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제의 명창 도만리의 이동백, 빗그뫼의 김창룡
문화관광부에서는 한국인 재발견 운동의 일환으로 1990년 7월부터 매월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하여 선현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2003년 3월의 인물로 우리고장 출신 이동백 명창이 선정되어 참 자랑스럽다. 관공서 게시판에서 이동백 명창이 실린 포스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 서천 사람 이동백 명창이다. 저분처럼 서천을 빛낸 인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포스터 가까이 가서 그 자랑스러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하자 서천이라는 두 글자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인물이라면 그 사람의 고향을 넣어 한번쯤 그 고향 사람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얼마전 이동백 명창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는 내부적인 행사이지만 포스터는 전국적인 홍보 효과가 있다. 서천의 문화이미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럴 때 한번 서천 두 글자를 이동백 명창을 통해서 홍보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문화관광부에서 발행한 이동백 명창 소개 내용에도 그의 출생지를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라고 기록되어 있어 더욱 아쉬움을 더한다. 도만리는 행정 구역상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이다. 당시의 정확한 행정 구역 명칭은 비인현(군) 이방면 도만리이다. 문화관광부의 일이지만 우리 군과 관련 있는 행사이므로 담당자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우리 나라 판소리 5대 명창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이다. 이중 이동백, 김창룡이 서천 사람이다. 서천은 우리 나라 판소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김창룡은 누구인가? 김창룡은 횡산리 즉 장항읍 성주 3리 빗그뫼에서 1872년에 출생하였다. 진양조 창시자인 김성옥(金成玉)이 그의 조부이고, 김정근의 아들이다. 김정근은 진양조 창시자 김성옥의 아들로 강경 출신인데 어느 때인가 빗그뫼로 이사를 왔다. 무슨 이유로 빗그뫼로 이사를 왔는지 알 수 없다. 금강 변의 갈대밭은 판소리와 관계 있는 것일까? 상상을 해보지만 갈대밭에서 독공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무엇을 찾아 빗그뫼를 찾아 왔을까 찾아야 할 사연이 너무 많다.
김창룡은 7세때 벌써 부친에게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13세 때 판소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후 이날치에게 지도를 받고 독공하다가 김창환, 박기홍 등 선배와 종유하여 견문을 넓혔고 32세 때 상경하여 연흥사(演興社)창립에 공헌하였다. 1933년 조선 성악 연구회에 참가하여 원로로서 제자 지도에 힘쓰면서 가끔 라디오 방송도 하고, 음반에 취입도 하였다. 자가(自家)전래의 법제를 이어 받은 만큼 천품성대가 좋아서 며칠을 계속 하여도 목이 상하지 않았는데 1935년 64세에 별세하였다. <적벽가>에 뛰어났으며, <심청가>중에서 <꽃타령>이 유명하다.
김창룡에게는 김창진(金昌鎭)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김정근의 둘째 아들이다. 김창진 역시 서천 빗그뫼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지도아래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수년을 전공하였는데, 그가 판소리의 방향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의 창조와 제작이 제 나름대로 달라지기 시작하여 가문의 전통법제를 어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였지만, 그 후로는 각처를 돌아다니며 독공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김창진이 은둔처로 무량사를 선택하여 머물렀다. 무량사에 머물면서 공주 박동진(朴東鎭) 옹에게 <심청가>를 전수하여 그로 하여금 판소리의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 서천 사람 김창진이 판소리의 대가인 박동진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박동진은 자주 서면 띠섬을 찾아 독공을 하였다고 한다.
빗그뫼에 김창룡의 생가터가 남아 있다. 뒤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구기자 나무가 새싹을 만들어 내고 있다. 김창룡이 뜰 안을 거닐던 모습을 연상해 본다. 뜰 안을 거니는 김창룡의 정적을 깨는 것은 대나무의 부딪침 소리였을 것이다. 흩어진 옹기 그릇과 사기 그릇이 옛 흔적을 말하지만 김창룡은 없다.
