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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부임하는 이 지평(李持平)을 전송한 시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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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명(神明)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나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신명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오직 제왕만이 하나의 일로 간주해서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구분이 엄격하게 정해져서 문란시킬 수 없는 점이 있다. 대 체로 천자(天子)가 된 뒤에야 하늘과 땅의 신명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고, 제후(諸侯)가 된 뒤에야 산과 강의 신명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으며, 대부(大夫)가 된 뒤에야 다섯 곳의 제사를 올릴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례(儀禮)를 기록하는 자가 이미 언급해 놓은 터이다.
국가에서 동한(東韓)의 영토를 전제(專制)하게 된 뒤로부터, 사전(祀典)에 들어 있는 경내의 모든 산과 강에 대해서는 매년 두 차례씩 조정의 신하를 뽑아 임금 대신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니, 그 사신을 이름하여 제고(祭告)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피고 풍속의 미악(美惡)을 관찰하게 함은 물론 공부(貢賦)를 상고하고 제도를 동일하게 하는 가운데 널리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고 형벌과 시상을 행하면서 상의 하문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그 사신의 이름을 또 안렴(按廉)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두 사신의 임무를 한 몸에 아우르고서 군읍(郡邑)을 두루 안찰(按察)하며 순행(巡行)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방을 순행하며 살폈던 고대의 유법(遺法)이라고 하겠다. 임금을 대신해서 일을 행하게 된 만큼 그 존귀하고 영광스러움은 다른 사신들이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지만, 일단 그 신분이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되었고 보면 그 책임의 막중함이 또 어떠했다고 하겠는가.
신 하가 되어서 조정의 반열에 선 이상에는 품계의 높고 낮음을 굳이 따질 것 없이 권세가 있는 지위에 올라서서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어야 마땅하리라고 여겨진다. 물론 인사 행정을 주관하는 이부(吏部)라든가 학문을 논하고 건의를 올리는 관직(館職)과 같은 곳도, 청망(淸望)의 요직이요 화려한 시종(侍從)의 직책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풍속과 기강을 담당하는 관아에 몸을 담고서 손에 간책(簡册)을 쥐고 얼굴색을 엄숙히 한 가운데 어전(御殿)과 섬돌 사이에 서서 기필코 말과 행동으로 직간(直諫)하여 임금이 받아들이게끔 하는 직책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이런 두 가지 중책을 한 몸에 아우른다는 것은 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나의 동년(同年)인 완산(完山 전주(全州)의 옛 이름) 이군(李君)은 감찰사 지평(監察司持平)으로 있다가 명을 받고 경상도 안렴사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내가 말한 한 몸에 두 가지 중책을 아우른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조정의 사대부들이 시를 지어서 그의 앞길을 찬미하였는데, 정언(正言) 곽군(郭君)이 나를 찾아와 서문을 청하면서 지평(持平)의 뜻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이군(李君)은 독실한 인재로서 정밀하고 민첩하게 재질을 발휘한 결과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출입하면서 거둔 성적(聲績)이 이미 성대하기만 하다. 그러니 감찰사에 몸을 담고 있다가 다시 부월(斧鉞)을 쥐고 지방에 나아가 임금 대신 제사를 지내고 사방을 순행하여 살핌으로써,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여 분발시키게 된 것이 당연하다고도 하겠다. 이군은 앞으로 신명(神明)에게 제사를 공경히 올려 반드시 흠향(歆饗)하고 반드시 강림(降臨)하게 함으로써 풍우(風雨)가 제때에 이르게 하고 온갖 복이 모두 모여들게 할 것이요, 인민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관리는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게 함으로써 온 경내에 화기(和氣)가 훈훈히 감돌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에 돌아와 전리(田里)의 태평가(太平歌)를 바치면서 상의 덕을 드러낼 것이 또한 확실하다고 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이 내용으로 서문을 삼게 하였다.
[주D-001]대체로 …… 터이다 : 《예 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천자는 천하의 명산 대천 어디나 제사를 지낼 수 있으나, 제후는 자기 영토 안의 산과 강에만 제사 지낼 수 있다. 오사(五祀는 봄과 초여름과 늦여름과 가을과 겨울에 각각 지게문[戶]과 부엌[竈]과 집 중앙의 토지신[中霤]과 대문[門]과 한길[行]에 제사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사방을 …… 유법(遺法) : 《주역(周易)》 관괘(觀卦) 상사(象辭)에 “선왕이 이 관괘를 보고서, 사방을 순행하며 두루 살피고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여 교화를 베풀었다.[先王以省方 觀民設敎]”라는 말이 나온다.
《급암시집(及菴詩集)》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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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六義)가 일단 무시된 가운데 성률(聲律)과 대우(對偶)의 작법(作法)이 또 세상에 나오면서 시가 극도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시(古詩)가 변해서 제(齊)ㆍ양(梁)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가늘어지고 유약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율시(律詩) 역시 만당(晚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만 잘게 부서져서 좀스럽게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유독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가 출현하여 여러 가지 시체(詩體)를 겸비하고서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작품으로 내놓곤 하였는데, 그 드높은 시풍(詩風)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고금(古今)의 모든 시들을 압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 사이에 초연히 묘오(妙悟)한 면모를 보이면서 세속의 흐름에 빠지지 않은 자로는 도연명(陶淵明)이나 맹호연(孟浩然) 같은 이들을 들 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어느 시대이고 간에 없기야 했겠는가마는, 그들의 시집이 편집되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드물기만 하였으므로 아쉬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도연명과 맹호연의 두 시집을 보더라도 겨우 약간의 시편(詩篇)만 남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불만스러운 탄식을 발하곤 하는데,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런 시집을 통해서나마 천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사람들을 알 수가 있고, 그리하여 노두(老杜 두보의 별칭)로 하여금 천지 사이에서 자기 혼자 아름다움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였고 보면, 편집을 해서 후세에 전한 그 공로를 어찌 작게 평가할 수가 있겠는가.
또 더군다나 당(唐)나라의 한자(韓子 한유(韓愈))나 송(宋)나라의 증공(曾鞏)과 소식(蘇軾)으로 말하면, 천하에서 문사(文辭)를 잘 짓기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인데도 정작 시도(詩道)의 측면에서 보면 마음에 차지 않는 점이 있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유감으로 여겨 왔다. 그러고 보면 시다운 시에 대해서 또 어떻게 기교가 부족하다거나 양이 적다는 등의 이유를 가지고 따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되뇌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급기야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선생의 시를 읽어 보고 나서는 이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선 생의 시는 담박한 듯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화려한 듯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는데, 문자의 표현 속에 깃든 뜻이 참으로 심원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맛이 우러났다. 그리하여 선생의 시도 어쩌면 초연히 묘오(妙悟)한 면모를 보이는 유파에 속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였으니, 후세에 전해질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선생의 외손(外孫)인 제민(齊閔 김구용(金九容)의 초명(初名))과 제안(齊顔) 형제는 모두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왕년에 정신없이 피난을 떠날 적에도 이 시집을 분실하지 않고 제대로 간수하고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서문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가 그 뜻을 그지없이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그 시집의 첫머리에다 이렇게 서문을 써 주게 되었다.
[주D-001]육의(六義) : 《시경(詩經)》에 나타는 문학의 창작 정신 및 원칙을 말하는데, 시의 작법상 세 가지의 체제라 할 풍(風)ㆍ아(雅)ㆍ송(頌)과 세 가지의 표현 방법이라 할 부(賦)ㆍ비(比)ㆍ흥(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농상집요(農桑輯要)》 후서(後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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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려(高麗)의 풍속은 그저 질박하고 너그럽기만 할 뿐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에는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장마나 가뭄이 들기만 하면 번번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 또 자신들의 생활은 매우 빈약하기만 해서 귀천(貴賤)과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음식이라고 해야 채소나 건어물 혹은 육포(肉脯) 따위가 고작이요, 미곡(米穀)만 중시하고 기장 같은 곡식은 경시하는가 하면 삼베나 모시만 많이 생산하고 명주나 무명에는 관심이 적은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으로는 뱃속이 허전하고 밖으로는 살을 제대로 감싸지 못한 나머지, 그들을 바라보면 마치 병들었다가 금방 일어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열에 여덟아홉이나 되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상례(喪禮)나 제례(祭禮) 때에는 채식만 하고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다가, 잔치라도 한 번 벌이게 되면 소와 말을 때려죽이고 야생의 짐승들을 사냥해서 푸짐하게 먹는 광경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사람이 일단 이목구비를 갖춘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이상에는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욕망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볍고 따뜻한 옷을 몸에 편하게 여기고 살지고 맛난 음식을 입에 달게 여기면서 넉넉하게 남겨 두기를 좋아하고 모자라거나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야말로, 오방(五方 중국과 사방의 주변 민족)의 사람들 모두가 천성적으로 똑같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고려만은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단 말인가.
풍성 하게 하되 사치스럽게 되지 않도록 하고 검소하게 하되 누추하게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인(仁)과 의(義)에 근본을 두고 하나의 표준을 만든 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중제(中制 중용의 도에 맞는 예법)인 만큼, 사람들이 일을 행할 때마다 이를 아름답게 여기면서 따르고 있는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마리의 닭이나 두 마리의 돼지 같은 것은 사람의 손으로 길러지기만 할 뿐 사람의 힘을 돕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데도 차마 죽이지를 못하고, 소와 말은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해 주는 공이 무척이나 큰데도 모질게 때려잡고 있다. 또 사냥을 나가서 치달리는 수고를 하다 보면 혹 몸을 상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나오는데도 이런 일은 과감하게 행하고, 추환(芻豢)을 우리 속에서 꺼내어 잡는 일은 감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경중(輕重)을 식별하지도 못한 채 의리를 해치고 중제(中制)를 무너뜨리고 있는데, 본심(本心)을 잃는 것이 이 정도까지 이르게 한 것이 어찌 백성들의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 점을 나름대로 가슴 아프게 생각해 왔다.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면서 왕도정치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나의 뜻이었는데, 결국에는 이를 행할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 와서 내가 또 어떻게 하겠는가.
