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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校勘) 김천조(金天祚)를 위하여 모친에게 제사드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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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름에 / 父母生子
충신과 효자를 기대하나니 / 忠孝是期
참으로 그 뜻을 잇지 못한다면 / 苟不繼志
양심을 지녔다고 누가 말하리이까 / 孰云秉彝
생각하면 잔약한 이 소자는 / 惟予孱眇
자식의 도리를 어그러뜨렸나이다 / 子道之虧
아버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 先君早世
어머님 홀로 쓸쓸히 계시는데 / 北堂凄其
저는 벼슬과 배움을 구한답시고 / 求官與學
어머님 곁을 멀리 떠났습니다 / 遠違母儀
남과 북을 어렵게 떠돌아다니다가 / 間關南北
마침내 경사에까지 이르렀으나 / 遂至京師
자그마한 벼슬 하나 얻지 못한 채 / 薄宦無功
어머님과 이별만 하였나이다 / 祗以仳離
돌아갈 생각이 어찌 없었겠습니까마는 / 豈不懷歸
포의의 이 신세가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 愧此布衣
과거 설행의 조서가 내린 뒤로부터 / 自從科興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하여 / 講習孜孜
과장에서 기예를 겨룬 결과 / 戰藝場屋
요행히 두 차례 합격한 뒤에 / 幸再中之
청삼 차림으로 어머님을 뵈었더니 / 靑衫覲省
어머님은 한 번 미소를 띠셨지요 / 一笑之微
삼 년 동안 한림에서 근무했으나 / 三年掌翰
이는 낮은 말단의 직책이요 / 末吏之卑
운각에서 교서(校書)를 담당했으나 / 讎書芸閣
칠 년 동안 임시직에 불과했으니 / 七載權知
쓸모없이 허명뿐인 이들 관직이 / 虛名無用
자식의 직분에 무슨 도움이 되었으리오 / 子職何裨
그러다가 무진년에 이르러서야 / 戊辰之年
어머님을 찾아뵐 수 있었는데 / 來省庭闈
비록 늙고 병드셨다고는 하지만 / 雖云老病
또한 너무나도 여윈 모습이었습니다 / 亦甚淸羸
이듬해 봄 하직하고 떠나야 할 적에도 / 明春辭去
감히 간다는 말씀을 드릴 수 없었으니 / 不敢言歸
이미 늙으신 어머님을 뒤에 두고서 / 謂親已老
어떻게 떠날 수가 있었겠나이까 / 何以去爲
그때에 어머님은 저를 격려하시기를 / 時乃勉予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더디 떠나느냐 / 汝去何遲
조석으로 내 시중을 드는 것은 / 朝夕尸饔
며늘아기가 그동안 잘했는데 / 自有婦兒
내 뜻을 받들어서 봉양을 하니 / 以志爲養
네가 또 주저할 것이 뭐가 있느냐 / 汝復何疑
너는 가서 열심히 노력하여 / 汝去勉旃
좋은 벼슬을 함께 나눠 받고 / 好爵與靡
몸을 세워 이름을 날림으로써 / 立身揚名
효도를 끝까지 다하도록 하여라 / 以畢孝思
가르침을 받들고 길을 떠났으나 / 承敎就途
마음속으로 안 맞는 점이 있었습니다 / 中心有違
해와 달이 얼마나 흘러갔던가 / 日月幾何
겨우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 纔過一朞
꿈속에서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 夢想高堂
마음과 혼이 치달리고 날아갔는데 / 心馳魂飛
부고가 홀연히 이르렀습니다 / 訃書奄至
이젠 영감의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 永感在玆
누구를 의지하며 누구를 믿을까요 / 何怙何恃
모두 끝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 已而已而
아 슬픕니다 / 嗚呼哀哉
아들 칠형제를 두어 / 有子七人
베짱이처럼 번성하였나니 / 振振螽斯
착한 맏아들부터 강한 막내까지 / 昆令季强
부창부수하는 가운데 / 夫唱婦隨
밭을 갈고 길쌈을 하면서 / 以耕以織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 드렸지요 / 溫凊以時
그런데 저만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 獨予不類
멀쩡한 사지를 게을리 하면서 / 惰其四肢
강사의 나이를 넘기도록 / 齒踰强仕
공연히 배운답시고 헛수고만 하였을 뿐 / 浪學畫脂
제가 받는 박한 봉급으로는 / 猶無寸廩
반찬 한 가지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 一膳是資
뒤에 비록 저의 뜻대로 되어 / 後雖得志
만종을 받는다 해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 萬鍾何施
등에 지고 와서 드릴 곳이 없게 되었다는 / 負米無地
옛사람의 슬픈 고백도 있습니다마는 / 古人所悲
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아니하니 / 時不可再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悔不可追
한 잔의 술을 바쳐 올리노라니 / 一觴之奠
사모하는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 而誠叵涯
만약 어머님의 혼령이 계시거든 / 如生如存
저의 슬픈 이 말을 들어 주소서 / 聽我哀辭
[주D-001]좋은 …… 받고 : 임 금의 인정을 받고서 좋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에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으니, 내가 그대와 함께 하리로다.〔鳴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靡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몸을 …… 하여라 : 《효 경(孝經)》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해 드리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마음속으로 …… 있었습니다 : 차 마 떠나지 못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곡풍(谷風)에 “길 떠나는 발걸음 왜 이다지 더딘가, 마음속으로 안 맞는 점이 있어서.〔行道遲遲 中心有違〕”라고 하였는데, 이는 발은 앞으로 가려고 하지만 마음은 가고 싶지 않아서 마음과 발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04]이젠 …… 말았으니 : 부모를 모두 여읜 고아가 되었다는 말이다. 옛날에 부모 모두 생존시에는 구경(具慶), 부친만 생존시에는 엄시(嚴侍), 모친만 생존시에는 자시(慈侍), 부모 모두 여의었을 때에는 영감(永感)이라고 하였다.
