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권도자료 ▒

가라데 태껸 그리고 태권도

천하한량 2014. 8. 21. 00:49

가라데 태껸 그리고 태권도
밖에서 본 태권도史 2009/02/14 23:57   http://blog.hani.co.kr/ci04/20348

ynh_ci04.jpg
1959년-최초태권도교본 앞패지에 실린 사진
위:6단 엄운규씨 청도관장-
좌:6단 남태희대위 오도관장, 우:6단 현종명씨 학생연맹장-
 
태권도 역사論에서 古代史(고대사)가 하는 역할은 가라데로부터 벗으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 하에서 있었던 우리의 피해 의식과 이승만 정권 밑에서 민족주의를 앞세워 아부한 학자들, 그리고 김운용 그늘에서 한자리(?)차지하고 현재까지 長壽(장수)하는 임원,학자들이 만들어낸 협작품이 현재 국기원과 서울대 태권도부등 에서 주장하는 태권도 역사 이다.
박정희 정권 18년 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지내왔던 세대는 멸공과 반공이란 단어가 익숙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의 개념도 모러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공산당은 늑대 얼굴을 한 인간으로 교육 받았다.  
 지금은 북한을 다녀오는 것은 자랑으로 회자되고, 늑대의 얼굴을 만들게 한 장본인(김정일) 아들이 한국을 방문할려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반세기도 안된 隔世之感(격세지감)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홈패이지에 태권도에 열정적인 한 학생이 들어와 내가 쓴 태권도 역사에 반론을 하면서 항의한 일이 있다.

그는 태어 나면서부터 김운용의 태권도 공화국 안에서만 수련한 학생이고, 지금도 그 공화국 안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태권도를 수련 하고있다. 공산당은 늑대인간으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 역시 태권도는 삼국시대에 흥행한 무도로 철저하게 인식 되어 있었다.
 
필자 역시 김운용 공화국에서 시작해 태권도5단 까지 수련한 태권도인이다.
그렇다면 김운용 세대,그 이전에 태권인들은 이 세상에 한 명도없단 말인가? 초창기 태권도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고국을 떠나 살고 있고 그 밑에 1세대들은 김운용의 분위기게 맞쳐 지금의 태권도사를 창출해냈다.
태권도 역사의 논쟁은 삼국시대 부터 존재 했던 것으로 부터 출발한다. 박정희의 장기정권(18년)에서 태권도의 역사는 보기좋게 안착 한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전두환부터 김대중 시대까지 김운용은 체육계의 거물로서 정치적 회오리에 휘말리지않고 버틴 발군의 정치인이다.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 까지 태권도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었지만, 無所不爲(무소불위)했던 김운용의 태권도 30년 독재가 작금에는 태권도 개혁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하는 기의한 현상을 만들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이란 막강한 힘을 빌어 그 밑에서 한때는 녹을 먹던 사람들까지도 여기 저기서 김운용 독재에 항거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태권도의 고대사를 논하는 학자들 조차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출발했다고 용기 있게 말하는 자는 없다. 우리 국민들의 반일정서를 눈치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한다면 반일 감정하고 태권도를 연계할 필요는 없다.
태권도가 이데올르기에 휘말려 역사 자체가 왜곡 되어선 안된다. 이제는 태권도의 뿌리를 우리 안에서 인정하고 재정립해서 가라데로부터 완전히 벗으 나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태권도의 전신은 당수도, 공수도인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즉,태권도의 시작은 가라데라고 할수 있다.   고구려의 무용총을 오늘날 태권도의 기원이라고 추정 하면서 부터 다른 무술계 에서도 앞 다투어 태권도의 고대사를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적 고증도 없이 만들어낸 태권도 역사에 이용 하려다가 망신당한 예가 "태권도와 태껸"과의 관련이다.
물론 태껸이 오늘날 跆자의 발견에 영향은 있었겠지만 태권도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짜집기식으로 태권도사를 만들다 보니 한때는 태껸이 태권도의 전신이라고 주장한 한심한 학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태껸이 복원 되고 성행 하면서 여러 태껸 단체가 나오자 태권도는 태껸과의 관계 에서 슬그머니 꼬리는 감추는 추태를 보인것이다.  
당수도, 공수도가 이땅에 들어온 과정은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져 있어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하고, 가라데와 태권도를 일본과 한국에서 발간한 문헌상으로 비교해보면, 공수도의 창시자 후나고시가 생전에 집필한 공수도교본 67쪽을 보면 型(형)부분에서 太極初段(태극초단)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KARADE HUNAGOSI.JPG
(가라데의 창시자 후나고시 )
그리고 1959년10월 30일 태권도란 무도명으로 이땅에 처음 최홍희총재가 집필한 -태권도교본-재판(1960년) 132쪽을 보면 같은 太極型(태극형)이 소림류로 분류되어 있었다. 물론 이책에는 平安(평안)1型부터 5型까지와 鐵騎型(철기형)까지 기록 되어 있었다.


