가 요행이 추부(樞府)로 들어가니 공이 다시 복직하여 나와 동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예전처럼 공을 섬겼고, 공도 또한 아들같이 나를 대하였으니, 내가 공의 분묘에 명을 써야 마땅하고, 공의 막내아들 정당공(政堂公)이 이제 습봉(襲封)되었고 그가 지공거로 있을 때에 또 내 아들 종선(種善)을 선발하여 문생으로 삼았으니, 또 어찌 명을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한다.
해평의 윤씨가 / 海平之尹
고왕과 원왕을 도우니 / 左右高元
군자의 은택으로 / 君子之澤
흐르는 경사가 끊임이 없도다 / 流慶源源
원수공이 / 惟元帥公
우뚝히 시중이 되었고 / 蔚爲侍中
충간공이 뒤를 이으니 / 忠簡承之
장자의 풍모가 있어 / 有長者風
젊어서는 재덕이 뛰어났고 / 少而翹英
늙어서는 영화를 누렸네 / 老而享榮
막내가 뒤이어 정승 되고 / 季子繼相
또 문형을 맡았네 / 而典文衡
손자는 중추에 제수되고 / 孫拜中樞
바닷가를 절충하였네 / 折衝海隅
공의 가문은 / 惟公之門
중도에 맞아 / 弛張攸俱
무릇 하늘이 상서를 내림은 / 凡厥降祥
오직 착함을 표창함이리라 / 惟善是彰
공에게 아부함이 아니로다 / 我非諛公
공은 길이 이 무덤에 편안하시리 / 公永于藏


[주D-001]진저(晉邸) : 원 나라 황족으로 후에 황제가 될 사람 진왕임.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이색
 
 
유원 고려국 충근절의 찬화공신 중대광 서령군 시문희 유공 묘지명 병서 (有元高麗國忠勤節義贊化功臣重大匡瑞寧君諡文僖柳公墓誌銘 幷序 )
 

현릉(玄陵) 공신에 문희공(文僖公)이 있으니 성은 유(柳)씨요, 이름은 숙(淑)이며, 자는 순부(純夫)이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시학(侍學)으로 현릉을 따라 북경에 가서 머물렀고 11년 만에 새 책력을 받아가지고 동국으로 돌아와서 정사의 기밀(機密)에 15년 동안 참여하여 관장하였고, 벼슬에서 사퇴하고 고향으로 물러가 취성(鷲城)의 화란을 피한 지가 4년 동안이었다. 이미 졸한 지 4년 만에 취성이 복주(伏誅)되었고, 또 6년을 지나서 태실(太室)에 배향되었으며, 또 3년을 지나서 한산(韓山) 이색(李穡)이 그 무덤에 명(銘)하니, 아들 밀직공(密直公)의 요청으로 된 것이다. 아, 어찌 차마 명하겠는가. 지정 병술년에 선군 가정공(稼亭公)이 동방에 새 책력을 반포하려고 올 때에 문희공이 따라왔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직접 사귈 수 있었다. 그 뒤에 같이 현릉을 섬겨 내가 혹시 말을 망발하여 임금의 노여움에 부딪치면 공이 매양 이를 구제하였으니, 그 묘에 명을 쓰는 것은 의리상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 사위 이행(李行)이 지은 공의 행장을 상고하건대, 유씨는 서주(瑞州) 사람이다. 공기(公器)라는 분은 승봉랑 합문지후(承奉郞閤門祗候)요, 굉(宏)은 증 첨의평리 상호군이며, 성계(成桂)는 통의대부 태상경 지다방사(通議大夫太常卿知茶房事)이니, 공의 증조ㆍ조부ㆍ부친의 3대이다. 어머니는 강(姜)씨이니, 증 도첨의찬성사(贈都僉議贊成事) 문세(文世)가 공의 외조부이다. 부인으로는 양(楊)씨와 오(吳)씨가 있었다. 아들 실(實)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上護軍)이요, 후(厚)는 봉상대부 군부총랑(奉常大夫軍簿摠郞)이며, 딸이 셋이 있었으니, 큰 딸은 중현대부 선공령(中顯大夫繕工令) 김자충(金子?)과 승봉랑 판도좌랑 최정유(崔正濡)에게 출가하니, 이는 양씨의 소생이고, 하나는 선덕랑 의영고부사(宣德郞義盈庫副使) 이행(李行)에게 출가하였으니, 이는 오씨의 소생이다. 손자 몇 명이 있으니, 밀직부사의 아들 혜강(惠剛)은 별장(別將)이요, 혜남(惠南)은 부도(浮圖 불교)의 법을 배웠고, 혜화(惠和)는 산원(散員)이며 딸은 정사년 과거에 장원(狀元)하여 승봉랑 전의주부(承奉郞典儀注簿)인 성석인(成石?)에게 출가하였다. 총랑(摠郞)은 아들 기(沂)와 한(漢), 딸 하나가 있다. 외손 몇 명이 있으니 선공령의 아들은 분(扮)과 담(潭)이요, 부사의 아들은 적(?)과 적(迹)이며 딸 하나가 있다. 좌랑은 딸 하나뿐이다. 공이 처음 입학할 때에 정사(精舍)의 주인이 꿈에 원우(院宇)를 깨끗이 소제함을 보고, “어째서 이렇게 소제하느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유승지(柳承旨)가 온다.” 하더니, 다음날 공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16세에 신미년 진사과에 합격하니, 간의대부 김우유(金右?)가 시관(試官)이었고, 25세에 경진년 급제과(及第科)에 합격하니 정승 균헌(筠軒) 김영돈(金永暾)과 찬성사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공의 좌주(座主)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안동사록(安東司錄)에 선발 임명되었는데, 때마침 현릉(玄陵)이 왕대제(王大弟) 강릉부원군(江陵府院君)으로 원 나라 황제에게 입시하게 되니, 공은 벼슬을 버리고 따라갔다. 4년이 지나 갑신년에 명릉(明陵)이 즉위하자, 강릉부원군을 따르던 요좌(僚佐)들 가운데 절의를 지키지 않은 자가 많았으나 공만이 홀로 변하지 않으니, 명릉이 이를 의롭게 여겨 겨울에 길창부 전첨(吉昌府典籤)에 제수하였고, 다음해 개성참군(開城參軍)에 올랐으나 공은 더욱 굳게 의리를 지키고 딴 마음이 없었다. 일찍이 한 번 어버이를 뵙기 위해 나라에 오니, 사관과 한림원에서 서로 소를 올려 공을 천거하여 춘추관 수찬관에 보직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유림은 중요하게 선발되었다. 내 비록 재주가 없으나 또한 나의 어버이를 위로하여 드리게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자리에 나가니, 이는 바로 책력을 반포하던 해였다. 다음해 정해년에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의 실록을 편수해 완성하자, 공에게 명하여 역마로 달려가서 해인사고(海印史庫)에 간직해 두도록 하였다. 가을에 삼사도사(三司都事)로 옮기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북경으로 갔다. 이때 전선(銓選)을 맡은 관원이 말하기를, “유사관(柳史官)은 사직(史職)에 있으면서 이미 공로가 있었으니, 마땅히 기록하여 등용해야 합니다.” 하여, 6품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명릉(明陵)이 돌아가시자, 왕 정승(王政丞)이 창의(倡議)하여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현릉(玄陵)으로 왕위를 잇게 하기를 청하고, 또 기로(耆老)와 여러 관원의 글을 중서성에 진달하니, 실로 가정공(稼亭公)이 그 붓을 잡았던 것이다. 조석 사이에 명이 곧 내리게 되었는데, 공은 모친이 병환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청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를 말리니, 공은 말하기를, “충(忠)과 효(孝)가 명칭은 다르나 실상은 같은 것이요 본말에 있어서만 차례가 있을 뿐이다. 효도를 폐한다면 충성이 장차 어디서 나오겠는가. 또 더욱이 충성을 바칠 날은 길어도 효도할 날은 짧소. 만일에 돌아가시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갔다. 모친은 공을 보고는 너무 기뻐서 질병이 즉시 나았다고 한다. 또 나의 선인(先人) 가정공(稼亭公)을 좇아 금강산에 유람하여 동해 해변을 두루 보고 공이 말하기를, “지금 북경의 왕저(王邸)가 또 전날과 같으니, 내가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북경으로 가니, 이때가 총릉(聰陵) 원년인 기축년이었다. 신묘년 9월에 현릉이 즉위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요양성(遼陽省)에 이르러 밀직사좌부대언 군부총랑(密直司左副代言軍簿摠郞)에 제수되고, 봉상대부(奉常大夫)의 자급에 올라 예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지삼사사(藝文館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編脩官知三司事)가 되어 군국의 중요한 직무를 참여하여 결정하라는 왕지가 있었다. 그러나 소명(召命)이 아니면 일찍이 대내(大內)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 다음해 우대언 좌사의대부(右代言左司議大夫)에 승진되었으나 재상 조일신(趙日新)이 공을 싫어하기 때문에 공은 관직의 해면을 빌고 덕수장(德水莊)으로 물러가서 있었다. 그러나 바로 부친상을 당하였고 조일신은 불만을 품은 자들을 모아서 그들이 시기하던 사람들을 죽이더니 얼마 안 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계사년 4월에 기복(起復)되어 대언(代言)에 봉직하였고, 갑오년 2월에 좌대언 지군부사사(左代言知軍簿司事)로 옮기고, 을미년 정월에는 성균시(成均試)를 주재하여 전익(全翊) 등 99명을 뽑았으며,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판도판서(版圖判書)ㆍ전리판서(典理判書)로 두 번 전직되었다. 병신년에 자정(資正) 강금강(姜金剛)이 금강산에 향(香)을 내리는데, 공에게 명하여 그를 호송해 가게 하였으며, 산에 도착해서 공이 말하기를, “내가 질병이 생겨 조금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니, 공은 잘 말해 달라.” 하고서, 청련사(靑蓮寺)에서 수개월을 거주하고 있던 중 왕이 공을 부르기에 할 수 없이 조정으로 돌아왔다. 5월에 기씨(奇氏)의 화란이 일어나고 밀직(密直)으로 들어가 제학(提學)이 되었다. 새 관제가 행함에 따라 은청영록대부 추밀원 직학사 한림학사승지 상장군(銀靑榮祿大夫樞密院直學士翰林學士承旨上將軍)이 되고, 난동이 진정되자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받으니, 공이 여러 공에게 말하기를, “공신 녹권은 곧 죄안(罪案)과도 같은 것이다. 서로 면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하기를 곽분양(郭汾陽 곽자의(郭子儀))과 같이 하기를 바란다.” 하고, 또, “군자는 편벽되지도 당파를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니, 나는 결코 남들과 붕당(朋黨)을 맺지 않을 것이다. 한마음으로 왕실을 받들어 사적인 무리가 없으면 다행이다.” 하였다. 바로 부사(副使)로 고쳐 제수되고, 정유년에 동지상의회의도감사(同知商議會議都監事)에 승진되고, 기해년에 다시 지원제점사 천대사(知院提點司天臺事)로 승진되었다.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황주(黃州)를 침범하니, 그 상황이 몹시 급박하게 되어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공이 조용히 아뢰어 남행(南幸)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국가가 믿는 것은 성지(城池)와 양식입니다. 이제 성곽이 완전하지 못하고, 창고에 저축이 없으니, 만일 적이 사교(四郊)를 포위한다면 장차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하였던 것이다. 안동부(安東府)에 이르러서는 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동수국사(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同脩國史)가 되었다. 다음해에 적이 평정되자 세 원수(元帥)의 공로가 더욱 높아지더니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독단으로 살해하고 또 말하기를, “이제 총병관을 죽였으나, 유모(柳某)가 그 속에 있어 매양 기이한 묘략을 꾸미니 이 자가 두렵다. 제거해 버리는 것이 편하다.” 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기란 어려운 것인데 이제 여러 장수들이 신을 꺼려하는 것은 다만 신이 전하의 좌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을 축출하신다면 신은 한낱 포의(布衣)입니다. 누가 다시 신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내보냈다. 동경부에 도착한 지 10여 일에 공의 조치가 벌써 백성의 소망에 찼던 것이다. 국가에서 이미 원수의 죄명(罪名)을 내려 단죄하고, 3월에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불러들이어 광정대부(匡靖大夫)의 자급에 오르고, 충근절의찬화(忠勤節義贊化) 여섯 자의 공신 칭호를 하사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공을 수개월도 머물러 두지 않고 빼앗아 가기를 이같이 빨리한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였다. 그해 가을에 거가(車駕)를 청주(淸州)로 옮기고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박실(朴實) 등 33명을 선발하니, 당시에 여론이 선비를 많이 얻었다고 일컬었고, 겨울에 평리제점서운관사(評理提點書雲觀事)로 옮기게 되었다. 옹주(翁主)에 봉한 홍씨(洪氏)가 남양(南陽)에 있었는데, 빈곤하여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이를 불쌍히 여기고 안렴사 이지태(李之泰)에게 수교(手敎 친필로 쓴 편지)를 내려 쌀을 내리라고 하였다. 이지태가 말하기를, “무릇 임금의 명이란 반드시 양부(兩府)를 거쳐서 밖으로 반포하는 것인데, 이제 장차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받지 않을 수도 없고, 열어 볼 수도 없다.” 하고 책상 위에 그대로 놓아두니, 그 사람(홍씨)이 이를 노여워하여 다시 내전으로 보냈다. 임금은 이지태가 불공(不恭)하다 여기고, 사자를 보내어 이지태에게 착고를 채워 잡아오게 하니 그 죄를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이 그 불가함을 견지하니, 임금이 몹시 노하여 이르기를, “나라의 일이 모두 경들을 거쳐야만 하는가.” 하고 공을 주시하고는, “나가라.” 하니, 공이 급히 나왔다. 임금이 곧 다시 공을 부르자 공이 앞에 나아가서 엎드리고 이지태의 말을 상세히 주달하고 또 아뢰기를, “만일 전하께옵서 계속 노하신다면 신은 후세에 이를 구실로 들고 나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이에 이지태의 일을 불문에 붙이고 말았다. 후일에 공을 부르니, 공이 사죄하기를, “신이 성상의 은혜를 받아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티끌 만한 보답도 없이 도리어 입과 혀로써 망령되이 천위(天威)에 부딪쳤으니 그 죄가 용서받지 못할 지경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황금을 하사하여 이를 위로하시기를, “경의 곧은 말을 포상하는 것이다.” 하였다. 간간이 분에 넘치는 자리에 있기 어렵다고 치사(致仕)하여 여생을 보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오랜 뒤에 이를 허락하고 서령군(瑞寧君)에 봉하였다. 이어 선산에 성묘도 하고 치전(致奠)을 드리기 위하여 서울에 갈 것을 청하니, 다음날 다시 불렀다. 계묘년에 임금이 서울로 돌아와서 흥왕사(興王寺)를 임시 행궁으로 삼았는데, 적이 밤중을 이용하여 몰래 안으로 들어와 숙직하던 관원을 살해하므로 임금이 밀실로 피신하고 적들이 서로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 한 적이 “무슨 까닭으로 늦게 왔느냐?” 하고 묻자, 또 다른 적이 대답하기를, “홍모(洪某)와 유모(柳某)를 죽이느라고 늦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여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임금을 구원하고 공도 또한 따라 들어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이미 죽어 다시 못 보리라고 생각하였다가 경의 얼굴을 보니, 그 이루어진 일에 의혹이 들었다. 경의 말을 듣고 나니, 의혹이 비로소 풀린다.” 하였다. 당일로 성안에 들어가 정당문학에 임명되고 10월에는 감찰대부를 겸하였다. 갑진년에 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영서운관사(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領書雲觀事)에 승진되었고, 을사년 3월에 서령군(瑞寧君)에 봉하였으니, 신돈 때문이었다. 신돈이 대궐 안을 출입할 때에 밖으로는 승려를 가탁하고 안으로는 간사한 꾀를 품고 있으므로 공이 점점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머리를 길러 관을 씀에 이르러서 영도첨의(領都僉議)가 되고 상벌의 권한을 잡고는 대신들을 모략 중상하니, 그 기염은 실로 무서울 만하였는데, 공은 매양 불러도 절대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에 이르러 전리(田里)로 돌아갈 것을 청하고 이산현(伊山縣) 가야산에 집을 짓고 한가로이 만년을 보내자 경산(京山)의 초은(樵隱)선생이 시를 보내기를,
전에 위태로울 때 사직을 안정시키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평지에서 신선이 되었네 / 更從平地作神仙
한 시구(詩句)가 있었다. 무신년에 신돈이 참소의 공작을 편 지 이미 오래되어 그 계획이 시행되어 공을 영광군에서 목을 졸라 죽게 하니, 때는 12월 21일이었다. 공이 물러가 은거하고 있을 때에 국사가 평일과 다름을 듣고 일찍이 눈물을 흘렸다. 그 화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가족들이 공의 평소의 말에 의하여 용뇌(龍腦)를 보내며 말하기를, “달아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좋은 말을 보내며 말하기를, “공 스스로 택하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생각해 보면, 임금과 아버지는 하늘과 같으니, 하늘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또 생사란 천명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순하게 받아야 할 것이다. 도망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죽음을 당할 때에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 뒤에 신돈의 죄상이 탄로되고 실각됨에 이르러 임금이 비로소 깨닫고서 몹시 애도하며 전지를 내려 공의 원통함을 씻어 주고, 다시 시호를 문희공(文僖公)이라 내리고 임자년 정월 11일에 덕풍현(德豊縣) 가야동(加也洞)에 예법대로 장사하였고, 병진년 11월에 현릉(玄陵)을 부묘(?廟)할 때에 조정에서 공의 배향을 논의하여 공이 이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 이는 사후에 베풀어진 영전(榮典)의 대강이다. 그 계획의 치밀함과 조행(操行)의 자상함을 말한다면, 사람을 천거하여 쓰는 데 있어서는 일찍이 그 본인에게 말하는 법이 없었고, 사람을 죄주고 파출하는 데는 독단하여 결정하는 적이 없었으며, 큰 일을 당하거나 큰 의심을 결단하는 데 있어서도 일찍이 그 사이에 의심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정명(精明)과 인서(仁恕)의 두 가지를 다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맏아들이 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문희공의 자질은 / 文僖有質
정결한 아름다운 옥이요 / 美玉之潔
문희공의 행실은 / 文僖有行
훈훈한 바람이로다 / 薰風之發
일을 당하여는 정밀하고 강하게 처리하고 / 遇事精彊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서 / 存心惻?
우리 현릉을 도와 / 相我玄陵
평시나 위험할 때나 한결 같았네 / 夷險一節
늙음을 고하고 물러나자 / 告老懸車
왕명을 가탁하여 죽음을 내리니 / 矯命賜?
운명을 어찌하리 / 命也奈何
하지만 때가 와서 원한을 밝게 씻고 / 時哉昭雪
태실에 올라 배향하니 / 升于大室
진실되도다 그 공렬이여 / 允矣功烈
천도가 어김이 없어 / 天道不爽
밝게 대함이로다 / 赫如對越
무덤의 돌에 새겨 / 刻石幽室
훗날의 철인에게 고하노라 / 用告來哲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이색
 
