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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사(動安居士) 이공(李公) 문집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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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가 상우(尙友 옛사람과 벗하는 것)에 대해서 논하여 말하기를,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의 사람됨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래서 그의 당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문장을 논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해야 마땅하다고 내가 일찍부터 생각해 왔다.
문 장이란 사람의 말 가운데에서도 정련(精鍊)되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라는 것은 모두가 꼭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일을 행한 실상을 모두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자운(揚子雲 양웅(揚雄)), 그리고 당(唐)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이나 송(宋)나라의 왕안석(王安石) 같은 무리들이 그들의 말을 문장으로 펼쳐 놓은 것을 보면 뭐라고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이 일을 행한 실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내가 참견하며 입을 놀리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백정의 집에서 부처에게 절을 하고 창녀의 집에서 예절을 배우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겉에서 얼핏 보면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막상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백정이요 창녀임이 분명하니, 어떻게 그 본색을 숨길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의 시를 낭송하고 그 글을 읽을 적에는, 그 사람이 당세에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더욱 따지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말하면 학문이 깊지 못하니, 어떻게 감히 옛사람을 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감히 천하의 재사(才士)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내가 한갓 문장만을 가지고서 그 사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만은 감히 숨기지 못하겠다.
전임(前任) 밀직사사 겸 감찰대부(密直司使兼監察大夫) 이공(李公 이연종(李衍宗))이 그의 선친인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의 문집을 판각하려 하면서, 조카사위인 병부 시랑(兵部侍郞) 안군(安君)을 통해서 나에게 서문을 요청해 왔다. 나는 일찍부터 동안거사의 높은 풍도를 사모해 왔기 때문에, 같은 시대에 태어나 말채찍을 잡고서 그를 위해 봉사해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동안거사의 문집 위에 나의 이름이 실리게 된다면 그런 행운이 없다고 할 것이니, 내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상고해 보건대, 동안거사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독서할 줄을 알아 각고면려(刻苦勉勵)하며 자신의 뜻을 확립하였다. 경오년에 환도(還都)했을 때만 해도 동안거사는 아직 낮은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그 뒤로 바른말을 곧잘 하여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에 대한 원나라의 시호(諡號))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순안공(順安公 원종의 셋째 아들로 충렬왕(忠烈王)의 아우인 왕종(王琮)의 봉호)을 따라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는, 황제의 은사(恩賜)를 받을 때마다 표문(表文)을 올려 사례를 하곤 하였는데, 그 말들이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이름이 마침내 크게 떨쳐지기에 이르렀다.
그 뒤 충렬왕을 섬길 때에는 정언(正言)과 사간(司諫)이 되어 더더욱 바른말 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조정을 떠나 두타산(頭陀山) 속에 자취를 숨기고는 거기에서 몸을 마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동안거사를 맨 먼저 조정에 불러들이고는 그지없이 융숭한 대우를 해 주었으나, 동안거사는 끝내 달가워하지 않고서 더욱 간절히 떠나게 해 줄 것을 청한 결과,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사림학사(詞林學士)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동안거사는 또 집안사람들을 가르치고 다스림에 있어 법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자제들이 모두 이름 있는 인물이 되었는데, 그 막내 역시 곧은 절조와 출중한 재능으로 당시에 중신(重臣) 대부공(大夫公)이 되었다.
아, 재능이 없다면 어떻게 이처럼 뛰어나게 우수할 수가 있겠는가. 어질지 않다면 어떻게 높은 관직을 그처럼 쉽게 벗어 던질 수가 있겠는가. 참다운 도가 몸에 온축(蘊畜)되지 않았다면 그 이름이 어떻게 세 조정을 진동시킬 수 있었겠는가. 가르침이 집안에 행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어 갈 수 있었겠는가. 동안거사가 보여 주고 있는 여러 가지 일을 행한 실상이 이미 이와 같고 보면, 비록 그의 전집(全集)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글들이 마음에 뿌리를 박고서 문사(文辭)로 드러나게 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아,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게 마련이다.[有德者 必有言]”라는 말씀을 내가 이를 통해서 더욱 믿게 되었다고 하겠다.
지정(至正) 19년(1359, 공민왕8) 동지(至) 뒤 3일.
[주D-001]그의 시를 …… 것이다 :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온다.
[주D-002]같은 …… 생각하였다 : 기 꺼이 그의 마부(馬夫)가 되어 수레라도 끌고 싶을 정도로 그의 어진 덕을 매우 흠모했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가령 안자(晏子)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내가 비록 그를 위해 말채찍을 잡는다 하더라도[予雖爲之執鞭], 기쁜 마음으로 그를 떠받들어 모시고 싶다.”라는 사마천(司馬遷)의 말이 나온다.
[주D-003]경오년에 환도(還都)했을 때 : 원종(元宗) 11년(1270)에 왕이 원(元)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한 것을 말한다.
[주D-004]덕이 …… 마련이다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오는 공자의 말인데, 바로 그 뒤에 “말이 그럴듯하게 한다고 해서 꼭 덕이 있다고는 할 수가 없다.[有言者 不必有德]”는 말이 이어진다.
[주D-005]지정(至正) …… 3일 : 본 회가 편찬한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2집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수록된 목은의 서문에는, 이 뒤에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충(充)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 지제고(知制誥) 지공부사(知工部事) 한산 이색은 서문을 쓰다.”라고 하여 관직을 병기하고 있다.
묵헌(默軒) 선생 문집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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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문장이 성하고 쇠하는 것도 천지의 기운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원 (元)나라 세조(世祖)가 천하를 통일하자, 문학에 종사하는 인사들이 대궐 아래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바로 이때에 묵헌(默軒 민지(閔漬)) 선생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들어가서 세조를 알현하였는데, 세조가 관을 쓰지도 않은 채 한가로이 앉아 있다가 문득 이르기를, “너는 비록 왕자로서 나의 외손(外孫)이 되니 상관이 없다고도 하겠지만, 저자는 비록 배신(陪臣)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유자(儒者)의 신분인데, 어떻게 나로 하여금 관도 쓰지 않은 채 유자를 보게 할 수 있단 말이냐.” 하였다. 그리하여 의관(衣冠)을 모두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맞이하고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지국(交趾國)을 정벌하려면 어떤 계책이 좋겠느냐고 하문하자 선생이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군대를 수고롭게 하면서 멀리 나가 토벌하기보다는 사신을 보내서 불러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의 학문이 이 정도였기 때문에 문장으로 드러난 것을 보더라도 인물의 정태(情態)를 모두 극진하게 표현하면서 마치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막힘이 없었으므로, 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종주(宗主)로 삼고 있는 터이다.