KARADEKEOBON.JPG

 
(1920년대 후나고시 가라데 창시자가 쓴 교본에 동작, 태극초단형)

그리고 창헌류(최홍희의 호=창헌)로 분류한 화랑형,충무형,을지형,충장형,들이 새로운 태권도 (형)의 이름으로 태권도교본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책은 완성된 태권도 교본이라고 할수가 없다.
다음은 현재 한국에서 수련하는 태극 품새(형)과정을 보면, 1970년대 各館(각관)들의 통합과 함께 출발한 국기원에서 태극1장-8장의 탄생 과정은 이종우 관장 개인의 공수도 애착이 짙게 숨어 있다.
그는 태권도 명칭 통합 당시 공수도를 한사코 고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태권도 요직에서 공수도형의 이름이 같은 "태극형을" 만든 것을 보면 공수도에 집착한 것을 충분히 이해 할수가 있다. 물론 한국,중국,일본은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音으로 불리는 태극-이란 말은 먼저 사용한 공수도에서 탈피하기 힘들다.  
 
후나고시의 공수도교본 16쪽을 보면 唐手(당수)가 오끼나와에서 출발해서 뭍으로 상륙하면서 자기식의 무도로 재창출 되었으며, 唐(당) 같은 同音(동음)인 空(공)으로 바꾸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당수와 공수는 표기는 다르지만 同音(동음)인 -가라데-가 되는 것이다.   즉-唐手(당수)역시 일본식 발음은 가라데가 되고 空手(공수)또한 가라데가 되는데 착안하여 후나고시가 가라데를 空手道(공수도)로 표기한 것이다.
당나라 唐(당)자와 手(수)를 합친 唐手(당수)를 가라데 로 무도명을 바꾸고 후나고시가 자기식으로 창안 한것이 현재 공수도이다.  
필자는 태권도를 만든(국제연맹)당사자인 최홍희에게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총재님! 태권도는 가라데의 잔류가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쓴 태권도사를 보여드리고, 며칠 뒤 그에게 들은 얘기는 의외로 이런 대답을 들을수 있었다.
 "내가 가라데를 안했으면 태권도를 못만들었겠지! 가라데를 했기 때문에 가라데 보다 우수한 태권도를 만든것이야!" 태권도가 우리의 것으로 완전히 전환,발전한 계기가 있었다.
필자는 1973년 제1회 세계대회가 국기원에서 열린 시점이 오늘날 태권도 발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로 많은 사범들과 선수들, 코치들에 의해서 개발되고 만들어진 현란한 발차기는 태권도란 무도명이 명실상부하게 세계에 정착하는 분수령이 된 것이다.
다른 무술에서 볼수 없었던 발차기 만으로도 오늘날의 태권도는 일본과 무술의 본토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울수가 있다.
태권도가 우리것으로 거듭나고 세계 제일의 무도라는 것을 필자는 이렇게 인용해보았다. - 철은 중국에서 나왔지만 그 철로 아폴로를 만 든 것은 미국이다.
중국이 철의 원류를 가지고 아폴로를 자기것이라고 하지않는다.
가라데가 철이라면 태권도는 아폴로가 된다.

-2000년 3월 toronto 에서 글 정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