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엔 답사를 떠나자
오곡이 풍성한 가을!
멋처럼 지역에서 문화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일년 내내 준비된 풍성한 서천 문화의 소품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참에 아이들과 손잡고 군민회관을 찾아 가보자. 서천사람들이 이 시대에 무슨 무늬의 문화를 수놓고 있는지 살펴보자.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말자. 그리고 예년의 전시처럼 인사차 둘러보는 그런 자세를 접어두고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하자. 이 시대 서천 사람들의 문화를 만끽 해보자. 그 동안 서천에는 문화가 없다고 투덜대던 얄팍한 지성을 떨쳐버리고 겸허한 자세로 서천사람들의 소리 없는 무늬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무늬들의 아름다움의 원천을 찾아 답사를 떠나보자.
답사 일 번지로 종천 산천리를 추천하고 싶다. 종천면 산천리는 서천에서 약 3㎞정도 떨어져 있다. 종천 산천리는 요즈음 보기 드문 시골 풍경이 많이 남아 있다. 희리산 아래에 자리 잡은 상부 마을은 진주 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진주 김씨의 사당 흥산사가 이 마을의 역사를 대신하듯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 뒷길로 미인송들이 아름답게 서 있다. 그 앞으로는 최근 건축한 백세기 씨의 전원 주택도 산천리의 명물이 되었다. 통나무와 황토를 이용한 토속적 전통가옥으로 그 멋을 한층 뽐내고 있다. 여기서 내려다본 산천리의 들판은 우리의 가슴을 풍요롭게 한다. 이 들판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산천리 고인돌을 볼 수 있다. 이 고인돌은 2500년전 건축물로 청동기 시대 통치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이다. 이 무덤을 조성하기 위한 건축술과 노동력에 대하여 상상하여 보자. 이 큰돌을 운반하기 위한 도구는 무엇이었으며 얼마만큼의 인원이 소요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왜 여기에 이런 무덤을 조성하였는가 또는 이때 주민들은 어디에 살았을까를 상상해 보자 그리고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과 덮개돌에 얽힌 담쟁이덩굴의 조화를 살펴보자. 산천리 고인돌 외에도 백제 고분, 노랗게 물들은 은행나무 등이 산천리 가을 풍성하게 한다.
두 번째는 답사지로는 종천면 지석리 석탑, 비인 오층석탑, 마서 봉남리 석탑, 문산 수암리 석탑, 한산 지현리 석탑을 추천하고 싶다. 어느 탑이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을 끄는 탑은 종천 지석리 석탑이다. 종천 지석리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던 것을 빼앗아 지금의 지석리 마을 회관 앞에 세워 놓았다. 영원히 못 볼 문화재를 보고 있다는 기쁨에 더욱 애정이 가는 탑니다. 이 탑의 특징은 아기자기한 것이다. 꼭 조그마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여인 같아 보고만 있어도 감칠맛이 나는 석탑이다. 일본인이 반출하려고 했던 것도 아마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직접 보고 있노라면 작지만 균형 잡혀 있고 화려하지 않으며 자신을 뽐내지도 않고 어루만져 주길 원하는 듯 하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문화재이지만 나의 주변 놓고 보고 싶은 탑이다. 지석리 석탑에 대한 나만의 애정일까 아니면 그 일본 사람도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석리 석탑은 걸작이다. 이 가을에 애정을 갖고 찾아가 보자
우리 고장 문화재 중 최고를 추천한다면 당연히 비인 오층석탑이다. 비인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절집은 간데 없고 홀로 외롭게 서 있다. 비인 오층석탑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지 않아 베일 쌓인 탑이다. 단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든 백제계 석탑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백제계 석탑은 고려 시대 옛 백제 땅에만 건립되어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저항했던 지역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전제로 세워진 탑이라는 추정이다. 그렇다면 비인 지역에서는 어떤 호족이 이와 같은 불사를 하였는지 연구가 필요하다. 비인오층석탑의 연구를 통하여 고려 시대 이 지역의 실세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비인 오층석탑은 불안전하고 미완성 된 듯한 느낌이 특징이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가람배치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옥이 건축되고, 지형변경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문화재 지정이 단지 현재 탑이 차지한 면적만 지정함으로 그 보호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절집이 있던 전 범위를 지정해야 차후 그 지역을 보존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다음으로는 한산 지현리 석탑이다. 지현리 석탑의 특징은 고려 성종 10(991)년에 탑을 세운 연유를 조각한 조탑기가 있다. 따라서 이 탑의 조성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글씨는 8행 66자가 음각 되어 있다. 내용으로는 호국적인 발원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탑으로 보아 이 탑은 오층으로 여겨진다. 탑 지붕 돌에는 탑의 신비함으로 아들을 얻고자 돌가루를 갈아먹었던 구멍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지현리 오층석탑 주변에는 한산 이씨 호장공 묘를 비롯한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 조선 중종때 쌓은 한산 읍성과 한산 지역 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비석이 면사무소 앞에 있다. 이 비석들 중 눈에 띠는 비석은 이안진 군수와 이성중이다. 이안진 군수는 임진왜란 때 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며 이성중은 문헌서원을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한 사람이다.
