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집자료 ▒

가정집 제12권 번역

천하한량 2010. 1. 13. 01:41

 

 

가정집 제12

 

 

 묘지명(墓誌銘)

 

 

 

고려국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상호군(僉議贊成事上護軍) 평양군(平壤君) 조공(趙公)의 묘지(墓誌)

 


옛날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이 해내를 통일하고 나서 요황(要荒)을 회유할 적에, 우리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이 귀부(歸附)한 것과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이 근로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 은전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의 딸을 충렬왕(忠烈王)에게 이강(釐降)하였으니, 이실(貳室) 은혜삼접(三接) 총애는 천하에 비할 곳이 없었다.
이 때를 당하여 현능한 자들이 한꺼번에 나와 분주히 보익하면서 삼한(三韓)의 기업을 크게 빛냈는데, 그중에서도 정숙(貞肅) 조공이 특히 걸출하였다. 정숙공의 휘는 인규(仁規)인데, 관직은 첨의 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고,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에 봉해졌다. 국가를 중흥하는 공을 세우고 나서 상상(上相)의 지위에 거하였으니, 공훈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울연히 원로대신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많은 자제들 역시 모두 가업을 제대로 잇는 가운데 공명과 부귀가 한 시대의 으뜸이었는데, 공은 그 자제들 중의 막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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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가 위(), 자는 계보(季寶)이니, 평양(平壤) 상원(祥原) 사람이다. 공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된 영()의 손자요, 사재경(司宰卿)으로 치사한 조공 온려(趙公溫呂)의 외손이요, 관군 만호(管軍萬戶) 나공 유(羅公裕)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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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에 문공(門功)으로 권무 창희궁(權務昌禧宮)이 되고, 두 차례 전직하여 섭호군(攝護軍)이 되고, 다섯 차례 전직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경술년(1310, 충선왕 2)에 밀직 좌부대언(密直左副代言)에 임명되었으며, 네 차례 전직하여 우대언(右代言)이 되었다. 을묘년(1315, 충숙왕 2)에 언부 전서(讞部典書)를 제수받았다. 다음 해에 총부 전서(摠部典書)의 신분으로 평양 윤(平壤尹)의 직무를 행하였으며, 또 그 다음 해에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 북쪽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사나웠고, 남방 지역의 풍속 역시 교활하였는데, 공은 한결같이 은혜를 위주로 하고 위엄을 가하지 않으면서 태평무사하게 되기를 기대하였으며, 청송(聽訟)하는 여가에는 술을 마시고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의 덕을 알지 못하다가, 떠나고 난 뒤에 사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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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말년에 충숙왕(忠肅王)
심왕(瀋王)과 갈등을 빚었는데, 혹자가 그 틈을 타고 공을 이간하니, 공에게 원윤(元尹)을 제수하여 산지(散地)에 두었다. 사태가 안정된 뒤에 충숙왕이 공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는 계유년(1333)에 지밀직(知密直)에 임명하였다. 을해년(1335)에 판밀직(判密直)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에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이 정사에 권태를 느껴 재상에게 일을 위임하였는데, 공이 대체를 살피고 잗단 일을 힘쓰지 않으면서 발언을 강직하게 하자, 사람들이 공의 공정함에 심복하는 한편 부친의 풍모가 있다고 이르면서 총재(
)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무인년(1338) 윤월에 어떤 일로 면직되었다. 그리고 이때 재상에게 은총을 내려 습봉(襲封)하게 하는 관례에 따라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얼마 뒤에 충숙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태가 일변하자 공이 조정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날마다 친구들과 모여 술자리를 벌이곤 하였다. 그런데 지정(至正)으로 개원(改元)하던 해의 봄에, ()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가 공을 무함하면서 객들과 함께 국가 정책을 비판했다고 고자질하자, 영릉(永陵 충혜왕)이 매우 노하여 한밤중에 복주목(福州牧)으로 폄직(貶職)시키라고 명을 내리고는,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서 위사(衛使)에게 압송하게 하였다. 공이 창황 중에 도성을 나가 임소로 달려가는 중에 기분이 꽤나 언짢아지면서 몸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일단 돌아왔으나 병이 발작하여 걷기도 어렵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백방으로 치료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정해년(1347, 충목왕 3) 가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었으나, 병 때문에 사은하지 못하였다. 무자년(1348) 11월 을사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부인 나씨(羅氏)는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흥문(興門)을 낳았는데 지금 소부윤(少府尹)이다. 손자가 한 사람 있다
.
이듬해 3월 기미일에 송림원(松林原)에 장례를 행하였는데, 장사를 지내려고 할 적에 그의 형인 원조(元朝)의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묘지(墓誌)를 나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우리 조카가 지금 만리 길에 분상 중이라서 포복하여 와서 그대에게 청할 겨를이 없다. 우리 아우의 뜻에 대해서는 그대가 잘 알 터이니, 묘지를 써 주면 좋겠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우리 아우는 덕성으로 보나 품행으로 보나 옛사람에게 참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한 번 일어나 동방 사람들의 기대를 위로해 줄까 하고 생각하였는데, 슬프게도 이제는 모두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국상(國喪) 중에 죽었는데도 뭇사람들이 그의 시호를 의논하여 내려 주었고, 관청에서 일을 도와주며 백관이 모여서 장례를 행하였으니, 그의 덕성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다. 그러니 어찌 명()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알았다고 하고는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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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재질을 내림에 / 天之降材

