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도은재기(陶隱齋記) |
|
옛사람 가운데 조정에 몸을 숨긴 자가 있었으니, 《시경(詩經)》에 나오는 영관(伶官)과 한(漢)나라 때의 골계(滑稽)가 바로 그들이요, 저잣거리에 몸을 숨긴 자가 있었으니, 연(燕)나라의 도구(屠狗)와 촉(蜀) 땅에서 매복(賣卜)하던 이가 바로 그들이다. 진(晉)나라 때에 술을 마시며 숨었던 자들이 죽림(竹林)이라면, 송(宋)나라 말년에 고기잡이를 하며 숨었던 이는 초계(苕溪)였다. 그 밖에 ‘숨을 은(隱)’ 자를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표기한 적도 있었으니, 당(唐)나라의 이씨(李氏)와 나씨(羅氏) 같은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고 하겠다.
우 리 삼한(三韓)은 그 기풍이 워낙 유아(儒雅)해서 예로부터 걸출한 인재가 많다고 일컬어져 왔다. 그리하여 드높은 풍도(風度)를 지니고 절세(絶世)의 기예를 소유한 이들이 각 시대마다 모자람이 없이 배출되었는데, 정작 ‘은(隱)’이라는 글자를 가지고서 자신의 호로 삼은 사람은 보기가 드물었다. 이는 출사(出仕)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었기 때문에 ‘숨을 은’ 자를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은거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숨을 은’ 자를 가지고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서였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처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일까.
그러다가 근세에 들어와서는,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옛 이름)의 최졸옹(崔拙翁 최해(崔瀣))이 자신의 호를 농은(農隱)이라 하였고, 성산(星山 성주(星州)의 옛 이름)의 이 시중(李侍中 이인복(李仁復))은 자신의 호를 초은(樵隱)이라 하였으며, 담양(潭陽)의 전 정당(田政堂 전녹생(田綠生))은 자신의 호를 야은(野隱)이라 하였고, 나 역시 목(牧)이라는 글자 속에다 나 자신을 숨기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또 시중(侍中)의 족자(族子)인 자안(子安) 씨가 이 대열에 참여하였는데, 그가 대개 숨을 곳을 찾은 것은 바로 ‘도(陶)’라는 글자를 통해서였다. 도(陶)라는 글자 속에는, 순(舜) 임금이 바로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위에 알려지고, 주(周)나라도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장차 떨쳐 일어나게 된 그런 의미가 깃들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이 서책에 기재되어 있으니 충분히 살펴볼 수가 있다.
자 안 씨는 나이 16세 때에 시부(詩賦)를 가지고 임인년(1362, 공민왕11)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글의 기상이 그때 벌써 노성(老成)한 경지를 보여 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료들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그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학문과 문장이 조금도 멈추는 법이 없이 날로 발전한 결과 마치 못물처럼 깊어지고 별빛처럼 빛나는 가운데 그의 글 속에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孔子)의 생각이 끊이지 않고 흘러넘치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노성하다고 자부하던 자들도 일제히 자안 씨를 찾아와서 자기들이 배운 것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자안 씨는 문장의 폐단이 필시 주(周)나라의 말기처럼 될 것을 알고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 도복도혈(陶復陶穴)의 바탕 위에서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도 ‘주나라는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를 본받았기 때문에 문물이 이토록 성대하게 된 것이다.[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라 고 일컬으셨는데, 주나라도 처음에는 이와 같았을 줄 그 누가 알기나 하겠는가. 지금은 상고 시대의 소박하고 간략한 풍조와는 너무도 동떨어져서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제도 가운데 그래도 상고 시대의 질박한 풍조가 가장 드러나 있는 것을 찾는다면, 바로 진흙을 구워 내는 것이 그렇다고 하겠다. 띠풀을 자르지 않은 채 지붕을 이고 흙으로 섬돌을 만들던[茅茨土階] 풍조가 변하여 옥돌 계단의 화려한 누대와 궁실이 세워지고, 땅을 파서 술을 담아 놓고 손으로 움켜 떠 먹던[汙尊抔飮] 풍조가 변하여 옥 술잔과 상아 젓가락이 등장했지만, 진흙을 구워서 쓰는 풍조가 변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고, 또 변했다고 하더라도 그 질박한 면모를 잃지는 않았으니, 예컨대 동작대(銅雀臺)의 기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하늘이요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이는 황제이니,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큰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천하의 온갖 물건이 모두 갖추어져서 성대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제기(祭器)로는 오직 질그릇을 사용하고 있으니, 예법을 만든 이가 어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뭔가 반드시 질그릇에서 취한 점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역시 질박함[質] 그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질(質)의 도(道)야말로 천하의 대본(大本)이라고 할 것이니, 커서 넉넉하기만 한 삼백의 경례(經禮)와 삼천의 곡례(曲禮) 모두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자 안 씨는 이름이 숭인(崇仁)인데, 그 이름 속에는 어떤 한 가지 일이라도 인(仁) 아닌 것이 없게 하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자안 씨가 이미 그러한 경지 속에 안온하게 거하고 있으면서 다시 도(陶)라는 글자를 가지고 자신의 거처를 이름하였으니, 이는 또 예(禮)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뜻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천하 사람들이 그 인(仁)으로 돌아갈 것 또한 확실하다고 할 것이니, 이는 바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지언정 결코 숨는 것[隱]은 아니라고 하겠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지가 막히면 어진 이가 숨는다.[天地閉 賢人隱]”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국정을 논하며 태평을 구가하고 있으므로, 물고기도 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새도 구름 사이를 훨훨 날아다닌다. 그리고 관작(官爵)과 녹봉(祿俸)을 풀어 놓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마음껏 경쟁하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루루 떼를 지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산림(山林)에 몸담고 있던 수재들뿐이다.
나야 이제 늙었으니 ‘숨을 은(隱)’ 자를 가지고 나의 호로 삼아도 괜찮겠지만, 자안 씨는 지금이야말로 남보다 우뚝 솟구쳐서 앞으로 용감하게 나아가야 할 때인데, 은(隱)이라는 글자로 자처해서야 되겠는가. 나와 자안 씨는 모두 남양공(南陽公 홍언박(洪彦博)을 가리킴)의 문인(門人)인 데다, 성균관(成均館)의 동료로 서로 어울려 지낸 지가 또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들기에 한 번 물어보는 것이니, 자안 씨는 더욱 힘을 내기 바란다.
[주D-001]시경(詩經)에 나오는 영관(領官) :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 모서(毛序)에 “위(衛)나라의 현자(賢者)가 영관(領官) 벼슬에 자신의 몸을 숨겼다.”는 말이 나오는데, 영관은 궁중의 악관(樂官)이다.
[주D-002]한(漢)나라 때의 골계(滑稽) : 한 무제(漢武帝) 때 활약한 동방삭(東方朔)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와 같은 사람은 조정 사이에 숨어서 세상을 피하는 자라고 하겠다.……궁전 속에서도 세상을 피하면서 몸을 온전히 할 수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오두막 생활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한 동방삭의 말이 실려 있으며, 《한서(漢書)》 권65 동방삭전(東方朔傳) 찬(贊)에 그를 일컬어 ‘골계지웅(滑稽之雄)’이라고 평한 대목이 나온다.
[주D-003]연(燕)나라의 도구(屠狗) : 전 국 시대 말기의 유명한 자객(刺客)인 형가(荊軻)를 가리킨다. 연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진왕(秦王)인 영정(嬴政)을 죽이러 갔다가 피살당했는데, 《사기》 권86 자객열전(刺客列傳)에 ‘그가 연나라에 있을 적에 개백장[屠狗] 및 축(筑)의 명인인 고점리(高漸離)와 어울려 노닐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D-004]촉(蜀) 땅에서 매복(賣卜)하던 이 : 군 평(君平)이라는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전한(前漢)의 술사(術士) 엄준(嚴遵)을 가리킨다. 촉 땅 성도(成都) 시내에서 점복(占卜)으로 생활하면서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앉아 《노자(老子)》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漢書 卷72 王貢兩龔鮑傳》
[주D-005]죽림(竹林) : 진(晉)나라 초기에 술과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던,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위(魏)ㆍ진(晉)의 완적(阮籍), 혜강(嵇康),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령(劉伶), 완함(阮咸), 상수(向秀) 등을 가리킨다.
