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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 효자 효부 모음

천하한량 2007. 1. 9. 19:59

인물이름     강현기(姜賢基)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진사(進士) 강시헌(姜時憲)의 8세손이다. 10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가세는 본래 빈한함으로 나무를 팔아 돈을 모으고 길거리에서 이삭을 주워 초하루 보름의 제상을 차렸으며 부친의 봉양에 정성을 바쳤으나 연로하여 병석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부친의 장수를 위해 몸부림을 치며 약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끝내 부친이 타계하니 그는 기절하였다가 깨어났으나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에 있었다. 유장(儒狀)이 있다.


 
인물이름     고례성(高禮聖)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제주(濟州)이고 이조판서(吏曹判書) 고득종(高得宗)의 12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가득하여 다섯살때 밤중에 화재가 일어나자 노조모(老祖母)에게 불꽃이 범하지 못하게 하는 효행과 부친의 병환시는 부친의 봉양에 정성을 바쳤으며 상을 당한 후에는 통곡하다가 기절하여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했다. 어버이가 사망 후에는 어육(魚肉)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한더위라도 상복을 벗지 않고 3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다. 고종(高宗) 21년(1884)에 그의 효행을 높이사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이 내려졌다.


 
인물이름     곽성찬(郭聖燦)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현풍(玄風)이고 벼슬은 동몽교관(童蒙敎官)이다.
모친의 병환이 점점 심해지자 하늘을 향하여 모친의 병을 자신이 옮겨 안고 모친을 편하게 해드리게 하여달라고 기원하였으며 모친의 상을 당하고는 졸도하여 한참만에 살아났다. 부친의 상을 당하고도 여전히 예절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묘소는 10리밖에 있었으나 날마다 쓸고 살피니 고향의 선비들이 효자로 표창하였다.


 
인물이름     권적(權謫)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자는 자경(字景)이고 호는 창백헌(蒼白軒)이다. 영조조(英祖朝)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오르고 영조4年(1728) 무신(戊申)의 난(亂)에는 격문으로 백성을 깨우쳐 주었고 경연관(經筵官)으로 강론에 나가니 그때 표창을 받았다. 전라도감사(全羅道監司)로 있을 때 군덕(君德)에 힘쓰라는 여덟가지 글월을 올리었고 한성우윤(漢城右尹)때는 성을 지키는 12책을 올리었다.

효행이 있어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으며 시호는 효정(孝靖)이고 1754 年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인물이름     권현(權現)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보(權補)의 아들이고 호는 영사재(永思齋)이다.
조선시대 인조(仁祖)때 1642年 생원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는데 모친이 병석에 눕게 되고 사경을 헤맬 때에 손가락에서 피를 뽑아 약에 타서 드렸고 부모의 상에는 모두 시묘살이로 삼년상을 마쳤다.
고향에서 올바른 선비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에 오르고 벼슬은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뒤에 특별히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인물이름     김길동(金吉同)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효자다. 모친의 병환에 모친이 꿩을 원하면 날으는 꿩이 스스로 떨어지고 또한 굴조개를 원하면 길에서 굴조개 꾸러미를 주는 이가 있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효심에 감복됨이라 하였다.

상을 당한 후 40년 동안을 하루같이 소복으로 지냈다. 조정에서 그의 효행을 높이 사서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비(碑)는 북문밖에 있다.


 
인물이름     김덕인(金德麟)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중호(仲好) 호는 양공재(讓恭齋)다. 어버이 섬김을 지극한 효도로 하고 그 모친이 병에 걸려서 아욱국을 원함으로 그는 엄동설한에 아욱을 구할 길이 없어 사방으로 뛰어다니다가 울타리가에 가니 아욱이 울타리에 나와 있으므로 고사리와 같이 뜯어서 국을 끓여 드리니 병에서 완쾌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가 사는 마을을 규화동(葵花洞)이라 하였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인물이름     김현(金鉉)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장성하여서는 초상(初喪)처럼 치르고는 그날부터 묘막을 짓고 6年동안 지냈으며 부모가 청어(靑魚)를 원하였으나 청어가 나오는 시기가 아니라 못 드린 것이 한이되어 종신토록 청어를 먹지 않았으며 그가 죽을 때에도 유언하기를 제사상에도 청어를 쓰지 말라 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당시 재상(宰相) 구행(具行)이 상소하여 특별히 사재감봉사(司宰監奉事)란 벼슬을 내렸다.


 
인물이름     김한겸(金漢謙)     지역     천안시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김한겸의 자는 사익이요 판관 가정의 자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두터웠고 집안이 가난하여 양친을 봉양하기 힘들었는데 무과에 등재하여 두료를 맡았으나 숙수로 여러해를 살았다. 공사가 바빠도 자주 근친하였다. 하루는 마음이 놀라와서 귀성하니 모병이 위급하므로 작지 지혈하여 회소함을 얻었다.

