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이 지은 칠언고시 가운데 일부분으로, “청학동은 지리산의 골짜기 이름인데, 세상에서는 선경(仙境)이라 전해진다. 상국 이규보*가
이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시 한 수를 남겨 은둔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靑鶴洞知異山洞名 諺傳僊境 李相國奎報尋之不得 留題一首
以寓逃世之志]”라는 원주(原註)가 붙어있다. 위의 시에서 태재는 청학동을 선계(仙界)가 아닌 그저 현실에 존재하는 그윽하고 청정한
공간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한(漢)나라 때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 약을 캐며 살다가 신선을 만났다는 유신(劉晨)ㆍ완조(阮肇)의
고사와 탈속적 선경으로 불리는 무릉도원의 고사도 모두 속세의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지어낸 허황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청학동은
현실에서 치이고 지친 심신을 쉴 수 있는 한가롭고 아늑한 공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외에는 더 이상의 고상한 품위나 취미를 붙이려 하지
않았고 그럴만한 여유도 그에게는 없었다.
태재는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성간(成侃), 김수온(金守溫), 서거정(徐居正), 이보흠(李甫欽), 권람(權擥), 강효문(康孝文) 등이 그 문하에서 배출되어 조선 초기의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이다. 또 세종(世宗)도 그의 학문을 존중하여 집현전 학사들을 보내 자문을 구하였으며, 사림(士林)에서는 이를 영광으로 여겨
스승의 예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태재는 1409년(태종 9) 아버지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배되고, 이후 19년 동안 젊은 시절 대부분을 객지에서 보내며 고뇌에 가득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타의에 의해 보편적인 삶조차
박탈당한 채 유배생활을 하던 태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포부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는 생각이 늘 간절했을 테고, 동시에 이처럼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지친 심신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간절한 염원과는 달리 현실의
장벽은 높기만 하였고, 다시 한 번 그 간절한 염원만큼이나 깊은 좌절감을 맛보았을 터이다. 이에 태재는 청학동을 찾아다니다가 정작 선경은 찾지
못하고 은둔의 뜻을 비치는 시만 남겨 놓은 채 산을 내려갔던 선배의 구선(求仙) 의식에서 가식적인 면을 보게 되고, 이 일에 대해 자신의 일신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군신(君臣) 간의 큰 의리를 저버리는 구차한 행동이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점이 바로 당시 태재의 눈에 비친 청학동의
불편한 진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또 이러한 생각은 문집에 보이는 “누가 죽음을 싫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군자는 기꺼이 충에
죽고, 누가 살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장부는 또한 구차히 용납됨을 부끄러워한다.[孰不惡死兮 君子樂死於忠 孰不欲生兮 丈夫且恥其苟容]”라는
말이나, “나아가지 않아야 하는데도 나아간다면 의(義)를 잊고 녹(祿)을 쫓음이니 명(命)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나아가야 하는데도 나아가지
않으면 자기 몸만 깨끗이 하고 인륜을 어지럽힘이니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不可出而出 則忘義以徇祿 非知命者也 可出而不出 則潔身而亂倫
非知道者也]”라는 표현처럼 이후 그의 출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에 의하면,
자신이 최당(崔讜)과 함께 지리산의 청학동을 찾아 은거하려고 하다가 그곳을 찾지 못하고 바위에 시만 남기고 돌아왔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인로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이인로가 바위에 남겼다는 시는 저간의 곡절과 함께 파한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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