[주D-005]누구를 …… 믿을까요 : 《시경》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아버지 아니시면 누구를 의지하며, 어머니 아니시면 누구를 믿을까.〔無父何怙無母何恃〕”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베짱이처럼 번성하였나니 : 자 손의 번창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 주남(周南) 종사(螽斯)에 “수많은 베짱이들 화목하게 모여들듯, 그대의 자손 또한 번성하리라.〔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는 말이 나온다. 참고로 베짱이는 한 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고 한다.
[주D-007]따뜻하고 …… 드렸지요 :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은 부모님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한다.〔冬溫而夏凊〕”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멀쩡한 …… 하면서 : 참고로 ‘사지를 게을리 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惰其四肢 不顧父母之養〕’은 세상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불효 중의 하나라는 말이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온다.
[주D-009]강사(强仕)의 나이 : 40세를 말한다. 《예기》 곡례 상에 “나이 사십을 강이라고 하니, 이때에 벼슬길에 나선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등에 …… 있습니다마는 : 공 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의 효성에 관한 고사이다.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적에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 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는데〔爲親負米百里之外〕,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어버이를 위해 쌀을 등에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致思》
원 재상(元宰相)을 위하여 양부(養父)인 정승(政丞) 김이용(金利用)에게 제사드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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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이 현인을 세상에 내려 보냄은 / 嶽將降賢
시대를 다시 태평하게 하기 위함이라 / 時當復泰
하늘이 그래서 공을 태어나게 하여 / 天故生公
구름과 바람처럼 만나게 하였나니 / 際風雲會
공의 그 덕성과 공의 그 공로를 / 惟德惟功
삼한 사람들이 힘입게 되었나이다 / 三韓所賴
우리 국가가 좋은 시운을 만나 / 自我國家
대국을 섬기게 된 뒤로부터 / 遭時事大
왕이 혹 친히 조회할 때면 / 王或親朝
부설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 負紲不懈
혹 사신으로 빙문할 때에도 / 或使之聘
왕명을 받들어 전대를 잘했나니 / 奉辭專對
반백 년 사이에 / 半百年間
사천 리 바깥으로 / 四千里外
말이 땀나도록 왕래하면서 / 汗馬來往
빠르기가 귀신과 같았지요 / 疾如神怪
의리를 지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 秉義不貳
자기 한 몸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 致身不愛
세 임금을 차례로 보좌하는 동안 / 歷輔三君
좋든 궂든 절조가 한결같았으며 / 夷險一節
두 번이나 백관의 어른이 되어 / 再長百寮
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을 살렸는데 / 邦興民活
장한 한 마음은 쇠하지 않았어도 / 一心未灰
귀밑머리는 어느새 눈 내린 듯하였지요 / 兩鬢如雪
아들이 없다고 굳이 말하리까 / 勿謂無兒
백도 역시 아들이 없었나이다 / 伯道是比
공의 덕성이 그토록 풍성하고 / 公德之豐
공의 공로가 그토록 아름다우니 / 公功之美
응당 종묘에 배향이 되어 / 當配廟食
백세토록 복을 향유하실 것입니다 / 百世不毁
아 바탕이 잔약한 이 몸이 / 嗟嗟孱質
비록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 雖曰無似
저는 공을 아버님으로 섬겼고 / 予以父事
공 역시 저를 자식으로 대하셨는데 / 公亦子視
이제 공이 돌아가셨으니 / 今公之沒
저는 장차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 予將疇倚
삼가 공의 명복을 빌면서 / 敬修冥福
변변찮은 제물을 바쳐 올리오니 / 兼陳薄祀
양양히 그 위에 혼령이 계시거든 / 洋洋在上
부디 강림하여 흠향해 주옵소서 / 魂其歆止
[주D-001]산악이 …… 보냄은 :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 보내,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태어나게 하였다.〔維嶽降神 生甫及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구름과 …… 하였나니 :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3]부설(負紲) : 말 고삐를 잡고 수행한다는 뜻으로, 왕의 측근에서 항상 고락(苦樂)을 함께하며 충의를 바친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4년에 “제가 말고삐를 잡고 주인님을 따라 천하를 돌아다니는 동안 저지른 죄가 매우 많습니다.〔臣負羈紲 從君巡於天下臣之罪甚多矣〕”라고 자범(子犯)이 공자 중이(重耳)에게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4]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5]백도(伯道)…… 없었나이다 : 진 (晉)나라 하동 태수(河東太守) 등유(鄧攸)가 석늑(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둘을 모두 보호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는, 자기 아들은 버려두어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자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하늘이 무지해서 백도에게 아들이 없게 했다.〔皇天無知 使伯道無兒〕”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진서(晉書)》 권90 등유전에 나온다. 백도(伯道)는 등유의 자이다.