이 사람에게 더욱 후했나니 / 彌篤于人
어떻게 후하게 하였는가 / 何以篤之
임금과 어버이가 특별하였네 / 有君有親
정숙공의 아들이요 / 貞肅之子
충숙왕의 신하로서 / 忠肅之臣
있는 힘껏 효도를 다하고 / 旣能竭力
몸 바쳐 또 충성하였다네 / 又致其身
송곳니를 주었으면 뿔이 없게 것은 / 予齒去角
품부할 이미 다르게 것이거니와
/
賦已不均
덕을 주고서 수명을 빼앗다니 / 予德奪壽
하늘이 어쩌면 불인(不仁) 것인가
/
天或匪仁
내가 공의 묘지에 명하는 것은 / 我銘公墓
백성을 위해 슬퍼하기 때문이니 / 其悲爲民
말을 만들되 부끄럽지 않게 해서 / 措辭無愧
이 지석(誌石)에 새기게 하였노라 / 刻此貞珉

 

[주D-001]요황(要荒) :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의 합칭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가리킨다.
[주D-002]이강(釐降) :
() 임금이 딸을 순()에게 시집보낸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왕녀를 신하에게 시집보낼 때 쓰는 표현이다. 충렬왕이 세자의 신분으로 있을 때 원 세조가 자기의 딸인 홀도노게리미실공주(忽都魯揭里迷失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주D-003]이실(貳室) 은혜 :
원나라가 고려를 사위 나라로 대우했다는 말이다.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요 임금이 사위인 순을 이실에 머물게 하였다.〔帝館甥于貳室〕라는 말이 나온다. 이실은 별궁이다.
[주D-004]삼접(三接) 총애 :
제 후국인 고려를 천자국인 원나라가 특별히 총애했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진괘(晉卦) 괘사(卦辭)진괘는 강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하고 낮에 세 번씩 접견하는 상이다.〔晉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라는 말이 나온다. 강후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제후라는 뜻이다.
[주D-005]심왕(瀋王) :
충선왕(忠宣王)의 조카인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를 말하는데, 충선왕의 장자인 충숙왕(忠肅王)과 고려 국왕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주D-006]송곳니를 …… 것이거니와 :
《한 서(漢書)》 卷56 동중서전(董仲舒傳)하늘은 역시 골고루 나눠 주는 바가 있으니, 예컨대 송곳니를 주었을 경우에는 뿔이 없게 한다.〔天亦有所分與 與之齒者去其角〕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늘이 한 사람에게 완전무결한 행복을 내려 주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주D-007]덕을 …… 것인가 :
《중 용장구(中庸章句)》 제 17 장에큰 덕의 소유자는 반드시 이에 합당한 지위를 얻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작록을 받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이름을 얻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수명을 누리게 마련이다.〔大德 必得其位 必得其祿必得其名 必得其壽〕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묘지명(墓誌銘)

 

 

 

고려국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僉議評理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으로 치사한 윤공(尹公)의 묘지명

 


