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선조(宣祖)때에 무과(武科)에 오르고 벼슬은 부사(府使)에 올랐다. 임진왜란때 왜구가 함경도를 침공함으로 그 지역을 지키는 권관(權管)으로 공이 있었으며 그 후에 회령(會寧) 보하진(甫下鎭)을 맡고는 여러 차례 침공해 오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다가 어느 한 해에 힘껏 싸웠으나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조(宣祖)는 애석한 끝에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하고 원종공신에 기록하게 하였다.
현종(顯宗)때에 경성창열사(鏡城彰烈祠)에 배향되었으며 뒤에 검산사(劍山祠)에 배향 했다.
인물이름 권갑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권벽(權擘)의 아들이다. 자는 여명(汝明)이고 호는 초누(草樓)이다. 아홉살때 시를 지어 절찬을 받았으며 선조(宣祖)때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올랐다. 그는 5형제로서 모두 시를 잘해서 중국의 시재(詩才) 5형제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대비를 폐위시켰을 때는 윤리(倫理)에 어긋났다 하여 피해 숨었다.
인조반정후(仁祖反正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이어 주부(主簿)에 올랐으나 소문으로 원종의 시호를 논의할적에 그 논의가 서로 다르므로 벼슬을 버리고 나가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인물이름 나세(羅世)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충숙왕(忠肅王) 7년(1320)에 태어난 원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 여러 장수들과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2등 공신이 되고 1374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부원수가 되어 난을 일으킨 제주도 목호(牧胡)들의 토벌에 출전했다. 뒤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교동만호(喬洞萬戶)가 되었다. 우왕(禑王)때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지고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었고 왜구가 서해안에 자주 침범할 때 솔선 출전하여 옹진 신천 문화 안악 몽주에서 무찌르고 왜구들이 대선단으로 다시 침략해 옴으로 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先)과 더불어 전함 백척을 거느리고 뒤쫓을 때 다시 왜구는 500척의 대선단으로 진포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으므로 최무선이 만든 화포(火砲)로 전선을 격파 이공으로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올랐다.
조선시대 개국후 참찬문하(參贊門下)로 치사했다가 태조 6년(1397) 경기 추포사(追捕使)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다가 태조 6년(1397) 그 해에 병사했다.
인물이름 노격(盧激)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노원의(盧原義)의 5세손이다. 조선시대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보령 남포(藍浦) 아미산(峨嵋山) 아래에 피난 갔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칼을 뽑아 싸우다가 그가 적에게 말하기를 나라는 위태롭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나니 그 불의한 자와 함께 사는 것이 죽는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그의 처 박씨(朴氏)가 따라 물에 몸을 던지고 그 아들 경인(敬人)이도 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그 못을 이름하여 삼강연(三綱淵)이라 하였다. 삼강의 뜻은 부군은 충의에 죽고 처는 정열에 죽고 아들은 효성에 죽은 것이니 뒤에 지산(志山) 김복한(김복한)이 그들을 찬하는 글을 썼다.
인물이름 노봉천(盧奉天)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선조(宣祖) 27년(1594)에 출생한 무관이다. 자는 여주(汝柱)이고 호는 병암(屛庵)이며 연인의 아들이다. 자라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등과하지 못하고 무관으로 등장할 것을 결심하던 중 1617년에 음직으로 예빈검정(禮賓儉正)이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북난(北亂)이 일어남에 조정의 천거로 출전하여 큰공을 세웠으며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웠다.
