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자료실 ▒

유승광 장항발전포럼 발표문

천하한량 2007. 1. 11. 21:17
장항지역 역사 자원의 현황과 활용 방안

유승광(공주사대부고)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장항은 정부가 쓰고 버린 사다리와 같다. 사람들은 사다리를 사용하여 높은 곳을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버린다. 사다리와 마찬가지로 장항도 쓰고 나서 버려진 느낌을 주고 있다. 아니 이제 쓸모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 장항은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서북부와 경기도 일부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한 철도와 항구가 필요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해방 후 정부는 국책사업으로 중화학공업의 육성 차원에서 장항제련소를 지원하였고 급기야는 1965년 장항 항을 국제항으로 승격시켜 장항의 국가적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해방과 산업 환경의 변화로 장항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에서 소외되었다. 그래서 장항은 정부가 쓰고 버린 사다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동안 장항을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장군 국가공단 조성과 아울러 장항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여 왔지만 현재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요즈음 특히 금강 하구둑 개통과 장항선 군산 연결은 장항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하고 있다. 서천과 군산의 직거래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장항은 서천과 군산의 섬과 같은 지역이다. 예전에는 군산을 가기 위한 경유지이었지만 지금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지역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떠나고 생기 없는 건물들만 우두커니 서있다.
이에 오늘날 장항의 문제점을 생각해 본다면 속지 이탈현상으로 인하여 장항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였다고 여겨진다. 즉 장항을 장항답게 만들지 못하고, 경제 활동에 주력했기 때문에 오늘날 장항만이 갖는 장항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장항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정치는 서천을 중심으로 전개하면서 경제, 교육, 문화 활동 등 대부분의 일상생활은 군산 지향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현재 장항에 남아 있는 문화 현상은 경제 활동을 제외하고는 공허한 상태이다.
장항에도 장항 문화가 있다. 단지 이 문화를 형성하는 장항 문화의 주인이 없었을 뿐이다. 그동안 대부분 장항 사람들의 이미지는 문화라는 측면보다는 경제 활동에 주력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이는 지금 살고 있는 장항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장항이라는 도시가 그렇게 만들어 졌다. 서천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인 자본주의가 싹튼 곳이 장항이기 때문이다. 1929년 이후 농지가 없던 장항 주변 사람들은 장항에 가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찾아왔던 것이다. 이때 장항의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의 식민지 정책 밑에서 경제 활동을 추구하는 정책 입안자이기보다는 정책에 순응하는 철저한 식민지 백성의 모습이었다.
이제 장항 문화에 대한 반성과 장항 사람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장항 문화가 필요한 때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장항이전의 역사 자원과 일제 강점기의 역사 자원 대한 현황(임성순, 1996)을 살핀 다음 장항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또한 현재 장항에서 이러한 역사 자원을 어떻게 활용(삼성경제연구소, 2003)할 것인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여 장항의 역사 자원 활용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한번에 지역 발전시키던 시대는 지나갔다. 또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에만 의존하여 지역을 발전시키던 시대도 아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여 지역 발전을 추구할 때 국가도 지도자도 돕게 된다. 이때 장항이라는 독특한 역사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장항 사랑 운동, 문화 찾기 운동을 전개한다면 장항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역사 자원의 현황
1. 장항이전의 역사 자원
1929년 이전의 장항은 갈대만 자라던 지역이 아니었다.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 환경과 백제의 웅진·사비 시대의 군사적인 요충지로 문화적인 근간을 이루고 있던 지역이다. 요즈음에 와서 우리는 이 지역의 문화를 기벌포 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장항에 살면서 그 문화를 모르고 살거나 잊고 살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아쉬운 이유는 장항을 중심으로 한 훌륭한 역사 문화 자원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장항은 지금까지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서천군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그 곳은 바로 장항 장암리 신석기 유적이다(충남대학교 박물관, 1995). 장암리 신석기 유적은 장군공업단지 산업도로공사 중 발견되어 조사 발굴하였다. 조사 결과 빗살무늬토기, 간돌칼 등 신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위치는 장암리 당크매 마을 야산에 있다. 그곳은 바다와 아주 근접해 있어 송림 백사장 환경 체험이나 모일 생일 날 행사와 연계하여 답사 코스 및 선사 인류 체험장(예: 암사동 선사 유적 전시장, 전곡리 구석기 체험장)으로 활용 가능한 유적이다. 