마서 봉남리 석탑은 통일신라 계통으로 그 모습이 훤칠한 탑이다. 주변 지역에서 서림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이 탑 역시 일본인이 가져가려는 것을 주민들이 못 가져가게 하여 남아 있다.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갔다는 상륜부 및 지붕 돌이 주변에 있다고 하여 수소문하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봉남리 석탑은 세련된 새댁에 비유하면 좋을 듯 싶다. 문산 수암리 석탑은 역시 그 모습이 범상치 않은 탑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랑을 덜 받아서 그런지 애정 결핍된 석탑이다. 야윈 모습과 무뚝뚝한 자태는 사랑을 그리워하는 여인을 닮았다.
이상으로 종천 산천리와 서천 지역의 석탑 5개를 소개하였다. 실내 전시된 오늘날 작품들과 야외에 전시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석탑을 돌아보고 우리 고장 문화 유산의 뿌리를 실감하였으면 한다. 자 올 가을엔 석탑 답사를 떠나자!
오곡이 풍성한 가을!
멋처럼 지역에서 문화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일년 내내 준비된 풍성한 서천 문화의 소품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참에 아이들과 손잡고 군민회관을 찾아 가보자. 서천사람들이 이 시대에 무슨 무늬의 문화를 수놓고 있는지 살펴보자.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말자. 그리고 예년의 전시처럼 인사차 둘러보는 그런 자세를 접어두고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하자. 이 시대 서천 사람들의 문화를 만끽 해보자. 그 동안 서천에는 문화가 없다고 투덜대던 얄팍한 지성을 떨쳐버리고 겸허한 자세로 서천사람들의 소리 없는 무늬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무늬들의 아름다움의 원천을 찾아 답사를 떠나보자.
답사 일 번지로 종천 산천리를 추천하고 싶다. 종천면 산천리는 서천에서 약 3㎞정도 떨어져 있다. 종천 산천리는 요즈음 보기 드문 시골 풍경이 많이 남아 있다. 희리산 아래에 자리 잡은 상부 마을은 진주 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진주 김씨의 사당 흥산사가 이 마을의 역사를 대신하듯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 뒷길로 미인송들이 아름답게 서 있다. 그 앞으로는 최근 건축한 백세기 씨의 전원 주택도 산천리의 명물이 되었다. 통나무와 황토를 이용한 토속적 전통가옥으로 그 멋을 한층 뽐내고 있다. 여기서 내려다본 산천리의 들판은 우리의 가슴을 풍요롭게 한다. 이 들판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산천리 고인돌을 볼 수 있다. 이 고인돌은 2500년전 건축물로 청동기 시대 통치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이다. 이 무덤을 조성하기 위한 건축술과 노동력에 대하여 상상하여 보자. 이 큰돌을 운반하기 위한 도구는 무엇이었으며 얼마만큼의 인원이 소요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왜 여기에 이런 무덤을 조성하였는가 또는 이때 주민들은 어디에 살았을까를 상상해 보자 그리고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과 덮개돌에 얽힌 담쟁이덩굴의 조화를 살펴보자. 산천리 고인돌 외에도 백제 고분, 노랗게 물들은 은행나무 등이 산천리 가을 풍성하게 한다.
