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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가 사예교위(司隸校尉) 왕존(王尊)을 문책하여 강등시킨 조서(詔書)를 모의(模擬)하여 지어 본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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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일어난 지 장차 200년이 되려고 한다. 세종황제(世宗皇帝 무제(武帝)의 묘호(廟號)) 이후로 예문(禮文)이 차츰 갖추어졌으나, 기강이 무너진 탓으로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선황제(先皇帝 원제(元帝)) 께서 또 아랫사람들을 관대하고 인후한 덕으로 대하고 엄단하는 것을 중난(重難)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간사한 자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중에서도 석현(石顯)이 특히 권세를 제 마음대로 휘두르다가 죄악이 가득 차고 쌓여서 지금 이미 하늘의 주벌을 받았다.
사예교위(司隷校尉)가 승상과 어사에 대해서 석현이 전횡(專橫)했을 당시 그 죄상을 아뢰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하는 주문(奏文)을 올렸다. 논리상으로는 그럴듯하기도 하다마는, 짐(朕)이 당시에 저위(儲位 태자의 지위) 에 있으면서도 그를 두려워하여 곁눈질하면서 아무리 분해도 한마디 말도 못 하였는데, 승상과 어사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사예의 말은 선제(先帝)의 허물을 드러내고 짐의 단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왕존을 조정에서 내보내 고릉령(高陵令)으로 삼도록 하라.
[주C-001]왕존(王尊) : 자 (字)는 자공(子贛)으로 탁군(涿郡) 사람이다. 원제(元帝) 때 안정 태수(安定太守)로 발탁된 뒤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서 그 위엄이 군중(郡中)에 진동하였다. 익주 자사(益州刺史)와 동평상(東平相)으로 있다가 면직된 뒤에 대장군(大將軍) 왕봉(王鳳)에게 발탁되어 사예교위(司隸校尉)가 되었다. 성제(成帝)가 즉위한 초기에, 승상(丞相) 광형(匡衡) 등이 원제 때에 위세를 부린 중서령(中書令) 석현(石顯)에게 아부했다는 내용으로 탄핵했다가, 공경(公卿)을 모욕했다는 죄에 걸려 강등의 처벌을 받고 고릉령(高陵令)으로 좌천되었다. 《漢書卷76 王尊傳》
정문(程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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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 양진(楊震)의 두 아들을 낭(郞)에 임명한 조서를 모의하여 지어 본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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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듣건대, 군자와 소인의 관계는 천지 음양의 변화처럼 번갈아 성쇠를 거듭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인주(人主)로서는 이를 잘 살펴서 대처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치란(治亂)의 기틀이 된다고 하였다.
우리 고황제(高皇帝)의 창업과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의 묘호(廟號)) 의 중흥도 그 도는 다른 것이 없었으니, 바로 이 점을 잘 살펴서 행한 것일 뿐이었다. 창업한 그 뒤로 문제(文帝), 경제(景帝), 무제(武帝), 선제(宣帝)는 이 도를 준행하여 잃어버리지 않았던 데에 반해서, 원제(元帝)와 성제(成帝) 이후로는 소인의 도가 자라나게 한 나머지 신망(新莽)의 화를 빚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중흥한 그 뒤로 거울로 삼아서 경계해야 할 선례가 바로 앞에 있었으므로, 영평(永平 명제(明帝)의 연호)과 건초(建初 장제(章帝)의 연호) 의 정사를 보면 선왕(先王)의 발자취를 제대로 잇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외척과 환관이 서로 선동하며 정권을 장악하고는 충량한 신하를 위해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군자의 도가 소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고(故) 태위(大尉) 양진은 젊어서부터 유행(儒行)으로 관서(關西)에서 명망이 높았다. 지방의 관원으로 있을 때에는 염근(廉謹)하였고 조정에 있을 때에는 강직하여 대신의 절조가 있었다. 간신을 미워하면서도 처형하지 못하고, 총애받는 여인을 혐오하면서도 금단하지 못하자, 안색을 바로 하고 곧게 발언하면서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꾸로 빈척(擯斥)을 당하게 되자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으니, 짐이 몹시 안타깝게 여기면서 매우 사모하는 바이다.
아, 덕을 숭상하고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은 선왕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던 바이다. 이에 양진의 사자(嗣子)인 모(某)와 모를 발탁하여 모관(某官)으로 삼고, 100만 전(錢)을 내려 집안을 구휼함으로써 그의 충직함을 표창하는 바이니, 그대들은 부디 부친의 유업을 힘써 지켜서 짐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주C-001]양진(楊震) : 자 가 백기(伯起)라서, 유자들로부터 ‘관서공자(關西孔子) 양백기(楊伯起)’라는 칭호를 얻었다.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외방에서 태수로 전전하다가 안제(安帝) 원초(元初) 연간에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와 태복(太僕)과 태상(太常)이 되었으며, 영녕(永寧) 원년(120)에 사도(司徒)가 되고, 연광(延光) 2년(123)에 태위(太尉)가 되었다. 외척과 환관의 발호를 막기 위해 무진 애를 쓰다가 오히려 참소를 받고 면직되자 분개하여 음독자살하였다. 그 뒤 순제(順帝)가 즉위하여 환관 번풍(樊豊) 등을 복주(伏誅)하고 양진을 후하게 예장(禮葬)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그의 두 아들을 낭(郞)에 임명하였다. 《後漢書卷54 楊震列傳》
[주D-001]신망(新莽) : 서한 말에 권력을 찬탈하고 국호를 신(新)으로 고친 왕망(王莽)을 말한다.
[주D-002]간신을 …… 못하자 : 양 진이 자결하기 전에 비분강개하여 문인들에게 말한 내용 중에 “간신이 교활하게 구는 것을 미워하면서도 처형하지 못하였고, 총애받는 여인이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면서도 금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일월을 보겠는가.〔疾姦臣狡猾而不能誅惡嬖女傾亂而不能禁 何面目復見日月〕”라는 말이 나온다. 간신은 경보(耿寶)ㆍ염현(閻顯) 등 외척과 이윤(李閏)ㆍ번풍(樊豊) 등 환관을 가리키고, 총애받는 여인은 안제(安帝)의 유모인 왕성(王聖)을 가리킨다.
응거시책(應擧試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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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라.
옛날에 태 공(太公)이 제(齊)나라를 다스릴 적에 현능(賢能)한 자를 등용하고 공(功)을 숭상하였으므로 뒤에 정권을 쟁탈하는 재앙이 있게 되었고, 주공(周公)이 노(魯)나라를 다스릴 적에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게 하였으므로 결국 점차로 쇠약해지는 걱정이 있게 되었다. 현능한 자를 등용하고 공을 숭상한 것이나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게 한 것은 모두 선정(善政)에 속한다. 그런데 말류의 폐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주공처럼 성스럽고 태공처럼 지혜로운 이도 미연에 그 폐단을 방지할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두 나라의 풍속을 그대로 따라서 다스리려고 하다 보니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인가? 부자(夫子)는 “제나라를 한 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 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풍속을 바꾸고 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 어찌 방법이 없겠는가?
답변드립니다.
