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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寧海)의 무가정(無價亭)에서 김간재(金簡齋)의 시에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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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올라 굽어본 사람 이미 많건마는 / 此處登臨人縱多
축정에 증손하려고 지금도 와서 뻐긴다오 / 築亭增損祗今誇
한 시내의 바람과 달은 시 속의 바로 그것이요 / 一川風月詩中地
십 리 너머 누대는 그림에 나오는 그 집일세 / 十里樓臺畫裏家
맑은 날엔 상해에서 욕일도 볼 수 있고 / 桑海天晴看浴日
따뜻한 봄엔 도계에 노을이 피어오르는 곳 / 桃蹊春暖見蒸霞
상국이 새 시구를 이곳에 남긴 뒤로부터 / 自從相國留新句
무가정의 승경(勝景)이 더욱 값을 더하누나 / 無價奇觀價更加
[주D-001]축정(築亭)에……뻐긴다오 : 과 거에 지은 남의 시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서로들 실력을 뽐낸다는 말이다. 축정은 정자의 현판에 가득 실린 시들을 말하고 증손(增損)은 문자를 고치는 것을 말한다. 여불위(呂不韋)가 이른바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만들어 놓고는, “한 글자라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자에게는 천금을 주겠다.〔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라고 현상금을 걸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85 呂不韋列傳》
[주D-002]맑은……있고 : 이 곳에서 일출(日出)의 장관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상해(桑海)는 부상(扶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東海)를 가리킨다. 부상은 동해 속의 신목(神木)으로, 해가 뜰 때 이 나뭇가지를 떨치고서 솟구쳐 올라온다고 한다. 또 《회남자(淮南子)》〈천문훈(天文訓)〉에 “해는 양곡에서 떠올라 함지에서 목욕한다.〔日出於暘谷 浴於咸池〕”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따뜻한……곳 : 봄 철에 복사꽃이 만발하여 시냇물을 붉게 물들이며 떠내려가는 경치 또한 볼만한 곳이라는 말이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소재로 한 그림을 보고서 한유(韓愈)가 지은 시에 “복숭아 곳곳에 심어 오직 그 꽃이 만발하였나니, 원근의 산천에 붉은 노을이 피어올랐네.〔種桃處處惟開花 川原遠近蒸紅霞〕”라는 표현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3 桃源圖》
무진년(1328, 충숙왕15) 겨울에 얼어붙은 한강(漢江)을 건너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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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언덕 여인숙 정말 을씨년스럽기에 / 沙頭逆旅正蕭條
빈 처마에 들러붙어 북두성 자루만 쳐다봤네 / 幾傍虛簷望斗杓
한밤중 질풍이 불어와 지붕을 날릴 듯하더니 / 半夜疾風吹破屋
강물이 외길로 얼어붙어 다리처럼 되었어라 / 一江流水凍成橋
짧은 시간에 알겠노니 사람이 얼마나 소심한지 / 須臾便見人心小
얇은 얼음 위에서 힘센 말 자랑은 그만둘 일 / 尋丈休誇馬足驕
건너온 뒤 후유 하며 혼자 쓴웃음 짓나니 / 過了畏途還自笑
고향에 돌아가 민초로 늙는 것이 더 낫겠네 / 不如歸去老漁樵
천력(天曆) 기사년(1329)에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띄웠다가 강어귀에서 바람에 막히다 2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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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의 물이 상앗대 반쯤 불어났기에 / 長江半篙漲
맑은 새벽에 띄운 조각배 한 척 / 淸曉片帆開
풍백이 도대체 누구에게 노했는지 / 風伯知誰怒
천공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봐 / 天公不我哀
청빈이 기운을 내뿜자마자 / 靑蘋纔吐氣
벌써 산더미 같은 흰 물결 / 白浪已成堆
공중 저 멀리 빗발이 비끼자 / 雨脚橫空遠
땅을 말면서 휘도는 파도 소리 / 濤聲捲地廻
바다와 산악에 이어진 무시무시한 길 / 畏途連海岳
구름과 우레의 둔의 상을 만났군그래 / 屯象値雲雷
건너는 게 이롭다는 옛 가르침 생각하며 / 利涉思前訓
천천히 갈 것을 후배들에게 당부하노라 / 徐行戒後來
염여에 당했다고 걱정할 것 있나 / 莫愁當灔澦
끝내는 봉래에 이르고 말 텐데 뭘 / 終欲到蓬萊
다만 고향의 어버이 생각 때문에 / 只爲庭闈念
돌아가고픈 마음 밤낮으로 쫓길 따름 / 歸心日夜催
강물이 바다로 흐르는 것은 생각건대 우의 공 / 河海東流想禹功
남쪽 돛 북쪽 노가 멀리 서로 통하게 됐네 / 南檣北楫遠相通
강 가득 자욱한 빗속에서 누구는 실컷 잠을 자고 / 何人睡足連江雨
온종일 부는 바람 속에서 객은 시름이 하 깊도다 / 有客愁深盡日風
어둠 속에 가랑잎처럼 나부끼는 조각배요 / 一葉簸掀冥晦裏
아무 것도 없는 속에 출몰하는 산들이라 / 群山出沒有無中
뗏목을 탄 노나라의 어른을 감히 본뜨리오 / 敢希魯國乘桴叟
반계에 가서 조옹의 소식 물어보려 함이라오 / 擬向磻溪問釣翁
[주D-001]청빈(靑蘋)이 기운을 내뿜자마자 :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전국 시대 초나라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대저 바람은 땅에서 생겨나는데, 푸른 마름꽃 끝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夫風生于地起于靑蘋之末〕”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구름과……만났군그래 : 《주역(周易)》 〈둔괘(屯卦) 상사(象辭)〉에 “구름과 우레가 둔이니 군자는 이때를 당하여 천하를 경륜한다.〔雲雷屯 君子以經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건너는……생각하며 : ‘큰 물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利涉大川〕’는 말이 《주역》의 괘사(卦辭)에 누차 나온다.
[주D-004]천천히……당부하노라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천천히 걸어서 어른의 뒤를 따르는 것을 공경한다고 하고, 빨리 걸어서 어른보다 앞서 가는 것을 불공이라고 한다.〔徐行後長者 謂之弟 疾行先長者 謂之不弟〕”라는 말이 있다.
[주D-005]염여(灩澦) : 염여퇴(灩澦堆)의 준말로, 배를 타고 무사히 건너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험하다는 장강(長江) 구당협(瞿塘峽)의 여울물 이름인데, 가정이 벼슬길의 난관에 봉착했다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주D-006]봉래(蓬萊) : 선인(仙人)이 사는 곳으로, 여기서는 임금이 있는 도성의 대궐을 가리킨다.
[주D-007]강물이……공(功) : 치 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한 우(禹)와 같은 인물 덕분에 강물이 범람하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서 바다로 빠지게 되었다는 말인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에 “풍수가 동쪽으로 흐르게 된 것은 생각하면 우의 공이로다.〔豐水東注 維禹之績〕”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강……깊도다 : 소식(蘇軾)의 시에 “강 가득 자욱한 빗속에서 평소 실컷 잠을 자다, 언덕을 치는 바람 속에서 온종일 배를 타네.〔平生睡足連江雨 盡日舟橫擘岸風〕”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8 與秦太虛……》
[주D-009]뗏목을……함이라오 : 난 세를 피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산골 시내로 들어가서 숨어 지내려 한다는 말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탄식한 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조옹(釣翁)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그는 위수(渭水) 물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강화군(江華郡)에서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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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 깊은 곳 조각배 하나 타고 / 海山深處一扁舟
화산까지 오는 동안 무궁한 흥치 / 行到華山興未休
예로부터 금탕은 곧잘 덕을 해치는데 / 自古金湯能害德
도읍을 여기로 옮긴 것은 누구 꾀인고 / 移都此地是誰謀
[주D-001]예로부터……해치는데 : 견 고한 요새처럼 산천이 험고한 것만 믿다 보면 통치자가 덕을 닦는 데에 소홀히 할 공산이 커서 결국에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금탕(金湯)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준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지를 뜻한다. 참고로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의 중류(中流)를 내려가다가 오기(吳起)를 돌아보고는 산천이 험고한 것이야말로 위나라의 보배라고 자랑하자, 오기가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자가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자연도(紫燕島)에서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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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도중에 자연도에 들러서 / 行過紫燕島
뱃전을 치며 한가로이 읊조리노라 / 扣枻一閑吟
개펄은 전자(篆字)처럼 꼬불꼬불 무늬 지고 / 浦漵盤如篆
돛대는 비녀처럼 배 위에 꽂혀 있네 / 竿檣蔟似簪
가까이 물가에 비끼는 소금 굽는 연기요 / 鹽煙橫近渚
멀리 산 위로 떠오르는 바다의 달이로다 / 海月上遙岑
조각배 이 흥치를 내 잊지 않고서 / 我有扁舟興
다른 해에 다시 한번 찾아오리라 / 他年擬重尋
제물사(濟物寺)에 묵으면서 벽 위의 시에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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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께서 은택을 베풀어 / 先王有遺澤
제물이란 이름의 편액을 내리신 곳 / 濟物牓玆亭
달이 나오니 천지가 온통 희고 / 月出乾坤白
구름이 걷히니 섬들이 푸르도다 / 雲收島嶼靑
이끼로 뒤덮인 옛 벽돌담이요 / 閑苔封古甃
잣나무 그늘 드리운 뜨락이로다 / 老柏蔭中庭
붓을 쥐었다가 다시 놓을 수밖에 / 搦筆還須閣
하늘이 인색해서 안 보여 주려 하니 / 天慳未易形
연흥도(延興島)에서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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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바다 산들 바람 한결 트인 전망 / 海闊風微望更平
붉은 뱃전 검은 노 멋대로 비꼈다 기울었다 / 紅舷烏榜任斜橫
파도 소리 상관없이 갈매기 포근히 잠이 들고 / 波聲不管鷗眠靜
새벽하늘은 신기루의 밝은 빛을 겸했도다 / 曉色能兼蜃氣明
서검이 연래에 평소의 뜻과 어긋났으니 / 書劍年來違素志
이번에 강호로 떠나서 남은 생애를 부치리라 / 江湖此去寄餘生
다행히 동점하는 성대의 교화를 만났으니 / 幸逢聖代東漸化
구구하게 성명까지 바꿀 필요는 없으리 / 不用區區變姓名
[주D-001]서검(書劍)이……어긋났으니 : 최 근 몇 년 동안 자신의 처지가 본래의 뜻과 어긋났다는 말이다. 책과 칼은 옛날 선비들의 일상 소지품으로, 곧 학문과 의기를 뜻하는데, 참고로 당나라 고적(高適)의 시에 “동산에 한번 은거하여 흘려보낸 삼십 년 봄, 책과 칼이 풍진 속에 늙어 갈 줄 알았으랴.〔一臥東山三十春 豈知書劍老風塵〕”라는 구절이 나온다. 《高常詩集 卷5 人日寄杜二拾遺》
[주D-002]동점(東漸) : 중 국의 선진 문명이 동방의 고려에까지 유입되고 있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우공(禹貢)〉 맨 마지막의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번져 갔고, 서쪽으로는 유사 지역에까지 입혀졌으며, 북쪽과 남쪽의 끝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의 풍성(風聲)과 교화가 사해에 다 미치자, 우가 검은 규를 폐백으로 올리면서 순(舜) 임금에게 그의 일이 완성되었다고 아뢰었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聲敎訖于四海 禹錫玄圭 告厥成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도의(道義)로 우정을 맺은 제군(諸君)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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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교는 이교를 짜증 나게 하기 마련이라 / 淡交應使利交嗔
지금 남은 벗이라야 고작 여덟아홉 명뿐 / 只數而今八九人
서로 모여 내구의 이름을 실컷 누렸으니 / 已厭盍簪名耐久
이제는 경개를 기약하고 여신을 면할 따름 / 但期傾蓋免如新
한가한 날 담소를 나눌 여러분을 생각하며 / 笑談暇日思諸彦
유거에서 식물 가꾸며 봄 한 철 보냈소이다 / 栽種幽居過一春
청운에 지기가 있는 것을 혼자 기뻐하노니 / 自喜靑雲有知己
어찌 이 몸을 유민이 되도록 내내 놔둘 리야 / 肯敎長此作遺民
[주D-001]담교(淡交)는……마련이라 : 소 인은 군자의 사귐을 답답하게 여기면서 짜증을 낸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군자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기가 단 술과 같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라는 말이 나온다. 이교(利交)는 사리(私利)를 도모하기 위한 교제를 말한다.
[주D-002]내구(耐久) : 내구붕(耐久朋)의 준말로, 장기간 우정을 나눈 붕우를 말한다. 당나라 위현동(魏玄同)과 배염(裴炎)이 우정을 맺고서 끝까지 변하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내구붕이라고 불렀던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87 魏玄同列傳》
[주D-003]이제는……따름 : 경 개(傾蓋)는 경개여고(傾蓋如故)의 준말이고, 여신(如新)은 백두여신(白頭如新)의 준말이다. 《사기(史記)》 권83〈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는 말이 나온다.
동년(同年) 윤 내상(尹內相)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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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병란으로 천지가 어두웠을 적에 / 驚塵疇昔暗乾坤
고생하며 부설한 일 어찌 말로 다 하리오 / 負絏艱危未可言
만리 길 돌아와서 인각에 그림 걸리신 분 / 萬里歸來畫麟閣
한 시대의 선비들이 용문에 반부하였다오 / 一時攀附在龍門
풍운을 손에 넣자 치밀한 경륜 발휘하며 / 風雲入手經綸密
천일의 온기를 지척 간에서 느끼셨지요 / 天日違顔咫尺溫
말을 듣자니 익재가 경사를 더하시어 / 聽說益齋傅盛事
연래에 옥순이 또 자손을 내셨다구요 / 年來玉筍又生孫
[주D-001]부설(負絏) : 말 고삐를 잡고 수행한다는 뜻으로, 어려운 시절에 위험을 무릅쓰고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4년 기사에 “제가 말고삐를 잡고 주인님을 따라 천하를 돌아다니는 동안 저지른 죄가 매우 많습니다.〔臣負羈紲 從君巡於天下 臣之罪甚多矣〕”라고 자범(子犯)이 공자 중이(重耳)에게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2]만리……분 : 중국에서 귀국한 뒤에 공신(功臣)에 책봉되었다는 말이다. 인각(麟閣)은 기린각(麒麟閣)의 준말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 곽광(霍光) 등 공신 11인의 초상화를 기린각에 걸어서 길이 기념토록 한 고사가 전한다.
[주D-003]한 시대의……반부(攀附)하였다오 : 후 학들이 그의 풍도를 사모하며 귀의했다는 말이다. 후한 환제(桓帝) 때에 이응(李膺)을 경모하는 선비들이 그의 집 마루에 올라가기만 해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면서 영광으로 알았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德行》 반부는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 혹은 명사(名士)에게 몸을 의탁해서 이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에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풍운(風雲)을……느끼셨지요 : 임 금의 측근으로 총애를 받으며 내상(內相)의 높은 지위에 오르자 평소의 원대한 뜻을 펼치게 되었다는 말이다. 풍운은 고위 관직을 뜻하고, 천일(天日)의 온기는 임금의 총애를 뜻한다. 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과 회맹(會盟)을 할 때, “천자의 위엄이 나의 이마에서 지척에 있다.〔天威不違顔咫尺〕”라고 하며, 절을 하고 하사품을 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僖公9年》 내상은 당 덕종(唐德宗) 때의 육지(陸贄)처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국정에 직접 참여하여 정승처럼 국사(國事)를 좌우하는 지위를 가리킨다.
