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서천의 명소! 갈목
『사진으로 본 서천의 20세기』라는 사진첩을 제작하려고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며 흑백 사진을 구하고 있다.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한 장도 못 얻을 때도 있고 흡족한 사진을 구하여 신이 날 때도 있다. 신나는 사진은 서천의 역사를 구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진들이다. 그러나 어찌 그런 사진들을 얻기가 쉽겠는가 혹 지니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슬며시 외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전에 관공서에 근무한 어른들은 대부분 직무와 관련하여 찍은 사진들이 한두 장 정도는 있을 수 있는데 찾아보는 것이 귀찮아 발길을 돌리게 한다.
사진을 구하러 갔을 때 가장 반가운 어른은 장롱 위에 얹어 놓은 와이셔츠 상자를 내리면서 사진은 몇 장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사진일지 모르겠다며 선뜻 사진을 펴 보이는 분이다. 상자 속에는 대부분 일가 친척의 결혼 사진이나 약혼 사진, 회갑 기념사진들이 가득한데 그 중 서천군 무슨 면 무슨 기념사진이라고 쓰여진 사진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가 없다. 그 사진 한 장으로 만족하고 다른 집을 방문하지만 그 기분을 매번 만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기념 사진과 함께 공통적으로 가정마다 가지고 있는 사진은 우리 고장의 명소를 찾아 찍은 사진들이다. 그 중 1950년대는 마서 송석 갈목에서 찍은 사진이, 1970년대는 동백정에서 찍은 사진이, 1980년대는 춘장대에서 찍은 사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동백정과 춘장대는 오늘날도 잘 알려진 해수욕장 중 하나이지만 갈목은 뜻밖의 일이었다.
갈목은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로 서천에서 서쪽으로 약 2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이다. 종천 장구만과 마서 죽산리, 송석리를 경계로 불쑥 나온 것이 꼭 갈대 모가지 같다하여 붙여진 동네 이름이다. 말하자면 육지에서 갈대 줄기처럼 가늘게 언덕이 이어지다 갈대모가지처럼 큰 산이 있는데 지도상으로는 갈대가 눕혀져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한자로는 노항이다. 갈대노(蘆)에 목항(項)자이다.
갈목은 1970년대 도굴사건이 있었던 지역으로 기억되는 마을이라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직 어느 시대 유물을 도굴하다 적발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항상 갈목 마을을 답사하면서 세심한 관찰을 해왔다. 해안 순경과 당시 단기 사병인 방위병이 짜고 도굴을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런 갈목이 195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고장의 명소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갯벌체험장으로 알려져 조개와 맛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여름철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그런 사실들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잠시 동백정 또는 춘장대로 인해서 주춤하다 최근 다시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다면 갈목은 어찌하여 1950년대 우리 고장 서천사람들에게 명소로 부각되었을까? 그것은 갈목 모래찜질이 민간요법으로 성행했기 때문이다. 땀띠제거, 관절염, 각종 피부병에는 갈목 모래찜질이 최고로 인기가 좋았다. 이렇게 알려지자 서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면민들이 걸어서 갈목까지 왔다. 교통이 발달하지도 못했고 마땅히 여름철에 놀러 갈만한 곳이 없자 가족단위 또는 나이에 걸맞게 끼리끼리 뭉쳐서 갈목을 찾곤 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학교까지 동참하여 당시 서남국민학교, 송석국민학교, 서천여자고등학교 등 인근 학교에서 매년 찾는 소풍의 명소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갈목은 갈대의 줄기를 중심으로 앞장불, 뒷장불, 섬갈목 등으로 세분하여 부르고 있다.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주로 찾는 곳은 뒷장불이다. 뒷장불은 활모양을 갖춘 해안선을 따라 백사장이 발달되어 있다. 해안선도 여름에는 파도가 모래를 차고 들어와 더 넓어지고 겨울에는 모래를 실어내어 좁아진다고 한다. 좁은 해안선으로 많은 사람이 활동하기엔 비좁지만 그 아름다움이 촌색시 같다. 아마도 1950년대를 전후하여 사람들이 느낀 감정이나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같다면 좁은 공간이지만 조용하고 깨끗한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서천 사람들은 이곳을 선택하여 자주 찾아와 모래찜질도 하고 해수욕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갈목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이 갈목이 1970년대이후 동백정과 춘장대로 인하여 찾지 않다가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물론 바다체험의 장으로 활용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즐거움을 나눌 수 있지만 그 많은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불편하다는 것이다.
1950년대, 서천의 명소 갈목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하여 새로운 관광지로 만들어 보자. 먼저 행정기관에서는 주민들과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어떻게 개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를 논의하고 청사진을 제시하여야 한다. 주먹구구식의 그때그때 개발하는 것은 이제 금해야한다. 주차장 시설만 하더라도 긴 안목을 갖고 지금의 주차장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화장실과 수도시설이 가장 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2003년을 대비하여 일찍 점검이 되었으면 한다. 작은 갈목이 서천의 관광명소로 효자노릇 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사진 속에 비친 갈목은 가장 자연스럽고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인간의 손발이 닿는 곳이면 무참히 짓밟히는 이 땅! 이제 싫다. 긴 역사를 간직한 갈목만큼은 자연 속의 갈목으로 우리가 만들어 보자.