선생의 증손(曾孫)인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자복(子復 민안인(閔安仁))이 아우 자의(子宜 민유의(閔由誼))와 함게 나를 찾아와서 서문을 청하기에, 내가 그 문집을 받아서 읽어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끝까지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순수하기로 말하면 마치 광석에서 빼낸 금이나 옥과 같았고, 준일(俊逸)하기로 말하면 구름과 물 속에서 노니는 새와 물고기 같았다. 그리고 특히 황제의 뜨락에서 말씀을 올리면서 표문(表文)과 장주(章奏)로 지어 놓은 것이라든가 나라의 역사를 윤색하면서 강령(綱領)과 조목(條目)으로 분류해 놓은 것들을 보면, 정말 한 세상의 독보적인 존재였음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나는 선생의 뒤에 늦게야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선생의 자손을 통해서 그 문장과 도덕의 남은 부분이나마 얻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나도 오히려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더군다나 우리의 도(道)에 뜻을 두고서 선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고 있을 검열(檢閱)과 같은 이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아름다움을 알고 있으면서도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또 불인(不仁)에 속하는 일이니, 그들이 서문을 급히 청하면서 장차 목판에 새기려고 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우리 동방에 문학이 성대하게 일어나서 중국에서도 일컬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는 최 문창(崔文昌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지금에 와서도 녹명(鹿鳴 과거 고시)을 통해 황제의 뜰에서 대책문(對策文)을 짓는 자가 많기는 하지만, 독권관(讀券官)이 그 사이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를 직접 알현하고 아뢸 길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유독 선생만은 침전(寢殿)에 들어가 면대(面對)하면서 천하의 큰 계책을 결단하였으니, 이런 일은 공사(貢士 중국의 회시(會試) 급제자)가 미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비록 옛날의 명신(名臣)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래서 내가 일찍부터 이 일을 노래로 읊어 뒷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으면서도 아직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검열 형제가 나에게 글을 청해 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 때문에 비루하고 졸렬한 나의 문장 실력도 돌아보지 않고서 즐거운 마음으로 서문을 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첫머리에다 ‘문장이 성하고 쇠하는 것〉에 대한 말을 올려놓은 것은, 선생을 찬미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스스로 탄식하는 뜻을 부친 것이기도 하다.
[주D-001]외손(外孫) : 충선왕의 모친이 원(元)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將公主)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죽계 안씨(竹溪安氏) 삼 형제의 등과(登科)를 축하한 시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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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竹溪 순흥(順興)) 근재(謹齋 안축(安軸)) 선생의 후사(後嗣)인 지금의 밀직 첨서공(密直簽書公 안종원(安宗源))은 나와 같은 해의 진사(進士) 출신인데, 그가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의 시대에는 삼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현달하여 재상(宰相)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나의 아들 세 명이 또 모두 요행히도 말등(末等)으로나마 급제하여 그 뒤를 이었으니, 이는 천운(天運)이라 하겠다. 게다가 우리 족조(族祖)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손자인 정당공(政堂公 안보(安輔))의 세 아들이 또 등과(登科)를 하였으니, 하늘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우리 안씨를 후하게 해 준단 말인가.
우리 문성공으로 말하면, 충렬왕(忠烈王)을 섬기면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였으니, 예악 문물의 성대함이 그야말로 근고(近古)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세(世)를 거쳐 그 손자 대에 이르러서야 과거에 급제하게 되었고 보면, 보답을 받는 일이 더디게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반면에 우리 선군(先君)으로 말하면, 비록 덕을 쌓고 의롭게 행동하셨다 하더라도 내가 제대로 그 뜻을 잇지도 못한 터에 나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이처럼 빨리 이루어졌고 보면, 이것을 어찌 천운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하늘의 도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인 만큼, 아무런 실상도 없는데 그 이름을 얻게 되는 경우는 지금까지 있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고(祖考)의 덕행이 위로 천심(天心)에 부합되어 아래로 자손에게 은택을 끼쳐 주게 된 것이니, 이를 어찌 시로 노래하여 널리 전파함으로써 후학들을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지만 나의 붓을 요청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그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 리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연고로, 국가에서 우리 모친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고 또 택주(宅主 외명부(外命婦)의 봉호)로 봉(封)해서 특별히 은총을 내려 주기까지 하였는데, 이러한데도 시를 지어 노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태만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식 된 도리로서는 부모님을 세상에 드러내어 떨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하기 때문에, 저희들이 이렇게 와서 선생에게 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광 묘(光廟 광종(光宗)의 묘호(廟號)) 때에 과거 시험을 처음 개설한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폐지한 적이 없으니, 부자 형제 사이에 잇따라 급제한 이들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나는 병이 들어서 널리 상고해 볼 수가 없으니, 자네들이 고실(故實)에 밝은 노인들을 방문하거나 역사책에서 찾아 기록해 가지고 오면, 내가 자네들을 위해 서문을 써 주겠다.”
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씨가 또 와서 말하기를,
“제 가 감히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멀리 상고해 보지는 못했고, 그저 충렬왕(忠烈王) 이후로 상당(上黨 청주(淸州)의 옛 이름) 한 중찬공(韓中贊公 한강(韓康)) 이하 열여섯 집안을 알아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많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선생께서 이제 가르침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재상(宰相) 김근(金覲)의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했으니, 부일(富佾)과 부식(富軾)과 부의(富儀)가 바로 그들이다. 평장사(平章事) 민공규(閔公珪)의 경우는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급제했으니 강균(康鈞)과 적균(迪鈞)과 광균(光鈞)과 인균(仁鈞)과 양균(良鈞)이 바로 그들이요, 평장사 임유(任儒)의 경우는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했으니 경숙(景肅)과 경겸(景謙)과 경순(景純)이 바로 그들이다. 증(贈) 복야(僕射) 이핵(李翮)은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했으니, 진(瑱)과 -원문 빠짐- 와 -원문 빠짐- 가 바로 그들이요, 검교 정승(檢校政丞) 김태현(金台鉉)도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했으니 광철(光轍)과 광재(光載)와 광로(光輅)가 바로 그들이다. 이 밖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겠으나 다 상고할 수가 없다.
자 네가 알아낸 바, 청주 한씨(淸州韓氏)에는 사기(謝奇)와 사겸(謝謙)과 사보(謝譜)가 있고, 함양 박씨(咸陽朴氏)에는 장(莊)과 이(理)와 계원(季元)이 있고, 진양 박씨(晉陽朴氏)에는 인간(仁幹)과 인지(仁祉)와 인우(仁祐)가 있고, 죽주 박씨(竹州朴氏)에는 문화(文華)와 효수(孝修)와 송생(松生)이 있고, 화평 노씨(化平盧氏)에는 승관(承綰)과 승조(承肇)와 승신(承愼)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에서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이로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에 동양(東陽)과 광윤(光閏)과 광원(廣元)이 있고, 밀성 박씨(密城朴氏)에 밀양(密陽)과 대양(大陽)과 삼양(三陽)과 계양(季陽)이 있고, 곡성 염씨(曲城廉氏)에 국보(國寶)와 흥방(興邦)과 정수(廷秀)가 있고, 창녕 성씨(昌寧成氏)에 석린(石磷)과 석용(石瑢)과 석연(石珚)이 있고, 흥안 배씨(興安裵氏)에 중보(中甫)와 중성(中誠)과 중유(中有)와 중륜(中倫)이 있고, 전주 유씨(全州柳氏)에 극강(克綱)과 극서(克恕)와 극제(克齊)가 있고, 단산 우씨(丹山禹氏)에 홍수(洪壽)와 홍강(洪康)과 홍득(洪得)이 있다. 또 배가 다른 형제로는 월성 이씨(月城李氏)와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회홀 설씨(回鶻偰氏)의 예를 들 수가 있다.