 
문경 이공 묘지명 병서 (文敬李公墓誌銘 幷序 )
 

선군(先君)이 가정공(稼亭公)이 일찍이 정해년의 공거(貢擧)를 주관하여 선발한 선비에 알려진 인물이 많았으니, 문경(文敬) 이공(李公)이 당년 15세로 신채(神采)가 뛰어나 당시에 이미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다고 알려졌고, 그 뒤에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지식이 높아짐에 따라 명성이 날로 더욱 중해지니 당당한 재상이 될 인재였다. 공이 병에 걸리게 되자,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사람이 어찌 여기에서 그칠 리가 있겠는가.” 하였고, 사망하자 또한 말하기를,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던가. 약물을 잘못 쓴 것이었던가. 어찌하여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하고, 사대부는 조정에서 서로 조상하고, 친척과 친구들은 신위(神位)에 가서 서로 곡하였으며, 길가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애석해하였다. 임금도 이 부고를 듣고 몹시 애도하여 후히 부의(賻儀)하도록 명하고, 태상(太常)에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추밀직(樞密職)은 시호를 내리지 않으나, 내가 특별히 이강(李岡)을 포상하는 것은 문신으로 오랫동안 노력해 온 사람은 정당문학 송수(松壽)였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와 몸은 달라도 공이 같은 사람으로는 이제 강이 있을 뿐이다.” 하였고, 시호를 논의하여 올리자 또 이르기를, “문경(文敬)은 오직 이강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였으니, 아, 공은 유감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공의 벗 상당(上黨) 맹운(孟雲) 한수(韓脩)는 곡성(曲城)의 염흥방중창(廉興邦仲昌)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계획을 말하기를, “우리의 벗이 죽었으니 이 세상 사람이 어느 누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의 벗이 전할 만한 것을 전하고 죽었다면, 이는 우리 셋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그 슬픔을 자위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묘비명은 나에게 부탁하고 한수의 글씨와 염흥방의 전서(篆書)로 쓰며, 돌에 새기는 공역은 중창(仲昌 염흥방)과 맹운(孟雲 한수)이 주관하기로 하니, 아, 슬프다. 내 어찌 차마 내 벗의 묘에 명하겠는가. 공의 이름은 강(岡)이요, 자는 사비(思卑)이니, 처음의 이름이 강(綱)이었던 것을 같은 항렬의 이름을 피하여 드디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던 것이요, 성은 이씨이니 고성(固城)은 본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존비(尊庇)이니 판밀직사사 겸 감찰대부로 경릉(慶陵) 왕조에 이름이 있었고, 조부의 휘는 우(瑀)이니 철성군(鐵城君)이며, 아버지의 휘는 암(?)이니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서법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니 호는 행촌(杏村)이다. 어머니 홍씨(洪氏)는 시중(侍中) 충정공(忠正公) 자번(子藩)의 손녀요,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딸이다. 처음에 가문의 공으로 복두점 녹사(?頭店錄事)에 임명되었고, 급제한 후에는 경순부(慶順府) 승(丞)이 되어 전의(典儀)에 있어서는 직장(直長)ㆍ주부(主簿)와 또 영(令)을 역임한 바 있고, 병부(兵部)의 원외(員外)와 문하성의 사간(司諫)과 이부(吏部)의 낭중과 호부(戶部)의 시랑을 지내고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는 대언(代言)ㆍ지신사(知申事)ㆍ제학(提學)ㆍ부사(副使)를 역임하였으며, 내외제(內外制)의 관직(館職)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러서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총릉(聰陵)이 서연(書筵)의 강의를 열고 있을 때에 시독(侍讀)에 선발 보충되어 손위(遜位)하게 되자 공이 따라가서 거하니 그 뜻을 세운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금상이 즉위한 지 5년째인 을미년에 공을 불러보고 기특하게 여겨 즉시 주부(主簿)를 제수하여 부새(符璽 절부(節符)와 옥새)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로부터 항상 임금의 좌우에 있으면서 오래될수록 더욱 근신하고 공경하였다. 이부에 있을 때에 관직을 옮기게 되자, 공이 아뢰기를, “신이 붓을 잡고 신의 이름을 주의(注擬)한다는 것은 진실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중히 여겼다. 신축년 가을에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북방 변경의 침략을 당하여 온 나라가 남으로 옮기게 되어 그 경계에 들어가니 공급하는 일이 끝이 없었으나, 이르는 곳마다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하여 사기를 다시 떨쳐 마침내 흉당을 섬멸하였으니, 이는 공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서울로 돌아와서 원문정(元文定)의 후임으로 전선(銓選)을 맡으니 때는 바야흐로 변경의 경보(警報)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하를 유지해 가면서 각기 소망을 채워 높은 공을 이룬 것은 공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시중이 죽으니 임금이 친히 명하여 그 모습을 그리게 하였으니, 이는 비록 임금이 큰 공신을 특별히 포상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흠모시키게 하였던 것이다. 그 덕도 매우 성대하나 또한 공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던 것이요, 일에 임해서는 극히 조심하였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착한 일을 좋아하기를 간절히 하고 마음을 공평히 가지니 내가 바로 벗으로 하는 이유이다. 하늘이 혹시 나이를 더 주어 묘당에 앉아서 큰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하고 큰 정사를 행하기를 그의 뜻과 같지 않음이 없었던들 나는 장차 그를 스승으로 섬겼을 것인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슬픔을 어찌 다하리요. 부인은 곽씨(郭氏)이니,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휘 연준(延俊)이 아버지이다. 딸 몇 명이 있는데 모두 어리고 아들 하나는 금년에 낳았다. 모월 모일에 서거하여 모월 모일에 성남쪽 남촌(藍村)에 장사하니 향년 36세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어찌하여 온전한 재주를 주고도 / 胡界其全
목숨을 주지 않았던고 / 而不予年
참으로 알 수 없다. 저 하늘의 정함이 없음이여 / 夢夢乎其天之未定也
내가 이 명을 새겨 / 我鐫斯銘
천년에 이름을 울릴 것을 / 千載而鳴
오히려 우리 문경공에게서 상고하리로다 / 尙有攷乎吾文敬也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유원 자선대부 태상 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 병서 (有元資善大夫大常禮儀院使高麗國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益山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幷序 )
 

