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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선생글 동문선 1

천하한량 2007. 1. 31. 17:47

성종의 명으로 1478년(성종 9)에 편찬된 역대 시문선집.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 등 찬집관 23명이 편찬하였다.


 

<참고>

서거정 (徐居正 1420∼1488(세종 2∼성종 19))


설명
조선 초기 문신?학자.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본관은 달성(達城). 권근(權近)의 외손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내고,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었다. 1451년(문종 1) 부교리에 올랐으며, 1457년(세조 3)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사간?지제교에 올랐다. 1460년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을 때 그곳 학자들과 문장?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었고, 《경국대전》 찬수에 참가하였으며,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하여 문형(文衡)을 관장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여섯 왕을 섬겨 14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으며, 조선 초기 관학을 대표한 핵심적 학자로 신라 이래 역대 한문학을 집대성한 《동문선(東文選)》을 엮었다.

 


동문선에 대한 내용 입니다

 

) 성종의 명으로 1478년(성종 9)에 편찬된 역대 시문선집.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 등 찬집관 23명이 편찬하였다. 《동문선》은 이 책 외에 신용개(申用漑)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宋相琦)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한다. 목록 상권 첫머리에 서거정의 서문과 양성지의 <진동문선전(進東文選箋)>이 실려 있다. 내용을 보면 권1∼3은 사(辭)?부(賦), 권4?5는 오언고시, 권6∼8은 칠언고시, 권9?10은 오언율시, 권11은 오언배율, 권12∼17은 칠언율시, 권18은 칠언배율, 권19∼22는 오언절구?칠언절구, 권23∼30은 조칙(詔勅)?교서(敎書)?제고(制誥)?책문(冊文)?비답(批答), 권31∼45는 표전(表箋)?비답, 권46∼48은 계(啓)?장(狀), 권49∼51은 노포(露布)?격서(檄書)?잠(箴)?명(銘)?송(頌)?찬(贊), 권52∼56은 주의(奏議)?차자(箚子)?잡문, 권57∼63은 서독(書牘), 권64∼95는 기?서(序), 권96∼98은 설(說), 권99는 논(論), 권100?101은 전(傳), 권102?103은 발(跋), 권104는 치어(致語), 권105는 변(辯)?대(對)?지(志)?원(原), 권106은 첩(牒)?의(議), 권107은 잡저, 권108은 책제(策題)?상량문, 권109∼113은 제문?축문?소문(疏文), 권114는 도량문?재사(齋詞), 권115는 청사(靑詞), 권116∼121은 애사(哀詞)?뇌?행장?비명(碑銘), 권122∼130은 묘지(墓誌) 등이다. 문체는 55종이며,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등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하였다. 130권, 목록 3권, 합 45책. 활자본?목판본. 규장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 1713년(숙종 39)에 송상기(宋相琦) 등이 편찬한 시문선집. 청나라에 갔던 사은사(謝恩使)가 돌아오는 길에 강희제가 《고문연감(古文淵鑑)》 《패문운부(佩文韻府)》 등 300여 권의 책을 보내주면서 조선의 시부(詩賦)를 보여달라고 청하여 조정에서 이 책을 편찬하였다. 권1?2는 사부(辭賦), 권 3 은 오언절구, 권 4 는 칠언절구, 권 5 는 오언율시, 권6?7은 칠언율시, 권 8 은 오언배율, 권 9 는 오언고시, 권10은 칠언고시, 권11은 주문(奏文)?봉사(封事), 권12는 소차, 권13∼16은 서(序), 권17∼19는 기, 권20∼25는 서(書), 권26은 설, 권27은 논, 권28은 변, 권29는 책, 권30은 전, 권31은 발?잠?명?송?찬, 권32는 원?격?상량문?비지?행장?제문?애사, 권33은 잡저로 되어 있다. 35권 15책. 현종실록자본. 규장각도서.

 

동문선 제1권   
 
 
 사(辭)
 
 
산중사(山中辭)
 

이색(李穡)

산이 그윽하고 깊디깊어 / 山之幽兮深深
빽빽한 숲에 깊고 넓은 골짝이네 / 鬱蕭森兮潭潭
누른 고니도 그 꼭대기를 못 지나가누나 / 黃鵠尙不得過其顚兮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바위들 / 截然屹立乎?巖
굽어보니 아찔한 산 그늘엔 / 邃莫?兮山之陰
서리와 이슬이 뽀얗게 젖어 있네 / 曖霜露兮濡霑
표범과 잔나비 번갈아 나와 울부짖고 / 文豹玄猿兮迭出以?
나는 새 감돌아 날제 털깃이 너울너울 / 飛禽回翔兮毛羽之??
밑 없는 굴 속에 천둥 소리 우르르 / 殷其雷奔于無底之竇兮
수풀을 뒤흔들며 날개 치는 바람신[飛廉神] / 振蕩林莽翼之以飛廉
돌부리가 솟구쳐 옷을 걸어당기고 / 石出角以鉤衣兮
비낀 가지가 길을 막아 맞찌르네 / 橫枝截路以相?
나 혼자 적막히 우뚝 서니 / 立寂漠以無隣兮
마치 말없는 기초 시 의 안화함인 듯 / ?祁招之??
멀어서 찾아갈 수 없어라 / ?不可討兮山之中
이 산 속을 동ㆍ서를 분간 못해 기진맥진하였네 / 東西冥迷兮氣奄奄
나는 듯 벼랑에 쏟아지는 샘물이여 / 淙飛泉以瀉于崖兮
폐부를 맑게 하며 맛이 달기도 해라 / 淸肺腑而味甘
손으로 움키니 싸늘한 얼음같고 / ?之手中兮?寒
쇠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라 / 照衰顔以是監
게서 쉬며 그 소리 들으니 / 爰流?以聽其聲兮
옥 패물을 쨍그렁 울리는 듯 / ??佩之相參
부싯돌로 불을 쳐 차를 달이려 하니 / 將敲火而煎茶兮
육우의 차맛 아는 것 시들하구나 / 鄙陸羽之口?
부러워라 반곡에 놀 만하다고 한 / ?盤谷之可?兮
한유의 그 글은 나의 길잡이로세 / ?其文爲我之指南
도통을 천년 만에 이었으니 / 續道?於千載兮
그 시내 이름이 염계로세 / 乃命其溪曰濂
산중에 짝이 없을망정 / 惟山中之無偶兮

모시고 섬길 스승이 있네(맑은 물을 말함) / 尙?衣於丈函
한 말씀 듣고 도를 깨달아 / 聞一言以悟道兮
이욕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자 / 洗利欲之貪?
마음 근원을 해맑게 열어 / 開心源之瑩淨兮
오직 태극에만이 함영하오리 / 惟太極之泳涵
잠깐 동안 금그은 듯이 만남 곧 있으면 / 若有遇於介然之頃兮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될 수 있으리 / 諒天地其可三
어찌하여 당(唐) 우(虞)의 유허에 엉킨 풀, 차디찬 연기 되고 / 胡唐虞之遺墟蔓草寒烟兮
우리 도가 남방으로 간단 말고 / 吾道被于南
어찌하여 물이 고여 있기만 하여 비를 안 주고 / 炎胡泓渟之而不?兮
삭방(朔方 북녘)의 눈과 월령의 독한 장기가 섞여 진창이 됐는고 / 朔雪越嶺之交粘
그러나 남은 그 여파(餘波)로 천하를 다스릴 만하여 / 信餘緖可以理天下兮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호)가 홀로 가는 말을 달렸네 / 魯齋獨騁其征?
그 물결의 혜택을 온 천하에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으니 / 然波及者靡不周兮
참상을 어찌 한하리 / 夫何恨於商參
후생이 두렵다 했거니 / 惟後生之可畏兮
푸른 빛이 남에서 나오누나 / 靑乃出乎其藍
다행히 그 도가 해ㆍ달같이 걸렸으니 / 幸其道之揭日月兮
내가 그 빛에 의지하여 만족하네 / 吾依光兮心焉甘
세상의 권세를 잊고 안으로 도를 즐기어 / 將忘勢而?樂兮
날마다 남쪽 처마 밑에 휘파람 불며 기대었네 / 日嘯倚於南?
성가시게 날 자꾸 부르기에 / 苦相招而不止兮
눈썹을 들어 바라보기도 하나 / 忽軒眉而載瞻
어허 내 처음 마음 그지없거니 / 款初心之弗竟兮
일생을 두고 여기 머물러 있으려네 / 終歲月以聊淹


[주B-001]사(辭) :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주D-001]날개 치는 바람신[飛廉神] : 본시 신령한 새 이름인데, 전(轉)하여 풍백(風伯 바람신). 《한서》
[주D-002]기초시(祁招詩) : 주(周) 나라 목왕(穆王)의 신하 모부(謀父)가 〈기초(祁招)〉라는 시를 지어 목왕에게 간하였는데, 이 시 속에 ‘음음(??)’이라는 글귀는 안화(安和)하다는 뜻이다. 《좌전》
[주D-003]육우(陸羽) : 당(唐) 나라 경릉(竟陵) 사람으로 《다경(茶經)》의 저자인데, 차의 기원, 달이는 법, 맛, 그릇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서술하여 천하의 다풍(茶風)을 일으켰다.
[주D-004]반곡(盤谷) : 골짜기 이름인데, 지금 하남성(河南省) 제원현(濟源縣) 북쪽으로서 당(唐) 나라 이원(李愿)이 반곡에 은거(隱居)하러 갈 때 한유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라는 유명한 글을 지었는데, 도통(道統)과 학(學)의 노정(路程)을 서술한 명문이다.
[주D-005]염계(濂溪) : 물 이름인데, 송유(宋儒) 주돈이(周敦?)가 여산(盧山)에 옮겨 살면서 자기 고향에 있는 염계(濂溪)의 이름을 따왔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염계 선생’이라 했다. 주돈이는 《태극도설(太極圖說)》 및 《통서(通書)》 등을 지었고, 성리학(性理學)의 개조(開祖)가 되었으므로 도통을 이었다 한다.
[주D-006]잠깐 …… 듯이 : “산골짜기의 오솔길도 개연(介然)히 다니면 길이 된다.”는 말이 《맹자》에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잠깐 트이는 것에 비유하였다.
[주D-007]천지와 …… 있으리 : 도덕이 높은 사람은 천지와 짝을 지어 가히 셋이 된다는 말이다.
[주D-008]우리 도(道)가 …… 간단 말고 : 송(宋) 나라 양시(楊時)가 명도(明道) 정호(程顥)에게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명도가 좌객(坐客)들에게 “내 도가 남으로 가는군[吾道南矣].” 하였다고 한다. 《송사(宋史)》권428
[주D-009]참상(參商) : 참(參)은 서쪽의 별, 상(商)은 동쪽 별로, 서로 어긋나 만나지 못한다는 뜻.
[주D-010]후생(後生)이 두렵다 :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학문이 선배(先輩)보다 진보되는 후생이 두려울 만하다.” 하였다.
[주D-011]푸른 빛이 …… 나오누나 : 후생(後生)과 제자가 전인(前人)이나 스승보다 나은 것을 말하는데, “얼음이 물에서 나되 물보다 차고, 퍼렁이 쪽[藍]에서 나되 쪽보다 푸르다[氷生於水寒于水 靑出於藍靑於藍].” 《순자(荀子)》 권학(勸學)

 

동문선 제1권   
 
 
 사(辭)
 
 
민지사(閔志辭)
 

이색(李穡)

애닲다, 내 뜻은 흐리멍덩 / 閔予志之溫?兮
맨 처음 본성이 아니로세 / 非厥初之有常
외물로 해 맘 움직여 / 慨因物以興懷兮
옳고 그름 잘못 판단하네 / 惟是非之失當
구름ㆍ안개 끼어 낮이 어두운데 / ?雲霧以晝晦兮
상에서 편안히 쉬려하네 / 將宴息以在床
달이 휘영청 밝아 하늘이 해 맑으면 / 月皎皎而天淨兮
옷 입고 허둥지둥 내달리려네 / 將顚倒其衣裳
대저 새벽과 밤이 그은 듯 유한한데 / 夫晨夜之截然有限兮
버들 꺾어 꽂은 울타리도 미친 사람 허둥지둥 / 折柳樊圃而瞿瞿之狂
어찌 늙어서 그윽한 골짜기에 도로 들어왔는고 / 胡老大而入子幽谷兮
진량에게 하직한 게 부끄럽네 / ?一揖於陳良
《이아》의 벌레와 고기를 소모함이여 / 爾雅蟲魚之消耗兮
손(損)이 없으면 무엇을 탓하리 / 匪有損其何傷
시와 서의 기름짐도 / 胡詩書之膏?兮
초췌하여 빛도 없네 / 亦憔悴而無光
아아, 공ㆍ맹과는 참상됨이 슬프고 / 悲參商兮孔孟
당우를 방불히 상상하네 / 想??兮虞唐
이을 듯하더니 이어지지 않고 / 若可續兮卒莫可續
꺼진 듯하더니 다시 일어나네 / ?乎將?而復揚
옛 성현의 기침소리 못듣겠고 / 竟不聞兮??
국에도 담에도 보이지 않네 / 杳不見兮羹墻
이에 천천히 내 행동 살펴보니 / 爰舒徐以視履兮
길한 징조 아예 없네 / 罔其旋於考祥
미색을 좋아하고 악한 냄새 싫어함이 혼란하여 결정 못 지으니 / 好色惡臭紛乎其不決兮
귀역의 지경에 서성댐이 마땅하구나 / 宜鬼域之彷徨
사람과 하늘의 큰 길이 환하거늘 / 惟人天之大道顯而不隱兮
어찌하여 아득한 데 구하는가 / 胡求之於渺茫
세월이 훌쩍 지나가서 / 歲月荏苒以相代兮
늙음이 찾아와 넘어지려네 / 衰老侵尋而欲?
풀ㆍ나무와 함께 썩으리니 / 甘草木之同腐兮
그 아니 놀랍고 서러운가 / 忽驚嘆而?傷
봄새가 주는 고운 소리나 / 貽好音兮春禽
귀뚜라미가 보내는 슬픈 울음이네 / 送悲聲兮寒?
잠깐 동안 귀에 시끄러울 뿐 / 諒須臾之?耳兮
한 번 웃고 말자 양 잃기는 일반일세 / 付一?於亡羊
아아, 나의 글이 시시하여 후세에 전할 것 못 되니 / 哀吾辭之匪足傳兮
애오라지 잔술이나 마셔야 하겠네 / 聊?之以羽觴
형해를 잊고 방랑하여 / 忘形骸以放浪兮
천지의 처음을 찾아 보리 / ?憑翼之玄黃
하늘이 어찌 말하리만 물이 나타나나니 / 天何言兮物之形
문이 여기 있으니 성인의 도가 환히 나타나네 / 文在?兮聖道以彰
내 글이 황잡하여 잡초처럼 거칠어 천정을 가리웠으니 / 我辭蕪兮?天庭
맹세코 간추려 내어 좋은 싹만 골라 세우리라 / 誓剛繁兮立良


[주B-001]사(辭) :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주D-001]버들 꺾어 …… 허둥지둥 : 《시경》에, “버들가지를 꺾어 꽂아 울타리를 만들어 놓아도 미친 사람이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허둥거린다.”는 구절에서와 같이, 미친 사람도 이러한데, 하물며 정상적인 사람이 아침ㆍ저녁의 분명한 시간도 지키지 못하는가 하는 뜻이다.
[주D-002]어찌 …… 부끄럽네 : 맹자(孟子)와 같은 시대 사람인 진상(陳相)이 유자(儒者)인 진량(陳良)에게 배우다가, 뒤에 그 학문을 버리고 다른 학파(學派)인 허행(許行)의 제자(弟子)가 되었으므로, 맹자가 그를 보고, 꾀꼬리는 그윽한 골짜기에서 나와 교목(喬木)으로 옮기는데, 자네는 어찌 교목을 버리고 골짜기로 들어가는가 하였다.
[주D-003]《이아(爾雅)》 : 중국 고대의 충어초목(蟲魚草木) 등 물명(物名)과 글자를 풀이한 책이름으로, 여기서는 자질구레한 문자나 파고 세월과 정력을 소모한다는 말이다.
[주D-004]국[羹]에도 …… 않네 : 갱장(羹墻)이란 문구는 옛날 요(堯)가 돌아간 뒤에 순(舜)이 3년 동안이나 앙모(仰慕)하여 앉아서는 요(堯)를 담에서 보고, 밥먹을 때는 요를 국에서 보았다는 말이 있다. 《후한서》
[주D-005]천천히 …… 아예 없네 : 《주역》에, “행동을 보아 징조를 상고한다[視履考祥].”는 말이 있다.
[주D-006]양(羊) 잃기는 일반일세 : 한 가지 일에만 충실하지 않으면 양을 잃기 쉽다는 말이다. 《열자》
[주D-007]천지(天地)의 처음[馮翼玄黃] : 풍익(馮翼)은 너훌너훌, 펄렁펄렁[馮馮翼翼]의 뜻. 《회남자(淮南子)》주에 ‘풍익’은 무형한 모양이라 하였다.
[주D-008]문(文)이 여기 있으니 :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이제 돌아갔으니 문(文)이 여기[자기에게] 있지 않으냐[文不在?乎].” 하였다. 주자(朱子) 주(註)에, “도(道)가 나타난 것은 문이라 이르나니, 대개 예악(禮樂)ㆍ제도(制度) 등을 이름이다.” 하였다.
[주D-009]천정(天庭) : 태미원(太微垣) 별. 전(轉)하여 ‘제왕(帝王)의 뜰’을 말한다.

 

동문선 제1권   
 
 
 사(辭)
 
 
영개사(永慨辭)
 

이색(李穡)

입 오무려 소리를 내면 / 興言蹙口以出聲兮
남들이 나를 교만을 벌인다 하고 / 人謂我其宣驕
변론해서 도를 밝히기를 좋아하면 / 辯之好以明道兮
남들이 나를 말 많다 하며 / 人謂我其??
명량의 노래를 좇아 내 몸을 맹세하면 / 追明良之歌以矢厥躬兮
남들이 나를 군 노래한다 하고 / 人謂我其長?
봉황이 천인에 낢을 생각하면 / 思鳳凰之飛于千?兮
남들이 나를 다루기 어렵다 하며 / 人謂我其難要
부엉이가 내 집을 망가친다 하면 / 惟??之壞我室兮
남들이 나를 조롱한다 하고 / 人謂我其相嘲
세상이 너절하게 비좁다 여기면 / 鄙塵?之局促兮
남들이 나를 너펄거린다 이르며 / 人謂我其飄搖
명교의 준칙을 좁다하면 / 隘名敎之準繩兮
남들이 나를 멋대로 거닌다 하고 / 人謂我其逍遙
내 방에 들어앉아 편히 쉬면 / 入我室以宴息兮
고부간 싸움으로 시끄럽고 / 婦姑?磎以膠膠
성현(聖賢)들을 옛 글에서 대할 양이면 / 對聖賢於黃卷兮
넓은 허공에 바구미를 찾는 듯하여 / 若??於?寥
소리도 그림자도 아득히 찾을 길 없으니 / 杳莫尋其聲影兮
부끄러운 면목으로 어찌 맞으리 / ?面目之奚邀
하물며 미묘한 말씀이 귀에 들릴 수 있으랴 / ?微辭之及於耳兮
사조의 아득한 메아리가 막막하네 / 昧?響於?姚
집을 나서 길이 달려 / 欲出戶庭以長騁兮
녹이ㆍ표조 앞세웠네 / 先??與驃?
슬프다, 가시덤불이 긴 길을 가리워 / ?荊棘之?脩道兮
고삐를 돌려 무료히 오네 / 回予?以無聊
남들이 나를 용이 없다 이름은 / 人謂我其無用兮
나의 학이 난잡함이요 / 斯其學之?也
남들이 나를 체가 없다 이름은 / 人謂我其無體兮
나의 행실이 엷음이요 / 斯其行之?也
남들이 나를 공밥 먹는다 이름은 / 人謂我其素飡兮
내가 실로 그 말을 달게 받겠네 / 我實甘其招也
다만 나의 입언이 말(末)임을 생각하니 / 惟立言之最末兮
눈물이 두 뺨을 적시네 / 兀流涕而?交
대저 공업 세움은 반드시 남의 험에 의탁해야 하는 것 / 夫脩功必因人兮
요행을 바랄 것이 못되네 / 非厥幸之可?
덕 닦을 줄 모르는 것을 / 夫何德之不知修兮
왜 남들이 나를 요량키 어렵다 이르는가 / 人謂我其難料
오미하여 알지 못하는 자는 바르고 곧은 길 버리니 / 彼昏不知兮舍是正直
허둥지둥 내닫다가 타락에 빠짐을 면치 못하리라 / 宜其冥趨而陷于淫?也
네가 이미 뉘우치고서 이렇듯 망설이니 / 爾旣悔兮猶豫之如斯
남들이 나를 요량키 어렵다 이름이 마땅하구나 / 宜乎人謂我其難料
천 년 뒤에 사람이 있으리니 / 千載而有人兮
한밤중에 탄식하며 상상하네 / 想永慨於中宵


[주B-001]사(辭) :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주D-001]명량(明良) :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남. “머리[元首]가 밝은저 팔다리[宰相]가 어진저[元首明哉 股肱良哉].”라는 노래가 《서경》에 있는데, 그 노래를 좇아서 밝은 임금 밑에 어진 신하가 되길 맹세한다는 것이다.
[주D-002]봉황이 …… 낢 : 봉황은 높이 천 길 위에 날아서 굶주려도 곡식을 쪼아 먹지 않는다 한다.
[주D-003]부엉이가 …… 망가친다 : 《시경》에, “부엉아, 부엉아, 제발 내 집을 망가치지 말려무나.”하는 시가 있는데, 관숙(管叔)ㆍ채숙(蔡叔) 등 종실(宗室)이 주실(周室)을 뒤엎을까 걱정하여 주공(周公)이 그들을 치기 전에 먼저 성왕(成王)에게 풍유(諷諭)한 노래라 한다.
[주D-004]명교(名敎) : 인륜(人倫)의 명분(名分)을 밝히는 유교(儒敎)를 말하는 것인데, 곧 도덕의 교. 단적으로 노장(老莊) 사상에는 명교의 예법(禮法)을 좁다 한다.
[주D-005]멋대로 거닌다[逍遙] : 소요는 《장자》 첫 편의 이름인데, 그 주지(主旨)가 세상의 준칙에 얽매이지 않고 물외(物外)와 무위(無爲)에 멋대로 거님에 있다.
[주D-006]사조(?姚) : 조사(姚?)를 거꾸로 쓴 것으로, 사(?)는 하우(夏禹)의 성(姓), 조(姚)는 우순(虞舜)의 성, 순(舜)ㆍ우(禹) 성군(聖君) 때 말씀과 글.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위로 조와 사를 엿보건대 아득히 가이 없다[上規姚? 渾渾無涯].” 하였다.
[주D-007]녹이(??)ㆍ표조(驃?) : 녹이(??)는 본래 녹이(綠耳) 귀가 푸른 천리마로, 주목왕(周穆王)의 팔준마(八駿馬)의 하나. 표조는 황백색 준마의 이름.
[주D-008]공밥[素餐] 먹는다 : 공(功) 없이 거저 밥을 먹는 일. 덕(德) 없이 나라의 녹(祿)을 먹는 것을 이름이다.
[주D-009]입언(立言) : 최상(最上)은 덕을 세우고, 그 다음은 공을 세우며, 최말(最末)에는 말을 세운다[立言]는 옛말이 있다. 입언(立言)은 후세에 전할 만한 말과 글.


동문선 제1권   
 
 
 사(辭)
 
 
유수사(流水辭)
 

이색(李穡)

물은 오직 아래로만 흘러 / 水之趨兮惟下
백 번 꺾여도 그냥 내리네 / 日百折兮不舍
바다에 들지 않곤 어느 웅덩이엔들 멈추리 / 不入于海兮何科之停
웅덩이를 채우고는 나아가니 / 盈必進兮
누가 그 멍에를 풀어 쉬게 할꼬 / 誰稅其駕
길가 구덩이에 고인 물도 근원이 없지 아니하여 / 彼行?之靡不源兮
한 여름 비에 위력을 뽐내나니 / 尙逞威於大雨之炎夏也
금방 말라질 듯하다가 곧 이어지니 / 勢暫似兮旋踵
어리석은 자에 자랑할 만하네 / 猶足?於鄙者也
우물을 쳐 깨끗이 한 물을 내 어이 먹지 않으랴 / 吾寧不食於井之渫兮
하늘의 해와 별이 거꾸로 비쳤구나 / 大虛日星之倒寫也
더러운 잡물이 안 섞인 물을 / ?雜穢之不?兮
왜 쳐 내며 왜 쏟아버릴꼬 / 夫何滌而何瀉也
막다른 항구에 항행치 마소 / 毋航斷港兮
막힐까 두려워하네 / 恐其窒也
약수를 밟지 마소 / 毋踵弱水兮
빠질까 두렵네 / 恐其溺也
이에 종장(終章)으로 이르노니 / ?從而亂之曰

천성이 하나인데 선ㆍ악이 어찌나 상대되나 / 性一兮淑慝之胡形
재주는 하나인데 취하고 버림에 걸리누나 / 才一兮取舍之是?
시냇물 샘물은 졸졸 / 澗泉之幽幽
강과 바다는 출렁출렁 / 江海之冥冥
내 그 가운데 노래하니 / 我歌其中兮
귀밑 털 희끗희끗 / ?毛之星星
천 년 뒤에 오는 사람 / 千載有人兮
귀 있거든 들으소 / 有耳其聆


[주B-001]사(辭) :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주D-001]웅덩이를 …… 나아가니 : 물은 웅덩이에 찬 뒤에 나아간다[盈科而後進]. 과(科)는 구덩이[坎]의 뜻. 《맹자》
[주D-002]누가 …… 할꼬 : 달리는 말의 멍에를 풀어 쉬게 함. “사물이 극하면 쇠하나니, 나는 멍에를 풀 바를 모르노라[物極則衰 吾未知所稅駕也].” 《사기》
[주D-003]우물을 …… 물[井渫] : 우물이 이미 준설(浚渫)됨. 스스로 몸가짐을 깨끗이 함의 비유. 설(渫)은 더럽고 흐린 것을 쳐 버려 깨끗이 함이다. 《주역》 정괘(井卦)에 “깨끗한 우물 물 먹지 않으니 마음 슬프다[井渫不食 爲我心惻].” 하였다.
[주D-004]약수(弱水) : 부력(浮力)이 약하여 새 털도 가라앉는다 한다.

동문선 제1권   
 
 
 사(辭) 이색
 
 
일본국에 사신 떠나는 정몽주(鄭夢周 字는 達可)를 보내며[東方辭]
 

저 동방에 임금 있어 / 詹東方之有君兮
태고로부터 자존했네 / 肇大始以自尊也
그 사람들이 의와 인을 숭상하고 / 其人佩義而服仁兮
기는 세차고 말은 온순했었네 / 厥氣勁而詞溫也
그러나 그 뒤 세도가 변천하매 / 越世道之升降兮
강렬만을 숭상하여 / 尙剛烈而專門也
걸핏하면 목숨 버림이 / 其輕生而敢死兮
북궁유(北宮?)로도 못 비길지라 / 何北宮?之足言也
주말 전국을 본뜬 풍속 / 倣周季之戰國兮
오싹 소름이 끼치고 간담을 서늘케 하네 / 凜凜乎使人毛竪而驚魂也
던져 주는 밥 먹지 않고, 눈 흘김도 원수를 갚아 / 嗟來不食兮??必報
아비와 형도 모르거니 자식ㆍ손자 아랑곳할까 / 上忘父兄兮下忘後昆也
하물며 처자와 하인들을 / ?妻?與輿臺兮
보기를 개돼지만도 못하고 / 視之不?犬豚也
이 몸이 시어져도 / 蓋此身兮?盡
이름만은 남긴다네 / 羌名譽兮求存也
선비는 죽일지언정 / 士可殺
욕되게는 못할것이요 / 不可辱兮
의관으로 욕 다함은 나라의 치욕이로세 / 辱衣冠痛在國也
이렇듯 백성을 가다듬어 풍습을 길렀으니 / ?于民而陶俗兮
그들로선 그럴듯한 일, 무엇을 책할쏘냐. / 亦其宜而何責也
사물이 극하면 반드시 변하는 법 / 極而罔有不變兮
예양의 풍속이 혹 금시 이뤄질 듯 / 揖讓或在於旦夕也
중국의 의관은 몇 번이나 제도가 바뀌었으나 / 中華衣冠之幾更制兮
우리는 아직 옛날 그대로이네 / 我?猶夫古昔也
천하 만국이 모두 서로 교통하건만 / 舟車所至之必通兮
우리는 아직 문턱을 넘은 일도 없네 / 我?足不踰?也
해 뜨는 곳의 천자가 / 日出處之天子兮
부상 땅에 터전을 잡았도다 / 奄宅扶桑之域也
원래 만물이 자라고 큼은 / 惟萬物之生育兮
동풍이 따스하게 불어 주는 때문이요 / ?谷風之習習也
온 누리를 환하게 내리비춤은 / 惟下土之照臨兮
저 햇님이 혁혁히 떠 있음이라 / ?陽烏之赫赫也
이 두 가지가 나오는 고장은 / 之二者之所出兮
과연 천하 무적의 나라이건만 / 信天下之無敵也
어쩌다 군흉들이 틈타 내달아 / 胡群兇之竊發兮
지금껏 저렇게 창궐하였는가 / 至于今其猖獗也
악명을 천하에 뿌리고 죄가 이미 극도에 이르니 / 播惡名於天下而旣稔兮
지사ㆍ인인들이 모두 동방을 위하여 애석히 여기네 / 志士仁人莫不爲東方惜也
이는 천하의 전쟁을 불러 일으킬 징조 / 是將動天下之兵端兮
의심 없으니 점칠 것도 없네 / 不疑又何卜也
볼과 턱뼈는 서로 의지하는 것 / 輔車相依兮
우와 괵이 거울이요 / 虞?是監
초 나라가 잔나비를 잃으면 화가 온 수풀에 미치는 법 / 楚國亡猿兮禍林木也
교빙을 하면서도 진정으로 하잖으면 / 旣交聘兮或不以情
위에 계신 신명이 정직히 감찰하시리 / 上有神明兮司正直也
이제 그 권이 그대에게 있으니 / 今其權兮有所在
그대는 음식을 부디 삼가고 / 子其愼兮飮食也
일상 생활에 생각을 줄이세 / 少思慮兮興居
건강을 보전하여 그 직책을 다하소 / 保厥躬兮供厥職也
서투른 나의 글이 필력이 쇠했으니 / ?予詞兮筆力衰
말은 끝났어도 뜻은 그지없사외다 / 言有盡兮意無極也


[주B-001]사(辭) :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주D-001]저 동방에 …… 자존(自尊)했네 : 일본 고대의 군주(君主)가 그 지리적 특수성에 의하여 자존이 세었다.
[주D-002]북궁유(北宮?) : 전국 시대의 역사(力士)로 남에게 지지 않고 임금 찌르기를 거지 찌르듯 하던 자.
[주D-003]던져 …… 않고 : 제(齊) 나라 검오(黔敖)는 흉년에 밥을 지어서 길가에 왕래하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데 어느 한 사람이 굶주려서 기운 없이 오는 것을 보고, “아아, 불쌍하다. 와서 먹어라.” 하니, 그 사람은, “나는, ‘불쌍하다, 먹어라’하는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하면서 먹지 않았다.
[주D-004]해 뜨는 곳의 천자 : 일본이 수(隋) 나라에 보낸 맨처음 국서(國書)에, “해 돋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보내는 글[日出處天子 奇書日沒處天子].”라 해서 수 나라 황제가 불쾌히 여겼다. 《수서(隋書)》
[주D-005]부상(扶桑) : 동방 신목(神木) 이름. 전(轉)하여 일본을 가리킨다. “양곡(暘谷)에 부상이 있으니 열 해[日]가 멱감는 곳이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徑) “부상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으니 키가 몇천 길, 천여 아름인데 해 뜨는 곳이다.” 《십주기(十洲記)》
[주D-006]볼[輔]과 …… 것 : 보(輔)는 협보(頰輔) 곧 볼, 거(車)는 아거(牙車) 곧 아래턱뼈,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 《좌전》희공(僖公) 5년에, “속담에 이른바, ‘꼴과 턱뼈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말을 우(虞)와 괵(?)을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주D-007]우(虞)와 …… 거울이요 : 춘추(春秋) 때에 진후(晉侯)가 우(虞)에게 길을 빌어 괵(?)을 멸하고 나서 군사를 돌이켜 오는 길에 또 우를 멸했다.

동문선 제1권   
 
 
 사(辭)
 
 
자송사(自訟辭) 이색
 

네 몸집이 작고 못 생겨 / 汝之軀矮而陋兮
남이 보면 금방 넘어질 듯 하다네 / 人視之若將?也
시력이 짧고 귀가 어두우니 / 視旣短而聽又瑩兮
사람의 소리 나면 좌우로 돌아본다 / 中人聲而左右顧也
놀란 사슴이 저자에 들어가듯 / 驚?駭鹿之入于市兮
누가 벗하여 상종하리 / 孰肯從而相友
잠깐 모여서 친우가 되어도 / 雖幸聚而乍成?兮
돌아서면 금방 욕지거리 / ?背焉而旋?
폐부의 고기를 내어 좋아하재도 / 出肺腑肉以求可兮
다른 데로 획 달려 만날 수도 없고 / ?異馳而莫之遇
부드러운 얼굴, 달콤한 말로 / 柔爾顔兮甘爾言
진정을 쏟아 연해 토하여도 / 瀉眞情之繼吐
마치 북으로 가는 수레로 초를 가는 듯 / 猶北轅而適楚兮
누가 내 화살에 촉이 되며 깃이 되리 / 夫誰鏃而誰羽
근심ㆍ설움을 어느 곳에 하소연하랴 / 舒憂娛悲之何所兮
넓고도 넓은 망망한 하늘뿐 / 豁茫茫其天宇
정다운 친지들도 흩어져서 / 惟情親之乖離兮
저녁 구름, 봄나무 아득하네 / 杳暮雲而春樹
천지 사이에 이내 몸 두고 보니 / 觀吾身於?壤兮
아홉 마리 소의 털 하나인 듯 / 吹毛一於牛九
누가 나를 그 대열에 끼워줄는지 / 疇其置齒牙閒兮
그것을 알 수 없네 / 抑難知其所否
나의 덕이 잡되지는 않았는가 / 豈予德之回譎兮
내딴에 순일함을 품고 있는데 / 予則懷其純一也
혹 나의 행실이 심히 괴벽함인가 / 豈予行之奇邪兮
내딴엔 정직하다고 보는데 / 予則視其正直也
혹 나의 말이 간사함인가 / 豈予言之?詐兮
나는 성실을 숭상하는데 / 予則師其??也
혹 나의 학이 거칠은 건가 / 豈予學之鹵?兮
나로서는 극치에 이른 것인데 / 予則底于其極也
혹 나의 정사가 흠이 많은가 / 豈予政之多疵兮
나는 승묵을 꼬박꼬박 따르는데 / 予則蹈夫繩墨也
오직 나는 허두지둥 낭패하여서 / 惟吾之顚頓狼狽兮
외곬으로 선을 주장할 줄 모르는 것 뿐 / 莫知主善之克一也
하나만 고집하고 타협 모르면 / 夫惟一之罔知?兮
금수와 무엇이 다르리 / 禽獸之歸而何擇
인인이 나를 사람으로 치지 않음이 마땅하건만 / 宜仁人之不齒兮
속여 사는 건 곧 적이네 / 罔之生也是敵
어찌 일찍 반성치 아니했던가 / 胡反觀之不蚤兮
하나님 환히 내려 보시네 / 上帝臨之而赫赫也
올바르게 예를 지켜서 / 其循循而蹈禮兮
지척도 어김 없으리 / 則不違於咫尺也
죄를 알아 사과를 하면 / 引罪辜以謝過兮
누가 지난 일을 다시 책하랴 / 孰旣往之追責
나를 칭찬한들 어찌 기뻐하며 / 貸予褒兮何欣
나를 훼방한들 어찌 두려워하랴 / 附予?兮何?
백관의 반열 속에 조용히 서서 / 雍容袍笏之班兮
이것저것 모르고서 임금의 법을 순종하려네 / 不識不知而順帝之則也


[주B-001]사(辭) :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주C-001]자송(自訟) : 자책(自責)과 같은 뜻으로 지금 말로 자기 고발의 뜻. “제 허물을 능히 보고 안으로 스스로 송사하는 자를 내가 보지 못하였노라.” 《論語》
[주D-001]정다운 …… 아득하네 : 멀리 갈려진 친우를 그리워하는 말이다. 두보의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시에, “위북(渭北)엔 봄철나무, 강동(江東)엔 저녁구름[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이라 하였다.
[주D-002]승묵(繩墨) : 대목이 나무를 바로잡는 먹줄인데, 사람의 행동하는 바를 준칙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3]속여 사는 건 :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의 삶은 정직한데, 속여 사는 것은 요행히 면할 뿐이다.” 하였다.
[주D-004]이것저것 …… 순종하려네 : 나도 몰래 하늘 법을 순종함[不識不知 順帝之則]. 하늘이 분부한 양심대로 행하면 스스로 하늘[帝]의 법칙에 맞는다는 말이다.

 

 

부(賦)
 
 
설매헌부(雪梅軒賦) 
 

이색(李穡)

부상의 늙은 이가 깊은 깨달음을 발하여 / 扶桑翁發深省道根
도의 뿌리가 깊고 맘이 재처럼 싸늘하여 / 固心灰冷
산뜻이 진세를 떠난 얼굴과 / 蕭灑出塵之標
한가히 세속을 끊은 지경이 / 幽閑?俗之境
옥병에서 얼음[玉壺之氷 마음이 깨끗한 것]이 나오는 듯 / 烱?壺之?出
요대에 휘영청 달이 비치듯 / 森?臺之月暎
이에 사장(謝莊)의 설부(雪賦)는 탈태(奪胎)하고 / 爾乃謝語奪胎
송경(宋璟 당나라 문인)의 〈매화부〉는 환골하여 / 宋句換骨
두 부가 유전하여 / 二賦流傳
천추에 뛰어났다 / 千載超忽
시인들이 보고 입 다물고 뭇 떠들며 / 風人?以不譁
문인들 듣고 잠잠한 채 속만 태울 뿐 / 騷客寂而彌鬱
한산자(韓山子 작자 자신)가 백발을 흩날리고 / 韓山子霜?蕭蕭
삼옷을 펄렁이며 / 麻衣飄飄
우연히 만나 한바탕 웃고자 / 思偶然之談笑
정중한 초대를 오히려 싫어하여 / 嫌丁寧之喚招
섬계의 배 삿대를 치며 / 叩剡溪之蘭漿
유령(庾嶺 매화가 많은 고개 이름)의 수레를 달려 가다가 / 馳庾嶺之星?
중도에 머무르는데 / 忽中道而坎止
식목이 불러 청해주네 / 乃息牧之相邀
대방을 열고 바람 난간에서 굽어보며 / 開竹房俯風?
방석 깔고 가부좌하여 / 展蒲團而加趺
노아 차를 끓여 해정하면서 / 烹露芽而解?
주시의 재도(載塗 《시경》중의 구절)를 읊고 / 吟載塗於周雅
은 나라의 국맛 맞추기를 생각하니 / 想調羹於殷室
이는 다만 쓰임없는 쓰임이요 / 是惟無用之用
대저 물건이 있음에 법칙이 있음이로다 / 蓋有則於有物
내가 이에 알괘라, 서역의 교도 / 予於是知西域之有敎
이것과 갑을이라 / 或於斯而甲乙
비와 이슬이 눈과 다 같은 은택이로되 / 雨露均是澤也
농상에 소중하고 / 農桑焉重
복숭아ㆍ오얏이 모두 매화와 다 꽃이건만 / 桃李均是花也
부귀에 마땅하네 / 富貴焉宜
대관절 눈과 매화와 우리 스님이 / 夫孰知雪也梅也
정경이 서로 어울리고 / 吾師也情境交徹
침개처럼 서로 따라 / 針芥相隨
잠깐도 떨어지지 못함을 뉘라서 알쏜가 / 罔或須臾之離也耶
게다가 한 가지가 백옥처럼 빛나고 / 若夫一枝璨璨
천산이 온통 흰빛 / 千山??
나는 새도 끊어지고 / 飛鳥自?
노는 벌도 아니 오며 / 游蜂不偕
먼지 찌꺼기를 기화에 녹이고 / 消塵滓於氣化
우주의 본체(本體 태극(太極))를 심제에 합하면 / 浩大極於心齊
실로 공부에 도움이 있으리니 / 實有助於所學
높은 서재의 편을 삼음이 마땅한저 / 宜其扁於高齋
그뒤 세월이 얼마 / 今歲月之幾何
아름다운 정과 경이 모두 격조했네 / 阻情境之俱佳
일후에 나 병이 나아 쩔룩발 아닌 평보가 되거든 / 異日沈?去蹇步平
돌길이 남여를 타고 / 鳴藍輿於石徑
한번 가 관상하고 속정을 잊으오리 / 當一賞以忘情


[주C-001]설매헌부(雪梅軒賦) : 일본 중 식목수(息牧?)를 위하여 짓다.
[주D-001]사장(謝莊)의 …… 탈태(奪胎) : 도가(道家)의 말로는 범인(凡人)을 바꿔 선인(仙人)을 만드는 것이나 문학의 말로는 문장에는 옛 사람의 일언일구도 도습(蹈襲)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환골탈태 등의 법이 있다 한다.
[주D-002]국맛 맞추기[調羹] : 《서경》에, “간이 맞는 국을 만드는 데는 네가 오직 소금이요, 매실이로다[若作和羹 爾惟鹽梅].” 하였다. 이것은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삼으면서 한 말이다.
[주D-003]침개(針芥) : 자석(磁石)에 붙는 바늘과 호박(琥珀)에 붙는 개자.
[주D-004]심제(心齊) : 《장자》에서 나온 말인데, 뜻을 한결같이 하고, 마음을 비워서 도(道)에 합한다는 뜻이다.

동문선 제3권   
 
 
 부(賦)
 
 
관어대부(觀魚臺賦) 병서(幷序) 이색
 


관어대는 영해부(寧海府)에 있다. 동해(東海) 석벽(石壁) 밑에 임하여 노는 고기를 셀 만하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부(府)는 나의 외가(外家)이며 이를 위하여 작은 부(賦)를 지어 중원(中原 중국)에 전해지기를 바란다.

단양(丹陽 영해(寧海)부의 별호) 동쪽 해안 / 丹陽東岸
일본 서편 물가에 / 日本西涯
큰 물결이 아득하여 / 洪濤??
딴 것이 보이잖네 / 莫知其他
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는 듯 / 其動也如山之頹
고요하면 거울을 갈아 놓은 듯 / 其靜也如鏡之磨
풍백이 풀무질을 하는 곳 / 風伯之所??
해신이 거처하는 집 / 海若之所室家
큰 고래가 떼지어 희롱하면 하늘이 흔들리고 / 長鯨群?而勢搖大空
사나운 새가 혼자 날면 그림자가 노을에 닿네 / ?鳥孤飛而影接落霞
그것을 굽어보는 이 대 / 有臺俯焉
눈 아래 땅이 없다 / 目中無地
위에는 한 하늘 / 上有一天
밑에는 한 물 / 下有一水
망망한 그 사이 / 茫茫其閒
천리인가, 만리인가 / 千里萬里
대 밑에는 물결이 잔잔 / 惟臺之下波伏不起
뭇 고기들이 모이는데 / 俯見群魚
같은 놈, 다른 놈들 / 有同有異
어릿어릿대고 꼬리치며 / ??洋洋
각기 제 멋대로 / 各得其志
임공의 미끼는 엄청나니 / 任公之餌?矣
내가 감히 엄두도 못낼 것 / 非吾之所敢擬
태공의 낚시는 곧았으니 / 太公之釣直矣
내가 바라지도 못할 것 / 非吾之所敢?
아아, 우리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 / 嗟夫我人萬物之靈
내 몸도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 忘吾形以樂其樂
그 즐거움을 즐기다가 편안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더라 / 樂其樂以?吾寧
외물과 내가 한 마음이요 / 物我一心
예와 이제가 한 이치라 / 古今一理
뉘라서 구복에 영영하여 / 孰口腹之營營
군자의 버리는 바 되겠는가 / 而甘君子之所棄
슬프다, 문왕이 이미 가셨으매 / 慨文王之旣歿
뜀 가득[於?]을 생각하나 발돋음하여 볼길 없고 / 想於?而難?
공자께서 떼를 타고 오시면 / 使夫予而秉?
또한 이것을 즐기시리 / 亦必有樂于此
더구나 어약의 구절은 / 惟魚躍之斷章
중용의 대지이니 / ?中庸之大旨
종신토록 그 뜻에 잠겨서 / 庶沈潛以終身
자사님을 스승으로 받들리라 / 幸?衣於子思子


[주D-001]공자(孔子)께서 …… 즐기시리 : 문왕(文王)이 연못의 고기를 읊은 시(詩)에, “가득히 고기가 뛰는구나[於?魚躍].” 하였고, 《시경》 영대(靈臺) 공자 말씀하시되,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내가 떼를 타고 바다에 뜨고자 하노라.” 하였다. 《논어》 공야장(公冶章)
[주D-002]어약(魚躍) :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 뛰노는구나[鳶飛戾天 魚躍于淵].”하는 《시경》의 구절을 《중용》에서 인용하여 위와 아래를 두루 유행(流行)하는 도(道)의 이치를 말하였다.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답서유의(答胥有儀)
 

이색(李穡)

소년 시절에 기이한 뜻을 품고 / 少年負奇志
슬피 노래하며 타호를 쳤도다 / 悲歌擊唾壺
슬프다, 내가 좋은 벗이 적어서 / 慨我少良友
연산(燕山) 모롱이에 머뭇거렸다 / ??燕山隅
호걸스런 선비가 술 팔고 소 잡는 데 / 焉知豪傑士
숨어 있는 걸 어찌 알리요 / 隱淪沽與屠
밖에는 비록 단갈을 입었으나 / 外雖被短褐
안에는 밝은 구슬 품었다 / 內或懷明珠
멀리 연나라 소왕을 사모하여 / 遠慕燕昭王
어진 선비가 우글우글 모여들었네 / 賢士來于于
금대 옆에서 배회하니 / 徘徊金臺側
융성한 기업이 사발 엎어둔 듯 든든하다 / 隆基如覆盂
어찌하여 형가는 / 奈何荊軻子
독항도로써 화를 샀을꼬 / 賈禍督亢圖
세속 사람들 어찌 이것을 알리 / 流俗豈知此
노는 협객들 다투어 도박을 일삼는다 / 游俠???
그대 얻은 것을 가장 기뻐하노니 / 最喜得吾子
산택 간에 말라 죽을 사람이 아님을 알겠도다 / 知非山澤?
당로에서 알아주는 사람 없으니 / 當路莫予識
밀수를 짝하여 시나 읊는다 / ?詩伴蜜殊
가을 바람이 서쪽에서 일어나니 / 秋風起西陸
흰 이슬에 고미와 갈대가 시들어진다 / 白露萎菰蘆
강남에 차가운 매화 있으니 / 江南有寒梅
임포(송나라 시인)의 좋은 글귀가 전한다 / 絶句傳林逋
도리가 어찌 좋지 않으랴마는 / 桃李豈不好
그대와 함께 나가는 길을 삼가리라 / 與子愼趨途


[주D-001]슬피 노래하며 타호를 쳤도다 : 진(晋)나라 왕돈(王敦)이, “천리마가 마판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리(千里)에 있도다.”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타호를 쳐서 깨었다.
[주D-002]형가(荊軻)는 독항도로써 화를 샀을꼬 : 연 태자(燕太子)가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고 자객(刺客) 형가(荊軻)를 보내며, 신물(信物)로 독항(督亢) 땅을 바치겠다고 지도(地圖)를 함에 넣에 보내었는데, 형가가 지도 밑에 감추었던 비수(匕首)로 진시황을 찌르려다가 실패하자,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연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주D-003]밀수(蜜殊) : 소동파(蘇東坡)와 친한 시승(詩僧) 두 사람이 있었는데, 혜총(惠聰)은 거문고를 잘 타고, 혜수(惠殊)는 꿈을 즐기므로, 금총(琴聰) 밀수(蜜殊)라 하였다.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답 죽간선사[答竹磵禪師]
 

이색(李穡)

산에 놀면서는 곤륜에 오르고 / 山游登??
물을 건너서는 방호(선산(仙山))를 지났다 / 水涉經方壺
몸소 천하의 반을 다녔는데 / 身行天下半
발자취는 동해의 모퉁이에서 시작했다 / 跡起東海隅
심신은 말이 마굿간에 매어 있는 듯하고 / 神心馬繫?
세월은 양이 도수장에 가듯 한다 / 歲月羊趨屠
더러운 냄새 나는 가죽 푸대[사람의 몸] 속에 / 誰謂臭皮袋
여의주를 감추었음을 누가 알리 / 自藏如意珠
맑은 얘기는 지극히 오묘한데 / 淸談極要妙
농담은 도리어 과장되고 허탄하다 / ?語還於于
높은 풍치는 천 길 산과 같고 / 高標山千?
담담한 생각은 그릇에 담긴 물과 같다 / 淡慮水一盂
고요한 방에는 향불이 차가운데 / ?室香火冷
좌우에는 책과 또 그림뿐이다 / 左右書與圖
때때로 가끔 시를 지으매 / 時時出詩句
쉽기는 마치 저포(도박의 일종)하는 것 같다 / 易易如??
근원이 깊으매 흐르는 것이 마르지 않고 / 源深流不竭
도는 살졌으나 몸은 심히 파리하다 / 道?身甚?
변환을 잘하는 것이 중의 업인데 / 善幻是僧業
묘한 작용이 때에 따라 달라진다 / 妙用隨時殊
오래 ‘뜰 앞의 잣나무’로 참선하여 / 久參庭前栢
강 위의 갈대를 타려고 한다 / 欲跨江上蘆
하수 언덕이 지금 전쟁에 시달려서 / 河?今苦戰
군령이 도망하는 자 엄하게 단속한다 / 軍令嚴稽逋
바라노니 공은 석장을 날려가서 / 遲公飛?去
저들을 감동시켜 정도로 돌이키라 / 感彼歸正途


[주D-001]뜰 앞의 잣나무[庭前栢] : 어느 중이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묻되, “어떤 것이 조사(祖 師 달마(達摩))가 서방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 하였다. 이것을 참선(參禪)하는 사람들의 화두(話頭)라 한다.
[주D-002]강 위의 갈대를 타려 : 달마조사(達摩祖師)가 갈대 한 가지를 타고 강을 건넜다 한다.
[주D-003]석장(錫杖)을 날려가서 : 양(梁)나라 보지선사(寶誌禪師)가 백학도사(白鶴道士)와 산에 터 잡이로 서로 다투다가 약속하기를, 도사는 학을 날려 그 자리로 보내고, 보지선사는 주석 지팡이[錫杖]를 날려 보내어 먼저 그 자리에 도착하는 자가 터를 차지하기로 되었는데, 주석 지팡이가 도사의 학보다 먼저 갔다.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답 동암선사[答東菴禪師]
 

이색(李穡)

오늘 저녁이 무슨 저녁인가 / 今夕是何夕
금병의 흰 술을 기울인다 / 白酒傾金壺
포도는 겹겹이 그늘 맺었는데 / 蒲萄結層陰
맑은 바람은 자리 한 구석에서 난다 / 淸風生座隅
동암은 우리 삼한의 수재 / 東菴三韓秀
높고 높은 옥으로 된 소도(마을 앞에 세운 둘기둥)이다 / ??玉蘇屠
아, 사문에 유희하여 / 游?於斯文
첩벽이 쌍주를 이었다 / 疊璧聯雙珠
부끄럽다 내가 수창을 욕되게 하니 / 愧我辱酬唱
지초와 난초가 헌우(취초 (臭草))에 섞인 듯 / 芝蘭雜軒于
그물을 벌려 아름다운 글귀를 사냥하는데 / 張羅獵佳句
엄연히 좌우ㆍ우우(모두 사냥하는 진(陣)의 이름)를 열어 놓았네 / 儼開左右盂
전날 선인이 생존하였을 때에 / 疇昔先人在
그 교분은 삼소도보다 깊었었거니 / 契深三笑圖
봄바람과 가을 달에 / 春風與秋月
시와 술로 내기했네 / 詩酒爲??
명교(유교 (儒敎))밖에 초연하였으니 / 超然名敎外
살찌고 여윔을 어찌 의논하랴 / 肯復論肥?
학은 가고 구름만 머물렀으니 / 鶴去雲獨留
인간 세상의 변천을 슬퍼하노라 / 傷心人世殊
돈견인 내가 무슨 다행으로 / 豚犬亦何幸
등 덩굴이 박 덩굴에 얽히었도다 / 藤蔓纏葫蘆
잔술을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 ?酒不敢辭
시령을 감히 벗어나지 못하네 / 詩令不敢逋
취하여 읊조리며 만고를 훑어보니 / 醉吟視萬古
부산하고 시끄럽긴 한 길이로다 / 擾擾同一途


[주D-001]첩벽(疊璧)이 쌍주(雙珠)를 이었다 : 문장이 구슬을 중첩으로 꿰어 놓은 듯하다는 말이다.
[주D-002]삼소도(三笑圖) : 혜원(慧遠)이 여산(驪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었는데,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이 찾아 왔다가 돌아갈 때, 혜원이 전송하매, 평일에는 손님 전송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이 날은 세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어느덧 호계를 지나 왔으므로 모두 웃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삼소도(三笑圖)를 그려서 전하였다.
[주D-003]돈견(豚犬) : 자기 아들을 남에게 말할 때 낮추어 ‘돈견’이라 하는데, 그 유래를 보면, 오대(五代) 때에 양주(梁主) 주온(朱溫)이 진주(晋主) 이극용(李克用)의 죽음을 틈타서 진나라를 치다가 극용의 아들에게 크게 패하자, “자식을 낳거든 이아자(李亞子 극용을 말함)처럼 낳아야 한다. 내 아들은 돼지나 개이다.” 하여, 후세에서 자기 아들을 겸사(謙辭)로 말할 때에는 ‘돈견’이라 한다.
[주D-004]시령(詩令) : 시인들이 모여서 시를 짓는데, 시를 꼭 지어야 한다든지, 시간을 정한다든지, 어떤 조건을 정하여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을 말한다.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답 철선장로(答鐵船長老)
 

이색(李穡)

불교가 말세에 있어서는 / 梵雄在叔世
배 잃은 중류에서 천금의 병 같았거니 / 中流千金壺
도의 크기가 가이 없는데 / 道大無津涯
이씨(불ㆍ로(佛老))는 한 구석에도 차지 못하였네 / 二氏不滿隅
철선장로가 그 근원까지 깊이 들어가 / 鐵船窮其源
바깥 인연을 모두 잘라버렸네 / 外緣俱剪屠
산에 살매 귀신의 글귀를 화답하였고 / 居山和鬼句
바다 지나매 교주를 만났네 / 過海逢蛟珠
남으로 놀아 월나라를 다 보고 / 南游盡於越
북으로 달아나 선우(몽고 임금의 칭호)에 이르렀구나 / 北走窮單于
흰 구름은 지팡이를 따르고 / 白雲逐?杖
감로(불법(佛法))는 사발 위에 가득하여라 / 甘露盈鐵盂
날마다 쓰는 것이 어찌 얕다 하랴 / 日用豈云淺
복을 받들어 나도로 돌아갔네 / 奉福歸蘿圖
이미 오욕의 쾌락을 일소하여 / 已將五欲樂
저포(도박)를 비워버렸나니 / 一掃空??
기어(여기서는 시문(詩文))를 오히려 면하지 못하여 / 綺語尙未免
억지로 시를 읊조리니 파리하구나 / 强作?詩?
시편마다 호일한 기운을 띠어 / 篇篇帶豪逸
맹교ㆍ가도와는 형연히 다르도다 / 逈與郊島殊
기이한 글자는 양웅에게 물었고 / 奇字問楊雄
비밀한 글은 호로에게서 전하였네 / ?書傳瓠蘆
미친 선비 시 재료가 떨어졌으나 / 狂生乏詩料
경ㆍ병 두 글자를 어찌 감히 빠뜨리리요 / ?病安敢逋
높은 담론에 아름다운 흥이 발하여 / 高談發佳興
가끔 돌아오는 길을 잊노라 / 往往忘歸途


[주D-001]교주(鮫珠) : 바다에 교인(鮫人)이 있는데, 울면 그 눈물이 구슬이 된다고 한다.
[주D-002]억지로 시를 읊조리니 파리하구나 :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는 당나라 헌종(憲宗) 때 같은 시대의 시인인데,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의 시를 평하기를, “맹교는 차고, 가도는 여위었다[郊寒島瘦].” 하였다.
[주D-003]경(競)ㆍ병(病)두 글자 : 양나라 조경종(曹景宗)이 무장(武將)으로 전승(戰勝)하고 돌아오니 축하하는 연회(宴會)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시를 지었으나 조경종은 무장(武將)이므로 시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가서 운(韻)이 몇 자나 남았는가 하고 물으니, 경(競)ㆍ병(病) 두 글자만이 남았다. 경종이 그 운을 따라 시를 부르기를, “갈 때에는 아녀들 슬퍼하더니, 돌아올 때는 피리 북이 다투어 울리누나.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자. 한(漢)나라 대장으로 흉노(凶奴)를 치고 온 곽거병과는 어떠한고[去時兒女悲 歸來?鼓競 借問行路人 何如藿去病].” 하니, 모두들 놀라서 칭찬하였다.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부작 견흥(復作遣興)
 

이색(李穡)

약을 파는 이상한 사람이 있어 / 賣藥有異人
저자에 항상 병을 매달고 있다 / 市上常懸壺
나에게 봉래산을 가르쳐 주니 / 指我蓬萊山
멀고 아득하여 하늘 가로다 / ??天一隅
너는 마땅히 욕심을 경계하라 / 汝當戒有欲
신룡도 오히려 도륙을 당하느니라 / 神龍猶被屠
청옥결로 주고 / 授之靑玉訣
명월주를 주었네 / 贈以明月珠
이로부터 번화한 것을 버리고 / 自玆斥繁麗
우위우를 높이 노래한다 / 高歌于蔿于
새벽에 태산 꼭대기에 오르니 / 晨登泰山頂
동해가 사발만하구나 / 東海如杯盂
구부려 옛 사람의 자취를 보고 / 俯視昔人跡
여지도를 훑어 보았네 / 流觀輿地圖
흥망은 똑같은 궤철이요 / 興亡一軌轍
승부는 참으로 도박이었다 / 勝負眞樗?
일월이 수레 바퀴 같으니 / 日月如車輪
대개 유자의 파리함이 아니로다 / 蓋非儒者?
돌아와서 현빈을 지키니 / 歸來守玄牝
한 근원이 만 가지로 나뉘었음을 알겠도다 / 一源分萬殊
푸르고 푸른 산 시내의 소나무요 / 靑靑寒磵松
멀고 아득한 봄 물가의 갈대로다 / 漠漠春汀蘆
천공이 만물의 우리가 되었으나 / 天公?萬物
달관한 이는 혹 벗어나기도 하네 / 達者或能逋
도규가 선약을 얻으면 / 刀圭得仙藥
청운 길에 학을 타리라 / 駕鶴靑雲途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섭공소와 함께 짓는 한풍 3수[寒風三首與葉孔昭同賦]
 

이색(李穡)

찬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오니 / 寒風西北來
나그네가 고향을 생각하네 / 客子思故鄕
서글프게 긴 밤을 함께 하니 / ?然共長夜
등불 빛이 내 잠자리에 흔들린다 / 燈光搖我床
옛 도가 이미 멀어졌다 하니 / 古道已云遠
다만 뜬구름 나는 것을 볼 뿐이다 / 但見浮雲翔
슬프다, 뜰 아래 저 소나무는 / 悲哉庭下松
가을 겨울에 더욱 푸르러라 / 歲晩逾蒼蒼
원컨대 교의를 두터이하여 / 願言篤交誼
금옥 같은 바탕을 잘 보전하세 / 善保金玉相

찬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 와 / 寒風西北來
밤낮으로 불어 그치지 않는다 / 日夜吹不休
구름은 날고 푸른 하늘은 넓은데 / 雲飛碧空闊
숲 소리는 쏴쏴하고 들려 온다 / 樹木聲??
아침에 공사 있어서 / 早衙有公事
겹 갖옷 입고 말을 채찍질하누나 / 策馬披重?
무부는 관도에 벽제 소리를 치는데 / 武夫喝官道
마음 속에는 백 가지 근심이 타오르네 / 心中焦百憂
해가 세 발이나 높은 뒤에 천천히 일어나서 / 何如日三丈
머리 빗질도 하지 않음과 어떠한고 / 徐起猶蓬頭

찬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 오니 / 寒風西北來
두터운 음기가 점점 맺혀진다 / 漸見層陰結
앉아서 풍세가 높아지는 것을 들으니 / 坐知風勢?
눈이 또 오려나 보다 / 又是天欲雪
잠깐 동안에 만 마리 학이 춤을 추니 / 須臾舞萬鶴
변화는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로다 / 變化眞一瞥
문을 닫고 홀로 가늘게 읊조리니 / 閉戶獨微吟
길에서는 수레 굴대가 꺾어지누나 / 途中車軸折
때로 초석금을 들으면서 향을 태우니 / 時聞楚石琴
맑기가 그지없어라 / 焚香更淸絶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유감(有感) 
 

이색(李穡)

이사가 순황에게서 나왔으니 / 李斯出荀況
어찌 유아한 선비가 아니리요 / 豈非儒雅士
진나라를 도와서 그 임금을 빛내었으니 / 相秦顯其君
도가 참으로 여기있다 하겠도다 / 道固在於此
마침내 분갱의 꾀를 내었으니 / 竟起焚坑謀
고담을 좋아하는 말폐로다 / 高談之弊耳
그 마음이 금수가 아니어든 / 其心非禽獸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을 달리함이 어찌 본심이랴 / 異好豈本志
많은 제자 모인 함장(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는 자리)에서 / 侁侁函丈閒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 / 搖脣勿容易
한 글자 잘못된 해석으로 / 一字訓之非
화를 끼친 것이 역사에 밝게 있다네 / 流禍明在史


[주D-001]마침내 분갱(焚坑)의 꾀를 내었으니 고담(高談)을 좋아하는 말폐로다 : 진(秦)나라 승상(丞相)은 처음에는 유학자(儒學者) 순황(荀況)의 제자인데, 후일에 진시황(秦始皇)을 권하고 모두 서적(書籍)을 불태우며, 유생(儒生)을 잡아서 무찔러 죽였다. 송나라 소식(蘇軾)이 순경(荀卿 순황(荀況))론을 지어서 말하기를, “순경이 기발하고 높은 말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의 성품은 악하다. 천하를 요란하게 하는 자는 자사(子思) 맹가(孟軻)다’ 하는 등의 해괴한 의론을 하였으므로, 그 폐단으로서 그로부터 배운 이사(李斯)가 끝에 가서는 서적을 불사르는 해괴한 일을 저질렀다.” 하였다.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의고(擬古) 
 

이색(李穡)

옛날 사람들은 도 좇는 것을 귀하게 여기더니 / 古人貴從道
지금 사람들은 시세 좇는 것을 중히 여긴다 / 今人重趨時
복희씨가 대역을 긋고 / ?羲?大易
문왕이 처음으로 괘사를 매었으며 / 文王初系辭
주공과 공자가 번갈아 법을 말하였으니 / 周孔迭有術
군자는 마땅히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 君子當念玆
변동하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 / 變動如流水
천리가 호리로 나뉜다 / 天理分毫釐
호리의 차이에 천 리로 틀리나니 / 差之信千里
경을 지켜 스스로 위태하지 말지어다 / 守經無自危

옛날 사람은 배우는 것에 법이 있더니 / 古人學有法
지금 사람은 배우는 데 스승이 없구나 / 今人學無師
저절로 아는 것은 참으로 하늘에서 낸 사람이거니 / 自得信天挺
착한 일 하기를 마땅히 부지런히 해야 하리 / 爲善當孜孜
내가 우리 도에 뜻을 둔 뒤로 / 自我志吾道
바깥 근심이 어찌 나를 흔들 수 있으랴 / 外患何曾移
아침 저녁으로 공경하여 지키면 / 朝夕?以守
갈리거나 물들지 않으리라 / 庶不?而緇
상로가 날로 처량하거니 / 霜露日惻惻
심하도다, 나의 노쇠함이여 / 甚矣吾之衰

옛날 사람들은 명을 아는 것을 중히 여기어 / 古人重知命
천지의 마음을 순하게 받들었네 / 順受天地心
천지는 내가 나온 바요 / 天地我所出
부모는 은혜와 사랑이 깊어라 / 父母恩愛深
예로 제도를 정하고 / 禮以定制度
지혜로 고금을 헤아리는 것 / 智以酌古今
때에 따라 큰 도를 밟아서 / 隨時蹈大道
개활하고 또 침잠하여야 하리 / 敞豁仍沈潛
지금 사람은 도리어 자기를 작게 여기니 / 今人反自小
더럽구나, 소나 말에 옷 입힌 격이로다 / 鄙哉牛馬襟


[주D-001]주공(周公)과 공자(孔子)가 번갈아 법을 말하였으니 : 《주역》의 상(象)은 주공(周公)이 짓고, 계사(繫辭)는 공자(孔子)가 지었다고 한다.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유감(有感) 
 

이색(李穡)

천지가 홍로를 주재하니 / 天地帝洪爐
만물을 만들어 내기에 얼마나 수고 하였으리 / 鼓鑄一何勞
이로 주장을 삼고 / 理以爲之主
기로 종류를 나누었네 / 氣以分其曹
적은 것은 혹 기린 뿔 같기도 하거니 / 少或似麟角
많은 것은 어찌 쇠털 같을 뿐이랴 / 多奚翅牛毛
인의는 고량같이 여기고 / 仁義是膏梁
예법으로는 홀과 도포를 삼누나 / 禮法爲笏袍
찬연히 천하에 입혔으니 / 粲然被天下
우리 인생이 어디로 도망하랴 / 吾生安所逃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고의(古意) 
 

이색(李穡)

일찍 가더라도 너무 이르게는 말아라 / 早行莫太早
너무 이르면 아득해지리로다 / 太早令人迷
밤중에 수레가 출발하니 / 夜半便發?
앞길이 울퉁불퉁하여라 / 前途互高低
인가는 어디에 있는고 / 人家在何許
때때로 숲 밖의 닭소리 들려 온다 / 時聞林外鷄
갈림길에 당하니 벌써 희미해져서 / 趨岐旣已迷
산의 동서쪽을 분간할 수 없구나 / 未辨山東西
하늘이 밝은 뒤에 비로소 뉘우치니 / 天明始知悔
내 갈길이 어찌 그리 바쁘던고 / 我行何栖栖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자감(自感)
 

이색(李穡)

근심이 없는 이가 성인이요 / 無悶是聖人
이것을 보내는 것이 현인의 일이라 / 遣之賢者事
근심 걱정으로 몸을 마치는 것 / 戚戚以終身
이것이 곧 소인이니라 / 斯爲小人耳
내 학문은 본래 텅비고 소홀하니 / 我學本空疏
내 행실은 괴이한 짓이 많아라 / 我行多乖異
무슨 소리가 귀에 부닥치면 / 有聲觸于耳
망령되게 움직임을 어찌 다시 그치랴 / 妄動寧復止
꾀꼬리 말은 내 심신을 융화시키고 / 鶯語融吾神
벌레 울음은 내 뜻을 슬프게 하네 / 蟲鳴悽我志
나는 내 자취를 밟는데 / 我則踐我迹
세월은 그저 흘러만 가누나 / 歲月其逝矣
억계가 해와 같이 밝으니 / 抑戒皎如日
오히려 자기 없기를 기약하네 / 尙期無自棄


[주D-001]억계(抑戒) : 《시경》에 억편(抑篇)이 있는데, 위(衛)의 무공(武公)이 나이 90세에 그 시를 지어서 스스로 경계한 것이다.

 


동문선 제7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이곡(李穀)
 
 
천력 기사년 6월에 예성강에 배 띄워 남으로 한산으로 가려다 강어귀에서 바람에 막히다[天曆己巳六月舟發禮成江南往韓山江口阻風]
 

놀란 바람이 땅을 울리며 동남쪽이 새까맣더니 / 驚風動地東南黑
사방 산이 배 꼬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네 / 四山低昻船尾側
창망한 일엽편주 물결 속에서 / 蒼茫一葉浪花中
생명은 밧줄에 의지했을 뿐 / 性命只憑管?力
빗소리 쏴하면서 선창 밑바닥을 적시는데 / 雨聲??濕?底
사흘째 구름이 모두 북으로만 가네 / 三日一雲猶向北
다만 천지의 원기가 화평을 잃지 않으면 / 但令元氣不傷和
역과 순이 사람에게 서로 득실이 되리라 / 達順於人互得失
언제나 바람과 비가 열흘만에, 닷새만에, 때 맞추어 / 何時風雨占十五
만국을 몰아 황극(중정)에로 돌아가게 할꼬 / 爲驅萬國歸皇極

 


동문선 제7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정추(鄭樞)
 
 
경신년 3월 3일 빗속에 낮잠 자면서 한사군이 찾아와 술상 놓고 기쁘게 웃는 꿈을 꿨으므로 깨어서 지은 시 있어 기정한다[庚申三月三日雨中晝寢夢韓山君見訪置酒歡笑覺而有作寄呈]
 

3월 3일 날 비 겹쳐 바람일기에 / 三月三日雨連風
문 닫고 주공을 꿈꾸려 했으나 / 掩關將以夢周公
주공은 멀어 만날 수 없고 / 周公遐哉不得見
곧 한산 목은옹을 꿈꿨다 / 乃夢韓山牧隱翁
흰 수염 붉은 얼굴로 내 당에 와 / 白?紅頰來我堂
완연히 웃으며 술을 찾아 마시더라 / 宛然淸笑索酒嘗
이미 어렵고 위태한 때 정승되었으니 / 旣際艱危身作相
가슴속 뭉텅이[磊槐 불평 덩어리]를 축이자면 깊은 잔이라야 하리라 / 欲?磊?須深觴
아이 불러 술을 사고 또 밥지어 / 呼兒貰酒且炊黍
서헌에서 진종일 얘기하려 했다 / 擬欲西軒終日語
바람 맞은 싸릿문 덜컥이자 자취 사라지니 / 風扉敲殘了無?
어디서 오셨다가 어디로 가시었나 / 何所從來何所去
아, 나는 본디 꿈속 사람이었거늘 / 嗟予本是夢中人
꿈속에서 다시 꿈꾸니 이 무슨 인연인고 / 夢中復夢知何因
다만 앞날부터 정 쏟던 터라 / 祗爲從前情所在
정을 펴며 서로 보니 웃음 도리어 새로워라 / 敍情相見笑還新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독 한사(讀漢史)
 

이색(李穡)

우리 도가 어두워지니 / 吾道多迷晦
선비 갓 쓴 이들은 겉만 꾸미네 / 儒冠摠冶容
자운이 자못 적막하고 / 子雲殊寂寞
백시는 제라서 중용이라네 / 伯始自中庸
육적을 마침내 어디 쓰랴 / 六籍終安用
삼장을 끝내 따르지 못했네 / 三章竟不從
유유한 천년 뒤에 / 悠悠千載下
공명와룡을 다시 생각하네 / 重憶孔明龍


[주D-001]자운(子雲)이 자못 적막(寂寞) : 한(漢) 나라 양자운(揚子雲 : 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며 숨어 살면서, “적막(寂寞)으로 덕을 지킨다.”고 자칭하더니, 뒤에 역적(逆賊) 왕망(王莽)에게 벼슬하다가 죄에 걸려 체포를 당하게 되자 높은 누각에서 몸을 던져 떨어졌다. 사람들이, “적막(寂寞)은 투각(投閣)이로다.” 하였다.
[주D-002]백시(伯始)는 제라서 중용(中庸)이라네 : 한 나라 호광(胡廣)의 자(字)가 백시(伯始)인데, 경학(經學)에 익숙하고 나라의 원로(元老)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모든 정무(政務)를 잘 처리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모든 일이 처리되지 않거든 백시에게 물어라. 천하의 중용(中庸)은 호공(胡公)에 있네.”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왕씨가 세력을 부려서 나라를 빼앗았는데도 그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몸만 보전하니, 후세에서는 이를, “호광의 중용”이라고 기롱하였다.
[주D-003]삼장(三章) : 한 고조(漢高祖)가 처음 진(秦) 나라를 평정하고 부로(父老)들을 불러 말하기를, “진 나라의 법은 너무 혹독하고 까다로웠으므로, 나는 이제부터 진 나라 법을 모두 없애고, 법 삼장(三章)만을 약속한다. 살인한 자는 죽이고, 사람을 상해(傷害)한 자와 도둑질한 자는 처벌한다.” 하였다.
[주D-004]공명와룡(孔明臥龍) : 한 나라 말기(末期)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출세하기 전에, 사람들이 그를 와룡(臥龍)이라 하였다.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안국사 송정에서 비 오는 것을 바라보며[記安國寺松亭看雨]
 

이색(李穡)

가랑비 속에 촌 피리소리 들려오고 / 小雨仍村笛
사양에 또 절 종소리 / 斜陽又寺鍾
산이 머니 자못 온자하고 / 山遙多?籍
물이 넓으매 스스로 조용하네 / 水闊自?容
시원한 기운은 밝은 달에서 생기고 / 爽氣生明月
찬 소리는 푸른 소나무에서 일어나네 / 寒聲起碧松
지금도 오히려 마음이 놀라움은 / 至今心尙悸
번개와 우레가 나는 용을 따르기 때문이네 / 雷電逐飛龍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야음(夜吟)
 

이색(李穡)

내 나이 벌써 오십인데 / 行年已知命
신세가 더욱 망연하네 / 身世轉悠哉
가는 비는 등잔불 앞에 뿌리고 / 細雨燈前落
좋은 산은 베개 위에 오네 / 名山枕上來
때를 근심하니 기국 사람의 마음알겠고 / 憂時知杞國
내게서 시작하라는 것은 연 나라 대가 있네 / 請始有燕臺
영욕을 다 잊는 지경에 이르러 / 恰到俱忘處
마음이 찬 재로 되려 하네 / 心原冷欲灰


[주D-001]기국(杞國) 사람의 마음 : 기국(杞國)의 어느 사람이, 만약 하늘이 무너지면 어찌하나 하고 매우 근심하였다.
[주D-002]연(燕) 나라 대(坮) : 연 소왕(燕昭王)이 어진 선비를 구하니, 곽외(郭?)가 말하기를, “옛날에 임금이 천리마(千里馬)를 구하려고, 사람을 시켜 천금(千金)을 가지고 사방으로 다니며 찾으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천리마를 찾고 본즉, 말이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은 말의 머리를 오백금에 사 가지고 왔더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으므로,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은 천리마를 오백금에 샀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 산 천리마가 절로 찾아 올 것입니다.’ 하더니, 과연 일 년 만에 천리마를 몰고 온 사람이 둘이나 되었다 합니다. 그런즉, 내가 비록 어질지 못하나 어진 선비를 구하시려면 먼저 나에게 융숭한 대접을 시작하여 보십시오.” 하였다. 연 소왕은 그 말대로 대(坮)를 쌓고 곽외를 먼저 스승으로 섬기었더니, 과연 사방에서 어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우음(偶吟) 
 

이색(李穡)

상전벽해가 참으로 아침저녁인데 / 桑海眞朝暮
하물며 부생은 가이 있음에랴 / 浮生況有涯
도잠은 바야흐로 술을 사랑하고 / 陶潛方愛酒
강총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네 / 江摠未還家
가랑비가 지나니 산빛이 살았고 / 小雨山光活
가는 바람에 버들 그림자가 비낀다 / 微風柳影斜
멀리 놀러 가려던 뜻을 돌려 / 句回還游意
혼자 앉아 풍경을 보내네 / 獨坐賞年華


[주D-001]부생(浮生)은 가이 있음에랴 : 사람의 생(生)에는 가[涯 : 마지막 한도]가 있다. 그러므로 생애(生涯)라 한다.
[주D-002]강총(江摠)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네 : 양(梁) 나라 문인(文人) 강총(江摠)이 난리를 만나서 고향을 떠나, 그의 외숙이 있는 영남(嶺南)으로 가서 의탁하였는데,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부생(浮生) 
 

이색(李穡)

부생을 어이 믿으리오 / 浮生安足恃
늙고 병드는 것이 다투어 침노하네 / 老病競侵尋
해와 달은 두 귀 밑에 고리요 / 日月環雙?
건곤은 한 심에 화살이로다 / 乾坤矢一心
바람이 소매에 드는데 갠 날 지팡이에 기대고 / 袖風晴倚杖
이슬에 옷 젖는데 밤에 거문고 울리네 / 衣露夜鳴琴
만 생각이 이로부터 고요해지니 / 萬慮自此靜
까마득하게 하늘 땅이 깊네 / 渺然天地深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견회(遣懷)
 

이색(李穡)

홀홀히 지난 반 백 년 / ?忽百年半
창황한 동해 한 모퉁이에 창환히 지냈네 / 蒼黃東海隅
우리 삶이 본디 구속이요 / 吾生元??
세상길이 또한 기구하구나 / 世路亦崎嶇
백발이란 어느 때에는 있는 것 / 白髮或時有
청산이야 어딘들 없으랴 / ?山何處無
가늘게 읊어 다하지 못하여 / 微吟意不盡
마른 나무처럼 오뚝하게 앉아 있네 / 兀坐似枯株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부벽루(浮碧樓) 
 

이색(李穡)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 昨過永明寺
잠깐 부벽루에 올랐어라 / 暫登浮碧樓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 城空月一片
돌은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로다 / 石老雲千秋
기린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고 / 麟馬去不返
천손이 어느 곳에 노니는고 / 天孫何處遊
길게 휘파람 불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니 / 長嘯倚風?
산은 푸르고 강은 저대로 흐르더라 / 山?江自流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한산군이 보낸 시에 받들어 화답하여[奉和韓山君所示]
 

한수(韓脩)

세모에 찬 바람은 심한데 / 殘歲寒風積
궁하게 살자니 술잔이 드물다 / 窮居酒盞疏
운 구름은 휑한 들판에 나직하고 / 愁雲低野逈
언 새는 빈 처마에 모이네 / 凍雀傍?虛
졸 근심스러함으로 내 도를 보존하고 / 拙可存吾道
한적한 것은 오직 내 집을 사랑하네 / 閑唯愛我廬
남녘창에 글이 더 읽혀지니 / 南窓書課進
차츰 날이 길어감을 알겠네 / 漸覺日行舒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천수절에 대명전에 입근(入覲)하여[天壽節入覲大明殿]
 

이색(李穡)

활짝 열린 명당에 새벽빛이 싸늘한데 / 大闢明堂曉色寒
옥난간엔 깃발이 높직이 펄렁이네 / 旌旗高拂玉?干
보좌에 구름 열리자 옥음이 들리고 / 雲開寶座聞天語
유하잔에 봄이 가득 지존께 기쁨 받드옵네 / 春滿霞觴奉聖?
온 천하가 모두 한 집 요 임금 일월이요 / 六合一家堯日月
세 번 부르는 만세 소리 한 나라 의관이로다 / 三呼萬歲漢衣冠
아지 못하겠네 이 몸이 지금 어디 있는고 / 不知身世今安在
아마도 난새를 타고 푸른 하늘 올랐는 듯 / 恐是?冥控紫鸞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신우 숭덕사(新寓崇德寺)
 

이색(李穡)

천 수레 만 말이 오가는 번화한 거리 / 千車萬馬九街頭
지척에 있는 절이 경개 절로 그윽하구나 / 咫尺祗林境自幽
구기꽃 섬돌에 비춰 벌겋게 뚝뚝 듣고 / 枸杞映階紅欲滴
포도가 시렁에 가득 푸른 빛 줄줄 흐르는 듯 / 葡萄滿架翠如流
중의 방에 기숙하는 것 생전의 인연인가 / 僧窓寄食生前事
나그네 베개엔 어버이 생각 밤중의 시름일세 / 客枕思親半夜愁
돌아오시는 행차 기다리니 지금쯤 오셨을까 / 屈指歸軒今到未
진강의 뽀오얀 비가 어선에 가득한데 / 鎭江煙雨滿漁舟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봉기 백부(奉寄伯父)
 

이색(李穡)

서풍이 어젯밤에 뜰 앞 나무에 들어오니 / 西風昨夜入庭柯
머리 돌려 어버이 생각 그 어떠하오리까 / 回首思親可若何
남포의 순나물이 술자리에 올랐겠고 / 藍浦蓴絲飛醉席
진강의 가을빛은 어부 도롱이에 가득했으리 / 鎭江秋色滿漁蓑
형제들 무고하니 기쁜 정 족하리이다 / 弟兄無故?情足
부로가 서로 주고받던 즐거운 일 하 많으리 / 父老相從樂事多
멀리 다니는 회포도 언짢으니 / 獨恨遠遊心況惡
먼지에 눈이 흐리고 말소리도 변했네 / 黃塵?目語音訛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통주 조발(通州早發)
 

이색(李穡)

다락문에 종이 울자 새벽빛이 밝는데 / 鍾動樓門曉色明
혼자 여윈 말 채찍질하며 앞길을 묻네 / 獨鞭羸馬問前程
반공에 솟은 백탑엔 구름 그림자 보이고 / 半空白塔見雲影
한 굽이 맑은 강에 노젓는 소리 들리누나 / 一曲淸江聞棹聲
동북의 산은 왕기를 머금어 장한지고 / 東北山含王氣壯
서남 땅은 황제의 도읍을 끼고 번듯하구나 / 西南地控帝都平
돛대 위에 까마귀 훨훨 물에 둥실 복사꽃 / 檣烏接?桃花漲
번상들 편안히 실려 봉성으로 들어가네 / ?送番商入鳳城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남신점(南新店)
 

이색(李穡)

글 가지고 어찌 공명을 세울 것인가 / 文章可是立功名
몹시 여윈 선비 꼴이 스스로 우습네 / 自笑儒冠大?生
양자는 책을 짓고 자부했느니 / 揚子著書空自負
마경[사마상여]은 기둥에 쓴 뒤 끝내 무엇을 이루었는고 / 馬卿題柱竟何成
인정은 봄날의 산 빛과 같지 않은 것 / 人情不似春山色
나그네 꿈은 밤비 소리에 특히 놀라네 / 客夢偏驚夜雨聲
장성을 지나면 날도 흠뻑 좋을 텐데 / 過了長城風日好
그 누가 나의 해변 걸음을 그림 그릴꼬 / 何人?我海邊行


[주D-001]양자(揚子) : 양웅(揚雄). 그가 역(易)에 비겨 태현(太玄)을, 논어에 비겨 법언(法言)을, 창힐(倉?)로 자처하여 훈찬(訓纂)을 지었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경사(京師)로부터 동으로 돌아오며 노상에서 지음[自京師東歸途中作]
 

이색(李穡)

버들빛이 우거져서 돌아가는 나를 보내주니 / 楊柳依依送我歸
이번 길이 전번보다 오히려 나은가베 / 此行還勝昔歸時
비록 풍경이야 아무 간섭없겠지만 / 雖然物色無干涉
절로 사람의 맘에 기쁨과 슬픔이 있네 / 自是人心有喜悲
말 달려 꽃구경 하는 재미 나한테도 있지만 / 走馬看花猶到我
나귀에 떨어져 들에 있는 사람은 누구 누구던고 / 落驢在野未知誰
송도의 술이 지금쯤 익었으려니 / 松都醴酒今應熟
돌아가 흠뻑 취하여 시를 지으려고 먼저 준비하네 / 狂興先判醉賦詩

푸른 시내 옆에 한 구비 모랫둑 / 一曲沙堤傍碧溪
구정 동쪽 자문 서쪽 / 毬庭東畔紫門西
아뢴 말씀 간절했으니 비방도 심할 것 / 陳言又切譏應甚
일을 헤아리기 더디니 내 뜻이 더욱 희미하네 / 見事殊遲意轉迷
창 앞 푸른 느티나무엔 바람이 솔솔 / 窓近綠槐風細細
섬돌에 번득이는 홍작약 비가 우수수 오리 / ??紅藥雨??
하필 젊어서만 구실을 다시 할꼬 / 重游未必年顔少
다시금 간초[간언의 초고]를 쓰니 해가 저물 무렵 / 更草諫書鷄欲棲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우부(又賦)
 

이색(李穡)

병중에 매양 스스로 서글퍼지는 회포 / 病裏情懷每自悲
창천이 나라 안위를 아랑곳하시는지 / 蒼天肯復管安危
때때로 거울 보매 누렇게 여윈 것 가엾어라 / 時時對鏡憐黃瘦
일마다 기회만나면 백치됨이 한이로세 / 事事臨機恨白癡
흐르는 세월은 진정 번개 같구나 / 頗信流光如電影
봄 소식이 벌써 꽃가지에 오다니 / 又驚芳信到花枝
내 무슨 힘으로 모든 물상을 지배하리 / 牢籠物像知無力
하찮은 작은 시로써 구사할 뿐이로세 / 驅使由來只小詩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동산(東山) 
 

이색(李穡)

동산 높은 꼭대기에 한참 서 있으나 / 東山高頂立移時
나도 몰래 생각이 아득한 데로 들어가누나 / 思入鴻?自不知
나는 새, 조각 구름은 모두 어디로 가는지 / 飛鳥片雲俱?渺
이은 산 끊어진 언덕은 제대로 구불구불 / 連岡斷?自??
가을 바람에 두로는 초가가 부서졌고 / 秋風杜老破茅屋
지는 해에 산공은 두건을 거꾸로 썼네 / 落日山公倒接籬
초야에서 임금 잊음이 내 뜻이 아니거니 / ?畝忘君非我志
남은 힘 다시 가지고 나라 안위를 생각하리 / 更將餘力念安危


[주D-001]가을 바람에 …… 부서졌고 : 두보(杜甫). 그의 시에, “초가집이 가을 바람에 부서짐을 탄식한다.[茅屋爲秋風的破嘆]”가 있다.
[주D-002]지는 해[日]에 …… 거꾸로 썼네 : 진(晋) 산간(山簡)이다. 형주(荊州)에 있을 때에 습지(習池)에 가 놀다가 술이 취하여 돌아 올 때에는 백접리(白接籬)를 거꾸로 쓰고 돌아왔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독두시(讀杜詩)
 

이색(李穡)

금리 선생이 어찌 가난할쏜가 / 錦里先生豈是貧
두릉 뽕밭ㆍ삼밭에 또 봄이 돌아왔네 / 桑麻杜曲又回春
발 드리우고 환약지으니 몸에 병은 없고 / 鉤簾丸藥身無病
종이에 바둑판 긋고 긴 바늘 두들겨 낚시 만드니 천진도 하구나 / ?紙敲針意更眞
난리를 우연히 만나 절의를 더할망정 / 偶値亂離增節義
쇠하고 늙었기로 정신이야 덜릴쏜가 / 肯因衰老損精神
고금의 절창을 뉘라서 이으리 / 古今絶唱誰能繼
남은 향기 남은 기름을 후인에게 빌리누나 / ?馥殘膏?後人


[주D-001]금리(錦里) 선생이 …… 가난할쏜가 : 금관성(錦官城 현 사천성 성도현(成都縣) 서남). 두보(杜甫)가 거기 살며 자칭 금리선생이라 했다. 그의 시 “금리 선생이 오각건을 쓰고 동산에서 토란과 밤을 거두니 온전히 가난하지는 않구나.[錦里先生烏角巾 園收芋栗未全貧]” 라는 시가 있다.
[주D-002]발[簾] 드리우고 …… 병은 없고 : 두보의 시에 발과 약에 관한 구절이 많다.
[주D-003]종이에 …… 천진도 하구나 : 두보의 시에, “늙은 아내는 종이를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어린 자식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는 구절이 있다.
[주D-004]남은 향기 …… 빌리누나 : 원미지(元微之)가 두보의 시를 칭찬하며, “남은 기름과 남은 향기가 후세의 시인에게까지 혜택을 준다.” 하였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요우(曉雨)
 

이색(李穡)

첫새벽에 보슬비가 초가 처마에 내리니 / 淸晨小雨?茅?
나그네 생각이 흰 자루 보습으로 쏠리네 / 客興悠然白柄?
강변 펀펀한 밭엔 아지랑이 아른아른 / 江上平田煙漠漠
산비탈 좁은 길엔 풀이 뾰죽뾰죽 / 山崖細逕草纖纖
꽃을 실어다 나르는 집에선 처음 화원을 열고 / 載花侯館初開塢
시인은 술 사기에 옷을 전당잡히려 하네 / 沽酒詩家欲典衫
나는 병든 몸 구복만을 꾀하노니 / 最是病夫謀口腹
바다에 둥실 돛 달고 고향 돌아갈 생각 뿐 / 海天歸思滿歸帆


[주D-001]흰 자루 보습 : 두보의 시에 “장참장참백목참(長?長?白木?)”이란 구절이 있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즉사(卽事) 
 

이색(李穡)

연래로 옛 친구들 차츰 다 성겨지고 / 年來舊故漸相疏
병들어 누운 뒤 앙상하게 여윈 몸으로 / 瘦骨支持臥病餘
죽은 뒤에 천자 시 읊어주기 바라리 / 身後敢期千字詠
뱃속엔 오거서를 부질없이 실었네 / 腹中空載五車書
덕장은 북산에 이문을 자주 짓고 / 德璋北嶽移頻勒
정절은 동고에서 혼자 휘파람 부네 / 靖節東?嘯獨舒
남양[제갈량이 살던 곳]을 바라보니 지금은 적적 / 回首南陽今寂寂
그 누가 공명의 초려에서 다시 일어날꼬 / 何人繼起孔明廬

앓고난 뒤로 봄바람이 날마다 휘몰아쳐 / 病後東風日日狂
말 발굽이 어딜 가나 봄빛에 둥실 뜨네 / 馬蹄隨處泛崇光
꽃의 마음은 하늘 마음의 교묘함을 묘사하고 / 花心欲寫天心巧
술의 힘은 붓의 힘을 제법 돕는구나 / 酒力能扶筆力長
달관한 사람은 망형[몸맵시와 의장에 무관심한 것]하나니 위ㆍ진의 분들이며 / 達士忘形如魏晉
가인[성행이 취할 만한 사람]이 손 잡으면 삼상도 반갑겠네 / 可人携手喜參商
가엾어라 내 봄 옷은 아직 안 되어서 / 自憐春服猶成未
웅천의 삼짇 놀이를 여름으로 미루누나 / ?飮熊川?夏?