[주D-005]말을……내셨다구요 : 익 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생인 윤 내상(尹內相)이 다시 좌주(座主)가 되어 문생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옥순(玉筍)은 급제한 문생을 가리킨다. 당나라 이종민(李宗閔)이 시관(試官)이 되어 선발한 문생들 모두가 저명 인사였으므로 당시에 옥순이라고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74 李宗閔列傳》
우 선생(禹先生)이 규정(糾正)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며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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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선 의기 드높아 공경을 추하게 보았고 / 少年高義陋公卿
만년엔 부침하며 성대한 명성 숨기신 분 / 晩節浮沈晦盛名
백발의 신임 어사님을 다투어 보는 지금 / 白首爭看新御史
명군이 노선생을 바야흐로 쓰시는 때라 / 明君方用老先生
교룡이 어찌 못 속에만 잠겨 있으리오 / 蛟龍豈是池中物
준마는 대지를 마음껏 치달려야 하는 법 / 騏驥須知地上行
예전에 시주의 모임에서 누차 모신 소생이 / 我昔屢陪詩酒社
경사를 듣고서 기쁨을 가누지 못하겠나이다 / 時聞喜事不勝情
[주D-001]젊어선……보았고 : 충 선왕(忠宣王)이 충렬왕(忠烈王)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하자, 우탁(禹倬)이 도끼와 거적을 메고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며 간했다. 이때 근신(近臣)이 소를 감히 읽지 못하자, 우탁이 “경은 근신이 되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행을 부추겨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경은 그 죄를 아는가.〔卿爲近臣 未能格非而逢惡至此 卿知其罪耶〕”라고 소리치니, 좌우가 겁에 질려서 떨고 왕도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고 한다. 《高麗史卷109 禹倬列傳》
동년(同年) 남 한림(南翰林)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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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에 어깨 스쳤으면 연분도 깊다 할 것인데 / 兩榜磨肩緣分深
최근 몇 년의 출처는 승침이 서로들 다르구려 / 年來出處異升沈
탁영의 나의 창랑 곡조는 비웃음을 받고 / 濯纓笑我滄浪曲
급찰의 그대 작약 노래는 우러러보는 세상 / 給札看君芍藥吟
천리마 알아보는 백락을 만나지 못할 바에야 / 伯樂未逢千里足
치이처럼 오호의 마음 지니는 것이 마땅하리 / 鴟夷應有五湖心
부재가 어찌 감히 취허의 힘을 바라리오 / 不才敢望吹噓力
비칙하는 여가에 안부나 전해 주시기를 / 批勅餘閑幸寄音
[주D-001]탁영(濯纓)의……곡조 : 탁 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 진속(塵俗)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뜻하는데,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孟子離婁上》《楚辭 漁父》
[주D-002]급찰(給札)의……노래 : 급 찰은 필찰(筆札)을 지급받는다는 말로, 임금으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당 현종(唐玄宗)이 침향정(沈香亭)에서 양 귀비(楊貴妃)와 함께 목작약(木芍藥)을 완상하다가 금화전(金花牋)을 하사하며 한림(翰林) 이백(李白)을 불러 시를 짓게 하자 그 자리에서 〈청평조사(淸平調詞)〉3장을 지어 바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楊太眞外傳》
[주D-003]백락(伯樂) : 춘 추 시대 진 목공(秦穆公) 때 준마를 잘 감별하기로 유명했던 손양(孫陽)의 별명이다. 전국 시대 종횡가(縱橫家)인 소대(蘇代)가 순우곤(淳于髡)에게 “준마를 팔기 위해 사흘간 시장에 내놓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더니, 백락이 한 번 돌아보자 하루아침에 그 말의 값이 열 배나 뛰어올랐다.”라고 말한 내용이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 2〉에 나온다.
[주D-004]치이(鴟夷) : 춘 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모신(謀臣)인 범려(范蠡)의 별칭이다. 범려가 일찍이 월왕을 보좌하여 오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나서는 월나라를 떠나 오호(五湖)에 배를 띄우고 돌아다니다가 제나라에 들어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성명을 바꾼 고사가 있다. 《國語 越語下》 《史記 卷129 貨殖列傳》
[주D-005]취허(吹噓)의 힘 : 입김을 불어 좋은 자리로 올려 줄 힘이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주D-006]비칙(批勅) : 조칙(詔勅)에 대한 비평이라는 뜻으로, 왕의 조서에 불가한 내용이 있을 경우에 신하가 자기의 의견을 말미에 적어 넣는 것을 말한다.
동년 유 한림(柳翰林)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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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은 재주가 없어서 전혀 감당 못하니 / 世事微才百不堪
농사나 다시 지으면서 일신을 도모할까 보오 / 徇身聊復事耕蠶
시장에서 고전하다 보면 양장이 그리우실 터 / 詩場苦戰思良將
교도의 중봉을 파삼처럼 생각하고 계실지도 / 交道重逢憶破衫
꿈속에서는 그대 찾아 정자 북쪽에 이르는데 / 魂夢尋君到亭北
구름 산은 나를 끌며 강 남쪽에 살라 하오 / 雲山挽我滯江南
어느 때나 치의의 시편에 화답하여 취하면서 / 何時和取緇衣什
역마의 소리 가운데 다시들 모일 수 있을는지 / 櫪馬聲中更盍簪
[주D-001]시장(詩場)에서……터 : 시 가 잘 지어지지 않을 때에는 가정과 같은 명인의 솜씨가 부러울 것이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위 문후(魏文侯)가 이극(李克)에게 “선생이 언젠가 과인에게 집안이 가난할 때에는 양처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양상을 생각하는 법이라고 가르쳐 주었소.〔先生嘗敎寡人曰 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라고 한 말이 《사기》 권44 〈위세가(魏世家)〉에 나오는데, 가정이 여기에 양장(良將)을 덧붙여서 재미있게 말한 것이다.
[주D-002]교도(交道)의……계실지도 : 찢 어진 옷을 꿰매듯 헤어진 벗 가정과도 다시 만나서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인데, 소식(蘇軾)의 “찢어진 적삼은 거듭 만나는 날이 있나니, 밥 먹을 때에 숟가락을 잊은 적이 있던가.〔破衫却有重逢日 一飯何曾忘却時〕”라는 시를 인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소식의 이 시는 찢어진 적삼을 꿰매야〔縫〕 하는 것처럼 헤어진 벗은 만나야〔逢) 하는 법인데, 이는 밥 먹을 때에 수저〔匙〕를 잊지 않는 것처럼 벗도 잊는 때〔時〕가 없다는 뜻으로, 소리가 같은 글자를 빌려서 뜻을 부친 이른바 오가(吳歌)의 격식으로 지은 것이다. 《蘇東坡詩集 卷9 席上代人贈別》
[주D-003]어느……있을는지 : 가 정 자신의 멋진 시에 화답하려고, 마구간에 매인 말처럼 벼슬에 얽매인 동년들이 다시 틈을 내어 모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뜻의 익살스러운 표현이다. 치의(緇衣)는 《시경》 〈정풍(鄭風)〉의 편명(篇名)으로, 현사(賢士)를 예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편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편처럼 하면, 벼슬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조심할 줄 알게 될 것이며, 형벌을 시험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모두 복종할 것이다.〔好賢如緇衣惡惡如巷伯 則爵不瀆而民作愿 刑不試而民咸服〕”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안원지(安員之)와 이중권(李仲權)이 동시에 옥당(玉堂)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축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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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올라 화전에 드셨다는 말을 홀연히 듣고 / 忽聞同上入花甎
나도 모르게 탄관하며 기뻐서 미칠 것만 같소 / 不覺彈冠喜欲顚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상석에 앉을 수 있으리까 / 餘子豈能居座右
두 분 모두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으셨소그려 / 諸公皆已著鞭先
평소 용 잡는 기술을 혼자서 비웃었소마는 / 平生自笑屠龍技
천악하는 현인이 성대에 어찌 없으리오 / 盛代寧無薦鶚賢
청운에 지기가 적다고 이젠 말하지 않으리니 / 莫道靑雲知己少
유림의 반절이 바로 망년지우(忘年之友)이시니까 / 儒林一半是忘年
[주C-001]안원지(安員之)와 이중권(李仲權) : 원지와 중권은 각각 안보(安輔 : 1302〜1357)와 이달충(李達衷 : ?〜1385)의 자이다.
[주D-001]화전(花甎) : 꽃무늬 벽돌이라는 뜻으로, 학사원(學士院)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 학사가 근무하는 내각(內閣) 북청(北廳)의 앞 섬돌에 화전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2]탄관(彈冠) : 관 의 먼지를 턴다는 뜻으로, 의기투합하는 친구의 손을 잡고 벼슬길에 나설 준비를 한다는 말이다. 서한 왕길(王吉)이 관직에 임명되자 친구 공우(貢禹)도 덩달아 갓의 먼지를 털고 벼슬길에 나설 준비를 했다는 ‘왕양재위 공공탄관(王陽在位 貢公彈冠)’이란 말이 《한서》 권72〈왕길전(王吉傳)〉에 나온다. 왕양은 왕자양(王子陽)의 준말로, 왕양의 자가 자양이다.
[주D-003]두 분……잡으셨소그려 : 동 진의 유곤(劉琨)이 친구인 조적(祖逖)과 함께 북벌을 하여 중원을 회복할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조적이 먼저 기용되었다는 말을 듣자 “내가 창을 머리에 베고 아침을 기다리면서 항상 오랑캐 섬멸할 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늘상 마음에 걸린 것은 나의 벗 조적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고 중원으로 치달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吾枕戈待旦 志梟逆虜 常恐祖生先吾著鞭耳〕”라고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賞譽下》
[주D-004]용 잡는 기술 : 세 상에 발휘하지 못한 채 혼자서 지니고만 있는 특출한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장자》〈열어구(列御寇)〉에 “주평만이 지리익에게서 용 잡는 기술을 배웠는데, 천금의 가산을 다 쏟으면서 삼 년 만에 그 기예를 완전히 익혔지만, 그 기교를 발휘해 볼 곳이 없었다.〔朱泙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三年技成 而無所用其巧〕”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천악(薦鶚) : 독 수리를 추천한다는 뜻으로, 인재를 조정에 천거하여 발탁하게 한다는 말이다. 후한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추천하면서 “사나운 새가 수백 마리 있어도 한 마리의 독수리보다 못하니, 예형을 조정에 세우면 필시 볼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鷙鳥累百 不如一鶚 使衡立朝 必有可觀〕”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0下 文苑列傳 禰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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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五侯) 선초(單超)ㆍ서황(徐璜)ㆍ구원(具瑗)ㆍ좌관(左悺)ㆍ당형(唐衡)이다.
발호장군이 권세를 독점하였을 때 / 跋扈將軍得意秋
한나라 천자는 짐짓 딴전 피우더니 / 漢家天子故凝旒
끝내는 공경들과 상의를 하지 않고 / 到頭不與公卿議
다시 오후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네 / 還把機權付五侯
장강(張綱)의 묘
도정(都亭)에 바퀴 묻고 화 풀지 못하더니 / 亭下埋輪意未平
단거로 또 곧장 광릉 성으로 달려갔네 / 單車直走廣陵城
가련타 다섯 길 높이 산 앞의 무덤이여 / 可憐五丈山前冢
장영에게만 흙을 지고 봉분하게 하다니 / 獨使張嬰負土成
이고(李固)
위태로운 나라에서 명성을 떨치다가 / 身在危邦有盛名
화를 면하지 못한 공경이 얼마이던가 / 從來未免幾公卿
바로 떠나지 않은 죄가 어찌 없으리오 / 君今不去寧無罪
양씨의 문생에도 마생이 또 있었나니 / 梁氏門生有馬生
오처사(五處士) 서치(徐穉)ㆍ강굉(姜肱)ㆍ원굉(袁閎)ㆍ위저(韋著)ㆍ이담(李曇)이다.
