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집자료 ▒

가정집 제14권 번역

천하한량 2010. 1. 13. 01:46

 

가정집 제14

 

 

 고시(古詩)

 

 

 

기행(紀行) 시 한 수를 지어 청주 참군(淸州參軍)에게 주다

 


고인은 획일법을 중시했는데 / 古人重畫一
금인은 제멋대로 변동하길 좋아하여 / 今人好變更
법조문이 쇠털처럼 세밀해짐에 따라 /
法令牛毛細
민생이 물고기 꼬리 붉어지듯 하였다네 /
黔蒼魚尾

아 멀리 노니는 사람이여 / 嗟嗟遠游子
그대 마음 어찌하여 편하지 못하신고 / 爾心胡不平
한평생 대부분을 구복(口腹) 위해 / 平生多爲口
뻔질나게 동남쪽으로 나돌아 다니면서 / 慣作東南行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청주(淸州)를 거쳐 / 逶迤過上黨
천리 길 한산(韓山) 땅에 이르곤 하였는데 / 千里到韓城
그동안 길에서 본 것이 또한 많아 / 道途多所見
탄식이 속에서 절로 나오니 어떡하나 / 感嘆由中生
십 리나 오 리 길을 가는 사이에도 / 十里五里間
역마를 탄 사신들 놀랍게도 많아 / 馳傳紛可驚
말에서 내려 길옆에 서 있노라면 / 下馬立道側
유성처럼 눈앞을 지나가곤 하였는데 / 過眼知流星
내 혼자 생각에 임금님이 덕음을 내려 / 吾疑將德音
농민에게 은혜를 펼치려는가 하였더니 / 布玆南畝氓
혹자는 말하기를 간구를 계산하여 / 或云算間口
불쌍한 백성들까지 착취한다 하고
/
抽錢及孤惸
혹자는 말하기를 산야를 농단(壟斷)하여 / 或云籠山野
토지 떼어 내 겸병하는 이들에게 바친다고 하네 / 割地歸兼幷
소송 문건을 바야흐로 얽어 만들어 / 訟牒方組織
도호
가 연달아 패소하게 만든다니 / 逃戶連欹傾
황화
가 어찌 이런 것을 말함이리오 / 皇華豈謂是
성인께서 경에서 밝혀 놓지 않았던가 /
聖人著之經
갑자기 대동 시 읊는 기분이 되어 / 忽詠大東詩
술이 깨지 않은 듯 정신이 멍하도다 / 兀如未解酲
선왕은 근면하고 부지런하여 / 先王勤且儉
사방을 경영하기 시작할 적에 / 四方始經營
산천의 경계가 각각 있게 하였으니 / 山川各有界
조세에 어찌 규정을 두지 않았으랴 / 租稅豈無程
공씨는 이익을 드물게 말하였고 /
孔氏罕言利
맹자는 서로 취함을 미워했느니라 /
孟子惡交征
지금은 바로 봄비가 내린 뒤로 / 時當春雨後
포곡
이 노래하며 자꾸 재촉하는데 / 布穀間關鳴
밭머리에 새참도 볼 수 없으니 / 不見田頭

물가에서 밭 가는 이 누가 있겠는가 / 誰從水際耕
나는 산을 하나 사서 이 세상 떠나 / 我欲買山去
푸른 산 빛 들어오게 격자창 열어 놓고 / 鑿翠開風欞
정원에는 기르나니 소나무 대나무요 / 園中養松竹
문밖에는 찰벼와 메벼 심고 싶어라 / 門外種稌

울울창창 나무 그늘에 앉아도 보고 / 茂樹坐鬱鬱
차디찬 맑은 샘물을 마셔도 보고 / 淸泉飮泠泠
날마다 세심경이나 펼쳐 보면서 / 日讀洗心經
세상일에 얽혀들지 않게 하고파라 / 無令世故嬰
하지만 한 자의 땅도 금혈에 들어가니 / 尺地入金穴
어느 곳에 사립문을 세울 수나 있겠는가 / 何處安柴扃
그래서 분주한 관직에 종사하면서 / 所以事奔走
일 년 내내 안정을 취하지 못한다네 / 終歲不得寧
생각해 보건대 우리 장서랑은 / 念我掌書郞
청삼
의 신분으로 송영에 얼마나 피곤할까 / 靑衫倦送迎
이런 일도 눈으로 직접 볼 것이요 / 此亦眼所見
저런 일도 귀로 직접 들을 것이니 / 彼亦耳所聆
군은 항상 이런 일을 접하련마는 / 知君常對此
의기는 어찌 그토록 씩씩하고 장쾌한지 / 意氣何崢嶸
군의 마음은 한 조각 단심(丹心) / 君心一寸丹
군의 모발은 모두가 흑발(黑髮) / 君鬢十分靑
훗날 묘당 위에 올라가서 / 他年廟堂上
은정의 국물에 간을 맞출 적에 /
手調殷鼎羹
내 시가 혹시라도 남아 있거든 / 吾詩儻不棄
좌우에 놔두고서 한번 보시기를 / 以爲座右銘

 

[주D-001]획일법(畫一法) : () 자를 긋듯 간단하고 명쾌해서 누구나 환히 알 수 있는 법령이라는 뜻이다. 한나라 초기에 소하(蕭何)가 간편하게 법을 제정하였는데, 조참(曹參)이 그의 뒤를 이어 상국(相國)이 된 뒤에도 변경하는 일 없이 그대로 준수하자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소하가 제정한 법이 일 자를 긋듯 명백했는데, 조참이 대신해 지키면서 그 정신 잃지 않았다네.〔蕭何爲法 若畫一 曹參代之 守而勿失〕라고 찬미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
[주D-002]법조문(法條文)이……따라 :
법 령을 엄밀하게 제정해서 백성의 생활을 가혹하게 규제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진 효공(秦孝公)이 법 제정을 상앙에게 일임하자, 법령이 쇠털처럼 세밀하게 되었다네.〔秦時任商鞅法令如牛毛〕라는 표현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12 述古2
[주D-003]민생(民生)이……하였다네 :
낚 싯줄에 걸려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물고기처럼 백성들의 생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곤고해진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여분(汝墳)〉에방어 꼬리 붉어지고, 왕실은 불타는 듯.〔魴魚
尾 王室如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방어(魴魚)는 힘이 약하고 비늘이 가늘다. 물고기는 피곤해지면 꼬리가 붉어진다. 방어 꼬리가 원래 흰데 지금 붉어졌다면 힘을 많이 써서 매우 피곤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004]혹자는……하고 :
간 구(間口)는 집의 간가(間架)와 인구(人口)라는 뜻으로,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주택세(住宅稅)와 호구세(戶口稅)를 강제로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말에 의하면 옛날 이 장군이, 험한 지형 믿고 말세에 편승하여, 인민을 착취하며 간가와 인구를 일일이 계산하였고, 나물국과 미음에만 세금을 매기지 않았을 뿐이라네.〔云昔李將軍 負險乘衰叔 抽錢算間口 但未榷羹粥〕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4 鳳翔八觀 李氏園》
[주D-005]도호(逃戶) :
부역(賦役)을 도피한 가호라는 말로, 호적도 없이 유랑하는 집을 가리킨다.
[주D-006]황화(皇華) :
임금의 명을 받든 사신이라는 뜻인 황화사(皇華使)의 준말이다.
[주D-007]성인(聖人)께서……않았던가 :
《시경》 〈소아(小雅) 황화(皇華)〉에 임금이 사신을 보내면서 간곡히 당부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시경》은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진다.
[주D-008]대동(大東) :
《시 경》 〈소아〉의 편명으로, 동방의 나라 전체가 부역과 착취에 시달리는 참상을 서술한 시인데, 그중에경박한 귀족들이 저 큰길을 행차하며 오락가락하여, 내 마음을 병들게 하도다.〔佻佻公子 行彼周行旣往旣來 使我心疚〕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D-009]공씨(孔氏)는……말하였고 :
《논어(論語)》 〈자한(子罕)〉에공자는 이익과 운명과 인에 대해서 드물게 말하였다.〔子罕言利與命與仁〕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맹자(孟子)는……미워했느니라 :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上下交征利而國危矣〕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주D-011]포곡(布穀) :
뻐꾸기의 별칭이다. 봄철에 우는 소리가씨앗을 뿌려라〔布穀〕라고 재촉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주D-012]산을 하나 사서 :
은 퇴를 뜻하는 해학적인 표현이다. ()나라 승려 지도림(支道林)이 심공(深公)의 소유인 인산(印山)을 사서 은거하려고 하자, 심공이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산을 사서 숨어 살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기롱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排調》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지금부터 세상만사 떨쳐 버리고, 처자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 살고 싶어라.〔從此萬緣都擺落欲
妻子買山居〕라는 구절이 나온다. 《白樂天詩集 卷16 端居詠懷》
[주D-013]세심경(洗心經) :
《역경(易經)》의 별칭이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성인은 이로써 마음을 씻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곳에다 감추어 둔다.〔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라는 말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주D-014]금혈(金穴) :
황 금이 쌓인 동굴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척의 집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곽 황후(郭皇后)의 동생 곽황(郭況)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은상(恩賞)으로 엄청난 재물을 받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집을 금혈이라고 칭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0上 光武郭皇后紀》
[주D-015]청삼(靑衫) :
푸 른 적삼이라는 뜻으로, 품계가 낮은 관원의 복장을 가리킨다. 보통 실의에 빠진 하급 관리의 심정을 비유할 때 많이 쓰는데,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 백거이가 강주(江州)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비파인(琵琶引)〉에좌석에서 제일 많이 운 사람이 누구인고, 강주 사마 푸른 적삼 눈물 젖어 축축하네.〔座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16]은정(殷鼎)의……적에 :
재 상의 지위에 올라 국정을 주도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열명 하(說命下)〉에 은나라 무정(武丁) 임금이 재상인 부열(傅說)에게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국을 끓일 때면, 그대가 간을 맞출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차운(次韻)하여 백화보(白和父)에게 답하다

 


나는 원래 멀리 나돌아 다니길 좋아하고 / 吾生好遠游
산과 물도 깊고 그윽한 곳만 찾는지라 / 山水極深幽
도하에선 겨우 몇 개월을 지냈을 뿐 / 都下數閱月
강남에서 가을을 열 번이나 보냈다오 / 江南十經秋
스스로도 이상해라 오늘의 이 계책이여 / 自訝今日計
방을 빌려 오래도록 죽치고 있다니 원 / 賃屋久淹留
빈궁과 영달에는 운명이 개재할 터인데 / 窮通要有命
뻔뻔스럽게 무엇을 구하려 한단 말가 / 强顔何所求
홀로된 모친 역시 이미 늙으셨고 / 孀親亦已老
고향 산천도 꿈속에 자꾸만 어른어른 / 故山歸夢稠
그대도 알다시피 부잣집 문 두드려도 / 君看富兒門
우리들을 어디 아는 척이나 한답디까 / 不容吾輩流

 

 

 

운명이 기박한 첩〔妾薄命〕. 태백(太白) 운(韻)을 써서 짓다. 2

 


첩은 본래 한미한 집안의 딸로 / 妾本寒門子
가시나무 비녀 꽂고 오두막에 살았지만 / 荊釵居白屋
아름다운 자질을 받고 태어나 / 美質天所生
뺨이 붉은 소반과 같아서 /