지금은 아무 표시도 없이 방치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백제 시대 때부터 제사 터로 추정되는 용당진사가 있다.(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백제 시대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 정부에서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면 백제 시대에도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이 된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단으로 사용되었다(서천군 1929). 용당진사는 1929년 장항을 매립하기 전에는 제련소 전망산과 함께 불쑥 나와 있는 곶으로 금강을 지나가는 선박들의 정보를 얻는데 유리했던 곳으로 추정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 시대에 금강하구를 통하여 오고가는 사신이나 무역선에 대한 무사고를 기원했던 제사 터가 분명하다. 용당진사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전라북도 부안 변산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국립전주박물관, 1995).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신사(神社)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체육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용당진사는 백제 시대 또는 고려 시대 제사 터로 지금처럼 방치할 것이 아니고 금강과 연계한 용당진사를 재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 발전하여 단순히 용당진사의 재현이 아니라 장항 축제 중 하나의 행사로 자리 매김 되었으면 한다.        
다음은 장항 지역의 백제 시대 지명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벌포 문제이다. 요즈음 장항뿐만이 아니라 서천군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매김한 기벌포이다. 이왕 서천 군에서 서천지역의 문화 개념을 기벌포 문화로 설정하였다면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검토를 걸쳐 서천의 문화 마인드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고 구심점이 되어야 할 지역이 바로 장항이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장항을 중심으로 한 기벌포 문화권 개발이 추진 될 때 그 개념이 혼란이 없이 서천 문화를 상징하고 장항의 정체성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기벌포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가 장항에서 개최되어야 한다. 기벌포에 대한 논의는 단순 우리고장의 문제가 아니고 장항(심정보, 1983), 군산(김중규 1998), 부안(전영래,), 안성(김재붕), 당진(박성흥) 등 백제 부흥운동 거점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백강, 주류성, 임존성 등에 대한 논의는 있어 왔지만 기벌포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기벌포를 장항으로 설정해야한다는 주장(심정보, 2003, 서정석, 2000)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에 기벌포에 대한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벌포에 대한 논의를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백제 시대 웅진·사비의 관문으로 나당 연합국의 주 공격로로 언급한 흥수와 성흥의 주장과 소정방의 상륙지점으로 보는 곳이다. 또 하나는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된 후 670년에서 676년까지 7년동안 22회의 전투가 발생한 곳이 다 기벌포이다. 당나라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인 야심을 드러내자 육지에서는 매소성 전투와 바다에서의 사찬 시득이 기벌포 전투를 통하여 당을 축출한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다. 그래서 기벌포는 백제 웅진·사비 도읍기의 문화의 수용과 수출의 관문이라는 의의와 자주적인 삼국통일의 발판이라는 의의를 지닌 장소이기에 의미가 있는 곳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벌포 해전을 기념하려고 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을 주목해야한다. 그는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을 강화하면서 자주 국방을 외치지 않았던가? 그가 이 곳 장항에 기벌포  대첩비를 세우려고 장소를 물색까지 하였다는 구전을 인상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 박정희 대통령이 장항에 기벌포 대첩비를 세우려고 했겠는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투였기 때문이다.
기벌포는 백제 시대 장항의 옛 지명이며 오늘날 장항의 정체성의 실체이다. 기벌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활용이 있어야한다.          
기벌포와 관련하여 가장 확실한 흔적으로는 장암진성을 들 수 있다(국립부여박물관, 1997) 기벌포의 주요 거점은 장암리에 있는 장암진성이다. 지금 남아 있는 장암진성은 조선 중종 때 축성한 성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백제성으로 금강하구를 방어하는 기능을 갖고 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암진성 내에는 장암리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던 당집이 있어 효용가치가 더 높다(유승광, 1993).
장암 진성을 뒤로하는 주봉에 봉화대가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 봉화대의 흔적을 발굴하여 활용하는 것도 장항의 문화를 화려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전망산 아래에는 두꺼비 바위가 있어 우리에게‘있을 때 잘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서천군지, 1989).
또한 모래 찜질로 유명한 송림 백사장이 있다. 송림 백사장은 고려 평장사 두영철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두영철의 유배와 관련한 고려 시대 가사가 일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장항이전의 역사 자원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했던 문화 유산이며 창조적으로 활용하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다.

