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진의 신분은
중인이었고 직업은 역관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이언진은 1763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것을 계기로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에 감탄한 일본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시를 지어 달라 청하고, 이에 앉은 자리에서 수백 편의 시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조선의 문단에 퍼졌다. 함께 일본에 다녀온 성대중은 하루에 세 번씩 사람을 보내 시를 청했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이용휴도 그의 재능을 매우 아꼈다. 안목 있는 비평가로 이름이 높던 이덕무는 이언진이 홍문관의 요직에 올라 외교 문서를 작성해도 될
수준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이언진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출세할 수 없었다.
위의 시는
「동호거실」이라는 제목으로 지어진 157수의 연작시 중 한 편으로, 자신의 신분과 사회에 대한 씁쓸한 마음을 담고 있다. 어차피 죽고 나면
똑같이 썩어 흙이 될 사람들이 양반이니 중인이니 하며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이언진의 재능은 쓰일 곳을 찾기 어려웠다. 양반들 중에는
일개 역관이 양반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시로 외국에서 명성을 떨친 것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열린 마음으로 그의
시를 인정하고 아끼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비주류인 서얼이거나 남인이라 그를 위해 힘을 써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의 재능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자신의 시가 천 년 뒤에도 썩지 않고 전해져 이언진의 생을 증명하리라는 자부심과 천 년 뒤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는 막막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다.
이언진은 1766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쓴 원고를 불태웠다. 다행히 다 타버리기 전에 원고를 수습하여 그의 유집인 『송목관신여고』가 간행될 수 있었다. ‘송목관’은 이언진의
호이고, ‘신여고’는 ‘타다 남은 원고’라는 뜻이다. 이 원고가 250년 뒤의 우리들에게 이언진의 존재를 증명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이언진이 살던 시대와는 달리 공식적인 신분 제도가 없고 따라서 공식적인 신분 차별도 없다. 그러나 장애인ㆍ성 소수자ㆍ외국인ㆍ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은 비공식적으로 차별받고 있다. 출신지역과 출신학교에 따른 차별도 여전히 남아 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차별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꿈을 이루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언진의 시대로부터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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