스스로 경국지색이라 믿고는 / 自倚傾國艶
세상 사람들과 아예 사귀지 않았지요 / 乃與世人疎
오릉의 많은 젊은 자제들
/ 五陵多年少
지나가다가 수레를 모두 멈췄지만 / 過者皆停車
미소 번이라도 어찌 가벼이 흘릴까 / 一笑肯輕賣
천금을 준다 해도 응하지 않았나니
/
千金且不收
이 때문에 자연히 좋은 시기 놓치고서 / 以此自愆期
세월만 장강처럼 흘려보냈다네요 / 歲月長江流
어젯밤엔 불어오는 갈바람 속에 / 西風昨夜至
이슬 맺힌 풀숲에서 베짱이 울음소리 / 莎雞鳴露草
고운 얼굴 시들고 나면 어찌할거나 / 紅顔恐消歇
때 지나면 호시절 다시 오지 않건마는 / 時過不再好

나면서부터 남과 사귀지 못한 채 / 生不識人面
긴긴 세월 집 안에만 틀어박혔는데 / 長年在深屋
미색이란 굴레로 계속 신세 그르치다 / 一爲色所誤
민이 옥을 기만하는 조롱만 되려 당했다오 /
反遭珉欺玉
미움과 사랑은 예부터 무상한 것이라서 / 憎愛古無常
아침의 연인이 저녁에는 타인이 된다네 / 朝恩暮乃疎
울적한 심정에 추선의 시 읊조리노니 / 悒悒詠秋扇
임의 수레에 오를 희망 끊어졌어라 / 望絶登君車
누굴 위해 금빛 침상 먼지 털거나 / 金牀爲誰拂
수놓은 이불 거둔 지도 이미 오래전 / 繡被久已收
허전한 규방에 스며드는 차가운 달빛 / 閨空寒月落
보이나니 깜박이며 흐르는 반딧불뿐 / 但見螢火流
깊은 시름 속에 잠깐 이룬 한바탕 꿈 / 沈憂暫成夢
어렴풋이 풀꽃 꺾어 겨루었던 듯도 한데
/
鬪百草
지금 세상에 상여의 재주 구할 수가 없으니 / 世無相如才
누가 옛정을 되찾게 있을까
/
誰令復舊好

 

[주C-001]태백(太白) 운(韻) : 《이 태백집(李太白集)》 권3에 〈첩박명(妾薄命)〉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한 무제(漢武帝)의 총애를 듬뿍 받다가 나중에는 폐후(廢后)되어 장문궁(長門宮)에 유폐된 진 황후(陳皇后) 아교(阿嬌)의 일을 서술하여, 인생의 영화가 허망한 것임을 우회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주D-001] 뺨이……같아서 :
이백(李白)의 〈첩박명〉 바로 뒤에 나오는 〈유주호마객가(幽州胡馬客歌)〉 시에부녀가 말 위에서 웃음 짓나니, 그 얼굴 붉은 옥 소반과 같아라.〔婦女笑馬上 顔如
玉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오릉(五陵)의……자제들 :
서 울 부호(富豪)의 경박하고 호협한 자제들을 가리킨다. 오릉은 함양(咸陽) 부근에 있는 서한(西漢) 다섯 황제의 능인데, 이곳에 능을 세울 때마다 사방의 부호들을 옮겨 와 살도록 했기 때문에 이런 뜻이 생겼다. 《漢書 卷92 原涉傳》
[주D-003]미소……않았나니 :
미인이 한 번 웃는 것이 천금 같아서, 미인의 웃음을 얻기가 어려움을 뜻하는일소천금(一笑千金)’의 성어(成語)가 있다.
[주D-004]민(珉)이……당했다오 :
자기보다 못생긴 다른 여자에게 총애를 뺏겼다는 말이다. 민은 옥과 비슷하게 생긴 돌이고 옥은 진짜 옥을 가리키는데, 보통 가짜와 진짜라는 뜻으로 대비해서 많이 쓰인다.
[주D-005]추선(秋扇) :
가 을 부채라는 뜻으로,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처량한 심정을 비유한 말이다. 한 성제(漢成帝)의 궁인 반첩여(班倢
)가 시가에 능하여 총애를 받다가 허 태후(許太后)와 함께 조비연(趙飛燕)의 참소를 받고는 물러나 장신궁(長信宮)에서 폐위된 태후를 모시고 시부를 읊으며 슬픈 나날을 보냈는데, 단선시(團扇詩)를 지어서 여름철에는 사랑을 받다가 가을이 되면 버려지는 부채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추선(秋扇)의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 권27에 〈원가행(怨歌行)〉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가 수록되어 있다. 《漢書 卷97 外戚傳下》
[주D-006]깊은……한데 :
옛날 단오절에 여인들이 꽃을 꺾어 와서 다과(多寡)와 우열(優劣)을 비교하며 시합한 놀이를 투백초(鬪百草)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꿈속에서도 잊지 않고 누가 더 예쁜지 서로 경쟁했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주D-007]지금……있을까 :
진 황후(陳皇后)가 유폐된 뒤에 성도인(成都人)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문장을 잘 짓는다는 말을 듣고는 100()의 황금을 보내어 글을 요청하자 사마상여가 〈장문부(長門賦)〉를 지어 주었는데, 한 무제가 그 글을 읽고 나서 진 황후를 다시금 총애했다는 이야기가 《문선》 권8〈장문부〉 서문에 나온다.

 

 

 

애왕손(哀王孫)

 


진황이 범처럼 노려봄에 만국이 달려와 무릎 꿇자 / 秦皇虎視萬國奔
도를 모두 없애고서 인민을 바보로 만들었네
/
剗滅古道愚黎元
시랑이 길을 막은 것을 누가 감히 어쩌랴만 /
豺狼當途誰敢行
천지가 폐색한 때야말로 운뢰둔의 시절이라 /
天地閉塞雲雷屯
회음 땅의 젊은이가 인걸을 업신여기면서 / 淮陰少年侮人傑
가랑이 사이 기어가게 문을 나가듯 하였지
/
令出胯下如出門
표모가 안목이 있어 왕손을 애처롭게 여기자 / 漂母有眼哀王孫
그릇 밥에 천금으로 보답하려고 생각했다오
/
千金思酬一飯恩
망이의 화가 일어나 진이 사슴을 잃은 뒤로 / 望夷禍起秦失鹿
천하가 함께 뒤쫓으며 얼마나 분분하였던가
/
天下共逐何紛紛
이중 유방과 항우 발 빠르다 칭했는데 / 是中劉項號疾足
한밤중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승부가 결판났네 / 楚歌半夜雄雌分
왕손의 공로가 워낙 커서 소조를 압도하였나니 / 王孫功大壓蕭曹
동서로 종횡무진하며 천하를 한 손에 주물렀네 / 東收西取囊乾坤
왕손의 충의는 당시에 여전히 사모할 만하였나니 /
當時忠義猶可慕
괴생도 계모를 철회하고 이상 말하지 않았다오 /
蒯生計輟無復言
조진궁장의 말이 얼마나 슬프다 하겠는가 /
鳥盡弓藏語已悲
한가의 은정이 야박해서 왕손이 원망한 것이라네 / 漢家恩薄王孫冤
왕손이여 번쾌 등과 줄에 것을 혐의 마오 /
王孫休嫌噲等伍
하늘이 어찌 오강에서 항우만 망하게 했으리까 / 天亡豈獨烏江濆
밥을 다시 구걸하려 해도 어찌 될 수 있으리오 / 更欲乞飯那可得
공연히 왕손을 만고토록 불쌍히 여기게 하였도다 / 空令萬古哀王孫

 

[주C-001]애왕손(哀王孫) : 한 나라 개국 공신으로서 삼걸(三傑)의 하나인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이다. 이 제목은, 한신이 빈궁해서 끼니를 잇지 못할 적에빨래터의 아낙네〔漂母〕가 밥을 먹여 주었는데, 이에 한신이 감격해서 언젠가 반드시 크게 보답하겠다고 하자, 그 아낙네가대장부가 끼니도 해결 못하기에, 내가 왕손을 불쌍히 여겨서 밥을 주었을 뿐이니, 어찌 보답을 바라겠는가.〔大丈夫不能自食 吾哀王孫而進食 豈望報乎〕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01]진황(秦皇)이……만들었네 :
진 시황(秦始皇)이 육국(六國)을 병탄하고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시행하면서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사건을 벌이기까지 했던 것을 말한다. 《사기》 권6〈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이에 선왕의 도를 폐하고 백가의 말을 불태워 백성을 바보로 만들었다.〔於是廢先王之道焚百家之言 以愚黔首〕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시랑(豺狼)이……어쩌랴만 :
()나라 이세 황제(二世皇帝) 호해(胡亥) 때에 환관 출신 승상인 조고(趙高)가 사슴을 말이라고 속이는 등 천자를 농락하면서 마음대로 위세를 부리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제어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후한 순제(順帝) 때에 장강(張綱)이 지방 풍속을 순찰하라는 명을 받자, 타고 갈 수레의 바퀴를 낙양(洛陽) 교외의 땅에 묻고서승냥이와 늑대가 지금 큰길을 막고 있으니, 여우와 살쾡이 따위야 굳이 따질 것이 있겠는가.〔豺狼當路 安問狐狸〕라고 하고는, 곧바로 당시의 권간(權奸)인 대장군 양기(梁冀)를 탄핵하여 경사(京師)를 진동시킨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56 張綱列傳》《東觀漢記 張綱》
[주D-003]천지(天地)가……시절이라 :
하 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힌 난세일수록 영웅호걸로서는 자기의 뜻을 펼치며 큰일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말이다. 《주역》 〈둔괘(屯卦) 상사(象辭)〉에구름과 우레가 둔이니 군자는 이때를 당하여 천하를 경륜한다.〔雲雷屯 君子以經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회음(淮陰)……하였지 :
한 신(韓信)이 어떤 청년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빠져나오면서도 마치 문을 지나가듯 태연자약하였다는 말인데, 한신이 초왕(楚王)이 되었을 때에 이 청년을 중위(中尉)에 임명하면서이자는 장사이다. 나를 모욕할 당시에 내가 어찌 죽일 수 없었겠는가마는, 그를 죽여 이름 낼 것도 아니라서 꾹 참은 결과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此壯士也 方辱我時 我寧不能殺之邪 殺之無名 故忍而就於此〕라고 술회한 기록이 《사기》 권92〈회음후열전〉에 보인다.
[주D-005]표모(漂母)가……생각했다오 :
실제로 초나라 왕으로 부임하였을 때에 회음현의 빨래터에 가서 그 아낙네를 찾아 천금을 주며 보답한 기록이 《사기》 권92〈회음후열전〉에 나온다.
[주D-006]망이(望夷)의……분분하였던가 :
진 나라 이세 황제가 망이궁(望夷宮)에서 조고에게 핍박을 받고 죽은 뒤 다시 난세로 접어들어 천하를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또 제()나라 변사(辯士) 괴통(蒯通)이 한 고조(漢高祖)에게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뒤를 쫓았다. 이에 재능이 뛰어나고 발 빠른 사람이 먼저 사슴을 잡았다.〔秦失其鹿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라고 말한 내용이 《사기》 권92〈회음후열전〉 말미에 나온다. 여기에서 사슴은 제위(帝位)를 뜻한다.
[주D-007]소조(蕭曹) :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의 병칭이다. 두 사람 모두 유방(劉邦)을 보좌하여 칭제(稱帝)하게 한 개국 공신으로서, 입국(立國) 후에 서로 연달아 상국(相國)이 되었다.
[주D-008]왕손(王孫)의……만하였나니 :
한 신이 제왕(齊王)이 되었을 적에 괴통(蒯通)이 찾아가 유세하며 제위에 오를 것을 역설하였으나, 한신이 유방의 여러 가지 은혜를 떠올리고는내가 어떻게 이익을 좇아 의리를 배반할 수가 있겠는가.〔吾豈可以鄕利倍義乎〕라면서 거절하였다.
[주D-009]괴생(蒯生)도……않았다오 :
괴 통이 마지막으로 한신을 찾아가서공이라는 것은 이루기는 어려워도 망치기는 쉽고, 때라는 것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 지금과 같은 좋은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夫功者難成而易敗時者難得而易失也 時乎時乎不再來〕라고 설득하며 모반을 극력 종용하였으나, 한신이 망설이며 차마 한 고조를 배반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아예 발을 끊고서 미친 척하며 무당 행세를 했다는 기록이 《사기》 권92〈회음후열전〉에 보인다.
[주D-010]조진궁장(鳥盡弓藏)의……하겠는가 :
한 신이 초왕(楚王)의 신분으로 고조에게 사로잡혀 끌려 올 적에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꾀 많은 토끼가 죽으면 날쌘 사냥개가 삶겨 죽고, 높이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이 벽장 속에 감춰지고, 적국이 격파되면 모신이 죽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도 원래 당연한 일이다.〔果若人言 狡兎死 良狗亨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亨〕라고 탄식하였다.
[주D-011]왕손이여……마오 :
한 신이 초왕으로 있다가 고조에게 낙양(洛陽)으로 잡혀와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된 뒤에 번쾌(樊噲)의 영송(迎送)을 받고 문을 나오면서내가 살아남아 그만 번쾌 따위와 한 줄에 서게 될 줄이야.〔生乃與噲等爲伍〕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던 기록이 《사기》 권92〈회음후열전〉에 보인다.