2. 장항의 역사
지금의 장항 읍내는 1929년 간척지 공사를 하기 전에는 갈대밭이었다. 1929년 일본인 카타끼리(片桐和三)가 중심이 되어 금강변의 갈대 밭을 매립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옥토로 만들었다(阿部薰,1937). 이어 용당산과 후망산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고 매립을 하여 시가지를 만들고 항구를 건설하여 서서히 장항이 만들어졌다. 1931년 8월에는 경남 철도가 개통되고 약진하는 도시의 면모가 갖추어지면서 관공서, 학교, 회사, 공장 등이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35년(소화10년) 2월 장항 제련소에서는 전망산 돌산 위에 높이 100m의 굴뚝을 세우기 위해서 돌산을 깎았다. 그리고 바다를 메우고 벌 땅에 용지를 조성하여 필요한 주요 공장과 용광로 설비가 완료되었다. 그 후 1936년 6월 점화를 시작하였다(엘지금속 60년사 편찬위원회, 1997) 한편 항구 건설에 있어서는 장항 항은 후망산의 돌을 운반하여 수축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드디어 완성되었다. 1938년 서남면의 일부와 마동면의 일부를 합쳐 장항읍으로 승격하였다(총독부 부령 197호 1938년 9. 27).  
이제 장항은 일제의 수탈 기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일제가 장항을 개발하는 속셈은 무엇일까? 첫째, 1899년 개항한 군산 항을 통하여 쌀을 유출하려면 시간과 임금소요가 많게 되자 장항을 개발하여 그 수탈 기지로 삼게 된 것이다. 즉 1918년 일본에서 쌀값이 폭등하여 일본 각처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는 조선 쌀이 요구되었다. 총독부에서는 1920년 조선인들에게 토지를 개량하게 하는 한편, 경종법(耕種法; 작물의 선택 배치 및 심는 순서를 정해 줌)을 만들어 쌀의 증산을 도모하여 한국쌀을 일본으로 유출하였다. 충남일대와 경기일대의 미곡을 경남철도(장항선)를 이용하여 장항에 운송하고 이곳에서 도정하여 장항 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던 것이다.
둘째, 광업 자원의 수탈 기지였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폐하고 회사의 설립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하였다. 이것은 성장하여 가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제 1차 대전의 전쟁 경기를 지나고 난 뒤에 유리한 자본투자의 시장을 조선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인데 허가제의 까다로운 절차를 없애고 손쉽게 회사를 설립하도록 신고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막대한 공업 자원을 개발하고 비약적인 광업 발전을 꾀하였거니와 특히 금광(金鑛)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이 금(金)생산에 중점을 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1937년 7월에 일본은 중국 대륙을 침략하였거니와 그 침략을 앞두고 전쟁에 필요로 하는 석유, 제철, 공작 기계 등을 미국 등 여러 나라로부터 수입하는데 금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워진 공장이 1935년 기공한 장항 제련소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주로 금을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장항은 서천의 경제적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삶의 개척을 위하여 새로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신도시가 되었다.
1920년대 서천 길산의 농업 중심의 경제권에서 벗어나 장항은 항만과 제련산업을 통한 산업도시이며 미곡의 집산지로 도정업이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결국 장항은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의해서 조성된 신도시이며 일제시대에 명성을 얻은 도시이다.
가. 장항제련소
장항제련소는 1936년에 조선총독 宇坦一成(우가키 가즈나리)참석 할 정도로 조선총독부의 관심 속에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창설되어 원산 흥남 제련소와 함께 일본인들의 동제련 주생산시설로 사용되었다. 해방후인 1947년 상공부 직영업체로 국유화되었고 국영기업체로 운영되다 1962년 한국광업제련공사로 재설립되었으며 1971년 민영화되어 현재는 LG금속에서 운영하고 있다.
장항 제련소는 설립당시 연산 1천5백 톤의 소규모 제련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해방 후 계속 확장되어 1974년 1만 5천 톤, 1976년 5만 톤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신설된 온산제련소(연산15만 톤)와 함께 전량을 국내 전기동 사용업계에 공급해왔다.  1989년 LG금속의 업종전환으로 동생산이 막을 내리게 되어 용광로를 폐쇄하게 되었다.
그 후 새 공법에 의해 전기동을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장항제련소의 상징인 굴뚝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장항제련소의 용광로 폐쇄요인은 아황산가스로 농작물피해 등 환경공해가 날로 심해지는데다가 공해보상비 및 공해 배출 부과금 등 14억 원을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이었다. 장항 제련소가 번창할 때는 노동자가 1,200명에 이르러 장항의 경제에 활력소가 되었는데 지금은 회사원의 감축으로 옛 영화만이 장항제련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장항제련소의 발전은 1937년 개항한 장항항이 1964년 국제항 승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즉 장항제련소의 물동량이 80%를 차지할 만큼 장항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나. 장항항
장항항만의 건설은 일제에 의하여 충남에서 생산되는 쌀을 반출해 가는 항구로써 축항된 것이다.  1931년 장항선의 개통으로 제반 물자가 이곳으로 속속 이동되어옴에 따라 長項港은 준설이 필요 없는 하구의 自然的 수심을 항상 유지하고 있고, 서쪽 전망산이 바람막이가 되어 웬만한 해일에도 안전하게 선박이 대피할 수 있어 천혜의 항만 여건을 갖추고 있다.
다. 장항선(역)
 충남북 및 경기 남부지방의 유지와 일본인 투자가들이 경부선의 천안역에서 남부벽지를 가로질러 장항으로 이르는 철도 부설을 몇 번의 숙의 끝에 1918년에야 비로소 경남선 (현 장항선) 철도 부설 추진 기구를 발족하였다.  1920년 2월 8일자로 자본금 1천만 원의 경남철도(주)가 설립되어 착공한지 11년 반 동안의 지루한 공기를 거쳐 1931년 8월 1일 역사적인 장항선을 개통시켰다.
장항선은 천안과 장항을 잇는 철도로 총연장 143.8㎞이다. 일제시대는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사설철도였지만 광복이후 사설철도 및 부대사업 일체에 대한 국유화 조처로 국유화되었다. 오늘날의 문제점으로는 장항선만이 복선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금강하구언이 설치된 이후 군산까지 연장 공사하고 있다. 앞으로 장항선의 철도 명칭이 사라질 위기에 있으며 장항역 역시 옮겨져야 한다. 이에 대한 장항 사람들의 대책이 필요할 때이다.
      