[주D-006]초계(苕溪) : 자신의 호를 초계어은(苕溪漁隱)이라고 했던 호자(胡仔)를 가리킨다.
[주D-007]당(唐)나라의 이씨(李氏)와 나씨(羅氏) :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인인 이상은(李商隱)과 나은(羅隱)을 가리킨다.
[주D-008]순(舜) 임금이 …… 알려지고 : 순 임금이 평민었을 때, 하수(河水) 가에서 질그릇을 구워 생활하기도 하였으며, 나이 20세 효성(孝誠)으로 세상에 알려졌다가 나이 30에 요(堯) 임금에게 발탁되었다는 기록이 《사기》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나온다. 그리고 《서경(書經)》 순전(舜典) 첫머리에 “숨겨진 덕행이 위에까지 알려졌으므로, 요 임금이 그에게 벼슬을 내려 임명하게 되었다.[玄德升聞 乃命以位]”는 말이 나온다.
[주D-009]주(周)나라도 …… 된 : 주 나라 태왕(太王) 즉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우고서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주(周)라고 하였는데, 《시경》 대아(大雅) 면(綿)에 “고공단보께서는 땅을 파고 혈거(穴居) 생활을 하였을 뿐, 아직 번듯한 집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다.[古公亶父 陶復陶穴 未有家室] ”는 ‘도복도혈(陶復陶穴)’의 고사가 실려 있기 때문에, 목은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0]도복도혈(陶復陶穴) : 주 (周)나라 초기라는 뜻이다. 주나라 태왕(太王) 즉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우고서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주(周)라고 하였는데, 《시경》 대아(大雅) 면(綿)에 “고공단보께서는 땅을 파고 혈거(穴居) 생활을 하였을 뿐, 아직 번듯한 집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다.[古公亶父 陶復陶穴 未有家室]”라고 나온다.
[주D-011]주나라는 …… 것이다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나온다.
[주D-012]띠풀을 …… 만들던 : 《사 기》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묵가(墨家)를 비평하는 대목에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은 흙으로 섬돌을 세 칸 올렸고[土階三等], 띠풀로 지붕을 얹으면서 가지런하게 자르지도 않았다.[茅茨不翦]”라는 내용이 나온다.
[주D-013]땅을 …… 먹던 :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14]동작대(銅雀臺)의 기와 : 위 무제(魏武帝) 조조(曹操)가 고도(故都)인 상주(相州)에다 동작대(銅雀臺)를 세울 적에, 흑연(黑鉛)에 호도(胡桃) 기름을 섞어서 기와를 구워 만들었다고 하는데, 후대에 그 기왓장을 벼루의 재료로 썼다는 기록이 전한다. 《春渚紀聞 銅雀臺瓦》
[주D-015]제기(祭器)로는 …… 있으니 :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천자가 교제(郊際) 즉 하늘 제사를 올릴 때, “제기로 질그릇과 바가지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천지의 질박한 본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器用陶匏 以象天地之性]”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6]커서 …… 곡례(曲禮) :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커서 넉넉하도다. 예의 삼백과 위의 삼천이여.[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는 말이 있다.
[주D-017]자안 씨는 …… 하겠다 : 《논 어》 안연(顔淵) 첫머리에, 인(仁)이 무엇이냐고 묻는 안연의 질문에 대해, 공자가 “나를 이기고 예에 돌아가는 것이 인인데, 하루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천하 사람들이 그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라고 대답한 대목이 나오는데, 목은이 바로 이 대목을 연관시켜 숭인(崇仁)이라는 이름과 도은(陶隱)이라는 호를 멋지게 풀이한 것이다.
[주D-018]천지가 …… 숨는다 : 천 지 사이에 있는 음양(陰陽)의 두 기운이 조화되지 못하여 서로 통하지 않게 되면, 인간 사회 역시 소인이 날뛰는 세상이 되기 때문에 군자들은 숨게 마련이라는 뜻인데,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 육사(六四)에 이 말이 나온다.
박자허(朴子虛)의 정재(貞齋)에 대한 기문 |
|
내 가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 그 이듬해에 벽옹(璧雍 원(元)나라의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주역(周易)》으로 말하면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온 학문이었는데도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배우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선군(先君)의 동년(同年)인 우문자정(宇文子貞 우문공량(宇文公諒)) 선생이 학관(學官)으로 부름을 받고 벽옹에 부임하였다. 이에 내가 즉시 찾아뵙고는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청하기를, “저는 고려 이가정(李稼亭 이곡(李穀))의 우마주(牛馬走 불초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 저에게 《주역》을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중보(中甫 이곡)야말로 《주역》에 훤했기 때문에 내가 경외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필시 자네의 나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네의 부친이 미처 가르쳐 주지 못했으리라고 여겨진다. 동년의 아들은 내 아들과 같으니, 내가 자네를 가르쳐 주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나아가서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선생이 말하기를, “가르칠 만한 자질이 보인다. 그러나 《주역》은 연소(年少)한 자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우선 자네에게 구두(句讀)나 가르쳐 주겠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 과정을 마친 뒤에 내가 《역의(易義)》 한 편을 지어 올렸더니, 선생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거의 되었다고 하겠으나, 표현상에 약간 차서(次序)를 잃은 점이 있다.” 하고는, 바로 붓을 잡고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는데, 조금도 다듬거나 꾸미는 일이 없이 마치 구름이 날아가고 물이 흘러가 듯 거침이 없었다. 내가 서안(書案) 앞에 두 손을 공손히 맞잡고 서서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선생이 또 말하기를, “이만하면 글 한 편이 이루어졌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주역》의 겉모습만 본 것일 뿐이다. 자네 정도의 수준으로 몇 년만 더 공부한다면 그 깊은 뜻을 혼자서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내가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정신없이 직무에 매달리게 되는 바람에 예전에 공부했던 것들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하물며 새로 터득한 것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줄어들고 닳아 없어져서 결국은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임인년의 과거에서 장원(壯元)한 박자허(朴子虛 박의중(朴宜中))가 자신의 거처를 정재(貞齋)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대개 《주역》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었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일찍이 역(易)을 공부하였으니, 나를 위해서 그 뜻을 해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야말로 역(易)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니, 건괘와 곤괘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역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주역》의 64괘 모두에 정(貞)의 뜻이 드러나 있다고도 하겠으나, 이를 모두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우선 건(乾)과 곤(坤)을 가지고 말해 볼까 한다. 정(貞) 중에서는 건(乾)의 그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곤(坤)의 경우에 있어서도 ‘빈마(牝馬)’라는 두 글자를 덧붙여 놓았으니, 이는 가장 존귀한 것은 이 세상에 두 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남(二南)의 교화는 후비(后妃)의 정(貞)과 관련이 있는 만큼, 건과 곤의 중괘(重卦)에 배속시킬 수가 있고, 《예기(禮記)》에 나오는 한 사람의 원량(元良)은 만국(萬國)의 정(貞)으로 나타나는 만큼, 건과 곤의 기운이 서로 통하여 태평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건과 곤의 두 괘를 보면 정(貞)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虞)ㆍ하(夏)ㆍ상(商)ㆍ주(周)의 글을 보면 바로 이 정(貞)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치 교화가 마치 하늘과 땅이 항상 보여 주는 것과 도 같고, 안회(顔回)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의 학문을 보면 바로 이 정(貞)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도학(道學)이 마치 해와 달이 항상 밝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의 효용이 또 얼마나 크다고 해야 하겠는가. 자허 씨는 자질이 명민한 데다 학문이 또 독실하기만 하니, 모든 행동이 항상 하나에 기초하는 그런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절조(節操)와 언행(言行) 모두가 확고하여 동요시킬 수 없는 것이, 마치 소나무와 잣나무의 내부에 불변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서 사계절 내내 곧게 뻗은 가지와 무성하게 푸른 잎들이 변치 않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요, 그리하여 비와 이슬에 축축히 젖는 은택을 입었다고 해서 더 영화롭게 되는 법도 없고 바람과 서리에 꺾이는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더 초췌해지는 법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화곤(華袞 예복)을 가지고 화려하게 장식해 주어도 자허 씨는 이를 애모하지 않고, 부월(斧鉞 형벌)을 가지고 위압을 가해도 자허 씨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림(士林)과 상대함에 있어서도, 화락하게 어울리긴 하면서도 구차하게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을 맑게 유지하면서도 굳이 유별나게 행동하지 않는 가운데 늠연히 범할 수 없는 기상을 지니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허 씨를 정(貞)으로 지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주역》을 공부하긴 하였으나 미처 다 끝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貞)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자허 씨에게 기대를 거는 바가 큰 것이다. 그러니 자허 씨가 만약 그 정(貞)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내가 자허 씨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크다고도 할 것이다. 뒷날 중주(中州 중국)에서 역사를 찬집하는 사관(史官)이 자허 씨의 열전(列傳)을 지으면서 ‘그 사람은 정(貞)한 자이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점을 알고서 권면한 사람은 한산(韓山) 이색(李穡)이었다.’고 적어 넣는다면, 이 어찌 나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하였더니, 자허 씨가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그만 하십시요. 이만하면 내 집의 기문으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하기에, 이것을 글로 적어서 제목을 ‘박자허정재기(朴子虛貞齋記)’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가 묻기를, “선생께서 《주역》을 위주로 하면서도 《서경(書經)》과 《시경(詩經)》과 《예기(禮記)》의 글을 인용하여 그 의미를 해설하였는데, 유독 《춘추(春秋)》 만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의 속뜻은 사실 《춘추》에 있는데, 읽는 자들이 그것을 살피지 못할 따름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우로(雨露)’와 ‘풍상(風霜)’이 곧 천시(天時)의 《춘추》라고 한다면, ‘화곤(華袞)’과 ‘부월(斧鉞)’은 바로 왕법(王法)의 《춘추》라고 할 것이다. 《춘추》라는 책으로 말하면, 본디 천시를 받들고 왕법을 밝혀서 한결같이 바른길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이 글이 바로 《춘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는데, 이 점도 여기에 아울러 적어 두는 바이다.