아, 이만하면 국가에서 얼마나 풍속을 아름답게 배양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삼한(三韓)에서 인물이 성대하게 배출된 것을 꼭 과거 급제에 국한해서 알아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성대하다고 일컬어지는 과거 급제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한나라에 행해진 정치의 기상(氣像)이 더욱 숨길 수 없이 뚜렷하게 드러나리라고도 여겨진다.
우리 동방이 중국의 유우씨(有虞氏)나 하(夏)나라 때에는 어떠하였는지 역사에 전해지지 않아서 상고할 수가 없지만, 주(周)나라가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를 우리 동방에 봉했고 보면, 우리 동방이 중국과 통하고 있었던 것을 대개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기자를 비록 봉하기는 했지만 또 신하로 낮춰서 대우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로부터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받은 것을 중히 여겨서 도(道)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사(太師)의 사당이 아직도 평양부(平壤府)에 있는데, 국가에서 날이 갈수록 더욱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고 있고 보면, 이를 통해서도 태사가 우리 동방 사람들을 얼마나 깊이 교화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러니 어찌 쌍기(雙冀)나 왕융(王融)처럼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부터 우리의 문풍(文風)이 비롯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비 록 그렇긴 하지만, 쌍씨(雙氏)와 왕씨(王氏)가 후생들을 붙들어 일으켜서 인도한 공으로 말하면 역시 지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영화(榮華)를 듬뿍 안겨 주고 남들 앞에 빛나는 영광을 과시하게 하여 한 시대를 격동시킴으로써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과거를 아름다운 것으로 흠모하게 하면서 자기 자제들이 기필코 급제하도록 힘쓰게 한 것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꼭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감화되고 점차로 젖어 들어 집집마다 글을 읽게 된 결과 한집안에서 삼 형제나 오 형제가 모두 급제하는 경우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쌍씨와 왕씨의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지금 안씨(安氏)를 축하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된 마당에 쌍씨와 왕씨에 대해서 굳이 언급을 하게 된 것은, 먹고 마실 때에도 그 음식 만드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을 생각해서 반드시 고수레하는 법을 취한 것이라고 하겠다. 아,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었다고 해서 자기의 근본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또 유독 무슨 마음이라고 하겠는가.
근재(謹齋) 선생의 휘(諱)는 축(軸)이요 자(字)는 당지(當之)이며, 정당공(政堂公)의 휘는 보(輔)요 자는 원지(員之)이며, 밀직공(密直公)의 이름은 집(輯)이요 자는 -원문 빠짐- 이다. 첨서공(簽書公)의 장남 경온(景溫)은 군부 판서(軍簿判書)이고, 차남 경량(景良)은 좌헌납(左獻納)이고, 삼남 경공(景恭)은 전리 좌랑(典理佐郞)이고, 막내아들 경검(景儉)은 과거 공부 중이라 한다.
창룡(蒼龍) 무오년(1378, 우왕4) 4월 일에 쓰다.
[주D-001]삼 형제 : 안축(安軸)과 안보(安輔)와 안집(安輯)을 말한다.
[주D-002]하늘의 …… 것 : 《서경(書經)》 탕고(湯誥)에 “하늘의 도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재앙을 내린다.[天道 福善禍淫]”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쌍기(雙冀)나 왕융(王融) : 과 거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정착시킨 사람들이다. 쌍기는 고려 광종(光宗) 때 후주(後周)에서 귀화(歸化)한 뒤에 과거 제도를 건의해서 시행케 하였고, 왕융은 광종 때부터 성종(成宗) 때까지 12회에 걸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발탁하였다.
휴 상인(休上人)에게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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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예닐곱 살 때쯤에 유자(儒者)들과 어울려 연구(聯句)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노닐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천태 판사(天台判事)로 있는 나잔자(懶殘子)가 우리들을 좋아한 나머지 모두 초청하여 함께 시를 지으면서 읊조리다가 날이 부족하면 다시 밤까지 계속 이어 갔으며, 술이 얼큰해지면 고담준론에다 장난기 어린 우스갯소리를 허물없이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때 오 선생(吳先生)이란 분이 가끔씩 찾아와서 모임에 참여하곤 하였는데, 모습이 청수(淸秀)한 데다 말솜씨도 능란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휴 상인(休上人)은 바로 그분의 아들이다. 오 선생이 상인에게 명하여 나잔자를 모시고 공부하도록 하자, 상인이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대한 내용을 배우고 나서는 그 곁을 떠나서 삼각산(三角山)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갑신년(1344, 충혜왕5) 정월에 나잔자가 또 우리들 몇 사람을 데리고 삼각산으로 놀러 갔는데, 그때 휴 상인이 우리를 위해서 동도주(東道主 손님 접대하는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상인은 나보다 몇 살 더 많았으나 나하고 무척 사이가 좋았는데, 그 뒤로부터는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었을뿐더러, 아예 얼굴조차 보지 못한 지가 또 오래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함께 노닐었던 정랑(正郞) 홍의원(洪義元)과 상사(上舍) 오동(吳仝)과 내시(內侍) 김정신(金鼎臣) 같은 이들은 이미 모두 고인(故人)이 되었고, 지금의 광양군(光陽君) 이공(李公)과 나만 외로이 조정에 몸담고 있을 뿐, 중랑(中郞) 김군필(金君弼)과 정랑(正郞) 한득광(韓得光)은 모두 시골에 내려가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상인이 이런 때에 나의 문을 두드릴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나잔자가 또 시자(侍者) 편에 나에게 급히 서한을 보내 상인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하게 말해 주었는데, 이는 내가 옛날의 일을 잊어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이에 내가 그 글을 보고 그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옛날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상인은 사중은(四重恩)을 갚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가는 면에 있어서도 나름대로의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의 말을 들어 보건대, 부처의 형상이나 부처의 언어 모두가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데 특히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제자인 도우(道于)와 달원(達元)으로 하여금 지묵(紙墨)의 시주를 받아서, 주해(註解)가 붙어 있는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을 각각 1부씩 찍어 내도록 하였고, 또 설법(說法)을 통해서 얻은 보시(布施)를 가지고 서방 정토의 아미타불과 팔대 보살(八大菩薩)을 그려 장명등(長明燈) 아래에다 안치(安置)하였으며, 남은 정재(淨財)는 불경을 찍는 비용에 보태 쓰도록 했다고 한다.