[주D-006]양양히 …… 계시거든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6 장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는 말이 나온다.
남 부마(男駙馬)를 위하여 심왕(瀋王)에게 제사드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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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왕의 일생은 / 惟王之生
예의로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 禮義是衽
옛날 덕릉이 살아 계실 적에 / 昔在德陵
매우 사랑하여 소중히 기르면서 / 愛育之甚
아들로 여기고 조카로 대하지 않았으며 / 子而不姪
당신의 밥도 내주고 술도 함께 마셨는데 / 推食與飮
급기야는 천자에게 주청을 하여 / 迺請天子
심왕의 봉호를 물려주기까지 했습니다 / 遜封于瀋
왕은 오직 공경하고 근신하면서 / 王惟敬愼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했는지라 / 兢兢伈伈
영종황제(英宗皇帝)의 총애를 받아 / 寵遇英皇
날마다 연침에서 시종하였나니 / 日侍燕寢
은혜는 춘풍처럼 따스하였고 / 恩沛春融
위엄은 삭풍처럼 늠렬하였지요 / 威生寒凜
황제께서 왕에게 이르시기를 / 帝謂汝王
소원이 있거든 짐에게 고하라 하자 / 有求告朕
간사한 자들이 그 틈을 이용해서 / 姦人抵隙
모략을 일삼고 고자질하여 / 乃謀乃諗
처음에는 집안에서 싸움이 나더니 / 始鬩于墻
나중에는 조정에 참소까지 하였는데 / 終成貝錦
이는 황상의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 / 此出宸衷
왕의 불찰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 非王不審
근래에는 백성들의 기대 때문에 / 近因民望
또 근거 없는 무함을 당했는데 / 又被讒譖
덕은 있어도 명이 따르지 않으니 / 有德無命
이 책임은 누가 감당해야 할는지 / 此責誰任
그런데 수레를 동쪽으로 돌리기 전에 / 未東其轅
느닷없이 북망산으로 베개를 두다니요 / 遽北其枕
이 몸은 고독하게 남겨진 중에서도 / 有兒煢煢
큰 음덕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 / 恩保巨廕
통곡을 하니 소리가 구천에 사무치고 / 哭徹九泉
눈물을 흘리니 피가 배어 나옵니다 / 血淚斯滲
[주D-001]옛날 …… 했습니다 : 덕 릉(德陵)은 충선왕(忠宣王)의 능호(陵號)이다. 심왕(瀋王)은 심양왕(瀋陽王)의 준말이다. 심왕은 당초 원 무종(元武宗)이 충선왕에게 내린 봉호인데, 1316년(충숙왕 3) 3월에 충선왕이 황제에게 주청하여, 심왕의 세자로 삼았던 왕고(王暠)에게 심왕의 지위를 전하고 자신은 태위왕(太尉王)이라고 칭하였다. 왕고는 충선왕의 이복형인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의 둘째 아들인데, 몽고 이름으로 완택독(完澤篤) 혹은 완택독(完澤禿)이라고 한다. 이후 수십 년간에 걸쳐 충선왕의 장자(長子)인 충숙왕 왕도(王燾)와 충선왕의 조카인 심양왕 왕고(王暠) 사이에 고려 국왕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그 와중에서 충숙왕이 참소를 받고 5년 동안이나 연경(燕京)에 억류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다가, 결국은 심왕의 국왕 추대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1345년(충목왕 1) 7월에 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일단락된다.
장곡강(張曲江)에 대한 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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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결락
묘지명(墓誌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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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원(有元) 봉의대부(奉議大夫)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 효기위(驍騎尉) 대흥현자(大興縣子) 고려(高麗) 순성보익찬화 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 순천군(順天君) 채공(蔡公)의 묘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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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원(至元) 6년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정월 10일 계해에 대흥현자 순천군 채공이 79세의 나이로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차 예법에 따라 장례를 지내려고 할 적에, 그의 자서(子壻)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명(銘)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공의 행의(行義)는 한 시대에 높고, 공의 공덕은 온 나라에 드러났다. 그러니 명을 짓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홍철(洪哲)이요, 자는 무민(無悶)이니, 교주도(交州道) 평강현(平康縣) 사람이다.
나 이 18세에 문사에 능하여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등제하였다. 처음에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으며,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외방에 나가 장흥부(長興府)를 맡아서 혜정(惠政)을 펼치다가 얼마 뒤에 그만두고는 곧장 집에 돌아와서 한가히 지냈는데 그 기간이 모두 14년이었다. 스스로 중암거사(中菴居士)라고 호하고는 항상 부도(浮圖)의 선지(禪旨)와 금서(琴書)와 약을 조제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은 성품이 또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세상일에 아무 욕심이 없이 그대로 몸을 마칠 것처럼 보였다.