봉 선대부(奉善大夫) 지합주사(知陜州事) 강시(姜蓍)가 나에게 글을 급히 보내 말하기를, “《농상집요》를 행촌(杏村 이암(李嵒)) 이 시중(李侍中)이 외생(外甥)인 판사(判事) 우확(禹確)에게 주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다시 이 책을 우확에게서 얻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의식(衣食)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과 전재(錢財)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을 비롯해서 씨 뿌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번식시키는 방법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조목별로 같은 내용끼리 정리해서 세밀하게 분석하며 환하게 밝혀 놓았으니, 실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에 있어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제가 합주(陜州 합천(陜川)의 옛 이름)의 치소(治所)에서 판각하여 널리 전파시키려 하는데, 글자가 크고 책이 무거워서 멀리 보내기에는 어려운 걱정이 있기에 이미 작은 해서(楷書)로 베껴서 다시 적어 놓았고, 안렴사(按廉使)로 있는 김공 주(金公湊)가 또 비용에 보태 쓰도록 포목 약간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이 책 뒤에다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 역시 이 책에 대해서는 일찍이 완상(玩賞)을 하며 음미한 바가 있다. 그런데 내가 우리 고려의 풍속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걱정하는 마음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또 조정에 몸을 담고 있었던 기간 역시 하루나 이틀 정도가 아니었는데, 조정에 건의해서 이 책을 간행하도록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라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강군(姜君)의 뜻이 나와 같다는 것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면서 왕도정치를 일으키는 그 일로 말하면 또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인데, 강군은 이에 대해서도 일찍이 강구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 일을 기필코 시행해 보려고 한다면, 이단을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고려의 풍속을 변화시킬 길이 없을 것이요, 따라서 이 책에 기재되어 있는 것들도 한갓 글자로만 남게 될 것이니, 강군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주D-001]다섯 마리의 …… 돼지 : 《맹 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다섯 마리의 암탉[五母雞]과 두 마리의 암퇘지[二母彘]가 새끼 칠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노인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해서 말한 것이다.
[주D-002]백성의 …… 일으키는 것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원문의 ‘제민산(制民産)’ ‘흥왕도(興王道)’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중순당집(中順堂集)》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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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詩)라는 것은 세도(世道)와 중요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 속에 임금의 교화와 백성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교화가 쇠퇴해지면서 《시경(詩經)》의 시가 변하여 이소(離騷)의 시가 되었는데, 한(漢)나라 이래로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의 시가 출현하면서는 시의 변화가 극도에 이르게 되었다. 옛날의 고시(古詩)와 후대의 율시(律詩)를 함께 펼쳐 놓고 비교해 보면 그 질박함과 공교한 면에서는 비록 차이를 보이지만, 그래도 각자의 성정(性情)을 쏟아내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기의 방식대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 시의 표현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운을 살펴보면 그 작자가 처했던 세도(世道)의 승강(升降)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 수가 있다.
금 남(錦南 금성(錦城) 즉 나주(羅州)의 남쪽 교외)의 우수(迂叟 나흥유(羅興儒)) 나 판서(羅判書)가 현릉(玄陵 공민왕의 능호)의 지우(知遇)를 받고는 연구(聯句)로 시를 지어 3품(品)의 직질(職秩)에 오르자, 도성 안의 사대부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면서 모두 90편의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작품들이 마치 제왕의 장서각에 들어 있는 시들처럼 찬란하게 빛을 발하여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 뒤에 우수가 자청하여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건너가서는 이색적인 풍물을 접하면서 감회가 일어날 때마다 문득 시로 표현하여 모두 250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일본 조계(曹溪)의 선승(禪僧 양유(良柔))이 또 20편의 시를 지어서 그에게 증정하였다. 이에 사씨(史氏)가 그 원본을 구해 베껴 써서 소장한 뒤를 이어 대신(臺臣)이 또 한 번 보기를 청하였으며, 그 밖에 부중(府中)의 사대부들도 서로들 다투어 직접 눈으로 보려고 한 지가 3년이나 되었건만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우수가 말하기를,
“내가 우(迂)라는 글자로 나의 호를 지은 것은 ‘세상 물정에 어둡다[迂於世]’는 뜻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관직이 육조(六曹)의 상서(尙書)에까지 이르렀고 보면 과연 우(迂)라는 호에 걸맞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내 시는 옛날의 고시처럼 시고 차기만 해서 후대의 율시처럼 살지고 맛난 시의 작자들로부터 기롱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그런 것일 따름이니, 이렇게 본다면 우(迂)라는 호가 어찌 나에게 걸맞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의 이름을 여러 유자(儒者)들의 문집 속에 실어 놓게 되었고 보면, 후세에 전해질 것이 분명하니 얼마나 다행이라고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그 시들이 한군데로 모여 있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라서, 내가 장차 한데 합쳐 문집으로 엮어 볼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또 사람들이 그 문집을 서로 전하면서 감상하기가 어려울 듯하기에, 아예 판각해서 사람들마다 모두 열람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금남(錦南)에 우수(迂叟)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였다. 그러고는 나에게 와서 서문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제후국(諸侯國)의 시를 채집하게 하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이다. 따라서 뒷날 이 문집이 모두 상국(上國)의 관청에 보내지게 되면, 우수의 이름이 더욱 널리 전파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의 시들도 우수 덕분에 중국에까지 퍼질 것이니, 이는 우수 혼자만의 행운이 아니요 일본으로서도 그런 다행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선왕(先王 공민왕)께서 유학(儒學)을 숭상하신 성대한 덕이 국내는 물론이요 국외에까지 흘러넘치게 된 데에는 우수의 이 문집이 또한 일조를 했다고 할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갖추어 써서 이러한 내용을 맨 첫머리에다 실어 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중순당(中順堂)은 우수가 한가로이 거하는 처소이다. 시는 지금 몇 권으로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주D-001]자신이 …… 있으니 : 원문의 ‘적기적(適其適)’은 《장자(莊子)》 변무(騈拇)의 “남이 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지 못하는 자[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者]”가 되지 말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천자(天子)가 …… 제도이다 : 《예 기》 왕제(王制)에 “천자가 5년에 한 번씩 천하를 순수(巡守)할 적에, 태사(太史)에게 명하여 시를 채집하게 한 뒤에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는 자료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나오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옛날에 시를 채집하는 관원을 두고서, 왕자(王者)가 그 시들을 통해 풍속을 관찰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일구 상인(一漚上人)에게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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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曹溪)의 승려 중에 종해(宗海)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사연을 물어보니, 불교의 학설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우리 하서(夏書)의 ‘조종우해(朝宗于海)’라 는 글을 줄인 것처럼 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를 찾아와서 호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내가 하서의 말을 가지고 일러 주는 대신에 그가 그 이름을 얻게 된 학설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거울이 물건을 비춰 줄 때에 아무런 사심이 없이 그저 그 대상에 응해서 그대로 비춰 주는 원리를 취한 것이었다.
바다의 크기로 말하면 하늘과 땅 사이의 어떤 물건도 여기에 비교될 것이 없기 때문에, 물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가 땅을 끌어다 대면서 ‘땅도 물이 실어 주는 것[水之所載]’이 라고 했던 것이었다. 땅이라고 하면 하늘과 짝할 정도로 큰 것이라고 할 것인데, 땅도 물이 실어 주는 것이라고 했고 보면 물을 하늘에 비교해 볼 때에도 물과 하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크고 작은지 알 수 없다고 할 것이니, 물의 그 규모를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지금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살펴보면,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쳐서 포말(泡沫)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포말이라는 것은 물과 관련된 현상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것이니, 가장 작은 것을 가지고 가장 큰 바다와 어떻게 짝 지을 수가 있겠는가. 형세상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니, 이는 팽상(彭殤)이나 붕안(鵬鷃)의 설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 지만 이치상으로 보면 바다와 물방울은 그 명칭만 다를 뿐이니, 물방울이 바다로 돌아가고 바다가 물방울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자취를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로 녹아 없어져서 더 이상 쪼개고 나눌 것이 없게 되었고 보면, 이치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그 물건의 됨됨이 역시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자(佛者)의 설을 살펴보면, 상(相)과 적(跡)이 끊어져 없어진 경지를 표현할 때에는 공(空)으로 돌리고 항(行)과 열(列)을 나누어서 펼쳐 놓을 때에는 바다로 돌리고 있으니, 이는 바다가 비록 크기는 하지만 그 체성(體性)을 떠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적멸(寂滅)의 바다라고도 하고 또 생사(生死)의 바다라고도 하는데, 적멸의 바다 속에 떠 있는 물거품들은 즉 이른바 제불(諸佛)을 가리키고 생사의 바다 속에 떠 있는 물거품들은 즉 이른바 중생(衆生)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지금 상인은 장차 어느 바다의 물거품이 되려고 하는가? 또 모르겠다마는, 생사와 적멸이라는 것이 과연 둘이라고 할 것인가, 하나라고 할 것인가? 상인이 상인의 스승에게서 얻은 것을 가지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그 안에만 안주하면서 만족을 취한다면, 혹 맹랑한 결과를 면치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대유(大儒)를 널리 찾아다니면서 물어야 할 것인데, 그러면 상인에게 제대로 일러 줄 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상인의 속성(俗姓)은 조씨(曺氏)로서 나주(羅州) 회진현(會津縣) 사람이다. 입선(入選)을 거쳐 승과(僧科)의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에, 죽원(竹院)에서 학자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나이는 지금 31세요, 대선사(大禪師)인 총 남산(聰南山)의 제자이다. 사람을 논할 때에는 으레 그의 출신을 언급하는 까닭에, 여기에다 아울러 적어 넣게 되었다.
