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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문고(牧隱文藁) 제1권 번역

천하한량 2010. 1. 8. 04:42

목은문고(牧隱文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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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 대한 일을 기록함

 


선 정(先正 돌아가신 부친)께서는 다른 기예에 대해서는 하나도 뜻을 두지 않으셨다. 그런데 유독 바둑에 대해서만은 묘한 경지를 대략 터득하셨으므로, 당대의 고수들도 더러 양보를 하곤 하였다. 하지만 집안에는 바둑과 관련된 도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처음에 부친상을 당하여 도성에서 돌아와서는 수심에 잠긴 채 아무 일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연제(練祭 소상(小祥))를 마치고 나서 서책을 정리하던 중에 바둑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하얀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진 조개껍질로 되어 있었으며, 하나는 옥처럼 윤기가 나면서 새까만 색깔을 띤 돌로 되어 있었다. 이 바둑돌들은 정교하게 갈고 다듬어져서 마치 별처럼 동글동글하게 빛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유자(儒者) 석상(席上) 진귀한 보배라고 할 만하였다. 하지만 그 바둑알이 겨우 200개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파도에 씻긴 돌들을 주워 모은 뒤에야 원래의 숫자를 채워 넣을 수가 있었다.
그 러던 어느 날 손군(孫君)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계홍(戒弘)이라는 승려에게서 받은 것인데, 영공(令公)의 선대부(先大夫)께서 어버이를 모시고 계시던 날에 우리 아이 기()가 바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바둑돌을 손에 쥐고서 하나하나 세어 보고는 말하기를, “처음에는 360개가 되고도 남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어째서 이처럼 줄어들었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내가 그의 뜻을 관찰해 보노라니 마음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슬픈 감정이 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이 에 내가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이처럼 보잘것없는 작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그 사이에 명수(命數)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니, 군자가 이 점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본다면, 계홍 이전에 이 바둑돌을 만든 자는 누구이며, 전해 준 자는 또 누구라고 할 것인가. 계홍으로부터 손씨(孫氏)에게 전해지고, 다시 손씨에서 이씨(李氏)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벌써 반의 반이나 분실되고 말았다. 그러니 앞으로 누구에게 계속 전해지다가 급기야는 점차로 흩어져서 누구의 손에 의해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유자(儒者)가 쓰게 될지, 아니면 부귀한 자나 호협(豪俠)한 자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
이처럼 고금의 슬픈 상념에 젖으면서 한 물건의 운명을 자세히 생각해 보노라면, 어찌 또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원동 방정(圓動方靜)의 기틀이라든가 이형 맹세(羸形猛勢)의 이론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언급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백돌은 140개요 흑돌은 109개가 현재 남아 있다고 기록해 두면서 글 두 통을 쓰게 되었으니, 하나는 손군에게 주어 그 바둑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내 집에 보관하여 그 바둑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케 함으로써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겠다.

 

[주D-001]유자(孺子)가 …… 보배 : 《예기(禮記)》 유행(儒行)유자는 석상의 진귀한 보배처럼 자신의 덕을 갈고 닦으면서 임금이 불러 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원동 방정(圓動方靜) :
모 난 바둑판 위에 둥근 바둑돌을 놓아 온갖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나라 장열(張說)이 현종(玄宗) 앞에서 이필(李泌)을 시험하기 위해방원 동정(方圓動靜)’을 설명하면서, “모난 것은 바둑판과 같고 둥근 것은 바둑돌과 같으며, 움직임은 바둑돌이 살아 있는 것과 같고 고요함은 바둑돌이 죽어 있는 것과 같다.[方若棋局 圓若棋子 動若棋生 精若棋死]”고 하자, 이필이 그 즉시모난 것은 의()를 행함과 같고 둥근 것은 지()를 쓰는 것과 같으며, 움직임은 인재를 초빙하는 것과 같고 고요함은 뜻을 얻음과 같다.”라고 대답하여 기동(奇童)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39 李泌列傳》
[주D-003]이형 맹세(羸形猛勢) :
형세를 허약하게 보이도록 하여 상대방을 유인했다가 맹렬한 기세를 떨치며 격파한다는 뜻으로, 이른바위기십결(圍棋十訣)’처럼 바둑을 둘 때의 자세나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차군루기(此君樓記)

 


진 강(鎭江) 위에 있는 내 집에서 성흥산(聖興山)까지는 겨우 30리 정도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그 산속을 들락거리면서 보광 장로(普光長老)인 남산공(南山公)을 찾아뵙곤 하였다. 그런데 내가 가기만 하면 공이 언제나 누각에 대한 기문(記文)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선대부(先大夫)께서 생전에 어버이를 모시고 계시던 날에 내가 언젠가 이 누각을 영광스럽게 해 줄 한마디 말씀을 해 달라고 요청드리자, 공이 또한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런데 세상일 때문에 계속 미루어지다가 공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이 누각이 불행하게 된 것을 슬퍼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 누각에 기문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선대부의 뜻이라고 할 것이니, 그대가 의리상으로도 사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바야흐로 독례(讀禮) 중이라서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그 러다가 금년에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 돌아와서는 다시 찾아뵈었더니, 또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누각이 완성된 뒤로 세월이 벌써 10여 년이나 지나갔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누각을 오르내린 유자(儒者)가 몇 명이며 승려가 몇 명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여태 누각의 벽 위에 한 글자도 걸려 있지 않으니, 이는 그대가 장원(壯元)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 산속의 승경(勝景)으로 말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 누각을 빛내고 있는 것은 바로 대나무에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내가
차군(君)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차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내가 유독 그대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내 가 차군과는 일찍부터 마음속으로 사귀어 왔던 만큼, 공이 나에게 명하지 않더라도 나의 감회를 펼쳐 보일 만한데, 하물며 이렇게까지 간절히 부탁하시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더라도 내가 후대에 늦게 태어난 몸이니 또 어떻게 감히 덧붙여 말을 할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
대나무가 현인(賢人) 비슷하다고 하는 설은 낙천(樂天) 기문(記文) 상세히 실려 있고, 대나무가 장부(丈夫)라는 주장은 목지(牧之) 부(賦)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우칭() 대나무와 어울리는 사물의 정상을 남김없이 표현하였으며, 관부(寬夫) 대나무를 통해 사정(邪正) 구분할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여가(與可) 대나무의 속성을 파악하여 묵(墨)으로 묘사하였고, 자첨(子瞻) 도리를 밝게 살펴 글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진()나라의 칠현(七賢)이나 당()나라의 육일(六逸) 같은 사람들 역시 모두 차군 덕분에 유명해진 경우라고 할 것이다. 그 밖에 소인(騷人)과 묵객(墨客)들이 웅장한 글과 걸출한 구절을 지어내어 차군을 찬양한 것들이 또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 러니 내가 비록 지어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대나무의 곧은 마음과 변치 않는 절조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필시 고루한 쪽으로 잘못 짓게 되어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비난을 받게 될 것이요, 달을 보내고 바람을 불러오는 면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필시 천박한 경지로 떨어진 나머지 돈후한 인품의 소유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어떻게 내가 터무니없는 설을 지어내어 옛사람들을 이기려고 대들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내가 아예 기문을 짓지 않는 것이 좋을 성싶기도 하다
.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내가 유독 부러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선가(禪家)의 유명한 노사(老師)께서 선정(禪定)을 잠깐 쉬고 재계(齋戒)하는 그 여가에, 정신을 풀어헤치고 생각을 모두 내려놓은 가운데 서로 더불어 이 누각 위에서 소요(逍遙)하노라면, 마치 비바람이 치는 듯한 소리가 대숲에서 몰려와 정적(靜寂) 속에 휘감긴 객진(客塵)을 얼음 녹듯 해소시켜 주리라고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필시 성문(聲聞 소승(小乘))의 공적(空寂)한 경계를 깨뜨려 줌은 물론이요, 불타는 번뇌에서 시원한 경지로 옮겨 가게도 해 줄 것이니, 차군의 도움이 그것만으로도 벌써 많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내가 이 점에 대해서만은 한마디 말을 해 두지 않을 수가 없다
.
남산공은 나의 선인(先人)이 만년에 사귄 방외(方外)의 친구분이신데, 누가 나에게 공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나는 번번이차군을 안다면 남산이 어떤 분인지 알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곤 한다.

지정(至正) 계사년(1353, 공민왕2) 여름 6월 어느 날 한산(韓山) 이색은 짓다.