[주D-001]뱃속엔 …… 부질없이 실었네 : 당 나라 이의산(李義山)의 시에, “내가 붓을 들면 곧 천자를 지으니, 내가 다섯 수레 책을 읽었는가 의심되네.[顧我下筆?千字 疑我讀書傾五車]” 하였다.
[주D-002]덕장(德璋) : 남조(南朝) 제(齊)의 공치규(孔稚珪)의 자. 은거생활을 떠나 벼슬길로 나간 벗 주옹(周?)을 풍자한 북산이문(北山移文)의 작가.
[주D-003]정절(精節)은 …… 휘파람 부네 : 도연명(陶淵明)의 시호.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 “동편 언덕에 올라 멋대로 휘바람 분다.[登東皐而舒嘯]”
[주D-004]위ㆍ진(魏晋)의 분들 : 위(魏)의 하안(何晏)ㆍ진(晋)의 완적(阮籍)ㆍ혜강(?康) 등이 모두 노장(老莊)의 풍으로 청담(淸談)을 즐기고 예법과 신형(身形)을 돌보지 않았다.
[주D-005]내 봄 옷은 …… 되어서 : “봄 3월에 봄 옷이 이미 되었거든 관자 5, 6명과 동자 6, 7명과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쏘이고, 읊으며 돌아오리이다.” 증점(曾點)이 공자 앞에서 뜻을 말한 말이다. ≪논어≫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유감(有感) 
 

이색(李穡)

앓고 난 뒤 몸과 세상이 다 꿈같은데 / 病餘身世兩??
이제 흰 머리만 두어 발 남짓하네 / 白髮如今數丈餘
첩을 말과 바꾸던 호기는 일찍 가져보지 못했고 / 豪氣何曾妾換馬
도심은 자네가 고기 아니니 비슷하이 / 道情還似子非魚
구름과 연기는 자욱히 푸른 메를 덮었고 / 雲煙暗淡埋靑?
나무들 높이 솟아 푸른 공중에 닿았네 / 樹木參差際碧虛
개공의 청정한 것을 배우려 하나 / 欲學蓋公淸淨處
내 벌써 쇠하고 늙어 처음 뜻을 저버리네 / 自憐衰老負吾初


[주D-001]첩(妾)을 말[馬]과 바꾸던 : “천금짜리 준마로 젊은 첩을 바꾸어.[千金駿馬換少妾]” ≪李白詩 少年行≫
[주D-002]도심(道心)은 자네가 고기 아니니 :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濠梁)에서 고기[魚]의 노는 것을 구경하다가. “고기들이 즐겁겠구나.”하니, 혜자는, “자네는 고기가 아닌데 어찌 고기의 즐거운 줄을 아는가.” 하였다. 장자는, “자네는 내가 아니면서 어찌 내가 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할 줄을 아는가.” 하였다.
[주D-003]개공(蓋公) : 한(漢) 나라 조참(曹參)이 제국(齊國)에 상(相)이 되어 가서 여러 학자를 모아 놓고 정치하는 방법을 물은즉, 노자(老子)의 학(學)을 하는 개공(蓋公)이란 노인이, “정치는 청정(淸淨)함을 위주(爲主)하여야 하오.” 하였다. 조참은 곧 그를 정당(正堂)에 모시고 스승으로 섬기었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야영(夜詠) 
 

이색(李穡)

헛되이 호기를 부리다 순진함에 들어서니 / 消磨豪氣入醇眞
높이 노래 불러 귀신 놀래던 것 차차 뉘우쳐지네 / 漸悔高歌動鬼神
젊어선 세상에 드문 새 부를 지어 유명했고 / 少日賦傳希有鳥
늘그막엔 상서롭지 못한 기린을 말하네 / 老年說着不祥麟
초 나라 포로는 신음해도 월 나라를 생각하고 / 楚囚吟苦猶思越
공자는 이름을 〈후세에〉 끼쳤으나 오히려 진에 있었네 / 孔聖名垂尙在陳
생각하니 가을바람이 또 급히 부는데 / 自念秋風吹又急
백발로 유공의 먼지를 못 피하고 있구나 / 白頭難避庾公塵


[주D-001]상서롭지 못한 기린 : 춘추 때 노애공(魯哀公)이 서쪽 벌판에 사냥가서 기린을 잡으니, 공자가 보고 말하기를, “기린은 어진 짐승, 왕자의 아름다운 상사이어늘 어째서 왔는고.”하며 소매를 뒤집어 얼굴을 씻으며 울어 줄줄이 옷깃을 적시었다. “기린이 기린된 소이는 덕으로서요 형상으로서가 아니니, 기린의 남이 성인을 기다리지 않으면 상서롭지 않다 해도 또한 마땅한저.” ≪韓愈 獲麟解≫
[주D-002]초 나라 포로[楚囚]는 …… 생각하고 : 진(晋) 나라 종의(鍾儀)가 초(楚) 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더니 진후(晋侯)가 음악을 하여 보라고 시켰다. 종의는 자기의 고국 소리를 연주하였다. 또 월(越) 나라 장석(莊?)이 초(楚) 나라에 벼슬하여 현달(顯達)하였는데 한 번은 병이 나서 누워 있었다. 초왕(楚王)이 사람을 시켜 장석을 가 보게 하며, “장석이 자기의 고국을 생각하는지 알아 보라.” 하였다. 가본 즉 장석은 월 나라 소리로 앓고 있었다. 이 시는 두 사실을 혼동하여 인용하였다.
[주D-003]공자(孔子)는 이름을 …… 진(陳)에 있었네 : 공자가 진에 있으면서 말씀하시되 “내 무리의 애들이 광간[뜻만 크고 실제는 엉성한 것]하여 번쩍하게 무늬를 이루나 마를 줄을 모르는도다.[子在陳曰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的以裁之]” 하였다. 《論語 公冶長》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여 이름을 날리고도 문인들이 아직 미숙함을 걱정하여 돌아가 시서ㆍ예악을 정리, 술작할 뜻을 가지고 한 말.
[주D-004]백발로 …… 피하고 있구나 : 진(晋) 나라 왕도(王導)가 유량(庾亮)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유량은 무창(武昌)에 있었다. 서풍(西風)이 불 때마다 왕도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우며, “원규(元規 : 유랑의 字)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히네.” 하였다. 무창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유감(有感) 
 

이색(李穡)

선생이 반드시 청류도 아니거니 / 先生未必是淸流
백발로 쓸쓸히 혼자 다락에 올랐네 / 白髮蕭然獨倚樓
진 나라 재상 자존하거니 어이 송에 벼슬하리 / 晉相自尊寧仕宋
한의 원수를 갚았으니 유에 봉하리로다 / 韓仇已報可封留
빽빽한 소나무 저녁 무렵에 찬 구름 / 赤松鬱鬱寒雲晩
하늘하늘 푸른 버들에 가을날 가랑비 / 碧柳依依細雨秋
필경 이 마음 편안할 곳 없으니 / 畢竟安心無寸地
하늘 가 돌아가는 배만 바라보고 섰노라 / 每從天際望歸舟


[주D-001]진(晋) 나라 재상 …… 벼슬하리 : 도연명(陶淵明)은 진(晋) 나라 재상 도간(陶侃)의 자손으로서 진(晋)을 빼앗은 송(宋)에 몸을 굽히기를 부끄러워하였다.
[주D-002]한(韓)의 원수를 …… 봉(封)하리로다 : 장량(張良)은 본시 한(韓)의 세족(世族)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진(秦)에 대항하여 일어났다가 한 고조(漢高祖)를 만나 진을 멸하고 나중에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즉사(卽事) 
 

이색(李穡)

들에 숨어 사는 흥이 늙을수록 맑은데 / 幽居野興老彌淸
마침 눈 앞에서 새 시가 생겨나누나 / 恰得新詩眼底生
바람 자도 남은 꽃은 스스로 떨어지고 / 風定餘花猶自落
구름이 날아가도 가랑비는 온통 개지 않누나 / 雲移少雨未全晴
담 위의 흰 나비는 가지를 작별하고 / 墻頭粉蝶別枝去
추녀 구석의 비둘기는 깊은 나무에서 우는구나 / 屋角錦鳩深樹鳴
제물과 소요가 내 일이 아니로세 / 齊物逍遙非我事
거울에 비치는 것 사뭇 분명하거니 / 鏡中形色甚分明


[주D-001]제물(齊物)과 소요(逍遙) : 장자(莊子)의 처음 두 편(篇) 이름. 세속적 대소(大小) 물아(物我)를 초월한 달관을 말한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춘만(春晩)
 

이색(李穡)

늦은 봄 성남에 풀이 우거졌는데 / 春晩南城遍綠蕪
적적한 뜰엔 새가 서로 부르네 / 寂寥庭宇鳥相呼
하늘이 비를 내리려니 산조차 침침하고 / 天陰欲雨連山暗
꽃이 떨어지자 바람이 모두 쓸어 가누나 / 花落猶風掃地無
호기 부리며 몇 해나 붓을 휘둘렀던고 / 放膽幾年揮筆札
몸을 빼쳐 어느 날 강호에 돌아가리 / 乞身何日向江湖
예로부터 호걸은 세상을 능히 깔보거늘 / 古來豪傑能輕世
우습다 나는 구구한 썩은 선비 아닌가 / 自笑區區一腐儒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야우(夜雨) 
 

이색(李穡)

밤비가 빈 뜰에 주룩주룩 내리는데 / 夜雨空階滴不休
앓고 난 뒤 정흥이 더욱 무료해 / 病餘情興轉悠悠
신선이 어디 갔나 누구 뼈가 푸르더뇨 / 神仙已遠誰靑骨
천지가 무궁한데 내 머리는 희었네 / 天地無窮我白頭
정녕 늘그막의 세월은 여울로 내려가는 배 / 頗信殘年如下瀨
가엾어라 당시에 동주를 만들려던 마음 / 可憐當日欲東周
지금에 이 마음을 뉘라서 알아주리 / 祗今心跡誰能辨
원룡의 백 척 다락에 높이 누워 있노라 / 高臥元龍百尺樓


[주D-001]당시에 …… 마음 :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만일 나를 쓰는 자가 있다면 나는 동방의 주 나라[東周]를 만들겠다.” 하였다. 《論語》
[주D-002]원룡(元龍) : 후한(後漢) 진등(陳登)의 자(字). 세상을 붙들고 백성을 구할 큰 뜻이 있었다. 허사(許?)가 유비(劉備)와 천하의 인물을 논할 때 사가 말하기를, “전에 하비(下?)를 지나며 진원룡을 찾아가니 그가 주객(主客)의 예가 없이 저는 큰 침상에 올라가 자고 객을 아랫 상에 눕히더군.[無主客禮 自上大狀似 使客以下床]” 하니, 비가 말하기를, “자네가 국사(國士)의 이름을 가지고 나라를 구함에는 유의치 않고, 밭을 구(求)하고 집이나 물으니 들을 가치가 없는지라 마땅히 백척 다락 위에 눕고 그대를 땅에 눕히리니, 어찌 다만 높은 평상, 낮은 평상 사이 뿐일 것이냐.” 하였다.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추일(秋日) 
 

이색(李穡)

새벽에 다락에 올라 혼자 기대어 바라보니 / 曉上高樓獨自憑
흰 구름 푸른 산이 모두 층층 쌓였구나 / 白雲靑?共層層
뜰에 비 지나자 이끼는 더욱 자라고 / 一庭雨過苔逾長
만리에 하늘이 개어 해가 또 솟아오르네 / 萬里天晴日又昇
담기는 우쭐해도 몸은 다 늙어서 / 膽氣?嶸身老大
얼굴은 메마르고 귀밑머리 더부룩 / 顔容枯槁???
천지간에 몇 번이나 가을바람 일었는고 / 乾坤幾度秋風起
강동을 바라보며 장계응[진 장한의 자]을 생각하네 / 回首江東憶季鷹


동문선 제1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작조(雀?)
 

이색(李穡)

해질녘 처마에 참새가 지저귀니 / 雀?茅?日欲西
안자가 이계를 아끼던 것 가엾구나 / 遙憐晏子惜泥谿
왕풍이 다행히 노 나라에 흥하려는데 / 王風幸矣興於魯
여악이 어찌하여 제로부터 이르렀던가 / 女樂胡然至自齊
쇠한 풀 자욱한 연기는 원근이 아득하고 / 衰草淡煙迷遠近
흰 구름 푸른 산이 번갈아 높낮고 / 白雲靑?互高低
봉의 노래가 문득 문 앞을 지나가니 / 鳳歌忽向門前過
늙은 나 방금 붓 들어 골계전을 지으려네 / 老我方將傳滑稽


[주D-001]안자(晏子)가 …… 아끼던 것 : 제 경공(齊景公)이 이계(尼谿)의 땅을 공자(孔子)에게 봉해 주려 하였더니 안자(晏子)가 방해하였다.
[주D-002]여악(女樂)이 …… 이르렀던가 : 공자(孔子)가 노국(魯國)에서 등용되어 정치를 잘하니 제국(齊國)이 노국의 강성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악(女樂)을 아름답게 꾸며서 노군(魯君)에게 선물로 보내어 마음을 미혹하게 하였다. 공자는 그 때문에 노국을 떠났다.
[주D-003]봉(鳳)의 노래 : 초광(楚狂) 접여(接輿)가 공자의 문을 지나가며 부른 노래. “봉이여 봉이여, 어찌 이리 덕이 쇠하노.[鳳兮鳳兮 何韓之衰也]” ≪論語 微子≫
 
 
 
동문선 제1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차 안동 영호루 운(次安東映湖樓韻)
 

최수(崔修)

강다락에 봄이 가득, 경치가 하 많으니 / 春滿江樓景氣多
시인의 맑은 흥이 더하여지네 / 詩人淸興向來加
온 성 중의 복사ㆍ오얏은 반안인의 골이런가 / 一城桃李潘安縣
두 기슭의 동산과 못은 습씨의 집인 듯 / 兩岸園池習氏家
목은 이색의 글은 교주가 달을 울리고 / 牧隱新文珠泣月
양촌(권근의 영호루 시제)의 고운 귀는 봄에 꽃이 피었네 / 陽村麗句筆生花
남순했던 지난 일 물어서 무엇하리 / 南巡往事何須問
늙은 나무이 물에 잠겨 떼가 되었구나 / 老樹潮侵臥作査


[주D-001]반안인(潘安仁) : 진(晉) 나라 시인 반악(潘岳). 그의 자가 안인(安仁)이다. 하양현(河陽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온 고을에다 도리(桃李)를 심었다.
[주D-002]습씨(習氏) : 진(晉) 나라 습욱(習郁). 그의 저택과 정원이 화려했고 특히 양어지(養魚池)가 있어 습가지(習家池), 일명 고양지(高陽池)로 유명했다.
[주D-003]목은 이색 : 영호루의 유대와 공민왕(恭愍王)의 글씨. 영호루 평악을 찬양한 목은 이색(李穡)의 찬(讚)과 서(序).
[주D-004]교주(鮫珠) : 바다에 교인(鮫人), 즉 인어(人魚)가 있는데 울면 눈물이 구슬이 된다.

 

동문선 제19권   
 
 
 오언절구(五言絶句)
 
 
진포 귀범(鎭浦歸帆)
 

이색(李穡)

가느다란 실비에 복사꽃 물결이요 / 細雨桃花浪
맑은 서리에 갈대잎 가을이로구나 / 淸霜蘆葉秋
돌아오는 돛대는 어느 곳에 떨어질꼬 / 歸帆何處落
아득해라 조각 배 한 척 / 渺渺一扁舟


동문선 제19권   
 
 
 오언절구(五言絶句)
 
 
한포 농월(漢浦弄月)
 

이색(李穡)

해가 지니 모래가 더욱 희고 / 日落沙逾白
구름이 옮겨지니 물이 다시 맑아라 / 雲移水更淸
고상한 사람이 밝은 달을 희롱하니 / 高人弄明月
다만 자란생(紫鸞笙) 없음이 흠이로구려 / 只欠紫鸞笙


[주D-001]자란생(紫鸞笙) : 신선이 부는 피리인데, 진자앙(陳子昻)과 이백(李白)의 시(詩)에 있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섭공소와 함께 청산백운도에 쓰다[與葉公昭賦靑山白雲圖]
 

이색(李穡)

풍진이 아득하여 가만히 사람의 혼을 녹이는데 / 風塵漠漠暗銷魂
홀로 건곤에 우뚝 섰으니 해가 저물려 한다 / 獨立乾坤日欲昏
한 번 바라보매 곧 산 밑의 길을 알겠으니 / 一望便知山下路
명아주지팡이 끌고 구름문을 지나가기 좋구나 / 好携藜校過雲門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교동(喬桐) 
 

이색(李穡)

바닷문은 끝이 없고 푸른 하늘은 나직한데 / 海門無際碧天低
돛 그림자 날아오고 해는 서쪽에 있다 / 帆影飛來日在西
저 산밑의 집집마다 흰 술을 빚나니 / 山下家家?白酒
파를 베어 오고 회를 치며 동우리에 닭 들기만 기다려라 / 斷蔥斫膾欲鷄棲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동정만애(洞庭晩靄)
 

이색(李穡)

한 점 군산(동정연(洞庭淵)가운데 있는 산)에 저녁볕이 붉었는데 / 一點君山夕照紅
오초를 마구 삼키매 그 형세 끝이 없다 / 闊?吳楚勢無窮
은촛불 비단 등롱의 어른어른한 속에 / 長風吹上黃昏月
긴 바람이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네 / 銀燭紗籠暗淡中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우암강림(雨暗江林)
 

이색(李穡)

하늘은 낮고 산은 먼데 나무에 구름 뜨니 / 天低山遠樹浮雲
바로 이 강하늘에 해가 저물려 하네 / 政是江天日欲?
범의 휘파람과 원숭이의 울음에 시름이 끝없나니 / 虎嘯猿啼愁不盡
쫓겨난 소객들 괴로이 임금을 생각하리라 / 逐臣騷客苦思君


[주D-001]쫓겨난 …… 생각하리라 :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동정호(洞庭湖)에 비가 부슬부슬 오는 컴컴한 저문 날에 범이 휘파람 불고 원숭이가 울 제, 귀양온 불우(不遇)한 신하가 임금을 생각하는 슬픈 회포가 생긴다.” 하였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전가(田家)
 

이색(李穡)

쟁기질 깊게 땅이 젖을 만한 부슬비에 농삿집이 어두운데 / 一犁微雨暗田家
복숭아 살구가 숲을 이룬 속에 길이 절로 비껴졌다 / 桃杏成林路自斜
늙은 소를 타고 돌아오매 도롱이 반은 젖고 / 歸跨老牛蓑半濕
간 곳마다 작은 못에는 쇠잔한 꽃 떠 있구나 / 陂塘處處泛殘花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독좌(獨坐) 
 

이색(李穡)

적적한 빈 집에 낮이 길구나 / 寂寂虛堂白晝長
건곤은 한 조각의 흑첨향(黑甛鄕)이라 / 乾坤一片黑?鄕
두어 가락 새소리 들리고 남쪽 바람 부드러운데 / 數聲啼鳥南風細
신세는 유연히 묘망에 떨어지네 / 身世悠然墮渺茫


[주D-001]흑첨향(黑甛鄕) : 흑첨(黑甛)은 잠자는 것을 말하는데 캄캄하고도 맛이 달다는 뜻이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기동정(奇東亭)
 

이색(李穡)

봄이 깊은 골목에는 지나가는 사람 적은데 / 春深門巷少經過
복숭아꽃 오얏꽃 피었다가 떨어지는 것도 많다 / 桃李花開落又多
지난해 그 정자 위에 앉았던 일 기억하나니 / 記得去年亭上坐
한 주렴 성긴 비에 술은 물결처럼 일었다 / 一簾疏雨酒生波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감춘(感春) 
 

이색(李穡)

꽃이 이제 시들었는가 오는 이에게 물어 보나니 / 花今衰未問來人
성 안에는 따로 봄이 있을까 함이었다 / 恐是城中別有春
동산에 걸어 올라가 도로 한 번 웃노라 / 步上東山還大笑
동군이야 어느 곳에 친소(親疎)가 있으랴 / 東君何處着嫌親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소우(小雨) 
 

이색(李穡)

가랑비 보슬보슬 작은 마을 어두운데 / 細雨??暗小村
남은 꽃 한 잎 한 잎 빈 동산에 떨어지네 / 餘花點點落空園
한가로이 살매 유연한 흥을 한껏 얻나니 / 閑居剩得悠然興
손님 있으면 문을 열고 가면 도로 닫는다 / 有客開門去閉門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등왕각도(?王閣圖) 
 

이색(李穡)

떨어지는 노을 외로운 따오기 물은 허공에 떴는데 / 落霞孤鶩水浮空
그림 그린 기둥과 날리는 주렴은 구름과 비속일세 / ?棟飛簾雲雨中
그때의 그 강신은 오늘 나를 아는가 / 當日江神知我否
어느 때 다시 반돛의 바람을 빌려 주려나 / 何時更借半帆風


[주C-001]등왕각도(?王閣圖) : 당나라 문인 왕발(王?)이 교지령(交趾令)으로 있는 아버지 복치(福?)를 보러 가는 길에, 꿈에 강신(江神)이 와서 말하기를, “내일 9월 9일에 남창(南昌)의 등왕각(?王閣)을 중수(重修)한 낙성식(落成式)이 있으니 참석하여 글을 지어 이름을 내라.” 하였다. 왕발이 대답하기를, “여기서 남창까지 7백 리인데 하룻밤 사이에 당도할 수가 있읍니까.” 하니, 강신(江神)은, “배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바람을 빌려 주리라.” 하므로, 왕발은 과연 하룻밤 사이에 남창에 도착하니 홍주 자사(洪州刺史)가 등왕각에 낙성식을 크게 열고 여러 손들에게 필묵(筆墨)과 종이를 돌려 글을 짓게 하였다. 사실은 자사(刺史)가 자기의 사위를 시켜 미리 글을 지어 두고 여러 손들이 사양하기를 기다려 사위의 글을 자랑하려 하였던 것이다. 다른 손은 모두 사양하는데 왕발이 사양하지 않고 붓을 드니 자사는 불쾌하여 사람을 시켜 왕발의 글을 쓰는 대로 엿보고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중간에 가서, “떨어진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다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하는 구절을 쓰니, 자사가 듣고, “참으로 기이한 재주로다.” 하였다. 왕발은 끝에 다시 시(詩)를 쓰기를, “그림 그린 기둥은 아침에 남포의 구름에 날고 주렴은 저녁에 서산 비에 걷는다 [畵棟朝飛南浦雲 珠簾暮捲西山雨].” 하였다. 등왕각은 당고조(唐高祖)의 아들 등왕(?王) 원영(元?)이 처음 지은 누각이었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여강(?江) 
 

이색(李穡)

작은 배 살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 不是無錢買小舟
표연히 한강 물결을 바로 거슬러 올라가련마는 / 飄然直?漢江流
문 앞에 다가 있는 용산의 푸르름이 그저 사랑스러워 / 只怜當戶龍山碧
날마다 시를 읊으며 혼자 다락에 기대어 보네 / 日日?詩獨倚樓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방 밀성 양박선생(訪密城兩朴先生)
 

이색(李穡)

벽도화 밑에 달은 벌써 황혼인데 / 碧桃花下月黃昏
긴 가지를 다투어 당기매 꽃이 눈처럼 술병에 뿌려졌네 / 爭挽長條雪酒樽
그때에 같이 놀던 이 몇 사람이 남았는가 / 當日同遊幾人在
그림자를 이끌고 다시 문을 두드림이 스스로 가엾네 / 自怜携影更敲門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정 성랑제현(呈省郞諸賢)
 

이색(李穡)

옛부터 벼슬길은 위태한 기틀이 되기에 족하거니 / 宦途今古足危機
늘그막에 시비에 걸려든 것 무엇이 이상하랴 / 何怪衰年惹是非
천지처럼 큰 임금의 은혜에 두 번 절하고 / 再拜聖恩天地大
만산의 쇠잔한 눈 속에 사립문을 닫노라 / 萬山殘雪掩柴扉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판교(板橋) 
 

이색(李穡)

판교의 강가에 풀은 연기와 같고 / 板橋江畔草如煙
찬 조수 떨어진 뒤 한낮이 가까웠다 / 落盡寒潮近午天
건너 언덕의 작은 배는 불러도 오지 않는데 / 隔岸小船呼不應
고기잡이들은 고기 판 돈을 나누어 가져 간다 / 漁人分去賣魚錢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절구(絶句) 
 

이색(李穡)

옥당 높은 곳 진애를 벗어났는데 / 玉堂高處絶塵埃
흰 날의 맑은 바람은 푸른 홰나무를 흔드네 / 白日淸風動緣槐
장관에게 한 번 읍하고는 한종일 앉았노니 / 一揖長官終日坐
두어 소리 새는 울고 이끼는 뜰에 찼다 / 數聲啼鳥滿庭苔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유관에 잠깐 쉬는데 한송선사가 술을 사왔기에[楡關小憩寒松禪師沽酒]
 

이색(李穡)

찬 바람이 눈을 불어 유관에 가득차니 / 寒風吹雪滿楡關
성긴 수염에 얼음이 맺히고 말은 가려 하지 않네 / 氷結疏?馬不前
우리 스님 삼매의 〈신통(神通)〉 솜씨 힘입었나니 / 賴有吾師三昧手
주머니 풀어 취향(醉鄕)의 하늘을 집어 내었네 / 破囊擎出醉鄕天


[주D-001]취향(醉鄕) : 당 나라 왕적(王積)이 지은 《취향기(醉鄕記)》란 책이 있는데, 취향은 술에 취한 세계라는 말이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제 목암권(題牧?卷)
 

이색(李穡)

어지러운 깊은 산속에 길이 가로 비꼈는데 / 亂山深處路橫斜
해 저무니 소와 염소 스스로 집을 안다 / 日暮牛羊自識家
이것이 이 늙은이의 참 경계라 / 此是老翁眞境界
맑은 연기 꽃다운 풀은 하늘 끝에 닿았나니 / 淡煙芳草接天涯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기사(紀事)
 

이색(李穡)

누가 알리 의발(衣鉢) 이 해외에 전해진 것을 / 衣鉢誰知海外傳
규재(圭齋)의 한 마디 말씀 낭연했었다 / 圭齋一語向琅然
그 뒤로 물건 값은 모두 뛰어오르는데 / 邇來物價皆翔貴
홀로 내 문장만 값이 못 오르네 / 獨我文章不眞餞


[주D-001]의발(衣鉢) : 선가(禪家)에서 법통(法統)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달마(達摩)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면서 석가모니가 입던 가사(袈裟)와 밥 먹던 바리때[鉢]를 가지고 와서 법통(法統)을 전하는 제자에게 그것을 전하여 육조(六祖)에까지 전하였다 한다.
[주D-002]규재(圭齋) : 원(元)나라 구양현(歐陽玄)의 호(號)인데, 이 시의 작자인 이색(李穡)이 그 밑에서 과거(科擧)에 올랐으므로, 그가 문장(文章)을 해외(海外)의 이색에게 전한다는 말이 있었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부작 절구(復作絶句)
 

이색(李穡)

절벽에 폭포가 날고 눈은 다리에 뿌리는데 / 絶壁飛湍雪灑?
얼음 녹은 봄물은 여강에 차 넘치네 / 氷消春水漲驪江
높은 사람 홀로 조각배에 앉아 가노니 / 高人獨坐扁舟去
수없는 푸른 산 스스로 선창에 가득 / 無數靑山自滿?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곡 이밀직 종덕(哭李密直種德) 
 

정몽주(鄭夢周)

한산 문벌에는 적선한 나머지라 / 自是韓山積善餘
아들이 일찍 죽음 마침내 어쩐 일인고 / 賢郞欠壽竟何如
옛부터 이 이치는 진실로 알아내기 어려워 / 古來此理誠難詰
공자 같은 성인도 일찍 백어(伯魚) 를 곡하였네 / 孔聖猶曾哭伯魚


[주C-001]곡이밀직종덕(哭李密直種德) : 이 시는 이색(李穡)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었다.
[주D-001]백어(伯魚) : 공자의 아들인데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조 시중이 좌주를 청하여 잔치하는데 축하하다[賀趙侍中邀座主開?] 
 

성석린(成石?)

선비를 잘 뽑았으니 비로소 좌주의 현명함을 알겠구나 / 得士方知座主賢
시중이 시중 앞에서 수 빌어 올리나니 / 侍中稱壽侍中前
하늘도 좋은 비를 내려 아름다운 손을 머무르게 하는데 / 天敎好雨留佳客
바람은 나는 꽃을 보내어 춤추는 자리에 떨어진다 / 風送飛花落舞筵


[주C-001]조 시중이 좌주를 청하여 잔치하는데 축하하다[賀趙侍中邀座主開?] : 조 시중(趙侍中)은 조준(趙浚)인데, 이색(李穡)의 밑에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자기를 과거에 합격시킨 시관(試官)을 좌주(座主)라 하며, 이 시는 조준이 이색을 초청한 연회에서 지은 것이다.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차운 정 한산군 이영숙(次韻呈韓山君李?叔)
 

정사도(鄭思道)

버드나무 거리의 가벼운 연기는 한식 뒤이요 / 柳巷輕煙寒食後
송악의 푸른 빛은 늦게 갠 다음일세 / 松山翠色晩晴餘
괴로이 읊었으나 상춘의 글귀 얻지 못하여 / 苦?未得賞春句
도로 밝은 창을 향해 불경을 읽는다 / 還向明窓讀佛書

 


동문선 제23권   
 
 
 교서(敎書)
 
 
사 찬성사 반복해 교서(賜贊成事潘卜海敎書)
 

이색(李穡)

대개 들으니 황급하고 창졸한 난을 만난 연후에야 출중한 참재주를 알고, 광명하고 위대한 공을 세운 연후에야 세상에 드문 지극한 은총을 받는 것이다. 때문에 자고 이래로 성제 명왕(聖帝明王)과 현신 석보(賢臣碩輔)가 부귀가 그 몸에서 떠나지 않고 성명(聲名)이 만세에 전하는 것이다.
슬프다, 너 복해(卜海)는 네 할아비 부(阜)가 사절(使節)을 받들어 일본(日本)에 갔었고, 문형(文衡)을 맡아서 영재를 취하였다.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였다. 시서(詩書)의 유풍과 예의(禮義)의 풍모를 드날려서 오래될수록 크게 떨치는 것이 복해에게 있는 것인가.
너 복해는 기운이 강유(剛柔)를 합하였고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였으며, 그 뜻이 금석같이 굳어서 효도를 옮기어 충성을 다하고 임금을 위하여 몸을 잊었으니, 과인이 급하고 어려울 때에 힘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병인년에 서쪽으로 사냥하러 갔었을 때 큰 멧돼지가 내 앞으로 달려 왔다.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얼굴빛이 변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으니, 나의 안위가 한순간에 달려 있었다. 그때 복해가 말을 달려 뛰어 와서 한 화살로 그 배를 꿰뚫어서 활시위 소리를 따라 쓰러졌으니, 이것은 복해가 나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이다. 비록 종사(宗社)와 산천의 신령이 복해를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하더라도, 복해의 속에 지녔던 충성과 타고난 용맹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오늘날 종사와 산천을 받들 수 있겠는가.
전고(典故)를 상고하여 너에게 왕성(王姓)을 주어 의자(義子)로 삼고, 너를 찬성사(贊成事)로 승진시키노니, 이는 은전을 특이하게 한 것이며, 충성과 용맹을 장려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시중(侍中)을 제수한 것도 그 충의를 권한 것이다. 한(漢) 나라에서 공신과 맹세하는 말에, “태산이 숫돌같이 되고 황하가 띠같이 되도록 나라가 길이 보존하여 후손에게 미치라.” 하였다. 지금 과인도 그것을 모방하여 맹세하기를, ‘제참(?岺)이 숫돌처럼 닳고 접해(?海) 에 물이 말라서 먼지가 나도록, 네 자손 곧 내 자손이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라.’ 하노라. 아, 복해야 훈명(訓命)을 명심하여 힘쓰고 공경하여 변함이 없을지어다.


[주D-001]접해(?海) : 우리 나라 근해에 가자미가 많이 나므로, 우리 나라를 접해라 한다.
 
 동문선 제23권   
 
 
 교서(敎書)
 
 
세 원수에게 죄주는 교서[罪三元帥敎書]
 

선지(宣旨)하노라. 국가가 불행하여 도적의 난리를 만나서 남쪽으로 파천하였다. 이는 오직 나 소자의 부덕한 소치이나, 또한 장수의 용병(用兵)에 규율이 없어서 방어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쓸개를 맛보는 근심을 품었기에 처음에는 패군(敗軍)한 처벌을 정지하였다. 그리고는 문하평장사 상의 회의도 감사 응양군상장군(門下平章事商議會議都監司鷹揚軍上將軍)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에 임명하고, 절월(節鉞)을 주어 나를 대신하여 행사하게 한 다음 이어 칙서를 내리어 위임하는 뜻을 선시(宣示)하여, 대장과 소장이 모두 명령을 들어서 감히 어김이 없게 하였다. 그러자 과연 조종의 신령이 위에서 계시(啓示)하고 충성할 뜻이 있는 선비가 아래에서 분주(奔走)하여, 사방에서 힘을 합해 쳐서 그 무리를 섬멸하였다. 이에 바야흐로 개선하기를 기다려 상을 주어 공을 갚으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안우(安祐)의 무리가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정세운을 해쳐서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의 일시의 분노의 쾌하게 하였다.
총병관은 나를 대신하여 일을 맡은 사람인데, 밑에 있는 자가 감히 제 마음대로 죽였으니, 이것은 나를 무시한 것이다. 임금을 업신여겨 범하였으니, 죄가 더 클 수 없다. 돌아보건대 안우 등은 국가의 조아(爪牙)로 수년간에 혈전하여 자못 공효를 나타내었는데, 한 생각의 잘못으로 전일의 공이 다 없어졌으니, 내가 실로 슬퍼하는 바이다. 그러나 적을 깨치는 공은 일시에 혹 있을 수 있으나 임금을 업신여긴 죄는 만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경중이 분명하여 서로 덮을 수 없다. 이것을 용서하고 베지 않으면 어떻게 후세를 징계하겠는가. 그러므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도원수 도첨의찬성사(都元帥都僉議贊成事) 안우(安祐), 원수 도첨의찬성사(元帥都僉議贊成事) 득배(得培),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방실(芳實), 동지밀직(同知密直) 민환(閔換), 밀직부사(密直副使) 김림(金琳) 등을 법대로 처단하였다. 그러나 예전 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죄가 처자에게는 미치지 않게 하고, 그 관하에 있는 대소 관리는 모두 유사(有司)로 하여금 공을 참작하여 서용하게 한다. 죄악에 뇌동하고 공법(公法)을 배반하여, 손수 정세운을 살해한 낭장(郞將) 정찬(鄭贊)은 도망중에 있으나 용서할 수 없다. 그 나머지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자는 모두 용서한다. 안팎에 포고하여 다 들어 알게 하노니, 너희 군사들은 힘써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직책을 폐하지 말아서 시종(始終)을 보전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주D-001]쓸개를 …… 근심 : 춘추(春秋) 때에 월왕(越王) 구천(口踐)이 오(吳) 나라에 패하여 수치를 당하자 짐승의 쓸개를 달아 놓고 매양 맛보았다. 쓸개는 맛이 쓴 것이므로 그것을 맛보는 것은 원수 갚기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동문선 제23권   
 
 
 교서(敎書) 이첨(李詹)
 
 
교 특진보국 숭정대부 한산군 이색(敎特進輔國崇政大夫韓山君李穡)
 

왕은 말하노라. 임금의 도는 반드시 노성한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의 정은 옛친구보다 더 친한 것이 없다. 이것은 고금에 같은 것이니, 어찌 시종(始終)을 혹시라도 변할 것인가.
경은 기품이 청명하고 경술이 넓은 바, 진신(搢紳)의 스승이요, 국가의 모범이다. 내가 전날에 동렬에 참여하여, 종유한 지가 오래여서 성의가 서로 미더웠고, 강마하는 도움으로 은의가 더욱 두터웠다. 그러므로 좋은 일 궂은 일을 같이하면서 평탄하고 험함에 따라 변하지 않기를 기약하였다. 중간에 많은 사고를 만나서 서로 나뉘게 되었다. 만나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생각하는 회포는 항상 간절하였다. 내가 개국함에 미쳐서, 정치를 같이하려고 생각하였다. 이미 작읍(爵邑)을 봉하여 조정 반열에 어른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옛날의 정의가 있어서였을 뿐 아니라, 노성한 이의 덕을 의지하려 함이었다. 앉아서 풍속을 진압하고 또 아름다운 꾀를 들으려 함이었다. 이달 초하룻날에 와서 여강(驪江)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내가 마침 정사에 임하여 친히 보지 못하였다. 잠시 서로 작별하였으나 머지않아 다시 올 것을 청하였다. 그러니 어찌 부음이 홀연히 들려올 줄을 생각했으랴.
지난날을 돌이켜보매 내 마음이 더욱 슬퍼진다. 하늘이 남겨 주지 않으니 나를 돕지 않는도다. 국가가 초췌하여진 슬픔을 어찌 다 말하리오. 영령(英靈)이 만일 있다면 어찌 다 알지 못하리오. 이제 내신(內臣) 아무를 명하여 빈소에 가서 전(奠)을 올리게 하노라. 슬프다, 길고 짧은 기한은 원래 천명을 의심하지 않으나, 슬픔과 영광에 대한 예는 마땅히 국가 법전대로 갖추어 거행하라. 운운.


[주D-001]주공은 …… 없고 : 공자가, “전대(前代)의 주공(周公)을 사모하여 간간이 꿈에 보았으나, 만년(晩年)에는 내가 심히 노쇠하여서 다시는 꿈에 주공을 볼 수 없구나.” 하였다.

 

동문선 제30권   
 
 
 비답(批答)
 
 
이색 걸퇴 불윤 비답(李穡乞退不允批答)
 

무명씨(無名氏)

올린 글을 보고서 시골로 은퇴하겠다고 청한 뜻은 잘 알았다. 무릇 대신의 출처(出處)는 치도(治道)의 경중에 곧바로 관계되는 것이다. 하물며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은 이때, 경의 나이 아직도 치사(致仕)에 이르지 않아 장차 기대함이 크거늘, 은퇴하기를 청함이 어인 말인가.
대개 문장은 나라를 경륜하는 것이요, 도덕은 풍속을 후하게 하는 바이니, 역량이 있는 자라야 중한 소임을 맡길 수 있고 견식이 있는 자라야 큰 의심을 해결할 수 있다.
경은 학문의 연원(淵源)은 중원(中原) 사우(師友)의 바른 계통을 얻었고,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은 옛날 성현의 마음을 가졌다. 강직함은 우뚝히 서서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고, 밝음은 어느 어둑한 구석도 환히 비치지 않음이 없다. 그러니 이른바 나라를 경륜하고 풍속을 후하게 하며, 무거운 소임을 맡기고 큰 의심을 해결할 자는 오직 경 한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선고(先考)께서는 경을 어질다 여기시어 재상으로 삼아 자문(咨問)에 응하게 하고, 사부(師傅)로 뽑아 어린 나를 돕게 하였다. 대국(大國)을 섬기는 문자가 모두 경의 토론에서 나왔고,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행실이 다 경의 거동을 규범으로 삼았다. 조정이 존엄함은 경과 같은 기구(耆舊)의 인망(人望) 덕택이요, 묘당(廟堂)의 논의 역시 경과 같이 과단성 있는 정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의 힘인지라, 하루라도 경이 없어선 안 될 것이거늘 어찌 지금이 경의 물러갈 때이랴.
아, 재상 자리에 유자(儒者)가 없을 수 없나니, 노공(盧公)이 그로써 다시 임용되었고, 어린 왕은 위(位)에 오르지 않음과 같으므로 소공(召公)이 그 때문에 오래 머물렀다. 물러가려는 마음을 고집하지 말고 나의 이 명을 공경히 받으라.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음이 마땅하겠기에 많이 말하지 않는다.


[주D-001]경은 학문의 …… 얻었고 : 이색은 원(元) 나라에 가서 구양현(歐陽玄)이 맡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동문선 제30권   
 
 
 비답(批答)
 
 
이색 사면 판문하 불윤 비답(李穡辭免判門下不允批答)
 

그대가 올린 전(?)을 보고 사직을 청하는 뜻은 다 알았다.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로부터 경이 선조(先朝)의 부탁을 받아, 사부(師傅)로써 총재(?宰)가 되어 태자에게 덕의(德義)를 가르치며 경륜을 맡아 왔었다. 그 뒤 황제의 뜰에 친히 조회하여 본국의 아름다움을 선양함에 미쳐서는, 천자께서 강후(康侯)로 접견하는 영광을 내리셨고, 사대부들이 계자(季子)의 사행(使行) 임을 칭탄하였다. 이는 뭇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니 경인들 어찌 스스로 만족하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대신은 인심이 술렁일 때는 진정하여 안정하게 하고, 국운이 어려울 때에는 부지런히 수고하면서 이를 처리하였다. 물러가 쉼이 편안함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도 매양 거취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한 몸의 관계가 매우 크고 뭇 사람의 의지함이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경이 진정(陳情)한 바를 내가 이미 알았으니, 나의 바라는 바를 경도 또한 알아줘야 할 것이다. 굳이 사양을 하지 말고 가서 그 직책을 행하라. 이에 명을 내리는 바이니, 다시 상소하지 말라.


[주D-001]천자께서 …… 영광 : 강후(康侯)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동생인 희봉(姬封)을 가리킨다. 처음에 강(康)에 봉해졌으므로 이렇게 칭한다. 《주역》에, “강후(康侯)에게 하루 세 번씩이나 접견하는 우대를 한다.” 하였다.
[주D-002]계자(季子)의 사행(使行) : 오(吳) 나라 계자(季子: 季札)가 중국의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거쳤는데, 그는 현인으로 간 곳마다 음악을 평론하고 명사들과 사귀었다.
 
 
 동문선 제30권   
 
 
 비답(批答)
 
 
이색 사면 좌대언 불윤 비답(李穡辭免左代言不允批答)
 

전녹생(田祿生)

내가 생각하건대, 만기(萬機)가 지극히 번잡하여 혼자 지혜로 다스리기 어렵다. 승선(承宣)이란 직임이 있는데, 실로 왕의 말을 출납(出納)하는 요직이다. 그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므로 적임자를 구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경은 성품이 명민하고 글재주가 탁월하여 일찍이 아버지의 풍(風)을 이어받아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었고, 현재 여러 유자(儒者)들의 여망을 얻어 동국에 표준이 되었으니, 학문이 이미 해박하고 계책 또한 임금을 계도할 만하다.
이에 내가 특별히 그대를 갸륵히 여겨 낮은 직위에서 발탁하여 큰 벼슬에 올리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내 좌우에서 대언(代言)을 담당하여 원근에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하고는, 문사(文詞)에 관한 것을 모두 너에게 위임코자 하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사면의 뜻을 표하니 그 진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 어찌 나의 애중히 여기는 뜻이 미더움을 주지 못하고 그대의 진언(進言)을 채납(採納)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숨기는 바가 없는 것이니, 정이 어찌 통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리고 신하가 숫제 제 몸만 편안케 하려는 것이 어찌 대의(大義)에 맞는 것이겠는가. 하물며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저버렸관대 그대가 나에게 의심을 두는가. 마땅히 나의 심사를 잘 체득하여 그대의 직책에 충실하라.

 

 

동문선 제30권   
 
 
 비답(批答)
 
 
권근이 본직을 사면하고 《예경》을 고증(考證)하는 일을 마치는 데에 윤허하지 아니하는 비답[權近請辭免本職終考禮經節次不允批答]
 

유사눌(柳思訥)

올린 전(箋)을 보고서 사직에 관한 것은 잘 알았다.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건대, 당우 삼대(唐虞三代)의 임금은 모두 도학을 밝혀 정치를 하였고, 그 신하들도 모두 도학을 밝혀 정치를 도왔다. 후세의 임금과 신하가 도학을 밝히려면 육경(六經)을 버리고 무엇으로 할 것인가. 나는 즉위한 뒤로부터 명유(名儒)를 얻어 좌우에 둔 다음, 경학(經學)을 강론하여 정치를 내는 근원을 밝히려고 하였다.
경은 천품이 순수하고 지식이 깊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육경(六經)을 모조리 꿰뚫어 전성(前聖)의 오묘한 이치를 발명하고 후진의 사표가 되었으며,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ㆍ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의 저술은 학자들의 지남(指南)이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재보(宰輔)에 임명하고 겸하여 경연(經延)을 맡게 하고, 또 사관(四館)과 성균관의 장을 겸임하게 하였으니, 이는 성리(性理)의 학을 듣고자 함이었다. 그 학문을 의논하는 훌륭함은 어찌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에 합할 뿐이겠는가. 필삭(筆削)의 법이 이미 춘추(春秋)를 엿보고, 박약(博約)의 가르침이 그윽히 아성(亞聖)을 사모하였다. 그러니 마땅히 공경치 않음이 없는 학(學)과 생각이 사특함이 없는 가르침으로 아침저녁 아뢰어서 나의 마음을 열어서 대도(大道)의 요령을 듣게 함이 경의 직책이거늘, 어찌 갑자기 병(病)으로 핑계를 삼는가. 대개 하늘이 이미 경에게 이 도(道)의 책임을 주셨으니 반드시 경의 장수(長壽)의 복을 끊지 않을 것인바, 복서(卜筮)의 말을 어찌 괘념하겠는가. 선유(先儒) 주희(朱熹)가 《서경》의 집전(集傳)을 짓는 것을 채침(蔡沈)에게 명하여 드디어 전서(全書)를 이루었는데, 이제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또한 《예기(禮記)》를 경에게 부탁하여 절차(節次)를 고정(考定)하게 하였다. 비록 주희의 때와 지금이 시대가 같지 않고 세상이 다를지언정, 사제지간에 전수(傳授)하는 법은 마치 부절(符節)처럼 부합되는바,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또 예서(禮書)가 원래 불탄 나머지에서 주워 엮은 것이라 서차(序次)가 문란해졌으니, 진실로 바르게 고증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경의 박학(博學)과 능문(能文)으로는 정치를 협찬하는 여가에도 넉넉히 편차(編次)할 수 있으리니, 어찌 한가한 자리에 두어야만 할 수 있다 하겠는가. 옛날에 송 나라 신종(神宗)이 사마광(司馬光)에게 명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함에 범조우(范祖禹)와 유서(劉恕)를 보좌관으로 삼아 각각 분장(分掌)하게 하고 사마광이 이를 정밀하게 절충하여 함께 일대(一代)의 사적(史籍)을 이루어 지금까지 흠모한다. 내가 경에 대하여도 또한 그와 같으니, 경은 부디 속에 품은 지식을 다 드러내고 상세하게 고증하여 그 책을 완성하라. 그리한다면 스승의 부탁과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또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동시에, 당세에 보탬이 있을 뿐 아니라 아마도 이 글을 영원토록 후세에 전하게 될 것이니, 이 아니 위대한 일이겠는가.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다스림을 도우라.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음이 마땅하겠기에 전교하노니, 마땅히 잘 알라.


[주D-001]필삭(筆削)의 …… 엿보고 :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에 붓질할 데는 붓질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는데 그의 제자 자유와 자하의 무리는 한 마디도 거들지 못하였다.
[주D-002]박약(博約)의 …… 사모하였다 : 아성(亞聖)은 안자(顔子)를 말하는데, 그의 말에, “부자(夫子)는 나에게 문(文)으로써 박(博)하게 하여 주고, 예(禮)로써 약(約)하게 하여 주셨다.” 하였다.
[주D-003]공경치 …… 학(學) : 정자(程子)는 “《예기》는 그 중에 있는 ‘무불경(毋不敬 : 공경하지 않음이 없음)’ 세 글자가 중심이다.” 하였다.
[주D-004]생각이 …… 가르침 : 공자는, “《시경》 3백편을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으니, 그 중에 있는 ‘사무사(思無邪 : 생각이 사특함이 없음)’라는 한 마디면 그만이다.” 하였다.
[주D-005]예서(禮書)가 …… 엮은 것 : 진시황(秦始皇)이 경전(經傳)을 모두 불살라 버렸는데 한(漢) 나라 때에 와서 불탄 나머지의 책을 수집하였다.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하 절일 표(賀節日表)
 

이색(李穡)
사방의 신복(臣服)하옵는 마음은 비록 온 천하가 같사오나, ‘억재(億載)에 부림(父臨)합소서.’ 하는 축원은 실로 보통보다 만 배나 더하옵나이다. 운운.
4월이라 여름철에 바야흐로 번개가 두른 날이 돌아왔사오니, ‘천 년으로 몸을 삼으시옵소서.’로 하늘과 가지런한 성수(聖壽)를 축원하오며, 조정에서는 화려한 의식, 온 누리엔 기쁜 정이 넘치옵나이다. 운운. 몸소 성덕(盛德)을 닦으시고 지극한 인(仁)으로 민생(民生)을 기르시어 문교(文敎)를 환히 밝히시니 건곤(乾坤)에 일월이 조림(照臨)함 같고 무공(武功)을 이룩하시니 악독(嶽瀆)을 풍정(風霆)처럼 휩쓸었사온데, 이제 탄강(誕降)의 날을 만나 더욱 넘쳐 흐르는 복을 받으시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臣) 모가 외람되이 수은(殊恩)을 입사와 중직(重職)을 맡고 있으면서, 척촌(尺寸)의 공효(功效)도 생성(生成)에 앙답(仰答)함이 없사옴을 부끄러워하오나, 억만(億萬)의 성수(聖壽)를 받들어 항상 송도(頌禱)를 드리옵기 원하옵나이다.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이색
 
 
황후 봉책 하표(皇后封冊賀表)
 

녹(?)을 받고 도(圖)에 응하여 단정히 신령의 통서(統緖)를 받드시고, 헌폐(軒陛 조정)에 임하여 옥책(玉冊)을 발하시어 이에 궁곤(宮?)의 의식을 새로이 거행하옵시니, 일월이 맑고 빛나며 강산이 안온(安穩)하옵나이다. 운운. 도(道)는 계체(繼體 사위(嗣位)와 같다)를 빛내시고 효도는 이모(貽謀 자손에게 알려 줄 꾀)를 중히 여기시어, 이에 좋은 배필을 권념(眷念)하사 일찍 금지(金枝)의 경사를 기르시고, 이제 큰 이름을 높이어 엄연히 초방(椒房)의 높은 자리에 임(臨)하옵시니, 위로는 만세(萬世)의 큰 터를 높이고 아래로는 삼한(三韓)이 길이 의뢰할 바를 열으셨기에 하늘이 크신 명(命)을 붙들고 사람들이 빛나는 때를 즐거워하옵나이다. 운운. 외람되이 폐방(弊邦)을 지키느라 성례(盛禮)를 뵈옵지 못하오나, 백성들의 풍화(風化)로 하여금 관저정시(關雎正始)의 시(詩)를 노래하게 하려 하오며, 이 몸이 생성(生成)에 보답을 꾀하여 화봉인(華封人)이 요 임금께 올린 다수(多壽)의 축원을 올리옵나이다.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이색
 
 
하 평촉 표(賀平蜀表)
 

황제께옵서 군림(君臨)하시어 구주(九州)를 어루만지시니 엄연히 중국에 거처하시고, 군사가 기율(紀律)로써 만전(萬全)으로 나가며 군추(群醜)를 모두 섬멸하셨기에, 첩음(捷音)이 미치는 곳마다 희기(喜氣)가 솟아 오르나이다. 공경하여 생각하옵건대, 운운. 요순(堯舜)의 신성하옵신 자격으로 은(殷) 나라ㆍ주(周) 나라가 정벌하던 의거(義擧)를 맡으시어, 강호(江湖)에서 일어나 초(楚) 나라ㆍ 월(越) 나라를 가로질러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 없고, 제(齊) 나라ㆍ노(魯) 나라를 평정하고 연운(燕雲)을 쓸어 가는 곳마다 서로 경하(慶賀)하여, 큰 훈공(勳功)이 겹쳐 모이고 더러운 풍속이 일신(一新)되었나이다. 남자는 아내를 가지고 여자는 시집가 모두 가정에 안도(安堵)하고, 글은 같은 글자, 수레는 같은 궤도(軌道), 누가 아니 칭경(稱慶)하오리이까, 생각건대, 저 촉(蜀) 나라 지방이 명자(名字)를 도둑질해 일컬었사오니, 지역의 험고(險固)만을 믿고 명을 거역하였으나 저들이 어찌 당랑(螳螂)의 팔로 바퀴를 막음인 줄 알았겠으며, 죄를 성토하고 주륙(誅戮)을 가함이 마치 기러기 털을 모닥불에 태움과 같았나이다. 검각(劍閣)의 길이 다시 탄탄해지고 염예퇴(??堆)의 물결이 금시 잔잔해졌사오니, 이는 모두 천운(天運)의 사연(使然)이요 성모(聖謀)의 독단(獨斷)에서 나온 것이오며 혼일(混一)의 빠름이 전고(前古)에 드문 일이로소이다. 신(臣) 모(某)가 다행히 성시(盛時)를 만나 개가(凱歌)를 바로 듣는 듯하오니, 제잠(?岑)에 구실을 지키면서 감히 재조(再造)의 은을 잊사오리까. 호배(虎拜)로 성덕(聖德)을 찬양하여 공손히 만 년의 축수를 올리나이다.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이색
 
 
황태자의 천추를 하례하는 기거 전[賀皇太子千秋起居箋]
 

학금(鶴禁)의 시서(侍書)로서 우악(優渥)한 은총을 도맡아 받자옵다가, 제잠(?岑)에 직책을 지키면서 강녕(康寧)하옵소서의 축원이 항상 간절하였습니다. 이제 가신(佳辰)을 당하와 더욱 미침(微沈)을 다하옵나이다.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이색
 
 
하표(賀表) 
 

황종(黃鍾이 기운을 산출(産出)하여 바야흐로 탄강(誕降)하신 날이 돌아오고, 벽루(碧鏤)가 상서를 모아 유신(維新)의 명(命)에 응하오니, 백성들이 모두 구가(謳歌)하고 첨앙(瞻仰)함이 모두 고르도소이다.
운운. 품성(稟性)이 온량(溫良)하시고 마음에 경애(敬愛)가 돈독하시어 문안 올리는 용루(龍樓) 새벽에 효행(孝行)이 진작 드러나시고, 중화(重華) 봉력(鳳曆)의 봄에 자손에 남겨 줄 꾀가 더욱 영구하온대 이제 무지개가 흐르던 아침을 만나오니, 냇물이 흘러 이르는 복을 배(倍)나 받으시리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운운. 외람되이 폐봉(弊封)을 지켜 황공히 큰 은택을 입었사오나 추창의 열(列)에 나아가지 못하옵고 오로지 송도(頌禱)의 정성을 펴옵나이다.


[주D-001]황종(黃鍾) : 악률(樂律) 12율(律)의 첫째 율. 임금의 비유.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방물장(方物狀)
 

하늘에서 복을 내리시니 더욱 중윤(重潤)의 아름다움을 더하시고, 땅의 산물(産物)대로 애오라지 드릴 만한 미더운 물품을 올리나이다. 운운. 가지 수가 매우 적고 만듦새도 서투르오니, 긴히 쓰실 만한 물건이 못 됨을 부끄럽게 여기나, 정성을 표하는 예(禮)로 굽어 살펴 주시옵기 바라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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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평정 안남 전(賀平定安南箋)
 

이극(貳極 왕태자)의 높은 위(位)에 계시면서 크게 펴는 문덕(文德)을 도우시고, 만기(萬機)를 참결(參決)하사 필승(必勝)의 작전(作戰)을 수행하시오니, 이번 포고(布告)에 모두들 환성(歡聲)을 올리옵나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의리를 모르는 조그만 것들이 감히 표절(剽竊)을 행함은 실로 신인(神人)이 공노(共怒)하는 바요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일이온지라, 마땅히 육군(六軍)을 정돈하여 구벌(九伐 정벌하는 아홉 가지 법)을 베풀 것이온데, 풍정(風霆)이 동탕(動?)하여 황위(皇威)를 먼 변방에 빛내고 일월(日月)이 정명(貞明)하여 사나운 풍속이 아름다운 성화에 귀복(歸服)하오니, 이는 무력(武力)을 시위함이 아니요 오직 평정(平定)을 위함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인(仁)은 호생(好生)에 돈독하고 의(義)는 제폭(除暴)만을 위주하오니, 일방(一方)의 재조(再造)를 이룸으로써 사해(四海)의 영원한 평화를 기약하게 되었는데 무릇 보고 듣는 자 뉘 아니 기뻐 춤추오리이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외람되이 성시(盛時)를 만나 반갑게 첩보(捷報)를 듣삽고, 구실이 비록 제잠(?岑)에 매어 칭하(稱賀)에 참예하지 못하오나, 마음은 학금(鶴禁)에 달려가 있사오며 곱절로 강녕(康寧)을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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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개환 하전(皇太子凱還賀箋)
 

용기(龍旗)가 가리키는 곳마다 천자의 위엄을 엄숙히 보이시고, 학가(鶴駕)가 개선(凱旋)해 오셔서 도인(都人)의 기대하던 바람을 크게 위로하시니, 이번 포고(布告)에 모두 환성을 올리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운운. 크신 도량이 연충(淵?)하시고 영명(英明)한 계략(計略)이 과단하시어, 정신을 기다듬어 덕화를 넓히심에 크게 펴시는 문덕(文德)을 협찬하셨고, 황명(皇命)을 받아 행차하시와 필승의 작전을 수행하였사오니, 다만 무력(武力)을 과시할 뿐이 아니요 오직 평정(平定)을 위함이었나이다. 요망 도적은 솥 안의 고기와 같았으니 응당 항복을 진작 애걸하지 않았었음을 후회할 것이요, 역신(逆臣)이 사창(社倉)의 쥐가 되어 바야흐로 거역하면 반드시 주륙(誅戮)됨을 알았사오니, 어찌 창궐(猖獗)을 족히 근심하오리이까. 이는 대개 지휘(指揮)에 예정(豫定)이 있어서 입니다. 풍정(風霆)이 동탕(動?)하니 어찌 사기(私氣)가 머무름을 용납하며 일월이 청명하여 드디어 부운(浮雲)의 가림을 쓸어버렸사오니, 이는 모두 예산(叡算)이 위로 신충(宸衷)을 도와 드려 일이 만전(萬全)함이 있었고, 신모(神謀)를 뭇사람들과 함께하여 마음에 이의(異議)가 없었기 때문이옵나이다. 아들로서 효도를 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하였으므로 마땅히 나가서는 국보(國步)의 간난(艱難)함을 돌리고 들어와서는 천안(天顔)의 기쁨을 받드셨습니다. 이에 성명(聲名)의 널리 중외(中外)에 퍼지고 공업(功業)이 우뚝 고금에 제일이오니, 무릇 보고 듣는 자 뉘 아니 기뻐 춤추오리이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몸은 확굴(?屈)을 부끄러워하오나 마음에 응양(鷹揚) 을 사모하오며 만기(萬騎)가 내조(來朝)하여 개가(凱歌)를 아뢰옴을 멀리 상상하면서, 사방이 칭경(稱慶)하는 때 배(倍)나 호고(胡考 장수(長壽))의 복을 비옵나이다.


[주D-001]몸은 확굴(?屈)을 부끄러워하오나 : 《역경》의 괘사로 자벌레처럼 움츠려 실의(失意)한 것인데, 여기서는 패전(敗戰) 때를 말한다.
[주D-002]응양(鷹揚) : 새매가 높이 날 듯이 위무(威武)를 떨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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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이 운남을 평정하고 양왕의 가속을 압송하여 제주에 안치함을 하례하는 표[賀朝廷平定雲南發遣梁王家屬安置濟州表]
 

이숭인(李崇仁)
춘추(春秋)의 일통(一統)을 크게 하여 운(運)을 중국에 열었고, 뇌정(雷霆) 같은 육군(六軍)의 위엄이 남방에 떨치오니, 첩보(捷報)가 멀리 전해지자 희기(喜氣)가 도처에 솟아오르나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우서(虞書)》엔 유묘(有苗)의 정벌(征伐)을 실었고 한사(漢史)엔 교지(交趾)를 격파(擊破)했음을 적었으니, 대개 저들이 완미(頑迷)를 고집하여 천명(天命)을 항거했으므로, 죄악을 성토(聲討)받아 주륙(誅戮)을 당하였음이로소이다. 그러하온데 저 조그만 운남(雲南)이 바닷가에 있어, 망령되이 험(險)하고 먼 것을 믿고 감히 날뛰어 불공(不恭)한 짓을 함으로, 위대하게도 만전(萬全)의 계책(計策)으로 사나운 풍속을 냅다 평정하고 벌컥 한 번 노(怒)하시어 평화를 회복하였사오니, 이는 대개 중화(重華)가 덕을 협찬(協贊)함이니 광무(光武)의 공(功)과 부합(符合)되옵나이다. 그 성공(成功)을 고하자 환우(?宇) 안에 거서(車書)가 통일되고 이 군추(群醜)를 굴복시켜 해도(海島) 안에 포로를 안치(安置)하오니, 이로써 요분(妖?)이 마땅히 사라지고 더욱 신인(神人)의 기대를 위로하오리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소대(昭代)를 만나 반가이 개가(凱歌)를 듣삽고, 정사를 동방(東邦)에서 돕는 때문에 준분(駿奔)의 열(列)에 참가하지 못하오나, 시(詩)로써 위[上]를 찬미하여 애오라지 연하(燕賀)의 정성을 펴옵나이다.


[주D-001]벌컥 한 번 노(怒)하시어 : 천자가 진노하여 토벌한다는 뜻. 《詩經 大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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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등극 표(賀登極表)
 

하늘을 이어[繼] 황극(皇極)를 세우시니 꼭 역수(曆數)의 돌아옴을 받으셨고, 인(仁)으로써 위(位)를 지키시니 진실로 신인(神人)의 희망에 맞사온지라, 익대(翊戴)가 이에서 비롯하여 구가(謳歌)가 모두 고르나이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도(道)는 미륜(彌綸 천하를 다스리는 경륜)에 합하시고 공(功)은 기정(耆定)을 이루사, 이에 대통(大統)을 이으시와 제업(帝業)을 중흥(重興)하시고, 조서(詔書)를 멀리 반포하여 황유(皇猷)가 더욱 빛나오니, 이로써 선조(先朝)의 부탁을 보답하고 드디어 만화(萬化)의 경장(更張)을 보게 되었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외람되이 세봉(世封)을 승습(承襲)하고 황송하게도 분성(分省)의 직(職)을 맡았기에 풍운(風雲)이 제회(際會)하는 때 대래(代來)를 모시지 못하옴이 한(恨)이오나, 천지가 장구토록 화축(華祝)을 드리고자 원하옵나이다.


[주D-001]대래(代來) : 하늘을 대신하여 오신 분, 또는 오행(五行)을 대체(代遞)하여 오신 분인데, 새 천자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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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를 책봉함을 하례하는 표[賀冊皇太后表]
 

지극한 인(仁)을 길이 주시어 제덕(帝德)이 드디어 새로우시니 화려한 예식을 거행하여 모의(母儀)가 무게를 더하오며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옴에 기쁨이 신린(臣?)에 넘치옵나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창희(蒼姬)는 한대(漢代) 이래에 세운 호(號)요, 중임(仲任)의 명덕(明德)은 간책(簡冊)에 수두룩히 적혀 있사오니, 이제 국운(國運)이 흥할 때를 당하여 휘호(徽號)를 드리옴이 마땅하옵나이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순(舜) 임금보다도 더하신 총명과 탕(湯) 임금을 능가하는 용지(勇智)로써, 정치의 요도(要道)를 어버이에서 시작하여 교화(敎化)가 행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지오며, 난세(亂世)를 헤쳐 바른 데로 돌려 가까운 자가 기뻐하고 먼 데 사람이 오는 바, 즐겁게 하심으로써 자훈(慈訓)을 받드시와 이제 빛나는 휘호를 드렸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일찍 예전의 봉직(封職)을 이어받아, 그윽이 《주역(周易)》을 본떠 왕모(王母 황태후)의 큰 복을 받으신 줄 아오며 원컨대 주아(周雅)를 노래하여 천자의 만년에 절하고자 하옵나이다.


[주D-001]가까운 …… 오는 바 : 섭공(葉公)이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가까운 곳에서는 기뻐하고, 먼 곳의 사람은 찾아온다 하였는데, 선정(善政)을 뜻한다.《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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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교사 개원 표(賀郊祀改元表)
 

성인(聖人)이 왕위에 오르사 비로소 인사(?祀 천제(天祭))의 예(禮)를 거행하시고, 호천(昊天)이 명(命)을 내리사 드디어 보력(寶曆)의 시작을 고치시니, 화기(和氣)가 넘쳐 흐르고 환성(?聲)이 끓어오르나이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마음을 잡으심이 경외(敬畏)롭고, 운(運)을 어루만지심이 형태(亨泰)하시와, 황제의 첫 행사(行事)로서 고갈(藁?)과 질그릇, 바가지를 깨끗이 차려놓고, 백성과 더불어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을 새롭게 하시니, 빛나는 일이 완성을 고하자 다방(多方)의 백벽이 하례를 올리는 것이 마땅하도소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로써 다행히 창성(昌盛)한 때를 즈음하여, 옥잔(玉盞)을 받들고 하례의 반열(班列)에 참가해서 진접(晉接)의 영광을 받지는 못하오나, 성수(聖壽)를 축원하옵는 정성은 숭호(嵩呼)의 만세를 간절히 부르옵나이다.


[주D-001]고갈(藁?) : 제사 때 쓰는 초석(草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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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표(賀正表)
 

신정(新正)에 황력(皇曆)을 반포하여 춘추 일통(一統)의 뜻을 크게 하시고, 의장(儀仗)을 동정(?庭)에 늘어세우고 사방의 조공(朝貢)을 받으시오니, 신인(神人)이 기뻐하고 종사(宗社)가 예안(乂安)하나이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강건ㆍ순수하옵시고 총명ㆍ예지하시어 백성에게 어지시고 물건을 사랑하시니, 제택(帝澤)이 회유(懷柔)에 흐뭇하고 문(文)을 상고하여 예(禮)를 정하시니, 천심(天心)이 모훈(謀訓)에 나타났사옵고, 양신(良辰)이 바야흐로 돌아왔으므로 만 가지 복이 다 이르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외람되게 미거한 자질로 다행히 소대(昭代)를 만나, 초반(椒盤)에 찬송을 올립니다. 비록 성대한 의식에 참가하지 못하오나, 해옥(海屋)에 대오리를 더하여 감히 항상 다수(多壽)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주D-001]초반(椒盤) : 초주(椒酒)를 드리는 쟁반. 초주는 산초를 넣어 빚은 술로, 정월 초하룻날에 집안의 어른들에게 장수와 축하의 뜻으로 드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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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전(表箋)
 
 
하정표(賀正表)
 

정월에 인(寅)을 건(建)하여 보력(寶曆)이 대통(大統)에 새롭삽고, 성인(聖人)이 몸을 공경하사 진의(袗衣)로 법궁(法宮)에 단정히 납시오니, 서기(瑞氣)가 넘쳐 흐르고 한성이 끓어오르나이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천지를 잘 재단하여 만드심에 있어 신명(神明)과 함께 협참(協參)하시고 도덕의 경(經)을 발휘하여 그 묘(妙)를 관찰하시며, 정일(精一)의 학(學)에 종사하시어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시니, 이제 신정(新正)을 선포(宣布)하시어 상서가 풍성하게 모여드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빛나는 아침을 만나 외람되게 폐봉(弊封)에 봉직(封職)하고 있기에 백벽(百?)과 반열(班列)을 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한정(漢庭)의 모임에 참예하지는 못하오나, 만세의 성수(聖壽)를 올려 숭악(嵩嶽)의 만세 삼창(三唱)을 함께하고자 원하옵나이다.


[주D-001]진의(袗衣) : 아름답게 수놓은 화려하고 진귀한 옷 천자가 입던 성복(盛服).
[주D-002]진실로 …… 잡으시니 : 개인으로서나 제왕으로서의 학문과 수양을 다한 순(舜)이 우(禹)에게 한 말[允執厥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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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동지 표(賀冬至表)
 

인사(麟史)에 봄이라 썼으니, 황종(黃鍾)이 일양(一陽)의 내복(來復)에 응하고, 계인(鷄人)이 새벽을 고하니, 단의(丹? 붉은 병풍)를 치고 사방의 조회를 받으시자 상서가 대궐에 엉기고 선지(宣旨)가 천문(天門)에 전해지옵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명철(明哲)을 법칙으로 삼으시고 중정(中正)으로 임어(臨御)하시어 화공(化工)의 생성(生成)으로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되 치우치거나 편들지도 아니하고 자위(慈?)의 봉양(奉養)을 예(禮)로써 부지런히 하시되 잘못하거나 잊으시지 않으시니 마침 도(道)가 길어지는 때를 만나 크게 벗들이 오는 경사를 끌어안으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운운. 봉직(封職)에 고삐를 잡아 당길 만한 자격이 없사옵고, 하반(賀班)의 한 자리에 끼이지 못하오나, 해[日]에 비추는 봉래(蓬萊)의 오색(五色) 경운(卿雲)을 바라보면서, 하늘과 같으신 성수(聖壽)를 비옵되 숭악(嵩嶽)에서 만세 삼창하는 정성을 다하겠나이다.


[주D-001]계인(鷄人)이 새벽을 고하니 : 계인은 벼슬 이름으로, 궁중에서 닭을 기르면서 큰 제사가 있을 때에는 백관을 깨운다.
 
