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자료실 ▒

장항이 살아야 서천이 산다.

천하한량 2007. 1. 10. 01:50
장항에 가면 현수막이 늘 나풀거린다. 장항 공업단지 개발, 장항·군산을 한국의 수도로, 공사 차량 천천히 운행하라는 현수막에 이르기까지 각종 구호들이 난무하다. 이것은 장항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진 풍경일 것이다. 하구둑이 개통된 후 장항 부두가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 많던 횟집이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그 팔팔 뛰던 생선들이 즐비한 가게, 그 옆으로 난 골목길에서 불러주던 선술집 아리랑 소리도 이제 사라지고 없다. 장항 제련소 직원이면 물을 것도 없이 딸을 주었다던 말이 거짓같이 들리는 장항 땅은 삭막하기까지 하다. 경남 철도가 충남 서북부 지방을 달리던 그 날 화려한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머지않아 장항선의 종착역은 군산이 되어가고 있다.
텅 빈 장항 거리를 거닐면서 나는 장항이 살아야 서천이 산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엉뚱한 생각인지 모른다. 장항이 만들어진 것은 서천을 변화시킨 가장 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그때가 암울한 일제강점기였지만 서천의 가장 큰 변화를 촉진하였다. 1929년에 갈대밭을 메워 50만평을 마련하고 철도, 부두, 상가, 공장을 분양하였던 그 모습은 새로운 희망의 도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충청남북도의 물자를 착취하기 위한 기반 시설이었지만 서천군의 역량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욱 장항을 장항답게 만든 것은 제련소이다. 많은 노동자가 모여들었고 그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부두 노동자의 모습은 활기차기 그제 없었다. 어느 일간지의 기사에는 술집의 노랫소리가 끈이지 않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구가 3만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활기찬 장항으로 변모하여 갔다.
장항의 변화는 조선 오백 년이래 농경을 주로 하던 서천 사람들에게 이촌향도 현상을 제공하였다. 장항의 성씨를 살펴보면 서천 어느 면들과 달리 각 성이 모여 살고 있다. 그것은 각 면에서 이사온 사람들이 장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천 사람들만 모여든 것은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꿈과 희망을 찾아 장항으로 모여든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영화관 카페, 여관, 각종 유흥 시설이 즐비하게 세워지게 되어 장항은 서천사람들이 구경 삼아 와 볼만한 곳이 되었으며 그들의 경제 활동의 결과가 서천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장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1955년 4월 21일 이승만 대통령, 1961년 7월 박정희 의장 장항 제련소 방문은 국가적으로 장항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국가 수반이 관심을 갖고 정책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장항은 국가 정책에서 사각지대가 되었다.
장항의 경제 활동이 왕성할 때는 서천의 경제도 살아 움직였다. 그 후 장항의 경제가 침체되자 서천 경제 역시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항의 변화가 서천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장항에 경제적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2003년 으뜸 서천은 장항 경제를 일으키는데서 출발해야한다. 서천군수, 도의원, 군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장항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한다. 나는 민주당 너는 한나라당, 자민련으로 나누지 말고 일심동체가 되어 장항의 경제를 살려야 한다. 서천군수는 여당 군수로서 새로 출발하는 노무현 당선자와도 당선 축하인사를 나눴다는 기사를 보았다. 서천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느낀 소감으로 아직도 미비하지만 서천을 위해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은 김종갑 국회의원이 아니었나 싶다.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는 장항항 개항, 비인공업단지 건설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실제적으로 서천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실제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1966년에는 모시고 와서 지역 개발의 중요성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나소열 군수도 차제에 노무현 당선자와 함께 장항을 발전시켜 서천에 꿈을 심는 군수로 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