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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지역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접수가 700여건을 육박하고 있다.

천하한량 2007. 1. 11. 21:09

 

 

일제징용 恨, 언제나 풀리려나…”

  
아비규환의 생지옥, 일본 하까다에서의 8개월
 
윤승갑 기자 
 
“다시 그때 지옥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혀! 어렸을 때부터 일본인들에 의해 짓밟힌 한민족아녀? 이젠 한민족의 기상을 일본인들에게 보여줘야 혀!”

 

그 때 기억을 되살리며 치를 떠는 최 옹은 단호히 튼실한 국민성으로 강한 국가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1945년 2월. 22살 청년 최 옹은 운 없게도 특정연령징용대상자에 포함돼 강제 징용됐다.

 

최 옹은 그 때부터 8개월간의 생생한 궤적을 풀어놓는다.

 

당시 징용되지 않기 위해 요리저리 잘 피해 다니기도 하고 발뺌하기도 했지만 역시 나라 잃은 설움은 여실히 그에게 닥쳐오고 말았다.

 

최 옹이 강제징용 되던 때 서천군에서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서천인들은 97명 정도.

 

“한국사람이란 존재가 없었다”는 일제강점기, 최 옹을 비롯한 한국인들은 천안에서 부산으로 이동해 관부연락선이 현해탄을 건너 징용자들을 ‘부려놓던’ 항구, 시모노세키로 건너갔어야 했으나 시모노세키행 관부연락선이 미군 폭격으로 좌초되자 두 번째 연락선을 타고 하까다로 징용됐다.

 

하까다는 당시 일본의 제강(製鋼)산업의 하나였던 대동제강 주식회사가 있던 곳.

 

최 옹은 군속으로 징용됐지만 다행히 대동제강주식회사에서 강제징용 노역자로 생활하게 됐다. 하지만 나라 잃은 자의 설움은 마찬가지였다.

 

전선으로 배치된 강제징용자에 비하면 호강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고.

 

“맞기도 많이 맞고 괄시도 많이 당했지. 생각해봐 일본인들이 징용된 우리들을 사람취급이나 했것어?”

 

최 옹에게 있어 대동제강에서의 생활은 전선의 동료들과 같은 두려움의 극치였다.

 

대동제강 2~3개월 생활부터 매일 되는 미군의 기습적인 폭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생사의 순간이다.

 

“살기 위해 뛰어야 했어. 일본인, 한국인 따로 없었어. 죽느냐 사느냐에 한 문제였으니. 나는 더했지~! 억울하게 잡혀 와서 다시 한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다는 게 참으로 분통터지는 일였거든?”

 

같이 징용됐던 한국인이 폭격으로 옆에서, 앞에서 비명횡사하거나 크게 다쳐 울부짖을 때 부둥켜안고 그렇게 울어본 적 없다는 최 옹.

 

강제징용도 억울한데 내 나라를 되찾아주기 위해 나선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무참히 피를 토하며 주검이 되던 한국인들의 모습은 차라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상흔이다.

 

“폭격 이후의 상황은 다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전쟁 이었어”라고 말하는 최 옹은 “살기 위해 일본인같이 생활하고 일본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증언한다. 폭격 이후 일본인들의 악랄함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배운 일본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어. 일본말을 모르는 한국인들은 매일같이 일본인들에게 붙잡혀 매맞고 피투성 되기 일쑤였으니~. 여자의 경우 놀림감이었어. 보다 못해 일본인들과 맞붙은 한국인들도 있었으니께”

 

1945년 8월15일. 최 옹을 포함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은 라디오에서 일본천황의 항복 발표를 직접 듣고도 그 기쁨을 내색조차 하지 못했지만 서로의 눈빛으로 그 기쁨을 주고 받아야만 했다.  

 

한국 귀환선을 타기까지 살기위해 엎드려야 했고, 살기위해 무엇이라도 훔쳐 먹어야 했던 기억을 회상하는 최 옹의 눈에 눈물이 송송 맺혔다.

 

하까다 대동제강에서의 8개월은 기나긴 일제강점기보다 더 지옥 같고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그 기억을 습작하는 최 옹은 “내 생이 끝나야만 이런 역사가 끝날 것이여”라며 나라 바로 세우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몸서리 쳐지지만 그들의 나라사랑 정신만은 본 받아야 혀. 나라사랑 정신이 우리에겐 부족혀. 바닥난 나라사랑 정신을 바로세울 수 있다면 청와대라도 가서 시위하고 싶어”

 

우베, 홋카이도의 탄광촌으로, 오사카의 군수 공장으로 징용갔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한은 광복 60년, 한·일 국교 재개 40년을 맞는 올해도 최 옹의 마음처럼 아직 씻어진 것이 아니다.  
 
 
입력 : 2005/03/09 11:00        

 

 

 

 

 

 

일제피해접수 700건 육박  


6월말까지 1천500여건 이를 전망  
 
 
서천지역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접수가 700여건을 육박하고 있다.
 

16일 서천군에 따르면 “지난달 1일부터 시작된 일제 강제동원 피해접수 건수가 15일을 기준 676건에 이르고 있다”고 밝혔다.

 

군이 밝힌 일제 강제동원 피해신고 접수 현황에 따르면 이날 현재 접수건수는 총 676건으로 유형별로 보면 노무자가 524건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군인이 103건, 군속은 42명에 달했으며 위안부는 7건으로 나타났다.

 

군내 13개 읍·면 가운데에서는 비인면 110명으로 가장 많고 시초면이 60건, 마서면이 58건, 종천면이 53건, 장항읍이 52건 순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는 화양면이 49건, 서면이 48건, 문산면이 44건, 마산면 41건으로 나타났으며 판교면은 36건, 기산면이 35건, 서천읍이 34건, 한산면 32건이 신고됐다.

 

그동안 지역 내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위안부의 경우 이번 신고기간 중에 총 7건이 접수 돼 일제강점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위안부의 경우 총 7건 중 장항읍과 종천면이 각각 3건이 접수됐으며 한산면에서는 1건이 신고됐다.

 

군 관계자는 “지난달 1일 피해 접수가 이뤄진 이후 매일 30여건의 피해접수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며 “마감시한인 6월말께는 피해접수는 1천500여건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군은 오늘 6월말까지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자 및 유족들이 빠짐없이 신고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흥보를 펼칠 방침이며 이로 인한 피해를 확인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급적 피해사항을 접수하도록 할 방침이다.


 
 
입력 : 2005/03/23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