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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 유물 유적 정리

천하한량 2007. 1. 9. 19:56


  
 
 
      
     지역     서천군
 
   명칭     열녀 부여서씨 정려 비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1748년(영조 24)에 건립된 것으로 부여 서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많은 글을 익히지는 못했으나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님을 섬겼다고 한다. 최씨가문 최천응에게 시집와서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열로써 아내 된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인생철학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원래 넉넉지 못한 가세에 남편이 몸져누워 가산은 말이 아니었다. 병중의 남편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돈이 없어 고기를 구할길이 없어 고민 끝에 자기의 넓적다리살을 떼어 먹였다. 부인의 정성에 남편의 병은 회복되었고 이들 부부의 금슬은 유명하여 모두다 부러워하였다. 그 후 1748년(영조 24)에 남편 최공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그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 10일만에 작고하였다. 부인이 죽자 빈소와 남편의 묘 사이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3일간이나 떠서 이를 본 사람들은 서씨야말로 하늘이 낸 열녀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지역     서천군
 
   명칭     열녀 유병식처 여양진씨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열녀 유병식의 처 여양진씨는 동서지간에 우애롭고 부부간에 공경하고 순종함을 근본으로 하고 남편을 학문에 힘쓰게 하였는데 남편이 병이나 위독하자 정화수를 떠놓고 하늘에 빌어 대신 병 앓기를 원했고 시부모 몰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남편의 회생을 도모했다.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초익공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명정현판과 정려기가 걸려있다.

 
 


 


  
 
 
      
     지역     서천군
 
   명칭     열녀 유한승 처 분성김씨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강릉유씨 유한승 처 분성 김씨는 뛰어난 열행으로 1869년(고종 6)에 명정받았으며, 이 정려는 그 같은 강릉유씨, 분성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정려이다. 정려내부에는 분성김씨의 행적을 알리는 비가 있다.
유한승의 처 분성김씨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웠으며 유씨댁으로 시집와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으며 남편이 등창에 걸려 여러 해 앓자, 종기를 빨아내고,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어 국을 끓여 4일간의 목숨을 연장시키는 등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윤말정 효자비
 
   구분     정려
 
   시대     시대미상
 
 
 
 
   내용
  

윤말정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모께서 머리와 배가 아프시면 그곳을 어루만지며 "내 배와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을 하면 부모의 병이 나았다 한다. 또한 아버지가 이질에 걸려 붕어가 약이 된다고 하나 장마뒤라 잡을 수 없게 되자 울며 하늘에 기도하니 물고기가 저절로 뛰어나와 잡아드려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한다. 어머니 병환으로 양쪽 손가락을 모두 잘랐으며 노루고기가 먹고 싶다 하시자 산에 올라가서 제를 드리니 노루가 나타났다한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시묘살이에 비나 눈이 오면 우산을 갖추어 봉분위를 가렸다 한다.

 
 


 

 
  
 
 
      
     지역     서천군
 
   명칭     이상재선생 생가
 
   구분     기타
 
   시대     조선(충청도)
 
   관련인물     이상재(李商在) 
 
 
 
   내용
  

▷이상재(1850-1927)선생 약력
1881년 10여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방문
1896년 내각총서와 중추원 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 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驅逐)등 국운을 바로잡기에 힘씀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등과 함께 독립협회 조직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회장 추대, 1927년 사망

▷주요 유적
한산면 종지리에 선생의 생가(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유물전시관 : 1991년 생가옆에 건립
동상 : 한산중학교 교정에 설립
추모비 : 1975년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돼지고개에 세움

 
 


 

  
 
 
      
     지역     서천군
 
   명칭     장계선 충신문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관련인물     장계선(張繼先) 
 
 
 
   내용
  

장계선은 무예에 출중하여 무과에 합격, 부장으로 오랑캐를 막아내고 비장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금나라 장수 응하를 쫓아 보개산에 이르러 적군에게 포위되었으나 힘써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져 순절하니 명나라 황제가 우리 임금에게 벼슬을 주라고 하여 효종께서 병조참의를 증직하시고 숙종께서 병부시랑을 증직하시고 1679년 정려를 명했다.
그후 정려가 도괴되자 176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지씨 충신문(지계최)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관련인물     지계최(池繼催) 
 