인조(仁祖) 1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짐으로 그의 형 감정(監正) 노경천(盧擎天)과 함께 충청감사(忠淸監司) 정세기(鄭世期)의 군영으로 달려가 군영을 정비할 때 정세기를 대장으로 우부장(右部將)은 최진립(崔震立),선봉장(先峰將)은 그가 맡고 출진하였으나 우부장 최진립은 연로함으로 황백(黃白)으로 대신하고 진천(鎭川)에는 광주(廣州)와 협천(險川)에 진을 치고 그는 홀로 전진하여 송파(松坡)에 이른 즉 적은 이미 남한산성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음을 목격하고는 어서 바삐 왕을 구출하여야 한다는 신념에서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고 들어 가려고 하였으나 대장이 말을 듣지 않고 협천(險川)에만 배수진을 쳤다. 그때 적이 침공해 왔을 때 싸움이 일진일퇴를 이루는 격전을 치르던 중 최공진(崔公震)이 적이 휘두르는 칼날에 죽었으며 처음으로 벼슬에 오른 임복량(林復良)의 성급한 후퇴 권고에도 물러서지 않고 말하기를 왕이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데 어찌 물러설 수 있는가?, 하고는 북한산성을 바라보고는 그 쪽으로 향해 가기 위해 칼을 뽑아들고는 적중으로 뛰어들어 덤벼드는 적들을 무수히 무찌르며 한참 동안을 진격하였으나 적 대군을 혼자서 막을 수 없어 힘이 빠져서는 적의 창칼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적이 물러간 후 형 감정 노경천은 전장의 시체속에서 인조 15년(1637) 1월 28일 아우 노봉천의 시체를 거두어 보니 그의 몸에는 10여 군데 창칼에 찔려 있었다 한다.
그의 형의 손으로 그의 시신은 군(郡)의 북쪽 마명산하에 장사지냈으며 그의 장사가 끝난 지 3일만에 형도 격분한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숙종(肅宗) 16년(1690)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경종(景宗) 3년(1723)에 정문을 세워 포상하였다.
인물이름 노연필(盧涎弼)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선조(宣祖)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수문장(守門將)이었다. 자는 군보(君輔)이고 원의(原義)의 6세손이나 친상을 입고 집에 돌아와 있을 때 왜구가 쳐들어오고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단신으로 분연히 뛰어 나와 왕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도중 충청병사가 부르는 바가 있어 그 진중에 들어가 여러 곳의 싸움에서 적을 무찌르며 분전하였다.
그 후 충청병사를 따라 진주(晉州)로 들어가라 한 즉 왜구의 무리가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그는 군사를 이끌고 3일간 싸워 진주성에 들어가서 전세를 살핀 후 적이 반드시 역습해 올 것을 감지하고 황진(黃進)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적은 순순히 퇴각하였으나 반드시 쳐들어 올 것임으로 대비를 하여야 한다고 하고는 적이 쳐들어 올만한 요충지에 복병(伏兵)을 좌우로 매복시켰다가 적이 쳐들어 올 때 공격을 하면 승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적에게 성을 빼앗길 것이요, 하고 건의하였으나 황진(黃進)은 귀담아 듣지 않다가 과연 적의 공격을 받고 성이 함락되었다. 적이 쳐들어 올 때 노연필은 병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주성 한 구석을 지키며 힘을 내어 죽기로 싸워 활을 잡아 왜구를 무찌르고 힘껏 싸웠다.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뽑아 들고 왜구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적을 무수히 무찌르며 싸웠으나 죽여도 몰려드는 적을 감당치 못하고 힘이 빠져 죽으니 이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속편에 전한다.
인조(仁祖) 10년(1632)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고 숙종(肅宗) 39년(1713)에 정문을 세워 그의 공로를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인물이름 맹희도(孟希道)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신창(新昌)이고 호는 동포(東浦)다. 고려의 문신으로서 시묘살이 3년에 흰까마귀가 노막에 집을 짓고 피눈물로 울었고 그도 따라 어버이 잃은 슬픔에 통곡을 삼년을 하니 온세상에서 천하의 효자라 하였다. 그가 묘소에서 통곡함에 묘소의 잔디는 모두 마르고 공양왕때에 정문을 세워 그의 효도를 더욱 높혔다.
벼슬은 전교부령(典校副令)에 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나아가지 않고 충(忠)의 기감이 되었다. 온양에 서원이 있다.
인물이름 안창(安昶)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선조(宣祖)때에 관찰사(觀察使) 안방경(安方慶)의 아들이다. 그리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생원과 진사로 복시(覆試)의 과거에 급제하여 감역(監役)에 오르고 정여림(鄭汝立)의 역옥을 당하여 부관으로 역인을 신문한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오르고 159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경상도 성주(星主)에서 중국의 장병들께 군량을 2000여말 거두어 주고 팔읍(八邑)의 보전에 힘입은 것이 화근이 되어 정인홍(鄭仁弘)의 무고로 탄액되어 거의 중한 형벌이 내려질뻔 하였으나 성주에서 은혜를 입은 중국 장수의 도움으로 다시 관직에 임용되었다.