공 의 휘는 선좌(宣佐), 자는 순수(淳叟)이다. 영평군(鈴平郡) 사람이니, 삼한 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예이다. 신달의 현손인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은 융적(戎狄)을 평정하고 국토를 개척하여 왕묘에 배향되었고, 관의 손자인 태사 문하시중 인첨(麟瞻)은 난리를 평정하고 나라를 바로잡아 사직에 공을 세웠다.
인첨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종해(宗海)를 낳고, 종해가 내고 부사(內庫副使) 세방(世芳)을 낳고, 세방이 증()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응식(應植)을 낳았다. 응식이 증 첨의 평리(僉議評理) ()을 낳았는데, 균이 증 찬성사(贊成事) 송세견(宋世堅)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공에게 부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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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7세에 벌써 글을 잘 지었으며, 무자년(1288, 충렬왕 14)에 제일인(第一人)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김해(金海)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조정에 들어와 비서랑(秘書郞)에 보임된 뒤에 문한서(文翰署)에서 입직하였으며 누차 당후관(堂後官)으로 전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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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년(1307)에 충선왕(忠宣王)이 정사를 이어받고 백관을 도태(淘汰)할 적에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우사보(右思補)로 전직하여 언부 산랑(讞部散郞)을 겸하였다. 그리고 회양도(淮陽道)를 안렴하러 나갔다가 누차 옮겨 내서 사인(內書舍人)과 선부 의랑(選部議郞)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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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년(1312, 충선왕 4)에 전라도를 안찰할 적에는
고삐를 잡고 부월(斧鉞) 쥐었던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그 일이 위에 알려지면서 바로 도진령(都津令)으로 승진하였다. 계축년(1313)에 왕이 충숙왕(忠肅王)에게 양위하였다. 충숙왕이 평소에 공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성균 좨주(成均祭酒)를 제수하고 부인(符印)을 관장하면서 좌우에 있도록 명하였으며, 이와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감찰 집의(監察執義)로 전직하였다가 중도에 무슨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신유년(1321, 충숙왕 8)에 복직하여 예전과 같이 되었다.
이해에
심왕(瀋王)이 영종황제(英宗皇帝)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충숙왕을 무함하여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왕위를 뺏으려고 하였다. 이에 부귀를 얻으려고 안달하는 자들이 모두 그쪽에 빌붙었는데, 그 패거리 10여 인이 홀연히 연경에서 내려와 말하기를심왕이 이미 나라를 인수하였는데, 국인들은 어찌하여 왕의 비행을 적어서 조정에 보내지 않는가.”라고 하고는, 수십 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 왕의 죄상(罪狀)이라는 것을 그 위에 써서 민천사(旻天寺) 문에 게시해 놓은 다음에, 백관을 불러 서명하게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말하기를나는 우리 임금님의 비행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신하의 신분으로 자기 임금을 고자질한다는 것은 개나 돼지도 하지 않는 일이다.”라고 하고는 침을 뱉고 가니, 이로 말미암아 대간(臺諫)과 문한(文翰)의 신하들이 서명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뒤에 사태가 안정되고 나서 중서(中書)가 서명한 그 서장(書狀)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서명하지 않은 자들을 꼽아 보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윤모(尹某)가 헌사(憲司)에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이 연경에 5년이나 억류되어 있는 동안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심왕의 무리가 그런 사실을 알고는 부고(府庫)를 봉하여 물자의 수송을 방해하였다. 이에 공이 찰관(察官) 조관(趙琯)에게 격문을 보내어 주관하는 자를 독책하게 한 결과 물자 수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을축년(1325)에 왕이 귀국하여 판전교(判典校)를 제수하니 품계는 통헌(通憲)이었다. 얼마 뒤에 민부 전서(民部典書)의 신분으로 한양 윤(漢陽尹)이 되어 나갔는데, 조금 지나서 왕이 공주와 함께 용산(龍山)에 가서 좌우에게 말하기를윤 윤(尹尹)이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목민관(牧民官)으로 삼은 것이다. 그대들은 부디 그를 흔들어서 혼탁하게 만들지 말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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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년(1331, 충혜왕 1)에 나이를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에 왕이 친히 수령(守令)을 주의(注擬)할 적에 계림 윤(鷄林尹) 차례에 와서 붓을 놓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조정에 신하들이 가득하지만 윤 윤 같은 사람은 없다.”라고 하고는, 즉시 공을 주의하였다. 공이 왕에게 신임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재차 대부(大府)의 윤()이 된 뒤에 더욱 청렴하고 근실하게 행하면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들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힘쓰고 백성에게 이로운 것들은 빠짐없이 거행하였다. 병자년(1336)에 공에게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가하고 이어서 치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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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 9월 모() 갑자에 미질(微疾)에 걸리자, 자녀들을 앞에 불러 앉히고 말하기를지금 사람들이 형제간에 대부분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재물을 다투기 때문이다.”라고 하고는, 아들 찬()에게 명하여 문계(文契)를 작성해서 골고루 가산을 분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계하기를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너희 자손들을 가르쳐라.”라고 하고는, 말이 끝나자 의관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서거하였다. 그달 모 갑자에 북쪽 언덕에 장례를 행하였다. 향년 7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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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윤씨(尹氏)는 국학 대사성(國學大司成) ()의 따님인데, 자녀 셋을 낳았다. 장남 체()는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 찬()은 급제하여 지금 전의시 승(典儀寺丞)이고, 딸은 대호군(大護軍) 유양준(庾良俊)에게 출가하였다. 계실(繼室)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 박씨(朴氏) 2남을 낳았다. ()은 급제하여 지금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이고 막내는 삭발하고 불문(佛門)에 들어갔다. 두 번째 계실인 임씨(林氏)는 자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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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평생토록 가산을 경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공이 희학(戱謔)하거나 가무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공은 또 교유를 삼가고 약속을 중하게 여겼다. 홀로 거할 적에도 항상 손님을 마주한 것처럼 하였으며, 오직 경사(經史)를 가지고 혼자 즐기곤 하였는데, 질의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경에 의거해서 대답하곤 하였다. 그리고 노장(老莊)의 글이나 형명(刑名)의 학술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학자들이 많이 귀의하였다. 또 사한(詞翰)이 맑고 통창하였으므로 정언(正言) 이상의 벼슬에 있을 때에는 항상 관직(館職)을 겸대하였는데, 당시의 표전(表箋) 가운데에는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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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장례 지내고 7년이 지난 때에, 나와 같은 해의 과거에 함께 급제한 우대언(右代言) 윤택(尹澤)이 그가 지은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공이 나에게는 고모부이지만 은혜로는 아버지와 같다. 그런데 공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마침 남쪽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하였고, 장례 기일이 또 촉박해서 명()을 청할 겨를도 없었다. 사람의 묘지명을 지을 때에는 우리 공과 같아야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도 없이 오늘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저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대가 남의 묘지명을 많이 지었겠지만, 우리 공과 같은 분이 또 일찍이 있었던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뭐라고 사양할 말이 없어서 그저 알았다고 하고는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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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난을 걱정하지만 / 人以貧憂

공은 부유함을 수치로 여겼고 / 公以富羞
혹자는 임금에게 아첨했건만 /
于君
공은 곧음으로 알려졌다네 / 公以直聞
누군가가 벼슬을 주관하면서 / 孰尸厥爵
공의 벼슬을 덕보다 못하게 하였다만 /
爵劣于德
공의 덕이 연치와 함께 높기만 하니 /
德與齒尊
공의 존귀함을 말해 무엇 하랴
/
公貴何言
재능과 명망이 워낙 뛰어나서 / 才名出衆
중용되리라 기대를 받았는데 / 蘄其見用
중용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어도 / 見用之蘄
공은 또한 서운해하지 않았다네 / 公亦不慍
지금 누가 의기양양 기염을 토해도 / 赫赫者誰
얼음 녹듯 자취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 泯滅如澌
공은 죽어도 여전히 살아 있으리니 / 公死猶生
못 믿겠거든 여기 새긴 명을 보라 / 視此刻銘