[주D-001]조종우해(朝宗于海) : 《주 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에 제후가 천자를 봄에 조회하는 것을 조(朝)라 하고, 가을에 조회하는 것을 종(宗)이라 하였고, 《서경(書經)》 하서(夏署) 우공(禹貢)에 “모든 강물이 바다에 들어와 조회한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땅도 …… 것 :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물은 하늘을 띄우고 땅을 실어 주는 것이다.[水浮天而載地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팽상(彭殤)이나 붕안(鵬鷃)의 설 : 아 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현격한 것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팽상은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와 어린아이 때 죽은 상자(殤子)를 뜻하고, 붕안은 대붕(大鵬)과 메추라기의 병칭인데, 《장자》 제물론(齊物論)과 소요유(逍遙遊)에 이 말이 나온다.
[주D-004]입선(入選) : 참학입선(參學入選)의 준말로, 승과(僧科)의 소과(小科)에 합격한 것을 말한다.
환옹 상인(幻翁上人)에게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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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탄여(坦如)가 나의 집을 찾아와서 청하기를,
“저 는 조계종(曹溪宗)에 속한 승려로서, 올해 실시한 정사년의 승과(僧科)에서 대선(大選 승과에 합격한 자의 초급 법계)에 뽑혔습니다. 속성(俗姓)은 영일(迎日)의 정(鄭)이고, 연복사(演福寺)의 주지인 대선사 죽암(竹菴) 진공(軫公)이 바로 저의 스승이십니다.
제가 태어난 지 27년이 지나도록 아직 호(號)가 없어서 동료들이 저의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어렵게 여기자 저의 스승께서 환옹(幻翁)이라고 지어 주셨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니 바로 《원각경(圓覺經)》의 보현장(普賢章)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이 호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렸더니, 저의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여(如)야, 너의 탄여(坦如)라는 이름 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하겠느냐. 그것은 바로 탄탕탕(坦蕩蕩)의 뜻으로서, 마음속으로 집착하는 일이 없고 외물(外物)에 기대는 일이 없이 종용(從容)히 자득(自得)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니, 이렇게 하면 반드시 여여 부동(如如不動)의 경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러고는 스승께서 다시 ‘비록 그렇긴 하지만 네가 이 세계라는 것을 보면 환(幻)이 아니더냐? 우리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도 환이 아니더냐? 삼세(三世)의 교주(敎主)와 제방(諸方)의 조사(祖師)들도 환이 아니더냐? 내가 말하고 네가 듣는 것도 환이 아니더냐?’라고 물어보시기에, 제가 그때마다 환이라고 모두 답변을 올렸더니,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듣건대 한산(韓山)의 목은자(牧隱子)가 지금 바야흐로 환어(幻語)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하니, 네가 가서 그 설명을 구하면 필시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부탁드리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스 님의 스승으로 말하면, 의관(衣冠)의 후예로서 고량진미와 화려한 비단옷으로 자신의 몸을 기르면서,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가지고 자신의 성정(性情)을 수양해 오셨던 분이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초연히 홀로 출가(出家)하여 세상일을 뒤돌아보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여환(如幻)의 진정한 의취(意趣)를 터득한 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분이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 이에 대해서 배운 바가 없다.”
하고는, 상인의 말을 통해서 그 설을 구명(究明)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에 상인이 말하기를,
“지금의 이 세계는 기 세간(器世間)이요, 중생은 바로 중생세간(衆生世間)이요, 제불(諸佛)은 바로 지정각 세간(智正覺世間)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개의 세간이 서로들 구애받는 일이 없이 융화하는 까닭에, 여여(如如)의 지혜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독자적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모두가 환(幻)이 머무는 곳이라고 말할지라도 여여(如如)의 지혜가 아니면 환화(幻化)임을 알아낼 수가 없고, 환화를 통하지 않으면 여여의 지혜를 구할 수가 없으니, 사(事)와 이(理)가 어찌 혹시라도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상인은 참으로 원기(圓機)의 경지를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상인의 말을 들어 보건대, 하나는 여여(如如)가 환화(幻化)와는 다르다는 입장[如其幻]에서 설명한 말이요, 하나는 여여가 바로 환화라는 입장[如且幻]에서 설명한 말로 여겨진다. 처음에 여기환(如其幻)의 시각에서 살펴보게 되면, 물(物 인식 대상인 객체)이 있고 아(我 인식 주체인 자아)가 따로 있으니 이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 하겠지만, 나중에 여차환(如且幻)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물(物)도 없고 아(我)도 없어질 것이니 이는 대립 관계가 해소된 상태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物)과 아(我)를 모두 잊은 가운데 심(心)과 적(跡)이 둘이 아니게 될 것이니, 이는 그야말로 지극한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뒷날 환옹(幻翁)이 연좌(宴坐 좌선(坐禪))를 하고 정념(正念)을 닦아 나가다가, 이 설에 대해서 체득하여 깨닫는 점이 있게 되거든, 내가 지금 말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나에게 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서 상인의 말을 경청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탄여가 또 묻기를,
“우리 스승께서는 바야흐로 선생께서 환어(幻語)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고 일컬으셨는데, 어(語)가 환(幻)이 되는 이유에 대해서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우 리가 소리를 낼 적에는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치아가 상호 의존해서 잘 어울려야만 하나의 성음(聲音)이 이루어지고, 글로 쓸 적에는 붓과 먹과 종이와 벼루와 물이 상호 의존해서 잘 어울려야만 하나의 글씨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전주(轉注)와 가차(假借)와 형성(形聲)과 사의(事意)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말하면, 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가 만약 이들 요소들을 하나씩 쪼개서 분리해 놓는다면, 소리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할 것이며 글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 나온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본다면 이것이 환(幻)이 아니고 또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더니, 탄여가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우리 스승께서 선생을 참으로 잘 아셨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불서(佛書)에서 말하는 ‘환이 아닌 것[非幻]〉에 대해서도 선생께서는 필시 알고 계실 것이니, 제가 이에 대해서도 배웠으면 합니다.”
하였다.
[주D-001]탄탕탕(坦蕩蕩) : 흉금이 널찍하게 툭 터져서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군자는 탄탕탕한 반면에, 소인은 늘 근심 걱정에 휩싸여 있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2]여여 부동(如如不動) : 환 (幻)처럼 변화무쌍한 현상계에서도 변함이 없이, 언제나 ‘원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진여(眞如) 즉 법신(法身)을 뜻하는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원각경(圓覺經)》 보현장(普賢章)에 “일체중생의 갖가지 환화(幻化)는 모두 여래(如來)의 원각 묘심(圓覺妙心)에서 나온다.……여러 가지 환(幻)이 모두 사라져도 각심(覺心)은 부동(不動)이다.……환(幻)이 없어지고 난 상태를 이름하여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여환(如幻) : 《원각경》 보현장에 누차 나오는 말로, 이 세상의 일체 현상이 모두 환(幻)처럼 실체가 없다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의 사상을 말하는데, 보살은 모름지기 여환 삼매(如幻三昧)를 닦아야 한다는 말도 그 안에 함께 언급되어 있다.
[주D-004]지금의 …… 속합니다 : 불 교의 이름바 〈삼종세간(三種世間)〉에 대한 설명인데,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본문의 내용은 《화엄경(華嚴經)》 공목장(孔目章)에 나오는 설을 가리킨다. 기 세간은 산하대지(山河大地) 즉 국토를 말하고, 중생세간은 불계(佛界)에서 지옥(地獄)에 이르는 10개의 유정(有情)의 세계를 말하고, 지정각 세간은 여래(如來)가 큰 지혜를 구비하고서 삼계(三界)의 윤회(輪廻)를 초월한 출세간(出世間)을 말한다.
[주D-005]사(事)와 이(理) : 《화 엄경》의 이른바 ‘사법계(四法界)’ 가운데 사법계(事法界)와 이법계(理法界)를 가리킨다. 사법계는 현상계(現象界)를 의미하고 이법계는 본체계(本體界)를 의미하는데, 뒤의 본문에 나오는 여여(如如)와 환화(幻化)는 각각 이법계와 사법계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D-006]원기(圓機) : 《장 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말인데, 도추(道樞)에 입각하여 펼쳐 내는 환중(環中)의 세계를 뜻하는 말로 이 세계의 선악 시비 등 상대적인 관계를 초월하여 외물(外物)에 구애받지 않고 소요(逍遙) 자적(自適)하는 경지를 말한다.