안거를 타고 무서운 길에 굳이 들어서랴 / 不駕安車向畏途
임천에 높이 누우면 걱정이 하나 없는걸 / 林泉高臥百無憂
진공이여 우리의 뜻을 막으려 하지 마오 / 陳公莫逆吾儕意
한정이 어찌 고당 때문에 남아 있으리까 / 漢鼎寧爲錮黨留
가표(賈彪)
난세에 궁한 백성 애달픈 일들뿐 / 世亂民窮事可哀
황량한 마을마다 버림받은 아이들 / 荒村處處見遺孩
몇 년 사이에 천여 명의 자식을 길렀으니 / 數年養得千餘子
조물도 가부의 재능에는 부끄러워하리라 / 造物應慙賈父才
황보규(皇甫規)
지사라면 지사를 어찌 가련하게 여기리오 / 志士寧將志士憐
지금 구당이라 칭하다니 이 어떤 사람인고 / 今稱鉤黨是何人
타년에 지하에서 제자를 만났을 때 / 他年地下逢諸子
쇠옹은 유독 몸 아꼈다고 웃었으리라 / 應笑衰翁獨愛身
진번(陳蕃)
자리 양보한 당년의 뜻 다른 것이 없었나니 / 推席當年意靡他
가련토다 유예하며 기회를 많이 놓쳤도다 / 可憐猶豫失機多
칼 빼 들고 승명문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 拔刀莫入承明去
두후가 태아의 칼자루 먼저 넘겨줬으련만 / 竇后應先倒太阿
공포(孔褒)
장검이 도망쳐 오면 처자까지 벌 받건만 / 張儉亡來罪及孥
집안이 망할 각오하고 많이들 숨겨 주었어라 / 破家相納尙如毛
일문쟁사한 것은 더욱 애석해할 일인데 / 一門爭死尤堪惜
각박한 군왕은 마침내 공포를 연좌시켰도다 / 恩少君王竟坐褒
맹타(孟佗)
감노의 절 한 번에 빈객들 놀라고 / 監奴一拜衆賓驚
다음 날 양주 자사 부임 길에 올랐다네 / 明日凉州刺史行
부엌 귀신에게 잘 보이려는 꾀를 내다니 / 此計來從媚於竈
백랑의 심보는 그야말로 소인이로다 / 伯郞眞箇小人情
호광(胡廣)
기우는 나라 붙들어 세울 충절이 없었어도 / 縱無忠節可扶顚
삼십 년 간 재상으로 여섯 임금 섬긴 사람 / 輔相六君三十年
천하의 중용이라니 이는 어떻게 된 말인고 / 天下中庸是何語
잘 보이려고 낮춘 말을 비꼬며 전한 것이라오 / 遜言取媚謾相傳
선릉 효자(宣陵孝子)
지금은 충직한 인사가 수민으로 전락하고 / 而今忠直是讐民
장사꾼이 참으로 사인이 될 수도 있는 세상 / 賈豎眞堪作舍人
한나라 왕실에 효자가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 縱道漢家無孝子
비열한 자들이 제 어버이를 모멸하게 할 수야 / 寧容鼠輩慢吾親
홍도문학(鴻都門學)
옛 성왕들의 지극한 정치 만회해 보려고 / 欲挽皇王至治廻
석거와 백호의 회의(會議)를 예전에도 열었었지 / 石渠白虎昔曾開
홍도도 명색은 문학을 닦는 곳인데 / 鴻都亦是修文地
어찌하여 조충 조전의 재주만 썼단 말인고 / 何用雕虫鳥篆才
양구(陽球)
황제가 하찮은 기예에 관심을 둔 나머지 / 帝意方珍斗筲才
송람을 그려서 운대에 비기려 하였다네 / 欲圖松覽擬雲臺
상서령이여 단청의 비루함을 문제 삼지 마오 / 尙書莫說丹靑陋
뒷사람 경계용으로 세상에 전하면 될 테니까 / 留與人間戒後來
서저(西邸)
공후에게 매각하더니 심지어 종들에게까지 / 賣與公侯及爾奴
이날 돈이 떨어져서 막다른 길에 몰렸구나 / 無錢此日盡窮途
가련타 가난한 자가 피해를 더욱 받았나니 / 可憐貧者尤爲害
부임하는 그길로 갑절을 바쳐야 했으니까 / 始到官來得倍輸
황건(黃巾)
지금 백성의 원망이 진나라 때와 같아서 / 民怨今應更似秦
광부의 고함 한 번에 반절이 황건을 썼다네 / 狂夫一叫半黃巾
감히 요술을 부려 천위를 범하려 하였으니 / 敢將妖術干天位
하늘이 어쩌면 당인 때문에 그들을 냈는지도 / 天意生渠爲黨人
허소(許劭)
현우를 품평하면 세상이 미워하는데 / 題品賢愚世所憎
화를 면한 것은 마음이 공평했기 때문 / 能逃人禍爲心平
교현의 말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조공에게 / 曹公欲質橋玄語
간웅이라 평했더니 최고로 좋아하더라나 / 解道姦雄最得情
조지(棗祗)
백성을 위해 거의하여 주멸한다고 하지만 / 擧義誅殘號爲民
백성은 상식의 궁지에 몰려 유랑할 따름 / 民窮相食只風塵
농업을 첫째로 주장하여 조실의 기틀을 세웠나니 / 首陳農業基曹室
원손에게는 이만한 인물이 확실히 없었더니라 / 須信袁孫無此人
예형(禰衡)
철없이 조조를 욕한 것만도 위험천만한 일 / 輕狂罵操已多危
유가에 곱게 보내신 뜻 무엇인지 알 만하이 / 送與劉家意可知
재주 높다고 모두가 꼭 아낀다고는 못할 터 / 未必高才人盡愛
강하에서 목숨 잃은 일 늦었다고도 하겠네 / 失身江夏亦爲遲
여포(呂布)
평소 친하게 모시던 동 태사를 배반했으니 / 已負平生董大師
백문에서 항복했지만 누가 의심을 안 할까 / 白門雖下孰無疑
젊어서부터 대경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는 / 不知自小臺卿智
유씨네 귀 큰 아이 믿을 수 없다 하였다네 / 叵信劉家大耳兒
원소(袁紹)
전풍 한 사람도 포용하지 못하면서 / 有一田豐尙不容
감히 조씨와 자웅을 겨루려 하였는가 / 敢將曹氏競雌雄
가련타 담장 안에서 일어난 환란이여 / 可憐禍起蕭墻內
이세에 망한 진나라와 대략 같구나 / 二世亡秦略與同
공융(孔融)
북해가 변란을 평정할 생각을 품기도 하였으나 / 北海曾懷靖難情
뜻만 컸지 재주가 어설퍼 결국 이루지 못했어라 / 才疎意廣竟無成
조공이 음흉한 간웅인 것을 그대는 몰랐던가 / 曹公陰賊君知否
경솔히 재앙을 초래한 것이 정평과 유사하네 / 輕易招殃似正平
장간(蔣幹)
예로부터 유세객은 모두 경위하는 사람들 / 從來說客盡傾危
강호를 멀리 건너옴도 남몰래 속셈 있어서라 / 遠涉江湖暗有期
구설로 남의 절의를 바꿀 수 있다고 한다면 / 口舌若能移節義
세간에 소진(蘇秦) 장의(張儀)가 어찌 만 명뿐이리 / 世間何啻萬秦儀
주유(周瑜)
오림의 일거로 노적이 도망쳤나니 / 一炬烏林老賊奔
삼강이 이로부터 중원과 맞먹었네 / 三江自此抗中原
평소의 아량이 정장보다 한수 위이니 / 平生雅量程張上
전국 마신 듯하다는 말 언급할 가치도 없다 하리 / 如飮醇醪未足言
여몽(呂蒙)
누가 군사 작전에 박사의 재능 요구했겠나 / 誰要軍籌博士才
지난 일 대강 알아도 여유가 있기 때문이지 / 粗知往事也恢恢
아몽이 이미 손랑의 학문처럼 되었고 보면 / 阿蒙已似孫郞學
노숙이 아무렴 괄목상대를 해야 하고말고 / 魯肅應須刮目來
순욱(荀彧)
조씨의 음모가 참으로 신과 흡사하였나니 / 曹氏陰謀政似新
찬조하여 이룬 것은 모두가 한나라 신하였네 / 贊成皆是漢家臣
순후가 어찌 부질없이 이름을 위해서 죽었으랴 / 荀侯豈爲浮名死
그 충의는 관중의 인보다 높이 평가해야 하리라 / 忠義多於管仲仁
유수구(濡須口)
봄물이 불어나니 어서 빨리 떠나시오 / 春水方生宜速去
조공이 죽어야만 이 몸이 쉴 터이니 / 曹公且死我方休
경승의 아이들은 정말 돼지나 개라 / 景升兒子眞豚犬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쯤은 되어야지 / 生子當如孫仲謀
왕상(王祥)
삼공이 무턱대고 신하에게 절할 수 있는가 / 安有三公輒拜人
하순 등은 일찍이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네 / 眼中曾不見何荀
한마디 말에 조실의 구금이 중해졌나니 / 一言曹室九金重
상국이 존귀해도 엄연히 위나라 신하인걸 / 相國雖尊亦魏臣
[주C-001]영사(詠史) : 역사적인 사실을 소재로 삼아서 당시의 세태를 탄식하며 풍자하는 시를 말한다.
[주D-001]오후(五侯) : 동 시에 똑같이 봉후(封侯)된 다섯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런 경우가 역사상 몇 차례 있었는데 여기서는 후한 환제(桓帝) 연희(延熹) 2년(159)에 조칙을 받들어 대장군 양기(梁冀)와 그 도당을 소탕하고 봉후된 선초(單超) 등 중상시(中常侍) 5인을 가리킨다. 이로부터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고 불법을 자행하여 조정이 어지러워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한 명의 장군이 죽고, 다섯 명의 장군이 나왔다.〔一將軍死 五將軍出〕”고 비꼬았다. 《後漢書 卷78 宦者列傳》
[주D-002]발호장군(跋扈將軍) : 양 기(梁冀)를 가리킨다. 후한 순제(順帝)가 죽고 누이동생 양 태후(楊太后)가 임조(臨朝)하면서 정권을 독점하였다. 충제(冲帝)가 죽자 질제(質帝)를 세웠는데, 질제가 “이 사람이 발호장군이다.〔此跋扈將軍也〕”라고 자신을 평한 것을 미워하여 독살하고 환제(桓帝)를 세웠다. 20여 년 동안 권력을 전횡하다가 연희 2년에 양 태후가 죽자 환제가 환관 5인과 합세하여 그를 복주(伏誅)하고 그 종족을 모두 기시(棄市)하였다. 《後漢書 卷34 梁冀列傳》
[주D-003]장강(張綱) : 후 한 순제(順帝) 때 사람으로 지방 풍속을 순찰하라는 명을 받자, 타고 갈 수레의 바퀴를 낙양(洛陽) 도정(都亭)의 땅에 묻고서 “승냥이와 늑대가 지금 큰길을 막고 있으니, 여우와 살쾡이 따위야 굳이 따질 것이 있겠는가.〔豺狼當路 安問狐狸〕”라고 하고는 곧바로 당시의 권간(權奸)인 대장군 양기(梁冀)를 탄핵하면서 그가 속으로 임금을 업신여긴 15조목의 일을 열거하여 경사(京師)를 진동시켰다. 양기가 그를 광릉 태수(廣陵太守)로 내보내자 병마를 요구하는 전임 태수들과는 달리 조촐하게 단거(單車)로 부임한 뒤에 이졸 10여 인만을 거느리고 장영(張嬰)의 군영으로 들어갔다. 장영은 기병하여 자사(刺史)와 이천석(二千石) 고관을 죽이는 등 양주(楊州)와 서주(徐州) 일대를 장악하고 약탈하면서 10여 년간이나 위세를 부렸는데 그동안 조정에서는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런데 장강의 설득을 받고는 감복하여 회개하고 투항하였으며, 장강이 죽었을 때는 장영 등 500여 인이 상복을 입고 장지까지 “등에 흙을 지고 와서 봉분을 했다.〔負土成墳〕”는 기록이 전한다. 《後漢書 卷56 張綱列傳》《東觀漢記 張綱》
[주D-004]이고(李固) : 후 한 충제(冲帝) 때의 태위(太尉)로 조야의 명망이 높았다. 충제가 죽었을 때와 질제(質帝)가 시해되었을 때에 모두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옹립하려고 노력하다가 권신인 양기(梁冀)의 비위를 거슬러 면직되었다. 환제(桓帝) 건화(建和) 원년(147)에 유문(劉文) 등이 유산을 황제로 세우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였는데, 양기가 이고를 이 사건에 연루시켜 하옥시키자, 이고의 문생 등이 상소하여 무죄를 주장하며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였다. 이에 양 태후(楊太后)가 사면하여 출옥시키자 경사(京師)의 시민들이 환호하며 만세를 부르니, 양기가 대경실색하며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시 무옥(誣獄)을 일으켜 이고와 두교(杜喬)를 죽이고 그 시신을 성 북쪽에 전시하였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주D-005]위태로운……떨치다가 : 《논 어(論語)》 〈태백(泰伯)〉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부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天下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6]바로……없으리오 : 군 주에게 간(諫)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재상을 그만두고 물러나 숨어 살아야 했다는 말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여 처형을 당한 일과 관련하여 진(晉)나라 장화(張華)의 고사가 곧잘 인용된다. 진 혜제(晉惠帝) 영강(永康) 원년(300)에 가후(賈后)가 민회태자 휼(遹)을 폐출시키려 할 적에 장화가 식건전(式乾殿)의 회의석상에서 “이것은 국가의 큰 화란이다. 한 무제(漢武帝) 이래로 적자인 후계자를 폐출시킬 때마다 항상 국가가 혼란해져서 위태로웠다.”라고 주장하며 반대 의사를 강력히 개진하였다. 그 뒤에 장화가 가후를 폐출한 조왕 윤(趙王倫)과 손수(孫秀)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할 적에, 장림(張林)에게 “경이 충신을 죽이려 하는가?” 하고 묻자, 장림이 “경은 재상으로서 천하의 일을 맡았는데도, 태자를 폐출시킬 적에 죽음으로써 절의를 세우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반문하니, 장화가 “식건전의 회의 때에 내가 간했던 일이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장림이 “간해도 들어주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재상을 그만두지 않았는가?〔諫若不從 何不去位〕”라고 묻자, 장화가 답변을 하지 못하고는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주D-007]양씨(梁氏)의……있었나니 : 마 생(馬生)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운 벗이라는 뜻으로, 양기(梁冀)와 같은 자에게도 그를 위해 헌신하며 이고(李固)의 죄상을 위에 알리려고 노력한 충직한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후한서》 권63〈이고열전(李固列傳)〉에, 이고에게 면직을 당해 불만을 품고서 양기에게 빌붙은 자들이 이고를 무함하며 처형할 것을 상소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소식(蘇軾)이 마정경(馬正卿)이라는 옛 친구를 소재로 한 시에 “마생은 본래 곤궁한 선비로서, 나와 어울린 것이 어언 이십 년. 밤낮으로 나의 출세를 기원하면서, 산을 살 돈을 나눠 줄 것을 기대하였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내가 폐를 끼치면서, 그에게 이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오.〔馬生本窮士 從我二十年日夜望我貴 求分買山錢 我今反累君 借耕輟茲田〕”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卷21 東坡八首》
[주D-008]안거(安車)를……들어서랴 : 상 서령(尙書令) 진번(陳蕃)이 상소해서 다섯 명의 처사를 천거하니, 황제가 안거와 현훈(玄纁) 등의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자치통감(資治通鑑)》 환제(桓帝) 연희(延熹) 2년 조에 나온다. 안거는 앉아서 편히 타는 수레를 뜻한다. 수레는 서서 타는 것이 보통이나, 은퇴한 국가의 원로나 중망(重望)이 있는 인사를 징소(徵召)할 때에는 안거를 하사하며 예우하였다. 현훈은 검은색 비단을 말한다.
[주D-009]한정(漢鼎)이……있으리까 : 한 나라 왕실이 고당(錮黨)의 화를 당한 인사들 덕분에 유지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한정은 한나라 구정(九鼎)이란 뜻으로, 한나라의 국운(國運)을 의미한다. 고당의 화는 후한 영제(靈帝) 때 환관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이 대장군 두무(竇武)와 함께 환관을 모살(謀殺)하려다가 오히려 실패한 나머지 진번과 이응 등 100여 인이 피살을 당한 뒤를 이어 계속해서 사형과 유배를 당하고 수금된 자가 700여 인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이때 곽태(郭泰)가 당인(黨人)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혼자서 그들을 위해 통곡하면서 “현인이 이제 사라졌으니 나라가 병들게 되었다는 시가 있는데, 이제 한나라도 망하게 되었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 漢室亡矣〕”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資治通鑑 卷56 李靈皇帝 上之上》 인용문에 나오는 시는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의 구절이다.
[주D-010]가표(賈彪) : 가 표가 신식(新息)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 빈곤한 백성들이 자식을 낳아 기르지 못하고 내버려서 인구가 감소하자, 영아를 유기할 경우에 살인죄를 적용하도록 엄하게 법령을 정하였다. 그 결과 몇 년 사이에 기르는 아이들이 1000명에 이르렀는데, 가부(賈父) 덕분에 기르게 된 아이라고 하여, 아들을 낳으면 가자(賈子)라고 하고 딸을 낳으면 가녀(賈女)라고 불렀다 한다. 환제(桓帝) 연희(延熹) 9년(166)에 당고(黨錮)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낙양(洛陽)에 가서 당인(黨人)을 변호하여 이응(李膺) 등을 석방시키기도 하였는데, 영제(靈帝) 초에 당인의 일에 연좌되어 금고(禁錮)를 당한 상태에서 집에서 죽었다. 《後漢書 卷67 賈彪列傳》
[주D-011]황보규(皇甫規) : 서 황(徐璜), 좌관(左悺) 등의 환관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무함을 받고 하옥되자 제공(諸公)과 태학생 300여 인이 대궐에 가서 억울하다고 호소한 결과 사면을 받고 풀려나기도 하였는데, 뒤에 당고(黨錮)의 화가 크게 일어나 천하의 명현이 체포되는데도 자신은 연루되지 않자, 이를 수치로 여긴 나머지 스스로 상소하여 자기도 당인(黨人)이라면서 함께 처벌받기를 원했으나, 조정에서 아예 불문에 부쳤다는 내용이 《후한서》 권65〈황보규열전〉에 보인다. 그리고 그 열전의 논(論)에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실제로 행하기 어렵다.〔其言之不怍 則爲之也難〕”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뒤에, “황보규의 말을 살펴보면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察皇甫規之言 其心不怍哉〕”라고 비평하고 있다.