그 러고는 상인이 다시 말하기를, “법보(法寶 불경(佛經))가 일단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내 나이가 벌써 60에 가까운 만큼 혹시라도 받들어 간수하는 데에 소홀하게 된다면 앞으로 다른 걱정거리가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장차 오대산(五臺山)에 안치하고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할까 하니, 선생이 이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한다.” 하였다.
나는 불씨(佛氏)에 대해서 당초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과(因果)에 대한 설이라든가 돈오(頓悟) 점수(漸修)의 설 등에 대해서도 모두 알지를 못하니, 내가 어떻게 감히 언급할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상인의 이야기 가운데 ‘위로 사중은(四重恩)을 갚으려 한다’는 말을 들어 보면, 우리 유가(儒家)의 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듯도 하다.
지금 은 풍속이 모두 무너져서 아비와 자식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고 형과 아우가 서로 도모하는가 하면 역신(逆臣)이 잇따라 일어나고 완악한 백성들이 자꾸만 난리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부도씨(浮屠氏)가 천륜(天倫)을 무시하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사중은을 갚을 줄을 알고 있으니, 어찌 기뻐서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상인으로 말하면 나의 옛 친구요, 여기에 또 나잔자의 청까지 앞세웠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주D-001]사중은(四重恩) : 불교 용어로, 부모(父母)와 중생(衆生)과 국왕(國王)과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의 은혜를 말한다.
[주D-002]팔대 보살(八大菩薩) :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보호하는 여덟 보살로, 보통 관세음(觀世音)ㆍ미륵(彌勒)ㆍ허공장(虛空藏)ㆍ보현(普賢)ㆍ금강수(金剛手)ㆍ묘길상(妙吉祥)ㆍ제개장(除蓋障)ㆍ지장(地藏) 등의 보살을 가리킨다.
송자교(宋子郊)에게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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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소재(崔疎齋 최표(崔彪))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와 염동정(廉東亭 염흥방(廉興邦))은 모두 성산(星山 성주(星州)의 옛 이름) 송 영공(宋令公)의 문하(門下)인데, 지금 그분의 손자인 자교(子郊)가 또 동정의 문하가 되었다. 그가 장차 성산으로 돌아가서 자기 할아버지를 뵈려고 하기에 우리들이 전별(餞別)해 주었는데, 동정도 감히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기꺼이 와서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제는 그에게 뭔가 말을 해 주어야 하겠는데, 시나 글을 우리가 지어 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은문(恩門 급제할 때의 시관(試官))을 기껍게 해 드리지 못할 듯하다. 그런데 선생으로 말하면, 비록 후진(後進)이긴 하지만 그래도 용두(龍頭 장원 급제)의 모임에 함께 속해 있으니, 자교를 볼 때에도 필시 다른 사람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한마디 말로 이 일을 빛나게 해 준다면 다행이겠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가 늙은 데다 병까지 들어서 이제는 다 잊어버렸다마는, 우리 좌주(座主)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시중(侍中)의 손자인 이 정당(李政堂)이 자기 조부의 문생(門生)인 안 정당(安政堂)의 문하에서 나왔고, 근재(謹齋 안축(安軸)) 안 문정공(安文貞公)의 손자인 정랑(正郞) 경공(景恭)이 자기 조부의 문생인 홍 찬성(洪贊成)의 문하에서 나왔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자식인 종학(種學) 역시 나의 선친 가정공(稼亭公 이곡(李穀))의 문생인 한 청성(韓淸城)의 문생이 될 수가 있었으니, 이렇게 본다면 지금 자교(子郊)가 동정의 문하에서 나온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하겠다.
은문과 문생의 관계는 당(唐)나라 때에 성했다가 송(宋)나라 말년에 와서 쇠해졌다. 그러나 문장의 혈맥(血脈)이라는 것은 천지(天地)와 더불어 함께 흘러내려오는 것이니, 세상의 도가 흥하고 쇠하든 세상 사람들이 중시하든 경시하든 간에 어찌 그 사이에 어긋나는 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중원(中原)에 많은 일이 벌어진 이후에도 우리 동방만은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문치(文治)를 앞세우는 일을 태평 시대와 다를 것 없이 행하여 왔다. 그래서 주문(主文 은문(恩門))의 영광과 급제(及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중원에서도 따를 수 없다면서 모두 찬탄을 하고 있는 터이다. 아, 그러고 보면 국가에서 교화를 성대하게 펼쳐서 인심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옛날에 비교해 보아도 결코 못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내가 비록 늙고 병들긴 하였지만, 그래도 봉군(封君)의 반열에 외람되게 끼어 사한(史翰)을 아울러 관장하고 있는 터이다. 그래서 인재를 격려하고 국가의 교화를 넓혀서 그들이 오늘날에 쓰이고 뒷날에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돕게 되기만을 밤낮으로 바라고 있으니, 소재(疎齋)의 청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또 동정(東亭)의 아름다운 행동도 써넣어야 마땅하고, 송씨의 자손에게도 글을 써 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비루하고 졸렬한 글솜씨를 잊어버리고 글을 써서 그의 가는 길을 전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다 덧붙여 두고 싶은 말이 있다. 동정이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해 드릴 잔치에 송군의 할아버지가 오시지 않는다면 매우 섭섭할 것이다. 서늘한 가을날에 수레를 편안히 하여 송군이 부축해서 모시고 올 수만 있다면, 나도 다시 모임의 말석에 참여할 것이니 유독 동정의 영광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십운시(十韻詩)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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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과(百字科)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국가가 문치(文治)를 일으켜 다방면으로 교양을 쌓게 하면서, 백자과라는 간편하고도 용이한 방법으로 이끌어 들여 급제(及第)라는 화려한 영광을 안게 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몽매함을 깨우치고 나서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니, 아, 그러고 보면 선왕(先王)이 사람을 분발시킨 그 성대한 마음이 참으로 원대했다고 하겠다.
근세(近世)에 백자과를 통해서 진출한 이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열헌(悅軒 조간(趙簡)) 조 선생(趙先生)이 특히 걸출했다고 할 만하다. 나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신사년(1341, 충혜왕2)의 과거에서 14세 때에 역시 이 백자과에 급제하면서 송정(松亭 김광재(金光載))의 문생(門生)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비록 평소에 일컬을 만한 점이 없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100자(字)의 시를 육운(六韻)이나 팔각(八脚)의 시와 비교해 본다면, 과거 시험의 체제와 천지(天地)처럼 현격하게 동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국가에서 과거 시험을 베풀어 인재를 뽑는 뜻에 비추어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여겨졌다.
지 금 외숙인 김유양(金有暘)이 장차 이 백자과를 통해서 유사(有司)에게 나아가 시험을 보려고 구본(舊本)을 청해 왔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예전에 흥국사(興國寺) 법천(法泉)의 방장실(方丈室)에서 이 책을 얻어 보았던 기억이 나기에 그 책을 가져다가 옮겨 쓰도록 명하고는, 이 책의 첫머리에다 이런 사연을 적어서 뒷날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D-001]백자과(百字科) : 10개의 운자(韻字)를 달아서 짓는 십운시(十韻詩)로, 100글자를 시험하여 합격자를 뽑는 과거를 말한다.