제가 듣건대,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정치는 민간의 풍속을 참작해서 개혁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여 교화를 베푼다.”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현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어찌 한 가지뿐이겠습니까. 혹은 풍속의 후박의 차이를 관찰하기도 하고 혹은 교화의 난이의 정도를 살피기도 해서, 가르침을 베풀어 인도하고 정책을 세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태공이 제나라를 다스릴 적에 현능한 자를 등용하고 공을 숭상한 것이나, 주공이 노나라를 다스릴 적에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게 한 것은 모두 시대에 맞게 변화할 줄을 알았던 선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가득 차면 이지러지고 오래 지속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류의 폐단이 어쩔 수 없이 생겨서, 제나라에는 권력을 쟁탈하는 화가 있게 되었고 노나라에는 점차로 쇠약해지는 걱정이 있게 된 것입니다. 주공(周公)의 원성(元聖)과 태공(太公)의 대지(大智)로도 그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없었느냐고 물으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두 나라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답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개 현능한 사람을 오직 보배로 여긴다고 하였고, 공을 힘쓰는 자에게 상을 주어 장려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현능한 사람을 등용하고 공을 숭상하는 것이야말로 선왕(先王)이 소중하게 여긴 바이니, 태공이 이를 급선무로 삼았던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고 자기의 공을 자랑하다 보면 처음에는 근실하다가도 나중에는 태만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시하고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방벽(放辟)하고 사치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고, 방벽하고 사치하는 풍조가 계속되어 점점 치성해지면 내부에서 붕괴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권력을 쟁탈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나라는 후대에 쇠퇴하여 패도로 전락한 가운데, 위로는 환공(桓公)과 공자(公子) 규(糾)가 나라를 쟁탈하는 죄에 빠지게 되고, 아래로는 무지(無知)와 전화(田和)가 찬탈하고 방축(放逐)하는 모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도리를 세우되 친한 이로부터 하며, 공경의 도리를 세우되 어른으로부터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게 하는 것이야말로 성인이 힘쓴 바이니, 주공(周公)이 이를 급선무로 삼았던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친하게 여겨야 할 대상에 대해서 버릇없이 굴고 어른으로 여겨야 할 대상에 대해서 무례하게 대한 나머지 점점 불경(不敬)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릇없이 굴고 무례하게 대하는 마음이 생기면 업신여기고 거드름 부리는 폐단이 일어나게 되고, 업신여기고 거드름 부리는 폐단이 계속되어 점점 고질화되면 물고기가 썩어 문드러지고 담장이 무너져 내리듯 형세가 미약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나라는 후대에 마치 철류(綴旒)하는 것처럼 위태로워진 가운데, 처음에는 삼가(三家)가 권력을 독점하더니 나중에는 배신(陪臣 가신(家臣))이 국명(國命)을 쥐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런 까닭에 주공이 일찍이 태공에게 “제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태공이 “현능한 자를 등용하고 공을 숭상하겠다.”라고 하자, 주공이 “후세에 반드시 찬탈하는 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그러고 보면 제가 앞에서 말한 “과시하고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방벽하고 사치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태공도 본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태공이 주공에게 “노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주공이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게 하겠다.”라고 하자, 태공이 “후세에 반드시 점진적으로 쇠약하게 되는 걱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그러고 보면 제가 앞에서 말한 “버릇없이 굴고 무례하게 대하는 마음이 생기면 업신여기고 거드름 부리는 폐단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공도 본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두 분 공의 말씀이 은미한 곳까지 환히 밝히면서 장래의 환란을 염려한 것이 지극하다고도 하겠지만, 후대에 권력을 쟁탈하고 점차로 쇠미해지는 폐단을 빚게 된 것 역시 형세로 볼 때에는 자연적인 일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그 두 나라의 풍속을 따라서 다스림을 행해야 했기 때문에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자(夫子)는 “제나라를 한 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 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풍속을 바꾸고 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 어찌 방법이 없겠습니까. 대저 공자(孔子)의 이 말은, 두 나라의 풍속에 비록 미악(美惡)의 차이가 있다고는 할지라도, 그 풍속을 바꾸는 도에 난이의 정도가 다르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공자의 본의는 필시 “풍속은 교화에 달려 있으니, 이는 마치 이금(泥金)이 도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과 같다. 그릇이 좋고 나쁘게 되는 것이 장인의 솜씨가 훌륭하냐 졸렬하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풍속이 아름답고 그렇지 못한 것도 교화를 잘 펼치느냐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하는 것일 겁니다.
지금 만약 그 까닭을 알아보고 그 유래를 살펴본 다음에, 염치의 도리를 가지고 그들을 바로잡는다면 권력을 쟁탈하는 재앙이 어떻게 일어날 것이며, 애경(愛敬)의 도리를 가지고 그들에게 보여 준다면 업신여기고 거드름 부리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공자가 바꾸려고 한 본뜻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제나라와 노나라의 후세에 참으로 이러한 방법을 적용해서 시행했더라면, 풍속의 폐단이 바로잡혀서 누구 하나 처벌하지 않고도 변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요, 하루아침을 마치지 않고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제하고 변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듣건대,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성인으로서도 어렵게 여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류의 폐단으로 말하면 제나라나 노나라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고, 하(夏)나라나 상(商)나라, 주(周)나라나 한(漢)나라의 말엽을 보면 모두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경(詩經)》에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으나, 끝까지 제대로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삼 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현능한 자를 등용하고 공을 숭상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의리를 돈독히 하는 가운데, 중도를 붙잡고 화기(和氣)를 펼치면서 시의에 맞게 정치를 행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28세(世)를 전하고 400여 년을 거치는 동안 바꿔야 할 풍속이 있지 않고 구제해야 할 폐단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사(執事)께서 제나라와 노나라의 일을 가지고 힐문을 하시니,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의 과거의 일을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화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이상과 같이 답변드리는 바입니다.
[주D-001]태공(太公)이 …… 되었다 : 송 (宋)나라 소철(蘇轍)의 상론(商論)에 “태공이 제나라에 봉해진 뒤에 현능한 자를 높이고 공을 숭상하자, 주공이 ‘후세에 반드시 찬탈하고 시역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공이 노나라를 다스릴 적에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게 하자, 태공이 ‘후세에 점진적으로 쇠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저 현능한 자를 높이고 공을 숭상하는 것은 강에 가깝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는 것은 약에 가깝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제나라에 전씨의 재앙이 내부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노나라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맹주의 명령을 받고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太公封於齊 尊賢而尙功 周公曰 後世必有簒弑之臣周公治魯親親而尊尊 太公曰 後世寖衰矣 夫尊賢尙功 則近於强 親親尊尊 則近於弱 終之齊有田氏之禍 而魯人困於盟主之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부자(夫子)는 …… 하였다 :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온다.
[주D-003]정치는 …… 한다 : 《서경(書經)》 필명(畢命)에 “세도(世道)는 때에 따라 오르고 내리는 현상이 있다. 따라서 정치는 그 시대의 민간의 풍속을 참작해서 개혁해야 한다.〔道有升降政由俗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백성의 …… 베푼다 : 《주역(周易)》 관괘(觀卦) 상(象)에 “선왕이 이 관괘를 보고서, 사방을 순행하며 두루 살피고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여 교화를 베풀었다.〔先王以 省方觀民 設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현능한 …… 여긴다 : 《서경》 여오(旅獒)에 “먼 곳의 물건을 보배로 여기지 않으면 먼 곳의 사람이 귀의할 것이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오직 현능한 사람이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안정될 것이다.〔不寶遠物 則遠人格 所寶惟賢 則邇人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공을 …… 장려한다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덕을 힘쓰는 자에게는 관직을 주어 장려하고, 공을 힘쓰는 자에게는 상을 주어 장려한다.〔德懋懋官 功懋懋賞〕”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환공(桓公)과 공자(公子) 규(糾) : 공 자 규는 춘추 시대 제 양공(齊襄公)의 아우이다. 환공은 이름이 소백(小白)으로, 공자 규의 아우라는 설과 양공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황음무도한 양공을 피해 두 사람 모두 국외에 망명해 있다가, 공손무지가 양공을 시해하고 혼자 즉위했다가 살해당하자, 각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왕위 쟁탈전을 벌인 끝에, 소백이 승리하여 공자 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주D-008]무지(無知)와 전화(田和) : 무 지는 제 양공을 시해한 공손무지를 가리킨다. 제 환공 때에 진 여공(陳厲公)의 아들 전완(田完)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환대를 받았는데, 그의 후손인 전상(田常)이 제 간공(齊簡公)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전상의 증손인 전화 때에 이르러 천자의 승인을 받고서 정식으로 제후가 되었다.
[주D-009]사랑의 …… 한다 : 《서경》 이훈(伊訓)에 “사랑의 도리를 세우되 친한 이로부터 하며, 공경의 도리를 세우되 어른으로부터 하여, 집과 나라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해에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立愛惟親 立敬惟長 始于家邦 終于四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철류(綴旒) : 깃술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임금이 권위를 잃고 신하에게 끌려 다니는 것을 말한다.
[주D-011]삼가(三家) :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인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의 세 집안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모두 노 환공(魯桓公)의 후손이기 때문에 삼환(三桓)이라고도 한다.
[주D-012]시작이 …… 드물다 : 《시경》 대아(大雅) 탕(蕩)에 나온다
향시책(鄕試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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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라.
재용의 영허(盈虛)와 호구의 증감은 바로 왕정의 득실의 단초가 되고 국체(國體)의 안위의 근본이 되니, 국가를 다스리는 자로서는 깊이 생각해야 마땅한 일이다.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 다스린 것을 보면, 백성들에게서 거두는 것이 십일(什一 십분의 일을 징수하는 것)의 세법(稅法)에 불과하였지만, 이것을 가지고 군국의 수요를 충당함에 재용이 항상 여유가 있었고, 백성의 구역을 정하는 것이 인보(隣保 이웃이 보증을 서게 하는 호적 편제)의 제도에 불과하였지만, 이것을 가지고 공가(公家)의 사업에 복무하게 함에 호구가 날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쇠한 세상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에게서 과반수의 세금을 징수하고 관시(關市)와 산택(山澤)의 부세(賦稅)를 거두었는데도 재용이 항상 부족하였고, 관애(關隘)를 방수(防守)하는 법령과 잡아서 신문하고 형벌로 엄금하는 법령을 두었는데도 호구는 갈수록 감소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 저 천하의 재물은 반드시 일정한 수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재물이 관청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을 수밖에 없으니, 재물이 출입한다 하더라도 항상 관청과 백성 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재용이 고갈되면 상하가 동시에 모두 부족한 현상을 보이니, 그렇다면 이와 같은 때에 천하의 재물은 도대체 어느 곳에 모여 있다는 말인가?