[주D-012]구당(鉤黨) : 한 패거리라는 말과 같다.
[주D-013]자리……없었나니 : 자 리를 양보하면서 스스로 토로한 진번(陳蕃)의 말이 에누리 없이 진실이었다는 뜻으로, 가정이 진번 자신의 말을 들어서 그의 단점을 지적한 것이다. 연희(延熹) 8년(165)에 양병(楊秉)을 대신해서 진번이 태위(太尉)에 임명될 당시에, “선왕의 예악과 형정을 준수하여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 점에서는 신이 호광(胡廣)보다 못하고,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고 오전(五典)을 따르는 면에서는 신이 왕창(王暢)보다 못하고, 총명하고 양달(亮達)하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면에서는 신이 이응(李膺)보다 못하다.”라고 사양한 말이 《후한서》 권66 〈진번열전〉에 보인다.
[주D-014]칼……넘겨줬으련만 : 영 제(靈帝)가 즉위한 뒤에 두 태후(竇太后)의 부친인 대장군 두무(竇武)와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했는데, 그 일이 누설되어 두무가 환관들에게 먼저 살해당하자, 진번이 70여 세의 나이로 곧장 관속과 제생 등 80여 인을 이끌고서 칼을 빼 들고 승명문(承明門)으로 돌입했다가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에 그처럼 무모하게 행동하지만 않았더라면 두 태후로부터 정국의 주도권을 넘겨받고서 사태를 뜻대로 처리할 수 있었으리라는 말이다. 두 태후는 환제(桓帝)의 황후로, 환제가 죽자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장제(章帝)의 현손(玄孫)으로 당시 12세였던 영제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웠다.
[주D-015]공포(孔褒) : 노 나라 사람으로 장검(張儉)과 친분이 있었다. 망명 중인 장검이 그의 집을 찾아왔을 때 마침 그는 없고 16세 된 그의 동생 공융(孔融)이 숨겨 주었다. 나중에 그 사실이 알려지자 장검은 도주하고 공포와 동생과 모친이 추궁을 당했는데, 세 사람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며 서로 벌을 받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자치통감(資治通鑑)》 권56〈효령황제(孝靈皇帝) 상지상(上之上)〉에서는 “한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겠다고 자청하며 나서자 군현에서 판결할 수 없는 의옥(疑獄)이라 하여 조정에 평의(評議)를 청하니, 영제(靈帝)가 조서를 내려 마침내 공포를 연좌시켰다.〔一門爭死 郡縣疑不能決 乃上讞之 詔書竟坐褒〕”라고 기술하였다.
[주D-016]장검(張儉) : 후 한 환제(桓帝) 연희(延熹) 8년(165)에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과 그 모친의 죄악을 탄핵한 일로 후람과 원수가 되었다. 뒤에 후람의 무고로 영제(靈帝)가 장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마침내 망명 길에 올랐는데, 그가 찾아가는 집마다 멸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후대하였다가 수많은 친척들이 처형을 당하고 군현(郡縣)이 폐허로 변했다. 헌제(獻帝) 중평(中平) 연간에 당금(黨禁)이 해제되자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 뒤 건안(建安) 초에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조조(曹操)가 전횡하자 정사에 참여하지 않다가 84세의 나이로 집에서 죽었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張儉》
[주D-017]맹타(孟佗) : 원문은 ‘맹타(孟他)’로 되어 있으나 《후한서》 권78〈장양열전(張讓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18]감노(監奴)의……올랐다네 : 후 한 영제(靈帝) 때에 환자(宦者) 장양(張讓)이 중상시(中常侍)로 자리를 옮기고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부풍(扶風) 사람 맹타(孟佗)가 장양의 감노(監奴)와 하인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선물을 많이 주었다. 감노가 그의 소원을 물으니, 맹타가 말하기를 “나의 소망은 너희들이 나에게 절 한 번 해 주는 것이다.〔吾望汝曹爲我一拜耳〕”라고 하였다. 장양에게 청탁하려는 빈객들이 잔뜩 모였을 때 맹타가 뒤늦게 도착하자, 감노가 하인들을 이끌고 맹타에게 절을 하며 모시고 들어오니, 빈객들이 장양보다 더 위세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맹타에게 다투어 뇌물을 바쳤다. 이에 맹타가 그 뇌물을 장양에게 나누어 주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여 맹타를 양주 자사(凉州刺史)로 삼았다. 《後漢書 卷78 張讓列傳》
[주D-019]부엌……내다니 : 위 (衛)나라의 실권자인 왕손가(王孫賈)가 “아랫목 귀신과 같은 왕에게 잘 보이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부엌 귀신처럼 실력이 있는 자기에게 잘 보이라.〔與其媚於奧 寧媚於竈〕”는 뜻으로 공자에게 말하자, 공자가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라고 대답한 내용이 《논어》 〈팔일(八佾)〉에 나온다.
[주D-020]백랑(伯郞) : 맹타의 자이다.
[주D-021]기우는……없었어도 : 권 간(權奸) 양기(梁冀)가 질제(質帝)를 독살하고 환제(桓帝)를 세우려고 할 적에 호광(胡廣)이 겁에 질린 채 “오직 대장군의 명령대로 따르겠다.〔惟大將軍令〕”라고 하면서 굽실거렸으므로, 이고(李固)가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그에게 글을 보내 호되게 질책했던 고사가 《후한서》 권63〈이고열전(李固列傳)〉에 나온다.
[주D-022]삼십 년……사람 : 차 례로 여섯 황제를 섬긴 30여 년 동안 사공(司空)을 한 차례, 사도(司徒)를 두 차례, 태위(太尉)를 세 차례 지냈고, 또 태부(太傅)가 되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에도 공경대부를 위시한 수백 인이 모두 상복 차림으로 빈위(殯位)에 서서 장례를 행하였으므로, 한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이처럼 극진하게 예우를 받은 신하는 없었다는 평을 받았다.
[주D-023]천하의 중용(中庸) : 당시에 “어떤 일이든 잘 모르면 백시에게 물어보라, 천하의 중용은 호공에게 있나니라.〔萬事不理問伯始天下中庸有胡公〕”라는 말이 경사(京師)에 유행했다고 한다. 백시(伯始)는 호광(胡廣)의 자이다. 《後漢書 卷44 胡廣列傳》
[주D-024]선릉 효자(宣陵孝子) : 환 제(桓帝)의 능인 선릉에 서로 모여 효자 노릇을 했다는 시고(市賈)의 서민들을 말한다. 후한 영제(靈帝) 희평(熹平) 6년(177)에 “시장에서 장사하는 서민들로 선릉의 효자 노릇을 했다는 수십 인에 대해 모두 태자 사인의 직책을 제수하게 하였다.〔市賈民爲宣陵孝子者數十人 皆除太子舍人〕”는 말이 나온다. 《後漢書 卷8 靈帝紀》 이에 의랑(議郞) 채옹(蔡邕)이 그들의 사위(詐僞)를 밝히며 개정할 것을 건의하자, 태자 사인 대신 승위(丞尉)를 제수하도록 하였다. 채옹의 상소는 《채중랑집(蔡中郞集)》 권2〈진정요칠사(陳政要七事)〉에 나온다.
[주D-025]수민(讐民) : 귀순한 적국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업신여기며 조롱하는 뜻이 들어 있다.
[주D-026]홍도문학(鴻都門學) : 황 궁의 홍도문(鴻都門) 안에 세운 학교라는 말로, 후한 영제 광화(光和) 원년(178) 2월에 설치되었다. 주군(州郡) 및 삼공(三公)의 추천을 받아 척독(尺牘) 사부(辭賦) 및 전서(篆書) 등에 능한 학생들을 모집하였는데, 한창 번성할 때는 그 숫자가 1000명에 이르렀다. 이때 영제가 경학 대신 문예를 좋아하여 이들을 총애했으므로 자사(刺史)와 태수(太守)로 나가기도 하고 상서(尙書)와 시중(侍中)이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인(士人)들은 이들을 ‘홍도군소(鴻都群小)’라 부르면서 그들과 함께 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後漢書 卷8 靈帝紀》
[주D-027]석거(石渠)와……열었었지 : 한나라 선제(宣帝)와 장제(章帝)가 각각 석거각(石渠閣)과 백호관(白虎觀)에서 학사(學士)들과 함께 친히 오경(五經)을 강론하며 《석거의주(石渠議奏)》와 《백호의주(白虎議奏)》를 펴낸 유명한 고사가 있다.
[주D-028]조충 조전(雕虫鳥篆) : 벌레나 새 발자국 모양으로 생겨서 알아보기 힘든 전서체(篆書體)의 이상한 옛날 글자라는 말이다.
[주D-029]황제가……하였다네 : 마 치 공신을 대하는 것처럼 홍도문학의 예능인들을 파격적으로 예우했다는 말이다. 영제가 상방(尙方)에 명하여 홍도문학의 낙송(樂松)과 강람(江覽) 등 32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찬(贊)을 지어서 학자를 권면하게 하자, 상서령(尙書令)인 양구(陽球)가 그 부당함을 극력 설파하고 그 기회에 아예 홍도문학의 혁파를 건의하는 주문(奏文)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後漢書 卷77 陽球列傳》 운대(雲臺)는 후한 명제(明帝) 때 등우(鄧禹) 등 전대(前代)의 명장 28인의 초상화를 그려서 걸어 놓고 추모한 공신각(功臣閣)의 이름이다.
[주D-030]서저(西邸) : 서 원(西園)의 저택이라는 뜻으로, 매관매직의 대가로 받은 돈을 저장해 두던 곳을 말한다. 후한 영제 광화(光和) 원년(178)에 처음으로 서저를 지어 놓고 관직을 팔면서 관내후(關內侯)와 호분(虎賁)과 우림(羽林) 등의 벼슬 값으로 각각 차등 있게 돈을 내게 하였으며, 이와 함께 사적으로 측근을 시켜서 공경(公卿)의 자리도 팔게 하였는데, 공은 천만전(千萬錢), 경은 오백만전(五百萬錢)을 지불하게 하였다. 그리고 외방의 고을 수령 자리 역시 그 고을의 풍약(豐約)의 정도에 따라 각각 가격을 달리하였는데, 부자는 먼저 돈을 내게 하고 빈자는 먼저 부임하고 나서 갑절의 돈을 바치게끔 하였다. 《後漢書 卷8 靈帝紀》
[주D-031]황건(黃巾) : 후 한 말년에 태평도(太平道)의 수령 장각(張角) 등이 거느린 농민군을 말하는데, 모두 누런 두건을 썼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후한서》 권8〈영제기(靈帝紀)〉에 “거록인 장각이 스스로 황천이라고 칭하였는데, 그 부하 36만 인이 모두 누런 두건을 쓰고서 같은 날에 반란을 일으켰다.〔巨鹿人張角自稱黃天其部帥有三十六萬 皆著黃巾 同日反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2]현우(賢愚)를……때문 : 후 한의 허소(許劭)는 젊어서부터 명절(名節)을 지니고 곽태(郭泰)와 친하게 지내면서 사람을 잘 알아본다는 명성을 함께 얻었다. 그리고 종형(從兄)인 허정(許靖)과 더불어 달이 새로 바뀔 때마다 향리의 인물들에 대해서 품평을 다시 하곤 하였는데, 그 뒤로 여남(汝南)에 월단평(月旦評)의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後漢書 卷68 許劭列傳》
[주D-033]교현(橋玄)의……좋아하더라나 : 처 음에 조조(曹操)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는데, 교현이 “지금의 형세로 보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텐데 생민을 안정시킬 사람은 바로 그대일 것이다.〔今天下將亂 安生民者其在君乎〕”라고 말했으므로, 조조가 항상 지기(知己)로 여기면서 감격하다가 교현이 죽은 뒤에는 묘소에 가서 제문(祭文)을 지어 감회를 술회하기도 하였다. 《後漢書 卷51 橋玄列傳》 그 뒤에 조조가 겸손한 태도로 예물을 갖추어 허소에게 찾아가서 자기를 평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허소가 그 인물을 비루하게 여겨 응대하려고 하지 않다가, 마지못해서 강요에 못 이겨 “그대는 태평 시대에는 간적이 될 것이고, 난세에는 영웅이 될 것이다.〔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라고 대답하니,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떠났다는 내용이 《후한서》 권68〈허소열전〉에 보인다.
[주D-034]조지(棗祗) : 고 (故) 진류 태수(陳留太守)로 의병을 함께 일으켜 동탁(董卓)을 토벌하였다. 원소(袁紹)가 기주(冀州)에 있으면서 조지를 탐내어 얻으려고 하였으나 조조에게 귀의하니 조조가 동아 영(東阿令)을 삼았다. 여포(呂布)의 난에 연주(兗州) 일대가 모두 조조를 배반했으나, 조지가 동아를 굳게 지키면서 군량 조달을 원활히 하였다. 황건(黃巾)을 격파한 뒤에 조지의 둔전책(屯田策)을 받아들여 그를 둔전도위(屯田都尉)로 삼으니, 재정이 풍족하게 되었다. 이상은 조지가 죽은 뒤에 조조가 그의 행적을 술회한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삼국지(三國志)》 권16〈임준전(任竣傳)〉의 “군국의 풍요는 조지에서 시작되어 임준에게서 완성되었다.〔軍國之饒起於棗祗而成於竣〕”라는 말에 대한 배송지(裴松之)의 주(注)에 나온다.
[주D-035]상식(相食)의 궁지 : 양식이 없어서 사람끼리 잡아먹을 정도까지 된 것을 말한다.
[주D-036]원손(袁孫) : 원소(袁紹)와 손권(孫權) 같은 조조의 강력한 경쟁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37]예형(禰衡) : 재 주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으나, 오직 공융(孔融)에게 인정을 받고서 조정에 천거되었다. 조조의 앞에서 발가벗는 등 무례한 태도를 많이 보이자 조조가 당장에 죽이고도 싶었으나 용납하지 못했다는 이름을 얻을까 봐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보냈는데, 유표 역시 조롱을 받고 더 참을 수 없게 되자 성질이 급한 강하 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에게 보냈다. 황조가 처음에는 존중하며 예우하였으나, 결국에는 분노가 폭발하여 죽이고 말았는데, 이때 예형의 나이 26세였다. 《後漢書 卷80下 文苑列傳 禰衡》 《三國志 卷10 魏書 荀彧傳 裴注》
[주D-038]동 태사(董太師) : 동탁(董卓)을 가리킨다. 동탁이 여포(呂布)와 맹세하며 부자(父子) 관계를 맺고 매우 사랑하였으나, 결국에는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後漢書卷72 董卓列傳》 《三國志 卷7 魏書 呂布傳》
[주D-039]백문(白門) : 서 주(徐州) 하비성(下邳城)의 남문(南門)이다. 조조에게 수공(水攻)을 당해 물에 잠긴 지 3개월 만에 부하 장수들이 배반하고 먼저 항복하자, 여포 역시 백문루(白門樓)까지 올라갔다가 포위망이 좁혀지자 내려와서 항복하였는데, 《후한서》 권75 〈여포열전(呂布列傳)〉과 《삼국지》〈여포전〉에 보인다.