[주D-002]육운(六韻)이나 팔각(八脚)의 시 : 육운은 오언(五言) 혹은 칠언(七言)의 배율(排律)로서 6운(韻) 12구(句)로 된 시를 말하고, 팔각은 여덟 개의 운자(韻字)로 압운(押韻)된 율부(律賦)를 말한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떠나는 안 시어사(安侍御史)를 전송한 시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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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흥 안씨(順興安氏)는 대대로 죽계(竹溪) 위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산이 워낙 커서 물줄기가 멀리까지 흘러내려 가고 있으니, 안씨 집안이 흥성하는 것 역시 그처럼 무궁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근재(謹 齋 안축(安軸)) 선생으로 말하면,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천자의 뜰에서 대책문(對策文)을 지어 올려 명성을 마침내 크게 떨치고는 본국에 돌아와 벼슬하면서 봉군(封君)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문장과 도덕이 그야말로 한 시대에 걸출한 분이었다고 하겠다. 선생은 관직에 몸을 담고서 어떤 일을 담당하든 간에 언제나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특히 충의(忠義)에 입각한 큰 절조(節操)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퇴폐한 풍속을 격동시키고 쇠퇴한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데 일조함으로써, 나약한 자들이 지조를 세우게 하고 완악한 자들이 방정(方正)하게 되도록 해 준 효과가 다대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는 터이다.
선생의 막내아들인 사청(嗣淸 안종원(安宗源))이 또한 문학을 통해서 진출하였는데, 그는 나와 동년(同年)이다. 그가 조정에 서면 상서로운 기린이요 위의(威儀) 있는 봉황과도 같았으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면 장성(長城)이요 적국(敵國)과 도 같았는데, 부친의 풍도를 이어받았으면서도 온화하게 포용하는 면에서는 오히려 나은 점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선친인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이 근재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데다가 또 선생의 아우인 정당공(政堂公 안보(安輔))과는 동년이었으며, 나 역시 사청과 함께 신사년의 진사(進士)가 되었고 보면, 안씨와 이씨 집안 사이에는 대대로 두터운 교분을 쌓아 왔다고 할 것이니, 증처(贈處)할 적에도 정리(情理)에 입각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여겨진다.
사청이 시어사(侍御史)로 있다가 외방으로 나가서 양광도(楊廣道)를 안찰(按察)하게 되자, 동년인 인사들이 서로 모여서 전별(餞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술잔이 돌기 시작했을 때에 내가 곧장 나서서 말하기를,
“이 미 대대로 두터운 교분을 쌓아 온 데다가 공이 또 한마디 말을 청했고 보면, 내가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청이 학업을 닦고 절조를 세워 처음부터 지금까지 맡은 바 직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으니, 사청에 대해서 충고하는 말을 한다면 망발이 될 것이요 칭송하는 말을 한다면 아첨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안회(顔回)와 자로(子路)를 예로 든다면, 그들이야말로 어떠한 사람이었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성인의 감화를 직접 받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접하였으니, 심지(心志)를 굳게 지니고 성찰하는 공부에 있어서 비난을 받을 점이 원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심으로 증처(贈處)하는 말을 서로들 주고받았으니, 우리와 같은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청이 그동안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이미 빛나게 현달하기는 하였지만, 오래된 세덕(世德)과 근면한 자신의 행동으로 볼 때, 앞으로 이룰 공명(功名)과 사업이 또한 마치 물이 흘러내려가듯 날로 발전하여 그 끝을 볼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이 잘하는 점을 과시하며 남을 무시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의 장점이라고도 하겠지만, 도덕을 자신의 한 몸에 지니고서 정사(政事)에 실효를 거두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는 또 오늘날에 이룬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요, 반드시 진보해야 할 여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니, 사청은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뜻을 굳게 지니고서 처음의 결심을 변하지 말아야만 옳을 것이다.”
하였더니, 모두들 옳은 말이라고 동의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 내용을 써서 서문으로 삼기로 하였다.
[주D-001]나약한 …… 다대하였으므로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伯夷)의 풍도를 듣고 나면, 완악한 자들도 방정해지고 나약한 자들도 지조를 세우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적국(敵國) : 개 인 한 사람이 본국과 필적하는 하나의 국가 역할을 해낼 만큼 위엄이 중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오한(吳漢)이 강한 적을 상대하면서도 태연자약하게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진행시키자, 광무제(光武帝)가 “오공은 은연중에 하나의 국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吳公隱若一敵國矣]”라고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18 吳漢列傳》
[주D-003]증처(贈處) : 헤 어질 적에 두 사람이 서로들 상대방에게 충고하고 권면해 주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노(魯)나라로 길을 떠나면서 안회(顔回)에게 “떠나는 나에게 무슨 말을 선물로 주겠는가.[何以贈我]”라고 하여 안회의 대답을 들었고, 다시 안회가 자로에게 “여기에 남아 있는 나에게는 무슨 말을 해 주겠는가.[何以處我]”라고 하여 다시 자로의 대답을 들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4]그 뜻을 …… 것이다 : 《맹 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뜻은 기운을 지휘하는 장수요 기운은 몸을 채워 주는 것이니, 그 뜻을 굳게 지니면서도 그 기운을 자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持其志無暴其氣]”라는 말이 나오고, 한유(韓愈)의 〈송석처사서(送石處士序)〉에 “대부들이 항상 처음의 결심을 변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使大夫恒無變其初]”는 말이 나온다.
은계(隱溪) 임 상인(林上人)을 보내면서 지어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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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월 21일에 내가 무더위에 시달린 나머지 옷을 풀어 헤치고 망건을 벗어 던진 채 손님을 사절하고 있었으므로 집 안이 마냥 적요(寂寥)하기만 하였다. 그때 임 상인(林上人)이 찾아왔는데, 그의 호는 바로 은계(隱溪)였다. 이에 상쾌하게도 맑은 기운이 감돌면서 뛸 듯이 기쁜 심정이 되었으니, 그것은 그의 임(林)이라는 글자를 통해서 푸른 소나무라든가 초록빛 대나무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의 계(溪)라는 글자를 인해서 뿜어 나오는 샘물이라든가 바위 밑에 고인 깊은 물을 연상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것을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하루아침에 나의 문 안에 들어섰으니, 이런 다행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 몸이 고달프게 된 나머지 벽을 사이에 두고도 그런 경치를 직접 대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산수를 그린 조그마한 화폭이나 대하면서 만리의 먼 경치를 논해야 하는 신세[咫尺應須論萬里]’와 다를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고 보면 하늘이 원래 나에게는 청아(淸雅)하게 즐기는 일을 아끼고서 주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 늘이 당초 사람에게 품부해 줄 때에는 어디까지나 공평하게 하려고 했을 뿐, 그 사이에 1푼(分) 1촌(寸)이나 1수(銖) 1량(兩)이라도 사정(私情)을 두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 분수에 따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을 품부해 주면서 서로 빼앗을 수 없게 했을 것이요, 한망(閑忙)과 정조(靜躁) 역시 서로 용납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각 사람들도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것에 대해서는 감히 1푼 1촌이나 1수 1량이라도 그 사이에서 혹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지금 내가 거처하는 곳은 도성의 저잣거리요, 내가 노닐러 가는 곳은 공경(公卿)의 저택이요, 내가 함께 어울려서 읊조리고 노래하는 사람들은 또 넓은 도포 자락에 큰 띠를 맨 유자(儒者)의 무리들뿐이다. 그러고 보면 상인(上人)처럼 산림과 천석(泉石) 속에서 거하는 이들과 함께 어울려 노닐 수 없는 것도 하늘과 관련된 일이라고 할 것이니,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또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그래 서 바야흐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일에 대해서 서술해 보려고 하였는데, 무더위가 더욱 심해져서 중도에 그만두고는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뒤에 다시 만나는 날 상인을 위해서 나의 못다 한 이야기를 분명히 끝내 주기로 약속하였다.
