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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대타-대나무 호구를 아시나요?

천하한량 2014. 8. 20. 23:05

방구대타-대나무 호구를 아시나요?
1960년대 태권도 경기의 특징을 살펴보다
기사입력 2014.06.23 10:39:47 | 최종수정 2014.06.23 10:39:47 | 서성원 | seo@taekwonline.com
 

 

 

1세대 태권도 경기화 반대, 1962년 경기규칙 제정

태권도 경기화는 19619월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되고 196211월 경기규칙이 제정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기화가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태권도가 무도적 성격에서 스포츠로 변환하자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태권도 경기화를 반대한 사람은 황기, 최홍희 등 현대적 의미의 태권도 1세대들이었다.

최홍희는 태권도의 경기화는 태권도 기술의 3대 요소인 형(), 대련(對鍊), 격파(擊破) 중에서 대련만으로 승부를 결정하게 됨으로 불합리하다. (따라서) 시합을 할 때 착용하는 호구가 기술을 완전히 발휘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기는 태권도를 무술로 규정하고, “무술이란 원래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인 대련으로 하는 것이므로 시합이 불가능하다. 기술이 그 형태나 방법에서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므로 경기화는 신중하게 고려돼야 한다며 신중론을 폈다. 그는 또 경기화는 결과적으로 무도정신(武道精神)을 무시하게 되고, (()의 심사제도가 불필요하게 된다며 태권도의 경기화를 반대했다.

홍정표는 무도적인 견지에서 (1세대는) 태권도가 경기화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게 사실이었지만 이종우, 엄운규 등은 태권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로 전환해야 한다며 각 유파별로 제각각 시행되던 경기규칙을 제정하는 데 열성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종우-엄운규-이남석 등이 태권도 경기화 주도

양진방 교수는 해방이후 한국 태권도의 발전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1986) 논문에서 태권도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술에서 경기로의 전환이라며 태권도 경기화는 엄운규 이종우 이남석 등 2세대들이 (자신들이 터득한) 기술을 경기에 적응시키고 발전시켜 경기 태권의 기술체계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태권도는 196210월 제43회 전국체육대회 시범종목으로 참가한 후 196310월 전북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육대회부터 정식종목이 되었다. 전국체육대회에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태권도는 스포츠의 체계를 잡아나갔다. 경기규칙을 제정하고, 경기장 규격 통일, 보호구 및 장비 개발, 심판의 기능과 역할 정립, 선수선발 등 무술에서 스포츠로 변화하는 기틀을 다졌다.

1960년대 초 태권도 경기는 주로 지도관 중앙본관이 있던 한국체육관과 국민회당, 서울운동장 옥외 경기장에서 행해졌다. 이 무렵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몸통보호대(호구)가 등장했다. 1962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경기에서 개인이 직접 제작한 보호구를 가지고 참가했는데, 이것이 태권도 최초의 호구이다. 이로 인하여 현대 경기방식의 직접 타격 및 완전 타격방식이 가능할 수 있게 됐다.

 

대나무 호구 전 방구대타 호구 착용, 68년 몸통보호대 착용 의무화

전주 지도관 출신인 유병룡은 몸통보호대와 관련 초창기에는 얼굴에는 야구를 할 때 쓰는 마스크를 쓰고손끝을 자른 것(얇은 장갑)을 끼고 얼굴을 때리기도 하고검도할 때 입던 호구를 입기도 했다”(장권, 한국태권도경기사연구 참조)고 증언했다. 이는 방구대타(防具對打)’ 호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태권도 경기에서 사용된 몸통보호대는 조선연무관 공수도부 창설자 전상섭의 친동생인 전일섭이 창안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몸통보호대는 196210월 경북 대구에서 열린 제43회 전국체육대회 태권도 시범종목에서 사용되었다. 초창기 몸통보호구는 무겁고 투박했다. 대나무 조각을 얇게 다듬어 광목에 솜으로 감싸고 꿰맸는데, 선수들이 타격을 하다가 손과 발을 다치기도 했다. 이러한 몸통보호대는 조선연무관 공수도부 창설자 전상섭의 친동생인 전일섭이 창안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대한태권도협회는 1968년 경기규정을 개정해 몸통보호대 착용을 의무화했다. 초창기 대회는 경량급(輕量級중량급(中量級중량급(重量級) 3체급으로 열렸다. 1964년부터 무제한급이 추가되어 4체급으로 바뀌었고, 1965년에 핀급부터 헤비급까지 8체급으로 확대됐다.

1960년대 중반 대표적인 대회는 1963년도 한국우수선수선발전(63. 2.국민회당) 1회 전국중고등대학단체대항전(63.6.16.국민회당) 3.1절기념개인선수권대회(64.3.18.동국대강당) 1회 전국태권도신인선수권대회(1965.4.18·한국체육관) 1회 전국중고대종별개인선수권대회(1966.7.23·한성여고) 1회 대통령기쟁탈전국태권도대회(1966.10.28·장충체육관) 등이다. 이 중 서울신문 후원으로 열린 제1회 대통령기쟁탈 태권도대회는 1팀에 6명씩 참가해 선봉, 전위, 중견, 후의, 주장, 후보의 순서로 체급과 관계없이 각 팀에서 선수명단을 제출하고 5명이 순서대로 기량을 겨루는 단체전이었다.

 

마땅한 체육관 없어 서울운동장 옥외서 태권도 경기해

60년대 초·중반, 태권도 경기는 서울운동장(현재 동대문운동장)의 옥외 배구경기장에서 펼쳤다. 태권도 경기를 할 만한 마땅한 체육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로 만든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들과 내빈들을 위해 만든 임시천막, 그리고 천막에 쓰여져 있는 칠성사이다광고 문구와 시계탑 아래의 범표 신발광고가 당시의 시대상과 운치를 느끼게 한다. 또 경기장 뒤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북악산 능선과 그 옆의 택지개발 현장은 60년대 중반의 서울 개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사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동식 마룻바닥을 이음새로 엮어 만든 정방형(正方形)의 임시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이다. 심판들은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모자도 쓰고 신발도 신었지만, 선수들은 맨발에 헤드기어도 없어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당시의 태권도 경기에 대해 이승완 국기원 고문(태권도 국가대표 1)전진하면서 앞차기를 하던 선수가 발바닥에 이음새에서 삐져나온 조각이 박힌 상태로 발차기를 하기도 했다. 햇볕에 달궈진 마룻바닥에서 경기를 한 선수들은 대개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따라서 휴식 시간에는 열기가 오른 발바닥을 물수건으로 식힐 정도였다며 당시 선수들의 고충을 설명했다.

한편 태권도 경기를 연구한 대표 논문에는 2010장권 교수가 쓴 한국 태권도 경기사 연구(박사학위 논문)가 있다.

 

<서성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