 

[주D-001]고삐를 …… 풍도 : 후 한(後漢) 범방(范滂)이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나갈 적에,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서는 천하를 정화시킬 뜻을 개연히 품었다.〔登車攬轡 慨然有澄淸天下之志〕는 남비(攬轡)의 고사와, 한 무제(漢武帝) 때에 수의어사(繡衣御史) 폭승지(暴勝之)가 황제가 내린 부월을 쥐고서 군국(郡國)의 도적 떼를 일망타진했던 지부(持斧)의 고사가 있다. 왕명을 받들고 지방에 나가서 난리를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때 이 고사를 인용하곤 한다. 《後漢書卷67 黨錮列傳 范滂》《漢書 卷66 王訢傳》
[주D-002]심왕(瀋王) :
충선왕(忠宣王)의 조카인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를 말하는데, 충선왕의 장자인 충숙왕(忠肅王)과 고려 국왕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주D-003]부귀를 …… 자들 :
《논 어》 양화(陽貨)비루한 자들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니, 참으로 잃을까 걱정한다면 못 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다.〔子曰 鄙夫可以事君也與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苟患失之 無所不至矣〕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4]누군가가 …… 하랴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이 세상에 누구나 존귀하게 여기는 대상이 세 가지 있으니, 벼슬과 연치와 덕이 그것이다.〔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라는 말이 나온다.

 

 

 

행장(行狀)

 

 

 

고려국 승봉랑(承奉郞) 총부 산랑(摠部散郞) () 비어대(緋魚袋) ()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 기공(奇公)의 행장

 

 

증조(曾祖)는 휘 윤숙(允肅)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判吏部事)를 지냈고,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는 휘 홍영(洪穎)으로,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保勝郞將)을 지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증직되었다.

()는 휘 관()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우사 상장군(三司右使上將軍)을 지냈다.