익주(益州 익산의 옛이름)의 이씨는 명성이 난 지 오래였다. 상서좌복야 휘(諱) 주연(周衍)이 참군(參軍) 휘 열(冽)을 낳았는데, 참군은 직사관(直史館) 휘 영재(英梓)를 낳았고, 직사관은 증 상서좌복야 양진(陽眞)을 낳았고, 좌복야는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翰林學士承旨) 휘 주(湊)를 낳았고 승지는 조봉대부 국자전주 보문각직학사 지제고(朝奉大夫國子典酒寶文閣直學士知製誥) 휘 행검(行儉)을 낳았으니, 곧은 절조로 이름이 있었다. 공이 형부(刑部)의 관원이 되었을 때 동료들이 권세에 압력을 받아 송사에 곧은 자를 패소하게 하는 것을 전주공이 한사코 그 불가함을 고집하다가 때마침 질병으로 정고(呈告 사직서) 중에 있었는데, 동료들이 공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 곧 이를 자기들의 생각대로 결단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예리한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형부의 관리들을 두 조각으로 내는 일이었다. 얼마 안 되어 그 관리들이 모두 갑자기 병으로 죽고, 전주공만 아무 탈이 없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한다. 전주공이 승봉랑 감찰규정(承奉郞監察?正) 휘 애(崖)를 낳아 통직낭중(通直郞中) 송탐(宋耽)의 딸과 결혼하여 지대(至大) 무신년 12월 24일에 공을 낳았다. 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고, 재상 전공(全公) 휘 사의(思義)의 집에서 거두어 양육하니, 공의 자부(姉夫)이다. 그리하여 전공이 생존했을 때에 공이 이미 현달하여 전공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였고, 전공이 사망하자, 그 누님을 어머니 섬기듯이 하였다. 돌아가시자, 같은 묘혈(墓穴)에 장사하였으며 제사에 예를 다하였고, 늙어서도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말할 만하다. 지원(至元) 경진년에 공의 나이 33세였다. 이때 상락군(上洛君) 김공(金公) 휘 영돈(永暾)과 순흥군(順興君) 안공(安公) 휘 축(軸)이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공이 낭장 겸 감찰규정으로서 장원급제하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전의주부(典儀注簿)와 성균직강(成均直講)에 두 번 천전하였고, 임오년에는 봉선대부 성균사예 예문응교 지제교로 전직되었으며, 계미년에는 봉상으로 올라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옮겨 춘추관 수찬관에 보충되었다. 갑신년에 다시 중현대부 전교령 밀직사우부대언 예문관직제학 지제교(中顯大夫典校令密直司右副代言藝文館直提學知製敎)로 승진되고, 을유년에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그해 겨울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겼고, 다음해에 다시 감찰대부로 승진되었다. 정해년 7월에 밀직부사에 임명되고, 무자년 정월에는 다시 광정대부 판밀직사사(匡靖大夫判密直司使)로 올랐다. 4월에는 원 나라에 들어가서 천수성절(天壽聖節)을 하례하였고, 6월에 겸 감찰대부가 되었다. 경인년에 정당문학에 임명되었고, 임진년 윤 3월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옮겨 또 감찰대부를 겸임하였으며, 10월에는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고쳐 제수되었다. 계사년에 다시 도첨의(都僉議)로 들어가서 찬성사에 승진되고, 을미년에 지공거가 되어 안을기(安乙器) 등 33명을 선발하니, 뒤에 고관에 이른 자와 저명한 인사로 일컬어진 자가 많았다. 이해에 현릉(玄陵)이 스스로 불러 동성도사(東省都事)로 삼으니, 황제의 칙첩(?牒)을 받고 황제의 궁궐에 들어가서 사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이를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승진되어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신축년에 사적(沙賊)이 우리 북방 변경을 침범하여 공이 죽전(竹田)에서 이를 막았으나, 서울이 함락됨을 보고 공은 단기(單騎)로 중원(中原) 행궁으로 달려가니, 임금이 몹시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하였다. 임인년 6월에 찬성사에 임명되어 판판도사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判版圖司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으로 승진되었다. 이해에 사적(沙賊)이 붕괴되어 달아났으나, 서울이 병란에 파괴되어 모든 일을 새로 창설해야 했다. 공이 명을 받고 와서 인재(人材)와 일의 완급을 헤아려 방략(方略)을 지시해 주니, 조정에는 폐지된 정사가 없었고 돌아오는 자는 위로하고 안정되게 거주할 수 있도록 양식과 종자를 안배하여 분급하니, 들에는 노는 백성이 없었다.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드리고, 생도들을 국고의 양곡으로 먹이니 내외(內外)의 학교가 다 풍족하여 예절과 풍속을 인도해 이루고 인재를 양육하게 하였으며, 대개 무예를 강론하는 것과 군마를 쉬게 하고 치도를 논하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터득한 점이 있었다. 계묘년에 임금의 거가를 맞아 서울로 돌아오니, 간신(奸臣) 최유(崔儒)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원 나라의 권력을 가진 자에게 붙어서 현릉(玄陵)의 폐위를 계책하여 황제의 명을 받고 실행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표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가게 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 허강(許綱)으로 보좌하게 하였다. 공이 길을 출발하여 서경(西京)에 이르러 태조 원묘(太祖原廟)에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맹서하기를, “우리 임금님이 복위하지 못하시면 신(臣) 공수(公遂)는 죽음을 맹서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미 북경에 이르니, 황후와 황태자가 교외에서 위로하려고 보낸 사자가 연이어 끊이지 않았고, 4월 3일에는 황제가 흥성궁(興聖宮)에 앉아서 전서원사(典瑞院使) 완택독(完澤篤)에게 명하여 공을 불러들여 위로하였고, 공은 예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황후가 찬물(饌物)을 베풀어 후히 위로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공이 이미 마음을 다하여 우리 어머니께 효도하였으니, 이는 곧 나의 친형(親兄)인데, 어찌 감히 친형을 대하는 예로서 공을 대하지 않겠소.” 하니, 공이 아뢰기를, “주(周) 나라의 강원(姜嫄)ㆍ태임(太任) 태사(太?)가 성인(聖人)을 낳아 나라를 교화하는 터전을 만든 것이 《시경》 풍(風)ㆍ아(雅)에 있습니다. 그 중간에 쇠퇴하였는데, 강후(姜后)가 죄주기를 기다림으로써 선왕(宣王)이 크게 깨닫고 스스로 근면하여 중흥의 큰 업적을 세웠으나, 한편 패망을 자초한 임금들은 포사와 달기와 여(呂)ㆍ무(武)가 종사(宗社)를 뒤엎고 제사를 그치게 하였으니, 아름답고 악한 것이 밝아져 천년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고려와 원 나라는 처음에는 신하로서 형제의 의(義)를 맺었고, 다음에는 천자께서 생구(甥舅)를 정하여 백여 년 동안을 물고기와 물이 서로 만나듯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전하로 말씀하면 바로 주 나라 태임과 태사가 되셨으니, 삼한(三韓)의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제 고려 국왕이 원 나라에 심력을 다하고 적을 정벌하여 국가를 위하여 공훈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전(賞典)을 행하여 밝게 사방에 보임으로써 장수들의 사기를 격려하여야 할 것이온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의(公義)를 폐하리까. 병신년의 화는 실로 우리 집안이 너무 넘침을 만족할 줄 모르고 그치지 못한 소치이지, 왕의 죄는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 허물할 줄 모르고 공이 있는 임금을 폐하려 하시니, 조정에 사람이 없단 말씀이십니까. 다른 날에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옵서는 황제께 잘 아뢰시어 우리 임금을 복위하게 하시고, 간신을 쫓아내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하니, 황후가 비록 그 말에 감동하였으나, 그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드디어 공으로 하여금 덕흥군을 받들고 돌아가라고 하므로, 공이 병을 칭탁하고 더 머무르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전지하기를, “고려인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는 이 공수를 제외하고 모두 왕을 따라 가라.” 하였다. 21일에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에 임명되니, 다음날 조정에 들어가 아뢰기를, “신이 변방에서 생장하여 언어가 통하지 않고, 중국의 예법을 익히지 못하였사오니, 어찌 감히 은총을 무릅쓰고 기롱과 비웃음을 취하겠습니까. 또 지금 밖에 포진해 있는 장수들 중 공을 세운 자에게도 상을 내리시지 않으셨으니, 신은 혹시 천하에서 이것을 가지고 폐하를 비난이나 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미 황제의 윤허의 명을 얻지 못하고 27일에 그 자리에 부임하니, 자정원(資政院)에서는 의지(懿旨 황후의 전지)를 받들고 예로 대접하는 음식을 성대하게 베풀어 동료들에게 향응하였다. 종묘대향(宗廟大享)에 공이 두 번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예법을 따라 행하니 보는 자가 모두 공경히 대하였다. 이리하여 공의 할아버지 좨주공(祭酒公)에게는 중봉대부 집현학사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아버지 규정공(?正公)에게는 자선대부 전서원사(資善大夫典瑞院使)의 증직을 내렸으며, 할머니 정(鄭)씨와 어머니 송(宋)씨, 그리고 부인 김(金)씨는 모두 농서군부인(?西郡夫人)을 봉하였다. 황태자가 황제의 명으로 공을 불러 같이 만수산(萬壽山)의 광한전(廣寒殿)에 올라갔었는데, 태자가 전액(殿額)에 쓴 인지(仁智)의 의미를 물었다. 공은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이르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을 지(智)라고 이르는 것인데, 제왕이 이 두 글자를 가지고 사해를 통어(統御)하면 만대까지라도 태평을 누릴 것입니다.” 하였다. 광한전 안으로 들어가서 황태자는 금과 옥으로 장식한 기둥을 가리키면서, “노인은 일찍이 이와 같은 기둥을 본 일이 있소.” 하였다. 공은 “신이 들으니, 제왕이 정사를 행할 때, 인정(仁政)을 베풀면 그 거처하는 집은 비록 썩은 나무일지라도 금과 옥의 견고함과 같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금석(金石)의 견고함도 도리어 썩은 나무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궁전에서 나와서 왕가노(王家奴) 태사백 살리소보(太師伯撒里少保)에게 자리를 주고, 공에게 명하여 그 다음 자리에 앉게 하고는, 독로첩목아첨사(禿魯帖木兒詹事)가 서서 비파를 타는 것을 태자가 이를 가지고 타다가 곡조를 이루지 못하니 놓으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익히지 않았더니 잊어버렸다.” 하는 것이었다. 공이 즉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면 비파 위의 한두 곡조를 잊었다 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황제가 태액지(太液池)의 배 위에 있으므로 태자가 공의 말한 것을 아뢰니, 황제가 이르기를, “내 진실로 이 노인이 어진 사람임을 알았다. 너의 외가에는 오직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하루는 황후가 그의 형 평장사(平章事)의 집안이 화란을 당한 연유를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재물을 탐하여 원망이 쌓여 모이면 화를 모면하는 경우가 드물지요. 상황의 격화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 왕의 마음도 아니며, 왕의 죄도 아닙니다.” 하였다. 환관 박불화(朴不花)가 황후에게 밀고하기를, “이모(李某)는 그 임금만을 위하니, 어찌 그 친족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하여 황후는 오랫동안 공을 불러보지 않았다. 덕흥군이 이미 요양로(遼陽路)에 이르니, 최유(崔儒)가 말하기를, “이모(李某)가 북경에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일이 혹시 중간에 변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에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와 박불화(朴不花)에게 뇌물을 많이 주고 기필코 공을 데리고 돌아가려 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 그의 서장관 임박(林撲)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부모도 없고 또 후사도 없으며, 벼슬도 또한 최고로 이르렀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시 돌아보고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이요, 결코 저 사람들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독로첩목아와 박불화 두 사람이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었으나, 황제도 윤허하지 않았다. 7월에 패라첩목아(?羅帖木兒)가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와서 승상(丞相) 삭사(?思)를 내쫓고 그 자리를 대리하면서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를 대신(臺臣)으로 삼아 쌓인 폐단을 개혁하고 이에 말하기를, “고려 국왕이 공은 있어도 아무 죄없이 소인들의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이를 먼저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리하여 조서를 내려 왕위를 회복하게 하고, 최유를 착고에 채워 본국으로 보내니, 공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다. 제화문(齊化門)을 나와서 수종하는 종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는, 따르는 자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다. 이보다 더할 즐거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연도(沿途)에서 말이 피곤하여 따르는 종이 화살 한 개로 1속(束)의 콩을 사서 먹이니, 공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왜 궁한 백성들의 먹을 것을 빼앗았느냐.” 하고, 면포(綿布)를 잘라주어 그 값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여산참(閭山站)에는 사람은 없고, 양곡만 들에 쌓여 있었는데, 공이 조 1속의 값이 면포 몇 척(尺)인가를 묻고, 그 말대로 이를 두 끝에 써서 조를 쌓아둔 속에 넣어 두었다. 수종하던 자들이 말하기를, “말[馬]을 가지고 온 자가 돌아갈 때에 반드시 가져갈 것이니,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값을 보상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도 본시 알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10월 25일에 서울로 들어와 합문(閤門)으로 나아가서 고하기를, “사명을 받들고 갔던 신 이공수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조금도 힘들고 어려웠던 상황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임금은 후히 대접하였다. 이때에 성균관에서는 공역(工役)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는데 공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황제가 내린 금대(金帶)를 풀러 이를 희사하여 그 경비를 도왔다. 취성(鷲城 신돈)이 국권을 잡게 되자 매우 공을 꺼려하였고, 공도 자신의 분에 넘침을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집에 들어 앉아 두문불출하였다. 공이 이미 원 나라 서울로 가니 4월에 공에게 도첨의자정승 판군부사사(都僉議左政丞判軍簿司事)에 임명하였다. 다음해 10월 17일에 다시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도첨의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로 승진되었는데, 25일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을사년 6월에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니, 이로 인하여 일찍이 하루도 묘당에 앉아서 총재(?宰)의 직무를 행한 일이 없어 사람들이 자못 이를 한탄하였다. 아, 공의 밝은 지혜와 삼가한 처사는 당대의 나이와 덕이 높은 대신들 중에도 견줄 사람을 보기가 드물다. 과단성과 씩씩한 풍모는 뛰어나 어떤 권세에도 구속을 받지 않으면서도 풍류가 조용하고 단아하였다. 그 산수를 좋아하는 지취를 스스로 가릴 수 없는 점이 있어, 덕수현(德水縣)에 별서(別墅)를 두고 스스로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칭호하고, 복건(幅巾)과 여장(藜杖)으로 동년의 여러분을 초청하여 그 가운데서 휘파람 불고 시도 읊었으며, 혹시 문생(門生)이 가서 뵈면 언제나 술에 취해 돌아가게 하였다. 부인 김(金)씨는 신라 금부대왕(金傅大王)의 13대 후손인 삼중대광 의흥부원군(三重大匡義興府院君) 김공 휘 상기(上琦)의 딸로 어진 행실이 있었고, 군자의 덕에 짝하여 종족들이 지금까지도 그 인자함을 칭송한다. 병오년 5월 초 1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서거하여 부음을 아뢰니, 임금이 애도하여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명하고, 장례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관에서 부담하게 하여 24일에 별서의 서쪽 산기슭에 합폄(合?)하였다. 공은 자녀가 없어 족인(族人)의 딸을 길러 성균생원(成均生員) 안속(安束)에게 출가시켰다. 아, 이(李)씨의 8대가 공에 이르러서 더욱 창성하였는데, 전주공(典酒公)의 덕과 명망으로 그친 것은 하늘이 진실로 그 지위를 아낀 것이요, 규정공이 착한 일을 쌓아 뒤를 이으니 이것으로 문충공의 탄생의 보답이 있었던 것인데, 문충공이 더욱 그 문호를 번창하게 하여 이미 그 선조를 빛나게 하였으나 그 후사가 없으니, 참으로 저 창망한 하늘이 끝에 없는데, 사람이 잠시 그 사이에 붙어 있음을 알겠도다. 아, 슬프다. 공의 휘는 공수(公遂)요, 자는 □이요, 사는 집을 형재(衡齋)라 하였다. 공이 성절(聖節)을 하례하러 갔을 때에 내가 따라 갔었고, 성균관에서 학업을 받아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공의 은혜이다. 명하는 글을 어찌 사양하리요.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삼동에도 푸른 소나무의 곧음이요 / 三冬而靑松也惟貞
백 번 녹여도 단단한 철의 좋음이여 / 百煙而剛鐵兮孔良
아름답다 문충공이여 / 懿哉文忠
조정에서 온화하게 자득하였네 / 委蛇朝中
차디찬 샘물 같고 / 有洌其泉
훈훈한 바람 같았네 / 有熏其風
섬기는 임금에게 충절을 다하여 / 盡忠所事
황제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겼네 / 帝嘉其志
공을 이루고도 자랑하지 않으니 / 成功不居
사람들이 의리를 탄복하였네 / 人服其義
태실에 종향하여 / 從享大室
모두 길함을 동의하였으니 / 僉同其吉
공로가 많은 것이 아니요 / 匪功之多
그 덕이 한결같기 때문이네 / ?德之一
비록 자손은 없으나 / 雖無子孫
이 조묘가 보존되어 있도다 / ?廟之存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파평군 윤공 묘지명 병서 (坡平君尹公墓誌銘 幷序 )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서울을 핍박해 와서 현릉(玄陵)이 남방으로 행행할 계책을 결정하니, 조관들이 많이 벼슬을 버리고 달아났다. 파평군(坡平君) 윤해(尹?)가 전직 복주 목사(福州牧使)로서 필마로 왕의 거가를 따라 광주(廣州)에 이르러, 객사의 문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웃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는데, 내 비로소 그 얼굴을 알게 되었으니, 대개 기이한 큰 인물이었다. 내가 병중에 있을 때 일찍이 문병하러 온 일이 있었다. 그때에 그의 얼굴빛을 살펴보니, 나를 몹시 애처롭게 여기는 것 같아 내 지금까지도 감히 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 공이 사망한 지도 벌써 5년이 되었고, 또 병이 앓은 나머지 졸렬한 글로써 공의 묘소에 명(銘)하게 되니, 어찌 느끼는 바 없으리요. 공의 이름은 해(?)요, 자는 자기(子奇)이니, 파평현 사람이다. 13대조 신달(莘達)을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 부르는데, 공신 선지(先之)를 낳았고, 공신은 좌복야 금강(金剛)을 낳았고, 좌복야는 우복야 집형(執衡)을 낳았으며, 우복야는 추충좌명 평융척지 진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수태위문하시중 판이부사 영평군개국백 식읍 3천 5백호 실봉 3백호 감수국사 문숙공(推忠佐命平戎拓地鎭國功臣開府儀同三司上柱國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鈴平郡開國伯食邑三千五百戶實封三百戶監修國史文肅公) 관(瓘)을 낳았다. 예왕(睿王) 때에 여진(女眞)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문숙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버리니, 여진이 멀리 도망하기에 돌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문숙공이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언이(彦?)를 낳으니, 의지와 기개가 있었고 죽고 사는 이치에 통달하여, 운명하려 할 때에 시(詩) 한 편이 있었는데, 선가(禪家)의 말과 같았다. 이 평장사가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 돈신(惇信)을 낳았고, 시랑이 위위소윤(衛尉少尹) 상계(商季)를 낳았고, 소윤이 태상록사(太常錄事) 복원(復元)을 낳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녹사가 공의 증조인 감찰어사 순(純)을 낳았고, 어사는 조부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부(珤)를 낳았으며, 영평은 아버지 소부윤(少府尹) 암(?)을 낳았는데, 만호 판삼사사(萬戶判三司事) 박지량(朴之亮)의 딸을 아내로 맞아 원정(元貞) 정미년 7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14세에 가문의 공덕으로 처음 주릉직(周陵直)에 제수되었다가, 지원(至元) 경진년에 흥위위 정용호군(興威衛精勇護軍)에 발탁되어 봉선대부(奉善大夫)의 자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의 하사를 받았고, 다음해 봉상 겸 통례문부사(奉常兼通禮門副使)에 올랐고, 흥배(興拜)하는 절차가 모두 도수(度數)에 맞았으며, 호군(護軍) 40여 명이 모두 용맹있고 호방하여 법도를 지키지 않았으나 공은 매양 예법에 의하여 행동하였으므로, 지금까지 그 방도를 공경히 본받았다. 임오년에는 친어군 호군(親禦軍護軍)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감시주사(監試主司) 민사평(閔思平) 집의 종이 나무를 하려고 성 밖으로 나아가서 생 소나무를 베고 있는 것을 반주(班主) 인안(印安)이 마침 교외에 나갔다가 보고 법으로 당연히 금하여야 하기 때문에 금지하였는데, 민사평 집의 종들이 반주임을 알지 못하고 모여들어 쳐서 그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중방(重房)으로 하여금 민주사의 가택을 부수라고 하니, 공은 말하기를, “종은 참으로 죄가 있으나 그 주인이 어째서 관련된단 말입니까. 또 지금 많은 선비들이 모두 눈을 씻고 방(榜)의 게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주사의 집을 부수려 한다면 주사가 무슨 마음으로 시권(試券)을 고열(考閱)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얼마 후에 임금의 노기가 풀려 그 일이 중지되었다. 계미년에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에 승진되었는데, 공이 청렴하고 근면하여 보흥고(寶興庫)의 관원으로 있은 지 무릇 3년 만에 왕의 부름을 받고 원 나라 서울 북경으로 갈 때에 정승 홍빈(洪彬)이 돈과 물품을 회계해 보니, 공만이 조금도 하자가 없었으므로, 홍공이 이를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기축년에 대신(臺臣)을 선발하게 되자, 집정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윤모(尹某)는 대대로 예법을 지키고 맑은 절조를 숭상하여 왔으며, 또 기강의 대체를 알고 있으니 이 사람만한 자가 없다.” 하여, 드디어 집의(執義)로 옮겨서 많이 건의한 것을 비록 모두 시행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명성이 진동하였고, 지평(持平) 정국경(鄭國經)도 청백하고 근신하며 또 강개하여 사람들의 기대하는 대상이 되어, 당시 감찰원에, “집의는 강기(綱紀)를 잡고 지평은 부절(符節)을 가졌다.”는 말이 있어 사대부들이 이를 흠모하였다. 경인년에 봉순대부 판소부시사 지전법사사(奉順大夫判少府寺事知典法司事)가 되어 재결을 공평하고 타당하게 시행하자 사람들의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현릉 5년 을미에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에 제수하니, 중방의 여러 이서(吏胥)들이 평소부터 공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므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만하지 못했다. 달을 지나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부임하라는 명이 있어 공이 부임하자 모든 조치에 법도가 있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많이 받았다. 신축년 겨울에 공의 아들 지금의 밀직공(密直公)에게 명하기를, “나는 행재소로 가지 않을 수 없으니, 너는 너의 어머니와 더불어 지름길로 좇아가라.” 하고, 드디어 왕을 따라 가서 경상도 점군병마사가 되었다. 얼마 후에 바로 서울을 회복하고 공신을 선정하여 기록하니, 공의 공(功)은 2등에 있었다. 공의 공로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공은 억울한데 어찌 호소하지 않는가.” 말하니, 공은 웃고 답하지 않았다. 갑신년에 봉익대부 판전의시사(奉翊大夫判典儀寺事)로 승진되고 임자년에는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임명되었으며, 갑인년 겨울에 파평군(坡平君)에 봉하고 대광(大匡)의 관계에 올랐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시중공(侍中公) 이하로 무릇 7대를 내리 과거에 올랐는데, 우리 부자(父子)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였다. 병진년 12월 12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70이었고, 다음해 정월 갑인일에 송림(松林)의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최(崔)씨니 봉상대부 사헌장령(奉常大夫司憲掌令) 용(甬)의 딸로 4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의 이름은 호(虎)이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이요, 다음은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맏딸은 판내부사(判內府事) 김회조(金懷祖)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지여흥군사(知驪興郡事) 유원무(柳元茂)에게로 시집갔다. 손자는 남녀 몇 명이 있으니, 밀직공은 지선주사(知善州事) 이원후(李元厚)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무개요, 큰 딸은 중서사인(中書舍人) 방순(方恂)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합문지후(閤門祗候) 남재(南在)에게 시집갔으며, 내부(內府)가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 첨(瞻)은 문하주서(門下注書)요, 다음은 우(?)요, 그 다음은 반(盼)인데 아직 어리고, 딸은 호군(護軍) 김간(金侃)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지여흥군사가 6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아무개요, 다음은 아무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밀직공의 사람됨이 단정하고 근신하며 큰 뜻이 있었고, 글씨를 잘 쓰고 바둑에 능하여 일찍이 현릉(玄陵)에게 알려져 현릉이 고시(古詩)를 써서 바치라고 명하니, 이는 필적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공은 말하기를, “달 아래 맺힌 이슬과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을 읊은 따위의 시는 왕 앞에 바칠 것이 못 된다.” 하고, 드디어
어두운 방에서는 속일 수 있다 하나 항상 그런 것도 아니요 / 欺暗常不然
밝음을 속이면 응당 죽임과 욕을 당하게 될 것이네 / 欺明當自戮
한 사람의 손을 가지고 / 難將一人手
천하 사람의 눈을 가리긴 어렵도다 / 掩得天下目
라고 써서 올리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나를 은미하게 간언하는 글이다.” 하고, 이 때문에 공을 점점 멀리 하였으나 군자들은 말하기를, “공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다. 아, 파평군은 아들을 잘 두었다고 말할 만하다. 밀직공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않으셨으나 마실 때에는 일정한 주량이 없었고, 평생 질병이란 없으셨으며, 천성이 검약을 숭상하여 육식하시는 일이 적었으며, 더운 때에도 반드시 옷을 갖추어 입으셨고, 추위에는 갖옷을 겹쳐 입지 않으셨으며, 음악이나 여색은 더욱 멀리하셨다. 또 널리 제도와 조격(條格)에 통하셨고, 본국 판지(判旨)에 더욱 유의하셨는데,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니, 나는 이에 더욱 공이 어진 아들을 두었음을 알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영평의 봉군을 / 鈴平之封
왕이 윤공에게 주었네 / 王錫尹公
군사를 출동하여 국토를 개척하고 / 出師闢國
그 공적을 비에 세웠네 / 乃碑其功
또 개부를 습봉한 분은 / 襲封開府
공의 조부로다 / 在于公祖
공이 뒤를 이어 / 公克嗣之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도다 / 惟仕之?
공의 이름은 / 惟公之名
오직 그 의가 밝음이로다 / 惟誼之明
지위가 덕에 걸맞지 못하였으니 / 位不稱德
누가 그 공평함을 맡았는가 / 孰司其平
이 묘비명 / 幽堂之誌
길이 앞날에 보이리라 / 于永厥?
나의 아첨이 아니요 / 匪我之諛
공이 어진 아들을 두었도다 / 公有賢子