 

[주D-001]독례(讀禮) : 거상(居喪)을 뜻한다. 《예기》 곡례 하(曲禮下)장사 지내기 전에는 상례를 읽고, 장사 지낸 뒤에는 제례를 읽는다.[未葬讀喪禮 旣葬讀祭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차군(此君) :
대 나무의 별칭이다.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잠깐 빈 집에 거할 적에도 대나무를 심도록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어떻게 하루라도 차군이 없이 지낼 수가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라고 대답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주D-003]대나무가 …… 있고 :
낙천은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자()인데, 그의 〈양죽기(養竹記)〉 첫머리에대나무는 현인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竹似賢 何故]”라고 한 뒤, 전편에 걸쳐 그 설을 일관되게 개진하고 있다.
[주D-004]대나무가 …… 있다 :
목 지는 당()나라 두목(杜牧)의 자인데, 그의 〈만청부(
晴賦)〉에대숲이 외부를 둘러싸고 있음이여, 십만 장부가 갑옷과 칼날을 서로 부딪치면서 빽빽하게 진을 친 채 주위를 시위(侍衛)하고 있도다.[竹林外裏兮 十萬丈夫 甲刃摐摐 密陣而環侍]”라는 표현이 나온다. 《樊川集 卷1
[주D-005]우칭()은 …… 표현하였으며 :
()나라 왕우칭(王禹
)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에, 대나무가 여름에는 소나기와 잘 어울려서[夏宜急雨] 폭포 소리가 나고, 겨울에는 함박눈과 잘 어울려서[冬宜密雪] 옥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 등, 이른바 6()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주D-006]관부(寬夫)는 …… 하였다. :
관부는 송나라 채거후(蔡居厚)의 자인데, 그의 《채관부시화(蔡寬夫詩話)》에 대나무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주D-007]여가(與可)는 …… 묘사하였고 :
여가는 송나라 문동(文同)의 자로, 대나무 묵화(墨畫)를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는데, 너무도 대나무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호를 차군암(此君庵)이라고 짓기까지 하였다.
[주D-008]자첨(子瞻)은 …… 붙여 놓았다 :
()가 자첨인 소식(蘇軾)이 문동과 친하게 지내면서, ()와 초사(楚辭)와 초서(草書)와 회화(繪畫)의 사절(四絶)이라고 극찬을 하였는데, 문여가(文與可)의 묵죽(墨竹)에 쓴 서()와 시가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272829권에 보인다.
[주D-009]칠현(七賢) :
()ㆍ진()의 완적(阮籍), 혜강(
),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령(劉伶), 완함(阮咸), 상수(向秀) 등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말한다.
[주D-010]육일(六逸) :
당 나라 개원(開元) 말년의 이백(李白), 한준(韓準), 공소보(孔巢父),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陶沔) 등 이른바 죽계육일(竹溪六逸)을 가리킨다. 태안부(泰安府) 조래산(徂徠山) 아래 죽계에 거하면서 날마다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만끽하였으므로 당시에 그런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新唐書 卷202 文藝列傳中李白》

유사정기(流沙亭記)

 


유사(流沙) 우공(禹貢)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니, 성인의 명성과 교화가 그래도 미친 지역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기까지 하다니, 나로서는 그 뜻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옛 사람들이 한가로이 노닐며 휴식을 취하는 장소에 편액(扁額)을 내걸 때에는, 으레 유명한 산수(山水)를 가탁한다든가, 혹은 대표적인 선인(善人)이나 악인(惡人)을 게시하여 권선징악의 뜻을 보인다든가, 아니면 선대(先代)와 향리(鄕里)에서 그 이름을 취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뜻을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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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유사(流沙)처럼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환경이 조악(粗惡)해서 중국의 인물이 배출되지 않음은 물론 배와 수레가 닿지 않는 곳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말하기조차 싫어하여 그 이름을 일컫는 것을 부끄러워할 텐데, 더구나 대서특필하여 출입문 사이에다 기재해 놓으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나의 형이 그런 이름을 붙인 이면에는 필시 범상치 않은 뜻이 들어 있으리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
천하는 광대한 것인 만큼 성인의 교화가 그에 비례하여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오히려 외적(外的)인 일이요, 사람의 몸이 비록 작긴 하지만 광대한 천하와 서로 함께할 수가 있으니, 이것은 우리의 내적(內的)인 일이다
.
우선 외적인 일의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동쪽으로는 해가 뜨는 곳까지, 서쪽으로는 곤륜산(崑崙山)까지, 북쪽으로는 불모(不毛)의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눈이 내리지 않는 곳까지
성인의 교화가 다다르고 이르고 미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혼연일체가 되는 경우는 드문 반면에 분열 현상이 언제나 많이 일어나곤 하니, 내가 정말 마음속으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런데 내적인 일의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힘줄과 뼈로 묶여 있는 우리의 육신과 성정(性情)의 미묘한 작용을 보이는 우리의 몸속에, 마음이라는 것이 자리하고서 우주를 포괄한 가운데 온갖 만물과 수작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그 마음은 어떠한 위무(威武)로도 분리시킬 수가 없고, 어떠한 지력(智力)으로도 꺾을 수가 없이, 외연(巍然)히 나 한 사람의 주인공으로 거하고 있다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비록 외따로 떨어진 극지(極地)에 잠복하여 칩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가슴속의 도량(度量)으로 보면 성인의 교화를 받는 사방의 어떤 먼 곳까지도 내 마음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또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형의 뜻도 사실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옛날에는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지닌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피곤해서 그만두었다
.
신 축년(1361, 공민왕10) 겨울에 병화(兵禍)를 피해서 동쪽으로 가다가 처음으로 영해부(寧海府)에 발을 딛게 되었는데, 이곳은 나의 외가(外家)인 동시에 나의 형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해로 말하면 동쪽으로 대해(大海)와 맞닿아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으니, 실로 우리 동국(東國)의 극동(極東)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하겠다. 지금 내가 다행히 한 모퉁이에 이르러서 동극(東極)을 극()할 수 있었고 보면 다른 모든 곳도 미칠 수가 있을 것인데, 하물며 이 동극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서극(西極)의 유사(流沙)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누대 위에서 술잔을 들고 있을 적에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흔쾌히 이와 같이 적게 되었다.

지정(至正)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짓다.

 

[주D-001]유사(流沙)는 …… 하겠다 : 유 사는 사막 지대를 말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 말미에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다다랐고, 서쪽으로는 유사에까지 이르렀으며, 북쪽과 남쪽에도 모두 그 힘이 미쳐, ()의 명성과 교화가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聲敎訖于四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성인의 …… 미친다 :
《서 경(書經)》 우공(禹貢) 말미에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다다랐고, 서쪽으로는 유사에까지 이르렀으며, 북쪽과 남쪽에도 모두 그 힘이 미쳐, ()의 명성과 교화가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聲敎訖于四海]”라는 말이 나온다.

인각사(麟角寺) 무무당(無無堂)의 기문

 