정사년(1377, 우왕3) 11월 하순에 짓다.
[주D-001]건(乾)의 그것 : 《주역》 건괘 괘사(卦辭)에 “건(乾)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정(貞)하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그 정(貞)을 가리킨다.
[주D-002]곤(坤)의 …… 놓았으니 : 《주역》 곤괘 괘사에 “곤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빈마지정(牝馬之貞)이다.”라고 하였다.
[주D-003]시경(詩經)에 …… 있고 : 이남은 《시경》 국풍(國風) 맨 처음에 잇따라 나오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말하는데, 그 시들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시킨 주 문왕(周文王)과 후비(后妃)의 덕이 중천건(重天乾)과 중지곤(重地坤)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주D-004]예기(禮記)에 …… 것이다 : 원 량(元良)은 현량(賢良)한 우두머리, 즉 훌륭한 국가 지도자를 말한다.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한 사람의 원량이 있으면 국가가 바르게 된다.[一有元良 萬國以貞]”는 말이 나오고, 《주역》 태괘(泰卦) 상사(象辭)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이 태괘이다.[天地交泰] 제왕은 이로써 천지의 도를 복돋우고, 천지의 일을 도와 백성을 좌우한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5]하늘과 …… 것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하늘과 땅의 도는 항상 보여 주는 것이요, 해와 달의 도는 항상 밝은 것이다.[天地之道 貞觀者也 日月之道 貞明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모든 …… 기초하는 : 역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오는 내용으로, “천하의 모든 움직임은 하나에 항상 기초하는 것이다.[天下之動貞夫一者也]”라고 하였다.
[주D-007]확고하여 …… 것 :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초구(初九)에 “확고하여 동요시킬 수가 없다.[確乎不句拔]”는 말이 나온다.
[주D-008]마치 …… 같다 : 《예기(禮器)》 첫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성거산(聖居山) 문수사(文殊寺)의 기문 |
|
이 산의 내룡(來龍)이 아득히 멀기만 하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두고 용틀임하며 구불구불 천여 리를 내려와서는 다시 동해를 옆에 끼고 남쪽으로 천 리를 치달려 멈춰 섰으니, 그중에 가장 높은 곳이 화악산(華嶽山)이요, 화악산에서 남쪽으로 수백 리를 벋어 와서 불쑥 솟아난 곳이 바로 성거산이다. 우리 국조(國祖)인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대왕(虎景大王)의 사당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성거라는 산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인데, 어떤 이는 신라(新羅)의 성승(聖僧)인 의상(義相)이 여기에 거처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이 산의 또 다른 이름은 구룡(九龍)인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호경이 사냥꾼 아홉 사람과 산속에 들어가서 짐승을 잡다가 마침 날이 어두워지자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입구에 버티고 서서 크게 포효하는 것이었다. 이에 아홉 사람이 서로 돌아보며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니, 우리들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이 당해 내야만 할 것이다. 한 사람씩 자신의 모자를 호랑이 앞에 던져서, 호랑이가 어떤 모자를 집어 물면 그 사람이 나가서 당해 내기로 하자.”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 모자를 던졌는데, 호랑이가 집어 문 것이 바로 장군의 모자였으므로, 장군이 즉시 밖으로 나가서 호랑이와 싸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금세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동굴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아홉 사람 모두가 빠져나오지 못했으므로, 그 산의 이름을 구룡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산속에 부도(浮屠)가 세운 집들이 많기는 하지만, 워낙 높고 험준한 데다 기후가 춥기 때문에 겨울철에 거처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산허리 아래로는 그다지 산세가 가파르지 않은데, 문수사(文殊寺)가 실로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골짜기의 물이 그 앞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여름철에 비가 올 때면 마치 천둥소리처럼 숲을 온통 뒤흔들어 대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겨울철에 물이 얼 때면 얼음을 깨고 마실 수가 있으니 물을 길어 오기에도 편리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절이 불에 타서 황량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승려 -원문 빠짐- 가 장차 중건(重建)할 목적으로 나에게 화소(化疏 시주(施主)를 모집하는 글)를 써 달라고 요청했었는데, 지금 또 그 인연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이제 공사를 끝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또한 능력이 있는 자라고 하겠다.
내 가 일찍부터 이 산을 유람해 볼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병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예전의 소원을 이뤄 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하늘이 나를 애처롭게 여겨줄지 어쩔지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지팡이를 짚고 가거나 아니면 들것에 실려서 가거나 간에 그곳에서 한 번 노닐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리하여 고목이 바위를 휘감고 있는 그 누각 위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시 한 곡조를 읊어 회포를 풀어 볼 것이요, 천 길 벼랑 위에 서서 옷자락을 나부끼는 가운데 퉁소를 불며 일만 리 아래 세상을 내려다볼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찌 조금이나마 답답하게 맺힌 나의 심정을 위로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문수사에는 전우(殿宇 불당)와 상설(像設 불상)과 종경(鍾磬)을 위시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집기들이 또한 대개는 갖추어졌다. 가장 크게 보시(布施)한 단월(檀越 시주(施主))은 시중(侍中)인 성산(星山) 이초은(李樵隱 이인복(李仁復))의 부인인 하씨(河氏)이다. 그 밖에 정재(淨財)를 출연하여 도와준 시주들의 명단도 아래에다 함께 기록해 둔다. 이상의 기록을 한데 묶어 기록해서 산문(山門)에 길이 보관해 둔다면, 뒷날에 참고할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년(1377, 우왕3) 10월에 짓다.
[주D-001]내룡(來龍) : 산맥이 시작되는 곳을 가리키는 풍수 용어이다.