라. 일제강점기 장항 기관들
1937년대 장항에 있었던 공공기관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부곡물검사소 장항출장소, 마동면사무소, 장항경찰관주재소, 장항우편소, 장항세관출장소, 조선농회장항비료배합소, 장항공립심상고등소학교, 마동공립보통학교, 조선식산은행 장항파출소, 동일은행 장항지점, 조선운송주식회사 장항영업소, 주식회사장항조, 대판상선 장항대리점,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동화해운주식회사, 주식회사장항미곡알선소, 조선제련주식회사 장항제련소, 장항강(糠)공업주식회사, 장항작업주식회사, 주식회사대동정미소, 남북면업주식회사 장항조면공장, 충남정미소, 예산정미소 장항지점, 옥정(玉井)정미소, 장항역, 장항잔교역(棧橋驛), 수동잔교역(棧橋驛), 면영(面營) 장항시장, 장항번영회, 장항재향군인분회, 신흥보안조합, 장항소방조, 장항소방후원회, 장항학교조합, 장항학교후원회, 마동청년단, 장항불교부인회, 장항축항기성회, 장항보통학교기성회, 서천금융조합 장항지소, 조선물산 장항출장소, 군산해운 장항출장소, 금강토지주식회사, 궁기농장(宮崎農場), 편동과수원(片桐), 동양척식수동농장미곡창고, 상은창고(商銀倉庫), 경남상옥창고, 농업창고, 충청남도 장항상옥(上屋), 장항조창고(長項組倉庫), 인정전주조장(仁井田酒造場), 죽본주조장(竹本酒造場), 안동주조장(安東酒造場), 장항목장, 장항미곡상조합, 장항미곡상통제조합, 장항상옥사용조합, 장항어업조합, 경남철도자동차부, 관자동차부(菅自動車部), 장항트럭, 금만인력거장장(金滿人力車帳場), 장항편동출장소, 경성일보 장항지국, 군산일보 장항지국, 중선일보 장항지국, 조선민보 장항지국, 조선일일신문장항지국, 조선일보지국, 통구의원( 口醫院), 인정전의원(仁井田醫院), 일본인 경영의 장항여관, 암전(岩田)여관, 남본(楠本)여관, 조선측의 만덕여관, 대흥(大興)여관, 경남여관, 극장유락좌(劇場有樂座), 장항욕장, 제련소구락부, 당구금강구락부, 면영격리병사(面營隔離病舍) 그 외 일본요리의 新月, 조선요리의 해동간(海東館), 화성관(花城館), 지나요리(支那料理)의 복경원(福慶園), 장춘관(長春館), 군산관, 광월관(光月館), 카페는 사우스, 낙원(樂園), 파리, 식당은 석정(石井)식당, 첩첩식당 등이 있고, 기타 이발관, 사진관, 미용원 등도 있다. 극장유락좌에서는 편동화삼씨가 도키 영사기도 설치하고 있어 장항 유일의 대중 오락기관이다. 신사(神社)는 장항신사(長項神社)가 있고, 절은 조동종(曹洞宗) 보은사(報恩寺), 진의진언종 장항포교소(眞儀眞言宗 長項布敎所). 아울러 조선불교 은숙사(隱淑寺) 장항포교소 등이 있다(阿部薰,1937).