 동문선 제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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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팔관 표(賀八關表)
 

병록(丙鹿)의 천년에 응하는 큰 명(命)은 오직 옛것이나 새롭고, 의봉(儀鳳)의 팔관회(八關會)는 지금이 아니라 옛 제도이니, 보좌(寶座)에 높이 앉아 계심에 여정(輿情)이 모두 기뻐하옵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운운, 성덕(盛德)이 몸에 있고 지인(至仁)으로 만물을 기르시니, 넓고 크사 실로 원(元)ㆍ형(亨)ㆍ가(利)ㆍ정(貞)이 구비(俱備)되고, 예(禮)다 악(樂)이다 함은 옥백(玉帛)과 종고(鍾鼓)만을 갖춘 것을 말함이 아니므로 신인(神人)이 번갈아 유쾌하고 복록(福祿)이 와 높이 쌓이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운운,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빛나는 성시(聖時)를 만나, 호산(湖山)에 땅이 멀어 숙목(肅穆)한 반열(班列)에 참가치 못하오나, 위궐(魏闕)에 구름이 열린 데로 강녕(康寧)의 축원을 올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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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절일 표(賀節日表)
 

황제께서 진(震)에서 나옵시니, 탄강(誕降)하신 날에 상서가 풍성하옵고, 천명(天命)을 펴[申]시와 운수가 형태(亨泰)하게 열리오니, 화려한 예식을 거행하여 환심이 모두 고르도소이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성신(聖神)ㆍ문무(文武)하옵시고 총명ㆍ예지(叡智)하시어 공(功)을 이루고, 정치가 정해지시니 제도가 삼대(三代)의 지치(至治)를 재현하시고, 인(仁)으로 젖게 하고 의(義)로 매만지시니 성교(聲敎)가 사해(四海)의 먼 곳에까지 미쳐,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고 일월과 같이 조림(照臨)하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창신(昌辰)을 만난 덕분에 유업(遺業)을 이었사온대 먼 길에 막혀 옥잔(玉盞)을 들어 만세를 부르옴은 못하오나, 금감(金鑑)의 글을 본떠 올려 항상 화축(華祝)을 대신하옵나이다.


[주D-001]금감(金鑑)의 글 : 풍유하는 글이나 책. 장구령(張九齡)이 당 현종의 생일인 천추절에, 거울로 삼아야 할 일 열 가지를 쓴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을 올린 데서 유래함.
 
 
 
동문선 제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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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전(賀正?)
 

삼양(三陽)과 함께 도(道)가 길어지는 때 대화(大和)를 펴서 만물을 기르시고, 이극(貳極)에 위(位)가 높으사 화려한 예식에 하례 올리는 반열이 뜰에 가득하오니, 기쁜 기운이 솟아오르고 찬송하는 소리가 사방에 들끓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성품은 충효에 돈독하시고 덕은 온문(溫文)으로 드러나사, 종묘와 황통(皇統)을 이으실 귀한 자격으로 천하의 근본이 되셨고, 사부를 존중하시어 성인의 예(禮)를 잘 따르시오니, 신정(新正)이 갓 돌아오자 큰 명(命)이 더욱 굳으시리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로 덕분에 폐봉(弊封)을 승습(承襲)하여 휘윤(輝潤)의 노래를 이어 부르며 항상 강녕(康寧)의 축원을 바치옵나이다.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하 동지전(賀冬至?)
 

율관(律管)에 기운을 넣어 부니 일양(一陽)이 돌아오고, 궁정에 예식을 거행하자 사방이 하례하오니, 동물이나 식물 어느 것인들 기뻐하고 환영하지 않겠나이까.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제성(齊聖)ㆍ광연(廣淵)하시고 총명ㆍ예지(睿智)하시어 운행우시(雲行雨施)는 생성(生成)에 천지의 마음을 체(體)하시고,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정일(精一)히 제왕(帝王)의 학(學)을 전하시니, 때마침 도(道)가 길어지는 아침을 당하여 더욱 냇물이 흘러 이르는 복을 끌어안으리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資質)로서 다행히 후하게 내려주신 직책을 맡았사오니 비록 천문(天門)에 들어가 용안(龍顔)을 배알(拜謁)하는 반차(班次)에는 참가하지 못하오나, 제궐(帝闕)을 바라보며 상운(祥雲)을 적어, 애오라지 경사로운 상서를 기뻐하옵나이다.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친히 대표에 제사지냄을 하례하는 전[賀親祀大廟?]
 

대업(大業)을 재흥(再興)시키시니 학문과 문장이 이처럼 성(盛)하옵고, 정스러운 제사를 처음 거행하시니 조종(祖宗)을 존경하심이 이에서 더하리이까. 신인(神人)이 경사를 함께하옴에 사책(史冊)에 빛을 더하리로소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공은 반정(反正)에서 높으셨고 다스림은 무위(無爲)에 근본을 두셨습니다. 관면(冠冕)의 예복을 더욱 아름답게 하시고, 제수(祭需)를 경건하고 성대하게 올리오니, 여기서나 저기서나 음양이 밝은 데서 구하고 나타나고 존재함에 있어 어림풋이 얼굴과 목소리도 계신 듯하오니, 사방이 모두 하례하고 만복(萬福)이 어울려 이르옵나이다.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히 소중한 직책을 맡사와, 선실(宣室)에 음복주(飮福酒)를 마시는 준분(駿奔)의 반열(班列)에는 비록 참가하지 못하오나, 화봉인(華封人)처럼 성수(聖壽)를 축원하면서 호배(虎拜)의 간절한 정성을 다하옵나이다.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은혜에 사례하는 글[謝恩表]
 

이색(李穡)

밝은 윤음(綸音)이 내리시니 바야흐로 깨우침이 깊고, 높은 관급(官級)을 올려주시니 지극히 황공한데 게다가 하사품(下賜品)까지 내리시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 모가 생각건대, 땅을 나누어 군장(君長)을 세움은 심복(心腹)이 팔과 다리에 의뢰하는 것과 같고, 적개심을 품고 임금을 보좌하는 것은 수족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고금이 함께 따르는 대체(大體)이고 상하가 서로 친하는 지극한 정입니다. 신 같은 자는 세계(世係)가 황실의 외손으로 습작(襲爵)의 은혜를 외람히 입었습니다. 군사가 남방에서 승전했을 때에는 추호도 돕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황제의 수레가 겨울에 상도(上都)에 순수하실 때에는 진실로 몸이 가루가 되는 것을 사양하지 아니 하려 하였습니다. 방숙(方叔)과 소호(召虎)가 주 나라를 중흥하였음을 생각하고,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당 나라를 다시 일으켰음을 생각하여 표문을 올려 군사를 낼 것을 감히 뒤에 하지 못하였고, 마초와 양식을 운반함이 매우 곤란하였으나 시일이 빨리 가는데 공은 이루지 못하고, 뜻이 한갓 부지런하여도 힘은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뜻밖에 황제께서 멀리 어리석은 마음을 살피셔서 따뜻한 말씀을 앞에 내리시어 권장(勸?)함을 먼저 하시고, 뒤에 우정승에 올렸으며 다시 이어 표창하시니, 이것은 모두 세상에 드문 영화인데 하물며 열흘 동안에 아울러 얻게 되어서 술은 하수(河水)에 던져 마시도록[投河之飮]하고 옷은 솜을 품은 것 같은 정[??之情]을 베푸시니 공경히 사랑을 입어 더욱 근심하고 책임을 느낍니다. 이것은 대개 황제폐하께서 운운. 배우지 않고도 아는 성스러움을 타고 나시고 태평한 때에 처하셔서 공묵연충(恭默淵?)하여 진퇴(進退)ㆍ존망(存亡)의 까닭을 환히 살피시고, 진작(振作)ㆍ흥기(興起)시켜 주고 빼앗고 세우고 폐지하는 권력을 잡아 뭇사람의 계책을 받아들이어 섞어 시행하고, 뭇 마음을 감동시켜 함께 분발시키므로 신명(神明)이 함께 도와 잠깐 사이에 평정하게 되었거늘 오히려 먼 지방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덕에 돌아오게 하시니, 신이 한신(韓信)처럼 많은 군사를 잘 거느린다고 해서가 아니라 대개 신이 성실하여 다른 것이 없음을 사랑하심이니, 신이 어찌 절개가 금석(金石)같이 굳기를 맹세하여 시종 오직 한결같이 하고 성수(聖壽)가 강릉(岡陵) 같기로 축원 드림을 보통보다 만 배나 하지 않겠습니까.


[주D-001]술은 …… 마시도록[投河之飮]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와 전쟁하는 초왕(楚王)이 어느 사람이 술 한 병을 바치자 그것을 군사와 나누어 마시려니 적어서 할 수 없으므로, 술을 하수(河水)에 던지고 군사들에게 하수의 물을 마시게 하였다.
[주D-002]솜을 품은 것 같은 정[??之情] : 초왕(楚王)이 소(蕭)를 칠 때에 군사들이 추위에 고생하는 것으로 보고 왕이 친히 군중에 돌아다니며 위로하니, 모든 군사들이 솜을 낀 것과 같아서 추위를 잊었다 하였다. 《左傳》
[주D-003]많은 …… 거느린다고 : 한 고제(漢高帝)가 한신(韓信)과 더불어 여러 장수의 능력을 말하다가, “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겠는가.” 하고 물으니, 한신은, “신은 군사가 많을수록 더 잘 거느립니다[多多益善].” 하였다.
[주D-004]성수(聖壽)가 …… 축원 : 《시경(詩經)》에, “메 같고 언덕 같으소서.”라는 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신하가 임금의 수(壽)하고 복 많기를 비는 시다.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술과 의복을 내려준 데 대하여 사례하는 글[謝御酒御衣起居表]
 

몸이 동쪽 지경에 거하면서 편벽되게 우로(雨露)의 은혜를 받았고, 눈이 황제의 뜰을 바라보매 배나 강릉(岡陵)의 수를 축원하옵니다.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사례하는 글[謝表]
 

하늘로부터 물품을 보내시니 황공하기 짝이 없고, 몸에 입어 빛이 나니 은혜가 뼈에 배어 더욱 깊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운운. 외람히 황제의 알아주심을 입어서 일찍이 선대의 업을 이었으나, 조정(朝廷)과 멀리 있으니, 누가 임금 생각하는 정을 알 것이며, 또한 산과 바다가 막히었으니 임금을 보좌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나이다. 지난날 요망한 도적이 방자하게 흉악한 짓을 하는 때를 만나 분함을 이기지 못해 작은 정성을 다하여 탐욕스럽고 모진 것들을 죽였으나, 바야흐로 승전을 보고할 길이 막히었음을 염려하였더니 갑자기 두터운 은덕을 반포하여 사신을 급히 달려 보내심에 놀랬습니다. 빛깔은 그림처럼 찬란하고, 봄 술 항아리에 향기가 가득합니다. 이것은 대개 엎드려 운운. 지극히 인자하심이 먼 지방을 어루만지고 넓으신 도량이 거친 것을 포용하셔서 비록 깊이 구중궁궐 가운데 계시나, 만리 밖의 것을 밝게 보시어, 신이 우둔하나 선대의 직책에 이바지함을 아시고, 신이 겁이 많고 나약하나 군공(軍功)에 참여하였음을 어여삐 여기사 보고가 늦음을 용서하시고 큰 포상을 내리셨습니다. 신이 어찌 아름다운 명령에 보답하여 좋은 때에 뛰고 춤추어, 동포(同袍)의 노래를 이어서 은혜에 감격하여 서로 독려하고, 투하(投河)의 마심을 이어서 은혜를 고루 나누지 않겠습니까.


[주D-001]동포(同袍)의 노래 : “자네와 같이 옷을 같이 하세[同袍]. 임금이 군사를 일으키거든 나의 창을 준비하여 자네와 함께 원수를 치세.” 하였다. 《詩經》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복위 기거를 사례하는 글[謝復位起居表]
 

산천이 막히었으매 항상 해를 받드는 마음이 달리었고, 비ㆍ이슬같이 적셔 주시니 더욱 하늘과 같이 오래 계시라는 축수를 간절히 드립니다.


[주D-001]해를 …… 달리었고 : 송 나라 한기(韓琦)가 꿈에 해를 받들기를 세 번 하였더니, 뒤에 인종(仁宗)ㆍ영종(英宗)ㆍ신종(神宗) 세 임금을 섬겨서 위국충헌왕(魏國忠獻王)에 봉해렸다.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사례하는 글[謝表]
 

은혜롭게도 이 관작을 돌려 주시고, 일은 모함한 것을 변백(辨白)하여 주시니 감격함이 하늘에 움직여 눈물이 비같이 흐릅니다. 생각하건대 간사한 일과 정직한 실상은 덮고자 할수록 더욱 드러나고 상하의 정은 끝내 통하게 되어 막히기 어렵습니다. 운운.
그들이 신을 폐할 마음을 품어서 드디어 하늘을 속일 꾀를 내어 표전(表箋)과 예물을 공공연하게 백일(白日) 하에 빼앗고, 부새(符璽)와 첩서(捷書)는 조정의 표상을 저해하여 스스로 그 음모를 다행으로 여기고 또 반드시 벌 받기를 바랬습니다. 신이 먼 지방에 외롭게 갇혔으니, 눈 닿는 곳은 오직 하늘밖엔 없습니다. 그러나 참소[?]가 비록 핍절하나 본래 절개를 어찌 옮기겠습니까. 외로운 그림자를 돌아보며 스스로 슬퍼하니 이 충심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오직 황제께서 알아주심만을 바라고 잠깐 동안 죽음을 참았더니, 과연 천도(天道)가 틀리지 않아서 죄인을 잡아내게 되었습니다.
선악이 가려지자 특별히 황제의 말씀을 반포하시고 기강을 엄숙히 하여 공을 기록한 글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신이 이르니 황제께서 임하심과 같았습니다. 얽어 만든 지난날의 의심을 풀었으니 이미 다행이요, 속국(屬國)의 옛 직분을 회복하게 되니 더욱 특수한 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궁중 비단은 아름답게 빛나고 신선의 술은 봄에 향기롭습니다. 비상한 은총이 불초한 몸에 거듭 더하심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이것은 대개 황제께서 먼 지방을 덕으로써 어루만지는 방침을 실천하고, 간사함을 버리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는 생각으로, 그들이 총명을 가리었음을 살피시어, 특수한 은택을 속여 입었던 죄책을 밝히셨습니다. 신이 황실을 위해 도적을 무찔렀음을 어여삐 여기셔서 선대의 공에 빛이 있다는 포장을 주셨습니다. 드디어 훼방 입었던 바를 다시 보전해 주는 은혜를 입게 하여 주심을 만난 것입니다.
신이 아름다운 명령에 보답하여 직분을 닦는 정성을 배로 드려서 남은 백성을 편하게 하여 길이 천하를 다같이 사랑하시는 덕화를 어찌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태위에 임명함을 사례하는 글[太尉謝表]
 

선대의 업을 이어 닦아서 바야흐로 천리의 봉함을 받았고, 황제의 마음에서 선택하시와 또 삼공(三公)의 벼슬을 주시니 은혜가 뜻 밖이라 느낌과 부끄러움이 함께 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보잘것없는 작은 재질이요, 번보(藩輔)의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중국에 들어가 황제의 돌보심을 받아서 현달함을 이루었으니, 비록 작은 마음에 항상 어리석은 정성을 가렸으나 보답함을 이루지 못하였더니, 우연히 돼지와 뱀 같은 종류들의 난을 만나 견마(犬馬)의 충성을 조금 바쳤습니다. 그러나 파리가 울타리에 앉으므로[蠅止樊] 마침내 중간에 무함하는 화를 만났더니, 물고기가 그물에서 벗어난 것과 같게 됨은 실로 보전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겨우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결코 다른 바램은 없었는데 갑자기 사신이 이르러 조서를 전함에 놀랬습니다. 사양하고자 한즉 명예를 구하는 것 같기 때문에 억지로 취임하게 되니, 멀리 옛 성인의 지족(止足)의 훈계에 부끄럽고, 깊이 가득 차면 기울어진다는 것을 경계하옵니다. 운운.
운수는 중흥을 이룩하였고, 어진 덕은 천하를 한결같이 보셔서 드디어 성한 은택을 펴 먼 지방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신이 어찌 삼가서 가문의 이름을 보존하여 황제의 덕화를 더욱 드러내지 않겠습니까. 구궁궁궐이 비록 멀지만 보불(?? 임금의 옷)의 빛남을 보는 것 같고, 사방이 대강 편안하니 오직 태산 같은 수를 축원할 뿐입니다.


[주D-001]번보(藩輔) : 제후(諸侯)가 왕실(王室)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한다는 말이다.
[주D-002]돼지와 뱀 : “오(吳) 나라가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상국(上國)을 먹는다.” 하였다. 《左傳》
[주D-003]파리가 …… [蠅止樊] : 《시경》에, “푸른 파리가 울타리에 앉는다.” 한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파리가 흰 것에 똥을 싸서 찍어 검게 만들므로, 소인(小人)이 군자를 참소[?]하는 데 비유하였다.
[주D-004]지족(止足) : 노자(老子)는,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만족한 줄 알면 욕되지 않는다[知止不殆 知足不辱].” 하였다.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은혜를 사례하는 글[謝恩表]
 

밝은 윤음(綸音)을 내리시고 진기한 물품을 하사하시니, 은혜가 바란 바가 아니므로 아름다운 명령에 절하기에 마음이 부끄러워집니다. 운운. 신은 외람되이 조그마한 재질로 선대의 업을 이어 지켜 오다가, 마침 중원(中原)의 어지러운 때를 만나 자못 의지할 곳을 잃었더니, 성군(聖君)이 일어나심에 미쳐 기쁘게 추대함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천이 멀고 멀어 아직 조정에 가서 조회함이 늦었는데도 뜻밖에 곡진히 포용하시어 우악(優渥)하게 진무(鎭撫)하여 주시어 사신이 험한 물결을 건너 동으로 날아와 조서가 동쪽 나라에 내려 비치니, 종묘사직이 이미 영화롭고 온 집안이 서로 경하합니다. 이것은 대개 엎드려, 운운. 황제께서 문(文)을 닦고 군사를 쉬며 덕을 펴 간척(干戚)은 춤을 추니 천지가 화평하여 오제삼왕(五帝三王)을 이어 법을 세우시매 남방까지 교화가 미치어 구주사해(九州四海)로 집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먼 나라까지 똑같이 사랑하는 덕화를 얻어 입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마땅히 뜻을 충순(忠順)에 두고 대대로 속국이 되어 정성껏 집양(執壤)의 예의를 닦고 언제나 하늘과 같은 수(壽)를 빌겠습니다.


[주D-001]집양(執壤) : 《서경》에서 나온 말인데, 그 지방의 토지에 생산되는 진기한 물품을 가지고 온다는 말이다.
 
 동문선 제38권   
 
 
 표전(表箋)
 
 
사라의 하사를 사례하는 글[謝賜紗羅表]
 

사신이 갑자기 이르러 황제의 하사품을 특별히 내리시니 분수를 헤아려 한도에 지나치므로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 모는 지혜가 족히 다스림을 도모하지 못하고, 재주는 족히 몸을 빛나게 하지 못하므로, 황잡하고 소홀함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선대의 전해온 업만 대강 보존하였더니, 뜻밖에 조그마하고 못난 자가 위로 황제의 들으심을 번거롭게 하여서 이에 귀부(歸附)된 후로 과도하게 총애를 입었습니다. 예복(禮服)과 악기(樂器)는 중국 제도로 시범을 삼고, 경적(經籍)과 사서(史書)는 오랫동안 우매하였던 양심(良心)을 발하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미 여러 번 물품을 나누어 주신 특별한 은택은 감당하지 못하겠는데, 또 이에 아름다운 명령에 절[拜]하게 되니 더욱 송구합니다. 이것은 대개 엎드려 운운. 황제께서 우(禹)의 잘 다스림을 사모하시고 문왕(文王)의 태평되게 하심을 본받아, 덕 있는 이를 명하는 데는 상자에 있는 물건을 내어주시고, 장수를 쓰는 데는 자기가 입었던 옷을 풀어 주기[解衣]를 급히 하시므로, 드디어 넓은 모든 지역이 황제의 다스리는 가운데 들어와서 신 같은 조그만한 것도 주심을 받은 것이 역시 두터웠습니다. 신이 어찌 어진 이를 좋아하시는 아름다운 뜻을 미루어 떨어지면 또 고쳐 만들지 않겠으며 수(壽)를 비는 정성을 다하여 싫증내지 않고 입겠습니까.


[주D-001]자기가 …… 주기[解衣] : 한신(韓信)이 말하기를, “한왕(漢王)이 입었던 옷을 풀어 나를 입혀 주었다.” 하였다.
[주D-002]떨어지면 …… 않겠으며 : 《시경》에, “검정 옷이 알맞음이여, 떨어지면 내가 또 고쳐 지으리라.” 하였다. 검정 옷은 경대부(卿大夫)의 옷이다. 정(鄭) 나라 환공(桓公)ㆍ무공(武公)이 주(周)의 경(卿)이 되어 직무를 잘하므로 칭찬하여 지은 시다.


동문선 제40권   
 
 
 표전(表箋)
 
 
홍건적을 평정한 후 진정하는 글[平紅巾賊後陳情表]
 

이색(李穡)

신은 들으니, 아랫사람을 어거하는 도는 제 할말을 숨김없이 다 하게 하는데 있고, 윗어른을 섬기는 의(義)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하는 것이니, 정의가 이로써 서로 진실하고 덕택에 따라서 널리 입혀진다 합니다. 예로부터 이러하거늘, 하물며 밝은 시대에 무엇을 의심하오리까. 감히 그칠 줄 모르는 요구로써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타고난 자질이 천박하고 천성이 우매하나, 천년의 풍운(風雲)은 일찍 창성한 세대에 은혜를 받았고, 한 구석의 산해(山海)에서 달갑게 여생을 은총 속에 보냅니다. 아무 것도 보답할 길이 없고, 오직 조공하는 직책에나 힘쓸 따름이더니, 도적의 난리를 만나서 이윽고 조정과 막힐 줄을 어찌 뜻이나 하였겠습니까. 전번에는 평양(平壤)에서 만연(蔓延)되고, 후에는 개성(開城)에까지 불난리가 미치매, 교전(交戰)할 적마다 약함을 보게 되니, 진실로 꾀가 많아서 그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발꿈치를 돌이키지 않고 에워 쳐서, 마침내 한 척의 수레도 돌려보내지 않았으니, 남쪽으로 옮기는 곤난을 피하지 아니한 것은 대개 동쪽을 돌아보시는 근심을 덜어드리려는 뜻이었습니다. 과연 천총(天聰)에 들리어, 보내주신 사신을 만나보게 되니, 은혜를 입음이 지극하여 분수를 생각하면 어찌 감당하오리까. 하물며 이 척촌(尺寸)의 미미한 수고가 어찌 정종(鼎鍾)의 현각(顯刻)에 참여하오리까마는, 먼 곳 백성들의 적개심도 취할 만한 것이 간혹 있으니, 밝은 세대로써 공을 보답함에 있어서는 비록 지극히 미미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므로, 제 몸을 돌아보아 주저하고, 명령을 기다리며 황송할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께서 멀리 내다보시는 밝음을 미루어주시고, 온 누리를 감싸는 도량을 여시며, 구중(九重)의 독단(獨斷)을 내리시고, 만리의 고충(孤忠)을 살피시어, 덕음(德音)을 내려서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게 하고, 공적을 보여서 사관의 기록에 전하게 하여 주시면 오늘만 빛날 뿐 아니라, 후세에 보이게 될 것이며, 신은 삼가 칠덕(七德)의 노래를 권장하여 기봉(箕封)의 안도(按堵)한 기풍을 넓히고, 만년의 수를 빌며 순전(舜殿)의 수의(垂衣)하는 덕화를 받들겠습니다.


[주D-001]칠덕(七德) : 《좌전(左傳)》 선공(宣公) 11년에, “무릇 무(武)란 것은 금포(禁暴)ㆍ집병(?兵)ㆍ보대(保大)ㆍ정공(定功)ㆍ안민(安民)ㆍ화중(和衆)ㆍ풍재(?財)를 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고, 그 주에, “이것을 무(武)의 칠덕(七德)이라 한다.” 하였다.
 
 
 동문선 제40권   
 
 
 표전(表箋)
 
 
진정하는 글[陳情表]
 

신은 아룁니다. 7월 13일에 배신(陪臣) 강인유(姜仁裕) 등이 돌아와서 선유(宣諭)하신 성지(聖旨) 한 통을 전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이미 상국(上國)을 정탐할 의향을 가지고 있으니, 관원 수재(秀才) 2ㆍ3백 명과 화자(火者 환관〈宦官〉) 5ㆍ6백 명을 이곳에 들여보내라.” 하셨사기로, 신은 놀랍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문득 소회를 아뢰는 것입니다. 성인의 훈계가 크게 선포되매 깊이를 측량할 수 없고, 하늘같은 위엄을 지척에 뵈옵는 듯이 너무도 노하셨기로, 이에 미미한 정성을 피력하여 우러러 총청(聰聽)을 번거롭게 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우매하여 배우지 못하고, 고루하여 아는 것도 없으나, 다행히 민이(民?)와 물칙(物則)이 아주 사라지지 아니하여, 천명(天命)과 인심의 소재를 알고 있기로, 인의(仁義)를 사모하여 이미 폐백을 바치고 신하가 되었거늘, 무슨 마음으로 간사함을 품어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오직 소국이 동떨어져 궁벽한 구석에 있기로 옛날부터 풍기(風氣)가 국한되어, 문장은 겨우 자기의 의사를 표시할 정도요, 언어는 반드시 역관이 있어야 통하게 되므로, 책을 끼고 당에 오를 6ㆍ7명의 아이쯤은 항상 보내고 싶었지만, 경(經)을 밝히고 율(律)을 익힐 2ㆍ3백 명의 유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하물며, “정탐[窺?]의 본이 된다.”고 하시는데, 어찌 감히 모집해 보내라는 명령에 응하겠습니까. 아울러, 부르신 환자(宦者)와 이미 윤허하신 생원(生員)에 있어서도, 한편으로는 혐의도 피해야 되고, 또 한편으로는 마땅히 조명(詔命)을 준수해야 하므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처지에 놓여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뇌정(雷霆)의 위엄을 거두시고, 천지와 같은 도량을 열으시어, 신의 예도를 다하려 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예도인지 알지 못함을 어여삐 여기시고, 신의 충성을 다하려 하오나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인지 알지 못함을 살피시와, 어려운 것을 책망하지 마시고, 그 소원을 좇아 주시면 신은 삼가 번방(藩邦)의 임무를 더욱 신중히 하고, 길이 성교(聲敎)의 동점(東漸)을 생각하여, 아름답게 만년을 두고 성인의 수를 빌겠습니다.


 
동문선 제40권   
 
 
 표전(表箋)
 
 
우(又)
 

신은 아룁니다. 7월 14일에 배신 강인유(姜仁裕) 등이 돌아와서 선유하신 성지(聖旨)를 받은 바, 성은(聖恩)이 망극하여 선박 엎어진 일에 대한 염려를 보이셨습니다. 유시가 진지하고 회유(懷柔)가 흡족하여, 혜택과 위엄이 아울러 나타났으니, 감격과 부끄러움이 서로 어울립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소국은 중국을 존대할 줄 알아서, 어린아이가 반드시 그 부모를 얻으려는 것과 같이 하며, 성인(聖人)이 계시면 의귀(依歸)하려고 합니다. 신같은 것은 전조(前朝)의 상란(喪亂)한 여생으로, 밝은 세대의 분봉(分封)하는 명을 처음으로 받았으니, 스스로 다행함은 실로 금고(今古)에 없는 바이니, 비록 죽어도 변함없다는 것은 오직 신명에게 대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명이 험란하여 움직이면 문득 비방만 생깁니다.
두 내시(內侍)가 침상(寢牀)을 맞대고 같이 자는데, 어떻게 짐살(?殺 짐〈?〉은 독조〈毒鳥〉로 그 깃을 술에 담가 먹으면 죽는다) 하겠습니까. 늙은 원사(院使)가 배를 함께 타고 서로 싸우다, 마침내 화가 미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무위(武衛)는 국가의 상도이거늘, 공순하지 못하게 조서를 맞이하는 것이라 여기고 빈관(賓館)에서 무기를 가질 이치가 없거늘, 손님 대접하는 자가 방비가 있다고 무고하였습니다. 저 망해버린 원(元)의 유족과 납씨(納氏)의 이웃들은 이미 교통을 끊었는데, 오히려 호의를 맺어 동화(東化)와 혼인을 하고, 북평과 왕래한다고 하며 조회에 부지런한 것으로써 간활한 정탐이라 이르고, 의심스러움을 인연하여 근사하게 꾸며대며, 화(禍)를 전가시켜 위태롭게 하려드니, 오직 성감(聖鑑)의 소명(昭明)으로 모든 신하의 곡직을 통찰하시고, 특별히 예훈(睿訓)을 반포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새롭게 하여 주시고, 또 미미한 아룀에 있어서도 모두 윤허하여 주시고, 아악(雅樂)을 내려 정음(正音)으로써 인도해 주시며, 자제가 국학에 들어가면 조치해 주심이 자상하고 심원(深遠)하며, 풍파에 목숨을 잃게 되면 부조를 후히 보내시고, 본국 사신에게 칙명하여 다시 평탄한 길을 이용하게 하여 주시니, 이는 대개 강건(剛健)하시고 정수(精粹)하시며, 영명(英明)하시고 과감하시며, 안으로 자상하고 밖으로 간략하여 벼리를 들면 눈이 따라서 벌어지고, 큰 나라를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를 안아들여, 형벌은 맑고 정사는 엄숙하여, 드디어 고루한 자질로 경광(耿光)을 얻어 보게 하시니, 신이 감히 성인의 모훈(謨訓)을 패복(佩服)하고, 넓은 은혜에 젖어 거의 신하의 절개에 이지러짐이 없게 하며, 항상 황제를 위하여 축수를 올리지 아니겠습니까.

동문선 제40권   
 
 
 표전(表箋)
 
 
우(又)
 

신 아무는 아룁니다. 신은 생겨나서 열살 때에 신의 아비 신 아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매 조모 홍씨(洪氏)가 곧 신을 명하여, “상차(喪次)에 거처하며 상주 노릇을 하라.”하므로, 신은 다만 애통할 줄만 알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여러 신하가 조모의 명령을 받들어, 신에게 임시 국사를 처결할 것을 청하므로 신은 비록 회피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였으며, 여러 신하가 표문(表文)을 갖추어 신에게 서명(署名)하기를 청하여, 천자께 들어가 아뢰고 선신(先臣)의 시호와 아울러 신의 작명(爵命)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인데, 세월이 오래 흘렀으나 지금까지 밝은 은강(恩降)을 입지 못하였으니, 신이 비록 우매하나 어찌 송구하지 아니하리까. 제 마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죽은 아비는 능히 천명(天命)의 돌아가는 바를 짐작하고 나라를 가지고 내부(內附)하였으나, 타고난 수명이 길지 못하여 문득 세상을 떠났으며, 적신(賊臣) 김의(金義)가 사신(使臣)을 죽이고 북방으로 달아나고, 조모는 이미 늙고 신마저 나이 어리니, 곤난이 많다 해도 이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신성하신 천자께서 보전해 주시는 혜택을 힘입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부지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표를 올리고 멀리 바라보며, 날마다 덕음(德音)이 내리시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배신 심덕부(沈德符)가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매, 공경히 성지(聖旨)를 받들고 엎드려 읽으매 땀이 흐르며, 넓은 천지에 용납한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모 홍씨가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 손자가 나이 어리니 능히 사리를 분별하여 아뢸 수 없고, 여러 신하도 자기들이 직접 주달하기 어려우니, 내가 마땅히 표를 올려 낱낱이 아뢰야겠다.” 하고, 바로 곧 배신 중대광 문하찬성사(重大匡門下贊成事) 이무방(李茂芳)과, 광정대부 문하평리(匡靖大夫門下評理) 배언(裵彦) 등을 특별히 선정하여, 조모의 표(表)를 싸들고 아울러 금(金) 31근 4냥, 은(銀) 1천 냥, 백세포(白細布) 5백 필, 흑세포(黑細布) 5백 필, 잡색마(雜色馬) 2백 필을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선신(先臣)의 내부(內附)한 공을 생각하시고 조모의 궁박한 정상을 살피시어, 선신의 시호를 내리시고, 신에게 습작(襲爵)할 것을 명령하시며, 해마다 조공바치는 물품에 있어서도, 또한 소국이 일정한 수효에 구애하지 않고 힘대로 마련하여 바치도록 용허하여 주시면, 선신은 지하(地下)에서 웃음을 머금을 것이며, 우리 자손에게 계시하여, 대대로 성조(聖朝)의 번신이 되게 하리니, 신의 지극한 소원이요 지극한 경행(慶幸)입니다. 하감하시어 받아들여 주소서. 신 모(某)는 송구함을 이기지 못하며 삼가 표문을 받들어 진술하여 드리 나이다.

 
 동문선 제40권   
 
 
 표전(表箋)
 
 
왕대비 진정표(王大妃陳情表)
 

아룁니다. 첩(妾)은 그윽이 듣자오니 예로부터 제왕이 임어(臨御)하면, 바다 안팎에 있는 만국 백성들은 모두 신하와 첩이 된다고 합니다. 사내는 신하가 되고 계집은 첩이 되매, 그 종류는 비록 다르지만 그 성질은 같으며, 그 형세는 비록 소원하지만 그 정은 친한 까닭으로 말하기를,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자기 임무를 다할 바를 얻지 못하면, 임금이 그 공을 이룩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첩은 사세가 급박하여 하늘밖에 부를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곧 하늘과 같으시어, 듣고 보시는 것도 우리 백성으로 하시므로, 하늘이 말씀하지 않는 것을 폐하께서 대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때문에 첩이 천위(天威)를 저촉하면서 소회를 남김없이 아뢰는 것입니다.
첩이 태어나서 16세에 선신(先臣) 왕모(王某)를 섬겨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모(某), 차자는 모였고, 모의 아들로 모모가 차례로 위(位)를 승습(承襲)하였으나, 일찍 죽어 아들도 없고 모가 최후로 들어서서 첩을 섬겨 효도가 극진함은 온 국민이 다 아는 바이며, 천지도 실상 굽어보는 바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게 되매, 모는 능히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것을 알고 즐겁게 내부(內附)하였으니, 폐하께서도 역시 그 충성을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불행히 단명하여 갑자기 죽은 것이 의심을 사게 되고, 전하는 말이 진실성을 잃어 천총(天聰)에 들렸으니, 폐하께서 노하심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남의 의심을 사게 된 것이고, 다른 까닭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사신을 죽인 역적 김의(金義)는 도망가던 도중에서 모(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곧 간사한 계교를 내어 심왕(藩王)을 세워 임금으로 삼을 양으로, 호지(胡地)로 도망해 들어가서 지금까지 감히 본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본국이 간여하지 않는 것도 또한 분명할 것입니다. 첩은 또 들으니,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성인의 큰 정사이다.” 하는데, 하물며 나라가 멸망하지는 않았고, 대가 끊어지지도 않은 것이 아닙니까. 지금 모가 모의 유고(遺孤) 모로써 국사를 임시 처결하게 하고, 표를 올려 시호를 내려주실 것과 작위를 승습하게 해 주실 것을 간청한 것이 이미 해가 지났기로, 첩은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늙고 젊음을 막론하고 밤낮으로 우러러 바라며, 덕음(德音)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아직도 내려주지 아니하십니다. 폐하께서는 천지와 같은데, 천지 사이에 만물은 무럭무럭 발육되어 각기 그 본성을 발휘하는데, 유독 소국은 왕화(王化)에 젖지 못하니, 첩은 실로 통탄해 마지 않습니다.
또 소국의 해안(海岸)이 왜국과 인접하여 날로 더불어 적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집정자(執政者)들이 다 장수(將帥)가 되어 밖으로 가고, 안에 남아 있는 자는 적은데, 게다가 반수를 뽑아서 조정에 들여보낸다면 너무 허소(虛疏)하여 혹시 왜적이 횡행할까 염려이니, 그리 되면 어찌 소국의 불행이 아니며, 조정의 염려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소국이 토지가 박하여 금은이 나지 않는 것은 중국이 아는 바이며, 말[馬]은 두 종류로써 호마(胡馬)는 북방에서 온 것이요, 향마(鄕馬)는 국내의 소산이온데, 국마(國馬)로 노새[驢]같은 것은 좋은 것을 얻을 길이 없고, 호마도 백에 하나둘 정도라는 것은 역시 중국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요즘에는 왜적으로 인하여 손상되어 거의 다 없어졌으며, 필육도 비록 국내에서 소산되나 만필(萬匹)에 달하는 수효는 진실로 충당하기 어려운 형편이며, 요동(遼東)의 유리된 민호(民戶)는 현재 방(榜)을 내걸고 초집(招集)하는 중입니다. 첩은 젊어서부터, 일찍이 함부로 말한 적이 없었는데, 하물며 감히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첩은 대덕(大德) 무술년(戊戌年)에 나서 지금 나이 82세이니, 머지 않은 시일에 당연히 성대(盛大)를 하직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죽은 아이의 지성으로 왕화(王化)에 복종하던 미행(美行)이 민멸(泯滅)되어 드러나지 못하고,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손자가 세상에 설 수 없음을 참아 못 보겠기로, 예법을 범하고 심복을 피력하여 폐하의 한 번 깨우치심을 바라니, 폐하께서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시어, 선왕의 시호를 주시고 세작(世爵)의 명령을 내리시며, 세공(歲貢)의 조서를 정돈하여, 소국으로 하여금 그 편의(便宜)를 도모하여, 철에 따라 토산물을 바치고 길이길이 신용을 지키게 하여 주시면, 첩은 마땅히 안심하고 명(命)대로 살다 죽을 것이며, 죽은 아이도 또한 마땅히 지하에서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첩이 하나의 부녀자로서 두 아들과 세 손자의 봉양을 누리고 있으면서, 일조에 급하고 어려움을 당하여, 능히 성명(聖明)의 세대에 자상히 아뢰지 않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선왕을 지하에서 보겠습니까. 지금 사람이 10금(金)의 재산만 지녀도 오히려 자손에게 물려주어 손실됨이 없게 하려 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하물며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정이겠습니까. 첩은 표를 올림에 다다라 눈물을 흘리며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동문선 제41권   
 
 
 표전(表箋)
 
 
청자제입학표(請子弟入學表)
 

이색(李穡)

타고난 이성(彛性)이 덕을 좋아함은 고금(古今)이나 지우(智愚)가 다름이 없고, 야만이 문명으로 변함은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를 습득함에 있나니, 진실로 누속(陋俗)으로 인하여 과매(寡昧)하게 될진대, 어찌 학업을 닦아 제때에 미치도록 하는 것만 같으오리까. 그러므로 우리 동방은, 비로소 한(漢)나라에 복종하매, 자제를 보내어 고협(??)으로 입학하였고, 당(唐)ㆍ송(宋)에 내려와서는 연서(聯書)를 하여 족히 상고할 수 있사오니, 어찌 한갓 중국을 존숭하는 마음만이었겠사옵니까. 또한 족히 태평을 아름답게꾸미는[賁飾] 기구(器具)가 되는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신무(神武)로 천하를 안정하시고 문덕(文德)으로 먼 사람을 오게 하시며, 경사(經史)를 반포하시와 학의 규정은 여기에 나타났고, 법복(法服)과 아악(雅樂)을 주시와 제사하는 일도 한결같이 새롭게 되었사온데 오직 습속이 경박함으로 인하여, 깊이 유풍(儒風)의 황폐함을 염려하옵니다. 부화(浮華)한 문장의 말기(末技)도 그 능한 자를 보기 드문데, 성현의 의리의 종지(宗旨)를 바르게 알 자가 뉘 있겠습니까. 마땅히 노(魯)나라를 변할 것을 기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먼저 주(周)나라를 보아야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향화(響化 덕화에 추향한다는 말임)하는 정성을 어여삐 여기시고, 신의 사랑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뜻을 양찰하시와, 특히 명조(明詔)를 내리시고 빛나게 유음(兪音)을 내시와 호향(互鄕)의 동자(童子)들로 하여금, 우상(虞庠 학교)의 주자(?子)와 함께 배우게 하여 주시오면 신은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어 길이 기자(箕子)의 봉역(封域)을 편안히 하고, 충성을 다하여 더욱 화봉인(華封人 요임금이 화봉을 시찰할 때 화봉 사람이 요를 위하여 수(壽)ㆍ부(富)ㆍ다남(多男)을 빌었다) 의 축수를 올리겠사옵니다.


[주D-001]고협(??) : 북을 쳐서 선비를 모으고 책상자를 끌러서 책을 펴놓게 하는 것이다. 《예기》〈학기(學記)〉에, “학궁에 들어와 고협(??)을 한다.” 하였다.

 

 동문선 제41권   
 
 
 표전(表箋)
 
 
청승습표(請承襲表)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사 널리 만물을 살리는 인(仁)을 베푸시옵기로 하정(下情)이 가슴속에 감동되옵니다. 분모(分茅)의 명(命)을 바라오며, 오늘의 부르심을 당하니, 더욱 송구한 마음 간절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 모(某)는 어렸을 적부터, 비색한 운수를 만나, 서성대며 자기 그림자를 대할 적마다 우애하는 형과 공순하는 아우가 없음이 한스러웠고, 조심하는 마음을 지녀 아비가 시작하면 거의 자식이 계승하는 전통을 무너뜨림이 없게 하려 하옵니다. 그러므로 두 번이나 습작(襲爵)의 청을 아뢰어 향화(嚮化)의 정성을 바쳤사옵니다. 처음부터 이제까지 더욱 부지런하고 게으름이 없는데, 세월은 이미 7년이 지났으나, 사신은 한 사람도 온 이가 없었사옵니다. 우러러 바람은 한이 없어, 표로써 아뢰오며, 간원하는 이 심정은 신령이 다 짐작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폐하는 선신(先臣)의 귀부(歸附)하신 처음 일을 기억하시고 소국의 위의(危疑)에 싸인 오늘의 입장을 민망히 여기시와 지난 것을 책하지 마시고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을 허하시고,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와 기구(箕?) 의 업을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은 삼가 덕으로써 배가 불렀사오니 청사(靑社)의 군생(群生)을 보호하고 잘 끝마치기를 생각하여 화봉(華封)의 축수(祝壽)를 올리옵니다.


[주D-001]분모(分茅) : 잔디와 흙을 나누어 준다는 말이다. 옛날 천자(天子)가 제후를 봉할 적에 모토(茅土)를 나누어 주어 땅을 봉하는 것을 표시하였다.
[주D-002]기구(箕?) : 세업(世業)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활을 잘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키[箕]를 잘 만들게 되고, 야장(冶匠)의 아들은 갖옷을 잘 만든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동문선 제41권   
 
 
 표전(表箋)
 
 
청개명표(請改名表)
 

물(物)을 명(命)함은 같은 종류로써 하오며 마땅히 스스로 겸손하는 것보다 더함이 없사온데, 이름이 조정에 들렸사옵거늘 감히 까닭없이 고치기를 청하겠사옵니까. 그러므로 아뢰옴에 당하여, 더욱 송구한 마음 간절하옵니다. 적이 생각하옵건대, 소국의 풍속이 으레 그 옛을 인습하는 것은, 대개 세황(世皇)의 조서에, “처음을 변치 말라.” 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어니와, 신의 이름을 기(祺)라 하여 대국에 봉습됨으로부터 크게는 관청의 문안과 작게는 향리의 서사(書詞)에 있어, 무릇 글자 된 것이 보일 시(示) 변에 그 기(其)자를 붙였는데, 그 기(其)자가 음이 서로 같고 모양도 서로 근사하다 해서 모두 다 휘피(諱避)하며, 이렇게 함이 떳떳한 것이라 이르옵니다. 신은 오랜 후에야 일에 구애됨이 많음을 알았사오나, 뭇 사람의 뜻을 무시할 수는 없사옵고, 오직 자신이 고치는 것이 편할 따름이옵니다. 신의 증조부 충렬왕의 휘(諱)는 심(諶)이었는데 거(?)로 고쳤고, 조부 충선왕의 휘는 원(源)이었는데 장(璋)으로 고쳤으니, 그 유래를 상고하오면 모두 이런 까닭이 있기에 신도 지금 전(?)으로 이름을 고치려 하온즉 행여 총청(聰聽)을 기울여, 마음대로 고치게 하여 주시오면 신은 삼가 한결같은 절개로 동방을 다스려 시종을 입양(立揚 입신양명의 준말)할 것이오며 북궐(北闕)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생성(生成)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맹서하겠사옵니다.

 
 
 동문선 제41권   
 
 
 표전(表箋)
 
 
청관복표(請冠服表)
 

예를 논의하고 법을 제정하여 크게 화하(華夏) 중의 문명을 열고, 의리를 사모하고 풍화에 추향하여 거의 요황(要荒 궁벽한 땅)의 고루(孤陋)를 변하고자 하므로, 감히 어리석은 소회를 피력하여, 총문(聰聞)을 모독하옵니다. 그윽이 성인(聖人)의 흥기함을 보오면 반드시 그 시대의 법이 있어 상의(上衣)ㆍ하상(下裳)의 제작은 대개 천지의 형상을 취하였고, 은호(殷? 은나라 때의 모자의 이름)ㆍ주면(周冕 주나라 때의 모자의 이름)의 이름은 다 때에 따라 더하고 덜해서, 이목의 습관을 새롭게 하고 풍속의 동일함을 이루었사옵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신무(神武)의 자질을 지니시고 아름다움을 누리는 운을 맞추어, 문(文)과 물(物)이 구비함은 삼대의 융성(隆成)을 넘나고, 덕과 교화는 거룩하여 사방에 널리 미쳤사오며, 비록 소국에 대하는 본래의 습속을 따르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이미 제복을 내려주심이 배신(陪臣)에게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그 나머지도 그대로 옛것만을 인습할 수 있사옵니까. 성세(盛世)의 법전에 있어서는 진실로 다른 관계가 없겠사오나, 다만 먼 사람의 마음은 심히 볼 만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소국으로써 대국을 섬기는 뜻을 어여삐 여기시고 신의 문명을 이용하여 이속(夷俗)을 고치려는 것을 허락하시와, 드디어 윤음(綸音)을 내리어, 화제(華製)를 따르게 하여 주시오면, 신은 마땅히 시종을 한결같이 하여 더욱 보곤(補袞)의 정성을 다하며, 억만 년을 길이 수의(垂衣 웟사람이 덕으로 다스림을 말함)의 다스림을 받겠사옵니다.

 

 


동문선 제41권   
 
 
 표전(表箋)
 
 
본직을 사면하고 예경 절차의 상고를 끝맺게 하여 주기를 청하다[請辭免本職終考禮經節次箋]
 

권근(權近)

예전에 신의 좌주(座主 선생과 같은 말임) 한산(韓山) 이색(李穡)이 일찍이 신더러 이르기를, “육경(六經)이 모두 진(秦)나라 세상에 불탔는데 그 중 예기(禮記)가 가장 많이 산일(散逸)되어, 한(漢)나라 선비들이 불에 타다 남은 조각을 주워 모아 책을 엮으면서 얻은 것의 선후에 따라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착란(錯亂)하여 차서가 없고, 정자(程子)ㆍ주자(朱子)는 「대학」한 편을 표해 내어 서차(序次)를 고정(考定)하였을 뿐이며, 그 나머지는 미처 손을 대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부문(部門)을 나누어 종류대로 모아 따로 한 책을 만들려고 하나 아직 성취를 못하였으니, 너는 아무쪼록 힘써 하라.” 하셨습니다. 신은 그 지시를 받아 매양 절차를 편성하려 하였사오나 벼슬 직무에 매어 또한 능히 이루지 못하였사옵고, 전조 때에 죄를 얻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다행히 태상왕(太上王) 전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인덕을 입사와 성명을 보존하여 향리에 편안히 있게 되오니, 신미년 봄으로부터 임신년 가을까지 수백 개월 사이에 비로소 이 경을 연구하게 되어, 편목에 따라 종류를 서열하여 원고를 작성하였사오나, 본경의 문자가 너무도 호번하여 다 기록하기에는 애로가 많으므로 오직 구절마다 머리와 끝의 두어 자를 들어서, “아무 구절로부터 아무 구절에 그친다. 아무 것은 아무 구절 아래 있었는데, 지금 마땅히 아무 데에 있어야 한다.” 하였고, 이따금 또 억견(臆見)의 설을 들어 그 아래에 부주(附注)하였을 따름입니다. 장차 본경의 정문(正文)을 다 쓰고 다음으로 진(陳)씨의 집설(輯設)을 쓴 연후에 억견의 설을 붙여 써서 한 책을 이루려고 하옵는데, 이 어찌 수 개월 동안에 한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므로 당시에 탈고를 못하고 남은 세월을 기다려서 완성하기를 바랐던 것이 었습니다. 개국(開國) 초기에 불러 쓰심을 입었사옵고, 전하께오서 대통을 계승하시매 또 아무런 공이 없는 저 같은 것을 훈신(勳臣)의 반열에 참예하게 하시와, 지위가 재상에 이르고 두 번째 동맹(同盟)의 영광을 주시니, 감사함이 하늘까지 사무치며 몸이 분가루가 되어도 보답하기 어렵사옵니다. 오직 생각하옵건대, 신 근(近)은 체질이 본래 병이 많사와 왕왕이 발작하였는데, 지금은 그 징조가 더욱 심하와, 사지가 나른하고 머리와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하여 잘 잊어버리고 귀가 먹어 들리지 아니하여 직무를 받들기 어려우며, 술자(術者)가 또 말하기를, “을유년으로부터 정해, 무자 수년 간은 다 액운(厄運)이니 거의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 하옵니다. 그 말이 비록 족히 믿을 것은 못 되오나, 신의 병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역시 짐작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신이 이 책을 비로소 편집함으로부터 지금 10년이 넘었사오나 아직 완성을 못하였으니, 신이 하루아침에 병이 더하여 서산에 지는 해와 같이 갑자기 성대(盛大)를 여의게 되오면, 신은 스승의 부탁을 지하에서 길이 저버리게 될 것이오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오리까. 더구나 신은 천박한 지식으로 오랫동안 조정에 있었으나 조금도 보익됨이 없었사오니 만약 신의 직(職)이 해임되고 아울러 세무(世務)가 제거되어 전심전력으로 이 책을 완성한다면, 비록 광망(狂妄)하고 참람(僭濫)한 죄는 벗어날 수 없사오나 후학에게는 반드시 보익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전하는 신의 쇠한 병을 가련히 여기시고 신의 지원(志願)을 양찰하시와 직무를 면하고, 한가한 곳에서 복약(服藥)하면서 틈틈이 다시 정력을 가하여 그 공을 마치게 하여 주시고, 특히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종이와 글씨 쓸 사람을 마련하여 전질(全帙)을 늑성(勒(成)하여 인쇄 발간하게 하여 주시오면 신의 저술은 비록 족히 보잘것 없사오나 후진의 선비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흥기하여, 경적(經籍)을 정돈[發揮]하여서 성조(盛朝)의 문치(文治)를 숭상하는 정책을 빛내게 할 것이옵니다. 신은 구구(區區)의 뜻을 이기지 못하오며 황공히 머리를 조아리옵니다.

 

동문선 제42권   
 
 
 표전(表箋)
 
 
사좌대언 전(辭左代言箋)
 

이색(李穡)

신은 아뢰옵니다. 직에 헌신한 이래로 보익한 일이 없사옵고 한갓 성명(聖明)을 더럽혔사옵기로 본직을 해면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밝은 임금은 정성을 미루어 선비를 대우하므로 은혜를 보이는 것만을 전용하지 아니하옵거늘, 충신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오므로 어찌 총애를 굳혀서야 되겠사옵니까. 감히 진정을 아뢰어 존엄을 모독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천성이 우매하옵고, 마음씀이 편협하오며, 줄이 좋아 빨리 존귀해졌으므로 평소에 물의를 많이 들었사옵고, 행동이 법도가 없어 모두들 청반(淸班)의 흠이라고 지적하오니, 한산한 곳에 몸을 둠이 분에 합당하온데 영광이 무리를 넘었사옵니다. 이는 대개 넓으신 도량으로 결점을 숨겨주시고, 거룩하신 은혜가 대로 미치어, 신의 아비가 성상의 직위(?位)하시기 전에 위질(委質)한 것을 어여삐 여기시고, 신의 이름이 처음 실시하는 과거에 오른 것을 아시와 차서를 무시하고 뽑아 올리시고, 유윤(惟允)의 직에 거하게 하신 것이온데, 신이 이미 가한 것은 드리고 그른 것은 대체하지 못하였사오며, 더구나 기미(幾微)를 막고 시초를 단속한 무슨 공이 있사옵니까. 일에 임하오면 뜻을 바로하기 때문에 도리어 뇌정(雷霆)의 노(怒)하심을 격동하였사오며 몸둘 곳을 생각하오면 천지의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울 것 같사오니, 이는 다 복이 지나쳐 하가 생긴 것이오라, 정히 명예를 이루었으므로 몸이 물러감이 합당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불초한 현상을 용서하시고 신의 그칠 줄 아는 마음을 가긍히 여기시와, 유음(兪音)을 내리어 어리석은 포부를 이루게 하여 주시오면, 신은 한가하게 나아가 살면서 더욱 학업을 넓히는 것이 바로 소원이오며, 지휘를 받들어 문사(文詞)를 진달하는 것은 많은 사양을 아니하겠사옵니다. 신은 감격하고 황송함을 누를 길 없사옵니다.


[주D-001]위질(委質) : 몸을 맡김.
[주D-002]유윤(惟允) : 오직 옳게 한다는 말인데, 대언(代言)이라는 직무는 비서와 같은 것으로 임금의 명령을 옳게 인도하는 데에 있다.


동문선 제42권   
 
 
 표전(表箋)
 
 
사판문하 전(辭判門下箋)
 

신은 아뢰옵니다. 신은 사신으로 갔다가 비방을 들은 일로 직무를 해면하기를 청하였사온데, 성자(聖慈)가 윤허하지 아니하시니, 신은 부끄러워 땀이 그치지 아니하와 두 번째 낮은 포부를 아뢰는 것이옵니다. 위에 계신 이는 혜택을 베풀기를 힘써 특별히 덕음(德音)을 내리었사오나, 속이 좁아 부끄러움을 간직하기 어려워 다시 간곡한 정성을 아뢰게 되오니 감격함이 부끄러움과 함께 모여들고 눈물이 말씀을 따라 흐르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위포(韋布) , 외로운 인생이옵고, 시서(詩書)의 만학(晩學)으로 그릇 태정(台鼎)에 참예하였으므로 항상 복속(覆?)의 기롱을 근심하옵고, 천정(天庭)에 조회하오니 마침내 사실이 아니라는 비방을 초래하였기로 반열(班列)들이 지목하여 비웃고 여항(閭港)이 떠들썩하오니, 색(穡)은 비록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도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겠사온데 어찌 감히 옷자락을 끌고 활보하여 몸소 경광(耿光)에 가까이 하겠사옵니까. 대개 신은 약속을 내렸으되 아래서 따르지 아니함은 신이 엄하지 못한 때문이옵고, 아래서 속이되 신이 알지 못함은 신의 불찰이오니, 살피지 못한 것은 어두운 탓이옵고 엄하지 못한 것은 유약한 까닭이라, 천하에 어찌 어둡고 유약한 자가 가히 하는 것이 있을 때를 당하여 모두 우러러보는 지위에 처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때문에 하루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남은 목숨을 애걸하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이 심정을 이해하시고 제 소원에 따라 주시오면 신은 녹야(祿野)에 한거하여 태평의 풍월(風月)을 읊조리고, 화봉(華封)을 본받아 군왕의 만수를 빌겠사옵니다.


[주D-001]위포(韋布) : 가죽과 베라는 말인데, 미천한 사람의 의복을 말한다.
 
 
 동문선 제49권   
 
 
 노포(露布)
 
 
총병관 중서평장사 정세운이 홍건적을 평정한 노포[摠兵官中書平章事鄭世雲平紅賊露布]
 

무명씨(無名氏)

임금께서 일찍이 세상을 건질 마음을 품으시와 널리 인재를 구하셔 삼가 장수의 임명을 받게 되매, 임금의 알아주심에 누가 될까 걱정하였다. 나는 듣건대, 흥하고 쇠하는 것은 기수(氣數)에 매였으므로 다스리고 어지러움이 그지없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요점으로 도적을 막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태왕(太王)이 빈(?) 땅을 버린 것은 능히 적(狄)의 괴롭힘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요, 명황(明皇)이 촉(蜀)땅에 거동한 것은 안록산(安祿山)의 침범을 막지 못한 것이다. 적미(赤眉) 를 쓸어없애고서야 유(劉)씨의 한(漢) 나라는 중흥이 되었고, 황건(黃巾) 을 파하고 나서야 조(曹)씨의 위(魏) 나라는 이어 받게 되었다. 모두 생각하면 시운(時運)인 것이요, 한갓 사람의 탓만은 아니다. 지난해 동지달에 죄악이 많은 억센 도적을 만났는데, 그의 독함을 말하면 승양이나 범으로도 같을 수가 없고, 그의 군대 진행하는 것을 보면 또한 손빈(孫?)이나 오기(吳起) 로도 막아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방자하여 지니 세상에서는 누구냐 하는 이도 없었다. 승전한 기세를 타서 몰아 들어와 이미 천하에 횡행하였고 멀리 제휴하여 바로 들어오기는 이내 우리 나라에 까지 기세를 떨쳤다. 성낸 기세를 당적할 수가 없어 소문만 들으면 모두 저절로 무너졌다. 백 만이나 되는 억센 군대는 어느덧 서울 안에 들어왔고 억조(億兆)의 이 나라 백성은 행길에서 떠돌았다.
가엾다.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빠졌고 하물며 임금이 멀리 파천하셨음이야 실로 장상들의 깊은 근심이었다. 그리하여 구름같이 모여드는 군대를 가지고 드디어 개미떼 같은 오랑캐를 쳐부수었다. 우리 군대는 병에 물 쏟아지듯 하는 세력이니, 적에게 달려들기 무엇이 어려우며 저 놈들은 쪼개지는 대쪽처럼 칼날 닿는 대로 문득 찢어졌다. 천하에서 억제하지 못하는 놈을 베어죽였다. 물고기가 솥 가운데에서 숨을 쉴 것이냐 토끼는 그물 밖으로 벗어나기 어려웠다. 전단(田單)의 일시적인 기묘한 방법은 본따를 것이 없고 제갈량(諸葛亮)의 팔진(八陣)이 스승될 만하였다. 눈 속에 성을 쳐들어가니 이소(李?)는 채주(蔡州)땅을 빼앗았고, 도망가지 못할 강물을 배후에다 두고 진을 쳤으니 한신(韓信)은 조(趙) 나라 성에 꽂힌 기(旗)를 뽑고야 말았다. 일은 비록 같지 않으나 이치는 진실로 합한 것이다. 지난번 기해년에 군사를 모집하여 일찍이 도둑놈을 조선에서 쓸어없애고 두 번이나 도적이 억세게 달려든 것을 이기고야 말았으니, 모두 신 등의 공적이 아니오, 이는 대개 전하(殿下)의 용맹과 지혜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며, 성스럽고 공명함이 날로 높아서 멀리 아름다운 바람을 퍼뜨리매 예(禮)와 풍악[樂]을 삼대(三代) 에 따른것이요, 크게 문덕(文德)을 펴 간우(干羽)의 춤을 뜰에서 추었다. 올빼미 같은 놈들은 순종하게 되고 견양(犬羊) 같은 놈들도 항복하였으니, 성인의 덕화에 관계되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또한 지극한 인애(仁愛)의 품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치의 자연함이요, 비운(否運)이 가면 태운(泰運)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는 중흥의 시기이며 실로 다시 시작되는 처음이다. 신들은 감히 매[鷹]처럼 날치는 용맹을 뽐내어 아침나절에 청명하게 되도록 하지 아니하리까. 기뻐 뛰는 정성을 펴서 행재(行在)를 우러러 바라지 아니하랴.


[주B-001]노포(露布) : 전쟁에 적병을 쳐서 승리하면 비단에다 글을 써서 간(竿)에다 달아 일반에 선포하는 것을 노포(露布)라 한다.
[주D-001]태왕이 …… 버린 것 : 주(周) 나라 태왕이 강성한 적(狄)의 침략을 당하여 힘으로 당할 수 없으므로 도성(都城)인 빈(?)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 갔다.
[주D-002]적미(赤眉) : 서한(西漢) 말기의 도적인데 군사들이 눈썹에 붉은 칠을 하였었다. 한(漢)을 중흥시킨 유수(劉秀)가 적미를 쳐부수었다.
[주D-003]황건(黃巾) : 동한(東漢)의 말기에 장각(張角)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사들이 모두 누런 수건을 썼다. 조조(曹操)가 황건을 부수었는데 뒤에 위(魏) 나라 임금이 되어 한(漢)을 대신하였다.
[주D-004]손빈(孫?)과 오기(吳起) : 전국(戰國) 시대에 군사를 잘 쓰던 명장(名將)이다.
[주D-005]전단(田單) …… 방법은 : 제(齊) 나라 장수 전단(田單)이 연(燕) 나라와 싸우면서 소[牛] 천 마리를 모아 몸에 붉은 비단을 입히고 뿔에는 칼을 매고 꼬리에는 갈대를 달고 기름을 치고는 불을 질러서 연나라 군중으로 달려가게 하여 칼 달린 뿔로 연나라 군사들을 찔렀다.
[주D-006]제갈량(諸葛亮) …… 스승될 : 어복포(魚復浦)에다 돌을 모아 팔진(八陣)을 만들어서 적병을 막은 일이 있다.
[주D-007]한신(韓信) …… 말았다 : 한(漢) 나라 장수 한신(韓信)이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군사 2천 명을 조의 성 근처에 매복하여 두고 싸움에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조의 군사들이 성을 비워두고 추격하였다. 그 틈에 매복했던 군사가 조의 성에 들어가서 조의 기(旗)를 뽑아버리고 나라의 기를 세워 두었더니 추격하러 나갔던 군사가 점령당한 줄 알고 놀래 요란하였다.
[주D-008]삼대(三代) : 하(夏)ㆍ는(殷)ㆍ주(周) 삼대(三代)가 고대에 가장 태평하고 문화가 빛났다 한다.


동문선 제49권   
 
 
 잠(箴)
 
 
자경잠(自儆箴)
 

이색(李穡)

50세 되던 가을 구월 초하루날에 자경잠(自儆箴)을 지어서, 아침 저녁으로 보아서 스스로 힘쓰려 한다.
가까운 듯하면 멀어지고 얻은 듯하면 잃어버린다. 멀어졌다가 때로는 가까워지고, 잃었다가 때로는 얻게 된다. 아득하여 착수할 데가 없기도 하고 밝아서 보이는 듯하기도 하다. 밝다가도 혹 어둡게 되고 어둡다가도 혹 밝게 된다. 그만 중지하려고 하여 보면 차마 그럴 수가 없고 힘써 하자하니 힘이 부족하다. 마땅히 스스로 책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여야 한다. 50세 때에 지나간 49세의 그름을 알게 되고 90세 때에 자경(自儆)하는 억시(抑詩)를 지었다. 이들은 옛날에 스스로 힘쓰던 분들이다. 오히려 숨 한번 쉬는 동안에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니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이는 이 어떤 자이냐.


[주D-001]49세의 …… 되고 : 춘추시대의 위(衛) 나라 거백옥(?伯玉)은 나이 오십이 되자 자기의 49년동안 그릇된 것을 알았다 한다.
[주D-002]억시(抑詩) : 《시경(詩經)》에 억편(抑篇)이 있다.

 

동문선 제49권   
 
 
 명(銘)
 
 
성재명 위 유시중작 탁(誠齋銘爲柳侍中作濯)
 

이색(李穡)

들어 앉았을 때에는 고요하고 전일하니 높직하여 태산의 안정됨 같고 움직여서는 쉬지 아니 하니 봄바람이 불어온 듯하다. 홀로 있을 때나 여러 사람 보는 데서나 한결같으니 왕도(王道) 천덕(天德)이로다. 일호(一毫)라도 딴 것이 있겠는가, 정성이 아니면 물(物)이 없는 것이다.

동문선 제49권   
 
 
 명(銘)
 
 
척약재 명 위김경지작(?若齋銘爲金敬之作)
 

상제(上帝)가 강림하신 듯 엄한 스승을 겁내듯 하여, 어데서나 밝으라. 범의 꼬리를 밟듯, 봄 어름 위에 건느듯, 살피기를 정(精)하라. 밝음이 아니면 어둡고 정(精)함이 아니면 혼잡하게 된다. 교만하고 인색한 것이 생기는 것은 버젓이 스스로 방자함에서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것은 속이면서 사는 것이다. 오직 경지 씨는 이것을 생각하여 척(?)자로 거처하는 집 이름을 만들었다. 주공(周公)의 효사(爻辭)요, 공자(孔子)의 단사(彖辭)다. 움직일 때나 휴식할 때에 항상 물이 가득한 쟁반을 받드는 것처럼 하라. 더구나 학문의 걱정은 중도에서 실패하는 것이니 마땅히 성취하려거든 벗[友]으로 인(仁)을 도우는 것이다. 충고하기가 급하므로 감히 이 명을 짓노라.

동문선 제49권   
 
 
 명(銘)
 
 
치당 명 위김경선작(致堂銘爲金敬先作)
 

부모의 초상에 애통을 극진히 하고 임금 섬기기는 몸을 바쳐야 한다. 두 가지를 번갈아 하여 충과 효가 함께 되느니라. 이것이 대절(大節)이니, 인륜(人倫)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비록 학문하지 않았을지라도 타고난 본바탕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 혹시 여기에 어그러짐이 있으면 사람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인되기를 바래서 그 본성을 되찾는 것이 귀한 것이다. 그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도(道)는 딴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세밀한 데서 조심하여 마침내는 중화(中和)를 이룩한다. 거룩하신 옛 사람들은 적선(積善)하는 집이 되라 하였다. 큰 열매가 여는 것은 성한 꽃이 있었던 것이다. 집 이름을 치(致)라고 지었으니 부지런히 힘써서 사특함이 없으리라. 벗의 도리는 서로 충고하는데 있나니 아름답게 여기고 권면(勸勉)하여 이렇게 노래를 짓노라.

 

동문선 제49권   
 
 
 명(銘)
 
 
삼여명 병서(三與銘幷序)
 

조계종의 등계(登?)한 안상인(安上人)이 삼여(三與)라 호(號)를 짓고 나에게 명(銘)을 청한다. 명(銘)에 이르기를, 갈대(蘆)를 꺾어서 타고 양(梁) 나라 강을 건너가서 위(魏) 나라에서 눈오는 밤에 면벽(面壁)하였다. 저 어떤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뜰에 섰는고, 문답하는 사이에 지극한 도(道)가 결정났네. 준다[與]는 말을 세 번 하니 우레 울고 번개치는 듯 마침내 아손(兒孫) 들로 하여금 바람 그치고 달을 꾸짖게 하였다. 나는 불도(佛徒)가 아닌데 감히 그대에게 무슨 말하랴.


[주D-001]삼여(三與) : 달마(達摩)에게 찾아온 혜가(惠可)가, “마음이 불안하니 안정시켜 주소서(與).” 하였다. 달마는 “불안한 마음을 내어서 바쳐라. 안정시켜 주리라(與).” 하니 혜가는 “마음을 찾아 보아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하였다. 달마는 “너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노라(與).” 하니 혜가는 문득 깨달았다.
[주D-002]아손(兒孫) : 달마의 후세제자(後世弟子)들을 말한 것이다.
 
 
 

 

 

 

동문선 제49권   
 
 
 명(銘)  이첨(李詹)
 
 
한산백 청심당 명(韓山伯淸心堂銘)
 

내가 허공을 보니 어느 때는 그늘이 끼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맑기도 하다. 사람의 가진 지각(知覺)은 어둔 때도 있고 밝은 때도 있다. 저 물욕이란 것이 하늘에 구름 생기듯 하니 깊이 살펴서 능히 쫓아버리기는 정성에 있다. 온갖 사특한 것은 없어지고 온갖 착함이 나게 된다. 내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노니 그 이름에 더럽힘이 없을지어다.


동문선 제50권   
 
 
 송(頌)
 
 
수명지송 병서(受命之頌幷序)
 

이색(李穡)


홍무(洪武) 18년 가을 7월 을해일에, 천자께서 정전에 나와 책봉을 발령하여 우리 권서국사(權署國事) 신 왕 아무를 세워 왕을 삼고, 우리 선왕에게 시호를 내려 공민(恭愍)이라 하였습니다. 9월 을해일에, 국자학록(國子學錄) 장보(張溥), 행인(行人) 단우(段祐)가 왕을 봉한 조서를 받들고 왔고, 병자일에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행인(行人) 낙영(?英)이 시책(諡冊)과 고명(誥命)을 받들고 왔는데, 이 글은 다 천자가 친히 지은 것이었습니다. 왕은 선왕의 받은 법복을 입으시고 신료(臣僚)를 거느리고 의장(儀仗)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 영접하여, 조서를 읽고 고명을 접하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를 불렀으며, 기묘일에 분황(焚黃)하고 종묘에 고유하되 모두 중국 조정에서 내려준 의주(儀注)와 같이 하였고, 경진일에 현릉(玄陵)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 신 임견미(林堅味) 신 이성림(李成林), 삼사좌사(三司左使) 신 흥방(興邦) 등이 왕에게 고하기를, “신 등이 불초하온데 선왕의 지나치게 써 주심을 입어 양부(兩府)에 대죄(待罪)하옵더니 천화(天禍)를 만나 선왕께서 문득 여러 신하를 버리시니, 여러 신하는 전하를 받들어 위(位)를 지킨 지가 12년이오라 천지에 용납을 못할 것 같은 심정으로 은명이 내리기만 바라오며 어찌 잠깐인들 잊었겠사옵니까. 이제 다행히 전하께서 위(位)를 바르게 하시고, 선왕께서 시호를 받으시와 종사가 안정하고 실가(室家)가 서로 치하하게 되었사오니, 실로 삼한의 재조(再造)이온바, 돌을 세워 공덕을 칭송(稱頌)하여 만세에 보이지 아니하면 천자의 은사를 빛나게 할 수 없사옵기로, 신 등은 오직 분부가 지연될까 두려워하오니 바라옵건데 신 이색(李穡)에게 글월을 만들게 하고, 신 아무에게 책(冊)을 쓰게 함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신 등은 삼가 체면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 하니,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옳다.” 하였습니다. 명년 정월 1일에 양부 재상(宰相)이 세사(歲事)를 왕륜사(王輪寺)의 영당(影堂)에서 고하였으니 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중 임공과 이공이 또 상의하기를, “수명송(受命頌)을 세우자면 이러한 기회가 없다.” 하고 바로 허락을 얻어, 드디어 신 색에게 명령하게 된 것입니다. 신 색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 신성대왕께서 22년에 명을 받으셨고, 그후 사왕(嗣王)이 명을 중국에서 받지 않으신 적이 없었으니, 소국을 사랑하는 은혜와 대국을 섬기는 예는 다른 번방(蕃邦)이 감히 따르려해도 못할 것입니다. 원나라 말엽에 당하여 선왕께서 깊이 기운(機運)을 관찰하시고 바다를 건너서 조공하였으니 하늘이 시킨 것이며, 지금 우리 전하께서 유지를 계승하여 정책을 바꾸지 아니하시고, 오랠수록 더욱 삼가시며 정성이 지극하여 위아래에 통하시니, 천자의 밝은 명령이 하늘로부터 내려, 우리 소국으로 하여금 의식은 본국의 습속을 따르게 하고, 법은 옛 헌장을 지키게 하여 사랑이 깊고 훈계도 깊사오며, 전하의 봉승(奉承)하시고 주선하신 바도 어찌 천위(天威)를 지척에 대한 것과 어김이 없을 뿐이겠사옵니까. 증상(蒸嘗)을 받들고, 조상을 제향하고, 신명(神明)을 제사하고, 국정(國政)을 부지런히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은 오직 천자의 보훈(寶訓)을 존중히 여기는 데 있을 따름이오니, 신 색이 감히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송을 지어 올리지 아니하오리까. 송은 다음과 같다.

오직 우리 동방이 / 惟我小東
대대로 중국 풍교를 사모하였네 / 世慕華風
오계로부터 원에까지 / 五季?元
황제 은혜 더욱 융숭했느니 / 帝眷益隆
선왕께서 이어 받으시자 / 先王承之
그때야말로 매우 험난했네 / 艱哉厥時
모두 다 북으로 옮기는데 / 時惟北徙
나만이 남으로 달리었네 / 我?南馳
아, 빛나도다, 대명이여 / 於赫大明
나의 정성을 살핀지라 / 察我之誠
오랫만에 사귐이 진실하여 / 久乃交孚
습작을 받게 하고 시호를 내렸구려 / 襲爵易名
사연도 엄하고 의도 깊어 / 辭嚴義深
황제의 마음에서 우러났네 / 流出帝心
전후를 통해 우뚝히 솟았으며 / 卓冠前後
이제만 빛날 뿐이 아니로세 / 不寧耀今
밝으신 황제의 훈계 / 帝訓炳然
쳐다보면 앞에 있네 / 瞻之在前
감히 안일을 일삼으리 / 無敢逸豫
하늘이 두렵지 않을건가 / 不畏于天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 畏天之威
직무에 충실하여 어김없으라 / 述職無違
정사에 근간하고 백성을 편케 하며 / 勤政安民
때에 순응하고 기미를 삼가하니 / 惟時惟幾
황제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 帝則歎嘉
이내 멀리 버리질 아니했네 / 乃不遐遺
위아래가 간격이 없어야 / 上下無間
우리 나라 길이 다스려지리 / 永又我家
혹시나 이에 어긋나면 / 或悖于玆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려우리 / 天難諶斯
무릇 위에 있는 분네 / 凡百在位
이 송의 사연을 생각할지어다 / 顧?頌辭

 

동문선 제51권   
 
 
 찬(贊)
 
 
김사공 진찬(金司空眞贊)
 

이색(李穡)

아름다운 자질(資質), 할아버지의 풍도를 따를 만하였고 넓은 아량은 경박한 세속을 진압할 만하였다.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 놀던 풍류를 사모하였고, 진평(陳平)의 관옥(冠玉) 같은 얼굴이 멀리 빛났다. 어떤 때는 하루 1천 잔을 마셔도 시달리지 아니하며 어떤 때는 종일토록 꿇어앉아 있으며 다투는 바가 없었다. 단물이 솟는 샘, 신령한 붉은 풀, 서기 어린 구름, 상서로운 별, 이것이 모두 세상에 드문 것이지만 공은 또한 상서로운 인간으로서 세상이 태평함을 나타낼 인물인 듯하도다.


동문선 제51권   
 
 
 찬(贊)
 
 
관물재 찬(觀物齋贊)
 

사물을 관찰함에는 방법이 있으니, 사물이 있으면 원칙이 있다. 나타난 현상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천근하여 그림의 채색과 같은 것이며, 원리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쳐서 이단(異端)의 허무함에 빠지게 된다. 또 그것을 두 가지로 분리하면 나의 천덕(天德)을 잃게 된다. 복희씨(伏羲氏)가 천지를 쳐다보며 굽어본 것을 따르며 순(舜)이 사물의 이치를 밝게 관찰하였음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나의 마음속의 태극(太極)을 찾아서 돌려올 수 있다. 자안(子安) 이씨(李氏)는 학문을 닦고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마당에 풀을 가꾸며 항아리에 고기를 길렀다. 그의 만족한 생활을 즐겁게 여기어 이렇게 서재(書齋)의 이름을 붙이고 반드시 이것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공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코끝이 희게 보이는 데부터 시작하라.

동문선 제51권   
 
 
 찬(贊)
 
 
의곡 청경 사자 찬(義谷淸卿四字贊)
 

서원(西原) 이씨(李氏)는 큰 종족이다. 대대로 훌륭한 이름을 남겼고 덕택이 흘러 내려오며 재주가 유전되어 의곡(義谷)에게 이르러서 공민왕(恭愍王)의 사랑을 받아서 벼슬이 2품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방직(邦直)이요, 자는 청경(淸卿)이다. 공민왕은 정치를 처결하신 여가로 글씨 쓰기를 좋아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신하인 방직은 내가 매우 그를 가상히 여긴다. 대대로 신하 노릇하던 대가(大家)이므로 특별히 그를 표창하는 마음 내가 어찌 남만 못하겠느냐.” 하시고 곧 의곡청경(義谷淸卿)의 네 글자를 크게 써서 그에게 내려주셨다. 공의 아들 삼사 좌윤(三司左尹)인 승도(承度)가 공의 말을 전하며 찬(贊)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신(臣) 색(穡)이 보옵건대 공민왕의 글씨는 심묘하심이 근대에 높히 뛰어나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바이며, 세신(世臣)을 예모로 대접하심은 뒤로 조종을 법삼으셨다. 이씨의 선대에 공승(公升)이란 분이 의종(毅宗)에게 크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었는데, 지금 그의 자손으로서 또 이와 같은 은총을 받았으니, 정말 이 집안은 따를 수 없는 일이옵니다. 백세(百世) 이후에 임금께서 쓰신 글씨를 받들고 그 영광을 대하면 당일에 직접 본 것과 같을 것이니 곧 승도(承度)의 여러 아들, 또 그의 자손은 그의 할아버지를 책 속에서 대면한 듯 할 것이며, 그들이 부모를 섬기며 임금을 섬기는데 있어서 충성과 효성스러운 마음이 날마다 솟아 올라서 조금도 줄어지지 않을 것이다. 공민왕께서는 인재의 양성을 권장하시며,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를 다하며 아들은 아들의 도를 다하며, 임금은 임금노릇을 신하는 신하노릇을 다하며, 영원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도를 내려주신 것이니 그 도가 어찌 더욱 빛나며 크지 아니하겠습니까. 신(臣) 색(穡)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를 위하여 찬(贊)을 지었습니다. 찬에 이르기를
곧음이여, 오직 맑으리로다. 오직 의(義)를 밝히리로다. 골짜기에 임한 듯 조심하옴은 군자의 바른 길이옵니다. 진실로 군자요 세신(世臣)의 후손이로다. 그의 선조를 잘 계승하였으니, 누가 그의 아름다움을 겨룰 수 있으랴. 공민왕의 마음씨는 옥[璧]과 같으며 금과 같으시다. 글씨로 나타내시어 지금까지 빛나도다. 어찌 이씨네 개인만 위함이랴. 사실은 온 세상을 격려하심이로다. 하물며 그의 자손으로서는 마땅히 임금의 뜻을 알아야할 것이다.

