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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늘날 연구단장과 연구원이 된 것은 바로 어릴 적 꿈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TV도 없던 시절, 고향인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 단장은 방과 후 라디오에 매달렸다. 바로 공상과학 연속극이 방송됐기 때문이다. “당시 연속극 내용은 과학자가 악당에 잡혀갔으나 그들과 싸움을 벌이고 과학기술을 통해 헤피엔딩의 결말을 이끌어냈어요”
이 방송을 들으면서 초등학생 이조원은 과학자의 꿈을 품게 된다. “당시에는 과학자나 연구원이 주요역할을 하는 것을 느끼면서 ‘과학자가 세상을 바꾸는구나’, ‘힘이 막강하구나’란 생각을 품게 됐죠”
그는 그때부터 과학자를 꿈꾸게 된다. 그러나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억지로 외우는 공부를 하기가 지겨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래들과 수업을 빼먹은 채 푸른 자연을 벗삼아 낚시와 산타기를 즐겼다. 이처럼 철부지로 중학교시절까지 보내다가 고교는 군산으로 유학(?)을 갔으나 역시 암기위주의 공부에는 담을 쌓아 성적이 널뛰듯 들쭉날쭉 했다. 그 결과 대학입시에서는 학교 지원조차 못하게 됐다.
재수를 택해 서울로 올라온 청년 이조원은 재수학원 선생님의 권고를 따라 이듬해 한양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한다. 역시 공학이다 보니 외우는 과목이 많았다. “당시 너무 괴로웠어요. 과연 이 공부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회의도 들었어요”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그는 철이 들어 취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상에서 미친 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과목 이해할 때까지 파고들어” 이런 과정 속에 진드기란 별명답게 어떤 과목이라도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형성된 그는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들여서 외우는 내용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과정 중에 그의 머리에 나름대로 학문체계가 형성되어 갔다.
졸업 후 국방과학연구원에 들어간 이 단장은 반도체의 근간이 되는 학문인 고체물리학 분야를 택해 유학을 계획하게 된다. 학자금이 없었어도 그는 어릴 적 부푼 꿈을 버리지 않고 여러 통로 유학길을 알아봤다.
그 결과 1980년 비행기를 타고 도미해 전액 장학금으로 펜실베니아 공대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시 펜실베니아대가 장학금을 지원한 분야는 전기화학분야였다. 그래서 이 단장은 전기화학분야 석사논문을 쓰면서 자신이 관심을 갖던 고체물리분야 공부도 틈새시간을 이용해 매달렸다.
그의 노력에 혀를 내두른 그의 지도교수는 이 단장이 석사과정을 마치자 고체물리학과 교수와 협의를 거친 뒤 이 단장을 인수인계한다. 이 단장이 박사과정이 들어서면서 마침내 자신이 하고싶은 분야에 들어선다.
보장된 교수직 날아가 자성재료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당초 도미할 때 한국에 돌아가 기여할 수 있도록 10년 이상 미국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자신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카네기멜론 대학 연구원에 취직해 컴퓨터와 관련된 초전도, HDD헤드, 반도체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섭력하며 한국에서는 도입도 안 된 ‘나노소자’ 지식을 쌓아나갔다. “나노소자는 반도체를 크기를 줄여 용량을 늘리고 속도는 빠르게 하는 기술이죠. 당시에 이런 기술이 10년 후엔 반드시 상용화될 것이라는 비전을 갖고 열심히 노력했니다”
이런 연구 과정 중에 그는 한가지 배운 게 있다. “미국에서 공부나 연구하는 중 어느 누구 하나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의지할 것은 내 실력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미국 교수들이나 상사가 실험실패나 원하는 결과가 안나올 때 듣는 꾸중이 저에겐 약이 됐죠”
마침내 유학 10년째인 1990년 친구 권유로 미국IBM왓슨연구소에서 2년간 더 경험을 쌓다가 한국 모 대학 교수직으로 섭외가 이뤄져 그는 금의환양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른 사람이 이 단장이 가기로 한 교수직에 채용이 된 것이다.
졸지에 실직자가 된 이 단장은 국내에 소개도 안된 나노소자 분야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삼성종합기술원에 문을 두드려 입사에 성공한다.
10년 전에 꿈 꾼 비전이 성취되다 그런데 그의 외줄타기는 이어졌다. 국내 처음 도입된 것이다 보니 팀 연구원들이 헤맬 수 밖에 없었고 성과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조직개편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그는 긴장했다.
그러기를 4년. 이 단장은 모 신문광고에서 ‘구세주’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그가 연구 중인 테라급나노소자 개발에 과기부가 지원을 나서고 사업단장을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삼성 측은 이 단장의 계획에 동참,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이 결과 이 단장은 2000년 사업단장을 맡아 현재 500여 명 연구자들의 선봉장으로 나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 물론 삼성도 현재 사업단 연구의 30%이상 기여하고 있다.
그는 사업단장의 임무에 대해 자신이 고교때 읽었던 소설 ‘로드짐’의 주인공을 예로 들었다. “그 주인공이 배를 탔다가 난파되어 선장과 선원이 도망가고 혼자남아 떨었죠. 그러나 눈을 뜬 뒤 배가 안전한게 어느 섬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떨었던 것을 회개하며 그 섬에서 추장이 되어 외부 적과 싸우다 목숨을 내놓죠” 그는 이런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단장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장한 ‘무실역행’을 본받아 자기사업단에서만 세계최고의 권위자 10명 이상을 배출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노소자분야 외국경쟁자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바로 그들을 훨씬 뛰어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뷰가 끝마치자 다시 연구실로 달려갔다.
<서현교 객원기자>
<이조원 단장 약력>
1952년 충남 서천 한산면 출생 1971년 한양대 금속공 입학 1980년 미 펜실베니아대 금속공학과 입학 1986년 동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1990년 미국 IBM왓슨연구소 연구원 1992년 삼성종합기술원 입사(신소재 연구실장) 2000년 테라급나노소자개발사업단장 현 - 국가나노기술전문위원회 위원, 나노기술연합회 부회장, 한영나노기술포럼 한국대표, 나노기술정보자문위원장, IMS-나노기술 국제운영위원. IMS-나노기술 국제운영위원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