[주D-001]산수(山水)를 …… 신세 : 두보(杜甫)의 〈희제왕재화산수도가(戲題王宰畫山水圖歌)〉에 나오는 시구인데, 목은이 임 상인(林上人)을 조그마한 하나의 화폭으로 비유해서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9》
율정(栗亭) 선생의 일고(逸藁)에 붙인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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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외적(外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마음속에 박혀 있다. 그런데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대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읽을 때면 풍아(風雅)의 정변(正變)에 대해서 감회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뒤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진 말세(末世)에 들어와서는, 장구(章句)의 수준이 날이 갈수록 저하되기만 하였으니, 정음(正音)이 다시 지어지지 않아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다행히 봉황새 한 마리가 출현하여 뭇 잡새들 속에서 외로이 울어대는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 소리마저 바람따라 떠나가 버리기 일쑤이고, 떠나간 때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소리의 여운조차 얻어 들을 수가 없으니, 아, 슬픈 일이라고 하겠다.
율정(栗亭 윤택(尹澤)) 선생은 그 그릇이 원래 웅위(雄偉)한 데다, 《춘추(春秋)》에 통달하고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으므로, 제대로 된 문장이 여기에서 또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의 좌주(座主)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께서도 공의 문장에는 예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여러 차례나 칭찬하였던 것인데, 지금 문집에 수록된 것이 이 정도로 그치고 만 것은 어찌 된 연고인가? 공이 금산(錦山)에서 노년을 보낼 적에 일찍이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가옥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면서 문서도 함께 모조리 없어지고 말았으므로, 손자인 소종(紹宗)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만을 여기에다 수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사위인 기거랑(起居郞) 허식(許湜)은 글을 잘하는 분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조(操)가 군부사 총랑(軍簿簿司摠郞)에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고, 지금은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있는데, 장차 이 문집을 간행하려 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요청해 왔다. 나는 소싯적에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서 공부하였고, 기거공(起居公)이 또 나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기도 하였으며, 소종(紹宗)이 나의 문생이 된 인연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의리를 헤아려 볼 때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었으므로 곧장 이렇게 쓰게 된 것인데, 선생의 출처(出處)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은 국사(國史)에 실려 있기에 여기서는 췌언(贅言)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주D-001]풍아(風雅)의 정변(正變) : 《시 경(詩經)》에 나오는 공명정대한 시와 퇴폐적인 시를 말한다. 풍아는 《시경》 국풍(國風)과 대아(大雅)ㆍ소아(小雅)의 약칭으로, 보통 《시경》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국풍 가운데 정풍(正風)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키고, 변풍은 패풍(邶風) 이하 빈풍(豳風)까지의 13국의 작품을 말하며, 대아와 소아에도 각각 주(周)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른 정아(正雅)와 변아(變雅)가 있다.
원 상인(元上人)에게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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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인은 내가 양주(楊州)의 배 위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태가 고결하여 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으므로, 내가 옛날에 사귄 사람처럼 흔연히 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배가 가다가 조금 멈춰 서기라도 하면, 상인이 등으로 들어 올려 움직이게 하기도 하고 손으로 끌어당겨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하였는데, 그 일이 매우 수고스러웠건마는 어려워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처음에는 마지못해서 그런 일을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가도 그 일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제야 비로소 상인이 뜻을 확고히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배 안에서만 10여 일을 보내게 되었는데도 상인은 아직도 힘이 남아 돌았는지, 강 속에서 서늘하게 보내고 싶은 생각이 나기라도 하면 또 배를 밀고 끌면서 물속을 치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옷이 물에 흠뻑 젖어서 몸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을 보고는 좌우에서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기도 하였는데, 정작 상인 자신은 태연자약하기만 하였으니, 유독 뜻만 확고히 지니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대개는 형체를 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할 수가 있었다.
도를 닦기 위해 뛰어든 사람은 마치 수레를 뒤집어엎어 버리는 말처 럼 일정한 방향을 미리 설정해 놓지 않고 종횡으로 치달리면서 곧장 물욕(物慾)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마땅한 법이다. 그런 뒤에야 앉아도 내가 앉고 걸어도 내가 걷는 것이 되어, 존엄하기만 한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행보를 밟아 나갈 수가 있게 될 것인데, 상인과 같은 사람은 바로 그런 경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사방을 돌아다녀 볼까 하는데, 선생께서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상인이 추구하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 아니요, 내가 배운 것은 상인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해 줄 수가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옛사람 중에는 반면(半面)의 사귐을 가진 경우도 있었는데, 더군다나 우리로 말하면 한 배를 타고서 10여 일을 함께 보낸 두터운 인연이 있으니,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그의 요청을 사양하지 않고 대략 적어서 그에게 작별 선물로 주었다.
상인의 이름은 경원(景元)이다. 상인은 그동안 화엄종(華嚴宗)에서 경(經)을 수업 받고는 이제 남종(南宗)에 참여하여 운수(雲水) 납자(衲子)들과 어울리려고 하는데, 나는 상인이 거기에 가서도 신발값은 충분히 보상받으리라는 것을 잘 알겠다.
[주D-001]형체를 잊은 경지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뜻을 기르는 자는 자신의 형체를 잊고, 형체를 기르는 자는 자신의 이익을 잊고, 도를 이룬 자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잊는 법이다.[養志者忘形 養形者忘利致道者忘心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수레를 …… 말 : 남 이 시키는 대로만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를 뜻하는 말인데, 원문의 ‘범가지마(泛駕之馬)’는 《한서(漢書)》 무제 본기(武帝本紀)의 “수레를 엎어 버리는 말이나 법도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어떻게 잘 다루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夫泛駕之馬 跅弛之士 亦在御之而已]”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3]반면(半面)의 사귐 : 후 한(後漢)의 응봉(應奉)이 20세에 원하(袁賀)를 찾아갔을 적에, 수레를 만드는 장인(匠人)이 문을 열고 얼굴 반쪽[半面]만 내보이면서 원하가 출타 중이라고 알려 주었으므로 곧장 발길을 돌렸는데,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응봉이 거리에서 그 장인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8 應奉列傳》
[주D-004]상인은 …… 하는데 : 상 인이 불경 공부를 주로 하는 교종(敎宗)을 떠나서, 이제는 참선과 만행(萬行)을 통해 마음을 찾는 선종(禪宗)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말이다. 화엄종은 《화엄경》을 소의 경전(所依經傳)으로 하는 교종이고, 남종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이른바 돈오(頓悟)를 주지(主旨)로 하는 선종을 말한다.