동문선 제51권   
 
 
 찬(贊)
 
 
판삼사사 최공 화상 찬 병서(判三司事崔公畵像贊 幷序 )
 

홍무(洪武) 12년 여름 4월 을축(乙丑)일에 중관(中官)이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를 “판삼사사(判三司事)인 최영(崔瑩)은 나의 아버지를 섬기는데 힘을 다하고 정의를 떨쳤으며, 우리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오늘날에까지 잘지내게 하였으니 나는 그를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이제 그의 부하가 홍산(鴻山)에서 적진을 파하던 상황을 묘사하여 장차 영원한 세대에 전하려 하니 너 색(穡)은 여기에 찬(贊)을 지으라.” 하셨다. 신 색은 생각하옵건대 국가에서 문무(文武)의 신료를 쓰실 적에 어떤 사람은 중앙에서 임금의 심복이 되어 나라의 원기를 기르게 하며 어떤 사람은 지방에서 임금의 발톱과 어금니 노릇을 하여 무력으로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시국의 안정과 위험을 따라서 이에 대하여 마음을 주시합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오면 대신이 되어, 조정에서는 그를 믿고 대견히 생각하며 변경은 그를 힘입어 편히 살 수 있으며 간사한 무리들은 위엄을 두려워하여 기가 꺾이어 숨어버리고, 도둑들은 소문만 듣고도 물러가게 하는 사람을 오늘에사 찾는다면 판삼사(判三司)는 가장 그 중에도 걸출한 사람입니다. 판삼사는 곧 상서령(尙書令)입니다. 경인(庚寅)년 이후로 적을 해변에서 막아냈고 하남(河南)에서 적을 토벌하였고 흥왕사(興王寺)에서 난을 평정하여 크고 적은 전투가 78회인데 반항하는 자를 치며 허한 곳을 찌르고 어려운 고비를 당할 적마다 기묘한 전술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60을 넘었는데도 기운이 더 줄어들지 아니하였으니 하늘이 준 용맹과 지혜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되겠습니까. 삼사(三司)의 선대에서는 문장으로 우리 나라를 도와서 재상에 오르기도 하였고 과거에 고시관을 맡기기도 하여 하나 하나 지적할 수가 있었는데 삼사공은 다만 전술을 가지고 곤란하고 사변이 많았던 시기를 만나서 굉장하며 비상한 공적을 세웠으며 종종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기도하여 기운이 일세를 덮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에게 “황금을 흙덩이처럼 생각하라.”는 교훈을 받고 이를 마음에 명심하였기 때문에 그의 청백한 지조는 늙을수록 더욱 굳어졌사오니 삼사공의 문무(文武)와 충효(忠孝)는 이것을 모두 겸비하였다 할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성상 전하(聖上殿下)께서 선왕의 뜻을 따르시와 덕을 높이며 공을 보답하시고 정명(精明)하심을 진작하시고 굳건한 기운으로 이 어려운 판국을 건져내어 태평을 맞이하였사오니 마땅히 삼사공이 첫째로 영광스런 은총을 이와 같이 극진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아, 훌륭하시도다. 신 색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춤추며 발로 뛰며 길게 노래하옵나이다. 그 글월에 이르기를,
빛나는 위엄과 명성이여, 오직 굳세며 오직 밝도다. 바다 밖의 도둑들도 두려워서 떨고 있으니 나라의 방패며 성벽이로다. 지방의 토호들이 물러나서 숨을 죽이니 백성의 법관이로다. 개부(開府)의 봉작(封爵)을 받았으니 벼슬로 그를 후하게 대우함이다. 생각컨대 공의 마음씨는 곧 그의 아버지의 마음이로다. 어름처럼 맑으며 소태처럼 쓰도다. 홍산(鴻山) 높은 곳에 북을 울리며 진두에 나섰을 적, 영걸한 그 풍채 찬바람이 휙휙 나니 기운은 세상에 떨쳐 있노라. 그림으로 비슷하게 나타냈으니 모두들 우러러 쳐다 보리라. 옛말에 이르기를, “덕(德)이란 미묘하여 지적할 수 없다” 했는데 이를 지적하자면 다만 공이 해당되리니 아아, 공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오래도록 건강하시어 우리 임금 곁에 계시옵소서.

동문선 제51권   
 
 
 찬(贊)
 
 
식목수 찬 병서(息牧?贊 幷序 )
 

식목(息牧)이란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다. 중암(中庵)이 이르기를, “소는 사람이 기르는 가축이다. 그것을 먹이면 곧 그의 명대로 살 것이나 먹이지 않으면 곧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지금 사람이 남에게서 소나 양을 받아서 그것을 기른다면 반드시 먹이와 꼴을 구할 것이다. 먹이와 꼴을 구하여 얻지 못한다면 곧 그것을 돌려주어야 되느냐, 아니면 서서 그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느냐” 하였다. 나의 스승인 석가모니께서 세상에 나타나실 적에 중생을 보고 소와 같이 생각하였다. 중생은 무명(無明)에 지배를 받고 육도(六道)로 헤매는 것이 꼭 발정한 마소와 같았다. 우리 스님은 여러 방편으로 그들을 올바른 지식으로 인도하시어 그들로 하여 배부르고 살찌게 하며 그 몸이 마칠 때가지 걱정이 없게 하셨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곧 우리 스님은 목자였고 중생은 소였다. 중생은 감정과 지식은, 높고 낮음이 있고, 지위가 얕고 깊음이 있다. 그러므로 소의 빛깔을 가지고 이것을 구별하였다. 악도 한가지며 선도 한가지다. 그러므로 소는 순전히 검정 것도 있으며 순전히 흰 것도 있다. 혹은 선에 치우치기도 하며 혹은 악에 치우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소도 반쯤 흰 것과 반쯤 검은 것이 있다. 중생이 인품은 네가지가 있는데 우리 스님은 열가지 힘으로 이를 기른다. 소가 비록 아는 것이 없으나 목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중생이 비록 무지하나 우리 스님에게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은 다섯가지의 흐린 상태를 분명히 깨우친 것이므로 나는 이것으로 나의 호를 삼은 것이니 그대는 행여 나를 위하여 찬을 지어 주면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이것을 보고 스스로 경계하려 하노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나는 아직까지 이런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이치가 분명하고 그 비유가 매우 근사하다. 중국의 성인이 하늘을 계승하여 도를 베풀 때에 사도(司徒)라는 직책과 전악(典樂)이라는 벼슬이 사람에게 중화의 덕을 가르치어 그 기질이 치우친 것을 바로 잡아 주던 방법이 태양이나 별처럼 환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풍속이 달라져서 사치하고 간사하며 화려하고, 교만하며, 방탕하여 과장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인이 계속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나타난 적도 또한 드물었다. 소가 목자를 따르지 않는 것쯤은 무슨 책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중암(中庵)은 일본(日本) 사람이다. 식목(息牧)이라고 호를 지은 것은 곧 공부도 아니하며 하는 것도 없는 한가한 도인(道人)이다.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 인하여 찬(贊)을 지었다. 이르기를 “저 어떠한 사람인데, 도롱이와 삿갓으로 소를 먹이네 팔을 휘둘러 지휘하니 소는 살찌고 튼실하다. 따라서 올라가니 풀도 좋은 평원일세. 태평한 풍월은 동자의 짧은 피리일세.”

 


동문선 제51권   
 
 
 찬(贊) 이색(李穡)
 
 
사 귀곡서원화 찬 병서(賜龜谷書院畵贊幷序)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 동자보현 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큰 글씨로 쓴 각운(覺雲)ㆍ귀곡(龜谷) 모두 네 개의 두루마리다. 높이와 넓이가 꼭 같은데 모두 지금 임금의 친필이다. 지금의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崇信眞乘勤修至道大禪師)인 운공(雲公)이 이것을 가지고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들려서 이르기를 “임금께서 주신 것을 화려하게 하려면 문장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니 대저 현세의 사람에게 보이며 후대에 전함에 있어서 이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장차 관료들에게 글을 받으려 하는 것이니 그대가 먼저 하여 달라.” 하고 또 이르기를 “장노도(長蘆圖)와 백상도(白象圖)는 나를 경계하시기 위함이니 그 은혜 본시 망극하온 바이며 각운(覺雲)은 나의 이름이요, 귀곡(龜谷)은 나의 호(號)다. 지금 그 집을 나가서 도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 수가 몇 만 명인데 이름과 호가 임금에게 알려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또한 마음에 명심하시고 손을 대시고 글씨로 나타내어 한 세상에 빛나게 하셨으니 그 다행이 어떠한가, 이러므로 나는 기필코 그대에게 이것을 부탁하는 것이다.” 하였다. 신(臣) 색(穡)이 삼가 엎드리어 펴 보고 물러 앉아서 말하기를 “불교가 세상에서 소중히 여긴지가 오래 되었다. 다만 인과(因果) 관계를 말하며 죄와 복을 운운하는 자는 말단에 속하는 것이요, 고상하고 공허하며 묵묵히 모든 세속 밖에, 초월한 사람에 대하여는 곧 우리 유학(儒學)에서 고상한 사람이라도 그를 경멸히 여기지 않는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성상 전하(聖上殿下)께옵서는 깊이 오묘한 뜻을 체득하셨으므로 그들에게서 취하는 것이 그 방도를 얻으셨다. 그러므로 근세의 속된 폐해를 모조리 배척하시고 장차 태조(太祖)의 옛 도리를 복구하시려 하였다. 그런데 귀곡(龜谷)은 홀로 사랑을 받자와 벌써 자(字)로 표창하여 높이는 칭호를 내리셨고 또 한가하신 때에 항상 그를 생각하시와 친이 서화를 제작하시어 이렇게 사랑하심을 내리셨으니 곧 그 사람이 어떠한 줄은 알 수가 있다. 대저 귀곡은 양반의 후예다. 타고난 기질이 벌써 보통 사람과 달랐고 도학으로 닦은 공부가 또한 원숙하였다. 그러므로 달마(達磨)의 마음으로, 보현(普賢)의 행적을 따랐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여 마음에 아무것도 가지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원리를 삼았고 그의 호(號)를 생각하여 장륙(藏六)을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행적은 자연스러웠고 그의 마음은 담담하였으니 본시, 벌써 물질을 물질로 여기지 아니한 것이다. 그가 오늘에 내리신 것을 받음은 요행이 아니요 당연한 것이다. 큰 글씨는 깊고 온자하여 만근 무게의 솥과 같으며 변화한 품은 아홉 번 제련한 단사(丹砂)와 같다. 코끼리의 걸음이 뚜벅뚜벅 옮겨지는데 강 바람이 옷에 가득하니 인간의 정서와 물건의 형태가 모두 그 극치에 도달하였다. 성인의 마음이 붓으로 옮겨지는 것이 조물주의 재주가 물건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신 색은 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에 대하여 찬을 지으며 그 첫 머리에 서술하였다.
귀곡(龜谷)
화(和)한 기운은 하늘에 있으며 허령(虛靈)함은 물건에 있다. 오직 신묘한 용도(用途)를 간직하였으니 아무도 이를 막을 이 없다. 누가 이것을 고르게 베풀어서 우주를 하나로 만들 것인가.
달마(達磨)
이 몸은 공허한 것, 하늘과 물이 한가지 빛이로다. 아득히 가는데 바람은 맑고 달은 밝았다. 그 가운데 조그마한 존재, 오직 한결 같아, 알지 못하리라.
보현(普賢)
어금니 여섯 개인 큰 코끼리는 큰 들로 걸음을 내딛었네, 부귀스럽구나 이 훌륭한 모습을 보라. 딱할사 산골 길에는 비로소 나의 수레를 달리는구나.
법명(法名)
무심으로 마음을 삼아, 큰 허공으로 드나들도다. 바람은 벗이 되며 비는 아들이라. 그것도 부지런한 일이구나 오묘한 그 까닭 알아낼 사람, 스님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동문선 제51권   
 
 
 찬(贊) 이색(李穡)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
 

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 이공(李公)이 임인(壬寅)년에 여러 장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했는데, 그 총병관(總兵官)은 곧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 정세운(鄭世雲)이었다. 원수(元帥) 세 사람은 총병의 공적이 자기네보다 위에 올라감을 시기하여 부하를 시켜서 끄집어내어 그를 해쳤다. 세 원수는 비록 죄를 받고 죽었으나 세상에서 정공을 슬퍼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광평공은 생각하기를 “정공의 이름은 영원히 전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후세에서 알지 못할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하였다. 또 이르기를, “능연각(凌烟閣)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옛날 제도이긴 하지만 지금에는 실시되고 있지 않으니 그의 화상을 그려서 철을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는 편이 낫겠다.” 하였다. 이미 완성되매, 한산 이색(韓山李穡)에게 청하여 찬을 지으라 하였다. 색이 광평군과는 함께 승선(承宣)으로 있으면서 공민왕을 섬겼다. 그러므로 정공이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비위를 맞추려한 적이 없었고 뜻을 확고히 가져서 조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신축(辛丑)년에 남쪽 복주(福州)로 옮겨갈 때에 임금이나 신하가 북쪽을 염려하는 마음이야 다시 말한들 무엇하리오, 정공은 비장히 가기를 자청하였다. 열흘남짓 한달이내에 나라가 다시 안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옛적 현종(顯宗)때에 강시중 한찬(姜侍中邯贊)이 경술(庚戌)년에 남쪽으로 행차 하실 것을 청하고 무오(戊午)년에는 북방에서 적을 막아냈으니, 그 공적이 탁월하였다. 근세에 금산 김씨(金山金氏)가 영토를 침범할 적에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의 공적이 컸고, 기해(己亥)년에 모적(毛賊)이 서경(西京)을 침범할 적에 총병(總兵) 이승경(李承慶)의 힘이 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강시중(姜侍中)처럼 두가지의 계책이 한 몸에서 일어난 것과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 현종(顯宗)은 금성(錦城)까지 가셨고 공민왕은 복주(福州)까지 가셨으니, 아아 참아 말할 수 있는가. 정공은 남쪽으로 행차하기를 결정할 때에 참여하였고 또 능히 모든 군대를 통솔하고 여러 적들을 쫓아 내어 홀로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위대함은 강공과 맞세울만 하였다. 그러나 강공은 개선(凱旋)할 때에 현종이 친이 교외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하였고 시를 지어주어 그를 표창했으니, 그런즉 곧 정공이 불행을 당한 것은 공민왕으로서의 슬픔이었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이었는가. 아아, 슬프다. 아아, 슬프다. 뒷날 정공의 화상 앞에 경례를 올리는 사람은 이 화상이 광평공(廣平公)에 의하여 만들어진 줄 알터이니 반드시 천년 뒤에라도 경의를 표하면서 이르기를, “정공이 진실로 공이 있었다. 그러나 광평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정공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랴.”할 터인즉 광평공이 선을 좋아한 실효가 더욱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길게 읊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정씨는 광주 장택현(光州長澤縣) 출신이며 공민왕 11년의 공신이다. 아우는 세문(世文)이며 아들은 없다. 찬에 이르기를, “아아, 정공이여, 겉으로는 소박하며 안은 확고하였다. 공민왕의 공신으로 병신(丙申)년에 출발하였다. 적(賊)이 중국에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리 영토에까지 침입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무력을 피하였는데 공은 마침내 적을 내쫓았다. 이미 그들을 무찔렀는데 부하가 공을 해쳐버렸네. 해친 자들도 다 없어졌으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없었던가, 강공(姜公)은 옛날 일이지만 공의 위대함, 그와 맞서리로다. 우리 광평군 아니었으면 누가 그리며 누가 기록했으랴. 송악산(松嶽山) 푸르른데 우리 명당(明堂) 웅장할사, 정공의 영향은 영원하게 전하리라.”


동문선 제51권   
 
 
 찬(贊)
 
 
금화란 찬 병서 (金畵蘭贊 幷序 )
 


김영록 광수(金榮祿光秀)가 지정황제(至正皇帝)를 가까이 모시고 있었는데, 황제는 금색으로 그린 난초를 주었다. 맹견(孟堅)이 그린 것이다. 영록(榮祿)이 벼슬에서 은퇴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와서 공산수옹시중공(公山壽翁侍中公)에게 주었다. 공이 색에게 그 위에 글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난초의 향기로운 이름이 중국 조정에까지 전파되었다. 측근의 신하에게 사랑으로 주었던 것인데 우리 나라에 빛이 비쳤도다. 오직 시중공(侍中公)은 황제의 궁전을 호위했었다. 은혜에 감격하며 옛 일을 회상할 제 그 마음이 같을 것이다. 물이 갈 곳을 얻었으니 묘하도다. 하늘의 기특함이여. 신 색(臣穡)이 찬사(贊辭)를 쓰니 눈물이 흘러 옷을 적시네.

동문선 제51권   
 
 
 찬(贊)
 
 
상찰 찬 병서 (上札贊 幷序 )
 

성균 사예(成均司藝)인 신 도(臣濤)가 색(穡)에게 말하기를, “도가 못난 것은 그대도 아는 바이다. 재주는 임무를 수행할만 하지 못하며 학문은 자문에 응할만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임금의 은총을 받자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화려한 관직에 발탁되었으니 정말 만번 죽을지라도 보답할 길이 없음을 두려워하였다. 이번에 또 서연(書筵)에서 필묵을 다루시던 여가에 성명(姓名)과 자호(字號), 모두 여덟 자(字)를 크게 써서 내려 주셨다. 절하고 받아가지고 돌아왔으나, 낮과 밤으로 송구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 어쩌면 특별한 은총을 이렇게까지 입을 수 있으리오. 인하여 표장을 꾸며서 장차 사대부들에게 청하여 임금의 거룩한 덕을 노래하며 칭송하는 글을 받아서 이 못난 사람의 이름으로 하여금 영구한 세대에 전하려 한다. 그대가 먼저하지 않겠는가. 또한 나의 이름을 도(濤)라고 지은 것도 그대요 자(字)를 장원(長源)이라한 것도 그대요, 나복산인(蘿?山人)이라는 호도 그대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는 그 은혜를 끝까지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신 색(臣穡)이 보옵건대 임금께서 때로 여러 신하에게 글씨를 써서 내리시는데 혹은 이름, 혹은 자(字), 혹은 호뿐이었고 이름과 자와 호를 이렇게 완전히 구비하게 써 주신 적은 없었다. 김군이 놀랍고 기쁨이 소망에 넘치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감히 전일에 이름을 지어준 의의를 부연하며 이것이 임금께 사랑을 받게 된 이유임을 밝혀서 거룩한 덕을 노래하여 칭송하는 근본을 삼으려 한다. 군이 처음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나서 나에게 자기가 지은 문장을 가지고 와서 고쳐 달라 하기에 읽어 보았더니 으젓하게 작가의 풍이 있었다. 열흘, 이후 한달을 넘지 않아, 그의 문장은 더욱 발전되었다. 나는 너무나 기뻐하였다. 그가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곧 그의 이름을 “도(濤)라” 하였으니 그의 문장을 칭찬한 것이요 자(字)를 청하기에 곧 자를 “장원(長源)”으로 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근본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경계함이다. 그 뒤에 과연 높은 과거에 올라, 어사(御史)가 되고 정언(正言)이 되어 재주와 명성이 날로 진전되었다. 이번 황제가 새로 즉위하신 뒤에 천하의 선비를 금릉(金陵)에 모여서 과거를 보이게 하였다. 고려의 선비들은 바다를 건너 가기를 꺼려하여 모두들 겁을 내고 피했는데 군은 혼자서 단연히 웃으며 이르기를, “나는 나의 문장을 시험해보는 것 뿐이니 합격이 되고 안되는 것과, 죽고 사는 것은 다 운명이다. 무엇을 걱정하리오.” 하고 가을에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하여 과연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또 천자의 궁전에서 대책(對策)으로 시험을 치러서 합격함에 있어서는 높은 등급으로 합격되어 25등이 되었다. 이 과거에서 합격자가 모두 1백 20명인데, 김군의 위에 올라간 사람의 수가 이렇게 얼마 안되는 것을 보면 군의 재주와 역량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구현승(丘縣丞)에 임명하니 사양하여 이르기를, “신은 말이 통하지 못하고 또한 부모가 모두 늙었사오니 돌아가서 봉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여 드디어 놓여서 돌아오게 되었다. 임금께서는 “유능하다.” 칭찬하셨다. 이러므로 그를 대우하심이 특히 후하였고 이번에 임금께서 써 내리신 글씨도 이렇게 완전히 구비한 것은 김군의 재주와 학문이 일반에게서 뛰어남을 칭찬하신 것이다. 그의 호를 나복산인(蘿?山人)으로 한데 대하여는 세 가지의 설명이 있다. 김씨(金氏)는 본시 염주(鹽州) 출신이요 동복(同福)은 외가(外家)인데 별호를 나복(蘿?)이라 한다. 군의 부모가 이 곳에 거주하였으니 곧 그의 출신지다. 또한 무우라는 것이 그다지 신기한 것도 아니지만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 덕은 되어도 쓰는데 해로울 것은 없다. 사람으로써 이와 같게 된다면 또한 이 세상에서 무난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군의 눈썹과 눈이 설천민(?天民)이라는 사람과 비슷하였다. 어떤 고관이 길에서 김군을 만나서 설천민의 안부를 물었는데 군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물러 갔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다. 설씨(?氏)는 위굴[回?] 출신이다. 그러므로 친구들이 모두 군을 가리키어 “위굴”이라 하였다. 위굴 사람은 성품이 정결하여 의복을 깨끗하게 입으려하고 욕심도 잘 참는다. 좋은 음식은 없고 먹는 것이 무우인데 그 남은 것도 버리지 않는다. 위굴과 무우에 대한 얘기는 대개 이러하였다. 임금께서 일찍 이르기를, “김도(金濤)는 설첩해(?帖該)와 닮았다.” 하였는데 첩해는 천민의 숙부다. 그런즉 그를 나복산인이라고 호를 지은 것은 어찌 신(臣)의 의사에서만 나온 것이겠는가. 이것이 김도 장원 나복산인(金濤長源蘿?山人) 여덟 자(字)의 부(賦)가 임금의 글씨로 나타나서 세상에 드문 영광이 된 것이다. 모든 신하들로서는 누가 권면하여 임금께서 어진 인재를 격려하시는 거룩한 마음에 부합되게 하지 않겠는가. 글씨의 법을 연구하고 임금의 덕을 선양하여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찬(贊)을 지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시국이 바야흐로 태평하오니 임금의 심경도 안정하시도다. 신하의 재능을 권장하기 위하여 그에게 은총을 내려주셨다. 가벼운 서리 흰빛을 펼쳤는데 빛나는 이슬 윤기가 흐르도다. 붓끝이 돌아가는 곳에 옥소리 금소리 울려나는 듯, 하늘에는 별들이 비치고 있는데 귀신도 으슥한 곳에서 울고 있구나. 신묘한 그 형태 절정에 달했으니, 말로서는 형용하지 못하리로다. 생각건대, 임금의 덕은 바람이 부는 것과 같아서 그가 부딪치는 모든 곳에 소리가 난다. 혹시라도 이것을 모른다면 짐승같이 사나운 것이로다. 오직 관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의 말을 들어다오.

동문선 제51권   
 
 
 찬(贊)
 
 
무능거사 찬 병서(無能居士贊幷序)
 

밀양군 박공(密陽君朴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선왕의 스승인 태고 국사(太古國師)가 성량(成亮)의 호를 무능(無能)이라고 지어 주었다. 선왕조에서 붓을 잡던 사람으로는 오직 공만이 남았으니 다행히 한 말씀을 주어 그 뜻을 설명하여 달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공이 총릉(聰陵)을 섬길 때에 매우 사랑을 받았고 강도(江都)로 양위(讓位)하고 나앉은 뒤에도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여 사람은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공민왕에게 사랑을 받아, 왕명을 출납하는 신하가 되어서 삼가하며 조심한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임금께서 그를 중추(中樞)에 승진시켰으나 영화로운 이름을 즐겨하지 않고 다만 능묘(陵廟)와 불사만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여, 10년이 넘도록 하루같이 지내면서도 그 마음이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였다. 대저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한다는 것은 충성과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하는 일이 세상을 놀래며 세속에 놀랄 만한 것을 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없다면 아무 것도 귀중히 여길 것이 못 된다. 공의 평생을 보면, 임금을 섬김에는 그 충성을 다하며 부처를 섬김에는 그 도를 다하였으니, 아무리 무능하다 할지라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법은 공허하며 고요한 것이다. 공허하고 고요한 가운데에는 범인도 없고 성인도 없으며,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이니 어찌 능(能)과 소(所)가 있겠는가. 능과 소가 있다면 지극한 도가 아니다. 태고(太古)가 공에게 기대한 것이 깊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우선 약간 들은 것을 가지고 대략 서술하였다. 그 찬에 이르기를,
본사(本師)에게 인(仁)을 받았으며 초조(初祖)에게 은혜를 입었다. 공허하며 적적한 가운데서 사마귀처럼 달려 있고 혹처럼 붙었도다. 공만은 이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걸음마다 바람이 일어났다. 누가 능히 공을 알아주리오. 태고(太古) 한 사람뿐이었다.

 
 동문선 제53권   
 
 
 주의(奏議)
 
 
진 시무 서(陳時務書)
 

이색(李穡)

신은 듣자오니, “국가가 일이 없을 때에는 공경의 말이 깃털보다 가볍고 국가에 일이 있을 때는 필부(匹夫)의 말로 태산보다 더 무겁다.” 하였으니, 신이 필부의 미천한 존재임을 무릅쓰고 과감한 말씀을 드리오니, 미치고 망령된 죄는 의당히 놓아 줄 수 없는 것이오나, 방울진 물이나 티끌만한 가느다란 것도 높은 메와 깊은 바다에 자원이 되는 것이요, 꼴꾼의 말도 성인이 취하는 바이니, 전하께서 굽어 채택해 주신다면 종묘에 다행이 될 것이요, 사직에도 다행이 될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경계(經界) 의 바름이나 정전(井田)의 고른 것은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서 선무(先務)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조종(祖宗)께서 업을 비롯하고 전통을 드리운 제도와 그를 지키는 세밀한 규모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4백 년 말류의 폐해가 어찌 없었으리오마는, 그 중에 전제(田制)가 더욱 심하여 경계가 바르지 못하여 호족(豪族)이 모두 겸병하였던바 “까치가 살고 있는 집에 비둘기가 거한다.”는 말이 모두 이와 같은 것입니다.
유사(有司)가 비록 공문(公文)에 붉은 글씨의 선후로써 빈주(賓主)를 정하였으나, 만일 갑(甲)이 유력하다면 을(乙)에게서 무리하게 빼앗는 것인데, 하물며 공문의 붉은 글씨도 생선의 눈이 구슬에 섞여 있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농토를 받은 집들은 모두 임금의 신하로써 힘을 다한 공신의 자손이 이것으로 농사를 대치함이니, 저편에서는 비록 잃어버렸으나, 이편에서는 얻음이 되는 것이니 이는 마치 초(楚) 나라 사람이 활을 잃었는데, 초 나라 사람이 얻은 것같아서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마는, 다만 백성이 하늘처럼 믿고 있는 것은 밭에 있을 것이니, 두어 이랑의 밭을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부모 처자의 부양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조세를 거두는 자가 이미 이르렀으니, 만일 그 밭의 주인이 한 사람만이라면 다행이지만 더러는 서너 집도 있고, 일고 여덟 집도 없지 않으니 진실로 힘이 서로 같고 형편이 서로 대적이 될 수 있다면 누가 즐거이 양보하겠습니까.
이러한 관계로 그 조세를 장만하여 부족하면, 또 꾸어서 보태어 바치는데, 무엇으로써 그의 부모를 봉양하며, 무엇으로써 그의 처자를 살리겠습니까. 백성이 곤궁에 빠지는 것이 곧 이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부(富)한 사람은 그럴 수 있겠지마는, 이 간난하고 의로운 자가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자리에 오르시던 처음에 전제를 급무로 삼으셨고, 이어서 교지를 내리시되 역시 이 일에 대하여 권권하셨던 바, 깊은 꾀와 깊은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서 나왔으니, 아, 거룩하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느니보다는 그물을 맺는 것이 좋을 것이며, 비파 기둥에 풀칠하고는 어찌 곡조를 고를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그 법을 고치지 않고는 그 폐해를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니, 빌건대 갑인(甲寅)년에 마련하였던 안(案)으로 근본[柱]을 삼되 공문(公文) 중에 붉은 글씨로 기록된 것을 참고로 하여 쟁탈한 자의 것은 이것으로 바로잡고, 새로 개간한 자의 땅은 이로써 측량하여, 새로 개간한 땅은 세금을 매기고 남사(濫賜)한 밭은 삭감시킨다면 국고에 들어오는 것이 증가될 것이요, 쟁탈된 밭을 정리하여 농민들을 안정시키면 민심이 매우 즐거울 것이니, 민심이 즐겁고 국고의 수입이 증가되는 것이란 임금이 간절히 하고자 하는 바이거늘, 전하께서 무엇을 꺼려서 하시지 않습니까.
혹은 이르기를, “부호(富豪)의 밭은 갑자기 빼앗을 수 없겠고, 해묵은 폐해는 갑자기 고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이것은 변변치 못한 임금의 소행일 것이니 전하께 바라는 바는 아니옵니다. 이에 대한 시행하는 방법이라든가 수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보좌하고 있는 대신 중에서 반드시 계획을 세우는 자가 있을 것이니 어찌 신진(新進) 소생(小生)으로써 감히 망령되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일을 행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전하의 성의의 유무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근년에 왜구(倭?)가 강토(疆土)에 침입하여 성상(聖上)께 주야로 걱정을 끼치니, 세신(世臣)과 원로들이 이에 대한 처리 방안을 서로 꾀하여 그 요점에는 합의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아비의 상사를 당하여 바닷가에 살고 있으면서, 초야에서 생각한 꾀가 익숙하였습니다. 이제 계획으로써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니, 첫째는 육지를 지키는 것이요, 둘째는 바다 싸움인데, 수레로 강물을 건너지는 못할 것이요, 배로 뭍을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람의 성품도 역시 이러한 것입니다. 되놈들은 그 성품이 추위를 잘 견디고 남방 사람들은 더위를 잘 견디는데, 이제 이 평민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타기 전에 정신이 벌써 혼미하여 한 차례만 풍파를 겪으면 왼편으로 자빠졌다가 바른편으로 거꾸러져서 서로 뱃속에서 쓰러지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렇게 앉았다 섰다, 나갔다 물러섰다 하며 적을 상대하여 용맹을 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뭍을 지키는 데는 평민을 징발하여 그 기계(器械)를 날카롭게 하여 요새지에 주둔하되, 군용(軍容)을 엄숙하게 하고 봉화(烽火)를 조심하여 왜인의 눈을 현란하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은 안렴사(按廉使)나 군수(郡守)로써도 족히 맡아 보살필 수 있을 것인데, 도순문사(都巡問使)가 여기에 쓸 곳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수령(守令)에게 굴욕이나 주고 비용을 허비할 따름입니다. 바다 싸움에 대한 방법은 신의 생각으로는 본국의 세 변방(邊方)은 바다에 가깝고 섬에 살고 있는 백성의 수가 무려 백만 명이나 되니, Ep를 타기도 하고 헤엄을 치기도 하는 것이 그들 장기(長技)이며, 그들은 또 농사나 누에로 일을 삼지 않고, 고기잡이와 소금구이를 업으로 삼았었는데, 요즈음 왜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살던 곳을 떠나서 업을 잃었으니, 그 원망스런 마음이 뭍에 살고 있는 이들에 비해서 어찌 열 갑절만 되겠습니까. 한 필의 말을 달려 문서를 받들고 강을 따라 내려가서 군인을 모집하라면, 반드시 그 상(賞)을 희망하여 몇 천 명의 무리를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그들의 장기를 이용하여 그들이 원망하는 적들을 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더구나 적을 죽이고 상을 얻는 것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이익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또 추포사(追捕使)로 하여금 일을 맡아 보살피게 하되, 늘 배위에 주재하게 한다면 여러 고을이 편의를 얻을 것이요, 도둑이 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왜구를 막는 중요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대개 뭍만을 지키고 바다 싸움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으로 알고 침입할 것이요, 바다 싸움만을 하고 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저들은 혹시 불의에 나와서 그 해가 작지 않을 것이므로, 뭍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공고하게 함이요, 바다 싸움은 그들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무(文武)는 그 하나만을 폐할 수 없으니, 문을 경(經)으로 삼고 무를 위(緯)로 삼는 것은 천지의 상도입니다. 당(唐)ㆍ우(虞) 3대(代)의 일은 먼일이므로 이야기할 것도 없지마는, 또 서한(西漢)과 동한(東漢)을 말한다면, 고조(高祖)가 초 나라와 각립되었을 때에도 소하(蕭何)같은 이가 있어 꾀를 운용하고 말을 달리고 땀을 흘리는 수고도 없었으니, 이는 문(文)이었고, 한신(韓信)같은 이가 있어서 병력을 나누어 전쟁에서의 공로가 있었으니, 이는 무(武)였던 것입니다. 광무(光武)가 중흥을 이룩할 때에는 창을 버리고 문예를 강론하고 말[馬]을 쉬고는 도를 논하였으니, 그는 문무를 병용하여 경(經)과 위(緯)가 함께 베풀어져 후세의 미칠 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비록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도 강론을 폐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승평 시대를 만났으나 전쟁에 대한 예비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왕께서 이러한 것을 알고서 집을 세우고 설치하였고, 문을 닦고 무를 중하게 여겼으되 일찍이 한 가지 [문(文)]를 위해서 다른 것[무(武)]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점점 태평이 이룩되고 그 위에 문화가 동으로 점차 들어와 승평한 지 백 년 만에 백성이 싸움을 알지 못하고, 만호부(萬戶府)는 중국에서 세운 것이었으나, 이미 빈 간판만 남아 있으며, 모든 위(衛)의 벼슬은 부호가가 점유한 바 되었고, 또 군사도 없으니 지금을 옛것에 준한다면, 비록 무(武)를 중요시한다 하더라도 무를 쓸 실제는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왜적으로 말미암아 내외가 모두 소연(騷然)하여 거의 토착(土著)하지를 못하고, 또 중원(中原)의 백성이 제법 왜적의 비린내에 물이 들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오히려 하늘이 원(元) 나라의 깊은 뜻과 우리 임금이 생민을 기르는 넓은 은덕을 돌보심을 힘입어 이제 안정이 되어 낭패의 경지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편안한 데 처하면서도 위태함을 생각하면 비록 가득찼다 하더라도 넘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여 미리 막는다면 어떤 것이고 꾀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구습(舊習)을 버리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일이 생긴다면 무엇으로써 방비하겠습니까. 옛날 초 나라에서는 원숭이를 잃으니 그 재앙이 나무숲에까지 이르렀고, 성문에 불이 일자 그 재앙이 못 속의 고기에까지 미쳤다 하였으니, 어찌 편안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나라는 동으로는 일본(日本)이 있고, 북으로는 여진(女眞)이 있으며, 남으로는 절강(浙江 중국 동남부 연안에 있는 성으로 가는 배가 있어서 다만 중국을 통하는 길만 있으며, 서로는 연산(燕山)으로 달아날 수 있으니, 왜적이 이르자 벌써 창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절강의 도둑에게 군대를 청하여 배를 타고 오거나, 여진 사람이 남으로 그 기병(騎兵)을 돌리게 되면, 쟁기를 메었던 백성이 어찌 갑자기 적을 막는 군졸이 되겠습니까. 만일 창졸간에 사변(事變)이 일어나서 사람이 모두 엎어진다면 사직을 보호하고 임금을 붙들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매양 이 일을 생각하면 적이 스스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무과(武科)를 설치하되 모든 위(衛)의 군사로 보충하게 하여 무용(武勇)으로 시험하며 기술을 연마하여 벼슬을 주어서 그 기운을 돋구어준다면 나라가 풍족하고 병정이 정용하며 사람마다 쓰기를 즐겨하여 거의 다른날의 후회됨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 가의(賈誼)는 문제(文帝)가 무사할 때를 당해서도 긴 한숨을 짓고 슬프게 울었는데, 하물며 섶에 불이 이미 붙었음에도 오히려 그 위에서 잠을 잘 것입니까. 차라리 미신(微臣)으로 하여금 요망스런 말씀을 드렸다는 죄를 얻게 할지라도 성조(聖朝)로 하여금 아무런 방비가 없었다는 기롱을 얻지 않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이옵니다.
공자(孔子)의 도는 크고도 멀어서 신이 능히 찬양할 바가 못 될 것이며, 고금에 문묘(文廟)와 학교를 숭봉하는 규모도 역시 신이 능히 다 알아 논할 바는 아니겠습니다마는, 국가에서 안으로는 성균(成均) 십이도(十二徒)와 동서의 두 학당을 두었고, 밖으로는 주(州)와 군(郡)에 역시 각기 학교를 두었는데, 그 규모가 굉원(宏遠)하고 절목(節目)이 치밀하였으니, 조종(祖宗)의 뜻을 살피건대 유도(儒道)를 높이고 중시함이 깊고도 절실하였던 것입니다.
대개 국학(國學)은 곧 풍속 교화의 근원이요, 인재는 곧 정치 교육의 근본이어서, 북돋아주지 않으면 그 근본이 반드시 굳지 못할 것이며, 깊이 파지 않으면 그 근원이 반드시 맑지는 못할 것입니다. 옛 제왕으로써 아름다운 이름을 천하에 끼친 이는 역시 이에 뜻을 두었을 따름입니다.
전하께서는 성인의 자질로써 일찌기 성인의 도를 연모하고 학교의 폐함을 슬프게 여겼으므로, 드디어 수즙(修葺)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이는 비단 우리 유도에서의 다행일 뿐 아니라 실제로 생민의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도(生徒)들은 해산되고 재사(齋舍)는 기울고 무너졌으니, 이는 연유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옛날의 배우는 자는 장차 성인이 되려 하였으나, 지금의 배우는 자는 장차 벼슬을 구하였으므로, 시(詩)를 외우고 서(書)를 읽었다 하나 도를 즐겨함이 깊지 못하여, 번화(繁華)를 다투는 것이 이미 승하였고, 문장을 아로새기고 글귀를 좇는 데에 마음을 지나치게 썼으니,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공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혹은 변해서 다른 데로 가서 붓을 던져버렸다고 과장하였고, 더러는 늙어서도 이룩함이 없이 그 몸을 그르쳤다고 탄식하였으며, 그 중에서 영매 걸출하여 선비의 종장(宗匠)이 되고 나라의 주석(柱石)이 된 자 몇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개제한 임이여 어찌 선비를 일으키지 않으시나요.” 하였으니, 선비를 일으키는 그 묘는 실로 임금의 덕화에 있는 것인데, 사류의 폐가 이렇고서야 위에 있는 사람으로써 어찌 그 책임을 사피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벼슬에 오르는 이는 반드시 급제할 필요가 없었으며, 급제한 이는 반드시 국학에 나와야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누가 즐겨 지름길을 버리고 갈랫길을 달리겠습니까. 무리[徒]가 해산되고 재사가 퇴락해짐은 실로 이런 까닭입니다.
신은 엎드려 비옵건대 밝게 조제(條制)를 내리시어 밖으로는 향교, 안으로는 학당에서 그 재목을 고사하여 십이도(十二徒)에 올리게 하고, 십이도에는 또 종합적으로 고사하여 성균(成均)에 올리되 시일을 제한하여 그 덕망과 학예(學藝)를 부과시키고 예부(禮部)에 올려서 합격하는 예에 따라 벼슬을 주고, 불합격자에게도 역시 출신의 기회를 주고, 벼슬에 있으면서 과거 보려는 이를 제외하는 그 나머지 국학생이 아닌 자는 고시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면, 옛날에는 불러서도 오지 않던 것이 이제는 휘몰아 내어도 가지 않을 것이니, 신은 장차 인재가 배출되어 전하께서 써도 다하지 못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씨(佛氏)가 중국에 들어왔을 제, 왕공(王公)이나 사서(士庶)들이 높이 섬겨서 한(漢) 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성하더니, 우리 태조(太祖)께서 집을 화하여 나라를 만드시니 사찰과 민가가 세 다섯이 서로 섞여 있었던 것이, 중세 이후로는 그 무리가 더욱 번성하여 오교(五敎)와 양종(兩宗) 이 이굴(利窟)로 화하여 시내 곁이나 메 구비에 사찰 아닌 것이 없으니, 승려들도 비단 점점 비루해졌을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백성으로써 놀고 먹는 자가 많았으므로 식자가 매양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 부처는 대성인(大聖人)이라 그의 호오(好惡)가 반드시 사람과 같을 것이거늘, 어찌 이미 죽은 영(靈)인들 그 무리가 이와 같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신은 엎드려 빌건대, 밝게 금조(禁條)를 내리시어 이미 중이 된 자에게도 역시 도첩(度牒)을 주고, 첩이 없는 자는 곧 군대에 편입시킬 것이며, 새로 창건한 절은 아울러 철거를 명하되 철거하지 않는 자는 곧 그 곳 수령에게 벌을 내린다면 양민으로 하여금 모두 중이 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전하께서 부처를 봉사하는 정성이 더욱이 열성(列聖)에 비하여 독실하시다 하니, 그 나라 운명이 길 것을 기도함은 심히 성한 일이요,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저윽히 생각하건대 부처는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공평되어 받들기를 극도로 아름답게 한다 해서 기뻐하지도 않으려니와, 극도로 엷게 대우한다 하더라도 노하지도 않는 것인데, 더구나 그들 경(經) 가운데에, 분명히 말하기를 “공덕을 보시하는 것이 경을 읽는 것보다 못하다.” 하였습니다. 정사를 처리하시는 나머지 정신이 한가하시거든, 방등(方等)에 주목하시고 돈법(頓法)에 유심하심은 불가함이 없을 것이로되, 다만 윗자리에 있는 이는 사람의 본받음이 되는 것이요, 허비하는 자는 재산이 마르는 것이니, 미묘할 때에 막으며, 점차 전염을 예방하여 가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귀신을 공경하여 멀리하라.” 하였으니, 신은 원하건대 부처에 대해서도 또한 마땅히 이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은 또한 임금의 뜻을 거슬리면 반드시 머리가 부서질 줄을 모르는 바는 아니옵니다마는, 다만 잔 넘치는 물이 점차 하늘을 박찰까 저어하여 죽음[萬死]을 무릅쓰고 한 말씀을 아끼지 않는 바입니다.
신은 또 생각하건대, 성하고 쇠함이 서로 대체함은 이치의 필연한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두 대나 어린 임금에 배신(倍臣)이 집권하여 기강이 떨어졌으므로 사람은 그 다스림을 생각하니,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너그러우시므로, 가히 하염이 있을 만한 자질로써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여 다스림을 생각할 때를 당하였으니, 이는 가히 하염이 있을 만한 때인 만큼 의당히 어진이를 씀에 갈급할 것이온데, 아직 폐백을 묶어 어진이를 맞이함에 급급함을 보지 못하였고, 의당 정치 보살핌에 급할 터이온데 아직 뜰의 횃불이 밝았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질고 능한 이가 어찌 다 등용되었으며 간악하고 사특한 자가 어찌 다 물러났으리오. 한 정사도 행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갓 백성의 소망만 어긋났다 하겠습니다. 이러고도 그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뒷걸음질하면서 전진을 도모하는 것과 같으며, 남쪽으로 수레바퀴를 돌려서 연 나라에 가려는 것과 같으니, 신은 심히 전하를 위해서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행함은 건(健)하니, 군자는 이로써 스스로 강해서 쉬지 않는다.” 하였으니, 마음을 닦는 요지나 정치를 하는 방법이 모두 이에 지나는 것이 없사오니, 오직 전하께서는 이에 마음을 머물러 주옵소서.

 

[주D-001]경계(經界) : 농토의 정리 분배를 말한 것이니, 곧 전제(田制)이다.
[주D-002]남사(濫賜) : 합법이 아니고 위에서 내리는 것이다.
[주D-003]오교(五敎)와 양종(兩宗) : 화엄종(華嚴宗)의 설에, 불교는 다섯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일은 소승교(小乘敎)요, 이는 시교(始敎)요, 삼은 종교(終敎)요, 사는 돈교(頓敎)요, 오는 원교(圓敎)인데, 그 중에 종교는 점교(漸敎)라고도 일컫는다. 돈교ㆍ원교ㆍ점교 삼자는 대승교(大乘敎)라 통칭(通稱)하였고, 양종(兩宗)은 천태종(天台宗)ㆍ조계종(曹溪宗)을 말함이다.
[주D-004]방등(方等)에 돈법(頓法) : 방등은 5교의 제2ㆍ제3과 같고 돈법은 돈교(頓敎)이다.

 


동문선 제53권   
 
 
 주의(奏議)
 
 
논 이색 소(論李穡疏)
 

오사충(吳思忠)

판문하(判門下) 이색(李穡)은 우리 현릉(玄陵)을 섬겨서 유종(儒宗)으로써 그 지위가 보상(輔相)에 이르렀더니, 현릉께서 돌아가시자 사속(嗣續)이 없으니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이 스스로 권세를 독차지하려 하여 어린 임금을 세울 제 이색이 그 의논에 방조하여 우(禑)를 세웠더니, 모든 장수가 군사를 돌리어 왕씨(王氏)를 세우자는 의논을 하는 즈음에, 대장(大將) 조민수(曺敏修)가 이인임의 인친(姻親)으로써 그의 아들 창(昌)을 세워서 그 사사로운 꾀를 계속하려 하여 이색에 꾀를 물었더니 이색 역시 창으로 세울 것을 마음에 정하여 드디어 의논해서 세웠고, 그의 아들 종학(鍾學)은 외척(外戚)에게 선언하기를, “여러 신하가 종실(宗室)을 세울 것을 의논했으나, 마침내는 세자(世子)를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우리 아버지의 힘이다.” 하였습니다. 이색이 서울로부터 돌아올 때에 이숭인(李崇仁)ㆍ김사안(金士安) 등과 약속하여 우를 여흥(驪興)에서 뵈었는데 이색은 앞서서 홀로 만나보았으니, 그 홀로 만나볼 즈음에 그의 말한 것이 공사였던가, 또 사사였던가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천자(天子)가 명하기를, “비록 왕씨로 거짓하고 다른 성으로 임금을 삼은 것은 삼한(三韓)의 대대로 지키는 아름다운 꾀가 아니다.” 하였으므로, 충신과 의사(義士)들이 다시 왕씨를 세울 것을 의논하여, 천자의 명령에 따르려 할 제 적신(賊臣) 변안렬(邊安烈)은 기이한 공훈을 세워서 부귀를 도둑하려 하여, 이색과 신우의 외숙 이림(李琳)과 김저(金佇)ㆍ정득후(鄭得厚) 등과 더불어 신우를 맞이하기로 꾀하여 다시 왕씨를 세울 의논을 저해하였으니, 만일 이르기를, “15년동안을 몸을 맡겨 신하가 되었으니 다시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다.” 한다면, 어찌 5백 년의 왕씨를 저버리고 15년의 신씨에게 충성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색은 대대로 왕씨에게 벼슬을 하여 공민왕의 망극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임에게 붙어 신우를 세워서 왕씨를 끊어버리고, 모든 장수들이 왕씨를 세우려 하였을 제는 민수에게 붙어서 신우를 쫓아내고는 신창(辛昌)을 세웠으며, 충신 의사가 왕씨의 자리를 회복하려고 하였을 제는 안렬에게 붙어서 창을 쫓아내고는 우를 맞이하였으니, 그는 우와 창에게도 역시 반측(反側)하는 신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족히 논할 것 없이, 대대로 왕씨의 신하로써 적신(賊臣)에게 아부하여 왕씨의 종사(宗社)를 길이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 죄악은 종사(宗社)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왕망(王莽)이 한(漢) 나라를 빼앗는 것이 장우(張禹)에게서 이룩되었으니, 그것은 장우가 그 꾀에 참여하여 그 힘을 썼던 것이 아니었고, 다만 장우가 유종(儒宗)으로써 본디부터 중망을 지녔으므로, 왕망에게 붙게 되니 왕망은 꺼릴 것이 없었고, 온 나라 사람이 그를 신종(信從)하였으며 왕망에게 붙지 않은 자가 도리어 죄인이 되었는데, 능히 주운(朱雲)이 베어 죽이자고 청한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능히 스스로 후세의 공론도 피하지 못했거늘, 이색은 우와 창에게 붙어서 나라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장우보다 중하고 또 이색이 인임의 대우를 받아서 그 부귀를 보수하였으며, 인임이 그의 무리 견미(堅味)와 흥방(興邦)과 더불어 탐욕을 자행하여 벼슬을 팔고 죄인을 놓아 뇌물을 공공연히 행하고 백성의 농토를 빼앗아 점유하되 원망이 쌓이고 죄악이 충만하여 마침내는 패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그 그릇됨을 말하지 않았으며, 우의 스승이 되어서 여러 차례 보상을 받아서 젖내[乳臭] 나는 자제들이 모두 높은 과거에 올라서 요직에 깔렸고, 우가 그 포악함을 멋대로 하여 죄없는 자를 살육하였으나, 이색은 그 허물을 바로잡지 않고 우가 망령되이 군사를 일으켜 장차 중국의 경계에 침입하여 동방의 무궁한 재화를 시작하려 함에도 이색은 또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국가에서 사전(私田)으로써 공가(公家)를 여위게 하고 민생을 해쳐서, 송사를 일으키며 풍속을 헐어버리니, 이를 개혁하여 전법(田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이색은 상상(上相)으로써 옳지 않다고 고집하여, 그의 아들 종학(種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말을 퍼뜨려 거실(巨室)의 원망과 비방의 단서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림(李琳)이 탐욕스럽고 변변하지 못함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인데 이색은 또 외척(外戚)과 교제하여 보존하기를 도모하되, 이림을 추천하여 스스로 그 자리에 대체시켰고, 또 그가 유종(儒宗)임에도 불구하고 대장경(大藏經)을 인출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다투어가면서 본을 받아 오히려 미처 못할까 저어하여 풍속을 그르치게 하고는 그의 아들을 시켜서 사람들에게 선언하기를, “이것은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니요, 할아버지 곡(穀)의 뜻을 이룩한 것일 뿐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아비를 이단(異端)에다 빠트려도 돌아보지 않음이었습니다.
또 신창을 받들어 조회할 때에 신우를 맞이하여 세울 꾀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이숭인(李崇仁)에게 위촉하여 탄핵을 입고는 장단(長湍)으로 돌아가 사변을 관망하더니, 전하께서 위에 오르니 공공연히 와서 판문하(判門下)의 벼슬을 받아 백관의 위에 앉았으나,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고 배운 것을 굽히어 세상에 아부하되 거짓을 꾸며 이름을 낚시질하였으니, 청하건대, 유사에게 내려서 이색 부자와 민수(敏修)의 죄를 논하여 후세의 남의 신하로써 충성하지 못하는 자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

동문선 제63권   
 
 
 서(書) 정도전
 
 
상 도당 서(上都堂書)
 

재상(宰相)의 직임(職任)은 그 나라의 모든 책임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일찍이 석개보(石介甫)는 말하기를, “위로는 음양(陰陽)을 조화(調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안무(安撫)하여, 작상(爵賞)과 형벌(刑罰)이 경우하는 바의 관건이고, 정화(政化)와 교령(敎令)이 시작되어 나오는 바다.”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도 재상의 직임은 이 네 가지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다 하겠고, 더욱이 그 중에서도 작상과 형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른바 음양을 조화한다는 것은, 그 일이 없는데 음양이 스스로 조화되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상을 주되 그 공로에 해당하게 한다면 선행(善行)을 한 자에게 권장(勸?)이 된 것이고, 형을 집행하되 그 죄에 해당하게 한다며 악행(惡行)을 한 자에게 징계(懲戒)가 될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형 중에서 큰 것은 찬역(簒逆)하는 죄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 왕씨(王氏)를 저지(沮止)하고 창(昌)을 세운 것은 바로 신우(辛禑)를 영립(迎立)하여 왕씨를 단절시킨 자들인데 찬역의 죄가 이보다 더 큼이 없는 난적(亂賊)의 괴수(魁首)입니다. 그런데도 구차히 천벌을 면함이 이제 이미 여러 해입니다. 또 그는 얼굴빛을 좋게 꾸미고 그 도종(徒從)을 성대하게 딸리고 궁중과 궁외를 출입하되 조금도 기탄(忌憚)함이 없이 하고 있으며, 그 자제(子弟)와 생질(甥姪)들도 요직(要職)에 들어 세워 놓고 있으나 아무도 그들에게 시비를 못하고 있으니, 지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 상형의 권병(權柄)을 지키는 자는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당히 그 죄상(罪狀)을 낱낱이 논하여 전하(殿下)께 아뢰고 백성과 함께 대묘(大廟)에 고하고 그 죄를 세어서 처 죽인 뒤에야 하늘에 있는 영령이 위로 될 것이요, 신하와 백성의 울분이 씻어질 것이요, 천지의 바른 기강(紀綱)이 설 것이요, 재상의 책임이 메워질 것입니다.
만약 말하기를, “사람의 죄악은 내가 알 바 아니오, 사람을 살리고 죽이며, 없애고 폐하고 놓아두는 권한은 임금이 맡은 것인데 재상이 어떻게 이에 관여하겠는가”고 한다면, 동호(董狐)가 어찌하여 조순(趙盾)이 임금을 시해(弑害)한 역적을 처 죽이지 않은 것으로써 그에게 악명(惡名)을 짊어지게 했습니다.
춘추(春秋)시대에 진(晋) 나라 조천(趙穿)이 임금을 시해함에 직사관(直史官)인 동호가 기록하되, “조순(趙盾)이 임금을 시해하였다.” 하자 조순이 말하되,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직사(直史)가 말하되, “그대가 정경(正卿)이 되어 가지고 망명해서는 국경을 넘지 못하였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처 죽이지 못하였으니 임금을 시해한 자는 바로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였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말하기를, “동호는 훌륭한 사가(史家)요, 조순은 훌륭한 대부(大夫)인데 법을 위해 악명을 받았다.” 하시었습니다. 무릇 조순이 정경(正卿)으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시역하였다는 악명을 씻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뒤에 도적을 토벌하는 의리가 엄중하여져서 난적의 무리가 천하에서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최악의 이름을 얻을 것이요.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찬역과 시해의 죄에 빠진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내 비록 재주가 없으나 내가 재상의 뒤를 따라, 나라 정사에 참여하여 듣고 있는데 이 훌륭한 사가의 의논을 감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만약 말하기를, “이른바 죄인이 유종(儒宗)이 있고, 거듭 왕실에 혼인한 자가 있어서 그 법을 의논하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옛날 임연(林衍)이가 원왕(元王)을 폐하고 동복 동생 (?)을 영립(迎立)할 적에 연(衍)이 먼저 모든 계모(計謀)를 꾸며 놓고 나중에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에게 알리자 이 일을 당한 장용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직 예, 예, 하는 대답으로 이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그 뒤에 원왕이 반정(反正)함에 장용이 그 지위가 재상에 있으면서도 능히 그 계모(計謀)를 누르지 못하고 그 반란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그의 직위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색(李穡)의 유종(儒宗)됨이 장용과 더불어 어떻다고 보시며 그가 먼저 간악한 계교를 일으켜서 왕씨를 저지하고 창(昌)을 영립한 것이 장용이 다만 임연의 모역(謀逆)에 예, 예, 라고 대답한 것뿐인 것과 더불어 누가 낫다고 보십니까.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옛날에 문강(文姜)이 노환공(魯桓公)을 시해하는 데 참여하였고, 애강(哀姜)이 두 임금을 시해하는 데 관여하였으나, 성인께서 준례로 ‘손(遜)’이라고 써서 그는 가고 돌아오지 않은 것같이 하였음은 깊이 끊어 버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정(恩情)은 가볍고 의리는 무거움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환공(桓公)을 시해한 사람은 양공(襄公)이요, 두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경보(慶父)입니다. 그러니 문강과 애강은 의심컨대 죄 없는 것같이 보이나 여기 성인께서 문강과 애강 두 부인에게 그 일을 참여하여 들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깊이 끊어버리고 이와 같이 심하게 주토(誅討)한 것입니다.
무릇 사군(嗣君)은 부인이 출산한 바이나 자식과 모친의 사사 은정으로서 임금과 신하의 큰 의리를 폐하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이색(李穡)이, ‘우(禑)가 비록 돈(旽)의 아들이긴 하나 현릉(玄陵)이 자기의 자식으로 삼아서 강녕군(江寧君)에 봉하였고, 또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이미 신하가 되었다가 임금을 몰아냄은 크게 옳지 못하다.’ 하는데 그 말이 옳지 않으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왕위(王位)는 태조(太祖)의 왕위요, 사직(社稷)은 태조의 사직입니다. 현능이 진실로 사사로이 하지 못할 일입니다.
옛날에 연(燕) 나라의 왕자지(王子之)가 연 나라를 정승 자쾌(子?)에게 주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연 나라를 가히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맹자 말하기를, “옳지 못한 일이다. 자지가 자쾌에게 연 나라를 주지 못할 것이며, 자쾌도 스스로 연 나라를 자지에게서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현의 마음이 이와 같으시니, 땅과 백성은 먼저의 임금께 받은 것입니다. 임금이 사사로이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주 나라 혜왕(惠王)이 사랑함으로써 세자를 바꾸자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를 거느려 왕세자를 수지(首止)에서 회견하여 그 지위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분수는 비록 달랐으나, 그 혜왕의 아들됨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천왕의 존귀함으로서도 그 나라는 사사로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제후는 그의 낮은 몸으로서도 제후의 무리를 거느려 천자의 명령에 항거하였으나 성인께서는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세자가 아버지의 명령을 항거하였고, 제환공(齊桓公)이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천하의 의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현릉이 어찌 태조(太祖)의 왕위와 태조의 백성을 저 역적 신돈(辛旽)의 자식에게 사사로이 준단 말입니까.
또 천자께서 고명(誥命)하신 것은 한때 권신(權臣)이 우를 현릉의 아들이라고 속여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 뒤에 천자께서 명하여 말씀하기를, “고려 임금의 지위는 후사(後嗣)가 끊어져서 다른 성을 빌려서 왕씨를 대신하였으나, 이것은 삼한(三韓)이 대대로 지켜오던 좋은 계모(計謀)가 아니다.” 하고 또 이르되, “과연 어질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있어 인군(人君)과 신하(臣下)의 지위를 정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앞에 명령한 과오를 천자도 또한 알고서 말씀하신 것인데 어찌 감히 천자의 고명(誥命)이 있었던 것으로 핑계한단 말입니까.
그 신하가 되었다는 말도 변명됨이 있습니다. 이는 주자가 〈강목(綱目)〉의 앞에는 이기(食其)가 제(帝)의 큰 스승이 되고,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이 승상(丞相)이 되었다고 썼고, 뒤에는 한(漢) 나라 대신이 아들 홍(弘)을 목 베고 대왕항(大王恒)을 영입하여 황제의 지위에 나아갔다 하였습니다. 그를 제(帝)라 하고 승상(丞相)이라고 쓴 것은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말하여 대신이라 하고 자홍의 목을 베었다 함은 적을 주토(誅討)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재인(武才人 측천무후)이 황제를 칭호한 지가 오래였습니다마는, 적인걸(狄仁傑)이 장간지(張柬之)를 천거하여 재상을 삼았는데 간지가 무재인을 폐위하고 중종(中宗)을 영립하였습니다. 그를 천거하여 재상을 삼은 것은 어찌 신하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재인을 폐한 것은 또한 역적이 된 것을 주토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세를 두고 내려오면서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은 유씨(劉氏)를 편안하게 하였고 장간지가 당(唐) 나라를 다시 회복한 공로가 있다고 칭송은 할지언정 여러 공들(주발(周勃) ㆍ 진평(陳平) ㆍ 적인걸(狄仁傑) ㆍ 장간지(張柬之))이 신하가 되어서 옛 임금을 폐하였다고 하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색과 다못 현보가 비록 인의롭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나, 모두 글을 읽어 옛일을 통한 선비인데 어찌 이런 말들을 듣지 못하였을 것이겠습니까마는 그 미혹(迷惑)됨에 사로잡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특(邪慝)한 말을 만들어 내서 민중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음을 이에서 가히 보겠습니다. 선왕의 법에 말을 조작하여 민중을 현혹시킨 자는 있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간악한 말을 불러 일으켜서 난적(亂賊)의 일을 꾸미는 죄에 있어서야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말하기를, “신우(辛禑)를 영입하여 왕씨를 절사(絶嗣)시켰다고 하는 것은 그 죄를 더 가중되게 하기 위한 말이다.”라고 하기도 하나, 이때를 당하여 충신과 의사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이성(異姓)을 폐출(廢黜)할 것을 의결하여 왕씨를 부흥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왕(僞王) 신우의 무리가 먼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얻어, 천자의 명이 있음과 충신의 의결이 있음을 알고도 창(昌)이 어리고 약하니 그 부(父)를 영립하여 그 사사로운 일을 이루기도 도모하였으니, 이는 신우를 영입하여 왕씨를 사절시킨 것이 아니겠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색(穡)과 현보(玄父)는 그대에게 있어 항렬(行列)이 선배가 되고, 사문(斯文)의 구의(舊誼)와 고구(故舊)의 정(情)이 있을 것인데, 그대가 힘써 공격함이 이와 같으니, 너무 각박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옛날 소식(蘇軾)은 주문공(朱文公)의 전배(前輩)였지만 식(軾)이 감히 괴이한 논의를 하여 예악(禮樂)을 없애고 명교(名敎)를 파괴하니 그를 깊이 꾸짖고 힘써 헐뜯되 조금도 가차(假借) 없이 하면서 곧 말하기를, “감히 옛사람을 공격하여 꾸짖음이 아니라, 옛 성탕(成湯)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상제(上帝)를 두려워 하기에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나도 또한 상제를 두려워하기에 감히 논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무릇 식의 죄가 이론(異論)을 세우고 예법을 멸하기에 이르자 주자(朱子)의 인자하고 관용스런 덕으로도 그를 공격하기를 성탕(成湯)이 걸(桀)을 주(誅)하는 말로써 아울러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이성(異姓)에 작당하여 왕씨를 저지하였다는 것은 조종(祖宗)의 죄인이요, 또 명교(名敎)의 적괴(賊魁)인데 어찌 선배의 인연으로서 용서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저의 말에 “무진(戊辰)년 폐위하고 영입하는 때에 사문에 이의가 있었다.” 합니다. 이른바 이 이의한 것은 왕을 세움을 의논한 것입니다. 또 민중에게 제창(提倡)하기를 “제장(諸將)이 왕씨를 영입하는 일에 대해 의논할 때, 우리 아버지가 이를 저지시켰으니 우리 아버지의 공이 크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와 창의 귀에 깊이 흘러 들렸던 것입니다. 우 창으로 하여금 뜻을 얻었을 것 같으면 사문과 제장이 과연 그의 머리를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경박한 처사를 어떻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왕씨를 세우는 일에 이의(異議)를 하고, 왕씨를 저지한 것을 자기의 공을 삼았으니, 이제는 거짓 신우를 영입한 것에 이의를 하고, 왕씨를 저지한 것을 중죄를 삼음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또 혹은 말하되, “그대가 이미 편지를 올려 사면(辭免)하고는 글을 전하(殿下)께 올려 죄인을 잡아서 묘당에 고할 것을 논하고 있으니 이는 너무 심한 일이 아니냐.” 하였습니다.
반드시 이 말과 같음이 있을진대, 옛날의 제(齊) 나라 일로 말해 보겠습니다. 진항(陳恒)이 그 임금을 시해(弑害)함에 공자께서 목욕하시고 조회(朝會)하여 말씀하시되,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청하건대 주토(誅討)하시옵소서. 또 삼자(三子)에게 고하여 말씀하시되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청하건대 주토하소서.” 하시었습니다.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제 나라에 있으니 노(魯) 나라와는 관련됨이 없을 것 같은 일이요, 공자가 대로(大老)에게 고한 것은 이것도 노 나라의 성사에는 관련됨이 없을 것 같은 일이요, 또 공자께서는 임금에게 진항을 주토할 것을 청하였음에 반드시 삼자에게는 고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또 성인이 그의 넓고 큰 겸용(謙容)한 마음을 지니고서도 들어와서는 임금께 청하였고, 나와서는 삼자에게 고하여 반드시 그 죄인을 주토한 뒤에 말고자 하였음은 진실로 시해하는 역적(逆賊)은 사람마다 주토하기를 원하는 것이오니 천하가 미워함은 한결같다 하겠습니다.
또 노 나라에 살면서도 제 나라에 있는 역적을 보고 참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역적을 보고 참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대부의 뒤에 쫓아서도 이웃 나라의 정사에 참지 못하였거니와 하물며 공신(功臣)의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왕실(王室)의 역적을 보고 참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에 “위인(衛人)이 주우를 죽였다[殺州?]”라 썼습니다. 이에 대해 호씨(胡氏)는 “인(人)은 여러 사람이라는 말이요, 그 주우(州?)를 죽임은 석작(石?)이 도모(圖謀)한 것이니, 우재추(右宰醜)로 하여금 그를 죽이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글자를 고쳐서 사람이라 말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토(誅討)하는 마음을 두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마다 주토할 일이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또 변란(變亂)을 일으키는 신하와 적해(賊害)하는 자식은 사람마다 주토하는 것인데 재상이 주토의 의거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석작이 주우의 연고(緣故)로써 그 자식인 후(厚)를 죽였으니, 군자는 말하기를 “석작은 순수한 신하다. 큰 의리는 친척도 없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할 것 같으면 난적(亂賊)한 사람은 친하고 멀고 귀하고 천하고를 막론하고 모두 주토해 버리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까.
누가 말하기를, “진항(陳恒)과 주우(州?)는 자신이 시해와 역모를 감행한 자이다. 그러나 색(穡)과 현보(玄父)는 일찍이 시해한 일이 없는데 자네는 둘을 비교하여 같다고 하니 이는 또한 지나친 말이 아니냐. 또 어찌 그의 죄악을 무고(誣告)하여 그릇되이 죄악을 입었음을 알겠느냐”고 하나, 이것은 이미 호씨(胡氏)의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임금을 시해하고 임금을 영입하는 것은 종묘(宗廟)는 오히려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종묘를 옮기고 그 국성(國姓)을 고치면 이것은 그 나라를 멸망시킨 것인데 어찌 시군하는 것보다 중죄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성(異姓)에 당여가 되어 왕씨의 종사(宗祀)를 끊어지게 한 것은 실상 호씨가 말한 그 종묘를 옮기고 동성을 멸망시킨 것이 그 죄도 시해함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옛날의 대신도 그의 죄를 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죄수복(罪囚服)으로 갈아입고 그 죄를 청하였습니다. 한(漢) 나라의 곽광(?光)은 무제(武帝)의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서 소제(昭帝)를 옹립(擁立)하였으니 그 공덕이 지극히 컸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상서하여 그 죄를 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감히 금중(禁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자기의 죄를 기다렸습니다. 이런 일로써 볼지라도 진실로 죄를 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마땅히 체읍(涕泣)하여 절실하게 자기의 죄를 청하여야 될 것인데 몸소 유사(有司)에 대하여 그 죄를 변명한 후에라야 그 마음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처자를 권유하여 글을 올리고 병들었음을 핑계삼아 의원을 외사(外舍)에 불러 놓고 어찌 그 죄를 밝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자기에게 죄가 있음을 알려 줌이니 기필코 말이 막히어 변명하지 못함에서입니다. 춘추(春秋)의 난적을 주토하는 법에 비록 그 사람의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오히려 그 뜻을 찾아 주토하였던 것입니다. 하물며 이미 그 자취가 드러남이 이와 같은 사람이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고종(高宗)이 무재인(武才人)을 책봉(冊封)하여 황후(皇后)를 삼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수량(?遂良) ㆍ 허경종(許敬宗)은 같은 재상직에 있을 때입니다. 수량은 임금께 그 처사가 옳지 못함을 힘써 간하다가 마침내 살육의 화를 입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종은 고종의 뜻에 순응하여, “이 일은 폐하(陛下)의 집안일일 뿐이옵니다. 재상이 알 바가 아니옵니다.”라고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에 고종은 경종의 말을 인용하여 마침내 무재인을 황후(皇后)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종은 평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또 5왕자들이 함께 반정(反正)을 협의하다가 다같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지금에 와서 살펴보면, 경종의 계모(計謀)는 성취되었고, 수량(遂良)과 5왕자는 실책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종이 한때 부귀를 누렸다는 것은 몹시 빠른 것이어서 회오리바람이 귀바퀴를 지남과 같이 그 자취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수량과 5왕자의 영특한 성예(聲譽)와 정의의 열백(熱魄)은 역사 기록에 휘황찬란하게 우주를 관통하여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 비록 비천(鄙賤)하고 졸렬(拙劣)한 몸이오나 경종을 수치로 여기고 수량을 사모하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처음에 더불어 같이 도모(圖謀)하였으면 마침내 더불어 같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이 어리석고 졸렬한 몸을 버리지 아니하셔서 반정의 의거에 참여함을 얻었습니다. 간흉한 도당의 화해(禍害)를 두려워하여 내 어찌 감히 묵묵히 구차하게 지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춘추》의 난적을 주토하는 법을 법받아서 공자 석작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종사가 퍽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동문선 제71권   
 
 
 기(記)  이곡(李穀)
 
 
한주 중영객사 기(韓州重營客舍記)
 

지정 기축년 가을에 비가 심하여 마산(馬山) 객관(客觀)의 남쪽 낭사(廊舍)가 무너졌다. 비가 이미 개고 농사 또한 한가하니 고을 사람들이 수축하려 하였다. 군수 박군(朴君)이 말하기를, “남쪽 낭사뿐 아니라 청사도 거의 무너졌는데, 왜 한 번에 새롭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지방에는 재목이 생산되지 않아서 8척 가량 되는 나무도 다른 산 백 리 밖에서 취하여 오고, 또 우리 고을에 사는 자가 대부분 권세 있는 사람에게 가리워져 있으니 누가 우리를 위하여 부역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박군이 말하기를, “어떻게든 해보라. 어려울 것이 무엇 있겠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묵은 집을 헐어 버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하며, 하루아침에 다 철거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심하고 근심하였다. 박군이 이에 아전들의 재주를 헤아려서 능한 자는 큰 집을 맡겨 인부를 많이 주고, 재주가 없는 자는 적게 주어서 이미 나누어 주관하게 하고, 명령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편안히 살 방도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로와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는다’하였으니, 지금 너희들이 이 땅에서 입고 먹으며 근심하는 탄식이 없는 것은 모두 웃사람의 덕택이다. 모든 빈객이 오는 것이 크게는 천자의 말을 선포하는 것이고, 작게는 본국의 명령을 반포하는 것으로 나라의 근본을 근심해서이니 이 관사를 세우는 것은 결국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이번의 역사가 너희들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가 아니겠는가. 하물며 묵은 집의 제도가 추하고 소박하고 또 무너져 가고 있어 사신을 받들어 조서와 명령을 들을 수가 없으니, 군수는 오직 공경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데 어찌 감히 태만하랴.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다. 이에 호수(戶數)를 조사하여 인부를 내고 오직 늙은이와 어린이만 뺐다. 바다를 건너 재목을 취하였으며 험하고 먼 것을 꺼리지 않고 돈을 거두어 돕고 도시락밥을 싸 가지고 먹이는 자가 어깨가 서로 스칠 정도로 많았다. 그 해 윤달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두어 달이 지나서 청방(廳房)과 낭무(廊?)가 지어지긴 했으나, 때가 바야흐로 춥고 어는 때여서 흙을 바를 수가 없어 우선 공사를 중지하게 하였다. 이듬해 2월에 준공이 되려 하는데,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서 면세(面勢)에 맞고, 사치하지도 않고 비루하지도 않아서 시의(時宜)에 적합하였다. 처음에는 의심하고 근심하던 자들도 마침내는 기뻐서 탄복하였고, 지난날에는 세력이 있어 방자한 자들도 지금은 모두 지시대로 따랐다. 또 고을 관원의 일보는 집과 서적을 두는 곳과, 물건을 두는 창고를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규모와 계획이 이미 정해졌는데, 박군이 마침 체직되어 떠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은 정신이 아득하여 부모를 잃은 것처럼 여겼으니, 박군은 역시 능하다 하겠다. 내가 어려서 시골서 자라 백성의 화복이 실지로 수령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고, 우리 시골에서 더욱 그렇게 보았다. 도성에 있게 되어서 우리 아전과 백성들이 가끔 도망하여 숨어서 고을 길이 가시밭이 되고 빈객이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군수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인(印)을 품고 가 버린다는 말을 듣고,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아전과 백성들의 죄일 뿐만 아니라, 땅을 지키고 있는 자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 조서를 받들고 돌아오니, 그 때에 이군(李君) 자(資)가 정사를 한 지가 얼마 안 되었는데, 아전을 통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모두 조목과 법도가 있어서 한 고을 사람들이 이루어진 효과에 매우 놀라워했다. 그런데 일찍이 반 년도 되지 못하여 조정으로 불리어 들어가고, 이군(李君) 자장(自長)이 이어서 정사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국법에 수령이 사는 곳을 공아(公衙)라고 하는데, 이 고을 수령은 거처할 곳이 없어서 백성의 집에 거처하고 있으니 어떻게 고을이 되겠는가.”하고, 그 고을 아전에게 명하여 부서와 부역을 나누어 며칠이 안 되어 완성하였다. 또 관사(館舍)를 차례로 수축하려 하였는데, 조금 뒤에 상사를 당하여 고을을 떠났다. 박군이 부임했는데 능히 두 이군의 재주를 겸하여 두어 해 동안에 이익이 되는 일은 일으키고 해되는 것은 없애어 일이 이루어지고 백성들이 화합하여 실로 전날의 한산(韓山)이 아니었다. 또 성의로 사람을 대우하며 빈객을 접대함에 게으른 모양이 없고 필요에 따라 공급하는 물건과 침상이나 담요, 온갖 기구 등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비되고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관청 창고의 장물(贓物)에서 취하여 쓴 것이고, 조금도 백성에게서 거둔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대단히 성하여 한 고을에서 으뜸이 되었다. 나는 같은 고을 사람으로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다행히 보고 들은 바가 있었는데, 이제 관사가 지어진 것을 보고 그 대략을 쓴다. 아, 이제부터 박군의 뒤에 오는 자가 한결같이 박군을 본받아서 완성되지 못한 공적과 끝나지 못한 일을 마침내 이루어 놓는다면 훌륭한 관리가 되지 못함을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군의 이름은 시용(時庸), 자(字)는 도부(道夫)로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가 전례에 따라 군수로 나왔다 한다. 경인년 3월 일에 기록한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기 기(碁記)
 

이색(李穡)

선정(先正 돌아간 자기 아버지를 가리킴)께서 다른 기예(技藝)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바둑만은 대강 묘리를 얻어서 당시의 능수(能手)들도 혹 양보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그 기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상제가 되어 서울에서 내려와 마음이 쓸쓸하여 학업을 그만두었는데, 소상(小祥)을 마치고 서질(書帙)을 정리하다가 바둑알이 나와 살펴보니, 하나는 조개로서 흰 바탕에 누렁 무늬가 있고, 다른 하나는 돌로서 옥같이 곱고 검은데, 갈고 다듬은 것이 정교하여 둥글둥글한 것이 마치 별 같아, “선비로 자리 위에 보배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바둑알은 겨우 2백 개이며 파도에 씻기고 깨진 돌로 보충하여 겨우 부족이 없었다. 하루는 손군(孫君)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중 계홍(戒弘)에게서 얻은 것인데, 영선대부(令先大夫 이색의 아버지)를 채시(綵侍)하실 때 우리 아이 기(起)가 올린 것이요.”하고, 곧 찾아다가 개수를 세어 보고 말하기를, “처음에는 3백 60개가 넉넉하였는데 이제 남은 것이 어찌 이렇게 적은가.”한다. 내가 그의 말한 뜻을 살펴보니, 그의 마음 속에 개연(慨然)함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하니, 비록 조그만 물건이라도 반드시 명수(命數)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니, 군자(君子)로서 알아 두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근원을 찾아보면 계홍(戒弘)의 위에 이것을 만든 이가 누구였으며 전한 이는 누구였을까. 계홍으로부터 손(孫)에게로, 손으로부터 이(李)에게로 전해지는 동안 잃어 버린 것이 반(半)의 반이니, 이제 여기를 지나서 또 어느 사람에게 전해질 것인가. 점점 흩어지고 잃어버릴 것인데, 어느 사람의 손에 가서 다 없어지고 말 것인가. 또 우리 선비의 소용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부자나 호협객(豪俠客)의 노리개가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개연히 고금(古今)을 생각하고 물리(物理)를 자세히 살피면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으리요. 원(圓 바둑알)은 동(動)하고 방(方 바둑판)은 정(靜)하는 원리와 불리한 모양과 사나운 기세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는 미처 말할 겨를이 없다.
삼가 기록하기를, “흰 알 1백 40개, 검은 알 1백 9개”라고, 두 통을 써서 한 통은 손군에게 보내어 이 바둑알을 보내 준 데를 알게 하고, 한 통은 이 바둑알이 온 곳을 기록해서 스스로 간직하여 혹 잃어버림이 없기를 바란다.


[주D-001]채시(綵侍) : 초(楚)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늙으신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채색이 화려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어리광을 부렸다는 고사를 가리킴. 자식이 부모를 봉양함을 뜻함.

 

 

 


동문선 제72권   
 
 
 기(記)  이색(李穡)
 
 
차군루 기(此君樓記)
 

내 집이 진강(鎭江) 위에 있어 성흥산(聖興山)과 거리가 겨우 30리라, 일찍 산중을 왕래하여 보광장로 남산공(普光長老南山公)을 뵈었는데, 갈 때마다 누기(樓記)를 청하며 말하기를, “선대부(先大夫)를 모시고 있을 때에 일찍 한 장의 글을 얻어 이 누(樓)의 영광이 되기를 청하였더니, 공(公)도 기꺼이 허락하셨는데, 세상일이 변하여 공은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 누(樓)의 불행을 슬퍼한 지 오래 되었소. 그렇다면 우리 누의 기문을 쓰는 것은 선공(先公)의 뜻이니 그대의 도리로서 사양하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내가 바로 상중(喪中)에 있어 틈을 얻지 못하였었는데, 이제 복(服)을 벗고 과장(科場)에 나가 놀다가 돌아와서 그 집에 갔더니, 또 말하기를, “우리 누가 이룩된 지 벌써 12년[一紀]이 넘었는데, 이 누에 오르내리는 사람으로 유자(儒者)는 몇이며 석자(釋者)는 몇이었는가. 그러나 지금 벽에는 글 한 자 붙은 것이 없으니, 어찌 그대가 장원(壯元)되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또 산중의 승경(勝景)은 하나뿐이 아니지만 누의 승경(勝景)은 대나무에 있으므로 내가 차군(此君 대나무의 별명)이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차군의 뜻을 아는 이가 드무니 이 때문에 내가 유독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오.”한다. 내가 차군(此君)과는 일찍이 사귀고 있었으므로 공이 비록 명하지 아니하여도 장황하게 기록할 것인데, 하물며 이와 같이 부지런히 청하니 어떠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나는 만생(晩生)이라 어찌 감히 말할 바가 있으리오. 대나무를 어진 사람과 같다고 한 말은 낙천(樂天) 의 기(記)에서 자세히 말하였고, 장부(丈夫)와 같다는 설은 목지(牧之)의 부(賦)에 갖추어 있으며, 우칭(禹?)은 다른 사물들과 잘 어울리는 형상을 모두 말하였고, 관부(寬夫)는 사정(邪正)의 분별을 세웠으며, 여가(與可) 는 그 정을 얻어서 서화(書畵)에 맞추었고, 자첨(子瞻 소식(蘇軾)의 자)은 이치에 밝아서 글로 표현하였다. 진(晉) 나라의 칠현(七賢)과 당 나라의 육일(六逸)도 다 차군에 힘입어 유명해진 것이다. 그 나머지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웅문걸구(雄文傑句)로 차군을 우익(羽翼)한 것이 어느 정도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내가 비록 뜻을 내어 그 곧고 굳은 절개를 말하려 하나 반드시 고루한 데 지나쳐서 소산(蕭散)한 무리에게 꾸지람을 당할 것이요, 달을 보내고 바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하려 하나 반드시 천박한 데 지나쳐서 독후(篤厚)한 사람에게 웃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허튼 말로써 옛사람 이기기를 구하리오. 나는 기(記)를 짓지 않음이 가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단지 부러운 것은 명선 노사(名禪老師 덕이 있어 이름 높은 중들)가 재(齋)를 파한 뒤에 정신을 풀고 마음을 펴서 이 누 위에서 서로 거닐 적에 대숲으로부터 우수수 하고 들리는 소리가 있으면, 고요히 얽혔던 객진(客塵 번뇌)이 환연(渙然)히 얼음 녹듯 할 것이요, 공적(空寂)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열뇌(熱惱 고뇌)가 맑고 서늘한 심경으로 화할 것이니, 차군의 도움이 이미 많지 아니한가. 내가 여기에 대해서는 말이 없을 수 없다. 남산공(南山公)은 우리 선인(先人)의 늘그막의 방외(方外 자기 교가 아닌 불교)의 교우(交友)이다. 어떤 사람이 공(公)에 대해서 내게 묻기에, 나는 곧 대답하기를, “차군을 알면 남산을 알 것이다.” 하였다. 지정 계사년 6월 어느 날 한산(韓山) 이(李)는 기한다.


