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양력 1월 20일은 절기로 대한(大寒)이다. 실제로는 소한의 추위가 더 맹렬하지만 이름 때문에 그런지 대한이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로 인식되곤 한다. 대한 이후에는 추위가 한풀 꺾이고, 며칠 있으면 봄소식을 알리는 입춘을 맞이하니 대한은 따뜻한 봄을 향한 마지막 관문이다. 그래서 이때쯤이면 남은 추위를 어찌 보낼까 하는 걱정보다는 다가올 봄날에 대한 기대가 앞선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자연의 변화는 우리 인생살이의 굴곡과도 비슷하다. 매서운 겨울 마냥 어렵고 힘든 때가 있으면 따뜻한 봄날처럼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있다. 대한과 같은 힘든 고비만 잘 견뎌 내면 분명 좋은 날은 오게 마련이다. 이러한 인생의 법칙을 잘 표현한 속담이 ‘대한 끝에 양춘(陽春) 있다.’이다. 이 시의 지은이 의암 유인석 선생은 조선 말 위정척사 사상으로 잘 알려진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8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스승 이항로와 함께 상경하여 혼란한 민심을 목도하였고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화서학파의 동문들과 의기투합하여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시행하자, 선생은 일제의 만행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대의 규모는 한때 3,000명이 넘을 정도였지만 제천 전투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은 관군에게 패해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다. 선생은 본거지를 서간도로 옮겨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리의 횡포로 불가피하게 의병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선생은 망명 중에도 두 차례 귀국하여 고종을 접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하였으나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에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都總裁)를 맡아 의병 세력들을 규합하고 합병 반대 서명 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일본의 공작으로 연해주의 항일 운동가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다시 만주로 거점을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망명 온 지사들을 모아 항전을 준비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74세의 일기로 한스러운 생을 마쳤다. 이렇듯 모진 삶을 살았던 선생이기에 대한을 맞아 쓴 시에는 큰 울림이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조국에도 좋은 시절이 올 것이란 확신과 그날이 온다면 혹독한 추위와 같은 고난쯤은 얼마든지 견디겠다는 선생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다. 선생이 만리타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것은 이러한 확신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봄날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의 말대로 대한이 지나 봄날은 다시 왔고, 그 즐거움은 새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