 
 
   내용
  

지계최(?-1636)의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언숙이다. 1623년(인조 1년) 관서행영의 도원수 장만에게 의병 800명을 이끌고 가 그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이 되었으며 인조 2년 그의 친구인 강적이 난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자 목을 베고 서울로 출동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전공으로 진무공신 3등이 되고 충성군으로 봉해졌으며 서흥부사가 되었다.
1836년(인조 14년)에 원수 김자정의 휘하에 들어가 소모장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서흥의 검수참에서 적들과 싸웠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는 수없이 많았으며 전세는 점점 불리해져 지계최도 부상을 당했다. 남은 병사들과 함께 위험을 무릎쓰고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쪽으로 갔으나 신계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지계최는 적에게 사로잡히느니 죽음을 택하기로 하고 남쪽을 향하여 4배하고 자결하였다. 그의 죽음에 인조도 슬퍼하였으며 그의 충성심이 길이 빛나게 충성군에 봉해지고 한성부윤에 추증되었다.
 
 


 

   
 
 
      
     지역     서천군
 
   명칭     진주이씨 정려비각
 
   구분     정려
 
   시대     시대미상
 
 
 
 
   내용
  

진주이씨는 시어머니를 섬기는데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오줌똥을 받아내었으며, 가을경치를 구경하고자 하시면 등에 업고 바깥 구경을 시켜드리기를 8년 동안이나 하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기구를 모두 마련하여 편안히 모셨다 한다.
 
 


 

  
 
 
      
     지역     서천군
 
   명칭     추만기, 추태기 형제 효자비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만기와 태기 형제는 문헌공 적(適)의 19세손이며 완산 무원군 수경(水鏡)의 12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으며 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였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앓아눕자 형은 한산땅으로 동생은 서천으로 약을 구하러 떠나 구해드렸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전라도와 홍주까지 수소문하여 약을 구해드려 드디어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가난한 생활에 고기 살 돈이 없어 한 겨울에 직접 고기를 잡으러 강과 바다로 들어갔으며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를 모셨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셔서 형제는 삼년동안 시묘하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이웃들도 그 효에 탄복하여 나라에 소문이 퍼져 예원(禮院)에서 임금께 알리니 1905년(고종 42년)에 형 만기는 중학교 교관에, 태기는 비서감승(秘書監丞)에 증직되었다.
 
 


 

  
 
 
      
     지역     서천군
 
   명칭     파평윤씨 5효자 기적비
 
   구분     비석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윤하의 서천유배로 서천지역에 태반을 형성한 파평 윤씨는 이곳 마을에서 5효자를 배출하여 유명해지는데 5효자 기적비는 파평 윤씨 가문에서 배출한 오형제 영승, 영모, 영거, 영춘, 영규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는 비로 1909년 신응선이 찬하고 쓴 것이다. 기적비에 의하면 이들 5형제는 1811년 어머니가 병이 나자 형제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입에 피를 넣어드리고 변을 맛보는 듯 지성을 다하여 간호하였고, 밤마다 어머니의 병을 대신하고자 하늘에 빌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기를 21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183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상을 예에 의거하여 정성껏 치루어 어버이에 대한 상례를 다하였다. 부모가 타계하신 뒤 5형제는 한집에서 화목하게 지내 일가의 가풍을 이루어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
 
 


 

  
 
 
      