[주D-007]정념(正念) : 석가가 최초로 설법한 이른바 ‘팔정도(八正道)’의 하나로, 만법(萬法)의 현상과 본질을 여실히 관찰하며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8]전주(轉注)와 …… 사의(事意) : 육서(六書), 즉 한자가 만들어진 여섯 가지의 원리를 열거한 것인데, 형성(形聲)은 상형(象形)과 형성(形聲)을 가리키고, 사의(事意)는 지사(指事)와 회의(會意)를 가리킨다.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 있는 선각(禪覺)의 진당(眞堂)을 위해서 지어 준 시 병서(幷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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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려 지선(志先)과는 내가 일면식(一面識)도 없는데, 국신리(國贐里)의 노파가 그를 끌고서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스승인 선각(禪覺)의 탑(塔)에다 선생께서 명(銘)을 지어 주셨으니, 저희들이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생의 망극한 은혜를 입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우리 스승의 진당(眞堂)에다 기록해 둘 한마디 말씀을 청하려고 선생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선생께서 이번에도 물리치지 않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우리 스승은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모습을 드러내어 기틀에 응하셨으니, 비유하자면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했던 것과 같다고도 하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회암사(檜巖寺)는 기림(祇林)과도 같고, 신륵사(神勒寺)는 쌍림(雙林)과 같다고도 할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저희들이 부여잡고 울부짖으면서 정신이 아뜩해져 까무러친다 한들 그것이 끝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화를 베푸신 자취를 뒤돌아보아도, 달이 허공 속에 떨어져 남은 빛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만 같습니다. 그런 중에도 사리(舍利)가 남아 있어서 극진하게 받들어 모실 수가 있고, 도모(道貌 도인의 초상화)가 남아 있어서 널리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신륵사의 석종(石鍾)으로 말하면, 실로 스승의 정골(頂骨) 사리를 받들어 모신 곳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뒷날 이 사리에 예배하는 이들이 우리 스승의 도모(道貌)가 어떠한지 알 수가 없고, 우리 스승의 풍도(風度)를 흠모하면서도 그 의표(儀表)가 어떠한지 알지를 못한다면, 우러러 귀의하려고 하는 마음에 필시 미흡한 점이 있게 되리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가령 그들이 나아와서는 우리 스승의 도모를 뵙고 물러가서는 사리를 예배하면서 마음속으로 환희를 일으켜 사모하게 한다면, 얼마 안 되는 그 시간 사이에서나마 어찌 감격하여 깨닫게 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당(眞堂)을 세우게 된 이유입니다. 선생이 비록 우리 불도(佛道)를 아시는 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붓을 잡고 글을 짓는 것은 그야말로 선생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 선생께서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는 말한다.
지선 스님의 말이 옳다. 지금 초상(肖像)을 설치해 놓은 곳이 많기는 하다마는,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민간의 부녀자들이 어떻게 그것들을 모두 알 수가 있겠는가. 그들에게 반드시 ‘이것은 부처인데 그 이름은 무엇이고, 이것은 부처의 제자인데 그 이름은 무엇이다.’라고 말해 준 뒤에야 비로소 그들이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켜 제대로 예배를 하면서 은연중에 그 초상과 마음이 합치되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선각(禪覺)을 모신 진당(眞堂)도 단청(丹靑)을 칠해 놓은 하나의 고물(故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알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지선 스님 등의 절실한 그 마음도 앞으로 드러내 밝힐 수가 없게 될 것이니, 나를 찾아와서 간절히 청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내가 사양하지 않고 시 한 수를 지어 넣게 되었는데, 뒷날 읽는 사람들이 기롱이나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토목 공사의 과정은 보통 다들 아는 일인 만큼 여기에서는 기록하지 않기로 한다. 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도를 묘하다고 말하는 것은 / 道之云妙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기 때문이라 / 匪無匪有
아 이분의 초상화를 한 번들 보시게나 / 於戲畫像
어느 것이 이보다 더 낫다고 하겠는가 / 與衆孰愈
늠름한 그 모습 마치 살아 있는 듯 / 凜然其生
빼어난 그림 솜씨 자연이 빚어낸 듯 / 秀色天成
여기에 찾아와서 예배를 올릴 때면 / 有來拜者
큰 스님의 목소리 들리는 듯하리로다 / 如聞其聲
[주D-001]오탁악세(五濁惡世) : 인 류의 수명이 8만 세에서 점차 감소되어 100세도 못 되는 때에 이르게 되면, 겁탁(劫濁)ㆍ견탁(見濁)ㆍ번뇌탁(煩惱濁)ㆍ중생탁(衆生濁)ㆍ명탁(命濁) 등 다섯 가지의 고통과 죄악이 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는 불교의 말세 사상을 가리킨다.
[주D-002]기림(祇林) : 인도 불교 성지(聖地)의 하나로, 석가모니가 머물면서 설법한 장소이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혹은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하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최초의 양대 정사로 꼽힌다.
[주D-003]쌍림(雙林) : 석가모니가 열반한 발제하(跋提河) 언덕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숲을 말한다.
보제 존자(普濟尊者)의 어록(語錄) 뒤에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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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릉(玄陵 공민왕의 능호)이 왕사(王師)로 모신 보제 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는 서천(西天)의 지공(指空)과 절서(浙西)의 평산(平山)으로부터 법을 이어받고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그래서 그의 한마디 말이라도 세상에서 모두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 어록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의 도가 행해지느냐의 여부는 바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의 도를 알기 위해서는 어록을 보는 이외에 다른 길이 없으니,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다 정성을 쏟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 가 재주가 없는 몸으로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서 그의 명(銘)을 지었는데, 이번에 또 어록의 뒤에다 한마디 말을 적어 넣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의 행운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불행이라고 할 것인가. 뒤에 오는 이들은 이 점을 살펴 줬으면 한다. 제자의 이름은 각우(覺玗)와 각연(覺然)과 각변(覺卞)이다. 구본(舊本)의 교정을 마치고 장차 간행하려 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청하기에, 내가 이와 같이 간략히 써넣게 되었다.
《선수집(選粹集)》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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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을 시대별로 분류하는 것이 바로 공씨(孔氏 공자)의 방법이다. 그래서 상고(上古)의 글을 시대별로 분류한 다음에, 우서(虞書)ㆍ하서(夏書)ㆍ상서(商書)ㆍ주서(周書) 등의 제목을 붙인 것이었다. 시를 사체(事體)에 따라 분류하는 것 역시 공씨의 방법이다. 그래서 제후국(諸侯國)의 시는 풍(風)이라 하고 천자국(天子國)의 시는 아(雅)와 송(頌)의 제목을 붙인 것이었다.
공씨는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도를 받들어 계승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을 드러내 밝히면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정리하여 편찬하고 예(禮)와 악(樂)의 제도를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정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사람의 성정(性情)을 바로잡음으로써, 풍속이 모두 한결같이 되게 하고 만세토록 태평을 누릴 수 있는 근본 바탕을 마련해 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우리 선생님보다 훌륭한 분은 나오지 않았다.[生民以來 未有盛於夫子]”고 한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 이런 책들이 모두 불에 타서 없어져 버리고는 공벽(孔壁)에서 겨우 일부의 책자만이 나오게 되었으므로, 시(詩)와 서(書)의 도라는 것도 그만 무너져 버려 잡스럽게 뒤섞인 채 혼란스럽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한유(韓愈) 씨가 홀로 공씨를 존숭할 줄을 알아 문장이 마침내 크게 변하게는 되었으나, 그의 대표작이라 할 ‘원도(原道)’ 한 편만 보더라도 원래의 고문(古文)과 비교해 보면 그 득실이 어떠한지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하겠다.
그 뒤 송(宋)나라 시대에 들어와서는 한씨(韓氏)를 본받아 고문을 배운 자가 구공(歐公 구양수(歐陽脩))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급기야는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강명(講明)하고 이씨(二氏 도교와 불교)를 축출하여 만세토록 가르침을 내려 주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바로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 형제의 공로라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송나라가 망하고 나서 그 학설이 북쪽으로 흘러들어가서는 노재(魯齋 원(元)나라 허형(許衡)) 허 선생(許先生)이 그 학술을 응용하여 원 세조(元世祖)를 돕기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해서 중통(中統)과 지원(至元)의 치세(治世)가 모두 이를 바탕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아, 참으로 성대했다고 말할 만하다.
나의 벗인 김경숙(金敬叔 김구용(金九容))이 개연히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문 중자(文中子)가 공씨의 뒤를 이어 육경(六經)을 짓고 《논어(論語)》를 본뜬 저술을 내놓았으니, 이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외람된 행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는데도 논하는 이들은 일찍이 이 일에 대해서 또한 정상을 참작하여 관대히 봐주려는 태도를 취했었다. 그래서 내가 천박하고 고루한 소견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옛날에 얻어 들었던 것을 편집하여 췌언(贅言)을 가하면서 운운(云云)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서는 모두 몇몇 가(家)의 시문(詩文) 가운데 풍화(風化)를 고취시키고 성정(性情)을 바로잡는 것과 관련된 약간 편(篇)을 정리해서 약간 권(卷)으로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모관(某官) 모(某)가 또 나를 찾아와서는 말하기를,
“김 경숙이 벼슬길에서 제대로 뜻을 펴 보지도 못한 채 지금 늘그막에 접어 들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이 생각해도 그의 입장이 슬프게만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다행히 전장(典章)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어 내자 선생이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다시 고금의 시문 약간 권을 정리해 내자 선생이 《선수집(選粹集)》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선수(選粹)의 선(選)은 소명(昭明)에게서 취했고 수(粹)는 요현(姚鉉)에게서 취한 것으 로서, 말하자면 순수한 것만을 뽑았다[選其粹]는 의미라고 여겨지는데, 뽑히려면 순수해야만 하고 순수하면 뽑히게 마련이라는 뜻이 그 속에 들어 있고 보면 그 시문을 지은 이들을 찬미함과 동시에 시문을 배우는 이들을 격동시키는 바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내친김에 한마디 말씀을 내려 주어 제편(諸篇)의 첫머리를 장식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다음과 같이 자서(自敍)를 붙이게 되었다.
내 가 젊어서 중원(中原)에서 노닐 적에, 진신 선생(搢紳先生)이 ‘문(文)은 한(漢)나라의 그것을 본받아야 하고 시(詩)는 당(唐)나라의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논하는 것을 들었는데, 왜 그런 것인지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있을 당시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 데다 모친이 또 연로하셨기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릉(玄陵)의 지우(知遇)를 잘못 받고서는 직무에 허물이나 없게 하려고 애쓰다 보니, 시문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서 예전에 터득했던 한두 가지마저도 거의 모두 닳아 없어져 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 경숙(敬叔)이 이처럼 우뚝하게 수립해 놓은 것을 보고서는 어찌 부끄러운 나머지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 《선수집》이 전해지면 나의 이 서문도 따라서 전해질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서문이 전해진다면 나의 이름도 자연히 전해지게 될 것이니, 내가 어떻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뒷날 중국의 문장을 정리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어 내는 이가 공씨(孔氏)의 진서(秦誓)ㆍ비서(費誓)나 노송(魯頌)ㆍ상송(商頌)의 예를 본받아서 혹 《선수집》의 한두 편을 뽑아 책 끝에다 붙여 놓는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행운이라고 할 것이니, 내가 또 어떻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주D-001]공씨는 …… 밝히면서 : 원문의 ‘조술요순(祖述堯舜)’, ‘헌장문무(憲章文武)’라는 말이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0장에 나온다.