 

 

 

당 태종(唐太宗)의 육준도(六駿圖)

 


변하의 비단 닻줄
사람들이 싫어하매 / 汴河錦纜人方厭
진왕
이 천명 받들어 보검을 빼 들었네 / 秦王順天提寶劍
폭풍이 불듯 번개가 치듯 비린내 씻어내며 / 風行電邁掃羶腥
가는 곳마다 금탕을 곧바로 무너뜨렸다네 / 所向金湯隨手陷
주나라 이후 천 년 만에 이룬 정관의 시대 / 周衰千載一貞觀
공업이 혁혁해서 양한을 초월하였다오 / 功業赫然超兩漢
당시에 여섯 마리 준마를 타고 다녔는데 / 當時所乘有六駿
창을 휘두를 공간이 비어 널찍하였다오
/
揮戈恢恢有餘刃
그 모습 돌에 새기고서 손수 찬을 지었나니 / 寫眞刻石手自贊
돌 조각이 우뚝 서서 능연과 높이를 겨뤘다네 / 片石屹與凌煙峻
소릉의 가을 석양 무렵의 모습 /
昭陵秋草夕陽邊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비감에 젖는고녀 / 行人指點多愴然
그대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
수레 타고 분분하게 나돌아 왕도를 잃은 채 / 轍迹紛紛王道缺
곤륜산 정상에서 팔준마를 몰던 일을
/
八駿曾到崑崙巓
또 보지 못했는가 / 又不見
뽑을 다하고 오추마(烏騅馬) 가지 않아 / 拔山力盡騅不逝
오강의 뿌연 달이 한나라 천지 되고 만걸
/
烏江煙月漢家天
공을 이룸은 예로부터 지기에 있는 법 / 功成自古在知己
어찌 높은 발굽과 뾰족한 에 있다 하리오 / 豈在蹄高幷銳耳

 

[주D-001]변하(汴河) 비단 닻줄 : 수 양제(隋煬帝)가 운하를 통해 강남(江南)을 순행할 적에 변하에 이르러 자신은 용주(龍舟)에 타고 소후(蕭后)는 봉모()에 태운 뒤에, 돛과 닻줄을 모두 비단으로 만들게 하고는, 장장 200여 리에 걸쳐 수백 척의 배로 자신을 뒤따르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隋書 卷24 食貨志》
[주D-002]진왕(秦王) :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의 봉호(封號)이다.
[주D-003]금탕(金湯) :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준말로, 굳건한 요새지를 가리킨다.
[주D-004]정관(貞觀) :
당 태종의 연호이다. 그가 즉위한 이래로 멸망한 수나라를 거울삼아 문치(文治)를 숭상하며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발탁하여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따른 결과,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번영하는 등 태평 시대를 구가하였으므로 역사상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일컬어지면서 성강(成康)의 시대와 병칭되곤 한다. 성강은 주나라 성왕(成王)과 그 아들 강왕(康王)의 병칭인데, 이 시대에 약 40년 동안 천하가 안정되고 죄수가 없어 감옥이 텅 비는 등 태평 시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주D-005]양한(兩漢) :
서한(西漢)과 동한(東韓)의 합칭이다.
[주D-006]당시에……널찍하였다오 :
당 태종이 육준(六駿)을 타고 전쟁터를 누비면서 아무리 복잡하고 힘든 상황도 손쉽고 여유 있게 처리했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지금 내가 칼을 잡은 지 19년이나 되고 잡은 소도 수천 마리를 헤아리는데, 칼날이 지금 숫돌에서 금방 꺼낸 것처럼 시퍼렇다. 소의 마디와 마디 사이에는 틈이 있는 공간이 있고 나의 칼날에는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것을 그 틈 사이에 밀어 넣으면 그 공간이 널찍해서 칼을 놀릴 적에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
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정(稼亭)이 백정의 칼을 당 태종의 창으로 바꾸고 소를 전쟁터로 바꿔서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주D-007]능연(凌煙) :
능연각(凌煙閣)을 말한다. 당 태종이 정관(貞觀) 17(643)에 장손무기(長孫無忌)ㆍ두여회(杜如晦)ㆍ위징(魏徵)ㆍ방현령(房玄齡) 등 훈신(勳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여기에 걸어 놓게 하였다. 《新唐書 卷2 太宗皇帝本紀》
[주D-008]소릉(昭陵)의……모습 :
소릉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당 태종의 능이다. 정관 10(636)에 육준(六駿)을 돌로 조각하여 소릉 앞에 세웠는데, 현재 6개의 석각(石刻) 2개는 미국에 있고 4개는 섬서성 박물관에 있다.
[주D-009]수레……일을 :
주 목왕(周穆王)이 정사는 돌보지 않은 채 팔준마(八駿馬)가 모는 수레를 타고 천하를 두루 유람하다가 곤륜산 꼭대기의 요지(瑤池)에 가서 전설적인 선녀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환대를 극진히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子 周穆王》
[주D-010]산……만걸 :
항 우(項羽)가 일찍이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으나, 뒤에 해하(垓下)에서 한군(漢軍)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어 곤경에 처하자, 밤중에 일어나 장중(帳中)에서 우 미인(虞美人)과 함께 술을 마시며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는데, 때가 이롭지 못하여 오추마가 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가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라고 노래하였다. 그리고는 오강(烏江)에 이르러 그의 근거지인 강동(江東)으로 건너가 재기하려 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결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11]높은…… :
두 보(杜甫)의 시에 호마(胡馬)를 형용하여머리 위 뾰족한 귀는 가을 대나무를 비스듬히 잘라 놓은 듯하고, 다리 아래 높은 굽은 견고한 옥돌을 깎아 놓은 듯하다.〔頭上銳耳批秋竹 脚下高蹄削寒玉〕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6
縣丈人胡馬行》

 

 

 

 

 

한양(漢陽) 정 참군(鄭參軍)을 보내며

 


가을바람에 정원의 나무 우수수 낙엽 지고 / 西風庭樹鳴摵摵
유인의 시름 깊어 긴 밤 잠 못 이루는 때 / 長夜幽人正愁絶
춤춘 황계 소리
듣고 이불 끼고서 잠이 들면 / 舞破荒鷄擁褐眠
해가 높이 뜨도록 문밖엔 오는 수레도 없다네 / 日高門外無來轍
오늘은 문 두드리는 손이 있어서 기뻤나니 / 今朝剝啄喜有客
바로 마음의 친구가 고별하러 온 것일세 / 乃是心親來告別
백년 인생에 즐거운 때는 적은 반면에 / 人生百歲少歡樂
태반이 시름인 것은 애착에 매인 탓이라 / 大半離愁緣愛結
동교에 술을 싣고 가니 황엽이 즐비한데 / 載酒東郊黃葉稠
한잔 술 못다 해서 노래 먼저 끝나누나 / 一杯未盡歌先闋
그대 돌아가는 길은 바로 한양관 / 歸途政指漢陽關
삼각산 봉우리가 눈에 선히 보이는 듯 / 三峯入眼明如刮
예로부터 일컬어 오는 양주의 경물은 / 楊州景物古所稱
내가 익히 다녔으니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지 / 我慣經由能細說
남한강 풍우 속의 어지러운 고깃배 등불 하며 / 南江風雨亂魚火
북한산 연하 속의 선명한 불찰 풍경 등등 / 北嶺煙霞明佛刹
다만 유감은 거민이 물고기 꼬리 붉어지듯 하여 /
所恨居民魚尾赤
마을은 쓸쓸해지고 생계는 어려워진 것 / 籬落蕭條生事拙
그대 돌아가 병들어 지친 백성들을 어루만져 / 君歸摩撫已
痌癏
그대의 한 경내부터 먼저 소생시키시라 / 要令一境先再活
연래의 세상일 차마 들을 수가 없어 / 年來世事不堪聞
남쪽으로 떠날 뜻 나도 이미 굳혔으니 / 我亦南游意已決
삿대로 건널 만큼 봄물이 불어날 때쯤엔 / 待得半篙春水生
한강에 편주 띄우고서 뱃전을 두드리리라 / 扁舟一扣漢江

 

[주D-001]춤춘 황계(荒鷄) 소리 : 동 진(東晉)의 조적(祖逖)이 친구인 유곤(劉琨)과 함께 한 이불 속에서 자다가 한밤중에 황계 소리를 듣고는 발로 유곤을 차서 깨우며이 소리는 악성(惡聲)이 아니다.” 하며 함께 춤을 춘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世說新語 賞譽》 황계는 삼경(三更) 이전, 즉 새벽이 되기 전에 우는 닭으로, 그 소리는 보통 악성이라고 하여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통례였다.
[주D-002]다만……하여 :
백 성들의 생활이 곤고함을 말한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여분(汝墳)〉에방어 꼬리 붉어지고, 왕실은 불타는 듯.〔魴魚
尾 王室如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방어(魴魚)는 힘이 약하고 비늘이 가늘다. 물고기는 피곤해지면 꼬리가 붉어진다. 방어 꼬리가 원래 흰데 지금 붉어졌다면 힘을 많이 써서 매우 피곤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력(天曆) 기사년(1329, 충숙왕16) 유월에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남쪽으로 한산(韓山)에 가려다가 강어귀에서 바람에 막히다 5

 


행장
은 스스로 알아서 결단해야 하는데 / 行藏在自斷
나는 수준이 낮아서 여태 미적미적 / 下士尙猶豫
출처를 모르고 헤매니 당연하고말고 / 宜乎迷出處
온갖 번뇌로 이 마음 들볶이는 것이 / 寸心煎百慮
오늘 남쪽으로 떠날 뜻을 굳혔는데 / 今朝決南意
그것도 작은 배로 날아가니 더욱 기쁜 일 / 且喜輕舟去
돛을 걸고 강어귀 빠져나가려 하니 / 掛席出江口
장오
가 금세 하늘로 날아오를 듯 / 檣烏欲飛