[주D-002]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대왕(虎景大王) : 고 려 태조 왕건(王建)의 5대조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이름은 호경(虎景)으로, 자칭 성골장군이라고 일컬으면서 백두산 등 각처를 유력(遊歷)하다가 개성(開城) 부소산(扶蘇山)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강충(康忠)이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追尊)된 보육(寶育)을 낳았다고 한다. 《高麗史 高麗世系, 卷107 閔漬傳》
영모정기(永慕亭記) |
|
청 주(淸州) 추동(楸洞)에 곽씨(郭氏)의 밭이 있다. 그래서 곽씨가 그 안에 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어 손님 접대와 혼례(婚禮)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등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였고, 아침저녁으로 먹을 양식만 대충 마련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을 뿐, 그 이외에는 다른 것을 일절 바라지 않았다. 어떤 때는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느라 농사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밭이 그만 황무지로 변해도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일단 벼슬을 그만두게 되면 다시 처자를 이끌고 돌아와서 밭을 갈곤 하였다. 그러고는 글을 읽고 시를 읊는 여가에 나무꾼이나 농부들과 어울려서 담소를 하였을 뿐, 권세나 이익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곽씨의 대부(大父 장원공(壯元公) 곽린(郭麟))는 지원(至元) 연간에 충직하고 문장을 잘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이때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오직 일본씨(日本氏)만이 홀로 조정에 조회(朝會)하지 않자, 이에 이르기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덕(德)으로 회유함에 있어서는 직접 불러다가 어루만져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러니 고려(高麗)로 하여금 사신을 급히 보내 짐(朕)의 뜻을 분명히 일러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고려의 군신(君臣)이 황공한 심정으로 명을 받들고서 사신의 자격을 갖춘 인물을 신중히 물색하였는데, 다만 서장관(書狀官)으로 갈 만한 사람은 찾지 못하였다. 이때 사람들 모두가 꾀를 내어서 피하려고 하였으나 유독 장원공만이 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어떤 이가 재상(宰相)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재상이 크게 기뻐하여 왕에게 들어가 보고한 결과 장원공을 보내라는 명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부옹(婦翁 장인)인 최양(崔諹)이 재상을 찾아가서 왕에게 다시 아뢰도록 부탁하려 하니, 장원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언젠가 한 번은 죽기 마련인데,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이 그래도 처자의 손에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길을 떠났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군신(君臣)이 슬퍼하면서 그에게 관작(官爵)과 전토(田土)를 내려 주었으니, 지금의 추동(楸洞)을 하사받은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추동과 관련하여 장추(長楸)라는 말이 이소경(離騷經)에 나오는데, 이를 해설하는 이가 ‘교목(喬木)이라는 말과 같으니 고국(故國)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장 원공의 아들인 정랑군(正郞君 곽지태(郭之泰))이 종신토록 슬픔에 겨워 호읍(號泣)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이미 70여 세나 되었는데도 부친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만 하였다. 이에 정랑군의 아들인 통헌공(通憲公 곽충수(郭忠秀))이 추동에다 정자를 세우고 물을 끌어다가 연꽃을 심는 등, 부친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기 위해서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랑공이 그에게 말하기를, “어려서 부친을 잃은 나의 슬픔에 대해서야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느냐마는, 네가 다행히 벼슬길에 올라 현달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아무 탈이 없는 데다가 네가 또 나의 옆에 있으니, 나의 신세가 정녕 너보다 못하다고 하겠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에서 글 잘하는 이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되, 내가 동쪽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마음을 쓰게 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도록 하라.” 하고는, 정자의 이름을 영모정(永慕亭)이라 하였다.
대체로 보건대, 아침에 사모했다가 저녁에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영원히 사모하는 것이 못 되고, 아들은 사모하는데 손자가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영원히 사모하는 것이 못 된다. 따라서 아침과 저녁이 한시각처럼 되고 아들과 손자가 한몸처럼 되어야만 그 사모함이 영원한 것이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통헌공이 나에게 기문을 요청한 지가 오래되었다. 통헌공은 나와 동년(同年)으로, 의로운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법사(法司)에 있을 때에는 오직 법대로 집행할 뿐, 권세가 막강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언관(言官)으로 있을 적에는 오직 과감하게 바른말을 하였을 뿐, 어렵게 여기면서 피하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행성(行省)의 힐책을 받기도 하였지만 기강은 더욱더 진작되었고, 해도(海島)에 귀양을 가기도 하였지만 명성은 오히려 더욱 떨쳐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사(御史)의 부월(斧鉞)을 잡았을 때에는 엄하게 밝힐 따름이요, 가혹하게 세세한 흠까지 찾아내려고는 하지 않았으며, 지방의 장관으로 나가서 다스릴 적에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보살피려고만 하였기 때문에, 공정하고 근면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통헌공이야말로 장원공의 충직함과 정랑공의 효성스러움을 대체로 한 몸에 지녔다고 할 것이니, 그 몸이 영화롭게 현달하여 사림(士林)의 맨 윗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 몸을 담고서 일찍이 어느 한 해도 편안하게 보낸 적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당연히 추동에 거처하는 일 역시 일찍이 어느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었다. 옛날 홰나무 세 그루를 심은 왕씨(王氏)는 자신의 몸에 덕을 닦아 놓고는 하늘에다 이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였는데, 뒤에 가서 실제로 계약서(契約書)를 작성한 것처럼 그대로 실현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장원공의 충의(忠義)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 지금 이러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 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할 적에는 대체로 이름과 지위와 덕을 가지고 하는데, 방법은 다를지라도 그렇게 하는 목적은 모두 한가지이다. 그런데 덕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름이 나지 않거나, 이름은 있으면서도 지위가 거기에 걸맞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군자가 걱정하지 않지만, 자신의 덕이 그 지위에 걸맞지 않거나 이름이 실제보다 혹 지나치게 된 경우에는 군자가 크게 두려워하는 바이다.
지금 통헌공의 덕이나 이름으로 말하면 하늘이 장원공에게 보답한 결과라고도 하겠지만, 지위를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현달했다고는 하더라도 사론(士論)은 아직까지 겸연쩍게 여기면서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통헌공의 나이가 이제 겨우 이순(耳順 60세)에 불과하니, 앞으로 크게 쓰이게 될지 어떨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지위를 가지고 보답해 줄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모두 지금 속단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하늘이 장차 크게 보답해 주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늦추고 있는 것인가. 어찌하여 응당 보답해 주어야 할 일에 대해서 아직껏 보답을 해 주지 않고 있는 것인가. 하늘의 뜻이 이미 확실하게 정해졌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오래되었는데, 나는 장차 곽씨 집안의 일을 통해서 이를 한 번 징험해 보려 한다.
철 원(鐵原)의 최씨(崔氏)는 80세에 자식을 낳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자손들이 매우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니 곽씨가 아직 후사(後嗣)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걱정할 것은 없다고 하겠다. 하늘이 반드시 곽씨를 후하게 대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곽 씨에게 후손이 없게 된다면 이는 실로 하늘의 뜻이 공정하다고 기필할 수가 없는 것이요, 그리하여 영모정이 만약 폐허로 변한다면 이는 실로 하늘의 뜻이 공정하다고 기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가령 하늘의 뜻이 공정하다고 기필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곽씨가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정사년(1377, 우왕3) 11월에 전(前)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성좌우사낭중(征東省左右司郞中)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목은 이색은 짓다.
[주D-001]장추(長楸)라는 …… 하였다 : 《초 사(楚辭)》 권4 구장(九章) 애영(哀郢)에 “장추를 바라보며 크게 탄식함이여, 마치 비가 쏟아지듯 눈물이 흘러내리도다.[望長楸而太息兮 涕淫淫其若霰]”라는 말이 나오는데,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장추는 이른바 고국의 교목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뒤돌아보고서 차마 떠나지 못한 채 서성이게 하는 것을 뜻한다.[長楸所謂故國之喬木 使人顧望徘徊不忍去也]”라고 하였다.