이동백, 김창룡, 김창진, 판소리의 한 시대를 장식하였다. 하지만 지금 서천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공주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그 사람을 우리는 지원해야한다. 이 시대에 이동백, 김창룡, 김창진의 소리를 서천에서 다시 들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문화관광부에서는 한국인 재발견 운동의 일환으로 1990년 7월부터 매월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하여 선현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2003년 3월의 인물로 우리고장 출신 이동백 명창이 선정되어 참 자랑스럽다. 관공서 게시판에서 이동백 명창이 실린 포스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 서천 사람 이동백 명창이다. 저분처럼 서천을 빛낸 인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포스터 가까이 가서 그 자랑스러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하자 서천이라는 두 글자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인물이라면 그 사람의 고향을 넣어 한번쯤 그 고향 사람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얼마전 이동백 명창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는 내부적인 행사이지만 포스터는 전국적인 홍보 효과가 있다. 서천의 문화이미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럴 때 한번 서천 두 글자를 이동백 명창을 통해서 홍보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문화관광부에서 발행한 이동백 명창 소개 내용에도 그의 출생지를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라고 기록되어 있어 더욱 아쉬움을 더한다. 도만리는 행정 구역상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이다. 당시의 정확한 행정 구역 명칭은 비인현(군) 이방면 도만리이다. 문화관광부의 일이지만 우리 군과 관련 있는 행사이므로 담당자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우리 나라 판소리 5대 명창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이다. 이중 이동백, 김창룡이 서천 사람이다. 서천은 우리 나라 판소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김창룡은 누구인가? 김창룡은 횡산리 즉 장항읍 성주 3리 빗그뫼에서 1872년에 출생하였다. 진양조 창시자인 김성옥(金成玉)이 그의 조부이고, 김정근의 아들이다. 김정근은 진양조 창시자 김성옥의 아들로 강경 출신인데 어느 때인가 빗그뫼로 이사를 왔다. 무슨 이유로 빗그뫼로 이사를 왔는지 알 수 없다. 금강 변의 갈대밭은 판소리와 관계 있는 것일까? 상상을 해보지만 갈대밭에서 독공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무엇을 찾아 빗그뫼를 찾아 왔을까 찾아야 할 사연이 너무 많다.
김창룡은 7세때 벌써 부친에게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13세 때 판소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후 이날치에게 지도를 받고 독공하다가 김창환, 박기홍 등 선배와 종유하여 견문을 넓혔고 32세 때 상경하여 연흥사(演興社)창립에 공헌하였다. 1933년 조선 성악 연구회에 참가하여 원로로서 제자 지도에 힘쓰면서 가끔 라디오 방송도 하고, 음반에 취입도 하였다. 자가(自家)전래의 법제를 이어 받은 만큼 천품성대가 좋아서 며칠을 계속 하여도 목이 상하지 않았는데 1935년 64세에 별세하였다. <적벽가>에 뛰어났으며, <심청가>중에서 <꽃타령>이 유명하다.
김창룡에게는 김창진(金昌鎭)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김정근의 둘째 아들이다. 김창진 역시 서천 빗그뫼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지도아래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수년을 전공하였는데, 그가 판소리의 방향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의 창조와 제작이 제 나름대로 달라지기 시작하여 가문의 전통법제를 어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였지만, 그 후로는 각처를 돌아다니며 독공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김창진이 은둔처로 무량사를 선택하여 머물렀다. 무량사에 머물면서 공주 박동진(朴東鎭) 옹에게 <심청가>를 전수하여 그로 하여금 판소리의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 서천 사람 김창진이 판소리의 대가인 박동진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박동진은 자주 서면 띠섬을 찾아 독공을 하였다고 한다.
빗그뫼에 김창룡의 생가터가 남아 있다. 뒤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구기자 나무가 새싹을 만들어 내고 있다. 김창룡이 뜰 안을 거닐던 모습을 연상해 본다. 뜰 안을 거니는 김창룡의 정적을 깨는 것은 대나무의 부딪침 소리였을 것이다. 흩어진 옹기 그릇과 사기 그릇이 옛 흔적을 말하지만 김창룡은 없다.
이동백, 김창룡, 김창진, 판소리의 한 시대를 장식하였다. 하지만 지금 서천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공주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그 사람을 우리는 지원해야한다. 이 시대에 이동백, 김창룡, 김창진의 소리를 서천에서 다시 들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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