[주D-040]대경(臺卿) : 자 (字)가 공대(公臺)인 진궁(陳宮)에 대한 경칭이다. 진궁은 일찍이 조조(曹操)를 따르다가 그 인격에 회의를 품고 떠나 여포에게 가서 좋은 계책을 많이 제공하였으나 여포가 매번 듣지 않았다. 여포와 함께 조조에게 붙잡혔을 적에, 조조가 “공대는 평소에 지혜가 많다고 자처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가?〔公臺平生自謂智有餘 今意何如〕”라고 묻자, 진궁이 여포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 만약 내 말을 들었더라면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是子不用宮言 以至於此 若見從 未可量也〕”라고 답변하고는 의연히 죽음을 택하였다. 이 내용은 〈여포전〉에 기재되어 있다.
[주D-041]유씨(劉氏)네……하였다네 : 여 포가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적에 조조는 살려 줄 뜻이 있었으나, 유비(劉備)가 여포의 배은망덕한 옛일을 거론하면서 안 된다고 반대하자, 조조가 그렇겠다고 머리를 끄덕이니, 여포가 “귀 큰 아이는 정말 믿을 수 없다.〔大耳兒最叵信〕”라면서 원망한 말이 〈여포전〉에 보인다. 유비는 자기 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귀가 컸다고 한다.
[주D-042]전풍(田豐) : 무 재(茂才)로 천거되어 시어사(侍御史)로 있다가 환관의 전횡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던 중에 원소(袁紹)의 명에 응해 별가(別駕)가 되고 나서 뛰어난 계책을 많이 올렸는데, 지구(持久)의 작전 계획을 건의하자 원소가 성을 내며 포박했다가 관도(官渡)의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한 뒤에 전풍을 죽였다.
[주D-043]가련타……같구나 : 원 소(袁紹)의 사랑을 받아 그 지위를 이어받은 소자(小子) 원상(袁尙)과 장자(長子) 원담(袁譚) 사이에 틈이 벌어져서 형제간에 해마다 교전(交戰)을 하다가 조조에게 패망한 것이 마치 진(秦)나라가 2세 황제 호해(胡亥) 때에 패망한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담장 안의 환란이란, 《논어(論語)》 〈계씨(季氏)〉의 “계손의 걱정거리가 전유에 있지 않고 담장 안에 있을 것 같다.〔吾恐季孫之憂不在顓臾而在蕭墻之內也〕”라는 공자의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자중지란(自中之亂)을 뜻한다.
[주D-044]북해(北海) : 공융(孔融)의 별칭이다. 일찍이 북해 상(北海相)을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45]경솔히……유사하네 : 공 융이 조조에게 맞서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조롱하는가 하면, 조조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도 누차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면서 쓸데없이 거드름을 부리고 업신여기는 말을 많이 한 것이 《후한서》 권70〈공융열전〉에 보인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유감을 품고 원망하던 조조에게 무함을 받고서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에 걸려 기시(棄市)되고 멸족을 당했는데, 이는 예형(禰衡)이 함부로 말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정평(正平)은 예형의 자로, 공융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조정에 추천하였다.
[주D-046]경위(傾危) : 교활한 속임수로 국가를 기울어지고 엎어지게 한다는 뜻으로, 유세객으로 유명한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두 사람을 경위지사(傾危之士)라고 단정하여 평한 내용이 《사기(史記)》 권70〈장의열전(張儀列傳) 찬(贊)〉에 나온다.
[주D-047]강호(江湖)를……있어서라 : 장 간(蔣幹)은 재변(才辯)으로 강회(江淮)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는데, 조조가 오나라 주유(周瑜)를 유혹하려고 그를 유세객으로 보냈다. 그가 포의(布衣)를 입고 사적인 여행이라면서 주유를 찾아가자, 주유가 영접하며 “자익이 강호를 멀리 건너오느라 고생이 참 많았다. 그런데 조씨를 위해서 나에게 유세객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子翼良苦遠涉江湖 爲曹氏作說客耶〕”라고 하고는, 극진하게 환대한 뒤에 손권(孫權)과 자기와의 뗄 수 없는 의리 관계를 강조하면서 “소진과 장의가 다시 세상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뜻을 바꾸게 할 수 있겠는가.〔假使蘇張更生 能移其意乎〕”라고 하여 아무 말도 못 하게 하고 돌려보냈다. 《資治通鑑 卷66 孝獻皇帝》 자익(子翼)은 장간의 자이다.
[주D-048]오림(烏林)의……맞먹었네 : 적 벽(赤壁) 전투에서 승리한 뒤로 삼강(三江) 일대의 강동(江東) 지방이 조조에게 대항하면서 유비(劉備)와 함께 비로소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림은 장강(長江) 북쪽 언덕에 위치한 지명인데, 헌제(獻帝) 건안(建安) 13년(208)의 적벽 전투에서 주유(周瑜)가 조조의 군대를 여기에서 격파하였다. 《三國志 卷54 吳書周瑜傳》 일거(一炬)는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을 점령한 뒤에 진(秦)나라 궁실을 모두 태워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게 했다는 초인일거(楚人一炬)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적벽 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를 화공(火攻)으로 섬멸한 것을 말한다.
[주D-049]평소의……하리 : 오 나라 정보(程普)가 주유와의 두터운 교분을 비유하면서 “주공근과 사귀다 보면 마치 전국술을 마신 것처럼 나도 모르게 절로 훈훈하게 취해 온다.〔與周公瑾交 若飮醇醪 不覺自醉〕”라고 한 말이 〈주유전〉의 배송지(裴松之) 주(注)에 나오는데, 정보는 주유와 비교하면 수준이 한참 아래이기 때문에 동격으로 논해질 자격도 없다는 말이다. 정보가 주유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업신여기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주유가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면서 끝내 다투려 하지 않자, 정보가 결국에는 존경하며 심복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그 주에 함께 나온다. 정장(程張)은 정보와 장소(張昭)의 병칭이고, 공근(公瑾)은 주유의 자이다.
[주D-050]누가……하고말고 : 손 권(孫權)이 여몽(呂蒙)을 군정(軍政)에 참여시키면서 독서할 것을 권하였는데, 여몽이 군중(軍中)에 일이 많아서 책을 읽을 여가가 없다고 사양하니, 손권이 “내가 어찌 경에게 경서를 연구하여 박사가 되라고 하는 것이겠는가. 지금 대강이라도 지나간 일을 섭렵해서 알아 두라는 것일 뿐이다.〔孤豈欲卿治經爲博士耶但當今涉獵見往事耳〕”라고 하였다. 여몽이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워낙 천품이 총명해서 숙유(宿儒)보다도 뛰어난 식견을 보였다. 뒤에 노숙(魯肅)이 여몽과 담론하다가 학식이 몰라보게 진보한 것에 탄복하면서 “나는 현제(賢弟)가 무사(武事)만 아는 줄로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건대 학식이 깊고 넓으니 과거에 보던 오하의 아몽이 아니다.〔吾謂大弟但有武略耳 至于今者 學識英博非復吳下阿蒙〕”라고 칭찬하니, 여몽이 “선비는 사흘만 헤어져 있어도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되는 법이다.〔士別三日卽更刮目相待〕”라고 대답하였다. 《三國志 卷54 吳書 呂蒙傳 裴注》 오하(吳下)는 소주(蘇州)를 가리키고, 아몽(阿蒙)은 여몽을 가리킨 말로 아(阿)는 어조사이다.
[주D-051]조씨(曹氏)의……신하였네 : 순 욱(荀彧)이 조조(曹操)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 나머지, 한말(漢末)에 왕위를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처럼 되게 했다는 일부 평가에 대해서, 가정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호한 것이다. 왕망은 한나라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생질로,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어 재형(宰衡)이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하였으나, 마침내는 평제(平帝)를 시해하고 유자 영(孺子嬰)을 세워 섭정을 하면서 가황제(假皇帝)라고 칭하다가, 뒤이어 찬탈하고는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는데, 재위 15년 만에 광무(光武)의 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漢書 卷99 王莽傳》 한편 《삼국지》 권10〈순욱전(荀彧傳)〉의 논(論)을 보면, 진수(陳壽)가 “순욱은 청수하고 통아하여 왕좌의 풍도가 있었다. 그러나 감식안이 높고 선견지명이 있었는데도, 그 뜻을 확충하지 못하였다.〔荀彧淸秀通雅 有王佐之風 然機鑒先識 未能充其志也〕”라고 하여, 조조를 왕도(王道)로 인도하지 못한 책임을 그에게 돌렸는데, 이에 대해서 배송지(裴松之)는 그 주(注)에서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고 여기면서 그 뜻을 실행에 옮긴 의로운 인사였으니, 그 뜻을 확충하지 못했다고 평한 것은 거의 무함에 가깝다.〔可謂任重道遠 志行義士 謂之未充其殆誣歟〕”라고 반박하였다.
[주D-052]순후(荀侯)가……죽었으랴 : 후 한 헌제(獻帝) 건안(建安) 17년(212)에 동소(董昭) 등 대신(大臣)이 조조의 공훈을 감안하여 승상(丞相)의 신분으로 국공(國公)의 작위를 지니게 하고 구석(九錫)의 특례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조가 이 일에 대해서 순욱에게 은밀히 물었는데, 순욱이 충의의 도리에 입각하여 그러한 일은 온당치 못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조조가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 뒤에 조조가 유수(濡須)로 진격했을 적에 순욱이 병으로 수춘(壽春)에 남아 있다가 울화병에 걸려 죽었다. 《三國志 卷10 裴注》 이와는 달리 《후한서》 권70〈순욱열전〉에는, 조조가 보낸 음식물의 뚜껑을 열어 보니 빈 그릇이었으므로 순욱이 음독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D-053]관중(管仲)의 인(仁) : 관 중이 자기가 모시던 공자(公子) 규(糾)에게 충성을 바쳐 함께 따라 죽지 않은 것을 거론하면서,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로(子路)와 자공(子貢)이 불인(不仁)하다고 주장하자, 공자가 천하를 규합하여 전란을 종식시킨 관중의 공을 환기시키면서 그 주장을 반박한 내용이 《논어》 〈헌문(憲問)〉에 나온다.
[주D-054]유수구(濡須口) : 유 수는 고대에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사이의 교통 요지로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쟁탈의 요소였다. 후한 말년에 손권(孫權)이 이 강물의 어귀에 제방을 쌓아서 조조(曹操)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삼국지》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에 “조조가 유수를 침공하자, 손권이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하였다. 조조가 손권의 군대를 바라보고는, 엄숙하게 정제된 것을 탄복하면서 물러갔다.〔曹公攻濡須權與相拒月餘 曹公望權軍 歎其齊肅乃退〕”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조조가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쯤은 되어야지, 유경승의 아이들은 개나 돼지와 같다.〔生子當如孫仲謀 劉景升兒子若豚犬耳〕’라고 탄식하였다.”라는 말과, 또 “손권이 조조에게 글을 보내기를 ‘봄물이 불어나니 공은 빨리 떠나시오.〔春水方生公宜速去〕’라고 하고, 별지(別紙)에 ‘족하가 죽지 않으면 이 몸이 편안할 수가 없소이다.〔足下不死 孤不得安〕’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중모(仲謀)는 손권의 자이다. 경승(景升)은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자이고, 그 아들은 유기(劉琦)와 유종(劉琮)을 가리키는데, 유표가 죽은 뒤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며 형주를 헌납하였다.
[주D-055]삼공(三公)이……않았다네 : 진 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이 황제가 되어 진나라를 세우기 전 부친 사마소(司馬昭)의 뒤를 이어 위(魏)나라의 상국(相國)이 되고 진왕(晉王)이 되었을 때, 왕상(王祥)과 하증(何曾)과 순의(荀顗)가 각각 태위(太尉)와 사도(司徒)와 사공(司空)으로 삼공의 지위에 있었다. 왕상과 순의가 진왕을 보러 갈 때, 순의가 “상국과 진왕의 지위는 존귀하다. 그래서 하후도 이미 공경을 극진히 하였으니 우리도 절을 해야 한다.〔相王尊重 何侯旣已盡敬 今便當拜也〕”고 하니, 왕상이 “상국이 존귀하긴 하나 위나라의 재상일 뿐이다. 우리는 위나라의 삼공이니, 공과 왕 사이는 한 등급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반열이 거의 같은데, 천자의 삼사 신분으로 무턱대고 신하에게 절을 할 수가 있는가. 위나라 조정의 위신을 깎아내릴 뿐 아니라 진왕의 덕망도 훼손하는 일이다.〔相國誠爲尊貴 然是魏之宰相 吾等魏之三公 公王相去一階而已 班例大同 安有天子三司而輒拜人者 損魏朝之望 虧晉王之德〕”라고 하고는 홀로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다. 《晉書 卷33 王祥列傳》 하후(何侯)는 낭릉후(朗陵侯) 하증을 가리킨다.
[주D-056]조실(曹室)의 구금(九金) : 조 씨(曹氏)가 세운 위나라 왕실의 권위를 뜻하는 말이다. 구금은 하우씨(夏禹氏)가 구주(九州)의 쇠붙이를 모아 주조했다는 구정(九鼎)으로, 삼대를 전해 오면서 천하를 차지한 제왕 혹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보배로 여겨졌다. 《史記 卷12 武帝紀》
묵매(墨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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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에 비친 매화 자태 청창에서 그리려니 / 晴窓寫出照潭姿
경각간에 묵지 가득 봄바람이 넘실넘실 / 頃刻春風漲墨池
명비가 그림 속서 찡그리니 어떡하나 / 已分明妃愁畫面
옥안 검게 변한 것을 적선은 저어 마오 / 謫仙休怪玉顔緇
[주D-001]묵지(墨池) : 먹물을 한데 모으도록 된 벼루 속의 오목한 곳으로, 연지(硯池)라고도 한다.
