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한은 자가 한지(漢之), 시회(時晦)이고, 호는 기재(企齋), 낙봉(駱峯), 청성동주(靑城洞主) 등으로 불리었다. 중종 초기에 문과에 합격하여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고 이후 18년간 여주(驪州)에 칩거하였다. 위의 시는 이 기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신륵사는 바로 여주의 유명한 사찰이다. 한때 뜻을 모아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동지들은 대부분 유배되거나 고인이 되어버렸고 자신은 시골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데, 위의 시에서는 그런 비분한 감정을 찾을 수가 없다. 마치 팔자 좋은 선비가 절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비로 인해 하룻밤 더 머물게 된 듯한 분위기이다. 또 봄을 상징하는 시의 소재로 도리화(桃李花) 같은 화려한 봄꽃과 푸른 초목, 꾀꼬리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유독 청각을 자극하는 소재가 첫 구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쓰였다. 봄비 소리, 비에 불은 강물 소리, 멧비둘기 소리 등은 계절을 드러내지만 화려한 시각적인 자극보다는 좀 더 은근하고 차분하게 다가온다. 멧비둘기가 울어대고 개살구꽃이 피었으니 4월쯤 봄이 한창 무르익는 시기였을 것이다. 봄비가 진종일 내려 절 앞의 강물이 불었으니 물 구경도 좋이 할 만 하다. 시끄러운 마음을 한 곁에 제쳐두고 세상 먼지 벗어난 이 절에서 물소리, 새소리 듣고 쉬다 가라고 비는 일부러 그치지 않고 나를 붙들어 둔다. 그저 그뿐이고 원망도 비탄도 강개함도 없으며 자신에 대한 탄식도 과거에 대한 회한도 없다. 그래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그의 시를 “맑고도 꿋꿋하여 좋아할 만하다[淸健可愛]”라고 평했나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