동문선 제128권   
 
 
 묘지(墓誌)
 
 
여흥군부인민씨 묘지명(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이색(李穡)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 윤 5월 갑진(甲辰)에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金氏)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참군사(?軍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명(銘)을 구하였는데,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行狀)을 상고하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 시호 문온(文溫) 급암선생(及菴先生) 휘 사평(思平)은 그 아버지요,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密直司使) 시호 문순(文順) 휘 적(迪)은 그 대부이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 충순(忠順) 휘 종유(宗儒)는 그 증조이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시호 정렬(貞烈) 죽헌(竹軒) 김공(金公) 휘 윤(倫)은 그 외조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에서 부러워하였는데 부인이 그 사이에서 태어나 견문이 익숙하여 대개 마땅히 할 일에는 모두 어머니를 모범으로 근본을 삼고, 부모를 섬기되 매우 효도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병이 들어도 폐하지 않으니 종족들이 칭찬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도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이 편안하였다. 그 뒤에 여흥(驪興)에 살면서 십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안 할 것이니,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하였다. 5월 계사일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6세였다. 구용씨(九容氏)가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알까 걱정하시며 남모르게 양성하였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할꼬.” 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모(金母)여, 문온공(文溫公)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또 그 생질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지었으니, 어질다 이르지 않으리오.” 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맏은 구용이니, 전(前)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이었고, 다음은 제안(齊顔)으로 중의대부 중서 병부랑중 겸첨서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敎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이요, 다음은 구덕(九德)인데, 전(前) 좌우위(左右衛) 보승산원(保勝散員)이었다.
딸이 아홉인데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 ㆍ 전(前) 개성윤(開城尹) 이창로(李彰路) ㆍ 전 종부령(宗簿令) 최유경〈崔有慶〉 ㆍ 전(前) 낭장(郞將) 허호(許顥) ㆍ 전 부령(副令) 허의(許誼) ㆍ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ㆍ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시집가지 못하였다. 그 명(銘)이 다음과 같다.
사물이 그 근본으로 돌아갔으니 / 物歸其根
그 삶은 무궁하도다 / 其生不窮
여흥 민씨를 / 驪興閔氏
그 가운데 장사하니 / 葬于其中
강물은 흘러 흘러 / 江之??
어찌 쉴 때가 있으리오 / 曷其有終
강물과 함께 길지어다 / 與之俱長
영가의 풍모여 / 永嘉之風