[주D-002]명비(明妃)가……어떡하나 : 매 화의 본색을 제대로 그려 내지 못하고 그림을 망쳐 버렸다는 말이다. 명비는 한 원제(漢元帝) 때 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에게 보내진 왕소군(王昭君)을 가리킨다. 원제는 후궁이 워낙 많아서 화공에게 궁녀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그것을 보고 궁녀를 골라 총애하였기 때문에 궁녀들이 화공에게 다투어 뇌물을 주곤 하였는데, 후궁 중 최고의 미인이었던 왕소군만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화공이 추하게 그린 까닭에 황제의 은총을 입지 못했을뿐더러 흉노가 선우의 연씨(閼氏)가 될 미인을 요구했을 때도 왕소군이 뽑혀서 가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94 匈奴傳下》 《後漢書 卷89 南匈奴列傳》 《西京雜記 卷2》
[주D-003]옥안(玉顔)……마오 : 얼 굴이 야위어 핼쑥해진 정도야 잘못된 이 그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이백(李白)의 시에 “시조 사이에서 그럭저럭 보내는 동안, 옥 같은 얼굴은 날로 검게 야위어, 잃은 것은 산악보다도 중하고, 얻은 것은 진애보다도 가벼웠소.〔悠悠市朝間玉顔日緇磷 所失重山岳 所得輕埃塵〕”라는 말이 나온다. 《李太白集卷14 潁陽別元丹丘之淮陽》 적선(謫仙)은 인간 세계에 귀양을 온 신선이란 뜻으로,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을 처음 만나 그의 글을 보고는 지어 준 별칭이다.
매화. 권일재(權一齋)의 시에 차운(次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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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소매 푸른 치마로 달빛 아래 노닐 뿐 / 縞袂靑裙月下遊
금전두는 요구하지 않을 것을 알겠도다 / 知渠不要錦纏頭
천홍만자(千紅萬紫)가 사람 눈을 호리는 세상 / 世間紅紫迷人眼
폭풍이 흰 올챙이 꽃을 앗아갈까 두려워라 / 便恐凌風控玉蚪
[주C-001]권일재(權一齋) : 일재는 권한공(權漢功 : ?〜1349)의 호이다.
[주D-001]금전두(錦纏頭) : 옛날 예인(藝人)이 가무를 끝내고 나면 손님들이 그 대가로 주던 비단을 말하는데, 보통 기녀에게 재물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금벽전(金壁傳)의 후벽(後壁)에 제(題)하다 고려인(高麗人)이 대녕(大寧)에 들어와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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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가족을 이끌고서 피난 오던 초기에는 / 憶昔携家避地初
요서가 우리 집보다 꼭 낫다고는 못했는데 / 遼西未必勝吾廬
지금은 말소리도 변하고 자손들도 자라나서 / 語音變盡兒孫長
고향 마을 모조리 잊고도 태연자약하다네요 / 鄕井渾忘却自如
중서(中書) 역사(譯史)의 모란도(牡丹圖) 뒤에 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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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의 정묘한 구상이 조물의 솜씨 빼앗아서 / 畫師妙思奪天工
국색이 의연히 이슬을 머금고 붉었도다 / 國色依然帶露紅
기억하라 명년에 우리가 서로 만날 때는 / 記取明年相對處
침향정 북쪽 난간 봄바람 속에 기대리니 / 沈香亭北倚春風
[주D-001]국색(國色) : 모란의 별칭이다. 모란의 비범한 향기와 색깔을 국색천향(國色天香)이라 한다.
[주D-002]기억하라……기대리니 :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출세하겠다는 뜻을 은연중에 토로한 것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침향정(沈香亭)에서 양 귀비(楊貴妃)와 모란꽃을 구경하다가 한림(翰林) 이백(李白)을 불러 시를 짓게 하자 3수를 지어 바쳤는데, 그중에 “유명한 꽃과 경국지색 모두 기쁨을 선사해서, 군왕이 언제나 미소 띠고 바라본다네. 봄바람의 끝없는 한을 풀어 녹이려고,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섰다오.〔名花傾國兩相歡長得君王帶笑看 解釋春風無限恨 沈香亭北倚闌干〕”라는 말이 나온다. 《李太白集卷4 淸平調詞》
송 좨주(宋祭酒)의 육준도(六駿圖)에 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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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물이 서로 만나는 것이 어찌 우연이리오 / 神物相逢豈偶然
규염 십팔 세 때부터 전쟁에 종사하였도다 / 虯髥十八事戈鋋
진나라 삼세와 같은 수가의 일월이라면 / 隋家日月秦三世
한나라 오년과 같은 이씨의 건곤이로다 / 李氏乾坤漢五年
일족이 당시에 모두 번개를 쫓듯 하였는데 / 逸足當時皆逐電
채호의 제자가 능연의 솜씨를 한껏 발휘하였도다 / 彩毫諸子擅凌煙
소릉에 돌로 새긴 데에는 깊은 뜻이 있나니 / 昭陵石刻有深意
세상에 와전됨이 없이 보배로 남게 해 주려고 / 留與人間作寶傳
[주D-001]규염(虯髥) : 용 처럼 위로 돌돌 말려 올라간 수염이라는 뜻으로, 당 태종(唐太宗)을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시에 “규염이 당 태종과 비슷하다.〔虯髥似太宗〕”라고 표현한 대목과 당 태종을 “십팔구 세쯤 된 규염의 소유자〔虯髥十八九〕”라고 묘사한 대목이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16〈팔애시(八哀詩) 4〉와 권23〈송중표질왕예평사사남해(送重表姪王砅評事使南海)〉에 각각 나온다.
[주D-002]진(秦)나라……일월(日月)이라면 : 진나라가 시황(始皇), 이세 황제(二世皇帝), 공자 영(公子嬰)의 3세 만에 망한 것처럼, 수(隋)나라 역시 문제(文帝), 양제(煬帝), 공제(恭帝)의 3대만에 망했다는 말이다.
[주D-003]한(漢)나라……건곤(乾坤)이로다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한이라고 국호를 정하고 나서 5년 뒤인 한(漢) 5년(기원전 202)에 해하(垓下)에서 결전을 벌여 항우(項羽)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처럼,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당이라고 국호를 정하고 나서 5년 뒤인 의령(義寧) 7년(624)에 할거한 군웅(群雄)들을 모두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말이다.
[주D-004]일족(逸足)이……발휘하였도다 : 당 태종이 여섯 마리의 준마를 타고 전쟁터를 종횡무진 치달린 것에 대해서는 문재(文才)가 뛰어난 시인 묵객(墨客)들이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면서 마음껏 표현해 냈다는 말이다. 일족은 준마의 빠른 발이라는 뜻으로 육준(六駿)을 가리킨다. 채호(彩毫)는 오색의 붓이라는 뜻으로, 문장의 재능이 뛰어난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인데, 남조 양나라의 시인 강엄(江淹)이 꿈속에서 이 붓을 받고는 문명(文名)을 떨치다가, 만년에 다시 꿈속에서 그 붓을 돌려주고 나서는 좋은 시를 짓지 못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능연(凌煙)은 능운(凌雲)과 같은 말로, 그 기상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는 말이다.
[주D-005]소릉(昭陵)에……있나니 : 소 릉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당 태종의 능이다. 정관 10년(636)에 당 태종이 육준(六駿)의 모습을 돌에다 새겨서 소릉 앞에 세우게 하고 직접 찬(贊)을 지었다. 현재 6개의 석각(石刻) 중 2개는 미국에 있고 4개는 섬서성 박물관에 있다.
허 이문(許理問)을 전송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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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있으면서부터 / 自君在東省
사람들이 청빈을 말하게 되었나니 / 有口說淸貧
처음에는 예거의 객을 부러워하다가 / 始慕曳裾客
나중에는 입막의 빈도 부끄러워했다오 / 終慙入幕賓
평생토록 오직 절조와 의리를 지키신 분 / 平生唯節義
출처가 어찌 검어지거나 얇아졌으리 / 出處豈緇磷
이별주에 취하는 것 사양하지 마오 / 別酒休辭醉
절의의 꽃 국화가 사람을 비웃을 테니 / 黃花笑殺人
[주D-001]예거(曳裾) : 옷 자락을 끌고 다닌다는 뜻으로, 왕족이나 권세가의 집에 출입하며 빌붙어서 출세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추양(鄒陽)이 오왕(吳王)에게 보낸 글 가운데 “내가 고루한 나의 마음을 꾸미려고만 들었다면, 어떤 왕의 궁문인들 나의 긴 옷자락을 끌고 다닐 수가 없었겠는가.〔飾固陋之心 則何王之門 不可曳長裾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漢書 卷51 鄒陽傳》
[주D-002]입막(入幕) : 장 막 뒤에 숨어서 남의 말을 엿듣는 역할을 하는 참모라는 뜻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환온(桓溫)을 찾아왔을 때 환온이 자신의 참모인 치초(郗超)에게 장막 속으로 들어가서 엿듣도록 하였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와 장막이 걷히자 사안이 웃으면서 “치생은 장막 속의 손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郗生可謂入幕之賓矣〕”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67 郗超列傳》
[주D-003]출처(出處)가……얇아졌으리 : 신 념을 변치 않고 고수하면서 출처를 분명히 했다는 말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아무리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견고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결백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차운하여 이 승통(李僧統)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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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극에 달하면 근원으로 돌아오는 법 / 理極從來必返原
친상 자진이라고 항용 말하지 않던가 / 親喪自盡是恒言
구천에 영결하고 나면 찾아뵐 길이 없는데 / 九泉永訣無尋處
삼교도 귀결은 같으니 어찌 차이가 있으리오 / 三敎同歸豈異門
바람이 멎지 않아 흔들리는 묘역의 나무요 / 宰樹搖搖風不止
햇볕이 들지 않아 항상 캄캄한 지하 세계라 / 佳城鬱鬱日長昏
유명묵행이 알고 보면 얼마나 많은가 / 儒名墨行知多少
보은하는 스님 보면 얼굴을 들지 못하리라 / 愧殺吾師解報恩
승통(僧統)이 모친의 분묘에서 여묘(廬墓)하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주D-001]친상 자진(親喪自盡) : “어버이 상이야말로 스스로 극진히 해야 할 일이다.〔親喪固所自盡也〕”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주D-002]삼교(三敎)도……있으리오 : 부 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는 유교(儒敎)나 불교(佛敎)나 도교(道敎) 모두 차이를 보이지 않고 일치한다는 말이다. 참고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세상의 일을 보면 귀결점은 같은데 가는 길이 다르고,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데 생각은 가지각색이다.〔天下同歸而殊塗 一致而百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바람이……세계라 : 다 시는 뵐 수 없는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여묘를 하는 자식의 애달픈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이 있다. 《說苑 敬愼》
[주D-004]유명묵행(儒名墨行) : 겉 으로는 유자(儒者)의 행색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묵자(墨子)의 도를 따른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에 “사람 중에는 본디 이름은 유자이지만 묵자의 도를 행하는 자가 있다. 이름을 물어보면 유자이지만 행동을 따져 보면 유자가 아니다. 이런 자와는 어울려 노닐 수가 없다. 반대로 이름은 묵자이지만 유자의 도를 행하는 자가 있다. 이름을 물어보면 유자가 아니지만 행동을 따져 보면 유자이다. 이런 자와는 어울려 노닐 수가 있다.〔人固有儒名而墨行者問其名則是 校其行則非 可以與之遊乎 如有墨名而儒行者 問其名則非 校其行則是 可以與之遊乎〕”라는 말이 나온다. 이 승통은 묵명유행(墨名儒行)인 셈이다.
권일재(權一齋)가 중구일(重九日)에 용산(龍山)에 올라 두목(杜牧)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시에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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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곤곤히 동쪽으로 해는 날듯 서쪽으로 / 東流袞袞日西飛
세상의 일이 분분해서 시절의 일도 흐지부지 / 世事紛紛時事微
노란 국화 활짝 필 때 통음해야 마땅하니 / 黃菊開時宜痛飮
푸른 산 좋은 곳을 그냥 가서야 되겠는가 / 靑山好處可空歸
속사가 멋진 모임에 끼일 길도 다시 없어 / 更無俗士參高會
명절 마주 대하면서 짧은 해 아쉬워할 뿐 / 唯對良辰惜短暉
유감일세 그 자리에 모자 날리는 객이 되어 / 恨不得爲吹帽客
공 위해 옷깃 떨치고 취해 춤추지 못한 것이 / 爲公醉舞拂塵衣
[주C-001]두목(杜牧)의 시 : 〈구일제산등고(九日齊山登高)〉라는 제목의 시로, 예로부터 절창(絶唱)으로 회자되는데, 《번천시집(樊川詩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주D-001]유감일세……것이 : 일 재(一齋) 권한공(權漢功)과 그때 함께 용산(龍山)에 올라가 술을 흠뻑 마시며 중구일의 정취를 느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맹가(孟嘉)가 중구일에 정서장군(征西將軍) 환온(桓溫)이 베푼 용산의 주연(酒宴)에 참군(參軍)의 신분으로 참석했다가, 국화주에 취한 나머지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識鑑》
박치암(朴恥菴)이 사의(司議)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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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임금이 진유를 쓰려고 뜻을 두신 때 / 吾君着意用眞儒
인망이 두터운 분에게 간의대부가 돌아갔네 / 物望方歸諫大夫
지금부터 이 자리가 더욱 축하받겠는걸 / 從此此官尤可賀
전관들이 같은 날에 홍추에 들어갔으니 / 前官同日入鴻樞
이때 왕(王)ㆍ조(趙) 두 사람이 사의로 있다가 같은 날 밀직(密直)에 임명되었다.
[주C-001]박치암(朴恥菴) : 치암은 박충좌(朴忠佐 : 1287〜1349)의 호이다.
영양(英陽) 신촌(新村)의 이 거사(李居士)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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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경치 좋은 곳에 조촐한 초당 / 新村勝處草堂淸
세상 모두 잊고서 아침엔 꽃 저녁엔 달 / 月夕花朝不世情
옛날엔 곁에서 모시며 시주를 나눴는데 / 詩酒昔曾陪杖屨
어느새 또 벼슬길에서 공명을 좇다니 원 / 風塵忽復走功名
푸른 산은 예전처럼 탈 없이 잘 있으련만 / 靑山無恙似前日
흰머리는 불공평해서 후생을 기만한다나요 / 白髮不公欺後生
난 후로 함께 취하고 싶은 생각 더욱 간절한데 / 亂後更思同一醉
원래 육식은 여갱 보기 부끄러우니 어떡하오 / 從來肉食愧藜羹
[주D-001]육식(肉食) : 보 통 벼슬아치들을 낮춰 부를 때 쓰는 말로, 가정 자신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장공(莊公) 10년 기사에 “고기 먹는 자들이 잘 알아서 할 텐데, 또 뭣 때문에 끼어드는가.〔肉食者謀之 又何間焉〕”라고 마을 사람이 묻자, “고기 먹는 높은 분들은 식견이 낮아서 멀리 꾀하지 못하니까.〔肉食者鄙 未能遠謀〕”라고 대답한 조귀(曹劌)의 말이 나온다.
[주D-002]여갱(藜羹) : 나물국 먹는 청빈한 선비라는 뜻으로, 이 거사(李居士)를 가리킨다.
게 이문(揭理問)이 작은 술자리를 베풀고서 함께 마시자고 나를 초청했는데 병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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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객이 공연히 번거롭게 자주 부름을 받다니 / 病客空煩屢見招
한가한 관직은 동료의 술자리에나 적격이니까 / 官閑只合讌同僚
이와 함께 알겠네 화기가 사기를 물리쳐서 / 也知和氣排邪氣
오늘 아침 목가를 소멸할 수 있게 되었음을 / 能使今朝木稼消
[주C-001]게 이문(揭理問) : 게이충(揭以忠)을 가리킨다. 그는 게혜사(揭傒斯)의 동생이다.