덕릉(德陵 충선왕) 이 평소에 공의 이름을 알고 있던 중에, 지대(至大) 무신년(1308, 충선왕 원년)에 이르러 신정(新政)을 행하게 되자, 현재(賢才) 얻기를 급히 여기면서 공을 크게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고집을 부리며 출사하려고 하지 않다가 강권에 못 이겨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곧바로 사의 부정(司醫副正)을 제수하였고, 다시 황경(皇慶) 임자년(1312)에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전임 지후(祗候)의 신분에서 한 번 몸을 일으켜 여덟 번 옮긴 끝에 5년 만에 재상의 지위에 오르니, 사림이 이를 영광으로 알았다.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 1)에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게 할 적에 공이 그 임무를 전담하였다. 이에 사방의 토지를 살펴 적절하게 삼양(三壤)으 로 분류한 뒤에 옛 제도를 참작하여 개간된 토지에 징수하되 당시의 상황에 알맞게 하도록 힘쓰니, 공사(公私)가 모두 편하게 여겼다. 덕릉이 이 일을 계기로 공을 더욱 중시하여 누차 밀직사(密直使)를 가하였으며, 이듬해 겨울에 그 일이 일단 보고되자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올리고 삼사사(三司使)로 옮겼다가 뒤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승진시켰다. 경신년(1320)에 평강군(平康君)에 봉해졌다. 또 공의 자제 중에 원조(元朝)에 벼슬하여 5품의 직질(職秩)에 오른 자가 있어 은혜를 받고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에 봉해졌는데, 이는 자계(資階)를 갖춘 훈작(勳爵)이었다.
지순(至順) 임신년(1332, 충숙왕 복위 1)에 의릉(毅陵 충숙왕) 이 복위하여 구인(舊人)을 임용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다시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얼마 뒤에는 또다시 순천군(順天君)에 봉하였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품계를 높이고 공신의 호를 가하였다. 그리고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의 신분으로 병자년(1336)에 공거(貢擧 시관(試官))를 맡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뽑았다고 일컬어졌다.
공 은 문장과 기예가 모두 정밀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석교(釋敎)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도를 논할 적에는 비록 저명한 승려라고 할지라도 공이 한마디 말로 굴복시키곤 하였으니, 참으로 본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공 은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지어 놓고 항상 선승(禪僧)을 길렀는데, 그중에는 득도한 자도 꽤 있었다. 또 그 전단원 안에 약방을 차렸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많이 봤으므로 활인당(活人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뒤에 집 남쪽에 중화당(中和堂)이라는 건물을 짓고서 때때로 영가군(永嘉君 권보(權溥)) 권공(權公) 이하 국상(國相) 8인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선현(先賢)의 모임을 본받은 것으로서 풍류가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공 은 감식이 뭇사람보다 뛰어났고 그 풍유(風猷)는 세상에 보기 드물었다. 사람을 취할 때에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허물을 보고 어짊을 알았다. 그리하여 집에 있을 때나 남을 대할 적에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우러나오곤 하였으니, 정말 대아(大雅)한 군자라고 일컬을 만하였다.
증조 휘 모(某)는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모는 소부감(小府監)으로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모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保勝郞將)으로 첨의 정승(僉議政丞)에 추증되었다. 모친 박씨(朴氏)는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으로 한국태부인(韓國太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추증된 휘 모의 따님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인데, 또 자제가 귀하게 되었으므로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다. 부인의 부친 휘 모는 지위가 첨의 중찬(僉議中贊) 상락공(上洛公)에 이르렀으며,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의 조정에 공을 세워서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를 제수받았다.
부인은 유가(柔嘉)하고 숙선(淑善)하여 규문의 법도를 잘 지켰다. 자녀 5인을 낳았다. 장남 하중(河中)은 연곡(輦轂 연경) 에서 숙위하다가 태부부 자의참군(太傅府咨議參軍)에 뽑혔으며, 본국에서도 간간이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고 지금은 평강군(平康君)이다. 다음 하로(河老)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이다. 다음 선지(先智)는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 대선사(繼祖演眞大禪師)가 되었다. 장녀는 지금 계림 부윤(雞林府尹) 검교 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인 설현고(薛玄固)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고(故) 좌우위 보승별장(左右衛保勝別將) 정광조(鄭光祖)에게 출가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모범을 잃고 나라는 시귀(蓍龜)를 잃었다고 탄식하며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8일 경인에 성 동쪽 언덕에 장례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덕이 있어야 / 人之有德
지위도 수명도 누리는 법 / 必位必壽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 亦或不然
공은 덕이 있어서 누릴 수 있었다오 / 惟公克有
오직 우리 공만이 그러했나니 / 惟其有之
그래서 영원히 전해질 것이라오 / 是以不朽
[주D-001]삼양(三壤) : 징세(徵稅)에 편리하도록 토질에 따라 상ㆍ중ㆍ하의 3등급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주D-002]선현(先賢)의 모임 : 송 (宋)나라 때 문언박(文彦博)이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으면서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부필(富弼)ㆍ사마광(司馬光) 등 13인의 학덕(學德) 높은 노인들과 함께 만든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말한다.