그는 평생 화려한 의복을 입지않고 기름진 것을 먹지 않았다. 관에서는 겸직하여 백구지계를 하지 않아 동료들 중 흠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한 기안이 걸오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항상 문학을 숭상했다.

권함의 만시에 이르되
鄕隣詩禮士 吾黨老成師라 했다.

증손 성건은 사친을 효로 했는데 모병약을 구하지 못하여 애쓰는 중 까치가 앞에 화사를 뜰에 떨어뜨리므로 약으로 써보았더니 구치 되었다. 더 차도를 보려고 변을 맛보고 하늘에 빌기를 정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자 애훼함이 지나쳐서 상기를 마치지 못하고 졸하니 나이 25세였다.


 
 인물이름     나극순(羅克淳)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나주(羅州)이고 자헌대부 나봉찬(羅鳳燦)의 손자다. 또한 나진탁(羅鎭탁)의 아들로 그의 모친 최씨(崔氏)가 위독하여 임종에 이르니 단지(斷指)하여 피를 입에 흘린즉 소생함으로 그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모친 최씨가 자녀에게 이르기를 나의 회생은 너희들의 단지 덕분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로 3일밖에 살지못하는데 백년의 몸을 손상시킬수 있는가 하고 그와같은 일을 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후 다시 혼몽을 거듭함으로 모든 아들과 딸들이 그럴때마다 끊은 단지가 34개나 이루었으니 그들의 효심의 극치를 짐작할수 있다. 순조(純祖) 23年(1823)에 어사가 그들의 효행을 조정에 알렸다.


 
 인물이름     나량재(羅亮在)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원명(元明)이며 호는 송암(松菴)이다. 나광규(羅光奎)의 아들로 일찍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나 집안이 빈한하여 뜻대로 글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의 나이 13세에 모친이 병석에 눕게 되자 모친이 원하는 순채나물을 구해드림으로써 병석에서 일어나게 하였으며 부친의 상을 당하였을때도 신인(神人)의 도움으로 장사를 치른 효자다. 그는 또한 향교(鄕校)의 직원(直員)으로 낡은 대성전(大成殿)을 수리하는등 향교와 이웃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나이 80에 이르기까지 장수함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인물이름     노경인(盧敬仁)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노원의(盧原義)의 5세손인 노격(盧激)의 아들이다. 조선시대 선조(宣祖)때의 효행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받지 않고 선조(宣祖) 20年(1597) 정유(丁酉)의 난때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인솔하여 남포(藍浦) 아미산 아래로 피난갔다가 적을 만나 부친은 그들을 꾸짖었으나 덤벼들음으로 항거하다가 몸을 물에 던져 죽고 모친 박씨(朴氏)역시 물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그도 또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숙종(肅宗)때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인물이름     노재규(盧載奎)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자는 덕장(德章)이고 호는 월헌(月軒)이다. 천성에 지극한 효심이 있고 또한 문학으로도 이름이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 꿈에 모친을 보고 급히 집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몹시 위독하여 그날부터 모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 뛰어 다니는 모습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끝내 모친은 슬픔의 길로 가고, 부친마저 병을 얻어 타계하니 몸에 신경을 잃은 듯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일생을 효행으로 살은 효자다.


 인물이름     노태우(盧泰愚)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노경인(盧敬仁)의 8세손이며 자는 종오(宗五)이고 호는 일농(逸農)이다. 나이 15세때에는 가세는 빈한하나 동생 건우(建愚)와 함께 집안을 일으키고 효행을 가훈으로 삼고는 꾸준히 노력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고 가세를 넓히는데 노력을 하였다. 상사를 당하고는 3년동안 하루같이 하였으며 제삿날이 가까워지면 성스런 제사를 잘 치르기 위해 주위와 자신을 청결히 하고 제사를 지내니 모두 귀감으로 삼았다. 고향의 부녀와 선비들이 그의 풍토와 덕기를 사모하였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인물이름     맹사성(孟思誠)     지역     서천군 
 
    출생·사망     1360(공민왕 9)∼1438(세종 20)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3대 정승의 한사람이다. 호는 고불(古佛) 또는 일명(日明)이라 하였으며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다. 벼슬은 우의정(右議政)에서 그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지극한 효심이 있어 부모 삼년상에 무덤에 시막을 짓고 시묘살이하니 묘앞에 잣나무가 산돼지에 부닥쳐 말라죽음으로 그가 그나무를 껴안고 울으니 이날밤 산돼지는 범의 먹이가 되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일화가 있다. 세종(世宗)때에 정문을 지었으니 양대의 정문의 비석은 한산 유산(紐山)의 맹씨삼대의 묘앞에 있다.