[주D-002]옛날 …… 이르렀다 : 소 식(蘇軾)의 〈삼괴당명(三槐堂銘)〉에 나오는 구절을 목은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송(宋)나라 초에 왕호(王祜)가 재상(宰相)의 자격이 충분했는데도 강직한 신념을 견지하다가 끝내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하자, 자기 집 마당에다 삼공(三公)을 의미하는 홰나무 세 그루를 심어 놓고는 “내 자손 중에 삼공이 되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의 아들인 왕단(王旦)이 진종(眞宗) 때에 18년 동안이나 명재상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주D-003]하늘의 …… 않았는지 : 소 식의 〈삼괴당명〉에, 도척과 같은 흉악한 인간이 오래 살고 공자와 안회 같은 훌륭한 인물이 재난을 당한 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盜跖之壽 孔顔之厄 此皆天之未定者也]이라는 말과, 선악의 응보가 자손에게까지 이르는 것을 보면 하늘의 뜻이 이미 오래전에 정해진 것[善惡之報 至於子孫則其定也久矣]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곽씨에게 …… 있겠는가 : 목 은이 소식의 〈삼괴당명〉의 논리를 차용해서 하늘이 보답해 줄 것이라고 마무리를 지은 부분이다. 소식은 그 글의 첫머리에서 “하늘의 뜻이 공정하다고 기필할 수 있는가?[天可必乎] 그렇다면 어찌하여 현자(賢者)가 꼭 귀하게 되지 않고 인자(仁者)가 꼭 오래 살지를 못하는 것인가. 하늘의 뜻이 공정하다고 기필 할 수 없는가?[天不可必乎] 그렇다면 어찌하여 인자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게 되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고는, 여러 사례를 거론한 다음에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상고해 보건대, 하늘의 뜻은 분명히 공정하다고 기필할 수가 있다.[其可必也審矣]”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수원부(水原府) 객사(客舍)의 지정(池亭)에 대한 기문 |
|
연 못 속의 누대나 언덕 위의 정자나 모두 노닐면서 감상하는 곳이니, 세도(世道)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국가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진 자취라든가 주현(州縣)이 흥하고 폐하게 된 사유 등을 우리는 모두 이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대 개 조정이 맑고 밝아서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 관리는 자신의 직분을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하고 백성은 자신의 생업에 충실하게 될 것이니, 이런 때에 누대나 정자가 있지 않다면 태평 시대의 장관(壯觀)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가 있겠는가. 반면에 법령이 가혹하고 사나우며 세금을 거두는 것이 번거롭고 무거우면, 백성들은 들판에서 탄식하고 관리들은 관청에서 곤욕을 치를 것이니, 이런 때에 비록 누대나 정자가 있다 한들 어찌 혼자서 즐길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수원부에 새로 세워진 정자에 어찌 기문(記文)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수원부 치소(治所)의 동북쪽 모퉁이에 예전부터 연못이 있었는데, 황폐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에 전군 성안(全君成安)이 부사(府使)로 재임하면서 개연한 심정으로 이를 복원할 뜻을 굳히고는, 연못을 파서 깊게 하고 그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새 정자를 날아갈 듯이 세웠는데, 관가에서 비용을 조달하지도 않았고 백성들에게 번거롭게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정자가 낙성(落成)되었을 때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는 서로들 돌아보며 깜짝 놀라 말하기를, “어쩌면 이렇게도 쉽게 이루어졌단 말인가. 아마도 귀신이 와서 도와준 것이 틀림없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도 않고서 어떻게 이처럼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하였다. 아, 그러고 보면 전군이야말로 백성을 부릴 줄 아는 자라고 하겠다.
그 뒤에 전군이 마침 내직(內職)으로 옮겨 가고 비서 소감(祕書少監) 안군(安君)이 양광도(楊廣道)를 안찰하러 나왔는데, 그가 전군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는 나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전씨(全氏)의 자취가 사라지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려면 오직 문자로 기록해 놓는 방법밖에 없으니, 선생께서 이 일을 사양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수원은 안찰사(按察使)의 치소가 있는 곳으로서 여러 주군(州郡)을 통제하고 있는 만큼 한 도(道)의 물산(物産)이 집결하는 중심지요, 이와 동시에 성쇠와 흥폐의 현상도 한 도 안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게 되는 곳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지금 전군이 위엄과 은혜를 병행하여 백성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는 일을 알맞게 행하는 한편, 힘없는 주민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고서도 우리 국가에서 이룬 태평 시대의 아름다움을 널리 보여 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안군 역시 자신의 직분에 따라 백성의 풍속을 제대로 관찰함은 물론이요, 타인의 훌륭한 점을 또 즐겨 말하고 있으니, 이것도 모두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뒷날 내가 공을 이루고서 물러가기를 청한 뒤에 이 고을을 지나다가 연꽃이 활짝 핀 광경을 보게 될 때면, 반드시 수레를 멈추고 정자 위에 올라가서 내가 쓴 이 기문을 읽어 보고 떠날 것이다.
순창(淳昌) 객관(客館)의 새 누각에 대한 기문 |
|
누 각이 세워질 때마다 기문을 지어서 걸어 놓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그런데 기문을 지을 때에는 제작의 규모를 서술하여 그 공을 드러내고 누각의 이름을 해설하여 그 뜻을 밝히는 것이 통례이니, 이런 것을 놔두고서 억지로 말한다는 것은 또한 어려운 일이다.
순창(淳昌)의 자사(刺史)인 남후(南侯)가 정사를 행하고 남은 여가에 객관(客館) 뒤편에다 새로 누각을 세웠는데, 강군 호문(康君好文)이 남후의 부탁을 받고 나를 찾아와서는 기문을 지어 달라고 무척이나 졸라 대었다. 그런데 누각의 제작 규모나 주위의 형세를 위시해서 얼마나 공력이 들어갔고 시간은 얼마나 걸렸는지에 대해서는 나에게 일러 주지 않았으며, 또 그 뜻을 해설해서 글을 지을 만한 누각의 이름 같은 것도 아예 없었다. 그래서 내가 기문을 청한 그 의도를 살펴보건대, 그저 뒷사람들로 하여금 이 누각이 남후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을 알게 하려는 것일 뿐이요, 다른 것은 급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순 창군이 있게 된 이래로 이 객관에서 손님을 대접해 온 것이 몇백 년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이 누각이 있게 되었으니, 그러고 보면 남후가 예전부터 전해 오는 어떤 토대도 없이 자기 혼자서 결단하여 몇백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명승(名勝)을 이루어 낸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누각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하여 한 고을의 장관(壯觀)으로 우뚝 서게 됨으로써, 그 백성들은 물론이요 나아가 손님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선사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우연으로만 돌리겠는가.
내가 또 생각해 보건대, 꿩이 날고 새가 날개를 펴는 것처럼 높다랗게 누각이 서 있는 이곳이야말로 예전에는 모두 풀과 나무 덤불이 뒤엉켜 우거져 있던 곳인데, 이런 곳에다 누각을 아름답고 완전하게 지어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남후의 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르겠다만, 천 년쯤 세월이 지난 뒤에 비바람에 씻기고 무너져서 그저 황량하게 옛 자취만 남아 있을 때 이를 보고서 비감에 젖어 길게 탄식할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지금 이후로 그 뒤를 이어서 이곳의 백성이 되고 이곳의 관리가 된 자 가운데에, 남후의 마음을 제대로 체득하여 무너지면 고치고 낡으면 수선하여 황량하게 옛 자취만 남아 있지 않게 할 자는 또 어떤 사람일까.
비록 그렇긴 하지만, 공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그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처음 착수한 사람을 반드시 생각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뒷날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들마다 반드시 남후가 지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남후의 사람됨을 이야기할 것이니, 남후의 이름이 또 이로 인해서 어찌 더욱 전해지지 않겠는가. 남후의 이름은 징(徵)이다. 정사에 재능을 보일 뿐만 아니라 온아한 성격의 소유자로 예법을 늘 잃지 않고 있는데, 우리 집안과는 대대로 교분이 있는 터라서 내가 어렵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억지로 글을 지어 보았다.