동문선 제128권   
 
 
 묘지(墓誌) 이색
 
 
계림부윤 시문경공 안선생 묘지명 병서 (鷄林府尹諡文敬公安先生墓誌銘) 幷序 
 

순흥(順興) 안씨(安氏)는 문성공(文成公) 향(珦) 이하 고위 관원이 많았다. 문성공의 증손 정당문학 원숭(元崇)이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등과하였고, 문성공의 족자(族子) 급제 휘 석(碩)은 은둔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근재선생(謹齋先生)의 아버지이다. 세 아들이 다 등과하였고, 근재의 아들과 지금 밀직공(密直公)의 세 아들이 또 등과하였으며, 근재의 백씨와 중씨는 모두 중국의 제과(制科)에 올라서 조정의 명을 받아 일세에 빛이 나서 문성공의 자손으로서는 미치지 못하였다. 원조(元朝)에서 과거를 보인 이래로 우리 동방 사람으로서 부자 형제가 대를 이어서 과거에 오른 자는 순흥 안씨와 우리 한산(韓山) 이씨(李氏)가 있을 뿐이었다.
가정(稼亭) 선생이 근재에게서 수업을 받아 그 무덤에 명(銘)을 지었고, 이색이 향시(鄕試)에 응하였을 때, 선생이 또 주문(主文)이 되었으니, 이색이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사양할 수 없고, 이어 명문(銘文)을 한다면 선생에 대하여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성품이 활달하고 한대(漢代)의 역사서 읽기를 좋아하고, 일처리에는 대체를 따르려고 힘써서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고 관망을 하지 않았으며,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였으나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취하면 그만 마셨다. 문장을 쓰는 데는 화려한 문체를 버리고 사실을 취하여 말이 통할 뿐이었다. 현릉(玄陵)께서 그가 어짊을 알고 크게 쓰려고 밀직제학으로 탁용하여 감찰대부 제조전선사를 겸하였다가 동지(同知)에 나아갔고, 을미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안을기(安乙器) 등 33명을 뽑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선생은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고 스스로 말하고,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얼마 뒤에 임금이 그를 실정에 어둡다고 하자 선생은 어머니가 늙었다고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계림부윤이 되었다. 병신년 관제를 고칠 때에 선생은 부르기 전에 시골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때마침 병이 나자 탄식하기를, “어머니께서는 무양하시나, 아우가 죽고 백씨가 또 돌아가시고, 나 또한 이러하니 어찌할꼬.” 또, “천명이니, 어찌하리.” 하고는 얼마 안 되어 과연 서거하였으니, 아, 슬프다.
근재 선생의 아들 밀직재상(密直宰相) 종원(宗源)은 나와 동년 진사(同年進士)이다. 그의 매부 밀직재상 정양생(鄭良生)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문경공(文敬公)이 나이 19세에 경신년 진사과에 합격하였을 때, 허(許) 판서는 그 시관(試官)이었고, 그 해에 또 수재과에 합격하였을 때, 문충공 이익재(李益齋)와 판서 박석재(朴石齋)가 그의 지공거였다. 문경공은 천품이 이미 아름답고 우리 선인(先人)께서 또 엄하게 가르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문경공의 천품이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더욱 어진 부형이 있음을 중하게 여겼다. 처음 지낸 벼슬은 광주사록 권지전교교감 예문검열 춘추수찬 예문공봉 문하주서 감찰규정 군부좌랑 좌정언 우헌납 전리정랑 감찰장령 전의부령 전리총랑 위위윤 감찰집의 우대언 겸 집의 전법판서(廣州司錄權知典校校勘藝文檢閱春秋修撰藝文供奉門下注書監察糾正軍簿佐郞左正言右獻納典理正郞監察掌令典儀副令典理摠郞衛尉尹監察執義右代言兼執義典法判書)였고, 관직(館職)은 제학(提學)으로부터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가 중국 진사과에 오른 것은 을유년이요,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나간 것은 갑신년에 양광도 안렴사요, 을유년에 교주도 안렴사이며, 정유년 9월 4일에 순흥부(順興府)에서 졸하여 장사하였는데, 향년이 56세였다. 이제 22년 동안 무덤에 지(誌)를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문정공(文定公)의 자손 없음이 더욱 슬프도다. 부인 최씨가 아들이 없어 따를 곳이 없었고, 따를 곳이 없어 수절하기가 어려웠으며, 우리들은 직무에 분주하기에 또 그 사이에 뜻을 오로지 할 수 없어 지체하던 중 이에 이르렀으니, 아, 더욱 슬프도다. 그대는 명(銘)을 지어주오. 장차 돌에 새겨서 광중(壙中)에 넣는다면 아마 썩지 않을 것이요.” 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선생의 이름이 전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마오. 등과(登科)할 때 기록이 있고, 제명(題名)한 비(碑)가 있으며, 안탑(雁塔)에 꽃다움을 흘려 중국에 산재하였으니, 사람들이 보면 이르기를, ‘고려의 안씨 형제가 함께 과거에 올랐다’고 누가 말하지 않으리오. 그 풍모를 동해 밖에서 흠모하고 있으니, 선생 무덤의 돌엔 비록 새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괜찮을 것이다. 더구나 그 행적이 국사(國史)에 실었으니, 다른 날 현릉실록(玄陵實錄)을 수찬한다면 선생의 열전이 또 사책(史冊)에 빛나서 반드시 전해질 것이다. 나는 다만 그 후손이 없음을 슬퍼하노라. 그러나 근세 명공(名公) 선인(善人)으로 남촌(南村) 이시중(李侍中), 우곡(愚谷) 정밀직(鄭密直), 급암(及菴) 민찬성(閔贊成)은 덕행과 문장이 우뚝이 당대의 종가가 되고, 또 털끝만큼의 과오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후손이 끊기는 큰일이겠는가. 그럼에도 다들 후손이 없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의 뜻이 정하지 못함이 있도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전선(銓選)을 제조(提調)할 때에 이색이 붓을 잡고 그 뒤를 따랐더니, 어느 날 밤중에 선생을 불러들여 제수한 바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고는 책력을 가져다 보고 이르기를, “창귀날이니, 잠시 그치려무나.” 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음양의 구기(拘忌)를 싫어하여, 꿇어 앉아 아뢰기를, “왕자(王者)가 천시(天時)를 받들어 행함에는 이런 것으로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행하고자 하신다면 행하소서. 창귀날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얼굴빛을 바꿨다. 선생이 처음 과거에 올라 장사랑 요양등처 행중서성조마(將仕郞遼陽等處行中書省照磨)로서 승발가각고(承發架閣庫)를 겸하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명을 받고서 공직(供職)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공(不恭)한 일인데, 더구나 조마(照磨)의 직책이 문서만 관장할 뿐 다른 사무가 없겠는가. 나는 성(省)으로 부임하련다.” 하고는 이미 부임하자 성관(省官)이 그 재주를 중하게 여기고 모두 대우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이제 나의 직무를 이행하였으니, 어머니가 늙으셨는데도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효도가 아니다.” 하고는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어사(御史) 한중보(韓仲輔)가 말하기를, “이부(吏部) 관원 중에 선생을 아는 자가 있어서 한림국사원편수관(翰林國史院編修官)에 추천하였으나, 성신(省臣)이 아뢰지 않았다.” 하였다. 불초한 나도 오히려 선인 뒤를 이어 한림에 공봉(供奉)하였거늘, 선생은 마침내 이러고 말았으니, 참으로 운명이로다. 참으로 운명이로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아들이 없으니 문생(門生)이 곧 아들이다.” 하더니, 이제 그의 문생 이보림(李寶林)은 정당문학이요, 염국보(廉國寶) ㆍ 이인(李?) ㆍ 우현보(禹玄寶)는 모두 추밀재상 봉익대관(奉翊大官)이며, 또 그 나머지도 많이 현달하여 이름이 일시에 날렸으며, 불교를 물리쳐 유학을 붙들 자는 초계(草溪) 정습인(鄭習仁)이요, 원수를 피해서 거친 들에 은둔한 자는 광주(廣州) 이원령(李元齡)이었으니, 인재를 성하게 얻었다고 당대에서 칭찬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보(輔)요, 자는 원지(員之)이며, 조부 휘(諱) 아무와 증조 휘 아무는 모두 본부(本府)의 호장(戶長)이었으며, 외조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안 아무개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호라, 선생이시어 / 嗚呼先生
학문이 이룩되어 / 學底于成
조정에 대책을 올려 / 對策丹?
그 소리를 떨치셨소 / 克振厥聲
우리 선왕을 보필하여 / 相我先王
묘당에서 주선하고 / 周旋廟堂
문화를 널리 펴고 / 弘敷文化
과거를 열었으니 / ?闢春場
이야말로 우리 선비의 / 曰我儒生
지극한 영화였소 / 斯爲至榮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는다면 / 母老不養
어찌 마음 편하리요 / 我心胡乎
충효로 입신 양명 / 忠孝立揚
군자의 빛이라오 / 君子之光
더러는 그렇지 못하니 / 厥或不全
어리석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라오 / 非癡則狂
이제 그 심정 진술하여 / ?陳其情
월성의 원이 되었소 / ?尹月城
어머니 무양하시더니 / 母則無恙
병에 걸리었고 / 而疾是?
구름이 흩어지니 / 雲?乎方
길이 길이 슬퍼했소 / 永矣其傷
덕 있으나 아들 없으니 / 有德無子
어인 일인가 저 하늘이여 / 云何彼蒼
아, 슬프도다.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무덤 곁 나무가 무성히 자랐구료 / 木拱于塋
천년 뒤에 / 天載之下
전할 것은 이름이로다 / 可傳惟名
이름 드날렸으니 / 有名之彰
죽어도 없어지지 않은 것이라네 / 死猶不亡
죽계의 물이 근원 있으니 / 竹溪有源
그 흐름이 길겠지 / 其流之長
동문선 제128권   
 
 
 묘지(墓誌)
 
 
판서 박공 묘지명 병서 (判書朴公墓誌銘 幷序 
 

영해(寧海) 박씨(朴氏) 중 유술(儒術)과 이사(吏事)로써 세상에 현달된 자는 전법판서(典法判書) 휘 원계(元桂)이니, 자는 □였다. 충숙왕(忠肅王)때에 사신이 중국으로부터 와서 은총을 믿고 기세를 부려 노비의 일로 왕께 아뢰어, 남의 곧은 일을 굴복시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두 차례나 궁문에 이르니 대신(臺臣)에게 명하여 해결을 하게 하였다. 판서 공이 마침 장령(掌令)이 되어 잘잘못을 구별하되,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사신이 크게 노하여 갔다. 충숙왕이 이르기를, “대신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하고는 드디어 집의(執義)에 승진시켜서 그 곧음을 칭찬하니, 당세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공의 나이 19세 때인 신축년에 정상시(鄭常侍) 희(僖)가 성균관에 선비를 뽑을 때, 이익재(李益齋) 시중이 나이가 15세에 장원에 뽑히고, 공은 그 다음이었다. 이 해에 국재(菊齋) 권공(權公) 보(溥)와 열헌(悅軒) 조공(趙公) 간(簡)이 예조(禮曹)에서 고시를 주관할 때 공이 또 합격하였다.
전주 사록(全州司錄)으로 서기(書記)를 겸임하였다. 그 경내에 호환(虎患)이 발생하였는데, 목사와 판관이 잡지 못하여 마침내 공에게 위임하니 공이 곧 기병을 요해지에 배치하여 화살 하나로 쏘아 죽였다.
연우(延祐) 병진년에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다가, 정사년 가을에 성균학정(成均學正)에 옮겼고, 그 해 겨울에 예문관에 들어와 검열이 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갔는데 붓을 들고 곁에서 떠나지 않고 삼가고 부지런히 하여 과실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애중함을 입었다. 무오년 겨울에 가안부승(嘉安府丞)에 옮겼고, 기미년 겨울에 승봉랑(承奉郞) 중문지후(中門祗候)가 되었고, 경신년 여름에 도관산랑(都官散郞)이 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 여름에 개성소윤(開城少尹)으로서 보성군사(寶城郡事)를 겸하여 선정이 있었고, 지순(至順) 임신년 가을에 통례문 판관(通禮門判官)이 되었으며, 원통(元統) 을해년 봄에 봉상대부 감찰장령(奉常大夫監察掌令)이 되어 기강이 크게 떨치고 반열이 엄숙하였더니, 그 다음해에 궁문(宮門)에 일이 있어 중승(中承)에 진급되었고, 지원(至元) 정축년 종묘부령(宗廟簿令) 지제교에 옮겼다. 무인년 봄에 소부시판사 봉순대부 보문각제학(小府寺判事奉順大夫寶文閣提學)으로 지제교를 겸하다가,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에 뽑혔다. 가을에 돌아올 때 재신(宰臣)이 말하기를, “강릉 사람들이 박존무(朴存撫)를 편하게 여긴다.” 하여, 곧 사자를 보내 제사를 맡아 머무르게 하였고, 다음해 봄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가을에도 또한 그러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공을 생각하고 잊지 않는다. 경진년에 충혜왕(忠惠王)이 왕위에 오르자 편민조례추변도감(便民條例推辨都監)을 두고 공을 사자로 삼았는데, 2년 만에 결재가 공평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칭도하였다. 충정왕(忠定王)이 처음 정사를 할 때 인재를 크게 등용하였으나 전형하는 자가 법사(法司)를 중하게 여겨 드디어 공을 써서 봉익대부에 승진시키고, 관직(館職)으로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겸하였는데, 조정에서 모두 말하기를, “법을 맡은 판서 자리에 인재를 얻었다.”하였다. 이 해에 공의 나이가 67세였는데, 여름 4월 12일에 병을 얻어 23일에 졸하여 모월 모일에 동성(童城) 양족산(兩足山) 마전곡(馬田谷)에 장사하니, 지정(至正) 9년 기축일이었다.
을미년 정월 초2일에 부인 오씨(吳氏)가 나이가 □세에 병으로 졸하니, 같은 영역에 장사하였다. 부인의 본관은 두원(豆原)이요, 예빈경 휘 의(誼)의 딸이었으며, 집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침이 모두 법도가 있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보생(寶生)은 벼슬이 봉순대부 판위위시사(奉順大夫判衛尉寺事)이고, 동생(童生)은 지금 봉익대부 전공판서(典工判書)이며, 딸은 하나인데, 검교 성균관 대사성 김대경(金臺卿)에게 출가하였고, 손자와 손녀도 약간 명이 있다. 위위(衛尉)는 나의 매부인데, 아들이 없고, 판서의 전부인은 시중(侍中) 이익재(李益齋)의 딸로, 아들 경(經)은 봉상대부 삼사부사(奉常大夫三司副使)요, 위(緯)는 전교시 교감(典校寺校勘)이요, 수문(秀門)은 별장(別將)이요, 딸은 출가하지 않았으며, 계실(繼室)은 종부시판사(宗簿寺判事) 치사(致仕) 채자(蔡滋)의 딸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고 증손 남녀 약간 명이 있다. 부사(副使)가 찬성사 기유걸(奇有傑)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고, 교감은 판사 이사의(李思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외손 남녀 약간 명이 있다. 가구(可久)는 중현대부 전교령이요, 딸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전교시 판사 김희(金禧)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 사재부령(奉善大夫司宰副令) 정지(鄭漬)에게 출가하였는데, 외증손 약간 명이 있다. 전교령은 선공령(繕工令) 권승구(權承矩)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딸을 두었다고 한다. 판전교는 아들이 없고, 부령은 2남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내가 이미 15세가 되었을 때에 판서공이 우리 집을 왕래하였는데, 그분의 얼굴이 풍후하고 말을 들으면 자상하여 두려움을 알지 못하였는데, 조금 자라났을 때 그 분이 대신(臺臣) 헌사(憲使)가 되었음을 알고 비로소 기강을 지닌 열장부(烈丈夫)임을 알았다. 죽은 뒤에 직접 오랫동안 배우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여기고, 노성(老成)이 없음을 슬퍼한 지가 오래였다. 더구나 전공(典工)이 진사과에 합격되어 이 시대의 통재(通才)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이 부(府)에 들어오고, 지방관이 되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남겼기 때문에 그가 이 명(銘)을 청하였을 때,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그 세계(世系)를 쓰고 명을 하였다. 증조 휘 득주(得珠)는 좌복야(左僕射)요, 조부 휘 문규(文圭)는 예빈경이요, 아버지 휘 관(琯)은 중현대부 전객령(典客令)이요, 외조는 통례문 지후 대령(大寧) 최서(崔壻)이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동녘 바다 한 모퉁이 / 東海之隅
우리 공이 나셨네 / 我公出焉
단양 그 지경에서 / 丹陽之區
큰 길가에 드날렸소 / 蜚英通衢
우리 충선왕을 섬겨 / 事我忠宣
붓 잡고 연경에 갔소 / 珥筆燕都
광명한 충숙왕이 / 烈文忠肅
지척에 군림하고 / 威臨咫尺
궁문에서 송사 판결 / 決訟宮門
흑에서 백을 골랐었소 / 析白于黑
이에 중승에 뽑혔으니 / ?擢中丞
나라의 사직이오 / 邦之司直
강릉 존무사가 되어 / 存撫江陵
바닷가에 가고 산에 올랐소 / 海循山登
한 지방이 고요하니 / 一方靜謐
나의 능력이 아닌가 / 非我之能
오직 오래도록 맡으시니 / 惟久於任
교화가 계속되었소 / 風化其承
송사 없음을 숭상하니 / 無訟是尙
사헌부의 우두머리로다 / 秋官之長
그 혜택이 끝나지 않아 / 弗竟厥施
누런 흙에 풀이 얽혔소 / 蔓草黃壤
나의 묘비명이 사사로움이 아니라 / 我銘匪私
태사의 일이라오 / 太史攸掌
동문선 제128권   
 
