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받는 등 유럽 위기가 이전보다 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다른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도 많지만 유럽 위기에 파묻혀 가는 분위기다. 그런 만큼 유럽 위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가 당분간 세계경제와 글로벌 증시의 움직임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된다.
발생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유럽 위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유럽 통합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 통합은 자유사상가에 의해 '하나의 유럽' 구상이 나온 20세기 초를 기점으로 한다면 100년, 구체화되기 시작한 1957년 로마조약을 기준으로 한다면 50년이 넘는다. 역사가 긴 만큼 쉽게 붕괴되기도 어렵다는 의미다.
유럽 통합은 두 갈래 길로 진전돼 왔다. 하나는 회원국 수를 늘리는 '확대(enlargement)' 단계다. 초기 7개국에서 출발한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은 27개국으로, 1999년에 출범한 유로랜드 회원국도 11개국에서 17개로 늘어났다. 유럽 위기만 없었더라면 북아프리카와 동유럽, 심지어는 구소련의 일부 국가까지 포함하는 범유럽 경제권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다른 한 길은 회원국 간의 결속을 다지는 '심화(deepening)' 단계다.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유럽통화동맹(EMU)·유럽정치동맹(EPU)·유럽사회동맹(ESU) 수순을 밝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유럽 통합 헌법으로 상징되는 EPU가 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로랜드 핵심국의 국민 비준 과정에서 부결됨에 따라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 통합처럼 국가 간의 통합은 계획대로 진행돼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 만약 특정 단계에서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면 성공했다고 평가되던 이전 단계도 그동안 잠복돼 왔던 한계가 노출되면서 위기가 발생한다. 유럽 위기도 EPU가 주춤거리는 것을 계기로 EMU의 내부적인 문제가 드러나면서 발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유럽 위기가 제때 해결되지 못함에 따라 그 성격도 크게 변했다. 초기에는 그리스 재정 문제에서 비롯됐지만 이제는 금융 위기로 악화됐다. 이 국면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다. 단일 국가와 달리 유럽은 '통합'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이 사태가 발생하면 곧바로 인접국으로 점염되는 '뱅크 런 도미노(Bank Run Domino)' 현상이 발생된다.
'뱅크 런 도미노'를 막지 못하면 위기 범위는 유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위기로 치닫는다. 대규모 예금 인출로 유럽 금융사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면 경제 여건이 좋은 국가에서 투자 자산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에서 유럽계 자금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
금융 위기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 처리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유로 존 잔존을 고집해 왔던 독일이 그리스 탈퇴 방안에 대해 전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문제가 처리되지 않고서는 유럽 위기의 최후 보루 역할을 맡고 있는 독일까지 점염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판단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그리스 처리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유로 존에서 완전히 탈퇴시키는 '그렉시트(Grexit·Greece+Exit)'와 'G 유로(Greece+Euro)' 방안이다. 'G 유로'는 외형상으로 그리스를 유로 존에 잔존시키면서 독자적인 경제 운영권을 주는 방식이다. 'G 유로'가 선택된다면 포르투갈 등과 같은 경제 여건이 나쁜 회원국들(Bad Apples)도 이 방식을 따라갈 수 있다.
'G 유로'에 이어 'P 유로(Portugal+Euro)'가 탄생된다면 유럽 통합 앞날에는 커다란 변화가 예상된다. 바로 유로화의 '이원적인 운영체계(Two way Band System)'가 공식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 체계는 유로화가 도입 위기 이전에 운영됐던 '유럽 조정 메커니즘(ERM: European Realignment Mechanism)'과 원리가 동일하다. 유럽 통합의 기본 골격도 보완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 통합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통화 통합과 재정 통합이 동시에 달성돼야 한다. 주무 부서로 유럽중앙은행(ECB)과 가칭 '유럽재정안정기구(EFSM·European Fiscal Stabilization Mechanism)', 상징물로 유로화와 유로본드 간의 '이원적 매트릭스(Two by Two Matrix)' 체제를 갖춰야 한다.
금융 위기 막아도 그리스 문제 '그대로'
유럽 위기가 발생한 것도 통화 통합을 달성해 놓고 재정 통합을 추후 과제로 남겨 놓았던 것이 원인이 됐다. 세금 부과에 따른 조세 조항과 재정지출의 하방경직성을 감안하면 초기부터 재정 통합을 달성해 놓지 못한다면 여건이 좋지 않은 국가부터 재정 위기가 발생한다. 이때는 통화 통합을 달성해 놓은 것이 화근이 돼 재정 위기는 다른 회원국으로 급속히 확산된다.
향후 유럽 위기는 ①현 체제 유지(muddling through: 유럽 통합에 대한 회의론 확산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변화 없이 지금 상황이 지속되는 시나리오) ②유럽 통합 및 유로화 강화(bonds of solidarity: 유럽 위기로 붕괴 조짐을 보이는 유럽 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유로본드 도입, 유럽통화기금 설립, 재정동맹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시나리오) ③유럽 통합과 유로화 동시 붕괴(the collapse: 유럽 위기 회원국들이 독자 통화 도입을 위해 혹은 국내외 정치적 압력에 의해 유로 통합을 탈퇴하고 잇달아 경제 규모가 큰 회원국이 탈퇴하는 시나리오) ④유럽 통합 질서 회복(resurgence: 특별한 조치 없이 주변국의 경쟁력 회복과 재정 개선 등으로 회원국 간 불균형이 해소되면서 유럽 통합이 재정 위기 이전 상황을 회복하는 시나리오) 등의 네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
유럽 위기를 계기로 이 같은 많은 문제가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회원국들이 정치적 명분과 경제적 이익 간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지난 2년 동안 보여줬던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세계경제는 진흙탕 속에 헤매는 과정에서 '불황이 장기화(muddling through)'되고 증시는 '숙취(hangover) 현상'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뒤늦게나마 EFSM을 만들어 유로본드를 발행하는 일이다. 이때 이미 만들어진 통화 동맹의 ECB·유로화와 함께 '이원적 통합 형태(two by two matrix)'가 완성된다. 관건은 독일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다. 유로본드 발행에 독일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세계경제와 증시에는 대형 호재가 될 수 있다.
유로본드 발행을 통한 재정 통합이 어렵거나 시간이 걸린다면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통화 동맹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그리스와 같은 경제 여건이 나쁜 회원국들을 조정해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두 가지 방안이다. 하나는 차제에 그리스를 탈락시키는 '그렉시트(Grexit)'와 다른 하나는 유로 존에 잔존시키되 독자적인 운영권을 주는 'G 유로' 방안이다.
'그렉시트'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나 유럽 통합의 역사가 긴 점을 감안하면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반면 'G 유로'는 유로 존 붕괴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면서 그리스가 위기 극복에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고 경기까지 회복된다면 독일 등의 구제금융 부담도 줄어드는 이점도 있다.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으로 구체화된다면 최소한 유럽 위기에 따라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은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용어 설명●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세계경제와 국제금융 시장을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는 차기 위기 후보지를 말한다. 중국의 경착륙, 일본의 엔고 불황, 독일 등의 국채 거품 붕괴, 미국의 재정 절벽 가능성이 '티핑 포인트'로 꼽힌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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