     지역     서천군
 
   명칭     풍천임씨 정려비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풍천 임씨는 임경모의 딸이며 김필곤의 아내이다. 풍천임씨는 시아버지가 체증으로 밤 열두시경에 솟아나는 물(자야수)을 마셔야 병이 낫는다 하여 3년이나 먼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다드렸다. 시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쌀밥을 드리지 못할때는 눈물이 앞섰으며, 남편을 모시는데는 친구들이 매일 놀러와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고 항상 남편의 의관을 깨끗이 하여 조금도 어색함이 없도록 하였다. 시어머니 병환에 마(서여)가 약이 된다고 하여 추운 겨울에 산에 올라가 마를 구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한산이씨 효자문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공의 휘는 임이요, 자는 여실이요, 호는 남강 이시다.
공은 명종 3년 1548년에 태어나시어 인조 2년에 서거하신 효자이시며 문신이시다. 공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 모두 병석에 눕게되자 공이 약과 음식으로 지성껏 시중을 드는것에 게으른 적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공을 칭송하고 감탄했다. 선조 24년 1591년에 벼슬이 사마에 오르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제학 신담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며 호서지방을 방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지역     서천군
 
   명칭     한산향교 대성전
 
   구분     향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구릉지에 남향인 계좌정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향교의 대지조건은 전후로 긴 구릉지인데 좌우 폭에 비해 전후 길이가 매우 길다. 좌우 폭은 명륜당 전면폭과 거의 비슷한 15m정도이다. 이 때문에 명륜당 양측면에 통로가 거의 없고 대성전과 측면담 사이도 매우 좁다.
외삼문 앞에는 돌로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종으로 긴 마당을 두고 동측에 동재가 배치되고 마당 북측에 축대를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명륜당을 배치했다. 서재는 동재 맞은편에 대칭으로 두지 않고 담밖에 배치해 두었다.
명륜당 바로 뒤에 붙여서 계단을 두고 계단위에 외삼문을 두었다. 대성전은 구릉 상부나 또 하나의 대지를 조성하여 동서무 없이 배치되어 있는데 전후로는 공간의 여유가 있으나 좌우로는 좁게 만들었다.

내삼문을 나오면 아래쪽에 명륜당이 정면 5칸, 측면 3칸, 명륜당 동쪽으로는 전교당과 서쪽으로 좀 낮은 위치에 고직사가 있다. 외삼문과 홍살문, 하마비는 남아있다. 주요현판으로는
교궁중수기(1851년, 철종 2) : 군수 정우용 기, 갑진 개필
교궁중수기(1850년, 철종 1) : 노시량기 정우용 군수시
향교구폐입의(1887년, 고종 24) : 노균우, 심상훈, 박재근 등

 
 


 

 
 
 
      