공 의 휘는 자오(子敖), 자도 자오(子敖)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 문공(門功)으로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반란을 일으킨 원()나라 대왕(大王) 내안(乃顔)의 일당인 합단(哈丹)이 그 무리와 함께 동쪽을 향해 진번(眞番) 쪽으로 도주하여 우리나라 강역으로 난입하였는데, 그 반역의 기세가 매우 성한 가운데 가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충렬왕(忠烈王)이 황제의 딸인 안평공주(安平公主)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그 예봉을 피하였고, 주군(州郡)도 모두 험한 요새지에 의거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지키느라 중외가 흉흉하였다.
공이 이때에 중군 편장(中軍偏將)의 신분으로 깃발을 등에 지고 선두에서 치달리는 등 자못 공을 세웠다. 적이 평정되고 나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 산랑(摠部散郞)이 되었고, 외방에 나가서 선주(宣州)를 다스리기도 하였는데, 거하는 곳마다 그 직책에 걸맞게 하였으므로 떠난 뒤에는 사람들이 공을 그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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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원래 대대로 빛나는 의관(衣冠) 가문의 출신인데도 벼슬길에서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품이 관후한 데다 높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날마다 어진 사대부들과 어울려 노닐면서 환락을 다하기에 힘썼을 뿐, 집안의 살림살이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63세의 나이로 천력(天曆) 무진년(1328, 충숙왕 15)에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
부인 삼한국태부인(三韓國太夫人) 이씨(李氏)는 좌복야(左僕射) 휘 주()의 손녀요, 국학 좨주(國學祭酒) 휘 행검(行儉)의 따님이다. 대족 출신으로 성대한 덕을 갖추고 군자의 짝이 되어 5 3녀를 낳았는데, 지금의 황후는 그 막내이다
.
삼가 상고해 보건대, 기씨(奇氏)는 국가의 초창기부터 무재(武材)로 일컬음을 받으면서 대대로 공로를 드러냈다. 그 뒤에 인왕(仁王 인종)의 왕비 임씨(任氏)가 의왕(毅王 의종)ㆍ명왕(明王 명종)ㆍ신왕(神王 신종) 의 세 왕을 낳고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공의 조모는 바로 왕태후의 아우인 평장(平章) 휘 유()의 손녀요, 판사(判事) 휘 경순(景恂)의 따님이다. 이로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가 더욱 커지고 귀해지면서 동국(東國)의 으뜸이 되었다
.
공의 증조인 시중(侍中) 강정공(康靖公)은 총재(
)로서 의왕ㆍ명왕ㆍ신왕을 보필하였다. 의왕 말년을 당하여 무인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켜 조정의 신하들을 죽이고 왕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로부터 권신이 계속해서 그 뒤를 이어 나오자 진신(搢紳)들이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침착하게 도를 견지하며 시종 부지(扶持)해서 선왕의 옛 기업을 잃지 않게 한 것은 시중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공의 조부인 복야(僕射) 역시 비분강개하며 절의를 몸에 지녔다. 국가의 운세가 힘들고 어려운 때를 당하여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가 나랏일을 제멋대로 처리하였는데, 공이 비록 권신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긴 하였으나 아첨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매번 역순(逆順)과 화복(禍福)의 도리를 가지고 깨우쳐서 간특한 짓을 자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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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가 병들어 눕게 됨에, 그 아들 항()이 못나고 어리석은데도 사람들이 대부분 항에게 빌붙었으나 복야만은 그를 미워하였다. 최이가 언젠가 후계자를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에, 복야가 곧장 현인(賢人)을 천거하면서 그를 후계자로 하라고 답변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 항이 후계자가 되고 나서 예전의 유감을 풀려고 공을 배척하였다. 이에 공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
공의 부친인 삼사(三司)는 본래 휘가 장()이었으나, 뒤에 국휘(國諱 임금의 이름)를 피하여 개명하였다. 처음에 장군의 신분으로 외방에 나가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는데, 오로지 관대하고 온화하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포편(蒲鞭)해수(薤水)의 정사를 펼쳤으므로 백성들이 차마 기만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사의 성적이 우수해서 부름을 받고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응양군(鷹揚軍)으로 영전하였다.
국 가의 제도에 의하면, 군정(軍政)과 관련된 상벌과 장교의 진퇴에 대한 일은 일체 응양(鷹揚)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사는 그 은혜와 위엄을 내리는 권한을 사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예법에 입각해서 행하였으므로 군사들이 감복하였다. 이로부터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상부(相府)에 오르게 되었는데, 충렬왕(忠烈王)이 거실(巨室)이요 국로(國老)라고 하여 더욱 예모를 가하였으며
, 애영(哀榮) 은혜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공 의 모친인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朴氏)는 전법 판서(典法判書) 휘 휘()의 따님이요, 시중(侍中) 문진공(文眞公) 이장용(李藏用)의 외손이다. 지원(至元) 원년(1264, 원종 5)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올해에는 왕공(王公)과 군목(群牧) 모두
상도(上都)에 서 모일 것이니, 왕은 역마를 타고 입조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문진공이 평장(平章)의 신분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입근(入覲)해서 비상한 총애를 받았는데, 이로부터 문진공의 덕업과 문장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 시에 우승상(右丞相)이었던 동평 충헌왕(東平忠憲王)이 문진공을 매우 큰 그릇으로 여겨 특별한 예로 대우하면서 앉을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 자리를 비워 두곤 하였으며, 한림(翰林) 왕 학사(王學士) 등 제공도 그 풍도를 흠모하여 모두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명을 선양하는 동시에 본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해를 제거하여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덕을 입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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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은 이처럼 내외가 모두 명문 출신이다. 고조(高祖)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휘 수전(守全) 이하로부터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백성에게 은공을 베풀었는데, 공이 그 음덕(陰德)을 향유하지 못하고서 낮은 지위로 생을 마쳤으니, 이는 어쩌면 하늘이 그 보답을 크게 하여 후손에게 베풀어 주려고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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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식()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 철()은 첨의 정승(僉議政丞)으로 지금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고, 다음 원()은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로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고, 다음 주()는 대광(大匡)으로 원윤(元尹)이고, 다음 윤()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장녀는 상의 평리(商議評理) 조희충(趙希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전의령(典儀令) 염돈소(廉敦紹)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모두 11인이다. 장손 천린(天麟)은 소자(小字)가 완택보화(完澤普化)인데 판도 총랑(版圖摠郞)으로 연곡(輦轂 연경)에 입시하여 지금 직성 사인(直省舍人)으로 있고, 다음 인걸(仁傑)은 소자가 첩목이보화(帖睦邇溥化)인데 군부 총랑(軍簿摠郞)으로 궐정(闕庭)에서 숙위하고 있고, 다음 천기(天驥)와 유걸(有傑)과 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고, 나머지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손녀는 7인이다. 장손녀는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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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가문에서 대대로 쌓은 공덕은 국가의 사책에 기재되어 있고, 공의 빛나는 사업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들어 있다. 지금 그중에 대체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행장을 지어서 채택할 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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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모년 8 1일에 삼가 짓다.

 

[주D-001]포편(蒲鞭) : 때 려도 아프지 않도록 부들 가지로 만든 회초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유관(劉寬)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관리와 백성들이 혹 과실을 범하더라도 형벌 대신 포편으로 다스려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감화시킨 고사가 있다. 지방 장관이 관후하게 백성을 사랑하며 심복시킬 때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 《後漢書卷25 劉寬列傳》
[주D-002]해수(薤水) :
지 방 장관이 청렴하게 지내면서 호족(豪族)을 진압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을 말한다. 후한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로 부임하여 고사(高士)인 임당(任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아무 말 없이 염교의 큰 뿌리 하나〔薤一大本〕와 물 한 사발〔水一盂〕을 문 앞에 놓고는 손자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려 있자, 방삼이 한참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물처럼 청렴하고, 염교 뿌리를 뽑아 버리듯 힘 있는 자를 억누르고, 손자 아이처럼 약한 백성을 돌보아 주라는 뜻임을 깨닫고는 돌아가서 그대로 실천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1 龐參列傳》
[주D-003]애영(哀榮) 은혜 :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 생전과 사후 모두 영광스럽게 되도록 해 주었다는 말인데, 《논어》 자장(子張)살아서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죽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긴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4]상도(上都) :
지 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
)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에 위치하였는데, 난경() 혹은 난도()라고도 하였다.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함께 양도(兩都)로 칭해졌으며, 1년에 한 번씩 천자가 순행하게 되어 있었다.