[주D-001]꿩이 …… 것처럼 :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뜻하는 표현인데, 《시경》 소아(小雅) 사간(斯干)의 “추녀가 마치 새가 나래를 펼치는 듯, 꿩이 날아가는 듯하였다.[如鳥斯革如翬斯飛]”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송월헌기(松月軒記) |
|
전(前) 임관사(林觀寺) 주지(住持)인 옥전 선사(玉田禪師)가, 나의 좌주(座主 과거 급제 당시의 시험관)인 구양(歐陽 구양현(歐陽玄)) 선생이 쓰신 송월헌(松月軒)이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나에게 와서 기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태 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연간에 서천(西天)의 지공(指空) 스님이 우리 동방에 오셨을 때, 내가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스님을 만나 뵙고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마침내 스님을 따라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다. 그런데 우리 승도(僧徒)가 무리 지어서 사는 것을 보면, 마치 예가(禮家)에서 하는 것처럼 자신을 단속하며 규제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산수를 즐기며 한가히 노닐면서 자득(自得)하는 더 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천력(天曆) 초년에 우리 스님이 유지(有旨)를 받고 경사(京師)로 돌아가실 적에 나도 함께 따라서 서쪽으로 건너가서는 천하의 장관(壯觀)을 모두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말과 수레가 일으키는 먼지 속에서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곧장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그런 곳은 너무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므로, 명산(名山)과 승지(勝地)를 유람하는 일을 거의 한 해도 빠뜨리지 않았는데, 다만 파촉(巴蜀)의 경우만은 위공(危公 위소(危素))이 서문(序文)까지 써 주었는데도 끝내 여행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내 가슴속의 회포를 사람들이 혹 알지 못할 수도 있겠기에, 나의 거처하는 곳을 송월(松月)로 이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내가 나의 고향에 살고 있을 적에 장송(長松)이 그늘을 드리워 주고 명월(明月)이 밤을 밝혀 주었는데, 바로 이 솔과 달을 통해서 나는 나의 귀와 눈을 맑게 하고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하면서 온갖 번뇌와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 황홀한 광경이 어느 한순간도 나의 가슴속에서 잊혀진 적이 없었으므로, 내가 장강(長江)과 회하(淮河)에 배를 띄우거나 전국(戰國) 시대의 연(燕)나라 땅과 대(代)나라 땅을 말 타고 치달릴 적에도 내 몸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송월(松月)의 마루라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 동쪽으로 돌아와 보니, 동자(童子) 시절에 보았던 솔과 달은 대체로 예전과 다름이 없었건만, 내 몸은 이미 노쇠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그대에게 글을 부탁하여 내 몸이 떠난 뒤에까지 전하려고 하는 이유이다.”
하였다.
나는 본디 오래전부터 스님을 알고 있었는데, 스님은 대개 도(道)의 경지가 높아서 속기(俗氣)가 없는 그런 분이었다. 스님은 평소에 당대의 명공(名公)이나 아사(雅士)들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들 역시 스님에게는 깍듯이 예모(禮貌)를 갖추어 대우하곤 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기예(技藝)에도 능한 면모를 보여 서화(書畫)를 대할 적엔 정밀한 감식안(鑑識眼)을 자랑하였으며, 고금(古今)에 두루 통하여 막히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한림 승지(翰林承旨) 구양원공(歐陽原功 구양현(歐陽玄))과 집현 학사(集賢學士) 게만석(揭曼碩 게혜사(揭傒斯))과 국자 좨주(國子祭酒) 왕사로(王師魯 왕기(王沂))와 중서 참정(中書參政) 위태박(危太朴 위소(危素))과 집현 대제(集賢待制) 조중목(趙仲穆 조옹(趙雍)) 같은 분들, 그리고 도가(道家)의 오종사(吳宗師) 같은 이가 모두 스님을 위해서 제(題)와 찬(贊)과 서(敍)와 인(引)을 써 주었으며, 집현 대제 조중목과 진인(眞人) 장언보(張彦輔)와 오흥(吳興)의 당자화(唐子華)가 또 송월헌을 위해 그림을 그려 주기까지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다.
스 님의 행실이 진정 사람들에게 미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저 제공(諸公)과 같은 분들이 스님과 어울려서 노닐려고 하였겠으며, 굳이 시문(詩文)으로 드러내면서까지 스님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려고 하였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산에 있는 솔과 하늘에 있는 달은 그래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와 빛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만, 솔과 달을 대하는 스님의 경지 속에는 이미 그 소리나 빛이 아무런 누(累)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더군다나 솔 자체는 원래 푸른 것도 아니요, 달 자체는 원래 밝은 것도 아님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그것이 영대(靈臺)를 뚫고 들어 올 때에는 바로 불서(佛書)에서 말하는 청정 법신(淸淨法身) 그 자체가 된다고 할 것이니, 산에 있는 솔이나 하늘에 있는 달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 스님을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스님은 이름이 달온(達蘊)이요, 옥전(玉田)은 그의 호이며, 속성(俗姓)은 조씨(曺氏)로서 창녕(昌寧) 사람이다. 금상(今上)의 원종공신(元從功臣)으로서 정승의 지위에 오른 이가 있는데, 스님은 바로 그의 막내 아우이다.
[주D-001]땀방울을 …… 그런 곳 : 도 성(都城)처럼 사람이 많이 모여 북적거리는 대도회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사기》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齊)나라 서울 임치(臨淄)에 가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소매를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擧袂成幕 揮汗成雨]”는 말이 나온다.
환암기(幻菴記) |
|
내가 아직 스무 살이 되기 이전에 산속을 돌아다니면서 노닐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승려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며 어울리곤 하였다. 그때 그들이 외우는 사여게(四如偈)라는 것을 들어 보노라면, 비록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요컨대 그 귀결점은 무위(無爲)를 강조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는 것은 잠을 깨면 그만인 것이고, 환영(幻影)이라는 것은 술법(術法)의 효력이 없어지면 허망해지는 것이며, 물거품은 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림자는 그늘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며, 이슬은 곧장 말라 버리는 것이고, 번갯불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 이 모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實有]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런 현상이 또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현상이 실제로 없지는 않지만 또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불교의 가르침이란 것이 대체로 이와 같다고 하겠다.
그 뒤 조금 더 장성했을 때 봉액(縫掖 유자(儒者)) 18인이 모여서 결사(結社)를 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는데, 오늘날 천태(天台)의 원공(圓公)과 조계(曹溪)의 수공(修公 환암(幻菴) 혼수(混修))도 그때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니 나와 그들 사이에 얼마나 깊이 의기가 투합하고 얼마나 많이 서로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다시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다가 내가 연경(燕京)의 국자감(國子監)으로 유학 갔을 때 수공(修公)도 입산(入山)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3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간혹 서로 만나는 일이 있어도 두 밤 정도만 자고 나면 곧장 헤어지곤 하였으니, 옛일을 회상하면서 질탕하게 술을 마시고 시를 읊어 보는 풍류를 어떻게 다시 가져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영(幻影)과 같다는 것을 정말 실감할 수 있다고 하겠다.
현릉(玄陵)이 공의 풍도(風度)를 흠모하여 두 번이나 큰 사찰의 주지로 있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모두 사양하였다. 그리고 간청에 못 이겨 내원(內院)에 들어가는 일이 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버리고 떠났으니, 이는 대개 세상을 마치 허깨비[幻]처럼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언젠가 한 번은 고승(高僧) 10인의 법회(法會)를 주관한 적이 있었는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현릉(玄陵)이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으니, 공이 또 환(幻)의 맛에 대해서 더욱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청룡(靑龍) 혜 선사(惠禪師)가 경성(京城)에 오는 편에 공이 글을 나에게 보내 기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이 몸의 환(幻)은 사대(四大)가 바로 그것이요, 이 마음의 환은 연영(緣影)이 바로 그것이요, 이 세계의 환은 공화(空華)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일단 환이라고 말했고 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볼 수 있는 것이요, 따라서 이것을 닦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닦을 수 있는 것을 닦는 이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과는 같지가 않다. 이것이 바로 내가 평소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바탕이니, 어찌 단멸(斷滅)의 경계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또 이른바 삼관(三觀)이라는 것이 있어서 단복(單複)을 통해 청정정륜(淸淨定輪)을 이룰 수가 있는데, 허깨비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그 남은 티끌을 녹여 없애기도 하는 그런 묘한 솜씨가 그 속을 또 관통하고 있고 보면, 환(幻)이라는 것이 말학(末學)에게 도움을 주는 면도 결코 적지 않으리라고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의 거실을 그렇게 이름 지음으로써 나의 소문을 듣고 나의 거실에 들어오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이를 보고서 자성(自省)하게 하려는 까닭이라고 하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적막하고 쓸쓸한 암자에서 한가로이 거하는 처지에, 굳이 그런 이름을 내걸고 기문을 지어서 중언부언(重言復言)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나야 물론 공을 안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또 공부선(功夫選)을 시험할 당시에 유독 공이 혼자서 입을 열어 묻는 뜻에 정확하게 답하는 것을 보고는, 공의 명성이 그야말로 헛되이 얻어진 것이 아니라서 어떤 사람들보다도 출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지금 자신의 암자를 이름 지은 그 뜻을 살펴보건대, 이 역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그 문하에 노니는 자들로 하여금 뭔가 의거하여 힘쓸 여지를 만들어 주려는 배려가 느껴지기에, 내가 글솜씨가 졸렬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노래 한 수를 지어 부치기를,
텅 빈 하늘에 흰 구름 일어 떠다니고 / 白雲兮行太虛
잠잠한 바다에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네 / 長風兮卷滄海
어디서 와서 이런 모습 나투다가 / 其來兮何從
어디로 떠나 홀연히 사라지는고 / 其去兮安在
암자에 높이 누운 우리 한가한 도인이여 / 菴中高臥兮閑道人
밤엔 달이 등불이요 낮엔 솔이 일산(日傘)일세 / 月作燈兮松作蓋
하였다.