Ⅲ. 활용방안
1. 전제 조건

가. 주민의 참여와 연대
장항 지역은 1929년 이후 신도시 건설로 새로운 인구가 전입하여 왔다. 1932년 서천군의 인구는 95,307명이었으며(서천군세일반,1934) 장항 인구는 1,333명이다(阿部薰,1937). 1936년 장항 인구는 7,856명이다. 그후 1965년 서천군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는 162,221명이며, 2002년 서천군 인구는 70,254명이며 이 중 서천은 14,404명, 장항은 16,697명이다(서천군 통계연감, 2003). 1965년 이후 현재까지 서천군 인구의 반감 원인은 우리 나라 농촌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이촌 향도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장항 지역의 경기 침체가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서천군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농토를 바탕으로 생업을 삼아 왔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 서천군의 인구가 상승하는 것은 장항의 도시 기반 확충과 산업 시설로 인한 인구 유입과 장항 근교 지역인 서천을 비롯한 여타의 지역의 경제 여건의 상승에서 인구가 증가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항의 경기 침체는 서천 지역에 영향을 미쳐 인구 감소와 서천군세를 왜소화 시켰다.
그러므로 장항의 문제는 장항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닌 서천군 사람들의 문제임으로 장항 사람들과 서천을 비롯한 11개면 사람들의 단합된 힘이 필요할 때이다. 이에 서천과 장항의 배타의식을 배제하고 합동으로 장항 문제에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장항 문제는 장항 사람들의 문제로만 보지말고 서천외 11개면과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 방법을 도모해야할 것이다.
이에 장항 내부에서도 문제 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참여와 연대가 필요할 때이다. 장항 문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많은 단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항 발전의 실질적인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영달이나 정치적인 목적과 관계없이 헌신적으로 장항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단체나 개인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정치적인 위상도 중요하고 경제력도 있어야 하지만 이제 장항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주민과 함께 운동을 전개할 단체나 사람이다. 그런 단체나 개인의 참여와 연대가 장항을 장항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이런 운동은 장항번영회에서 앞장서서 서천군번영회 또는 각 면단위 번영회와 연계하여 사업을 전개한다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나. 장항의 정체성 연구
장항은 서천의 다른 지역과 달리 시대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신흥도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서천에서는 처음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싹튼 곳으로 볼 수 있다. 발전하는 장항이라는 미명하에 찾아온 사람들은 서천 사람들을 비롯한 전국각지의 사람들이다. 특히 장항의 발전 주체가 일본인이었다가 해방 후 그들이 떠나자 장항의 도시 계획 자체가 무산된 상태이다. 그 후 경제 활동에 주력한 나머지 장항에 대한 정체성 구명을 위한 노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장항 이미지가 지금까지 장항제련소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특히 민간 주도로 이루어지는 문화 행사를 거의 볼 수 없으며 그런 공간조차 없다가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다.
경제 활동 위주의 삶은 치열한 경쟁의식을 가져 왔지만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장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연구소가 마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장항의 문화를 선도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장항의 정체성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할을 장항청년회의소, 장항번영회, 각종 사회 단체에서 연구하여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장항에 대한 사회 봉사와 계몽도 중요하지만 이제 부분적인 역할보다는 장항에 대한 전체적인 도시 계획 속에서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장항 경제에 장기적인 면에서는 이익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정체성 구명을 위한 노력 역시 장항 사람들의 노력이 없으면 그 결실을 얻기 어렵고 대단히 시급한 일이다.

