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량은 27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활약한 무장이다. 명도(鳴渡), 첨산(尖山), 예교(曳橋)를 비롯해 여러 곳의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전사한 후, 그는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대박산에 비은정(費隱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한다. 그곳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며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삶을 보내고 있었다. 46세에는 공신으로 녹훈되기까지 하며 남부럽지 않은 여생을 보내던 그는 70대에 또다시 전란을 마주하게 된다. 정묘·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지자 몸속에 흐르는 무인의 피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칠십 노쇠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숱한 전투에서 함께했던 오래된 검을 어루만져 보지만 이젠 검을 휘두르기도 힘든 나이였다. 그저 위태로운 나라를 걱정하며 홀로 근심하고 눈물지을 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기 마련이다. 젊은 시절보다 신체 기능은 저하되고 과거 아름답던 모습도 하나둘 잃어 간다. 이 장군도 이러한 자연의 법칙 앞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그 역시 늙어 가는 과정에서 오는 상실감에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늙음 그 자체보다 늙음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구할 수 없는 무인으로서의 절망감이었다. 이 작품은 난삽한 고사를 끌어온다거나 시어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심정을 투박하리만큼 진솔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노쇠한 장군의 탄식에서 느껴지는 장엄한 비애와 숭고한 애국심은 결코 옅지 않다. 후대 사람이 그의 시를 평가하며 ‘기상과 절의가 있는 사람은 한마디 짧은 말을 하더라도 그의 말을 아끼고 사랑하여 보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