 
 묘지(墓誌)
 
 
오천군 시문정정공묘지명 병서 (烏州君諡文貞鄭公墓誌銘) 幷序 
 

근세에 태평시대를 논한다면 반드시 명릉조(明陵朝)를 말한다. 대체로 영릉(永陵)은 소인들을 사랑하여 악양(岳陽)의 화(禍)에 이르렀고, 총릉(?陵)은 나라를 보살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최원(崔源)이 반대로 주인을 보고 짖는 일이 생겼으나, 오직 명릉은 5년 만에 조야(朝野)가 안정되어 선비가 즐기고 백성은 붙었으니, 이를 소강(小康)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때를 당하여 낭관으로 뽑힘을 입은 지 4년에 그 지위가 추밀(樞密)에 이르고, 일을 잡으면 공경하고 몸가짐이 간략하고 중후하였으니 일찍이 일국에 명예가 드러난 경우는 오천(烏川) 정문정공(鄭文貞公)이 마땅히 으뜸이 될 것이다. 현릉(玄陵) 초기에 규례대로 정승을 그만두고 한가히 거한지 13년 동안 날마다 산수(山水)에 유유자적하여 편안히 외물에 대한 사모가 없어 현릉이 아름답게 여겨서 일성(日城)에 봉하였다. 얼마 되에 밀직상의 재상(密直商議宰相)으로서 합포(合浦) 동북면을 맡아, 조정에 들어오면 정승이요, 나가서는 장수가 되니, 그 명망은 더욱 중하였다. 금상께서 바야흐로 옛 신하를 쓰려 하였는데 공이 병이 났으니, 아, 슬프도다. 공이 병이 났을 때, 내가 가서 병문안을 하였는데, 심히 위독하지는 않았으나, 몇 달 뒤에 다시 가서 문후하였더니 이미 손님을 접견하지 못하였다. 돌아가시자 내가 상당(上黨) 한행운(韓孟雲)과 더불어 가서 치제(致祭)를 하였으나, 병이 나서 장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제 그 아들과 사위가 그 무덤의 명(銘)을 청하니, 오호라, 차마 사양할 수 있는가.
공의 휘는 사도(思道)요, 자는 □요, 아명은 양필(良弼)이다. 이미 과거에 오른 뒤에 당연히 피휘할 일이 있어서 이름을 사도라 하였다가 현릉을 섬길 때부터 비로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그 뜻은 대개 벼슬하거나 은거하는 것이 도에 맞지 아니함이 없다라는 것이다. 정씨(鄭氏)는 연일(延日)의 명망있는 가문으로 증조 휘 균지(均之)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에 증직(贈職)되었고, 조부 휘 윤(潤)은 봉선대부 현부의랑 지제교(奉善大夫獻部議郞知製敎)요, 아버지 휘 유(侑)는 중현대부 종부령(中顯大夫宗府令)이요, 어머니 채씨(蔡氏)는 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에 봉하였는데, 봉상대부 헌부의랑 유길(惟吉)의 딸이다. 연우(延祐) 무오년 11월 을묘일에 공을 낳았는데, 어릴 때부터 글 잃을 줄을 알았고, 자라나 시(詩)를 읊으니 호기가 있어 동료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19세에 순천군(順天君) 채공(蔡公) 홍철(洪哲)과 연평군(延平君) 안공(安公) 규(規)가 함께 고시를 맡았을 때, 공이 한 번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니, 후지원(後至元) 병자년이었다. 지졍(至正) 신사년 봄에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주부(注簿)에 옮겼고, 여름에는 낭(郞)이 되었으나 겨울에 버리고 당후관(堂後官)이 되었으며, 그 노고로 승봉랑 감찰규정(承奉郞監察糾正)이 되었으니, 들어와 벼슬한 지 10개월만에 참관(?官)이 된 이도 역시 드문 일이었다. 갑신년 명릉이 즉위하자, 규정에서 군부좌랑(軍簿佐郞)에 특진시켰고, 다음 해 봄에 정랑(正郞)에 올랐다가, 여름에 전리(典理)에 옮겼다. 무릇 18일 동안 봉선대부 성균관 사예가 되었고, 겨울 11월에 밀직사좌부대언 군부총랑 예문관직제학 지제교(密直司左副代言軍簿摠郞藝文館直提學知製敎)로서 춘추관편수관에 충원되어 이미 봉상대부의 직계를 두었다. 좌랑으로 한 해를 지난 뒤에 승선(承宣)에 임명하는 명을 받음도 역시 드문 일이었다. 다음 해에 좌부대언 전리총랑(左副代言典理摠郞)에 오르고, 또 우대언 지군부(右代言知軍簿)에 올랐더니, 6월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승진되어 중정대부(中正大夫) 직계에 오르고, 그 해 겨울에 정순대부(正順大夫) 우대언동지춘추관사가 되었고, 또 다음 해에 성균관에 과거 시험을 치루어 지금 지밀직(知密直) 박형(朴形) 등 92명을 뽑았으니 당시에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여름에 지신사 지전리(知申事知典理)에 오르고, 가을에 봉익대부 전리판서(奉翊大夫典理判書)에 승진되어 관직(館職)은 이전처럼 갖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명릉께서 공을 크게 쓰려고 밀직사 직제학에 올렸다. 처음 대언(代言)이 된 뒤로 무릇 22개월 만에 두 부(府)에 들어갔으니, 공의 나이는 겨우 30세였다. 그러나 사론(士論)은 지나치게 일찍 올랐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공이 당시에 얻은 명예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병신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무덤에 여막을 세워 3년을 지냈고, 계묘년에 이르러 현릉께서 이르기를, “정 아무개가 맡은 일에 충성하고 효도가 또 이러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노라.” 하고 일성군(日城君)에 봉하였다. 이로부터 무릇 기도 드리는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공에게 명하였으니, 그 정직함을 취한 것이었다. 가을에 밀직부사 상의대보문 동지춘추관(密直副使商議大寶文同知春秋館)에 오르고, 다음 해 봄에 한양부윤이 되었고, 가을에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불러서 얼마 안 되어 합포(合浦)에 출진(出鎭)하여 군기(軍機)와 백성에 관한 업무 모두 잘 수행하여 온 도(道)가 편하게 여겼다. 때마침 취성(鷲城)이 지금 판삼사(判三司) 최영(崔塋)을 죽을 죄로 다스리려고 그 무리 이득림(李得霖)을 보내서 국문하게 할 때 공이 죽기를 각오로 불가함을 고집하자, 이득림이 취성에게 하소연하니 취성이 또 임금에게 아뢰어 진(鎭)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정미년에 밀직첨서(密直僉書)가 되었고, 신해년에 지사(知司)에 오르고 다음 해에 단성익찬공신(端城翊贊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또 다음 해에는 밀직으로서 행안변부사 진동북면(行安邊府事鎭東北面)이 되었는데, 그 이름은 상원수(上元帥) 또는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군민(軍民)의 모든 사무가 한 몸에 모여 들었으나, 잘 처리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찬하였다. 계축년에 공신호 단성(端城)을 고쳐 충근(忠勤)이라 하였고, 그 해 겨울에 본관(本官)으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가, 금상이 즉위하자 광정대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정당문학 지서연사(知書筵事)로서 아울러 이전처럼 관직(館職)을 겸하였다. 다음 해에 평리상의(評理商議)가 되고, 얼마 있다가 일성군(日城君)에 봉하였다가, 오천군(烏川君)으로 고쳤다. 크게 어진이를 승진시켜 공신호를 더하여 충근절의익찬(忠勤節議翊贊)이라 하였다. 무오년에 공의 갑자(甲子)가 돌아왔으며 지조와 절개가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았다. 발병함이 하늘의 일이기에 기미년 9월 보름날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이 62세였다. 관청에서 장사를 도와주었는데 11월 경신일에 율촌(栗村)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 슬프다. 군자로서 장수하지 못한 이가 많았고, 수를 누리면서도 겨우 60을 지났으니, 하늘이 사람에게 아낌이 심하도다. 공은 모두 두 차례 장가를 들었는데, 배씨(裵氏)는 소윤(少尹) 휘 현포(玄浦)의 딸로서 두 딸을 낳았는데, 맏딸은 전법총랑(典法摠郞) 이용(李容)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헌부지평 안경공(安景恭)에게 시집갔다. 정씨(鄭氏)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휘 포(?)의 딸로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홍(洪)이며, 전교부령(典校副令)이었고, 손자는 남녀 약간 명이 있었다. 총랑은 아들이 없고, 지평은 1남을 낳았으며 이름은 김경(金經)이고, 부령은 1남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문정공의 어짊이여 / 文貞之賢
문무를 겸하였네 / 文武具全
두 부에 벼슬한 지 / 致身兩府
30년이 넘었소 / 餘三十年
네 조정을 섬기니 / 歷事四朝
참으로 맑은 모습이네 / 展也淸標
검소하나 고루하지 않고 / 儉而非固
호방하나 교만하지 않았소 / 豪而非驕
아름다운 문정공 / 美哉文貞
그 이름이 마땅하도다 / 宜得其名
천년 뒤에도 / 千載之下
오히려 이 명을 상고하리 / 尙徵斯銘
동문선 제128권   
 
 
 묘지(墓誌)
 