대원(大元) 고(故) 장사랑(將仕郞) 요양로 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 고려국 정순대부(正順大夫) 검교성균대사성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檢校成均大司成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최군(崔君)의 묘지(墓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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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조(皇朝)의 진사(進士) 출신으로 동방에 유명한 이가 있으니, 그는 바로 계림(雞林)의 최수옹(崔壽翁)이다. 처음에 개주 판관에 제수되었는데, 그 지역이 외지고 직무가 번잡스럽자 다섯 달 동안 있다가 병을 핑계로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황조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국에서도 벼슬하기는 하였지만 재질이 기이하고 지조가 고상해서 시대에 용납되지 못하다가, 나이 54세인 지원(至元) 6년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6월 10일 임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지낼 날짜가 잡혔을 적에, 그의 아우인 감찰 규정(監察糾正) 지(潪)가 자기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묘지명을 청하며 말하기를 “우리 형님의 재질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는데, 우리 형님의 뜻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벼슬도 높이 오르지 못하고 수명도 오래 누리지 못한 채, 남에게 은택을 끼치지도 못하였으며 뒤를 이을 자식도 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또 유당(幽堂)에 명문(銘文)을 새겨서 그 행적을 기록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내가 형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 형님을 아는 이로는 그대만 한 자가 없으니, 그대가 명을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그의 세계(世系)를 차례로 적고 그의 행실을 서술하게 되었다.
군의 휘는 해(瀣)요, 일자(一字)는 언명보(彦明父)이다. 원조(遠祖) 윤순(允順)은 신라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수에 이르렀다. 그 뒤로 대대로 계림부(雞林府)에서 살았다. 증조 휘 모(某)는 경주 사병(慶州司兵)으로 군부 판서(軍簿判書)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모는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으로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백륜(伯倫)은 장원급제하여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으며, 고려 왕경(王京)의 유학 교수(儒學敎授)를 제수받았다. 그 뒤로 누차 승진하여 본국의 민부 의랑(民部議郞)에 이르렀으며 품계는 중현대부(中顯大夫)이다. 모친 임씨(任氏)는 진양군부인(晉陽郡夫人)에 봉해졌는데, 대호군(大護軍)으로 치사한 휘 모의 따님이다.
군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9세의 나이에 이미 시를 잘 지었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선배들이 크게 탄복하였다.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두 번 사부(詞賦)로 유사(有司)의 시험에 응시하였는데,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합격하였다. 처음에 성균 학유(成均學諭)로 있다가 파직당하고 다시 예문춘추관 검열(藝文春秋館檢閱)에 뽑혔는데 뒤이어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되었다. 얼마 뒤에 또다시 예문춘추관 주부(藝文春秋館注簿)에 선발되었고, 주부에서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승(成均館丞), 예문 응교(藝文應敎), 전교 부령(典校副令), 전의 부령(典儀副令), 검교 대사성(檢校大司成)을 역임하였다. 군의 이력은 이와 같다.
군은 글을 읽고 문사를 지음에 사우(師友)와 강습하는 도움을 받지 않았으되, 초연히 의리의 귀추를 자득하여 이단에 현혹되지 않고 속습에 빠지는 일이 없이 고인(古人)의 경지와 합치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이(同異)를 논할 적에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알면 당시에 존경을 받는 노사숙유(老師宿儒)라고 할지라도 힐난하고 절복(折伏)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확고히 견지하고 바꾸지 않았다. 군의 학문은 이와 같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연간에 과거(科擧) 설행(設行)의 조서가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배운 것을 시험해 보겠다고 하더니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년(1321, 충숙왕 8)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송 좨주(宋祭酒)가 그의 재주를 칭찬하며 누차 시로 표현하였으므로 이로부터 더욱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자기와 다른 자는 더욱 좋아하지 않고 더욱 배척하였다. 군은 또 높은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드리는 일을 잘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과감하게 발언을 하였으며 남의 선악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임용될 때마다 번번이 쫓겨나고 끝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벗으로 취하였고, 천명을 알아 걱정이 없었으며, 벼슬하고 안 하는 것으로 희로의 감정을 보이지 않고서, 오직 시와 술로 혼자 즐길 따름이었다. 군은 일찍이 본국의 명현(名賢)이 지은 글들을 뽑아서 그 제목을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군은 평생토록 집안의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고 졸옹(拙翁)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리고 뒤에는 도성 남쪽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면서 취족(取足)이라는 농원을 마련하고는 마침내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 산의 동쪽에 묻혔는데, 집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군을 아는 자들이 다투어 부의를 보낸 뒤에야 겨우 장례를 치를 수가 있었다.