사해의 백성도 일정한 수가 있다. 병혁(兵革)과 기근과 사망을 제외하면, 사해의 백성이 비록 흩어져 유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는 것일 뿐이요, 백성들이 떠돌며 우거(寓居)하는 것도 국경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호구가 피폐해지는 때를 당해서는 여기나 저기나 동시에 모두 줄어드니, 그렇다면 이와 같은 때에 사해의 백성은 도대체 어느 곳에 흩어져 있다는 말인가?
만약 재물과 백성의 소재를 안다고 한다면, 장차 무슨 방법을 써서 그 재물을 꺼내어 상하 모두 풍족하게 할 것이며, 장차 무슨 방법을 써서 그 백성들을 모아 호구를 다시 온전하게 만들 것인가?
역 대의 재용과 호구의 액수는 사책(史冊)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는데, 시대마다 그 액수가 각기 다른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수(隋)와 당(唐)의 경우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수나라 고조(高祖)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처음에는 호구가 400여 만이었는데, 양제(煬帝)의 대업(大業) 5년(609)에 이르러서는 무려 890여 만으로 증가하였고 부고(府庫)의 재물도 흘러 넘쳤으니, 한(漢) 이래로 이와 같이 번성한 적은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함에 미쳐서는, 고조(高祖)로부터 고종(高宗) 2년(651)에 이르는 사이에 호구가 무려 380여 만으로 감소되었으므로, 태종(太宗)도 수나라의 융성에 대해서 탄복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수나라는 고조로부터 대업 5년까지 불과 30여 년 동안에 양제의 사치 생활이 극에 달했는데도 그토록 융성하였고, 당나라는 고조로부터 고종 2년까지 역시 불과 30여 년 동안에 태종이 근검하며 선정을 베풀었는데도 이토록 감소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당나라는 오래도록 유지된 데 반해서, 수나라는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망하고 말았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장구한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용과 호구만 믿을 수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성(全盛)의 기틀을 지키면서 무궁한 기업을 향유하려면 과연 무엇을 힘써야 하겠는가? 만약 선을 행하면 다스려지고 악을 행하면 망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진부하고 천박한 언론이 되고 말 것이다. 제생(諸生)은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논을 표출하여 마음을 다해서 답변하도록 하라.
답변드립니다.
제가 재주는 없어도 나름대로 세상의 정치에 관심을 두고서, 왕정(王政)의 득실의 단초와 국체(國體) 안위의 근본에 대해서 일찍이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궁구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우(師友)와 이 문제에 대해서 강론할 때에는 그저 선을 행하면 다스려지고 악을 행하면 망한다고 말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 생각에 이런 말은 대체적인 개략이라고 할 수 있을 뿐, 정치를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반드시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사(執事)께서 재용의 영허(盈虛)와 호구의 증감(增減)이야말로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라고 전제한 뒤에, 성왕(聖王)의 정치와 쇠한 세상의 폐단 및 숨어 있는 재물을 꺼내어 쓰는 방법과 흩어진 백성을 모으는 방법을 문의하고, 마지막으로 수당(隋唐)의 일과 나라를 향유하는 도에 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이는 제가 평소에 강론해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니,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답변드리지 않겠습니까.
집사 께서는 “삼대(三代)의 성왕이 다스린 것을 보면, 백성들에게서 거두는 것이 십일(什一)의 세법에 불과하였지만, 이것을 가지고 군국(軍國)의 수요를 충당함에 재용이 항상 여유가 있었고, 백성의 구역을 정하는 것이 인보(隣保)의 제도에 불과하였지만, 이것을 가지고 공가(公家)의 사업에 복무하게 함에 호구가 날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쇠한 세상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에게서 과반수의 세금을 징수하고 관시(關市)와 산택(山澤)의 부세를 거두었는데도 재용이 항상 부족하였고, 관애(關隘)를 방수(防守)하는 법령과 잡아서 신문하고 형벌로 엄금하는 법령을 두었는데도 호구는 갈수록 감소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듣건대, 선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백성에게 거두는 데에 제도가 있고 백성을 부리는 데에 법도가 있었는데, 쇠한 세상에 이르러서는 이것과 모두 거꾸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릴 적에는 모든 일을 공경히 행하여 믿을 수 있게 해야 하며, 씀씀이를 절도 있게 하여 백성을 사랑해야 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게 해야 한다.〔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라고 하였습니다. 제후가 다스리는 천승의 나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천하를 다스리는 법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 개 모든 일을 공경히 행하여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의 대강(大綱)이라고 할 것입니다. 삼대의 성왕이 백성에게 거둘 때에 중용의 도에 맞는 제도를 수립하여 천하 후세로 하여금 그 법을 본받게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십일의 세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보다 많게 하면 폭군 걸의 방법이 되고, 이보다 적게 하면 맥국(貉國)의 방법이 된다.〔多則桀 寡則貉〕”라 고 한 것이니, 백성의 이해관계가 여기에 매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참으로 씀씀이를 절도 있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게 하여 정사를 행하면서, 반드시 공경히 행하여 반드시 믿을 수 있게만 한다면, 재용에 어찌 영허(盈虛)의 현상이 있겠으며, 호구에 어찌 증감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주(周)나라가 쇠미해지면서 춘추 시대에 돌입하고 다시 춘추 시대에서 전국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이에 성을 다투고 땅을 다투느라 날마다 서로 공격하며 전쟁을 하다 보니 재용이 부족해지면서 백성의 생활이 각박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십분의 이를 받아도 부족하다.〔二猶不足〕”는 노(魯)나라 애공(哀公)의 말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상앙(商鞅)의 주장이 진(秦)나라에 채용되면서 정전법(井田法)이 폐지되고 천맥법(阡陌法)이 실시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선왕의 제도가 땅을 쓸어버린 듯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는데, 비록 한때 부국강병의 효과는 거두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만세토록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좀먹는 원천을 열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유폐가 과반수의 세금을 징수하고 관시(關市)와 산택(山澤)의 이익을 독점한 뒤에야 그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비록 관애(關隘)를 설치하여 방수(防守)하고 날마다 잡아서 신문하며 형벌로 엄금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어떻게 유망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호구가 어떻게 감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장차 떠나 너를 버리고, 저기 낙토로 향해 가리라. 아 저 낙토에 가면, 내가 살 곳이 있으리로다.〔逝將去汝 適彼樂土 樂土樂土 爰得我所〕”라고 한 것도 이런 사정을 노래한 것입니다.
집 사께서는 “천하의 재물은 반드시 일정한 수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재물이 관청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을 수밖에 없으니, 재물이 출입한다 하더라도 항상 관청과 백성 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재용이 고갈될 때에는 상하가 동시에 모두 부족한 현상을 보이니, 그렇다면 이와 같은 때에 천하의 재물은 도대체 어느 곳에 모여 있다는 말인가? 사해의 백성도 일정한 수가 있다. 병혁과 기근과 사망을 제외하면, 사해의 백성이 비록 흩어져 유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는 것일 뿐이요, 백성들이 떠돌며 우거하는 것도 국경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호구가 피폐해지는 때를 당해서는 여기나 저기나 동시에 모두 줄어드니, 그렇다면 이와 같은 때에 사해의 백성은 도대체 어느 곳에 흩어져 있다는 말인가? 만약 재물과 백성의 소재를 안다고 한다면, 장차 무슨 방법을 써서 그 재물을 꺼내어 상하 모두 풍족하게 할 것이며, 장차 무슨 방법을 써서 그 백성들을 모아 호구를 다시 온전하게 만들 것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듣건대, 성왕의 제도는 토지의 광협(廣狹)을 헤아려서 부세(賦稅)의 다과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는 토지를 주어 백성을 거주하게 하고, 아래에서는 백성이 부세를 내었으니,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있는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후세에 비록 향수(鄕遂 행정구역 명칭) 에서 실시하던 정전(井田)의 세법을 폐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토지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비록 순박하고 각박한 풍속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백성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 사이에 가혹하게 마구 거두어들이는 신하들이 경쟁적으로 이굴(利窟 세원(稅源))을 개발해서 다투어 선여(羨餘)를 바치곤 하는데, 다만 자기들끼리 계획을 세워서 교묘하게 취하는 까닭에, 범상한 군주의 처지에서는 그러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유능하다고 인정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 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이 이런 내용으로 신법(新法)의 폐해를 논하면서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의 간계(姦計)를 분쇄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재물은 실로 일정한 수가 있고 사해의 백성은 실로 일정한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런데 간혹 천하가 어지러워지면서 전쟁이 잇따르고 기근이 거듭될 경우에는, 토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 나머지 재용이 감소되고 호구도 이에 따라 피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는 재용이 물론 감소되고 호구도 물론 피폐해지겠습니다만, 그런 와중에서도 일정한 수는 어느 때나 반드시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만약 재리(財利)를 좋아하는 경우에는 재물이 위에 모여서 관청에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물이 아래에 분산되어 백성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재물이 출입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관청과 백성의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관청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나라는 당연히 부유해야 할 텐데 항상 재용이 부족한 걱정이 있고, 백성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그 백성은 당연히 풍족해야 할 텐데 일정한 생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탄식이 있으니, 그렇다면 재물이 도대체 어느 곳에 모여 있단 말입니까.