광해군조(光海君朝)에 옥사(獄事)로 금고형에 처하게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내 관직은 회복되었으며 벼슬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호는 석천(石泉)이다.
인물이름 유기창(兪起昌)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세종(世宗) 19년(1437)에 태어난 무신(武臣)이다. 자는 자성(子盛)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본관은 기계(杞溪)로서 참판 유해(兪解)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연산군(燕山君) 2년(1496)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고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04년 좌의정 성준(성준)이 왕의 난정을 극간하다 교살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비인현(庇仁縣)에 은거했다. 그후 조정에서 특히 병조참의의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이땅에서 늙도록 벼슬을 주는 것은 병을 주는 것과 같다 하였다. 위명으로 옛 직함 첨추(僉樞)로 신주를 만들라 함으로 향리 사람들이 청절사(淸節祠)를 지어 제사지냈다. 중종(中宗) 9년(1514)에 죽었다.
인물이름 유여림(兪汝霖)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성종(成宗) 7년(1476)에 출생한 문신(文臣)이다. 자는 계옥(啓沃) 호는 정당(政堂) 본관은 기계(杞溪)다. 첨지중추부사 유기창의 아들로서 연산군(燕山君) 4년(149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연산군 10년(1504) 식년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동부승지(同副承旨) 부제학을 거쳐 중종 26년(1531) 호조판서로서 김안노(金安老)의 논핵으로 삭직되고 1537년 김안노가 사사되자 복관되어 이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안(景安)으로 중종 33년(1538)에 죽었다.
인물이름 이계린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태종(太宗) 1년(1401)에 출생했다. 자는 자경(子耕)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이색(李穡)의 손자이며 이종선(李鍾善)의 아들이다. 또한 정순공주(貞順公主)의 사위로서 태종(太宗) 16년(1416) 16세에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이 된 뒤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지냈다.
세종(世宗)초에 승지(承旨)로 발탁되었고 세종 22년(1440)에는 강원도 도감찰사(江原道都監察使)가 된 뒤에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경기도 도관찰사 형조참판, 경상도 도관찰사를 역임 1449년에는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해에 도관찰사를 거쳐 1449년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문종(文宗) 1년(1451) 지중추원사 단종(端宗) 즉위(1452)에 형조판서가 되고 1454년에는 경판호조사가 되었다.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에 승진이 되었으며 좌익공신 2등으로 한산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무(恭武)다. 세조 1년(1455)에 죽었다.
인물이름 이계전(李季甸)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태종(太宗) 4년(1404)에 태어난 문신이다. 자는 병보이고 호는 존양재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이색의 손자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종선의 아들이다.
세종(世宗)9년(1427)에 종묘부승(宗廟副丞)으로 친시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學士)가 되고 1436년 왕명으로 김문(金汶)과 함께 강목통감훈의(綱目通鑑訓義)를 편찬했다. 도승지를 거쳐 문종(文宗) 2년(1452)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단종(端宗) 1년(1453) 계유정난에 공을세워 정난공신 1 등에 1455년에는 좌익공신 2등으로 한성 부원군(漢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대제학 영중추원사 등을 역임했다. 세조 5년(1459)에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인물이름 이안진(李安眞)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고 호는 청호(淸湖)다. 광해군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를 숙청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仁祖反正後) 청양현감(靑陽縣監)에 오르고 이어 한산군수(韓山郡守)를 지냈다.