[주D-001]낙천(樂天) : 당(唐) 백거이(白居易)의 자(字). 그가 지은 〈양죽기(養竹記)〉에 대나무를 어진 사람에게 비하였다.
[주D-002]목지(牧之) : 당(唐) 두목(杜牧)의 자. 그 〈죽부(竹賦)〉에 대나무를 장부(丈夫)에 비하였다.
[주D-003]우칭(禹?) : 송(宋) 왕원지(王元之)의 이름. 그 〈죽루기(竹樓記)〉에 여름의 비, 겨울의 눈, 거문고 칠 때, 바둑 둘 때에 다 좋다고 하였다.
[주D-004]관부(寬夫) : 송 나라 사람으로 성명은 채거후(蔡居厚)이다. 그는 그가 지은 《채관부시화(蔡寬夫詩話)》에서 대를 논하였다.
[주D-005]여가(與可) : 송 나라 사람이니, 성은 문(文), 이름은 동(同), 여가는 자인데 소식(蘇軾)과 동시대 사람으로 대를 잘 그려서 소식이 그에게 대 그리는 것을 배웠다.
[주D-006]진(晉) 나라의 칠현(七賢) : 진(晉) 혜강(?康)ㆍ완적(阮籍)ㆍ산도(山濤)ㆍ향수(向秀)ㆍ유령(劉伶)ㆍ왕융(王戎)ㆍ완함(阮咸) 등 7명으로서 하내 죽림(河內竹林)에 있어서 죽림칠현이라 하였다.
[주D-007]당 나라의 육일(六逸) : 이백(李白)ㆍ공소보(孔巢父)ㆍ한준(韓準)ㆍ배정(裵?)ㆍ장숙명(張叔明)ㆍ도면(陶沔) 등 6명으로서 조협산 죽계(組狹山竹溪)에 있었으므로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하였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유사정 기(流沙亭記)
 

유사는 〈우공(禹貢)〉에 실려 있는 왕의 교화가 미친 지역이다. 그러나 이것을 정자의 이름으로 삼은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옛사람이 한가롭게 놀고 거처하는 곳에 현판을 할 적에, 진실로 유명한 산수(山水)의 이름을 붙이거나 혹은 매우 아름답거나 매우 나쁜 것을 써 걸어서 권계(勸戒)하는 뜻을 붙이거나, 혹은 그 선대의 향리(鄕里)에 대하여 그 근본을 잊지 못할 뜻을 기록할 것이나, 멀리 떨어진 지역, 낮고 악한 고을, 인물이 나지 아니하고 배와 수레가 이르지 못하는 중국의 유사(流沙) 같은 이름은 사람이 말하기도 싫어하고 일컫기도 부끄러워하는데, 하물며 대서특필하여 지게문과 창 뒤에 써 붙이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오형(吾兄)의 뜻 둠이 반드시 남보다 뛰어남이 있음을 알겠다. 천하의 큼[大]은 성인의 교화와 더불어 무궁한 것이나 이는 오히려 외형이요, 한 몸의 작음이 천하의 큼[大]과 더불어 같다는 것은 내면이다. 그 외형으로부터 보면 동쪽으로는 부상(扶桑)에 닿고, 서쪽으로는 곤륜(崑崙)에 닿았으며, 북쪽은 초목이 나지 아니하고, 남쪽이 눈이 내리지 아니하는 곳까지 성인의 교화가 젖고 덮이고 미쳤다. 그러나 통일되었을 때는 적고 분열되었을 때는 항상 많으니, 진실로 마음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내면으로부터 보면 힘줄과 뼈는 묶였고 정(情)과 성(性)은 미미하나 마음은 그 가운데 있어서 우주를 포괄하고 사물에 응대하여 위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지혜로도 막을 수 없으니 우뚝한 나[我]라는 하나의 사람이 비록 한쪽 끝[極]에 치우쳐 가만히 엎드려 그윽히 숨어 있으나 그 가슴속 도량(度量)에는 성인의 교화가 미치는 사방의 먼 곳이라도 이 마음에 벗어남이 없을 것이다. 형의 뜻이 역시 이와 같은 것인가. 내가 일찍이 사방(四方)에 유람할 뜻을 두었으나 지금은 이미 지쳐버렸다. 신축년 겨울에 동쪽으로 피란갔다가 비로소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니, 여기는 우리 외가인데 우리 형이 살고 있었다. 영해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서 일본과 이웃하였으니, 실로 우리 나라[東國]의 극동(極東)이다. 지금 내가 다행히 한 모퉁이에 가 보았으니 그 극(極)한 곳을 극진히 미루어 보면 다른 것도 돌이켜 알 수 있다. 하물며 유사(流沙)와 같이 상대하고 있는 곳은 어떠하겠는가? 그 위에서 술잔을 들며 기(記)하기를 청하므로 기꺼이 쓴다. 지정(至正) 임신년.


동문선 제72권   
 
 
 기(記)
 
 
인각사 무무당 기(麟角寺無無堂記)
 

석씨(釋氏)의 교(敎)는 역외(域外)에서 들어온 것인데도 역중(域中)에 본래 있던 것을 누르고 홀로 존귀해졌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역중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화복인과(禍福因果)의 말이 이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석씨를 따르는 자는 보통 다 평범한 것을 미워하고 속된 것을 싫어하며, 명교(名敎)의 구속에 따르기를 즐기지 않는 호걸(豪傑)의 재주들이다. 석씨가 인재를 이와 같이 얻으니, 그 도(道)가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이러므로 석씨를 심히 거절하지 아니하고 혹은 더불어 좋아하는 것은 대개 그 취할 바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조계 도대선사 서공(曺溪都大禪師?公)이 새로 총명(寵命)을 입어 구산(九山)의 영수(領袖)가 되어 낙수(洛水) 위에서 상감을 뵈니 자리를 주어 조용히 앉게 하니 가히 영광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덕행(德行)을 보면 평상시와 다름이 없으니, 진실로 마음이 담연(淡然)하여 누(累)가 없는 것이다. 내가 낙서(洛西)의 여러 절에서 놀다가 우연히 남장(南長)에 이르니, 창공(?公)이 한 번 보고 혼연히 그가 주지하는 인각사 무무당(麟角寺無無堂)의 기(記)를 지어 주기를 청하며 그 내력을 말하였다. 대개 이 절은 불전(佛殿)이 높은 자리에 있고 뜰 중간에는 탑이 있으며, 왼편에는 월랑[?], 오른편에는 선당(膳堂 식당)으로 되었는데, 왼편은 가깝고 오른편은 멀어서 배치가 맞지 아니하다. 이 때문에 무무당을 선당 왼편에 세우니, 이에 좌우의 거리가 고르게 되었다. 그 집의 됨됨이를 기둥으로써 계산하면 다섯으로 된 것이 셋이요, 간 수로써 계산하면 다섯으로써 된 것이 둘이니, 이는 공(公)의 창작이 새롭고 교묘함이다. 신축년 8월에 시작하여 올 7월에 일을 마치었는데, 8월 갑자일에 총림법회(叢林法會)를 열어 낙성(落成)을 하였다. 이미 이 집이 있어서 선당이 왼편으로 치우치고 또 협소하니 오른편으로 옮기면 배치와 제도도 논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혹 힘이 계속할 수 없을 듯하니 뒷사람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 공의 뜻이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공이 도를 독실히 믿는 까닭으로 명예가 날로 넓어지고, 착한 일에 부지런하기 때문에 일이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무릇 종파를 붙들고 교를 세우는 이가 매우 많으나 다른 석자(釋子)는 감히 바라지 못할 일이다. 하물며 인각(麟角)이 마음 구할 곳이 없음에랴. 이런 까닭에 비록 일이 많은 때이나 공역(工役)을 멈추지 아니하고, 윗사람의 뜻을 받아 맑은 법규를 행하여 후학(後學)에게 은혜 베풀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니, 공이 마음쓰기를 부지런히 한 것이다. 어찌 감히 공경히 써서 공의 후계자에게 고하지 않을 것인가. 그 무무(無無)의 뜻은 이 당(堂)에 사는 이는 다 알겠기로 이를 논하지 아니한다. 지정 임인년에 기한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영광 신루 기(靈光新樓記)
 

신전자 군(申展子君)이 영광(靈光) 군수가 되어 민폐를 없애고 인화(人和)로 인도하니 정무(政務)가 한가하였다. 공관(公館)을 둘러보니 누거(樓居)가 아직 없었다. 신군이 말하기를, “누거란 막히고 답답한 마음을 화락하게 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지, 미관(美觀)을 위하는 것이 아닌만큼 사람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다. 하물며 내가 이 고을을 지키면서 왕인(王人 왕명을 받고 오는 사자)을 예로 대접하게 되니, 왕인은 국사에 분망하여 매양 미치지 못할까 생각하므로, 뜻은 진실로 잠깐 동안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지금 너의 고을은 이미 답답한 마음을 화락하게 할 수가 없고 더욱 누거가 없으니, 어찌 정신을 상쾌하게 할 수 있으리오. 나는 오직 왕인을 섬기는 예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너희 부로(父老)들은 누거 세우기를 도모하라.” 하였는데, 이에 여럿이 달려와 다투어 힘써서 재목을 모으고 공역을 다스려서 열 달 사이에 아름답게 한 고을의 훌륭한 집이 되었으니, 신군은 유능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영광이 신군을 얻음과 신군이 신루(新樓)를 지음이 옛날이 아니고 지금에 와서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대나무는 푸르고 연꽃은 향기로우며 산빛과 바다 기운은 멀고 가까운 데서 서로 비추는데, 물소리가 또 그 사이에서 들려온다. 무릇 이 누에 오르는 이는 그 일에 분망함을 잊을 뿐 아니나, 물 흐르는 소리가 없었다면 또 어찌 여기에 이르는 다행함을 얻었으리요. 진실로 그 경지가 기이하다. 같은 해에 권길부(權吉夫)가 신군의 뜻으로써 나의 글로 기하기를 청하므로, 내가 허락하고는 틈을 내지 못하다가 이번 어버이를 뵈오러 집에 가니 독촉이 급하여 곧 그 자리에 서서 쓰게 되었다. 글의 졸렬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 왕인(王人)된 이에게 고하는데, 한갓 말하기를, “나는 왕인이니 누가 감히 나를 모멸할 것이냐.”하지 말고, 방탕하게 놀지 말며 욕심대로 하지 말고 고을을 지키는 이의 뜻을 저버림이 없으면 가할 것이다. 지정 을사년에 기한다.

 


동문선 제72권
  
 
 
 기(記)이색(李穡)
 
 
풍영정 기(風詠亭記)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공(金公)이 공관(公館) 동편에 정자를 짓고,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정자 이름과 기(記)를 지어 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누가 더운 기운을 씻어버리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상주(尙州)의 괴로움을 내가 이 정자로써 오히려 물리쳤으니 그대는 이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신축년 겨울에 상감이 남쪽에 거둥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상주로 거둥하였는데, 그때 색(穡)이 승선(丞宣)이 되어 조석으로 시종하였으며, 가을에 이르러 대가(大駕)가 청주로 옮겼었는데, 과연 더위를 당하여 뜨거움에 곤란을 겪었다. 그때에 매우 한스러웠던 것은 이 고을이 신라 때부터 큰 고을이었는데, 어찌 정자와 놀이터가 이처럼 없을까 하였는데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지금 나와 동년(同年)인 박헌납(朴獻納)의 기록과 문인(門人) 김남우(金南遇), 족인(族人) 김계(金桂)의 일컫는 말을 들어 보니, 이 정자는 서늘하여 바람에 더위를 씻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니, 그 즐겁고 다행함이 어떠하였겠는가. 무릇 사시의 기운이 천지 사이에 유행하여 춥고 덥고 따뜻하고 서늘함이 같지 아니하므로, 사람이 거기 적응하게 하는 것도 각각 그 도(道)가 있다. 그러나, 소나무ㆍ돌ㆍ물ㆍ샘과 같은 산수의 흥취와 거문고ㆍ피리ㆍ술잔의 행락에 마음에 주장함이 있으면, 이른바 추위와 더위가 목전에 유행하는 것은, 족히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리니 무엇 때문인가. 마음을 잃게 하는 것은 바깥 물건이다. 이 두 가지를 내어놓고는 천시에 순응하고 내 뜻을 펴는 것은 오직 소풍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무우(舞雩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에서 소풍하고 시를 읊고 돌아오면 가슴속이 유연(悠然)하여 한 점의 구애도 없는데, 하물며 더위ㆍ비ㆍ추위와 같은 원망이 이 마음을 더럽힘이 있으리오. 부절(符節)을 갖고 이 고을을 지나는 이로 하여금 봄옷을 이미 입을 때와 같은 화창한 기운이 넘치게 한다면 상주 백성은 다행할 것이니, 감히 풍영정(風詠亭)이라 이름하기를 청하였다. 무릇 공역(工役)의 본말과 같은 것은 보통 일이다. 그러나, 또 기록할 만한 것이 네 가지 있다. 공이 금년 초여름에 일을 보게 되면서 바로 공관의 무너지고 헐어진 것을 수리하고자 하니, 홀연 폭풍이 일어나 큰 나무가 뽑혀서 좋은 재목이 산같이 쌓였으니, 이것이 그 첫째요, 여러 아전들을 부(部)로 나누고 자신이 역사를 감독하여 한 백성도 괴롭히지 아니하며, 여러 공인들이 힘을 다하여 이미 공간을 수리하고 정자에까지 미쳤으니 이것이 그 둘째요, 풍영정을 처음 경영할 적에 더러운 흙을 걷어 내고 방향을 살펴서 재고 다듬으니 옛날 터가 완연하였다. 대개 그 지휘하고 계획함이 옛사람과 똑같았으나 그 제작하는 묘함은 더 넘쳤으니 이것이 그 셋째요, 정사에 임해서는 은혜와 위엄이 함께 나타나서 일이 이루어지고, 백성이 화합하며 명예와 공적이 뛰어나고 조그마한 공역이라도 또한 차례가 있었으니 이것이 그 넷째이다. 담을 둘러서 동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어 심고 가꾸니 둘러보면 널찍하고 시원하여, 또 여러 산봉우리가 옹위(擁衛)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 정자의 우익(羽翼)이니 간략하게 기록하여도 가하다. 후일 여기에서 바람을 쏘이고 시를 읊조리면서 “나는 증점(曾點)에게 허락한다.”고 한 대의(大意)를 깨닫는 이는 그 무엇으로 우리 김공에게 보답할 것인가. 아울러서 고한다. 김공의 이름은 남득(南得)이며 경진년에 진사(進士)하고 안팎에 출입하여 명망이 있어,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사양하지 아니하고 기(記)한다. 12월 10일.


[주D-001]나는 …… 허락한다 : 《논어(論語)》에 있는 말인데,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 그 뜻을 말하라 하니, 다른 제자들은 다 벼슬하기를 원하였으나 증점(曾點 이름은 석(晳), 증자(曾子)의 아버지)만은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차림을 하고 어른과 어린이 각 5ㆍ6명과 더불어 기(沂)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며 시를 읊고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니, 공자가 그 뜻을 칭찬하였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진종사 기(眞宗寺記)
 

지정(至正) 병오년 여름 5월에 시중(侍中) 유공(柳公) 이 경영하는 진종사의 공역을 마치자, 운치 있는 중 33명을 청하여 그들이 말하는 《화엄법(華嚴法)》을 강(講)하여 낙성을 고하였는데, 옷과 바리때ㆍ공양기구가 모두 새롭고 넉넉하였다. 임금이 듣고 향폐(香幣)를 내려서 그 모임을 빛나게 하니, 공경(公卿) 진신(搢紳)이 달려와서 찬탄하였는데 열흘 동안이나 빈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가서 보니 서까래 끝과 서까래의 그림과 단청이 웅장하지도 아니하고 초라하지도 아니하며, 사치하지도 아니하고 누추하지도 아니하며, 불상(佛像)ㆍ영개(纓盖)의 장식과 화등(華燈)ㆍ음악 등 설비가 아름답게 완비되었고, 중의 방과 손님의 자리가 엄숙하게 갖추어져 있고 곳간과 부엌에는 매일 쓰는 물품이 정결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일을 시작한 때를 상고하면 갑진년 초여름이었는데 날마다 5백 명이 넘는 사람을 부렸다. 그 집의 칸수를 계산하면 60칸이 넘는데, 비용은 관청 재물을 축내지 아니하였고, 역사는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이같이 빨리 이루었을까. 공이 내게 말하기를, “내 뜻을 그대가 알 것이니 기(記)를 써 주지 않겠는가.” 하므로 내가 생각하기를, “공의 조부 영밀공(英密公 유탁의 조부 유청신(柳淸臣))이 지원(至元) 연간에 중한 명망이 있어 그 뒤에 덕종(德宗) 때 재상이 되고, 의종(毅宗) 때도 재상이 되어 몸이 상상(上相)의 자리를 맡기를 13년 동안이나 하였다. 일찍이 이 절을 중건하고 그 서편 언덕에 장사하여 자손이 설과 명절에 성묘하였다. 절이 오래 되어 곧 쓰러지게 되니 공이 슬퍼하며 생각하기를, ‘불초한 손자가 선조의 업적을 잇게 된 것은, 진실로 선조가 애써 경영하고 미행(美行)을 드러내 우리 자손을 도운 때문이다. 자손의 반열에는 내가 가장 어른이 되었으니 선조의 뜻을 이어받들지 못하면 그 벌을 어찌 면하리오. 하물며 이 절이 우리 산소의 지역 안에 있으니, 어찌 헐어서 새로 세우고 또 당(堂)을 만들어서 우리 영밀공(英密公)의 화상을 걸어 두고 제사 지내 은공을 갚으며, 불교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복을 비는 여가에 무량광(無量光)을 불러서 명복(冥福)에 도움이 되게 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으리라.” 하였다. 이것이 진종사를 다시 일으킨 까닭인데 시중공(侍中公)의 평시의 뜻이기도 하다. 시중공이 한결같이 가법을 지켜서 이미 성한 이름과 넓은 도량은 조정에서도 덕망으로 으뜸이 되기 때문에, 능히 서울을 회복하고 난리를 평정하며 나라를 일으켜 북비(北鄙)의 적을 막은 것이다. 묘당 위에서 조용하게 웃으며 말하면서, 위태한 나라를 태산과 같은 튼튼한 나라로 바꾸어 놓았으니, 대개 그 한 번 말을 내고 한 번 일을 행하는 데에도 모두 선조의 법을 따르지 않음이 없었는데, 이 절의 조그마한 일이야 어찌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절을 일으킨 데에서 또 족히 공의 효성이 독실한 일단을 보겠다. 대개 효도는 이(理)의 근본이니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윗사람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 모두 이 효도에서 나온 것이니 이 절을 일으켜 선조의 뜻을 잇고 웃사람의 은혜를 갚는 것은 그 도리가 당연한 것이다. 어찌 화복의 말에 현혹되어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사치와 화려를 극진히 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세상에서 호걸이라 일컫는 이는 모두 이(불교)를 따르고 우리(유고)는 돌아보지 아니하니, 우리 도가 끊어지지 않은 실과 같이 미약한 것은 장차 누구를 허물할 것인가. 절의 흥하고 폐하는 전말은 옛책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논술하지 아니한다.


[주D-001]시중(侍中) 유공(柳公) : 유탁(柳濯). 고려 말년의 재상.


동문선 제72권   
 
 
 기(記)
 
 
승련사 기(勝蓮寺記)
 

남원부(南原府)는 많은 사람들이 산수의 명승이라 일컫는다. 불도들이 이 사이에 절을 지어 대개 빼어난 경지를 모두 점거하였는데, 승련사는 그 중에도 으뜸이 된다고 정문호 군(鄭文好君)은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또 주지 대선사(大禪師) 각운(覺雲)의 편지로써 그 시말을 기록하기를 청한다. 내가 좋은 산수에 가서 놀지 못함을 매양 한스럽게 여겨, 그 사이에 내 이름을 걸어 두는 것이 진실로 내 소원이었으며, 각운선사의 어짊을 또 내가 일찍 흠모하는 까닭으로 기꺼이 서술한다. 절이 부중(府中)과는 동북편 30리 거리로서 옛 이름은 금강사(金剛寺)였었는데,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름이 중긍(中?)이라고 하는 홍혜국사(弘慧國師)라는 이가 내원당(內願堂)으로부터 늙어서 물러나와 살았는데, 집이 낮고 누추하여 일찍이 더 넓히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 그가 이미 죽고 나서 대선사 졸암(拙菴 이름은 연온(衍?))이라 하는 이가 조계(曹溪)의 장로(長老) 나이로서 홍혜(弘慧)의 문도들에게 추양(推讓)을 받고, 그들이 입을 모아 언약을 하고 졸암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니, 졸암이 곧 공사를 살피고 재물을 맡았으며, 그 중생의 시주를 모은 것은 종한(宗閑)이라는 이가 있어 주간하였다. 그 현관은 ‘승련사’라 고치고, 을축년에 시작해서 신축년 봄에 일을 마쳤다. 불전ㆍ승무(僧?)ㆍ선당(膳堂)ㆍ선실(禪室)ㆍ객실ㆍ곳간ㆍ부엌 등 칸수를 계산하면 모두 1백 11이며, 불전 기구와 일상 쓰는 물건이 하나도 완비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다 졸암의 바랑에 모은 재물과 종한의 애쓴 힘으로 인하여 이룩된 것이다. 무량수불의 상(像)을 전의 중앙에 두었는데, 이는 졸암이 전적으로 맡아 한 것이요, 대장경을 찍어서 전(殿)의 좌우에 쌓아 놓은 것은, 고을 사람이 같이 시주로 한 것이다. 종[奴] 몇 명을 희사하였으니 곧 졸암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다. 무술년 가을, 그가 죽게 될 적에 친족으로는 조카가 되고 불법으로는 후계자가 되는 각운선사에게 절 일을 부탁하였다. 바깥담이 아직 없어서 운사(雲師)가 쌓으니 계묘년 여름에 절 일이 끝났다. 내가 말하기를, 불도들은 그 집을 사치하게 할 뿐 아니라, 그 후계자에게 전해 줄 것을 도모하는 것이 떳떳한 일이다. 지금 금강과 승련, 두 이름의 뜻이 어떤 것이 중하고 어떤 것이 경하기에 반드시 저것을 취하고 이것을 버렸는가. 그러나, 졸암이 기필코 그 현판을 고친 것은, 승련사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1대가 되고 다시 전하여 2대가 되어서, 백천 대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보인 것이니 그 뜻이 가히 멀다고 이르겠다. 그가 운사에게 전할 적에 친(親)과 법(불법)으로써 하였으니 또한 불만이 없었다 하겠다. 다만 운사가 사람을 얻어 전함을 또한 능히 그 스승과 같이 할지 못할지는 알지 못하겠다. 나는 오래 전해갈수록 그 뜻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부터 다시 백천 대를 지나서 승련사의 경내에 가시나무가 나지 아니하게 하면 족하겠고, 친족으로 대를 잇거나 불법으로 대를 잇거나 내가 감히 알 바 아니다. 졸암의 성은 유씨(柳氏)요, 문정공(文正公) 경(璥)의 증손이며 감찰대부 정(靖)과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요, 판밀직사사 이존비(李尊庇)의 외손이다. 학수 사선(學首四選)에 참여하고 과시(科試)에 나가서 갑과에 합격하였고, 명산에 두루 머물러서 불도의 명예가 성하였었다. 운사는 유씨의 조카로서 학문이 깊고 행실이 높으며 필법이 일세에 절묘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청출어람이라 하였다. 지정 24년 6월 일 기(記).

동문선 제72권   
 
 
 기(記)
 
 
서경 풍월루 기(西京風月樓記)
 

금상 19년 가을 7월에, 개성 윤(開城尹) 임공(林公)을 안주(安州)의 장관으로 삼으니, 얼마 안 가서 군사와 정사가 다 잘 이루어졌으며, 그 해 겨울 11월에 서경 윤(西京尹 평양 부윤)으로 옮겨 그 도(道)를 순찰하여 군사를 통어하고 백성을 위로하니, 위엄과 은혜가 더욱 나타나서 이듬해 2월에 밀직부사로 올랐으니 그 공을 표창한 것이다. 이미 그 감화가 크게 행해져 사람들이 복종하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5월 첫 길일에, 영선점(迎仙店) 옛터에 자리를 잡아서, 기둥 다섯 개의 누(樓)를 짓고 도벽과 단청을 하였는데 다섯 달을 지나서 이룩되었다. 누를 바라보니 나는 듯하고 동남쪽 여러 산이 자리 아래에 있는 것 같으며, 강물이 그 앞을 지나간다. 좌우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으니, 올라서 바라보는 좋은 경치는 부벽루와 서로 백중(伯仲)이 되겠고 화려함은 그보다 더 낫다. 이미 상당(上堂) 사람 승지(承旨) 한맹운(韓孟雲)이 크게 쓴 ‘풍월루(風月樓)’석 자를 얻어서 걸고, 또 한산 이색에게 기(記)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기하기를 아끼는 것은 내가 능히 내 누의 이름을 짓지 못함으로써 그런 것이다. 내가 여기에 흥취를 붙인 것이 고루하지는 아니하니, 그대가 능히 그 뜻을 펴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의 고매한 지식과 넓은 도량은 대개 한 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으니 또 누의 이름도 이와 같도다. 바람이 불어오는데 방향이 없이 불고 달이 가는데 자취 없이 가니, 넓어 그 끝을 알지 못하겠다. 비록 도(道)가 대허(大虛)에 있어 본래 형상은 없으나 능히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기(氣)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크면 하늘과 땅이 되고, 밝으면 해와 달이 되며, 흩어지면 바람ㆍ비ㆍ서리ㆍ이슬이 되고, 솟으면 산악이 되며, 흐르면 강과 내가 된다. 질서정연하여 군신ㆍ부자의 윤리가 되고, 찬연하여 예악ㆍ형정(刑政)의 기구가 된다. 그 세도(世道)에 있어서는 맑고 밝아서 다스림이 되고, 더럽고 탁하여 어지러움이 되는 것은 다 기운의 형상하는 바이다. 하늘과 사람은 간격이 없어서 감응(感應)이 어그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리가 펴지고 정치와 교화가 밝아지면, 해와 달이 궤도에 순행하고, 바람과 비가 때를 맞추면, 경성(景星)ㆍ경운(慶雲)ㆍ예천(醴泉)ㆍ주초(朱草)와 같은 상서로움이 이르는 것이요, 윤리가 무너지고 정치의 교화가 퇴폐하면, 해와 달에 흉년이 나타나고 바람과 비가 재앙을 이루며, 혜패(彗?) 가 날고 흐르며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마르는 변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즉,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의 기틀은 사람의 일을 살펴서 볼 수 있을 것이니,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의 형상은 바람과 달에 구하면 족할 것이다. 지금 중원이 겨우 평정되어 사방에 근심이 없으니 이른바 다스려진 세상이다. 우리 나라가 한가한 때를 당하여 정치와 형벌을 닦아 백성이 편하고 재물이 성하며, 강과 산이 맑고 화려하여 어디에서나 음풍농월하지 못할 곳이 없다. 더욱이 서경(西京)은 나라의 근거가 되고 서북을 제압하며, 백성과 선비가 업을 즐기니 기자(箕子)의 유풍이 있다. 이 누는 한 부(府)의 승지(勝地)를 차지하고 있어서 손님이 이 곳에 이르면 한 잔 올리며, 백 번 절하고 투호놀이하며 맑은 노래를 부를 적에 바람이 불면 몸이 서늘하고, 달이 뜨면 정신이 맑으며 좌우에는 연꽃이 향기로와서 정경이 유연(悠然)하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그것이 곧 태평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익(?)새가 물러감을 성인이 《춘추》에 기록하였고, 소가 헐덕거림을 《사기》에 기록하였으니, 세상을 경계하는 바가 지극하였다. 이것이 공의 그윽한 뜻을 붙인 까닭인가. 천하를 위하여 즐거워하고 천하를 위하여 조심하는 이가 아니면 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세월을 허송하여 의리를 해치고 교화를 상하게 하는 것이니, 군자로서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뒤에 오는 사람은 더욱 삼갈지어다.” 하였다.


[주D-001]혜패(彗?) : 혜성(彗星)과 패성(?星). 고대에는 이 별들이 나타나면 재앙이나 전쟁이 발생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주D-002]익(?)새가 …… 기록하였고 : 익(?)새는 물새인데 기후를 따라 다니는 새이다. 그런데, 익새가 한참 올 때에 돌아간 것은 기후의 이변이 생긴 것이므로 공자가 《춘추》에 ‘육익퇴비(六?退飛)’라 기록하였다.
[주D-003]소가 …… 기록하였으니 : 소가 헐떡거림은 더위에 못이겨서 그러는 것인데, 아직 봄철인데도 그러는 것은 기후의 이변이 아닌가 하여, 한 나라 때에 병길(丙吉)이라는 정승이 소임자에게 물어본 일이 있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남원부에 새로 둔 제용재의 기[南原府新置濟用財記]
 

금상 8년 봄에, 간관(諫官)인 익재 시중(益齋侍中)의 손자가 남원 부사로 쫓겨나간 지 돌이 못 되어 선정(善政)의 이름이 남방 수령들 가운데서 최상이 되었다. 내가 이를 적어서 《순리전(循吏傳)》에 붙이려고 한 것이 오래였었다. 국자학유(國子學諭) 양이시 군(楊以時君)은 남원 사람인데, 솔직하고 성실하며 말이 또 미더웠다.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사의 어진 정사는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서 금석(金石)에 새기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나, 오직 그가 설치한 제용재(濟用財)는 무너지기 쉬울까 두려우니, 진실로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을 알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영영 폐가 없다고 보장하지 못할 것이므로, 선생이 글을 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한다. 나는 익재 선생에게서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기 때문에 진실로 그 어진 손자가 있는 것을 기뻐하였고, 또 일찍이 간원(諫垣)의 동료로서 더욱 깊이 서로 알았기 때문에 기꺼이 양군의 말을 좇아 그 일을 상고해 보니, 양군이 말하기를, “매양 사자(使者)가 와서 부세 바치기를 독촉할 때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반출하지 못하면, 대충(貸充)하는 까닭으로 혹 파산하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부사가 그런 것을 알고 말하기를, ‘백성에게 포악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으리오.’하며, 포세(逋稅)를 거둬 모아 무명 몇 필을 얻었고, 또 안렴사에게 이런 일을 아뢰니, 가상히 여겨서 무명을 내어 보조하였고, 또 종[奴]의 일로 다투는 일이 있어 관청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하나에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총합 무명 6백 50필을 얻었습니다. 향교 세 반(班)에서 각 한 사람씩 뽑아서 이를 맡게 하고, 급할 적에는 지현(支縣)에서 네 사람을 부관(府官)에게 아뢰어 내어 주게 하고, 이식은 받지 않으며 부리(府吏)들을 경계하여 감히 다른 데에는 쓰지 못하게 하여 영구히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고을이 비록 산중에 있으나 손님이 자주 왕래하여 그 비용을 거둬들이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니, 우리 부사가 알고 또 말하기를, ‘백성에게 포악하게 하는 것이 다시 이보다 더하리오.’하고, 또 재물을 모아 놓을 뜻을 안렴사에게 아뢰어 무명과 적미(?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둔전이 있는 것을 방자한 아전들이 농간하므로 우리 부사께서 친히 그 일을 맡아 거둬들이니,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여 총계 쌀 2백 석, 콩 1백 50석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나누어 주고 거둬들이는 법을 세워서 본전은 두고 이식을 쓰게 하며, 또 새로 개간한 땅을 계산하면 72석을 거둘 만하니 손님을 공궤하고 또 일용가구까지 완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 제용재(濟用財)라 이름하니, 이는 백성들에게 사납게 거두는 것이 없고, 지현이 떳떳한 부세를 지켜서 이익을 보게 하고 해를 없게 하여서 백성들이 그 생활을 즐거워하니, 가히 기재할 만하지 않습니까.”한다. 나는 말하기를, “어질다. 그러나 이후(李侯)의 정사에서 이것은 아주 작은 일이므로 내가 별로 달가와하지는 않는다. 이후는 어질고 후함으로써 그 근본을 북돋우고, 강하고 밝음으로써 씀을 이루었으니, 한 고을을 화(化)하게 함이 촉군(蜀郡)과 영천(穎川)에 못지 않을 것이니, 그 기록할 만한 것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로서도 그 마음씀이 부지런한 것을 보겠다. 아지 못하겠다. 남원 사람이 능히 저버리지 않을 것인지, 그대가 나를 위하여 고을 사람에게 효유하되 고원한 말로 하지 말고 다만 눈앞의 일을 들어서 밝히라. 병든 자는 의원에게 효험을 보았고, 주린 자는 밥을 얻어 살았으니, 그 은혜를 갚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백성은 너의 마음이요, 현(縣)은 너의 지체[支]이나 현이 있고 백성이 있어야 너의 부(府)가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마음과 지체가 모두 피곤하여 주리고 병든 것보다 더 심하였는데, 이후가 와서 이미 병을 고쳤고 밥을 먹였는데, 은혜 갚을 줄을 알지 못하면 그래도 너희가 사람이라 하겠는가. 은혜 갚기를 어떻게 하면 마땅할 것인가. 그것은 그 법을 무너뜨리지 말고 그 뜻을 떨어뜨리지 않으면 이것으로 가하다.”하니, 양군이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한다. 이후의 이름은 보림(寶林)인데, 을미년에 급제하여 뜻가짐이 충성되고 곧아서 옛날 쟁신(爭臣)의 기풍이 있으니, 그 고을을 다스리는 것도 여기 근본함이 많다. 기해년 8월에 기한다.


[주D-001]순리전(循吏傳) : 지방에 군수로 가서 선정한 사람을 순리(循吏)라고 하여 역사에서는 따로 《순리전》을 두어서 성한 사람들만을 표창하였다.
[주D-002]촉군(蜀郡)과 영천(穎川) : 촉군(蜀郡)은 한(漢) 나라 때에 문옹(文翁)이라는 이가 촉군의 태수공이 되어 학교를 많이 세워 교육을 힘썼으므로 촉군에서 인재가 많이 났다고 한다. 영천(穎川) 역시 한 나라 시대에 소신신(召信臣)이라는 사람이 영천 태수가 되어 인덕(仁德)으로 정치를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소부(召父)라고 하였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남곡 기(南谷記)
 

용구산(龍駒山) 동쪽에 남곡이 있으니, 나와 동갑인 이선생이 살고 있다. 어떤 이가 묻기를, “선생은 숨었는가.”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숨은 것이 아니다.”하니, 또, “벼슬을 하는가.”하기에 대답하기를, “벼슬을 아니 한다.”하니 그가 매우 의심스러워하며 또 묻기를, “벼슬도 하지 않고 숨지도 않았으면 무엇 하고 있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숨는 사람은 그 몸만 숨을 뿐 아니라 또 반드시 이름을 숨기며, 이름만 숨길 뿐 아니라 또 반드시 마음까지 숨기는 것이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남이 알까 두려워하여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벼슬하는 것은 이와 반대로 몸이 반드시 조정 위에 서서 좋은 관복과 큰 띠로 화려하게 갖추어 이름이 실지로 그 마음에 있는 바가 정사에 나타나고, 시가(詩歌)에 올라 사방에 빛날 것이니 마음을 어찌 숨기리오. 나는 이로써 남곡(南谷)은 숨을 땅이 아님을 알겠다. 지금 선생이 남곡에 살지만 밭이 있고 집이 있어, 관혼빈제(冠婚賓祭)의 쓰임에는 족하나, 세리(勢利)에 마음이 없음은 오래였었다. 그러나, 숨은 것으로 자처하지 않은 까닭으로 해마다 서울에 가서 웃고 말하며, 길 가운데 오락가락하면서 약한 종[奴]과 여윈 말에 채찍을 들어 시를 읊는데, 흰 수염은 눈과 같고 붉은 볼에는 광채가 나니, 그림 잘 그리는 이로 하여금 그 풍채를 그려서 전하면 〈삼봉연엽도(三峰蓮葉圖)〉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남곡은 산에서는 나물 캘 만하고 물에서는 고기 낚을 만하니, 족히 세상에 구함이 없어도 스스로 족할 것이다. 산은 맑고 물은 푸르며 경치가 그윽하고 사람은 고요한데 눈을 들어 유연(悠然)히 바라보니, 비록 정신이 세상 밖에 논다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선생은 의당 여기에 스스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나는 늙고 병든 지 오래인지라 매양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고자 하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밭이 있는 곳에는 바다가 가깝고 집이 있는 곳에는 땅이 박해서 살기에 적당하지 못하였다. 밭과 집이 다 온전한 곳을 얻어 내 몸을 마치는 것이 나의 소망이나, 어찌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오. 선생이 정언(正言)이 되었을 적에 나는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는데, 같이 언사(言事)로써 재상의 뜻에 거슬리어 제공(諸公)은 다 외직에 옮기고 나만은 특이하게 뽑힘을 얻었으니, 지금까지 부끄럽게 여긴다. 선생은 여러 번 물러나고 여러 번 일어섰으나 위(位)는 겨우 삼품(三品)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끼친 사랑은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고, 빛나는 이름은 물망(物望)에 합하니, 여러 이씨(李氏)에서도 그 짝을 구하기 어렵다. 이는 반드시 명추(鳴騶)가 남곡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날에 큰 계책을 세우고 큰 의논을 결단하여 위로는 임금의 덕화를 도와서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에서 일어남과 같기를 기필할 것인지 기필하지 못할 것인지 이는 다 천명이다.” 선생의 이름은 석지(釋之)며 가정공(稼亭公)의 문생(門生)으로 급제하였고, 일찍이 나와 함께 신사년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정사년 섣달 8일에 기한다.


[주D-001]명추(鳴騶) : 귀인의 행차를 수행하면서 벽제하는 기마병. 인하여,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쓰임.


동문선 제72권   
 
 
 기(記)
 
 
둔촌 기(遁村記)
 

광주(廣州) 이씨(李氏)가 이미 《맹자》 집의(集義)의 집(集) 자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고,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호연(浩然)을 취하여 자(字)로 삼았으며, 성산(星山) 이자안(李子安)이 글을 지어 해설하였다. 내가 또 그 뒤에 제사(題辭)하여 주었더니, 호연은 말하기를, “내 이름과 내 자에 대해서는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나, 내가 황야(荒野)에 도망하여 취성(鷲城)의 당화(黨禍)를 피하였으니, 그 고생스러운 형상은 비록 미련한 사람이라도 듣고 실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오늘까지 살아 온 것은 둔(遁)의 힘이다. 무릇 숙손(叔孫)은 적(狄)을 이김으로써 그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대개 그 기쁨을 표한 것이다. 아들은 몸에서 나누어진 것인데도 오히려 이름을 지어서 그 기쁨을 기록하였는데, 하물며 나 자신의 이름이리요. 지금 내가 이미 이름과 자를 다 고쳤으니 내가 다시 처음이 된 것이다. 둔(遁)이 나에게 덕된 것을 장차 내 몸을 마치도록 잊을 수 없는 까닭으로, 나의 있는 곳을 둔촌(遁村)이라 하였으니, 그 둔(遁)의 덕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또한 그 위험에서 나와서 위험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붙여서 스스로 힘쓰고자 함이다. 둔(遁)은 《맹자》의 지언(知言 도리(道理)에 밝은 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뜻은 그윽히 이와 같이 취하였으니, 오직 선생은 가엾게 여겨 두세 번 번거롭게 함을 잊으시고 끝내 은혜를 베푸옵소서.”한다. 나는 말하기를, “그대가 《맹자》를 진실로 맛보고 즐거워하니 성인의 도를 찾는 경지에 거의 이르렀도다. 내가 이 까닭으로 다른 글은 상고하지 아니하고 《맹자》에 대한 것으로써 말을 마치겠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순(舜)이 천자가 되고 고요(皐陶)가 사(士 법관)가 되었을 적에 고수(?? 순의 아버지)가 사람을 죽이면 순은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니, 맹자는 말하기를, ‘아버지를 업고 도망가서 바닷가에 살면서 흔연히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비록 비유한 말이긴 하나 이와 같이 처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호연의 화(禍)가 비록 자신의 소치이나 늙은 어버이와 어린 자식들을 업고 안고 이끌면서, 낮에는 숲속에 숨고 밤에는 비와 이슬을 무릅쓰고 험한 산골 속을 걸으면서 쫓는 이가 뒤에 따라올까 두려워하여, 숨을 죽이고 처자에게 경계하여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역시 그 도망은 참혹하였다. 이는 마땅히 꿈에도 놀라고 깨어서도 놀랄 것인데 바야흐로 의기가 양양하여, 안으로는 몸이 즐거워하고 밖으로는 남에게 자랑하니 호연은 참으로 비상한 사람이다. 그 속에는 반드시 주심(主心)이 있고 헛이름을 얻은 것이 아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릴 적에 반드시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하는 바를 어그러지게 하며 어지럽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더 능하게 한다.’ 하였으니, 호연은 참으로 그 몸이 굶주렸고 그 하는 바도 어그러졌으니, 실지로 큰 임무가 그에게 내릴 것을 기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호연이 둔촌에서 몸을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그 강산 경치의 좋음과 아침에 밭갈고 저녁에 글읽는 낙(樂)은 호연의 스스로 가진 경지이니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다. 창룡(蒼龍) 정사년 9월에 기한다.


[주D-001]취성(鷲城)의 당화(黨禍) : 취성은 영산(靈山)의 별칭인데, 신씨(辛氏)는 영산이 본관이므로, 취성의 당화라 함은 신돈(辛旽)의 화를 말함인 듯하다.
[주D-002]숙손(叔孫)은 …… 지었으니 : 혹 숙향(叔向)이라 하였음은 숙손(叔孫)의 오기(誤記)이다. 춘추 때에 오(烏) 나라의 숙손씨(叔孫氏)가 적(狄)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을 당하였는데, 그 적(狄) 사람 중에 굉장한 거인(巨人)이 있어 그를 장적교여(長狄僑如)라고 불렀다. 그 장적교여를 숙손씨가 싸워 이기고 적군을 멀리 쫓친 후에 마침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아들 이름을 교여(僑如)라고 하였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안동 약원 기(安東藥院記)
 

지정 정미년 가을 9월에, 안동부(安東府)를 지킬 신하의 임명이 내렸다. 그 부사로는 지금 찬성사(贊成事) 홍백정(洪栢亭)인데 선녕군(宣寧君)으로부터 뽑혔고, 그 판관으로는 전 장흥 부사(前長興府使) 정무(鄭?)인데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부터 뽑혀 함께 조정을 하직하고 갔다. 10월 10일 이른 아침에 판관이 먼저 청사(廳舍)에 이르러 예를 행하고 대궐을 향하여 은혜를 사례하고 뜰에서 부사를 맞이하였다. 부사도 예를 행하기를 판관과 같이 매우 공경히 하고, 물러나서 고을 아전들의 뵈옴을 받고 예를 마치었다. 고을 부로(父老)들은 좋은 부사를 만났다 하여 서로 경하하니, 명령이 행해지지 않음이 없었다. 다음해 봄 2월에 두 공(公)이 말하기를, “하늘 기운[氣]이 펴서 만물이 처음 나니 월령(月令)을 상고하면 ‘인명이 중하므로 일찍 죽는 것을 대비하여 영위(榮衛)를 널리 펴는 것은 크게 화한 기운을 보호함이다.’ 하였다. 여기에 의약이 공이 있고 탕욕(湯浴)은 도움이 있으니, 어찌 이를 먼저하지 않으리오.”하고, 이에 빈 터를 살폈으나 그런 곳을 얻지 못하였는데, 법조(法曹)의 집이 오래 폐하여 그 터가 남아 있어서 이에 집을 세우고 이름을 약원(藥院)이라 하니, 대개 그 중한 쪽을 좇음이다. 동쪽 집 세 칸은 탕욕을 하는 곳이요, 서쪽 집 세 칸은 약을 공급하는 곳이며 중간에 높은 집은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는 곳이다. 동서로 행하는 길손들이 그 급할 때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함도 아낌없이 해야 하는데, 하물며 그 지방이 가장 멀고 그 백성이 가장 순박하여 약 쓰는 법과 청결하는 일을 다 알지 못하고, 악한 기운에 접촉하여 죽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백정공(栢亭公)이 위에서 주장하고 정 판관(鄭判官)이 아래에서 순응하여, 절반의 힘을 들이고도 공이 이루어져 안동(安東)이 길이 그 덕택을 힘입게 되었으니, 이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르는 말에, “훌륭한 정승이 되지 못하거든 좋은 의원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하니, 의원의 도(道)가 역시 중한 것이다. 지금 백정공이 그런 마음으로 나라를 담당하여 정군(鄭君)의 탕약(湯藥) 쓰는 효력도 점점 나아져서 오직 안동에만 그칠 뿐 아니니, 아, 그 멀리 퍼져 갈 것을 어찌 측량하리요. 정사년 11월 일에 기한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어은 기(漁隱記)
 

염동정(廉東亭) 이 천녕(川寧)에 살 적에 스스로 ‘어은’이라 호를 하고, 돌아와서 나에게 기(記)를 청하기로 내가 말하기를, “옛 성인이 형상을 보고 그릇을 만들었고 우리 부자(夫子)도 《주역(周易)》계사(繫辭)에서 이를 취하여 베풀었으니, 망고(網?)와 전어(?漁 사냥하고 고기잡는 것)는 대개 그것의 하나이다. 맹자가 공씨(孔氏)에게 배우고 그 말에 ‘촉고(數? 빽빽한 그물)를 웅덩이와 못에 넣지 않으면 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천지 사이에 생물이 매우 많으나 이를 취하는 데에는 그 기구가 있고 먹는 것도 때가 있으니, 재물을 이루어 천지의 도(道)를 돕는 것은 성인의 일이다. 홍수의 재난을 당하여 당우(唐虞)의 군신과 같은 성인으로써, 도(塗)에 장가간 지 나흘 만에 갓난아이를 자식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세 번 그 문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그 치수 사업이 매우 급하였기 때문이었다. 짐승과 새의 발자취가 중국에 어지러웠으니 백성의 피해가 참혹하였다 할 것이다. 이에 사람에게 고기 먹기를 가르치니 사냥하고 고기 잡는 기구가 더욱 급한 바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성품이 기욕(嗜慾)에 달리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법을 두어 한 자 미만의 고기는 시장에 팔지 못하게 하고 사람도 먹지 못하게 하니, 내와 못에는 많은 고기가 놀고 뛰었으니 지극히 다스려진 형상이 나타났다. 또 학교를 잇달아 일으켜서 인재를 양성함에 이르러 반드시 배우는 이로 하여금 솔개가 날고 고기가 뛰는 것을 보는 사이에 화육유행(化育流行)의 묘리를 깊이 체득하여 내 마음의 전체 대용(大用)에 있어서 성학(聖學)의 공이 이루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어항에서 즐겁게 노는 것을 대하는 것도 또한 후학에게 도움이 있을 것이다. 대개 물건이 있으면 법이 있으니, 하나의 일이라도 인(仁)이 아님이 없다. 동정(東亭)은 옛을 좋아하며 자신을 단속하고 마음을 보존하였다. 사람을 사랑하여 그 재물을 거두고 백성을 해치는 따위를 볼 적에 개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오직 고기와 자라도 다 덕화에 순응하게 되는 것으로써 자임(自任)하기에 힘썼다. 지금 이 ‘어은’이라 스스로 호를 한 것은 대개 천녕(川寧)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천녕은 여강(驪江)의 하류에 있으니, 그 땅이 농사에 알맞고 소나무가 많으며 백련정사(白蓮精舍)가 있다. 금사장(金沙庄)의 팔영(八詠 여덟 가지 경치를 읊은 시)은 족히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겠는데, 그 ‘동강에서 물고기를 낚는다[東江釣魚].’라 한 것은 곧 어은의 땅이다. 한 문공(韓文公)의 시에
물과 소나무를 낀 다리에서 백 보를 가면 / 橋夾水松行百步
대나무ㆍ살평상ㆍ돗자리가 있는 중의 집에 이른다 / 竹床莞席到僧家
잠깐 동안 한 손을 주먹 쥐고 턱을 괴고 누웠다가 / 暫拳一手支?臥
돌이켜 낚싯대 잡고 저녁 모래로 내려간다 / 還把漁竿下晩沙
하였는데, 문공은 내가 스승으로 여기는 터였다. 나는 늙었으니 만일 하늘의 복으로 그 이웃에 빈 땅을 얻으면, 마땅히 동정과 더불어 이 시를 읊조리며 내 평생을 마치기 원한다. 무릇 낚싯대ㆍ낚싯줄ㆍ낚시ㆍ미끼ㆍ곧은 낚시ㆍ굽은 낚시 같은 것은 동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뒤에 더불어 토론할 것이다.” 이에 어은기를 짓는다.


[주D-001]염동정(廉東亭) : 고려 말년에 권력을 남용하던 자인데, 그 성명은 염흥방(廉興邦)이라 하다. 여기 〈어은기〉와는 정반대의 못된 짓을 하다가 최영 장군에게 죽은 자이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보개산 지장사 중수 기(寶盖山地藏寺重修記)
 

중 자혜(慈惠)를 내가 좌주(座主) 익재선생(益齋先生)의 부중(府中)에서 처음 서로 만나 보니, 키가 크고 이마가 넓으며 모양이 질박(質樸)하고 말이 곧아 선생이 매우 사랑하였다. 그가 있는 곳은 보개산 지장사이다. 익재선생이 돌아가실 적에도 자혜가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자제(子弟)가 부형(父兄)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하니, 진실로 상인(上人 중의 존칭. 자혜를 가리킴)은 여러 중들 가운데서 특별히 뛰어남을 알았다. 자혜가 일찍이 절 일로써 경사(京師 북경)에 달려가서 공경(公卿)들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이름이 중궁(中宮)에 퍼져 내탕금(內帑金)을 내어서 절 기구를 만들었고, 절이 이룩되자 임천 위선생(臨川危先生)의 글을 빌어 절을 만든 전말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서 배에 실어 보내고, 자혜는 향폐(香幣)를 받들고 역마(驛馬)로 달려와서 돌을 절의 정원 가운데 세우고, 낙성회(落成會)를 크게 베풀었으니 참으로 그는 유능한 사람이다. 신축년에 병화가 절에 미쳐서 집이 남은 것은 대개 3분의 1 이었었는데, 자혜가 분발하여 새로 세우려고 하니, 이에 원조(元朝) 황비(皇妃)와 본국 왕비가 돈을 대고 철원군(鐵原郡) 최맹손(崔孟孫)과 감승(監承) 최충보(崔忠輔)가 이를 도왔다. 정당(政堂) 이공(李公)은 그 조부가 자혜를 사랑한 까닭과, 판사 박후(朴侯)는 그 장인이 자혜를 사랑한 까닭으로, 자혜 대우하기를 익재선생의 평상시와 같이하여 다 재물을 베풀어서 중건하는 공을 마치게 한 것이다. 병진년 4월 25일에 대장경을 전독(轉讀)하여 낙성식을 하였다. 자혜가 말하기를, “나는 지금 늙었으나 내가 이 절에 대해서는 일을 부지런히 하였으니, 현시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서 이 일을 기록하지 않으면, 다른 날 돌에 새긴 기록을 읽는 이가 오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지금 돌에 글을 새기려고 하나 돌이 이 땅에 나지 않고, 연경(燕京)으로 달려가고자 하나 길도 막혔고 내 몸도 매우 쇠하였으므로, 장차 목판에 새겨 벽에 걸어 두었다가 돌에 새기는 일은 뒤에 동지를 기다리겠소.”하니, 그 말이 매우 슬퍼서 내가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말하기를, “명산 보찰이 없는 곳이 없는데 반드시 이 산에서만 살고 이 절만 수리하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는가.”하니, 자혜가 초연히 말하기를, “스승의 명이라,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공의 말과 같이 할 것이요.” 하였다. 아, 자혜는 능히 그 스승을 저버리지 않는도다. 그 스승이 누구냐고 물으니 진공대로(眞空大老)라 한다. 내 일찍이 특이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으나, 그 얼굴을 알지 못함을 항상 한하였는데, 지금 자혜와 더불어 말할 기회를 얻으니 어찌 나의 다행이 아니리요. 제자는 스승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자손은 선조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소망이다. 어찌 감히 함께 기록하여 후세 사람에게 권하지 않으리요. 이에 기록한다.


[주D-001]임천 위선생(臨川危先生) : 원 나라 말년에 원 나라에 벼슬하던 위소(危素)라는 사람이다.

 

동문선 제72권   
 
 
 기(記)
 
 
향산 윤필암 기(香山潤筆菴記)
 

향산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 북쪽에 있는데 요양(遼陽)과 경계를 이루었다. 산의 크기는 비할 데가 없으며 장백산의 분맥(分脈)이다. 향나무ㆍ사철나무가 많고 선불(仙佛)의 고적이 있다. 산의 이름을 향으로써 □□□□□□□□□ 여러 부처와 도장 □□□□□□ 보제(普濟)가 올라서 놀 적에 일찍이 거기서 머물렀다. 그가 입적하자 제자 승지(勝智)가 장차 사리(舍利)를 받들고 이 산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역시 보제의 제자인 각청(覺淸)이 옛터를 찾아 집을 짓는데 세 기둥으로써 끝났다. 일을 마친 뒤에 그 스승의 화상을 받들어 당(堂) 가운데 걸고 아침저녁으로 예를 닦았다. 중 지선(志先)이 각청의 부탁으로 내게 와서 기(記)를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각청의 얼굴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각청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온 것은 지선의 입을 통해서이다. 각청이 이미 그대에게 청하였는데 그대가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무엇이 해로우며, 각청이 비록 청하지 않았더라도 보제선사의 구경(口?)이 있다. 나는 다만 보제를 알 뿐이라, 다른 사람은 무엇을 관여하리요.”하고 다시는 사양하지 않았다. 보제의 제자가 수없이 많고 보제를 위하여 힘써서, 죽은 뒤에 부도(浮圖)에 새기고 진당(眞堂 화상을 모신 집)에 기록하여 오래 전하기를 꾀하는 이가 연달아 나오고, 붙좇는 이가 존비(尊卑)와 지우(智愚)에 상관없이 하나로 합하여 굳어져 깨뜨릴 수 없으니 이는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개 한 마리가 모양을 보고 짖으면 뭇 개가 소리를 듣고 따라 짖는 것과 같이 그 형세가 반드시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서리가 떨어지면 종이 울고, 돌을 던지면 물이 응하는 감응교제(感應交際)하는 도(道)가 그러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인가? 보제가 이에 이르게 한 것은 반드시 그 도(道)가 있는 것이다. 지금 불도를 믿는 무리가 나라에 거의 반이나 되고, 거슬러서 수백 년 전부터 따진다면 그 도가 더욱 성하게 행하였으나, 세상을 하직하고 간 뒤에 보제와 같이 뛰어난 이를 나는 많이 듣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보제를 정성으로 받들어 잊지 못하였던 것을 가히 알겠다. 보제가 세상에 있을 적에는 꾸짖는 자가 많았는데 그 죽음에 미쳐서는 따르고 생각하기를 또 이같이 하니, 아, 사람의 마음이 과연 누구를 주장하는가. 내가 이런 말로써 지선에게 말하고 또 각청에게 고하여 그 생각하는 마음을 더욱 간절히 하며, 그 스승의 사리(舍利) 전하기를 도모하기에 더욱 삼가고 삼가는 것이 가하다. 산의 좋은 경치는 중들이 많이 말하나, 내가 늙어 가서 볼 수 없음을 애석해 하여 함께 기록한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금강산 윤필암 기(金剛山潤筆菴記)
 

이색(李穡)

보제 나옹(普濟懶翁)이 죽자, 비로소 사람들이 그 도(道)를 크게 믿고 좇아서 그를 사모했는데 하물며 그 교도들이랴. 한산자(韓山子)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명(銘)을 지은 것이 이 윤필암(潤筆菴)을 세운 유래이다. 이 윤필암은 무릇 일곱 곳으로써 공양드리고 좌선하는 제구(諸具)가 모두 몹시 정결하였으니, 보제(普濟)의 몸은 비록 갔어도 보제의 도(道)는 더욱 빛나기 이와 같아서 주위의 사람을 감동시킴이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금강산 선주암(善住菴)은 집만 있고 사람이 없은 지가 근 40년이더니 보제가 한 여름에 여기서 지내면서 돌을 모아 대(臺)를 만들고 거기서 여러 봉우리를 내려다 보았으니 사람들이 이것을 나옹대라고 일컬었다.
향로봉은 동쪽에 있고 금강대는 남쪽에 있는데 물이 그 아래로 흘러 마치 성처럼 둘려 있다. 나옹이 천하를 두루 돌아 다니며 산천을 구경하였고, 또 금강산에 들어와서도 암자가 벌집처럼 많이 있건만 유독 여기서 머물러 있었음은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림(志林)ㆍ찬여(粲如)ㆍ지옥(志玉)ㆍ신원(信元)ㆍ각봉(覺峰)이 나옹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그 화상을 모시어 조석으로 향화(香火)를 올리고, 또 반승(飯僧) 15명이 공양을 드리고 좌선하여 도를 깨닫기를 구해서 사람마다 모두 나옹을 위하여 분주하였고, 여가에는 화두(話頭)를 찾으려 하였으니, 뜻이 있는 자들이라 이를 만하다.
이제 집기(什器)가 부족해서 서울 연화소(緣化所)에서 구하고, 또 벽에 걸어 둘 글을 뒷 사람에게 구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천일회(千日會)의 좌선이 지난 해 3월 3일에 시작하였으되 백일이 끝나고 다시 시작하였으니 원컨대 이 사실도 아울러 기록하기 바란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착하도다. 지림(志林)등의 이 행사가 비록 여러 해를 지났으나 천일이 가고 다시 천일이 지나감이 마치 하루의 일같이 생각되는데, 도를 얻고 간 이를 어찌 다 기록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도 아울러 아래에 기록하였다. 기미년 윤 5월 모일에 쓴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침류정 기(枕流亭記)
 

염동정(廉東亭)이 귀양 가 있을 적에 천녕현(川寧縣)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물을 사이에 두고 걸쳐서 정자를 짓고 그 위에 쉬면서 옛 사람 손자형(孫子荊)의 수석침류(瀨石枕流)라는 말을 취해서 표하고는 돌아오자 나에게 기를 써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동정(東亭)은 선왕(先王)의 지우를 받아 젊은 나이에 상신(相臣)으로 제배되었으므로 이제 금상(今上)께 그 은혜를 보답하려 하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혐의 되는 말은 피하지 않았고,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았으며, 어둡고 흐린 것을 받아 들였고, 울려 흔들리고 쳐서 공격하는 것을 진정시켜서 굳센 기개는 금석(金石)을 막고 충성된 마음은 귀신을 움직였으니, 가히 움직일 수 없이 튼튼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비록 밖으로 귀양갔다고는 하지만 몸을 보전하고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여 산수의 낙을 맘대로 즐겼으니, 이는 임금께서 그 소원을 보전시켜 줌이라. 그 은혜 하늘과 같다. 이는 마땅히 음식 먹을 때나 쉴 때에도 감히 잊지 못할 일이라. 그야말로 강호의 먼 곳에 있어도 임금을 조심하는 것인데 어찌 정자의 이름은 이와 반대인가. 이는 장차 그 귀를 씻어 세상 일이 들리지 않기를 원하는 것인가. 장차 그 몸을 깨끗이 하여 세상 일의 번거로움이 미치지 않게 하고자 함인가.” 하였더니, 동정(東亭)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대체 물의 성품은 맑은 것으로서, 그 기운이 사람에게 닿으면 뼈에 사무치도록 차서 어둡고 흐린 마음이 비로소 맑고 밝아지며, 어지러운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어 가히 상제(上帝)를 섬기고 가히 사령(四靈)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하늘이 한 번 물[水]을 낳아 오행(五行)의 첫머리로 삼았으니 만물이 번식하는 것이 모두 물의 공(功)인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남의 집 문을 두드려 물과 불을 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고 하루라도 없으면 사람이 그 삶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니, 물의 공은 크다 할 것이다. 또 여기에 말한 베개를 삼는다는 말은 딴 뜻이 아니라 친하게 여긴다는 것이니 딴 말이 아니다. 이것을 내가 취한 것이다. 그대는 앞에 말하던 것을 끝내 주면 다행하겠다.” 하였다.
내 일찍이 듣건대, 천지 사이에 물이 커서 땅이 물위에 있기 때문에 땅이 물에 실려 있으니, 대체 형체와 빛깔이 있는 것은 천지 사이에서 모두 물을 베개한 셈인데 어찌 홀로 사람뿐이라 하겠는가. 지금 높다란 모든 산들은 위로 하늘에 닿아서 금수(禽獸)와 초목이 여기에 의지해서 살며, 비록 비와 이슬이 길러준다고 하지만 진실로 수기(水氣)가 그 사이에 통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그 삶을 이룰 수 있겠는가. 태화봉(太華峰) 꼭대기에 있는 옥정련(玉井蓮)이 이것인데 하물며 평평한 언덕과 넓은 들판이나 끊어진 산모퉁이와 평평한 숲속에서 물이 솟는 것은 필연한 형세이다. 이러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아닌 땅이 없고, 사람이 먹는 것은 물이 아닌 물건이 없으니, 물과 사람은 잠시도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동정(東亭)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살고 수양하여, 학식이 일세(一世)에 높아서 부귀에 쳐해서는 부귀를 행하고 환란(患難)에 처해서는 환란을 행하니 대개 그 스스로 얻음이 깊도다. 내가 알기에 구름이 흩어지면 달이 나오고 물이 흐르면 바람이 이는 것인데, 동정은 수연(脩然)히 세상을 떠나 홀로 섰으니, 부귀와 환란이 그 마음에 무슨 움직임이 있겠는가.
이 정자야말로 하늘이 더욱 동정(東亭)에게 후하게 하여 고루 사방으로 베풀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번거로운 마음을 씻고 정신을 통하게 한 것이니, 상덕(上德)에 도무(蹈舞)하는 것은 하늘에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을 기(記)로 삼는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훤정 기(萱庭記)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어쩌면 훤초(萱草)를 얻어서 집뒤에 심으리.” 하였는데, 이것을 해석해서 말하기를, “이는 망우초(忘憂草)라.” 하고는, 자서(字書)에도 또한 훤(萱) 자를 해석하여 망우초라 하였다. 훤을 망(忘)자로 말한 것을 그 근심을 잊는다는 말이요, 훤을 선(宣)자로 따른 것은 그 답답함을 푼다는 뜻이니 마음속의 답답한 것을 풀면 통해지고, 마음의 근심을 잊으면 즐거워지며, 즐거우면 부모에게 순종하여 그 부모도 역시 즐거워지고, 통하면 천지에도 통해져서 천지가 평화로워 질 것이니, 천지가 평화로워지고 부모가 즐거워진다면, 요(堯) 순(舜)의 시옹(時雍 요순의 태평스럽게 다스리던 시대)의 다스림도 가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치에 있는 바를 구하면 상(象)에 나타나고 그 상에 있는 바를 구하면 훤(萱)에 보이나니, 한 물건은 적고 한 글자는 실낱만하지만 천리와 인정이 밝게 나타난다. 정치하는 체제와 국가 풍속의 관계를 내 일찍이 읽고 완미하여 동지(同志)들과 함께 생각하고 연구한 지 오래 되었다. 문생 염정수(廉廷秀)의 자(字)는 민망(民望)인데 어느날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내 백씨(伯氏)는 거처하는 곳을 국파(菊坡)라 호했고 중씨(仲氏)는 그 거처하는 곳을 동정(東亭)이라 호했더니 나도 이 불초한 몸으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해서 세 아들이 급제한 까닭으로 전례에 따라 국가에서 어머니께 양식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 형제 세 사람이 기운을 같이 하고 마음을 같이 했으니, 거처하고 움직이는 것도 서로 보고 서로 책망하여 오직 책하게 하기를 바랄 뿐이므로, 이제 실로 내 몸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장차 훤정(萱庭)이라고 호를 할까 하오니, 원하건대 선생님은 대략 그 뜻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짐짓《시경(詩經)》의 말을 인용해서 대략 그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었는데, 여기에 거듭 풀어서 말한다. 천지는 기운이요, 사람과 물건은 이 기운을 받아 태어나서, 무리를 나누고 같은 것끼리 모이며, 습한 데로 흐르고 마른 데로 나아가서, 밖으로는 엉클어진 것 같아도 그 실상은 질서가 있고 빛나서 윤리가 조금이라도 어그러지지 않는다. 사군자가 젊어서는 글을 읽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천하의 사리를 밝게 터득하고, 장성해서는 임금을 섬기고 물건을 다스려서, 천하의 사리를 평탄한 데로 돌아가게 하여 탕탕(蕩蕩)한데 무엇이 나의 기운을 더럽히겠으며, 유유(愉愉)한데 무엇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는가. 이치가 부드럽게 순하고, 시원하게 의심이 풀리면 어찌 털끝만큼이나마 그 사이에 어긋나는 데가 있겠는가.
민망(民望)은 나이는 가장 적으면서도 학문은 가장 풍부하며, 또 당시 세상의 문사들과 더불어 놀고 교류하여 익혔으니 감(坎)의 대상(大象)이 나타났는지라, 이로써 뜻이 도탑고도 한만(汗漫)한 데에 들어가지 않고, 행하기를 힘써 하여도 허원(虛遠)한 데에 달리지 않아서, 돌이켜 자기 마음에 구하되 근심하는 바도 없고 답답한 바도 없이 오직 천지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며, 이것을 다시 임금에게 옮겨 탐스러운 곡식과 아름다운 풀이 밭과 논에 가득하게 되기를 바랐으니, 그 마음 가짐이야말로 가히 멀다고 할 것이다.
수장(首章)에 말하기를, “백혜(伯兮) 백혜여, 이 나라의 호걸이로다.” 하였으니, 이 나라의 걸(桀)이란 딴 재주와 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모에게 순종하고 천지에 통해서 몸소 친히 요순의 다스림을 볼 따름이니 민망(民望)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천보산 회암사 수조 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
 

회암사 주지(檜巖寺住持) 윤절간(倫絶磵)이 일찍이 색(穡)에게 말하기를, “보제(普濟)가 이미 죽자 중들이 명(銘)을 쓰고 비석을 세웠으니, 이 절을 세운 것도 마땅히 그 시말을 기록해서 보제가 구구하게 이 절을 위한 무궁한 뜻을 들어내 주어야 할 것인데, 이 때문에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므로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리 하겠습니다.” 하였더니,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문인 각전(覺田)이 또 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은 이미 죽었고, 우리 무리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갔는데 절이 전일 같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아, 슬프외다. 우리 스승의 도(道)는 세상에서 능히 소중히 여겨야 하고 가볍게 여기지 못할 바입니다. 그러나 절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뒷 사람에게 있는 것이요, 우리들의 능히 잘하고 못하는 데 있는 것인데, 또한 이것을 먼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슬프외다. 우리 스승이 여기에 역사를 시작하여 그 지획(指?)한 곳과 좌립(坐立)한 곳이 모두 전일과 같으며, 음성과 용모의 막연함과 우리 스승이 여기에서 법을 펴셔서 그 축도(祝禱)하는 규모와 봉갈(棒喝)하는 풍도도 전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威儀)와 호령(號令)의 삭막(索漠)함과 원우(院宇)의 적막함과 향화(香火)의 소조(蕭條)함과 강월(江月)의 경계는 평평하게 들 안개에 잠겨졌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불성(佛性)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요, 후생(後生)이 가히 두려운지라, 어찌 이 다음날에 전보다 나은 일이 있을지 알겠습니까. 이것으로 우리들이 스스로 위로하는 바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이 절은 앞에는 철산(鐵山)이 편액을 썼고 뒤에는 지공(指空)이 땅을 잡아서 그 산수의 형상이 완연히 서축(西竺) 난타사(蘭陀寺)와 같은데, 이는 또한 지공이 스스로 말한 것이라, 그 곳이 복지(福地)가 됨이 분명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혹시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이것을 새로 지었다고 하여 헐어 없앤다면 보제(普濟)의 문인이, 몸소 실천한 아름다움을 이룬 뜻이 사라져 버리고 전하지 못할 터이니 이것을 내가 깊이 슬퍼합니다. 이에 감히 여기에 온것이니 오직 선생은 글을 써 주시옵소서.” 하였다.
내가 보건대 보광전(普光殿)의 5칸은 남쪽으로 면했는데 그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의 5칸이 있으며,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 정청의 동서에는 방장 2곳이 있어서 각각 3채인데, 동쪽 방장 동편에는 나한전 3칸이 있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전(大藏殿) 3칸이 있다. 입실료(入室寮)는 동쪽 방장 앞에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시자료(侍者寮)는 서쪽 방장 앞에 있어서 동편으로 면했다. 설법전(說法殿) 서편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는 수좌료(首座寮)가 있으며, 설법전 동편에는 영당(影堂)이 있고 또 그 동쪽에는 서기료(書記寮)가 있어 모두 남쪽을 면했다. 영당 남쪽에 서편으로 면한 것은 향화료(香火寮)요, 조사전 남쪽에 동편으로 면한 것은 지장료(知藏寮)이다. 보광전 동쪽 조금 남쪽으로는 전단림(?檀林)이 있어 동운집(東雲集)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西雲集)이 동편으로 면해 있다. 동운집 동쪽에는 동파침(東把針)이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 서쪽에는 서파침(西把針)이 있어 동편으로 면했는데, 천랑(穿廊)이 3칸으로서 서승당(西僧堂)에 접해 있어, 이곳은 바로 보광전 정문(正門) 3칸이요. 문의 동랑(東廊)은 6칸으로서 동객실(東客室) 남쪽에 접해 있고, 문서편으로 열중료(悅衆寮) 7칸이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료(東寮)이다. 정문 동쪽에 서편으로 면한 5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객실이요. 그 서쪽이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서객실(西客室)이다. 열중료 남쪽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쪽에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욕실(浴室)이며, 부사료(副寺寮) 동쪽에는 미타전이 있다. 도사료(都寺寮) 5칸은 남쪽으로 면했으며, 그 동쪽에는 고루(庫樓)가 있고 그 남쪽에는 심랑(心廊) 7칸이 있어 미타전에 접해 있다. 그 북쪽에는 장고(醬庫) 14칸이 있으며, 고루 동쪽 11칸에는 고(庫)의 문이 있고, 누각으로부터 동쪽으로 4칸이 있으며, 또 꺾어져 북쪽으로 6칸이 있고 또 꺾이어 서쪽으로 2칸이 있다. 그 서쪽은 비어 있고 바로 정문(正門) 조금 동편에 종루(鐘樓) 3칸이 있고 종루 남쪽에는 5칸이 있는데, 사문루(沙門樓)이며, 종루 서편 동쪽으로 면한 것은 접객청(接客廳)이다. 종루에서 동북쪽으로 향하여 지빈료(知賓寮)가 있다. 접객청 남쪽 동편으로 면하여 양노방(養老房)이 있고 지빈료 동편 서쪽으로 면하여 전좌료(典座寮)가 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향적전(香績殿)이요, 향적전 동쪽과 고루의 남쪽에는 원두료(圓頭寮) 3칸이 있어 서쪽을 면했다. 향적전 남쪽에 있는 4칸 마구(馬廐)다.
집이 모두 2백 62칸이요, 불구(佛軀)는 15척(尺)이나 되는 것이 7개요, 관음상(觀音像)은 10척으로서 각전(覺田)이 시주한 것이다.
크고 웅장하고 미려하기가 동국(東國)에서는 제일로서 이것을 보기 위하여 강호에서 모여드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런 절은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나는 본래 부처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현릉(玄陵)이 이를 일찍이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경모(敬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물며 임금의 뜻을 받들어 명(銘)을 지은 터이므로 대사(大師)의 평생을 자세히 조사하여 더욱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으니 어떠하겠는가? 부처를 만들고 탑을 세웠어도 조금도 공덕이 없으나 대사의 도(道)에는 의논할 바가 아니다. 절간(絶磵)의 청하는 것과 각전(覺田)의 부지런한 것이 헛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역사의 시작함과 끝마침을 물었더니 모년 모월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능한 일이로다. 어찌 그다지 쉽게 이루어졌는가. 대사의 도가 아니였다면 어찌 능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사의 제자들이 또 일하는 재주가 있어서 이같이 쉽게 이루었겠는가. 비록 그러나, 기본을 이룩하고 계통을 있게 하여 이것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군자의 일이나, 그 뒤에 올 일을 돌아보지 않고 그 그릇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좇아서 그 사치를 다하는 것은 군자가 더럽게 여기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대사는 이미 먼저 아는 밝음이 있었고 보제의 원하는 것이 어찌 도량에서 마땅히 더욱 흥성하여 조금도 쇠폐됨이 없음을 알았겠는가. 이에 나는 즐거이 이 기를 쓰노라.” 하였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오관산 흥성사전 장법회 기(五冠山興聖寺轉藏法會記)
 

경성(京城) 간방(艮方) 모퉁이와 천마산(天魔山) 손방(巽方)과 고암(鼓巖) 태방(兌方)에 5봉우리가 있는데, 이들이 모여 서로 포위하고 있어서 바라다보면 하나와 같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오관(五冠)이라 했는데, 이것은 그 형상을 취한 것이요, 또 그 기이한 경치가 족히 삼한(三韓)의 모든 산보다 제일 좋기 때문이다.
정화공주(貞和公主)의 아버지는 이름을 보육(寶育)이라 하는데 이가 실상 여기에 살았고, 우리 태조(太祖)의 증조 작제(作帝) 건(建)의 외대부(外大夫)로서 태조가 사삿집을 화하여 나라로 삼고 집을 버려 절로 삼아 이름을 숭복(崇福)이라 했으니, 그 편액만 보아도 가히 알 수가 있다.
그 뒤 난리에 불타버린 뒤로 일찍이 개수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더니, 경효대왕(敬孝大王)께서 추원(追遠)하는 데에 뜻을 두어 조종조(祖宗朝)가 세운 법도를 모두 닦고 밝게 했다. 심지어 사원에 이르기까지 옛 것을 완전히 하고 새로운 것을 더하여 달과 같이 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이는 정화(貞和)가 사는 곳이니 후비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이 까닭에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스스로 공덕주(功德主)가 되어 옥우(屋宇)와 전량(錢糧)을 모두 새롭게 하고, 모두 넉넉히 하여 대장함장(大藏函藏)의 표지를 만들어 질서 있고 빛나게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공주가 훙(薨)하자, 또 공주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모셔 시절을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현릉(玄陵)이 세상을 떠나고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쇠폐함이 없어 울연(蔚然)히 대총림(大叢林)을 이루었다.
지금 주지 대선사의 이름은 내명(乃明)인데, 곧 조계(曺溪)의 원로이다. 시자(侍者) 불혜(佛惠)를 보내어 기를 구하기를, “이 절은 노국(魯國)이 와 있은 지가 이미 3번인바 그 공덕이 지난날의 일보다 나았음을 입으로 말하기를 어려우므로, 장차 이 현판을 써서 걸고 앞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니, 그대는 붓을 들어 운수승(雲水僧)과 함께 글을 짓기를 조금도 아끼지 말아 주시오. 더욱이 선왕(先王)의 은혜를 입음이 적지 않아 반드시 즐거이 기를 쓸 것이므로, 내 몸소 나가 청하지는 않았으며, 예에는 박하고 그 구하는 것은 많지만 역시 선왕의 위령(威靈)을 받드는 그대의 추모하는 마음이 도타운 까닭에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내명대사는 나이 지금 67세로서 이 절의 주지로 있은지 11년이라 하니, 선왕(先王)의 지우를 받음이 또한 얕지 않았으므로, 조석으로 향을 피워 선왕과 노국(魯國)과 노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모하여 지나간 허물을 씻고, 앞으로 올 길(吉)함을 맞아서 이를 점치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었으니, 이는 선왕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제 조석(朝夕)의 신하로 하여금 모두 내명대사와 같이 선왕을 저버리지 않게 한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밤낮으로 이렇게 되기를 바라며 이에 기를 쓰노라” 하였다. 무오년정월.