태종(太宗)의 사위 도위(都尉) 조대임(趙大臨)이 거칠고 방종하여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함으로 그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집의(執義) 박안신(朴安身)과 더불어 사헌부(司憲府)에 자리하여 곤장때려 죽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에게 벌을 주지않고 정승벼슬을주었고 세종때에도 정승으로 있으면서 항시 흑우(黑牛)를 타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흑우정승(黑牛政丞)이라 하였다.
 
 
인물이름     박규현(朴圭鉉)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박세광(朴世光)의 후손으로 호는 송와(松窩)다. 그는 천성이 고와서 어려운 자를 보지 못하고, 어버이 섬김을 효심과 정성으로 하였으며, 자녀의 가르침에는 의로써, 사람을 사귀는데는 공손으로 일관하였다. 일찍이 석당(石塘) 정구석(鄭龜錫)의 문하와 사귀었고 만년에는 석정(石井) 신명휴(申命休)와 더불어 도의로 친했으며 1876년 흉년에는 토지를 팔아 의지할 곳이 없는 자를 구제하고 친척에게는 재산을 털어 구제하였다. 청양의 복치흠(卜致欽)은 먼 친척인데도 불치의 병에 3년만에 죽으니 일금 백금(百金)을 그 아들에게 주며 구제코자하니 서로 그 돈을 사양함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맑은 물에 비교하였으며 유생의 우두머리라 하였다.


 
인물이름     송용섭(宋龍燮)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여산(礪山)이다. 좌찬성 대제학 송시철(宋時喆)의 11세손이다. 7세에 양자로 들어와 그 양친을 섬기는데 극진히 하였으며 모친이 병환일때는 얻기 어려운 약재를 구해다가 병을 치료하는가 하면 병이 위독할때는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넣으니 3일 동안 연명하였고 부친의 병환이 위독할때에는 똑같은 방법을 택하여 수일동안 생명을 연장케 하였다. 그리고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자 10여리 되는곳의 묘지까지 10여년을 초하루 보름으로 살피니 모두가 그의 효성에 놀랬다.


 인물이름     유도진(柳道鎭)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유영지(柳映池)의 9세손으로 자는 만재(萬載)이다.
가세가 빈한하여 어버이 봉양할 재물이 없으므로 나이 30에 20리밖 되는 곳에 머슴으로 있으면서 매일 밤에는 집에 돌아와 잠자리를 보아드리고 새벽에는 문안을 드리고 다시 돌아갔으며 머슴살이 할 때에는 어육(魚肉)을 사서 맛 좋은 음식을 드리고 자기는 온전한 의복이 없으나 어버이에게는 극진히 대우하는 효자였다. 유장(儒狀)이 있다.


 인물이름     이승두(李承斗)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 말기의 학자다. 자는 희경(喜景)이고 호는 석남(石南)이다. 유학인으로 학문을 연구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옛사람의 글을 보면 반듯이 그 뜻을 구명하여 행동에 옮기기도 하는 유인이었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패후 8도의 유인들이 서원의 복설(復設)을 위하여 상소할 때 그의 이름은 그 우두머리에 있었으며 궁중의 문 앞에서 8일간이나 선의 복귀를 부르짖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효자로서 10년 동안 부모에게 베푼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교관(敎官)벼슬이 내려졌고 그의 문집이 있다. 문집의 서문은 연재(淵齋) 송병준(宋秉濬)이 지었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찬문을 양재(良齋) 전우(田愚)가 발문을 썼다.
 
 
 인물이름     이인노(李仁老)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고 호는 묵재(默齋)다. 어버이 섬김을 지극한 효심으로 하였으며 우애가 깊었다. 술을 즐겼으나 모친의 훈계로 금주하고 모든 아우를 분가시킬 때 좋은 땅을 나누어주고 그는 남은 황폐한 땅만 차지하였다. 집안에 다투는 폐단이 있으면 문을 잠그고 자신을 두드리고 자신을 책망하여 집안을 편안하게 하여 고행 사람들이 모두 그를 사모하였다. 그의 효행과 인격됨을 조정에서 알고 찬한 글월이 있다.