[주D-002]이 세상에 …… 않았다 :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이 공자를 찬탄한 말로,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주D-003]진(秦)나라 …… 되었으므로 :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옛날의 책들이 모두 없어지고 간신히 공자의 옛집에서 일부의 서책만 얻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 말년에 노 공왕(魯恭王) 유여(劉餘)가 궁실을 확장하던 중에 우연히 공자가 살던 옛집의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와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 수십 편의 서책을 얻었다는 기록이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주D-004]중통(中統)과 지원(至元) : 1259년에서 1294년까지 지속된 원 세조 재위 기간의 연호인데, 유신(儒臣)을 중용(重用)하여 몽고(蒙古)의 옛 제도를 개혁하고 중국의 예법을 적용하면서 원나라의 기초를 다진 시기였다.
[주D-005]문중자(文中子)가 …… 취했었다 : 문 중자는 수(隋)나라의 사상가인 왕통(王通)의 사시(私諡)이다. 그는 속육경(續六經) 6종과 《중설(中說)》 10권 등의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문중자》라고도 칭해지는 《중설》은 《논어》의 체제를 모방했다 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유(儒)ㆍ불(佛)ㆍ도(道) 삼교(三敎)의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주공지도(周孔之道)’의 우수성을 적극 홍보하였고, 특히 ‘궁리 진성(窮理盡性)’의 명제를 제창하여 송(宋)ㆍ명(明) 도학(道學) 사상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정이(程頤)ㆍ주희(朱熹)ㆍ육구연(陸九淵)ㆍ왕수인(王守仁) 등으로부터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주D-006]선(選)은 …… 취한 것 :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엮은 《문선(文選)》의 선(選)과 송(宋)나라 요현(姚鉉)이 당대(唐代)의 문장을 취집하여 엮은 《문수백권(文粹百卷)》의 수(粹)를 뽑아서 책 이름을 지었다는 말이다.
[주D-007]공씨(孔氏)의 …… 예 : 진 서(秦誓)와 비서(費誓)는 《서경(書經)》 맨 마지막에 나오는 두 개의 편명(篇名)이고, 노송(魯頌)과 상송(商頌)은 《시경(詩經)》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시편인데, 모두 천자국과 관계가 없는 제후국의 문(文)과 시(詩)인데도, 공자가 진서와 비서를 ‘주서(周書)〉에 편입시켰는가 하면, 노(魯)와 상(商)에다 ‘송(頌)’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천자국의 시가처럼 대우해 준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서를 해설한 글 가운데에 “비서와 진서는 모두 제후국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도, 제왕의 일을 기록한 글의 끝 부분에다 편입시킨 것은, 마치 《시경》에서 상송과 노송을 기록해 놓은 것과 같은 예라고 하겠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관육익(周官六翼)》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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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늘과 땅 사이에 나라를 세우고 천제(天帝)를 대신해서 일을 행하는 자를 천자(天子)라 하고, 천자를 대신해서 봉국(封國)을 나누어 다스리는 자를 제후(諸侯)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는 그 지위에 각각 위와 아래가 있고 형세에 각각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결코 문란시킬 수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주역(周易)》에 이괘(履卦)가 있게 된 소이라고 하겠다. 그렇긴 하지만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면 태괘(泰卦)를 이루고, 그 기운이 막혀서 통하지 않으면 비괘(否卦)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상하(上下)의 마음이 서로 통하게 하면서도 대소(大小)의 분수가 정해지도록 하고, 그런 가운데 하늘의 명에 보답하면서 사람의 기강을 닦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것은 옛날에 행해졌던 일을 상고해 보기만 하면 자연히 알게 되는 일이라고 하겠다.
공자가 《상서(尙書)》를 정리할 적에 당우의 시대부터 끊어서 서술하였는데, 지금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읽어 보면 오히려 그 시대에도 관직을 임명할 즈음에 도유(都兪)와 해양(諧讓)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사람을 임용할 적에 그 적격 여부를 상세히 따졌음은 물론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또 이처럼 분명하기만 하였으니, 봉황이 날아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짐승들이 몰려와서 다 함께 춤을 추었던 것도 사리상 당연한 일이었다고도 하겠다.
그 리고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에 내려와서도 관직을 늘리고 줄이는 등 각각 규모를 달리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조절한 것일 뿐이요 그 정신에 있어서는 같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서경》 주서(周書)의 주관(周官)이나 《주례(周禮)》처럼 직방(職方)을 취급한 글을 보면 얼마나 찬란했던지 상고해 볼 수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그 뒤에 진(秦)나라의 관직을 보면 옛날의 것은 모두 버리고 자기의 것만 존중했기 때문에, 주대(周代)의 제도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에 한(漢)나라가 일어나서도 그저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하기만 하였으니, 옛날의 제도에 뜻을 둔 자가 불만스럽다고 탄식한다 하더라도 또한 장차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공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예(禮)라고 하는 것이 옥이나 비단 같은 외형적인 것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악(樂)이라고 하는 것이 종(鍾)이나 북 같은 형식적인 것을 이르는 것이겠는가.”라 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제도가 옛날의 것이냐 옛날의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은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 그 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새로 만든 다음에 강상(綱常)을 붙들어 일으키고 풍화(風化)를 넓히는 이런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될 뿐인 것이다.
우리 동방은 당요(唐堯)의 무진년에 처음 나라가 세워졌는데, 치란(治亂)의 시대를 거쳐 삼국(三國)으로 나뉘어졌다가, 우리 태조(太祖)가 하늘의 밝은 명을 받고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한 뒤로 어언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그동안 관직의 제도도 답습하고 개혁하는 등 여러 차례나 변천해 왔건마는, 이 관직 제도를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붓을 잡은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관직에 몸담고 있는 자들도 그냥 인습적으로 세월만 보내다가 교체되는 즉시로 곧장 떠나 버리면 그뿐인데, 심지어는 무엇을 맡고 있는지 물어보아도 “나는 아직 그런 것을 모른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녹봉(祿俸)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아도 “내가 녹봉 약간을 받는데 지금 벌써 몇 해가 지났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 상황이 이러한데도 관직을 헛되이 설치해 놓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근년에 고통스러운 일이 많이 발생한 이래로, 양식과 군대의 일에 대해 별도로 기구를 설치하고 유능한 인재를 뽑아서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는 있다. 하지만 백관을 출척(黜陟)하는 전리(典理)의 일, 제위(諸衛)를 단속하는 군부(軍簿)의 일, 재부(財賦)를 출납하는 판도(版圖)의 일, 형옥(刑獄)을 평결(平決)하는 전법(典法)의 일, 조회(朝會)와 제사를 주관하는 예의(禮儀)의 일, 공장(工匠)의 조작(造作)을 담당하는 전공(典工)의 일, 그리고 고공(考工)의 도력(都曆)이나 도관(都官)의 사인(私人)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저 고사(故事)로 보아 넘길 따름이요, 각 사(司)와 각 부(府)의 관직을 설치한 그 까닭을 제대로 알아내어 그 직무를 힘껏 수행하려고 하는 자는 대개 드물다고 하겠다.
이 에 김군 경숙(金君敬叔 김구용(金九容))이 이러한 실정을 깊이 개탄하고는 육방(六房)으로 대강(大綱)을 삼고 각 직무를 세목(細目)으로 나누어 설명해 줌으로써 관직에 몸담고 있는 자들 모두가 자신의 직책을 준수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진력할 것을 생각하도록 하고, 만약 자신의 힘이 부족하면 힘껏 노력해서 보완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전일처럼 일단 떠나가 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게끔 해 주었으니, 경숙의 마음 씀씀이가 또한 근실하다 하겠다.
그 책을 완성하고 나서 장차 판각할 즈음에, 진양(鎭陽)의 임희민(林希閔)이 김군의 부탁을 받고 나를 찾아와서는 그 책의 이름과 함께 서문을 청하였다. 이에 내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 책의 제목을 《주관육익》이라고 지어 주는 한편 각 관직을 그렇게 명명한 뜻을 대략 서술하여 벼슬자리에 있는 군자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위로는 국가를 저버리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경숙의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하였다.
[주D-001]이괘(履卦) : 인 간 사회에서 상하의 신분을 구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비유한 괘이다. 이괘의 상사(象辭)에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못이 있는 것이 이괘(履卦)이니, 군자는 이 괘를 응용해서 위와 아래를 구분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시킨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하늘과 …… 것 : 태 괘(泰卦)는 천하가 태평한 것을 상징하고, 비괘(否卦)는 난세를 비유한다. 태괘의 상사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을 태라고 한다.[天地交泰]”라고 하였고, 비괘의 상사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힌 것을 비라고 한다.[天地不交 否]”라고 하였는데, 64괘의 순서로 볼 때 이괘 다음에 태괘가 나오고 태괘 다음에 비괘가 나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주D-003]공자가 …… 서술하였는데 : 전한(前漢) 공안국(孔安國)의 〈상서 서(尙書序)〉에 “공자가 삼분 오전(三墳五典)을 정리할 적에 당우 즉 요순(堯舜)의 시대부터 끊어서 서술하기 시작하여 주나라에까지 미쳤다.[討論墳典 斷自唐虞以下 訖于周]”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D-004]도유(都兪)와 해양(諧讓) : 도 유는 도유우불(都兪吁咈)의 준말로, 도와 유는 찬성할 때의 감탄사이고 우불은 반대할 때의 감탄사이다. 해(諧)는 관직에 걸맞게 행하는 것을 말하고, 양(讓)은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서경》 순전(舜典)에서 수(垂)와 익(益)에게 관직을 임명할 때에 그 대화의 내용이 나온다.
