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滿洲, Manchuria] , 1909. 10. 26. 9 : 25
photographer Unidentified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특별 열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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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이유 1909. 10. 26. 9 : 25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 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관동도독부 검찰관 미조부치타카오(溝淵孝雄)에게 신문을 받을 때 이토를 저격한 15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제2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제3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강제로 체결한 죄
제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제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제8 군대를 해산 시킨 죄
제9 교육을 방해한 죄
제10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제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제12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린 죄
제13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제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제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 안중근 숭모회, <안중근 의사 공판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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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 다음, 러시아 의장대 앞을 지나 환영 나온 각국 영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토와 코코후초프가 나란히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 만철총재, 가와카미 토시히코(川上俊彬) 하얼빈 주재총영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만철이사,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비서관, 무로타(室田) 귀족위원 등이 뒤따랐다.
그때 하얼빈 역 플랫폼 기둥에 달린 시계침은 9시 25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이토는 그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앞을 지나 다시 러시아 의장대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러시아군 의장대 뒤편에 있던 안중근은 이 순간을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로 알고, 가슴에 숨겨뒀던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안중근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하며 회심의 첫 발을 쏘았다. 그때 안중근과 이토와 거리는 불과 열 발자국이었다.
첫 탄알이 이토의 팔을 뚫고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총소리가 주악 소리에 뒤섞여 그때까지 경비병들은 영문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안중근은 다시 혼신을 다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탄알은 이토 가슴에 명중했다. 경비병과 환영객들은 그제야 돌발 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을 먹은 채, 우왕좌왕 흩어지고 도망쳤다. 총을 맞은 이토는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다시 안중근은 이토의 절체절명 마지막 남은 명을 확실히 끊어주고자 침착하게 가슴을 정조준하여 회심의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세 번째 탄알은 이토 복부 깊숙이 명중되었다. 제3탄이 이토를 확실하게 절명시킨 결정의 탄알이었다. 그제야 늙은 여우 이토는 꼬리를 내리고 코코후초프 쪽으로 픽 쓰러졌다.
안중근은 그 자가 혹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일을 대비하여 그 곁을 수행하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수행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세 사람에게도 총알을 한 방씩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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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저격하다
1910년 2월 7일 오전 9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미나베 주조(眞鍋十藏)와 공판 문답이다.
문 : 피고는 작년(1909) 10월 26일 오전 9시를 지나 러시아 동청철도 하얼빈 역에서 미리 준비한 권총을 발사하여 추밀원 의장 공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고, 그 수행원이었던 총영사 가와카미 준히코(川上俊彬) 궁내대신비서관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의 발과 다리 가슴 등에 각각 총창을 입혔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런가?
답 : 그렇다. 발사는 하였지만 그 뒤의 일은 모른다. 그것은 3년 전부터 내가 국사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실행한 것이다.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고,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으로 도대체 이 법원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문 : 피고는 이번 이토를 살해하면 그 자리에서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었는가?
답 :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은 사원(私怨, 사사로운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오직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토를 죽여도 자살 따위의 뜻은 없었다.
문 : 피고의 직접 상관은 누구인가?
답 : 김두성이다.
문 : 피고는 특파원으로서 하얼빈에 왔다고 말하나 그것은 김두성으로부터 지휘를 받았다는 것인가?
답 : 이번 일에 새삼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고, 이전에 연추(煙秋) 부근에서 나는 김두성으로부터 청국과 러시아령 부근의 의병사령관으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날 오후 공판에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3년 간 각처로 유세도 하고 또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도 나갔다. 이번 거사도 한국의 독립전쟁이므로 나는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한 것으로 보통의 자객(刺客, 테러범)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까닭에 나는 지금 이 법정에서 신문을 받고 있으나 보통의 피고인이 아니고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우리는 일찍이 이토는 일본을 위해 공로가 있다는 것은 듣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 천황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는 것을 들었다. 이제부터 그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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