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이 이젠 음력으로도 하마 보름이 지나고 절기로도 입춘을 넘겨, 겨우내 웅크려 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바짝 메말라 있던 나뭇가지의 끝에서도 따뜻한 봄에 대한 희망이 싹트고 있습니다. 봄은 이제 저만치 서 있어, 손짓만 해도 곧바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봄은 천지간 뭇 생령들의 바람대로 조만간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 줄까요? 요새 날씨를 보면 한겨울에 비해 기온이 한결 높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왠지 한겨울의 추위보다 이맘때의 추위에 몸을 더 떨게 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따뜻한 봄을 갈망하는 마음의 작용이 가장 큰 듯합니다. 봄이 됐고, 봄이 됐으니 따뜻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한겨울 추위에 대한 공포어린 긴장을 몰아내고, 그 느슨해진 경계를 봄추위가 비집고 들어와 몸을, 더 나아가 마음을 떨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봄이라는 계절도, 달력이라는 물건도 인간이 자연현상을 관찰하여 어림잡아 만든 허울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따뜻하지 않은 봄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따뜻한 봄은 어디에 있을까요? 퇴계 선생은 49세가 되던 1549년 12월에 풍기 군수로 있다가 상관인 경상 감사에게 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을 요청했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자 바로 귀향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 고향에 있으면서 이 시를 짓습니다. 이 시를 짓게 된 계기가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이라고 바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고향에서 맞이한 봄은 생각보다 춥습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고 근무지 무단이탈로 인해 처벌을 받았으니 심사가 편치 않았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 차가운 온도를 느끼며 위축되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대로 떨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난로에 땔감을 넣어 세상의 차가운 공기를 막는 결계를 칩니다. 시나브로 온기가 퍼져 이젠 더 이상 춥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안에서 책을 뽑아 들고 남으로 난 창 아래에 앉아 흐붓이 쏟아지는 환한 빛을 맞으며 고요히 읽습니다.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세상살이가 마음과 같지 않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세상이 아무리 봄이 왔다 속여도 그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는 법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봄인데 나만 겨울이라는 생각에 더욱 기가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행복하게만 살기에도 짧은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퇴계 선생이 했던 것처럼 나의 행복을 위해 봄이 당장 오지 않았더라도 나만의 작은 봄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원하는 일을 당장은 이루지 못해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원하는 일을 성취할 힘을 기르자는 말입니다. 오늘 내가 힘들다면 학원을 하루쯤은 빼고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라디오를 들어도 좋을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의 봄을 나도 따뜻하게 느낄 날이 조만간 오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