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유지 관료집단에 대한 역할과 기대
서천 지역 유지 관료 집단에 대한 역할과 기대
한해가 저물 때면 한국을 빛낸 인물 또는 사건을 뽑는다. 우리 고장 서천에서도 1990년대 이후 지방 언론에서 우리 고장을 빛낸 인물, 사건들을 발표해 오고 있다. 그때 주변에서 뵙던 가까운 인물이나 사건들을 접하면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다. 정말 자기를 희생하며 지역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 사람, 아니 자기 가족뿐만이 아니라 사회에 귀감이 될 수 있는 효행 등 감히 실천하기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사건 사고는 기쁨과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렇게 지역 사회의 변화는 적은 일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서천을 고향으로 하는 사람과 서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과연 서천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존재해 왔을까? 일반적으로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자체에 얽매여 나 이외의 일에 관심을 못 갖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역 사회를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 명예와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 또는 지역에서 돈 좀 벌었다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지역 민의 눈과 입을 막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또 하나는 적지만, 나 아니면 서천을 변화시킬 수 없다며 야단법석을 떨거나 그것도 권력이라고 연줄을 타고 희희낙락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삶은 서천에서, 경제 활동은 대처에서 해야한다며 서천 금융권을 외면하고 내 돈 내가 벌어 쓰는데 어떤 놈이 시비냐는 사람들이 있다. 서천의 변화를 왜곡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곳이 어느 지역과 다름없는 서천이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위의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서천군의 현실을 잘 표현한 연구보고서가 있다. 6·25전쟁의 연구로 유명한 브로커밍스는 일제강점기이후 서천 지역의 진보지수를 0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사회적 운동을 통해 민족 해방 운동이나 지역 사회 변혁을 이끈 조직이나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 0점을 맞은 원인이다. 서천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서천의 동학 농민 운동을 주도했던 조영구 접주는 한말 나라로부터 참봉 벼슬을 받고 해방 후까지 생존한다. 마산 신장 3·1운동을 주도한 송기면은 해방 후 서북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함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지역 내 인사들의 일관성 없는 삶의 방향은 우리 지 역사의 악순환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민족 해방운동 차원의 야학, 또는 농민운동으로 연결되어 서천의 지역사회 변혁 운동을 지향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후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한 장영근에 관한 이야기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서천의 지역사회 변혁운동은 전무했단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천에는 괜한 말은 아닐 것 같은 ‘조지이로구나!’라는 말이 있다. 조씨, 지씨, 이씨, 노씨, 구씨, 나씨가 흔한 말로 서천을 ‘물 말아먹는다’는 말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위의 성씨들은 서천 지역의 큰 성씨임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또한 역대 국회의원 또는 그 후보들을 배출한 가문들이다. 아니 서천 지역의 대지주 출신들이 이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그렇다면 서천의 정치,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세력들이다. 그 성씨들이 어쩌면 변화의 주체로 전근대사회를 이끌어 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소위 지역 유지 관료 집단의 핵심 세력들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서천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역량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방 후 역대 국회의원을 보면 이훈구, 구덕환, 나희집, 우희창, 김옥선, 이상익, 조중연, 이긍규 씨 등이다. 이들과 손잡은 지역 유지와 관료 집단에 의하여 주도된 사회이다. 이러한 점들은 앞에서 언급한 브로커밍스가 말하는 진보지수가 0인 것과 대조적이어서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든다. 이들이 진정한 나라와 지역 사회의 유지와 관료로 성장하였다면 당연히 지역사회 변혁 운동의 주체로도 부각되어야 하는 데 그런 사람들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정말로 아쉬움을 더한다. 다시 말해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지역 사회의 변혁을 이끌지 못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성씨에게 서천 지역의 정체성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 이, 박, 최씨는 아무관련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제한적으로나마, 지역 사회의 유지 관료들의 어깨에 서천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소위 지역 사회 유지 관료 집단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면 첫째로, 이제 자신들의 명예와 부만을 생각하지말고 지역공동체의 이익과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하여 제시하여야 한다. 지역 민은 봉이라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제아무리 진보 지수가 낮은 지역이지만 항상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할 때이다. 둘째, 역사를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름만 걸어놓고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역사는 그를 심판할 것이다. 셋째, 개방적인 자세로 너와 나를 구별하지말고 지역 공동체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닫힌 사회일수록 부정이 많다. 연줄 때문에 소수의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사회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각 기관마다 어느 성씨냐 어느 면 출신이냐 서고냐 농고냐 군고냐 서중이냐 장중이냐?를 따지는 파벌을 없애야 한다. 이제 지역공동체 문제가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서천 지역의 변화의 주체들이 왜곡되어 있으며, 공동체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지 못하여 진보지수가 0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전근대사회에 변화의 주체로 볼 수 있는 조지이로구나씨가 우리 지역의 유지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며 미약하지만 그들의 역할을 제시하여 보았다. 서천의 유지 관료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서천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그 변화에서 내가 어떻게 역할을 해야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길 기대한다.