군은 두 번 장가들었다. 전처는 검교 평리(檢校評理) 반영원(潘永源)의 딸로 1녀를 낳았는데 사인(士人) 지섭(池燮)에게 출가하였다. 후처는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 채흥(蔡興)의 딸로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들은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최군이여 / 嗚呼崔君
매인 곳 없이 홀로 고상하였나니 / 不羈不群
그 학문은 옛사람을 사숙하고 / 私淑其學
그 문장은 옛사람을 좋아하여 / 好古而文
분연히 세속에 이끌리지 않았고 / 奮不牽俗
미친 척하며 과감하게 말했다네 / 陽狂敢言
오래 살지는 못했어도 / 雖無其年
이름을 전할 수가 있고 / 名有可傳
아들은 비록 없다 해도 / 雖無其子
믿을 수 있는 아우가 있다네 / 弟有可倚
저들은 지위요 자신은 덕이니 / 彼位我德
어느 것이 과연 득이요 실이겠나 / 孰失孰得
군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으니 / 君自不疑
또 무엇을 서운해하리오 / 其又奚悲
사자산(獅子山)의 동쪽 / 猊山之東
봉긋한 이 묘소가 / 馬鬣之封
멀리 천년 뒤에까지 / 千載之下
졸옹의 존재를 알려 주리라 / 知有拙翁
고려국 봉상대부(奉常大夫)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 이군(李君)의 묘표(墓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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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有元) 지원(至元) 6년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10월 1일에 왕부단사관 첨의평리(王府斷事官僉議評理) 이공(李公 이제현(李齊賢)) 이 그의 문생인 정동행성 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 이곡(李穀)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일찍부터 우리 아이 달존(達尊)과 어울려 놀았으니 그 사람됨을 알 것이다. 그러니 그의 묘표를 지어 주면 좋겠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 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슬픔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이러한데 내가 어떻게 차마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군은 휘가 달존이요, 자는 천각(天覺)이다. 세계(世系)는 계림 이씨(雞林李氏)에서 나왔다. 군은 고(故) 임해군(臨海君) 이공 진(李公瑱)의 손자요, 영가군(永嘉君) 권공 보(權公溥)의 외손이요, 상당군(上黨君) 백공 이정(白公頤正)의 사위이니, 내외 모두 세상에 혁혁한 문벌의 집안이다. 무릇 도덕과 문장을 칭할 때에는 반드시 이 세 정승의 가문을 먼저 거론하곤 하는데, 군은 어려서부터 귀족 자제의 티를 전혀 보이지 않고서,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11세가 되었을 때에 가문의 공로를 인정받아 별장(別將)에 임명되었다. 18세에 문사에 능해 과거에 을과로 등제한 뒤에, 사보(思補)를 거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고, 뒤이어 감찰 장령(監察掌令)과 전의 부령(典儀副令)으로 영전하였다. 기묘년(1339, 충혜왕 복위년) 겨울에 존공(尊公 부친) 이 국란으로 인해 왕을 수행하여 원(元)나라로 들어가자 당시에 인심이 의구(疑懼)하였는데, 군은 말하기를 “나는 군부(君父)가 있는 것만을 알 뿐이다.”라고 하고는 필마로 따라갔다. 이듬해에 사태가 안정되고 왕이 정사에 복귀할 때에 미쳐서 전리 총랑(典理摠郞)으로 승진하였다. 사보 이상의 자리에 있을 때는 모두 관직(館職)을 겸하였다.
6월에 동쪽으로 돌아오다가 병에 걸린 나머지 수레에 실려 압록강을 건너와서 29일 신해에 길에서 죽었다. 장림역(長林驛)에 임시로 빈소를 차렸다가 8월 모 갑자에 영구(靈柩)를 맞아 오게 한 뒤에, 10월 모 갑자에 모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자녀는 5남매를 두었다. 장남 덕림(德林)은 나이 11세이고, 다음 수림(壽林)은 9세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이에 앞서 군이 태부인(太夫人)의 상을 당했을 적에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종족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그 뒤에 학업에 종사하여 글을 잘하고 일에 종사하여 재간을 보이자, 그가 가업을 제대로 이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었다. 하늘이 만약 이 사람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여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수명을 더 빌려 주지 않고 이렇게 했단 말인가. 아, 슬픈 일이다.
고려국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密直司右副代言宗簿令兼監察執義知版圖司事) 유군(柳君)의 묘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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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儒州 문화(文化)) 유씨(柳氏) 중에 천명을 받은 태조(太祖)를 도와서 나라를 개창한 공신이 있었다. 그 뒤로 경사가 이어지고 복덕을 향유하는 가운데 대대로 현철한 자손들이 이어 나왔다. 명왕(明王 명종(明宗)) 때의 재상(宰相)인 휘 공권(公權)은 학문을 좋아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죽을 때의 관직은 참지정사(參知政事)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었다.
이때 최충헌(崔忠獻)이 토적한 공을 끼고서 임금을 제멋대로 폐하고 세우는가 하면 그 자손들이 또 잇따라 정사를 전횡하였다. 그러다가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 무오년(1258)에 이르러, 재화와 덕망이 당시에 으뜸이었던 문간공의 손자 휘 경(璥)이 별장 김인준(金仁俊)과 모의하여 충헌의 증손 의(誼)를 복주(伏誅)하고 임금에게 정권을 돌림으로써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직에 공을 세웠으므로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관직은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正)인데, 이분이 군에게는 증조가 된다.
문 정공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휘 승(陞)을 낳았는데, 시호는 정신(貞愼)이다. 정신공이 문화군(文化君) 휘 인기(仁奇)를 낳았는데, 시호는 온정(溫靖)이다. 온정공이 첨의 중찬(僉議中贊) 휘 지숙(之淑) 시호 광절(光節)의 따님인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 김씨(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분들이 군에게 부모가 된다.