끝 으로 다시 한 번 일러 둘 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뒷날 나의 기문을 읽는 사람들은 응당 요술을 부리는 환인(幻人)의 심식(心識)을 배워야만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수공(修公)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내가 이렇게 기문을 지은 뜻을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눈을 높이 들어 바라보시기를.
무오년(1378, 우왕4) 5월 26일에 짓다.
[주D-001]사여게(四如偈) : 《금 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구절, 즉 “일체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또 이슬이나 번갯불과 같으니, 응당 이런 차원에서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한 경문(經文)을 가리킨다.
[주D-002]무위(無爲) : 불 교 용어인 유위(有爲) 즉 유위법(有爲法)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보통 무위법(無爲法)이라고 일컫는다. 인연(因緣)의 화합으로 조작되어 일어나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 아닌 절대 상주(絶對常住)의 법으로서, 불가에서 말하는 진리나 열반(涅槃), 그리고 다른 말로 법성(法性)이나 실상(實相)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주D-003]사대(四大) : 불교에서 말하는 색법(色法) 즉 물질을 구성하는 4대 원소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가리킨다.
[주D-004]연영(緣影) :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의 5식(識)이 외계의 대상과 접하여 인식 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 나타나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의 영상(映像)을 말한다.
[주D-005]공화(空華) : 원 래는 눈병 걸린 사람의 눈에 괜히 어른거리는 환화(幻化)의 허공 꽃을 말하는데, 일체 만물과 세계 가운데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가 있다고 망견(妄見)을 일으키는 사람을 비유할 때 불가(佛家)에서 곧잘 쓰는 표현이다. 《成唯識論 卷8》
[주D-006]달을 …… 것 : 달 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응당 달을 보아야 할 텐데, 손가락만을 쳐다보고는 그것이 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에서 문자(文字)와 명상(名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는 비유이다. 《楞嚴經 卷2》
[주D-007]단멸(斷滅)의 경계 : 불 교 용어인 단멸론(斷滅論)의 준말로, 단견(斷見)과 같은 말이다. 사후(死後)에도 항상 존재한다는 상견(相見)과 대칭되는 말로, 어떤 존재이든 간에 결국에는 끊어져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 단견인데, 불가에서는 상견과 마찬가지로 단견 역시 외도(外道)의 편견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成唯識論 卷6》
[주D-008]삼관(三觀) : 일 체 존재를 대하는 세 가지의 관법(觀法)으로, 이에 대한 설명이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천태종(天台宗)의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의 설이 가장 유명하나, 여기에서는 환암(幻菴)이 선승(禪僧)인 점을 감안해 볼 때, 당(唐)나라 징관(澄觀)이 말한 정관(靜觀)ㆍ환관(幻觀)ㆍ적관(寂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D-009]단복(單複) : 단 복의 단(單)은 단전심인(單傳心印)을 주장하는 선종(禪宗)의 교설을 가리키고, 복(複)은 선종 이외의 각 종파의 법문을 가리키는데, 《원각경(圓覺經)》 서문에 “삼관으로 맑고 밝게 살피고, 단복으로 원만하게 닦아 간다.[三觀澄明單複圓修]”는 말이 나온다.
[주D-010]청정정륜(淸淨定輪) : 《원각경》에서 선정(禪定)의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는 25종(種)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 방법으로 얻어지는 선정에 사마타(奢摩他)와 삼마발제(三摩鉢提)와 선나(禪那)의 세 종류가 있는데, 삼마발제가 바로 환행(幻行)이다.
[주D-011]공부선(工夫選) : 승려가 수행한 공부를 평가하던 시험인데,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9월에 광명사(廣明寺)에 승려들을 모아 놓고 나옹(懶翁) 혜근(惠勤)에게 명하여 공부선을 행하게 했던 기록이 있다. 《高麗史 卷42 恭愍王世家》
[주D-012]한가한 도인 : 당 (唐)나라 선승(禪僧) 영가(永嘉) 현각(玄覺)이 지은 〈증도가(證道歌)〉 첫머리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배움도 끊어지고 아무 할 일 없이 한가한 도인은, 굳이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참된 진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름 없는 실제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허망한 몸이 바로 법신인 것을.[君不見絶學無爲閑道人不除妄想不求眞 無名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평현(砥平縣) 미지산(彌智山)의 윤필암(潤筆菴)에 대한 기문 |
|
한 산자(韓山子)가 보제(普濟)의 부도(浮圖 사리탑)에 명(銘)을 짓고 나서, 그 문도(門徒)들에게 이르기를, “보제는 우리 선왕(先王 공민왕)이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다. 그만큼 그분은 도(道)가 존귀하고 덕(德)이 고매하였다. 그러니 나라 안에서 그 누군들 공경하는 마음을 바치면서 그 문하에 달려가 한마디 말씀이라도 얻어듣는 것을 평생의 행운으로 여기지 않는 이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나만은 유독 인사드리는 일을 게을리 한 나머지 죽원(竹院)의 승화(僧話)조차도 내 귀에 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때문에 보제가 궁중을 출입할 때나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할 적에도 감히 경솔하게 나아가 찾아뵙고서 내가 지켜 오던 바를 바꾸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도가 서로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꾀할 수 없는 법이 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제가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舍利)가 나오는 이적(異蹟)이 나타나자 세상에서 보제의 도를 더욱 믿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달려가기에 바빴는데, 나만은 또 병이 드는 바람에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틈을 갖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유지(有旨)를 내려 명(銘)을 짓도록 하였기에, 감히 그 분부를 받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다만 보제가 나의 글을 괜찮게 여길지 어떨지는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 세상의 대유(大儒)로서 글을 잘 짓는 이들이 적지 않은 터에, 유독 내가 이런 명을 받게 된 것을 어찌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 자신이 미상불 행운으로 여기면서도 한편 슬퍼지는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보제의 문인(門人)이 나에게 예를 행하면서 “이것은 윤필료(潤筆料)입니다.” 하고 사례하기에, 내가 이를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스님은 선왕의 스승이었고, 나는 선왕의 신하였다. 내가 선왕의 신하 된 몸으로 선왕의 스승에게 명(銘)을 지어 드린 것이니, 예법(禮法)으로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가령 선왕이 현재 아무 탈 없이 살아 계시어 친히 나에게 예물(禮物)을 내려 주신다 하더라도, 나는 핑계를 대고 사양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지금은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텐데, 내가 감히 염치없이 재물을 탐낸 나머지 스스로 물욕(物慾)에 빠져들어서야 되겠는가. 스님의 제자로서 스승의 은혜를 꼭 갚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퇴락한 옛 절을 수리하여 한편으로는 국가에 보탬이 되게 하고 한편으로는 승도(僧徒)를 편안하게 거처하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비록 나의 붓 값을 치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제가 남겨 준 은덕을 더욱 윤택하게 하여 다른 모든 이에게 그 은혜를 끼쳐 주는 것이 갈수록 끝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모두 승려 지선(志先)과 지수(志守)가 열심히 뛰어다닌 공인 동시에, 지금은 묘덕(妙德)이란 이름의 비구니(比丘尼)가 된 정안군(定安君)의 부인 임씨(任氏)가 재물을 희사한 덕분이다. 이렇게 해서 미지산에 윤필암이 세워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내가 또 이 기문을 짓게 된 것이다.