 

 

 

유 원(有元) () 아중대부(亞中大夫) 하남부로총관 겸 본로제군오로총관 관내권농사 지하방사(河南府路摠管兼本路諸軍奧魯摠管管內勸農事知河防事) () 집현 직학사(集賢直學士) 경거도위(輕車都尉) 고양후(高陽侯) () 정혜(正惠) 한공(韓公)의 행장

 

 

증조(曾祖)

()

()


공의 휘는 영()이요, 자는 정보(貞甫), ()은 한씨(韓氏)이니, 고려 청주(淸州) 사람이다.
증 조 광윤(光胤)은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 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증직받았다. 조부 강()은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유술(儒術)로 충렬왕(忠烈王)을 보필하였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하였다. 죽은 뒤에 문혜공(文惠公)의 시호를 받았다. 부친 사기(謝奇)는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조청대부(朝請大夫) 우사의대부 지제고(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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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귀하게 됨에 따라 강()에게 중순대부(中順大夫) 첨태상예의원사 상기도위(僉太常禮儀院事上騎都尉)를 증직하고 고양현백(高陽縣伯)을 추봉하였으며, (
) 임씨(任氏)에게는 고양현군(高陽縣君)을 추봉하였다. 부친 사기에게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한림 직학사(翰林直學士) 아중대부(亞中大夫) 경거도위(輕車都尉)를 증직하고 고양현후(高陽縣候)를 추봉하였으며, 비 채씨(蔡氏)와 정씨(鄭氏)에게는 모두 고양군부인(高陽郡夫人)을 봉하였는데, 공은 정씨 소생이다.
이에 앞서서 본국에서 세가(世家)의 자제를 중국에 보내 인질로 삼을 적에 공의 부친도 선발 대상에 포함되었으므로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중국에 왔다. 공이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연곡(輦轂)에서 성장하며 중국에서 글을 배우다가 대덕(大德) 7(1303, 충렬왕 29)에 선발되어 숙위(宿衛)에 충원되었고, 11년에 인묘(仁廟)의 잠저(潛邸)에 입시하여 황상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지대(至大 원 무종(元武宗)의 연호) 초에 황제의 명으로 승무랑(承務郞) 자무고 제점(資武庫提點)을 제수받았으며, 황경(皇慶) 원년(1312, 충선왕 4)에 다시 수무고 사(壽武庫使)를 제수받고, 연우(延祐) 원년(1314, 충숙왕 1)에 이기고 사(利器庫使)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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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명종(明宗)이 바로 주왕(周王)에 봉해지자 장차 떠나려고 하면서 세갑(細甲)을 인종(仁宗)에게 청하니, 인종이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강절성 승상(江浙省丞相)인 답실만(答失蠻)이 당시에 무비 경(武備卿)으로 있었는데, 그가 무고(武庫)에 와서 무고를 대표하는 최고의 보물을 가지고 가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경은 듣지 못했습니까? 세조(世祖)께서 상의(尙衣)의 어개(御鎧)를 내리면서 이르기를이것으로 무고를 상징하는 보물로 삼으라. 그리고 후세에 제위(帝位)를 계승한 천자가 혹 융로(戎輅 병거(兵車)) 를 탈 때에나 착용할 것이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비장(秘藏)하여 대대로 보물로 간수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고를 관장하는 관원들이 서로 전하며 오직 근실하게 받들어 왔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내가 가져다 보려고 할 따름이지 다른 뜻은 없소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그 보물을 보자마자 가지고 달아났으므로, 공이 큰 소리로경은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오.”라고 외치면서 급히 달려가서 손으로 빼앗았으나 겨우 투구만 손에 넣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또 투구까지 뺏으려고 대들었는데, 공이 말하기를내 머리는 가져갈 수 있어도 이것만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투구를 품에 안고 통곡을 하니, 그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단지 갑옷만 가지고 주왕(周王)이 거하는 곳에 가서 바쳤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서 인종(仁宗)이 그 갑옷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주관하는 자가 사실대로 대답을 하니, 황상이 노하여 그 경()을 극형에 처하였는데, 투구를 보존한 일을 위에 알린 자는 끝내 있지 않았다. 자무고(資武庫)ㆍ수무고(壽武庫)ㆍ이기고(利器庫) 삼고(三庫)는 모두 상방(尙方)의 융기(戎器)를 비장한 곳이었다. 그런데 공이 재삼 지키는 일을 맡는 동안 근실하고 신중하게 하여 털끝만큼도 잘못이 없게 하였는데, 급기야 그 경이 형벌을 받게 됨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
연우 경신년(1320, 충숙왕 7)에 외방으로 나가 금주(錦州)를 다스렸고, 지치(至治) 임술년(1322)에는 고주 자사(高州刺史)로 옮겼다. 고주는 예전에 해거란(奚契丹)에 속한 지역으로서 누차 전쟁을 겪는 바람에 인민과 물자가 모두 결딴이 난 상태였다. 그리고 변방 이민족의 잡다한 종족들이 모여 살면서 농사나 양잠을 하지는 않고 항상 도둑질을 일삼고 있었다. 공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는 스스로 검속하는 한편 덕화를 힘써 진정으로 감화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래도 불법을 자행하며 잘못을 고치지 않는 자는 통렬하게 법대로 다스리면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한 경내가 잘 다스려진다고 일컬어졌다
.