군의 휘는 보발(甫發)이다. 나이 16세에 문음(門蔭)으로 흥왕도감 판관(興王都監判官)에 제수되었고, 두 번 옮겨 낭장(郞將)이 되었다. 지원(至元) 2년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에는 소부 소윤(少府少尹)에 임명되었다가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로 전직하였다. 그리고 기묘년(1339) 봄에 밀직 대언(密直代言)으로 승진하면서 감찰 집의(監察執義)를 겸하였다. 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공손하여, 어려서부터 의릉(毅陵 충숙왕)의 인정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장차 크게 쓰려고 우선 납언(納言)의 임무를 맡겨서 풍기(風紀)의 직책을 섭행하게 한 것이었다.
군 은 가업을 깊이 생각하여 선조에게 욕됨이 없게 하려는 뜻을 지녔다. 그리고 바야흐로 한 시대에 공을 세워서 후세에 이름을 드리우려고 하였으며,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군에게 기대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의릉이 승하하면서 시사(時事)가 크게 달라지더니, 그 이듬해 8월 을미일에 군 역시 그만 병이 들어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부인 원씨(元氏)는 고(故) 검교 평리(檢校評理) 휘 선지(善之)의 따님이다. 고귀한 가문에서 덕성을 수양하고 대갓집 어진 남편의 짝이 되어 제사를 받들고 음식을 주관하면서 유순하고 법도 있게 하였다. 자녀는 5남매를 두었다. 장남 계고(繼高)는 현재 10세이고, 차남 상좌(尙左)는 8세이다. 장녀는 심양로 달로화적(瀋陽路達魯花赤) 홍천군(洪川君) 홀실첩목이(忽失怗木耳)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지유 낭장(指諭郞將) 홍유귀(洪有龜)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딸은 신양군(新陽君) 노영(盧瑛)에게 출가하였다.
9월 경신일에 도성 동쪽 대덕산(大德山) 기슭에 장례를 지낼 예정인데, 군이 평소에 왕래하던 사람 중에서 문사 가운데에는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부인이 생각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명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유씨가 성대하게 일어난 것은 / 柳氏之興
나라를 처음 세울 당시부터 / 與國竝焉
멀고 먼 근원에서 흘러 내려와 / 源其遠矣
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도다 / 流慶綿綿
문간공과 문정공으로 말하면 / 文簡文正
기예에 능하고 현능한 분들 / 旣藝旣賢
재상으로 동방을 다스린 것이 / 相我釐東
다섯 대를 연달아 내려왔다네 / 五葉蟬聯
생각하면 우리 군이 선조를 닮아 / 惟君克肖
가업을 이을 뜻을 독실히 지녔는데 / 志篤紹先
덕을 싫어하지 않을 하느님이 / 天未厭德
수명을 왜 길게 주지 않으셨나 / 胡不永年
누가 수요를 주관하는지 / 孰尸壽夭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 莫究其然
유실에 이렇게 명을 새겨서 / 刻銘幽室
후세에 길이 전하려 하노라 / 惟後之傳
대원(大元) 고 장사랑(將仕郞) 요양로 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 고려국 삼중대광(三重大匡)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시(諡) 문정(文貞) 안공(安公)의 묘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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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사(京師 연경(燕京)) 에 있을 적에 근재(謹齋)가 병들어 누웠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귀국한 뒤에 문병을 하였다. 근재가 나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에 오래 살아 있지 못할 것이네.”라고 하더니, 그의 아들 종원(宗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생각한다면 내 아이를 잊지 말아 주게.”라고 하였다. 그리고 묘지(墓誌)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내 평생에 자랑할 만한 일은 없지만, 내가 네 번 사사(士師 법관)로 있는 동안 백성 중에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심리(審理)해서 양민이 되게 했으니, 이것은 기록할 만한 일이 될 터일세.”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슬픈 생각이 들기에 우선 답변하기를 “병들었다고 해서 모두 낫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왜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아, 근재는 명(命)을 아는 군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이 죽고 나서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할 적에, 나와 동년인 그의 아우 보(輔)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아, 나는 일찍이 공에게 수업을 한 인연도 있는데, 공이 또 직접 나에게 부탁하기까지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공 의 휘는 축(軸)이요, 자는 당지(當之)이니, 복주(福州) 흥녕(興寧) 사람이다. 증조 득재(得財)와 조부 희서(希諝)는 모두 본군의 호장(戶長)을 지냈다. 부친 석(碩)은 급제하였으나 끝내 은거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직은 모두 증직된 것이다. 모친 흥녕군태부인(興寧郡太夫人) 안씨(安氏)는 같은 고을 사람인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성기(成器)의 따님이다.
공 은 나면서부터 영특하였다. 그리고 글을 읽을 줄 알면서부터 배우기에 힘써 문사에 능한 결과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진사시(進士試)에 등제하였다. 그리하여 금주 사록(金州司錄)에 조용되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검열(檢閱)과 수찬(修撰)에 뽑혔으며, 다시 향시에 합격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었다. 계해년(1323, 충숙왕 10)에 또 제일명(第一名)으로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갑자년(1324)에 경사(京師)에 가서 회시를 볼 적에 정대(廷對)에서 제삼갑(第三甲) 7인의 한 사람으로 급제하여, 칙명으로 개주 판관(蓋州判官)을 제수받았다.