     지역     서천군
 
   명칭     효열부 신화용 정려비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신화용은 평산 신씨로 비인 관리 신화균의 딸이다.
그녀는 고종 26년에 음직으로 부사과(副司果)에 오르고 사헌부 감찰을 지낸 노용우의 손자 노현석과 14세때 결혼을 하였다. 어린 나이에 시부모를 포함한 영정 아홉을 정성과 슬픔을 다하여 공경을 다하였으며 기이하게 결혼한지 1년도 못되어 남편이 병에 걸렸다. 이때 백약이 효과가 없어 뒤뜰에 단을 만들고 야밤에 정화수를 떠놓고 대신 아프기를 기원하였다. 이에 하늘이 감동한지라 그릇에 물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솟아올라 정자모양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사망하였으나 온갖 정성으로 가문을 지켜 나갔다. 이에 1958년에 비각을 세우게 되었으며 효열 평산 신씨 신화용여사 사행을 송시헌이 찬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김용현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김용현(1825-1886)은 본관이 김령으로 김치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겨울철에는 체온으로 이부자리를 덮혀 부친을 편히 주무시게 하였으며 부친의 병환에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천식으로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려 목숨을 연장시켰다. 친상을 당하여서는 전후 6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여 효행을 실천하였다. 1880년(고종 17)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사후 이 지역의 유림들이 그의 효성을 높이 찬양하여 조정에 상언하니 정려의 명정과 함께 통정대부 병조참의행선략장군용양위부사과를 증직받았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김정구, 효부 남평문씨 정려비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 정려는 쌍암부락을 지나 등골에 이르게 되는데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자 김정구와 효부 남평문씨를 기리기 위하여 명정을 받아 세워진 것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이다.
남평문씨는 김해김씨 김원오에게 시집을 왔으나 남편이 일찍 죽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자식들에게는 바른 의리와 어진 행동을 하도록 가르쳤으며, 그의 행적이 알려져 1888년(고종 25)에 효부 명정과 함께 정부인을 증직 받는다.
김정구는 본관이 김해이며 호는 삼족당으로 김원오와 남평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라면서 항시 부모에게 효도하여 1888년(고종 25) 어머니 남평문씨와 함께 효자로 명정되고 가서대부 돈령부사를 증직받는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김제형 정려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 정려는 김제형의 부친이 병으로 1년 남짓 자리에 누웠을 때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던 중 어느 날 꿈에서 신령이 참게를 구해드리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 방죽으로 나갔으나 구할 길이 없어 자신의 불효 막심함을 자탄하면서 돌아오던 중 방죽가 양지바른 곳에서 참게 두 마리를 잡아 고아드리니 부친의 병이 나았다.
이러한 효행을 유림에서 조정에 천거하여 1883년 조봉대부 동몽교관의 증직을 내리고 훈자가 새겨진 보검을 내리는 한편 정려를 명하여 이익공의 팔짝 지붕으로 정려가 세워졌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나동윤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기산면 막동리 좌측 입구 쪽에 위치한 이 정려는 금성 나씨 나동윤의 효행을 기리는 유적으로 정 측면 각 1칸, 민장여 팔작지붕의 정려이다.
나동윤은 부모의 뜻을 봉양함에 입과 몸만 위하는 것은 부모님께 효를 다한 것이 아니고 뜻까지 받들어 봉양해야함을 신조로 어버이 생명을 연장시켰다.
정려 내부에는 「효자 학생 나동윤 지려」라는 명정현판이 걸려있고, 1863년 홍순형이 찬한 정려기가 걸려 있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박우석 정려비각
 