 
 인물이름     이임(李稔)     지역     서천군 
 
    출생·사망     1548∼1624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명종(明宗) 3년(1548)에 태어나서 인조(仁祖) 2년(1624)에 졸한 효행자며 문신이다. 자는 여실(汝實) 호는 남강(南江)으로써 일곱살 때 양친이 모두 병석에 눕게 되자 그는 부모가 누워 있는 사이에서 약을 올리고 시중을 드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 모두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만큼 어려서부터 효행이 두드러졌었다. 이에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깊었던 그는 늦게 선조(宣祖) 24년(1591)에 사마(司馬)에 오르고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제학 신담(申湛)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충청지방을 지키며 방위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그의 뛰어난 덕망과 능력을 높이사서 군의 원을 시키고자 수차 추천하여 하명하려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며 학문의 길에서 스스로를 닦다가 졸한 효행을 겸한 문신이며 학자였다.


 
 
 
  인물이름     이주민(李周民)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죽계(竹溪)다. 그의 나이 20세에 모친의 병세가 위독하니 단지(斷指)하여 절망하는 모친을 하루동안 연명케하여 모친곁에서 효도하였으며 홀로된 부친의 집이 수리(數理) 밖에 떨어져 있었으나 추위와 더위 폭풍우에도 매일 왕래하며 그날 그날의 부친의 동태를 걱정하였다. 친상을 당해서는 그의 서러움의 복바침으로 여러조객들이 모두 눈시울을 붉혔으며 상복을 한번도 벗지 않고 상을 치른 후에도 그렇게 생활을 함으로 상복은 남루하여 성한 곳이 없었다. 고종(高宗) 23년(1886)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올랐다.
 
 
인물이름     이황(李璜)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다. 그리고 동추(同樞) 이광규(李光逵)의 아들이다. 그의 나이 10세에 부친이 병이 나매 그는 어린 나이로 옷의 띠를 풀지 않고 간호를 하였으며 위급할때는 손가락을 쪼개어 혈서를 써서 원통함을 호소하니 관원도 그의 행각에 감동하였다. 또한 모친의 병에는 정월 초하루부터 지성으로 하늘에 빌어 섣달 그믐날에 이르기까지 시종 한결같았다. 철종(哲宗) 10년(1859)에 정문(旌門)이 내렸다.


 
 
 인물이름     장천도(張天道)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예산(禮山)이고 호는 사재(思齋) 판윤(判尹) 장원(張垣)의 아들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절도 있게 부모를 섬겼으며 친상을 당하고는 묘소에 묘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선조(宣祖) 22年(1589)에 관찰사(觀察使)가 조정에 알리어 음직으로 현능참봉(顯陵參奉)에 오르고 이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를 역임하였다. 뒤에 광해군조(光海君朝)에는 내킨바가 있어 시골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현종5년(1664)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인물이름     조 준(趙竣)     지역     서천군 
 
    구분     효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본관(本貫)은 양주(楊州)이고 자는 사담(士膽)이다. 15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형 조엄(趙엄)과 함께 모친을 모시고 원주 영월산성에 피난하였으나 적에게 성이 함락되어 모친이 적의 흉한 칼날을 받음을 보고 형제가 앞을 다투어 감싸니 적의 칼날이 사정없이 그들을 내리쳤다. 적이 물러간 후 노비가 가서 찾으니 모친과 형은 이미 없고 그는 홀로 초립으로 머리와 목이 가려져 있어 절명되지 않은 숨소리이므로 곧 노비가 의복을 찢어 상처를 싸매어 구호하니 겨우 회생하였으나 1635년에 타계했다. 정문이 세워졌다. 숙종(肅宗) 12年(1696)에 호조좌랑(戶曹左郞)에 추증되었다.
 
 


  인물이름     순흥안씨     지역     서천군 
 
    구분     효부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순흥안씨(順興安氏)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 안학묵(安學默)의 딸이고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봉하(金鳳河)의 처다.
10대가 종가 며느리로 들어와서 시부모를 모실 때에는 효로하고 남편을 공경할 때는 예로써 하였다. 시모는 돌아가고 시부는 살아서 78세때에 며느리 안씨는 75세에도 조석으로 상식과 초하루 보름의 차례를 친히 참여하니 모두가 그들의 효행을 극찬했다. 부모없는 조카 남매를 자기 소생처럼 키운 공도 있다.

 
 
인물이름     순흥안씨     지역     서천군 
 
    구분     효부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순흥안씨(順興安氏)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 안학묵(安學默)의 딸이고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봉하(金鳳河)의 처다.
10대가 종가 며느리로 들어와서 시부모를 모실 때에는 효로하고 남편을 공경할 때는 예로써 하였다. 시모는 돌아가고 시부는 살아서 78세때에 며느리 안씨는 75세에도 조석으로 상식과 초하루 보름의 차례를 친히 참여하니 모두가 그들의 효행을 극찬했다. 부모없는 조카 남매를 자기 소생처럼 키운 공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