 

동문선 제73권   
 
 
 기(記) 이색
 
 
지평현 미지산 죽장암 중영 기(砥平縣彌智山竹杖菴重營記)
 

중 각조(覺照)가 친히 찾아와서 청하기를, “지평(砥平) 용문산(龍門山)은 세상이 아는 바로서 그 이름을 미지(彌智)라고 하고, 여기에는 옛적에 암자가 있어 개현(開現)이라 합니다. 그 암자에 있으면서 도를 깨달은 자가 있었으나 그 이름은 잊었고, 다만 군왕으로부터 죽장(竹杖)을 하사받았다고 해서 그 암자를 죽장암(竹杖菴)이라 하였는데, 산중 사람들 간에 그대로 전해온 것입니다. 이 암자는 산 속의 높은 데에 의지하여 마치 심장에 있는 것 같고 상원(上院)은 배꼽에 있는 것 같아서, 암자의 높다랗고 상쾌함이 숲의 울창한 거죽에 나와 있고, 치악산(雉岳山)과 여강(驪江)을 굽어 보아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으며, 가까운 봉우리들을 나지막히 구부려 좌우로 둘러서서 뻐어나게 솟아 온자(溫藉)함이 사랑스럽고 가히 구경할 만 합니다. 사시(四時)의 경치와 밤과 낮의 변화는 역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벽을 향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면 정경(情境)이 함께 없어지고 두루 적적한 데 잠기게 됩니다. 학자들이 걱정하여 출정(出定)할 제 옷깃을 높이 세우고 눈썹을 치켜보면 조각 구름과 나는 새가 한결같이 만리에 푸르르며, 산은 병풍 같고 강은 비단을 펼쳐 놓은 것과 같이 좌우에서 밝게 비추어 안계(眼界)가 확연하고 마음속이 환해져서 의심나는 것이 모두 없어집니다. 이것을 병에 비유한다면 능히 걷지 못하던 자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며, 힘이 없던 자가 지팡이를 짚고 튼튼해지는 것과 같으니, 경치로 인하여 마음이 생기고 마음으로 인하여 도가 드러나 힘을 써야 할 바에 저절로 묵묵히 들어 맞게 됩니다. 더구나 대나무가 속이 비어 칼만 대면 쪼개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내가 이 암자를 다시 짓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각조(覺照)는 또 말하기를, “내가 처음 여기에 뜻을 두었을 적에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고 아무런 도움도 없었는데, 마침 유대언(柳代言)의 부인 원씨(元氏)가 산중에 왔기에 내가 이런 사실을 말했더니, 부인이 기꺼이 여겨 스스로 공덕주(功德主)가 되어 정사년 봄 3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가을 7월에 끝마치고는 9월에 단청을 하고 10월에 낙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집은 3간이지만 부처가 그 속에 있고 중들이 좌우에 있으니, 대총림(大叢林)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발진(發眞)해서 근원으로 돌아가서 시방허공(十方虛空)이 모두 다 사라진다면 중들의 많고 적은 것이나 집의 크고 작은 것은 우리들이 의논할 바가 아니니, 원하오니 선생은 한 마디를 주어 기를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각조는 인세(人世)를 공화(空華)하고 이미 몸이 법에 들어갔으니, 마땅히 건률(乾栗)을 구하여 그 마음으로 짊어져서 금강(金剛)의 무너지지 않는 곳을 만들기를 이같이 급하게 함이로다. 대체 일좌(一座)가 갖추어진 땅으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보게 되면 크고 작은 것이 스스로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삼천대천세계의 일어나고 멸하는 것은 또 방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요, 방촌의 마음을 구하려면 또 마땅히 일좌(一座)의 갖춘 땅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일좌의 갖춘 땅을 어찌 적다고 여기겠는가. 이것이 한산자(韓山子)가 이 기를 쓰는 까닭이니, 뒤에 읽는 자들은 행여라도 기롱하지 말지어다. 기미년 5월 모일에 쓰노라.” 하였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이색
 
 
여강현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 기(驪江縣神勒寺普濟舍利石鐘記)
 

보제(普濟)가 여흥 신륵사(驪興神勒寺)에서 죽을 적에 영이(靈異)스러움이 분명하여, 의심하던 자는 의심이 풀리고 믿는 자는 더욱 믿어서 그를 천년 후까지도 공경할 것을 꾀하였으며, 집을 지어 그 화상을 모시고 종을 만들어 사리를 모시었으니 대개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각신(覺信)이라 하는 자는 실로 석종(石鐘)을 만들었고, 각주(覺珠)라 하는 자는 연석(燕石)을 구하여 장차 그 일을 기록하력 색(穡)에게 기를 구하기를, “염정당(廉政堂)이 천녕(川寧)에 있을 제 우리 절에 왕래했는데 내가 이 까닭을 말했더니 공(公)은 기꺼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가면 마땅히 상인(上人)을 위하여 한 마디를 한산자(韓山子)에게 청하면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선생은 글을 써 주시옵소서.”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강월헌(江月軒)은 보제(普濟)가 거처하던 곳으로 보제의 몸은 이제 이미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강과 달은 전일과 같도다. 이제 신륵사는 장강(長江)에 임하였는데, 석종(石鐘)이 버티고 있어 달이 뜨면 그림자가 강에 기울어져서 하늘빛ㆍ물빛ㆍ등불그림자ㆍ향피우는 연기가 그 속에 섞이어 모여드니, 이른바 강월헌은 비록 몇 천 년을 지나더라도 보제가 생존했을 때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제의 사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혹은 높다랗게 구름과 안개 속에도 있고, 혹은 여염(閭閻) 연기와 티끌 속에도 있어서 혹 높은 데로 달리기도 하고 혹 얕은 데에 쉬어 있기도 하니, 그를 받들어 가진 자는 보제가 살아 있던 때와 비교한다면, 몇 십배보다 더할 뿐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신륵사는 그가 죽은 곳이니 마땅히 각주대사(覺珠大師)는 사리에 진심(眞心)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겠는가. 신륵사는 보제가 크게 도량을 열었기 때문에 장차 영구히 이 세상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석종의 견고함만이 유독 신륵사와 더불어 시종을 같이 할 것이 아니라, 또 장차 이 강과 이 달과 더불어 무궁함이 될 것이로다
아, 공화(空華)는 잠깐 동안이 아니요, 묵겁(墨劫)은 너르지 않는 것이 이치인데, 세상은 이루어짐이 있고 파괴됨이 있을 것이다. 세계는 비록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다고 하나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있을 것이니, 보제(普濟)의 사리는 장차 세계와 더불어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으려는가. 장차 사람의 성품과 더불어 그대로 있을 것인가. 이는 비록 어리석은 남자나 어리석은 여자라도 역시 택할 바를 알 것이니, 후세에 사리를 소중히 여기는 자는 보제의 고풍(高風)을 공경하고, 이것으로써 자기 마음을 구한다면 비로소 보제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보제의 도는 자기의 도가 될 뿐일 터이니,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기를 하노라.” 하였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양헌 기(陽軒記)
 

귀성부원군(龜城府院君) 김공(金公)이 천력황제(天曆皇帝)를 섬겨 규장각에서 글을 읽을 때 우강 게문안공(?江揭文安公)은 당시 강관(講官)이 되었었다.
각하(閣下) 김공은 그를 섬기고 제자로서의 예를 다하여 때로는 그의 집에 가서 깊은 뜻을 질문하되, 경사를 통달하고 시장(詩章)을 익혔는데, 그 뒤에 지정황제(至正皇帝)가 예로써 후히 대접하되 여러 번 천거하여 장패대경(章佩大卿)에 이르러 직책이 임금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 비단옷을 입고 고기음식을 먹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건만 태연히 화려한 일을 버리고 유아(儒雅)한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겨하여, 혹시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서로 읊고 노래하며 서로 화답하여 성정을 닦고 길렀으니, 시(詩)의 흥미를 깊게 얻었다 하겠도다.
관사에서 숙직하는 여가에는 매양 부모를 생각하여 임금에게 청하면 임금이 특별히 향을 내리고 역마를 타고 가게 한 적이 두세 번이나 된다. 금강산에 나아가서 성수(聖壽)를 빌기를 마치고, 술을 들어 고당(古堂)에 계신 부모에게 올리면 부모가 즐거워하되 오직 공(公)으로 하여 기뻐하였으니, 가정 안에 화기가 가득하여 사람들이 이것을 지금까지 공의 풍류가 한가롭고 아담함으로 칭송한다. 전배 중에 큰 선비들도 많이 공을 따라 놀았는데, 우리 선군 가정공(稼亭公)도 또한 그 하나이다.
충의(忠義)와 거취(去就)의 큰 절개에 이르러서도 역시 이를 경솔히 여겨 시속을 따르지 않았는데, 현릉(玄陵)의 기축년 굴욕을 당할 때에도 뜻을 지키고 변하지 않아서 진실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가히 군자(君子)라 이르겠도다. 이 까닭에 현릉이 사랑하고 중히 여겼으니, 그 글을 읽어 깊은 뜻을 얻었음을 알겠다.
지금 천녕현(川寧縣)에서 사는 데는 산이 있어 오를 만하고 물이 있어 가볼 만한데,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여기에 왕래하였으니, 또 염동정(廉東亭)의 얻기 어려움이 있도다. 그 일시의 바람과 달을 읊고 천지 사이에 잘난 체하여, 전일의 번화하고 광대한 인물들의 성(盛)하고 읍양하고 주선하는 예법의 아름다움을 모두 생각 밖으로 없애버리고 꿈속에서만 흐릿할뿐 털끝만한 나머지도 없으니, 비록 오수(汚?)의 독락(獨樂)한 것이라도 이보다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시경》에 이른바, “군자는 만족해 한다.”는 것은, 대개 적은 벼슬에 숨어 있는 자를 말함인데, 공(公)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은 곳에 숨어 있으니, 그 자취는 다르면서도 마음은 같음이로다. 동정(東亭)이 이미 조정에 돌아오자 나를 볼 때마다 공을 칭찬하여 마지 않았으며, 또 공의 말로써 양헌기(陽軒記)를 쓰라고 하니, 김공(金公)은 부집(父執)이니 우리로도 사양할 수가 없으나, 내 병이 오래 되어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오직 한 마디 말로만 답한다.
양(陽)은 군자요, 음(陰)은 소인이다.《주역(周易)》의 64괘가 모두 양을 붙들고 음을 억제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군자의 도를 길게 함이로다. 성인이 세상에 큰 교훈을 드리움이 이와 같으니, 그 음을 억압하고 소인을 없이함이 깊도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양의 유(類)이요, 슬퍼하고 싫어함은 음의 유이니, 내가 아는 바를 말해 보겠다.
병을 앓고 난 뒤에 늦게 일어나 처마 밑에서 볕을 쬐고 몸을 펴서 기운을 차려 걸으면, 정신이 맑고 뜻이 굳어져서 그 즐거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있을 것이니, 일찍이 옛사람이 임금에게 헌신(獻身)한다는 말로써 스스로 징험해 보면 진실로 맛이 있었는데, 더욱이 지금 요동(遼東) 고새(故塞 현 평북(平北) 박천(博川))에는 여름에도 눈이 내리니, 김공(金公)의 임금께 헌신하기로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날에나 그치겠는가. 아깝도다. 내 털도 반넘어 희어졌는데 하물며 공이겠느냐. 청하건대, “이 말로 답하는[塞責]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동정(東亭)이 말하기를, “옳도다. 그칠지어다.” 하기에 드디어 이것을 써서 기(記)로 삼는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양촌 기(陽村記)
 

양촌(陽村)은 나의 문생인 영가(永嘉) 권근(權近)의 자호이다. 근(近)의 말에 이르기를, “근이 선생의 문하에 있어 나이는 가장 어리고 학문도 가장 낮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여 미치려 함은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字)를 가원(可遠)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천하에 가깝고 또 먼 것은 그것을 안으로 구하면 정성이요, 밖으로 구하면 양(陽)이라 하는데, 정성은 오직 군자이어야만 실천하는 것이요, 양(陽)이란 것은 어리석은 남자나 어리석은 여자라도 모두 다 같이 아는 바이다. 봄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매우 무더우며 가을에는 건조하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따뜻하여, 세공(歲功)이 이루어지게 되고 민생(民生)이 살아 갈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근이 그윽히 스스로 성인이 인재를 만드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서와 예악의 가르침이 모두 천시(天時)에 순종하는 바가 되므로, 중니(仲尼)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를 숨긴다고 하는가. 나는 숨기지 않았노라.’ 하였으니, 대개 중니는 천지와 같고 일월과 같이 넓고 커서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남을 대신하여 밝게 비치지 않는 것도 없어 모든 물건이 그 사이에 있어서는 형형 색색으로 모든 근본 바탕을 드러내어 빠짐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소리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 속에 뛴다.” 하였으니, 상하에서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인데, 무슨 숨김이 있겠는가. 비록 그 음험하고 간사한 무리라도 역시 모두 그 뜻을 숨김이 없으니, 부자(夫子)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감화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소소(昭昭)하게 밝고 호호(浩浩)하게 크도다.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無雩)에 바람쐬는 일같은 것은 오히려 족히 화기가 유행함을 알게 되어 당우(唐虞)의 기상(氣像)과도 다름이 없으니, 그 시절에 맞춰 비가 와서 감화시킴으로써 만물이 번창하고 번식하는 것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랴.
슬프다. 중니(仲尼)는 천지와 일월을 위해서 그를 따라 노는 3천 명 중에서도 속히 학문을 배운 70명은 모두 양도(陽道)를 뚜렷이 찾아 나타난 자들이요, 보고서 안 자는 심히 적다.
증자(曾子)와 자사(子思)는 다행히 글을 저술하여 오늘날에 이르렀고, 염락(濂洛)의 학설이 행해진 뒤에야 학자들이 그 글을 읽어서 중니의 천지에서 노는 것과 같았고, 중니의 일월을 보는 것과 같았는데, 진한(秦漢) 이래로 음(陰)에 가리고 막혀 어두컴컴하여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것이 맑은 바람이 일어 흔적도 없이 쓸어버린 것과 같았으니, 얼마나 쾌한 일이냐. 10월은 양(陽)이 없는데도 양월(陽月)이라고 이르는 것은 성인(聖人)의 뜻이니 이것은, “큰 과실을 먹지 않는다.”는 교훈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성인이 양을 붙드는 것이 지극하도다.《춘추(春秋)》는 성인의 뜻인데 기린이 양물(陽物)로써 사로잡혔음을 성인이 몹시 상심해 하였으므로, 춘추를 지을 적에 춘왕 정월(春王正月)이라고 썼고, 이것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일통(一統)을 크게 한다.”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때를 만나지 못했으면 그만이지만 만났으면 천자를 도와 일통을 크게 하여 사해에 양춘(陽春)을 펴게 할 뿐이다. 나같은 사람은 늙었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으랴. 가원(可遠)은 그 생각한 대로 자호를 하여 더욱 힘쓸지어다. 힘쓰는 데는 마땅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 반드시 정성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로다.
기미(己未)년 봄 3월 계유(癸酉)에 쓰노라.

동문선 제73권   
 
 
 기(記)
 
 
규헌 기(葵軒記)
 

영가(永嘉) 권희안(權希顔)은 내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다.
맑으면서도 구차히 남보다 다르게 하지 않았고, 화하면서도 구차히 남과 같으려 하지 않았는데, 조정에 선 지 오래도록 그 뜻을 얻어 베풀지 못했다.
이에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뜻을 취해서 자기 마루에 규헌(葵軒)이라고 써 붙이고 나에게 기(記)를 쓰기를 청하였다.
내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전에 들은 바를 더듬어 다음과 같이 쓴다. 대개 이치란 형상이 없고 물(物)에 붙어 비로소 물의 형상이 되고 이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용도(龍圖)와 귀서(龜書)는 성인들이 법으로 삼는 바이며, 시초(蓍草)가 나와 음양의 기우(奇?)의 변화를 다 궁구하여 만세(萬世)의 물을 열고 일을 이루는 근본이 되었으니, 비록 적은 물건이라도 어찌 이것을 적다고 할 것이랴. 근세의 관매(觀梅)를 점치는 학문도 또한 여기에 근본하여 점차 발전한 것이다. 어찌 이것을 그만 둘 수가 있는가. 이로써 희안의 증대부(曾大父) 문정공(文正公)은 도덕과 문장이 백료의 본보기가 되어 그 거처하는 곳을 국재(菊齋)라 했고, 그의 대부(大父) 창화공(昌和公)은 공명과 부귀가 여러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더니 그 거처하는 곳을 송재(松齋)라고 하였다. 또 그의 아버지는 만호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외척의 세력을 잡아서 숭교리(崇敎理) 연지(蓮池) 옆에 누각을 지어 여기에 운금(雲錦)이라 하되, 그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이것이 종족에게까지 미쳐서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이 기까지 지어 주었으니, 실로 장한 일이로다.
이제 희안이 해바라기를 취한 것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인데, 해바라기의 물건됨은《춘추(春秋)》에도 전해졌고, 속수선생(涑水先生)이 또 이것을 취해다가 시(詩)까지 지었으니, 해바라기가 대접을 받은 것이 크도다.
물과 물에 있는 초목의 꽃이 아주 많지만, 유독 해바라기가 능히 뿌리를 보호할 줄을 아니 이는 슬기가 있음이요, 능히 해를 향하니 이는 충성됨이라, 군자들이 이를 취하는 것이 어찌 부질없는 일이랴. 서리와 이슬이 내려야만 국화는 누르고, 얼음과 눈이 쌓여야만 소나무는 푸르며, 바람과 비가 흩어져야만 연꽃의 향기는 더욱 맑으며, 태양(太陽)이 비쳐야만 해바라기꽃은 기울어지는 것이니, 그 보통의 초목과는 매우 다르도다. 누가 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으리요.
국화는 은일(隱逸)이요, 소나무는 절의(節義)이며, 연꽃은 군자요, 해바라기는 지혜와 충성인데, 이들이 어찌해서 한 집에 모두 모였는가. 할아비와 아들과 손자가 서로 계승하여 세상에 혁혁하고, 물건을 취하여 스스로 자기를 나타냄이 이와 같으니 권씨(權氏)가 보통의 초목들로 더불어 같이 썩지 않을 것이 또한 분명하여 사림에 빛을 드리우고 왕국에 명예를 넓힐 것을 가히 기다릴 만 하니, 청하건대 이를 기억하기 바라노라.
정사년 납월(臘月)에 쓴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국간 기(菊澗記)
 

동년(同年)인 병부(兵部) 박재중(朴在中)이 자기가 거처하는 방에 편액을 달았는데 국간(菊澗)이라 하고 나에게 기를 써달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국화는 꽃의 은일한 것이요, 산골짝 물은 물의 그윽한 것인데, 은밀하면 반드시 그윽하고 그윽하면 반드시 은일하다는 것은 대개 그 기상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재중은 나와 함께 이미 벼슬하여 옥당에 들어가 금성(錦省)을 지냈으니, 모든 사대부들이 서로 부러워하는 바가 되어 조금도 사양하지 않으니 어찌 그 은밀한 것을 사모할까 보냐. 재중은 기상이 수려하고 밝으며 기질이 아름답고 밝아서 고상한 뜻과 한가하고 아담한 용태(容態)는 좋은 금(金)과 순수한 옥과 같으며, 빛나는 산과 윤택한 바다와 같으니, 어찌 그 그윽한 것에 가까우리요. 그러나 그의 취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반드시 그 즐겨하는 바를 의심할 수 없다. 대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가 있는 이는 말을 좋아하는 것은 그 덕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재중이 마음에 얻은 것은 반드시 있는 바가 있을 것이니, 그의 거처하는 방에 표하는 것도 역시 이같이 하지 않을 수 없도다. 재중은 부모에게 효도하되, 부모의 뜻을 봉양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으니 그가 벼슬하는 것도 장차 자기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요, 자기 몸을 영화롭게 하려 함이 아니다. 재중은 그 몸을 닦아 덕을 밝히는 것을 급무로 삼으니 그가 자기 말을 문채나게 하는 것은 장차 그 도(道)를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요, 자기 몸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부모에게 효도할 뿐이나 몸은 은일한 것을 뜻하며, 덕을 밝게 할 뿐이나 몸은 유한(幽閑)한 것을 뜻하니, 공명과 부귀가 그를 더럽히지 못함이 분명하도다. 하루 아침에 때를 만나서 재상의 벼슬에 나가게 되고 다시 옮겨 조아(爪牙)의 군사를 맡게 되면 부모를 봉양하는 뜻을 다할 것이니 어찌 한갓 자기 몸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과 비교가 되랴. 하물며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여 물건을 만나 감회를 일으키면 언덕과 골짜기의 모양과 연기와 안개의 생각을 진실로 가릴 수가 없을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처소에 이와 같이 편액을 쓰는 것이 마땅하도다. 나는 목단(牧丹)에 가깝고 또 황료(潢?)에 가깝다. 이는 부귀를 족히 부끄러워하는 데 하물며 신명(神明)에 어떻게 드리겠으랴. 국간(菊澗)을 쳐다보니 실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비록 그러하나 천지는 본래 한 기운이요, 신하와 초목도 본래 한 기운이니 어찌 그 사이에 경중을 따지랴. 아, 이것은 재중과 더불어 말할 것이로다. 경신년 여름 4월에 쓰노라.” 하였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양주 통도사 석가여래 사리지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
 

홍무(洪武) 12년 기미 가을 8월 24일에 남산종(南山宗) 통도사(通度寺) 주지 원통무애변지대사(圓通無?辯智大師) 사문(沙門) 신 월송(月松)이 그 절에서 역대로 간수해 오던 자장(慈藏)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 석가여래의 정골(頂骨) 1개, 사리(舍利) 4개, 비라금점가사(毗羅金點袈裟) 1개, 보리수 잎 몇 개를 얻어 가지고 서울에 와서, 문하 평리(門下評理) 이득분(李得芬)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월송(月松)이 을묘년 이후로 상은(上恩)을 입어 이 절에 와 있더니 정사년 4월에 이르러 왜적이 와서 그들은 사리를 얻으려고 땅을 깊이 파므로, 나는 그들이 정말 이것을 파낼까 두려워하여, 짊어지고 달아났었습니다. 금년 윤 5월 15일에 왜적이 또 오므로 나는 또 이것을 지고 절뒤 언덕으로 올라가 나무와 풀로 가리고 있으며 들으니, 적들이 말하기를, ‘주지는 어디 있으며, 사리는 어디 있느냐.’ 하고, 절의 종을 잡아서 몹시 급히 물었으나, 마침 그때 날이 저물고 또 비가 그치지 않아서 좇아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나는 산을 넘어 언양(彦陽)에 이르렀다가 이튿날 절의 종을 만나 내 말을 세우고 서로 울면서 돌아오려 하니, 왜적은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마침 새 주지가 오려 하였으나 이를 편안히 모실 곳이 없어서 드디어 받들고 왔습니다.” 하였다.
그때 이공(李公)은 적은 병으로 몸이 몹시 불편하여 손들을 모두 쫓아 보냈는데, 사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사리가 내 집에 이르렀으면 경사스럽고 다행하기 이를 데 없도다.” 하고 병이 이내 평복(平復)되었다.
이공은 궁중으로 들어가 이 사실을 아뢰니 마침 이때는 장씨(張氏)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지 한 달이라, 찬성사 신 목인길(睦仁吉)이 신 홍영통(洪永通)과 상의하여 임금 앞에 아뢰니, 태후 근비(謹妃)가 모두 공경함을 이루고 예를 다하며, 태후는 또 은(銀) 대접과 보주(寶珠)를 주어 내시참관(內侍?官) 박을생(朴乙生)에게 명하여 이를 송림사(松林寺)에 봉안하도록 했으니, 이는 이공이 이 절을 중수해서 낙성회(落成會)를 베풀기 때문이었다.
국중에서 시주하는 사람들이 귀한 이나 천한 이, 슬기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따질 것 없이, 물결처럼 몰려들어 사리의 분신(分身)을 얻기를 빌어서, 이공(李公)이 3개를 얻고 영창군(永昌君) 유(瑜)가 3개를 얻었으며, 윤시중(尹侍中) 항(恒)이 15개를 얻고 회성군(檜城君) 황상(黃裳)의 부인 조씨(趙氏)가 30개를 얻었으며, 천마산(天磨山)의 여러 중들이 3개를 얻고 성거산(聖居山)의 여러 중들이 4개를 얻었으며, 황회성(黃檜城)이 친히 1개를 얻었으나 월송(月松)은 마침 밖에 나가서 시주를 받다가 와서 사리를 빌어 갔으니 이 사실을 월송은 다 알지 못하였다.
다음해 6월 16일에 이공이 신 색(穡)에게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강남 감옥에서 매를 맞을 적에 생각하기를, 원하건대 살아서 돌아온다면 친히 본국의 명산들을 돌아보리라 하여 통도사도 실상 그 중에 있었더니, 조정으로 돌아오자 현릉(玄陵)이 특별히 향을 내려 득분(得芬)을 명하여, ‘몸소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행례(行禮)하라.’ 하기에 통도사에 이르러 사리를 빌어 6개를 얻었으니, 득분이 사리와는 인연이 없다고 할 수 없도다.” 하였다.
사리가 통도사에 있던 것은 신라 선덕대왕(善德大王) 때부터였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로 들어와서도 또 장차 5백 년이나 되도록 일찍이 한 번도 송경(松京)에는 이른 일이 없었다. 주상전하께서 임어한던 처음 신 등이 벼슬자리를 채울 적에 월송사(月松師)가 사리를 받들고 왔는데 그 우연함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득분이 임금께 이 사실을 고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영예문관(領藝文館) 신 색(穡)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갖추어 쓰도록 하라.” 하시니, 득분이 이 때문에 와서 말한다. 이에 신 색은 월송사를 따라 그 일을 알아가지고 또 계속하여 이공의 말을 써서 이것을 제목하여〈통도사 석가여래 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라 하였다.
이 달 21일에 쓰노라.

동문선 제73권   
 
 
 기(記)
 
 
조씨 임정 기(趙氏林亭記)
 

평양조씨(平壤趙氏)는 정숙공(貞肅公) 때로부터 충렬왕을 도와 원나라 세조(世祖)를 섬겨서 울연(蔚然)히 원나라 신하가 되어 여러 아들들이 모두 큰 벼슬을 했고, 그 중에도 둘째 아들 충숙공(忠肅公)이 더욱 후중(厚重)해서 군자들이 지금껏 칭송하여 마지 않는다. 그 아들 판서공(判書公)이 병으로 평주(平州) 남쪽 철봉(鐵棒) 동쪽에 돌아가 안양(安養)하기를 받자, 그 아들 형제가 곁에 모시어 조석으로 봉양했으니 이것이 조씨(趙氏)의 임정(林亭)이 생긴 유래이다.
조씨의 중자(仲子) 통례문판관(通禮門判官)의 이름은 완(琓)인데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모가 여기 와서 사신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집도 겨우 완성되고 공양도 겨우 계속할 뿐이다. 대개 우리 구씨(舅氏) 사암공(思菴公)이 돌아가신 후에 비록 스스로 공양하는 것이 있으나 그것은 담담할 뿐 아무런 맛있는 것이 없으니, 그 형상을 잊어서 세상을 잊고 몸을 즐겁게 하여,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써 남은 생애를 보내고 후생들을 도와서 겨우 그 도를 얻었으니, 우리 형제가 화목하고 기뻐해서 그 속에 노는 것이야 그 즐거움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바야흐로 여름 경치가 펼쳐지니 산빛과 물기운이 위아래에 스며들고, 비올 뜻과 구름 모양이 조석으로 변화하여우리 부모를 즐겁게 하였으니, 이는 또 하늘이 조씨를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 형제는 실로 마음에 쾌하나 이것을 입밖에 낼 수는 없고, 또 붓으로 쓸 수도 없어 장차 우리의 효도하는 마음을 넓힐 길이 없으니 임정을 지은 것도 장차 부세를 피하여 산에 들어가기를 깊게 하고, 이름을 요구하여 경치 좋은 것을 표방하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니, 청하건대 선생은 이것을 기록해 주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대체 군자가 그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심지(心志)와 구체(口體)가 다른 것인데, 이 조씨(趙氏)의 형제야말로 이를 모두 겸했다고 할 것이다. 평양의 고을됨이 경읍(京邑)과 비슷해서 사대부들이 별장을 둔 자가 많고, 왕래하는 편과 벼슬하는 사람이 많다. 관청 일이 조금 한가하면 혹 휴가의 틈에 필마로 왕래하는데, 어찌 유독 임정이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 뿐이리오. 그들이 길에서 풍경의 아름다움을 읊는 것은 형제들이 마땅히 자득함이 또 깊을 것이다. 나는 병들어 문밖에 나가지 않은지 수 년이 되었기 때문에 조씨 형제들을 더욱 부러워하여 끝에 대략 기록하노라. 그의 백씨의 이름은 호(瑚)인데 나의 문생이었다.” 하였다.

동문선 제73권   
 
 
 기(記)
 
 
양진재 기(養眞齋記)
 

양진재(養眞齋)는 전 안동대도호(前安東大都護) 강공(姜公)이 거처하는 곳이다. 공(公)이 병으로 누은 지 오래더니 그의 외종제 장원(壯元) 김순중(金純仲)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기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대개 공보다 먼저 병든지라, 지금은 비록 일어났으나 오히려 힘이 없고 혹 때때로 시고 아픈 것이 서로 침노해서 일어날 수 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정에 다시 복직하여 양양하게 도당(都堂)으로 들어갔으나 두어 달 후에 파직했으니 이는 병이 이미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자는 나뿐이니 공이 당세(當世)의 말을 잘하는 자에게 이 글을 구하지 않고 나에게 구함도 마땅하도다.
대체로 사람이 이 기운을 받고서 태어남에 건(乾)은 굳건하고, 곤(坤)은 유순할 뿐이요, 이것을 나누어 말하면 수ㆍ화ㆍ목ㆍ금ㆍ토가 있을 뿐이니 그 양(陽)은 기수(奇數)이고, 음(陰)은 우수(?數)이며, 양은 변하고 음은 화하는 근원을 구하면 무극(無極)의 진(眞)으로 돌아갈 뿐인바, 이 무극의 진이란 이름지어 말하기가 어렵도다.
《시경》에 말하기를, “상천(上天)의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하였으니, 이것이 그 무극이 있는 곳인가. 그러므로 주자(周子)는〈태극도(太極圖)〉를 지어 또한 말하기를, “극함이 없는 것이 태극(太極)이라.” 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태극이 한 무극임을 말한 것이다. 하늘에 있어서는 혼연(渾然)할 뿐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우뢰를 움직이기 전이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적연(寂然)할 뿐으로 일에 응하고 물건에 접히기 전이니, 바람을 일으키고 우뢰를 움직여서 혼연한 자가 조그만 변함도 없다면 일에 응하고 물건에 접해서 적연한 자는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것을 거울에 비유한다면 곱고 더러운 것은 물건에 있을 뿐이요, 거울에는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물건을 비쳐주는 까닭으로 해서 물건에게 더러움을 받는 바 되랴. 이로써 사람의 나는 것은 이미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오직 대인(大人)은 이것을 잃지 않는 까닭에 능히 대인이 되는 것이요, 이 대인이 밖으로부터 얻은 것은 아니다.
임금을 섬기는 데 예를 다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고 참이며, 병든 사람을 위문하고 죽은 사람을 조상하는 것도 아첨이 아니고 참이다. 지금에 계속해서 사심을 이기지 못하여 꾀를 부려서 서로 해치며 간사한 짓을 하여 자기를 이롭게 하며, 이로써 도리어 온전함을 구하여 훼방이 되게 하는 일도 자주 있으니 그 거짓을 일삼는 것이 또한 졸(拙)한 일이 아닌가.
강공(姜公)이 비록 병이 있으나 능히 참됨을 길러서 이것으로 그 집에 편액(扁額)을 썼으니 그가 물건에 유혹되지 않음을 단연코 알겠도다. 나는 귀로 듣고 입으로 외기만 하는 공부를 하였을 뿐이므로 마음을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능히 이를 행하지 못한다.
추(鄒)나라에 말이 있기를,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으니, 청하건대 욕심을 적게하는 것으로 참을 기르는[養眞] 주장을 삼을 것이로다.
경신(庚申)년 7월 초하루에 쓰노라.
동문선 제73권   
 
 
 기(記)
 
 
육우당 기(六友堂記)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는 강절(姜節)선생의 눈ㆍ달ㆍ바람ㆍ꽃이란 것을 취하여 그 집을 사우당(四友堂)이라는 이름하고는, 나에게 그 뜻을 해설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나는 원래 강절을 배우기를 원하지도 않은 데다가, 또한 겨를조차 없어 오랫동안 응해 주지 못하였더니, 그가 여흥(驪興)에 살면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 모친의 집에 있는데, 강(江)과 산(山)의 좋은 경치가 조석으로 나를 위안하여, 눈ㆍ달ㆍ바람ㆍ꽃의 사우(四友)만이 아니오라, 강과 산을 더하여 육우(六友)라고 하였으니 해설하여 가르쳐 주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나는 쇠하고 병든지 오래되어 천시(天時)가 위에서 변하는데도 나는 몽매하게 알지 못하고 지리(地理)가 아래에서 변하는데도 나는 어두워 느끼지 못할 뿐인데, 강절의 학설은 상수(象數 천지의 운행과 만물의 형상)에 밝다. 지금 비록 강과 산을 눈ㆍ달ㆍ바람ㆍ꽃의 4가지에 더하여 강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였으되,《주역(周易)》의 육룡(六龍)과 육허(六虛)에서 강절의 학설이 나온 바이니 그대의 육우(六友)란 것도 상수(象數)의 학설과 같을 뿐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미 강절의 학설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상수 밖의 학설인들 말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산은 우리 어진 이의 즐겨하는 것이라 산을 보면 나도 어질어[仁]지고, 물은 우리 지혜로운 이의 즐겨하는 것이라 강을 보면 나도 지혜로워 진다. 눈이 추위를 덮어 따뜻해지니 나의 기운을 적중하게 보존해 주는 것이요, 달이 밤에 나와 밝으니 나의 몸을 편안하게 보존하는 것이로다. 바람이 팔방(八方)에서 각각 때를 따라 이르니 내가 망녕되지 않게 하는 것이요, 꽃이 사시(四時)로 각각 종류대로 모이게 되니, 나의 차례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로다. 하물며 경지(敬之)는 가슴속이 맑아 한점의 티끌이나 찌거기도 없고, 또 그가 사는 곳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아 밝은 거울이나 비단 병풍과 같다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눈은 외로운 배 위의 도롱이와 삿갓에 덮인 것이 더욱 아름답고, 달은 높은 다락과 술잔에 비춘 것이 더욱 아름답도다. 바람은 낚싯줄에 부니 더욱 맑고, 꽃이 책장[書函] 위에 있으니 그윽한 것이 더욱 그윽하도다. 4가지로 사시(四時)의 경지가 각각 더욱 지극한데 강산(江山)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도다. 경지는 어버이를 모시는 여가에 강물에 배 띄우고 산에는 나막신으로 올라, 맑은 바람 앞에 서서 떨어진 꽃잎을 헤아리도다. 눈을 밟아서 중을 찾고 달을 대하여 손[客]을 청하니 사시로 즐거움이 역시 지극하도다. 경지(敬之)는 아마 한 세상에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난 재주이리라. 그러나 벗이란 것은 뜻이 같은 것이니 멀리 옛 사람을 벗하려면 옛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요, 지금 사람을 벗하려면 나와 같은 무리가 어찌 적으리오? 그러나 경지는 강ㆍ산ㆍ눈ㆍ달ㆍ바람ㆍ꽃 여섯 벗[六友]만이 있으니, 경지는 아마 한 세상에 남이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재주로다. 천지는 부모와 같고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니, 어디로 간들 나의 벗이 아닐까보냐. 또한 하물며 대축(大畜) 괘(卦)의 산(山)과 습감(習坎)의 수(水)를 강론하여 많이 익힌다면 진실로 나의 벗일 것이로다. 이로써 육우당(六友堂)의 기(記)를 짓노라.” 하였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윤필암기(潤筆菴記)
 

이색(李穡)

사불산(四佛山)을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지공(指空)스님이다.
중 각관(覺寬)과 찬성(贊成)이었던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가 이 산에다 윤필암이란 절을 짓고, 윤필암기를 지어달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에는 “산 가운데 있는 암자를 묘적암(妙寂菴)이라 하는데, 요연선사(了然禪師)께서 계셨고, 나옹(懶翁)스님께서 출가(出家 처음으로 중이 됨)한 곳입니다. 지금은 나옹스님은 떠났으나 사리는 온나라에 펴졌으며, 그림을 그려서 모시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스쳐가신 땅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꼭 이런 곳을 다 평소에 유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은 뽕나무 아래서 사흘 밤을 계속해 자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출발한 곳으로 말할 것같으면, 머리를 깎음으로써 번뇌를 씻어버린 곳이요, 계명을 받음으로써 중이 된 곳이니, 이른바, ‘여러 성인이 전하지 못한 종문(宗門)의 지극한 곳[極處]’으로 지향하는 출발이 이에서 시작된 것이며, 도에 들어감도 이에서 시작되었다 하겠습니다. 도를 회암(檜巖)에서 깨닫고, 얻은 것을 평산(平山)에서 인정받으신 것도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서울에서 설법해서 선왕(先王)의 스승이 되신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니, 공덕산은 사실로 나옹의 본바탕이 되는 곳입니다. 나옹은 벌써 돌아가셨으되 그분의 사리를 간직하고, 그림을 모시어 공양하는 것은 오늘날 공덕을 구하는 사람들의 보통 일입니다마는, 소위 참된 공덕을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공덕산은 나옹 때문에 이름을 더욱 전하게 되었고, 세상에서 나옹을 흠모하여 공덕을 닦는 사람도 그와 같이 넓은 지역에 깔렸으니, 따져볼 때 공덕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분주하게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선생께서 한 말씀으로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었다.
나는 이 글을 받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공덕산이 대원(大院) 동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봉 위에 큰 돌이 네 갈래로 갈라졌고, 높이가 모두 넉 자 남짓한데, 마치 부처님의 모양같으므로 복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떼를 지어 몰려와서 기도하기 때문에, 이 산을 ‘사불산(四佛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聖)ㆍ지(智)ㆍ묘(妙)ㆍ원(圓)은 그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한 것이니, ‘묘적암(妙寂菴)’이란 이름인들 어찌 근거 없이 생겼겠는가. 공덕을 묘적암에서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옹과 같이 하면 족할 것이다.” 하였다 아울러 드러낸다. 경신 추 8월 초하루 기한다.


[주D-001]중은 …… 않는다 : 노자(老子)가 오랑캐 나라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뽕나무 아래서 세 밤을 거듭 자지 않았다. 이것은 오래 있음으로써 은애(恩愛)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後漢書》
[주D-002]여러 …… 곳[極處] : 종문의 지극한 곳을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하는데, “향상일로는 천성(千聖)으로 전하지 못했다.” 한다 《碧巖鐘電?》

동문선 제74권   
 
 
 기(記)
 
 
자비령 나한당기(慈悲嶺羅漢堂記)
 

황해도와 평안도 경계선에 크고 높은 산이 있어 길손들이 이곳을 넘을 때마다 고생이 심한 까닭에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자비령(慈悲嶺)이라 했다. 이 영의 북쪽은 평안도[平壤]에 속하고, 그 남쪽은 황해도[西海]에 속하는데, 나한당은 실제로 영북쪽 골짜기의 선참(仙站)에 자리잡고 있다. 이 당의 창립은 어느 연대인지 알 수 없으나 영험이 매우 나타난다고 한다. 내 젊었을 때 역마(驛馬)를 몰아 연도(燕都 중국의 서울 북경 )에 갔다가 다시 이 나한당 앞을 지나게 되어 한번 문안에 들어가 예를 드린 적이 있다. 당에는 깃발이 대단히 많이 달려 있었는데, 그 모두가 여행자의 기원하는 말이 씌어 있었고, 그 주방과 마구의 시설을 보면 여행자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 대단히 잘 갖추어졌음을 볼 수 있었다. 마음에 흐뭇함을 느꼈으나 자세한 것을 물을 겨를이 없었다.
이제 좌가부승(左街副僧) 계명사 주지(啓明寺住持) 중덕(中德) 정해(定海)란 사람이 중수하여 새롭게 만들었다는 기록을 쓰고, 그 제자 성주(省珠)를 보내 나에게 당기(堂記)를 지어 달라 하였는데, 그 중수의 시말을 써 보내지 아니하였다. 그 경위서를 성주에게 받으려 하였더니, 그는 또 말하기를 “계명사(啓明師)의 갈 길이 매우 바쁘니, 선생께서는 그 사실을 생략해서 써주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절을 중수한 것은 나한을 섬김으로써 복을 구하는 것이요, 여행자를 편하게 함으로써 우리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덕을 쌓는 것은 성인을 축복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에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절의 시말같은 것은 저 말단의 일이니 무어 쓸 게 있겠습니까. 쓰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소이다. 오늘날 천하에 불교가 가득 찼으나 그 원류를 따지면 서역(西域)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글 쓰는 법에 있어서 그것을 생략하여야 옳을 것이요, 자비령은 우뚝 솟고 나한당은 번쩍 아름다웠으니 아, 하고 감탄하며 한번 바라보는 것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말에 내려서 마음대로 경치를 돌아보고 향을 피워 정성을 들이게 되면, 가쁜 숨이 훅 펴이고 미혹된 심신이 고요해지게 되는 것으로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것이니, 글 쓰는 법에 있어서 이것은 마땅히 드러내 써야 할 것입니다.” 하고는 다시 그 자세한 사실을 기록하여 올 것을 요구하지 않고, 성주가 말한 대로 바로 써주어 가지고 돌아가 지붕과 벽 사이에 달도록 하였다.
계명(啓明) 스님의 자비는 자비령과 같이 풍부한 것이 옳을 것이요, 나한의 신통(神通)은 어쩌면 계명사의 신통도 되리라 자비 신통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큰 용도가 되는 것이다. 내 이러한 뜻에서 이 글을 기(記)한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삼중대광(三重大匡) □군 운암(雲菴) 징공(澄公) 청수(淸?) 절간(絶磵) 윤공(倫公)에 부탁하여 쌍계루(雙溪樓)의 이름을 짓고, 또 삼봉 정씨(三峯鄭氏)가 지은 누기(樓記)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는데, 백암사의 내력은 자세하나 쌍계가 쌍계로 된 내력과 쌍계루가 쌍계루로 된 내력은 모두 생략되어 써 있지 아니하였다. 아마 그 이름을 명명(命名)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듯 싶다.
이렇게 되어 한번 구경하기로 작정하여 절간공(絶磵公)을 따라 절을 찾았다. 절은 두 물 사이에 있었고, 물은 절을 일으킨 윗목에서 합쳤는데 동쪽은 근원이 가까웠고 서쪽은 근원이 멀기 때문에 수세가 크고 작고 하였다. 그러나 합하여 못을 이룬 뒤에 산을 빠져 흘러 내려갔다. 절 사면을 둘러 있는 산은 모두 높고 가팔라 한여름 6월 더위에도 바람을 쏘이고 땀을 들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두 물이 합치는 곳에다 쌍계루를 세웠다. 왼쪽 물위에 걸터앉아 바른쪽 물을 굽어보면 다락의 그림자와 물빛이 아래위에 서로 비치어 참으로 볼만 하였다.
경술년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누(樓)도 무너져버렸다. 청수옹(淸?翁)은 이 누를 중수하고 쌍계루 기를 지어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쌍계루는 우리 스승님이 세운 것인데 이처럼 무너져도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스승님은 스승을 이어받기 오대(五代)나 되었으므로 절에 뜻을 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누가 지금 없어졌으니 그 책임을 어디로 돌려야 할 일입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날을 다투어 공사를 끝내고 옛 모습대로 다시 세우자 썩었던 재목이 견고하여지고 알 수 없게 되었던 채색이 선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서야 족히 스스로 위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우리 스승님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점이 있지 아니한가 두려워함이 있음을 내 제자들이 반드시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 제자로서 나를 따라 이 절에 머물러 있는 자가 나의 이 마음을 못 알아본다면, 절 일은 지탱되지 못할 것이니 누(樓)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불상에 먼지가 끼고 지붕에 비바람이 들이치게 되어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누 하나쯤 재건한 것으로써, 글로 쓸 만한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꼭 글 잘하는 분을 구하여 써주기를 청하는 것은 오래도록 전하기를 꾀하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나의 후배를 경계하기 위한 까닭이니, 사양하지 마시고 써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내 일찍이 행촌(杏村)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모셨고, 그 자질(子姪)과 같이 공부하였는데 선생은 그 계씨(季氏)다. 여러번 써드린다는 약속을 어겨 왔으므로 이제 절간공(絶磵公)의 말을 인용하여 이름을 ‘쌍계루’라 하고 기를 지어 보낸다. “아, 내가 늙었구나. 명월이 누에 가득 찼으련만 하룻밤 그곳에서 구경할 길 없으니, 젊어서 길손되지 못한 것을 한할 뿐이로다.” 하고는, 그 사제(師弟)의 이어받은 계통은 자세하게 절 문서에 기재되어 있기에 여기에는 쓰지 않았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향산 안심사 사리 석종기(香山安心寺舍利石鐘記)
 

지공(指空)은 중인데 고려의 보제왕사(普濟王師)가 그 제자이다. 그들이 죽은 뒤에 화장을 지냈는데 모두 사리가 나와 그들을 믿던 사람이나 의심하던 사람도 이것을 보고 합하여 하나로 되었다.
향산은 압록강 가에 있는데, 땅이 가장 외지고 여진(女眞)과 경계를 접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많아 국경 지대의 신하였던 까닭에, 불교에 있어서도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껏 따라 서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아래에 꼭 그보다 더 좋아할 사람이 있다.”는 맹자의 말이 어찌 믿어지지 않겠는가. 중 각지(覺持)가 와서 말하기를, “나와 각오(覺悟) 두 사람이 석종(石鐘)을 만들어 지공의 사리 아홉 개와, 보제의 두골(頭骨) 한 조각과 사리 다섯 개를 안심사에 모셔 두었는데, 시주(施主)로 말하면 의주(義州)의 상만호 봉익대부 예의판서(上萬戶奉翊大夫禮儀判書) 장여(張侶)의 부인 용만군부인(龍灣郡夫人) 강씨(康氏)요, 또 보제의 가사 한 벌과 직철(直? 중이 입는 도포) 열 여섯 벌과 환장(環杖) 한 개를 보현사에 간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향로전(香爐殿)은 지정(志程)이 세운 것입니다. 그 뜻은 대강 말씀드리자면 사은(師恩)에 보답하고 당세를 교화하며, 사도(師道)를 높이고 내세에 전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여금 저마다 우리 도에 들어오게 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도에 들어온다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찾음에서 시작되고 얻음이 없음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행적이 멀어져 암매(暗昧)한 사람은 이따금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리를 간직하되 꼭 안심사에다 한 것이며, 사리를 보게 되면 반드시 마음이 편안하기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마음이 편안하게 되면 자신의 뼈에서도 사리가 나올 것입니다.”고 하였다.
따지자면 사람의 마음은 동일하다. 중생의 마음과 제불(諸佛)의 마음이 다름이 없는데, 하물며 지공 보제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다름이 있겠는가. 다음부터 석종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자신으로 돌아가 마음에서 찾는 것이 옳겠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징천헌기(澄泉軒記)
 

철수좌(澈首座)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을 뵙고 그를 따라 공부함이 오래되었는데, 그는 철수좌의 호를 ‘징천(澄泉)’이라 지어주었다. 얼마 안 되어 나옹이 세상을 떠남에 슬픈 마음과 사모하는 정이 날이 갈수록 더하여지게 되자 말하기를, “옹은 저 세상으로 멀리 떠나시어 그 모습을 다시 보일 수 없으나,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감촉은 아직도 제 마음에 가장 깊이 자리잡았고 제 몸에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 이름과 서로 짝이 되어 다함이 없을 것은, 옹이 지어주신 징천이라는 호입니다. 이제 또 제가 거처하는 추녀 끝에 글을 써 달기를 징천이라 함은 대체로 마음에 담아 달고, 눈으로 볼 때마다 생각하여 잠시라도 나옹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함에서입니다. 제 마음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제가 징천임을 알 것이요, 제 마음을 모르는 사람도 저 추녀 끝의 글을 보면 제가 징천임을 알 것입니다. 선생의 한 말씀을 얻어서 징천헌기로 하고자 합니다.” 하기로, 나는 “내 아직 석가의 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잠깐 유자(儒者)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추(鄒) 나라의 맹자가 말하기를, ‘근원이 있는 물이 콸콸 솟아나와 밤낮을 쉬지 않기에 웅덩이가 넘쳐 흘러 사해(四海)로 이른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 공자의, ‘물이여, 물이여.’라고 물을 보고 감탄한 말에서 나온 것같습니다. 우리 유가가 격물 치지, 성의 정심으로써 제가ㆍ치국ㆍ평천하를 이룩한다면, 석가모니가 맑고 고요한 관념으로써 본원과 자성(自性)의 천진(天眞)함을 보고 부처가 사람을 생사(生死)의 물결에서 건져 적멸로 돌아가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좌(首座)께서는 세속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또 양식(良識)을 가진 신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이미 선생의 솜씨를 터득하여 마음과 몸에 베풀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사모함이 깊습니다. 사모함이 깊은 까닭으로 취하기를 간절히 함이니, 나옹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한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옹으로부터 얻은 자기의 호를 부르는 자가 많습니다만, 수좌와 같이 옹을 사모하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하여서 어찌나 기쁜지 그의 청을 받아들여 다시 사양하지 않으나, 다만 병 때문에 곤고함을 겪어 말을 다할 수 없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뒷날 기회가 닿는다면 산중으로 찾아가 돌곽에 앉아 샘을 희롱하면서 마음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수좌를 위하여 다시 말을 계속함이 옳게 생각되어 이만 쓰기로 한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곡주 공관 신루기(谷州公館新樓記)
 

곡산(谷山)이란 고을은 황해도에서 궁벽한 곳이다. 동쪽은 교주(交州)에 접하고 북쪽은 평양과 경계하였다. 산 높고 물 맑아 한 구역의 펀펀하고 넓은 곳이 주(州)의 소재지다.
주 공관(公館)은 북쪽에 가까운데 여염집이 빙 둘러 있어 손이 오더라도 올라가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물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갑갑했다. 지주(知州) 윤상발(尹尙發)이 공관이 낡은 것을 슬프게 여겨, 나무를 찍고 풀을 베어낸 다음 작은 정자를 세웠다. 윤 지주는 임기가 끝나서 가고 김 지주(金知州)가 뒤를 이어 왔는데, 또 말하기를, “윤공이 할 수 없어 못한 것이 아니라 나를 기다린 것이다.” 하고는 아전들과 같이 땅을 더 넓히고 산에서 재목을 가져오고 들에서 기와를 굽고 하여 두 달 만에 건축 공사를 끝내었다.
이때에 그의 손님 체통문시위(?通門侍衛) 호군(護軍) 서윤명(徐允明)을 보내어 신루기(新樓記)를 지어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기를 지어 말한다.
“우리 나라 국도는 동ㆍ서ㆍ남 3면이 대해(大海)를 향하고 북은 장백산에 연달아 있으므로, 바다 부근의 주현(州縣)에는 누대가 서로 빛나고 빈객이 서로 바라보일 정도로 자주 왕래하여 유람객의 가무(歌舞)와 춘ㆍ하ㆍ추ㆍ동 네 철에 음악이 끊어지지 않아 수백 년이라 그날이 그날 같았다. 해적이 일어남으로부터 해마다 늘고 달마다 더하여 횃불은 밤낮을 이어서 오르고, 갑옷과 투구는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벗을 날이 없게 되니,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은 해골뿐이요 더러운 쑥대가 되고 말았으니, 더욱 누대는 말해서 무엇하랴. 언덕에는 여우와 토끼가 뛰놀아 지나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다. 곡주(谷州)는 서울 북쪽 3백 리쯤 되는 데 있어서 바다와 거리가 상당히 멀므로, 그 백성들은 난리가 나서 횃불이 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침저녁으로 밥지어 먹고 봄가을로 심고 거두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으니, 거기에 수령이 된 자는 정사가 번거롭지 않되 공이 쉽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더욱 그는 사랑으로 기르고 옳음으로써 베풀어 주었으니, 백성들이 쉽사리 편안하여지고 일이 쉽사리 거두어짐이 김공과 같을 자가 있으랴. 이 공관 신루의 역사가 시작됨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은 분명한 것이다. 수령은 백성을 친하게 하는 관직이니 백성이 편안하면 바로 넉넉한 것이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윗사람을 공경함에 있는 것이며, 윗사람을 공경하자면 마땅히 조장(법령)을 준수하고 사신을 예로 대하는 데 삼가야 하는 것인데, 김공은 급히 하여야 할 것을 아는구나.” 하였다.
공의 이름은 승귀(承貴)요, 관등은 3품인데, 이번 거사를 보아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윤 지사는 또 내 제자요 서 호군은 내 죽은 아내 송씨의 생질인 까닭으로, 옹졸한 글이라고 사양하지 않고 그 대략을 기록한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도은재기(陶隱齋記)
 

옛 사람으로 조정에서 숨었던 사람은 《시경》에 나오는 영관(伶官 음악을 맡아보던 관리)과 한(漢) 나라 때의 골계(滑稽) 그것이고, 저자에 숨었던 사람은 연(燕) 나라의 도구(屠狗)와 매복(賣卜)하는 사람이 그것이고, 진(晉) 나라 때 숲에 숨었던 사람은 죽림 칠현(竹林七賢)이요, 송 나라 말년에 고기잡이에 숨었던 사람은 거계(?溪)의 은자이다.
이 밖에도 은자라고 스스로 부른 사람으로는 당(唐) 나라 때의 이씨(李氏), 나씨(羅氏)이다. 우리 삼한(三韓) 시대는 사람들의 마음씨가 너그럽고 학문이 깊어 예로부터 선비가 많다고 일러 왔다. 높은 풍도와 뛰어난 재주가 어느 세대에도 다함이 없어 은자로서 자기를 부르는 사람이 적었다. 세상에 나아가서 벼슬을 사는 것이 그 뜻이기 때문에 은자로 자처함을 부끄럽게 여김인가. 숨어 있는 것이 그 떳떳한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 은자로서 드러내지 아니함인가.
어찌하여 틀림이 없음이 이같았는가. 근세에 계림(鷄林) 최졸당(崔拙堂)은 자호하기를 ‘농은(農隱)’이라 하였고, 성산(星山) 이시중(李侍中)은 자호하기를 ‘초은(?隱)’이라 하였으며, 담양(潭陽) 전정당(田政堂)은 자호하기를 ‘야은(野隱)’이라 하였고, 나는 목(牧)에 숨었다 하여 ‘목은’이라 호하였다.
이제 또 시중(侍中) 벼슬에 있는 일가 조카인 자안씨(子安氏 이숭인〈李崇仁〉의 자〈字〉)를 얻었으니, 아마 질그릇을 구우면서 숨은 것같다. 질그릇을 굽는 것은 순의 덕이 요에게 들린 것이요, 주(周)나라가 일어나려 할 때 이것으로써 근거지로 삼은 것이니 역사책에 실려 있어 볼 수 있다.
자안씨(子安氏)는 나이 16에 시부(詩賦)로써 임인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문장을 쓰는 솜씨가 노성(老成)하였으나 아직 나이 어린 까닭으로 그렇게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얼마 아니 가서 학문과 문장이 날마다 발전하며 조금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못과 같이 깊었고 별과 같이 빛났다. 주공ㆍ공자와 같은 사상과 감정이 한몸에 갖추어져 어느 때 어디에서도 나타났으므로 엊그제 늙었노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자안씨에게 와서 그 배운 학문을 바로 함께 구하기를 즐겨 하였다.
자안씨는 문채의 폐단이 주 나라 말기와 꼭 같은 것을 알고 도부도혈(陶復陶穴)하던 곳을 구하여 탄식해 말하기를, “공자는 주 나라가 하(夏)ㆍ는(殷) 2대로 거울삼았으니, 빛나도다 문채여.” 하였는데 그 누가 처음부터 이같이 빛날 줄 알았으랴. 먼 옛날의 소박한 풍속은 멀어져 따라갈 수 없구나. 오늘날 제도에 있어서 오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함이 심한 것은 질그릇만이 그러하도다. 띠풀 지붕과 흙담으로 지은 집이 변하여 옥으로 장식하였고, 흙을 잔으로 삼고, 술을 손으로 움켜 마시던 것이 변하여 옥으로 만든 잔과 상아로 만든 저를 쓰는 법이 일어났지만, 질그릇을 쓰는 법은 변하였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비록 변했다 하더라도 그 질박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동작대(銅雀臺)의 기와일 뿐이다.
세상 천하에서 가장 큰 것은 하늘이요, 지극히 높은 것은 황제이니 황제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은 세상에서 큰일이다. 그런데 세상의 물건이 모두 갖추어져 지극히 성대한데도 그 그릇만큼은 질그릇을 쓸 뿐이니 예법을 처음 만든 사람이 어찌 헛되이 제정했겠는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이 있음에서이니 다시 말하면 질박을 취했을 뿐이다. 질박한 것의 도는 천하의 큰 근본이라, 예(禮)의 3천 3백 가지의 아름답고 크다 함도 말하자면 이 질박함에서 나온 것이다. 자안씨는 인(仁)을 숭상함을 그의 이름으로 하였기에 한 가지 일이라도 인 아님이 없었고, 그는 그 인 가운데에서 편안히 여겼고 또 질그릇으로써 거처하는 집을 이름하니, 참으로 그 예의 근본으로 돌아감이로다. 천하가 그의 인을 허여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은 현달함이요 숨은 것이 아니다.
《주역》에, “천지가 폐색하니 현명한 사람이 숨는다.”는 말이 있지만, 오늘날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 옳은 일은 옳다 하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하여 정치를 잘하여 가니, 고기가 시냇물에서 헤엄치고 새가 구름 속에서 나는 격이다. 벼슬과 봉록을 두루 내려주고 소금을 판매한 이익까지라도 백성에게 돌려 보내므로, 만족했던 사람들이 모두 산림(山林)의 수재(秀才)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늙어서 괜찮지마는 자안씨는 탁연히 일어나 힘차게 나가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숨는 것으로써 스스로 이름하여 ‘도은(陶隱)’이라고 함이 옳겠는가 한다.
나와 자안씨는 다 같이 남양공(南陽公)의 문인이요, 성균관의 동료로서 상종하였다. 또 오랜 친구로서 묻고 따지고 하는 처지이니 자안씨는 더욱 학문에 힘쓰기를 바란다.


[주D-001]골계(滑稽) : 지식이 많고 말을 민첩하게 하며, 사람들에게 옳고 그른 판단을 잘못하도록 휘두르는 것을 말한다.
[주D-002]거계(?溪) : 남쪽 기슭을 말하는데, 낚시터가 좋아서 은자가 숨어 살았다.
[주D-003]도부도혈(陶復陶穴) : 주 나라의 선조 고공단보가 땅굴을 옹기 굽는 가마솥처럼 파고 살았다는 고사에 기인한 말이다. 이숭인도 영화를 버리고 원시적인 생활로 돌아갔다는 말.


동문선 제74권   
 
 
 기(記) 이색
 
 
박자허 정재기(朴子虛貞齋記)
 

내가 스물 한 살 나던 해로 이미 관례(冠禮)한 이듬해에 벽옹(?雍 지금 성균관)에 들어가서 《주역》을 공부할 때 선생을 얻지 못하였더니, 때마침 돌아가신 아버지와 동갑인 우문자정(宇文子貞) 선생이 학관(學官)으로서 오라 하므로, 곧 가서 뵙고 나아가서 자청하여 말하기를, “색(穡)은 고려 이가정(李稼亭)의 아들 우마주(牛馬走)입니다. 선생을 따라 《주역》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 중보(中甫)는 《주역》에 밝으신 분이요, 내가 학식이 높다고 모시는 분이다. 그대가 나이 젊기 때문에 그대의 아버지가 반드시 《주역》을 가르쳐주시지 않을 것이다. 동갑의 아들은 내 아들과 같은 것이니 내가 그대에게 《주역》을 가르쳐주지 않음을 병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며칠 뒤 《주역》에 대하여 교정을 구하러 가 뵈었더니 선생은 말하기를, “가히 가르칠 만하도다. 그러나 《주역》은 소년들의 배울 바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구두(句讀)나 가르치겠다.” 하였다. 그후에 내가 지은 《역의(易義)》 한 편을 올리니, 선생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의리는 거의 가까운 점까지 이르렀으나 말을 쓰는 것이 순서를 잃어버렸네.” 하고 붓을 들어 글을 쓰는데 구름이 날아가고 물이 흐르는 것같이 하여 거의 보태거나 고치는 데가 없었다. 내가 책상 앞에 공손히 섰다가 기쁜 빛을 얼굴에 띄우니 선생이 말하기를, “문장이 벌써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나 이것은 역(易)의 대강일 뿐이다. 그대가 몇 해 뒤에는 스스로 정미(精微)로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맡은 관직 일에 분주하게 됨에 따라, 앞서 공부하였던 것도 모두 버리게 되었는데, 더욱 새로 얻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세월이 갈수록 잊어버려 마침내 배우지 아니한 사람과 같게 되었으니 아, 애석하구나.
임인년 과거에 장원을 한 박자허가 자기 사는 집의 호(號)를 정재(貞齋)라고 붙였는데, 아마도 그 뜻이 《주역》에서 가져온 것같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 일찍이 《주역》을 공부하였으니 나를 위해 그 뜻을 풀이하여 주면 다행이겠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건곤(乾坤)은 역(易)의 문(門)이니, 건곤이 폐하면 역을 볼 수 없는 것이다. 64괘는 정(貞 역〈易〉에서 신성〈信誠〉ㆍ정성〈精誠〉 등으로 해석된다)의 나타남이니 말을 하자면 길어질 것이다. 아직 건곤에 대하여서만 말하겠노라. 건괘의 정(貞)은 큰 것이요, 곤괘에는 빈마(牝馬)의 정이라 하였으니 높은 것에 둘이 없음을 말한다. 《시경》의 주남(周南)ㆍ소남(召南) 두 편의 풍화(風化)가 후비(后妃)의 정(貞)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건곤의 중괘(重卦)에 배합한 것이요, 《예기(禮記)》의 한 사람이 원량(元良 태자)이란 것은 만국의 정(貞)을 나타낸 정이기 때문에, 건곤의 교태(交泰)로 이루는 것이다. 건곤 두 괘에서 정의 내용을 충분히 볼 수 있다. 하물며 우(虞)ㆍ하(夏)ㆍ상(商)ㆍ주(周)의 글은 이 정(貞)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교(理敎)가 천리의 정관(貞觀)과 같고,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의 학문은 이 정을 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도학이 해와 달의 정명(貞明)한 것과 같으니 정의 쓰임이 참으로 큰 것임에랴. 자허씨는 명민한 자질과 독실한 학문이므로 움직이면 정(貞) 그것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그 몸가짐이 확고하여 뽑을 수 없어 마치 소나무와 잣나무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이 있는 것과 같이, 춘하추동 4시를 일관하여 가지가 다시 뻗고 잎을 바꾸지 아니하며, 비와 이슬이 적시어도 번성을 더하지 아니하며, 바람과 서리가 꺾으려 해도 시듦을 더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이런 까닭으로 화곤(華袞)의 옷을 입어 빛난다 할지라도 자허는 그것을 그리워함이 없었고, 장수의 위험이 앞에 닥쳤다 할지라도 자허는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들과 놀 때에 조화(調和)하되 구차하게 같이 하지는 아니하고, 청렴하되 구차하게 이색(異色)을 하지 아니하며 항상 늠름하여 남들이 침범하지 못할 기상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진실로 정(貞)으로 지목하였다. 나는 역학을 배웠어도 업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하려 하여도 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허씨에 대하여 깊이 바람이 있는 것이요, 자허씨가 그 정을 잘 보전할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서 받음이 많겠다.” 하였다.
뒷날 《중주집(中州集)》을 편찬하는 자가 자허의 전(傳)을 쓸 때에, “이 남자는 곧은 사람이요, 그 곧은 것을 알아 힘쓴 자는 한산(韓山) 이색(李穡)이다라고 하면 어찌 나의 다행이라고 아니하겠는가.” 하니 자허씨는 말하기를, “선생은 말씀마십시오. 이것은 내 서재의 기(記)로 할 만한 것입니다.” 하기에 제목을 〈박자허 정재기〉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은 역(易)을 주(主)로 삼되 《시경》ㆍ《서경》ㆍ《예기》를 인용하여 뜻을 통하게 하면서 유달리 《춘추(春秋)》만은 언급하지 아니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내 뜻이 《춘추》에 있으나 읽는 사람이 자세히 보지 아니하였을 뿐입니다. 비와 이슬, 바람과 서리는 천시(天時)의 춘추요, 화곤(華袞)과 부월(斧鉞) 형벌은 왕법(王法)의 《춘추》입니다. 《춘추》는 천시를 받들고 왕법을 밝힌 것으로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올 뿐이니, 내 말의 《춘추》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하고 이 말을 아울러 드러내었다. 정사년 동짓달 하순에 기록한다.


[주D-001]우마주(牛馬走) : 마소처럼 분주하게 뛰어 다니는 사람이라는 말로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겸칭이다.
[주D-002]교태(交泰) : 태는 물건이 크게 통함을 말하는 것으로, 교태는 물건이 사귀며 통하는 때를 뜻한다.
[주D-003]이교(理敎) : 이 시대에는 치(治) 자가 왕의 어휘(御諱)이므로, 치(治) 자를 피하고 이(理) 자를 썼다. 즉 치교(治敎)이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성거산문수사기(聖居山文殊寺記)
 

성거산이 뻗어 내려온 거리는 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박고 길게 뻗기 천여 리, 동해 바다를 옆에 끼고 남으로 계속 달음질하고, 또 천리를 내려와 우뚝 섰는데 가장 높은 곳이 화악산(華嶽山)이다. 이 화악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수백 리를 달려 불쑥 솟은 산은 성거산인데, 우리 나라 국조(國祖 왕건의 고조부)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대왕(虎景大王)의 사당이 이곳에 있으니 이 때문에 성거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또 신라의 성승(聖僧) 의상(義相)이라는 이가 이 산에 와 있었으므로, 어떤 이는 산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 일명(一名)을 또 구룡산(九龍山)이라 하는데 그 고사는 이러하다. 호경대왕과 사냥꾼 아홉 사람이 이 산중에 들어가 짐승잡이를 하다가 마침 날이 저물어 하는 수 없이 바위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호랑이가 굴 어귀에 와 앉아 큰 소리로 으르렁댔다. 아홉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호랑이가 잡아 먹으려 하는데 우리들 중에 누구든지 하나는 꼭 당하고야 말 것이다. 다 같이 갓을 벗어 호랑이 앞에 던져보아서 호랑이가 물게 되면 그 갓 임자는 바로 죽은 사람이다.” 하고 모두 갓을 벗어 던졌다. 호랑이는 그 가운데서 성골장군의 갓을 물었으므로, 장군은 바로 나아가 호랑이와 싸우려 하였다. 굴을 뛰어나오자 호랑이는 간 곳 없고 굴이 우르르 무너져 나머지 아홉 사람은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이 까닭으로 구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산 가운데에는 절이 많다. 높고 가팔라 기온이 차서 겨울에는 거처하기 어렵다. 산허리부터 그 밑은 대체로 그리 봉우리가 치솟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문수사(文殊寺)가 실제로 여기를 점령하였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이 절 앞에 모여들어 여름에 비가 오면 물소리가 우레같아 온 산을 진동한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구멍이 뚫려 물을 길어다 먹는데, 물 긷기가 쉽고 이 절은 불에 타 황폐한 지 오래다. 중 □이 다시 절을 세우려 함에 나에게 부처가 만물을 유성하는 힘[化]이 먼 것을 써달라 하고 이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 이제 역사가 끝났으니 또한 훌륭합니다.” 하였다.
내 일찍부터 산에 가 놀기를 뜻 두었으나 병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겠고, 비록 앞서부터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더라도 또 하늘이 나를 어여삐 여겨 더 살게 하여 줄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하늘이 복을 주어 더 살게 한다면 지팡이를 짚고 가든가 또는 수레를 타고서 유람을 가, 묵은 나무와 울퉁불퉁한 바위를 구경하고 시원한 누각 바람 속에서 으레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조리면서 회포를 풀 것이요, 천 길 산에 올라 티끌 묻은 옷을 떨고 퉁소를 불면서 만리나 먼 산하를 굽어보는 것이, 어찌 나의 얽히고 맺힌 회포를 위로함이 적다 할소냐. 절집과 불상의 시설과 종 및 돌북과 일상에 쓰이는 집기도 대강 갖추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크게 시주한 분은 성산(星山) 이 시중(李侍中) 초은(樵隱)의 부인 하씨(河氏)이다. 재물을 내어 시주를 도운 사람의 명단은 빠짐없이 아래에 열거하였다. 그리고 또 모두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 길이 절에 남겨두어 뒤에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고할 자료가 있게 한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영모정기(永慕亭記)
 

청주도(淸州道)의 추동(楸洞)에 곽씨(郭氏)의 논밭이 있었다. 곽씨로 인해 그 논밭 가운데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서 손님 접대와 결혼 비용, 장사 비용과 제사지내는 비용에 충당하여 왔다. 아침저녁거리가 겨우되면 그에 만족하고 남기를 바라지 않았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면 혹 농사를 폐하여 밭이 묵더라도 다시 돌아볼 것같지 않았다. 그러다가 벼슬을 그만두게 되면 또 처자를 이끌고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글 읽고 시를 읊었다. 나무꾼과 농사짓는 늙은이와 서로 재미나게 말하고 웃고 하기를 즐기고, 세력과 권리에 대해서는 아주 잊어버린 것같이 막연하였다.
곽씨의 할아버지 장원공(壯元公)은 지원 연간(至元年間)의 사람으로 충직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원(元) 나라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일본만이 유달리 조정에 오지 아니하였다. 황제는 이에 이르기를, “먼 나라가 천자를 그리워하게 하려면 덕(德)으로써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불러다 위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고려에 명하여 똑똑한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도록 하여 짐(朕)의 뜻을 분명히 가르쳐주도록 하라.” 하니, 이때에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이 굴러 떨어질 듯[隕越] 세조의 명을 받들어 조심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을 선택하였는데 서장(書狀 외국에 보내는 사신에 따라 보내는 임시 변술)으로 따라갈 만한 자가 없었다. 모두들 꾀를 부려 가기를 피하거늘, 홀로 장원공(壯元公)만이 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재상(宰相)에게 이야기하자, 재상은 대단히 기뻐서 조정으로 달려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였다. 장원공이 가도록 명이 나자 장인 최알(崔謁)이 재상을 찾아보고 잘 살펴서 다시 아뢰라고 말하려 하였다. 이때 장원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처자의 손에서 죽는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모두 슬피 여기고 관직과 땅을 주었는데 지금의 추동이 바로 그것이다. 장추(長楸)란 말이 《이소경(離騷經)》에 나왔는데 해석하는 사람의 말을 든다면 교목(喬木)이란 말과 같은 것으로 고국(故國)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아들 정랑군(正郞君)이 일생토록 슬퍼하여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사모함이 더욱 깊어가기만 했다. 그 손자 통헌공(通憲公)이 정자(亭子)를 골짜기 가운데 짓고 물을 끌어다 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으니, 그 뜻을 기르는 바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정랑공(正郞公)은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니 내 슬픔이야 어찌 말로써 다하랴. 네 다행히 벼슬하여 출세하였으니 내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내가 병 없이 건강하고 너 또한 내 곁에 있으니 내 결코 너를 못 따를 것이다. 글을 이 세대에서 잘 쓰는 사람에게 청하여 내가 동쪽을 바라보는 뜻을 써서 자손에게 보여주어라.” 하였다. 이렇게 되어 정자의 이름을 ‘영모정(永慕亭)’이라 하였다.
대체로 아침에 사모한다 하더라도 저녁에 잊어버린다면 길이 사모함이 아니요 아들 때엔 사모한다 하더라도 손자 때에 잊어버린다면 길이 사모함이 아닐 것이다. 아침저녁을 한 시각같이 하고 아들과 손자가 한 몸처럼 하여야만 그 사모함이 길다 아니하겠는가.
통헌공(通憲公)은 나에게 명모 정기를 써달라고 한 지 오래되었다. 통헌공은 나이 나와 동갑이다. 의분에 복받치는 뜻을 가지고 있어 법사(法司)에 있을 때는 법을 그대로 집행할 뿐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언관(言官)에 있을 때는 과감하게 말할 뿐 일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이러므로 행성(行省) 의 금법(禁法)을 둠에 기강이 더욱 떨치고 바다 섬에 귀양살아도 이름이 더욱 퍼졌다. 죄를 다스리면 엄하고 밝게 할 뿐 가혹하게 살피는 데 힘쓰지 아니하고, 수령이 되면 백성을 사랑으로 기를 뿐이므로 그 공평하고 부지런함을 칭찬받았으니, 장원공의 충직과 정랑공의 효도를 대체로 겸하였다 할 것이다. 그 몸이 영화스럽고 현달함에 이르고 사림(士林)에 으뜸가게 됨이 마땅한 것이요, 그리고 조정에 섬에 일찍이 해를 마치도록 평안함이 없었고, 추동(楸洞)에 살면서 일찍이 해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삼괴 왕씨(三槐王氏)는 덕을 몸에 닦고 하늘에 갚음을 구하여 좌계(左契)를 지닌 것과 같이 손 닿는 대로 마주 붙어 복을 받았는데, 장원공의 충의(忠義)를 갚음이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갚아줄 때 이름으로써 하기도 하고, 지위로써 하기도 하며 덕으로써 하기도 하는데, 그 소치는 마찬가지다. 덕이 있으되 이름이 들리지 아니하고, 이름이 있으되 지위와 맞지 아니하는 것은 군자가 근심하지 않으나, 덕이 그 지위에 맞지 아니하고 이름이 어쩌다가 그 점에 지나가는 것은 군자가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날 통헌공의 덕의 이름은 하늘이 장원공에게 갚은 소이가 되는 것이요, 그 지위같은 것도 비록 현달하였다 하지만 선비의 공론이니 오히려 부족한 듯 불만스런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이 갓 60이라 쓰일는지의 여부를 아직 미리 알 수는 없으니 하늘이 갚아주기를 지위로써 할는지 안 할는지도 다 오늘에 결정할 것이 못 된다.
하늘이 앞으로 크게 갚아주려 하여 늦음인가. 왜 마땅히 갚아야 할 사람에게 아직도 갚지 않는가. 하늘이 정할 것을 정하지 않는 지 오래되었는데 내 앞으로 곽씨(郭氏)를 두고 보리라. 철원(鐵原) 최씨를 경험삼아 보건대 80에도 아들을 낳아 지금은 그 자손이 대단히 많다. 곽씨는 뒤를 이을 자손이 없음을 근심 말라. 하늘이 반드시 곽씨에게 후하게 갚으리라. 곽씨가 후손이 없을 것은 하늘이 과연 기필할 수 없을 것이요, 영모정이 폐허가 될 것은 과연 하늘이 기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로 하여금 기필할 수 있게 한다면 곽씨는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자손으로 갚아주어 영모정이 길이길이 전할 것이다.


[주D-001]장추(長楸)란 …… 나왔는데 : 〈이소경〉은 초 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글. 《초사(楚辭)》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글은 《초사》 구장곤영(九章袞?)에 나온 글로서 저자 이색(李穡)이 잘못 기억하고 쓴 것으로, 이소경이라 하지 말고 〈구장(九章)〉이라 하든가 또는 《초사》라 함이 옳겠다.
[주D-002]내가 …… 뜻 :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간 것을 사모함이다.
[주D-003]행성(行省) : 원대(元代)에 중서성(中書省)을 정부로 하고, 각 호에 행중서(行中書)를 두어 행성이라 하였다. 명ㆍ청은 이에 따라 지방 구역의 이름으로 하고, 약하여 성이라 하였다. 우리 나라의 구청(區廳)과 같은 것이다.
[주D-004]삼괴 왕씨(三槐王氏) : 송 나라의 왕우(王祐)가 세 그루의 홰나무를 뜰에 심고, 자손에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는 사람이 날 것을 예언하였다. 과연 그 아들 단(旦)이 재상이 되었으므로, 그 자손이 삼괴당(三槐堂)을 지었다.
[주D-005]좌계(左契) : 계약을 두 장으로 쪼개어 하나는 좌계(左契)로 하고 하나는 우계로 하였다가, 나중에 마주 붙여보아 증거로 하는 것. 좌계는 채무자가 소유하고 우계는 채권자가 소유한다. 전(轉)하여 약속의 증거.
동문선 제74권   
 
 
 기(記)
 
 
수원부 객사지정기(水原府客舍池亭記)
 

못과 대(臺)와 언덕과 정자는 유람하는 곳이니, 세도(世道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나 국가 치란의 자취와 주현(州縣)의 흥망한 이유가 여기에 달려 있다.
대체로 조정이 맑고 밝아 위와 아래가 안락하게 되면, 관리들은 그 직을 즐겁게 여기고 백성들은 삶을 편안히 여기게 되는 것이니, 못과 대ㆍ언덕과 정자가 있지 아니하면 무엇으로써 태평한 시대의 성대한 경관을 형용하겠는가.
법령이 까다롭고 사나우며 세금을 받아들이는 것이 번거롭고 무겁게 되면, 백성은 들에서 한탄하고 관리는 관청에서 곤란을 받게 되는 것이니, 비록 못ㆍ대ㆍ언덕ㆍ정자가 있다고 하여도 어찌 홀로 즐기겠는가. 그렇다면 수원부에서 새로운 정자를 지었는데 정기(亭記)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수원부 동북쪽에 옛 못이 있었으나 황폐된 지 벌써 오래되었다. 전성안(全成安)이 그 고을 원이 되었을 때 황폐된 것을 개탄하고 복구하는 데 뜻을 두어서, 바로 파서 깊게 하고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새 정자를 날아갈 듯하게 세웠는데, 재정은 관청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노역은 백성에게 미치지 아니하였다.
새로 낙성함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놀란 얼굴을 지어 서로 쳐다보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낙성을 그렇게 쉽사리 하였는가. 반드시 신이 와서 도운 것이구나. 우리들을 노역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잘 되었을까.” 하니, 아, 전군은 백성 부리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때마침 전군은 서울로 전보되어 가고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있던 안군(安君)이 양광도(楊廣道 지금의 경기도)에 나가 다스릴 때 전군의 정사(政事)한 것이 능함을 아름답게 여겨 나한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전씨의 자취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그리고 이것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오직 글에 있는 것이므로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정기(亭記)를 써주기를 바라오.”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수원 안찰부가 다스리는 것은 여러 고을을 단속하는 것이므로 한 도(道)의 문물이 모여드는 곳이 된다. 그러나 그 성쇠ㆍ흥망이 또한 한 도의 선두가 된다. 이제 전군은 위엄과 은혜가 동시에 이르렀고, 모아들이는 것이 마땅함을 얻어 또한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우리 나라의 태평한 아름다움을 잘 넓혔다. 안군의 직책을 말하면 백성의 풍습을 살피는 지위에 있어 남의 착한 것을 말하기 즐기니 모두 정기에 쓸 만하다.
뒷날 내(이색)가 공을 이루고 벼슬에서 물러갈 적에 이 고을을 지나다가, 만일 연꽃 피는 때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수레를 멈추고 정자에 올라가서, 내가 지은 이 글(정기〈亭記〉)을 꼭 읽어보고 가겠노라.

동문선 제74권   
 
 
 기(記)
 
 
순창 객관 신루기(淳昌客館新樓記)
 

누(樓)라면 누기(樓記)가 있어야 함은 더할 나위도 없다. 짓고 그 공명을 나타내서 그 뜻을 통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버리고 억지로 말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순창 자사(刺史) 남후(南侯 벼슬사는 이의 존칭)가 고을을 다스릴 때, 이미 여가가 있어서 새로 객관(客館) 뒤쪽에 누를 짓고, 강호문(康好文)이 남후의 청탁하는 말이라 하여 누기를 써주기를 매우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누의 규모와 지세가 공역이 얼마나 들고 날짜가 얼마 걸린다는 것은 나에게 일러주지 아니하였고, 또 무슨 명의(名義)로 글을 써달라고 한 일도 없었다. 그 뜻은 가만히 살펴보니 바로 뒷사람들로 하여금 이 누가 남후에게서 처음 일어난 것을 알리게 할 뿐이요, 다른 것은 급한 것이 아니었다.
순창에는 옛날부터 군관(郡館)이 있어 여기에서 손님을 접대하여 온 것이 몇 백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남후 때에 와서 이 누가 비로소 있게 되었다. 남후는 자기보다 앞 세대에서 의거할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자기 때에 와서 홀로 단안을 내리어 몇 백 년 동안 없었던 명승을 가지게 되었다. 높은 곳을 의지하여 먼 곳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것이 한 고을의 장관이니, 그 백성을 즐겁게 함으로써 오는 손님에게까지 미쳐가게 하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내가 또 생각할 때 그 휘비조혁(輝飛鳥革)의 높은 것이 모두 옛날 초목이 우거졌던 곳인데, 그 아름다운 것을 이루고 온전함을 즐기게 하는 것은 남후의 공이다. 천년 뒤에 바람치고 비가 스며들어 누각이 피폐하여지고 다만 빈터 자취만 남아 있게 되면, 슬픈 감정을 일으켜 길이 탄식할 자 과연 몇 사람이며, 서로 이어서 여기에 백성이 되고 여기에 아전이 되어 능히 남후의 마음을 본받아 무너지면 고치고, 헐게 되면 지붕을 이어 빈터 자취만이 남아 있는 데 이르러 가지 않게 할 자가 또한 몇 사람이 될는지 알지 못하겠다.
대체로 그 성공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그 처음을 생각하는 것이니, 남의 뒷사람이 되어 이 누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남후가 지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요, 따라서 백성의 성주가 된 이름을 의논하게 되면 어찌 이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오래 전하여지지 않는다고 하리오.
남후의 이름은 징(徵)이요, 정사에 재주가 있어 온화하고 예절을 지켰다. 우리 집과 서로 가교(家交)를 통한 까닭으로 어렵다고 사양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이 글을 지었다.


[주D-001]휘비조혁(輝飛鳥革) : 새가 날개를 편 것같고 꿩이 나는 것같이 궁실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말한다. 《詩經 小雅》


동문선 제74권   
 
 
 기(記)
 
 
송월헌기(松月軒記)
 

전(前) 임관사(林觀寺) 주지(住持) 옥전선사(玉田禪師) 가 내 좌주(座主) 구양현(歐陽玄)선생이 쓰신 ‘송월헌(松月軒)’ 세 자를 가지고 와 나에게 헌기(軒記)를 써달라 하면서 말하기를, “원 나라 태정(泰定) 연간에 서천 지공선사(西天指空禪師)가 동국(東國)에 오셨는데, 내 일찍이 인연이 있어 한번 뵙고 기뻐하여 마침내 그를 따르기로 하여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한데 뭉쳐 있어 비록 약속하기를 마치 예가(禮家)와 같이 하였으나 산수간에서 유유히 지내면서 스스로 만족하게 여김이 더욱 좋은 것이었습니다.
천력(天曆) 초년에 우리 스승께서 황제의 뜻을 받잡고 서울로 돌아갈 때, 저도 따라서 서쪽으로 원 나라 서울로 갔는데 천하의 장관이란 장관은 모두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레에서 일어나는 먼지와 말 발굽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요란하였고 땀이 비오듯 하여 스스로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명산과 승지(勝地)에 가서 유람하는 것이 거의 빠지는 해가 없었습니다. 다만 파촉(巴蜀)에 갔던 행적은 위공(危公 위태박(危太朴))께서 벌써 서(序)를 써주시겠다 하였으나 아직 결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저의 소회를 남들이 혹 알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여, 제 헌(軒)의 이름을 송월(松月)이라 하였습니다.
처음 제가 고향에 있을 때 낙락장송의 그늘과 밝은 달밤에 거닐면서 이목(耳目)을 깨끗이 하고 심신을 상쾌하게 하며, 속된 생각을 문득 비게 하여 보기에는 경(境)같으나 경(境) 아닌 소이가 되는 것을 일찍이 잠시라도 마음에서 잊어버리지 아니한 까닭으로, 배를 양자강과 회수(淮水)에 띄울 적이나 말을 연(燕) 지방이나 대(代) 지방으로 달릴 적에, 가는 곳마다 모두 송월(松月)의 마루[軒]라 하였고 싫증이 나서 본국으로 돌아와 본국 동자(童子) 때에 보던 송월은 대체로 변함 없이 그대로 있으나 제 몸은 이미 늙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네에게 부탁하여 죽은 뒤의 일을 도모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내 본래부터 옥전스님이 오래도록 스님이 된 도가 대체로 높아서 속되지 아니함을 알고 있다. 스님은 일생토록 명공(名公)ㆍ아사(雅士 조촐한 선비)와 더불어 놀기를 기뻐하여, 그 예모(禮貌)를 다 얻었고 또 서화를 정미롭게 잘 감정하여 고금을 두루 다하였다.
한림승지 구양원공(歐陽原功)과 집현학사 게만석(揭曼碩)과 국자 좨주 왕사로(王師魯), 중서 참정(中書參政) 위태박(危太朴)과 집현 대제 조중목(趙中穆)과 도가(道家)의 오 종사(吳宗師)같은 이들도 모두 그를 위하여 제ㆍ찬ㆍ서ㆍ인을 써주었고, 집현 대제 조중목과 진인(眞人) 장언보(張彦輔), 오흥(吳興)의 당자화(唐子華)도 송월헌(松月軒)을 위하여 전신(傳神)을 하였나 이제 잃었으니 아깝구나.
스님의 행실이 진실로 남에게 신의가 흡족하지 아니하면 저 여러분이 같이 놀기를 달게 여겼겠으며, 시문(詩文)에 드러내어 구차히 찬미하였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소나무가 산에 있는 것과 달이 하늘에 있는 것도 오히려 성색(聲色)을 말할 수 있고, 스님은 송월의 사이에 있어도 이미 성색이 더럽힐 수 없었는데, 하물며 소나무가 창연(蒼然)하지 아니하고 달이 형연(炯然)하지 아니하되, 마음을 꿴 것은 곧 불서(佛書)에 말한 청정법신(淸?法身) 그것뿐이니, 어찌 산에 있는 소나무와 하늘에 있는 달을 가지고 우리 스님을 말하랴.
스님의 이름은 달온(達?)이요, 옥전(玉田)은 그의 호이다. 속성(俗姓)은 조씨(曺氏)요 창녕 사람이다. 금상 전하의 원종공신으로 정승을 지내는 분이 있는데 스님은 그의 막내 동생이다.