『사진으로 본 서천의 20세기』라는 사진첩을 제작하려고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며 흑백 사진을 구하고 있다.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한 장도 못 얻을 때도 있고 흡족한 사진을 구하여 신이 날 때도 있다. 신나는 사진은 서천의 역사를 구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진들이다. 그러나 어찌 그런 사진들을 얻기가 쉽겠는가 혹 지니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슬며시 외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전에 관공서에 근무한 어른들은 대부분 직무와 관련하여 찍은 사진들이 한두 장 정도는 있을 수 있는데 찾아보는 것이 귀찮아 발길을 돌리게 한다.
사진을 구하러 갔을 때 가장 반가운 어른은 장롱 위에 얹어 놓은 와이셔츠 상자를 내리면서 사진은 몇 장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사진일지 모르겠다며 선뜻 사진을 펴 보이는 분이다. 상자 속에는 대부분 일가 친척의 결혼 사진이나 약혼 사진, 회갑 기념사진들이 가득한데 그 중 서천군 무슨 면 무슨 기념사진이라고 쓰여진 사진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가 없다. 그 사진 한 장으로 만족하고 다른 집을 방문하지만 그 기분을 매번 만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기념 사진과 함께 공통적으로 가정마다 가지고 있는 사진은 우리 고장의 명소를 찾아 찍은 사진들이다. 그 중 1950년대는 마서 송석 갈목에서 찍은 사진이, 1970년대는 동백정에서 찍은 사진이, 1980년대는 춘장대에서 찍은 사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동백정과 춘장대는 오늘날도 잘 알려진 해수욕장 중 하나이지만 갈목은 뜻밖의 일이었다.
갈목은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로 서천에서 서쪽으로 약 2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이다. 종천 장구만과 마서 죽산리, 송석리를 경계로 불쑥 나온 것이 꼭 갈대 모가지 같다하여 붙여진 동네 이름이다. 말하자면 육지에서 갈대 줄기처럼 가늘게 언덕이 이어지다 갈대모가지처럼 큰 산이 있는데 지도상으로는 갈대가 눕혀져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한자로는 노항이다. 갈대노(蘆)에 목항(項)자이다.
갈목은 1970년대 도굴사건이 있었던 지역으로 기억되는 마을이라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직 어느 시대 유물을 도굴하다 적발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항상 갈목 마을을 답사하면서 세심한 관찰을 해왔다. 해안 순경과 당시 단기 사병인 방위병이 짜고 도굴을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런 갈목이 195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고장의 명소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갯벌체험장으로 알려져 조개와 맛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여름철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그런 사실들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잠시 동백정 또는 춘장대로 인해서 주춤하다 최근 다시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다면 갈목은 어찌하여 1950년대 우리 고장 서천사람들에게 명소로 부각되었을까? 그것은 갈목 모래찜질이 민간요법으로 성행했기 때문이다. 땀띠제거, 관절염, 각종 피부병에는 갈목 모래찜질이 최고로 인기가 좋았다. 이렇게 알려지자 서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면민들이 걸어서 갈목까지 왔다. 교통이 발달하지도 못했고 마땅히 여름철에 놀러 갈만한 곳이 없자 가족단위 또는 나이에 걸맞게 끼리끼리 뭉쳐서 갈목을 찾곤 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학교까지 동참하여 당시 서남국민학교, 송석국민학교, 서천여자고등학교 등 인근 학교에서 매년 찾는 소풍의 명소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갈목은 갈대의 줄기를 중심으로 앞장불, 뒷장불, 섬갈목 등으로 세분하여 부르고 있다.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주로 찾는 곳은 뒷장불이다. 뒷장불은 활모양을 갖춘 해안선을 따라 백사장이 발달되어 있다. 해안선도 여름에는 파도가 모래를 차고 들어와 더 넓어지고 겨울에는 모래를 실어내어 좁아진다고 한다. 좁은 해안선으로 많은 사람이 활동하기엔 비좁지만 그 아름다움이 촌색시 같다. 아마도 1950년대를 전후하여 사람들이 느낀 감정이나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같다면 좁은 공간이지만 조용하고 깨끗한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서천 사람들은 이곳을 선택하여 자주 찾아와 모래찜질도 하고 해수욕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갈목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이 갈목이 1970년대이후 동백정과 춘장대로 인하여 찾지 않다가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물론 바다체험의 장으로 활용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즐거움을 나눌 수 있지만 그 많은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불편하다는 것이다.
1950년대, 서천의 명소 갈목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하여 새로운 관광지로 만들어 보자. 먼저 행정기관에서는 주민들과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어떻게 개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를 논의하고 청사진을 제시하여야 한다. 주먹구구식의 그때그때 개발하는 것은 이제 금해야한다. 주차장 시설만 하더라도 긴 안목을 갖고 지금의 주차장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화장실과 수도시설이 가장 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2003년을 대비하여 일찍 점검이 되었으면 한다. 작은 갈목이 서천의 관광명소로 효자노릇 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사진 속에 비친 갈목은 가장 자연스럽고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인간의 손발이 닿는 곳이면 무참히 짓밟히는 이 땅! 이제 싫다. 긴 역사를 간직한 갈목만큼은 자연 속의 갈목으로 우리가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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