천력(天曆) 원년(1328)에 또 의주 자사(懿州刺史)에 제수되었는데, 황제의 재가가 내려오기 전에 어사대(御史臺)에서 풍헌(風憲)을 맡을 만하다고 공을 천거했기 때문에, 하서농북도 첨염방사사(河西隴北道僉廉訪司事)로 바꾸어 제수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바야흐로 전쟁이 진행 중인 때라서 영하(寧夏)의 토호들이 위세를 빙자하고 흔단을 틈타서 헌사(憲司)를 교란하며 무력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부임하는 즉시로 본로(本路)의 점리(點吏)인 장능(張能)을 데리고 사안에 따라 단안을 내리면서 나머지 인원은 파직하여 모두 해산시켰다. 그리하여 총관(摠管)인 흔도(忻都)와 문추관(文推官)이 외축(畏縮)하여 병을 칭탁한 가운데, 공이 홀로 감사의 직책을 굳게 지킨 지 1년 만에 풍기(風紀)가 다시 진작되었다. 또 영전(營田 둔전(屯田))하며 수리(水利)를 주관하는 자들이 적임자가 못되어서 그 일을 이용하여 불법 행위를 자행하자 80여 인을 배척하여 축출한 뒤에 다시 청렴하고 유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하도(河道)를 수개하자 백성들이 그 덕분에 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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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 앞서 영하(寧夏)가 먼 변방의 미개한 지역인 탓으로 나그네가 여행 중에 죽으면 빈장(殯葬)할 수가 없어서 해골이 그대로 야외에 방치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경력(經歷) 장규(張珪)로 하여금 담을 쌓고 집을 지어 그중 570여 구()를 거두어 안치하게 하는 한편, 《천자문(千字文)》의 글자 순서대로 기록하여 그들의 성명과 관향을 표시해 둠으로써 그들의 친척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와 함께 담 안에 무덤을 파고서 야외에 방치된 해골들을 묻어 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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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섬(關陝)
에 한재가 발생하여 기근이 들자 유랑하는 백성들이 대부분 먹을 것을 찾아 야외에서 노숙하다가 비와 바람에 시달려 병들곤 하였다. 이에 공이 자신의 봉록을 모아 희사하며 앞장을 서자 부호들이 다투어 돈을 내며 도운 결과 유민을 수용할 가옥 20여 칸을 지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전당 잡혀 팔려 가는 남녀에게 관청에서 옷과 밥을 지급하고 그들의 부모에게 돌아가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미 죽은 자는 쉴 곳을 얻게 되고, 살아 있는 자는 병들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공이 옥사를 평결할 때에는 한결같이
흠휼(欽恤)을 위주로 하였다. 영하의 죄수 중에 당씨(黨氏)의 며느리가 간부(姦夫) 때문에 남편을 독살했다는 죄목으로 옥사가 일단 성립되었는데, 그 안건을 심리한 지 2년이 되도록 다른 말들이 없다가, 공이 한 번 심문하고 두 번 심문하여 그 실정을 알아본 결과 그 남편이 실제로 병들어 죽은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그 간부와 함께 며느리를 즉시 재판하여 석방하니, 사람들이 귀신처럼 잘 알아낸다고 탄복하였다.
지순(至順) 2(1331, 충혜왕 1)에 섬서성 원외랑(陝西省員外郞)으로 전직되었는데, 품계는 아중대부(亞中大夫)였다. 섬서의 분성(分省)이나 막부(幕府)의 직책에 임명되는 경우에는, 어사대(御史臺)가 그곳에 함께 세워져 있는 만큼 매번 소환과 호출을 받고 응대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사람들이 꺼린 나머지, 명을 받고도 취임하지 않으려 하는 자도 있었고, 일단 올라갔다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휴직을 청하는 자도 있었고, 혹은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한 채 왕왕 죄를 범하고서 떠나가는 자도 있었다. 당시에 행성(行省)의 관료들이 모두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파직되는 상황에서, 공이 혼자서 2년 동안 예외적으로 근무하며 마침내 유능하다는 평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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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전선(銓選)이 공정하지 못해서 오직 세력이 있는 자에게만 빌붙었으므로 뇌물이 아니면 아예 통하지를 않았다. 공이 이러한 폐단을 모두 알고는, 선후(先後)와 정궐(定闕)과 등차(等差)에 대한 내용을 작성한 장부의 기록에 의거해서 공개적으로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 명단을 대조하며 주의(注擬)한 다음에 즉시 게시판에 공고하였다. 그러자 청탁하는 길이 끊어지면서 마음대로 법을 농락하는 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임명장을 받는 사람들 모두가 기뻐하며 심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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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수령을 선발하는 때를 당하여, 원통(元統) 원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하남부로 총관(河南府路摠管)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공이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의 병폐를 물어 알아보고서 이익이 되는 일은 일으키지 않음이 없고 해가 되는 일은 제거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남은 서북의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여, 서쪽으로는 문향(
)에서 오고 북쪽으로는 맹진(孟津)에서 오고 동쪽으로는 공현(鞏縣)에서 왔는데, 이곳에 있는 11개의 역() 모두 인호(人戶)가 없어져서 열 집에 아홉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이에 은폐한 것을 검사하고 사찰하여 실정을 파악한 다음에 빈약한 자를 면제해 주는 대신에 풍후한 자에게서 보충하도록 하였다. 또 관사를 신축하고 주로(州路)를 닦고 이문(里門)을 세우고 농상을 권장하였으며, 혜민약국(惠民藥局)을 개설하여 궁민을 구제하는 한편, 동의(銅儀 혼천의(渾天儀))를 장치하여 기후를 신중히 관측하게 하였다.
이 렇게 해서 백성들이 일단 열복을 하자 다시 명령을 내리기를치도를 강구하려면 학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묘우(廟宇)가 허물어지고 재사(齋舍)가 퇴락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스승을 높이고 사도(斯道)를 존중하는 조정의 뜻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봉록을 덜어 내어 솔선하면서 공사를 일으켜 수리한 결과, 대성문(大成門)을 비롯하여 동쪽과 서쪽의 무서(廡序) 등 총 49칸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 뒤에 양 총관 의(梁摠管宜)가 이 일을 비석에 새겨 놓았으나, 내용이 간략해서 자세히 알아볼 수 없는 점이 유감스럽다
.