   구분     정려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이 정려는 1903년에 통신국전화와 주무를 지낸 박흥규의 아들 박우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박우석의 본관은 밀양으로 항시 남을 돕는 일을 즐겼으며 지독한 흉년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허덕일 때 곡식을 풀어 아사지경에서 구원하였다. 또한 스승 김성재의 상사때에는 어려운 스승의 장례비 전액을 부담하여 상사를 치루는가하면, 1928년도에는 서천군 신송리, 구암리의 어려운자의 호세 37호분을 대납하여 면민들의 친송을 샀었다.(서천군지 1989년 인물편에서 인용)
비문에는 20여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몸이 바짝 마르고 여의었다. 어머니를 섬기는데 뜻에 순종함을 제일의 살핌으로 삼았다. 일찍이 상업을 꾀하여 이미 만재의 일이 모두 완비되어 만약 그만둔다면 큰 손해가 이르는데도 어머니가 그만두라고 하여 마음을 바꾸어 그만두고 몸을 보호하여 원기를 돋구었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서희진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 비각은 효자 장성 서씨 희진의 효행을 기리는 유적으로 1926년에 건립된 것인데 서희진(1873-1909)은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한가지 행동과 한가지 일도 부모의 명에 어긋나지 않았고 자라서 빈곤하였는데 부친이 병으로 눕자 3년동안 품팔이를 하여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운명할 때 손가락을 찢어 피를 드려 3일간의 목숨을 연장하게 하였다. 장례를 치루고 제사를 지내는데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한다.
그의 아들 서열한이 중심이 되어 비각을 짓고 실적기를 자헌대 부판 돈녕부사 해평 윤용구가 찬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성학순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효자 성학순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효성으로 부모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여 부모 섬김을 한 겨울에 잉어와 뱀과 죽순을 구해 드리는 효성을 다했다고 한다.
정려는 정면 측면 각 1칸의 팔작지붕이며 정려 내부에는 명저기와 효자비가 있다. 명정기는 1888년 (고종 25)의 명정문으로 「효자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성학순지려」라 기록되어 있고, 비는「효자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성학순지비」(1890년)로 크기는 높이 96㎝, 폭 50㎝이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유재환 정려문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정려는 정면, 측면 각각 1칸으로써 우진각 민장여 팔작지붕이며 철제문과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정려의 내부에는 "효자 증조봉대부동몽교관유재환지문"이라는 명정현판(가로 220㎝×세로 43㎝)이 정면에 있고 양측으로 중건기와 정려기가 걸려있다.
유재환(1757-1829)의 자는 사문이고 예조판서 문절공 유종순의 후손으로 유상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과 돈독한 행실로 부모께 효도하고 공경하였다 한다.
성실하게 농사지어 부모를 봉양하며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잉어가 약이 된다 하였으나 때마침 가뭄으로 시냇물이 고갈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유재환이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니 잉어 한 마리가 튀어나왔으며, 어머니 병환에 꿩이 좋다 하였으나 사냥경험이 없어 구할 도리가 없었는데 꿩이 스스로 날아들어 공양하여 병이 나았다한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윤자학 정려비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윤자학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온화하고 선량하여 부모 섬기기를 극진히 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 한다. 아버지께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병세가 날로 심해지자 윤자학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3일간 목숨을 연장케하고 돌아가시자 온갖 정성으로 3년간 묘소를 보살폈다. 십년 후 홀어머니께서 또한 병세가 심해지자 이번에는 오른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며칠간의 목숨을 더 연장하게 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효심을 알게 된 조정에서 1988년 윤자학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를 세웠으며 현재의 유적은 1917년에 중수된 것으로 정면 1칸, 후면 1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이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이재원, 이재정, 효부 이재정 처 청송심씨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재원, 재정형제는 경주 이씨로 아버지는 택주요, 어머니는 여산 송씨이다. 3남 2녀중 재원(1802∼1875)은 첫째이고, 재정(1812∼1888)은 셋째로 둘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환에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 백약이 무효라 변을 맛보아 병세를 증험하고 부친이 생선을 먹고싶다 하자 겨울철이라 얻기 어려웠으나 어느 날 바닷가 웅덩이에 숭어 두 마리가 있어 잡아 봉양하고 노루고기가 병환에 효험있다 하자 노루를 얻고자 하나 구하기 어려워 술 먹으며 돌아올 때 노루가 뛰어나와 잡아 봉양하니 병환이 나았다 한다.
또한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이는 등 정성이 지극하였다. 재정의 처 심씨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남편의 뜻에 따랐으며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고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이조윤·이용명 정려
 
   구분     정려
 
   시대     고려(하남도)
 
 
 
 
   내용
  

이조윤의 본관은 연안이고 월사 이정구의 후손이다. 부모의 나이가 90살에 이르러 지병으로 자리에 눕자 온갖 정성으로 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병이 더욱 악화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10여일간 목숨을 연장케 하고 부인도 남편의 효심에 감격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10여일간의 목숨을 연장케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89년(고종 26년)에 통정대부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고 효자명정을 받았다.
이용명은 같은 가문의 인물로 14세때 모친이 고질병으로 자리에 눕자 깊은 산 속으로 약초를 구하러 갔는데 효성에 감탄한 산신령에게서 신약을 얻고 호랑이의 길 인도를 받아 집에 돌아와 모친의 병환을 완쾌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효행을 본 주민들이 '하늘로부터 나온 효자'라고 추대하여 1889년(고종 26년)에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명정을 받았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이학직 정려비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정려는 효자 이학직과 누이동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26년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한 것이다. 효자 이학직은 부모가 병환으로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절개하여 입에 넣어 드리니 누이동생이 나이가 어린데 옆에 있다가 또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렸다. 또한 계모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아 극진히 효를 다하였다.
서천군지 효행편에 이학직은 목은 이색의 후손이며 이승홍의 아들이다. 어버이가 병환일 때 그 누이와 함께 손가락을 찢어 피를 주니 얼마동안 회생하였다. 한집에 두 효자라 하여 읍에서 도에 천거하여 표창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이황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효자 이황은 자를 백원이라 하였고 효령대군의 후예인데 부친이 역모에 연루되자 그 무고함을 밝히기 위하여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관에 진정하기도 하였고 부친이 병에 들자 변을 맛보는 등으로 지성을 다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모든 예의를 갖추어 장례 지내고 40여 년을 하루같이 몸을 단정하게 하고 집례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방백과 어사가 효자로서 포계하여 1847년(헌종 13)에 효자의 명정을 받았고 1859년(철종 10)에는 동몽교관의 증직이 내렸다.