선 상인(詵上人)을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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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건대, 부도씨(浮屠氏)는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밤을 묵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사방을 유람하는 것이야말로 본래 그들의 일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시대에는 평온하고 혼란스러운 때가 있고, 길 역시 통하고 막히는 경우가 있으니, 무작정 깜깜한 길을 따라 치달리다가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몸을 마칠 때까지 유람해보고 싶은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다행히도 수레바퀴를 같이하고 문자를 같이하는 시대를 만난 덕분에, 남쪽의 월(越)나라에 가든 북쪽의 연(燕)나라에 가든 자기 집의 뜨락을 거니는 것처럼 되었으며, 배를 타고 물을 건너거나 미투리를 신고 산에 오르면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더라도 방 안에서 지내는 것처럼 되었으니, 이 또한 즐겨 볼 만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개구리는 얼마 높지 않은 거리도 뛰어오르지 못하지만, 붕새는 구만 리 위로 솟구쳐 날아가니, 그 기상이 어떠할지는 족히 알 만한 일이다. 그러니 더군다나 스승을 찾아 도를 물으면서, 밥을 먹어야 할 때에도 먹는 것을 잊고 잠을 자야 할 때에도 자는 것을 잊은 채, 기필코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선 상인(詵上人)은 내가 여강(驪江) 위에서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이다. 그는 사족(士族)의 출신으로서 글을 읽으며 문업(文業)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21세 때에 향리의 승려를 따라 금강산(金剛山)에 놀러 가던 도중에, 나옹(懶翁)이 대산(臺山)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산을 유람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기는 하지만 출가(出家)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요, 출가를 했다 하더라도 나옹 스님을 만나 뵙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내가 우선 나옹 스님을 따라서 출가한 뒤에 산을 유람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마침내 대산에 들어가서 나옹을 찾아보고 간청하자, 나옹이 그를 위해 머리를 깎아 주었다.
부모가 이 소식을 듣고서 처음에는 슬퍼하다가 나중에는 마음을 너그럽게 갖고는, 그의 자취를 따라 금강산으로 찾아가서 말하기를, “네가 이왕에 이렇게 된 이상에는 승과(僧科)에 응시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상인이 말하기를, “승과에 응시해서 뽑히려 했다면 차라리 선비를 뽑는 과거에 응시했을 것입니다. 제가 출가한 목적은 도를 배우기 위함인데, 그 도라는 것을 누가 과거로 시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고는 자기 부친에게 맹세를 하며 말하기를, “아버님은 하늘과 같은 분이시니, 제가 만약 이 도에 대한 뜻을 바꿀 경우에는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입니다.” 하니, 그 부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읍하고 돌아갔다.
이로부 터 상인의 학문이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는 가운데 명성이 또한 날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동료들이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는데도, 상인 자신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고는 다시 천하를 유력(遊歷)해 볼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으니, 그 뜻이 참으로 장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한마디 말을 해 달라고 매우 간절하게 청해 왔는데, 내가 도대체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어울려서 꾀하지 말아야 한다[道不同 不相爲謀]는 말씀도 있지 않던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그를 만난 것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되었고 보면, 피차 친하게 대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정리(情理)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헤어지는 마당에 어떻게 고해 주는 말을 해 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나아가기를 빨리 하는 자는 물러나는 것도 빠른 법이니[其進銳者 其退速], 상인은 이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은 90리를 왔어도 반절밖에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법이니[行百里者 半九十里], 상인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근면했다가 끝에 가서 나태해지는 것이야말로 유가(儒家)에서나 불가(佛家)에서나 공통적으로 근심해야 할 사항이니, 나와 상인 모두가 경계하고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령 불가의 도에 있어서는 상인이 돌아가서 구해 보면 다른 스승이 있을 것이다.
[주D-001]부도씨(浮屠氏)는 …… 하였으니 : 집 착하는 마음을 미리 끊기 위한 불가(佛家)의 하나의 방편이다. 《후한서(後漢書)》 배해열전(裴楷列傳)에 “승려는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밤을 묵지 않는다.[浮屠不三宿桑下] 이것은 오래 머무는 동안에 애착이 생기는 것을 면하고자 함이니, 지극한 정진(精進)이라고 하겠다.”는 말이 나온다. 승려가 행하는 12두타(頭陀) 즉 고행(苦行) 가운데 ‘같은 나무 아래에서 하룻밤만 묵고, 정오가 되기 전에 한 끼만 먹는다.[樹下一宿日中一食]’는 내용이 있다. 《十二頭陀經》
[주D-002]수레바퀴를 …… 덕분에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8장에 나오는 말로, 원(元)나라가 세계를 통일하여 온 천하가 평온한 시대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D-003]피안(彼岸) : 불 교에서는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서 허덕이는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차안(此岸)이라 하고, 생사를 초월한 적정 열반(寂靜涅槃)의 세계를 피안이라고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2에 “생사를 차안으로 삼고, 열반을 피안으로 삼는다.[以生死爲此岸 涅槃爲彼岸]”는 말이 나온다.
[주D-004]도가 …… 한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주D-005]나아가기를 …… 법이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6]100리 …… 법이니 :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5에 나오는 일시(逸詩)의 내용이다.
자 상인(玆上人)을 떠나 보내며 지어 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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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 암(幻菴)의 제자 가운데에 우수한 자제(子弟) 출신이 있었으니, 허씨(許氏)와 기씨(奇氏)가 그들이다. 그들 모두 나이가 어렸는데, 집안이 화를 당하는 바람에 미련없이 속세를 떠나고 말았으니, 대체로 세상에서 얻기 힘든 인재라고 할 만하였다. 그중에서 이름을 상자(尙玆)라고 하는 기씨는 사방(四方)을 유람할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장차 문인과 시승(詩僧) 사이에서 시가(詩歌)를 구해 볼 목적으로,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에 내가 환암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한마디 말을 사양하지 못하였다.