저는 이렇게 되는 까닭이, 법도 없이 취하고 절제 없이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산림을 아무리 울창하게 가꿔도 산불이 계속해서 발생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강과 바다의 물이 아무리 많아도 밑 빠진 독을 계속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수량이 정해져 있는 재물을 가지고 한이 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서, 상하가 모두 부족하지 않게 되려고 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재물을 잘 쓰는 자는 천하에 보관해 두기 때문에 어느 때 취하든 언제나 풍족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자(有子)가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 혼자 부족한 채로 남겨지지 않을 것입니다.〔百姓足君孰與不足〕”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잘 쓰지 못하는 자는 천하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의 소유로 간주하고는 쓸데없는 곳에 쌓아 두고서 긴급하지 않은 용도에 허비하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심한 경우에는 은상(恩賞)을 아껴서 장사(將士)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양곡을 내주지 못하게 금지하여 서민의 마음을 분노하게도 하면서, 남모르게 구체(狗彘)의 먹이로 소비하기도 하고, 암암리에 비빈(妃嬪)을 기르는 데에 소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풍교(風敎)가 무너지고 습속이 사치해진 나머지 서인이 황제의 복장을 착용하기도 하고 창우가 황후의 복식으로 치장하는 지경이 되어, 끝내는 천하의 재물이 고갈되면서 화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傳)에 “인자는 재물로 몸을 일으키는 반면에, 불인한 자는 몸으로 재물을 일으킨다.〔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재물이 제왕의 궁중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호구가 피폐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 리고 사해(四海)의 백성도 이미 정해진 숫자가 있습니다. 천하가 각 나라로 분열되어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남쪽 나라에서 북쪽 나라로 가거나 동쪽 나라에서 서쪽 나라로 가거나 금제(禁制)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기 낙토로 향해 가겠다.〔適彼樂土〕”라는 노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천하가 하나로 통합되어 진(秦)나라가 되고 한(漢)나라와 진(晉)나라가 되고 수(隋)나라와 당(唐)나라가 되어서는 백성들은 단지 나라 안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갈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호구가 피폐해지면 이곳이나 저곳이나 동시에 똑같이 줄어드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재물이 있는 곳에 백성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대저 기한(飢寒)이 몸에 절박하면 비록 자부(慈父)라도 자기 자식을 교화시킬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임금과 백성의 관계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한이 몸에 절박하면 약자는 남의 머슴살이를 하고 강자는 도적이 되는 등, 어떻게 해서든 살아갈 길을 강구하면서 오직 이익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전(傳)에도 “백성이 있으면 이에 토지가 있게 되고, 토지가 있으면 이에 재물이 있게 된다.〔有人此有土 有土此有財〕”라고 하였고, 육 선공(陸宣公)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상하면 그 근본이 상하게 된다.〔民者邦之本 財者民之心 其心傷則其本傷〕”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이 있는데 백성이 없는 경우도 없다고 할 것이요, 재물이 없는데 백성이 있는 경우도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역(周易)》에서 “어떻게 백성을 모으는 것인가. 그것은 재물을 통해서이다.〔何以聚民 曰財〕”라 고 말한 것도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재물이 있는 곳에 백성이 있게 된다고 말한 것인데, 이를 말미암는다면 재물을 꺼내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요, 이를 말미암는다면 백성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니, 상하 모두 풍족하게 하고 호구를 다시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의심할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집사께서는 “역대의 재용과 호구의 액수는 사책에서 모두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수(隋)와 당(唐)의 경우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수나라 고조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처음에는 호구가 400여 만이었는데, 양제(煬帝)의 대업(大業) 5년에 이르러서는 무려 890여 만으로 증가하였고 여기에 또 부고(府庫)의 재물도 흘러넘쳤으니, 한(漢) 이래로 이와 같이 번성한 적은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함에 미쳐서는, 고조로부터 고종 2년에 이르는 사이에 호구가 무려 380여 만으로 감소되었고, 재용의 풍부한 면에서도 수나라를 따라갈 수가 없었으므로, 태종도 수나라의 융성에 대해서는 탄복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수나라는 고조로부터 대업 5년까지 불과 30년 동안에 양제의 사치 생활이 극에 달했는데도 그토록 융성하였고, 당나라는 고조로부터 고종 2년까지 역시 불과 30여 년 동안에 태종이 근검하며 선정을 베풀었는데도 이토록 감소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듣건대, 하늘〔天〕에 대해서 말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人〕의 일로 증거할 수가 있고, 과거〔古〕에 대해서 말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현재〔今〕의 일로 증거할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시험 삼아 천인(天人)과 고금(古今)의 이치를 가지고 한번 설명해 볼까 합니다.
대저 천하가 있은 이래로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 어지러워지고 한 번 성해지면 한 번 쇠해지곤 하였는데, 이는 시대의 운세에 따른 기운의 변화와 관련되는 것일 뿐입니다. 여름에는 더위가 극에 달하고 겨울에는 추위가 극에 달하는데, 봄과 가을이 그 두 계절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봄이 따뜻한 것은 더위가 닥칠 조짐이고, 가을이 서늘한 것은 추위가 닥칠 조짐인데, 이 조짐이 점점 확대되고 축적되어 더위와 추위의 극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번 추워지고 한 번 더워지는 현상이 끝없이 순환하는 것인데, 저 수와 당의 재용이 차고 비는 것이나 호구가 늘고 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 대(前代)의 일을 차례로 살펴보건대, 주(周)나라의 성대함이 극에 달했다가 산동(山東) 육국(六國)의 시대에 이르러 쇠미해졌고, 육국의 쇠미함이 극에 달했다가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 성대해졌습니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한(漢)나라로 옮겨 와서는, 문경(文景)의 시대에 이르러 천하의 부서(富庶 풍부한 물자와 많은 인구) 가 극에 달했는데, 무제가 그 엄청난 자본을 등에 업고서 무려 50여 년 동안이나 무력을 남용하며 멋대로 전쟁을 발동한 탓으로 그 뒤에는 재용이 고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위진(魏晉) 이후로는 해내(海內)가 조각조각 갈라지면서 천하의 쇠미한 현상도 동시에 극에 달했는데, 쇠미함이 극에 이르면 다시 성대해지는 것은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수나라 고조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초기에는 호구가 겨우 400여 만에 불과하였는데, 급기야 천하를 통일한 뒤에 조금 휴양(休養)하는 정책을 가하자 30년쯤 지나서는 그 수가 갑절로 증가하였으니, 이는 쇠미함이 극에 이른 당시의 형세에 편승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 양제(隋煬帝)의 사치 생활이 비록 극에 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성대함을 갑자기 바꿔서 쇠미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당 태종(唐太宗)이 비록 근검절약하며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그 쇠미함을 갑자기 바꿔서 성대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는 추위도 점차로 찾아오고 더위도 점차로 찾아오는 형세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차로 발전하여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의 시대에 이른 뒤에야 부서(富庶)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개원이 지나고 나서는 또다시 쇠미한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성쇠가 순환하는 것은 비록 백세가 지난 뒤에라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하를 잘 다스리려면 성쇠의 단서가 되는 현상을 잘 관찰해서 이에 대한 대책을 미리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극에 이른 뒤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는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천인(天人)과 고금(古今)의 설을 가지고 이에 대해서 답변드리게 된 것입니다.