불 교(佛敎)는 역외(域外)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내(域內)의 종교를 앞질러서 홀로 존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역내의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화복(禍福)과 인과(因果)에 대한 설만 보더라도 거기에는 벌써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점이 있다. 게다가 불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일상적인 세상일에는 싫증을 내면서 유교(儒敎)의 예법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호걸스러운 인재들이다. 불교가 이런 인재들을 얻게 되었고 보면, 그 도가 세상에서 존경을 받게 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래서 불교를 심하게 거부하지 않을뿐더러, 더러는 호감을 가지고 서로 어울리기도 하는데, 이는 대개 그들에게서 취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계(曹溪)의 도대 선사(都大禪師)인 서공(
)이 새로 은혜로운 왕명(王命)을 받고 구산(九山)의 선문(禪門)을 영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낙수(洛水) 가에서 상을 뵙자 상이 자리를 하사하고 정중하게 대접하였으니,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도 그의 언행을 보면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으니, 실로 그 마음이 담연(淡然)하여 아무 데에도 매인 곳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내가 낙수 서쪽의 여러 산들을 유람하다가 우연히 남장(南長)의 승창(僧窓)에 들렀더니, 공이 한 번 보고 흔쾌히 여기면서 자신이 주지로 있는 인각사 무무당의 기문(記文)을 부탁하고는, 이에 대한 사연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대개 본사(本寺)로 말하면, 불전(佛殿)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중앙의 뜨락에 탑()이 서 있으며, 좌측에 승무(僧廡 행랑(行廊))가 있고 우측에 선당(膳堂 식당)이 있는데, 좌측은 거리가 가까운 반면에 우측은 멀기 때문에 공간의 배치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당의 좌측에 무무당을 세운 것인데, 이렇게 되자 좌우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서로 균일해졌다
.
무무당의 규모는, 기둥으로 헤아리면 다섯 개짜리가 셋이요, 칸 수로 헤아리면 다섯 칸짜리가 둘인데, 이것은 공이 건물을 지으면서 새로 고안한 방식이다. 이 공사는 신축년(1361, 공민왕10) 8월에 시작하여 금년 7월에 완공하였으며, 8월 갑자일(甲子日)에 총림(叢林)의 법회(法會)를 열어 낙성식(落成式)을 가졌다
.
그런데 일단 이 건축물이 들어서고 보니, 선당의 좌측 공간이 또 비좁아지는 걱정이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선당을 조금 우측으로 옮기면 공간을 배치하는 제도상으로 볼 때 더 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역량으로 볼 때 공사를 혹 계속 할 수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뒷사람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으니, 이것이 또한 공의 뜻이기도 했다
.
나는 생각건대, 공은 불도(佛道)에 대한 신앙이 독실하기 때문에 명예가 날이 갈수록 넓게 퍼져 나가고, 선행(善行)을 하는 것이 근실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지 쉽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자신의 종교를 붙들어 일으킨 공이 무척이나 많은데, 이러한 일들은 다른 승려에게는 감히 바랄 수 없다고 하겠다
.
더군다나 인각사에 마음을 닦을 만한 장소가 지금까지 없었으니, 공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이 때문에 당시에 비록 나라에 많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이 공사만은 중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의 뜻을 받들어 청규(淸規)를 행하고 후학(後學)들에게 은혜를 끼쳐 주려 하면서 오직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니, 공의 마음 씀씀이야말로 근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감히 이에 대한 일을 적어서 공의 뒤를 잇는 자에게 알려 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무무(無無)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 당()에 거하는 이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여기에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지정(至正) 임인년(1362, 공민왕11)에 짓다.

 

영광(靈光)의 새 누각에 대한 기문

 


신군 자전(申君子展)이 영광(靈光)의 수령으로 와서 그동안의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을 예악(禮樂)으로 이끌어 화목하게 하였다. 그런데 정사(政事)를 행하는 여가에 관사(館舍)를 둘러보다가, 누각이 여태 하나도 서 있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고는, 군이 말하기를,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누각이란 답답하게 막힌 심정을 해소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따라서 다만 보기에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사람에게 크게 보탬이 되는 곳이라고 하겠다. 더군다나 내가 한 지역을 맡아 지키고 있는 만큼 왕인(王人 왕의 사자(使者))이 오면 그들을 예우해야 할 처지인데, 왕인이 나랏일에 분주해하면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걱정하다 보면 잠시나마 마음을 즐거이 하고픈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고을에는 답답하게 막힌 심정을 해소할 길이 없으니, 누각이라도 하나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정신을 상쾌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오직 왕인을 극진하게 예우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기만 하니, 그대 부로(父老)들은 모쪼록 이 일을 도모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 에 뭇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권면하며 자재를 모으고 공사를 도운 결과, 몇 달이 지나는 사이에 누각 하나가 번듯하게 세워져서 한 고을의 장관(壯觀)으로 대두하였으니, 신군은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다. 영광 고을이 신군을 얻고 신군이 새 누각을 세운 것이 옛적의 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의 일이라는 사실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랴
.
이 누각은 푸른 대숲 속에 연꽃 향기가 풍기고, 산 빛과 바다 기운이 원근(遠近)을 비춰 주고 있는 가운데,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또 그 사이를 울려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누각 위에 한번 올라서기만 하면, 그 누구든지 바쁜 업무로 인한 피곤함을 잊고서 불만을 토로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또 어떻게 하면 이곳에 올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될까 생각하게 된다고 하니, 과연 그 경치가 기막힐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동년(同年 과거 급제 동기생)인 권길부(權吉夫)가 신군의 부탁을 받고 나에게 와서 기문을 요청하기에 내가 승낙하였는데, 그동안에는 글을 지을 틈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어버이를 뵙기 위해 돌아와 있는 때에 또 급하게 요청해 왔으므로, 내가 졸렬한 글솜씨를 잊고서 곧장 짓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왕인(王人)이 된 자들에게 일러 두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즉내가 왕인의 신분인데 누가 감히 나를 함부로 대하리오.’라는 생각만 하지 말고, 하는 일 없이 여기에서 놀기만 하거나 욕심대로 하지 말아서, 이 고을 수령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정(至正)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짓다.

 

[주D-001]백성을 …… 하였다 : 《효경(孝經)》 삼재장(三才章) 7예악(禮樂)으로 이끌면 백성이 화목하다.[導之以禮樂 而民和睦]”라는 말이 나온다.

풍영정기(風詠亭記)

 


상주 목사(尙州牧使)인 김공(金公)이 공관(公館)의 동쪽 편에다 정자를 지은 뒤에, 한산(韓山) 이색에게 글을 보내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요청하고는 또 말하기를, “뜨거운 물건을 만지고서 곧장 물로 씻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誰能執熱 逝不以濯]’ 내가 상주의 이 고달픈 무더위를 나름대로 씻어 내려 하고 있으니, 그대는 나의 부탁을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내 가 뒤돌아보건대, 지난 신축년(1361, 공민왕10) 겨울에 상이 남쪽으로 행행(行幸)하여 이듬해 봄에는 상주에 머물렀는데, 그때 내가 승선(承宣)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옆에서 모셨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어가(御駕)가 청주(淸州)로 옮겨 갔으니, 상주에서 여름철을 보내면서 얼마나 더위에 시달렸을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고을로 말하면 신라(新羅) 때부터 대부(大府)였는데도 어찌하여 이렇듯 유람할 수 있는 정사(亭榭)가 하나도 없는지 그때 매우 유감으로 여겼었는데, 지금에 와서도 대개 당시의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동년(同年)인 박 헌납(朴獻納)의 기록을 눈으로 보고, 문인(門人) 김남우(金南遇)와 족인(族人) 김계(金桂)가 말하는 것을 귀로 들어 보건대, 이 정자에 올라서면 맑은 바람에 미역을 감는 듯 상쾌한 기분이 든다 하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다
.
대저 사시(四時)의 기운이 천지 사이에 유행(流行)하는 과정에서 춥고 덥고 따뜻하고 서늘한 현상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사람이 이에 대응함에 있어서도 각자 다른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송석(松石)과 수천(水泉)의 흥치라든지 사죽(絲竹)과 배상(杯觴)의 즐거움 같은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면, 이른바 춥고 더운 현상이 우리의 눈앞에 전개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외물(外物)에 일단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위의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면, 천시(天時)에 순응하면서 우리의 뜻을 자유롭게 풀어헤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풍영(風詠)하는 한 가지 일이 있지 않나 싶다
.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온다면 가슴속이 유연(悠然)해져서 엉겨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텐데, 하물며 서우(暑雨) 기한(祈寒) 같은 것에 원망과 탄식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더럽힐 수가 있겠는가. 가령 부절(符節)을 나눠 받고 이 고을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봄옷이 만들어졌을 때처럼 마음속으로 화기(和氣)가 흘러넘치게 한다면, 상주 백성들에게 또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이런 뜻에서 내가 감히풍영(風詠)’이라는 이름이 어떨까 하고 제안하는 바이다.
이 정자의 공사를 시작하고 끝낸 그 과정이야 다른 공사와 다를 것이 없지만, 여기에는 특기할 만한 점이 또 네 가지가 있다. 공이 금년 초여름에 정사를 보기 시작하면서 즉시 퇴락(頹落)한 관사를 수선하려고 하였는데, 홀연히 폭풍이 불어와서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오는 바람에 좋은 재목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일이다. 관리들에게 부서별로 일을 나누어 맡기고는 자신이 직접 공사를 감독함으로써 한 사람의 백성도 괴롭히지 않게 하였고, 뭇 공인(工人)들에게 힘을 바쳐 일단 공관(公館)을 수선하게 한 다음에야 정사(亭謝)에 착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일이다. 처음에 풍영정을 경영할 적에 땅 위의 썩은 흙을 수레로 걷어 낸 다음에 방향과 형세를 살피고 나서 일단 몇 길 정도를 파 들어가자 완연히 옛날의 집터가 드러났으니, 이는 대개 공의 설계가 옛사람의 뜻과 깊이 계합(契合)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건물을 기묘하게 제작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난 점이 있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일이다. 또 공이 정사에 임한 이후로 은혜와 위엄을 함께 보여 주어 일이 안정되고 백성을 화목하게 하면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런 사소한 공사에 있어서도 모두 차서(次序)가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일이다
.
그 밖에 담장을 둘러 동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 와 못을 만들고서 각종 초목을 심어 놓은 것이라든가, 사방을 둘러보면 경계가 툭 터진 가운데 뭇 산봉우리가 옹위하듯 이 정자의 경관을 도와주고 있는 것 등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다만 뒷날 여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다.”라고 감탄하신 부자(夫子)의 큰 뜻을 터득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무엇으로 우리 김공(金公)에게 보답할 것인가. 아울러 일러 두건대, 김공의 이름은 남득(南得)이요, 경진년의 진사(進士)로서 중외(中外)에 출입하는 동안 중한 명성을 얻었는데, 내가 그를 아끼고 공경하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이 기문을 짓게 되었다.