다. 생태 관광 도시 장항
우리나라 국민의 관광 행태 변화를 보면 개인 내지 소규모화, 장거리화, 동적 성향, 개성화 등을 특징으로 볼 수 있으며, 해안에 대한 관심과 바다를 입체적으로 이용할 도구가 많이 발달하고 보급되고 있어서 해안 관광에 대한 여건 조성이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연자원을 바탕으로 한 생태관광에 대한 중요성이 나날이 더해가고 있다(유기준, 2003). 이런 생태 관광의 여건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 장항이다. 장항은 농업, 수산업, 광업, 공업에 대한 입지와 환경을 관광지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장항을 생태 관광도시로 육성할 수 있는 민간 차원의 운동이 필요하다. 한꺼번에 관의 도움으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을 원하겠지만 장항 사람 스스로 하나씩 여건을 갖춰 나갈 때 관이 도움을 줄것이다. 이런 운동들은 푸른 서천21이나 서천 환경 운동연합이 장항읍과 연계하여 실시할 때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라. 민-산-관 공동체  
장항에서는 많은 공공기관과 국내 큰 기업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연계한 문화 행사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소유한 다양한 문화 에너지를 장항에서 소비하도록 주민과 산업체뿐만이 아니라 각종 공공기관이 노력을 해야한다. 장항에서 기업 하는 사람들과 장항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면 장항은 발달할 수 없다. 지역사회도 기업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을 것이며, 기업도 지역사회에 요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 관계를 기업과 기관 차원의 연례행사로 풀어갈려고 하지말고 기업과 주민과의 관계가 원만할 수 있도록 문화 행사로 만나야 한다.
한솔제지, LG 금속, 풍농비료 등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장항 체육회에서는 정기적인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음악회, 미술전람회, 문학의 밤을 개최할 수 있도록 여건 조성이 시급하다고 판단이 된다. 그렇게 될 때 장항 사람들의 삶의 질도 풍부해 질 수 있으며 어떤 시민운동을 전개했을 때 직원들의 지원과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장항사람과 기업인, 공공기관이 하나가 되어 장항 문화 만들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장항의 인심과 역사문화가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2. 활용 방안

가. 기벌포 축제 개최
장항은 백제 문화와 일제 강점기 문화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두 문화의 성격이 별개의 것이지만 동시에 장항이라는 공간성을 갖고 있다. 이를 활용한 기벌포 축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백제 문화로써의 장항 문화는 어느 지역에서 실시할 수 없는 외국사신 접대 및 송별 축제를 할 수 있다. 부여 유왕산 놀이는 백제 패망의 유산이지만 장항에서의 기벌포 축제는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문화 유산이다. 용당진사의 제의로 시작하여 백제 제례 의식 재현을 하고 금강에 선박을 정박함으로 백제 선박 재현 행사를 하며 사신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신고식이 진행되었으면 한다. 장암진성에서는 사신 환영식과 송별식을 재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백제 수군 도열식을 준비하도록 한다.
기벌포 축제 기간 중에 송림 백사장의 모래찜질 방 운영, 송림 백사장의 해송욕, 갯벌을 활용한 축제, 장암리 선사 유적지에서의 선사인류 바다 생활 체험, 장항제련소 역사 체험 등을 체험 관광으로 실시한다. 그리고 향토 음식 축제로 아구찜, 복, 조기, 회 축제를 개최한다. 역사재현으로는 기벌포 문화 가장 행렬을 실시하여 장항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한다.        
제2부에는 일제강점기 재현으로 주제가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민중의 삶으로 장항항 쌀 수출 재현, 장항제련소 기공식 우각키 총독방문, 해방 후 모습인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의장 방문을 재현하는 행사 및 사진 전시회를 개최한다.    

나. 환경 참여 학습장
장항은 이미 서천 환경운동연합에서 환경 캠프를 실시하고 있다. 이런 캠프에서 장항 지역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진행하였으면 한다. 장항제련소, 한솔제지 풍농 등의 과거 환경 문제와 대책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참여학습을 통하여 장항 지역의 환경문제를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송림 백사장 생물 관찰하기, 포구 기행, 철새 관찰, 사구 관찰, 들꽃 관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장항의 환경 운동가의 안내 및 지도를 받도록 하였으면 한다.