[주D-001]옥전선사(玉田禪寺) : 옥전(玉田)은 중 조달온(曺達?).
[주D-002]좌주(座主) : 고려 때 감시(監試)에 급제한 사람이 시관(試官)을 부르는 경칭.
동문선 제74권   
 
 
 기(記)
 
 
환암기(幻菴記)
 

내 아직 나이 20이 되지 못하여 산중에 가 놀기를 기뻐하였다. 그리고 중과 같이 사여게(四如揭) 외는 것을 익히 들었다. 비록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돌아가는 곳을 따지게 되면, 무위(無爲 생멸〈生滅〉이 변화하지 않고 상주〈常住〉하는 것)뿐이다. 꿈을 깨면 그만이고, 환(幻)은 법이 물러가면 비고 거품은 물로 돌아가며 그림자는 그늘에서 꺼진다. 이슬이 마르고 번개가 꺼지는 것도 다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실지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실지로 없는 것도 아니지만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석가의 교(敎)가 대체로 이러하다.
좀 자라서 선비 열 여섯 사람과 계(契)를 맺어 좋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천태(天台 불교의 종파명)의 원공(圓公)과 조계(曹溪 불교의 종파명)의 수공(修公)도 참여하였는데, 서로 마음 얻기를 깊게 함과 서로 기약하기를 두터이 함은 더 말해 무엇하랴. 내가 연경(燕京)에 가서 관학(官學)에 다니게 되자 수공(修公)도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제 30년이 되었다. 간혹 서로 만나 자게 되면 그 전일을 회상하게 되는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기세가 등등하였던 것을 어찌 다시 얻으리오. 참으로 꿈같고 참으로 환과 같구나.
현릉(玄陵)이 공의 풍채를 흠모하여 두 번이나 큰 절에 주지가 되라고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비록 강권에 못 이겨 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버리고 가니, 대체로 세상 보기를 환(幻)같이 본 지가 오래다. 일찍이 일전십원법석(一典十員法席 불도를 닦는 법회)이 있었는데 현릉이 돌아갔는데 공이 환(幻)의 맛을 더욱 몸소 맛보았다. 청룡혜선사(靑龍惠禪師)가 서울에 오자 공이 글을 보내어 나에게 환암기를 써주기를 요구했다는데 그 말은 이러하다. “몸의 환은 사대(四大 불ㆍ물ㆍ바람ㆍ흙)가 그것이요, 마음의 환은 연영(緣影)이 그것이요, 세계의 환은 공화(空華 번뇌가 있는 사람에게 온갖 공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함)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환이라 하되 그것을 볼 수 있었고 닦을 수 있었습니다. 볼 만한 것을 보았고 닦을 만한 것을 닦았으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내 평생에 처하던 곳이니 어찌 단멸(斷滅)에 들어가겠습니까. 소위 삼관(三觀)이란 것은 한 번 두 번 거듭하여 청정(淸淨)을 이루고, 윤회를 정하여 환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진세의 생각을 없애는 방법이 그 가운데 꿰어 있으니 환 그 자체가 말학(末學)에게 유익한 것이 그리 얕지 아니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거처하는 방 앞에 환암(幻菴)이라고 표시하여 제 풍도를 듣고 제 방에 들어오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음이 있게 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아니하여 고요하고 쓸쓸한 가운데 한가히 있는 경계를 하필이면 이름을 세우고 말을 세워서 쓸데없는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내 본래부터 공을 안 지 오래고 또 공부를 가려 하였기 때문에 오직 공만이 입을 열게 되면 정확하게 묻는 뜻에 대답함을 알고, 그리고 공의 이름이 헛되이 얻어지지 아니한 것이요, 절대적으로 일반보다 뛰어났기 때문인 줄을 알고 있다. 이제 암자에 이름한 뜻을 보니 자리를 위하여 표현함이 아니라, 앞으로 그 문에 와 공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거할 것이 있게 하고, 그들을 위하여 힘을 쓰는 곳이 되게 하려 함에 뜻이 있으므로 글이 옹졸하니 못 쓰겠다고 거절하지 아니하고 썼다.
또 노래를 지어 그에게 보냈는데,
“흰 구름이여 대허를 가고 / 白雲兮行大虛
긴 바람이여 창해를 걷어 마는구나 / 長風兮卷滄海
오기는 어디에서 왔으며 / 其來兮何從
가서는 어디에 또 있는가 / 其去兮安在
암자 가운데 높이 누웠음이여 도인이 한가하고 / 菴中高臥兮閑道人
달이 등불이 되었음이여 소나무는 일산이 되었도다”/ 月作燈兮松作蓋

하고, 다시 고하여 말하기를, “뒤에 내 기(記)를 읽는 자 마땅히 환인(幻人)의 심식(心識)을 배워야 할 것이요, 그런 뒤에야 수공(修公)의 사람됨을 알 것이요, 또 내가 이 기를 지은 뜻을 알 것이니 착안(着眼)을 높이 하기 바란다. 무오년 여름 5월 스무 여샛날 쓴다.” 하였다.


[주D-001]삼관(三觀) : 진리를 달관하는 세 가지 지(智), 곧 천태(天台)의 공관(空觀)ㆍ가시(假視)ㆍ중관(中觀).

동문선 제74권   
 
 
 기(記) 이색
 
 
지평현 미지산 윤필암기(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
 

한산자(韓山子 이색 자신을 말함)는 이미 보제(普濟)스님의 명을 쓰고 그 제자에게 말하기를, “보제스님은 우리 선왕(先王)이 스승으로 삼았던 분이다. 도가 높고 덕이 높음에 온 나라 사람들 가운데 누가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그 바람이 불어가는 아래 나아가 서론(緖論)을 들음으로써 일생의 다행으로 여기지 아니함이 있으리오. 그런데 홀로 나만이 문안드리는 데 게을러 비록 죽원(竹院 둘레에 대를 많이 심은 집)의 승어(僧語)라 하더라도 일찍 한번 귀에 미친 적이 없었고, 보제스님이 대궐에 출입하고 공부를 간택(揀擇)할 때에도 감히 경솔하게 내가 지키던 것을 바꾸어 나아가 보지 못함은, 다름이 아니라 대체로, ‘도가 같지 아니하면 서로 꾀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돌아가심에 사리가 나오는 이적(異蹟)이 있어 스님의 도가 세상에서 더욱 믿어지게 되어, 온 나라 안 사람들이 달려가 절하되 못 미칠까 걱정을 하였는데, 내 또 병을 앓아 그 사이 뜻을 드리지 못함이 오래요, 또 임금의 전갈이 있어 그분의 명(銘)을 지으라고 하므로, 감히 하교를 받들지 아니하지 못하겠다. 다만 보제스님에게 내 글이 합당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 큰 선비로 글 잘 쓰는 사람이 적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명을 받자오니 어찌 도연(徒然 되는 대로 또는 그것뿐)한 것이겠습니까. 일찍이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고 또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인들이 나에게 예물을 가지고 와 윤필(潤筆 시ㆍ서ㆍ화를 써준 대가로 받는 예물)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것을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스님은 선왕의 스승이요, 나는 성왕의 신하입니다. 선왕의 신하로서 선왕의 스승의 명을 지었으니 이같은 예는 부당합니다. 선왕으로 하여금 병이 없이 오늘날까지 살아 계시게 하여, 친히 예물을 내려주시더라도 내가 의당 받지 아니하였을 터인데, 하물며 이제 선왕의 하늘에 계시는 영(靈)이 위에서 보고 계시니, 어찌 재물에 탐을 내어 스스로 재화 탐내는 데로 들어가겠습니까. 스님의 제자가 꼭 스승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자 옛 절의 황폐함을 수리하여 한편으로는 국가를 돕고 한편으로 신자들을 편안히 있게 하며, 비록 내 붓을 빛나게 하지 않더라도 그 보제스님의 여파(餘波)를 윤택하게 함으로써 물건에 미쳐감이 더욱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의 뜻과 선왕의 뜻을 지켜서 뛰어다닌 이유이오, 저 정안군(定安君)의 부인 임씨(任氏)는 이제 비구니가 되었고 이름을 묘덕(妙德)이라 하였는데, 덕이 재물을 희사하여 미지산에 이 암자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 한산자(韓山子)가 이 기를 쓰게 된 이유이다.
뒤에 이 암자에 와 있는 자는 오직 보제의 사리로써 그 몸의 사리로 함이 옳겠다. 우리 유교에,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함이 있는 자 또한 이와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좌우명으로 삼아주기 바란다. 시주한 사람의 성명을 빠짐없이 뒤에 기록하였다. 무오년 가을 8월에 쓰다.
동문선 제74권   
 
 
 기(記)
 
 
지평현 미지산 용문사 대장전기(砥平縣彌智山龍門寺大藏殿記)
 

《대장경(大藏經)》 한 질은 모관(某官) 모(某)의 시주에 의한 것이다. 처음에 강화부(江華府) 용장사(龍臧寺)에 두었었는데, 이것은 불의의 변을 피하려 함에서이다.
경인년부터 왜인이 바닷가의 군과 읍을 범하기 시작했는데, 강화는 요충 지대이므로 더욱 많이 그 해를 입었다. 구씨 손녀도 죽고 만호 벼슬을 한 인당(印?)의 부인도 죽었다. 재신(宰臣 고을 사는 사람) 오자순(吳子淳)의 부인이 일을 도모하여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께서 불법에 귀의하시어 《대장경》을 시주하였던 것인데, 불행하게도 왜적에게 짓밟혀 거의 절반이나 잃어버렸으니, 어찌 보정(補正)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겠는가.” 하여 경천사(敬天寺)로 옮기어 제목을 쓰고 함에 넣어놓으니 헌 책이 온전히 되어 새 책과 같았다. 그런즉 또 말하기를, “이 절은 또 물에 가깝고 용장사와의 거리가 한 칸밖에 안 된다. 깊은 산중 밀림이 우거진 골짜기에 옮겨서 보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마침 미지산(彌智山)의 지천(智泉) 등이 《대장경》을 서울에서 시주받으려 다닌다는 말을 듣고, 구씨(具氏)가 기뻐서 따라가 그 연고를 일러주니 지천 등이 큰 보배 얻은 것을 즐겁게 여겼다. 이때에 지천 등은 하는 것 없이 소망을 이루었고 《대장경》은 돌아갈 곳을 얻게 되었으니, 시주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둘 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것이요, 용문산에서는 절이 있은 이래 갖추지 못했던 일을 하루아침에 모으게 된 것이요, 구씨의 자손은 비록 백 세(世)가 되더라도 다시 대장경에 대하여 근심이 없게 되었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그 할아버지의 영을 명명한 가운데에 위로함이 된 것인즉, 용문(龍門)ㆍ천룡(天龍) 8부(八部)가 마땅히 대장경을 보호하기를 안목(眼目 사물의 요긴한 곳)을 보호함과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니 구씨는 후손 노릇을 잘했다고 말하겠다.
내 본래 석씨(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즐기지 아니하여 천 개의 함과 만 개의 축(軸)에 써 있는 말을 듣고 처음에 그 수가 많은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 제목을 들어봄에 경(經)이라 율(律)이라 논(論)이라 하였는데, 경은 불어(佛語)와 보살어(菩薩語)를 논함이요, 율(律)은 그 예의를 드러냄이며, 논은 그 뜻을 부연하였지만 다 석가모니의 금구(金口)에서 나온 것은 아니나, 그 도를 보좌[羽翼]하고 말이 조금 이치에 가까운 것까지도 문득 거둬넣었으니, 천함(千函)과 만 축의 많음에 도달하는 것이 옳겠다. 그 학문을 배움이 있는 자 그 글을 눈으로 보고, 그 뜻을 마음으로 찾아 일천 성인이 전하지 못한 묘리를 글자 수에 얽매어 사리가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에서 구해 얻게 되면 이것이 바로 그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만일 손가락 한번 튕기는 짧은 시간에 《대장경》이 벌써 된다면 녹야원(鹿野苑)과 발제하(跋提河 인도의 강 이름) 수십 년간에 사람과 하늘이 둘러 있어 마땅히 무슨 일을 지었다고 보겠는가.
그러나 시냇물 소리가 곧 장광설(長廣舌)이고 속눈썹이 눈앞에 있어도 길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불도를 배우는 자 마땅히 스스로 체(體)를 받고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대장전(大藏殿)은 무릇 세 칸으로 그 재물을 시주하여 짓는 것을 도운 사람은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북원은 원주의 옛 이름) 원씨(元氏)였다. 무오년 가을 8월 모일 쓰다.


[주D-001]녹야원(鹿野苑) : 중인도에 있었던 동산. 석가가 처음으로 다섯 사람의 비구를 위해 설법한 곳.


동문선 제75권   
 
 
 기(記)
 
 
송풍헌기(松風軒記)
 

이색(李穡)

조계종(曹溪宗) 윤절간(倫絶磵) 대사는 그 거처하는 집을 이름하여 ‘송풍헌’이라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나는 말하기를, “솔의 본연의 성질이 사시를 관철하고 천 년을 지나도 그 가지나 잎이 변치 않는 것은 반드시 그런 까닭이 있을 것이요, 바람이란 팔방으로부터 일어나 만물을 흔들어 움직이되 그 형적이 없음도 또한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징험해 본다면 천암만학(千巖萬壑) 속에 한번 깊숙이 자리잡고 앉으면, 좌우에 보고 듣는 것이 묶인 듯이 고요하여 모든 번뇌가 함께 다 흩어지고 풀릴 것이니 절간은 무엇을 하느냐. 눈으로 볼 뿐이요, 귀로 들을 뿐일 것이니, 들으면 마음에 움직임이 있을 것이며 보면 마음에 움직임이 있는 것인가. 반드시 그 보고 듣는 데서 오는 모든 것을 잊어서 그 마음을 손실되게 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저 창연(蒼然)한 기운과 빛이 여러 식물과 다르고, 맑고 온화함이 모든 성음과 다를지라도 일상 생활 속에 청정(淸淨)을 누리고 씀에 있어 또한 무엇이 족히 도움이 되리오. 그런데 절간은 바야흐로 그 처소에 편액을 달고, 또 사람들에게 불리기를, “나는 송풍헌의 한 한가로운 도인(道人)이다.” 하고 불씨(佛氏)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사람들이 또한 이에 따라 일컫기를, “송풍헌은 윤절간이 사는 곳이다.” 한다면 이 또한 쓸데없는 말 중에 또 쓸데없는 말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나 극히 높이 위로 솟아 있는 것을 사람들이 가리켜 하늘이라 하고, 광막하게 아래로 펼쳐져 있는 것을 사람들이 가리켜 땅이라 이른다. 그 속에 몸을 두어 동작하고 집을 두어 출입하면서 편액한 바도 없고 표기한 바도 없다면, 새나 짐승과 더불어 서로 떼지어 사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대사를 찾아 도(道)를 묻는 자가 끊이지 않아 대사의 이름을 아는 자면 반드시 짚신 신고 절벽에 올라 길의 험준함을 피하지 않고, 모두 말하기를, “내 장차 송풍헌을 찾으리라.” 할 것이니, 의혹의 그물을 걷어 치우고 진관(眞關)을 열어 시원하게 솔바람을 마음과 몸 사이에 헤쳐 불어준다면, 오랫동안 쌓인 어둠과 막힘이 장차 한 점의 남음도 없게 될 것이니, 그 타인에게 미치는 혜택을 어찌 다시 말하랴. 내 병석에 누운 지 오래이다. 다행히 대사를 얻었으니 □□□□ 비록 의혹 불명하다 할지라도 어찌 소득이 없으리오. 그러므로 비록 내게 청하지 않았더라도 장차 글을 주려고 했거늘 하물며 먼저 청함에랴. 그러므로 누추하고 졸렬함을 무릅쓰고 송풍헌기를 짓는다.” 하였다. 또 고하기를, “송풍헌은 온 땅에 다 있는 것이다. 비록 천 만리 밖에 있더라도 내게 한 가닥 맑고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번뇌에 싸인 두뇌를 어느 날에 씻어 식히겠는가. 잊지 말기를 바라고 이것으로 기를 삼노라.” 하였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청향정기(淸香亭記)
 

외삼촌 중추(中樞) 치정공(致政公)이 조그만한 못에 연꽃을 심고는 그 곁에 정자를 세우려고 사람을 급히 쫓아 글을 보내어, 그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물어 왔다. 색(穡)이 이제 병든 여가에 오직 용릉(?陵)의 주렴계(周濂溪) 광풍제월(光風霽月)같은 깨끗한 흉금을 사모하게 된지라, 드디어 그의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는 말을 취하여 대략 그 뜻을 서술하고자 한다.
하늘과 땅이 처음 나누어질 때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게 되었는데, 인물이 생겨날 때 이 기운을 온전히 타고난 자는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었으며, 그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있어서도 향기 높은 덕으로써 신명(神明)을 감동케 함은 옛 하ㆍ는ㆍ주와 같은 번영이 극한 시대에 찾아보더라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용릉이 송 나라의 문명 시대를 당하여 오계(五季 후량ㆍ후당ㆍ후진ㆍ후한ㆍ후주) 시대의 어둡고 막힌 혼란한 정치가 가져온 재앙을 추도(追悼)하여 성인 경전(經傳)의 태극(太極)의 본지를 추리ㆍ해명하여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이었는데 그의 애완(愛玩)함이 이같이 극진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지어 밝히는 데 이르고도, 오히려 그의 의사를 다하지 못하여 특히 결론에 이르기를, “연꽃을 사랑하기를 나와 같이 할 자 어떤 사람일는지.” 하였으니, 아득하고 적막한 천 년 전에 후생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킴이 깊도다.
색이 늘그막에 경전을 추구할 제 날로 그를 경모하더니, 다행히도 외삼촌의 사랑하는 바도 용릉과 같은지라, 내가 기뻐서 날뜀도 평일과 다름이 있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건대 시골의 부형과 빈객이 이르면 술잔을 들어 권하며 연구(聯句)시를 지을 것인데, 갠 날 물결 위의 연꽃과 비오는 언덕 아래의 연꽃, 바람결의 잎새와 안개 속의 꽃봉오리는 마치 그림같으면서 그림이 아니요, 시(詩)가 아니면서 시같은 것이다. 홍안 백발이 그 가운데에서 술 마시고 즐기며 노래하고 춤추니, 이것이 바로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이며 희황씨(羲皇氏)의 세월이 아니던가. 마음이 편하여 몸을 마음껏 펴고 기운이 강건한 속에 조용한 날을 보내니, 홀로 맑은 연꽃의 향기가 아니라도 외숙의 맑은 덕이 더욱 멀리 전파하여 자손에게 유물이 될 것이다. 후일에 늙음으로써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가 이웃집 빈터를 얻어서 집을 지어 정하고 외출하실 때 지팡이와 신발을 신칙하며 모시게 되면, 다시 외숙을 위하여 시를 지으리라. 무오년 동지 전 9일에 쓰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저정기(樗亭記)
 

기유년에 과거에 장원한 문생(門生) 유백유(柳伯濡)가 그가 사는 집에 제명(題名)하기를, ‘저정(樗亭)’이라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해 왔다. 그 뜻을 물으니 백유는 말하기를, “가죽나무[樗]와 상수리나무[?]는 쓸데가 없는 목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천연의 수명을 다해 자란 것인데, 우리 동방의 학자들이 우러러보기를 태산과 북두성같이 하는 자가 바로 시중(侍中) 익재(益齋 이제현)이다. 익재가 스스로 역옹(?翁)이라 일컬었음은 아마도 반드시 연유한 바가 있을 것이다.
백유가 선생의 문하에서 익재를 보기를 할아버지같이 하였다.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는 《중용(中庸)》을 저술함에 있어 자주 중니(仲尼 공자의 자)를 일컬었으니 중니는 도가 나온 바이자 자신의 몸이 나온 바이다. 이제 백온이 성원(省垣)에 벼슬하면서 남달리 영달하여 길에서는 행인들이 길을 피해준다. 들어와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벗들에게 친애하여, 그 이름을 드날려 오늘에 이른 것이 모두 익재 시중으로부터 파급된 나머지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樗) 자를 따서 내 정자를 이름하고 보니 지극히 참람하여 그 죄를 피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존경하고 사모함이 깊은 까닭에 친근히 함을 간절히 하게 되고, 친근히 함을 간절히 했기 때문에 비의(比擬)하기를 더욱 가깝게 하여 사양할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니, 원컨대 선생은 그 의의를 부연해 주기 바란다.”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 《시경》을 읽지 않아서 초목의 이름을 몰랐더니, 익재의 말에 ‘상수리나무 역(?) 자의 글자됨이 나무 목(木)에 즐거울 락(樂) 자를 붙인 것은 그 목재로써 쓸데없음을 즐겁게 생각한다는 뜻인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겸사(謙詞)인 듯하다. 이제 자네는 말하기를, ‘쓸데가 없는 목재는 무용의 물건일 뿐이다.’ 하니, 천하에 물건이 쓸 수 없는 것이 없거니와 나무의 소용이란 더욱 많은 것이다. 궁실(宮室)을 지어 거처하는 것과, 기명(器皿)을 만들어 쓰는 것 등은, 조석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창ㆍ방패 등의 군비와 수레와 가마의 승용구(乘用具) 등은 급할 때에 없을 수 없는 물건들이니 그에 쓰이는 목재는 모두 가히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제 백유가 이런 것들을 취하지 않고 오직 쓰지 못하는 가죽나무를 구하니, 이는 참으로 무용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익재가 스스로 ‘역(?)’으로써 호를 하고 평생을 조정에서 벼슬하여, 5대의 왕조를 섬기면서 도덕과 문장이 천하에 떨쳤으니, 백유는 가히 사모할 바를 안다고 하겠다. 익재같은 이는 대대로 나는 인물이 아니다. 사람이란 진실로 자신의 역량을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말하였으니, 뜻있는 자는 윗사람에게 선택하여 본받을 것이요, 자포자기할 것은 아니니 백유는 더욱 힘쓸지어다.
도덕과 문장을 하늘이 어찌 사람에게 주기를 아끼겠는가. 그러기에 이르기를,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이 성의 자연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였으니, 백유는 성인의 명(明)과 성(誠)의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만물의 체(體)가 되어서 버릴 수 없는 곳에 스스로 노정(露呈)되어 엄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유용(有用)을 운운할 것이 있겠는가.


동문선 제75권   
 
 
 기(記)
 
 
석서정기(石犀亭記)
 

광주(光州) 읍됨이 동ㆍ남ㆍ서 3방면은 모두 큰 산으로 되어 있되, 유독 북면만이 평탄히 멀리 트여 있으며, 남산의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둘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또한 멀다. 이러한 까닭에 합류하게 되면 그 형세가 더 클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매년 한 여름에 장마가 들게 되면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사납게 쏟아져 나와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 가는 등 백성들의 피해됨이 적지 않았으니, 고을의 장(長)이 된 자가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으리오.
남산 아래에 분수원(分水院)을 둔 것은 옛 사람이 그 물의 형세를 감쇄(減殺)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마침내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두 개의 물이 부딪치는 곳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어, 물결로 하여금 방향을 조금 서쪽으로 돌려 북으로 흐르게 하니, 지세(地勢)가 북으로 내려간지라 물이 천천히 흘러 백성의 피해가 이제야 끊기게 된 것이다.
이에 옛 물길 위에 정자를 짓고 그 한 중간을 거점으로 봇물을 양쪽으로 흐르게 하니, 사면으로 정자를 두른 것이 마치 벽수(璧水)와 같은 체제가 되었다. 정자의 전후에 흙을 모아 작은 섬을 만들어 꽃나무를 심고, 두 군데에 부교(浮橋)를 놓아 출입하게 하고는 그 가운데 앉아 휘파람을 불며 시도 읊으니, 마치 뗏목을 타고 바닷속에 앉아 많은 섬들이 안개와 파도 사이로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같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회골(回?) 설천용(?天用)이 남방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 위에 노닌 바 있었는데 서울로 돌아와서 목사(牧使) 김후(金侯 후는 지방관에 대한 존칭임)의 서신으로써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청해 왔다.
나는 말하기를, “우(禹)가 치수(治水)한 것이 우공(禹貢 《서경(書經)》의 편명임) 한 편에 나타나 있으나, 대개 물의 형세를 따라 인도했고 진(秦) 나라의 효문황(孝文王)이 이빙(李?)을 임용하여 촉(蜀) 땅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빙이 돌로 물소를 만들어 물의 재해를 진압한 바 있다. 역도원(?道元)이 《수경(水經)》을 편찬함에 있어서는 그 돌물소가 이미 이빙이 만든 옛것이 아니었으나, 뒤에 물의 이해(利害)를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이빙을 칭송한다 하니, 이것으로 이빙의 마음쓴 것을 구하여 보면 가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두공부(杜工部 두보를 두공부라 한다) 가행(歌行)을 지었으니 이르기를,
원기만 항상 조화됨을 볼 수 있다면 / 但見元氣常調和
자연히 파도의 피해는 면하리라 / 自免坡濤恣調?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 천강을 끌어다가 / 安得壯士堤天堈
다시 수토를 다스려 돌물소를 없앨꼬 / 再平水土犀奔茫
한 것이다. 대개 원기를 조화시키고 수토를 다스리는 것은 이제(二帝 요.순)와 삼황(三王 우ㆍ탕ㆍ문왕 )의 일이었고, 이제ㆍ삼황의 마음의 정치는 후세에 고유(固有)한 바로 일찍이 잠시라도 없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괴상하고 정도에 벗어나는 말을 구하여 경제의 요원한 시책으로 삼는다면 두공부의 마음도 또한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비록 그러하나 공자(孔子)는 일찍이 말하기를, “비록 조그마한 도(道)라 해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다.” 하였거니와, 돌이 물을 진압하는 사실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도 다 같이 아는 바이요, 물소의 형상을 만든 것도 반드시 그 이치가 있을 것이다.
《포박자(抱朴子)》의 글에 이르기를, “물소를 조각하여 어함(魚銜)을 만들어 물에 넣으니 물이 석 자[尺]나 갈라졌다.”는 것을 보면, 물소란 것이 가히 수재(水災)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하물며 돌은 산의 뼈가 되고 물소는 또 물을 물리치는 것이니, 물을 이것으로 피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도 이미 피할 줄 알고 또 아래로 인도하니, 지체 없이 흘러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날로 비고 넓은 땅으로 향하여 도도히 흘러 바다에 이른 뒤에야 말 것이니, 물의 환란이 어디로 좇아 다시 일며 읍의 주민들이 무엇으로 인하여 불안을 느끼리오. 이 정자를 지은 것을 쓰는 것은 마땅히 폄(貶)하는 예(例)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물소로써 그 정자를 이름하고, 두공부의 돌물소의 행위를 취하여 근본으로 삼으며, 또 《포박자》를 증거로 삼아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정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이 정자를 지음이 수재를 막기 위함이며,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요, 한갓 놀고 관람함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노라.
이 정자에 오르는 자는 그 이름을 고증하고 뜻을 생각하면, 반드시 수령에게 경의가 일어날 것이다. 수령의 이름은 상(賞)이며,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을 역임한 바 있으며, 지방 행정에 있어 청령하고 능력 있는 행정가로 이름이 있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축은재기(築隱齋記)
 

문생 송문귀(宋文貴)가 이름 자의 귀(貴) 자를 고쳐 중(中) 자로 하였는데 자(字)는 일창(日彰)이다. 판축(版築)의 축 자를 따서 그가 사는 집을 이름하여 ‘축은(築隱)’이라 이르고, 나에게 기문을 구하여 말하기를 “문중이 젊을 때에 부모가 매우 사랑하였다. 매우 사랑한다면 그 몸으로 하여금 세상에 현달하게 하고자 하였을 것이니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세상에 현달하는 길이 세 가지가 있으니, 유학[儒]과 관리[吏]와 무관[武] 등이 있는데, 나의 기질이 유학에 가까운 까닭에 문귀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아,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그에 대한 생각을 깊이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중이 혼자서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마다 자신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천작(天爵 사람에게 갖추어진 자연의 미덕)이 곧 그것이다. 천작을 닦아 인작(人爵 사람이 정한 관위(官位))이 따르는 것은 사군자의 크게 욕망하는 바이나, 곧장 인작을 구하고 천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우리 유학자의 일은 아니다. 천작이란 인ㆍ의ㆍ충ㆍ신과 착한 일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니 인ㆍ의ㆍ충ㆍ신과 착한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인 중도(中道)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 자로 고친 것이니, 중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각기 분립하는 바 되는 것으로써 그 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부모가 명명(命名)한 뜻에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내가 힘써야 할 바에 대해서도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으니, 하분(河汾)에서 학도를 모아 학문을 강의한 문중자(文中子)를 사모하여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건대 아울러 이를 기록해 달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중에 대한 뜻풀이는 《중용(中庸)》에 풀어 있다. 다시 무슨 말을 늘어놓으랴. 그러나 일창이 이미 중 자로써 스스로 명명하고, 그 사는 집을 축은이라 이름하니 내 이로 보아 일창은 뜻있는 사람임을 알았노라. 중(中)의 용(用)은 말할 때, 고요할 때, 나아갈 때, 물러날 때에 항시 드러나 보이며, 그 체(體)는 높아서 가히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집을 짓고 스스로 거함에 집안이 온통 소연하니 일창의 중용의 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띠로 지붕을 덮고 흙으로 뜰을 쌓은 것은 상고의 성인이 그 중용을 쓴 것이요, 주옥으로 정자와 궁실을 호화찬란하게 장식함은 후세 사람이 그 중용을 잃은 것이니, 일창의 중용지도를 내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대부가 그 뜻을 얻어 처신함에 있어, 그 거처를 화려하게 하고 그 음식을 풍족하게 하여, 안으로는 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밖으로는 그의 영달을 과시하면서도 날로 부족하게 여기나, 요행히 아들에게 전하고 또 요행히 손자에게 전하는 자는 아마 몇 사람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집을 옮기고, 벽도 마르기 전에 주인이 바뀌는 수도 있으니, 축은의 집은 이런 유가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나 다만 깨진 독 아가리로 창(窓)을 내었던가, 문 옆에 홀[圭] 모양의 좁은 문을 내었던가, 노끈[繩]으로 문 지도리를 대용하였던가, 가시덤불로 사립을 했던가, 움집같이 되었던가, 토실(土室)같던가, 위로 비가 새던가, 옆으로 바람이 들어오던가는 알지 못하나, 하나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담소하는 자리에 당대의 석학들이 있을 것이요, 왕래하는 손님에는 이름 없는 백도(白徒)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창이 그 가운데 편히 살면서 반드시 사모하는 바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부암(傅巖)땅의 부열(傅說)이 아니겠는가? 고종(高宗)이 꿈을 꾸고 않는 것은 또 하늘에 있는 것이니, 일창은 오직 중(中)의 도(道)만을 굳게 잡는다면 평생을 축은재에서 마친대도 미워할 바 아니요, 그 모형을 그려 널리 천하에 구한다 해도 또한 원할 바 아닐 것이니, 중의 도란 사람에게 있는 것인가, 하늘에 있는 것인가? 착한 자는 복을 받고, 어지럽게 하는 자는 화를 입는 것은 그 유래가 명백하니, 천도(天道)는 스스로 어김이 없는 것이다. 일창은 그것을 더욱 힘쓸지어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포은재기(圃隱齋記)
 

내가 《노론(魯論 지금 전하여 오는 논어》을 읽을 때 번지(樊遲 공자의 제자)가 채소 가꾸는 법 배우기를 청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내 원예에 대해서는 늙은 사람 원예사만 못하다.” 한 데에 이르러 나는 생각하기를, 번지가 성인을 좇아 배운 지 오래이거늘,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을 묻지 않고 이에 급급하였던 것은 과연 무슨 뜻에서였던가. 성인의 뜻은 일찍이 천하를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을 번지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가.
성인이 비록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 신분이 천하였기 때문에 많이 비루한 사람의 일에 능했었다.” 하였다. 그러나 위리(委吏 창고의 양곡 출납을 맡아보는 직책)와 승전(乘田 육축〈六畜〉의 목축을 맡은 관원)은 모두 관직에 있는 자이다. 그 관직에 있으면 그 직책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그 직책을 다하는 것은 홀로 성인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군자된 자와 함께 말미암은 바이다. 장저(長沮)ㆍ걸익(桀溺)이 짝지어 밭갈 때의 대답이 불손했었다. 공자가 책하여 말하기를, “새와 짐승과는 벗하여 상종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이 뜻을 천하게 둠이 가히 지극하다고 하겠다. 늘그막에 불우하여 시서예악(詩書禮樂)을 산정ㆍ편수하여 그의 가르침을 만세에 드리웠으니 농사나 원예같은 것도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 듣지 못하였다 하시었으니, 그런즉 번지의 질문은 스스로 낮춘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족히 성인을 알지 못하였음이 자명하다. 비록 그러하나 성인은 하늘같이 자처하여 그 천하를 보기를 할 수 없다고 보는 때가 없기 때문에, 공산(公山)의 부름에도 또한 배척하지 않았고, 양화(陽貨)의 예물[禮]도 또한 경솔히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 년이 지난 뒤까지도 오히려 그 마음의 고충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으니, 그 번지의 물음을 비루하다 함도 당연한 일이다. 번지에 이르러서는 그의 자처함이 감히 안자(顔子 공자의 제자〈弟子高第〉 안연〈顔淵〉)를 바라보지 못했을 것인데, 안자도 오히려 협착한 집에 있었으니 벼슬을 구하는 길을 배우지 않고, 원예를 배우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랴.
중유(仲由 공자의 제자)와 염구(?求 공자의 제자)도 공자에게 문책을 당하여 심지어 북을 울리며 공격하려고까지 하였으니, 번지가 친히 공자의 노기가 얼굴에 나타남을 보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이르기를, “중유 염구는 나와 동렬(同列)에 있는 우수한 사람인데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나의 무리이랴. 나아가 벼슬하지 않으면 은거해야 할 것이요, 은거하지 않으면 나아가 벼슬해야 할 것인데, 은퇴하여 나의 몸을 마칠 땅을 구한다면 원예에 종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여 그 원예를 다스리는 원리를 물은 것으로써 마음속의 고충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가 선생님을 앞에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의 열등을 한탄하고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하여 물은 그 모양을 또 상상할 수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거룩하다, 그 인재가 많음이여, 문왕이 이로써 편히 누리었도다.” 하였으니, 주(周)의 다스림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인의 문하에 우수한 자가 70명이요, 감화받은 자가 3천 명이나 되며 원예를 배우는 질문이 그 사이에서 나왔으니, 어찌 더욱 슬프지 않으랴. 오천(烏川 연일〈延日〉) 정달가(鄭達可 정몽주)가 〈녹명(鹿鳴 시경의 편 이름)〉을 노래하니 향리의 예물이 크게 이르고, 장원(壯元)에 발탁되니 문단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유도(儒道)의 전통을 염락(濂洛) 의 연원(淵源)에 계속하였고, 모든 유생을 시서(詩書)의 광장으로 이끌어 넣었으며, 더욱이 시(詩)를 잘한다는 것으로써 당세의 칭송을 받았다. 나라의 폐백을 받들어 금릉(金陵 중국의 서울)에 간 바 있고, 배를 띄워 일본에 사절로 간 바 있으니, 사명 수행의 재능은 평소의 말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봄에 버들가지를 꺾어 채소밭의 울타리를 하니, 주야의 한도로 인하여 천도(天道)에 영구성이 있는 데 통하였고, 10월에 채소밭에 마당을 닦으니 한서(寒暑)의 운행으로 인하여 민사(民事)에 차례가 있음을 알았다. 아래로 민사를 닦고, 위로 천도에 순응하면 학문의 지극한 공효와 성인의 가장 능한 일을 다하는 것이다. 내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리하여 포은(圃隱)으로 그 집의 이름을 지었노라.” 하고 나의 기문을 구해 왔다. 나는 이르기를, “정전법(井田法)에 2묘(畝)반은 밭에 있다.” 하였으니, 채소밭이 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다만 알 수 없는 일은 그때에도 역시 숨어 산 자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일이다. 소부(巢父) 허유(許由)는 은거한 사람이다. 그런데 식사에 채소는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므로 그들도 채소 농사를 했을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제 달가(達可)는 채소밭에 은거하면서 조정에 서서 유도(儒道)의 융흥을 자임하고, 엄정한 용색(容色)으로 학자의 사표가 되고 있으니,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소치는 자는 질그릇 굽는 자와 서로 맞서려 하는가. 기미년 봄 2월 경신일 쓰다.


[주D-001]염락(濂洛) : 송(宋)의 명유(名儒) 염계(濂溪) 주돈이(周敦이)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程?) 형제를 가리킨다.
[주D-002]소치는 자 : 목은(牧隱) 자신을 가리킨다.
[주D-003]질그릇 굽는 자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가리킨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보개산 석대암 지장전기(寶盖山石臺菴地藏殿記)
 

보개산 석대암의 비구(比丘) 지순(智純)이 나에게 그의 화소(化疏)를 써 주기를 청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또 와서 말하기를, “내가 소(疏)를 들고 공경(公卿)간에 다니며 쌀과 베[布]를 얻으면 나의 소용은 충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늙었는지라, 오히려 하루아침 이슬이 되어버려 역사(役事)의 준공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할까 두려우나, 나의 뜻은 불가불 뒷사람에 알려야 하겠고, 내 뜻을 이어받도록 하려면 역시 구설(口舌)로만 전할 수 없으니, 감히 선생의 한 말씀을 청하는 바입니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불교도들이 환화(幻化)를 잘하고 기능이 많기 때문에 그 건축 기공 등은 초개(草芥)를 줍는 것보다도 쉽게 하여 허다한 사찰과 빛나는 영적(靈跡)을 남긴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보개산의 지장석상(地藏石像)도 또한 그의 하나이다. 지장의 상서로운 감응은 세상이 다같이 아는 바이라, 비록 붓으로 써서 기록하지 않더라도 좋으나, 유독 지순이 이에 잊지 못하고 있기에 그 마음가짐을 아주 없어지게 할 수 없는지라, 이 때문에 그 말을 기록하고, 또 뒤에 지순을 계승할 사람에게 권면하는 바이다.” 하였다.
순의 말은 좋은 말이다. 생사(生死)란 참으로 무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비록 생존하고 있으나, 명일은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의 생사란 큰일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 □□□ 거울에 비치면 숨김이 없기 때문에 불(佛)에 빌고 귀의할 즈음에 어둡고 미혹함을 제거하고, 총명과 지혜를 준 것은 고금을 통하여 이미 징험한 자취가 많다. 이제 지순이 이미 높이 믿고, 그 일을 받들어 왔다. 지장보살이 그 지혜를 더하고 더하지 않는 것은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뒤에 정성껏 또 부지런히 구하여도 그의 총명과 지혜를 얻고 얻지 못하는 것도 역시 감히 알지 못할 일이다.
비록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불보살의 마음과 더불어 본래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부처에 있어서는 더하지 않고, 중생에 있어서는 줄지 않는다.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하루아침에 능히 죄를 뉘우치고 불쌍히 여김을 구하여 잠깐 사이에 그 본연의 착한 마음을 발하면, 본심의 전체와 대용(大用)이 완연히 드러나서 일생을 고요히 앉아 전제(全提) 단제(單提)를 얻은 자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니, 어찌 조그마한 총명과 조그마한 지혜에 그칠 뿐이리오.
이미 이로써 지순에게 고하고, 또 그 규모 제도를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지장의 석상(石像)은 3척 남짓하고, 석실(石實)의 높이는 6척이며, 깊이는 4척이요, 넓이는 4척이라.” 한다. 이제 지순이 지은 집 북쪽 처마가 석실의 위를 덮어 비가 오면 항상 낙숫물이 석실 북쪽으로 흐르게 한 것은 대개 석상을 비호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 정근(精勤)하는 자를 편하게 하기 위함이라 한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거제현 우두산 현암선사 중수기(巨濟縣牛頭山見菴禪寺重修記)
 

나옹(懶翁)의 스승은 지공(指空)이었다. 달순(達順)이라 이르는 자가 먼저 법당 아래에 있으면서 계행(戒行)이 긴요하고 고결하여 동렬(同列)이 모두 탄복하였고, 나옹도 또한 기이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그가 왕사(王師)가 되어 모든 승려의 영수가 되니 존숭하고 영화로움이 비길 데 없었으나 유독 달순대사가 이르면 함께 서로 맞 예를 행하였고, 달순대사가 비록 달아나 피하더라도 나옹은 끝내 감히 스스로 높게 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대개 나옹 문하에 있는 자는 모두 달순대사를 존경하고 예를 다하는 것이 모두 마음속에 달순을 즐거워함에서 나온 것이다. 내 스승이 높이 대접하므로 우선 그 뜻을 좇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달순의 사람됨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거제 우두산의 현암을 중수하여 그윽한 골짜기를 굉장하게 만들어놓고, 그 공사의 시말을 기록한 바를 적어 신륵사(神勒寺)의 주상인(珠上人)을 나에게 보내어 나의 기문을 구한다. 그 기록을 상고하건대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에 순응(順應) 이정(理定)이란 중이 있었는데,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보지공(寶志公)의 유교(遺敎)가 있기를, “내가 죽은 뒤 3백 년이면 마땅히 동국의 두 중이 올 것이니, 우리 불도가 동으로 가는 것이다.” 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지공의 초상을 알현하고 그 법을 얻어 나무로 노새를 만들어 이내 《화엄경(華嚴經)》을 싣고 돌아왔으니, 이것이 곧 우두산 현암을 짓게 된 유래이다. 산속에 또 원효(元曉)ㆍ의상(義湘)ㆍ자명(慈明)의 3대사의 유적이 있으니, 지금의 도정암(道正菴)ㆍ자명암(慈明菴)이 그것이다.
현암이 이미 폐하게 되자 그 옛 모습을 회복하려는 자가 없었는데, 지정(至正) 경자년에 중 소산(小山)이 풍수학(風水學)이 있어 그 경지를 사랑하고 좋아하여 달순공에게 그 일을 꾀하니, 달순공이 큰 시주(施主) 판사 김신좌(金臣佐) 및 그의 문인 아무 아무와 더불어 즉시 자재를 모으고, 공인(工人)을 갖추어 다섯 해를 지난 갑진년 모월에 낙성을 보게 되니, 장엄한 총림(叢林 사찰과 승도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함)을 이루었다. 다시 사찰 간방(艮方 동쪽) 모퉁이에 나옹의 영당(影堂)을 세워 추모의 정성을 이루게 하니, 이에 사찰의 능사(能事)를 다한 것이다.
달순대사가 흔연히 앉아서 38개의 산봉우리를 대하고는 자랑스럽게 한자리의 손들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었다가 그 사람에게 전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이 봉우리는 그 이름을 무어라 하고, 저 봉우리는 그 이름을 무어라 한다.” 하며, 38개의 봉우리를 일일이 세면서 날마다 부족해 하니, 달순대사의 산을 사랑함을 가히 벽(癖)을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는 것이다. 주상인의 말이 이와 같기에 아울러 밝혀두는 바이다. 기미년 6월.

동문선 제75권   
 
 
 기(記)
 
 
소재기(疎齋記)
 

인산(仁山) 최언보(崔彦父)가 새로 삼전동(三殿洞) 동쪽 봉우리에 집을 지을 제 벽을 바르고 지붕도 덮어 장차 공역을 마치게 되었다. 고개를 넘고 숲을 헤치며 골짜기의 외로운 버드나무 아래로 찾아와 목은자(牧隱子)에게 이름을 묻기를, “나는 재능도 없고, 또 병이 많아 능히 추세하고 아첨하지 못하여 내 몸을 붙일 곳이 없으나, 정유년에 과거에 오른 이후 22년이 된다. 서기(書記)를 맡음으로부터 삼관(三館)의 관직에 보직되었고 여러번 전전하여 이제 예의사 총랑(禮儀司憁郞)으로 봉상(奉常)의 계급에 이르도록 일찍이 하루도 관직에서 떠난 일이 없어, 해마다 나라의 녹을 소모해 왔음은 당국자의 아는 바 아님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지 오래이나 벼슬이 4품을 벗어나지 못함은 나의 운명이며 나의 소활한 탓이다. 명을 하늘에서 받은 것을 원망함이 아니요, 사람들이 나를 소외함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소외하게 하고 멀리함이니 어찌 남을 원망하겠는가. 또 근일에 뛰어난 인재와 학자들이 많이 화패(禍敗)를 겪는 것으로 보면, 나의 소활함을 일찍이 마음속으로 달게 받고 자족하게 알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감히 불만스러운 뜻을 잠시나마 두었으리오. 내 장차 내 집에 편액하기를 성길 소(疎) 자로 할 것이니, 그대는 원하건대 이를 기록하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소활한 것은 내가 일찍이 시험한 바이다. 학문의 소활로 추잡하고 경박하니 내 비록 뉘우치고 있지만 미치겠는가. 사무에 소활하여 벼슬자리를 비우고 직무를 폐하였다. 내 비록 뉘우치나 추급하겠는가. 교우(交友)의 소활로 옛 벗에게 버림받고, 오다가다 만난 사람에게도 시기를 받으니 내 비록 뉘우치나 미치겠는가. 군신간에 기밀을 비밀히 하지 않아 해를 이루어 위험한 지경에 빠질 뻔한 것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윗사람을 섬기는 데 소활함을 내 비록 뉘우치나 미치겠는가. 무릇 이 4가지 중 하나만 자신에게 있어도 족히 세상에서 버림받거늘 하물며 4가지를 아울러 가지고 있음에랴.
이는 마땅히 폐출되어야 하는데도 양부(兩府)에 벼슬하고, 2번 문형을 지냈으며,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임금의 녹을 봉해 받아 먹은 것이 또한 장차 5년이나 되니, 소활이란 사람에게 이익됨이 크다. 내가 시험한 바는 이에 그치거니와 이제 그대가 그 집의 문 위에 써서 달면, 그대의 소활한 것이 다른 날에 나의 소활했던 것같이 되지 않을 것을 어찌 알리오.
학문에 더욱 면려하고 직무에 더욱 근면하며, 교제에 더욱 신의 있게 하면 임금에게 은우(恩遇)하기는 비록 늦더라도, 마땅히 본래 온축(蘊蓄)된 것을 펴기를 반드시 내가 세운 사업과 공로보다 멀리 지날 것이니, 그 소활에서 거두는 공효가 반드시 영쇄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하늘의 복으로 두 늙은이가 서로 제휴하여, 푸른 들과 집에서 부르면 수답(酬答)하고 노래하면 화답하여, 타고난 연한을 마침을 얻는다면 세상의 교칠(膠漆)같이 굳고, 성부(城府)같이 깊었다가 마침내 패로(敗露)되어 해산하는 자들이 그 소재(疎齋)를 부러워함이 어떠하리오.

동문선 제75권   
 
 
 기(記)
 
 
무은암기(無隱菴記)
 

천태(天台) 숭산사(嵩山寺)의 장로(長老)는 전의(全義) 이(李)씨의 우수한 인물이다. 벼슬하던 씨족으로서 이를 버리고 불도를 배워 조계(曹溪)에 들어가 사선(四選)을 우두머리로 했으나, 또 이를 버리고 산중에 들어가 직접 불교의 골수를 마음자리에서 탐색하려 했다. 이를 마치기 전에 그 아버지가 강요하여 승선(僧選)에 응시하여, 마침내 천태에 뽑혀 상상품(上上品)에 탁발되어 무량(無量)의 경지에 삼매를 얻었다.
신축년 병화(兵火)에 사찰이 거의 소실되자 대사는 부모를 받들고 병란을 피하여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같이 하니 부모가 크게 기뻐하고, 듣는 자 또한 그 사람됨에 탄복하였다. 불행히 부모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니, 대사 상구(喪柩)에 매달려 부르며 애통하고, 분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마치니, 이는 비록 우리 유가의 뜻과 행실이 있는 자라도 그에 견줄 자가 드문 것이니, 대사의 지키는 바가 반드시 범인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천녕현(川寧縣)은 그의 어머니의 집이 있는 곳이다. 산수의 경개와 미곡이 풍요하여 세월을 보내기에 좋으며, 지대가 기구하고 깊어서 송백(松柏)을 씹고 연하(煙霞)로 집을 삼아 세상과 끊어져 더불어 이웃할 수 없는 곳같지는 않으니, 대사가 사는 곳에는 마땅히 조정의 대부와 산림 속의 석학들의 왕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대가 약간 궁벽하고 사람 또한 드물게 이르니 대사의 심정을 가히 알 수 있다. 다행히도 동정(東亭)이 남방을 유람할 제 서로 만나 수창하고는 오직 날로 부족을 느끼었던 것이니 대사가 살던 곳은 곧 무은암이다. 동정이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또 그 매죽(梅竹)과 수석(水石)의 경개를 즐겨하여 지금까지 회포에서 능히 잊지 못하는지라, 나로 하여금 그 집의 기를 쓰게 하여 그를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말하기를, “집을 이름한 의의는 내 알지 못한다. 홀로 우리 부자(夫子 공자)의 ‘제자들이여, 나는 숨김이 없노라.’ 한 말씀이 있어, 내 평생 이에 힘쓴 바이나 아직 보지 못한 경지인 것이다.” 하였다. 이제 대사는 이단(異端)이니 족히 이를 말할 일이 아니다. 비록 그러나 대사는 평범한 승려가 아니다. 이미 부모에게 효하였고, 이미 군자를 사랑하였으니, 우리 유자(儒者)들이 마땅히 이끌어 당기고 또 당길 것이요, 부당히 이단으로만 배격할 사람이 아니다.
아, 세상의 뻔뻔스런 얼굴로 그의 소행을 딱 잡아떼는 자는 모두 숨기는 유이다. 그러나 대사는 통연(洞然)하게 털끌만치도 그 사이에 거리낌이 없어 무은(無隱)이라 이르니 그 이름을 헛되게 붙이지 않았도다. 내 살펴보건대 암자 가운데 사람이 있어 사람이 이르면 그 폐(肺)와 간(肝)을 보는 것같고, 암자 밖에는 산이 있어 명쾌하고, 물이 있어 청랭(淸冷)하여 이른바 미세한 티끌도 서지 못할 지경이니, 사람과 경지(境地)가 장엄 활달하여 가로는 시방으로 뻗치고, 세로는 삼제(三際)를 다할 것이니, 누가 다시 주인공을 찾겠는가. 나는 병 든지 오래이나 한 번 산수 사이에 놀아 평일의 회포를 쾌히 풀어보려고 한다. 무은암은 혹시 나의 일숙(一宿)을 허용하겠는가. 청하건대 이로써 기문을 삼노라.

동문선 제75권   
 
 
 기(記)
 
 
육익정기(六益亭記)
 

상락(上落) 김직지(金直之)는 나와 같은 해에 진사가 되었다. 나이가 나보다 4살이 위인데 서로 매우 좋아하여 날로 상종하면서도 차마 떨어지지 못하여 밤에도 같이 자면서 등불을 돋우고 시를 읊었다. 직지의 부모도 또한 그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기뻐하여 후히 술과 음식으로 우리를 먹이니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요행히 빠르게 재부(宰府)에 올라 2번이나 과거를 맡아보았으나 직지는 아직도 여러 유생에 끼어 고시장을 출입하고 있었다. 매양 응시 유생의 고열(考閱)이 끝나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직지가 이번엔 또 어찌 되었는가.” 하다가, 방이 나옴에 미쳐서는 직지의 낙제를 스스로 마음 아파했으니, 비록 직지 자신의 아픈 마음일지라도 또한 어찌 나보다 더하리오, 이로 말미암아 마음으로만 공평한 것이 법에 공평함만 같지 못함을 알았다. 직지가 시율(詩律)에 능하더니 다행히도 이제 시부(試賦)로써 선비를 취택하게 되었는데 직지가 또 외간(外艱 부친상)을 당하여 응시함을 얻지 못한 것이 2번이나 되니 아, 슬프도다.
그러나 직지의 마음이 오히려 마지 않아서 세상에 뜻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마음에 번민하게 되나니,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법을 구하려면 들과 산에 자적(自適)하며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마음을 기름만 같지 못하다 하여, 이에 상주(尙州)의 속현 청려(靑驪)란 땅을 택하여 집을 짓고 살며 진(晉)나라 처사(處士) 도정절(陶靖節 도잠)의 송(松)ㆍ죽(竹)ㆍ국(菊)의 3가지 유익한 벗이란 말을 취하고, 뽕ㆍ밤ㆍ버드나무를 더 심고는 스스로 그 정자를 이름하기를 육익(六益)이라 하고, 나의 기를 구해 왔다.
나는 쓰기를, 손(損)과 익(益)의 상(象)이 《주역(周易)》의 괘(卦)에 밝혀 있으니 말할 필요가 없고, 유해하고 유익한 벗은 《논어(論語)》에 상세히 있으니 역시 말할 필요가 없다. 직지가 시를 읊기를 좋아하여 시의 비(比)와 흥(興)에 그 얻은 바가 아마 깊을 것이니, 내 또한 어찌 감히 군말을 하리오. 그러나 이 정자에 오르는 빈객들이 모두 직지의 심정과 정자를 이름한 의의를 반드시 알리라고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지의 이 여섯 가지 식물에 대하여 정성스럽게 아끼고 받드는 바를 대략 기록하여 고하노라.
소나무는 심(心)이 있고, 대나무는 포(苞)가 있어 네 계절을 통하여 가지와 잎을 바꾸지 않으니 군자가 취하는 바이고, 국화가 세상을 피하여 숨은 모습은 은거하는 자의 취하는 바이고, 뽕나무를 빈아(?雅)에 기록한 것은 의상(衣裳)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요, 밤나무를 초구(楚丘)에 기록한 것은 제사에 소용되기 때문이며, 버드나무란 물건은 때를 따라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그 사(私)를 버리고 공에 봉사하고 수용에 공급하며 구하여 얻기에 쉬운 나무이다. 직지가 그 가운데 살면서 한서(寒暑)의 움직임으로 미루어서 시물(時物)의 변화를 보고, 느낌에 따라 마음에 응하여 시와 노래를 읊어 무형의 형체 속으로 들어가고, 무미(無味)한 맛 속에서 맛을 씹으니 사시의 경치가 같지 않고 즐거움도 또한 무궁할 것이다.
직지가 비록 세상에 뜻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 몸에 스스로 얻은 바가 이와 같으니, 아, 이것은 이[齒]를 준 자에게는 뿔[角]을 제거함이니, 조물주가 참으로 사람에게 주는 것을 아끼는 도다.
내가 이제 우환으로 인하여 곤핍 속에 싸인 지 9년의 장구한 세월에 이르니, 이는 바로 내 연한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직지는 불우한 속에 늙었으니 마땅히 그 마음속을 즐기고, 몸을 편하게 함을 얻어 영리에 분주하다가 최절(?折)되고 퇴패한 동배[同年]들이 선망하는 바가 된 것이다. 그 여섯 가지 유익이라는 것은 그 덕을 더함이던가, 그 수(壽)를 더함이런가. 직지는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로다. 기미년 4월 22일에 쓰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송월당기(送月堂記)
 

이소윤(李少尹)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가군(家君 아버지)이 벼슬을 버리고 개령(開寧)에서 노경(老境)을 보내며, 살고 있는 집의 서쪽에 한 채의 집을 두고 평일에 서방(西方 불교)에 마음을 두어, 입으로 그 세계의 주(主) 이름을 부르면서 오래도록 기뻐하고 섬기기를 참된 불교도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빈객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전일과 같습니다. 선생이 그곳에 올 길이 없으나 가군이 선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잠시도 그만둘 때가 없습니다. 만약 선생의 한 말씀을 얻어 정침(正寢) 벽에 걸게 되면 이는 가군이 날마다 선생의 얼굴을 대하는 것같아서 다소나마 그 잊지 못하는 정을 위로할 것이니, 원하건대 이를 이름짓고 또 그 뜻을 부연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공(公)은 나와 함께 놀던 분이다. 그 세상을 경시하고 뜻을 숭상함은 비록 옛날의 고사(高士)라 할지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니, 아마도 대대로 벼슬하던 집 후손으로서 벼슬이 현달하지 못한 것은 사세의 필연한 바 있다 할 것이다.” 하고, 그 형세와 전망을 물으니 넓은 들과 큰 냇물이 있으며, 금오산(金鼇山)은 그 남쪽에 있고, 직지산(直指山)은 그 서쪽에 있으며, 동북쪽은 여러 산이 나즈막히 처마 밖에 읍(揖)하고 있는데, 집 앞에 못을 파고 연꽃과 버드나무를 심어, 그의 사모하는 바의 공허한 경지와 의탁하는 바의 은거(隱居)한 정취에 붙인다 하니, 공허의 경지란 곧 이른바 서방이요, 은거는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을 말함)를 말함이다. 흐르는 물에 임하여 달을 바라보면 심정과 흥취가 유연할 것이니, 비록 우리 유가의 사람 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씨의 부자 사이에 미치겠는가. 비록 그 뜻이 세상을 버리고 멀리 서방사람을 사모하는 데 있으나, 우리의 대도(大道)를 붙들어 세워서 자애하고 효도하는 기풍을 일으키고, 한 시골의 풍속을 선량하게 할 것을 가히 알 것이니, 송월당에 기(記)가 없을 수 없다.
병든 지 오래이므로 휴퇴(休退)를 빌어 장차 함창(咸昌)에서 늙고저 하나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하늘의 복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다면 필마로 왕래하며 백 리의 산천과 한 통 술의 풍월로 마땅히 옛날에 서로 좇아 놀던 즐거움을 펴볼 것이요, 크게 송월당(送月堂) 시(詩) 한 편을 지어 공을 위하여 노래할 것이다. 술잔을 멈추고 한번 묻노니 달을 운행하는 신은 잠깐 그 세월을 천천히 가게 해주겠는가. 소윤의 이름은 앙(?)이니, 곧 나의 인친(姻親)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노라.

동문선 제75권   
 
 
 기(記)
 
 
평심당기(平心堂記)
 

조계(曹溪)의 안상인(安上人)이 나를 황려강(黃驪江) 위로 와 보고 그의 평심당 기문을 구하여 말하기를, “내 스승 환암(幻菴)의 명명한 바이니, 선생은 그 뜻을 부연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나는 유학에 종사한 사람이다. 길 위에서 얻어 들은 축교(竺敎)를 감히 입에 발설할 수 없으니, 우선 배운 바로써 말하리라.
마음이 천지에 있는 것을 명명(明命)이라 하나니 이 명명 만물에 부여한 바가 균일하되 사람이 가장 신령하였다. 그러나 기질이 앞에 거리끼고, 물욕이 뒤에 가려져서 이에 삼품(三品 한퇴지 글에 나왔다)이란 말이 연유한 것이다. 성인이 이를 우려하여 가르침을 세워 인륜을 밝히고, 몸을 검속하여 예(禮)를 회복하게 하니 이에 상하와 사방이 고르게 정제하게 되고, 방정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유자의 말이다.
대상의 스승이 조(祖)의 뜻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함은 나의 사모하는 바이었다. 마음의 체(體)와 용(用)을 정밀하게 분석하였을 것이니, 내 또한 무슨 군소리를 할 것이며, 28대의 달마대사가 처음에 신광(神光)을 얻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고, 마음을 편히 하는 사이에 전체(全體)와 묘용(妙用)을 남김없이 드러 내어 육조(六祖)에 이르기까지 전하여 사문(沙門 승려)에서 널리 법받게 하였는지라, 내 또한 무슨 군소릴 할 것이며, 영산(靈山)에서 꽃을 가지고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분부한 것은 서건(西乾 인도의 별칭)과 동진(東震 한국)에 대대로 기록이 끊이지 아니한 종장(宗匠)이 많았으니 내 또한 무슨 군소리를 하리오.
상인(上人)은 범상한 무리가 아니요, 동렬(同列)에 뛰어나 더불어 어깨를 견주고 설 자가 없기 때문에, 선불(選佛)하는 마당을 당하여 등계(登階)의 칭호를 얻었으며, 법을 봄에 고하(高下)가 없고, 도(道)에 들어감에 피차(彼此)가 없다. 그러기에 그 마음이 맑기가 고정(古井)같고, 부드럽기가 대지(大地) 같으며, 혹은 운용(運用)하기를 신룡(神龍)같이 하여 천하에 비를 주니, 마음이란 것을 어찌 가히 쉽게 말하리오. 우리 유가에서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기운을 화열(和悅)로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고, 집을 바로잡아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려는 것이요, 상인의 뜻은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 가지 덕을 갖추고, 만 가지 행실을 갖추어 삼계(三界)의 마음으로 도사(道師)가 되려는 것이니 이것이 먼 것이냐, 멀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삼계에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에는 오직 아는 것뿐이니 어찌 그 평불평(平不平)을 논의하겠는가.
상인은 생각할지어다. 아, 나는 늙었도다. 군소리가 이에 이르렀으나 상인은 마음을 평탄히 하고 자리에 고요히 앉으라. 그 내 말을 옳다 하는가, 그르다 하지 않겠는가.

동문선 제75권   
 
 
 기(記)
 
 
부훤당기(負暄堂記)
 

설악상인(雪嶽上人)은 나옹(懶翁)의 제자이다. 스승의 석장(錫杖)의 신광(神光)이 원적(圓寂)ㆍ노골(露骨)ㆍ청평(淸平)ㆍ오대(五臺)로 옮겨 송광(松廣)에 머무르고, 송광으로부터 회암(檜巖), 회암에서 서운(瑞雲) 길상(吉祥) 등 여러 산을 거친 뒤에 다시 회암에 머물렀었다. 상인이 모두 따라가서 조석으로 감화받아 자못 얻은 바 있었으니, 그 하룻밤에 깨달은 것과는 비록 다르다 하겠으나,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하는 자가 감히 바라볼 바는 아니다. 나에게 그 집을 이름해 주기를 구한다.
나의 □□□ 신륵상인(神勒上人)이 군중 속에서 그 외모가 빼어 나고도 진중함을 보았고,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사리에 합당함을 듣고서는 내 마음에 기이하게 여겼기 때문에, 다시 사양하지 않고 이에 부훤(負暄)으로써 말막음을 하여 고하기를, “대사의 스승이 대사를 설악으로 호(號)를 한 것은 아마, ‘일천 산에 새 날아 끊어지고, 일만 산길에 사람의 자취 사라졌다.[天山鳥飛絶 萬徑人縱滅]’는 그 기상을 취했을 것이다. 한 점의 티끌도 날지 않고, 전체를 홀로 드러내어 멀리 구름 밖에 솟아 있으니, 음양(陰陽)과 한서(寒暑)가 가히 침범하고 녹일 바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나 핏기가 있고 생명이 있는 바에 담담한 밥으로 그 배를 채우고, 거친 옷으로 그 몸을 가리는 것은 비록 세속의 학문을 끊고 아무 근심없는 경지에 도달한 자일지라도 또한 면하지 못하는 바이다.
내 상상하건대 설악상인이 겨우살이에 방안의 병물이 얼고, 화롯불이 꺼지며, 샘물이 얼어붙어 맵도록 추울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해가 높은 산봉우리에 나와 짧은 처마에 들어오면 따스함은 가히 친할 만할 것이다. 그 햇살을 등지고 눈을 감으면 기운이 오르고 정신이 융화하여 비록 향기로운 장막을 치고 숯불에 고기 구워 먹는 깊은 규중(閨中)의 더운 기운일지라도 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집에 편제(扁題)하는 것이 헛된 미사(美辭)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저 가장 높은 도(道)는 형체가 없고 만물로 인하여 볼 수 있는 것이요, 만물이 나와 더불어 또한 둘이 아닌 것이다. 눈이 오면 차고 볕이 나면 따뜻하며, 따뜻한 기운엔 피어나게 되고, 찬 기운엔 움츠리는 것은 홀로 내 몸뿐이 아니요, 천지의 도(道)이나, 지묘(至妙)한 이치가 그 사이에 있으니, 마음에 있을 따름이다. 사람 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의 작음이 비록 사방 한 치[一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가장 높은 도가 존재한 바이기 때문에, 한열(寒熱)로 인하여 짐짓 조금이라도 변함이 없어 당당(堂堂)한 도의 전체가 하늘도 덮고 땅도 덮는 것이다.
상인이 고요히 앉아 구하는 바가 바로 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열에 찬 두뇌가 더욱 심하다. 대사와 더불어 차를 달여 마실 날은 어느 날에 있겠는가.

 
동문선 제75권   
 
 
 기(記)
 
 
각암기(覺菴記)
 

석씨(釋氏) 지선(志先)이 그 사는 집을 각암(覺菴)이라 편액하여 붙이고, 목은자(牧隱子)를 쫓아와 기문을 구한 바 있다. 내 허락하고도 오래도록 써주지 않은 것은 아낌이 아니요, 겨를이 없던 것인데, 그 구함이 또 간절하니, 간략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에, “천민(天民)으로 선각(先覺)한 자 이윤(伊尹)의 말을 기술하며 이윤의 뜻을 뜻한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스스로 표함이 마땅하지만 이제 지선은 석씨이다. 무엇을 취하였음인가.
은(殷) 나라의 위는 하(夏) 나라요, 아래는 주(周) 나라인데, 주 나라가 쇠퇴하면서부터 석씨의 교가 비롯한 것이다. 이윤의 뜻은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라도 요순(堯舜)의 덕을 입지 못한 자 있으면 자기 몸을 밀어서 개천 속에 집어넣는 것같이 생각하였으니, 그 천하로써 자임(自任)함이 극진하다.
그 풍화를 온 중국에 입히고, 서역까지 미쳤으니 석씨가 홀로 이 뜻[志]을 얻어 이를 이루고 또 키워서 이르기를, “삼계(三界) 삼세(三世)에 꿈틀거리는 자는 모두 나의 분신이다. 내 마땅히 그 빠진 자를 건져주고, 그 주린 자를 밥 먹이리라.” 하고, 수다스럽게 입술을 놀리고, 쉬지 않고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면서 잠시도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이윤의 뜻과 같은 것이다.
다만 그 관면(冠冕)의 예복을 찢어 없애고 부자(父子)의 은혜를 버리고 금수와 더불어 한 무리가 되는 것이 다르다. 우리 유가에서 혹 비난하는 것이 과한 일도 아니나, 세상 교화가 옛날과 같지 않아서 인륜이 무너지고 상패함을 석씨에게서 비방과 웃음을 사는 적이 적지 않다. 석씨는 독선(獨善)에 가까우나 그 기풍이 오히려 족히 쇠퇴한 세상을 격동하게 할 것이니, 내 이를 취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때로 서로 왕래하거니와, 더불어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비니, 그 뜻은 가히 가상한 일이로다.
이제 지선은 또 그 무리 중의 뜻있는 자이다. 원근의 거리를 가는 데 구속을 받지 않으며, 사람과 더불어 계교하지 않고, 혜택을 만물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선무로 삼으니, 대개 이른바 쇠 가운데의 쟁쟁(錚錚 강하고 예리함을 말함)한 자이다. 비록 그러나 사람을 헤아림에 반드시 그 무리를 통하여 본다 하였으니, 나의 이 죄를 진실로 피할 바 없음을 안다.
그러나 듣는 이의 귀에 순하게 하여 아첨하는 데 비하면 거리가 있을 것이니 나의 죄도 마땅히 말감(末減)될 것이다. 만약 그의 논설에 의하면 불(佛)이란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나, 나는 오히려 이에 자세하지 못하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설산기(雪山記)
 

설산(雪山)은 서역(西域)에 있는 산 이름이다. 이름만 들었을 뿐이요, 그 진면목을 알 인연이 없었다. 우선(牛禪)이란 자가 있어 이 이름을 취하여 스스로 호를 삼으니, 나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설산에 있는 소가 가장 살찌고 윤이 나며, 그 결백함이 더욱 유심하기 때문에 그 똥도 오히려 계단(戒壇)에 쓰인다는 것이다. 내 일찍이 그 말을 그의 서적에서 듣고 감히 고하였던 바이요, 상인이 본디 그 일을 알기 때문에 즐겨 취한 것이니 이제 나의 말을 구함에 있어 내 아마도 사양하기 어렵게 되었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그림을 그리려면 바탕이 흰 뒤라야 한다.” 하니, 희다는 것은 바탕의 문채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능히 5가지의 채색을 잘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품에 비유하면 착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고, 순수 전일하여 잡것이 없어 오상(五常)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성품이란 내가 마땅히 기를 바로써 유자(儒者)나 석씨가 다같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우선은 계(戒)로써 혹시 물욕이 그 결백함을 더럽히는 것을 끊고, 정(定)으로써 혹시 물욕이 그 청정함을 혼란하게 하는 것을 막고, 혜(慧)로써 물욕이 화(化)하여 그 순일로 돌아가게 한다면, 결백이 소에 있지 않고 내 몸에 있을 것이다.
내가 대사를 대하니 설산 속에 있는 것같아서 설산이 멀지 않을 것이요, 대사는 이 설산으로 스스로 표방하면 설산이 대사와 더불어 둘이 아닐 것이다. 그 계로 말미암아 정에 들어가고, 정으로 말미암아 그 혜를 발하여,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순전히 결백 청정하여 부처와 더불어 같은 것이니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리오. 설산의 참된 면목이 대사에게 있을 것이다. 대사에게 있을 것이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석씨 영로암(英露菴)은 나옹(懶翁)의 제자이다.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상원(上院)에 들어와 승당(僧堂)이 터만 있고 집이 없음을 보고 곧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대산은 천하의 명산이요, 상원은 또한 큰 사찰이다. 승당은 성불(成佛)한 곳이요, 시방의 운수도인(雲水道人 행각승)이 모이는 곳인데 사찰이 없을 수 있는가.” 하고, 이에 사방으로 쫓아다니며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인연을 맺기를 구걸하니, 최 판서(崔判書) 백청(伯淸)의 부인 안산군부인(安山郡夫人) 김(金)씨가 듣고 기뻐하여 최와 더불어 모의하고 돈을 내어 희사하였는데, 부인이 스스로 희사한 바가 컸다 한다.
병진년 가을에 시작하여 정사년 겨울에 공역을 마쳤다. 그 겨울에 승려 33명을 맞이하여 십년좌선(十年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신유는 곧 그 대반(大半)이다. 성대하게 법회를 열고, 그 정성을 다하도록 하니, 그해 11월 24일에 해가 이미 넘어갔는데 승당이 까닭없이 저절로 밝은지라, 여러 사람들이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겨 그 스스로 밝게 된 바를 탐구하니, 성승(聖僧 승단 중앙봉 안에 앉힌 좌상〈坐像〉) 앞으로부터 촛불이 나와 있어 여러 사람들이 드디어 크게 놀랐던 것이다. 이제 그 불꽃을 산중의 여러 암자에서 지금까지 서로 이어 나왔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는 김씨의 지성의 소치라 한다.
김씨가 그 일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더욱 느끼고, 더욱 믿고, 더욱 그 교를 높여, 노비와 토지를 바치어 상주(常住)할 자본으로 삼았다. 뒷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 길이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 기문을 색(穡)에게 구하였다. 색도 또한 놀라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런 일이 있었던가, 내 전에 듣지 못한 바이다. 대저 등(燈)과 초[燭]는 심지가 있고, 기름과 밀[蠟]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불이 있은 연후에 광명이 나오게 마련이다.” 하였다. 이제 불을 붙이지 않아도 스스로 밝아진 것은 부처의 신령함이 아니면 어찌 이루겠는가. 부처가 비록 신령하다 하더라도 또 아무런 연유도 없이 그 신령함을 나타냈으니 김씨의 이름이 전함은 지당한 일이다. 승당의 기문은 짓지 않을 수 없도다.

 
 동문선 제75권   
 
 
 기(記)
 
 
보법사기(報法寺記)
 

왕성(王城 도성)의 남쪽과 백마산(白馬山)의 북쪽에 큰 절이 있으니, 태조(太祖)의 비(妃) 유(柳)씨가 희사한 것이다. 보시한 전토와 인민이 지금까지 전해오다가 중간에 폐한 지 오래되었다. 시중(侍中)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이 선원(禪源) 법온화상(法蘊和尙)과 더불어 중건할 것을 같이 맹서하고, 지정(至正) 계미년에 시작하여 공역을 마치게 되었다. 또 모의하기를, “《대장경(大藏經)》은 없을 수 없다.” 하고, 이에 강절(江浙)에서 가져온 것이 무자년이었고, 살고 있던 서쪽 건물을 철거하여 《대장경》을 보호하게 한 것은 임진년이었다. 전당(殿堂)이 이미 갖추어지자, 노래 부르는 데 따르는 도구와 일용에 수요되는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하여 낙성을 베푼 것은 계사년이었다.
신축년에 낙성중회(落成中會)를 베풀고 겨울에 사적(沙賊)에 의해 전당ㆍ기명(器皿)ㆍ경권(經卷)ㆍ상설(像設) 등이 유린되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드물었으니, 국가에서 서울을 회복한 뒤에 약간 보수하고, 조계선사(曹溪禪師) 행재주석(行齋主席)을 맞이한 것이 갑진년이었다.
을사년에 부인 유씨가 사망하니 공이 슬퍼하고 감회하여 공역을 동독하기를 더욱 급히 하였으니 명년에 공사의 준공을 고했던 것이다. 정미년에 또 다시 대장경을 강절에 가서 가져오고, 다음해에 또 수요되는 기명을 다시 완비하고 말하기를, “이는 우리 절의 거듭 보는 초회이다.” 하였다. 드디어 낙성초회를 베푼 것이 경술년이요, 낙성중회는 정사년이었으며, 조계선사 행비주석(行備主席)을 맞이한 것이 무오년으로 □ 비로소 만일미타회(萬日彌?會)를 가졌던 것이다. 무릇 옥우(屋宇)로 된 것이 □□ 칸으로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보는 자로 하여금 엄숙한 존경심을 낳게 하였다. 부인은 3월 5일에 사망하고, 공은 8월 4일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전장(轉藏)을 한 해에 2번한 것은 그 날짜를 사용한 것이었다. 공의 의중은 또 공이 세상을 버리는 날을 쓰고자 하니 아, 그 생각함이 원대하도다.
시포(施布 부처에게 시주한 베) 천 필을, 본(本)은 두고 이식[息]만을 취했다. 또 시전(施田)이 부평부(富平府)ㆍ김포현(金浦縣)ㆍ수안현(守安縣)ㆍ동성현(童城縣)에 있는 것은 공의 조상의 유업이요, 또 토지가 김포 동성에 있는 것은 부인 조상의 유업이었다. 한 해의 비용이 거기에서 나와 일찍이 구걸한 바 없으니, 공의 계책은 그 법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세상에는 남의 문간에 서서 구걸하는 자가 많다. 능히 부끄럽지 않으냐. 미타회를 한 지도 이미 6년이다. 공의 강강(康强)한 건강을 하늘이 도와 대반(大半)에 이를 것은 필연한 일이다. 경(經 불경)을 받들어 귀중히 하면 삼승(三乘)의 가르침이 바다의 마음속에 미치고, 부처를 마음속에 생각하면 구품(九品)의 안락한 곳이 반걸음 사이에 있으니, 옛 허물을 벗고 새로운 복을 더하여 그 혜택이 만물에 미치게 할 것을 또 어찌 의심하리오. 다만 알지 못할 것은 공의 뒤를 이어 이 절의 공덕주(功德主)로 되는 자가 능히 공의 마음과 꼭 같아 비록 여러 백 대라도 쇠하지 않을런지가 의문이다. 아, 이것이 바로 공이 기문을 구하는 뜻일 것이다.
공이 현릉(玄陵)의 상신(相臣)으로 덕망이 가장 높아 지금까지 조야(朝野)에 의지하기를 태산같이 중히 여기고 있거니와, 복을 빌어 군왕께 보답하고 만물과 인류가 함께 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오래될수록 조금도 해태하지 않으니, 어찌 크게 뒷사람의 권계가 되지 않으리오. 염 좌사(廉左使) 중창부(仲昌父)가 공의 명으로 나에게 기문을 구하고, 또 말하기를, “사씨(史氏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가 마땅히 쓸 바이다.” 한다. 이 까닭에 사양하지 않고 기문을 쓰노라.