기유년(1369, 공민왕18) 12월 어느 날에 짓다.

 

[주D-001]뜨거운 …… 있겠는가 : 《시경(詩經)》 대아(大雅) 상유(桑柔)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2]무우(舞雩)에서 …… 돌아온다면 :
공 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밝히면서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기수에서 목욕하고 기우제 올리는 곳에서 바람을 쐬고는 노래나 부르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자, 공자가 감탄하면서나는 점과 함께하겠다.”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論語 先進》
[주D-003]서우(暑雨)와 …… 하면서 :
《서경》 군아(君牙)여름에 장맛비가 내리면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며, 겨울에 날씨가 많이 추워져도 백성들이 또 원망하고 탄식한다.[夏署雨小民惟曰怨咨 冬祈寒 小民亦惟曰怨咨]”는 말이 나온다.

진종사기(眞宗寺記)

 


지 정(至正) 병오년(1366, 공민왕15) 여름 5월에 시중(侍中) 유공(柳公 유탁(柳濯))이 경영하던 진종사(眞宗寺)의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에 운치 있는 승려 33인을 초청하여 이른바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고 낙성을 축하하였는데, 의발(衣鉢)과 공구(供具 공양(供養)하는 기구) 등 모든 것이 새롭고 풍족하기만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향과 폐백(幣帛)을 내려 그 모임을 빛내 주었으며, 공경(公卿)과 진신(搢紳)들도 모두 달려와서 찬탄하였는데, 무려 열흘 동안이나 빈자리 하나 없이 계속되었다.
내가 이때 처음으로 사찰을 한 번 둘러보게 되었는데, 서까래와 들보에 그려 넣은 단청(丹靑)이 장려(壯麗)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 가운데, 불상(佛像)과 영개(纓蓋)의 장식이라든가 화등(華燈)과 음악을 바치는 설비 등이 모두 찬연히 완비되어 있었다. 승료(僧寮)와 객사(客舍)가 사방을 에워싸고 단정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 밖에 곳간이나 공양간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정결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
상고해 보건대, 이 공사가 착수된 것은 갑진년 초여름이었다. 그런데 날마다 인부 500여 명을 투입하여 60여 칸의 건물을 지으면서, 관청의 비용을 축내지도 않고 백성들의 노역(勞役)을 착취하지도 않고서 어떻게 이처럼 빨리 완공할 수 있었는지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때 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뜻이 무엇인지는 공이 잘 알고 있을 테니, 나를 위해 기문 하나를 지어 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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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공의 조부(祖父)인 영밀공(英密公 유청신(柳淸臣)의 시호(諡號))은 지원(至元) 연간에 중한 명성을 얻었으며, 그 뒤에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의 능호(陵號))과 의릉(毅陵 충숙왕(忠肅王)의 능호)의 재상이 되는 등 한 몸에 모두 상상(上相)의 지위를 13년 동안이나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는 일찍이 이 사찰을 중건(重建)하였는데, 죽은 뒤에도 이곳의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으므로, 자손들이 세시에 이곳을 찾아와서 성묘를 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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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찰이 오래되어 장차 무너지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걱정하며 개연히 탄식하기를, “불초(不肖)한 손자가 선조의 자취를 이을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선조께서 수고스럽게 애쓰면서 아름다운 터전을 열어 놓아 우리 자손을 돌보아 주셨기 때문이다. 자손의 반열 중에서는 내가 가장 맏이인데, 내가 만약 제대로 선조의 뜻을 이어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그 죄를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 사찰이 우리 영역(塋域) 안에 있고 보면, 또 한 번 옛 건물을 철거하여 새롭게 단장하는 일을 어떻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와 함께 영당(影堂)을 지어서 우리 영밀공의 초상화를 드리워 놓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에 보답하게 하는 한편, 불도(佛道)를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축원(祝願)을 드리는 여가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 명복을 빌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종사를 다시 세우게 된 동기요, 시중공(侍中公)이 평소에 지니고 있었던 뜻이라고 하겠다
.
시중공은 한결같이 가법(家法)을 준수하였다. 그리하여 성대한 명성과 크나큰 도량으로 조정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경성(京城)을 수복할 때나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을 평정할 때나 북쪽 변방을 방어할 적에, 조용히 묘당(廟堂)에서 담소하는 가운데 국가의 위급한 형세를 바꿔 태산처럼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대개 한 번의 발언을 하거나 한 가지의 일을 행할 적마다 선조의 법도를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찰과 관련된 자그마한 일이야 또 굳이 거론할 것이 있겠는가
.
하 지만 이 사찰을 다시 일으킨 일을 통해서 우리는 또 공이 지닌 독실한 효성의 일단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효는 대개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이니, 아랫사람을 어루만지는 인()이나 윗사람을 섬기는 충() 모두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사찰을 다시 일으킨 것 역시 선조의 뜻을 이어 받드는 동시에 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니, 도리로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원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화복(禍福)의 설로 현혹시키고 행복을 빈다는 명분에 가탁하여 말할 수 없이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지어 국가의 재정을 탕진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들과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세상의 이른바 호걸(豪傑)이라고 하는 자들을 보면, 대부분 불교 쪽으로만 치달릴 뿐 우리의 도()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도가 간신히 끊어지지 않고 실낱같은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이 허물은 장차 누구에게 돌려야 할 것인가
.
이 사찰의 흥폐(興廢)에 대한 사연은 옛 기록에 나와 있으니, 여기에서는 거론하지 않겠다.

 

승련사기(勝蓮寺記)

 