[주D-005]봉황이 …… 것 : 《서경》 익직(益稷)에, “소소(蕭韶)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날아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鳳凰來儀], 경(磬)을 치고 두드리니 온갖 짐승들이 몰려와서 다 함께 춤을 추었다.[百獸率舞]”는 말이 나온다.
[주D-006]직방(職方) : 원 래는 《주례》 하관(夏官)에 나오는 하나의 관명(官名)인데, 여기서는 일반 관직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공안국의 〈상서 서(尙書序)〉에 다시 “공자가 직방을 서술할 적에 구주(九州)의 잡다한 기록들은 모두 생략하였다.[述職方以除九丘]”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예(禮)라고 …… 것이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김경숙(金敬叔) 비서(祕書)에게 써 준 시서(詩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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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 조군(趙郡)의 소 대참 백수(蘇大參伯修) 씨가 《국조명신사략(國朝名臣事略)》을 편찬해 낸 데 이어 다시 《문류(文類)》를 지어 내었다. 이에 대해서 규재(圭齋) 선생이 일찍이 “백수(伯修)는 학문이 넉넉한 데다 문재(文才)가 또 풍부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나는 또 “소공(蘇公)은 태평 시대의 전성기에 활동했던 까닭에, 사방의 문학지사(文學之士)와 교유하였음은 물론 누대(累代)의 조정에서 행해진 전장(典章)과 법도 등에 대해서도 익숙히 잘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또 정밀하고 민첩한 재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비단 문재만 풍부했던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가령 황량한 한 쪽 모서리 땅에 몸을 담고서 변변치 않은 벼슬살이를 하는 까닭에, 돈이 없어서 책을 구입하기도 어렵고 또 시사(市肆)가 없어서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수백 권에 이를 정도로 책을 많이 모아서 편집한 경우를 든다면, 오직 우리 경숙(敬叔) 한 사람뿐일 것이다.”라고 말하려 한다.
경 숙은 임인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문학에 대한 뜻이 독실했음은 물론이요 해서(楷書)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일찍이 선발되어 표장(表章)을 써서 현릉(玄陵 공민왕)의 칭찬을 크게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그리워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수년 이래로 그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그가 이토록 기특한 작품을 내놓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이 두 책의 이름을 나에게 또 부탁해 왔으니, 내 기쁨이 얼마나 컸다고 하겠는가. 이에 내가 전고(典故)를 정리한 책의 첫머리에 제목을 붙여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 하고, 문장을 편집한 책의 첫머리에 제목을 붙여 《선수집(選粹集)》이라고 한 다음에, 각각 그렇게 명명하게 된 뜻을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양(鎭陽)의 임희민(林希閔)이 진신(搢紳)들 사이에서 시를 구해 장차 경숙에게 증정하려고 하면서, 나를 찾아와 또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말한다.
우리 동방에 교화가 펼쳐지게 된 근원을 찾아보려면, 기자(箕子)가 이 땅에 봉해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그 당시에 백성들을 가르친 조목을 보면 알기 쉽고 간단하기만 하였을 뿐 번거로운 형식이나 지엽적인 일을 복잡하게 설정해 놓지 않았는데, 뒷세상에서도 계속 이를 이어받아 온 결과 지금까지도 순박한 풍속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삼국(三國)의 경우는 우선 차치하더라도,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운 이후의 일을 살펴보면, 광묘(光廟 광종(光宗)의 묘호(廟號)) 때에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인재를 뽑기 시작하였으므로 중국에서도 그 문학의 성대함을 일컬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글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은 그렇게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바로 이 점에 대해서 경숙이 분발하여 이런 작업을 수행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경숙이 추구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을 살펴보면 그의 속마음이 어떠할지는 대개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책을 저술한 이가 많다. 그런데 우리 삼한(三韓)의 경우 근세에 들어와서는 유독 쾌헌(快軒) 문정공(文正公)이 걸출하였고, 그의 문인인 계림(雞林)의 최졸옹(崔拙翁)이 또 그다음을 차지하는데, 자료를 풍부하게 모아서 편집한 것으로는 쾌헌을 일컫고, 간추려 뽑아서 선택한 것으로는 졸옹을 일컫고 있는 터이다. 하지만 그 책들이 세상에 성행(盛行)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공장(工匠)의 솜씨가 졸렬한 데다가 간질(簡秩)이 무거웠던 탓으로서, 이것은 《은대집(銀臺集)》이나 《상국집(相國集)》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런데 이 저술들은 모두 문장만을 수록해 놓은 것인 만큼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는 것이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주관육익》과 같은 책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내용이 들어 있는 만큼 만약 전해지지 않는다면 지극한 정치의 은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도(世道)와 관계되는 것이 어찌 중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 라서 경숙은 이 점에 대해서도 각별히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경숙이 만약 “나는 목판에 새겨서 명산에다 보관해 두고 뒷날의 군자들을 기다릴 뿐, 이 책이 널리 전해지느냐의 여부는 알 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경숙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나 사대부들이 노래를 부르며 찬미하고 있는 것 모두가 허문(虛文)이 되고 말 것이니, 경숙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글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로는 속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書不盡言 言不盡意]에 반해서, 시를 읊조리고 탄식하노라면 그 뜻이 풍부해서 밖으로 넘쳐흐르기 마련이기에[詠嘆淫佚], 나의 마음을 시로 한 번 표현해 보기로 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경숙은 다섯 수레의 책을 독파하고 나서 / 敬叔讀破書五車
자료를 모아 뽑느라고 일월도 다 잊은 채 / 搜羅剔抉忘居諸
바람 부나 눈이 오나 세월 보내기 삼십 년 / 風窓雪榻三十載
일생을 책벌레처럼 보낼 작정을 하였다나 / 自道一生如蠹魚
노사 숙유 다 함께 칭찬과 탄복을 하였나니 / 老師宿儒共嘆賞
이런 행비서 얻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 幸哉得此行祕書
한나라 조정의 여러 분이 우리 도를 지켰지만 / 漢廷諸公翼吾道
걸출한 진짜 재사는 동중서(董仲舒)라 할 것이요 / 眞才傑出唯仲舒
중루가 밤에 천록에서 글을 교정할 적에는 / 中壘校讎天祿夜
태을이 청려장(靑藜杖) 짚고 찾아와 주었다지 / 太乙黎杖來投初
자운이 현을 지키면서 청정하게 산 그 집은 / 子雲淸淨守玄宅
학문의 힘이 발휘되어 황폐해지지 않았는데 / 學力所到非荒虛
출사표는 삼국 시대의 명문이라고 하련마는 / 三國文章出師表
남양의 그 집은 천년토록 적적하기만 하였네라 / 千年寂寂南陽廬
태산이요 북두라 할 한 이부가 세상에 나와 / 泰山北斗韓吏部
이단을 극력 배척하며 틈새를 보완해 준 뒤에 / 力排異端仍補苴
구왕증소가 송대에 크게 활약을 할 때까지 / 歐王曾蘇冠趙宋
그 중간엔 작자들을 거의 볼 수가 없었는데 / 中間作者皆丘墟
정주의 도학이 그야말로 천지와 짝할 만했는지라 / 程朱道學配天地
해와 달처럼 높이 걸려 밝게 비치게 되었도다 / 直揭日月行徐徐
양선과 당수는 물론이요 거기에 또 송문감 / 梁選唐粹宋文鑑
통전이며 통고 모두 정화(精華)를 모아 놓았는데 / 通典通考精英儲
웅장하고 걸출한 문구 다 함께 휘황찬란하고 / 雄文傑句並晃耀
정밀한 감식 넓은 채집 장단점 서로 보완했네 / 精鑑博採相乘除
하지만 누가 알랴 동방에 선비 한 분 있어 / 誰知東方有一士
중년에 왕후(王侯)의 문에 옷자락 끌지 않고 / 中年不曳王門裾
문장과 전고를 샅샅이 상고하고 탐색하여 / 文章典故盡考索
위와 아래로 하늘과 땅을 두루 통하였을 줄을 / 上窮玄象下黃輿
산천에 구멍이 뚫려 신기가 흘러 나오고 / 竅於山川神氣流
저 밝은 은하수 빛에 별자리도 듬성듬성 / 倬彼雲漢星躔疎
토벌을 명함을 보여 주는 임금님의 부월이요 / 華袞斧鉞示命討
여염에 가득 채워져 있는 곡식과 옷감들이로세 / 菽粟布帛充閻閭
조정 위에 앉아 있는 상복과 용부는 어떠하며 / 象服龍浮坐廊廟
변방 요새지의 응양과 호투는 또 어떠한가 / 鷹揚虎鬪臨儲胥
봄 골짜기 일만 꽃 무더기 무더기 금수라면 / 春谷萬花堆錦繡
상천의 찬 달빛 아래 추위에 떠는 두꺼비라 / 霜天冷月凍蟾蜍
산 동쪽 기슭에는 혼자서 우는 봉황이요 / 朝陽喈喈孤鳳凰
하늘 마구간 우글우글 씩씩한 준마들이로세 / 天廏矯矯群騊駼
그대 알지 못하는가 쾌헌 선생 문정공은 / 君不見快軒先生文正公
문장과 도덕으로 당시에 영예를 다툰 것을 / 文章道德時爭譽
그대 또 알지 못하는가 예산농은 최졸옹은 / 又不見猊山農隱崔拙翁
워낙 탁월한 재주에다 여유가 작작했던 것을 / 高才卓絶仍紆餘
두 분이 유수 엮으면서 무진 애를 쓰셨는데 / 兩家類粹儘懃苦
지금 누가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 하겠는가 / 如今流傳安在歟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몸을 어찌 하오리까 / 蒼天蒼天知奈何
목은은 그저 흰머리로 탄식만 할 뿐이외다 / 白頭牧隱徒欷歔
[주D-001]소 대참 백수(蘇大參伯修) : 대참은 참지정사(參知政事)의 별칭이고, 백수는 원(元)나라 소천작(蘇天爵)의 자(字)이다.