집사께서는 “당나라는 오래도록 유지된 데 반해서, 수나라는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망하고 말았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장구한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용과 호구가 아무리 성하다 하더라도 그것만 믿을 수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성(全盛)의 기틀을 지키면서 무궁한 기업을 향유하려면 과연 무엇을 힘써야 하겠는가? 만약 선을 행하면 다스려지고 악을 행하면 망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진부하고 천박한 언론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듣건대, 옛날의 인군 중에는 사방 100리의 땅을 가지고 일어난 자도 있었고, 70리의 땅을 가지고 일어난 자도 있었으며, 또 1여(旅)의 사람과 1성(成)의 땅을 가지고 일어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해의 토지와 천하의 인구를 가지고 이른바 손바닥 위에서 운용하는 것과 같은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재용과 호구가 아무리 성해도 그것만 믿을 수는 없다고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재용이 만약 충분하지 못하고 호구가 만약 충분하지 못하다면, 아무리 계책을 잘 세우는 자라고 할지라도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도 잘못이지만,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잘못이니, 오직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나의 재용이 이미 풍족하고 나의 백성이 이미 번성하다. 재용이 풍족하고 백성이 번성한데, 천하에 무엇을 또 생각하고 무엇을 또 걱정하랴. 나는 나의 이목(耳目)과 심지(心志)의 욕망을 한껏 채우면서 나의 생애를 마치련다.”라고 생각하기만 할 뿐, 자기가 지금 재물을 모아 놓은 것이 남에게 건네주기에 마침맞게 되었다는 사실과, 자기가 지금 백성을 모아 놓은 것이 남에게 몰아주기에 적당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남의 자본으로 대 주기에 적격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용과 호구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의 맹점이라고 할 것이니, 수나라가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에 반해서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나의 재용이 이만하면 풍족하고 나의 백성이 이만하면 번성하다. 풍족한 데에서 예의(禮義)가 생기기도 하지만, 풍족한 그곳에서 교일(驕逸)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재물은 사람들 공동의 재물이니 내가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고, 백성은 하늘이 내려 준 백성이니 내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소한 물건 하나를 주고받을 때에도 반드시 자세히 살피고, 어떤 일 하나를 실행에 옮길 때에도 반드시 신중하게 하면서, 두려워하고 위태롭게 여겨 항상 예의를 힘쓰고 교일을 경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용과 호구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장점이라고 할 것이니, 당나라가 오래도록 유지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성(全盛)의 기틀을 지키면서 무궁한 기업을 향유하려면 이 두 가지를 자세히 살펴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반드시 십일(什一)의 세법(稅法)과 인보(隣保)의 제도를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 십일의 세법이나 인보의 제도는 반드시 정전법(井田法)을 복구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는 마치 결승(結繩)의 정사를 가지고 진(秦)나라의 혼란한 상황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고, 간척(干戚)의 무악(舞樂)으로 평성(平城)의 포위를 풀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오활한 주장 때문에 부유(腐儒)가 비평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당나라의 경우는 조용조(租庸調)의 법제가 정전법의 유의(遺意)에 근접하였고, 부위병(府衛兵)의 제도를 설치한 것이 농민에게 군병의 임무를 부과한 뜻과 비슷하였으며, 여기에 또 인의(仁義)로 교화해야 한다는 위징(魏徵)의 설이 당시에 조금 행해질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당나라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후세의 인주(人主)들은 이러한 경지에도 미칠 수 없었음은 물론이요, 이를 기꺼이 본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망해 버린 수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전성(全盛)의 기틀을 지키면서 무궁한 기업을 향유하려고 하는 자가 당 태종(唐太宗)의 도를 체득해서 행하기만 하더라도 그런대로 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집사께서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논을 표출해서 답변하라.” 하셨으므로, 감히 제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답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면 다스려지고 악을 행하면 망한다고 말하는 것이 진부한 말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요(大要)를 논한다면 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집사께서 재택(裁擇)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삼가 이상과 같이 답변드립니다.
[주D-001]관시(關市)와 산택(山澤)의 부세(賦稅) : 《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조(太宰條)에 아홉 종류의 부세(賦稅)가 나오는데, 그중에 관시지부(關市之賦)와 산택지부(山澤之賦)도 포함되어 있다.
[주D-002]천승(千乘)의 …… 한다 : 《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주D-003]이보다 …… 된다 : 《맹 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요순의 도보다 세금을 경감하고자 하는 자는 큰 맥국의 작은 맥국이요, 요순의 도보다 무겁게 하고자 하는 자는 큰 걸왕의 작은 걸왕이다.〔欲輕之於堯舜之道者 大貉小貉也 欲重之於堯舜之道者 大桀小桀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주희(朱熹)가 “10분의 1의 세법은 요순의 도이니, 이보다 많게 하면 폭군 걸의 방법이 되고, 이보다 적게 하면 맥국의 방법이 된다.〔什一而稅 堯舜之道也 多則桀寡則貉〕”라고 해설하였다. 맥(貉)은 오랑캐 부족의 이름이다.
[주D-004]십분의 …… 부족하다 : 노 나라 애공이 흉년이 들어 재용이 부족하다고 하자,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이 철법(徹法)을 쓰라고 권유하니, 애공이 10분의 2를 거두어도 부족하다고 불평하였는데, 이에 유약이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 혼자 부족한 채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이 부족하면 임금 혼자 풍족하게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주D-005]천맥법(阡陌法) : 천맥은 전답 사이에 있는 남북과 동서의 소로(小路)를 가리킨다. 상앙(商鞅)이 진 효공(秦孝公)에게 발탁된 뒤에 이 천맥을 없애는 일종의 경지 정리를 해서 토지 면적을 늘리고 새로운 세법을 적용하여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주D-006]장차 …… 있으리로다 : 《시경》 위풍(魏風) 석서(碩鼠)에 나온다. 석서는 큰 쥐라는 뜻으로, 가렴주구(苛斂誅求)하며 백성을 학대하는 위정자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7]선여(羨餘) : 부세 받고 남은 것이라면서 조정에 바치는 재물을 말한다.
[주D-008]인자(仁者)는 …… 일으킨다 :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10장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9]백성이 …… 된다 : 《대학장구》 전 10장에 나온다.
[주D-010]백성은 …… 된다 :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에 나온다. 선공은 당 덕종(唐德宗) 때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육지(陸贄)의 시호이다.
[주D-011]어떻게 …… 통해서이다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온다.
[주D-012]문경(文景) : 문 제(文帝)와 그 아들 경제(景帝)의 병칭인데, 이 시대에 죄수가 없어 감옥이 텅 비는 등 천하가 안정되었으므로, 주(周)나라 성왕(成王)과 그 아들 강왕(康王)의 이른바 성강(成康)의 시대와 함께 지치(至治)의 시대로 곧잘 일컬어지곤 한다. 《한서(漢書)》 권5 경제기 찬(景帝紀贊)에 “주나라는 성강을 운위하고 한나라는 문경을 말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周云成康漢言文景 美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옛날의 …… 있었으며 : 주 (周)나라 문왕(文王)과 상(商)나라 탕왕(湯王)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실제로는 무력을 행사하면서 형식적으로 인의를 가탁하는 자는 패자(覇者)이니, 패자는 반드시 대국을 소유해야 하겠지만, 덕을 위주로 인의를 행하는 이는 왕자(王者)이니, 왕자는 대국을 소유할 필요도 없다. 옛날에 탕왕은 사방 70리의 땅을 가지고 일어났고, 문왕은 100리의 땅을 가지고 일어났다.〔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 湯以七十里 文王以百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4]1여(旅)의 …… 있었습니다 : 하 (夏)나라 소강(小康)을 가리킨다. 사방 10리의 땅을 성(成)이라고 하고, 500명을 1여(旅)라고 한다. 소강이 1성과 1여를 가지고 과(過)와 과(戈)라는 나라를 무찌르고 우왕(禹王)의 기업을 중흥했다는 기록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원년에 나온다.
[주D-015]자기가 지금 재물을 …… 사실 : 《맹 자》 이루 상(離婁上)의 “못을 위해서 고기를 몰아주는 것은 수달이요, 숲을 위해서 참새를 몰아주는 것은 새매요, 탕왕과 무왕을 위해서 백성을 몰아주는 자는 걸왕과 주왕이다.〔爲淵敺魚者獺也 爲叢敺爵者鸇也 爲湯武敺民者桀與紂也〕”라는 논리를 원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D-016]결승(結繩)의 정사 : 문 자가 없던 태고 시대에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부호를 삼아서 행했던 소박한 정치 형태를 말한다. 신농씨(神農氏)가 이 결승의 정사를 행하다가, 복희씨(伏羲氏) 때에 이르러 팔괘를 긋고 나무에 새긴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서 서계(書契)의 정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와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보인다.
[주D-017]간척(干戚)의 무악(舞樂) : 방 패와 도끼를 들고 추는 춤을 말하는데, 인덕(仁德)으로 교화하여 심복시킬 때의 비유로 쓰인다. 순(舜) 임금의 신하인 우(禹)가 남방의 복종하지 않는 유묘씨(有苗氏)를 정벌하려고 하자, 순 임금이 무력 대신에 교화를 펼쳐야 한다면서 간척의 춤을 추니, 3년 만에 유묘씨가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나온다.
[주D-018]평성(平城)의 포위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흉노의 묵특(冒頓) 선우(單于)를 치기 위해 출정했다가 평성 부근의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동안이나 흉노의 30만 대군에게 포위를 당했던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93 韓信列傳》
[주D-019]조용조(租庸調) : 당 고조(唐高祖) 무덕(武德) 7년(624)에 반포된 부역 제도를 말한다. 남정(男丁) 1인당 1경(頃)의 토지를 받고 해마다 일정량의 곡식을 국가에 바치는 것을 조(租)라고 하고, 해마다 일정량의 비단과 면포를 바치거나 은냥(銀兩)을 대신 바치는 것을 용(庸)이라고 하고, 해마다 20일씩 복역(服役)을 하거나 하루당 비단 3척(尺)을 바치는 것을 조(調)라고 하였다.
[주D-020]부위병(府衛兵)의 제도 : 부 병제(府兵制), 즉 서위(西魏)에서 시작되어 북주(北周)와 수(隋)를 거쳐서 당(唐)나라 초기까지 실시된 병농합일(兵農合一)의 군사 제도를 말한다. 20세 이상의 농민을 대상으로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게 하고, 징발할 때에는 각자 병기와 식량을 휴대하게 하였으며, 정기적으로 경사(京師)에 숙위하게 하고 변경을 방수하게 하였다.