중도에 역풍이 갑자기 불어 닥쳐 / 中途逆風作
진퇴유곡(進退維谷)의 난감한 처지 / 進退俱遑遽
힘없는 닻줄을 믿기도 어려운데 / 弱纜未足恃
비렴
은 어찌나 거드름을 부리는지 / 飛廉何傲倨
밤새도록 거센 풍랑에 나부끼면서 / 終宵舞澎湃
봉창이 밝아 오기만을 몹시도 기다렸다네 / 苦待蓬窓曙
맑은 때에도 스스로 용납받지 못하다니 / 淸時自不容
요진을 내가 감히 차지할 있으리오
/
要津吾敢據
현명하고 사려 깊어 몸을 보전한다는 / 明哲保其身
전현의 말씀을 기억하는 누구인가
/
誰記前賢語

땅을 흔드는 폭풍 속에 동남쪽 하늘 새까만데 / 驚風動地東南黑
사방의 산들이 배꼬리 옆에서 오르락내리락 / 四山低
船尾側
창망해라 파랑(波浪) 속에 나부끼는 조각배여 / 蒼茫一葉浪花中
목숨이 오직 밧줄의 힘에 달려 있구나 / 性命只憑管蒯力
빗소리 쏴아 하고 배 밑바닥 적시면서 / 雨聲颼颼濕蓬底
사흘 내내 퍼붓더니 아직도 북쪽으로 / 三日一雨猶向北
단지 원기가 화기를 상하지 않게 해야 하리니 / 但令元氣不傷和
사람의 잘잘못에 따라 천지도 그대로 응하나니라 / 逆順於人互失得
어느 때나 바람과 비가 열흘과 닷새의 때에 맞아 /
何時風雨占十五
만국이 모두 달려와서 황극에 귀의하게 할꼬 / 爲驅萬國歸皇極

산속에 있을 때는 맹수가 두렵고 / 山居畏虎豹
물길을 갈 때는 수족(水族)이 싫어 / 水行厭蛟蜃
인생에 편안한 곳이 거의 없는데 / 人生少安處
주하에서 칼날이 나오누나 /
肘下生白刃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어떤 경우든 / 不如從險易
천명이라 믿고서 따르는 것이 나으리 / 天命且自信
빨리 갈 수 있다면야 물론 좋겠지만 / 速行固所願
조금 늦는다고 해서 무슨 탈이 나랴 / 遲留亦何吝
해와 달이 강물처럼 흘러가나니 / 日月江河流
백년 인생 참으로 한순간이라 / 百年眞一瞬
시를 지어 뱃노래에 화답하노니 / 作詩相棹歌
명일은 바람도 절로 순해지렷다 / 明當風自順

내가 옛날 청산 아래 배를 띄웠을 때 / 我昔泛舟靑山下
맑고도 빠른 찬 강물 내리쏟듯 하였지 / 寒江淸
如傾瀉
순챗국과 생선회 요리 남방보다 풍성해서 / 銀蓴玉膾富南烹
강 복판에서 노 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네 / 中流蕩
傾金斝
선두는 취해 누워 불러도 안 깨어나 / 船頭醉臥呼不醒
옆 사람이 찬물을 뿌려도 소용없었지 / 也任旁人泉水洒
낙하 고목
의 저녁 풍경 짙게 물들 무렵 / 落霞孤鶩暮痕濃
배를 매어 놓고 산에 올라 절에서 묵었어라 / 繫舟登山宿蘭若
그러다가 서울에 와서 여관 신세를 진 뒤로는 / 自從旅食京華來
세상일에 분주하며 얼굴 붉어질 일들뿐 / 奔走紅塵顔可赭
옛날 유람 생각한들 어찌 이룰 수 있으리오 / 縱憶舊遊安可得
꿈속에 왕왕 그림처럼 삼삼하게 떠올랐네 / 夢中往往森如寫
평소의 회포 풀어 볼 오늘의 이 조각배 / 扁舟今日愜素懷
이 세상에서 나를 아는 이 그 누구일까 / 世上誰爲知我者
역풍이 오래 길 막는다 혐의하지 마오 / 莫嫌風逆久淹留
화복은 종래 잃은 과 같지 않던가 / 禍福從來如失馬

바람이 있으니 송옥의 풍부(風賦)가 무슨 필요 있으랴 / 有風何須宋玉賦
비가 없어도 난파의 손주(酒)는 본뜰 것이 못 되나니 / 無雨莫學欒巴

다만 소원은 천기가 화순해 음양의 기운이 조화 이루어 / 但願時和二氣調
길이 우리 백성이 잘 자고 잘 먹게 해 주는 것 / 長使吾民穩眠飯
군은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
동남쪽 곡식 실은 배가 풍우에 길이 막히는 바람에 / 東南舟航阻風雨
성중의 쌀값이 뛰어올라 사람의 원성을 샀던 일을 / 城中米貴令人怨

 

[주D-001]행장(行藏) : 용 행사장(用行舍藏)의 준말로, 자신의 도를 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여 조정에 나아가기도 하고 은퇴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써 주면 나의 도를 행하고 써 주지 않으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출처(出處)도 같은 뜻이다.
[주D-002]장오(檣烏) :
돛 위에 매단 까마귀 모양의 풍향계(風向計)를 말한다.
[주D-003]비렴(飛廉) :
신화에 나오는 바람 귀신 이름이다.
[주D-004]맑은……있으리오 :
요 진(要津) 즉 현요(顯要)의 직책에 발탁되지 못하는 불운을 은근히 토로한 말이다. 공자(孔子)가 안회(顔回)에게《시경》에외뿔소도 아니고 범도 아닌데, 어째서 저 거친 들판을 헤매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우리의 도가 잘못된 것인가. 어째서 우리가 이런 곤욕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묻자, 안회가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광대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께서는 그 도를 추진해서 행하시기만 하면 될 것이니, 세상에 용납받지 못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용납받지 못한 뒤에야 군자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夫子之道至大故天下莫能容 雖然 夫子抽而行之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라고 대답하여 공자를 기쁘게 한 고사가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온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맑은 시대에 그대가 용납받지 못함을 감히 원망하랴마는, 단지 우리 도가 그대와 함께 동쪽으로 옮겨 가게 된 것을 탄식할 따름.〔敢向淸時怨不容 直嗟吾道與君東〕이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7 和劉道原見寄》
[주D-005]현명하고……누구인가 :
자 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에는 자신의 뜻을 표현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겠지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침묵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시경》에현명한 데다가 사려가 깊어서 자기 몸을 보전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國有道 其言足以興國無道 其默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어느……맞아 :
임 금이 선정을 베풀어 날씨도 때를 잃지 않게끔 된다는 말이다. 한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명우(明雩)〉에열흘 만에 한 번 바람이 불고 닷새 만에 한 번 비가 와야 한다. 비가 그보다 오래 내리면 홍수의 조짐이라고 할 것이요, 볕이 그보다 오래 들면 가뭄의 조짐이라고 할 것이다.〔十日者一雨 五日者一風 雨頗留 湛之兆也 暘頗久 旱之兆也〕라는 말이 나온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그대도 알다시피 대풍이 드는 해는, 닷새와 열흘에 한 번씩 바람 불고 비 온다오.〔君看大熟歲 風雨占十五〕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8 答郡中同僚賀雨》
[주D-007]주하(肘下)에서……나오누나 :
팔 꿈치나 겨드랑이〔肘腋〕처럼 가까운 신변에서 뜻하지 않게 환란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소식의 시에 양자(養子)인 여포(呂布)가 동탁(董卓)을 죽인 것을 두고흰 칼날이 느닷없이 주하에서 나왔나니, 황금만 공연히 산처럼 쌓아 두었구나.〔白刃俄生肘 黃金謾似丘〕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 壬寅二月有詔令……
[주D-008]낙하(落霞) 고목(孤鶩) :
당 나라 왕발(王勃)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에지는 놀은 짝 잃은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끝없는 하늘과 한 색이로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깊은 가을날의 저녁 경치를 절묘하게 묘사한 표현으로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주D-009] 잃은 :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말한다.
[주D-010]송옥(宋玉) 풍부(風賦) :
전 국 시대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만과 사치를 풍자할 목적으로, 대왕지풍(大王之風)과 서인지풍(庶人之風)으로 구분해서 지은 시부(詩賦)의 이름인데, 후대에는 보통 제왕에 대한 송가(頌歌)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3
[주D-011]난파(欒巴) 손주(酒) :
도 술에 능통한 동한(東漢) 성도(成都) 사람 난파가 조정의 연회 석상에서 황제가 하사한 술을 입에 머금었다가 내뿜어 비를 만들어서 성도 저잣거리의 화재를 진화했다는 이야기가 진()나라 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 〈난파(欒巴)〉에 보인다.

 

 

 

포사(曝史)의 임무를 띠고 남쪽으로 돌아가는 안원지(安員之)를 전송하며

 


문장을 본받으려면 반마쯤은 되어야 하고 / 文章當須慕班馬
사업 역시 이려 정도는 엿보아야 하고말고 / 事業亦可窺伊呂
채소 사며 원하지 않는 스스로 아는 터에 / 自知求益非買菜
닥나무 조각하듯 교묘히 꾸며대면 비웃음 산다오
/
人笑費巧如刻楮
가슴속 희로의 감정은 원숭이들과 진배없고 /
胸中喜怒紛衆狙
머리 위의 광음은 마리 처럼 바쁘도다 / 頭上光陰催二鼠
그대가 끌어준 덕분에 버림을 받지 않았는데 / 賴君汲引不見棄
내가 무능해 소속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 / 知我疎慵無所與
이따금 공동으로 백운의 시편을 주고받고 / 時時共和白雲篇
밤마다 금련의 불빛을 서로 마주하였다오 / 夜夜相對金蓮炬
어찌 공연히 따라다니며 시와 술만 즐기리오 / 豈唯詩酒謾追隨
평생 출처를 함께하리라 벌써 작정했소이다 / 已分平生同出處
오늘 아침 역마를 타고 자친을 뵈러 가시는 분 / 今朝乘傳覲慈親
옛날 다리에 제한 것도 희언이 아니었지요 /
昔日題橋非戲語
정녕 왕손을 위하여 내내 문에 기대실 /
端爲王孫久倚閭
어찌 증자의 소문 듣고 베틀을 내려오실까 /
豈因曾子輕投杼
붉은 기 서 있는 문 앞에는 수레들이 모여들고 / 紅旆門前織車轍
색동옷 입은 마루 위에는 진수성찬을 차렸으리 /
綵衣堂上列樽俎
왕명에 기한이 있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 應愁王命有程期
고대하는 우리 벗들 생각도 해 주겠지 / 亦念吾儕若延佇
세시를 분명 넘기지 않고 돌아올 텐데 / 歸期未必閱歲時
하필 아녀자처럼 작별을 아쉬워하랴 / 惜別何須效兒女
단지 내가 멀리 나와서 노닐고 있는 몸인지라 / 只緣長作遠遊人
귀향하는 그대 보내려니 마음이 쓰릴 뿐이로세
/
因送君歸心惻楚

 