두 번째는 답사지로는 종천면 지석리 석탑, 비인 오층석탑, 마서 봉남리 석탑, 문산 수암리 석탑, 한산 지현리 석탑을 추천하고 싶다. 어느 탑이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을 끄는 탑은 종천 지석리 석탑이다. 종천 지석리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던 것을 빼앗아 지금의 지석리 마을 회관 앞에 세워 놓았다. 영원히 못 볼 문화재를 보고 있다는 기쁨에 더욱 애정이 가는 탑니다. 이 탑의 특징은 아기자기한 것이다. 꼭 조그마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여인 같아 보고만 있어도 감칠맛이 나는 석탑이다. 일본인이 반출하려고 했던 것도 아마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직접 보고 있노라면 작지만 균형 잡혀 있고 화려하지 않으며 자신을 뽐내지도 않고 어루만져 주길 원하는 듯 하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문화재이지만 나의 주변 놓고 보고 싶은 탑이다. 지석리 석탑에 대한 나만의 애정일까 아니면 그 일본 사람도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석리 석탑은 걸작이다. 이 가을에 애정을 갖고 찾아가 보자
우리 고장 문화재 중 최고를 추천한다면 당연히 비인 오층석탑이다. 비인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절집은 간데 없고 홀로 외롭게 서 있다. 비인 오층석탑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지 않아 베일 쌓인 탑이다. 단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든 백제계 석탑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백제계 석탑은 고려 시대 옛 백제 땅에만 건립되어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저항했던 지역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전제로 세워진 탑이라는 추정이다. 그렇다면 비인 지역에서는 어떤 호족이 이와 같은 불사를 하였는지 연구가 필요하다. 비인오층석탑의 연구를 통하여 고려 시대 이 지역의 실세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비인 오층석탑은 불안전하고 미완성 된 듯한 느낌이 특징이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가람배치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옥이 건축되고, 지형변경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문화재 지정이 단지 현재 탑이 차지한 면적만 지정함으로 그 보호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절집이 있던 전 범위를 지정해야 차후 그 지역을 보존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다음으로는 한산 지현리 석탑이다. 지현리 석탑의 특징은 고려 성종 10(991)년에 탑을 세운 연유를 조각한 조탑기가 있다. 따라서 이 탑의 조성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글씨는 8행 66자가 음각 되어 있다. 내용으로는 호국적인 발원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탑으로 보아 이 탑은 오층으로 여겨진다. 탑 지붕 돌에는 탑의 신비함으로 아들을 얻고자 돌가루를 갈아먹었던 구멍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지현리 오층석탑 주변에는 한산 이씨 호장공 묘를 비롯한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 조선 중종때 쌓은 한산 읍성과 한산 지역 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비석이 면사무소 앞에 있다. 이 비석들 중 눈에 띠는 비석은 이안진 군수와 이성중이다. 이안진 군수는 임진왜란 때 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며 이성중은 문헌서원을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한 사람이다.
마서 봉남리 석탑은 통일신라 계통으로 그 모습이 훤칠한 탑이다. 주변 지역에서 서림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이 탑 역시 일본인이 가져가려는 것을 주민들이 못 가져가게 하여 남아 있다.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갔다는 상륜부 및 지붕 돌이 주변에 있다고 하여 수소문하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봉남리 석탑은 세련된 새댁에 비유하면 좋을 듯 싶다. 문산 수암리 석탑은 역시 그 모습이 범상치 않은 탑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랑을 덜 받아서 그런지 애정 결핍된 석탑이다. 야윈 모습과 무뚝뚝한 자태는 사랑을 그리워하는 여인을 닮았다.
이상으로 종천 산천리와 서천 지역의 석탑 5개를 소개하였다. 실내 전시된 오늘날 작품들과 야외에 전시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석탑을 돌아보고 우리 고장 문화 유산의 뿌리를 실감하였으면 한다. 자 올 가을엔 석탑 답사를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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