사방이라고 하면 동서남북을 가리키는데, 우리 삼한(三韓)은 천하의 동쪽에 해당된다. 우리 삼한의 동쪽에는 일본(日本)이 있는데, 큰 고래가 거대한 물결을 내뿜고 있는 가운데 왜적의 배가 일으키는 화란(禍亂)이 서로 잇따르고 있고 북쪽으로는 여진(女眞)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 모래가 날리고 눈이 쌓여 있는 가운데 구탈(區脫)의 경보(警報)가 계속 들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서쪽과 남쪽은 바로 중원(中原)에 속한 지역으로서 밤에도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을 정도가 되긴 하였지만, 현재 천하의 정세가 불안하게 된 까닭에 사신들도 아직 왕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더구나 죽장망혜(竹杖芒鞋)로 감히 경비가 삼엄한 경내를 어떻게 밟아 볼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상인(上人)이 말하는 사방이란 천하의 사방이 아니요, 대체로 우리 삼한의 사방인 줄을 내가 알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세계가 끝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장소를 떠나지 않고서도 제천(諸天)을 두루 노닐 수 있었던 것이니, 이는 마치 달이 하늘에 떠서 일천 강물에 두루 달빛을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부처의 마음과 그 근원이 같건마는, 우리의 육신이 여기에 매인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이 없으니, 우리가 어찌 달보다 못하다고 할 것인가. 상인의 경우도 바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내가 이쯤에서 노래를 불러 나의 이야기를 이어 볼까 한다.
사람의 몸은 마구간에 매인 말과 같다 해도 / 人有身兮如馬繫櫪
마음만은 사방팔방 어디나 치달릴 수 있지 / 心之馳兮遍于八極
발로 밟고 갈 적에는 통하고 막힌 길 있나니 / 凡曰道塗有通有塞
깜깜한 길 무작정 가면 그것이 바로 실덕이라 / 冥行暗趨則爲失德
젊어서 도를 지향할 땐 함양(涵養)이 특히 중요한 법 / 少而嚮道在於涵畜
마음을 안정시키고서 내 권고 부디 잊지 마소 / 式安爾心勿忘予勗
[주D-001]구탈(區脫)의 경보(警報) : 변방의 위급을 알리는 보고라는 뜻이다. 구탈은 흉노(匈奴)의 말인데, 한(漢)나라 때 중원의 정세를 염탐하기 위하여 세워 놓은 변방 초소를 의미한다.
절전 상인(絶傳上人)을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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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道)는 하늘과 땅 사이에 내재하여 어둡고 밝은 곳을 관통하고 크고 작은 것 모두를 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물건도 도가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때도 도가 작용하지 않는 적이 없으니, 도의 체(體)와 용(用)이 그야말로 찬연히 빛나고 있다 하겠다. 하지만 그 도를 인간 자신이 몸으로 행하면서 후세에 전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비단 우리 유자(儒者)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달마(達磨)는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종주(宗主)로 떠받들면서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의발(衣鉢)을 도의 징표로 삼아 왔다. 그러다가 6대(代)에 이르러 의발의 전수(傳授)를 중지하면서부터, 그 법(法)이 온 천하에 두루 퍼지게 되었는데, 지금 여러 선자(禪者)들도 그와 같이 하고 있다고 내가 들었다.
소 (紹)라는 이름을 가진 상인(上人)이 호를 절전(絶傳)이라고 하였는데, 장차 사방을 유력(遊歷)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내가 그들의 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필코 나에게 와서 서문을 구하려고 한 이상에는 그 성의를 또 헛되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간략하게 한마디 말을 해 주기에 이르렀다.
우리 동방의 운치 있는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이어받은 것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는데, 이는 《전등록(傳燈錄)》을 읽어 보거나 《불조종파도(佛祖宗派圖)》를 들춰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상인이 이을 소(紹) 자로 이름을 하였고 보면, 이 속에는 불조의 혜명(慧命)을 이으려고 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전(絶傳)이라고 호를 한 것은 그 뜻을 그대로 취했다기 보다는 그 의미를 반어법의 형식으로 강조함으로써 기필코 전해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하는 광대한 만큼 선지식(善知識)이 많을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상인이 법을 얻어서 돌아온다면 이번 걸음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니, 상인은 부디 힘쓰기 바란다.
[주D-001]6대(代)에 …… 중지하면서부터 : 중 국 선종(禪宗)의 6대조(代祖)인 혜능(慧能)이 5대조 홍인(弘忍)으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아 조계(曹溪)에서 회상(會上)을 연 뒤에, 불법(佛法)은 어떤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요 깨닫는 사람들 모두의 것이라는 인식 아래 의발을 전하는 일을 금했는데, 이런 내용이 그의 설법을 수록한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에 보인다.
월창(月窓)을 전송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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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은자(牧隱子)가 여강(驪江)의 신륵사(神勒寺)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을 적에, 체구가 장대하고 얼굴이 거무접접한 납자(衲子) 하나가 있었다. 내가 그를 한 번 보고는 기걸차게 여겨져서 함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였으나 응답을 하지 않기에 나 혼자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옆에 있는 승려에게 그 사연을 물어보았더니 ‘말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면서 수행하는 자’라고 하기에, 내 의심이 비로소 풀리면서 ‘오늘날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사람’이라고 여기고는 자못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자자(自恣)를 하고 나서 그가 처음으로 토로하는 말을 들어 보니, 채식만 하는 승려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력을 물어보았더니, 예전에 음률에 통하고 회화에 능했음은 물론 술을 마시면 고래가 물을 들이켜듯 하였고 바둑을 두면 불길이 들판에 번져 나가듯 하였으며 창을 휘두르면 옛날의 효장(驍將)이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밖에 그가 숨기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역시 대개는 꼭 물어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이 모든 것들을 내팽개치고는 꼿꼿이 앉아 벽만 마주 보면서 한 발짝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한마디도 입에서 내놓지 않은 채 수행을 해 왔는데, 그 뒤로 천도(天道)가 벌써 소변(小變)의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가 얼마나 호쾌한 기상과 확고한 심지(心志)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니, 이대로 계속 추구해 나간다면 큰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그가 -원문 빠짐- 에 관한 일로 경외(京外)를 바삐 다니면서 시주에게 모금을 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주상을 축복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일인 만큼 그 뜻이 또 크다고 하겠다. 대저 체구가 장대하고 기상이 호쾌한 것과 마음이 확고하고 뜻이 큰 것들은 모두 보통 사람으로서는 얻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한 몸에 아울러 지니는 경우는 드문 일이라고 하겠다. 다만 월창(月窓)이 이러한 요소를 제대로 길러서 큰일을 성취할지의 여부는 또한 알 수 없으니, 월창은 신중하게 처리해야만 할 것이다. 《맹자(孟子)》에 “어떤 방법을 택할 때에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術不可不愼]”는 말이 있는데, 월창이 진정 아름다운 자질을 바탕으로 해서 바른 도를 고수해 나간다면, 그 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이라는 것도 바로 이 속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주D-001]자자(自恣) : 승려들이 여름 석 달 동안 절 문을 나서지 않고 수행하는 하안거(夏安居)를 끝내는 날에 자신이 범한 잘못을 대중 앞에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천도(天道)가 …… 한다 :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에 “천도의 운행은 30년을 소변(小變)으로 하고, 100년을 중변(中變)으로 하고, 500년을 대변(大變)으로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201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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