서천 지역 유지 관료 집단에 대한 역할과 기대
한해가 저물 때면 한국을 빛낸 인물 또는 사건을 뽑는다. 우리 고장 서천에서도 1990년대 이후 지방 언론에서 우리 고장을 빛낸 인물, 사건들을 발표해 오고 있다. 그때 주변에서 뵙던 가까운 인물이나 사건들을 접하면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다. 정말 자기를 희생하며 지역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 사람, 아니 자기 가족뿐만이 아니라 사회에 귀감이 될 수 있는 효행 등 감히 실천하기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사건 사고는 기쁨과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렇게 지역 사회의 변화는 적은 일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서천을 고향으로 하는 사람과 서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과연 서천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존재해 왔을까? 일반적으로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자체에 얽매여 나 이외의 일에 관심을 못 갖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역 사회를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 명예와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 또는 지역에서 돈 좀 벌었다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지역 민의 눈과 입을 막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또 하나는 적지만, 나 아니면 서천을 변화시킬 수 없다며 야단법석을 떨거나 그것도 권력이라고 연줄을 타고 희희낙락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삶은 서천에서, 경제 활동은 대처에서 해야한다며 서천 금융권을 외면하고 내 돈 내가 벌어 쓰는데 어떤 놈이 시비냐는 사람들이 있다. 서천의 변화를 왜곡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곳이 어느 지역과 다름없는 서천이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위의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서천군의 현실을 잘 표현한 연구보고서가 있다. 6·25전쟁의 연구로 유명한 브로커밍스는 일제강점기이후 서천 지역의 진보지수를 0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사회적 운동을 통해 민족 해방 운동이나 지역 사회 변혁을 이끈 조직이나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 0점을 맞은 원인이다. 서천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서천의 동학 농민 운동을 주도했던 조영구 접주는 한말 나라로부터 참봉 벼슬을 받고 해방 후까지 생존한다. 마산 신장 3·1운동을 주도한 송기면은 해방 후 서북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함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지역 내 인사들의 일관성 없는 삶의 방향은 우리 지 역사의 악순환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민족 해방운동 차원의 야학, 또는 농민운동으로 연결되어 서천의 지역사회 변혁 운동을 지향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후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한 장영근에 관한 이야기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서천의 지역사회 변혁운동은 전무했단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천에는 괜한 말은 아닐 것 같은 ‘조지이로구나!’라는 말이 있다. 조씨, 지씨, 이씨, 노씨, 구씨, 나씨가 흔한 말로 서천을 ‘물 말아먹는다’는 말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위의 성씨들은 서천 지역의 큰 성씨임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또한 역대 국회의원 또는 그 후보들을 배출한 가문들이다. 아니 서천 지역의 대지주 출신들이 이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그렇다면 서천의 정치,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세력들이다. 그 성씨들이 어쩌면 변화의 주체로 전근대사회를 이끌어 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소위 지역 유지 관료 집단의 핵심 세력들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서천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역량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방 후 역대 국회의원을 보면 이훈구, 구덕환, 나희집, 우희창, 김옥선, 이상익, 조중연, 이긍규 씨 등이다. 이들과 손잡은 지역 유지와 관료 집단에 의하여 주도된 사회이다. 이러한 점들은 앞에서 언급한 브로커밍스가 말하는 진보지수가 0인 것과 대조적이어서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든다. 이들이 진정한 나라와 지역 사회의 유지와 관료로 성장하였다면 당연히 지역사회 변혁 운동의 주체로도 부각되어야 하는 데 그런 사람들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정말로 아쉬움을 더한다. 다시 말해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지역 사회의 변혁을 이끌지 못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성씨에게 서천 지역의 정체성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 이, 박, 최씨는 아무관련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제한적으로나마, 지역 사회의 유지 관료들의 어깨에 서천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소위 지역 사회 유지 관료 집단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면 첫째로, 이제 자신들의 명예와 부만을 생각하지말고 지역공동체의 이익과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하여 제시하여야 한다. 지역 민은 봉이라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제아무리 진보 지수가 낮은 지역이지만 항상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할 때이다. 둘째, 역사를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름만 걸어놓고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역사는 그를 심판할 것이다. 셋째, 개방적인 자세로 너와 나를 구별하지말고 지역 공동체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닫힌 사회일수록 부정이 많다. 연줄 때문에 소수의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사회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각 기관마다 어느 성씨냐 어느 면 출신이냐 서고냐 농고냐 군고냐 서중이냐 장중이냐?를 따지는 파벌을 없애야 한다. 이제 지역공동체 문제가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서천 지역의 변화의 주체들이 왜곡되어 있으며, 공동체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지 못하여 진보지수가 0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전근대사회에 변화의 주체로 볼 수 있는 조지이로구나씨가 우리 지역의 유지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며 미약하지만 그들의 역할을 제시하여 보았다. 서천의 유지 관료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서천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그 변화에서 내가 어떻게 역할을 해야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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