[주C-001]포사(曝史) : 사 고(史庫)를 점검하면서 습기에 젖거나 좀먹은 서적들을 바람에 쐬고 볕에 쬐어 말리는 것을 말하는데, 혹은 포쇄(曝曬)라고도 한다. 보통 춘추관(春秋館)이나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이 이 일을 맡아서 하였는데, 그 관원을 포쇄관(曝曬官)이라고 하였다.
[주C-002]안원지(安員之) :
원지는 안보(安輔)의 자()이다. 그를 전송할 때 지은 시의 서문이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가정집(稼亭集)》 권9에 보인다.
[주D-001]반마(班馬) :
저명한 역사가요 문학가인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과 후한(後漢)의 반고(班固)의 병칭이다.
[주D-002]이려(伊呂) :
상나라 탕왕(湯王)의 승상인 이윤(伊尹)과 주나라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킨 여상(呂尙)의 병칭으로, 두 사람 모두 고대의 저명한 재보(宰輔)이다.
[주D-003]채소……산다오 :
안 원지가 떠나면서 친구에게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닌 터에, 공연히 미사여구로 교묘히 꾸며서 전송하는 말을 많이 하면 오히려 비웃음을 당하고 만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실제로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가정집》 9권의 서문을 보면, 가정이 안보에게 금의환향한다고 치켜세웠다가 안보로부터 반박을 당한 내용이 실려 있다. 후한의 고사(高士) 엄광(嚴光)에게 사도(司徒) 후패(侯覇)가 후자도(侯子道)를 보내 초청하였는데, 엄광이 다른 얘기만 하면서 입으로 간단히 대답하자 후자도가 보고할 말이 별로 없는 것을 혐의하여 몇 마디만 더 해 달라고 요청하니, 엄광이채소를 사면서 더 달라고 떼쓰는 격이다.〔買菜乎 求益也〕라고 핀잔을 준 고사가 진()나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나온다. 또 송나라 사람이 임금을 위해 상아(象牙)닥나무 잎〔楮葉〕을 교묘히 조각해서 3년 만에 완성한 뒤에 실제의 닥나무 잎사귀 사이에 놔두니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열자(列子)가 이 말을 듣고는가령 천지가 3년 만에 나뭇잎 하나를 만들어 낸다면, 나뭇잎을 가진 식물은 별로 없을 것이다.〔使天地三年成一葉則物之有葉者寡矣〕라고 비웃은 고사가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 나온다.
[주D-004]가슴속……진배없고 :
송 나라 저공(狙公)이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도토리를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내더니,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모두 기뻐하더라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우언(寓言)이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주D-005] 마리 :
흑서(黑鼠)와 백서(白鼠)를 뜻하는 말로, 일월(日月)과 주야(晝夜)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이다.
[주D-006]백운(白雲) 시편 :
고 향의 어버이를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시편을 말한다. 남조(南朝) ()나라 시인 사조(
)의 〈배중군기실사수왕전(拜中軍記室辭隨王箋)〉 시에흰 구름은 하늘에 떠 있건만, 용문 땅은 보이지 않네.〔白雲在天龍門不見〕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7]금련(金蓮) 불빛 :
당 나라 영호도(令狐
)가 대궐에서 야대(夜對)하다가 밤이 깊어 돌아갈 때, 천자가황금 장식을 한 연꽃 모양〔金蓮〕의 등촉(燈燭)과 승여(乘輿)를 주어 보내자, 학사원(學士院)의 관리들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천자의 행차인 줄로 알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卷166 令狐列傳》
[주D-008]옛날……아니었지요 :
촉 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에 성도의 성 북쪽에 있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그 다리 기둥에고거사마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駟馬高車 不復過此橋〕라고 써서 기필코 공명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는데, 뒤에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한 무제(漢武帝)에게 인정받고 출세한 고사가 진()나라 상거(
)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전한다.
[주D-009]정녕…… :
전 국 시대 제나라 왕손가(王孫賈)가 나이 15살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倚門而望〕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倚閭而望〕’”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戰國策 齊策6
[주D-010]어찌……내려오실까 :
증 자(曾子)와 동명이인인 증삼(曾參)이 살인을 했는데, 세 차례나 연속해서 증삼이 살인했다고 증자의 모친에게 전하니, 마침내 그 모친이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어서 길쌈을 하다가 베틀에서 내려와 도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戰國策 秦策2
[주D-011]색동옷……차렸으리 :
안 보가 어버이를 위해 수연(壽宴)을 벌일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老萊子)가 칠십의 나이에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는 고사가 있다. 《初學記 卷17 引 孝子傳》
[주D-012]단지……뿐이로세 :
어버이가 계시거든 멀리 나가 노닐지 말라.〔父母在 不遠遊〕라고 공자가 경계한 말이 있다. 《論語 里仁》

 

 

 

음주(飮酒) 시 한 수를 백화보(白和父), 우덕린(禹德麟)과 함께 짓다

 


호오의 정도가 사람에 따라 엷기도 진하기도 / 物情好惡淡且濃
하지만 모두 조화의 용광로 속에서 나오는 것 / 俱出造化爐中鎔
완부는 나막신을 화교는 돈을 좋아했는데 /
阮孚好屐和嶠錢
이것은 달인이 들으면 얼굴이 붉어질 일 / 達人聞之面發紅
우리들의 취미는 이런 것과는 달라서 / 吾徒所好異於此
늘상 만나는 곳은 꽃 앞이나 달 아래 / 長向花前月下逢
백씨는 술을 좋아해서 손을 멈추지 않고 / 白氏好飮不停手
우군은 닷 말쯤 마셔야 가슴이 트인다고 하고 / 禹君五斗方盪胸
이자는 평생 끊을 생각은 하지 않고서 /
李子平生不入務
눈 들어 술 단지 빈 것을 보면 질색한다오 / 擧眼厭見金罇空
형체를 잊고 너 나 하며 천지를 도외시하나니 / 忘形爾汝外天地
국생
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참으로 공이 있다 하리 / 麴生於我良有功
그대도 들었겠지만 / 君不聞
천종과 백고를 마신 분들처럼 /
千鍾與百觚
역사 이래 통음한 이는 모두가 영웅들이었다오 / 古來痛飮皆英雄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득실을 똑같이 보면 되지 / 但可陶陶齊得喪
일일이 같고 다른 점을 계교할 것이 뭐 있겠소 / 安用星星較異同
사람의 일이란 예로부터 어긋남이 많은 법 / 人事古多違
예구에서 노닐면서 맞지 않는 때도 있다오 /
羿彀或未中
잔을 들고 흘겨본 우리 최종지
/ 擧觴崔宗之
비녀장 던져 넣은 우리 진맹공
/ 投轄陳孟公
일곱째 찻잔에 겨드랑이에 청풍이 인다 한 / 應笑盧仝七椀茶
노동의 착각을 응당 비웃어 주리이다
/
誤疑兩腋生淸風

 

[주D-001]완부(阮孚)는……좋아했는데 : ()나라 완부가 나막신에 항상 밀랍을 반들반들하게 칠해서 신는 괴이한 습벽을 지니고 있었는데, 언젠가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갔을 때에도 밀랍을 칠하는 일을 태연히 계속하면서일생 동안 이런 나막신을 몇 켤레나 신을지 모르겠다.〔未知一生當着幾屐〕라고 탄식했다는납극(蠟屐)’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雅量》 또 진()나라 화교(和嶠)는 가산(家産)이 풍부해서 왕자(王者)와 견줄 만하였는데도 돈을 계속 모으기만 할 뿐 지극히 인색하였으므로, 두예(杜預)가 그를 전벽(錢癖)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晉書 卷45 和嶠列傳》 그리고 그의 집 정원에 맛 좋은 자두나무가 있었는데,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여러 아우들이 몰려와 자두를 따 먹자, 나중에 먹고 남은 씨를 계산해서 돈을 받아냈다는계핵책전(計核責錢)’의 이야기도 전한다. 《世說新語 儉嗇》
[주D-002]이자(李子)는……않고서 :
원 문의입무(入務)’는 금주(禁酒)를 뜻하는 송()ㆍ원() 대의 속어이다. 참고로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14〈칠월 오일(七月五日)〉 시에협서비방률(挾書誹謗律) 피하려고 시는 안 지으려 하고, 병들까 무서워서 술은 끊기로 하였다네.〔避謗詩尋醫 畏病酒入務〕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조낭중견화희부답지(趙郎中見和戱復答之)〉 시에조자는 하루 삼백 배씩 순식간에 술잔 비우니, 일 년이면 그 숫자가 십만 하고도 팔천 배라. 군을 일찍 술 끊게 하지 않으면, 동해를 다 퍼마셔 먼지가 일게 하리라.〔趙子飮酒如淋灰一年十萬八千杯 若不令君早入務 飮竭東海生黃埃〕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D-003]국생(麴生) :
누룩으로 빚은 술을 의인화한 별칭으로, 국선생(麴先生) 혹은 국수재(麴秀才)라고도 한다.
[주D-004]천종(千鍾)과……분들처럼 :
《공 총자(孔叢子)》 〈유복(儒服)〉에요순은 한자리에서 천종의 술을 마셨고, 공자는 백고의 술을 마셨다.〔堯舜千鍾 孔子百觚〕라는 말이 있고, 한나라 공융(孔融)의 〈여조조논주금서(與曹操論酒禁書)〉에요 임금은 천종의 술이 아니면 태평 시대를 세울 수 없었고, 공자는 백고의 술이 아니면 지고의 성인이 될 수 없었다.〔堯不千鍾 無以健太平 孔非百觚 無以堪上聖〕라는 말이 있다.
[주D-005]예구(羿彀)에서……있다오 :
《장 자》 〈덕충부(德充符)〉에명사수인 예(
羿)의 사정거리 안에서 노니는 자 가운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자는 적중되기에 꼭 알맞다고 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살을 맞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遊於羿之彀中 中央者中地也 然而不中者命也〕라는 말이 있다.
[주D-006]잔을……최종지(崔宗之) :
최 종지는 당 현종(唐玄宗) 때의 풍류 문인인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우리 최종지는 티 없이 맑은 미소년, 잔을 들고서 푸른 하늘 흘겨볼 때면, 깨끗하기가 바람 앞에 선 옥수와 같다 할까.〔宗之蕭灑美少年 擧觴白眼望靑天 皎如玉樹臨風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비녀장……진맹공(陳孟公) :
()가 맹공(孟公)인 한나라 진준(陳遵)이 술을 좋아해서 주연을 크게 벌이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손님들이 가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들의 수레바퀴에서 비녀장을 빼내어 우물 속에 던져 넣었으므로,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끝내 가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92 陳遵傳》 비녀장은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굴대 머리 구멍에 지르는 큰 못이다.
[주D-008]일곱째……주리이다 :
당 나라 시인 노동(盧仝)의 〈다가(茶歌)〉에다섯째 잔은 기골을 맑게 해 주고, 여섯째 잔은 선령을 통하게 해 주고, 일곱째 잔은 다 마시기도 전에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맑은 바람이 솔솔 이는 걸 깨닫겠네.〔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七椀喫不得 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라는 말이 나온다.

 

 

 

무극(無極) 스님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그의 문도(門徒)인 경초(景楚)가 전당(錢塘)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부처도 본래 말한 것이 없다고 설했지만 / 佛說本無言
유자(儒者) 행실도 복장에 있지 않은데
/
儒行不在服
염화미소의 경지는 만나 보지 못한 채 / 未遇拈花笑
들고 쫓기는 격이 될까 걱정도 되었소
/
恐見操戈逐
이런 도리를 무척이나 논해 보고 싶었소만 / 甚欲評此理
바짝 다가앉아 터놓고 얘기를 못하였소 / 吾膝未曾促
우리 해동은 산수가 아름답거니와 / 海東佳山水
현성의 발자취도 남아 있는 곳 / 賢聖有遺躅
그대도 잘 알다시피 무극 스님이 / 已知無極師
자운 골짜기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터에 / 送老慈雲谷
그대 돌아가는 것이 유독 뭐가 급하기에 / 子歸獨何先
훌훌 털고 구속에서 해방되려고 하시오 / 飄然謝羈束

 

[주D-001]부처도……않은데 : 유 가(儒家)와 불가(佛家)도 형식적으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근본정신에 입각하면 서로 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경초(景楚)도 비록 스님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 행실로 보면 충분히 유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석가(釋迦)가 팔만 사천 법문을 설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를 치유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 설법이었을 뿐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석가 자신은 한마디도 설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 적도 있다고 주장한다.
[주D-002]염화미소(拈花微笑)의……되었소 :
가 정이 경초를 유가의 가르침으로 인도했을 경우에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는 맛보지 못한 채, 오히려 창을 들고 유생을 쫓았다는 옛날의 이야기처럼 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는 말이다. 염화미소는 언어와 문자를 떠나 마음과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는 선종(禪宗)의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연화(蓮花)를 따서 대중에게 보였을〔拈花示衆〕때에 대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를 짓자, 석가가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ㆍ열반묘심(涅槃妙心)ㆍ실상무상(實相無相)ㆍ미묘법문(微妙法門)ㆍ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했다는 말이 육조대사(六祖大師)의 《법보단경(法寶壇經)》〈서문〉과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 등에 나온다. 또 송나라 양리(陽里)에 사는 화자(華子)의 건망증을 고칠 사람이 없던 중에 노나라의 유생이 찾아와서 완전히 낫게 해 주자, 화자가 오히려 화를 내면서창을 들고 유생을 쫓아냈는데〔操戈逐儒生〕’, 그 이유를 물으니건망증에 걸렸을 때에는 천지가 있는 것조차 몰랐는데, 지금은 존망득실과 희로애락 등 온갖 복잡한 상념이 일어나니 어느 한순간인들 망각의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나온다.