[주D-002]규재(圭齋) 선생 : 규재는 원나라 구양현(歐陽玄)의 호인데, 목은이 20세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원나라의 학자감(學子監) 생원으로 있을 당시에 그를 종유(從遊)하면서 학업을 닦은 인연이 있다.
[주D-003]시사(市肆) : 시 중(市中)의 점포, 그중에서도 특히 서점(書店)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이 항상 낙양(洛陽)의 시사를 돌아다니면서 팔려고 내놓은 책을 한 번 보고는 곧장 외워 버려 마침내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하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9 王充列傳》
[주D-004]쾌헌(快軒) 문정공(文正公)이 …… 터이다 : 쾌 헌은 김태현(金台鉉)의 호이고, 졸옹은 최해(崔瀣)의 호이다. 김태현은 고대로부터 고려 말엽까지의 시문을 수록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문선집(文選集)인 《동국문감(東國文鑑)》을 편찬하였고, 최해는 신라와 고려 명현의 시문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文)》을 편찬하였다.
[주D-005]은대집(銀臺集) :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시문집으로, 원집 20권 후집 4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이 시집의 주석 작업을 진행했다고도 하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주D-006]상국집(相國集) :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준말로, 모두 53권 13책으로 되어 있다.
[주D-007]글로는 …… 것 :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8]시를 …… 마련이기에 : 《대학장구(大學章句)》 3장을 해설한 주희(朱熹)의 글에 나온다.
[주D-009]시는 다음과 같다 : 《목은시고(牧隱詩藁)》 제10권에 〈기증김경숙소감(寄贈金敬叔少監)〉이라는 시가 나오는데, 대체로 내용이 같으면서도 어구(語句)가 생략되거나 다르게 표현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주D-010]경숙(敬叔)은 …… 독파하고 나서 : 박 학다식하여 학문의 세계가 넓은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인물인 혜시(惠施)에 대해서, 장자(莊子)가 “그의 학술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책이 다섯 수레나 된다.[惠施多方其書五車]”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莊子 天下》
[주D-011]행비서(行祕書) : 견 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출행(出行)할 적에 우세남(虞世南)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의 박문 강기(博聞強記)에 탄복하여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行祕書]’이라고 칭찬한 고사가 전한다. 《隋唐嘉話 卷中》
[주D-012]중루(中壘)가 …… 주었다지 : 중 루는 중루교위(中壘校尉)를 지낸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별칭이다. 유향이 성제(成帝) 말년에 조정의 장서각인 천록각(天祿閣)에서 매일 글을 교정하고 있을 적에, 어느 날 밤에 황의(黃衣)를 걸친 노인이 청려장을 짚고 찾아와 어두운 곳에서 유향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는, 청려장 끝에 불을 일으켜 환히 밝혀 준 뒤에 《홍범오행(洪範五行)》 등의 고문(古文)을 전수해 주었는데, 유향이 성명을 물어보니 ‘태을(太乙)의 정(精)’이라고 대답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拾遺記 卷6》
[주D-013]자운(子雲)이 …… 하였네라 : 후 세에 평가받는 빈부(貧富)의 차이는 바로 저술의 유무(有無) 다소(多少)와 직결된다는 말이다. 자운은 한나라 양웅(揚雄)의 자(字)로, 《법언(法言)》, 《태현(太玄)》 등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가 빈궁하게 살면서도 “나는 아무 말없이 나의 《태현》을 홀로 지키면서 살련다.[默然獨守吾太玄]”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87 揚雄列傳》 출사표(出師表)는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 사후(死後)에 출정을 하기에 앞서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올린 우국충정이 넘치는 글로 지금까지도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가 일찍이 남양(南陽)에 은거하고 있을 적에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은혜를 받은 바가 있다. 《三國志 卷30 蜀書5 諸葛亮傳》
[주D-014]태산(泰山)이요 …… 뒤에 : 당 (唐)나라 때에는 한유(韓愈)가 출현해서 불교와 도교 등을 배척하고 유가(儒家) 학술의 미비한 점을 보충해 주었다는 말이다. 그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기 때문에 이부(吏部)가 그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그의 〈진학해(進學解)〉라는 글에 “이단을 배척하고 부처와 노자의 주장을 무리쳤으며, 틈새와 물이 새는 곳을 보완하고 오묘한 이치를 펼쳐서 밝혀 놓았다.[觝排異端攘斥佛老 補苴罅漏 張皇幽眇]”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구왕증소(歐王曾蘇) :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ㆍ왕안석(王安石)ㆍ증공(曾鞏)ㆍ소식(蘇軾)의 병칭이다.
[주D-016]양선(梁選)과 …… 송문감(宋文鑑) : 양 선은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130여 명의 시문을 30권으로 엮은 《문선(文選)》을 말하고, 당수(唐粹)는 송(宋)나라 요현(姚鉉)이 당대(唐代)의 문장을 취집하여 엮은 《문수백권(文粹百卷)》을 말한다. 송문감은 송나라 여조겸(呂祖謙)이 효종(孝宗)의 명을 받들어 송대의 시문을 150권으로 엮은 책 이름인데, 《황조문감(皇朝文鑑)》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주D-017]통전(通典)이며 통고(通考) : 모 두 고금에 걸쳐 전장(典章) 제도(制度)의 연혁(沿革)을 취급하고 있는데, 《통전》은 당나라 두우(杜佑)가 200권으로 편찬한 것으로 의례(義例)가 엄정(嚴精)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통고》는 원나라 마단림(馬端臨)이 두우의 《통전》을 기초로 해서 송나라 영종(寧宗)에 이르기까지 다시 분야를 확대하여 348권으로 엮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말한다.
[주D-018]중년에 …… 않고 : 김 구용(金九容)이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권세가를 찾아다니며 아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추양(鄒陽)의 〈상서오왕(上書吳王)〉에 “고루한 마음을 꾸미려고만 한다면, 어떤 왕후의 문인들 긴 옷자락을 땅에 끌고 다닐 수가 없겠는가.[飾固陋之心 則何王之門不可曳長裾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9]산천에 …… 듬성듬성 : 그 가 편찬한 책에 땅과 하늘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말인데, 이하의 구절들 역시 임금과 백성, 문신과 무신, 춘추(春秋) 등 사계절, 뛰어난 인재들에 관한 내용 등이 각각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 “땅은 음의 역할을 행하면서 산천에 구멍을 뚫어 기운이 통하게 한다.[地秉陰 竅於山川]”라는 말이 나오고, 또 공자한거(孔子閑居) 편에 “땅은 그 위에 신령스러운 기운을 싣고 있다.[地載神氣]”라는 말이 나온다. 또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밝은 저 은하수 빛, 하늘에 문장을 이루었네.[倬彼雲漢 爲章于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0]상복(象服)과 용부(龍浮) : 코끼리가 심복하고 용이 물 위로 나왔다는 말로, 조정에 나아와 정사를 행하는 걸출한 문신(文臣)들을 비유한 말이다.
[주D-021]응양(鷹揚)과 호투(虎鬪) : 날쌘 매와 용맹스러운 호랑이라는 뜻으로, 무위(武威)를 자랑하는 무신(武臣)들을 비유한 말이다.
[주D-022]산 동쪽 …… 봉황이요 : 학 식과 덕망이 뛰어난 신하가 홀로 과감하게 직언(直言)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 대아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는구나,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 자라났네, 산 동쪽 저 기슭에.[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유수(類粹) : 유는 쾌헌이 자료를 풍부하게 모아 놓은 것을 말하고, 수는 졸옹이 자료를 간추려서 정선(精選)한 것을 말한다.
원암(元巖)의 연회(宴會)에서 창화(唱和)한 시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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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군자들은 자기 임금을 보좌하면서 그 의리를 극진히 행하였다. 그래서 임금 역시 그 신하들을 예우하면서 풍성함을 한껏 누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풍성하게 예우하고 의리를 극진히 행하는 가운데 뜻이 같아지고 기운이 합해져서, 울연(蔚然)히 구름이 용을 따르고 유연(悠然)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된 것이었다. 그리고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물러나 쉬는 일과 나아와 쓰이는 일을 서로들 번갈아 가면서 하였으니 황발(黃髮)을 드리우고 백발을 얹은 그 나이에는 몸에 매인 일이 없이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도, 자리를 떠났다고 해서 하루라도 국가를 잊은 적이 일찍이 있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대사(大事)를 의논할 일이 생기면 나아와 결단을 내리고 국난(國難)이 발생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니, 군신 간에 어쩌면 그렇게도 깊이 서로들 마음이 들어맞았단 말인가. 그런데 내가 원암(元巖)에서 여러 원로들이 함께 모여 연회를 베풀며 창화한 시를 읽어 보고는 이와 비슷한 감회에 젖어서 여러 차례나 탄식을 금하지 못하였다.
