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천면에는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종천면에는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산과 들에 기대어 종천면의 역사는 숨쉬고 있다. 희리산과 문수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종천은 동쪽으로는 판교천이 힘차게 서해로 줄달음치고 서로는 종천천이 내달려 서해로 빠져나간다. 그 중간을 희리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화산을 이루었다가 수리넘어재를 거쳐 테뫼산쪽으로 흘러내려 면사무소는 동편에 파출소는 서편에 있도록 종천을 양분하였다. 동편에는 한말 중고제의 명창 이동백이 태어나고 독공을 하였던 도만리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도집강 조영구 생가가 있다. 서편에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 있다는 부내복종의 구전이 아득한 신화처럼 깔려 있는 종천리와 낭평리, 당정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역사가 도란도란 모여 있는 재미있는 면이다.
종천은 풍류(風流)와 효의 고장이다.
중고제의 명창 이동백을 보라.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천직으로 여기던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 희리산 중턱 용굴에서 목에 피가 나도록 소리 공부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였지만 타고난 기질을 유감없이 펼쳐보인 당대의 가객이 되지 않았는가. 그가 벼슬을 탐낸 것은 아니지만 그는 고종 앞에서 소리를 하여 통정대부라는 벼슬을 얻었다. 이동백 그가 서천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랜된 일이 아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구속된 사회에서 주어진 일만을 했다면 그는 서천사람들이 기억하거나 그를 추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제약된 사회에서 풍류가 있고 멋스럽게 살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중고제의 명창 이동백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에게는 풍류의 멋과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종천을 대표하는 풍류객인 것이다. 그러나 종천 아니 서천군, 충청도에 그의 소리를 계승한 소리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전통문화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도 우리는 이동백의 풍류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사장된 이동백의 소리를 찾아야하고 그 소리를 이어가는 소리꾼을 양성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것을 지키는 일이다. 1998년 모시문화제 때 시내버스 운행시 이동백의 새타령을 들려주도록 했다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동백의 소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지역사회 차원에서 제공하여 이동백 소리대회를 개최 전국에 알리는 것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동백 자료관을 건립하여 흩어진 자료를 수집 전시하는 것도 서둘러야 할 일이다. 그의 풍류정신은 초등학교 교육에서부터 소리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
종천의 효자, 도집강 조영구는 동학에 입교하여 평등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지만 동학 입교 배경에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한다는데 있었다. 조영구의 아버지 조동척은 당시 양반가였던 양주 조씨의 늑장을 제지하다 폭력을 당하여 8개월동안 고생하다 죽었다. 양주 조씨는 조영희로 이완용의 매형이다. 조영희는 이완용의 누이 우봉 이씨가 죽자 명당이라고 알려진 조영구의 할아버지 묘지를 강제로 빼앗아 그 자리에 우봉 이씨를 매장하였던 것이다. 이때 조영구의 아버지 조동척이 이를 제지하다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에 권력이 필요했던 조영구는 동학에 입교하여 많은 세력을 규합한 다음 우봉 이씨 묘를 이장하여 아버지 조동척의 한을 풀어 주게 되었다. 도집강 조영구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항거 정신은 우리가 계승해야할 덕목으로 여겨진다. 또한 종천면을 효의 고장이라고 제시할 만한 사례로 보아진다.
또 다른 역사는 저 멀리 청동기시대부터 종천면에 사람이 살아 왔다. 이를 증면하듯 종천면 산천리에는 거대한 고인돌 3기 외 지석리 괸돌, 종천리 고인돌이 있다. 또한 백제시대에는 장구리 산성을 중심으로 백제 고분을 다수 남겨 놓았다. 즉 수리넘어재 고분, 산천리 고분, 도만리 고분, 당정리 고분, 종천리 고분 등 다수의 고분이 산적해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 문화가 발달했던 시대와 같이 하여 종천면 지석리 3층석탑이 아기자기하게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희리산에는 고려 시대 산성으로 여겨지는 석축산성이 있다.
조선시대는 충남에서 유일한 제민창이 장구리에 창건되어 빈민을 구제하고 흉년에 대비하였으며, 영수암, 흥산사가 건립되었다. 일제시대에는 화산봉에서 횃불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낭평리는 목신제를 지냈었으며, 당정리는 당이 많이 있었다는 것과 관련하여 어업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도만리는 이동백 생가, 용굴, 조영구 생가가 있다. 산천리는 문화의 보고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답사를 오고 있다. 석촌리에는 농공단지가 있으며 신검리는 개복다리 저수지가 있다. 장구리는 제민창이 있었으며 백제 시대 테뫼식 산성이 있다. 종천리는 백운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왔다. 지석리는 고인돌이 있었던 마을로 지금은 흥림지에 매몰된 상태이다. 화산리는 조선시대 종천장이 서던 곳이다. 종천면 여기저기에 역사의 흔적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방학을 맞이하여 아이들과 종천면 답사를 해봄직하다.
