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룡 1901-1931
photographer Unidentified
사진 - 1931년5월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여성노동자 강주룡.
항일 노동운동가. 평원고무공장 여공 파업과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로 평가받는다.
1901년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간도로 건너가 7년 동안 살다가 1920년 퉁화현[通化縣]의 최전빈(崔全斌)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의 죽음으로 24세 때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평원고무공장 직공으로 들어가 집안 살림을 꾸려가던 중 1931년 5월 16일, 회사측의 일방적인 임금인하 통고에 반발해 여공 파업이 일어났는데, 강주룡은 같은 달 28일 여공 49명과 함께 파업과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자 목숨을 끊어 세상 사람들에게 평원공장의 횡포를 호소하자는 마음을 먹고 광목 한 필을 사가지고 을밀대(乙密臺) 지붕 위로 올라가 100여 명의 산행객을 상대로 일제의 노동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며 9시간 30분 동안 규탄 연설을 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연행된 뒤에도 76시간 동안 단식 농성을 하다가 검속 기간 만료로 풀려났으나, 그해 6월 9일 다시 동료 노동자 최용덕과 함께 검거되어 옥중 단식을 하던 중 정신쇠약과 소화불량으로 보석되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얻은 병마로 같은해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로 평가받는다.
1931년 5월29일 새벽.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 선배가 을밀대 지붕 위에서 던진 말입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않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우리들 다하지 못한 꿈을 함께 싸워 이루어라"
1931년 5월29일 아침 평양 을밀대 지붕위에서 한 여성노동자가 우리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 1인시위를 벌였다. 평양 평원고무공장노조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외친 내용을 강주룡은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중략)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지붕)서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목매 자살하려다 을밀대 지붕에 올라
1931년 5월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은 제멋대로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때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의 절반 수준이었고,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런 임금을 더 깎겠다는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강주룡이 앞장섰다. 평양의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공장의 결과는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천3백여 노동자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였다.
노동자들이 12일 동안 죽자사자 싸웠지만 회사는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5월28일, 평원노동자들은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고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는 노동자 49명 전원해고를 선언하고 한 밤중에 일본경찰을 끌어들여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죽음으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밤중에 광목 한 필을 사서 을밀대 근처로 올라갔다.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고 목을 매려다 '이대로 죽는다면 사람들이 저 여자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려야 할텐데...'하며 궁리를 했다.
어둠 저편으로 을밀대가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건너편으로 던져 넘겼다. 한쪽을 기둥에 묶고 밧줄처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면서 강주룡은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면서 외치고 외쳤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한끼 밥도 먹지 않으면서 완강히 버텼다.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감옥서 얻은 병으로 31년 꽃다운 삶 마감
그 즈음 강주룡은 평양에 있는 다른 노조간부,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 정치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적색노조'라고 불렀던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었다. 6월9일, 노동자 출신 강주룡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을 얻었다. 1932년 6월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병은 다시 점점 깊어갔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하여 안정되게 치료를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동료들의 처지도 어렵고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달 동안 앓아 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13일 오후 3시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했다. 8월15일 남녀 동지 1백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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