 
당성부원군 홍강경공 묘지명(唐城府院君洪康敬公墓誌銘)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삼한의 명문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그 자취가 국경에 나가지 않았고, 그 중 중국에서 현달한 자로 더러는 도리어 반역한 자도 있었다.
중국에 벼슬을 하면서도 뛰어난 절개로 칭찬을 받고, 본국에 벼슬하여 지위가 총재(?宰)에 이르고, 공훈이 사직에 남은 자는 강경공(康敬公) 한 분이 있을 뿐이다. 공(公)의 휘(諱)는 빈(彬)이요, 자는 문야(文野)이다. 공의 선대가 연경(燕京)에 들어가 살았고, 공은 지원(至元) 무자년에 태어났는데 부모가 몹시 사랑하였다. 조금 성장하여 내정(內庭)에 숙위하여 그 공로를 쌓았다. 황경(皇慶) 임자년에 장관의 추천으로 종사랑 대도로 패주동지(從事郞大都路覇州同知)가 되어 감절혁공(監折革功) □ 다시 초지방제령(抄紙房提領)에 전임되어 승무랑(承務郞)에 오르니 일을 처리하는 재주에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천력(天曆) 기사년에 승직랑 송강부판관(承直郞松江府判官)이 되니 아전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고, 도수감경력(都水監經歷)으로 소환되어 승덕랑(承德郞)에 오르니, 도수(都水)의 정사를 맡아서도 조금도 위세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 봉훈대부 태상례의원경력(奉訓大夫太常禮儀院經歷)에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입어 연경에 머문 지 5년이나 되었을 때, 공이 왕을 위해서 항상 사력을 다하여 왕의 억울함을 밝혔더니, 그 작위가 회복되어 우리 나라로 돌아왔으니, 후지원(後至元) 정축년이었다. 왕이 공의 돈독한 공로를 생각하여 머물러 정사를 돕게 하려고 원나라에 청했더니, 공에게 정동성리문소관(征東省理問所官)을 내리고, 또 이르기를, “송사와 같은 일로 공을 번거롭게 말라. 어찌 국사로써 유임하지 않았는가.” 하니, 드디어 도첨의(都僉議) 찬성사(贊成事)로 중대광대상호군(重大匡大上護軍)의 품계가 올랐다. 얼마 안 되어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에 승진되니 사람들은 이상(二相)이라 일컬었다. 기묘년 봄 3월에 충숙왕의 유명(遺命)을 따라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가 되고, 가을 8월에 정승(政丞) 조적(曺?)이 심왕(瀋王)을 은밀히 협력하여 장차 충혜왕(忠惠王)을 폐위하려고 임금 주위의 소인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영안궁(永安宮)을 에워쌌으니, 충숙왕 공주의 거처였다. 조적이 이미 백관을 위협하였으나, 다만 공을 꺼려 온갖 방도로 공을 움직여 그 꾀를 고하였더니, 공이 말하기를, “그러면 실책이 더욱 심한 것이다. 그 형이 방종하게 무도한 일을 행하더라도 그 아우가 있으니, 심왕이 무슨 상관이냐.” 하여, 더욱 굳게 거절하였다. 조적이 비록 백관을 위협하여 왕의 죄를 소(疏)로 올리려 하였으나, 공이 마침내 중지시켜 사자가 가지 못하였다. 충혜왕이 날쌔고 용맹스럽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정예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에워쌌던 적을 무너뜨리고 길에 달려가서, “역적은 조적이요, 나머지 사람은 그의 위협을 당하였을 뿐이다. 내가 모두 잘 알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고함을 치고 도적을 죽인 뒤에는 또 “늙은 역적이 죄에 죽었으니, 남은 사람들은 안심을 하라.” 하였다. 충혜왕이 비록 에워싼 상황 중에 있었으나, 공이 의리를 지키고 또 공이 조적의 음모를 저지하였음을 알고는 매우 고맙게 여겼다. 임금이 연경으로 가서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 종정부(中書省樞密院御史臺宗正府) 한림원에 통지하여 여러 방면으로 물었으나 충혜왕이 스스로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태가 위태하였을 때 공이 말하기를, “조적은 왕의 종이거늘,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해치고자 하였으니, 왕법(王法)에서 놓아 줄 수 없었고, 또 이미 병기가 접전될 때에 누가 다시 조적을 잠깐 동안 살려주기를 빌겠는가. 그렇다면 왕의 죄는 마땅히 말소되어야 할 것이요, 빈(彬)이 선왕의 유명으로 성(省)의 일을 권행(權行)하되 일 중에 국궁(國宮)에 관계된 것은 빈이 실로 담당하였던 만큼 왕은 죄에 걸릴 것이 없다.”하여 그 말소리가 강개하였으므로, 공을 아는 자는 모두 공을 위해서 위태롭게 생각하였더니, 공은 “우리 임금의 아들에 관한 일을 내가 바로잡지 않으면 내가 어찌 지하에 가서 선왕을 뵙겠는가.” 말하였다. 왕이 작위가 회복된 뒤에 나라로 돌아오자 철권공(鐵券功) 등을 내리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승진시켜 당성군(唐城君)에 봉하여 부(府)를 열거하고, 또 이르기를, “무릇 천자를 섬기는 일은 행성(行省)에서 실로 주관하는 것인 만큼 좌우사(左右司)가 적임자가 아니어서 일이 혹시 태만하고 실례됨이 있은 뒤에야 책망 한들 늦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공을 추천하여 난중 조산대부(難中朝散大夫)를 삼았다. 명릉(明陵)께서 왕위를 이은 뒤에 허정(許政)이란 자가 있었으니, 중원 사람이었다. 공이 천자를 배격한 일이 있다고 참소를 하고 채정승(蔡政丞)이 증거를 하였는데 그 일이 중서성에 알려지자 성으로부터 관원을 파견하여 국문하였더니, 두 사람의 말이 마침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죄를 받게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 오래도록 이곳에 있을 수 없겠다.” 하고, 곧 서울로 가니 공을 아는 이는 모두 기뻐하여, “문야(文野)가 오는구나.” 하고, 조정에 추천하여 높이 발탁하려는데 공이 또 외직으로 나가기를 원하였으므로 흥국로 총관(興國路摠官)으로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다. 공이 백성에게 선정으로 다스리고 아전에게는 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덕화에 감격하는 백성이 남아 있다. 신묘년에 현릉(玄陵)이 즉위하여 공신을 책록할 때, “홍빈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히 나에게 충성하였고, 또 현재한 선왕의 대신 중에 홍빈 만한 이가 없으니, 의당 재상의 지위에서 나의 다스림을 도와라.” 하고, 추성익대동덕협의보리(推誠翊戴同德協義輔理) 열 글자의 공신호를 내리어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전리사사 당성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判典理司事唐城府院君)에 봉하였으니, 이는 옛날 승상으로서 봉후(封侯)하는 일은 대신을 매우 총애하는 것이었다.
지정(至正) 계사년 겨울 12월 17일에 병으로 본집에서 졸하니, 나이가 66세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애도하여 부의를 중히 하고 시호를 강경공(康敬公)이라 하였다. 관에서 장사를 돌봐주어 다음해 1월 초 8일에 성남(城南)에 장사하니, 공의 사후 영예가 유감이 없다고 하겠다. 중조 휘 충(沖)은 본국에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上將軍)을 증직하였고, 조부 휘 세(世)는 삼중대광 도첨의정승 판전리사 상호군(都僉議政丞判典理事上護軍)을 중직하였고, 아버지 휘 윤심(允深)은 추성익대좌리공신남양군(推誠翊戴佐理功臣南陽君)을 증직하였으며, 원나라에서 통의대부 집현직학사(集賢直學士)를 주었고, 어머니 김씨는 돈황군부인(燉煌郡夫人)을 봉하였으니, 정의대부 판성공시사(判繕工寺事) 휘 지(祉)의 딸이다. 고씨(高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돈황군 부인을 봉하였으니, 중봉대부 예부상서(中奉大夫禮部尙書) 극인(克人)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은 수산(壽山)이고, 통의군(通儀君) 왕연(王珩)의 딸로서 계실(繼室)을 삼았으니, 경화옹주(敬和翁主)이다. 왕씨는 소생이 있었고, 수산은 원나라에 벼슬하여 내장고부사 고주동지 비서낭중 상경력육운제거관(內藏庫副使高州同知秘書郞中尙經歷陸運提擧官)을 역임하고 봉훈대부(奉訓大夫)에 이르렀으며, 본국에서는 봉상대부 통례문부사(奉常大夫通禮門副使)였으며, 손자는 남녀 각기 하나씩이 있었는데, 귀(貴)는 지금 봉선대부 흥위위보승호군(奉善大夫興威衛保勝護軍)이요, 손녀는 중의대부 좌우위보승장군(左右衛保勝將軍) 백순(白絢)에게 출가하였고, 증손 강(康)은 어리고, 백씨 두 사람도 모두 어리다.
공이 제거(提擧)에게 글을 가르칠 때 절동(浙東) 호중연선생(胡仲淵先生)이 공의 집에서 머물렀고, 나의 선군(先君) 가정공(稼亭公)이 동성(東省) 좌막(佐幕)이 되었을 때, 공과 동료이며 또 서로 좋게 지냈기 때문에 나와 같이 수업을 하게 되었으니, 날이 저물어 돌아가려 하면 공이 만류한지가 1달이 넘었고, 공이 나를 먹이고 묵게 한 그 은혜가 또한 깊었다. 아, 슬프다. 이 명(銘)을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도덕과 정사(政事)가 국사(國史)에 실려 있고 석실(石室)에 간직되었기 때문에 이를 본 사람이 드물었으니, 가전(家傳)을 지어서 성시(聲詩)로 전파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었는데, 하물며 제거가 청하기를 지나칠까 보냐. 집을 다스림에는 엄격하고, 일에는 과단성이 있고, 어지러운 시기에 절개를 지키며 빼앗을 수 없었으니 비록 옛 열장부(烈丈夫)라도 공보다 뛰어난 자가 없을 것이다. 아, 슬프다. 공은 강명(剛明)함이 지극하다고 이를 것이다. 공이 늙은 뒤에 천하가 비로소 어지러웠으니, 공의 마음을 알겠다. 그 꿋꿋하고 과감한 기운이 장차 구원(九原) 밑에 맺혀있으리라. 봉과 기린처럼 태평을 기다려서 나오겠는가. 나로서는 이제 알 수 없도다. 아, 명을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홍공이시여/嗚呼洪公
궁중에 숙위하고/宿衛中宮
자라나 등용되어/長?擢用
재주가 출중하였지/才出於衆
강의 남에/惟江之南
두 차례나 우리 사신 맞이하여/再騁我?
가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여/所居稱職
백성은 그 덕을 생각하오/人懷其德
의릉 그 옛날에/毅陵惟昔
뭇 소인이 날뛰거늘/群小轢凌
공이 미워하여/公憎于懷
숯과 얼음 같았네/如炭于氷
간사한 놈 틈을 타니/奸夫抵隙
영릉의 액운이라/永陵之?
오직 공이 말씀하고/惟公之舌
오직 공이 도왔소/惟公之掖
선왕께서 이르시길, 아,/先王曰?
내 젊었을 때/予少之時
공의 충성 알았기에/知公之忠
늘 공을 생각하였네/念玆在玆
이에 세워 정승 삼으니/爰立作相
백관의 어른이라/百察是長
태보인 석을 스승 삼으니/保奭是師
오직 덕을 숭상하였소/惟德之尙
아, 홍공이시여/嗚呼洪公
벼슬과 녹이 풍부하였소/爵祿則豊
자손이 얼마 없으니/子孫無幾
뉘라서 그 궁함을 구하려나/誰?其窮
뉘라서 그 궁함을 구하려나/誰?其窮
아, 홍공이시여/嗚呼洪公
동문선 제128권   
 
 
 묘지(墓誌)
 
 
윤모 최부인 묘지 병서 (尹母崔夫人墓誌) 幷書 
 

율정(栗亭) 윤문정공(尹文貞公)이 그의 아들 지금 삼사부사(三司副使) 구생(龜生)을 위하여 며느리를 택할 때, 부인이 어질어 여공(女工)을 행하되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쉬지 않고 또 그 아우에게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한다는 소문을 듣고 문정공이 말하기를, “이 규수가 내 며느리감이다.” 하고는 예로써 맞이하였다. 시집온 뒤에 시부모 섬김에 며느리의 직분을 다하고 시누이를 시집보내며, 그 딸을 기르되 마치 자신의 자식과 같이 돌보았으며, 일가 중에 혹시 굶주리고 춥다면 부인이 의식을 주고 스스로는 주리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문정공 조상의 분묘가 금(錦)에 있는 것이 일곱 군데였는데, 삼사(三司)가 세시로 제사하며 부인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전물(典物)을 예식대로 장만하였으니, 어버이를 잘 섬기고 조상에게 공경함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부인의 장자 소종(紹宗)은 나의 문생이니, 을사년 과거에서 장원하였으며 지금 전의부령(典儀副令) 예문관응교이다.
문정공이 금(錦)에서 늙을 때, 매양 부인을 보고는, “나의 어진 며느리여, 나의 어진 며느리여, 우리 집에서 장원을 낳았구나.” 하였다. 문정공이 졸하여 장사지낼 때, 부인이 몹시 슬퍼하며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홍무(洪武) 신유년 겨울 10월 임술일에 병으로 마치니, 나이 65세였다. 금의 남산(南山) 문정공 묘소 오른편에 장사하였는데 조정의 사대부로서 만사(輓詞)로 곡한 자가 많았다. 그의 아우 성균박사(成均博士) 회종(會宗)을 보내어 명(銘)을 청하니, 회종이 상복을 입고 눈과 서리를 밟으니 내 슬피 여겨 차마 사양을 하지 못하고, 이에 그 가세(家世)와 자손을 쓰고는 명(銘)을 이었다.
부인은 최씨(崔氏)요, 본관은 고죽(孤竹)이다. 경덕재생(經德齋生) 휘 치(峙)는 증조인데,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킬 때 어부 중에 도피하여 더럽히지 않았고,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 휘 신목(臣牧)은 조부인데, 은둔하여 벼슬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처사(處士)라고 지목하였고, 진사 휘 영수(英粹)는 아버지로 시명(詩名)이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고, 주계사심관 쌍부감무(朱溪事審官雙阜監務) 배군(裵君) 휘 종연(宗衍)은 그 외조로 공평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이 있는데, 전의(典儀)는 우윤(右尹) 강창수(姜昌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고, 판서 박경(朴瓊)의 딸을 계실(繼室)로 삼아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회(匯)이며, 박사는 판사(判事) 정인언(鄭仁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이름은 강(江)과 하(河)인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딸이 되어 덕을 잡고/爲女執德
며느리로서는 법도가 있었네/爲婦蹈則
어머니가 되어 위의가 있으니/爲母有儀
그 위의 그르지 않았소/其儀不?
의당 아름다운 아들/宜有其子
영화와 녹으로 봉양하네/榮以祿食
살아서는 문정을 섬기더니/生事文貞
죽어서는 그 곁에 장사하네/死藏其側
얽힌 산과 긴 물/山密水長
이곳이 실로 현택이요/實惟玄宅
거의 잘못되지 않아/庶其勿訛
이 새긴 돌이 보전되리/保玆石刻

동문선 제129권   
 
 
 묘지명(墓誌銘)
 
 
유명 조선국 특진보국숭록대부 한산백 목은 선생 이문정공 묘명 병서 (有明朝鮮國特進輔國崇祿大夫韓山伯牧隱先生李文靖公墓銘)幷序 
 

하륜(河崙)