 

 

 

7 4일에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도성을 떠난 지 벌써 다섯 달 / 去國已五月
오늘 아침 처음으로 편지가 왔네 / 今朝始得書
받고는 감히 뜯어 보지 못했나니 / 得之不敢拆
무슨 내용이 들었는지 겁이 나서 / 書中道何如
다른 말은 없이 모두 평안하다고 / 平安無他語
나그네의 시름이 비로소 풀어지네 / 旅懷今始舒
숙수의 기쁨
이면 충분하고말고 / 菽水歡自足
기두의 이름
이란 또한 허무한 것 / 箕斗名亦虛
누가 다시 나를 구속할 수 있으랴 / 誰能更拘束
내 응당 내 집에 돌아가리라 / 吾當返吾廬

 

[주D-001]숙수(菽水) 기쁨 : 가 난한 생활 속에서도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는 자식의 기쁨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안이 가난해서 효도를 제대로 못한다고 탄식하자, 공자가콩죽을 끓여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극진히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효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위로했던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주D-002]기두(箕斗) 이름 :
실 제 내용은 없이 이름만 지닌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대동(大東)〉의남쪽 하늘에 기성이 떠 있어도 나락을 까불 수 없고, 북쪽 하늘에 북두성이 있어도 술을 떠 마실 수 없네.〔維南有箕 不可以簸揚維北有斗 不可以挹酒漿〕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도그대의 묘한 재질은 종묘의 제기와 같은데, 나의 헛된 이름은 기두와 영락없네.〔嗟君妙質皆瑚璉顧我虛名俱箕斗〕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28 次韻三舍人省上》

 

 

 

소백수(蘇伯脩)가 호성(湖省)의 참정(參政)으로 가는 것을 전송할 적에 시운(詩韻)을 나눠 동화진(東華塵)을 얻다

 


천구를 뒤덮 동화의 먼지 /
東華塵天衢
지척에 즐비한 중앙의 요직 / 咫尺要路津
금문이 새벽에 열리고 상군이 도착하면 / 金門曉開相君至
구름처럼 모여드는 수많은 수레와 말들 / 千車萬馬如雲屯
사방에 자욱이 홍진(紅塵)이 에워싼 가운데 / 茫茫四顧煙霞集
다만 보이는 것은 쌍으로 우뚝 솟은 관궐 / 但見觀闕雙嶙

조정에서 이름을 다툼은 예로부터 그러했나니 / 爭名於朝自古昔
땀방울 흩뿌려 얼굴을 스쳐도 감히 성내리오 /
揮汗拂面誰敢嗔
남아는 밝은 시대에 뭔가 큰일을 해야지 / 男兒有爲在昭代
북창 아래 누운
는 대관절 어떤 사람인고 / 北窓高臥知何人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려면 독서를 해야 하고말고 / 致君堯舜須讀書
유자의 썼다고 모두 신세 망치지는 않지 /
儒冠未必皆誤身
우리 공은 대각에서 명성이 자자하신 분 / 我公臺閣名籍籍
평소에 공론이 경륜을 공에게 돌렸다오 / 平生物議歸經綸
남쪽의 분성에 오래 계시게 할 리야 있으리까 / 南維分省豈得久
말방울 울리며 동화진에 다시 들어오시리이다 / 鳴鑣又入東華塵

 

[주D-001]천구(天衢)를……먼지 : 관 원들이 거마를 타고 조정에 출퇴근할 적에 내는 먼지가 서울 거리를 뽀얗게 뒤덮는다는 말이다. 천구는 도성의 거리를 말하고, 동화(東華)는 송나라 궁성의 동쪽 문 이름인데, 입조(入朝)할 때 이 문을 이용했다. 참고로 소식이서호의 풍월이 동화의 뿌연 먼지만 못하다.〔西湖風月不如東華軟紅香土〕라는 전인(前人)의 희어(戱語)를 인용해서은거하여 뜻을 구함엔 의리를 따를 뿐, 동화문의 먼지나 북창의 바람은 아예 계교치 않네.〔隱居求志義之從 本不計較東華塵土北窓風〕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4 薄薄酒》
[주D-002]관궐(觀闕) :
궁문 앞에 세운 두 개의 높은 누대(樓臺)를 말한다.
[주D-003]땀방울……성내리오 :
사 람이 많이 모여 북적거리는 도성 거리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사기(史記)》 권69〈소진열전(蘇秦列傳)〉에제나라 서울 임치(臨淄)에 가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소매를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擧袂成幕 揮汗成雨〕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북창(北窓) 아래 누운 :
은 거하여 혼자 즐기는 사람을 말한다. 도잠(陶潛)의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 있으면 서늘한 바람이 이따금씩 스쳐 지나가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태곳적 희황(羲皇)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凉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유자(儒者)의……않지 :
두보(杜甫)의 시에비단 바지 입은 자들은 굶어 죽는 일 없는데, 유자의 관을 쓴 이들은 신세 망치기 십상이라.〔紈袴不餓死 儒冠多誤身〕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 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

 

 

 

 

순암(順菴)이 새로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한 일에 대해 이극례(李克禮) 주판(州判)이 시를 지어 찬미하였기에 내가 그 시에 차운하다

 


도를 실은 그릇을 모두 경이라고 말하지만 / 載道之器皆謂經
석씨의 교설은 참으로 사량하기 어려운데 / 釋氏所說誠難思
인연과 과보의 설명 하나도 틀리지 않는지라 / 因因果果百不差
부절을 취한 듯 양손으로 수지(受持)한다오 / 如取符契兩手持
대해 용궁에 소장된 반주가 드러나면 /
龍宮海藏露半珠
사녀가 다투어 달려와 가산을 바치나니 / 士女奔競輸家貲
타생의 성불(成佛)의 공덕은 잠시 접어 두고라도 / 他生作佛且休道
오늘날 임금의 장수는 정녕 기약할 수 있으리 / 此日壽君端可期
스님은 본래 의관의 후예로서 / 阿師本是衣冠胄
부귀도 마다한 채 속세를 훌쩍 떠나신 분 / 脫略富貴輕分離
서쪽으로 유력(遊歷)할 제 황제의 은총 듬뿍 받고 / 西遊却被玉皇眷
번쩍이는 비단 장삼에 운하 무늬 가사 걸쳤다오 / 錦袍錯落雲霞披
바랑을 모두 털어 대장경 봉안을 못한다면 / 謂不傾囊置一藏
만겁토록 후회해도 소용없으리라 하였는데 / 噬臍萬劫安能追
여항의 묵본은 세상이 인정하는 보배인지라 / 餘杭墨本世所寶
돛배에 순풍을 보낼 줄 강물 귀신도 알았다네요 / 風帆穩送江神知
평생 손을 좋아하고 재물에 뜻이 없는 분이 / 平生好客不留物
이런 대보를 이뤘으니 더더욱 진귀한 일이로세 / 成此大寶尤瑰奇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
불문(佛門)에 자취를 의탁하고 부역을 피하면서 / 託迹空門逃賦役
신도의 시주로 자기의 이익을 꾀하는 자들을 / 還將檀施自利之

 

[주C-001]순암(順菴) : 승려 조의선(趙義旋)을 가리킨다. 조인규(趙仁規)의 아들인데, 보통 선공(旋公)으로 불린다.
[주D-001]대해(大海)……드러나면 :
불 경의 간행을 말한다. 불교의 전설에 의하면 대장경(大藏經)이 바다 속 용궁 안에 보관되어 있다가 세상에 드러난다고 한다. 그리고 불법(佛法)이 마치 대해(大海)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장경각(藏經閣)을 해장전(海藏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주(半珠)는 나머지 반쪽의 구슬이라는 뜻으로, 불교의 경전을 가리킨다. 《광홍명집(廣弘明集)》 권22에 수록되어 있는 당 고종(唐高宗)의 〈술삼장성교서(述三藏聖敎序)〉에중화에는 의거할 자료가 없는지라, 인도의 진짜 글을 찾게 되었다. 이에 항하를 멀리 건너 기필코 완전한 문자를 얻으려 하였고, 자주 설산을 등정하여 다시 나머지 반쪽의 구슬을 얻으려고 하였다.〔以中華之無質 尋印度之眞文 遠涉恒河 終期滿字 頻登雪嶺 更獲半珠〕라는 말이 나온다.

 

 

 

 

한식날에 홀로 앉아 심회(心懷)를 적다

 


거년에는 한식날에 서산에서 노닐었는데 / 去年寒食遊西山
금년에는 한식날에 홀로 문 닫고 앉았어라 / 今年寒食獨掩關
봄바람에 궁중 버들은 예나 이제나 똑같건만 / 東風御柳自今古
나그네 수심 어린 얼굴은 어디에서 펴 볼거나 / 客路何處開愁顔
함께 성묘할 덕공은 이 세상에 다시없고 / 世無德公同上

무덤 사이에 보이나니 걸제하는 사람들뿐 / 但見乞祭來
고당의 거울에 머리칼 많이도 비치건만 /
高堂明鏡多白髮
노래자(老萊子) 색동옷
못 입은 지 오래됐네 / 久矣不着萊衣斑
고향 동산 꽃나무 모두 내 손으로 심어 놓고 / 故園花木皆手種
꾀꼬리에게 남겨 주어 꾀꼴꾀꼴 울게 하나 / 留與黃鳥啼綿蠻
인생의 부귀 누려 본들 백년으로 그만인데 / 人生富貴亦百歲
세월은 한번 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어라 / 歲月一去無由還
하늘이 일부러 우리에게 풍부한 감정을 주었나 봐 / 天敎我輩故鍾情
무슨 일만 있으면 감회 일어 항상 못 견디게 하니 / 遇物興懷常不閑
누가 이 몸 일으켜서 한번 억지로 취하게 할까 / 誰能起我强一醉
오랜 병에 나가지 못해서 허리 다리도 굳었군그래 / 久病不出腰脚頑

 

[주D-001]덕공(德公) : 후 한 말엽의 은사(隱士)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그는 일찍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존경하여 배알을 하기도 했던 고사(高士)로서,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곡한 요청도 뿌리친 채, 가족과 함께 양양(襄陽)의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역시 당시의 고사였던 사마휘(司馬徽)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그가 성묘하러 산에 올라가고 집에 없자 사마휘가 대신 주인 행세를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高士傳 下》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한식날에 덕공이 바야흐로 성묘한 뒤에, 돌아와 보니 과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寒食德公方上 歸來誰主復誰賓〕라는 표현이 나온다. 《蘇東坡詩集卷16 寒食日答李公擇》
[주D-002]걸제(乞祭) :
묘 제(墓祭)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구걸하여 먹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배를 채우고 집에 돌아와서는 귀인(貴人)들과 노닐었다고 처첩에게 거드름을 부리는 천장부(賤丈夫)의 이야기가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온다.
[주D-003]고당(高堂)의……비치건만 :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고당의 거울에 비치는 슬픈 흰 머리칼, 아침에 푸른 실 같더니 저녁에 눈으로 변한 것을.〔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朝如淸絲暮成雪〕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2 將進酒》
[주D-004]노래자(老萊子) 색동옷 :
춘추 시대 초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가 칠십의 나이에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는 고사가 있다. 《初學記卷17 引 孝子傳》

 

 

 

 

황산가(黃山歌). 정중부(鄭仲孚)가 울주(蔚州)에서 지은 시에 차운하다.

