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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金開男, 1853 ~ 1895] 외 2인의 목

천하한량 2016. 9. 23. 02:32



김개남(金開南, 1853년 9월 15일 ~ 1894년 12월 13일)은 조선 말기의 한학자, 동학 종교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손화중과 아울러 농민군 남접의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본명은 영주(永疇), 자는 기선(箕先),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개남(開南)이란 이름은 동학 농민 혁명과정에서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뜻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남원에서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를 비롯하여 전라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1]를 설치하고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그 세를 떨쳤다. 제2차 봉기시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달리 청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북상 도중 전주에서 남원부사 이용헌과 고부군수 양필환을 체포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이들을 참수하였다. 그는 11월 10일 청주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임병찬의 고발로 12월 1일 강화병방 황헌주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12월 3일 임의로 처형하고 그 머리는 서울로 이송되어 12월 25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梟示)했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보내 효시케 했다. 향년 42세였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보국안민"을 주장하던 전봉준 등과는 달리 부패한 조선정부를 부정하고 남쪽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는데 이를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김개남은 제2차 봉기후 청주전투에서 패한후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붙잡혀 전주 서교장에서 즉결처분되면서 재판기록이 있는 전봉준 등과 달리 그의 활약상은 역사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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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Korea, 1895

Photographer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 ~ 1902.6.11] 

김개남 [金開男, 1853 ~ 1895] 외 2인의 목

참고

http://www.chondo.or.kr/bbs/zboard.php?id=sj_holyland&page=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subject&desc=asc&no=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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