 
 


 

   
 
 
      
     지역     서천군
 
   명칭     효자 정인교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정인교(1819~1879)는 온양 정씨 은우의 차남으로 보령군 미산면 풍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부모님 마음을 한번도 거역해 본적이 없다 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약 한첩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산에서 갖은 약초를 구하여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못다 이룬 효성을 묘소 앞에서라도 이루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여 비가오나 눈이오나 3년동안 묘소를 지키며 살았고 죄지은 자식이 하늘을 봐서는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며 방갓을 쓰고 움막에서 살았다 한다.

 
 


 

   
 
 
      
     지역     서천군
 
   명칭     3.1운동 기념비
 
   구분     기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1919년 일어난 거국적인 3.1운동에 우리고장에서도 3.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고시상, 이동홍, 김인두, 박재엽, 정일창, 양재홍, 송기면, 송여직, 나상준, 이승달, 조남영, 유성열, 이근호, 임학규씨 등이 선두에서 이끌었다.

이러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1987년도에 군민들의 합심과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마산면 신장리에 3.1운동기념비를 세웠다.

 
 


 

   
 
 
      
     지역     서천군
 
   명칭     김해김씨, 경주김씨 정려문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김해김씨는 김해중의 딸로 나주 나씨 나두경에게 시집왔는데 남편이 북관(함경도)에 출정하여 3년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남편의 죽음을 현몽하고는 졸도하여 쓰러져 식음을 전폐하고 14일만에 작고하였다.
경주김씨는 김송익의 딸로 나봉찬에게 시집와서 남편이 중풍으로 4년 동안 자리에 눕자 병간호를 하는데 늙고 미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병간호함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병세는 악화되어 남편이 작고함에 일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는 남편의 뒤를 따랐다.

 
 


 

   
 
 
      
     지역     서천군
 
   명칭     맹사성 효자비
 
   구분     비석
 
   시대     조선(충청도)
 
   관련인물     맹사성(孟思誠) 
 
 
 
   내용
  

맹사성(1360-1438)은 조선시대 3대정승의 한 사람이다. 호는 일명 고불이라 하였으며 맹희도의 아들이다. 벼슬은 우의정에 그치고 시호는 문정이다. 지극한 효심이 있어 부모 삼년상에 무덤에 시막을 짓고 시묘살이하니 묘 앞에 잣나무가 산돼지에 부딛쳐 말라죽음으로 그가 그 나무를 껴안고 우니 이 날밤 산돼지는 범의 먹이가 되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일화가 있다. 태종의 사위 도위(都慰) 조대임이 거칠고 방종하여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함으로 그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집의(執義) 박안신과 더불어 사헌부에 자리하여 곤장을 때려 죽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에게 벌을 주지 않고 정승벼슬을 주었고 세종때에도 정승으로 있으면서 항시 흑우(黑牛)를 타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흑우정승이라 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목은 이색 선생 묘
 
   구분     묘소
 
   시대     고려(하남도)
 
 
 
 
   내용
  

목은 이색(1328-1396)은 한산인으로 자는 영숙, 호는 목은이며 여말 삼은의 한사람이다. 14세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였고 1353년(공민왕 2) 괴과(魁科)에 들었으며 다시 정동성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1367년(우왕 3)에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되어 금천, 여흥, 장흥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저서에 <목은문고> 와 <목은시고>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지역     서천군
 
   명칭     반공오열사
 
   구분     비석
 
   시대     독립후
 
 
 