상이 남쪽으로 거둥할 적에,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공(廉公 염제신(廉悌臣))과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공(李公 이암(李嵒))과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 윤환(尹桓))과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공(黃公 황석기(黃石奇))과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공(洪公 홍빈(洪彬))과 수춘군(壽春君) 이공(李公 이수산(李壽山))과 계성군(啓城君) 왕공(王公)이 실로 의리에 입각해서 따라오자, 상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그들을 대우함에 있어 또한 예모를 깍듯이 하였다. 8월 병술일에 원암으로 행차했다가 정해일에 속리사(俗離寺)로 거둥하였는데, 다음 날에 큰비를 만났으므로 다시 원암으로 돌아와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제로(諸老)가 일단 관직을 떠나 한가로운 몸으로 자처하고 있었던 데다가 도성(都城)으로 돌아갈 날이 가깝게 된 것을 또 기쁘게 여긴 나머지,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면서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장군(大將軍) 김하적(金何赤)이 젓대를 불고 장군(將軍) 김사혁(金斯革)이 아쟁을 탔는가 하면 창안(蒼顔) 백발의 원로들 모두가 웃고 이야기하면서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하기에 이르렀으니,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들이 노니는 것처럼 여겨졌을 법도 하다. 아,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하였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인데, 이처럼 태평 시대의 문채(文彩)를 이루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제로가 이미 늙긴 하였으나 상이 부소(扶蘇 개성(開城)의 옛 이름) 남쪽 법궁(法宮 대궐의 정전(正殿))의 안에 계시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는, 솔선해서 무기를 잡고 서로 번갈아 야외의 막사에서 숙직하면서 풍우(風雨)와 한서(寒暑)에도 그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이에 각 급(級)의 관원들이 이를 본받고 모범으로 삼아 각자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감히 결함이 있게 하지 않았으니, 조석으로 주선(周旋)하는 그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국체(國體)에 도움이 되게 한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묘당(廟堂)에 앉아서 호령을 하는 것과 비교해서 다를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시상(柴桑)과 죽림(竹林)에서 노닐던 이들로 말하면, 명교(名敎 인륜(人倫)의 가르침인 유교(儒敎))의 죄인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도,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것을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지어 부르곤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이 원암의 성대한 모임으로 말하면, 국가의 원기(元氣)와 직결되는 것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오늘날 세상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자는 누구이며 노래를 잘 지어 부르는 자는 누구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림으로 그릴 경우에는, 내가 비록 제로(諸老)에 대해서 자제(子弟)의 예를 갖추고서 아쟁을 타고 젓대를 부는 대열에 끼이고 싶어도 이미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으로 말한다면 나와 같은 불초(不肖)가 부르지 않는다면 누가 또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한번 살펴보건대, 그 속리산(俗離山)으로 말하면 장엄하고 숭고하여 그 높이가 위로 하늘에까지 잇닿았으니, 우리 후생(後生)이 마땅히 우러러 사모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제로의 풍류와 문채로 말하면 또 그 산과 높이를 다툰다 해도 가하다고 할 것이니, 어찌 꼭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려서 전해야만 하겠는가.
[주D-001]울연(蔚然)히 …… 것처럼 : 군 신(君臣)이 서로 감응하여 의기가 투합한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나니, 성인이 나오시면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게 마련이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라는 말이 나오고,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얻고 나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猶魚之有水也]”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30 蜀書5 諸葛亮傳》
[주D-002]시상(柴桑)과 …… 이들 : 도연명(陶淵明)이나 죽림칠현(竹林七賢)처럼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고 혼자서 숨어 사는 이들을 말한다. 시상은 도연명이 만년에 돌아가서 은거한 고향의 이름이다.
설 부보사(偰符寶使)가 돌아갈 때 전송한 시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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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명(大明)이 하늘의 명을 받고 무성(武成 무력 통일)을 크게 고함에 따라 중원이 안정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이에 사방의 나라를 돌아보며 위무(慰撫)하는 일이 또 있어야 하겠기에, 사자(使者)에게 명하여 급히 사방으로 나가서 위덕(威德)을 선포함으로써 각각 그 나라 백성들을 안정시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부보사(符寶使) 설공(偰公)이 조서(詔書)와 예물을 받들고 만 리 바닷길을 건너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성천자(聖天子)가 회유(懷柔)하는 뜻을 밝게 드날리자, 온 나라 사람들이 분주한 가운데 받들어 모시기를 오직 근실하게 하였다.
과거에 관적(關賊 홍건적의 괴수 관 선생(關先生))이 요동(遼東)을 침범했을 때 공이 실로 이 땅에 피난을 왔었는데, 당시에 사대부들이 공과 함께 노닐면서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공이 떠나고 나자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기만 하였는데, 이번에 또 와서 만나게 되자 기쁨을 가눌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공이 돌아가는 일정이 또 급해서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는 서로들 시를 지어서 증정하게 되었다.
내가 살펴보건대, 조선씨(朝鮮氏)가 나라를 세운 것은 실로 당요(唐堯) 무진년의 일이었는데, 대대로 중국과 교류를 하긴 했지만 중국에서 일찍이 신하로 대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할 적에도 신하로 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뒤에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 세 나라가 솥발처럼 대치하여 자웅을 다투게 된 가운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는 중국과의 교류가 통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때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太祖)가 크고 원대한 재략(材略)으로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나서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고 이 땅의 제왕이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오대(五代) 이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500년의 세월이 흐르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속습(俗習)이 워낙 달라진 데다가 언어가 또 통하지 않은 관계로 중국에서 동등하게 취급해 주지 않게 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하겠으나,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기풍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중국을 존대할 줄 알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나오기만 하면 귀의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천자가 먼 변방의 사람들을 경시하지 않고서 이처럼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부보공(符寶公)이 또 충직(忠直)한 마음가짐으로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한 바닷길을 마치 평지처럼 여기면서 우리나라에 건너와 덕음(德音)을 선포한 결과 위와 아래 모두가 서로 신임하게 되어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대대로 번방(藩邦)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천만세토록 우리 대명(大明)을 떠받들어 모시는 일이 대개 지금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공은 부디 이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한다.
사방을 유람하러 떠나는 봉 상인(峯上人)을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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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인은 내가 평소에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적막한 나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만나기를 청하였을 때, 내가 그를 한 번 보고서는 손을 마주 잡고 오래 사귄 사람처럼 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나의 아내가 세상을 뜨자 그가 2주일 동안을 집에 머물면서 영가(靈駕)를 향하여 한마디 해 주고 불경을 독송하며 복을 빌어 주었는데, 그 음성이 너무도 청아해서 듣는 이들이 송연(竦然)해지기까지 하였다. 내가 그를 다른 데로 못 가게 붙들어 두고도 싶었으나,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로 그가 떠나려고 한 것이 두 번이나 되었는데, 이는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을 묵지 않는다는 불가(佛家)의 전통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가 작별에 앞서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스님이 사방을 유람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다만 도(道)를 구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어디 한 번 물어보세. 도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어디에도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처(當處 일을 당한 바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군?”
하자, 그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 렇다고 한다면 도를 찾아서 사방을 유람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님이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 도가 바로 부들방석 안에 있을 것이요 스님이 짚신을 신고 걸어가면 도가 바로 짚신 안에 있을 것이니, 장벽(墻壁)이나 와력(瓦礫) 역시 도 아닌 것이 없을 것이요 강산(江山)이나 풍월(風月) 역시 도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도 도 아닌 것이 없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거리는 것도 도 아닌 것이 없을 것인데, 스님은 어찌하여 꼭 사방을 유람하면서 도를 구하려고 하는 것인가? 내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옳다고 하겠는가, 그르다고 하겠는가?”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이 옳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조주(趙州)의 무(無) 자 화두(話頭)인데, 조주는 나이가 일흔이 되어서도 다시 참선(參禪 사방을 유람하면서 선리(禪理)를 묻고 탐구하는 것)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어찌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겠습니까. 나는 지금 태어난 지 29년밖에 되지 않으니, 조주의 나이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런 내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묻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도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서리와 눈을 무릅쓴 채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도 꺼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심하게 기롱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내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 래서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부들방석’과 ‘짚신’이라고 말한 그 속에는 사실상 가고 머무는 것[行住]과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초학자의 입장에서는 모름지기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부부터 시작해야지 무작정 조주의 행위를 본받으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행히 스님의 자질이 아름다우니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조주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그때가 되면 내 말을 수긍하게 되리라 믿는다.”
하고는, 마침내 그와 작별하였다.
갑술년(1394, 태조3) 8월 일에 쓰다.
[주D-001]뽕나무 …… 전통 : 집 착하는 마음을 미리 끊기 위한 불가(佛家)의 하나의 방편이다. 《후한서(後漢書)》 배해열전(裴楷列傳)에 “승려는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밤을 묵지 않는다.[浮屠不三宿桑下] 이것은 오래 머무는 동안에 애착이 생기는 것을 면하고자 함이니, 지극한 정진(精進)이라고 하겠다.”는 말이 나온다. 승려가 행하는 12두타(頭陀) 즉 고행(苦行) 가운데 ‘같은 나무 아래에서 하룻밤만 묵고, 정오가 되기 전에 한 끼만 먹는다.[樹下一宿 日中一食]’는 내용이 있다. 《十二頭陀經》
[주D-002]조주(趙州)의 무(無) 자 : 상 대적 개념인 유무(有無)의 집착을 깨뜨리고 초월적 존재인 불성(佛性)의 실체를 깨닫게 하기 위한 선종(禪宗)의 공안(公案)으로, 조주 구자(趙州狗子)ㆍ조주 불성(趙州佛性)ㆍ조주 유무(趙州有無)라고도 칭한다. 당(唐)나라의 고승인 조주 종심(趙州從諗) 선사에게 어떤 승려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狗子還有佛性也無]” 하고 묻자, 조주가 “없다.[無]”고 대답하였는데, 승려가 다시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개는 어째서 없는 것인가?” 하고 물으니, 조주가 “그에게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런데 다른 승려가 또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조주가 “있다.[有]”고 하자, 그 승려가 “일단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저 가죽 부대 속에 들어갔는가?” 하고 물으니, 조주가 “그가 알고도 짐짓 범하기 때문이다.”고 대답하였는데, 어째서 조주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했는지, 그 본래의 참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 화두(話頭)의 목적이다. 《무문관(無門關)》 제1칙(則), 《종용록(從容錄)》 제18칙 등에 나온다.
20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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