종천면에는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산과 들에 기대어 종천면의 역사는 숨쉬고 있다. 희리산과 문수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종천은 동쪽으로는 판교천이 힘차게 서해로 줄달음치고 서로는 종천천이 내달려 서해로 빠져나간다. 그 중간을 희리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화산을 이루었다가 수리넘어재를 거쳐 테뫼산쪽으로 흘러내려 면사무소는 동편에 파출소는 서편에 있도록 종천을 양분하였다. 동편에는 한말 중고제의 명창 이동백이 태어나고 독공을 하였던 도만리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도집강 조영구 생가가 있다. 서편에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 있다는 부내복종의 구전이 아득한 신화처럼 깔려 있는 종천리와 낭평리, 당정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역사가 도란도란 모여 있는 재미있는 면이다.
종천은 풍류(風流)와 효의 고장이다.
중고제의 명창 이동백을 보라.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천직으로 여기던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 희리산 중턱 용굴에서 목에 피가 나도록 소리 공부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였지만 타고난 기질을 유감없이 펼쳐보인 당대의 가객이 되지 않았는가. 그가 벼슬을 탐낸 것은 아니지만 그는 고종 앞에서 소리를 하여 통정대부라는 벼슬을 얻었다. 이동백 그가 서천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랜된 일이 아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구속된 사회에서 주어진 일만을 했다면 그는 서천사람들이 기억하거나 그를 추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제약된 사회에서 풍류가 있고 멋스럽게 살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중고제의 명창 이동백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에게는 풍류의 멋과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종천을 대표하는 풍류객인 것이다. 그러나 종천 아니 서천군, 충청도에 그의 소리를 계승한 소리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전통문화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도 우리는 이동백의 풍류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사장된 이동백의 소리를 찾아야하고 그 소리를 이어가는 소리꾼을 양성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것을 지키는 일이다. 1998년 모시문화제 때 시내버스 운행시 이동백의 새타령을 들려주도록 했다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동백의 소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지역사회 차원에서 제공하여 이동백 소리대회를 개최 전국에 알리는 것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동백 자료관을 건립하여 흩어진 자료를 수집 전시하는 것도 서둘러야 할 일이다. 그의 풍류정신은 초등학교 교육에서부터 소리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
종천의 효자, 도집강 조영구는 동학에 입교하여 평등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지만 동학 입교 배경에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한다는데 있었다. 조영구의 아버지 조동척은 당시 양반가였던 양주 조씨의 늑장을 제지하다 폭력을 당하여 8개월동안 고생하다 죽었다. 양주 조씨는 조영희로 이완용의 매형이다. 조영희는 이완용의 누이 우봉 이씨가 죽자 명당이라고 알려진 조영구의 할아버지 묘지를 강제로 빼앗아 그 자리에 우봉 이씨를 매장하였던 것이다. 이때 조영구의 아버지 조동척이 이를 제지하다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에 권력이 필요했던 조영구는 동학에 입교하여 많은 세력을 규합한 다음 우봉 이씨 묘를 이장하여 아버지 조동척의 한을 풀어 주게 되었다. 도집강 조영구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항거 정신은 우리가 계승해야할 덕목으로 여겨진다. 또한 종천면을 효의 고장이라고 제시할 만한 사례로 보아진다.
또 다른 역사는 저 멀리 청동기시대부터 종천면에 사람이 살아 왔다. 이를 증면하듯 종천면 산천리에는 거대한 고인돌 3기 외 지석리 괸돌, 종천리 고인돌이 있다. 또한 백제시대에는 장구리 산성을 중심으로 백제 고분을 다수 남겨 놓았다. 즉 수리넘어재 고분, 산천리 고분, 도만리 고분, 당정리 고분, 종천리 고분 등 다수의 고분이 산적해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 문화가 발달했던 시대와 같이 하여 종천면 지석리 3층석탑이 아기자기하게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희리산에는 고려 시대 산성으로 여겨지는 석축산성이 있다.
조선시대는 충남에서 유일한 제민창이 장구리에 창건되어 빈민을 구제하고 흉년에 대비하였으며, 영수암, 흥산사가 건립되었다. 일제시대에는 화산봉에서 횃불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낭평리는 목신제를 지냈었으며, 당정리는 당이 많이 있었다는 것과 관련하여 어업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도만리는 이동백 생가, 용굴, 조영구 생가가 있다. 산천리는 문화의 보고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답사를 오고 있다. 석촌리에는 농공단지가 있으며 신검리는 개복다리 저수지가 있다. 장구리는 제민창이 있었으며 백제 시대 테뫼식 산성이 있다. 종천리는 백운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왔다. 지석리는 고인돌이 있었던 마을로 지금은 흥림지에 매몰된 상태이다. 화산리는 조선시대 종천장이 서던 곳이다. 종천면 여기저기에 역사의 흔적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방학을 맞이하여 아이들과 종천면 답사를 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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