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통치 (植民統治) 헌병, 경찰통치(憲兵, 警察統治)
1910년 8월29일 < 한일병합 (韓日倂合)><한일합병, 한일합방(合邦), 경술국치(庚戌國恥)> 라는 조약 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짐에 따라 조선 (朝蘚)의 4243 년 이란 유구한 역사도 사라졌다 , 다만 , 굴욕스런 야수의 얼굴 , 식민통치 라는 일본
의 속국 으로 전락 , 노예가 되어 , 압박과 설움속에 지루하고 잔인한 수탈 의 역사 를 긴세월 허기진 채, 앞일을 가늠
할수없는 암울한 시대를 저항하며 보내야만 했다 .
( 한일병합 직후 덕수궁 (경운궁) 석조전 앞에서 <고종><순종>총독부 간부들 , 중앙이 고종 오른쪽이 순종 ,고종왼쪽 영친왕 ,
옆이 총독 < 데라우치 마사다케 > 이 사진속엔 친일대신 들이 꽉 들어 찼으나 확인방법 이 없다 . )
무단통치 ( 無斷統治) 헌병 ,경찰통치
( 제 1 단계 )
( 무단통치 를 실시한 초대조선총독 < 데라우치 마사다케> 좌측 과
초대헌병 사령관 겸 경무총감 <아까이시 >우측 .
헌병 경찰통치 는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과 동시에 9월 에 창설된 헌병 경찰 제도에서 시작 됐다 .
헌병 이 일반 경찰행정 까지 담당 , 언론 , 집회 , 출판 , 자유 를 박탈하고 즉결처분권 까지 갖었음 으로 한반도 를
공포로 몰아 넣는 무단정치 를지휘하게 됐다 . 조선총독 은 문관(文官)이 아닌 무관 (武官)으로 <일본군 >현역대장
중에서 임명 , 일본천황 에 직속되어 입법권 , 사법권 , 행정권 , 군대통솔권 ,까지 장악하였다 . <일본>은 2만여명
의 헌병 , 경찰과 헌병보조원 을 전국에 배치하여 무단식민통치 (無斷植民統治)를 감행 , 이시기에 민족적 각종단체가
해산, 폐지 되었다 . 눈엣가시 였던 신민회 도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 됐다 . <일본>은 계획대로 강압 , 탄압 ,
공포, 를 조성하며 통치를 입맛대로 강행 했는데 ,
1912 년부터 서서히 시행된 토지조사사업 (土地調査事業)을 기한부(期限付) 신고제 (申告制)를 채택 , 복잡한 신고절차
와 반일 (反日)에 대한 신고 거부, 를 통해 ,이를 알지 못하는 농민들의 토지 를 강제로 침탈 , 소유권이 불 분명한
마을이나 문중 토지, 등을 동양척식주식회사 에 넘겼다 . 넘겨진 토지는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싼값에 팔렸고 ,
제땅을 잃은 농민들은 졸지에 소작인 이 되거나 , 가족이 뿔뿔히 흩어지는 부평초 (浮萍草) 인생이 됐다 . 사법권 까지
총독부 가 갖고 있었음으로 억울함을 호소 할곳이 없었고 . 이외에도 조선총독부 의 허가에 의해서만 회사설립이
가능 했음으로 ,회사령 , 산림령, 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 등의 지배권은 모두 <일본>에 넘어갔다 , 이로서
민족자본 의 설땅과 성장은 철저히 배제 됐다 . 세계 제 1차대전 이 끝난후 1919년 3월 1일 , 3.1만세운동 이
일어나자 ,탄압을 강행했으나 오히려 ,독립운동 이 하나로 일치단결 하는결과를 초래하자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은
더욱 악랄하게 발전한다 .