[주D-001]목가(木稼) : 나 무의 물방울이 추위에 얼어붙어서 마치 갑주(甲冑)를 입은 것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병란이 일어날 조짐으로 해석하곤 하였다. 목빙(木冰)이라고도 하고 수가(樹稼) 혹은 수개(樹介)라고도 한다. 《新唐書 卷34 五行志1》
홍 합포(洪合浦)가 귤과 차를 부쳐 준 것을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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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식에는 나물국도 맛이 좋은데 / 晩食藜羹味亦長
동정향을 나눠 주다니 이것이 웬 떡이오 / 忽驚分我洞庭香
안개 낀 강의 옥회는 구할 길이 없다 해도 / 煙江玉膾雖無計
이따금 금제 대하면서 흥을 가누지 못한다오 / 時對金虀發興忙
봄 우레 기다려서 돋아나온 황금색 싹 / 芽茁黃金待一雷
대궐에 바치고 부쳐 준 향기롭게 볶은 차 / 焙香新寄貢餘來
옥천의 일곱째 잔 신묘한 그 효과 신속해서 / 玉川七椀神功速
곧장 맑은 바람 타고 월대에 내려앉을 듯도 / 便擬乘風到月臺
[주C-001]합포(合浦) : 옛날 경상도 회원현(會原縣)의 치소(治所)로, 지금 경남 마산(馬山)에 있던 포구 이름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는 일본 정벌의 발진기지(發進基地) 역할을 하였다.
[주D-001]만식(晩食)에는……좋은데 : 배 가 고플 때에는 거친 음식을 먹어도 고기를 먹는 것처럼 좋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말로, 시장이 반찬이라는 우리말과 같은데, 채소와 나물이나 먹는 담박한 생활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전국 시대 제나라 은사(隱士) 안촉(顔斶)이 “늦게 먹음으로써 고기 맛과 진배없게 하고, 천천히 걸음으로써 수레에 앉은 것과 진배없게 한다.〔晩食以當肉 安步以當車〕”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戰國策 齊策4》
[주D-002]동정향(洞庭香) : 향기 짙은 동정귤(洞庭橘)이라는 말이다. 감귤에는 금귤(金橘)ㆍ동정귤ㆍ청귤(靑橘)ㆍ산귤(山橘)ㆍ왜귤(倭橘) 등 5종이 있는데, 동정귤은 상품에 속한다고 한다.
[주D-003]안개……못한다오 : 가늘게 썬 생선회에 감귤을 껍질째 짓이겨서 함께 섞어 버무린 것을 금제 옥회(金虀玉膾)라고 한다. 감귤은 황금같이 노랗고, 생선회는 백옥같이 하얗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4]옥천(玉川)의……듯도 : 당 나라 시인 노동(盧仝)의 호가 옥천자(玉川子)이다. 그의 〈다가(茶歌)〉에 “다섯째 잔은 기골을 맑게 해 주고, 여섯째 잔은 선령을 통하게 해 주고, 일곱째 잔은 다 마시기도 전에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맑은 바람이 솔솔 이는 걸 깨닫겠네.〔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 七椀喫不得 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 라고 하였다.
안강(安康) 이 선생(李先生)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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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한가해야 마음이 한가한 분을 찾아뵐 수 있을 텐데 / 身閑方可見心閑
홍진 속에 바쁘게 달리기만 하니 또한 면목이 없습니다 / 奔走紅塵亦强顔
출처에 대해서야 선생께서 충분히 생각을 하셨겠습니다만 / 出處先生思已熟
옛사람도 동산에서 일어날 것을 의논하지 않았습니까 / 古人猶議起東山
[주D-001]옛사람도……않았습니까 : 진 (晉)나라 사안(謝安)이 회계(會稽) 땅 동산(東山)에서 20여 년 동안 한가히 은거하면서 조정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하지 않자 “안석이 나오려 하지 않으니 장차 창생을 어찌할꼬.〔安石不肯出 將如蒼生何〕”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나이 사십에 몸을 일으켜 벼슬길에 나아가 삼공(三公)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안석(安石)은 사안의 자이다.
완산(完山)의 최 장원(崔壯元)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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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 누운들 대단할 게 뭐 있겠소 / 退臥田廬未足多
산천을 경계로 모두가 호가의 땅인걸 / 山川爲界入豪家
그래도 낫지 않겠소 이름이나 치달리며 / 算來猶勝馳名客
만길 누런 먼지 속에 백발이 되려는 객보다는 / 萬丈黃埃鬢欲華
강남(江南)으로 돌아가는 비 태의(費太醫)를 전송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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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밖에서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유감인데 / 千里相逢恨已遲
오늘 벌써 전송하는 시를 또 짓게 되다니요 / 今朝又作送行詩
강남에 가시거든 삼한의 일은 말하지 마오 / 南歸莫說三韓事
풍속이 많이 옛날과는 달라졌을 테니까요 / 風俗多應異舊時
강남으로 떠나는 식무외(式無外)를 전송하며 2절(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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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히 북쪽으로 갔다 이번엔 또 남쪽으로 / 忽然北去又南遊
만 이랑 내 낀 물결에 한 척의 조각배로다 / 萬頃煙波一葉舟
천애를 두루 답사하려는 뜻이 물론 있겠지만 / 踏遍天涯應有意
도는 몸 밖에 없는데 또 어디서 구하려는지 / 道非身外更何求
할애한 분이야 원유한들 무슨 상관 있겠소 / 割愛何妨好遠遊
이런 신세는 매인 곳 없는 빈 배와 같은걸 / 此身無繫一虛舟
양식 싸 들고 도를 물어도 한가한 일일 텐데 / 裹糧問道是閑事
시 잘한다는 이 만나면 또 시를 구하니 원 / 逢著能詩還有求
[주D-001]도(道)는……구하려는지 : 참 고로 당나라 두목(杜牧)의 〈등지주구봉루기장호(登池州九峯樓寄張祜)〉라는 칠언율시 중 5ㆍ6구(句)에 “속눈썹이 눈앞에 있는데도 항상 보지 못하는 터, 도는 몸 밖에 없는데 또 어디서 구하려는지.〔睫在眼前長不見 道非身外更何求〕”라는 표현이 나온다. 《樊川詩集 卷3》
[주D-002]할애(割愛)한……있겠소 : 식 무외(式無外)처럼 ‘친애(親愛)의 정을 떼어 버리고〔割愛〕’ 어버이 곁을 떠나 출가한 승려의 입장에서야 멀리 나가 노닐더라도 무방할 것이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논어》 〈이인(里仁)〉에 “부모가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서 노닐지 말 것이요, 나가서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처소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03]시……원 :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가정집》 권7〈복산(福山) 시권(詩卷)의 발문(跋文)〉 참조.
최 어사(崔御史)의 경친(慶親)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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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일찌감치 영명을 날리며 / 天邑蜚英早
누차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되었네 / 頻爲執憲臣
소장을 올린 것 모두 체재를 얻었고 / 拜章皆得體
송사를 처리할 땐 으레 귀신같았네 / 聽訟動如神
부월(斧鉞) 손에 쥐고 왕명을 선포하며 / 持斧宣明詔
술잔 올려 늙은 어버이 축수하였네 / 稱觴慶老親
삼한에 이런 시권 일찍이 없었는데 / 三韓無此事
천 년 만에 이런 분이 있게 되었네 / 千載有斯人
동년(同年) 성의숙(成誼叔)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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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다행히 시대 구제할 재능을 펼치면서 / 喜君方展濟時才
아침엔 화전 저녁엔 백대를 출입하는데 / 朝出花甎暮柏臺
나는 아무 의미 없이 동성의 외랑에 있으니 / 東省外郞無意味
땅을 생각해 일찍 돌아온 이 몸이 부끄럽소이다 / 却慙懷土早歸來
[주D-001]그대는……출입하는데 : 성 의숙(成誼叔)은 가정과 함께 제과(制科)에 급제한 중국인 성준(成遵)을 가리킨다. 의숙은 그의 자이다. 그는 가정이 귀국할 적에 송별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는데, 그 시가 《가정잡록》에 실려 있다. 화전(花甎)은 꽃무늬 벽돌이라는 뜻으로, 학사원(學士院)을 가리키는데, 당나라 때 학사가 근무하는 내각(內閣) 북청(北廳)의 앞 섬돌에 화전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백대(柏臺)는 어사대(御史臺)를 가리키는데, 한나라 때 어사대에 잣나무를 많이 심었으므로 백부(柏府) 혹은 백대라고 불렀다 한다. 《漢書 卷83 朱博傳》
[주D-002]나는……부끄럽소이다 : 동성(東省)의 외랑(外郞)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을 말한다. 《논어》 〈이인(里人)〉에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살 땅을 생각한다.〔君子懷德 小人懷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1) 봄날에 느낀 바가 있어서 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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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이 낡았다 하더라도 도둑은 미리 막아야지 / 靑氈雖舊防他盜
옥촉이 항상 조화로우면 홀로 빈궁하게 놔두리오 / 玉燭常和任獨貧
하고많은 세상일에 대해 하늘은 말하지 않는데 / 世事悠悠天不語
한쪽을 서로 원망하다니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 / 一方相怨是何人
산과 벗으로 지내는 터에 돈을 주고 굳이 살까 / 與山有素何須買
보필을 제대로 못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였네 / 輔理無能且未歸
오히려 기쁘게 여겨지는 오늘의 이 심정이여 / 此日此情猶可喜
원추리 심은 북당의 따스한 봄볕이 그리워라 / 北堂萱草媚春暉
입추의 여지 없이 사람들 여전히 다투지만 / 立錐無地人猶競
거적문을 친 집에도 손님은 찾아오는 법 / 以席爲門客亦來
이만하면 여유가 있으니 무엇이 부족하랴 / 豈不有餘何不足
어디서나 손 안의 술잔 들이마시면 그만인걸 / 逢場且進手中杯
[주D-001]청전(靑氈)이……막아야지 : 오 래된 종묘사직을 누가 훔쳐 가지 못하도록 잘 지키는 것이 임금의 사명이라는 말로, 충혜왕(忠惠王)이 황음무도하여 원나라의 형부(刑部)에 갇혔다가 풀려나는가 하면, 온갖 악행을 일삼는 악소배(惡少輩)를 비호하며 함께 어울리는 등 실정을 거듭하자, 부원파(附元派)의 이른바 입성(立省) 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을 개탄한 말로 보인다. 경진년은 충혜왕 복위 1년인 1340년에 해당한다. 청전은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면면히 이어져 온 국가의 기업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주D-002]옥촉(玉燭)이……놔두리오 : 임 금이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이 잘 살게 되면 임금만 홀로 빈궁하게 남겨지겠느냐는 말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흉년이 들어서 재용이 부족하다고 하자,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이 철법(徹法)을 쓰라고 권유하니, 애공이 10분의 2를 거두어도 부족하다고 불평하였는데, 이에 유약이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 혼자 부족하게 남겨지지 않을 것이요, 백성이 부족하면 임금 혼자 풍족하게 누릴 수 없을 것이다.〔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옥촉이 조화롭다고 하는 것은,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계절에 따라 알맞은 기후가 펼쳐지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성군(聖君)이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3]하고많은……않는데 : 인간 세상의 일에 대해서 하늘은 말로 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 준다는 말이다. 《맹자》〈만장 상(萬章上)〉에 “하늘은 말로 하지 않는다. 행동과 일을 통해 보여 줄 따름이다.〔天不言以行與事 示之而已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한쪽을……사람들인지 : 악 소배가 충혜왕에게 상이나 관작을 나눠 받고서도 뜻에 차지 않아 서로 불평하며 원망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 《시경》 〈소아(小雅) 각궁(角弓)〉에 “백성 중에 불량한 자들은 서로 한쪽을 원망하느니라. 관작을 받고 사양할 줄도 모르니, 결국은 망하고 말 것이니라.〔民之無良 相怨一方 受爵不讓 至于已斯亡〕”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산과……살까 : 권 세가와 호족(豪族)들이 산천을 경계로 해서 땅을 온통 겸병하고 있는 때이긴 하지만, 은퇴할 산골을 원한다면 산과 친하게 지내는 만큼 굳이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뜻의 냉소적인 표현이다. 진(晉)나라 승려 지도림(支道林)이 심공(深公)의 소유인 인산(印山)을 사서 은거하려고 하자, 심공이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산을 사서 숨어 살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기롱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排調》 또 소식(蘇軾)의 시에 “고인은 원래 산과 벗으로 지내는지라, 부르지 않아도 산이 내 집에 가득 내려와 앉네.〔高人自與山有素 不待招邀滿庭戶〕”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7 越州張中舍壽樂堂》
[주D-006]원추리……그리워라 : 시 골에 계신 모친을 어서 빨리 뵙고 싶다는 말이다. 북당(北堂)은 주부의 거실이라는 점에서 모친의 거처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는데, 《시경》 〈위풍(衛風) 백혜(伯兮)〉에 “어떡하면 원추리를 얻어서 북쪽 뒤꼍에 심어 볼까. 떠난 사람 생각에 내 마음만 병드누나.〔焉得萱草 言樹之背 願言思伯 使我心痗〕”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유자음(游子吟)〉에 “한 치의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을 가지고서, 봄날의 햇볕 같은 어머니의 사랑을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7]입추(立錐)의……다투지만 : 명리(名利)를 구하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권세가의 집에 모여들어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다툰다는 말이다.
[주D-008]거적문을……법 : 한나라 진평(陳平)이 소싯적에 가난해서 빈민가에 살았는데, 그때 ‘해진 거적으로 문을 쳤는데도〔以弊席爲門〕’, 문밖에 장자(長者)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는 석문궁항(席門窮巷)의 고사가 있다. 《史記 卷56 陳丞相世家》
병중(病中)에 초청을 받고서 게 이문(揭理問)에게 사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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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도다 술잔치 벌이는 날 / 怪底開筵日
마침 내가 병가를 내게 되다니 / 適予移病時
술 못 먹게 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 儘敎防飮酒
시를 논하지 못하다니 유감이로세 / 唯恨阻論詩
게이충(揭以忠)이 화답했기에 또 짓다 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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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강산은 그대로지만 / 江山雖故國
예악은 옛날과 달라졌으니 / 禮樂異前時
타국에서 벼슬하는 분이시여 / 爲報宦遊客
기묘년의 시는 엮지 마시기를 / 休編己卯詩
동성에 어찌 그리 일도 많은지 / 東省何多事
내가 온 것은 때마침 이런 시기 / 我來當此時
시름을 풀려다 보니 잦은 술자리 / 畏愁頻置酒
비방이 싫다면서 계속 읊는 시 / 避謗尙吟詩
비와 구름 같은 이 세상의 일 / 世事如雲雨
특히 세시에 인심이 보이는 법 / 人情見歲時
나도 만나는 사람 하고많지만 / 相逢雖袞袞
너무 시름겨워 시도 못 짓겠소 / 愁絶不成詩
문 닫고서 글이나 읽고 / 閉戶讀書處
산 마주해 술이나 들 뿐 / 對山持酒時
손이여 시사는 얘기하지 말고 / 客來休說事
상춘하는 시나 함께 지읍시다 / 共賦賞春詩
[주D-001]비와……일 : 인정세태가 반복무상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손 젖히면 구름 일고 손 엎으면 비 오게 하는, 경박한 세상 인심 따질 것이 뭐 있으랴.〔翻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라는 시구에서 나왔다. 《杜少陵詩集 卷2 貧交行》
차운하여 방 판각(方判閣)의 죽음을 애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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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을 남겼으면 죽어도 산 것과 다름없지 / 爲有高名死若存
도성 문 나가는 상여 신세 누군들 면하리오 / 百年誰免送都門
사람들은 거울을 잃어 눈물 더욱 뿌리고 / 人亡一鑑增揮涕
객은 술 석 잔 올리면서 모두 애가 끊어지네 / 客奠三杯摠斷魂
가목은 먼저 부러져 끝내 열매도 못 맺고 / 佳木先摧終不實
꽃들은 홀연히 피어나 뿌리 없이 떠다니누나 / 浮花忽發本無根
내가 비록 후배지만 경개한 연분이 있나니 / 我雖後輩曾傾蓋
당시에 권유해 준 말 항상 기억하고 있다오 / 常記當時善誘言
[주D-001]꽃들은……떠다니누나 : 왕의 측근에서 발호하는 악소배(惡少輩)들이 자격도 없이 관직을 마음대로 차지하고 거드름을 떠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
[주D-002]경개(傾蓋) : 경 개여고(傾蓋如故)의 준말이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는 말이 나온다.