뒷날 이 암자에 거처하는 이들은 보제의 사리가 바로 자기 몸의 사리로 될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 유자(儒者)의 말 가운데에도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렇게 하기만 하면 나도 그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부디 그 의미를 되새겨서 좌우명으로 삼기를 바란다. 단월(檀越)의 성명은 아래에다 갖추 기록한다.
무오년(1378, 우왕4) 가을 8월에 짓다.
[주D-001]죽원(竹院)의 승화(僧話) : 절 간에서 우연히 승려를 만나서 나누는 한담(閑談)을 말한다. 당(唐)나라 이섭(李涉)의 〈제학림사승사(題鶴林寺僧舍)〉라는 시에 “절간을 지나다가 스님과 만나 나눈 얘기, 떠도는 몸 반나절의 한가함을 또 얻었네.[因過竹院逢僧話 又得浮生半日閑]”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02]공부선(工夫選) : 승려가 수행한 공부를 평가하던 시험인데,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9월에 광명사(廣明寺)에 승려들을 모아 놓고 나옹(懶翁) 혜근(惠勤)에게 명하여 공부선을 행하게 했던 기록이 있다. 《高麗史 卷42 恭愍王世家》
[주D-003]도가 …… 법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주D-004]순(舜)은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안연(顔淵)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지평현 미지산 용문사(龍門寺)의 대장전(大藏殿)에 대한 기문 |
|
이 대장경(大藏經) 1부(部)는 모관(某官) 모(某)가 시주(施主)한 것이다. 맨 처음에는 강화부(江華府)의 용장사(龍藏寺)에 안치하였는데, 이는 뜻밖에 일어나는 재앙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경인년(1350, 충정왕2) 이후로 왜적이 바닷가의 군읍(郡邑)을 계속 침범하였는데, 강화는 요충지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그 피해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으므로, 그 와중에서 구씨(具氏)의 손녀가 죽고 만호(萬戶)인 인당(印璫)의 부인이 죽기까지 하였다.
이에 재신(宰臣)인 오자순(吳子淳)의 부인이 계책을 내기를, “우리 조부께서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대장경을 시주하셨는데, 불행히도 왜적에게 유린당한 나머지 거의 태반이나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 이를 보충해서 복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경천사(敬天寺)로 장소를 옮긴 뒤에 표제(標題)를 붙이고 궤 속에 넣어 종전의 것을 완전히 새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이 절이 또 바다와 가까운 데다 용장사와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니, 깊은 산골짜기에다 보관해 두는 것이 더 낫겠다.” 하였는데, 그때 마침 미지산의 지천(智泉) 등이 서울에 와서 대장경을 시주받으려고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구씨가 기뻐하여 그 사연을 털어놓으니 지천 등도 큰 보배를 얻게 된 것을 즐거워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천 등으로서는 특별히 한 일도 없이 뜻을 이루게 되었고, 대장경 또한 돌아갈 곳이 있게 되었으니,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더 이상 마음 쓸 일이 없게끔 되었다. 그리고 용문사의 입장에서는 절이 생긴 이래로 아직 갖추어 놓지 못한 일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가 있게 되었고, 구씨 자손의 입장에서는 백세토록 대장경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게 되었음은 물론, 지하에 계신 선조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제는 용문사의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마치 안목(眼目)을 보호하듯 대장경을 마땅히 보호하게 될 것이니, 구씨야말로 후손된 도리를 제대로 했다고 말할 만하다.
나 는 평소에 불교의 교설(敎說)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교설이 일천 궤짝에 일만 두루마리나 된다는 것을 얻어듣고는, 왜 그렇게도 많은 것인지 처음에는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이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들어 보니, 경(經)이라는 것과 율(律)이라는 것과 논(論)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경은 부처와 보살(菩薩)의 말을 옮겨 놓은 것이고, 율은 의례(儀禮)에 관한 것을 드러낸 것이고, 논은 경과 율의 의미를 부연하여 설명한 것으로서, 이 모두가 석가모니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불도(佛道)를 펴는 데에 도움이 되거나 말이 조금 이치에 가깝기만 하면 문득 그 속에다 편입시키곤 하였으니, 일천 궤짝에 일만 두루마리나 될 정도로 많아진 것이 또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불교의 학문을 배우는 자들은 그 책을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글자 하나 구절 하나를 음미하는 그 사이에서 일천 성인(聖人)이 말로 전하지 못한 묘한 도리를 찾아내어야만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대장경의 전독(轉讀)을 끝마쳤다고 말한다면,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는 수십 년 동안 인천(人天)이 부처를 둘러싸고 예배(禮拜)를 올렸던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시냇물 소리 하나하나가 부처의 넓고 긴 혀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말과 ‘속눈썹이 눈 앞에 있건마는 항상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으니, 배우는 이들은 자기 몸으로 체득하는 일을 또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장전은 모두 세 칸으로 되어 있는데, 재물을 희사해서 도와준 사람은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이다.
무오년(1378, 우왕4) 가을 8월 일에 짓다.
[주D-001]천룡팔부(天龍八部) : 불 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 신들을 가리키는데, 제석천(帝釋天)인 천(天), 용(龍)을 비롯해서 야차(夜叉), 향신(香神)인 건달바(乾闥婆), 아수라(阿修羅), 금시조(金翅鳥)인 가루라(迦樓羅), 비인(非人)인 긴나라(緊那羅), 대망신(大蟒神)인 마후라가(摩睺羅伽) 등이다.
[주D-002]전독(轉讀) : 1 부(部)의 경(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진독(眞讀)과 상대되는 말로, 불경이 너무 방대한 점을 감안해서 법회(法會) 때에 불경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의 몇 줄 정도만 읽고서 끝내는 것을 말하는데, 대장경의 전독은 달리 전장(轉藏)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주D-003]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 동안 : 석 가(釋迦)가 성도(成道) 후 인도(印度) 각지에서 설법한 45년 동안을 말한다. 35세에 대각(大覺)을 이룬 뒤에 녹야원에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비구를 상대로 사제(四諦)의 교설 등을 처음으로 베풀었으며, 80세에 이르러 발제하의 서쪽 언덕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입멸(入滅)하였다.
[주D-004]시냇물 …… 것이다 : 송 (宋)나라 소식(蘇軾)의 〈증동림총장로(贈東林總長老)〉라는 칠언 절구 가운데 1ㆍ2구(句)에 “시냇물 소리도 바로 부처의 넓고 긴 혀, 산 빛 또한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어찌 아니랴.[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라는 표현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23》 광장설(廣長舌)은 부처의 이른바 32가지 대인상(大人相) 가운데 하나이다.
[주D-005]속눈썹이 …… 못한다 : 당 (唐)나라 두목(杜牧)의 〈등지주구봉루기장호(登池州九峯樓奇張祜)〉라는 칠언 율시 가운데 5ㆍ6구(句)에 “속눈썹이 눈 앞에 있는데도 항상 보지 못하는걸, 몸 밖에 도가 있지 않은데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睫在眼前長不見 道非身外更何久]”라는 표현이 나온다. 《樊川詩集 卷3》
2010-01-06
'▒ 목은고자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은문고(牧隱文藁) 제6권 번역 (0) | 2010.01.08 |
---|---|
목은문고(牧隱文藁) 제5권 번역 (0) | 2010.01.08 |
목은문고(牧隱文藁) 제3권 번역 (0) | 2010.01.08 |
목은문고(牧隱文藁) 제2권 번역 (0) | 2010.01.08 |
목은문고(牧隱文藁) 제1권 번역 (0) | 2010.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