그는 한산군수를 마지막으로 한산에서 죽으니 한산 남쪽 추동에 장사지내고 자손이 대대로 지켰다. 뒤에 선정을 베푼 인연으로 많은 선비들이 글을 올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인물이름 이영화(李永華)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은 광주(廣州)다.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은 사과(司果)에 올랐다. 병자호란때는 고향에서 변란이 일어났음을 들었고 남한산성에 수행치 못한 것을 탄하면서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신념에서 서천군의 동료 성진복(成振復)과 홍산(鴻山)사람 김득일(金得一)과 분연히 일어나서 의병이 되어 용인(龍仁)으로 달려가 적과 싸울 것을 그 곳 수장에게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수장이 듣지 않아 통분하고 있을 때 이어 왕이 굴욕적인 화해의 논의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비보를 듣고는 통분하여 울면서 성진복과 김득일에게 말하기를 어찌 오랑캐에게 굴복하겠는가 하고는 옷을 벗어 주고는 내가 죽거든 이 옷을 고향까지 가지고 가서 혼을 불러 장사지내 달라 하고는 창을 들고 말에 올라 쏜살같이 적중으로 달려가서는 닥치는 대로 적을 무수히 죽이다가 기진맥진하여 적중에서 전사한 무관이다. 그가 전사한 뒤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여러 고을의 유림에서 포장이 있었다.
인물이름 이현석(李玄錫)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안진(李安眞)의 현손으로 호는 서강(西岡)이다. 벼슬은 종묘봉사(宗廟奉使)에 올랐다. 그는 의지가 굳으며 인품이 크고 훌륭하였으며 기개와 절조는 보통에서 뛰어났다.
숙종(肅宗) 15년(1689) 왕후가 자리를 내놓을 때 태학장의(太學掌議)로서 박정재태보(朴定齋泰輔)의 뒤를 이어 여러 선비를 불러 스스로 상소문을 지으니, 마침내 승정원(承政院)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동지들을 이끌고 도끼를 들은 채 대궐 앞에 부복하고 관철을 외치니 왕이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말하기를 이는 박태보가 죽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했다.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인물이름 장계선(張繼先)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선조(宣祖) 3년(1570)에 태어난 무관이다. 본관은 예산(禮山)이고 장사랑(將士郞), 장석린(張石麟)의 아들이다.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1년(1609)에 부장(部將)에 승진하였으나 1611년 각병(脚病)으로 사직하고 고향 임천(林川)에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겼다.
광해군 10년(1618)에 그의 검소와 무용이 인정되어 다시 기용,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나선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휘하에 들어가 노성(老城) 남장의 부차싸움에서 전사했다. 효종(孝宗)때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 됐다.
인물이름 조시태(趙始泰) 지역 서천군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준(趙峻)의 손자로 자는 래숙(來叔)이다. 좋은 행실을 귀감으로 하는 그는 살아서의 효도와 죽어서의 장사도 예제(禮制)대로 따랐다.
숙종(肅宗) 15년(1689) 그가 산사(山寺)에서 공부할 때 왕비가 퇴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입성하여 대궐 앞에 이르니 대신(大臣) 셋은 이미 형을 받았고 상소를 금한다는 방문을 보고는 군중 속에서 뛰어나와 그는 말하기를 '오늘의 계획은 그 잘못된 것이 하늘이 알고 임금의 침식까지 우는소리가 들리는 즉 이는 시정하여야 할 사항이다. 그 시정할 사항을 내가 죽기를 한하고 발의하는 것이니 나를 따르시오.' 하고는 여러 선비를 인도하여 대궐 앞에 엎드려 몇 날 몇 일을 앉아 있었으나 대궐문은 굳게 닫친 채 말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집에 돌아와서는 궁중의 잘못이 백성의 잘못인가 생각들어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바깥출입을 삼갔으며 죽을 때까지 도성의 문에도 나가지 않았다. 뒤에 사헌부집평(司憲府執平)에 증직되었다.
인물이름 지계최(池繼催) 지역 서천군
출생·사망 ? ~ 1636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자는 언숙(彦叔)이다. 조선시대 인조(仁祖) 1년(1623)에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에 올랐다. 당시 영변(寧邊)에서 반란을 기도한 부원수 이괄이 강적(姜適)을 보내어 반란에 가담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강적을 죽였다. 이듬해 이괄의 반란군을 맞아 정충신(鄭忠臣), 남이홍(南以興)등과 함께 안현(鞍峴)에서 크게 전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지고 1631년 희천군수(熙川郡守)를 지낸 뒤 사흥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 때 원수(元帥) 김자점(金自點)의 소모장(召募將)으로 서흥 검수참(劍水站)에서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남한산성으로 철수하던 중 신계(新溪)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했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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