남 원부(南原府)는 원래 산수(山水)의 경치가 뛰어나다고 사람들이 많이 일컫고 있는데, 부도씨(浮屠氏)가 그 사이에다 집을 지어 놓은 것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그곳의 특출한 승경(勝景)을 점거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승련사(勝蓮寺)가 또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강군 호문(康君好文)이 나에게 들려주면서, 그 사찰의 주지인 대선사(大禪師) 각운(覺雲)의 글을 가지고 와서는 그 본말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산수 좋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직접 가서 노닐어 보지 못하는 것이 매번 한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렇긴 하지만 그 사이에 내 이름만이라도 걸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원래 내가 바라던 바라고 하겠다. 게다가 우리 각운 선사의 어진 덕에 대해서는 내가 또 일찍부터 사모해 왔던 터이기에,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기문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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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은 관아가 있는 곳에서 동북쪽으로 30리쯤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그 이름을 금강(金剛)이라고 하였다는데, 어느 시대에 창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홍혜 국사(弘慧國師) () 중긍(中亘)이라는 분이 내원당(內願堂)에서 물러 나와 노년에 이곳에서 거주하였는데, 건물이 낮고 누추해서 일찍이 넓혀 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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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뒤에 대선사인 졸암(拙菴) 휘 연온(衍昷)이라는 분이 홍혜 국사의 문도(門徒)들로부터 조계(曹溪)의 장로(長老)로 추대를 받았다. 그러고는 그들이 의견을 모아 사찰의 신축과 관련된 계회(契會)를 결성한 다음 졸암에게 주관해 달라고 요청하자, 졸암이 즉시 공사 내역을 살피고 소요될 재정을 강구하였는데, 이때 시주들로부터 모금하는 일을 실질적으로 담당한 사람은 종한(宗閑)이라는 자였다
.
이에 사찰의 편액을 승련(勝蓮)이라고 고치고, 을축년(1325, 충숙왕12)에 공사를 시작하여 신축년(1361, 공민왕10) 봄에 완공을 보았다. 그리하여 불전(佛殿)과 승무(僧廡)와 선당(膳堂)과 선실(禪室)을 위시해서 빈객의 숙소와 곳간과 공양간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갖추어 놓게 되었는데, 이것을 칸으로 헤아리면 도합 111칸이나 되었다. 그리고 범패(梵唄)에 필요한 도구와 일상 용품 또한 하나도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 모두가 졸암의 바랑에 비축되어 있던 것과 종한이 뛰어다니며 애쓴 노력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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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미타(阿彌陀)의 불상을 불전의 중앙에 봉안(奉安)하였는데 이는 졸암이 독자적으로 담당해서 한 것이요, 이와 함께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여 불전의 좌우에 안치하였는데 이는 고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시주한 것이다. 그리고 노비 약간 명이 사찰에 희사되었는데, 바로 졸암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
무 술년 가을 졸암이 입적하려 할 즈음에, 친족으로는 조카가 되고 불법(佛法)으로는 후계자가 되는 각운 선사에게 사찰의 일을 부탁하였다. 이때 바깥 담장이 아직도 둘러 있지 않았으므로 각운 선사가 쌓는 일을 마무리 지었는데, 이렇게 해서 계묘년(1363, 공민왕12) 여름에 산문(山門)의 공사가 모두 끝나게 되었다
.
나는 말한다
.
부도씨가 사찰을 지을 적에는 단지 웅장하게 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후세에 길이 전하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으니, 이것은 대개 일반적인 현상일 것이다. 지금 저 금강(金剛)이니 승련(勝蓮)이니 하는 이름과 뜻 속에 무슨 경중의 차이가 있기에 꼭 금강은 버리고 승련을 취해야만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암이 그 현판을 기필코 바꾸려고 한 것은 그 사찰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1()가 되고 또다시 전해져 2대가 되어, 백대 천대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않도록 하려 함이니, 그 뜻이 정말 원대하다고 할 만하다
.
그러고 보면 졸암이 각운 선사에게 전한 것이야말로 친족으로 보나 불법(佛法)으로 보나 정말 하자가 없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각운 선사가 자신의 후계자를 얻어 전할 적에도 자기 스승처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인데, 나는 후대에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더욱 보전할 수 없게 될까 걱정되기도 한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이후로 다시 백대 천대에까지 이르는 동안 승련사의 이 경내에
가시나무가 돋아나는 이 없게만 된다면 충분하다 할 것이니, 친족의 후계자를 얻든 불법의 후계자를 얻든 간에 그것은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라고 하겠다.
졸 암은 성이 유씨(柳氏), 문정공(文正公) ()의 증손이요, 감찰대부(監察大夫) ()의 모제(母弟),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공 존비(李公尊庇)의 외손이다. 참학(參學 승과(僧科)의 소과(小科))에 네 번이나 으뜸으로 입선하였고, 진사과(進士科 제술과(製述科)라고도 함)에 응시하여 갑과(甲科)로 급제하였으며, 명산에 두루 머물면서 명성을 널리 떨쳤다. 각운 선사는 유씨의 조카이다. 학문이 깊고 행동이 고매하였으며, 오묘한 필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일컬었다.

지정(至正) 24(1364, 공민왕13) 6월 일에 짓다.

 

[주D-001]가시나무가 돋아나는 : 전쟁의 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노자(老子)》 제30장에군대가 주둔하고 나면 가시나무가 돋아나고, 대군이 지나가고 나면 흉년이 들게 마련이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라는 말이 나온다.

서경(西京) 풍월루(風月樓)의 기문

 


금 상(今上 공민왕) 19년 가을 7월에 개성(開城)의 부윤(府尹) 임공(林公)을 안주(安州 재령(載寧)의 옛 이름)의 만호(萬戶)로 전임(轉任)시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정(軍政)이 모두 제대로 거행되었다. 그래서 그해 겨울 11월에 서경(西京)의 부윤으로 옮겨 주었는데, 관할 지역을 순시하면서 군병을 제어하고 백성을 위무하는 등 위엄과 은혜를 더욱 드러내기에 이르렀으므로, 이듬해 2월에 승진시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제수하였으니, 이는 대개 표창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그런데 공의 교화가 이미 크게 행해져서 사람들이 기꺼이 공을 위해 쓰이고자 하였으므로, 5월 초하룻날에 영선점(迎仙店) 옛터에다 터를 정하고서 기둥 다섯 개짜리 누대(樓臺)를 세우고 단청(丹靑)을 입혀 다섯 달 만에 공사를 마치니, 바라다보매 마치 날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동남쪽으로는 뭇 산들이 자리 아래에 엎드려 있는 듯하고 그 앞에는 다시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 좌우에다 또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어 놓기까지 하였다. 이 누대 위에 올라서서 멋진 경치를 감상하노라면 부벽루(浮碧樓)와 으뜸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툴 만하였는데, 화려한 면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난 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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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승지(承旨)인 상당(上黨 청주(淸州)의 옛 이름) 한공 맹운(韓公孟雲 한수(韓脩))의 큼직한 글씨를 받아 풍월루(風月樓)라는 세 글자를 현판으로 내건 뒤에, 한산(韓山) 이색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내게 기문 써 주는 것에 인색하다면, 그것은 내가 그런 누대의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여기에다 정취를 붙이고 있는 것이 결코 얕지 않으니, 그대가 그 뜻을 펼쳐서 보여 줄 수 없겠는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공의 높은 식견과 넓은 도량은 한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또 누대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니, 마치 바람이 불어옴에 방향이 없고 달이 운행함에 자취가 없는 것처럼, 그 마음이 크고 넓어서 끝이 없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
대저 도()가 태허(太虛)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본래 무형(無形)이지만, 이 세상에 다양한 사물의 현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그 태허의 기()가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는 천지(天地)가 되고, 밝게는 일월(日月)이 되며, 흩어져서는 풍우(風雨)와 상로(霜露)가 되고, 치솟아서는 산악(山嶽)이 되며, 흘러서는 강하(江河)가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질서 정연하게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기(倫紀)가 있게끔 하고, 찬란하게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의 도구가 있게끔 하며, 세도(世道)와 관련해서는 청명(淸明)해져서 치세(治世)를 이루게 하기도 하고, 혼탁(混濁)해져서 난세(亂世)를 이루게 하기도 하는데, 이 모두가 기()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
그런데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없는 만큼 서로 어긋남이 없이 감응(感應)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륜(彝倫)이 베풀어지고 정교(政敎)가 밝아지면, 일월이 궤도를 따라 순행하고 풍우가 제때에 맞으며
, 경성(景星) 경운(慶雲) 예천(醴泉) 주초(朱草) 등의 상서(祥瑞)가 이르게 마련이다. 반면에 이륜이 무너지고 정교가 폐해지면, 일월이 흉조(凶兆)를 고하고 풍우가 재앙을 일으키며, 혜패(彗孛)가 날아다니는가 하면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마르는 등의 변고(變故)가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치란(治亂)의 기틀은 인사(人事)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고, 치란의 조짐은 풍월(風月)을 통해 충분히 예견할 수가 있다.
지 금은 중원(中原)이 바야흐로 안정을 되찾아 사방에 걱정할 일이 없게 되었으니, 이른바 치세라고 일컬을 만하다. 따라서 우리 국가가 한가한 틈을 타서 정형(政刑)을 제대로 닦아 나간다면, 백성이 편안해지고 물산이 풍부해질 것이니, 맑고 아름다운 이 강산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음풍농월(吟風弄月)할 만한 곳 아닌 데가 없게 될 것이다
.
더군다나 서경(西京)으로 말하면, 국가의 터전이 되어 서북쪽을 제압하고 있고, 인사(人士)들 모두가 자신의 생업(生業)을 즐겨 하면서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을 간직하고 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이 누대로 말하면 또 서경의 승지(勝地)를 차지하고 있으니, 빈객이 찾아와서
일헌 백배(一獻百拜)를 하고 아가투호(雅歌投壺)를 하면서 서로 어울릴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바로 그럴 즈음에 바람이 불어와서 육신을 상쾌하게 씻어 주고 달이 떠서 정신을 맑게 해 줄 것인데, 여기에 또 연꽃 향기가 좌우에서 풍겨 와 정경(情境)이 더욱 유연(悠然)해질 것이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 모두가 태평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익(鷁)이라는 물새가 바람에 밀려서 뒤로 날자 성인이 특별히 기록하였고, 소가 헐떡이는 현상을 보이자 사가(史家) 역사에 수록하였으니, 세상을 경계시킨 것이 지극했다고 하겠다. 어쩌면 공이 또 이 점에 대해서도 은미한 뜻을 붙인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즐거워하기를 천하의 일로써 하고 근심하기 천하의 일로써 하는 가 아니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그저 경치에 취해 죽치고 앉아 노닐기만 하면서 의리를 해치고 명교(名敎)를 상하게 할 뿐이라면 군자가 말하기를 부끄러워할 것이니, 뒤에 오는 자들은 이 점을 생각해서 몸가짐을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다.