[주D-021]인의(仁義)로 …… 있었는데 : 당 태종(唐太宗)은 원래 왕도정치보다는 패도를 추구한 제왕이었는데, 즉위한 이래로 멸망한 수나라를 거울 삼아 문치(文治)를 숭상하면서 위징(魏徵) 등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발탁하여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따른 결과,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번영하는 등 태평 시대를 구가하였으므로 역사상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일컬어지기에 이르렀다. 위징은 태종(太宗)에게 전후 200여 차례에 걸쳐 상소문을 올리면서 인의에 입각한 성현의 정치를 역설하였으며, 황제가 노여워해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직간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태종이 하나의 거울〔一鑑〕을 잃었다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그가 인의의 교화를 강조한 내용은 《구당서(舊唐書)》 권71 위징전(魏徵傳)에 나온다.
정시책(廷試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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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朕)은 이르노라.
짐이 듣건대, 《주역》에 “군자는 옛 성현들의 언행을 많이 알아 자신의 덕을 키운다.〔君子多識前言往行 以畜其德〕”라 고 하였다. 대개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지난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하는데, 이는 제왕이 중시해야 할 덕목이다. 옛날에 천하를 다스렸던 자들을 일컬어 황(皇)이라고도 하고 제(帝)라고도 하고 왕(王)이라고도 하고 패(覇)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지위도 같았고, 묘사(廟社)와 신민을 소유한 것도 같았고, 작록(爵祿)ㆍ폐치(廢置)ㆍ생살(生殺)ㆍ여탈(與奪)의 권한을 행사한 것도 같았는데, 유독 그들의 명호만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황이라고 하고 제라고 하고 왕이라고 하고 패라고 하는 그 명호의 뜻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천하를 다스린 자마다 어떤 일을 행하여 반드시 공을 세우곤 하였는데, 그것이 간책에 실려서 오랜 옛날부터 후세에 전해져 왔다. 그런데 삼분(三墳)의 글이나 소호(少皥)ㆍ전욱(顓頊)ㆍ고신씨(高辛氏) 등에 관한 전적은 인멸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일과 공에 대해서도 오늘날 고찰을 해서 징험해 볼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당우(唐虞 요순(堯舜)) 이하는 그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들이 또 모두 의심할 것 없이 믿을 만한 것들이라고 하겠는가?
억 조 신민(億兆臣民)의 위에 군림한 이상에는 반드시 다스리는 도를 각자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고 준행해서 한 시대의 정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과 제와 왕과 패가 행한 그 정치의 도는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전(傳)에 이르기를 “정치를 행하기를 덕으로써 한다.〔爲政以德〕”라 고 하였다. 대개 반드시 도를 행하여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있은 뒤에야 그것을 정치에 적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황과 제와 왕과 패의 덕과 관련하여 그 심천(深淺)과 순잡(純雜)의 차이를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임금의 마음은 정치가 나오는 근원이다. 황과 제와 왕과 패의 그 마음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상은 모두 짐이 들어보고 싶은 것들이다.
여러분들은 거의 몇 년 동안 집에서 수업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정으로 모두 이끌어 들여 그동안 온축(蘊蓄)했던 공부를 물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서 경》에 이르기를 “지금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선친인 문왕(文王)의 언행을 공경히 따라야 한다.〔今民將在祗遹乃文考〕”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옛날 밝은 선왕들의 사적을 별도로 구해서 듣고 따라야 한다.〔別求聞由古先哲王〕”라고 하였다. 짐이 우러러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여러 성인의 큰 기업을 계승하고 나서 두려운 마음으로 좋은 정치를 해 보려고 꾀하고 있다. 조종(祖宗)을 본받는 일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분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아도 되겠다마는, 등급을 나누어 미루어 볼 때 황과 제와 왕의 마음 가운데에서 어떤 덕과 어떤 도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고 본받을 만한지 모두 진달하여,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짐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근세에 들어와서 유자(儒者)가 황과 제와 왕과 패를 나누어 각각 춘(春)과 하(夏)와 추(秋)와 동(冬)에 배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황과 제와 왕과 패가 되는 것은 절기가 한 해를 도는 것과도 같아서, 마침 그런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과거에 운운했던 것과는 애당초 관계가 없는 것인가? 대저 천도는 순환하는 것이니, 정(貞)에서 원(元)으로 가는 것은 이치상으로 볼 때 필연적인 사실이다. 만약 사시(四時)를 가지고 황과 제와 왕과 패에 배당한다면, 진한(秦漢) 이후의 시대에 대해서도 당연히 황과 제와 왕과 패에 배당하여 등급을 매겨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들은 짐을 위해 자세히 답변하라. 짐이 앞으로 거울로 삼으려 한다.
답변드립니다.
신이 듣건대,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황(皇)과 제(帝)와 왕(王)을 본받을 뿐이니, 패자의 일은 하등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삼 가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 대보(大寶)에 오르시자마자 덕음(德音)을 발하고 밝은 조서를 내려 신등을 황궁으로 나아오게 한 뒤에 황과 제와 왕과 패의 도에 대해 물으시면서 이르기를, “짐이 듣건대, 《주역》에 “군자는 옛 성현들의 언행을 많이 알아 자신의 덕을 키운다.”라고 하였다. 대개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지난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하는데, 이는 제왕이 중시해야 할 덕목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폐하의 마음이 옛날의 성인과 부절(符節)을 맞춘 듯 완전히 같아서, 황과 제와 왕의 정치를 스스로 기약하시는 것이니, 이러한 일은 진한 이래로 결코 볼 수 없었던 바입니다. 아, 이 얼마나 성대한 일입니까. 미천한 신이 이 아름다운 명을 어떻게 만분의 일이라도 선양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책(聖策)을 받들어 읽어 보건대, “옛날에 천하를 다스렸던 자들을 일컬어 황이라고도 하고 제라고도 하고 왕이라고도 하고 패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지위도 같았고, 묘사와 신민을 소유한 것도 같았고, 작록ㆍ폐치ㆍ생살ㆍ여탈의 권한을 행사한 것도 같았는데, 유독 그들의 명호만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황이라고 하고 제라고 하고 왕이라고 하고 패라고 한 그 명호의 뜻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태극(太極)이 나뉘어 양의(兩儀)가 되면서 천지(天地)의 이름이 있게 되었고, 사람이 그 사이에서 나와 삼재(三才)를 이루면서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의 칭호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혼돈 상태에서 정교가 행해지지 않다가, 복희씨(伏羲氏)가 나와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의 정사를 대신하였고, 신농씨(神農氏)가 나와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黃帝)와 요(堯)ㆍ순(舜)이 그 뒤를 이어서 임금이 되었는데, 그런 뒤에야 의상(衣裳)을 늘어뜨린 가운데 천하가 제대로 다스려졌다고 합니다.