안겸재(安謙齋)를 축하하다 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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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단지 삼강을 바르게 세우면 될 것이니 / 持家只要正三綱
휘장 치고 풍악을 좀 울린들 상관이 있으리오 / 隔幔絃歌也不妨
거울이 나뉘지 않았으니 맞춰 볼 것도 없는 일 / 鏡自未分何更合
먼지를 털어내고 보면 전보다 훨씬 더 빛나리라 / 拂塵還勝舊時光
증리 때문에 채빈을 어찌 폐할 수야 / 豈爲蒸梨廢采蘋
애증이 끝내 천진을 뺏지는 못했구려 / 愛憎終不奪天眞
잠시 헤어졌다 만나는 것은 보통 있는 일 / 暫時離合渾閑事
술잔 들고서 한번 웃고 넘기면 되리이다 / 付與樽前一笑新
[주C-001]안겸재(安謙齋) : 겸 재는 안목(安牧 : ?〜1360)의 호이다. 그가 언젠가 처를 집에서 쫓아냈는데, 원나라 사신 독만(禿萬)이 그 집에 숙소를 정했다가 그 연유를 듣고는 “아낙네는 머리카락은 길어도 생각은 짧으니 탓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소이까. 한 여자가 하늘에 원망하면 유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으니, 그대는 잘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니, 안목이 그 말에 느낀 바가 있어서 마침내 처음과 같이 부부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高麗史 卷105 安牧列傳》 안목은 안향(安珦)의 손자이다.
[주D-001]거울이……일 : 부 부가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종적을 모르게 된 것도 아닌데, 굳이 당사자인지 확인하고 나서 재결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진(陳)나라 때 태자사인(太子舍人) 서덕언(徐德言)이 진 후주(陳後主)의 누이인 낙창공주(樂昌公主)와 결혼하였는데, 시국이 불안하여 장차 헤어지게 될 것을 예감하고는, 동경(銅鏡)을 절반으로 쪼개어 한 조각을 공주에게 주면서 정월 보름날에 도시(都市)에 내다 팔도록 하였다. 그 뒤 과연 부부가 서로 헤어졌는데 서덕언이 도시에서 그 거울을 찾아서 맞춰 보고는 “거울과 사람이 함께 떠났는데, 거울만 돌아오고 사람은 안 돌아오는구나. 항아의 그림자는 다시 볼 수가 없고, 공연히 밝은 달만 휘영청 빛나네.〔鏡與人俱去 鏡歸人不歸 無復姮娥影 空留明月輝〕”라고 거울에 시를 써서 보냈다. 그때 공주는 월국공(越國公) 양소(楊素)의 집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 시를 본 뒤로는 음식도 들지 않고 울기만 하자, 양소가 그 내막을 알고는 마침내 서덕언에게 공주를 돌려주어 부부가 해로(偕老)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本事詩 情感》
[주D-002]먼지를……빛나리라 : 한번 곡경(曲境)을 치른 뒤로는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부부의 금슬이 예전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3]증리(蒸梨)……수야 : 야 채를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과 같은 사소한 잘못 때문에, 제사 음식을 정결히 마련하여 조상을 모시는 주부를 쫓아낼 수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증리는 증려(蒸藜)의 속칭으로, 야채를 익히는 것을 말한다. 효자로 유명한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이 후모(後母)에게 올릴 야채를 잘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를 내쫓고는 종신토록 다시 장가들지 않았던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卷9 七十二弟子解》 또 《시경》 〈소남(召南) 채빈(采蘋)〉에 “마름 풀 뜯으러 남쪽 시냇가로 가네. 마름 풀 뜯으러 저 개울가로 가네.〔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시는 법도에 따라 제사 음식을 정결하게 마련하려는 주부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록한 것이다.
[주D-004]애증(愛憎)이……못했구려 : 일시적인 감정이 천연의 본성을 동요시키지는 못해서 다시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게이충(揭以忠)을 축수(祝壽)하다 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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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서 사방을 경륜할 호시의 뜻 품고서 / 弧矢高門志四方
부상 가까이 만리타국에서 벼슬하시는 분 / 宦遊萬里近扶桑
바라건대 우리 그대 가는 곳마다 오늘처럼 / 願君到處逢今日
동이에 술 가득하고 마루에 손님 가득하길 / 酒滿金樽客滿堂
옥사를 판결한 음공이 이미 환히 드러나고 / 決獄陰功已外彰
밤이 되면 남극에 또 별빛이 찬란히 비치네 / 夜來南極見星光
아무 할 일도 없이 문 닫고 지내는 병부가 / 病夫閉戶渾無事
술잔 올리는 대신으로 시나 한 수 부칩니다 / 謾寄新詩當壽觴
[주D-001]고문(高門)에서……품고서 : 게 이충(揭以忠)이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원나라의 귀한 가문에서 출생했다는 말이다. 그는 게혜사(揭傒斯)의 동생이다. 호시(弧矢)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천지 사방을 경륜할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상목(桑木)으로 활을 만들어 문 왼쪽에 걸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서 사방에 쏘는 시늉을 하며 장차 이처럼 웅비(雄飛)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禮記 內則》
[주D-002]부상(扶桑) : 동해(東海) 속의 신목(神木)으로, 해가 뜰 때 이 나뭇가지를 떨치고서 솟구쳐 올라온다고 한다.
[주D-003]밤이……비치네 : 장수를 축원하는 말이다. 옛날에 수명과 장수를 맡은 별로 남극노인성군(南極老人星君)이 있다고 전해졌다. 《史記卷27 天官書》
경상도 박 안렴(朴按廉)의 글을 얻고 나서 시를 지어 감사하는 뜻을 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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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을 나에게 보내 주어 얼마나 놀랐는지 / 尺素方驚及弊廬
슬픔과 기쁨이 교차함이 또 어떠하였겠소 / 悲歡交集復何如
정녕 일본 사신을 일찍 돌아가게 하여 / 丁寧來使早歸去
예산에게 답서를 짓게 하지 않았으면 / 莫向猊山索報書
[주D-001]예산(猊山) : 개성(開城) 남쪽 사자산(獅子山) 밑에 은거하면서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고 자호한 최해(崔瀣 : 1287〜1340)를 가리킨다.
대신 지어서 전라도 민 안렴(閔按廉)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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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 속에 부질없이 전송하는 시를 넣고 / 袖中空有送行詩
교정으로 말 달렸으나 미치지 못하였소 / 騎發郊亭未可追
그래도 나에게 소식을 주니 부끄러워라 / 深愧信音猶到我
관풍이 당시와는 전연 같지 않소그려 / 觀風全不似當時
생사를 몰라 부르짖으며 그저 애만 태웠나니 / 存沒驚呼便熱中
오래 떠돈 세상살이 더 어떻게 견디리오 / 更堪世事久西東
돌아와서 그림 보니 더욱 슬퍼지는 마음 / 歸來見畫增惆悵
예산으로 졸옹을 다시 찾을 수도 없으니 / 無復猊山訪拙翁
[주D-001]졸옹(拙翁) : 최해의 호이다.
차운하여 김 재상(金宰相)을 축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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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한 시대에 공을 우뚝 세우신 분 / 已向危時卓立功
이젠 퇴폐 풍속을 어서 빨리 바꿔야지 / 應敎弊俗早移風
극위의 인재 선발은 더욱 어려운데 / 棘圍取士尤難事
마음이 공정해서 법도 공정했다네요 / 爲有公心法亦公
[주D-001]극위(棘圍) : 과거 시험장의 별칭이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낙방한 응시자들의 난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 울타리를 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舊五代史 卷127 周書 和凝列傳》
김 사공(金司空)의 초청을 받았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서 감사의 뜻을 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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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생이야 땅에 앉은들 무슨 상관 있으리오 / 諸生露坐亦何傷
오늘은 문위가 다시 기강을 떨치는 날인걸 / 此日文闈復振綱
흠잡을 곳이 없다는 평을 기다릴 것도 없이 / 不待譏訶無假濫
인재 선발이 정밀한 것을 충분히 알겠도다 / 須知考閱便精强
청포가 줄지은 가운데 좌석에 넘치는 은혜의 빛이요 / 恩光溢座靑袍列
금석이 펼쳐진 가운데 가문에 전해질 성대한 일이라 / 盛事傳家錦席張
연회에 참석을 하여 축하드리려 하였는데 / 擬向尊前成醉舞
미질이 홀연히 방해하니 괴이한 일이로세 / 怪來微疾忽相妨
[주D-001]문위(文闈) : 과거 시험장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고시를 주관한 시관(試官)과 급제한 문생 간의 사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안근재(安謹齋)를 축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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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자가 금년에 시관(試官)을 제대로 만났나니 / 擧子今年得主司
시험장이 엄격해서 남들이 엿보지 못하였네 / 棘圍嚴切絶人窺
붓끝의 솜씨를 누구에게 빌릴 수 있으리오 / 筆端巧拙誰相假
실력이 거울에 비쳐 절로 속일 수 없었도다 / 鑑裏姸媸自不欺
은혜에 따라 황지는 값이 배나 오를 것이요 / 黃紙隨恩增價倍
뜻을 얻은 청포는 줄지어 서서 사은하리라 / 靑袍得意綴行遲
부신의 시름 때문에 모임에 참석을 못하고서 / 負薪未獲參高會
풍악 소리 울리는 앞에 그저 시 한 수 올립니다 / 錦瑟前頭謾獻詩
[주C-001]안근재(安謹齋) : 근재는 안축(安軸 : 1287〜1348)의 호이다.
[주D-001]황지(黃紙) : 과거 합격자나 뛰어난 성적을 올린 관원의 명단을 적어서 위에 보고한 누런색 종이를 말한다.
[주D-002]청포(靑袍) : 아직 관직을 받지 않은 과거 급제자의 복색이다.
[주D-003]부신(負薪)의 시름 : 《예 기》 〈곡례 하(曲禮下)〉에 나오는 말로, 병에 걸렸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이다. 땔나무를 지고 온 피곤함 때문에 몸이 병들어서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었다는 해석과, 병이 들어서 땔나무를 질 수도 없게 되었다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의령(宜寧)의 남 중서(南中書)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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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 어찌 처음과 또 다를 수 있으리오 / 交情寧復變終初
길이 멀어서 우연히 소식이 뜸했을 따름 / 路遠音書偶爾疎
그대를 벼슬시키려던 생각하며 혼자서 웃나니 / 始欲起君還自笑
지금은 나도 내 오두막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 祗今吾亦愛吾廬
[주D-001]지금은……있으니까 : 가 정 자신도 현재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잠(陶潛)의 시에 “초여름에 풀과 나무 무성하게 자라나서, 집을 에워싸고 나뭇가지 우거졌네. 새들도 깃들 곳이 있어서 좋겠지만, 나도 내 오두막을 사랑한다오.〔孟夏草木長 繞屋樹扶疎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라는 표현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4 讀山海經》
진주(晉州)의 수재(守宰)로 나가는 우 좨주(禹祭酒)를 전송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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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에서 으뜸가는 진주 고을 풍류 / 晉邑風流冠嶺南
쪽빛처럼 푸른 장원루 아래의 물 / 狀元樓下水如藍
일휘출수도 이런 곳은 한번 해 볼 만 / 一麾出守猶堪羨
지금 치암이 안찰사로 있으니까 / 按部如今有恥菴
[주D-001]장원루(狀元樓) :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의 별칭이다. 이 누각을 처음 지은 사람과 뒤에 복원한 사람 모두가 장원을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卷30 晉州牧》
[주D-002]일휘출수(一麾出守) : 지 방 관원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남조 송나라의 안연지(顔延之)가 〈오군영(五君詠)〉을 지으면서, 완함(阮咸)에 대해 “몇 번 추천받아도 벼슬자리 못 얻다가, 순욱(荀勗)이 손 한번 내저으매 수령으로 나갔도다.〔屢薦不入官 一麾乃出手〕”라고 읊은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文選 卷21 五君詠 阮始平》
[주D-003]치암(恥菴) : 박충좌(朴忠佐 : 1287〜1349)의 호이다.
안강(安康) 이 선생(李先生)에게 부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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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 이 마음에 언제 누를 끼쳤으리 / 世慮何曾累此心
대 울타리 소나무 길 하나의 계음이라 / 竹籬松逕一溪陰
광생은 계책을 잘못 세워 참으로 시시하게 / 狂生謬計眞無賴
어쩔 수 없이 황조 위해 한림이 되었다네요 / 强爲皇朝作翰林
구구한 세상 벼슬길 마음에 차지 않는데 / 世路區區未足心
세월만 보내는 강쇄의 몸 부끄럽습니다 / 却慙韁鎖費光陰
어떻게 하면 선생의 문 앞에 터를 잡고서 / 何當卜築門前地
솔과 개울과 대숲 나눠 받을 수 있을는지 / 分我松溪與竹林
[주D-001]계음(溪陰) : 그 의 거소와 생활을, 소식(蘇軾)이 〈계음당(溪陰堂)〉 시에서 읊은 정경에 비유한 것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물이 연못에 가득할 때 백로가 쌍으로 내려오고, 푸른 홰나무 높은 곳에 한 마리 매미 노랫소리. 간밤의 술이 깨니 해님은 벌써 두둥실, 개울 남쪽 십 묘의 그늘을 누워서 바라보노매라.〔白水滿時雙鷺下 綠槐高處一蟬吟 酒醒門外三竿日臥看溪南十畝陰〕” 《蘇東坡詩集 卷25 溪陰堂》
[주D-002]강쇄(韁鎖) : 명리(名利)의 굴레를 쓰고 이록(利祿)의 쇠사슬에 묶였다는 명강이쇄(名韁利鎖)의 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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