 

[주D-001]경성(景星)과 …… 주초(朱草) : 고 대에 태평 시대에 나타난다고 인식했던 상서로운 현상들이다. 경성은 대성(大星) 혹은 덕성(德星)이라고도 하고, 경운(慶雲)은 오색의 채운(彩雲)을 가리킨다. 예천은 단물이 솟는 샘이고, 주초는 붉은색의 향초인대, 《갈관자(鶡冠子)》 도만(度萬)성왕(聖王)의 덕이 아래로 온갖 생령(生靈)에 미치게 되면 예천이 솟아나고 주초가 돋아난다.”는 말이 나온다.
[주D-002]혜패(彗孛) :
살별의 종류인데, 고대에 재난과 전쟁의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주D-003]산이 …… 마르는 :
《국어(國語)》 주어 상(周語上)대저 나라는 산천에 의지하게 마련인데,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말라붙었으니, 이는 나라가 망할 징조이다.[夫國必依山川 山崩川竭 亡之徵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일헌 백배(一獻百拜) :
주 객(主客) 간에 점잖게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선왕(先王)이 이 때문에 음주에 관한 예법을 제정하였으니, 그것은 즉 한 잔을 주고받을 때에도 손님과 주인이 서로 백 번씩 절을 하기로 하여[一獻之禮 賓主百拜], 종일토록 마시더라도 취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아가투호(雅歌投壺) :
투 호 놀이를 하고 고상한 시를 읊조리며 노니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무장(武將)의 유아(儒雅)한 행동을 가리킬 때 많이 쓰는 표현이다. 후한(後漢)의 장군 채준(祭遵)이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들을 때면 반드시 아가투호를 했다.[對酒設樂必雅歌投壺]는 기록과, ()나라 명장 악비(岳飛)가 아가투호를 하며서 마치 서생처럼 신중을 기하였다[雅歌投壺 恂恂如書生]는 기록이 보인다. 《後漢書 卷20 祭遵列傳》 《宋史 卷365 岳飛列傳》
[주D-006]익(鷁)이라는 …… 기록하였고 :
여섯 마리의 익조(鷁鳥)가 송나라 도성 위를 지나갈 때에 강풍을 만나 뒤로 밀려서 날자, 송나라 사람들이 일종의 재이(災異)로 여겼는데, 이 사실을 공자가 《춘추(春秋)》 희공(僖公) 16년 조에 기록하였다.
[주D-007]소가 …… 수록하였으니 :
서한(西漢)의 재상인 병길(丙吉), 사람들이 길에서 싸우다 죽고 다친 일은 묻지 않고, 소가 혀를 빼물고서 헐떡이는 것을 보고는 계절의 기후가 바뀐 것을 중대시하여 자세히 물어보았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4 丙吉傳》
[주D-008]즐거워하기를 …… :
《맹 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즐거워하기를 천하의 일로써 하고 근심하기를 천하의 일로써 하고서도 왕 노릇 못할 자 없다.[樂以天下 憂以天下 然而不王者未之有也]” 하였는데, 백성과 고락(苦樂)을 함께하는 통치자로서의 자세를 표현한 말이다.

남원부(南原府)에 새로 설치한 제용재(濟用財)의 기문

 


금 상(今上) 8년 봄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시중(侍中)의 손자인 간관(諫官)을 외방으로 내보내어 남원부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1년도 채 안 되어 선정(善政)을 행한 업적이 동남 지역의 수령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내가 그에 대한 일을 써서 순리(循吏)의 열전(列傳)에 붙이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다.
국자 학유(國子學諭)인 양군 이시(楊君以時)는 남원 출신이다. 행동거지가 신중하고 성실하였으며 말하는 것도 신실(信實)하기만 하였는데, 어느 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원님의 정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깊이 감동하고 있으니 굳이 금석(金石)에 새겨 놓지 않더라도 그 자취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새로 설치한 제용재의 일만큼은 쉽게 무너져 버릴 염려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경계할 줄을 알게 하지 못한다면, 영원토록 폐단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으니, 선생께서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
나는 익재 선생으로부터 평생에 걸쳐 두터운 은혜를 받아 온 처지였던 만큼, 선생의 손자가 훌륭하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하였고, 또 일찍이 간원(諫垣)에서 동료로 함께 근무할 적에 더욱 깊이 교분을 쌓았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양군의 말에 흔연히 응하면서 그 일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 일과 관련하여 양군이 말하기를,

사 자(使者)가 와서 세금을 급하게 독촉할 때마다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마련해 내질 못하였는데, 그럴 때면 빚을 내서 보태어 세금을 내게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도 가끔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님이 바로 그런 사실을 알고서 탄식하기를, ‘이보다 더 심하게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있겠는가하고는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포세(逋稅)를 거두어 모아 약간의 포목(布木)을 얻고 나서 안렴사(按廉使)에게 장계(狀啓)를 올리니, 안렴사 역시 그 일을 가상하게 여기면서 포목을 내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노비 문제로 다투다가 관가에 소송을 낼 적에, 그 값으로 받는 것을 포목으로 받아들이되 1() 1()씩으로 하였는데, 우리 원님이 판결을 잘 내려 주었으므로 수입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합 650필의 포목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향교(鄕校)
삼반(三班)에 서 각각 한 사람씩을 뽑아 그 일을 맡아 보게 하였는데, 지현의 급한 일을 그 네 사람이 부()에 보고하면, 관아에서 공적 자금을 내주도록 하되 이식(利息)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의 관리들이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게끔 정식(定式)으로 확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남원부가 비록 산중에 있다고는 하지만 빈객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까닭에 그들을 대접할 비축용 자금을 징수하곤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님이 바로 그런 사실을 알고서 또 탄식하기를, ‘이보다 더 심하게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 하고는 다시금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그리하여 재고(財庫)를 설치할 뜻을 또 안렴사에게 아뢰어 우선 포목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둔전(屯田)을 시행해 오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제멋대로 간악한 짓을 자행하였는데, 우리 원님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직접 보살피자 관리들이 감히 속이는 짓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합 200()의 미곡(米穀) 150석의 두숙(豆菽)을 확보한 뒤에, 규정을 세워 내주고 거둬들이게 하되, 본전(本錢)은 남겨 두고 이식만 활용토록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72석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밭의 개간을 계획하여, 빈객을 대접하는 비축용 자금으로 삼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쓰는 집기나 도구까지도 모두 완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재원(財源)들을 모두 통틀어서 제용재(濟用財)라고 이름하였습니다
.
이렇게 되자 평민들에게서 마구 거두어들이는 일이 없어지고 지현에서도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로운 일만 생기고 해로운 일이 점차 제거됨으로써 백성들이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이 일에 대해 논하면서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 일이 인정(仁政)의 하나라고는 하겠지만, 이후(李侯)의 정사(政事)로 볼 때 그런 일 정도는 마땅히 행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니, 내가 선뜻 그 일 하나만을 굳이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이후는 인후(仁厚)한 덕을 발휘하여 그 근본을 배양하였고 강명(剛明)하게 위엄을 보여 운용이 잘 되도록 함으로써 하나의 지역을 제대로 교화시켰다. 따라서 그 치적이 영천(穎川)이나 촉군(蜀郡)보다도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니, 글로 남길 만한 것이 그 일 하나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 지만 이 하나의 일을 통해서도 얼마나 근실하게 마음을 썼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겠는데, 남원 사람들이 이후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제대로 행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그대의 고을 사람들에게 유시하되,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내세울 것 없이 그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거론해서 증명하도록 하라
.
병든 사람이 의원에게서 병이 낫고 굶주리던 사람이 먹을 것을 얻어서 살아난다면,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그대들의 마음이고 현()은 지체(支體)이니, 현이 있고 백성이 있고 난 뒤에야 그대들의 부()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마음과 지체가 모두 고달팠던 것으로 말하면, 굶주리거나 병든 것보다도 더 심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후가 와서 병을 고쳐 주고 먹을 것을 주었는데도 보답할 줄을 모른다면, 그래도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보답해야 마땅하겠는가? 이후가 세운 법을 무너뜨리지 말고 이후의 뜻을 실추시키지 말아야만 그런대로 보답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니, 양군이 두 번 절하면서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후의 이름은 보림(寶林)으로, 을미년에 급제하였다. 신념이 확고한 데다 충성스럽고 올곧아서 옛날 쟁신(爭臣)의 풍도가 있었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대부분 여기에 뿌리를 두었다고 하겠다.