 


옛날에 배 타고 황산 동쪽 지날 적에 / 憶昔舟過黃山東
삭풍에 태양도 빛을 잃고 썰렁했었지 / 朔風吹日寒無光
황산 서쪽으로 삼십 리쯤 바라다보면 / 黃山西望三十里
창망한 강 빛 속에 고깃배 출몰하였어라 / 漁舟出沒江蒼茫
내가 불시에 떠난 데다 또 급히 가다 보니 / 我行不時行又急
승경을 아득히 바라보며 공연히 방황했었다오 / 目斷勝境空彷徨
듣건대 그대 원님 되어 강해로 향했다고 / 聞君出守向江海
상상컨대 화극에다 맑은 향기 어렸으리 /
想像畫戟凝淸香
손님 보내며 강변길도 자주 지나다니고 / 送客頻過江上路
스님 찾아 산속 절간도 누차 출입했으리 / 尋僧屢到山中莊
하지만 황산만큼 즐거운 놀이가 또 있을까 / 黃山之遊最可樂
미인 실은 화려한 배 강 복판에 띄우겠지 / 紅粧畫舸江中央
사군이 부른 황산가 한 곡조 들어 보니 / 使君一曲黃山歌
사군의 호탕한 기상 여전히 청광하군그래 / 使君豪氣仍淸狂
만났다가 헤어지는 인생은 족히 슬퍼할 일 / 人生聚散足哀樂
부용 아래 눈물짓는 수심 어린 원앙이여 / 芙蓉低泣愁鴛鴦
하필 호탕한 사군의 노래 거듭 불러서 / 何當重唱使君曲
단판
소리에 황산 언덕 떠나가게 해서야 / 檀板拍碎黃山岡

 

[주C-001]황산가(黃山歌) : 황산은 경상도 양산군(梁山郡)의 황산강(黃山江)을 가리킨다.
[주C-002]정중부(鄭仲孚) :
중 부는 정포(鄭誧 : 1309
1345)의 자이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의 신분으로 내정(內政)을 개혁하려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면을 당하였다. 이때 원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참소를 받고 울주(蔚州)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장부의 기개를 굽히지 않고서 태연히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주D-001]상상컨대……어렸으리 :
고 을 수령의 생활을 비유한 표현이다. 화극(畫戟)은 화려하게 색칠한 목창(木槍)으로, 관부(官府)의 문을 지킬 때 병졸들이 쥐고 호위하는 것이다. 중당(中唐)의 시인인 위응물(韋應物)이 군재(郡齋)에서 문사(文士)들과 잔치를 벌이면서 지은 〈군재우중여제문사연집(郡齋雨中與諸文士燕集)〉 시에 나오는호위하는 병사들의 화려한 창 삼엄도 하고, 편히 쉬는 방에 어렸나니 맑은 그 향기.〔兵衛森畫戟 宴寢凝淸香〕라는 명구가 회자된다.
[주D-002]단판(檀板) :
널빤지를 두드려서 박자를 맞추는 악기 이름이다.

 

 

 

 

십일국(十日菊)

 


중추절도 열엿새 밤이 / 中秋十六夜
달빛 더욱 밝지 않던가 / 月色更輝輝
중양절 하루 지난 오늘 / 重陽十日菊
국화 향기 여전히 은은하여라 / 餘香故依依
세속은 유행에 부화뇌동하여 / 世俗尙雷同
명절만 지나면 관심도 없지만 / 時過非所希
나는 유독 청초한 이 꽃을 사랑하노니 / 獨憐此粲者
만년의 절조 지킴이 내 마음에 꼭 들어 / 晩節莫我違
바람결에 번이나 향내 맡고도 싶다마는 /
臨風欲三嗅
주위의 사람이 뭐라고 할까 또 겁이 나니 / 又恐旁人非
차라리 술잔 위에 꽃잎을 둥둥 띄워 / 不如泛美酒
곤드레만드레 황혼 녘까지 함께하리라 / 昏昏到夕暉

 

[주D-001]바람결에……싶다마는 : 두보(杜甫)의 시에마루 위의 서생은 공연히 머리만 세었을 뿐, 바람결에 몇 번이나 향내 맡으며 우노매라.〔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3 芻虞歎》

 

 

 

우곡(愚谷)의 시에 차운하여 우 선생 탁(禹先生倬)에게 바치다

 


험난한 바다처럼 가없이 망망한 벼슬길 / 茫茫宦海無津涯
선생은 육침이시니 어찌 또 생각하리 / 先生陸沈寧復思
춘추도 아예 잊은 화락한 인수지역(仁壽之域) /
熙熙壽域無春秋
선생은 아치이시니 뭐가 또 서운하리 / 先生兒齒亦何悲
향 사르고 시초 쥐고 진퇴를 아셨고 / 焚香執蓍知進退
술잔 들고 꽃 대하며 성쇠를 보셨다오 / 置酒對花看盛衰
추억건대 영남에서 나그네살이 할 당시에 / 追思作客嶺南日
미천한 신분도 잊고 멋지게 어울려 놀았었지 / 勝遊不覺靑衫卑
그때 마침 선생이 산수굴에 계시면서 / 先生適在山水窟
이 몸과 시를 화답하고 바둑도 많이 두셨어라 / 和我新詩饒我棊
한바탕 꿈과 같은 이십육 년 전의 추억 / 二十六年如一夢
내 머리 하얗게 센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 吾頭之白亦其宜
심지 돋워 옛 얘기하는 짧은 이 가을밤 / 挑燈話舊秋夜短
진솔하고 확삭하신 건 옛날과 똑같네요 / 眞率矍鑠如當時
잠시 머물러 육경(六經) 강의나 좀 해 주세요 / 先生且留談六籍
제가 어르신 위해 팔다리 주물러 드릴게요 / 吾爲長者能折枝

 

[주D-001]육침(陸沈) : 육지에 물이 없는데도 빠졌다는 말로, 은거(隱居)를 비유한 말이다.
[주D-002]춘추(春秋)도……인수지역(仁壽之域) :
인 수지역은 천수(天壽)를 다하며 오래도록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뜻하는데, 《한서(漢書)》 권22〈예악지(禮樂志)〉에한 세상의 백성들을 몰아서 인수의 영역으로 인도한다면, 풍속이 어찌 성강 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수명이 어찌 고종 때처럼 되지 않겠는가.〔驅一世之民 濟之仁壽之域 則俗何以不若成康 壽何以不若高宗〕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아치(兒齒) :
노인이 이가 빠진 후에 다시 나는 것으로 장수의 징조라 한다. 《시경》 〈노송(魯頌) 비궁(閟宮)〉에이미 복을 많이 받으시어, 머리도 누렇고 이도 새로 나셨다네.〔旣多受祉 黃髮兒齒〕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산수굴(山水窟) :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을 말한다.
[주D-005]확삭(矍鑠) :
노 인이 여전히 강건하여 젊은이처럼 씩씩한 것을 말한다. 동한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에 뛰어올라 용맹을 보이자, 한 무제(漢武帝)이 노인네가 참으로 씩씩하기도 하다.〔矍鑠哉是翁也〕라고 찬탄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총석정(叢石亭)의 시에 차운하다

 


해변 어느 곳인들 푸른 산이 없으랴만 / 海邊何處無靑峯
여기 와서 속세의 묵은 때 말끔히 씻었네 / 到此洗盡塵緣濃
옥을 묶어 나란히 세운 우뚝 솟은 기암이요 / 奇岩峭拔玉束竝
떨어져 나간 채 이끼만 잔뜩 낀 옛 비석이라 / 古碑剝落苔封重
궤리가 황석을 섬긴 일과 어찌 같으랴만 /
跪履寧同事黃石
비결을 쥐고서 적송을 정말 찾아올 만도 /
執訣眞堪來赤松
노동은 공연히 봉래산에 가려고 했고 /
盧仝浪欲蓬山去
태백은 요대에서 만났다 잘못 비유했지 /
太白誤擬瑤臺逢
놀라워라 선경에 이미 발을 디뎠으니 / 忽驚仙境已自致
게다가 멋진 선비들과 어울렸음에랴 / 況有佳士能相從
뒷날 도성에서 머리 돌려 생각하면 / 他年京輦若廻首
자욱한 풍진 속에 한동안 도취되리라 / 風埃漠漠迷人蹤

 

[주D-001]궤리(跪履)가……같으랴만 : 총 석정(叢石亭) 위에서 몸을 낮추고 굽어보며 경치를 감상하는 일이 옛날 궤리의 고사와 어찌 같기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궤리는, 한나라 장량(張良)이 하비(下邳)의 다리 위에서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을 만나, 그의 신발을 다리 밑에서 주워다가 공손히 무릎 꿇고 앉아서 신겨 준 일을 말한다. 그 덕분에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太公兵法)》을 받고 익힌 결과,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소서가 황석공에게 있었으니, 무릎 꿇고 신 신기는 일을 어찌 감히 사양하랴.〔素書在黃石 豈敢辭跪履〕라는 표현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40 和陶讀山海經》 소서(素書)는 병법을 가리킨다.
[주D-002]비결(秘訣)을……만도 :
고 대 전설상의 선인(仙人)인 적송자(赤松子)가 거할 만한 곳으로서, 장량이 그와 노닐기 위해 찾아올 만한 선경(仙境)이라는 뜻으로 비결은 《태공병법》을 말한다. 한나라가 건립되고 장량이 유후(留侯)에 봉해진 뒤에 속세의 미련을 버리고 신선술을 닦으면서 말하기를지금 세 치의 혀를 가지고 임금의 스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호에 봉해지고 열후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는 포의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으로서 나에게는 이미 충분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노닐고 싶다.〔今以三寸舌 爲帝者師 封萬戶 位列侯 此布衣之極 於良足矣 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耳〕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사기》 권55〈유후세가(留侯世家)〉에 나온다.
[주D-003]노동(盧仝)은……했고 :
당나라 시인 노동의 〈다가(茶歌)〉에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은 어느 곳에 있는고. 옥천자가 이 청풍 타고 돌아가고 싶구나.〔蓬萊山在何處 玉川子乘此淸風欲歸去〕라는 말이 나온다. 옥천자(玉川子)는 노동의 호이다.
[주D-004]태백(太白)은……비유했지 :
이 백(李白)의 〈청평조사(淸平調詞)〉에군옥의 산 정상에서 본 것이 아니라면, 요대의 달빛 아래에서 만난 것이 분명하네.〔若非群玉山頭見 會向瑤臺月下逢〕라는 표현이 나온다. 군옥(群玉)은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산 이름이고, 요대(瑤臺)는 유융(
)의 미녀가 산다는 누대 이름이다.

