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Ok-gyun Yanghwajin Seoul 1894
능지는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는 듯 고통을 준다는 것으로 오랜 시간 극심한 고통을 준다는 뜻이고, 처참은 몸을 나누어버린다는 뜻이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동안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의 개입과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하자 일본으로망명하였다. 김옥균의 어머니와 누이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 김옥균의 부인과 딸은 노비가 되었다.
조선정부의 자객을 피해 10년간 일본을 떠돌았으며, 1894년 중국 상하이로 옴겼으나 호텔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양화진에서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은 후 대역부도옥균 大逆不道玉均이란 깃발이내걸렸다. 갑신정변은 소수지성인들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구분되고, 개혁의지로 일으켰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 구분된다. 왕조질서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갑오개혁과도 구분된다.
1894년(고종 32년) 4월 27일 유해가 선박으로 옮겨졌고, 4월 28일 조선에 도착한 그의 시신은 강화도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되었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1894년 4월 28일자 일본 시사신보에는 양화진에서 고균의 시신을 참시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김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임금(고종)의 이름을 빌려서 민비와 민영익의 십년을 벼르다 벌인 철저한 복수극이었으리라. 아!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시신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어느 기간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시신을 다 모아서 장례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까? ”
— 일본 시사신보 1894년 4월 28일자
그의 가족 역시 연좌제에 의한 처벌이 건의되었고, 생부 김병태는 처형당하고 모친 등은 음독 자결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항렬자를 균에서 규로 바꾸기도 한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고 한다. 김옥균의 죽음은 곧바로 동북아 정세의 외교적으로 확대되었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일본제국은 곧바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언론매체 등을 통해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등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청일전쟁을 향한 일본제국의 국민감정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용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를 본 청년지사 박중양은 분노하였다. 특히 박중양은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라며 분개하였다.
개화파 인사들을 선각자로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와 능지처참, 연좌제 등의 악형을 목격하면서 박중양은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에 일찍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가 일본에 남긴 머리카락으로 일본인들은 도쿄에 그의 가묘를 만들고 위패는 일본의 한 신사에 안치한뒤 제사를 지냈다. 그의 연인인 오타마는 후일 어느 일본인 기업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다른 연인인 마츠노 나카는 딸 사다 를 데리고 행상과 노동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1910년(융희 4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는 그가 생존하여 개혁정책을 펼쳤더라면 한일 병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은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한일 병합을 막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암장한 묘소는 한일 합방 이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로 이전되었다.
김옥균의 암살 사건은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조선과 청은 일본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만국공법과 같은 허울 좋은 세계 공존론을 맹신한 나머지 제국주의가 침투하리라는 예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조선 침략, 나아가 대륙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에게 김옥균 암살 사건은 대단한 호재였다. 김옥균 암살 사건은 장기적으로는 조선 합병, 당장에는 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기막힌 명분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청과 일본은 정면으로 부딪친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갑신정변 [ 甲申政變 ]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1884년 10월 17일(음력, 양력으로는 12월 4일) 오후 6시경, 급진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일본군 200명과 50여 명의 조선군인으로 호위케 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급진개화파는 이튿날인 10월 18일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하였다. 새정부는 형식적으로는 왕실과 연합한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개화파가 개혁추진을 위한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 급진개화파의 권력이었다.
최고 권력기관인 의정부의 좌의정에는 홍영식이, 군사·사법·경찰·외교·통상·인사·재정 등 정부 중추기관의 자리에는 김옥균(호조참판)을 비롯하여 박영효(전후영사 겸 좌포장), 서광범(좌우영사·우포장 겸 외무독판 대리), 서재필(병조참판 겸 정령관), 박영교(朴泳敎:도승지) 등이 배치되었다.
이어 10월 19일에는 새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조로 된 '신정강'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정강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그 동안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발전시켜온 개화사상과 그에 따른 정치적 개혁활동의 총체적 표현이었다.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명성황후가 청(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9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하였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본군인을 철수시켰다. 결국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물었고, 1885년 1월 9일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 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또한 일본은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56786&mobile&categoryId=200000329
참고
http://blog.naver.com/holy918?Redirect=Log&logNo=8004794638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4870
http://www.designersparty.com/
The process of making body and spirit of Korean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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