중국에서 진사에 오르고 이학(理學)으로써 동방을 처음 밝히고 벼슬이 왕국상상(王國上相)에 이른 사람은 한산(韓山) 목은 선생 이문정공(李文靖公)이 있을 뿐이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선산(星山) 초은 선생(樵隱先生)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더불어 예위(禮圍)를 맡았을 때, 하륜이 부족한 재주로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제자의 예를 잡은 지가 30여년이었다. 공이 졸했으나, 직무로 인하여 나아가 영전에 울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태까지 슬픔이 잊히지 않더니, 이제 그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 권근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내가 실로 공의 덕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형용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으나, 정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색(穡)이요, 자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이니, 대대로 충청도 한주(韓州)에 살았다. 증조 휘 창세(昌世)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을 하였고, 조부 자성(自成)은 원조(元朝)의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증직받았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成事)를 증직하였고, 아버지 휘 곡(穀)은 원조의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요,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都僉議?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였고, 호는 가정(稼亭)이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었다. 원조(元朝) 원통(元統) 계유년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시문이 일시에 높아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어머니 김씨는 원조 요양현군(遼陽縣君)이요, 본국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이니, 천력(天曆) 무진년 5월 신미일에 공을 낳았다.
어릴 때부터 매우 영리하고 총명하여 글을 읽자마자 외웠다. 지정 신사년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나이가 14세였고, 무자년에 가정 선생이 원조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공이 예에 따라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에 충원되니 학문이 더욱 진보되었다. 경인년에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다음해 정월에 졸하자, 공이 분상하여 상복을 끝내었다. 계사년 여름에 본국 예부의 고시에 으뜸으로 합격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었다. 가을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갑오년 봄에 경사(京師)에서 회시(會試)를 볼 때 대궐 뜰에 대책(對策)을 올려 크게 독권관(讀卷官)의 칭찬을 받아서 제2갑(甲) 제2명에 급제하자 응봉한림문자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칙임(勅任)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왕이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전리정랑 예문응교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으로 취임하였다. 을미년 봄에 왕부필도치(王府必?赤)가 되었다가 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에 올랐다. 이로부터는 본국의 제수에 모두 관직(館職)을 겸하였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는 예임본원(禮任本院)이었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었다.
공은 천하가 어지럽자 어머니가 늙었음을 칭탁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가을에 본국이 관제(官制)를 고치자,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으로 문무(文武)의 선발에 참여하였다. 공이 일찍이 글을 올려 시정(時政) 여덟가지를 말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써 정방(政房)을 없애고 이부와 병부를 뽑는 제도를 되살리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命)이 있었다. 정유년에 국자좨주가 되고 지합문(知閤門)으로 왕부지인(王府知印)이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옮겼다. 무술년에 동료들이 모두 국사에 대해 말하다가 권세가들에게 미움을 입어 좌천이 되었을 때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은 뭇 사람들에게 비교할 수 없다.”하여, 추밀원 우부승선에 승진시켰다가, 여러번 옮겨서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기밀(機密)에 참여한 지 무릇 7년동안 보좌함이 실로 많았다. 신축년 겨울에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왕이 남으로 거동을 할 때, 공이 왕을 따라 호위와 협찬하여 수복의 공을 이룩하여, 훈1등(勳一等)에 책정되고 철권(鐵卷)을 받았다. 계묘년 원조에서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주었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단성보리공신(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端誠保理功臣)의 호를 주었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여, 을사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수협역서(搜挾易書)의 법을 행할 것을 청하였고, 정미년 원조(元朝)에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 되었고, 무신년에 판개성 겸 성균대사성(判開城 兼成均大司成)으로서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성균관을 다시 창건하고, 일대에 경술(經術)을 익힌 자를 골라서 나누어 생도를 가르치게 하되 모두 다른 벼슬로 학관을 겸하게 하였다. 공이 날마다 여러 학관으로 더불어 나누어 가르친 뒤에 서로 토론하고 논변도 하면서 해가 저물도록 게으름이 없었으니 학자들이 옛 습속을 변하여 유풍(儒風)이 한결같이 새로웠다. 그 해 여름에 왕이 구재(九齋)의 생도에게 육경(六經)의 뜻을 시험하여 급제 7명을 뽑을 적에 공으로 하여금 시권을 읽게 하였다. 기유년 또 동지공거가 되어 삼장통고(三場通考)의 법을 실시할 것을 청하여 행하였다.
처음에 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 동쪽 언덕에 세우자고 하였으나, 그 땅이 협소하다고 하여 다시 마암(馬巖) 서쪽 땅을 보았는데, 너무 드넓어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이 글을 올려 중지할 것을 청했다. 왕이 노하여 유탁 등을 옥에 가두어 죽이려 하면서 공을 시켜 백성들에게 유시하는 글을 짓게 하자, 공이 그 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왕이 네 가지의 죄목을 열거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요, 또 죽일 죄가 못됩니다. 근자에 유탁 등이 글을 올려 영전의 공사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비록 이것으로 죄를 준다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글을 올렸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왕께서 생각하소서.”하였더니, 왕이 더욱 노하여 급하게 글을 짓게 하였다. 공이 엎드려 여쭙기를, “신이 어찌 감히 글을 고의로 만들어서 그 죄를 읽을 수 있겠습니까.”하자, 왕이 더욱 노하여 정비(定妃)의 궁(宮)에 옮겨 처하고는 조석을 거절하였다. 그 이튿날 총애하는 신하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왕에 청하여 공을 하옥할 것을 청하고 왕명을 따르지 않는 죄명을 주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주상의 알아주심을 입어 포의(布衣)에서 달관(達官)까지 이르렀으매, 일찍이 ‘임금의 덕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진달하여 숨김이 없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제 왕이 유시중(柳侍中)을 죽이려 하시니, 내가 감히 극진히 말씀을 드리는 것은 왕의 이름이 천하 후세에 아름답지 못하올까 두려워함이었네.” 하였다. 옥관(獄官)이 그 말을 갖추어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드디어 깨닫고 유탁 등을 방출시키고 사람을 시켜 공에게 말하기를, “내일에 목욕하고 조회를 하면 내 장차 사과하련다.”하였다. 그 위에 왕이 더욱 공경하고 조심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로 그 가을에 정당문학에 오르고, 공신호를 더하여 문충보절찬화(文忠保節?化)라 하였다. 왕이 공을 불러들일 때마다 반드시 주위를 깨끗이 하고 향을 피우며, “이색의 학문은 중국에서도 역시 매우 드무니,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9월에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고, 이듬해 6월에 왕명으로 본직에 기복(起復)되니 공이 힘껏 사퇴하였고, 계축년 겨울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갑인년 가을에 왕이 훙(薨)하였다. 공은 요양현군이 졸한 뒤에 슬픔으로 병을 얻었더니 왕이 훙서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정사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推忠輔節同德?化)의 호를 내리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고, 임술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에 봉하였고, 갑자년에 부원(府院)을 더하였으며, 을축년에는 검교문하시중에 옮겼다. 병인년에 또 지공거가 되었으니, 공이 무릇 다섯 차례나 고시를 맡아서 훌륭한 선비를 뽑은 바가 많았다. 무진년에 명 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무신(武臣) 최영(崔塋)이 위주(僞主)를 끼고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을 치려고 하여 군사가 압록강에 도착하였는데,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최영의 무리를 잡아 물리쳤다. 공을 기용하여 문하시중을 삼았더니, 공이 말하기를, “이제 국가에 혼란이 생기고 왕은 어려서 친히 조회할 수 없으니 집정(執政)한 자가 당연히 해야 될 것이므로, 노신이 감히 자청합니다.”하였더니, 왕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들었다 하여 굳이 만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이 국은을 지극히 후하게 받았기 때문에 늘 죽음으로써 갚고자 하였으니, 실로 나라의 명(命)을 천자(天子)에게 진달한다면 비록 죽어도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하고는 곧 명나라에 가서 상세히 주달하였더니, 고황제(高皇帝)가 특례로서 대우하여 은총을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 여름에 귀국하여 가을에 병으로 번잡한 정무를 풀어 줄 것을 청하여 판문하부사가 되고,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공이 자신에게 붙지 않음을 꺼리는 자가 탄핵해서 장단현에 안치되었다가, 경오년 4월에 함창(咸昌)으로 옮겼다. 5월에 유이(尹彛) ㆍ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공 등 몇 10명을 청주(淸州)에 가두어 장차 준절한 법을 쓰려고 죄목을 꾸며 사태가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나, 공은 정의와 천명으로 자처하여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하늘에서 별안간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쳐 성문이 파괴되고 관사가 다 잠기게 되었는데, 문사관(問事官)이 나무를 잡아 겨우 화를 면하였다. 역마를 달려 이를 나라에 보고하였더니, 모두 놓아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청주의 부로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고을이 생긴 이후 이런 극심한 수재가 없었는데, 이는 공 등의 일에 원한이 있기 때문이다.”하였다. 임금이 본래부터 공이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여러 차례 소환하려 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들이 번번이 배척하였다. 신미년 겨울에 공이 함창(咸昌)으로부터 소환되어 다시 한산부원군이 되었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로 귀양갔다가, 6월에 여흥(驪興)으로 옮겨졌고,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가 공을 고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망령되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무고를 거짓 자백할 수 있겠는가. 죽어서도 바른 귀신이 될 것이니, 또한 혐의도 없어질 것이다.”하였다. 그 말이 조정까지 들려 왕이 용서하여 장흥부(長興府)에 옮겼다. 그와 동시에 귀양간 자는 공의 힘을 입어 많이 보전되었다.
겨울에 석방되어 한주(韓州)로 돌아왔고, 을해년 가을에 관동을 유람하다가 오대산에 들어가 이어 머물렀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어 맞이하여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옛 친구의 예로써 대우하였으며, 공이 뵙고 물러갈 때는 반드시 중문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병자년 여름 5월에 공이 여강(驪江)에 가서 피서하기를 청하였고, 5월 7일에 병이 위급하자 어떤 중이 와서 그 방법을 이야기하니 공이 사절하여 말하기를, “생사의 이치는 내 이미 의혹이 없노라.”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졸하니, 나이 69세였다. 부고가 이르자 왕이 반찬의 숫자를 감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부의와 장사를 예(禮)로써 행하고 시호를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다. 10월에 아들 종선(種善) 등이 관을 모시고 한주로 돌아와 11월 갑인일에 가지원(加智原)에 장사하였다.
공은 성품이 맑고 학문이 정밀하며, 일찍이 가훈(家訓)을 받들어 벽옹(?雍)에 들어갔으며, 문학에 넓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성리학에 힘썼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는 후생을 길러 사문(斯文)을 흥기함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학자들이 태산 북두와 같이 우러러 존경하였다. 나라의 사명(辭命)을 맡은 지 수 10년이 되었지만 늘 조정의 칭찬을 받았으며, 시문(詩文)을 지을 때 붓을 잡으면 곧바로 쓰되 글과 이치가 극히 정밀하여 당시에 절묘하였고, 문집 55권을 남겼다. 초은(樵隱)이 박학하고 감식안이 있어 선배를 논함에 칭찬이 적었으나, 다만 공에게는 감탄을 마지 않으며 말하기를, “목은은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평상시에 사람을 맞이하고 일을 접함에 혼연하여 둥근 화기(和氣)가 감돌았다. 벼슬을 하여 처사할 때는 의논이 절실하고 명확하게 흔들리지 않더니,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에 힘쓰고, 조금도 명예를 가깝게 하는 누가 없었다. 평생에 살림살이를 하지 않아 비록 여러 차례 부족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가롭게, 때때로 산수(山水)에 놀면서 스스로 소일을 하였으며, 방외(方外)의 사람이라도 종유하고자 하는 자는 거절하지 않았고, 시문을 구사하는 자가 있으면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으로 이단(異端)을 물리치지 않았다고 기롱을 하였으니, 공과 같은 이치를 통달한 밝은 식견으로 어찌 환망(幻妄)의 설을 믿었겠는가. 공이 서거할 때의 한 마디 말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 영가(永嘉) 권씨(權氏)는 원 나라 명위장군(明威將軍)이며, 우리나라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 나라 태자좌찬선(太子左?善)이며, 우리나라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 한공(漢功)의 손녀인데, 어진 행실이 있어 부도(婦道)를 지켜 살림살이로써 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 지밀직사사였고, 다음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였으며, 병진년 과거에 올라 기사년에 동지거거(同知貢擧)였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 종선(種善)은 사헌부 집의로서 임술년 과거에 올랐었다. 지밀직(知密直)의 아들은 넷인데, 맏아들 맹유(孟?)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요, 다음 맹균(孟畇)은 예문관직제학으로 을축년 과거에 올랐고, 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 과거에 올랐고, 다음 맹진(孟畛)은 사복시직장이었다. 딸은 들인데 맏딸은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총제(僉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가고, 첨서(僉書)는 아들이 여섯인데 맏아들 숙야(叔野)는 사재고감(司宰小監)이요, 다음 숙규(叔畦)는 사수주부(司水注簿)요, 다음 숙당(叔當)은 부사직이요, 다음 숙묘(叔畝)는 공조의랑(工曹義郞)이요, 다음은 숙복(叔福)이요, 다음은 숙치(叔?)이다. 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고, 집의는 아들이 셋인데 맏아들은 계주(季疇)요, 둘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영재로세 / 維韓之英
가정이여 / 有翼稼亭
패옥같은 문장으로 / 瓊?厥辭
황제의 뜰에서 급제했네 / 射策帝廷
아, 빛나는 문정공이 / 於赫文靖
실로 경을 전하였소 / 實維傳經
일찍이 벽옹에 들어가 / 蚤入?雍
그 향기를 크게 풍겼고 / 大播其馨
계속 을과에 합격하여 / ?中乙科
옥당 벼슬에 올랐네 / 繼踵玉堂
그 울림이 더욱 커서 / 厥鳴益大
국가의 빛이었고 / 家國之光
동으로 돌아와서 / ?而東歸
일방에 스승이 되었네 / 師範一方
의리에 정미하여 / 義理精微
위로 정자와 장자를 이었고 / 上接程張
문장이 고고하여 / 文辭高古
소식과 황정견을 내려 보았었네 / 下視蘇黃
도가 그 몸에 쌓여 / 道積厥躬
처사가 편안하였고 / 處事安詳
덕은 나이와 함께 높고 / 德與齒尊
지위는 조정에 으뜸이었네 / 位冠巖廊
사명을 받들어 전대하여 / 奉使專對
천자에게 존경받고 / 見禮天王
돌아오자 한가함을 요청하였으니 / 來歸乞閑
진퇴가 다 옳았소 / 進退其臧
시세가 어려움이 많아 / 維時多難
하늘의 뜻은 아득하여 / 天意杳茫
진퇴양난의 시기 / 狼尾之?
나라 사람이 슬퍼하였고 / 國人心傷
태산이 무너지니 / 泰山之?
길 가던 사람도 눈물 뿌리었다오 / 行路涕滂
아,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그 덕음이 잊혀지지 않네 / 德音不忘
자손이 뒤를 이어 / 子孫其承
복록이 다하지 않으리 / 福祿未央
나의 명에 아첨이 없으니 / 我銘不諛
먼 앞날에도 보리라 / 用示攸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