 

 

 

 

서주(西州) 용당(龍堂)과 장암(長岩)의 두 사당을 지나며

 


용당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면 장암 포구 / 龍堂南對長岩曲
그 위에 교목 그늘 아래 황량한 사당 / 上有荒祠蔭喬木
동남으로 향하는 배들 신령에게 비나니 / 東南舟航皆乞靈
노래와 춤 분분하고 술과 고기도 듬뿍 / 歌舞紛紛供酒肉
몇 년 전부터 꽤나 심한 풍우의 재해 / 年來風雨頗爲災
사람이 불성실해 신령이 복을 안 주는지 / 人不誠耶神不福
내가 한가히 노닐지만 마음에 걱정되어 / 我縱閑遊心悄悄
천리에 내 낀 파도 괜스레 눈에 가득 / 千里煙波空滿目

 

 

 

 

도중(途中)에 읊다 상도(上都)에서 지었다.

 


산허리에 관도가 나 있고 / 山腰有官道
그 아래는 길고 긴 강물 / 其下長河水
동으로 흐르는 강물 밤낮으로 바쁘고 / 河水東流日夜忙
길 위의 행인 역시 그치는 일이 없네 / 路上行人亦未已
인생은 각자 영위함이 있다지만 / 人生各有營
물은 어째서 그렇게도 바쁜고 / 水性何所以
이로써 알겠도다 하늘과 땅 사이에 / 乃知天地間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 無物不如此
말 타고 보낸 세월 속에 공연히 머리만 세었나니 / 馬上光陰空白頭
강물에 임하여 탄식함은 나를 탄식함이로다 / 臨河之嘆自嘆耳

난경을 향하는 나의 걸음 구백 리 길 / 我行
京路九百
풍토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즐길 만도 / 風土雖殊差可樂
조과령(鵰窠嶺) 이남은 산이 점점 아름답고 / 鵰窠以南山漸佳
용문협(龍門峽) 이북은 물이 모두 험악하네 / 龍門之北水皆惡
천지가 비좁은 깊은 이로곡이요 / 李老谷深天地窄
하늘과 맞닿은 높은 창간령이라 / 槍竿嶺峻雲霄薄
황조의 풍아를 감히 잇자는 뜻이 아니라 / 皇朝風雅不敢繼
흥을 만나면 졸필을 그만둘 수가 없어서 / 遇興拙筆無由閣

 

[주C-001]상도(上都) : 지 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 원 세조(元世祖) 때에 건립되었다.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병칭하여 양도(兩都)로 일컬어졌으며, 1년에 한 번씩 천자가 순행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난경() 혹은 난도()라고도 한다.

 

 

 

 

부여 회고(扶餘懷古)

 


청구가 수기(秀氣) 배태해 황하에 응하면서 / 靑丘孕秀應黃河
온왕이 동명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나니 /
溫王生自東明家
부소산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울 적에 / 扶蘇山下徙立國
상서로운 기적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 奇祥異蹟何其多
인재들이 즐비하고 문물이 성대하여 / 衣冠濟濟文物盛
틈을 엿봐 신라까지 합치려고 하였는데 / 潛圖伺隙幷新羅
못난 자손들이 덕을 제대로 잇지 못해 / 在後孱孫不嗣德
고대광실 아로새기며 사치를 일삼았네 /
雕墻峻宇紛奢華
하루아침에 견고한 성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 一旦金城如鮮瓦
천척 푸른 바위에 낙화의 이름이 붙었나니 / 千尺翠岩名落花
공후의 동산에는 농부가 씨 뿌려 밭을 갈고 / 野人耕種公侯園
깨어진 비석 곁에는 구리 낙타가 파묻혔어라 /
殘碑側畔埋銅駝
내 와서 고적 찾다 문득 흘리는 눈물이여 / 我來訪古輒拭淚
옛일은 어부와 초동의 노래 속에 들었는데 / 古事盡入漁樵歌
천 년의 서기(瑞氣)는 땅을 씻은 듯 없어지고 / 千年佳氣掃地盡
조룡대
아래 강물만 혼자서 출렁이는구나 / 釣龍臺下江自波

 

[주D-001]온왕(溫王)이……탄생하였나니 : 황 하(黃河)가 천 년에 한 번 맑아지는 것처럼 동방이 길한 운세를 만난 덕분에 온조(溫祚)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강 남쪽 지방에 백제를 건국했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출현한다.〔夫黃河淸而聖人生〕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황하는 천 년에 한 번 맑아지는데, 그 상서(祥瑞)에 응하여 성인이 나온다고 세상에서 전한다.〔世傳黃河千年一淸 淸則聖人生於此時也〕라고 하였다.
[주D-002]고대광실(高大廣室)……일삼았네 :
나 라를 망하게 할 만큼 극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형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만 좋아하거나, 술과 풍악에 탐닉하거나, 고대광실을 짓고 담장을 아로새기거나, 이 중에 한 가지 일만 있어도 요행히 망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內作色荒 外作禽荒 甘酒嗜音 峻宇彫牆 有一於此未或不亡〕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깨어진……파묻혔어라 :
국 가의 패망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진(西晉)의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져 나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는 낙양(洛陽) 궁문 앞에 서 있는 구리 낙타에 빗대어 탄식하기를이제 곧 너도 가시나무 덤불 속에 파묻히겠구나.〔會見汝在荊棘中耳〕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0 索靖列傳》
[주D-004]조룡대(龍臺) :
나 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용의 조화로 구름과 안개가 끼어 방향을 구분할 수 없자 미끼로 유인하여 용을 낚아 올렸다는 곳으로 부여 백마강(白馬江)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가정집》 권5〈주행기(舟行記)〉에 나와 있다.

 

 

 

 

금내(禁內)의 제생(諸生)과 함께 자하동(紫霞洞)에서 노닐며 차운하다

 


초당에 잠에서 깨어나니 낙화가 한가롭고 / 草堂睡起落花閑
주렴을 걷으니 남북으로 청산이 즐비하네 / 卷簾南北多靑山
청산이 나를 비웃나니 방에만 틀어박혀 / 靑山笑我不出門
오똑 앉아 문자 속에서 세월을 보낸다고 /
兀兀窮年文字間
하지만 장안 만가에 어디 갈 곳이 있던가 / 長安萬家無所適
고문엔 죽어도 내 얼굴 숙이고 싶지 않은걸 / 肯向高門低我顔
산중에서 노닐다니 이 어이 된 저녁인고 / 山中之遊是何夕
계석에 달각달각 울리는 나막신 소리로세 / 屐齒
䃘䃘響溪石
시호는 다시 옥당의 현재를 만났나니 / 詩豪更値玉堂賢
팔두 문장이 옛사람을 뛰어넘는다오
/
八斗文章超古昔
푸른 석벽 기어올라 오늘의 놀이를 새겨 둘 일 / 須攀翠壁記玆遊
내일 아침엔 예전처럼 홍진객 되어 있으리니 / 明朝依舊紅塵客

 

[주D-001]오똑……보낸다고 : 참고로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독서와 저술을 하느라고등잔불을 밝혀 낮을 이으면서 항상 오똑 앉아 세월을 보내곤 하였다.〔焚膏油以繼晷 恒兀兀以窮年〕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시호(詩豪)는……뛰어넘는다오 :
당 나라의 백거이(白居易)가 유우석(劉禹錫)을 시호(詩豪)로 추천하고 그의 시를 무척 아꼈다. 한번은 유우석이 백거이의 집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금릉 회고(金陵懷古)의 시를 지었는데, 백거이가 그의 시를 보고는 물속에서 졸고 있는 여룡(驪龍)의 턱 아래 구슬을 얻었다고 극찬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비늘이나 발톱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송나라의 소식(蘇軾)이 하양현(河陽縣)의 읍재(邑宰)로 있는 벗 성교(盛僑)를 진()나라의 반악(潘岳)에 비유하면서 지은 시에백거이가 시호라고 추천한 유우석 같은 이도 오늘은 그야말로 진나라의 반악과 같은 성교와 자리를 함께하는 바람에, 반악이 하양현에 가득 심어 놓은 꽃나무만 부질없이 보게 되었구나.〔詩豪正値安仁在 空看河陽滿縣花〕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다. 안인(安仁)은 반악의 자이다. 《蘇東坡詩集 卷12 次韻孫巨源寄漣水李盛二著作幷以見寄五絶》 지금 가정의 이 구절 역시 동파의 이 시를 염두에 두고서시호가 오늘은 다시 동방에 있는 옥당의 현재(賢才)를 만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현재는 옛사람을 능가하는 팔두 문장(八斗文章)의 소유자이다.”라는 뜻으로 익살을 부려서 표현한 것이다. 팔두 문장은 삼국 시대 위()나라 조식(曹植)과 관련된 고사이다. 남조 송나라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천하의 글재주가 모두 합쳐서 한 섬이라면, 조자건 혼자 여덟 말을 차지하고, 나는 한 말이요, 나머지 한 말을 천하 사람들이 나누어 갖고 있다.〔天下才有一石 曹子建獨占八斗 我得一斗 天下共分一斗〕라고 말한 일화가 《석상담(釋常談)》에 실려 있다. 자건(子建)은 조식의 자이다.

 

 

 

 

이생(李生)의 운을 써서 용두사(龍頭寺)의 노승에게 부치다

 


서원엔 단지 용두사 하나 있는데 / 西原只有龍頭寺
용두사 늙은 시인은 선비와 중의 중간 / 龍頭詩老釋儒間
내 걸음 마침맞게 꽃 피는 시절이라 / 我行正値花時節
진기한 새들 짹짹 봄 산을 울리누나 / 珍禽磔磔鳴春山
청삼 입은 벗님 역시 풍류객이라 / 靑衫故人亦好事
셋이 만나 웃으며 찌든 얼굴 폈다오 / 邂逅三笑開塵顔
낮 시간 내내 고담준론에 실컷 마신 술 / 高談劇飮白日永
누가 다시 말하리오 서생은 따분하다고 / 何人更道書生寒
스님이여 말없이 떠난다 나무라지 마오 / 師乎勿誚不告別
산꽃 지기 전에 내 꼭 돌아오리이다 / 山花未落吾當還

 

 

 

 

진주(眞州) 중대사(中臺寺)의 고장로(古長老)와 작별하며 남겨 준 시

 


두타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우리 스님 / 上人不出頭陀山
마음의 자취 수운과 같아 맑고 한가하기만 / 水雲心迹淸且閑
내 가끔 왕래하며 솔 대문을 찾았소만 / 我時杖屨扣松關
돌길이 험난해서 어찌나 오르기 어려운지 / 石逕犖确難躋攀
인간 세계 아닌 장관이 열 하고도 넷 / 雄觀十四非人寰
전현의 걸출한 시가 벽 사이에 남아 있네 / 前賢傑句留壁間
시내 다리 저녁 햇빛 떠나기 아쉽소만 / 溪橋夕照離思艱
속세의 인연 남아서 내 부끄럽소이다 / 俗緣未盡吾何顔
누대에 오른 뒤로 어느새 두 달이 훌쩍 / 登樓不覺月再彎
죽서루의 풍경이 감쪽같이 날 속여서 / 竹西風景欺我頑
그동안 돌아갈 꿈도 꿀 수 없었다오 / 邇來歸夢不可扳
불러도 안 돌아보리라 총총히 말에 오르오만 / 悤悤上馬呼不還
춘풍에 이별의 눈물 보일까 그것이 걱정이오 / 只恐春風別淚潸

 

[주C-001]진주(眞州) : 삼척(三陟)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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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12권 번역   (0) 2010.01.13
가정집 제11권 번역   (0) 201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