다. 장항 문화 관광 지도 제작
장항 지역의 역사 자원을 안내하는 문화 관광 지도를 제작하였으면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문화 유적 현황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장항 문화 관광지도를 제작하여 각급 학교 및 공공기관, 업소에 비치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문화 관광지도의 뒷면에는 일제 강점기 관공서 및 각종 기관, 업소 등을 표시하여 흥미를 갖고 오늘날과 비교할 수 있도록 제작한다.    

라. 문화 유적 안내판 설치
장항지역의 문화 유적에 대한 안내판을 설치해야한다. 장암리 신석기 유적, 장암 진성, 기벌포 해전, 용당진사, 봉화산, 개구리 바위, 모레 생일 유래 장항 제련소, 장항항, 장항선 및 역등에 대한 안내판을 설치하도록 한다. 또한 장항 시가지에는 일제 강점기에 당시 어떤 건물이 있던 장소인가를 설명하는 작은 안내판도 필요하다. 이런 안내판을 중심으로 장항 시가지의 모습이 밝혀지면 가장 잘 남아 일본식 건물을 중심으로 기벌포 축제 동안 일제 시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민중의 아픔을 표현하도록 한다.

마. 답사 코스 개발
장항 지역을 답사하기 위하여 찾는 사람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적인 답사 코스 안내가 필요하다. 전문적인 안내자가 배치되어 역사 유적에 국한 하지말고 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답사 계획을 수립한다.  
제1코스: 장항이전 역사 (도보)
         장암리 신석기 시대 유적→ 장암진성→ 기벌포(LG금속)→후망산 봉화대             →개구리 바위 → 용당진사
 제2코스: 일제강점기 장항 역사(도보)
         장항제련소굴뚝→ 장항항 →장항역 → 일본인 거리 궁기농장→ 인정양             조장 등
 제3코스 : 서천군 관광 코스(버스이용)
      장항제련소→장항항→한산모시관 →이상재선생생가→비인오층석탑→동백정
 제4코스: 서천 바다 여행(배이용)
      장항역→ 장항항→ 기벌포(LG금속) →비인쌍도→월하성→마량진성→
      서천해양박물관


Ⅳ. 나오는 글

장항 국가 공단을 만들어 그 경제적 파급효과를 장항 사람들이 얻으려면 앞으로 20여년의 기간이 필요하다(서천군, 삼성경제연구소, 2003). 지금까지 10여년을 잘 기다려 왔기 때문에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 긴 세월 동안 이대로 장항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차원에서 본고는 그동안 방치해온 장항의 역사 자원 현황을 살펴보고 그 활용 방안을 제시하여 보았다. 지금 당장 장항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대안은 아니다. 그러나 장항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장항 사랑 운동과 문화 찾기 운동은 어느 시민 운동보다 중요한 일이다. 이런 운동을 통하여 장항의 정체성이 구명될 때 장항을 개발하고자 하는 인프라가 구축될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장항 개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장항을 개발하고자 하는 장항 사람들이다. 식민지 시대의 근성을 가지고 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주길 기대할 것이 아니라 장항 스스로 장항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가려는 시민 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시민 운동이란 주민 스스로 참여와 연대를 통한 서천군 또는 읍 행정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일이다. 올바른 시민 운동이 전개될 때 장항 사람들의 삶이 달라질 것으로 본다. 장항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각종 단체들의 냉정한 반성을 통하여 장항 발전 계획을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길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임성순(1996). 長項의 歷史와 向後 發展方向. 서천향토문화연구 창간호.
충남대학교 박물관(1995). 장암리 신석기 유적 발굴 보고서. 미발간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천군지(1929)
국립전주박물관(1995).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 pp.59-68
김중규(1998). 잊혀진 백제 사라진 강. 신아출판사.  
심정보(1983). 百濟復興軍의 據點에 關한 硏究. 百濟硏究14 忠南大百濟硏究所.
서정석(2000). 백제산성 연구. 정신문화원 박사학위 논문.
국립부여박물관. 대전지방국토관리청(1997). 장암진성.
유승광(1993). 서천의 민속 -동제를 중심으로- 서천문화원.
세종실록지리지. 서천군 봉화조.
서천군지(1989). 제11편 민속 제7장 전설.
阿部薰(1937). 伸ぴ行く長項. 民衆時論社.
엘지금속 60년사편찬위원회(1997). 엘지금속 60년사. 서울  
서천군세일반,1934
유기준(2003). 서해안 자연자원의 현황과 활용 방안
서천군(2003) 서천군경제사회발전5개년 계획, 삼성경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