지정(至正) 기해년(1359, 공민왕8) 가을 8월에 짓다.

 

[주D-001]삼반(三班) : 고려 시대 지방 관아에 속한 향리(鄕吏)와 군졸(軍卒)과 관노(官奴)를 일컫는 말이다.
[주D-002]영천(穎川)이나 촉군(蜀郡) :
한 선제(漢宣帝) 때 황패(黃覇)가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나가서 천하제일의 정사를 펼친 고사와, 한 경제(漢景帝) 때 문옹(文翁)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나가서 시문(詩文)으로 교화시킨 결과 제()ㆍ노()처럼 변화시켰던 고사를 말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남곡기(南谷記)

 


용 구(龍駒 용인(龍仁)의 옛 이름) 동쪽에 남곡(南谷)이 있는데, 그곳에 나의 동년(同年)인 이 선생(李先生)이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선생이 숨어 사느냐고 묻기에 내가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고, 벼슬살이를 하느냐고 묻기에 내가 벼슬살이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벼슬살이도 하지 않고 숨어 사는 것도 아니라면 무슨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 왔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듣건대, 숨어 사는 사람은 그 육신만 숨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름까지도 숨기고, 그 이름만 숨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까지도 숨긴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은 이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육신은 반드시 조정의 위에 세워서 헌상(軒裳 수레와 관복(官服))과 규조(圭組 옥으로 만든 홀()과 인수(印綬))로 아름답게 하고, 그 이름은 반드시 온 누리에 들리게 해서 문장과 도덕으로 실증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그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역시 곧장 정사(政事)로 드러나게 되어 노래와 시로 칭송을 받으면서 사방에 빛을 뿌리게 될 것이니, 그 마음을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 남곡은 선생이 숨어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지금 선생이 남곡에서 사는 것을 보면, 밭도 있고 집도 있고 관()ㆍ혼()ㆍ빈()ㆍ제() 등의 의식도 여유 있게 치르면서, 권세(權勢)와 재리(財利) 따위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 온 지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숨어 사는 것으로 자처하지 않는 까닭에, 해마다 서울에 와서 옛 친구를 찾아 실컷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 길을 왕래할 적마다 핼쑥한 동복(僮僕) 하나에 야윈 말을 타고서 채찍을 곧추세운 채 시를 읊조리기도 한다. 게다가 흰 수염은 백설과 같고 붉은 뺨에는 광채가 넘쳐흐르고 있으니
,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신(傳神)하게 한다면 필시 삼봉연엽도(三峯蓮葉圖)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 리고 남곡의 땅으로 말하면, 산에서는 나물을 캘 수가 있고 물에서는 낚시질을 할 수가 있으니, 구태여 세상에 나가서 구할 필요도 없이 자족(自足)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 이와 함께 산 빛이 밝게 비춰 오고 물이 푸르게 둘러 있는 가운데 경내(境內)는 그윽하고 사람은 적요(寂寥)하기만 하니, 눈 들어 바라보매 모두가 유연(悠然)할 따름이다. 우주 밖까지 정신을 노닐어 본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이곳의 경지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니, 선생이 여기에서 혼자 즐기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내 가 쇠하고 병든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항상 전원(田園)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었지만 아직껏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바다에 가까운 밭을 가지고 있고 밭과 붙어 있는 집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 두 가지를 모두 온전히 할 방도를 생각해서 이 한 몸을 마치는 것이 나의 소망이지만, 어찌 쉽게 이룰 수가 있겠는가
.
선생이 정언(正言)으로 있을 적에 나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조정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때 함께 어떤 일을 논하다가 재상(宰相)의 뜻을 거스르는 바람에 제공(諸公)이 모두 외방(外方)으로 옮겨졌는데, 나만 홀로 외람되게 은혜를 받고 발탁되었으므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부끄러워진다
.
선생은 배척을 당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일을 여러 차례나 반복한 끝에 지위가 겨우 3()으로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선생이 떠난 뒤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사모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고, 화려한 명성을 드날리며 아직도 중망(重望)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영천 이씨(永川李氏)를 통틀어 살펴봐도 이런 아름다움을 짝할 자는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
그러고 보면 앞으로 필시
사자(使者) 태운 말이 울음소리를 내면 남곡에 들어오게도 것이요, 그리하여 뒷날 마치 남양(南陽)에서 제갈공(諸葛公) 일어났던 것처럼 큰 계책을 세우고 큰 의논을 결정하면서 위로 남면(南面)의 교화를 성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또 모두가 하늘에 달린 일이다.
선생의 이름은
석지(釋之)이다. 선군(先君)인 가정공(稼亭公)의 문생(門生)으로 급제하였는데, 일찍이 나와 더불어 신사년의 진사과(進士科)에 함께 입격하였다.

정사년(1377, 우왕3) 섣달 8일에 짓다.

 

[주D-001]그림을 …… 것이다 : 뛰 어난 화가를 시켜서 그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리게 한다면, 어떤 유명한 신선도(神仙圖)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전신(傳神)은 매우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여 생명력을 불어넣는 고차원의 예술 기법을 뜻하는 말인데, ()나라의 저명한 화가인 고개지(顧愷之)가 초상화를 그려 놓고 몇 년 동안이나 눈동자에 점을 찍지 않으면서바로 눈동자 속에 전신의 요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巧藝》 삼봉연엽도는 송()나라의 화가인 용면거사(龍眠居士) 이공린(李公麟)이 그린태을진인연엽도(太乙眞人蓮葉圖)’를 가리킨다. 태화산(太華山)의 삼봉(三峯) 가운데 연화봉(蓮花峯) 꼭대기의 연못에 천엽(千葉)의 연꽃이 피어 있는데, 그 커다란 연잎 속에 태을진인이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그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데, 목은(牧隱)이 삼봉연엽도라고 바꿔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주D-002] 우주 …… 본다 :
이 백(李白)의 〈대붕부(大鵬賦) ()〉에내가 옛날 강릉(江陵)에서 천태(天台)의 사마자미(司馬子微)를 만났더니, 그가 나를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고 일컬으면서, 자기와 함께 우주 밖까지 정신을 노닐어 볼 수 있겠다.[可與神遊八極之表]고 말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사자(使者)를 …… 것이요 :
다 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서 관직에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남조 제(南朝齊)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사자(使者)를 태운 말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골짜기에 들어오고, 은자(隱者)를 조정에 부르는 학서가 산언덕을 넘어왔다.[鳴騶入谷 鶴書赴隴]”는 말이 나온다.
[주D-004]마치 …… 것처럼 :
유비(劉備)가 남양(南陽) 땅에 살고 있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해서 맞아들였던 고사처럼 임금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고 경륜을 펴는 것을 말한다.
[주D-005]석지(釋之) :
목은이 착오한 것으로, 이름은 무방(茂芳)이고, 석지는 그의 자이다.

둔촌기(遁村記)

 


광주(廣州) 이씨(李氏) 《맹자(孟子)》에 나오는 ‘집의(集義)’ 집(集) 자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고, ‘호연지기(浩然之氣)’ 호연(浩然) 취하여 자(字) 삼았다.
이에 성산(星山 성주(星州)의 옛 이름)의 이자안(李子安 이숭인(李崇仁))이 그 뜻을 해설하는 글을 짓고, 내가 또 그 뒤에다 한마디 말을 붙여서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호연이 또 말하기를,

