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에
살았던 성암(誠菴) 윤석희(尹錫熙)가 지은 장편시 가운데 일부이다. 이 시는 동짓달 보름날 친척 간에 모이는 작은 술자리에 갔다가 거나하게 취한
뒤 집으로 돌아와 꿈을 꾸고 나서 새벽에 지은 것으로, 1938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3년째 되는 해에 있었던 일이다.
성암은 통덕랑(通德郞) 윤탁규(尹卓逵)와 동래 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한 달 만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모친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중에도 자녀들의 가정교육에 남달리 정성을 기울였는데, 한번은 슬하의 형제들을 불러놓고 “너희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행동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만일 옳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면 과부의 자식이라서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할 터이니, 이점을
특히 유념하여 가문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이 늘 뇌리에
남아 있다가, 꿈속에서 그 그리움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만나고도 기쁘고 애틋한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인식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한 상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체하지 못할 격정에 사로잡혀 통곡만
하다가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그간의 회포를 풀지도 못하고 영결의 인사도 고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꿈에서 깬 뒤에는 그저
방문을 열고 하늘에 걸린 달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다하지 못할 통한을 품은 채로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는 하해(河海)와 같은 존재이다. 자식의 허물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넉넉히 포용하고, 자식의 일에 관해서는 온갖 시련을
감내하면서라도 묵묵히 기다릴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아는 자식의 정은 지극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어머니의 살뜰한 마음을 ‘사모곡’이란 제목으로 노래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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