일을 행한 그 자취를 살펴보건대, 요ㆍ순 이상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면서 인의(仁義)의 길을 따라 행하였으니, 이는 본래의 성품 그대로 행하신 분〔性之者〕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황이라고 말하고 제라고 말한 것도 하늘과 같다고 하는 뜻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덕이 하늘과 같다.〔其仁如天〕”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뒤 하(夏)나라가 쇠하면서부터 위에서 도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아래에서 흩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일어나면서 자못 참덕(慙德)이 있게 되었으니, 하늘과 공을 함께하는 오묘한 차원에서 제(帝)와 비교해 본다면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덕을 살펴본다면 비록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공을 이루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할 것이니, 이는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여 행한 분〔反之者〕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패자(覇者)의 일로 말하면, 모두 인의(仁義)의 이름만 빌려서 자기 한 몸의 사욕을 채운 것이니, 이는 빌려서 쓴 자〔假之者〕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을 위주로 해서 인을 행하는 이는 왕(王)이고, 무력으로 인을 가탁하는 자는 패(覇)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말해 본다면, 황이라고 하고 제라고 하고 왕이라고 하고 패라고 한 것에 대해서, 굳이 그 글자마다 새겨서 풀이할 것도 없이 그 명칭의 의미가 그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신 이 삼가 성책(聖策)을 받들어 읽어 보건대, “천하를 다스린 자마다 어떤 일을 행하여 반드시 공을 세우곤 하였는데, 그것이 전적에 실려서 오랜 옛날부터 후세에 전해져 왔다. 그런데 삼분의 글이나 소호ㆍ전욱ㆍ고신씨 등에 관한 전적은 인멸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일과 공에 대해서도 오늘날 고찰해서 징험해 볼 수가 있겠는가? 당우(唐虞) 이하는 그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들이 또 모두 의심할 것 없이 믿을 만한 것들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전성(前聖)이 앞에서 지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후성(後聖)이 뒤에서 조술(祖述)한 뒤에야 그 도를 전할 수 있고 그 말을 믿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자(孔子)의 시대를 당하여서는 천하가 생성된 지 오래되었고 천하의 치란이 한 번만이 아니었으니, 그 전적이 번다하고 난잡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바르지 않게 될 것을 걱정하여 전성이 지은 것들을 모두 가져다가 조술하였으니, 예컨대 《주역》의 도를 찬술하여 팔색(八索 팔괘(八卦)에 관한 글)을 물리친 것이나, 직방(職方)을 서술하여 구구(九丘 구주(九州)의 지지(地誌))를 없앤 것이나, 분전(墳典)을 정리하여 편찬하면서 당우(唐虞) 이하의 시대부터 끊어 서술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성인이 술작(述作)한 그 뜻이 깊고 거취(去取)한 그 취지가 은미하니, 후세 사람들이 감히 따지고 의논할 성격의 것이 못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 러고 보면 삼분의 글이나 소호ㆍ전욱ㆍ고신씨의 전적 등이 인멸되고 전해지지 않아서 그 일과 공을 오늘날 고찰하여 징험해 볼 수 없게 된 것이 오래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진(秦)나라의 분서(焚書) 사건을 겪은 그 뒤로, 가령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사람이 사관(史官)의 가업을 이어받아서 주역(紬繹)했는데도 위서(緯書)를 출입하는 잘못을 면하지 못했고 보면, 그러한 책들을 어떻게 모두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현상은 자부(子部)와 사부(史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 현전(聖經賢傳)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의심할 만한 부분이 간혹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그 글의 내용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말이 아니라, 그 표현이 사실을 지나쳐서 과장되게 꾸민 면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나는 예전엔 그래도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곳은 빼놓고 기록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였고, 맹자가 “《서경》의 내용을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서경》이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한 것인데, 이는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신 이 삼가 성책(聖策)을 받들어 읽어 보건대, “억조 신민의 위에 군림한 이상에는 반드시 다스리는 도를 각자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고 준행해서 한 시대의 정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과 제와 왕과 패가 행한 그 정치의 도는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전(傳)에 이르기를 ‘정치를 행하기를 덕으로써 한다.’라고 하였다. 대개 반드시 도를 행하여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있은 뒤에야 그것을 정치에 적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황과 제와 왕과 패의 덕과 관련하여 그 심천(深淺)과 순잡(純雜)의 차이를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임금의 마음은 정치가 나오는 근원이다. 황과 제와 왕과 패의 그 마음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상은 모두 짐이 들어 보고 싶은 것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체요 만화(萬化)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인군의 마음은 특히 정치가 나오는 근원이요 천하 치란의 기틀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된 자는 자기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 모두가 감히 한결같이 바른 길로 나오지 않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런데 덕(德)은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이요 정치는 그 덕을 바탕으로 해서 행해지는 것이니, 마음에서 얻어지지 않고 정치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의 인주(人主)들은 이러한 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고 싶으면 먼저 자기의 나라를 제대로 다스렸고, 자기의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 싶으면 먼저 자기의 집을 그렇게 정제(整齊)하였고, 자기의 집을 그렇게 정제하고 싶으면 먼저 자기의 몸을 제대로 닦았고, 자기의 몸을 제대로 닦고 싶으면 먼저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였으니, 잠시라도 마음에 종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황과 제와 왕과 패의 덕에 비록 심천과 순잡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고 준행해서 한 시대의 정치를 이룬 면에서 본다면, 모두 마음에서 터득한 것을 가지고 억조 신민의 위에 군림했을 것이니, 그들 모두가 정치를 행하는 도를 반드시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은 점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황과 제와 왕과 패에 따른 미묘한 마음의 차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들의 덕에도 천심과 순잡의 차이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이 그 명칭의 의미를 묻는 항목에 대해서, 본래의 성품 그대로 행하고〔性之〕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여 행하고〔反之〕 빌려서 쓴 것〔假之〕 등으로 분류해서 답변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황과 제와 왕과 패의 마음이 나뉘는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일한 것이니, 왕과 패라고 해서 어찌 유독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살펴보건대, 《서경》에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미세하다.”라 고 하였는데, 대개 이 도심을 확충한 분들이 황과 제와 왕이 되었고, 이 인심을 따른 자가 패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황과 제와 왕과 패의 마음의 미묘한 차이를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만약 이것을 버리고서 다른 곳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면, 신은 자칫 지리(支離)하고 허탄한 지경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삼가 성책(聖策)을 받들어 읽어 보건대, “여러분들은 거의 몇 년 동안 집에서 수업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정으로 모두 이끌어 들여 그동안 온축했던 공부를 물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지금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선친인 문왕(文王)의 언행을 공경히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옛날 밝은 선왕들의 사적을 별도로 구해서 듣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짐이 우러러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여러 성인의 큰 기업을 계승하고 나서 두려운 마음으로 좋은 정치를 해 보려 꾀하고 있다. 조종을 본받는 일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분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아도 되겠다마는, 등급을 나누어 미루어 볼 때 황과 제와 왕의 마음 가운데에서 어떤 덕과 어떤 도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고 본받을 만한지 모두 진달하여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짐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성스러운 덕과 공경하는 덕이 날로 발전하는 가운데, 일을 행할 때마다 으레 조종을 본받고 계십니다. 그런데 신은 초야에 있는 미천한 몸으로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으니, 성인의 도 가운데에서 무엇을 스승으로 삼고 취해야 하는지 어떻게 감히 함부로 의논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신이 일찍이 경서(經書)를 약간이나마 읽어서 제왕의 도에 대해서 나름대로 짐작하고는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상고해 보건대, 《주역》의 맨 처음 건괘(乾卦)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나오는데, 대개 이 네 가지는 하늘의 도로서 왕자(王者)가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건실한 운행을 본받아서 군자는 스스로 힘쓰면서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라고 한 것입니다. 《시경》에 관저(關雎)를 맨 처음에 소개한 것은 풍화(風化)의 근본이 집에서 시작하여 나라로 옮겨지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어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처럼 답답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歟〕”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기》에서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毋不敬〕”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함을 말한 것이요, 《춘추》에서는 대일통(大一統)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평천하(平天下)의 뜻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경》에 기재된 것으로 말하면, 요(堯) 임금은 위대한 덕을 잘 발휘하여 구족을 친하게 하고 백성을 평등하게 대하고 만방을 화목하게 하였으며〔克明俊德 以親九族 平章百姓 協和萬邦〕 순(舜) 임금은 무능한 관원을 퇴출시키고 유능한 관원을 승진시켰으며〔黜陟幽明〕 우왕(禹王)은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하고 받아들였으며〔拜昌言〕 탕왕(湯王)은 허물을 고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으며〔改過不吝〕 문왕(文王)은 해가 중천에 뜨고 다시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한가하게 식사할 겨를이 없이 노력하여 만백성을 모두 화합하게 하였으며〔日中昃 不遑暇食 用咸和萬民〕 무왕(武王)은 믿음을 두텁게 하고 의리를 밝히면서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였다〔惇信明義 崇德報功〕 하였습니다.
이 와 같은 종류는 평이하고 명백한 것들로서 모두 본받아 행할 만한 것들입니다. 폐하께서도 이에 대해서 익히 들어서 알고 계실 텐데, 굳이 이런 물음을 제기하신 것은 진부한 발언이요 상식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셔서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스승으로 삼고 본받을 만한 것들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참으로 폐하께서 여기에 유의하신다면, 한 단계씩 추진해서 황과 제와 왕의 마음의 그 덕과 도에 이르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책(聖策)을 받들어 읽어 보건대, “근세에 들어와 유자(儒者)가 황과 제와 왕과 패를 나누어 각각 춘과 하와 추와 동에 배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황과 제와 왕과 패가 되는 것은 절기(節氣)가 한 해를 도는 것과도 같아서, 마침 그런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과거에 운운했던 것과는 애당초 관계가 없는 것인가? 천도는 순환하는 것이니, 정(貞)에서 원(元)으로 가는 것은 이치상으로 볼 때 필연적인 사실이다. 만약 사시를 가지고 황과 제와 왕과 패에 배당한다면, 진한(秦漢) 이후의 시대에 대해서도 당연히 황과 제와 왕과 패에 배당하여 등급을 매겨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들은 짐을 위하여 자세히 답변하라. 짐이 앞으로 거울로 삼으려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신 이 듣건대, 황이 내려와서 제가 되고 제가 내려와서 왕이 되고 왕의 도가 쇠미해지면서 패자가 출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마지막에 위치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하는 것일 뿐이니, 어떻게 이것을 꼭 사시에 비겨서 배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넷이라고 하는 숫자로 보면 정에서 원으로 가는 시절에 해당시킬 법도 합니다마는, 그 일과 공으로 보면 결코 같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비록 융성했다고 하더라도 왕의 도에는 감히 진입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그 덕과 도와 공을 어느 물건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 황과 제와 왕과 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충(忠)과 질(質)과 문(文)을 숭상한 것이나,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의 운행도 모두 순환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윤위(閏位 정통이 아닌 임시 지위) 의 설이 있게 된 것입니다. 대저 이와 같은 설은 술수에 가깝기 때문에 당시에도 이미 배우기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황과 제와 왕과 패가 반드시 춘과 하와 추와 동에 비겨서 배당해야 하는 것이라면, 공자와 맹자가 먼저 그런 사실을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 국가는 태조황제(太祖皇帝)가 큰 기업을 창건하시고,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신 이래로, 열성(列聖)이 그 뒤를 이어서 무위(武威)를 떨쳐 화란을 진정시키고 문교를 펼쳐 태평 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천지가 개벽된 이래로 이처럼 융성했던 시대는 일찍이 있지 않았으니, 정(貞)에서 원(元)으로 가는 시운을 바로 지금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신 데다 바야흐로 큰일을 성취할 수 있는 시운을 맞으셨는데, 여기에 또 황과 제와 왕의 도를 본받으려 하고 계시니,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이 도를 금석(金石)처럼 굳게 잡으시어 정치가 나오는 근원인 마음을 맑게 하시고 조종의 기업을 넓히도록 하소서. 그러면 천하를 위해 더 이상의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요행히 폐하의 책문(策問)을 받드는 은혜를 입고서 이상과 같이 글을 마무리하여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재택(裁擇)하소서. 신은 삼가 답변드립니다.