 동문선 제75권   
 
 
 기(記)
 
 
고암기(古巖記)
 

신해년 조계(曹溪)의 대선(大選)인 천긍(天亘)은 나와 동년(同年) 급제한 최 병부(崔兵部)의 아우이다. 병부의 아우가 있다는 것은 들은 지 오래이나 그가 석씨가 된 줄은 알지 못했었다. 광암(光巖)에서 만나 그 얼굴이 병부와 같은 것을 보고 나는 더욱 놀랐다. 병부가 아들이 없는데 아우가 또 이 같음은 어찌된 일인가.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나의 호는 고암(古巖)이니, 귀곡(龜谷)이 명명(命名)한 바이다. 내가 좋아하는 바는 옛것이요, 사는 곳은 바위 속이다. 옛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과 어긋나고, 바위 속에 살기 때문에 평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처음 배울 적에는 높이 옛사람과 벗하기 위함이요, 세속을 피하기 위함이었지, 승려를 진체(眞諦)로 높인 때는 아니었다. 선생께 한 마디 말을 청하여 스스로 법 받고저 한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동년의 아우는 곧 나의 아우이니, 내 어찌 나의 말을 아끼겠는가. 대사는 이미 형을 등지고 이단(異端)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형의 벗을 존경할 줄 알고, 또 글을 구하여 우리 유도[儒]를 사모하니, 내 어찌 나의 말을 아끼리오? 그러나 대사의 학문은 우리의 학문이 아니요, 나의 학문은 대사의 학문이 아니니, 길에서 얻어 듣고 길에서 말해 버리는 경박한 행위에 가깝지 않은가.” 하였다.
반고(盤古)씨는 너무나 멀다. 대우씨(大禹氏)가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였으니 사람은 평탄한 땅을 얻어 살고, 높은 바위 산은 그윽하고 깊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게 이르는 곳은, 호랑(虎狼) 원조(猿鳥)가 집을 삼아 깃들이는 바 되었다. 그러나 산과 못이 서로 기운을 통하여 때로는 구름과 비를 내고 밭과 논에 물을 대게 하니, 황제(黃帝)가 정전법을 실시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이익됨이 넓다. 배불리 먹고 편히 살면서 그 유래한 바를 알지 못하는 자는 망령된 사람일 따름이다. 내 후생과 더불어 항상 말하여 왔으나, 내 말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더니, 홀로 긍상인(亘上人)만은 명(名)으로 말미암아 실(實)을 세운 것 같기 때문이다. 상인이 그 스스로 명명한 의의를 구하는 까닭은, 혜택을 삼도(三塗)에 흡족히 적시고, 도를 삼제(三際)에 행하는 것으로써 마음하여 고금이 없이 포함 병합하고, 고하가 없이 평등하게 하여, 반드시 깨달은 성품으로 하여금 시방에 가득히 차게 하고, 두루 청정(淸淨)하게 하면, 예와 현재와 바위와 평지가 모두 내 마음 사이의 전체 묘용(全體妙用)이 될 것이다. 벽을 대해 앉으니 쌓아 얻은 시방공허(十方空虛)가 모두 소멸하려 한다. 어찌 세로 다하고, 가로 뻗치는 이상이 있으리오.
상인은 이미 자신의 본연한 형체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차마 그 이름을 감추지 못하니, 세상 교화에 막연히 무관심한 자는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와 대우씨의 일을 끌어서 그의 일단을 발론하고 그의 교(敎)로써 종결하니, 상인은 그 스스로 택할지어다. 상인의 사는 바는 누구의 힘이며, 상인의 먹는 바는 누구의 힘이던가. 동년의 아우라, 감히 정의로써 고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문선 제76권   
 
 
 기(記)
 
 
고암기(?菴記)
 

이색(李穡)

상인(上人) 승(昇)이 현릉(玄陵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얻어 광암사(光巖寺)에 머무른 지 10년이나 되었다. 일찍이 현릉이 ‘일승고암(日昇?菴)’이라고 네 글자로 쓴 친필을 하사받았다. 여러번 사퇴하고 가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현릉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금상이 즉위한 후에 무릇 세 번이나 사퇴하려 하였으나 또 윤허하는 명을 얻지 못하자 드디어 몸을 빼내어 돌아갔다. 상당(上黨) 한 선생(韓先生)이 신륵사(神勒寺)에서 만나니, 상인(上人)이 선생을 통하여 한산자(韓山子)에게 고암기(?菴記)를 쓰라고 부탁하였다.
한산자가 막 붓을 잡으려 할 때 마침 성산(星山) 이자안(李子安)씨가 왔다. 한산자가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붓을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말하여 주겠는가?” 하였다. 자안(子安)씨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고(?)라는 글자는 날 일(日)와 나무 목(木) 자로 되었으니, 해가 나무 위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상인(上人)이 살고 있는 곳이 동해의 언덕이니 바로 해돋는 곳입니다. 해가 돋을 때는 함지(咸池)에 미역감고 부상(扶桑)에 솟아오른다고 하니, 이것은 고(?) 자가 날 일(日) 밑에 나무 목(木)을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일찍이 남쪽으로 계림(鷄林)에 유람할 때 불일사(佛日寺)의 동쪽 봉우리에 올라 아직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은 광대하고 몽롱함 속에 서서 큰 바다를 굽어보았습니다. 때가 이른 새벽이어서 빛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물과 하늘이 아래 위에서 잠깐 밝아졌다가 곧 어두워지고, 잠깐 붉었다가 곧 검어지곤 하여 그 변화가 몹시 빨라서 정말 놀랐습니다. 조금 있으니 태양이 뛰어 나와 갑자기 하늘로 올라왔습니다. 밝은 빛이 찬란하여 털끝도 셀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아까 말한 부상(扶桑)이 눈 안에 있는 것같아서 나는 진정 가슴이 시원하였습니다. 지금 상인(上人)도 일찍이 이를 관람하였는지요. 그가 ‘고암(?菴)’이라고 암자의 현판을 단 뜻을 모르겠습니다마는 유학하는 선비로서 말한다면, 명명(明命)이라 함은 하늘로써 말한 것이고, 명덕(明德)이라 함은 사람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명명(明命)을 돌아다보며 명덕을 밝히는 것은 배우는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도 자기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밝은 측면입니다. 어린 아기가 우물로 기어 들어가려 하는 것은 마음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완전히 밝지도 못하고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것은 배우는 자의 공부가 아직 정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배움에 빛이 있어 광명이 온 천하를 덮는 것은 배우는 자의 최대한의 공력(功力)이며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해가 부상에 솟아 하늘에 올라서 비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상인(上人)이 강남에 노닐면서 통달한 선비들과 두루 만나보았으니, 그의 배움이 깊다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중국의 학문과 현인(賢人)들과의 교제에서 한마디 유익한 말을 찾아 얻었는지, 반드시 지금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은 말로써 일러준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산자(韓山子)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뒤에 마땅히 승상인(昇上人)을 볼 것이니, 그것을 물어보리라.” 하였다. 드디어 그대로 적어서 기문을 삼았다.


[주D-001]한산자(韓山子) : 필자 이색(李穡)이 자신을 가리킨 말.

 

동문선 제76권   
 
 
 기(記) 이색
 
 
청주 용자산 송천사 나옹진당기(靑州龍子山松泉寺懶翁眞堂記)
 

나옹(懶翁) 의 진당(眞堂 초상을 모신 곳)은 명산과 복지(福地)에는 어느 곳이나 있다. 한산(韓山) 목은자(牧隱子)가 붓을 잡아 그 시말(始末)을 기록한 지도 오래이다. 이제 그 무리인 각련(覺連)이 또 와서 말하기를, “청주 용자산(龍子山)에 돌미륵과 석탑이 있습니다. 실로 복지(福地)이기에 촌과 읍을 잇달아 쫓아다니며 불교 신도인 남녀들을 뵙고 재물을 약간 얻어 모아서 방 세 칸을 만들었습니다. 무술년 8월에 준공하고 우리 나옹(懶翁)의 초상을 그 가운데 방에 걸고, 중들은 그 좌우의 방에 살고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향화(香火)를 받들어 스님의 은공에 보답하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선생님께 기(記)를 청합니다. 기문을 누가 쓰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나옹의 진당(眞堂)에 기문을 쓰는 것은 선생님의 일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옹의 탑(塔)에는 내가 왕명을 받들어 명(銘)을 쓰는데, 나옹의 진당에는 그의 제자를 위하여 기문을 쓰는구나. 나와 나옹과는 아득히 멀어서 연결되지 못하였으니, 내가 나옹의 문하에 노닐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나옹의 진당이 나로 인하여 영구히 전해져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나옹의 이름을 알게 한다면, 실로 나의 붓에 힘입은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평소에 직접 그의 교화를 받았으면서 그가 죽은 뒤에 보탬이 없는 자들과 어찌 같은 날에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나의 다행인가, 나옹의 다행인가, 아니면 제자들의 다행인가? 인연(因緣)을 만나 마주침은 마땅히 한번 미소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주D-001]나옹(懶翁) : 고려 공민왕 때의 고승.
동문선 제76권   
 
 
 기(記)
 
 
적암기(寂菴記)
 

화엄종의 고승 경원(景元)이 흥왕사(興王寺)에 머무른 지 얼마 안 되어 속세의 번다함을 끊어버리고 뜬구름과 흐르는 물 사이에 초연하게 살면서 장삼과 나물밥으로 일생을 지내려고 한다. 의기는 호방하고 심지는 깨끗하여, 보는 사람마다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다. 내가 벽사(?寺) 에 왕래할 때 비로소 마음으로 사귀었다. 경원공(景元公)이 일찍이 나옹(懶翁)을 스승으로 섬겼더니, 나옹이 경원공의 암자를 적암(寂菴)이라고 이름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이제 한맹운(韓孟雲) 선생이 크게 쓴 글씨를 얻어 암자의 현판을 만들고, 나의 글을 요구하여 기문으로 삼으려 한다.
또 말하기를, “이각(二覺)이 적(寂)에 귀일하는 것은 교(敎)의 극치이며, 삼관(三觀)이 적에 마치는 것은 선(禪)의 극치입니다. 공행(功行 공덕과 수행)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도 이미 끊어버리고, 사리를 아는 견해도 세우지 않습니다. 영가(永嘉) 스님의 시비(是非)를 함께 잊고, 바로 달마(達磨)의 공덕에 투철하려 하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그러나 선생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산에 있으니 낮에는 한 마리 새도 울지 않고, 밤이면 외로운 달이 또 떠오를 뿐입니다. 물은 꽃 사이를 흐르고 눈은 소나무 위를 누릅니다. 혼자 있어도 본래 고요하지만 여럿이 살아도 역시 고요합니다. 고요함의 맛있음은 혀로는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이 까닭으로 나의 암자를 적암(寂菴)이라고 현판을 단 것입니다. 내가 보니 선생께서는 왁자지껄한 것은 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의 도(道)를 반드시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대략 이각(二覺)ㆍ삼관(三觀)ㆍ달마ㆍ영가의 설(說)을 들어 말하고, 끝으로 산중(山中)의 일을 말하였는데, 선생은 그 어느 것을 취하시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유학자들이 복희씨(伏羲氏) 이래로 지켜서 서로 전해 오는 것은 역시 고요함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나도 감히 그 전통을 떨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태극은 고요함의 근본입니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정지하여 만물이 화육(化育)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고요함의 다음입니다. 한번 감동하고 한번 감응하여 모든 선(善)한 것이 유행합니다. 이런 까닭에 《대학》의 강령(綱領)은 고요히 안정함에 있는 것이니, 고요함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중용》의 가장 중요한 점은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함에 있으니, 고요함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계구(戒懼)함은 공경함이고, 고요히 안정함도 역시 공경함입니다. 공경함이란 한 가지에 전념하고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할 뿐입니다. 한 가지에 전념하게 한다고 함은 지키는 바가 있음이요, 다른 데로 감이 없다는 것은 옮기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키는 바가 있고 옮기는 바가 없다면 고요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평하게 다스리는 것은 정치의 밝은 공효이며, 만물이 제 자리에서 잘 육성되는 것은 도덕의 큰 효험입니다. 스님의 고요함이라는 것도 역시 보리(普利 보리(菩提))ㆍ함식(含識)의 근원입니까, 혹은 그 형태는 고목(枯木)같고 마음은 차가운 재처럼 되어서 적막한 것에 굳어버린다면, 우리 유자(儒者)들이 새와 짐승과 더불어 무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유학자가 물(物)을 끊는다면 석가여래의 죄인인 것입니다. 나와 적암(寂菴) 스님은 마땅히 스스로 잘 도모하여 한쪽에 치우치는 것에 흘러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산중의 고요함같은 것은 스님에게 속한 것이고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 내가 어찌하겠소 내가 어찌하겠소.” 하였다.


[주D-001]벽사(?寺) : 벽사는 여주(驪州)에 있는 신륵사(神勒寺)를 벽절이라고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한다.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쌓은 것에 유래하는 말이다.
[주D-002]영가(永嘉) : 당(唐) 나라 온주(溫州) 영가(永嘉)의 현각(玄覺)스님을 가리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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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중방 신작공해기(重房新作公?記)
 

홍무(洪武) 계해년 겨울 10월 초하룻날, 응양호군(鷹揚護軍) 배구(裵矩)가 그들의 반주(班主)인 밀직(密直) 최공(崔公)의 말을 갖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중방수조기(重房修造記)를 지어달라고 감히 선생을 번거롭게 합니다.” 하고 곧 공사의 기록을 내보였다. 대청(大廳)이 3칸, 서편 마루가 3칸, 다락의 곳간이 3칸, 남쪽 행랑이 9칸, 문(門)이 1칸인데, 단청으로 채색을 하고 밖에는 담을 둘러쌓았다. 역시 하나의 큰 공사였다. 재목은 값을 주고 샀으며, 부족한 것은 도통(都統)인 최 시중(崔侍中 최영)이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 베 2백 50필을 보조하였다. 근장내상감문위정(近仗內廂監門尉正)이 군사들을 반으로 나누어 공사에 나갔는데, 공인과 장인은 중으로서 집에 있는 자들이 고용(雇傭)되어 다투듯이 나아갔다. 수레를 세내어서 재목을 실어 들이고, 관원을 보내어 공사를 독려하였다. 5월 24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준공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어떻게 그리 능하게 했단 말인가. 관청에 이러한 공사가 있었으나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위에서 하는 일이 있을 때 아래에서 서로 권면하였으니 근래에 드문 일이다.” 하니, 동역관(董役官)이 말하기를, “대호군은 정 승가(鄭承可)이며, 정승가가 마치려 할 때 관청에서 파견하여 대신한 자는 염치중(廉致中)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공사를 감독한 이는 오직 배군뿐이다.” 하였다. 그 밑에 낭장 최유(崔愉)ㆍ김을정(金乙鼎), 별장 배천석(裵天碩), 산원(散員) 윤영렬(尹英烈)이 있었고, 또 그 아래에는 도장교(都將校) 원을부(元乙富), 서자(書者) 이임발(李林發), 서역(書役) 정규부(鄭圭夫)가 있었다. 이 역사는 반주(班主)가 지휘하였다. 아래로 서역(書役)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련하여 이름을 쓰게 되었으니,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하기에 문(文)과 무(武)가 국가의 쓰임이 되는 것은 몸의 두 팔과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진실로 어느 한쪽을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기에는 치란이 있고, 쓰임에는 경중이 있기도 한다. 이제 나라에 어려움이 많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조정에서 결속해야 한다. 무반(武班)의 관직은 나라의 간성(干城)이고 조아(爪牙)이며, 나라의 사명(司命)인 것을 알 수 있다. 최공(崔公)은 충직하기로 유명하여 임금에게 알려져서 국가의 기밀을 관장하는 데 참여하게 되었다. 최공은 온화하고 공순하여 조정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존경하고 사모한다. 군사들과 장교들이 잘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뛰어나와 싸울 것을 반드시 기약할 수 있다. 하물며 청사를 건축하는 것같은 이런 작은 공사임에 있어서랴.
나는 나이 15세 때에 아버지의 음덕으로 과거도 보지 않고 별장(別將)의 직위를 받았으니, 역시 응양위(鷹揚衛)의 한 옛 장교인 것이다. 반주(班主)가 글을 요구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또 무관(武官)은 간소한 것을 숭상한다. 그런 까닭에 바로 일 자체만을 기록하고 감히 말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반주(班主)는 서반(西班)을 주재하는 자이니, 8명의 상장군(上將軍) 중에서 가장 존귀하다. 그런 까닭에 양부(兩府)의 재상들이 그 직책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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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남양부 망해루기(南陽府望海樓記)
 

남양부(南陽府)는 삼국 시대에는 당성(唐城)이라고 이름하였다. 본조(本朝 고려)에 들어와서 중세 이후로는 익주(益州)로 되었다. 이 고을의 홍씨(洪氏)는 태조가 처음 일어날 때부터 익대공(翼戴功)이 있었으니, 휘(諱)가 은열(殷悅)이라고 하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대로 거족을 이루었으니, 강도(江都)의 말기에 이르러 남양군(南陽君)이 권신을 베어 죽이고, 정권을 왕실로 도로 돌렸으며 문예부주(文睿府主)를 낳아 양조(兩朝) 의 태후가 되었으므로 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켰다. 대개 산천의 신령하고도 뛰어난 정기가 뭉쳐서 아름다운 상서를 낳아, 억만년 영원히 끝이 없는 왕업의 기초를 이루었으니, 진실로 다른 군현(郡縣)과 똑같이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곳의 수령을 소중하게 여기고 또한 반드시 신중하게 뽑아 임명한다.
해정어수(海亭漁?)라고 하는 정후(鄭侯)가 부임하여 말하기를, “태양에는 나오고 들어감이 있고, 물에는 원류와 끝이 있다. 비록 멀고 큰 것일지라도 탐구의 방법을 잘하는 자는 다 알 수 있다. 더구나 군왕이 출생한 근본인 곳임에랴. 신하된 자는 진실로 마땅히 삼가 공경하여 감히 소홀하게 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나는 영광스럽게 임금의 은택 있는 말씀을 받아 군왕이 출생한 땅의 수령이 되었다.” 하고, 이 때문에 밤낮으로 오직 삼가고 공경하고 우선 덕(德)으로써 힘을 썼다.
아전들을 교화하는 데 감히 법으로 대하지 아니하며, 백성을 은혜롭게 대하여 감히 위압을 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지 1년이 되어 고을 안이 매우 평화로운 것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고, 해로운 것은 모두 없어졌다. 이에 누대를 고을의 치소에 세워 보는 것을 장대하게 하고 빈객과 사신들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이름을 ‘망해루(望海樓)’라고 붙이었다. 그의 아들 국자감(國子監)의 학생인 정이(鄭彛)를 시켜, 나의 글을 받아서 기문으로 삼았다.
이 고을에 옛날에는 못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폐지하고 수리하지 않아 위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아래에는 앙금이 쌓이니, 그곳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함부로 경작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못에 살던 용(龍)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로 못이 말라버렸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정후(鄭侯)가 부임하여 못을 파내고 수축하게 하였더니, 이날 검은 구름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일어나고 바람과 우레가 따라왔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높이 드러난 용의 꼬리가 못에 내려왔다. 못의 물이 사흘동안 끓어오르고 흰 기운이 뭉게뭉게 일어나서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의 작용은 위대한 것이다. 마음을 한번 정하면 온 천하에 족히 못할 것이 없다. 정후(鄭侯)의 공경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환하게 틔어서 막힘이 없기 때문에 드러난 데에서는 인화(人和)를 가져오고, 그윽한 곳에서는 영물(靈物)을 오게 한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이 누(樓)를 창건한 것은 작은 일이니 무엇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고을의 고사(故事)를 적고, 뒤에는 용이 돌아온 유래를 기록하여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알린다. 정후의 이름은 을경(乙卿)이고, 자(字)는 선보(善輔)이다.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재목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주D-001]권신 : 무장으로 4대 동안 국가 권력을 잡었던 최충헌(崔忠獻)의 가문을 말함.
[주D-002]문예부주(文睿府主) : 충숙왕(忠肅王)의 비(妃) 명덕왕후(明德王后)
[주D-003]양조(兩朝) : 충혜왕(忠惠王)과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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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청주목 제용재기(淸州牧濟用財記)
 

청주(淸州)는 양광도(楊廣道)에 있는 목(牧)으로 충주와 공주에 접경하고 있다. 토호가 많으며, 아전은 법을 받들고, 백성들은 꽤 순하였다. 그러나 목사로 오는 사람은 어떤 이는 관대하고 어떤 이는 사납고, 어떤 이는 구차하게 있다가 전임해 가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곳의 아전과 백성들도 다른 고을과 다른 것이 없다. 곡식을 공출하여 공용(公用)을 받들고 관(館)의 양식을 풍부하게 하여 빈객을 대접하는 일들이 거의 일정한 법이 없었다. 혹은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하니, 백성은 이 때문에 곤궁하게 되고 아전은 이 때문에 횡포해져 폐단이 생긴 지가 오래되었다. 그중에서도 간혹 관대함과 사나움을 알맞게 하며, 폐지되고 실추된 것을 정비하여 밝혀도 역시 모두가 한때의 일에 그치고 말았다. 강령을 세워 오래도록 전할 만한 제도로써 위와 아래의 잘못된 빈틈을 꿰매어서 묵은 폐단을 제거하고 아전과 백성을 안정하게 만든 것은 대개 드물다.
용구(龍駒) 이모지(李慕之)는 나의 성균관 생도였다. 동료들이 그의 학문을 칭찬하였는데, 마침 집정관(執政館)이 이군(李君)을 알고 천거하여 참관(參官)이 되었는데, 근래의 전례에 참관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으므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과거에 급제한 자와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청주를 다스린 것을 보면 충분히 그의 학문을 알 수 있다. 내가 드물다고 말한 경우가 이모지(李慕之)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청주가 왜구에게 유린되어 거리와 마을은 텅비고 고을은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모지가 그곳 수령으로 임명을 받고 부임하여, 묻고 찾고 계획하며 따뜻이 품어주고 어루만져주니 2년만에 은덕과 혜택이 흡족하여 백성들은 친애하고 아전들은 법을 지키게 되었다. 선정의 명성이 조정에 들리게 되어, 당연히 전임시켜야 할 경우에도 전임시키지 않고, 그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게 하였다. 이모지 자신은 비록 오랫동안 외직에 곤란을 당하였으나, 조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현저한 것이다.
이모지가 오랫동안 절약하여 백미(白米) 20석, 조 70석, 좁쌀 80석, 메밀 30석, 베 1천 필을 저축하였다. 베와 쌀은 쓰면 없어지는 것이다. 물품을 세워두고 이식(利殖)만을 받아쓰게 하여 계속 유지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생각하기를 “내가 가고 대신으로 오는 사람마다 나의 마음과 같다면, 원 물품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 그렇지 않다면 이식이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그렇게 되면 나의 방침은 몇 년 되지 않아서 반드시 폐지될 것이다. 아, 상심되는구나.” 하였다. 또 염려하기를, “입으로 일러주고 붓으로 써서 전하는 것은 그 방법을 극진히 한 것이다. 그러나 전해주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혹 업신여길 것이다. 만약 당대의 문장가가 이 일을 기술한다면, 반드시 널리 전파될 것이다. 청주 사람들이 비록 나의 현판은 불태우더라도 끝내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하였다. 훗날 목사된 자가 이 기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묻기를, “기문이 이와 같은데 지금 그 쌀과 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그 불지른 사람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드디어 나 한산자(韓山子)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백씨(伯氏) 판각공(判閣公)이 뒤따라 집에 찾아왔는데 나는 태사(太史)의 관직에 있다. 선한 일을 들으면 반드시 써야 하기에 기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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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운헌기(雲軒記)
 

화엄종의 중 의공(宜公)이 저번에 나에게 시(詩)를 보내 왔다. 그 시를 음미하고 나는 시 잘 짓는 중을 만났다고 생각하였다. 서로 헤어진 지 오래되었더니 옥천사(玉泉寺)에 머무르면서 나에게 수백 마디의 말을 쓴 편지를 부쳐 왔다. 뜻하는 바와 표현이 바로 문인(文人)과 더불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나는 곧 의공(宜公)이 시문(詩文)에 뜻이 매우 두텁다는 것을 알았다. 만나서 그의 말을 듣고 싶은 지 오래였다.
금년 여름에 서울로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구름으로 나의 마룻방의 이름을 붙였으니, 선생의 기문을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이미 그의 논의를 들으려고 하였으므로 곧 운헌(雲軒)이라고 이름을 지은 뜻에 대해 묻기를, “공은 어찌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의 장애를 받아 뜬구름을 쓸어버리려고 생각한 것입니까?” 하니, 그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은 어찌 마음대로 가고 향하는 것을 사모하여 법운(法雲)으로 올라가시려 하십니까?” 하니,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갑자기 깨달았다. 이 구름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그가 누워서 보는 구름일 것이다.
누워서 몸을 편안히 할 수 있는 것은 산속의 구름이며, 앉아서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의 구름이다. 마루가 어두워지면 구름이 모인 것을 알고, 마루가 밝으면 구름이 지나간 것을 안다. 마루가 시냇가에 있으니 꽃이 곁에 있음을 사랑하고, 마루가 소나무와 마주 대하니 뜬구름이 사랑스럽다. 달이 마루에 들 때 구름이 가렸다가 지나가면 맑은 달빛이 더욱 좋고, 바람이 마루로 불 때 구름이 따라오면 찬 기운은 더욱 더한다. 의공(宜公)이 그 안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면, 시는 더욱 문채가 나고 가사(歌詞)는 더욱 오묘한 경지에 들어갈 것이니, 절로 유익됨이 매우 많을 것이다. 그 구름이 뭉게뭉게 모여서 비를 만들면, 은택은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흡족하게 되고, 공(功)은 제전(祭典)을 받들 만큼 높을 것이니 어찌 세상의 교화에 크게 도움되지 않겠는가. 우리 스님이 사물까지 파급하는 마음이 여기에 드러난다. 사물에 파급하는 마음이 먼저 이처럼 정해지면, 뜬구름을 헤치고 법운(法雲)에 올라 자애의 구름으로 삼천 세계를 고루 덮을 것을 곧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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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엄곡기(嚴谷記)
 

비구니 화엄곡(華嚴谷)이 그가 사는 곳에 ‘엄곡(嚴谷)’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초선사(超禪師) 무학(無學)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기문으로 하려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내가 들으니, 화엄종은 원만한 교법(敎法)으로 온갖 덕(德)을 갖추어서 한 종파를 열었다고 한다. 넓은 것도 가냘픈 것도, 큰 것도 미세한 것도, 트인 것, 막힌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유성(有性)ㆍ무성(無性)과 유형ㆍ무형과 번뇌와 해탈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돌아가서 터럭만한 작은 차이도 없다고 한다. 하물며 남녀상(男女相)의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학설은 나는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니 우선 일상사로 말하겠다. 일어나고 앉는 것이 때가 있고, 음식에 절제가 있는 것은 일상생활의 근엄이요, 참화(參話 화두에 참여하는 것)에 법도가 있고, 축성(祝聖)에 규범이 있는 것은 안과 밖에 있어서의 근엄이며, 여러 사람이 모여 있거나 홀로 행하거나 오로지 몸을 정결하게 가질 것을 마음먹고 조금도 해이하지 않는 것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근엄이다. 적어도 이 세 가지에서 하나도 폐하는 것이 없다면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열 눈이 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키니, 엄하도다.” 하였다. 대체로 마음을 잡아서 반성하여 살피는 것을 엄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즉 이른바 단속한다는 것이다. 엄곡(嚴谷)은 부인이다. 내가 가까이 하거나 또 가르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나옹(懶翁)이 좋다고 하여 화두(話頭)에 참여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모든 복(福)이 장엄하게 오는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화엄종의 53종의 참례인들이 이 밖에 있는 것인가.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다.


[주D-001]축성(祝聖) : 국왕의 장수(長壽)를 비는 선종(禪宗)의 의식(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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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중녕산 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
 

중녕산에 성을 쌓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는 일이다. 고을이 큰 바다 언덕에 위치하여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다. 옛날에는 낙토(樂土)라고 일컬었다. 인종왕비(仁宗王妃)인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가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의 세 임금을 낳아 서로 이어서 왕위에 오르고, 장흥(長興) 고을이 옛날에 비하여 풍년이 잘 들었다. 군(郡)에서 목(牧)으로 승격하였으니, 특출한 것을 극진히 드러내어 표창한 것이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다스리는 일은 간소하여 이름난 어진이와 재주있는 대부들로 조용히 다스릴 뿐 다른 공리심이 없는 자가 많이 이곳의 수령이 되었다. 지정(至正) 경인년 이후로는 일본 섬 오랑캐들이 몰래 침입하여 난리를 일으키고 밤에 왔다가 날이 새면 문득 달아나곤 하였다. 국가에서 사태를 가볍게 여겨 염려하지 않으니, 왜구는 날로 더하고 달로 성대하여 백주 대낮에 침입하여 열흘씩 한달씩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닷가의 민가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번번이 대장을 파견하여 쫓아 보내면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형세는 궁하게 되고 사태는 절박하게 되니, 백성들을 다른 곳에 옮기라는 명이 내렸다.
장흥의 치소가 철야현(鐵冶縣)에 흘러 들어가 붙어 있게 된 해가 기미년이고, 보성군(寶城郡)에 합쳐 들어간 해가 기사년이다. 제후가 나라를 잃으면 다른 제후에게 붙여 있는 것은 비록 예법으로는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곳 출신인 사대부로서 향리에 늙어 은퇴한 자와 뜻있는 아전과 백성 중 거센 자들은 다 마음에 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장흥부는 은대(銀帶) 이상의 관원이 다스리는 곳인데, 지현(支縣)의 지관(知官 수령)에 붙어서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고, 사마귀나 혹처럼 달려 있으니 너무나 부끄럽지 않는가!” 하였다.
금년 봄 2월에 부사 황보공(皇甫公)이 부임하는 수레에서 내리니, 부로(父老)들이 그 사유를 진정하였다. 황보공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안렴사 이원(李原)에게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이공(李公)도 “그 말이 옳다.”고 하고 이웃 고을에 통첩을 내려 장정 3백 50명을 뽑아 보내었다. 1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7일에 준공하니, 성(城)의 높이는 15척(尺)이고, 두께는 6척이며, 주위는 1천 5백 척, 동서(東西) 2칸으로, 문지방과 빗장은 높고 견고하며, 파수병의 경비 소리는 밤에도 끊어지지 않고, 낮이면 나무꾼과 목동에게 열어주어 나가서 일하고 들어와서 휴식하는 데 편하게 하니,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처자를 보양할 수 있고, 북쪽으로 달아나야 하는 위험이 없어졌다. 사대부와 아전과 백성들의 소망이 이제야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봉수(封守)를 굳게 하고 부역을 공급함이 여유가 있었다. 《서경》에 말하기를,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굳게 한다.” 하니 무엇이 불가하리오.
공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절도사 김용초(金用貂) 공에게 알리기를, “인부들이 무기를 가진 것이 없고 바다가 가까우니, 군관(軍官)을 보내어 불의의 변고를 방위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김공이 20명을 보내 왔다. 전농 부정(典農副正) 이운기(李云起), 중랑장(中郞將) 정을충(鄭乙忠)과 김길(金吉), 낭장 양세(梁世) 등이었다. 고을 사람으로서 공사를 감독한 자는 전(前) 승봉랑(承奉郞) 송원비(宋元庇), 낭장 고적(高迪), 산원(散員) 신득귀(申得貴)ㆍ김을보(金乙寶)ㆍ형방언(邢方彦), 검호군(檢護軍) 고천경(高天景)ㆍ조한귀(曺漢貴)ㆍ고중학(高仲鶴), 영동 정(令同正) 임보(任寶)ㆍ위언(魏彦)ㆍ오보만(吳甫萬)ㆍ조생철(曺生哲)ㆍ장용세(張龍世)ㆍ김성기(金成奇)ㆍ위의(魏宜)ㆍ강인덕(姜仁德)이며, 호장 신봉한(申奉閒)은 공급을 주관하였고, 호장 오인교(吳因敎)와 문기관(文記官) 조수(曺修)가 공사의 전체를 관장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은 완성하였으나, 식량이 또 급하다.” 하였다. 그런 까닭에 쌀 20석을 의재(義財)로 하여 아전으로 하여금 교대로 주관하게 하고, 원 물품은 그대로 두고 이식만 사용한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사신과 빈객을 공궤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도 아울러 기문에 쓴다.
나는 현릉(玄陵)의 재상으로서 위조(僞朝) 에 벼슬하는 실신(失身)을 범하였으니, 죄가 마땅히 베임을 받아야 할 것인데, 금상께서 옛일로 의논하여 교서를 내리시어 서인(庶人)이 되게 하고, 또 전례대로 편의대로 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내일이면 마땅히 서울로 가야 할 것이다. 황보공(皇甫公)이 기문을 청하므로 곧 이렇게 쓴 것이다. 공(公)은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여 백성들이 즐겁게 따른다. 그러므로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주D-001]은대(銀帶) : 종 6품 이상 경 3품까지의 관원이 받는 은으로 만든 띠.
[주D-002]위조(僞朝) : 고려 공민왕의 후계자인 우왕(禑王)과 그의 아들 창왕(昌王)을 신돈(辛旽)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동문선 제76권   
 
 
 기(記) 이숭인
 
 
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판삼사사(判三司事) 한산(韓山) 목은 선생(牧隱先生)이 숭인(崇仁)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대덕(大德) 경술년 7월 초 3일에 나의 조부 정읍부군(井邑府君)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先君) 가정문효공(稼亭文孝公)께서 당시 13세였으나 초상과 장사를 잘 치르셨다. 지정(至正) 경인년 10월 2일에 조모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이 예(禮)를 다하여 장사하고 중을 청하여다가 시골의 절에서 불경(佛經)을 읽었다.
선군이 항상 탄식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하셨는데, 좌올남산총공(坐兀南山聰公)이 선군에게 말하기를, ‘공이 지금 진실로 우리 불법으로써 선고(先考)와 선비(先?)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면, 어찌 1부 장교(藏敎)를 간행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불법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선군이 즉시 부처의 초상(肖像)을 향하여 기원을 세웠다.
다음해 신유년 정월 초하룻날 선군이 불행하게도 어머님의 상복을 입은 가운데서 돌아가셨다. 내가 중국에서 분상(奔喪)하여 와서 총공(聰公)을 청하여 불경을 읽었다. 선군의 입원(立願)을 언급하였으나, 내가 상중에 있으므로 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상복을 벗은 뒤에 요행히 세과(世科 조상의 은덕으로 얻는 벼슬)에 들어 이름이 관원의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 오직 직무에 충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선군이 입원(立願)한 불사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총공(聰公)이 여러번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선대인의 입원(立願)을 어찌 어길 수 있습니까.’ 하였으나, 일찍이 답장은 하지 않고 스스로 상심할 뿐이었다.
홍무(洪武) 신해년 9월 26일에 선비 김씨(先?金氏)가 또 병으로 돌아가셨다. 상기(喪期)가 겨우 끝났을 때에는 내가 병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갑인년 9월 23일에 현릉(玄陵)이 모든 신하들을 버리고 승하하셨다. 내가 삼가 생각하니 우리 선군(先君)은 현릉(玄陵)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의 옛 신하로서 오랜 세월을 섬겼으며, 나는 현릉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재상의 관부(官府)에 올랐으니 우리 부자가 입은 은택은 지극히 넉넉하였지만 일찍이 터럭만한 보답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기미년에 총공(聰公)이 마침 산중에서 내려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제 나의 나이가 벌써 74세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공과 더불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선대인(先大人)의 말씀이 또렷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공은 기억하십니까.’ 하니, 내가 더욱 마음으로 아파하여 말하기를, ‘위로는 선왕의 명복을 빌고, 아래로는 선고(先考)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의 병이 나았을 때, 왕명을 받들어 나옹(懶翁)의 탑명(塔銘)을 지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스스로 계획하여 보니 내 힘으로는 부족하였다. 힘입어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옹(懶翁)의 무리뿐이기에 즉시 편지를 보내어 의사를 말하였다. 호(號)가 무급(無及), 수봉(琇峯)이라고 하는 두 중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격려하였다.
경신년 2월부터 인연을 따라 희사(喜捨)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각참(覺?)은 순흥(順興)에서, 각잠(覺岑)은 안동에서, 각홍(覺洪)은 영해(寧海)에서, 도혜(道惠)는 청주에서, 각연(覺連)은 충주에서, 각운(覺雲)은 평양에서, 범웅(梵雄)은 봉주(鳳州)에서, 지보(志寶)는 아주(牙州)에서 선행을 권장하였다. 닥나무가 변하여 종이가 되고 검은 것을 녹여 먹을 만들었다. 신유년 4월에 이르러 《경률론(經律論)》을 인쇄하여, 9월에 표지(表紙)를 꾸미고, 10월에 각주(覺珠)가 이금(泥金)으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이 누런 책가위를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函)을 만들었다. 아침저녁으로 몇 되, 몇말의 곡식을 빌어다가 여러 중들을 밥 먹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은 국신리(國?里)에 사는 노파 묘안(妙安)이었다. 임술년 정월에 화엄종 영통사(靈通寺)에서 거듭 교열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군(驪興郡) 신륵사에 이르니 나옹(懶翁)이 입적한 곳이다. 화산군(花山君) 권공희(權公僖)가 제목(題目)을 주관하여 다시 여러 시주(施主)들과 더불어 시재(施財)하고, 동암(同庵) 순공(順公)이 공사를 감독하여 드디어 절의 남쪽에 2층 집을 세우고 크게 단청을 장식하였다. 준공하자 인쇄한 《경률론(經律論)》을 그 안에 넣어 간직하였다.
5월에 전경(轉經)하고, 9월에 전경하였으며, 금년 들어 계해년 정월에 또한 전경하였다. 대략 1년에 세 번 전경하는 것은 일정한 규정으로 한다. 가운데에 꽃동산을 만들고 사람의 키만큼 큰 비로자나(毗廬遮那) 불상 한 위(位)를 두었다. 당성군(唐城君) 홍공 의룡(洪公義龍)이 죽은 딸을 위하여 지은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한 위(位), 강부인(姜夫人) 화연(化緣)이 지은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한 위가 있어서 사중(四衆)의 무리들에게 우러러보고 예배하는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 아, 30여년의 오랜 세월을 지난 뒤에 선군(先君)의 입원(立願)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 경축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큰 공(功)을 미루어 영원히 임금의 장수(長壽)와 나라의 복(福)을 비는 데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중들이 비석을 세워 장래에 가르침을 보이려 한다.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기문을 쓰라.” 하였다.
숭인(崇仁)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곧 기문을 써서 말하기를, “부처의 도(道)가 청정(淸淨)하고 고묘(高妙)하여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않고 만물에 초연하게 뛰어났으므로, 현자와 지자(智者)들은 본래부터 이를 즐거워하였다. 그 말에는 또 소위 복전이익(福田利益)이라는 설(說)이 있다. 여기에서, 충신이나 효자로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자라면 그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 귀의(歸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불서(佛書)가 세상에 크게 전파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이미 일으키고 목은 선생이 계승하여 마침내 이 법보(法寶)를 이루어 임금과 어버이에게 복(福)을 받드는 이것이 곧 충신ㆍ효자가 임금이나 어버이를 위하여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다는 것인가. 아, 누가 신하 아니며, 아들 아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천만세에 이르기까지, 그 하늘같이 존경하는 분에 대하여 사모하고 발원(發願)하려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아니하니, 내가 감히 즐겁게 글을 쓰지 아니하겠는가. 저 사중(四衆)의 무리 중 재물을 바쳐 조력한 자는 그의 성명을 모두 비석의 뒷면에 적어둔다.” 하였다.


[주D-001]복전이익(福田利益) : 밭에 곡식을 심으면 몇 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부처를 공양하면 복을 받는다는 설.

 

동문선 제79권   
 
 
 기(記)
 
 
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건문(建文) 원년 기묘년 겨울 11월 신미일에, 도승지 신 문화(文和)가 왕명으로써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신(臣) 근(近)을 불러서 전지(傳旨)하기를, “관산 성등암은 고려 태조 왕씨가 처음 설치한 것이다. 내가 잠저(?邸)에 있을 때에 이 집을 신축할 것을 도모하여 이제야 완성하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시주하였으니, 너는 이 사실을 글로 지어 영원히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臣) 권근이 엎드려 영을 받고 물러가 삼가 암자의 옛 문헌을 상고하였다. 오관산 서쪽 봉우리에 창같이 날카롭게 우뚝하게 선 돌이 있는데 사람들이 창바위라 한다. 그 산등성이는 이리 꾸불 저리 꾸불하다가 서쪽으로 꺾여서 남쪽으로 송악산과 닿았다. 왕씨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왕도를 송악산 남쪽에 건설하였는데, 술사(術士)가 진언하기를, “창바위가 우뚝 선 곳은 지맥이 둘째 번 순룡(順龍)의 폐간에 해당되는데, 하늘을 찌르듯이 서 있으니 이것은 삼재(三災)가 일어날 곳으로, 만약 삼재를 없애려면 마땅히 석당(石憧 돌로 만된 깃대)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양지쪽 벼랑의 큰 돌 위에다가 돌기둥을 사방에 벌여 세워 집모양 같이 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여 창바위의 재앙을 누르고, 또 명군(明君)이 계승하고 충신이 끊임없기를 발원하였던 까닭에, 왕씨는 대대로 태부시(太府寺)에게 그 등유(燈油)를 공급하게 하였다.
치화(致和) 무진년에 시중 윤석(尹碩)은 충숙왕 당시의 정승이었고, 지순(至順) 경오년에 시중 한악(韓渥)은 충혜왕 당시의 정승이었는데, 모두 양부(兩府 문하부〈門下府〉와 밀직부〈密直府〉)의 제공(諸公)과 함게 그 기름값을 보탠 것이 시주판(施主板)에 열명(列名)하였다. 홍무(洪武) 계해년에 시중 조민수(曺敏修) 등이 또 양부(兩府)와 함께 쌀 또는 베를 내어서 그 비용을 대었는데 한산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기록하였고, 첨서(簽書) 유순(柳珣) 등은 성등(聖燈)을 위해서 집을 지었다. 성등(聖燈)을 왕씨 대대로 이처럼 소중하게 취급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원량(元良)의 덕과 용지(勇智)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오직 충성과 효도로 태상왕(太上王)을 보좌하여 어려움이 많았던 나라를 널리 구제하였고, 천명에 순응하여 조선 억만 년의 왕업을 열어놓았다. 일찍이 잠저에 있을 적에 어질면서도 형장(兄長 정종)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인심이 모두 돌아왔지만 더욱 겸손한 덕을 숭상하여 실행하는 데 법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오직 국가에 이로움이 있으면 이것을 도모하고 힘쓰셨다. 이에 무인년 초봄에 이 암자를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가을 8월에 이르러 드디어 태상왕(정종)의 명을 받들어 보위(寶位)에 나아갔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 정사와 교화를 다시 새롭게 하여 모든 치적이 다 빛나고 사방에 근심이 없었으니, 이 성등의 공효가 있었다는 것도 대개 거짓은 아니었다.
새로 지은 불당 세 칸에 새로 그린 석가 삼존(釋迦三尊)ㆍ16나한(羅漢)ㆍ십대 제자(十大弟子)ㆍ오백 성중(五百聖衆)이 모여드는 화상(?象)을 걸었고, 동쪽에 붙은 익랑(翼廊) 3칸은 중들이 우거(寓居)하고, 서쪽에 붙은 3칸은 부엌으로 사용한 곳이며, 밭 5백 결(結)과 노비 19명을 바친 것은 성등을 계속하여 영원토록 식륜(食輪)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 유신(維新)하는 조정을 만나 무릇 법사(法事)를 빛나게 하는 일이 더욱 원만하게 갖추어질 것이니, 그 국가에 이익됨은 더욱 크고 영구할 것이며, 성수(聖壽)의 장원함과 국운의 영구함이, 이 산과 이 성등과 함께 한없이 전해지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 권근은 공경히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아룁니다. 이달 기해일

 


동문선 제80권   
 
 
 기(記) 권근
 
 
상주 풍영루 기(尙州風詠樓記)
 

상주(尙州)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이었는데 신라(新羅)에 붙음으로부터 큰 부(府)가 되었다. 지금까지 천여 년 동안에 수려한 산천과 번성한 인물이 온 도(道)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다. 그러나 일찍이 누대(樓臺)와 정사(亭?)를 설치한 것이 없었으니, 그 민풍이 순박함을 상상할 수 있다.
홍무(洪武) 경술년에 목사(牧使) 김남득(金南得)공이 공해(公?)를 중건한 다음 그 동북쪽에 과원(菓園)를 설치하고 그 가운데에다가 비로소 정자를 지었는데, 나의 좌주였던 한산 목은 상국(韓山牧隱相國)이 정자 이름을 풍영(風詠)이라 하고 이어 기문을 지었으며, 해원(解元) 한 성산 도은(星山陶隱)은 시를 남겼는데 두 공은 모두 일세의 문장으로서 큰 솜씨였으니 이 주(州)의 성가(聲價)는 그 무게를 더하였다.
경신년에 왜구가 침범하여서, 관사(官舍)와 민가가 병화를 만났다. 다음해 신유년에 반자 전이군(田理君)이 비로소 주성(州城)을 쌓고 남은 백성을 불러 모으며 옛 터대로 별관(別?)을 창건하여서 사명(使命)을 접대하였다. 경오년에는 목사(牧使) 이복시(李復始)공이 또 해사(?舍)를 창건하였으나 정사(亭?)는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목사 송공(宋公)이, 판관 한암(韓岩)공과 마음을 합쳐 다스리면서 민폐를 없애고 이로움을 행하니 풍교(風敎)가 발흥(勃興)하고 인민이 편하였다. 이에 정자를 옛터에 따라 더욱 넓히고 그 위에다가 누각(樓閣)을 일으켰고, 또 목은의 기문과 도은의 시를 써서 모두 예전 모습대로 회복하니 온 고을의 훌륭한 경치가 더욱 증가되었다.
고을 사람인 전 대호군(前大護軍) 김겸(金謙) 공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풍영정(風詠亭)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 두 대유(大儒)의 훌륭한 글을 얻어서 그 광성을 빛나게 하였던 것인데, 중간에 불에 타버렸으나 중건(重建)하지 못하여 오랫동안 고을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던 바였다. 지금 우리 목백(牧伯)은 정적(政績)이 탁월하여 여러 주에서 첫째가 되며, 이 누각을 건립하는 데에도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며칠 안 되어 완성하였다. 사명이 왕래할 적에 등람(登覽)할 곳이 있어 고을 백성 노유(老幼)도 서로 더불어 즐거워 한다. 목은과 도은은 그대의 스승이요 벗인데 어찌 한 마디 아껴서 그 뒤를 계속하지 않으려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풍영이라는 뜻은 정자의 기문에 다 말하였으니, 내 어찌 군말을 하랴. 그 기문에 장절부부(仗節剖符)로서 이 고을 지나가는 자들의 봄옷이 이미 이루어진 때를 만나 화기(和氣)가 넘칠 것 같으면 상주의 백성이 그 얼마나 다행이겠나.”
하였으니, 이것은 이 고을 사람에게 기망(期望)한 것이 매우 큰 것이다. 내 감히 이 점에 대해서 거듭 말한다.
공자 문하 여러 제자가 각각 그 뜻을 말하는데, 모두 섬기고 다스리는 말단적인 일만을 살폈으나, 증점(曾點)만이 바람쐬고 시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겠다 하니, 부자께서 감탄하면서 증점을 허여하였고, 해설하는 자는 요ㆍ순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유연한 가슴속이 하늘과 더불어 같은 체(體)여서 물(物)을 따라 형상을 부여하여 각자 제자리를 얻으면, 그 정사를 시행하는 즈음에 반드시 젊은이는 품어주고 늙은이를 편하게 하며 오는 이를 편하게 하여 항상 조화로운 묘리(妙理)가 있게 되서 화기가 유행(流行)할 것이다. 백성은 밭갈고 우물 파는 것을 편하게 여겨서 호호(??)한 것이 봄바람 속에 있는 듯하여, 다스림의 효과는 바로 큰 조화(造化)와 함께 운전(運轉)할 것이니, 요순(堯舜)의 다스림도 이런 데에 불과할 것이다. 그 원유(源由)를 궁구하면 다만 가슴속에 한 점만큼이라도 사적인 얽매임이 없는 데에 말미암을 것이다.
만약 장절부부한 자가 등람(登覽)할 즈음에 세속의 번다함을 씻어내고 세상의 근심을 없앤다면 뜨거운 것을 잡은 자가 샘에 씻지 않아도 저절로 맑아지고, 번거로운 것을 다스리는 자가 들에 가서 의논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음이 있을 것이다. 부앙(俯仰)하며 수작(酬酌)하는 동안에 풍영의 즐거움을 잠자코 보고 마음에 얻는 것이 있어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이치를 넓히게 되면 그 치화(治化)의 효과는 어찌 크지 않으리.
그 누(樓)에 유람할 만한 훌륭한 경치는, 내 늙었으나 만약 한 번 가서 직접 보고 그 풍경에 임한다면, 마땅히 도은의 뒤를 이어서 읊으리라. 영락 6년 가을 7월 일.


[주D-001]좌주(座主) : 고려(高麗) 때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그 과거의 시관(詩官)을 부르던 말.
[주D-002]해원(解元) : 향시(鄕試)를 해시(解試)라고도 하는데, 해원은 해시에 장원한 사람.
[주D-003]반자(半刺) : 주(州)ㆍ군(郡)의 보좌관, 곧 차석 자사(刺使)란 뜻이다.
[주D-004]장절부부(仗節剖符) : 장절은 절월(節鉞)을 잡았다는 뜻으로, 곧 어사(御使)ㆍ체찰사(體察使)ㆍ안찰사(按察使) 등이고, 부부는 인부(印符)를 쪼갠다는 뜻인데, 수령 방백(守令方伯)이 부임하게 되면 나라에서 대나무에다가 표를 하고 쪼개서 한쪽은 나라에 두고 한쪽은 수령 방백에게 주어서 증거로 한 것인데, 수령 방백을 말한 것이다.
[주D-005]봄옷이 …… 때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기의 뜻을 말하면서, “늦은 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관자(冠者) 5ㆍ6명과 동자(童子) 6ㆍ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쏘이다가 읊조리면서 돌아오겠다.” 하였다.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
[주D-006]호호(??) : “왕자(王者)의 백성은 호호한 듯하다.” 하였고, 주자 주(朱子註)에는 호호는 넓고 커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모양이라 하였다. 《맹자 진심장(盡心章)》

동문선 제86권   
 
 
 서(序)
 
 
익재 선생 난고 서(益齋先生亂藁序)
 

이색(李穡)

원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사해(四海)를 통일하니, 삼광(三光) 오악(五嶽)의 기운이 함께 뭉치어 넓고 크게 움직이고 뻗치어, 중원과 변방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 세상을 주름잡는 재주가 그 사이에 섞여나서 무르익고 성한 것에 젖어들어 그 정수를 취하여 문장으로 펼쳐내어, 일대의 정치를 빛나게 장식하였으니 거룩하다 이르겠다. 고려 익재 선생은 이때에 나서 나이가 20이 되기 전에 문장이 벌써 당세에 유명하여 크게 충선왕(忠宣王)이 중히 여긴 바 되고, 시종(侍從)으로 연곡(輦穀)의 아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대유(大儒) 진신(搢紳) 선생으로 목암(牧菴) 요공(姚公)ㆍ염공(閻公) 자정(子靜)ㆍ조공(趙公) 자앙(子昻)ㆍ원공(元公) 복초(復初)ㆍ장공(張公) 양호(養浩)가 모두 왕의 문하에 종유하므로, 선생은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게 되어, 보는 것이 바꾸어지고 듣는 것이 새로워져 격려(激勵)되고 변화되어, 진실로 고명하고 정대한 학문을 궁극하였다. 또 사명을 받들어 천촉(川蜀)에 가고, 왕을 모시고 오회(吳會)를 구경하여 만여리를 오가는 동안에, 웅장한 산하와 특수한 풍속과 옛 성현의 유적과, 무릇 굉장하고 기절한 구경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일괄(一括)하여 남겨둠이 없었으니, 그 통활하고 호방한 기운은 거의 사마자장(司馬子長)보다 못하지 않았다. 만약 선생으로 하여금 이름을 왕관(王官)에 올리고 제제(帝制)를 관장하며 대각(臺閣)에 오래도록 계시게 하였다면 공업의 성취가 결코 요(姚)ㆍ조(趙) 여러 군자에게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취를 거두고 동으로 돌아와 다섯 임금을 모셔 네 번이나 총재(?宰)가 되었으니, 동국 백성에게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문(斯文)에 있어서는 어찌하랴. 비록 그러하나 동쪽 사람이 우러르기를 태산과 같이하며, 학문하는 선비가 그 누습을 버리고 차츰 정성(正聲)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다 선생의 교화였다. 옛 사람으로서 비록 이름이 왕관(王官)에 오르지 못하였으나 교화가 각각 그 나라에 시행되어 남은 바람이 후세에 떨친 이가 있으니, 저 숙향(叔向)ㆍ자산(子産)같은 이를 어찌 적게 여길 수 있으랴. 천자를 보필하여 천하에 호령하는 것은 어느 누가 사모하지 않겠는가만 이름을 전하고 못 전하는 것은 그에 있지 아니하고 이에 있으니, 무엇을 한탄하리오.
선생의 저술이 매우 많았는데 일찍이 말씀하기를, “선친 동암(東菴) 공께서도 아직 문집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소자(小子)이랴.” 하였다. 그러므로 시ㆍ문에 있어, 지으면 곧 버렸는데 남들이 소장하였다. 선생의 막내아들 대부소경(大府少卿) 창로(彰路)와, 장손(長孫) 내서사인(內書舍人) 보림(寶林)이 서로 수집하여 몇 권을 만들어 목판에 새기기로 의논하고 나에게 서문을 명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선생께서 편찬하신 국사(國史)도 오히려 병란에 분실됨을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편언척자(片言隻字)로 남에게 수장된 것이야 소실될 것을 어찌 의심하랴. 이 몇 권만이라도 불가불 빨리 간행되어야 하겠다. 그대들은 아무쪼록 노력하라. 아, 나야 어찌 문장을 아는 자겠는가만 부자(父子)가 선생의 문생이 되었기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짐짓 소견을 기록하는 바다.” 하였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이색
 
 
설곡시고 서(雪谷詩藁序)
 

하늘이 나의 기호(嗜好)에 후한 것이 어찌 그리 많은가. 지난해 중국 서울에 있을 적에 한 마을 사람 오현윤(吳縣尹)의 집에 당(唐)의 백가시(百家詩)가 있으므로, 그 절반을 빌려서 한 번 내려 읽고, 간혹 또 당세의 이름 높고 재주 있는 경대부의 가집(家集)을 얻어서 읽었는데, 비록 깊고 얕음을 채 알지 못했지만 충분히 스스로 즐길 수 있었다. 동으로 돌아올 적에 당시(唐詩) 십여 질을 행장에 넣어 가지고 와서, 한산(韓山)에서 은거하는 즐거움에 이바지하려 하였다. 그런데 실력 없는 몸이 주상의 지우(知遇)를 입어 직무를 맡게 되니, 능히 음영(吟詠)의 일에 전심을 못해서 스스로 서글프게 생각하였고, 또 전배의 저술을 많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하물며 지금 난리 뒤에 다시 이 일에 뜻을 둘 수 있으랴.
그러나 《급암유고(及菴遺稿)》와 《익재문집(益齋文集)》은 대개 한번 읽을 기회를 얻음으로써 남으로 온 이래 불편한 기분을 상쾌하게 씻었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랴. 동년(同年) 정공권(鄭公權) 보(父)가 자기 선친 간의공(諫議公)의 소작을 기록하여 이름을 《설곡시고(雪谷詩藁)》라 하였는데, 모두 두 권이다. 나에게 주며 그 머리에 서문을 쓰라는 것이다. 내가 설곡의 시를 보니 맑아도 고고(苦孤)하지 않고, 화려해도 음탕하지 아니하여, 사기(辭氣)가 우아하고 심원하여 결코 저속한 글자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득의작을 보면 왕왕 내가 중국에서 보던 경대부(卿大夫)와 더불어 서로 대등하였으며, 동시에 당(唐)의 요(姚)ㆍ설(薛) 제공의 틈에 끼어도 부끄럽지 아니하다. 아, 천하의 갑작스런 난리로써 신축년 중동(仲冬)에 있었던 난리보다 참혹한 것이 어디 있으랴.
이때를 당하여 사람이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어진 자나, 불초한 자를 막론하고, 자기 집 소유물이 아무리 긴요한 것이라도 잠깐 사이에 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죽고 사는 일에 관계된 것이라도 버리고 가서 난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간수하기 힘들고 버리기 쉬운 이 묵은 종이 뭉치야 말해 무엇 하랴. 그 자식된 도리를 생각하면 진실로 차마 못할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공권(公權)이 아니면 나는 감히 보증을 못하며 또 하늘이 나의 기호(嗜好)에 대해 후히 하지 않았다면 난들 어떻게 상란(喪亂)과 파천(播遷)을 겪은 뒤에 이런 즐거운 일을 얻어서 실컷 그 가운데서 헤엄치고 읊조리며 평소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으랴.
비록 그러나 이것이 어찌 유독 나의 다행만 되겠는가. 다른 날에 사가(史家)가 예문지를 만들 때는 장차 이 시집에서 증빙하게 될 것이며, 혹시 예산(猊山) 농은(農隱)의 동문(東文)을 유선(類選)한 것을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역시 이 시집에서 간추리게 될 것이니, 장차 이 시집으로 하여 더욱 오랠수록 설곡(雪谷)의 이름이 더욱 드러날 것이 아닌가. 이 시집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 공권보 때문이니, 아, 공권보는 아들된 도리를 잘했다고 이를 만하다. 선곡의 이름은 보(?) 자는 중부(仲孚)니, 나의 선친 가정(稼亭) 공과 더불어 서로 좋은 사이였고, 나도 또한 공권보를 매우 사랑하는 처지이며, 선업(先業)을 없어지지 않게 하려는 그 뜻도 또한 같으므로 즐거이 서문을 하는 것이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근사재일고후서(近思齋逸藁 後序)
 

원 나라 조정에서 북정(北庭)의 진사(進士)가 고문(古文)으로써 당세에 현달하였다. 마조상(馬祖常)ㆍ백용(伯庸)ㆍ여궐(余闕)ㆍ정심(廷心)같은 자가 더욱 그 중에 뛰어났다. 을유년에 을과(乙科)에 설백요손(?伯遼遜) 공원(公遠)이 남방에 유학하여 나이 20세 전에 과문(科文)을 다 능통하였고, 틈틈이 고문을 전공하여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미 급제해서 한림을 응봉(應奉)하여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로 선발되었고, 오랜 후에 숭문감(崇文監)에 승진하여 바야흐로 쓰이게 되었는데, 국정을 담당한 자가 그 부친 회남좌승(淮南左丞) 공과 더불어 원한이 있었던 까닭으로 나가서 선주(禪州)를 다스려서 능리(能吏)로 소문이 있었다. 이윽고 모친상을 만나서 대녕(大寧)에 우거하는데, 그때에 적(賊)이 이미 상도(上都)를 쳐부수고 요서(遼西)로 향하니, 공원은 자제를 이끌고 단기(單騎)로 요수(遼水)를 건너서 고려로 들어왔다. 이미 길을 떠난 수일 후에 적은 대녕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주상은 단본당에서 종유한 연고로 맞아들이고 서로 위안하였다. 면대하게 되자, 예우가 거룩하여 부원(富原)의 전장(田莊)을 주고 개부(開府)의 군(君)을 봉하여 수년 동안 살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 아우 공문(公文)ㆍ 공소(公素)는 그 문고(文稿)가 분산됨을 애석히 여겨 그 시의 기록할 만한 것을 필기하여 두 질을 만들었다가 신축년 병란에 피난가면서 또 잃어버렸는데, 지금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군(金君) 자빈(子贇)이 그 한질을 잿더미 속에서 발견하여 설씨에게 돌려보냈다. 설씨는 회골(回?)의 대족(大族)으로 중국에 들어와 이름난 집안이 되어 과거에 오른 자가 아홉 사람이었으며, 시서와 예의로 수 대를 내렸는데, 공원이 그 영화(英華)를 축적하여 피어나서 떨치고 빛내니, 그 문장이 찬란하여 바로 백용(伯庸)ㆍ정심(廷心)과 더불어 서로 위아래를 따질 만하며, 후세에 전하는 것도 의심이 없다. 그러나 죽기 전에 이미 유실되었고, 유실된 데다 또 유실되어 얼마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역시 슬픈 일이다. 지금 이 원고를 보면 다 젊은 시절의 작품이나 창연(蒼然)히 노련한 기운이 있으니, 장년기에 지은 것은 대개 상상할 수 있다.
그 아들 도관총랑(都官摠郞) 천우(天祐)가 나더러 말하기를, “원고가 보존된 것은 김후(金侯)의 힘이다. 내 형 천민(天民)이 다행히 그 장(長)이 되었으니, 장차 판각하여 진주의 향학(鄕學)에 수장하기로 한다. 청컨대 그 연유를 써달라.” 하므로, 나는 간단히 공의 출처의 대략과 이 한 질이 다행히 보존되었다는 사유를 편말에 기술하여 다른 날에 문류(文類)를 이어받아 이루려 하는 자의 증빙이 되게 하는 것이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기증 유사암 시권 서(寄贈柳思菴詩卷序)
 

군자는 종신의 즐거움이 있나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은 족히 자기 즐거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가함도 없고 가하지 않음도 없으며, 움직이고 고요하며 쳐다보나 굽어보나 부끄러운 생각이 조금도 싹트지 아니하면, 이른바 나라는 것이 담담한 그 가운데 있거니와, 사생과 수요(壽夭)는 하늘이 준 것이요, 길흉과 영욕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다 나는 아닌데, 내가 그로써 기쁘게 여기고 두렵게 생각한다면, 이는 정(情)이 이기는 것이다. 정이 이기게 되면 천리는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인데, 이러고도 내가 종신의 즐거움이 있다 한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다.
벼슬을 시키는 것은 나를 귀하게 하자는 것이요, 녹을 주는 것은 나를 부자 되게 하자는 것이니, 나를 부자 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궁하게 할 수 있고, 나를 귀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천하게 할 수 있으며, 내가 감히 그 명령을 듣지 아니하지 못하는 것은 그 권리가 저쪽에 있고 내게 없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본시 내게 없는 것을 하루아침에 나에게 주어서 비록 더할 수 없는 부귀를 하게 될지라도 나는 기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기뻐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못하거늘 하물며 종신토록 즐길 수 있는 것이 되겠느냐. 이른바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저만이 스스로 아는 것이므로, 아비가 자식에게 줄 수도 없고 남편이 아내에게서 빼앗지도 못하게 된다. 무릇 천하의 지극히 친밀한 사이는 부자와 부부같은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서로 주고 빼앗을 수 없으니,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알기만 할 것이 아니라 또 실천을 한다면 반드시 밖에서 오는 근심이 이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사암(思菴) 선생은 대개 가까이 보는 바로 말하면, 서울에 거한 지 11년에 동배들이 그 높은 행실을 허여하고, 국정에 간여한 14년에 같은 조관(朝官)들이 그 넓은 도량에 굴복하여 포의(布衣)로 말미암아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또한 성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털끝만큼도 만족히 여기는 뜻이 말과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거처하는 것이나 그 입고 먹는 것을 보고 더불어 종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당시의 부귀한 자들이지만 그 외모를 보면 야인 시절과 같으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으로써 즐거운 것을 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수십 년 간 우뚝하고 빛나다가 능히 그 만절(晩節)을 지키는 자가 대개 적은데, 선생은 진퇴에 조용하여 벼슬하고 안 하는 것을 영화롭고 욕되게 여기지 아니하여 지난날 조정에 있을 적엔 그 도가 시행됨을 즐거워하였고 지금 농촌에 있어선 그 몸의 온전함을 즐거워하니, 몸이 온전하며 도(道)도 또한 온전하다. 지난날에 구름과 물이 흐르듯 처신하여 이미 자취를 남기지 않았으나, 유독 그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오랜 즐거움과 더불어 잠깐이라도 잊지 않았다. 만약 잊을 수 있다면 어찌 내가 말한 즐긴다는 것이 되겠는가.
성균 사예(成均司藝) 강자야(康子野)는 선생의 문인이다. 장차 제공들에게 시를 얻어서 은거의 도움이 되게 하려 하는데, 내가 선생을 깊이 아는 까닭으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나는 그 대강을 말한 것이다. 장주(莊周)는, “공허(空虛)에 사는 자가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문득 기쁘다.” 하였는데, 하물며 내 글이랴. 그는 반드시 격절(擊節)하여 감탄하기를, “서로 알아주는 지기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다.” 할 것이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송 양광도 안렴 한시사 서 홍도(弘道) (送楊廣道按廉韓侍史序)
 

내가 어렸을 적에 산중에서 글 읽기를 좋아해서 그 옛날 노닐던 곳은 역력히 헤아릴 수 있는데, 금곡(金谷)에서 밥을 구걸하던 일이 더욱 잊을 수 없다. 현 사헌(司憲) 한시사(韓侍史)ㆍ민부(民部) 장의랑(張議郞)과 나, 세 명이 책을 짊어지고 해중(海中)에 있는 교동(喬桐)의 화개산(華蓋山)에 들어가 보니, 그곳은 외롭게 동떨어져서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오래 묵으려고 했다. 그러나 산중이라 배가 주려서 있을 수가 없어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배[舟] 안에서 서해의 여러 산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평주(平州) 남쪽 모란산(牧丹山)도 옛 사람이 글 읽던 곳이니, 그곳으로 가보자.” 하여, 드디어 장의랑에게 부탁하여 돌아가서 두 집을 보호하라 하고, 뱃사람에게 간청하여 서해안으로 내려서 갈대밭으로 6, 7리를 가자, 해가 저물고 다리 힘도 더 계속할 수 없어 금곡(金谷) 역사(驛舍)의 주인에게 밥을 빌어먹었으니, 한때 피곤에 지쳐 구걸하던 형상은 지금도 생각할수록 우습기만 하다.
그러나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말씀이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능히 감추려 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주인도 알고 후히 대접한 것이다. 옛날의 군자는 동심인성(動心忍性)하여, 모두 한때의 궁액(窮?)을 통하여 평생 도움을 얻게 하였으니, 나 자신의 처신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어찌 높은 수레에 네 마리의 말을 몰고 가는 것과, 옷자락을 무릅쓰고 짚신을 끄는 것으로 영화롭고 욕됨을 삼았겠는가.
처음 한시사(韓侍史)와 더불어 함께 신사년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계사년에 또 함께 급제하였다. 나이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고 학문과 문장도 내가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지조는 승상(丞相)과 봉후(封侯)의 영예라도 또한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오직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는 것을 더럽게 여길 뿐이다. 이 때문에 나는 요행히 벼슬을 얻은 이래로 일찍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군은 오히려 말직에 맴돌면서 그대로 종신할 것같더니 지금은 양양하게 대중(臺中)에 들어가 시사(侍史)가 되었으니, 역시 때를 만났다 이를 만하다. 저 역사(驛舍)에서 밥을 빌던 날에 비하면 환경이 달라졌다 이를 수 있는데, 우리 두 사람이 지키는 바도 또한 변함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무릇 선비가 조정에 서서 지위의 높고 낮음과 녹의 후하고 박함을 묻지 말고 그 뜻을 행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인데, 시사(侍史)는 탄핵을 주로 하여 위로 군상(君上)의 득실을 다투고 아래로 재상의 시비를 힐난하며, 온갖 관원이 바람에 쏠리듯 하여 감히 우러러보지를 못한다. 안렴사(按廉使)는 또한 중대한 소임이니, 임금의 대리로 산천에 제사하며 풍속을 관찰하고, 상과 벌을 자유로 결단하므로 수령들이 떠받들기를 더욱 삼가 사소한 한 가지 음식이라도 반드시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살피며, 감히 조금도 그 뜻을 거슬리는 것이 없다. 이러고서 능히 자기 주장대로 시행되는 것이 없다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시사가 이 두 가지 책임을 겸하였으니, 반드시 스스로 힘쓰는 바가 있을 것이다.
조정의 사대부가 시를 노래하여 그 떠나는 길을 아름답게 하자, 시사의 말이, “서문은 반드시 목은(牧隱)이 해야 내 뜻에 맞을 것이다.” 하였다. 나는 글짓기를 기뻐하지 않으며 짓는다 해도 또한 졸한 것은 시사가 아는 바다. 그러나 반드시 내 글을 얻고자 하는 것은 내가 아유(阿諛)하지 않음을 아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 노닐던 일을 서술하여 그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이 이와 같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송 경상도 안렴 송도관 서 명의(明誼) (送慶尙道按廉宋都官序)
 

백성을 장양(長養)하는 자는 점잖은 어른이라야 하는 것이니, 조정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절(使節)을 내세워서 사방을 순시하는 데도 그 사람을 중하게 보지 않아서는 아니된다. 풍속의 아름답고 악한 것을 안찰해서 표창하고 규탄하며,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염탐해서 권장하고 징계하나니, 이는 형(刑)과 상(賞)이 그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무릇 형과 상의 권리를 어찌 하루아침에 그 적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줄 수 있겠는가.
국가가 경기(京畿)로부터 밖으로 8도를 세워 부ㆍ주ㆍ군ㆍ현이 바둑판 벌리듯이 둘러 있으므로 해마다 봄 가을에 조신(朝臣) 8명을 뽑아서 나눠 보내는데, 그 사람이 명예를 가까이 할 마음이 있으면 백성이 반드시 근심을 품게 되고, 그 사람이 관용이 있으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게 된다. 조정이 이와 같은 사정을 알아서 매양 이 선택을 중히 여기니, 그에 걸맞는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얻을 수가 없다.
지난날 내가 일찍이 양부(兩府)에 참례하여 이 선택에 대한 의논을 같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도관 송군이 언제나 그 선택에 끼어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도관은 태재(泰齋) 상공(相公)과 인친(姻親)관계가 있다 해서 반드시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혐의를 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천거하는 자가 날로 많아서 그 형세가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私)가 공(公)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도관은 근후하여 어른다운 기풍이 있고 더구나 이재(吏才)에 장점이 있다.
경상도는 옛날 신라의 전경(全境)으로 산천과 풍기가 쌓이고 쌓여 새어나가지 아니하였으니, 훌륭한 풍습이 아직도 보존된 것이 있다. 비록 땅덩이가 크고 일이 많다지만 그러나 백성이 부리기에 용이하면 일도 효과를 거두기 용이한 것이니, 다른 도는 이에 앞설 수 없다. 도관이 오래 등용되지 못하다가 등용되자 이 도를 얻었으니, 나는 아주 기뻐하는 바다. 큰 고기가 자유롭게 노닐자면 큰 강이라야 하고, 옷을 만드는 직공이 좋지 못하면 한 필의 비단만 애석하게 되는 것이니, 이 사람에 이 도가 서로 맞지 않은가. 유독 나의 기쁨만 대단할 뿐 아니라, 일시의 사대부가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그 떠나는 길에 노래하는 자가 물밀듯이 끊임없으며 그 편 머리의 서문은 반드시 내 글로 하게 한 것은 도관의 뜻이다. 도관은 나와 대면을 못했으나 그 뜻을 내게 통한 자는 나의 동료 김군 백언(伯誾)이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송 강릉도 안렴 김선생 시 서(送江陵道按廉金先生詩序)
 

천지가 생긴 이래로 청명(淸明)한 기운과 탁란(濁亂)한 기운이 서로 그 사이에 녹았다 자라났다 하므로, 비록 호걸의 선비라도 확고하여 변하지 않는 자가 매우 적다. 이러므로 다행히 청명한 기운과 더불어 서로 태평한 세상을 만나게 되면, 나서는 성현이 되고 죽어서는 명신(明神)이 되며 풍성(風聲)이 시대와 부합하여 그 유택이 그지없다. 그러나 불행히 탁란한 기운과 더불어 서로 쇠하여 비색한 말세에 부딪치면 움직일수록 화가 따라서 얻는 것이 잃는 것을 당하지 못하며, 그저 생겨났다 그저 죽게 되나니, 또한 너무도 슬픈 일이 아니냐. 나는 이것을 생각한 적이 대개 오래였는데 나와 뜻을 같이한 자는 두어 사람에 불과하니 영가(永嘉 안동) 김씨의 형제가 그중에 하나인데 백씨의 자는 경지(敬之)요, 제씨의 자는 중현(仲賢)이다.
총명하여 놀라운 재주가 있는 것은 두 분이 동일하나 제씨는 역적 신돈(辛旽)의 발호하는 날을 당하여 능히 그 영특하고 예리한 기운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따금 사용하여 분연히 맨손으로 맹수(猛獸)를 치려 들고, 빈주먹으로 날랜 칼날을 제어하려 하다가 마침내 그 화를 입어 그 목숨을 떨어뜨렸고, 경지는 조용히 들어앉아서 물(物)에 거슬리지 않고, 깊이 공자의 유교에 맛을 들여 그 강령과 조목이 다 《대학(大學)》의 한 책에 있다 하고, 아침저녁으로 정말하게 체를 받아 사변(事變)에 수응하는 것도 한결같이 이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이른바 ‘스스로 만족하다.[自慊]’는 것에 있어서도 이미 여한이 없으니, 내게 있는 기운을 배양하여 저 기운에 녹아나지 않게 된 까닭을 대개 알 수 있다.
지금같은 경화(更化)에 미쳐서는 조정이 엄숙하고 화평하여 이 나라의 물은 다 무럭무럭 생기가 있게 되자, 경지는 으뜸으로 묘당(廟堂)의 공선(公選)에 응하여 강릉(江陵)의 안렴을 맡아서 한 도의 명령을 전제하게 되었으니, 선비의 더할 수 없는 영광이다. 강릉도는 백성이 순후하고, 일이 간편하며 기절하고 굉장한 경치가 천하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안렴하는 자가 얻기를 원하고 즐거이 취임하는 곳이다. 그런데 경지 자신은 보기를 평소같이 하여 근심도 기쁨도 안색에 나타내지 아니하니, 자못 이른바 확고하여 변하지 않는 자가 아니랴. 조정의 사대부로서 그 떠남에 앞서 노래한 이들도 반드시 경지의 존재가 이러한 줄은 모두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는 바를 서술하고 거듭 고하는 것이다. 주상께서 바야흐로 학을 흥기하여 교화를 앞세우고 형명(刑名)을 뒤로 하지만 그러나 유술(儒術)의 공효는 나타나지 않은 적이 오랜지라, 세상이 오히려 오활하다고 헐뜯고만 있는 현실이다. 선생이 이미 《대학》에 밝다는 칭도를 받았고 성균 교관(成均敎官)을 거쳐서 안렴사가 된 것도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더욱 힘쓸지어다. 나는 장차 눈을 씻고 학문의 실효가 있기를 기다리겠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전등록 서(傳燈錄序)
 

금상 21년 봄 정월에, 판조계종사(判曺溪宗事) 신 각운(覺雲)이 상언(上言)하기를, “전등록은 선학(禪學)의 지남(指南)이온데, 판본이 병화에 불타서 손으로 초하기가 매우 어려운데다 지금 전혀 묵묵히 앉아 있는 것만을 힘써 만일의 성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윽이 염려되는 바는 이치를 말하는 자마저 없어지게 되면 이 도는 더욱 어두워질 것이오니, 이를 중간(重刊)해서 널리 보급하여 학자에게 이바지하게 하여 주시길 비옵니다.” 하니, 주상은,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에 광명사(廣明寺) 주지(住持) 경예(竟猊), 개천사(開天寺) 주지 극문(克文), 굴산사(?山寺) 주지 혜식(惠湜), 복암사(伏巖寺) 주지 탄의(坦宜)가 그 일을 관계하게 되었으니, 모두 주상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재목을 구하여 각장(刻匠)을 불러들여 일을 시작하게 되자, 운(雲)은 또 상언하기를, “신의 종문(宗門)의 지극한 영광이온데, 편 머리에 사실을 기록하여 두지 아니하면 후일의 증빙이 될 수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문신에게 하명하시어 이 일을 기록하게 하여 주소서.” 하자, 드디어 신 이색(李穡)에게 명령하게 되었다. 그즈음에 색이 모친상을 당하여 조정을 떠났다가 이듬해에 기복(起復)되어 올라오니, 운이 와서 글을 독촉하며 이르기를, “공역이 이미 끝났다.” 하였다.
그 이른바 《전등록》이란 책을 구해서 읽어보니, 연호인 ‘경덕(景德)’으로 그 제목의 머리에 붙였으며, 한림 학사 양억(楊億), 병부 원외랑 이유(李維), 태상 승(太常丞) 왕서(王曙)가 조서를 받들어 함께 재정(裁定)을 가하고 버리고 취하게 된 경우를 매우 자세히 서문에 썼다. 《송사(宋史)》의 태중(太中) 상부(祥符) 2년의 글을 상고해 보니, 이르기를, “소주(蘇州) 승(僧) 도원(道元)이 불조(佛祖) 이래 명승(名僧)의 선화(禪話)를 찬하여 《전등록》 30권을 만들어서 올리기로 명하여 목판에 새겨 선포하게 하였다.” 하였고, 양억(楊億) 등이 간정(刊定)한 사실은 기재되지 아니하였다. 어찌 사가(史家)가 생략하게 되었던가.
그 제목이 경덕(景德)으로 되었다면 그 《전등록》이 경덕 연간에 이뤄졌는데, 상부(祥符) 연대에 바쳤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가의 실수였을 것이다. 번양 마씨(?陽馬氏)가 저술한 《통고(通考)》에는, “양억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지적하였으니, 양억이 비록 문장의 선비이기는 하나 입후(立后)의 제서(制書)도 오히려 거절하고 초하지 아니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부도(浮圖)에 의탁하여 위서(僞書)를 만들어서 임금을 속이고 세상을 현혹하게 하였던가. 이때에 재상 왕단(王旦)이 국병(國柄)을 담당하였는데 일대의 위인이었다. 그가 죽게 되면서 유명(遺命)이, “머리 깎고 검은 옷을 입혀서 염(斂)하라.” 하였는데, 양억이 한림(翰林)으로 있어 선학에 조예가 깊다는 칭호를 받으므로 이 《전등록》이 진상되자 간행의 명령이 양억에게 미쳤던 것인가.
《책부원구(冊府元龜)》는 역대 군신의 사적이요, 요현(姚鉉)의 《문수(文粹)》는 당(唐)의 문장으로 세교(世敎)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서적이 다 상부 연간에 다뤄졌으나 목판에 각하여 선포하라는 명령이 내리지 않았음을 볼 때, 이 《전등록》이 한때에 소중하게 되었다는 것은 가히 알 수 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는 지극한 인(仁)이 민심에 흡족하고 지극한 도가 물(物)의 밖에 뛰어나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의 별전(別傳)의 묘리에 대한 묵계(?契)가 있는 것은 고루한 선비의 얕은 소견으로 능히 측량할 바 아니다.
운(雲)이 일찍이 금중(禁中)에 있어 이 《전등록》을 담론한 적이 만 1년인지라. 주상은 깊이 그 재능을 아시고 십자(十字)의 법호와 선교(禪敎) 도총섭(都摠攝)을 하사하여 조계도대선사(曺溪都大禪師)를 삼아 내원(內院)에 들어와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능히 성심(聖心)을 체받아 목판에 각하여 선포하였으니, 그 오는 자를 가혜(嘉惠)하고 심학을 넓힌 그 공은 이루 말할 수 있으랴. 무릇 마음을 비유하자면 등불이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맞으면 다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고 등불과 등불이 서로 계속하면 역시 다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니, 우리 국가가 우러러 자광(慈光)과 역수(曆數)의 전함을 힘입는 것이 역시 등불의 다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 신의 이 서문이 망작(妄作)이 아니게 된다. 후일의 학자는 마땅히 복을 비는 것으로써 일을 삼고 한갓 겉치레만 하려 들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화(禪話)에 이르러서는 신이 배우지 못한 바이기로 언급하지 않는다.

동문선 제86권   
 
 
 서(序)
 
 
송 박중서 귀근 서(送朴中書歸覲序)
 

친구가 세력 때문에 합하여 서로 아는 것은 한갓 외면일 따름이고 마음으로써 합하는 것이 바로 의교(義交)다. 그런 연후에야 서로 아는 것이 비로소 지극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박중서(朴中書)와 더불어 아는 것이 지극하다 할 것인가, 혹시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 할 것인가 모르겠다. 중서군이 조정에서 배척을 당하자 돌아가서 대부인을 뵈려 하면서 나로 하여금 그 떠나감에 대하여 서술을 하게 하므로, 나는 다른 말을 방증할 것 없고 그저 군을 아는 것만으로써 질정한다.
중서군이 젊어서부터 조정에 나와서 빛나는 직과 임금과 친근할 수 있는 직을 역임하여 남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물러나오면 아침저녁으로 양친께 문안하고 형제끼리 우애하고 공순함이 성대하여 볼 만하였으나 항상 부족한 바가 있는 듯이 하였다. 대개 조정에서는 자기 직무에 극진할 것을 생각하여 당연히 할 일이면 하지 않음이 없으며,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숙직하여 게으르지 않고 더욱 정성을 다할 따름이니, 써주건 버리건 승진되건 쫓겨나건 무엇이 나에게 간여되어서 족히 영화롭고 욕됨을 삼겠는가 하는 것이 중서의 마음이요, 집에서는 정성껏 엄친(嚴親)을 섬기어 사랑과 공경을 함께 지극히 해야 하나 자당이 멀리 고향에 있음을 생각할 때 어찌 부모가 한 집에 동거하여 우리 형제가 서로 그 아래서 어린양하는 것만 같으냐 하는 것이 중서의 마음이다.
이러므로 지금 배척을 당하게 되어서도 화평하여 평시와 같이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친구들에게 알리고 부형에게 상의한 것이 오직 돌아가서 자친을 뵙는 한 가지 일 뿐이었다. 이는 중서의 이 길이 소장부가 떠나려면 하루의 일력(日力)을 다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요, 평소에 모친의 생각이 간절하였기로 그 돌아가서 뵈올 기회를 얻었음을 기뻐한 것임을 알겠다. 또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나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그 도는 동일하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도를 다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되 그 도를 다한다면, 이는 충효에 다 같이 이름을 세운 것이다. 정자(程子)가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으로써 충(忠)의 뜻을 해석한 연후에 사람이 비로소 효도도 또한 충인 줄을 알았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신하가 되어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은 조정에서의 효(孝)요, 자식이 되어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은 집에서의 충이며, 벼슬하게 되면 기뻐하고 그만두게 되면 성내는 것은 반드시 능히 임금에게 할 바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요, 가까우면 친압하고 멀면 잊어버리는 것은 반드시 능히 어버이에게 할 바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효는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다르지 않고, 충은 벼슬하건 안 하건 간에 변동될 수 없는 것이니, 자기 할 일을 다한 자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있으랴.
내가 중서를 아는 것이 지극한가 그렇지 않은가. 중서여, 돌아가서 나를 아는 것으로 나에게 답해 주기 바란다. 다른 날에 중서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나를 아는 것이 의심할 바 없다. 청컨대, 그로써 서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