 
   내용
  

반공오열사(김달식, 양태순, 임상덕, 신윤식, 최승상)
6.25전쟁 발발 후 7월 13일 밤 구국 결사대를 조직하고, 연도밖에 있던 우리 군함에게 적의 동태를 통보할 것을 결속하고 제 1차로 우리 함대와 연락이 성공되어 장항 제련소 뒷산과 비인 월명산에 있는 적을 함포사격으로 쳐부수게 하고 밤에는 서천 도만 웅천 등지에서 신호탄을 올려 적 진지를 부수는데 활약하고, 제 2차로 연락코져 송석리 아목섬에서 배를 타려다 선부의 밀고로 북 내무서원에게 붙잡혀 9월 9일 대전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국. 이러한 용감한 반공오열사의 영령을 추모하고 안보의식 고취를 위하여 위령탑을 건립.

 
 


 

  
 
 
      
     지역     서천군
 
   명칭     비인향교
 
   구분     향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이 장려되면서 고려시대의 향교체제를 재정비하는데, 그것은 태종때(1407년, 태종 7)였고, 비인향교도 이때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비인향교의 배치는 극히 정제되고 엄격한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 즉, 중심축선을 설정하여 모든 건물이 이 중심축선을 중심으로 좌우대칭되게 배치하였다. 또한 배치하고 있는 대지조건이 구릉지여서 뒤로 갈수록 상승적 위계성을 갖게 된다.
맞배지붕의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축대를 쌓아 평지보다 높게 지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동서재와 동서무는 없다. 대성전과 명륜당사이에 내삼문이있다. 명륜당 앞에는 외삼문이 있고 약 100미터 앞에 홍살문과 입구 도로변에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에는 "하마비"라는 글자외에 다른 내용은 없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 앞마당을 두고 축대를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여 명륜당을 배치했다. 명륜당 후면 구릉에 축대를 쌓고 대지를 조성하여 대성전을 배치했다. 공간구성은 크게 세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진다. 첫 번째는 외삼문과 명륜당 사이의 공간이고, 두 번째는 명륜당을 포함하여 내삼문까지의 공간이며 세 번째는 내삼문을 들어서서 대성전이 있는 묘당공간이다. 이 세 개의 공간은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담을 포함하여 모두 대칭으로 구성된다.
이와같은 대칭구조는 공간을 엄숙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특히 대성전과 같은 사당의 경우 이러한 공간구성이 필요하다. 구릉지에 배치된 다른 향교와 같이 전학후묘식 배치이고 좌향은 인좌신향(寅座申向)이다.
 
 


 

   
 
 
      
     지역     서천군
 
   명칭     사효자 평해 구공 기적비각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 비각은 평해구씨 구광수와 광산김씨 사이에서 출생한 4명의 아들 병례, 병순, 병희, 병하가 부모님을 극진히 모신 것을 칭송하기 위하여 후손 구택현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이다. 병례, 병순, 병희, 병하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항상 어버이 섬기기를 아침저녁으로 기쁜 얼굴로 대하고 하루에도 여러번 잘못된 점이 없는가를 반성하였다. 또한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여 물고기즙이 드시고 싶다 하자 한 겨울에 잉어 2마리를 잡아 다려드려 생명을 4개월 연장하였다. 어머니 병환에도 정성을 다해 간호하길 아버지와 같이 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서천향교 대성전
 