[주D-001]군자는 …… 키운다 : 《주역》 대축괘(大畜卦)의 상(象)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2]정치를 …… 한다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주D-003]서경에 …… 하였다 : 《서경》 주서(周書) 강고(康誥)에 나온다.
[주D-004]정(貞)에서 …… 것 : 겨 울이 봄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에 하늘의 네 가지 덕인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정이(程頤)가 해설하기를 “원은 만물의 시작이요, 형은 만물의 성장이요, 이는 만물의 완성이요, 정은 만물의 종결이다.〔元者 萬物之始 亨者 萬物之長 利者 萬物之遂 貞者 萬物之成〕”라고 하여, 각각 춘ㆍ하ㆍ추ㆍ동에 배당하였다. 《程氏易傳 卷1》
[주D-005]황제(黃帝)와 …… 합니다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황제와 요ㆍ순 등 제왕이 의상을 늘어뜨리고 편히 앉아 있었는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으니, 이는 천지자연의 법도를 취했기 때문이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 蓋取諸乾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본래의 …… 분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요 임금과 순 임금은 본래의 성품 그대로 행하신 분들이다.〔堯舜性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그 …… 같다 : 《사 기》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제요란 분은 이름이 방훈이니, 그 인덕(仁德)은 하늘과 같았고, 그 지혜는 신과 같았으며, 가까이 나아가 보면 따스한 햇볕과 같았고, 멀리서 바라보면 촉촉이 비를 내려 주는 구름 같았다.〔帝堯者放勳其仁如天 其知如神 就之如日 望之如雲〕”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상(商)나라와 …… 되었으니 : 상 나라의 탕왕(湯王)과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각각 신하의 신분으로 그들의 임금이었던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성탕이 걸왕을 남소에 유폐시키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느끼면서 말하기를 ‘나는 후세에 나를 구실로 삼아서 신하가 제멋대로 임금을 정벌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成湯放桀于南巢 惟有慙德 曰予恐來世 以台爲口實〕”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본래의 …… 분 : 《맹자》 진심 하에 “탕왕과 무왕은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여 행한 분들이다.〔湯武反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빌려서 쓴 자 : 《맹자》 진심 상에 “춘추(春秋)의 오패(五覇)는 빌려서 쓴 자들이다. 오래도록 빌려 쓰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았겠는가.〔五覇假之也 久假而不歸 烏知其非有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1]덕을 …… 것입니다 : 《맹 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실제로는 무력을 행사하면서 형식적으로 인의를 가탁하는 자는 패자(覇者)이니, 패자는 반드시 대국을 소유해야 하겠지만, 덕을 위주로 인의를 행하는 이는 왕자(王者)이니, 왕자는 대국을 소유할 필요도 없다. 옛날에 탕왕은 사방 70리의 땅을 가지고 일어났고, 문왕은 100리의 땅을 가지고 일어났다.〔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 湯以七十里 文王以百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2]분전(墳典)을 …… 것 : 전 한(前漢) 공안국(孔安國)의 상서 서(尙書序)에 “공자가 분전을 정리하여 《상서》를 편찬할 적에 당우 즉 요순(堯舜)의 시대부터 끊어서 서술하기 시작하여 주나라에까지 미쳤다.〔討論墳典 斷自唐虞以下 訖于周〕”라는 표현이 나온다. 분전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삼분 오전(三墳五典)의 준말이다.
[주D-013]위서(緯書) : 유 가(儒家)의 경의(經義)에 의탁하여, 부록(符籙)이나 서응(瑞應) 등을 선양한 책을 말하는데, 길흉을 점치고 흥망을 예언하는 등 허탄한 내용도 많으나, 천문(天文)ㆍ역법(曆法)ㆍ지리(地理)ㆍ신화(神話) 등에 관한 희귀한 자료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전한(前漢) 말기에 이 작업이 시작되어 후한(後漢) 때에 성행하였는데, 유가의 육경(六經)과 《효경(孝經)》에 의탁한 위서를 특히 칠위(七緯)라고 칭한다.
[주D-014]나는 …… 보았다 : 《논 어》 위령공(衛靈公)에 “나는 예전엔 그래도 사관이 의심나는 곳은 빼놓고 기록하는 것을 보았고, 또 말을 가진 사람이 남에게 타도록 빌려 주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런 미풍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吾猶及見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15]서경의 …… 것이다 :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목야(牧野)에서 싸울 적에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血流漂杵〕”라는 글이 《서경》 무성(武成)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맹자가 “《서경》의 내용을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서경》이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무성편에서 두세 쪽만 취할 뿐이다. 인자한 사람은 천하무적인데, 지극히 인자한 사람이 지극히 불인한 사람을 치는 마당에, 어떻게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할 수가 있겠는가.〔盡信書 則不如無書 吾於武成 取二三策而已矣 仁人無敵於天下 而至仁伐至不仁 而何其血之流杵也〕”라고 비판한 대목이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주D-016]임금이 …… 것입니다 : 전 한(前漢) 동중서(董仲舒)가 무제(武帝) 즉위 초에 올린 현량(賢良)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임금이 된 자는 자기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로잡아 만백성을 바르게 하고, 만백성을 바로잡아 사방을 바르게 해야 한다. 사방이 바르게 되면, 멀고 가까운 곳 모두가 감히 한결같이 바른 길로 나오지 않음이 없게 되어 사특한 기운이 그 사이에 범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爲人君者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正萬民以正四方 四方正 遠近莫敢不壹於正 而亡有邪氣奸其間者〕”라는 내용이 나온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주D-017]인심(人心)은 …… 미세하다 : 《서 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송유(宋儒)의 이른바 ‘십육자 심전(十六字心傳)’이 나온다.
[주D-018]성스러운 …… 가운데 : 성군(聖君)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으로, 《시경》 상송(商頌) 장발(長發)의 “상나라 탕왕이 제때에 탄생하여, 성스러운 덕과 공경하는 덕이 날로 발전하였다.〔湯降不遲聖敬日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19]하늘의 …… 않는다 : 《주역》 건괘(乾卦) 상(象)에 나온다.
[주D-020]사람이 …… 것이다 :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훈계한 말로,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관저(關雎)는 《시경》 주남(周南)의 맨 처음에 나오는 편명으로, 문왕의 후비(后妃)의 덕을 노래한 시이다.
[주D-021]공경하지 …… 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맨 처음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2]대일통(大一統) : 천 하의 제후국 모두가 중국 황제에게 복속되어 그 문물과 제도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춘추》 은공(隱公) 원년 첫머리에 “원년 춘 왕정월(元年春王正月)”이라고 한 연대 표기 방식과 관련하여, 《공양전(公羊傳)》에서 “어째서 왕정월이라고 하였는가. 크게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서이다.〔何言乎王正月 大一統也〕”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23]요(堯) 임금은 …… 하였으며 : 《서경》 요전(堯典)에 나오는 말을 간추려 소개한 것이다.
[주D-024]순(舜) 임금은 …… 승진시켰으며 : 《서경》 순전(舜典)에 나온다.
[주D-025]우왕(禹王)은 …… 받아들였으며 : 《서경》 대우모(大禹謨)와 고요모(皐陶謨)에 나온다.
[주D-026]탕왕(湯王)은 …… 않았으며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온다.
[주D-027]문왕(文王)은 …… 하였으며 : 《서경》 무일(無逸)에 나온다.
[주D-028]무왕(武王)은 …… 보답하였다 :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주D-029]충(忠)과 …… 것 : 하 (夏)ㆍ상(商)ㆍ주(周) 삼대(三代)에 각각 충(忠)과 질(質)과 문(文)을 숭상했다는 설을 말한다. 송유(宋儒) 정이(程頤)의 《춘추전(春秋傳)》 서문에 “세 분의 왕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삼대의 왕의 예법이 갖추어졌나니, 자ㆍ축ㆍ인의 달을 정월로 각각 삼고 충ㆍ질ㆍ문을 번갈아 숭상함에, 인도가 갖추어지고 천운이 골고루 미치게 되었다.〔曁乎三王迭興 三重旣備 子丑寅之建正 忠質文之更尙 人道備矣 天運周矣〕”라는 말이 나오는데, 《근사록(近思錄)》 권3 치지류(致知類)에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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