당시에 충숙왕이 4년째 연곡(輦轂 연경) 에 억류되어 있었다. 이에 공이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우환을 당하면 신하는 치욕스럽게 여겨야 하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 우리들이 배운 바는 이와 같다.”라고 하고는, 글을 올려 왕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변호하니,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성균 악정(成均樂正)에 뛰어 올려 임명하였다. 개주 태수(蓋州太守)가 사람을 보내 예의를 갖춰서 청하였으나 왕이 바야흐로 공을 중용할 뜻을 굳히고 있었으므로 국도(國都)를 떠나 임소로 갈 수가 없었다.
악정을 거쳐 전법(典法)ㆍ판도(版圖)ㆍ군부(軍簿)ㆍ전리(典理)의 총랑(摠郞)으로 전직되었다가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이 왕위에 있을 적에 강릉도(江陵道)를 존무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때의 문집으로 《관동와주(關東瓦注)》가 있다. 그 뒤에 다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와 지전법사사(知典法司事)에 임명되었다.
충 숙왕이 복위하고 나서 영릉에게 총애를 받았던 자들을 모두 배척하였다. 혹자가 배척당한 자와 공이 친하다고 하는 바람에 체직(遞職)을 당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가 잘해서 얻었는데, 친구가 못해서 잃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기용되어 전법 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또 내시 중에 세도를 부리는 자의 미움을 받아서 파직당하였다.
영릉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 판서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금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인 이공수(李公遂)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뽑았다고 칭하였다. 판서를 거쳐서 감찰 대부(監察大夫)로 전직하였다. 악정 이상은 항상 관직(館職)을 겸대하여, 헌사(憲司)의 장관으로 있을 때에도 겸대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 보내는 표전(表箋)과 사명(詞命) 중에는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에 검교 평리(檢校評理)로 있다가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상주는 복주(福州)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이때 태부인(太夫人)이 상재(桑梓 향리)에 계셨으므로 왕래하여 문안을 드리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갑 신년(1344, 충목왕 즉위년) 봄에 왕이 신정(新政)을 행하면서 맨 처음에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논하였다. 이에 공을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불렀다가 뒤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시켰다. 이듬해에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가하고, 또 찬성사(贊成事)와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가하였다.
정해년(1347) 가을에 병에 걸렸다. 이때 흥녕군(興寧君)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대개 권세를 부리는 자가 우리 유자(儒者)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 중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자 예전대로 복직하게 되었다.
무자년(1348) 봄에 병이 다시 발작하였다. 이에 치사를 청하니, 6월 초하루에 다시 흥녕군을 제수하고, 품계를 올려 관부(官府)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달 21일에 부음이 들리자,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예법에 맞게 조의를 표하게 하고, 시호를 내려 문정(文貞)이라고 하였으며, 백관이 모두 모인 가운데 장례를 행하게 하였으니, 애영종시(哀榮終始)의 대우를 부족함이 없이 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7월 11일에 대덕산(大德山)에 장사 지냈으니, 향년 67세였다.
공 의 배필인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는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귀(龜)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종기(宗基)는 관직이 보마배 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이었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 종원(宗源)은 급제하여 지금 유비창 부사(有備倉副使)로 있다. 딸은 별장(別將) 정양생(鄭良生)에게 출가하였다.
공에게는 아우가 두 명 있다. 보(輔)는 급제한 뒤에 경사(京師)의 을유년 과거에 입격하여 요양성 조마(遼陽省照磨)에 제수되었는데 근성(覲省)하러 귀국했다가 지금 우대언(右代言)으로 있고, 집(輯)은 급제하여 지금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있다. 선공(先公)이 일찍 작고하였으므로 공이 두 아우를 가르치면서 자기 소생과 다름없이 대하며 성인(成人)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아우들이 공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였다고 한다.
본국의 제도에 의하면, 세 아들이 등과(登科)할 경우에는 국가에서 그 모친을 종신토록 봉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공이 두 아우와 함께 이미 등제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중제(仲弟)와 함께 황조(皇朝)의 과거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하였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할 것인데, 이 역시 공이 가르쳐 길러 준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은 평소에 마음가짐이 공정하였고 집안에서의 몸가짐이 근검하였다. 발언할 때에는 명백하게 하고 회피하는 말이 없었으며, 근무할 때에는 부지런히 하고 게으른 기색을 보이는 적이 없었다. 선을 보면 칭찬해 마지않았기 때문에 좋은 평판이 많았고, 악을 보면 피하고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하는 소리가 적었다. 자신이 거하는 곳을 근재(謹齋)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그의 심지를 알 만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수를 누렸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謂非壽耶
연세가 칠순에 가까웠으니 / 年薄七旬
귀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謂非貴耶
지위가 제군의 으뜸이었으니 / 位冠諸君
아우도 있고 아들도 있고 / 有弟有子
덕도 남기고 말도 남기신 분 / 有德有言
나의 이 명 아첨이 아니오라 / 我銘不諛
공의 봉분 그대로 옮긴 것이라오 / 維公之墳
[주D-001]애영종시(哀榮終始) : 생영사애(生榮死哀)와 같은 말로, 생전이나 사후 모두 영예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살아서도 영광이요, 죽어서도 애도를 받는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2]덕도 …… 분 : 훌 륭한 덕에 걸맞은 훌륭한 말을 문집을 통해서 후세에 남겼다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덕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이에 합당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꼭 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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