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름 고시상(高時相) 지역 서천군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호는 지산(志山)이고 1884년 8월 26일 서천군 서초면 태성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적인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느낀 그는 항상 비분과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손병희(孫秉熙)선생을 비롯한 33인의 독립선언이 선언되자 그는 동지 송기면(宋箕勉)에 8인과 단합하여 3월 29일 하오 1시경 마산면 신장시장에서 송기면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 시위에 들어갔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를 받음과 동시에 동지들을 구금함으로 이에 더욱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지들과 구금자 구출을 위해 경찰주재소(警察駐在所)를 습격하고 구출한 다음 서천(舒川)을 향하여 시위에 가는 도중 그들의 시위를 제지하기 위해 나타난 일본헌병대(日本憲兵隊)앞에 당시 군수 권익채(郡守權益采)에게 너도 한국민족이면 만세를 부르도록 권하는 등 독립만세를 애타게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년형을 받고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주옥중에서도 우리민족의 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정당한 의사를 발동한 것이 범죄가 될 수 있는가? 하고 상고하여 3심에서 3년 6개월의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8.15해방 직전까지도 일제의 감시를 받았으며 1961년 12월 15일 78세로 눈을 감은 독립투사다.
인물이름 박재엽(朴在燁) 지역 서천군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고령박씨(高靈朴氏)로 명관 박세광(朴世光)의 후손이고 호는 상곡(上谷)이다. 그는 1898년 6월 14일 한산면 송산리에서 독자로 출생하였다. 평소 일본제국주의의 학정을 개탄하다가 기미년 3.1운동 만세시위가 터지자 양재흥(梁在興) 김인두(金印斗)와 같이 상경을 계획하다가 지방으로 확산하는 독립만세가 집회를 계획하고 태극기 7000매를 만들어 29일 하오1시 마산명 신장리 장터에서 참가한 군중의 선두 지휘를 하다가 체포되어 공주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고 출감 후 후진양성에 치중하였다. 1942년 7월 1일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영민한 독립 투사였다.
인물이름 이상재(李商在) 지역 서천군
관련이미지
출생·사망 1850∼1927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관련유물/유적 이상재선생 생가
내용
민중 계몽운동의 선구자
이상재는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이다. 한말 정치가로 민권운동가이며 청년운동가이다. 서천군 한산면에서 태어나 1864년 15세에 강릉유씨와 혼인하였다. 18세 되던 1867년 서울에 올라와 과거를 치뤘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에 개탄한 그는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파묻히려 하였다.
그러나 친족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 들어가 1880년, 31세 되던 해까지 개인비서일을 보게 되었다. 이듬해인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準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이후 1884년 신관제에 의하여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홍영식이 그를 주사로 임명하였으나, 그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하여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 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이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서도 나라의 운명을 걱정,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다가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초대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일제에 맞선 꿋꿋한 지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여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 이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구금·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4년에는 재일본 조선 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 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가 되게 하였고,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놓았다.
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서 이른바 제2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22년에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75세 고령의 나이에 조선일보 초대사장이 되었고, 1925년 제1회 전국기자회 의장으로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여러 번 사양 끝에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3월 29일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최초의 사회장으로 각계각층이 모두 참여하여 식민지를 청산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결의장이 되었다. 한산선영에 묻혔다. 1957년 그가 떠난지 30년이 지난해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卞榮魯)가 비문을 썼다.
저서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진평화(眞平和)』·『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청년회문답』과 『상정부서(上政府書)』 제1·2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등 다수가 있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 제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재는 국권상실 시기를 살아간 항일운동가로, 그의 일생은 암흑시대의 젊은이를 이끌어 온 정신적 지주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항일의 핵심보다는 주변에서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러, 온건한 민중 계몽적 차원에 머물렀다고는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개화파 동료들이 대부분 친일파로 돌아설 때 그는 꿋꿋한 지조를 지켰고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면 살았다. 그는 민중과 함께 그들을 주체로 세워 일제와 싸우는 독립투사라기보다는 민족의 지조를 꿋꿋하게 지킨 항일지사였다.
이상재 생가와 전시관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는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된 월남 이상재의 생가가 있다. 생가는 목조초가로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이 가옥은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교육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전면 지붕의 길이가 후면보다 길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기념물 제84호)
생가 옆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유품들을 전시하기 위하여 1991년에 개관한 유물전시관이 있다. 전시된 유물은 서적 1,132점, 신문기사 80점, 만장 56점, 사진 49점, 가훈 1점, 병풍 1점, 임명장 6점, 상소문 1점, 친필 3점 등이다.
생가 외에도 서천에는 이상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서천읍에서 한산면 방면으로 가면 속칭 '돼지고기 마루'라고 하는 작은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갯마루 왼편에 이상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조선 역대 임금들이 물을 마시던 우물이 있던 서울 훈정동의 종묘 광장에도 이상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 3월의 문화인물로 월남 이상재를 선정했다. 그의 독립운동과 시민운동가뿐만 아니라 종교인과 언론인으로서의 뚜렷한 발자취가 인정된 것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거리캠페인을 비롯해 역사학자와 함께 하는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월남 청소년 지도력 캠프 등 기념사업을 펼쳤다. 또한 해마다 열리는 추모제에는 그를 기억하는 각계의 인사들이 줄을 이으며 그의 정신을 길이 되살리고 있다.
이상재의 해학
이상재는 손자 이홍직의 배재학당 졸업식에 참석했다. 내빈과 학부형들이 졸업식 축사를 하는데 조선총독과 도지사 대리로 참석한 두 조선인 관리가 축사를 했는데 모두 일본말로 낭독했다. 다음으로 그의 차례가 되었다. 단상에 올라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일본말을 몰라서 조선말로 하오"하고 말했다. 그 말에 일본말로 축사를 대독한 두 조선 사람은 너무나 무색하여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일제가 조직한 조선미술협회의 창립식에 이상재가 초대되었다. 자리에는 통감 이등박문도 있었고, 친일파 이완용과 송병준도 초대되었다. 이상재가 이런 자리에 나온 것은 족히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갑자기 이상재가 이완용과 송병준이 있는 자리에 가서 말을 걸었다.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대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이 망할 것이 아니오."
이완용과 송병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개나리꽃이 일본 순경을 뜻하는 은어로 쓰인 적이 있다. 일본 관헌을 뒤에서는 '개(犬)'라고 불렀고 앞에서는 존칭으로 '나리'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한데 합치면 개나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재가 YMCA에서 강연을 할 때 일본 형사들이 청중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허, 개나리가 만발하였구나!" 라고 하여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인물이름 최낙권(崔洛權) 지역 서천군
출생·사망 1923∼1947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그는 1923년 2월 10일 서천군 마서면 봉남리 4가에서 출생하였다. 1936년 3월 공주고등보통학교(公州高等普通學校) 2학년 재학 때부터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한민족의식이 강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응대학(慶應大學)로 유학가고 재학 중, 1942년 5월에 대전헌병대(大田憲兵隊)에 체포되어 수감되고 1945년 3월 대구, 김천의 형무소를 전전 수감되었다가 2년 6개월만에 출감하였으나 형구로 인하여 1947년 4월 3일 24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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