( 이사진 은 조선통감부 건물이나 , 데라우치 마사다케 가 초대 총독으로 무단통치 를 감행 했던 곳이다 . )
( 제 2 단계 ) 민족분열 통치기 (民族分裂 統治期) 1919 - 1931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부임을 기점으로 ,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이 선회하며 , 일부 단체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 되었고 , 아주 기초적인 초등교육 과 기술교육 만이 확대 되었다 . 그러나 이것은 친일파 양성 이요 , 민족분열
의 시도 였으며 , 가혹한 식민통치 를 은폐하기 위한 교활한 통치방식 이 었다 . 경찰력 은 더욱 강화 되었고 , 독립운동가 색출
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경찰제 를 도입 하였다 . 또 , 문화통치 를 통해 <자신이> 조선인 이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교육
시켜 소수의 친일관료 로 등용 , <조선인>끼리 이간 , 분열 을 시키고 민족 근대의식 성장 을 <일본>을 위한 식민지 지배 에
도움이될 오늘날 친일파 들을 양산해 냈다 . 오늘도 이들은 무엇이 잘못인가 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 결국 민족주의세력 에서 비 타협적 민족주의 와 민족개량주의 로 분화되어 민족성 개조론 이 등장했고 , 이를 이용해 수박 겉 핡기 식 으로 개조된자 들이 이광수 , 최남선 ,등이다 , 이는 자치운동 <참 정권운동>으로 발전해 나갔고 , 후에 보수 를 덧칠해 기형적 보수 가 해방후 등장하며 국가에 헌신한 애국자 처럼 오늘도 권력의 중심 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
한편으론 , <일본>의 식량부족 문제 를 해결 하려는 산미증식 (産米增殖) 계획이 수립되어 <한반도> 의 미곡 (米穀)생산량을 증대 시키는 정책을 폈으나 , <일본>으로 빼돌리는 양 이 급증하여 <한반도>의 식량부족은 심각하였으며 , 농민들은 보릿고개 만 되면 초근목피 (草根木皮) 로 연명하며 굶어 죽는자가 허다 했다 , 고 한다 . 이때는 공출 (共出)이란 강제제도 가 있어 미곡수거
량 이 부족하면 가가호호 침입하여 종자용 미곡 과 연명할 식량조차 빼앗아 갔다고 한다 .
( 이곳은 서울 정동에 있는 대법원 이다 . 총독정치 때 이곳에서 수많은 조선인 에게 형벌 을 가하던 악명높은 사법부 다 )
(헌병통치 의 복마전 ,경무국 (警務局) , <일본>은 헌병사령관 이 경무총감 을 겸임 하는 헌병경찰제도 를 채택, 1918 년 한해
에 항일인사 <14만명 >을 검거하여 악랄하게 고문 하며 무단정치 를 펴던 악명높은 곳이다 . )
( 신민회 <105인 사건> 때 조작된 사건 을 일본인 변호사 등 20 여명이 통박 했으나 통할리 없었다 . 맨앞 김병로 (金炳魯)
선생 , 세번째 가 정구영 (鄭 求暎) 선생 , )
( 1911 년 9월 , < 105 인 사건 > 의 피의자 들이 법정으로 끌려가는 장면 . )
<안중근>의사 의 사촌 안명근 의사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를 암살 하기전 ,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사실을 고백
하자 암살음모를 밀고한 뮈텔신부 , 이사건은 <105인 사건>으로 조작 , 신민회 가 해산 된다 . 밑은 성도들 . ) 이사건과
황사영 백서 사건은 뒷맛이 개운치 않고 논쟁 의 소지는 오늘날 까지 계속 된다 .
( 제 3 단계 ) 민족 말살 통치기 (民族 末殺 統治期)
1930년 당시 세계 1차대전 과 세계 대공황 (世界大空況) 으로 일본 의 만주철도 (滿州鐵道) 영업이 부진하자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西郞)>가 <만몽영유계획 >을 모의하여 1931년 9월18일 밤 10시 30분경 < 류타오 거우 >
에서 만주철도 를 스스로 폭파 하고 이를 <중국 >의 <쟝쉐린 >군대의 소행으로 덮어 씌우며 <쟝쉐량 >의 <펑톈성>을 공격 ,
1931년 9월21일 <조선주둔군 사령관 > 하야시 센주로 에 의해 만주사변 (滿州事變)이 확대 되었다 . 이시기 <한반도 >는 일본 의 중국대륙 진출의 병참기지 로 둔갑 , 일본은 한반도 의 경제적 지배정책 에서 병참기지화 정책 으로 바뀌어 1941 년에 태평양 전쟁 을 미국 과 벌리면서 식민지 수탈 을 더욱 강화 , 한민족 (韓民族)의 문화와 전통 을 완전히 말살 하려는 정책을 강취하고 인적, 물적, 자원수탈에 광분하며 집집마다 식기 (食器)중 놋쇠 로 된 식기는 모두 강탈하여 탄피 (彈皮)를 만드는데 사용 하였다 . 일본인 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은 내선일체 와 일선동조론 에 의한 황국신민화정책 (皇國臣民化政策)을 실시 하였다 . 학교의 한글교육 은 없애고 역사도 배울수 없었으며 창씨 (創氏)개명 (改名)이 강압적 으로 실행됐다 . 특히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 는 폐교 나 강제개명 을 당했다 . 이시기 모두 일본어 만 사용 하였다 .
