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성은 영축산성이다. 서천 역사와 민속의 보고 영축산성 서천 남산성이 그 위용을 드러내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필자는 이 놀라움을 이미 맛보았다. 1990년 가을에 남산을 답사하고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그 날 가벼운 자동차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다. 남산에 성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정교하게 쌓여진 성벽이 남아 있으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나 가슴이 벅찼다. 남산성의 북벽 중앙 부분에 몇 층의 성돌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데, 성벽과 담쟁이 덩굴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 인생사를 바라다보는 것 같아 너무 기뻤다. 더구나 성벽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꿈만 같았고 그것은 곧 서천에서도 백제 산성을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기에 나의 가슴은 벅찼다. 그 아름다운 흔적과 희열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나는 졸저 「서천 서천사람들」 겉표지에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그 모습의 연장이 2001년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남산성은 백제시대 서천의 중심 산성이다. 설림(서천), 마산(한산), 비중(비인)으로 행정 구역이 나누어져 있던 백제 시대, 설림의 행정적 군사적 중심지였다. 마산의 중심지는 건지산성으로, 비인은 성북리 산성으로 추정이 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2읍 11개 면의 중심 산성은 아니다. 중심 산성 주변에는 주변 산성이 산재해 있다. 남산성 바로 앞의 봉남리 산성, 서쪽으로 한성리 산성, 동쪽으로 송내리 산성, 북쪽으로 태월리 산성, 금강 주변을 방어하기 위한 서태 산성(테살뫼산), 그 옆으로 중태 산성(테뫼산) 등이 남산성을 감싸고 있다. 따라서 남산성은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서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성으로 백제 시대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웅진·사비 도읍기에 이 산성의 중요성은 자못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역사적 의미와 함께 남산성의 모습은 우리를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 발견의 기쁨은 서천에서 무령왕릉의 발견이며 금동대향로의 발견과 같은 것이었다. 그 생각에 잠겨 마서 계룡 삼거리에서 마주 오던 자동차를 못봐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은 서천 지역의 백제 산성연구였다. 그때 남산성의 중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남산성은 백제시대 정치적, 군사적 중심 역할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 세종 때까지 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말하자면 세종 때까지 오늘날 군청이 남산성에 있었다. 그래서 남산성이 서천 역사의 보고인 것이다. 또한 남산성은 서천의 민속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음력 8월 17일에 여자들이 남산에 오르는 남산놀이이다. 남산 놀이는 시집간 여인들이 친정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모든 일을 그만두고 남산에 오르던 놀이이다. 서천의 대부분 여성들이 이 놀이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후 6·25 전쟁을 전후하여 폭탄이 묻혀 있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이 놀이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남산 놀이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패하고 의자왕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잡아갈 때, 여인들이 마지막 가는 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금강을 따라 높은 산에 올라왔던 것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매년 부여 양화 유왕산에서 같은 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우리도 남산성이 복원되면 이 놀이를 재현하였으면 한다. 또한 남산성은 기우제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산이다. 기우제는 가뭄 중에 비를 내려 달라고 비손하는 것이다. 그런 장소가 바로 남산이었다. 다시 말해 남산 자체가 영험하여 산신령이 사는 깨끗한 산이기에 기우제의 명소였다. 기우제의 종류는 마을에 따라 다르지 대개 산상에서 불피우기, 묘파기, 시장 옮기기, 용왕제 등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남산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두 가지 방법이 전해 오고 있다. 우선 남산에서 돼지를 잡아 그 피를 바위에 바르며 제를 지내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군청 주변에 있던 서천 시장을 남산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두 방법은 모두 영험한 산을 더럽히는 방법이다. 돼지 피를 바위에 바르고 저자를 옮겨 쓰레기를 방치하는 것은 불결한 행위이다. 이는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이에신은 노여움을 느끼고 산을 청소하기 위해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서천의 시장을 옮겨 세우기도 하였고 돼지 피를 바위에 바르기도 했던 것이다. 영험한 신이 사는 산이기에 남산을 영취산이라고 불러 왔다. 영취산은 본래 부처가 도를 깨우친 산이다. 우리나라에는 7곳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산이 통도사 뒷산 영취산이 유명하다. 너무나 스님들이 공부하기에 좋은 산이기에 많은 암자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그런데 통도사에서는 산 이름 바로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영취산(靈鷲山)이 아니고 취를 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를 때 불교식 발음에 적합하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도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바로 그 영험하다는 신이 사는 곳으로 기우제를 지내 그 효력을 맛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산은 서천 시가지에서 바라다 보았을 때, 남쪽에 있기에 남산이라고 부르는데 문헌에 의하면 남산은 영축산과 운은산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축산에는 고읍성이 있고 운은산에는 봉수대가 있다. 남산은 서울 남산, 한산 남산, 경주 남산 등 여러 곳에 있다. 이에 우리도 쉽게 서천 남산이라고 부르면서 산 이름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그 명칭이 살아 있는 것이다. 성급한 마음이겠지만 영축산에 서천 시가지와 서해를 바라다 볼 수 있는 명소로 영축정을 지었으면 한다. 그럴여면 산정에 있는 송신탑을 철거해야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영축산에 올라와 보고 영축산성의 위용을 보고 놀라고, 금강에서 떠오르는 일출과 서해로 사라지는 일몰의 장관을 보고 서천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역할을 담당할 영축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서천 역사와 민속의 보고 영축산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영축산성은 백제 시대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 행정적 군사적 요충지로 서천의 중심산성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많은 산성을 거느리고 있다. 이번 발굴은 이런 고고학적 측면을 밝히고 있지만, 영축산에는 우리 서천의 정체성을 밝혀줄 고유한 민속이 잔존하고 있다. 남산놀이, 기우제중 부정행위, 시장 내세우기 등 이외에도 다양한 민속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침 한남대 이필영 교수님께서 서천의 민속을 조사하고 있다는데 관계기관과 협조하여 영축산성에 대한 종합 보고서가 나올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그래야 영축산의 역사 문화적 의미가 더욱 부각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영축산은 우리 군의 상징으로 복원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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