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공주·서천 고분군 발굴 의미 오늘날 서울인 한성에 도읍을 두었던 초기 백제(기원전 18년~서기 475년)가 475년 고구려 공격으로 도읍이 함락되자 당시 문주왕이 주저없이 웅진(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겨가버린 정치적 배경은 무엇일까. 금동제 관모자, 금동신발이 출토된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의 4~5세기 백제고분군과 금속제 장신구가 나온 충남 서천군 화양면 추동리 5~7세기 백제고분의 발굴결과는 백제사의 이 묵은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다.
충청도 금강벌에 자리잡은 토착 정치세력의 존재를 암시하는 고분의 화려한 금속제 유물들은 초기 백제정부가 토착세력과 협력하며 통치영역을 넓혀나간 곡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수촌리 백제고분군은 금강 이북 지역세력 수장의 무덤떼다.
출토된 금동신발 금동관모는 곧 고대 왕이나 중앙귀족층만 사용할 수 있었던 최고급 유물로 백제정부가 지역세력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간접지배를 위해 회유하려고 내린 전형적인 하사품(사여품)에 해당한다.
전북 익산 입점리 고분,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 등 전라도 지역세력의 수장급 무덤에서도 나온 관모, 신발유물들과 재질, 모양이 대개 비슷하고, 쌍으로 두 유물을 함께 묻은 특징 또한 같다는 점에서 하사품의 특징은 드러난다.
토착세력이 직접 수입하기 힘든 중국제 계수호(닭머리 모양의 장식의 흑유도기), 청자제품 등이 나왔다는 점도 그렇다.
게다가 이 무덤떼는 천도 전인 5세기초 한성백제시대의 무덤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발굴책임자인 충남발전연구원의 이훈 연구원은 “금속제 호화유물과 중국제 청자가 한성백제기인 4세기후반부터 5세기 중반까지 무덤들 속에서 계속 출토되는 것은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에게 선물을 계속 주며 협력을 모색했다는 의미”라며 “웅진천도를 요구했을 정도로 지방세력이 강성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라고 해석한다.
즉 고구려 공격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왕조를 뒷받침하는 안정적인 지역세력이 공주에 오래전부터 존속했다는 뜻이다.
결국 수촌리 유물은 초기 백제가 충청권 남부까지 통치권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성 함락 뒤 신속하게 공주에 새 도읍을 옮길 정도로 공주 토착세력이 백제 왕권의 배후세력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가 1세기 정도 뒤지는 서천 추동리 고분군의 금제꽃모양 장식, 은제 팔찌 등의 호화 금속 유물들도 주목된다.
역시 지방유력자 부장품인 이들 유물은 천도 뒤인 5세기말부터 6세기 웅진, 사비시기의 것들로 천도 뒤에도 중앙귀족이 썼을 법한 호화 장신구들을 즐겨 선물받을 정도로 지방세력이 건재했다는 증거로 학계는 보고있다.
노형석 기자
충청도 금강벌에 자리잡은 토착 정치세력의 존재를 암시하는 고분의 화려한 금속제 유물들은 초기 백제정부가 토착세력과 협력하며 통치영역을 넓혀나간 곡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수촌리 백제고분군은 금강 이북 지역세력 수장의 무덤떼다.
출토된 금동신발 금동관모는 곧 고대 왕이나 중앙귀족층만 사용할 수 있었던 최고급 유물로 백제정부가 지역세력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간접지배를 위해 회유하려고 내린 전형적인 하사품(사여품)에 해당한다.
전북 익산 입점리 고분,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 등 전라도 지역세력의 수장급 무덤에서도 나온 관모, 신발유물들과 재질, 모양이 대개 비슷하고, 쌍으로 두 유물을 함께 묻은 특징 또한 같다는 점에서 하사품의 특징은 드러난다.
토착세력이 직접 수입하기 힘든 중국제 계수호(닭머리 모양의 장식의 흑유도기), 청자제품 등이 나왔다는 점도 그렇다.
게다가 이 무덤떼는 천도 전인 5세기초 한성백제시대의 무덤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발굴책임자인 충남발전연구원의 이훈 연구원은 “금속제 호화유물과 중국제 청자가 한성백제기인 4세기후반부터 5세기 중반까지 무덤들 속에서 계속 출토되는 것은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에게 선물을 계속 주며 협력을 모색했다는 의미”라며 “웅진천도를 요구했을 정도로 지방세력이 강성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라고 해석한다.
즉 고구려 공격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왕조를 뒷받침하는 안정적인 지역세력이 공주에 오래전부터 존속했다는 뜻이다.
결국 수촌리 유물은 초기 백제가 충청권 남부까지 통치권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성 함락 뒤 신속하게 공주에 새 도읍을 옮길 정도로 공주 토착세력이 백제 왕권의 배후세력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가 1세기 정도 뒤지는 서천 추동리 고분군의 금제꽃모양 장식, 은제 팔찌 등의 호화 금속 유물들도 주목된다.
역시 지방유력자 부장품인 이들 유물은 천도 뒤인 5세기말부터 6세기 웅진, 사비시기의 것들로 천도 뒤에도 중앙귀족이 썼을 법한 호화 장신구들을 즐겨 선물받을 정도로 지방세력이 건재했다는 증거로 학계는 보고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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