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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農産物)수탈 과 생사(生絲) 목재 (木材)광물 (鑛物)해산물 까지

천하한량 2011. 12. 16. 01:07

 

 

 

 

 

 

 

     일제 (日帝) 의 농산물 (農産物) 수탈 (收奪) 그  현장

 

일제 는 <조선>농민이 힘들여 지은 농산물 수탈 하기위해 산미증산 정책을 강행하며

농토는 동양척식 땅이나 일본 땅으로 둔갑시켜 <조선 농민 >을 영원한 소작인 으로

만들어 주종관계 (主從關係)를 확실히 하고 모든 노동조건을 소작인 에게 불리하게 법제화

했다 . 여기서 땀흘려 수확한 농산물은 모두 인천 군산항 통해 전량 일본땅

으로 실어 날랐다 .

 

수확기 가 되면 , 날이갈수록 착취 가 심해져 생활고 는 극심했고 ,  애써 수확한 쌀을 직접

지게 로 져다 공출이란  이름으로 일제 에 바쳐야 했다 . 소작료 제하고 , 농지세 ,수리조합비,

등 을 제하면 빈털털이 가 되어 굶길 밥먹듯 해야 했다.

 

 

              공출 (郡)단위 로 집계 되어 항구로 실려 나갔다 . ( 당시 전북 군산 미곡검사소 )

 

 

               농촌학교 에서는 학생들 에게 가마니 짜기를 강요하여 소요되는 쌀가마니 를 충당케 했다 .

 

 

               공출한 반출미 가 산처럼 쌓인 군산항 (群山港) 부두 전량 일본 으로 반출 된다 . 

 

 

      정작 농사를 지은 농삿꾼 은 굶어 죽는데 ,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일본인 들은 배두두리며 잘들 먹었으리라 .

 

 

             뿐만 아니라 생사 (生絲) 와 목화 까지 이들은 수탈 했다 . 부녀자 들이 목화를 고르고 있는 사진 .

              아마도 부역 이란 이름으로 노동력 까지 착취 하였으리라 .

 

 

                      1927 년경 목포항 (木浦港)에 집하 면화 이것들도 전량  일본행 이다 . 

 

 

 1930 년대 목재 (木材)까지 반출 , 함북 무산군 연암 부근에서 벌목한 통나무를

뗏목으로 엮어 하류로  운반하는 광경 , 이시기 엔 , 한강 , 임진강 , 등 전국 강 상류 부터 하류에

이르기 까지 많은 뗏목들이 물품운반에  중요한 몫을 했다 .

 

 

           일제 (日帝) 가 수탈 (收奪)한 지하자원

 

       재래식 함지박 으로 사금 (砂金)을 채취하는 원시적 방법을 도광기 (搗鑛器)를 설치,  

        효율적 으로 사금 을 채취하여 수탈했다 .

 

 

 

 

       부역 이란 이름으로 사금채취 현장 에 동원된 사람들 , 이들도 노역비 는 기대할수 없었으리라 , 우측의 감독관 .

      말이 좋아 인부 (人夫)이지 ,  노예 와 뭐가 다른가 ? 

 

                                        금산포 (金山浦) 채광 현장  

 

수완보 형석광업소                 

 

                          해산물 자원 (海産物 資原)  수탈 (收奪)

 

  동해안 통조림 가공공장 을 세워 ,  털게, 가시게, 참게 일본인 경영공장 에서 통조림

전량    일본 본토로  빼 돌렸다 .  1938 년경 동해안 에서 잡은 청어 도 전부 일본 으로 가져 갔다 .

 

산처럼 쌓인 김더미 . 소풍   (당시 원족 이라함 ) 갈때만 먹던 음식인데 , 그만큼 이 귀한 대접을 받던

시대 였다 , 달걀 또한 , 귀한 영양소  였음으로 달걀한줄 (10개)선물 이면  대단한 선물 이 었다 .  

 

 

 

 일본인 들은 우리연해 의 백합 , 굴, 김, 미역, 등을 모조리 수탈 , 일본시장 으로 가져 갔다 . 이렇다 보니 우리의

 먹거리 는  거의 없었다 . 당시 내륙인 은 교통 관계로 공급이 어려워 생선은 더욱 접하기 어려웠다 .

 

 

 일본 으로 출하될  해산물들 ,   1950 년말 쯤 , 우리 김맛 에 길들여진 일본인 들은 국교 도 없는 우리와 비공식적

 으로 과  쌀을 수출입 했던걸로 기억 된다 ,  1964국교정상화  와 동시 <김> 수출이 늘어나 국내는 <김값>이

  폭등한 때도 있어 ,특별한 날 아니면 대하기 부담스런 메뉴가 된적도 있었다 . 어쨋든 수탈의 역사는우릴 헐벗게 했고

  암울한 고통속에 힘겨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만 했다 . 다시는 , 서글픈 민족 이되지 않도록 모두 두눈 똑바로

  뜨고 현실에 급급해 미래를 망쳐선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