나의 이름과 자에 대해서는 이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친 들판으로 도망쳐 숨어서 취성(鷲城)의 패거리가 꾸며 낸 화()를 피하였는데, 그때 온갖 고생을 겪은 정상으로 말하면, 아무리 흉악하고 잔인한 자라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서는 안색이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나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때 도망쳐 숨은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숙손(叔孫) 적군을 이기고 나서 적장(敵將)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이것은 대개 기쁨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식은 자기의 분신인데도 오히려 그렇게 이름을 붙여서 자신의 기쁨을 표시했는데, 하물며 나의 이 한 몸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이미 이름과 자를 모두 고쳤고 보면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쳐 숨은 것[]이 나에게 덕을 끼쳐 주었으니, 장차 이 몸이 다할 때까지 나로서는 잊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처하는 곳을 둔촌(遁村)이라고 이름 지었으니, 이는 도망쳐 숨은 것을 덕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위험한 상황을 빠져나온 뒤에도 그때의 위험을 잊지 않으려는 뜻을 붙여 스스로 노력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둔(遁)이라는 것이 지언(知言) 하나에 속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내 나름대로는 그 뜻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풀어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직 선생께서는 가엾고 애달프게 여기시어, 내가 자꾸만 귀찮게 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추(鄒)나라의 에 대해서 그토록 음미하며 즐기고 있으니, 성인의 도를 구해 고 하는 측면에서 볼 때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나 역시 다른 글에서 찾을 것 없이 《맹자》의 글을 통해서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볼까 한다.
이가 “순(舜) 천자이고 고요(皐陶) 법관일 때, 고수(瞽瞍 순(舜) 부친) 살인을 했다면, 순이 어떻게 했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맹자가 대답하기를 “몰래 업고 도망쳐 바닷가에 살면서 흔쾌히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가정하여 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때의 처신은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가 화를 당한 것은 비록 그대 자신이 초래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늙으신 어버이를 등에 업고 어린 자식의 손을 잡아끌면서 낮에는 무성한 풀숲에 몸을 숨기고 밤에는 비와 이슬을 무릅쓰고서 험한 산골짜기를 헤맸을 것이며, 그런 와중에서도 추격하는 자가 혹시 뒤를 밟아 오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숨을 죽이고 몸을 움츠리면서 처자들이 감히 숨소리조차도 내지 못하도록 경계시켰을 것이니, 도망쳐 숨은 그 정상이 또한 참혹하였을 것이다
.
따라서 마치 무서운 꿈을 꾸고 나서 계속 겁에 질려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마땅할 것인데도, 바야흐로 의기양양해하면서 안으로는 자기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는 듯하고 밖으로는 남에게 자랑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그대야말로 결코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는 필시 자신의 내부에 확고한 주관이 서 있어서 가능한 것일 테니, 그대의 명성은 참으로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
맹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사명을 내리려 때에는, 그의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게 하여,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하게끔 만들어 준다.”라 고 하였다. 그런데 그대야말로 육신이 굶주림에 시달렸음은 물론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질 않았으니,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 그대에게 큰 사명을 내려 주어 반드시 이룰 수 있게 해 주리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그대가 둔촌에서 계속 살다가 몸을 마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밖에 강산(江山)과 풍물(風物)의 아름다움이나 주경야독하는 즐거움 같은 것은 그대 자신이 실컷 누리고 있을 터이니,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겠다.

창룡(蒼龍) 정사년(1377, 우왕3) 9월에 짓다.

 

[주D-001]광주(廣州)의 …… 삼았다 : 그 의 본명은 원령(元齡)이었는데, 공민왕(恭愍王) 17(1368)에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천(永川)으로 도망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뒤에,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다시 돌아와서 새 이름과 자를 지은 것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중에그 기운은 의리가 안에 축적된 결과 나오는 것이다.[是集義所生者]”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취성(鷲城) :
신돈(辛旽)을 가리킨다. 경남 창녕군(昌寧郡) 영산(靈山)의 옛 이름이 취성인데, 신돈이 영산 신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숙손(叔孫)은 …… 것이었습니다 :
()나라 숙손득신(叔孫得臣)이 장적(長狄)의 군주인 교여(僑如)를 사로잡아 죽여 그 머리를 자구문(子駒門) 가에 묻고는 자기 아들 선백(宣伯)을 교여(僑如)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11년 조에 나오는데, 그 주()이는 자신의 공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以旌其功]”고 하였다.
[주D-004]둔(遁)이라는 …… 합니다만 :
()이라는 글자가 원래 《맹자》에 의하면 부정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맹자의 제자 공손추(公孫丑)남이 하는 말을 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何謂知言]” 하고 묻자, 맹자가 편파적인 말[詖辭]과 방탕한 말[淫辭]과 삿된 말[邪辭]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에, “도망쳐 숨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떤 궁지에 몰려 있는지를 알 수 있다.[遁辭知其所窮]”고 대답한 말이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주D-005]추(鄒)나라 :
추나라가 맹자의 고향이기 때문에 《맹자》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6]성인의 도를 구해 본다 :
()나라 한유(韓愈)의 〈송왕훈서(送王塤序)〉 끝 부분에성인의 도를 구해 보려면, 반드시 《맹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求觀聖人之道必自孟子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어떤 이가 …… 하였다 :
어 떤 이는 맹자의 제자 도응(桃應)인데, 이에 대한 내용이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온다. 이집(李集)이 신돈(辛旽)의 화를 피해 광주목(廣州牧)의 향리(鄕吏)로 있던 부친 이당(李唐)을 등에 업고서 영천(永川) 최윤도(崔允道)의 집으로 도망쳐 숨었으므로, 목은이 고수(瞽瞍)의 이야기를 꺼내어 말한 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6 廣州牧 辨誤》
[주D-008]하늘이 …… 준다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9]창룡(蒼龍) :
태세(太歲) 즉 간지(干支)를 뜻하는 말인데, 이때는 원()나라가 이미 망한 뒤로,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굳이 피한 것이 주목된다.

안동(安東)의 약원(藥院)에 대한 기문

 


지 정(至正) 정미년(1367, 공민왕16) 가을 9월에 안동부(安東府)를 맡아 지킬 신하들을 임명하였다. 부사(府使)에는 현재 찬성사(贊成事)인 홍백정(洪柏亭)이 의령군(宜寧君)에서 선발되고, 판관(判官)에는 전에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지냈던 정무()가 감찰사 규정(監察司糾正)에서 선발되었는데, 입조(入朝)하여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나서 함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 10 10일 이른 아침에 판관이 먼저 청사(廳事)에 도착해서 예()를 행하고 대궐을 향하여 사은(謝恩)한 뒤에 뜰에 내려가 부사를 영접하니, 부사가 판관처럼 매우 근엄하게 예를 행하고 나서 물러 나와 고을 관리들의 배알(拜謁)하는 예를 받았다. 이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적임자가 부임하였다고 서로 경하(慶賀)하는 가운데, 어떤 명령을 내려도 행해지지 않는 법이 없게 되었다.
이듬해 봄 2월에 두 분 공이 말하기를, “천기(天氣)가 이제 피어오르니 만물이 다시 생동하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따라서 계절의 일을 가지고 상고해 보더라도 사람을 보살펴 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니, 불행히도 일찍 꺾이는 일이 없도록 대비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혈기(血氣)가 제대로 유통되어 태화(太和)를 보지(保持)하게 해 주려면 의약(醫藥)의 공을 베풀면서 탕욕(湯浴)의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이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그러고는 빈터를 물색해 보았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 법조(法曹)의 관아가 오래전에 허물어진 채 빈터로 남아 있었으므로, 거기에다 건물을 세우고 약원(藥院)이라고 명명(命名)하였으니, 이는 그 건물의 여러 가지 기능 중에서도 약원의 비중을 감안해서 대표적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 건물 가운데 동쪽의 곁채 세 칸은 탕욕(湯浴)의 장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고, 서쪽의 곁채 세 칸은 약물(藥物)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중앙에서 내려다보듯 높다랗게 지어 놓은 집은 찾아오는 왕인(王人 사자(使者))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
그리하여 빈객들이 동서로 여행하다가도 응급 처치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주후방(肘後方 휴대용 비상 구급약) 같은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진귀하게 여길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지역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백성들이 또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데, 약을 조제하여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에, 독한 기운에 쏘이기라도 하면 불행하게 되는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러한 때에 백정공(柏亭公)이 위에서 제창하고 정 판관(鄭判官)이 아래에서 화답한 결과, 힘은 절반만 들이고도 공은 갑절이나 이루어 안동이 영원토록 그 덕을 보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 기록해 두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어진 정승이 되지 못할 바에는 훌륭한 의원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전해 오는데,
이 말은 의원의 도리가 또 얼마나 중한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지금 백정공이 바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나라의 일을 담당하고 있고, 정군 역시 점진적으로 중용(重用)되는 과정 중에 있으니, 탕욕과 약물의 효과가 안동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 또 당연하다고 하겠다. , 그러니 앞으로 은택이 멀리 퍼져 나가는 것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정사년(1377, 우왕3) 11월 일에 짓다.

 

 

[주D-001]어진 …… 오는데 : ()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소싯적에 일찍이내가 만약 어진 정승이 되지 못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의원이라도 되어야 할 것이니, 의원도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吾不能爲良相 必爲良醫 以醫可以救人也]”고 말했다는 기록이 〈광사류부(廣事類賦)〉라는 글에 전한다.

 

 

 

2010-01-06