공이 묘우와 학교를 일신한 뒤에는 일과를 정해 제생(諸生)을 독려하며 강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이 공무를 마치고 치소(治所) 뒤의 매화당(梅花堂)으로 물러 나와서는 관료와 아전들을 모아서 경사(經史)를 강설하였는데, 추위와 더위에도 이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원근의 백성들이 오래도록 풀지 못한 억울한 사안이 있으면 헌사(憲司)가 으레 공에게 위임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공 역시 마음속으로 성실하게 임하면서 모두 실정에 맞게 해결해 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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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불행히도 지원(至元)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 3 26일에 병으로 관아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2세였다. 사서인(士庶人)이 부음을 듣고 모두 슬피 울면서 사모하였음은 물론이요, 옥송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목 놓아 통곡하면서부로(府路)가 생긴 이래로 청렴하고 유능하고 순량(循良)한 점에서 공과 비길 만한 자는 있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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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성품이 관대하고 온화하였으며, 호오에 치우침이 없이 정도를 지키면서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공무 이외의 한가한 시간에는 온유한 가운데 거친 말을 하거나 조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있지 않았으며, 공무를 행할 때에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부지런히 수고하였다. 공은 품행이 청렴결백하여 조금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붕우가 보내 주는 것이 비록 음식처럼 사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혹 뜻에 맞지 않으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공이 고주(高州)와 하남(河南)에 있을 적에 조정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양식을 싸 가지고 갔으며, 나물 한 가지라도 먹으면 반드시 값을 후하게 치렀고, 마시는 것은 오직 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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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의 아들 효선(孝先)이 조칙을 받들고 섬서(陝西)의 지역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그 기회에 공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들렀는데, 공이 효선에게 원래의 예정된 길을 벗어나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래도 한 번 뵙고 가겠다고 청하였으나 공이 허락하지 않자 며칠 머물다가 떠났는데, 부로(府路)의 관원이 주식(酒食)을 갖추어 교외에서 전별했다는 말을 공이 듣고는 불쾌하게 여기면서 그 비용을 계산하여 갚아 주었다. 공은 자신의 생활을 매우 검소하게 하였으며, 안에 잉첩(媵妾)을 두는 일이 없이 담담하기만 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나던 날에 장롱에는 남은 비단이 없고 창고에는 남은 곡식이 없을 정도로,
빙벽(冰蘗)과 같은 절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지정(至正)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에 집현 직학사(集賢直學士) 아중대부(亞中大夫) 경거도위(輕車都尉)에 추증되고, 고양군후(高陽郡侯)에 추봉되었으며, 정혜(正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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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인 최씨(崔氏)는 누차 봉해져서 고양군태부인(高陽郡太夫人)이 되었다. 아들은 3인이다. 장남 효선은 일명 첩목아불화(帖木兒不花)라고 하는데, 근시(近侍)를 거쳐서 누차 승진하여 대부감 좌장고부사 정동행중서성원외랑 자정원도사 강남제도행어사대감찰어사 대사농사도사 첨산남강북도숙정염방사사(大府監左藏庫副使征東行中書省員外郞資政院都事江南諸道行御史臺監察御史大司農司都事僉山南江北道肅政廉訪司事)가 되었고,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었다. 다음 중보(仲輔)는 일명 관음노(觀音奴)라고 하는데, 시의사 통사사인(侍儀司通事舍人)을 거쳐 중흥무공고 부사(中興武功庫副使)로 승진하였다. 다음 문헌(文獻)은 일명 승수(承壽)라고 하는데, 동궁(東宮)의 급사(給事)로 있다. 딸이 하나 있는데, 섬서제도행어사대 감찰어사(陝西諸道行御史臺監察御史) 철철불화(徹徹不花)에게 출가하여 원평현군(宛平縣君)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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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과 동향 사람으로서 일찍이 어울려 노닌 적이 있다. 그래서 공의 덕행과 그 가세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주D-001]명종(明宗) : 원 무종(元武宗)의 장자(長子)이다. 무종이 죽은 뒤에 무종의 동모제(同母弟)인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자기의 장자인 영종(英宗)을 황태자로 삼고 명종을 주왕(周王)에 봉하여 운남(雲南)에 출진(出鎭)하게 하자, 명종이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과 무종의 구신(舊臣)을 규합하여 관중(關中)의 군대로 반기(叛旗)를 들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진종(晉宗)이 죽은 뒤에 명종의 아우인 문종(文宗)이 대도(大都)에 웅거하면서 영접하여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하였는데, 재위 8개월 만에 순행 도중에 독살당하였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는 명종의 장자이다.
[주D-002]관섬(關陝) :
섬서(陝西) 지역을 말한다. 섬서의 옛 이름이 관중(關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한 것이다.
[주D-003]흠휼(欽恤) :
《서경》 순전(舜典)공경하고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신중하게 형벌을 행한다.〔欽哉欽哉惟刑之恤哉〕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주D-004]빙벽(冰蘗)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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