더욱 분노할 일은 강제징용 으로 노동력 을 착취 당했고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 들을 자기네 전쟁에 총알받이 로 내몰고 , 젊은여성 들은 정신대 (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 하여 군수공장 (軍需工場)등지에서 혹사 시켰으며 ,절반은 전선으로 끌고가 일본군 위안부 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 그러나 오늘날 이 부분도 일본편을 들어 위안부 는 없었다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망발을 하여 살아계신 정신대 할머니들을 울렸으며 , 뉴라이트 란 해괴한 단체에서도 이런 주장을 편다 . 아마도 이들은 몸은 한국에 살아도 영혼은 일본에 두고온듯 하다 , 이들이 애국 , 애족 이란 말을 뱉을때 마다 몸속에 음식물을 토해놓고 싶다 . 이들은 껍데기만 한국인 이지 내용물은 일본산 이다 .
전쟁이 패전으로 몰리자 한국인 의 해외 단파방송 청취 를 엄중히 단속 , 눈과 귀를 막았으나 경성방송국 의 직원이 미국의소리 한국어 방송 을 청취한것이 발각되어 수많은 방송인 들이 옥고를 치른 단파방송 밀청사건 이 일어나기도 했다 . 그러나
1945 년 원자탄 2방 으로 일본은 악랄한 수탈을 멈추고 망 (亡)하고 만다 .
( 총독부 는 공진회 (共進會 :박람회)를 열어 일본상품 의 선전과 판매에 열을 올렸다 .이때 인기상품은 왜고약 이 었다 )
( 총독부 는 토산품 품평회 를 자주 열어 한국의 토산품 을 헐값으로 사서 일본으로 가져 갔다 .
( 일본 의 경제수탈의 아성 , 동양척식 주식회사 .이 건물은 경술국치 이후에 세워져 <한반도>의 땅을 맘대로 뺏고 , 헐값으로
사고 파는 수탈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 그러나 해방후 이건물을 이승만 은 내무부 로 사용 한다 . 을지로 2가 에 있었다 .)
( 토지조사사업 ,당시 동양척식 은 일본인 측량기사 와 기술자 들을 동원 , 토지의 현황 과 면적을 측정 지적도 를 만들어
본격적 수탈을 감행한다 . 우측에 측량기기 를 지고 오는 한국인 노동자들 , 좌측엔 말숙하게 차려입은 일본인 기사 들 )
1904 년 11월 10일 < 경부선 철도공사 > 완공을 앞두고 일본의 체신대신 이 채통 없이 가마에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공사
를 독려 한다 . 이해 2월 에 노일전쟁 이 터졌고 , 철도개통 이 긴박했던 때다 . 1905 년 1월 1일 에 경부선은 개통 된다 .
1910 년 < 총독부 >는 경복궁 안에 4000 여칸 을 헐어 개인에게 불하 했고 ,1926 년 엔 근정전 앞마당에 조선총독부 를 지어 < 조선왕조 > 500 년 역사를 가려 버린다 . 임진왜란 때 전소 된것을 1869 년 <대원군 >이 왕권의 상징 으로 무리하게
중건하여 숱한 반대와 고난을 받았고 , 명성황후도 이곳에서 시해를 당했다 . 고종 은 아관파천 후 이곳을 자주 찾지 않은 탓에
퇴락했고 , 조선총독부 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 집은 나그네 가 아닌 주인 이 지켜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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