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이
세상의 생명체인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에게 죽음 이상의 문제가 있을까. 죽음은 나의 가장 바깥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고, 내 존재를 완결하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죽음은 그것을 명료하게 의식할 때,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일깨워 그 어떤
일상적인 세상의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자기 존재를 직면하게도 한다. 옛 현인들은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빠지거나 외면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에 얼굴을 맞대고 늘 삶의 일부로 여겼던 듯하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결국 삶을 더욱 의미 있고 진지하게 살아가기 위한, 나아가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승화시키려는 방편이었으리라. 자기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挽詩) 역시 그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창작물인 것이다.
노수신은
본관이 광주(廣州)로,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ㆍ암실(暗室)이며, 중종, 명종, 선조 연간에 활동한 문신이자 시인이다. 29세에
문과의 초시ㆍ회시ㆍ전시에 모두 장원을 하고 곧바로 청요직에 올랐으나, 을사사화로 벼슬에서 쫓겨나 충주로 귀향하게 되고, 곧이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33세의 나이로 순천을 거쳐 진도로 유배된다. 이후 19년 동안 섬을 떠나지 못하였고 51세가 되어서야 육지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선조
즉위 후에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노수신은 진도에 유배된 직후 스승이자 장인인 이연경(李延慶)의 부음을, 연이어 동서이자 벗인 강유선(康惟善)의
장살(杖殺)과 함께 사화에 연루되었던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들었다. 그 무렵 그는 늘 자기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기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격정적이면서도 곡진하고 진솔해질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뛰어난
남자이고, 온 산하를 품을 만큼 거대한 포부를 지녔으며,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라곤 털끝만큼도 짓지 않았다는 짐짓 과장된 표현도 죽음 앞이라
수긍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후한 때의 선비 서치(徐穉)가 술에 적신 솜과 닭고기를 갖고 와서 문상하듯이 숱한 선비들이 조문을 오고, 관청에서
관리들이 시신을 덮을 이불을 점검해 주겠지만, 그들에게 나의 죽음이야 세상 사람의 일상적 죽음일 뿐이지 무어 특별할 게 있으랴. 어차피 죽음은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나만의 고독인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실존이 개체로서의 자연 생명에 그치는 것일까. 우리는 오랫동안 조상, 부모 형제
등 관계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존재 의의를 가져왔다. 결국, 시인의 넋이 돌아갈 곳은 어디겠는가. 그에겐 죽음도 부모 형제와 함께하고자
하는 처절한 소망의 역설적 표현이리라.
죽음은 끝내 불가지의 영역이고, 금기시할 문제일까. 공자는 귀신과 죽음에 대한 제자
자로(子路)의 질문에, 그 불가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귀신보다는 현실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가치, 죽음보다는 삶으로 관심의 방향을
이동시킨 바 있다. 삶 속에 늘 죽음이 함께 있음을 인지하고 죽음을 통해 삶의 진지한 의미를 모색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희열이요 실존의 겸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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