   구분     향교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홍살문가의 직선상에 외삼문을 두고 전면에 명륜당을, 후면에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식 배치이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곧이어 구릉에 계단을 두어 대지를 조성한 다음 명륜당과 동서 양재를 배치하였다. 명륜당이 있는 이 공간을 '강학공간'이라 부른다. 강학공간에는 명륜당을 앞에 배치하고 뒤에 마당을 조성한 다음 마당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마당 북편으로 계단을 만들어 이 계단을 오르면 대성전이 있는 묘당공간이 된다.
묘당공간에 들어서면 앞마당을 중심으로 북편에 대성전을, 좌우에 각각 동무와 서무를 마주보게 배치해 두었다.
향교내에는 대성전, 양무, 명륜당, 양재, 그리고 내외삼문을 두는 것이 기본적인 건물구조이다. 그러나 대부분 동서 양무가 없거나 동서 양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서천향교에서와 같이 기본적인 건물을 두고 있는 경우는 충청남도에서도 36개중에서 서천을 비롯하여 공주, 금산, 천안, 대흥, 면천, 서산 등 7곳밖에 없다.
명륜당은 1873년(고종 10) 군수 이회창때에 중수되었고, 1918년에는 동무와 담장, 1924년에는 대성전이 수즙(김상준)되고, 1931년의 중수(나석기), 1938년의 중수기(군수 이정기), 1936년 서무중수(나도우), 그리고 1950년의 중수(구재성)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지역     서천군
 
   명칭     선산김씨, 용궁전씨 정려문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 정려문은 조훈의 처 선산김씨와 조진구의 처 용궁전씨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로 원래는 둔덕리 조씨 종가의 솟을대문에 명정현판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정려문은 서천지역에서는 유일한 정려문 형태로 남아있는 유적이었으나, 1995년 정려를 새로 건립하면서 현상이 바뀌어졌다.
두 열부는 조손간으로 선산김씨는 덕성을 갖추고 절도있는 행실이 남보다 뛰어나 남편이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고, 겨울에는 뱀으로 몸의 원기를 보호하도록 하였으며 용궁 전씨는 남편이 죽으려할 때 넓적다리를 잘라 난도질하여 죽을 끓여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선산김씨, 용궁전씨 정려문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 정려문은 조훈의 처 선산김씨와 조진구의 처 용궁전씨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로 원래는 둔덕리 조씨 종가의 솟을대문에 명정현판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정려문은 서천지역에서는 유일한 정려문 형태로 남아있는 유적이었으나, 1995년 정려를 새로 건립하면서 현상이 바뀌어졌다.
두 열부는 조손간으로 선산김씨는 덕성을 갖추고 절도있는 행실이 남보다 뛰어나 남편이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고, 겨울에는 뱀으로 몸의 원기를 보호하도록 하였으며 용궁 전씨는 남편이 죽으려할 때 넓적다리를 잘라 난도질하여 죽을 끓여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

 
 


 

 
 
 
      
     지역     서천군
 
   명칭     열녀 노격 처 고령 박씨, 효자 노경인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이 정려는 고령 박씨(노격의 처)의 열행과 그의 아들 노경인의 효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명정하고 1688년(숙종 14)에 건립된 것이다. 열녀 고령박씨는 정유왜란(1597년)때 남포의 아미산(현재의 보령군 미산면) 부근으로 피난을 가다가 왜적을 만났는데, 이때 남편이 왜적에 대항하다가 굴복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에 부인인 박씨 또한 물에 뛰어들어 남편의 뒤를 따라 열행을 실천하였고 부모가 모두 물에 뛰어들자 이를 본 아들 노경인 역시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경인의 처 박씨는 등에 3살난 아이를 업고있어 인근 숲으로 도망가 후손을 잇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아버지는 충으로 죽고, 처는 열로 죽고, 자식은 효로 함께 죽게되자 사람들은 삼강을 실현한 뜻으로 그곳을 삼강연이라 불렀으며, 산봉우리는 삼강대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지역     서천군
 
   명칭     열녀 박후진 처 김해김씨 정려
 
   구분     정려
 
   시대     조선(충청도)
 
 
 
 
   내용
  

열녀 김해김씨는 17세에 박씨집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다가 시부모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극진히 치루었다.
또한 남편이 병석에 눕게되자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죽자 그 뒤를 따라 자결하려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 아들을 훌륭히 키웠으며 아들이 장성하자 남편이 사망한 같은 달 같은 날에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다.
이같은 열행에 감탄한 향중의 유림들이 상신하여 조정에서는 1894년에 명정을 받아 정려문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